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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일 2024-12-01
  • 조회수 2,261

   다른 겨울


최유안


   음습한 바람이 무리의 발소리를 갑작스레 가뒀다. 육중한 무게가 계단을 수시로 눌러 내리는 탓인지 천장에 붙은 낡은 철제 안내판 한쪽이 불규칙하게 덜컹댔다. 

   거, 애도 있는데 앞으로 자꾸 밀지 마시고. 

   신경질적인 영어에 앞쪽 무리에 끼어 있던 몇이 남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남녀 한 쌍이 눈치를 보며 그의 주위를 빙 돌더니,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나는 그들이 빠져나가는 지하철 입구를 올려다봤다. 나 말고도 작은 소요에 신경 쓴 사람이 더 있었는지 고개를 튼 방향에 시선이 여럿 뒤섞여 있었다. 출구 끄트머리 너머 작은 간판이 눈에 띄었다. 남자가 안정을 찾은 목소리로 말했다.

   츄러스 먹을까?

   남자의 품에 안겨 있는 여자아이가 신이 나는지 까르륵 소리를 냈다. 빨간 털모자가 단번에 눈을 사로잡았다. 두 돌 정도 되어 보였다. 아이 소리에 힘이 난 남자가 끙 소리를 내며 큰 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같은 줄에 서서 걷는 남자와 내 뒤로, 수십 명이 굴리는 발걸음이 코뿔소 떼처럼 광광거렸다. 계단참에 짧은 치마 차림의 여자가 카메라를 들고 멈춰 섰다. 사람들이 그를 피해 둥글게 호를 그리며 밖으로 빠져나가거나, 혹은 같은 자리에서 비슷한 구도로 앵글을 잡았다. 한데 몰려 있던 찬바람이 안쪽으로 거세게 밀려 들어왔다. 지하철 입구가 아랑곳없이 사람들을 쏟아냈다. 단어들이 하얗게 내뿜는 입김을 타고 구슬처럼 흘러나와 공기 중에 분사됐다. 

   북적이는 관광객 틈에는 한국인도 여럿 섞여 있었다. 깔깔거리는 소리에 익숙한 단어들이 튀어나와 저마다의 파동으로 멀어져 갔다. 누군가는 여행을 오기 전에 유럽에서 동양인 경멸이나 무시가 빈번하다는 조언을 들었다고 했고, 여긴 그나마 괜찮아, 하는 자조 섞인 말도 들렸다. 게다가 지금이 연초보다 더 멋질 게 분명해, 하고 아직 마주하지 않은 새해 풍경을 확신하기도 했다. 불안을 기만하는 방식으로 불가해한 미래를 정당화하는, 인간은 오만하다.

   

*


   간간이 부는 시린 바람 사이로 빵 굽는 냄새가 옅게 났다. 멀리 성당 종소리가 아득했다. 걷는 행위에 극심한 피로를 토로하는 나를 배려해 희용과 혜미는 속도를 조절하며 앞장섰다. 희용은 오른편에, 혜미는 왼편에 있었다. 오가는 사람이 많은 탓에 희용은 약간 비틀린 채 서서 인도와 차로를 번갈아 걸었다. 한 아이가 다가와 거칠게 희용의 옆구리를 밀치며 지나갔다. 앞서간 아이를 멈춰 서 바라보는 희용의 곧게 선 뒤통수가 홧홧해 보였다. 희용을 치고 지나간 아이 뒤로 비슷한 또래의 아이 둘이 장난치며 뛰었다. 뒤따라 어른 몸집만 한 아이가 달려들더니 희용의 어깨를 치고 지났다. 희용의 귀에서 에어팟이 빠져나와 바닥에 내리꽂혔다. 아, 씨. 희용은 포장된 도로 위를 굴러가는 에어팟을 주워 올리며 멀리 아이들을 바라봤다. 벌써 저만치 뛰어가는 중이었다. 얼굴을 구긴 희용은 낯선 사람들 사이에 끼어 걷던 내 옆으로 다가왔다. 

   괜찮아? 

   내가 물었고 희용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어보는 목소리가 걱정스러웠는지, 에어팟 한쪽을 내게 건네며 짐짓 무심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애들이 그렇지 뭐. 들을래? 

   유럽 하늘이나 마음껏 즐기겠다고 선언한 혜미는 수용하지 않을 제안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혜미는 여행 내내 약간 들떠 있었다. 마르고 찬 나무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시다 말고 몸을 돌려 두 팔을 벌리고 눕는가 하면, 적지 않은 입장료를 내고 들어간 미술관에서는 사진 몇 장만 찍고 나가더니, 내가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때는 길고양이들이랑 저만 아는 대화를 달뜬 얼굴로 나누고 있기도 했다. 혜미는 정보 얻는 것을 내내 귀찮아했다. 그것이 이번 여행의 콘셉트인가 보다 싶었고 굳이 권하지도 않았다.

   희용이 건넨 에어팟 한 쪽을 귀에 꽂았을 때, 나는 아까 지하철에서 본 남자의 얼굴을 다시 마주했다. 중동이나 남미에서 온 여행객이겠거니 생각했고, 남자도 나를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지나쳤다. 한국어 성우는 정직한 발음으로 내 귀에 몰락, 하고 첫 단어를 쑤셔 박았다. 

   합스부르크의 몰락. 1918년 11월, 권력을 되찾으려고 반란을 두 차례 시도했으나, 합스부르크 시대는 결국 막을 내립니다. 카를 1세는 퇴위를 거부하고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그럼에도 결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등의 국가로 분리됩니다. 

   주재원으로 온 이후 희용은 동유럽 역사에 부쩍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고 했다. 엄청나. 희용의 단언이 혜미와 나를 예정에도 없던 부다페스트로 불러들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뭐가? 내 질문에 음, 하고 길게 운을 띄우더니 희용이 말했다. 

   위태롭지 않았던 때가 없었달까. 

   나는 그 말을 듣고 시큰둥하게 답했다. 

   그거야, 그곳만의 이야기가 아니잖아.

   대답은 그렇게 했어도, 그곳에 대한 희용의 인상에 내밀한 호기심이 일었다. 그 대화가 오간 지 여섯 달 만에 혜미와 나는 짐을 꾸려 부다페스트로 왔다. 헝가리는 다른 어떤 유럽 국가보다 안전하다고, 희용은 자신했다. 그게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당시의 나는 제대로 알지 못했다. 


*


   지금 나, 걷기는커녕 서 있기도 힘들어.

   나는 스마트폰 만보기에 기록된 숫자를 내밀었다. 19146. 지금까지 걸은 걸음의 수가 지독할 정도로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혜미도 말을 거들었다. 

   매일 여덟 시간 이상 걸었으니 힘들지 않은 게 이상하지. 희용이만 안으로 들여보내고 나랑 같이 앉아서 쉬자. 

   혜미의 말에 희용이 한껏 톤을 높여 물었다.

   둘 다 안 들어가려고?

   능청스러운 혜미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바닥을 품 안에서 바깥으로 두어 번 저었다. 혜미의 표정이 나를 안도하게 했다. 나도 혜미를 따라 훠이, 소리를 냈다. 어서 가, 우리 몫까지 보고 와서 이야기를 들려줘. 희용은 걸음을 재촉하는 동안에도 혜미와 나를 몇 번이나 돌아보며 외쳤다. 

   추우면 카페라도 들어가 있어. 

   못내 아쉬운 목소리의 희용이 건물 안으로 들어간 뒤에, 혜미는 잠시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나더니 이윽고 멀리 세체니 다리를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혜미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보았다. 방향을 잃은 강바람이 몰려와 혜미의 머리칼을 거칠게 쓸고 지났다. 매무새를 정리하던 혜미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쩌다 이런 높은 곳에 궁전 지을 생각을 했을까.

   혜미의 목소리가 시린 공기에 실려 내게 왔다. 나는 혜미의 눈이 가닿은 궁전의 외관으로 고개를 돌렸다. 뿌연 구름이 박힌 듯 유리창이 옅은 빛을 반사하며 반들거렸다. 거울 조각이 모자이크처럼 촘촘히 건물을 채우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말했다. 

   이 옆에는 요새로 쓰인 건물도 있대. 

   혜미가 아하,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하철에서 희용이 알려 준 정보였고, 혜미도 함께 듣고 있었다.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 검색 창을 열었다. 합스부르크. 동구권 시장주의. 구야시. 철거되었던 왕실의 공간은 다시 복원 중이라는 말도 덧대어 있었다. 그중 몇 글자는 걸러지지 않은 조각처럼 혀끝에서 까끌거렸다.

   - 철의 장막

   나는 마지막으로 눈에 들어온 단어를 힘주어 바라보며 화면을 닫았다. 부흥하는 모든 역사는 결국 끝나게 되어 있다고, 바뀐 현실에 적응할 수 없는 사람들이 여과하지 못한 역사의 잔재를 운명의 사슬처럼 끌고 떠돌기도 한다고, 생각하면서.


*   

   

   삽삽한 강바람에 문득 고개를 들었다. 멀리 광장에 크리스마스 마켓이 한창이었다. 축 늘어진 전구알들이 둥근 더미를 이루어 일렁였다. 정원을 한 바퀴 돌고 난 혜미가 내 곁에 와 있었다.

   시즌이 시즌이라 사람 진짜 많다.

   그러게. 빈집 구경일 뿐인데. 

   혜미는 내 말에 그렇다고, 맞는 말이라고, 맞장구치더니 손바닥을 위로 바짝 치켜들어 에메랄드빛 돔 쪽으로 카메라를 들이댔다. 혜미가 서 있는 아케이드 뒤쪽으로 분수대가 눈에 띄었다. 카메라에서 눈을 뗀 혜미도 내 시선을 따라 고개를 뒤로 돌렸다.

   저기까지만 가 볼까?

   하늘을 찌르는 첨탑 끝을 올려다보다가 부신 눈을 찡그리며 내가 말했다. 

   사흘 동안 계속 걸었잖아. 오늘은 아직도 많이 남았고.

   혜미가 팔짱을 끼더니 내 몸을 정원 안쪽으로 약간 밀어 넣으며 아양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걷는 거, 몇 걸음만 더 걸어가서 찍고 오자,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데.

   먹구름 사이로 가는 빛줄기가 흘러내려 땅에 닿았다. 모래로 채워진 길옆에는 거름이 옅게 뒤덮인 잔디가 깔려 있었다. 청동 입상이 곳곳에 세워진 분수대가 아니라면 을씨년스러운 데가 있는 풍경이었다. 나는 고개를 옅게 끄덕였다. 혜미가 안심시키듯 종알거렸다. 여기도 휴족시간 같은 걸 팔 거야. 모래 사이로 컨버스 바닥이 끌렸다.

   왕들은 집을 왜 이렇게 크게 지었을까. 

   사람들을 구경하며 곁에서 걷던 혜미는 내 말에 해사한 얼굴로 답했다. 

   내려다보이는 도시가 다 제 집 정원이라, 크다는 인식 자체가 없었을지도 몰라.

   그 말을 들은 나는 웃어 버렸다. 

   그래, 그럴지도. 

   다리가 욱신거릴 때마다 멈춰 잎이 벗겨진 나무들을 보며 주춤거렸다. 혜미는 어느새 분수대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상아, 이쪽으로 와.

   가벼운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혜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 한 여자를 발견했다. 보드라운 가죽이 덧대진 천 가방을 엇갈리게 맨 채 여자는 내 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시선이 나를 향했으므로 나는 여자가 내게 할 말이 있는 줄 알았다. 예상과 달리 여자는 나와 가까워질수록 눈을 바닥에 두었다. 나는 여자의 주변으로 얇은 나무껍질들이 풀썩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앞으로 계속 걸었다. 젖은 흙이 신발 바닥에 엉켜 점점 무거워졌다.

   혜미는 정원을 사진에 담고 있었다. 뼈만 남은 나무들이 집요한 간격으로 열을 지은 정원길이었다. 혜미가 사진을 찍는 모습에서 눈을 돌렸을 때 나는 여자와 다시 눈이 마주쳤다. 이번에 여자는 도리어 나와 눈이 마주치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생긋 웃었다. 자유분방하게 뻗은 검은 곱슬머리를 뒤로 묶은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턱턱 소리를 내며 걸어오자, 나는 알 수 없는 중압감에 몸을 옹송그렸다. 여자가 불쑥 얼굴을 내밀더니 뭐라고 물었다. 

   Can ◇◇◇ ◇◇◇◇ ◇ Photo ◇◇◇◇◇? 

   길이가 긴 문장은 아니었지만, 발음이 꽤 까다로웠다. 나는 여자가 방금 뱉은 말을 조각처럼 주워 의미를 파악했다. Can? Photo? 서로의 신분이 관광객인 사이에 부탁할 수 있는 말은 다행히 몇 개 되지 않았다. 사진을 찍어 주실 수 있나요? 사진 찍어 드릴까요?

   아, 포토, 오케이.

   나는 그녀가 주는 스마트폰을 받아 들었다. 갤럭시였고 작동법도 내 것과 완전히 같았다. 낯선 국적의 여자가 나와 같은 물건을 쓰고 있으며, 그게 대한민국 기업의 제품이라는 거. 나는 오로지 그 사실이 끌어낸 비밀스러운 자신감에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아 여자 쪽으로 내보였다.

   여자는 마티아스 조각상을 배경으로 서서 내가 들고 있는 자신의 스마트폰을 향해 환히 웃어 보였다. 나는 혜미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렸다. 혜미는 사진에 남다른 철학을 고집하곤 했고 나는 셔터를 누를 때마다 눈치를 살피는 중이었다. 아쉽게도 혜미의 철학은 기준이 모호하고 규칙이 성글었다. 어느 때는 모델의 발끝을 앵글의 가운데 맞춰야 맞고, 어느 때는 배경이 중심이 되어야 맞았다. 예쁘게만 찍어. 혜미는 그렇게 말했지만 내게 그 말은 갈피를 잃은 관념어였다. 다행히 나는 낯선 여자의 취향을 알 리 없었고, 여자도 내가 어떤 인간인지 알 리 없었으므로, 나는 혜미가 멀리 있는 동안 잽싸게 멋대로 사진을 찍어 여자의 갤럭시를 내밀었다. 물건을 받으며 여자가 멋쩍게 물었다.

   Well··· you Korean?

   여자를 향해 고개를 올리며 작게 끄덕였다. 여자의 몸 뒤쪽으로 흩어지는 구름 사이를 소연한 햇살이 비집고 내렸다. 혜미가 다가와 물었다.

   무슨 일이야?

   사진 찍어 드렸는데, 한국 사람이냐고 물어서.

   내 대답을 알아듣는 것처럼 여자가 나와 혜미를 번갈아 보더니 불쑥 말했다.

   I’m from Malta.

   여자에게 미소로 답한 혜미가 나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말타? 몰타? 거기가 어딨지? 그렇게 눈동자로 질문하는 것 같았다. 나는 눈썹을 살짝 올리며 작게 답했다.

   글쎄.

   몰타에서 온 여자는 말이 많은 편이었다. 그게 우리가 한국인이어서인지, 여자의 본성인지는 깨닫기 쉽지 않았다. 여자는 제 스마트폰 갤러리에 담겨 있던 각종 아이돌 사진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보여 주기 시작했다. 나는 BTS가 아니고서는 알아보는 눈이 없는 아이돌 무능력자였으므로 재치 있는 반응을 보일 수 없었지만, 여자는 굴하지 않았다. 

   케이팝의 파죽지세야 한국인이라면 각종 채널을 통해 접하지 않기가 더 어려우니 낯설지 않다고 해도, 내가 한국인이라고 해서 모든 사정을 잘 알 수는 당연히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혜미가 제 스마트폰으로 무언가 불현듯 재생하더니 몰타에게 건넸다. 여자가 그것을 받아 들어 살피기 시작하자 혜미의 목소리가 조금 고양되었다.

   한때 굉장히 유행했던 챌린지였는데.

   탕탕후루후루가 마티아스 분수대 앞에서 흘러나왔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소리 나는 스마트폰 쪽으로 하나둘 고개를 돌렸다. 몰타는 총구를 겨누듯 집게손가락을 뾰족하게 세워 탕, 하고 손을 차올렸다. 나는 반걸음 물러나 시선을 바닥에 두었다. 이번에는 여자가 혜미에게 제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오징어 게임이네!

   혜미의 흥분한 목소리에 한껏 톤이 올라간 여자가 한국어 문장을 그대로 따라했다. 

   오징어 게임이네!

   여자의 열정과 혜미의 치솟은 공감 능력이 불꽃을 일으키며 소리가 점점 커졌다. 문장이 멈추는 마디마다 끼어들 곳을 찾지 못한 나는 둘에게서 멀어져 분수대로 조금 더 다가갔다. 분수대 수면에 파동이 일어나 깔깔대는 두 사람의 웃음소리처럼 동심원이 번져 나갔다. 저수반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스마트폰을 열어 지도 앱을 켰다. 몰타가 어디에 있는 나라인 줄은 알아야 저렇게나 한국을 좋아하는 여자에게 적어도 미안하지는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


   눈앞을 오가는 무리의 상당수는 가족이었다. 대부분은 뜨내기 관광객이었고 간간이 주민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섞여 있었다. 분수대 맞은편에 한 아이가 할머니 손을 맞잡고 산책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여자아이 인상이 낯익었다. 빨간 털모자 때문이었다. 모자 위로 뾰족하게 튀어나온 더듬이 두 쪽에는 각각 빨간 모자를 쓴 눈사람과 노란 부직포 상자가 달려 있었다. 그 와중에 내 귓속은 몰타에서 온 여자가 심심치 않게 활용하는 코리아라는 단어로 가득 차 있었다. 코리안 컬처, 코리안 무비, 코리안 팝. 그들의 대화는 코리아를 시작으로 번져 가 여행과 일상에 닿았다. 둘 다 영어를 아주 잘하지는 않았지만, 관심거리를 공유하는 이들에게 중요한 건 애초에 질 좋은 문장이 아니었다. 내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혜미가 물었다. 

   다리 괜찮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가 혜미에게 갤럭시를 내밀었다. 갤럭시가 한국어로 여자의 언어를 통역해 주었다.

   원래 나는 팔레스타인 사람입니다. 

   혜미가 아하, 통역 앱이 있지, 하고 말하며 제 아이폰을 열었다.

   팔레스타인이요?

   아이폰이 말하고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민이 되어 몰타로 왔어요. 

   별로 놀라지 않는 혜미를 나는 바라보았다가 재빨리 시선을 거뒀다.

   난민 센터에서 한 4년 정도 머물렀어요. 그곳에서 사회로 들어갈 때 필요한 것을 교육받아요.

   아이폰은 건조하게 내뱉은 문장의 끝을 의도하지 못한 곳에서 올리는 방식으로 나를 조금 더 놀라게 했다.

   여기는 어떻게 왔어요?       

   혜미가 질문하고 갤럭시가 답했다. 

   몰타의 작은 주점에서 서빙을 해요. 한 시간에 11유로를 벌어요. 그걸로 식구를 먹여 살려요. 

   어떻게 왔냐는 말을 어떻게 돈을 벌어 여기까지 왔냐는 걸로 잘못 알아들은 쪽이 갤럭시인가, 나는 생각했고, 모호하게 방향을 잃은 말을 바로 잡듯 혜미가 다른 방식으로 질문했다. 

   여기는 어떻게 하다가 왔어요? 

   아이폰이 답했다.

   이곳에 비행기를 타고 오지 않았어요. 배를 타고 기차를 타고 왔어요···.

   앱이 영 이상하네. 혜미가 혼잣말하면서 내가 있는 곳으로 돌아서서 물었다.

   팔레스타인 사람이라고 했잖아. 거기 지금 전쟁 중인 나라지?

   아이폰은 통역해 달라는 문장만 통역하지는 않았고, 혜미의 문장도 고스란히 통역되고 있었다. 나는 울퉁불퉁해진 여자의 표정을 살폈다. 당황한 혜미가 앱을 껐지만, 앱은 구동을 멈추지 않았다. 갤럭시가 여자의 말을 받아 또박또박 문장을 뱉어 냈다.

   우리는 전쟁을 반기지 않아요. 평화를 원해요. 매우 인도주의적인 문제죠.

   분수대 건너편에 있던 빨간 모자 아이가 나를 보고 있었다는 걸 나는 그제야 알았다. 아이는 아직 걸음이 서툴렀다. 검은 눈동자가 얼굴에 비해 굉장히 크고 양 볼에 살이 도톰했다. 아이의 머리 위에서 떨어질 듯 흔들리는 빨간 모자 눈사람과 노란 부직포 상자. 나는 그것들에서 이윽고 시선을 떼었다.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아이의 할머니에게 온 것이었다. 할머니는 아이와 맞잡은 손을 떼는가 싶더니, 왼손으로 다시 아이를 붙잡고 오른손으로 전화기를 들고 통화를 했다. 영어가 아니었다. 혜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불렀다.

   이상아, 그거 뭐라고 하지? 무슬림 여자들이 뒤집어쓰는 거. 몸 전체를 가리는 거. 

   그건 왜?

   이분 무슬림이라는데 아무것도 안 썼잖아. 그거 이름 알았는데. 

   부르카?

   맞아, 부르카!

   혜미가 막 반가운 반응을 했을 때, 나는 깔깔거리는 아이들 서넛을 보았다.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그들은 분수대 저수반과 보도블록으로 된 정원 바닥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잡기 놀이에 열중했다. 주변 소음 때문에 목소리가 잘 전달되지 않는지 톤을 높이던 할머니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마땅한 장소를 찾지 못한 할머니가 아이를 잠시 놓고는 그 손을 둥글게 말아 전화기 아랫부분에 가져다 댔다.

   불안하다는 느낌이 스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일은 일어났다. 술래를 피해 도망치던 두 명이 아이를 살짝 밀쳤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대단한 충돌도 아니었다. 저수반 턱에서 뛰어내리던 초등학생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 중에 어떤 이가 훕플라, 하는 소리를 냈다. 나도 그들을 따라 소리를 높였다. 어어. 있어야 할 자리에 아이가 없었다.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진 아이를 찾으려는 듯 할머니는 얼빠진 표정으로 고개를 휘저으며 주위를 살폈다. 

   물 깊이가 발목 높이 정도일 줄 알았던 건 내 착각이었다. 아이를 휘감은 물에 잔 포말이 일었다. 아이의 손이 물결 위로 번쩍 나왔다 들어갔다. 물비늘마다 부서진 햇살들이 아이를 먹었다 뱉었다 했다. 나는 생각하고 말 겨를 없이 물로 뛰어들었다. 물은 차가웠고 두 살배기 아이를 충분히 빨아들일 정도로 깊었다. 좁아진 시야에 아이만 걸렸다. 몸을 최대한 숙여 아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갑자기 무언가 몸을 물 아래로 잡아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에는 그냥 답답하기만 하더니 차츰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내가 입은 패딩 때문이었다. 눈을 찔끔 감았다. 벗겨 내려고 몸을 비틀수록 옷이 점점 내 몸을 조여 왔다. 물속에서 몸을 둥글게 만 아이는 양수 안에 웅크린 어린 코끼리처럼 보였다. 

   온 힘을 끌어모아 아이에게 손을 뻗었다. 몇 번 시도한 끝에 아이를 잡아 가슴 앞까지 끌어왔다. 이제 분수대를 빠져나가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허리를 세우려는데 물을 한껏 먹은 패딩이 나를 당겼다. 무게를 이기지 못해 아이를 안은 채 주저앉아 버렸다. 그때 나와 아이 사이를 파고드는 손이 있었다. 아이가 들려 나와 멀어졌다. 옹골졌던 긴장이 서서히 풀렸다. 시린 바람에 물살이 일렁였다. 비릿한 물비린내가 내 몸을 훑었다. 멈췄던 감각들이 다시 기능하기 시작했다. 누군가 나를 확 끌어당겼다.

   이이상!

   혜미는 울부짖고 있었다. 파동처럼 웅웅대던 소리가 혜미의 목소리라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몰타 여자가 아이를 안고 있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물 밖으로 빠져나온 나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사람들이 몰려왔다. 누군가는 내 패딩 지퍼를 끌어내렸고 누군가는 자기가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내 몸을 감았다. 


*


   나 괜찮아. 

   혜미에게 그렇게 말하고 나서 나는 몰타 여자 품에 안겨 있는 아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닥에는 내 몸에서 흘러나온 물이 흥건히 고여 있었다. 긴장이 풀린 아이가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소란한 탓인지 주위에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혜미가 물에 홀딱 빠졌다 나온 나를 보더니 한껏 높아진 톤으로 물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거야? 

   나는 제 외투를 벗어 아이의 몸을 닦고 있는 몰타 여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 사람이랑 비슷한 생각이었겠지.

   몰타 여자는 이번에는 제가 쓰고 있던 모자를 아이의 머리에 덮어씌우고 있었다. 

   아니, 그거 말고. 아이 가슴 높이밖에 안 되는데 왜 물속에 온몸을 밀어 넣느냐고, 바보 같이.

   혜미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었다.

   모르겠어. 

   정말이었다. 아이의 머리가 차가운 물에 잠기는 걸 본 순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런 건 희생이나 헌신 같은 거창한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본능이라면 모를까. 나는 시큼한 물을 목구멍으로 삼키며 웃었다. 주저앉아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던 아이의 할머니가 내게 다가와 덥석 손을 잡았다. 할머니가 뭐라고 말했지만, 나는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혜미가 아이폰을 꺼내 들었다. 나는 부산스러움 속에서 눈을 감았다. 몰타 여자가 주변 사람들을 향해 영어로 소리쳤다. 

   저 한국인이 이 아이를 구했어요. 

   행인 서너 명이 가던 길을 멈추는가 싶더니 웅성대는 소리가 번져 갔다. 몰타 여자가 한 글자 한 글자에 힘을 주며 다시 외쳤다. 감격에 잠긴 목소리는 끝이 자꾸 갈라졌다.

   살았어요. 아이가 살았어요.

   여자는 한 번 더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코리아요, 사우스코리아.

   여자가 소리를 질러댔다. 그 나라를 똑똑히 보라는 듯, 이들의 훌륭한 시민 의식을 만천하에 알려 달라는 듯. 무리 속에 있던 한국인들 몇이 다가와 물었다. 

   괜찮으세요? 뭐 도와드릴까요?

   괜찮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자못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 지나갔다. 몰타 여자가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동경은 상상에 가까웠지만 내게 그것을 함부로 깨뜨릴 자격이 주어진 건 아니었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잦아들자 마치 태엽을 감았다 푼 것처럼 사람들이 다시 각자의 방향으로 흩어졌다. 낱낱의 움직임이 잔상을 남기며 빛의 선으로 쏟아졌다. 흔들리는 인파 사이로 커다랗고 앙상한 나목이 검은 인장처럼 눈에 들어왔다. 어지러웠다. 궁전 밖 정원으로 은은한 오르간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익숙한 캐럴이었다.

   몰타 여자가 다가와 안고 있던 아이를 제 아버지에게 건네주었다. 늦게 상황을 마주한 아이 아버지는 거의 우는 표정이 되어 있었다. 이해할 수 없지만 뜻을 알 것 같은 단어들로, 그는 여자에게 몇 번이나 감사 인사를 했다. 여자는 내게 공을 돌렸다. 아이의 아버지가 이번에는 내게 다가와 고맙다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낯선 공간에서 낯선 사람들이, 서로 의지하는 장면. 이상화와 고다이라 나오가 서로를 끌어안고 토닥이던 장면처럼. 국적을 뛰어넘어 인류의 가치를 밝히는 그런 장면. 아마 거기서 매듭지어졌더라면 완벽했을 터였다. 더 다정한 방향은 바라지도 않으니, 그렇게 끝이 났더라면.

   잠시 후, 몰타 여자와 얼굴을 마주하고 있던 아이의 아버지가 아이를 숨기듯 감싸더니, 급히 자리를 피해 버렸다. 그 황당한 장면에 눈을 두고 있는 건 혜미와 나뿐이었다. 도망치듯 자리를 뜨는 남자의 눈빛에 경계심이 혼란하게 섞여 있었다. 혐오나 경멸, 공포처럼 또렷한 목적이 있는 시선이 아니었다. 몰타 여자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는 얼굴로, 그 시선을 익숙하게 견디는 몸짓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간단한 눈인사를 하더니, 아이의 가족과 반대 방향으로 터벅터벅 걸어 나갔다. 사고 소식을 뒤늦게 들었는지 제복을 입은 사람 둘이 우리를 향해 다급히 뛰어오고 있었다. 

   내가 아직 여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을 때, 두 사람이 각각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출신이라는 걸 알려 준 건 혜미였다. 어떻게 알았느냐는 내 질문에 혜미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혹시 이스라엘 사람이냐고, 몰타가 물어봤거든. 아랍어로. 

   혜미의 손에는 통역 앱이 켜진 아이폰이 쥐여 있었다. 

   

*


   희용은 사색이 되어 나타났다. 대강 몸을 말린 뒤라 아까보다 상황이 좋은 편이라는 말에도 희용의 표정은 풀릴 기미가 없었다. 

   정말이야, 이제 괜찮아. 

   나는 상의를 로열 카페에 있던 여분의 웨이터복으로 갈아입고 파란 담요로 몸을 두른 채였다. 아이의 아버지가 어렵게 구해 와 건네고 간 것이었다. 그가 주는 달러 지폐는 한사코 거절했다. 

   입술이 파랗잖아. 

   곧 돌아오겠지. 

   혜미가 간이 카페에서 사 왔다며 핫초코를 내밀었다. 희용이 받아 뚜껑을 열어 건넸다. 향긋하고 달콤한 초콜릿 향이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나는 그것을 받아 한 모금 마셨다.

   좀 살 것 같아.

   내가 기분 좋은 소리를 내자 희용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혜미가 그간 있었던 일들을 거칠게 요약해 희용에게 들려주었다. 

   큰일날 뻔했네.

   희용은 잘했단 말을 하지는 않았다. 혜미처럼 걱정을 화로든 분노로든 표시하지도 않았다. 희용은 그저 이야기를 들었고 머뭇거렸다. 

   근데 그 남자 말이야. 진짜 눈을 이렇게 부라리더니 아이를 보이지도 않게 감싸안고 가더라니까.

   여전히 오른쪽 눈을 사납게 솟구쳐 올리고 있는 혜미의 말에 내가 동조했다. 

   무자비하게.

   희용이 목소리를 낮추면서 거의 속삭이듯 말했다. 

   말조심해. 걔네 전쟁 중이야.

   그 말을 들은 혜미가 약간 더 높은 톤이 되어 대꾸했다.

   그러니까, 팔레스타인 사람들 난민 되는 거 다 그 사람들 때문 아니냐고.

   희용이 조금 더 세게 압박하듯 톤을 내려 마디마다 힘을 주며 혜미를 향해 말했다.

   조용히 하라고. 저 사람들 다 알아듣는다고. 그 문제라면 여기 사람들 진짜 민감해. 

   그게 무슨 말이야?

   희용이 옅게 한숨을 쉬고는 말을 이었다. 

   소위 반 난민법이라는 게 있어. 불법 이민자를 함부로 지원하면 최대 1년 징역형에 처할 수 있는. 유럽연합 사법재판소에서 제동을 걸었지만, 국가 정서라는 게 잘 안 바뀌잖아. 여긴 그래서 유럽 국가 중에서도 난민이 적은 편이야. 독일 같은 데 가면 난민들이 아마 널려 있을 거거든. 여기는 겨우 허가받은 난민들뿐이라 거의 못 들어와.

   좋네. 

   혜미의 음성이 퉁명스러웠다. 

   좋다고? 

   희용이 놀라며 답했다. 

   그거 우리나라랑 다를 거 없잖아. 

   갑작스러운 침묵이 돌았다. 나는 희용이 어째서 이곳은 다른 서유럽 국가들보다 안전하다고 했는지를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안전하다는 단어에 소름이 끼치기는 처음이었다. 몰타 여자가 불법 이민자라면 나도 처벌받는 건가. 나는 잠시 상상에 빠졌다. 알고 보니 몰타 여자가 진짜 불법 체류자였고 혜미와 내가 경찰 조사를 받으러 가는 그런 스토리로 빚은 상상. 머릿속으로 지렁이가 꿈틀거리며 지나가는 것 같아 눈앞이 갑자기 번득였다. 정신을 차리려고 고개를 두어 번 거세게 도리질했다. 대치한 친구들 사이에 어정쩡하게 서 있을 수는 없었다.

   전쟁이 뭐, 평범한 사람들이 하냐. 기분 풀자 다들.

   그럼, 평범한 사람들이 하지.

   희용의 답에 혜미가 말로 툭 쳤다. 

   전쟁을 뭔 평범한 사람들이 해.

   희용이 되받아쳤다.

   분노를 만드는 건 권력자지만, 권력을 그들 손에 쥐어 준 건 평범한 사람들이잖아. 히틀러도 푸틴도 선출직이야.

   나는 바닥을 보며 짧게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 알았어. 둘 다 그만해 이제. 

   내 말에 희용이 여기까지만 하겠다고서는 입술을 앙다물었다가 틈 없이 열며 말했다. 

   어차피 인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잖아. 사라예보에서 합스부르크 왕세자를 죽여서 세계 대전을 일으킨 것도 결국 한 개인이었어.

   나는 이 궁전의 주인이었던 합스부르크의 마지막에 관해 검색했던 내용을 떠올렸다. 권력을 다시 잡지 못한 채 그들의 자손은 유럽 각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싸움에서 졌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권력을 배분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권력은 평범한 시민들에게 갔다. 나는 몰타 여자의 발언을 떠올리며 한참 만에 말을 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전쟁을 원하지 않아.

   희용이 조금 누그러진 투로 답했다.

   원하냐 원하지 않느냐의 차원이 아니야. 

   나는 입을 닫았다. 혜미는 고개를 저었다. 

   죽고 다친 사람들은 아무런 죄가 없어.

   알지, 알아. 근데 우리가 지금 당장 그들을 구할 수 있는 기가 막힌 방법도 없다고. 그러니까, 조심하자는 거야. 괜히 우리가 다칠 필요는 없잖아. 

   희용의 말을 들으며 나는 오른쪽 허벅지에서 이상한 이물감을 느껴 표정을 구겼다. 몸을 약간 비틀자 이번에는 무언가가 살에 박혔는지 악 소리가 날 정도였다. 손을 넣어 파란 담요 아래를 뒤적이자 차가운 줄이 손에 걸려 따라 나왔다. 둥근 고리가 달린 얇고 가는 은색 사슬이었다. 이음새가 틀어진 고리에는 찢어진 노란 천 조각도 달려 있었다. 뒤따라 빨간 모자를 쓴 눈사람 장식이 반대쪽 고리에 달려 밖으로 나왔다. 하아. 나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사슬을 검지에 걸었다. 희용과 혜미는 어느새 페스트 방향으로 눈을 두고 있었다. 멀리 세체니 다리에 촘촘히 박힌 둥근 전구 불빛이 구슬을 꿰어 만든 사슬처럼 반짝였다. 손에 쥐고 있는 사슬 장식을 나는 천천히 매만졌다. 축축했다.

   숙소로 돌아갈까? 

   희용이 물었다. 부다에 오기 전부터 광장에서 열리는 크리스마스 마켓을 봐야 한다고 몇 번이나 말하더니, 아니나 다를까 약간 풀이 죽은 목소리였다. 나는 엄지손가락으로 사슬을 꾹 누르며 말했다.

   마켓 입구라도 가 보자. 

   희용이 내 머리카락을 몇 가닥 들어 손가락에 대고 비볐다.

   머리카락이 아직 젖어 있어. 

   나는 괜찮다는 걸 알리기 위해 머리카락을 탁탁 털며 걸었다.

   어차피 광장이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에 있잖아. 잠깐만 돌아보고 가자. 그 정도는 괜찮아. 

   시내를 내려다보는 혜미의 목소리도 조금 더 밝아져 있었다. 

   그러자. 어렵게 유럽까지 여행 와서, 우리가 전쟁과 평화를 고민하는 척하는 거 우습지 않아?

   나는 혜미가 그 문제를 지금까지 담아 두고 있었다는 사실에 내심 놀라며 답했다.

   그래, 잊어버리고 놀자. 우리가 그런 거 알자고 힘들게 시간 내고 비행기 표 끊어 여기까지 왔냐.

   혜미가 한층 밝아진 음성이 되어 있었다.

   얘들아, 저거 봐. 아까 역에서 나올 때 굴라쉬 파는 집 있었잖아. 몸 좀 녹이자. 그 뒤로 다 크리스마스 마켓이네!


*


   파프리카를 넣고 오래 끓인 소고기 국물 냄새가 골목마다 진동했다. 광장에는 성탄 분위기를 한껏 머금은 간이 부스들이 모여 있었다. 대부분은 각종 음료와 따뜻한 먹거리들을 팔았다. 우리는 굴라쉬 두 그릇을 받아 무지개색 파라솔 아래에 있는 테이블로 가져왔다. 붉은 수프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나는 차가운 손바닥을 둥글게 말아 굴라쉬가 담긴 사기그릇을 손에 감쌌다. 

   구야시. 굴라쉬가 아니고. 목동이라는 뜻이래.

   희용은 아는 것이 많았지만, 모르는 척할 줄도 몰랐다. 아는 것도 그러려니 하는 혜미는 온화한 얼굴로 첫 수저를 음미하더니, 함께 나온 빵을 국물에 적시며 작게 말했다.

   흐음, 빵을 두 조각 던져 줬네. 너희 둘이 먹어. 찍어 먹을 빵 좀 더 가져올게.

   혜미가 빵을 얻으러 가는 동안, 나는 그릇을 감싼 채 희용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철의 장막 말이야.

   좁은 골목 안으로 사람들이 밀려들어 파라솔 아래에 선 우리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뭐라고?

   희용이 되물었다. 그 단어를 희용이 얼른 알아채길 나는 원했던가. 나는 희용의 눈 옆에 붙어있는 작은 점을 물끄러미 들여다봤다.

   적어도 헝가리는 스스로 철의 장막을 걷어 냈대. 막혔던 서방 쪽 국경을 사람들이 직접 나서서 다시 이은 거지.

   나는 희용에게 말할 작정으로 입을 떼었다. 혜미가 그새 파라솔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머뭇거렸다. 그 말 한마디가 우리의 분위기를 또 어떻게 몰아갈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가만히 희용의 눈을 바라보다가 이내 굴라쉬, 아니 구야시로 시선을 옮겨 파프리카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우리 옆으로 줄을 서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골목을 살피던 혜미가 입을 비죽이며 중얼거렸다. 

   들었던 거랑 다르네.

   나는 희용의 눈치를 보며 크리스마스 마켓을 여기서는 뭐라고 부르느냐고 물을 뻔했는데, 마침 희용이 혜미에게 물었다. 

   너무 소박해?

   아니, 그런 게 아니고.

   각종 원목 장난감, 새해 다이어리, 주방용품, 인테리어용 오브제, 가죽 아이템. 마켓에서는 부스마다 특색 있는 제품을 팔고 있었다. 나는 두 사람이 하는 말을 건성으로 듣다가 무심코 숟가락을 내려 두고 한 부스 앞으로 다가갔다. 오르골을 파는 가게였다.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톡, 하고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누군가 가져다준 수건으로 머리카락 끝을 꾹 눌렀다. 그러면서도 매대에 놓여 있는 상품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중이었다. 동그랗고 맑은 색의 지구본이 중앙에 놓인 오르골이었다. 네모난 원목 위로 한 가운데 지구본이, 그 주변으로 기찻길이 놓여 있었다. 

   앞에 있던 점원이 내게, 어떻게 재생시키는지 보여 줘도 되겠냐는 듯 그것을 손에 들고 미소 짓더니, 아래로 손을 넣어 태엽을 감았다. 서너 번 태엽이 감긴 후에 점원이 손을 놓았다. 기찻길 위로 장난감 기차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태엽이 풀어지며 소리가 조금 더 느슨해졌다. 빨간 모자를 쓴 눈사람이 기차의 첫 번째 칸에 있었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눈사람을 감싸 쥐었다. 기차는 지구본을 구심점 삼아 원을 그리며 달렸다. 빨간 모자를 쓴 눈사람이 내게로 왔다가 다시 지구 뒤편으로 사라지는 장면에서 나는 눈을 떼지 못했다.

   오르골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익숙한 선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war is over.

   손에 들려 있던 스마트폰에 진동이 울렸다. 회사 메신저에서 날아든 알림이었다. 프로젝트 관련 회의 소집 공지였는데, 팀원의 메시지에 다급함이 고스란히 전달됐다. 지금까지 내게 전쟁은 이런 거였다. 없는 능력을 만들어서라도 버텨야 하는 직장, 클라이언트에게 조금이라도 잘 보이려고 애쓰는 집념. 겨우 사흘 뒤에 나는 다시 그런 전쟁터에 나를 내맡겨야 했다. 오르골의 음악이 어느새 끝나 있었고, 나는 생각의 끝에 머물러 있었다. 사는 동안 전쟁이라는 말을 너무 자주 썼다는 생각. 

   희용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평화로운 캐럴이 광장으로 흘러나왔고 행인들의 얼굴은 즐거웠다. 희용이 그새 뭘 샀느냐고 물었다. 나는 내가 산 오르골의 샘플을 손으로 가리켰다. 

   신기하게 생겼네.

   오르골이 담긴 봉투를 건네받았다. 지구가 내 품으로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어릴 때 나는 불교였어. 

   내 말에 희용이 뭐라고? 하고 되물었다. 

   나는 어릴 때는 불교였는데, 캐럴은 다 알아. 지금은 종교가 뭐든 상관없고. 누군가는 종교 때문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데, 신기하지 않아?

   뚱딴지같은 이야기를 한다는 듯, 희용이 희미하게 웃었다. 어느새 인파가 크리스마스 마켓 안쪽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파라솔 아래에서 마켓을 배경으로 셀피를 찍고 있던 혜미에게 그만 숙소로 돌아가자고 말했다. 그러곤 물결을 가르듯 앞서서 좁은 골목들을 지나쳐 지하철역 입구로 턱턱 걸어갔다.


*


   우리가 삼 일째 묵고 있는 숙소는 페스트 지구에 있었다. 기침을 좀 했고 추운 기운도 들었지만, 몸 상태는 비교적 양호했다. 나를 위해 혜미와 희용이 간단히 먹을 수 있는 따뜻한 수프와 비상용 감기약을 구해 왔다. 혜미가 아까 있었던 일을 희용에게 속속들이 다시 이야기해 주었다. 몰타 여자의 이름이 벨라라는 것도, 그녀가 하루에 3만 원 하는 게스트하우스에 묵는다는 것도 이제야 혜미를 통해 알았다. 

   하루에 3만 원 내는 건 우리랑 똑같네. 

   희용이 말하자 혜미가 피식 웃었다. 우리가 묵는 숙소는 애초에 호텔로 잡으려던 것을 혜미가 수완을 들여 구한 단층 주택이었는데, 열심히 찾은 20% 쿠폰 할인을 알뜰하게 먹여 한 명에 3만 원 정도의 비용을 들이고 있었다. 방도 두 개였고, 욕조가 딸린 화장실과 사인용 식탁도 있었다.

   나는 물에 빠졌던 아이의 아버지가 건넨 파란 담요를 아직 몸에 뒤집어쓰고 있었다. 혜미가 티브이를 켰다. 극우가 점점 기세를 펼치는 유럽연합 의회 선거에 대한 뉴스, 미국 대통령 선거를 다룬 단신 뉴스가 몇 개 지나갔다. 관심 밖이라는 듯 채널이 빠르게 돌려지다 멈췄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을 다룬 뉴스였다. 어쩐지 다음으로 넘어가지 못했다. 화면을 바라보는 셋 다 별말이 없었다. 펑, 소리가 나면서 불꽃 기둥이 치솟아 올랐고 나는 소리에 놀라 몸을 웅크렸다. 그다음 장면으로 초토화된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이더니, 마이크 앞에 한 아이가 등장했다. 자막에 ‘바심(7)’이라고, 아이의 이름과 나이가 적혀 있었다. 

   - 바라는 게 있니? 

   아이는 카메라에 대고 말했다. 축구하고 싶어요, 자전거 타고 싶어요, 하는 것처럼 단조로운 어투로.

   - 죽고 싶어요. 

   아이의 대답을 들은 앵글 밖 기자의 목소리가 조금 더 높아졌다. 아니, 조금 더 흥분해 있었다.

   - 왜?

   아이의 목소리 톤은 감정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일정했다. 검은 눈은 살아보지도 않은 삶을 이미 잃어버린 것처럼 텅 비어 있었다. 평온해 보일 정도였다. 

   -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넋을 놓고 있는 내 뒤로 혜미의 빳빳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국 뉴스라면 저 인터뷰 못 나왔겠는 걸.

   나는 그 순간 빨간 털모자를 쓴 아이를, 몰타 여자를, 아이의 아버지를 차례로 떠올렸다. 그들은 언젠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갈까. 그 여자가 팔레스타인 출신이라는 걸 알지 않았더라도 남자가 여자에게 그 정도로 냉혹한 표정을 지었을까. 

   이번 전쟁은 팔레스타인 하마스가 먼저 방아쇠를 당긴 거야.

   희용의 말을 듣던 혜미가 소리를 질렀다. 

   뭐야, 그 여자 쪽이 시작한 거야?

   희용이 혜미를 한번 쳐다보더니 부쩍 긴장감 도는 목소리로 말했다.

   뭐, 애초엔 이스라엘 때문이지. 싸우는 당사자에게는 이제 어떤 좋은 말도 안 들릴 거야. 전쟁을 여러 차례 치르면서 증오만 남았을 테니까.

   혜미는 혀를 한번 끌어 차며 말했다.

   참, 전쟁 좀 안 하면 안 되나? 말로만 평화를 바란다고 하지 말고 서로 양보하면 되잖아. 신이 내려다보시면 다 쓸데없는 짓이라고 하지. 

   희용과 나는 혜미를 빤히 들여다봤다. 그게 다, 네가 믿는 신 때문이었다고 말해 줄 참에 희용이 눙치며 에둘러 말했다.

   너는 가끔 이상한 포인트에서 관조적이더라. 그런데 말이야. 그 논리라면 네 고향 고성? 전쟁 때 국군이 조금만 더 남쪽으로 물러났더라면 지금 너는 여기 없다.

   혜미가 격앙된 톤으로 희용을 돌아보며 물었다.

   야, 지키려고 싸운 거랑 같냐? 

   뭐가 달라? 다 같은 싸움인데 서로 양보했어야지. 전쟁은 어디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야. 우리는 경제력 순위보다 군사력 순위가 높아. 어디까지나 휴전 중이라고. 

   희용은 그렇게 말하더니 칩 한 조각을 넣어 와그작 씹었다.

   어떤 폭력이 정당할까. 폭력에 저항하는 폭력, 전쟁에 반대하는 전쟁, 평화를 위한 싸움. 두서없이 조합된 개념어들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폭력 없는 세상이 가능은 할까. 나는 초점 없는 시선으로 창문을 바라보다가 문득 스마트폰에서 유튜브 앱을 열어 한국 전쟁을 찾아보았다. 희용과 혜미도 곧 내 주위로 몰려들었다. 검색의 결과는 대부분 남한 입장에서 이야기되는 한국 전쟁이거나, 혹은 빈궁하던 옛 모습을 기억하는 전쟁 참전 용사들의 서울 방문기였다. 어떤 외국 뉴스들은 디엠지의 철조망을 자료 화면으로 내보내며 제2차 한국 전쟁의 가능성을 토론했다. 그들은 수십 개의 언어로 한국의 전쟁에 관해 말을 보탰다. 우리는 그들의 말을 대부분 이해하지 못했다. 

   인간은 오만해. 

   희용이 말했고 혜미와 나 누구도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나무로 만들어진 매끈한 소파 팔걸이에 팔뚝이 닿자 서늘한 기운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밤이 차다. 

   어머, 감기 걸리면 안 돼. 

   담요를 추스르는 내 말을 듣고 혜미가 부산스레 소리쳤다. 희용은 공기 온도를 좀 더 높여보겠다며 라디에이터를 조작하러 갔고, 혜미는 물을 끓이러 부엌으로 들어갔다. 창밖 거리는 떠드는 사람들과 폭죽 소리로 소란했다. 나는 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검은 화면에 반짝이는 불빛이 미사일이 날아드는 밤하늘 같았다. 테이블 위에 올려둔 오르골로 손을 뻗었다. 금속 태엽은 네 번 정도 넉넉하게 감아 달라고, 오르골을 팔던 여자는 말했었다. 빨간 모자를 쓴 눈사람을 태운 기차가 원목 위의 기찻길을 돌았다. 전등의 불빛이 지구촌에 닿아 반짝였다. 오르골에서 퍼져 나오는 소리가 칼림바 연주처럼 청량했다. 

   전쟁은 끝나요, 당신이 원한다면. 

   나는 문득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깥으로 은밀한 겨울의 밤이 깊어 가는 중이었다. 웃는 표정의 눈사람이 기찻길을 따라 도는 소리로 오르골은 달그락거렸다. 태엽이 다 풀릴 때까지 검은 어둠이 내 시선을 빼앗았다. 














* 팔레스타인 어린이 인터뷰는 튀르키예 공영 방송국(TRT World)의 가자 지구 인터뷰(2024년 5월 9일) 내용을 참조했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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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드를 올려요 양지예 월요일 출근 지하철에 이현은 용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제일 좋아하는 구석 자리 좌석이었다. 이어폰을 꽂으려 고개를 들었을 때 맞은편에 앉은 노인이 급히 시선을 돌렸다. 이현을 훑어보던 눈치였다. 까끌까끌해 보일 정도로 머리를 짧게 자른 왜소한 남자. 이현은 아무 일도 없는 듯 스마트폰에 무선 이어폰을 연결했다. 괜찮았다. 진심이었다. 언제인가 눈이 마주쳤는데도 시선을 돌리지 않는 사람과 마주 앉은 적도 있었다. 노인 여성 한 명, 중년 남성 한 명. 이현 쪽에서 시선을 먼저 돌린 후에도 이현에게 고정되어 있던 두 시선. 지금 생각해 보니 전혀 닮지 않은 두 사람은 꼭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서른 인생에서 스쳐 지나간 수천수만의 사람 중 단 둘뿐이었는데도 기억에 선명했다. 두 번 모두 이현은 목적지에 닿기도 전에 낯선 역에서 내려야 했다. 어김없이 지하철 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내리는 사람 없이 타는 사람만 늘었다. 건너편의 까까머리 노인이 아직 그 자리에 있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이현의 시선에는 앞에 선 고등학생이 배 쪽으로 멘 백팩만 들어왔다. 백팩에 얹힌 스마트폰에 고정된 안경알과 마주치지 않으려 조심하면서 이현은 자리를 고쳐 앉았다. 이어폰에서는 출근 때마다 듣는 ‘직장인 필수 영문장 섀도잉’ 음성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 시간 정도 되는 유튜브 영상은 지하철에 타서 듣기 시작하면 갈아타는 역에 도착할 즈음 끝났다. 광고 건너뛰기▶| 를 누르려다 이현은 알고리즘이 추천한 다른 영상을 잘못 누른다. 보통은 광고가 흘러가게 두는 편이었다. 예고 없이 튀어나오는 광고 음악에는 졸음이 달아나는 효과가 있었다. 더 큰 이유는 앉아서 출근하는 때보다 서서 출근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었다. 만원 지하철에 선 채 가방이나 외투 주머니에 넣어 둔 스마트폰을 꺼내려면 꽤나 용기가 필요했다. 주위 승객 여러분, 아주 잠깐만 이만큼의 영역에서 제 팔꿈치를 좀 휘두르겠습니다. 나서서 승낙을 구할 수 없기에 적당한 때를 노리는 요령과 눈치까지 필요했다. 앉아서 가면 민폐에 대한 부담이 덜했다. 무릎 위에 올려 둔 가방이 약간의 공간을 확보해 주기 때문이었다. 이현이 실수로 누른 영상은 어젯밤에 시청하던 발톱 치료 영상이었다. 이현의 알고리즘은 비슷한 영상으로 채워져 있었다. 얼굴이 아니라 균과 얽힌 나머지 안으로 파고들다 파고들다 이윽고 시커멓고 누렇게 되어 버린 발톱이 주인공인 영상들이었다. 증상이 심한 사람은 색이 변한 정도를 넘어 자라나는 발톱을 내리누를 정도로 두껍게 쌓여서 발톱이 웃자란 조개껍데기처럼 보이기도 했다. 올린 사람은 달라도 영상의 흐름은 거의 비슷했다. 소독약을 뿌린 다음 작은 드릴처럼 생긴 도구로 발톱을 갈아 낸다. 휘날리는 빵가루 같은 각질들을 닦아 내고 가끔은 니퍼를 이용해 커다란 발톱 덩어리를 잘라 내기도 한다. 잘라 낸 발톱 아래에는 각화된 살과 균이 융합해 불규칙적이고 축축한 구조체를 이루고 있기 마련이었다. 피고름이 고여 있을 때도 있

  • 관리자
  • 2025-01-01
막내를 찾습니다

막내를 찾습니다 곽재민 작정하고 도망친 사람의 자리는 깔끔하다. 이를 토대로 우린 이틀간 연락이 되질 않던 막내가 돌아오지 않을 거란 결론을 내렸다. 얼마 전까지 같이 일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수많은 욕설이 들려왔다. 막내는 얼어 죽을 년이었다가, 차에 치어 콱 죽어 버렸으면 좋을 년이 됐다가, 찢어 죽일 년이 됐다. 잠자코 선배들의 욕을 듣던 왕작가 님은 요즘 막내들은 버틸 생각이 없는 것 같다며 따지듯이 얘기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왕작가 님은 무안했는지 내게 면죄부를 내려 줬다. 막내와 비슷한 연배임에도 요즘 것들에 묶이지 않았다는 사실이 묘하게 안정감을 줬다. 혹시 너는 막내가 도망칠 걸 알고 있었니. 나는 몰랐다고 답했다. 혹시 숨겨 주는 거라면 너도 다를 게 없는 거 알지. 나는 알고 있다고 답했다. 그것도 못 버티면서 어딜 방송계에 발 들이려 해. 선배들은 방송작가 블랙리스트에 막내의 이름을 올리겠다며 윽박질렀다. 고작 23살짜리 사회 초년생에게 너무한 처사가 아닌가 싶었지만, 내게 발언권은 없었다. 도망치는 걸 도와줬다간 네 이름도 오르게 될 거야. 가족도 아닌데 연좌제라니. 나는 공손하게 두 손을 모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블랙리스트는 방송작가들 사이에서 은밀하게 공유된다. 으레 블랙리스트가 그렇듯 내용은 상당히 주관적이다. 업무 강도가 어땠는지, 막내가 얼마나 버티다가 도망치게 됐는지는 명시되지 않는다. 선배의 기분을 거슬리게 했던 몇몇 일화가 적힌 채 방송계에 떠돌게 될 뿐이다. 그렇게 박제된 작가들은 취업 시장에서 기회가 제한되곤 한다. 작가들이 최대한 구설수 없이 일하려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비롯된다. 방송업계에 발을 들인 지 얼마 되지 않은 막내가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알 리 없었다. 이런 것도 알려 줬어야 하나. 하지만 방송에 환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추잡한 부분을 일일이 설명하기가 싫었다. 선배, 이거 해석해 봐요. 나 어시민 못살메, 이추룩 조꼬띠 이서도 못 사는디. 이걸 어떻게 알아먹어요. 조만간 베네수엘라어 해석하라고 시킬 것 같아요. 세전 180만 원 받으면서 이런 일을 해야 돼요? 함께 일한 지 한 달이 지나고 막내는 내게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영상을 문서화하는 프리뷰 작업은 막내의 일이었다. 얼마 전, 제주도 해녀들의 방언을 문서화하는 작업을 할 때 막내의 투정이 더욱 격해졌다. 비품을 채우러 다이소에 들르거나 커피 심부름하는 것보다도 이해할 수 없다고,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다고 했다. 그런 기본적인 업무를 할 줄 알아야 메인작가도 되는 거라 다독였지만 막내는 거듭 하소연했다. 이런 잡무를 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선배 대단하다. 이런 짓을 몇 년씩이나 하면서 어떻게 버텨요? 정신병 오겠네. 나는 잠자코 투정을 들어줬다. 나까지 이런 것도 못 하냐며 핀잔을 줬다간 당장이라도 그만둘 것 같았으니까. 어르고 달래며 막내가 실수하지 않도록 체크해 주는 일. 그게 서브작가의 잡무였다. 그러던 지난 월요일 아침, 작가 팀 톡방이 잠잠했다. 보통이면 막내의 현황 보고

  • 관리자
  • 2025-01-01
비비안의 딸들

비비안의 딸들 유호민 “금고 좀 비워 놔. 곧 갈게.” 남편의 전화는 길지 않았다. 그러나 그 짧은 통화에 모든 것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 집 어디에도 피할 수 있는 공간은 없다. 고민할 여유는커녕 필요조차 없이, 결정의 순간이 떠밀려 왔다. 금고 속에 있던 수천 장의 종이를 상자에 옮겨 담으며 희빈 씨를 생각했다. 그녀를 처음 만난 건 이번 학기 수업이 시작하던 날이었다. ‘나는 xxx xxx xxx xxx 이다’ 화이트보드에 그렇게 쓴 강사가 돌아서서 수강생들을 마주 봤다. “나는, 여러분에게 시 쓰기를 가르쳐 줄 수 없는 시인 김인하, 입니다.” 구립 도서관의 초급 시 창작반 첫 수업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다음 순서는 자기소개였는데 ‘구체적이고 창의적인 한 문장으로’라는 단서를 붙이자 강의실 안의 모든 사람이 고개를 숙였다. 강사는 나를 지목하고, 나는 수줍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초급 시 창작을 여덟 번째 수강하는 대치동 쌍둥엄마, 입니다.” 수강생 몇 명이 작은 소리로 웃었다. “저렇게 소개하시면 만년 초급을 못 면하십니다.” 강사의 말에 폭소가 터졌다. 팔 년 전 시 창작 강의가 처음 열렸을 때, 강의실을 휘익 둘러본 그는 나를 회장으로 찍었다. 평균 연령 60세쯤 되는 강의실에서 그중 젊고, 그리고 반듯해 보이는 내 인상 때문일 터였다. 뭔가 민망해서 “회장은 다른 분이 하시고 저는 총무 할게요,” 했더니 그는 선선히 “그럼 총무 하세요,” 했지만 그걸로 끝, 나는 회장 없는 만년 총무가 되어 수업을 보조하는 경지에 이르게 된 거였다. 분위기가 편안해지자 신입회원들을 한 명씩 지목해 나갔다. 대부분은 이름과 나이를 밝히는 소심한 자기소개, 일부는 조금 더 자세한 소개를 하고, 한두 명은 나름 참신한 시도를 하다가 괴상망측한 결과가 되곤 하는데, 희빈 씨는 그중 마지막에 속했다. 정확히 기억은 못 하지만 비 오는 사막에서 꼬리 잘린 전갈 황 희빈,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소개한 거였다. 잠깐 뜨악한 정적이 흘렀다. 강사는 곧 “황 희빈 씨, 잘린 게 아니라 숨긴 것 같은데요?” 은근히 추어 주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수업이 끝난 후 서둘러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시어머니가 오기로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식사 준비는 식당에 주문해 둔 요리를 포장해 오는 걸로 끝냈다. 신경 써야 하는 일들은 따로 있으니까. 삶이 편안해지는 요령 1호는 새로 산 비싼 물건들은 눈에 띄지 않게 하는 것, 더 중요한 팁은 숨겨야 할 물건은 가격만으로 정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새로 산 가방과 친정어머니와 같이 갔던 여행 사진 액자를 들고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다. 남편 양복들 아래에 있는 금고. 가정용치고 꽤 큰 금고의 문짝을 열자 세 개의 서랍이 드러났다. 서류와 통

  • 관리자
  • 2025-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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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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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2-26 14:54:50
    용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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