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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를 찾습니다

  • 작성일 2025-01-01
  • 조회수 1,226

   막내를 찾습니다


곽재민

 

  작정하고 도망친 사람의 자리는 깔끔하다. 이를 토대로 우린 이틀간 연락이 되질 않던 막내가 돌아오지 않을 거란 결론을 내렸다. 얼마 전까지 같이 일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수많은 욕설이 들려왔다. 막내는 얼어 죽을 년이었다가, 차에 치어 콱 죽어 버렸으면 좋을 년이 됐다가, 찢어 죽일 년이 됐다. 잠자코 선배들의 욕을 듣던 왕작가 님은 요즘 막내들은 버틸 생각이 없는 것 같다며 따지듯이 얘기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왕작가 님은 무안했는지 내게 면죄부를 내려 줬다. 막내와 비슷한 연배임에도 요즘 것들에 묶이지 않았다는 사실이 묘하게 안정감을 줬다. 

  혹시 너는 막내가 도망칠 걸 알고 있었니. 나는 몰랐다고 답했다. 혹시 숨겨 주는 거라면 너도 다를 게 없는 거 알지. 나는 알고 있다고 답했다. 그것도 못 버티면서 어딜 방송계에 발 들이려 해. 선배들은 방송작가 블랙리스트에 막내의 이름을 올리겠다며 윽박질렀다. 고작 23살짜리 사회 초년생에게 너무한 처사가 아닌가 싶었지만, 내게 발언권은 없었다. 도망치는 걸 도와줬다간 네 이름도 오르게 될 거야. 가족도 아닌데 연좌제라니. 나는 공손하게 두 손을 모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블랙리스트는 방송작가들 사이에서 은밀하게 공유된다. 으레 블랙리스트가 그렇듯 내용은 상당히 주관적이다. 업무 강도가 어땠는지, 막내가 얼마나 버티다가 도망치게 됐는지는 명시되지 않는다. 선배의 기분을 거슬리게 했던 몇몇 일화가 적힌 채 방송계에 떠돌게 될 뿐이다. 그렇게 박제된 작가들은 취업 시장에서 기회가 제한되곤 한다. 작가들이 최대한 구설수 없이 일하려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비롯된다. 방송업계에 발을 들인 지 얼마 되지 않은 막내가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알 리 없었다. 이런 것도 알려 줬어야 하나. 하지만 방송에 환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추잡한 부분을 일일이 설명하기가 싫었다. 

  선배, 이거 해석해 봐요. 나 어시민 못살메, 이추룩 조꼬띠 이서도 못 사는디. 이걸 어떻게 알아먹어요. 조만간 베네수엘라어 해석하라고 시킬 것 같아요. 세전 180만 원 받으면서 이런 일을 해야 돼요?

  함께 일한 지 한 달이 지나고 막내는 내게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영상을 문서화하는 프리뷰 작업은 막내의 일이었다. 얼마 전, 제주도 해녀들의 방언을 문서화하는 작업을 할 때 막내의 투정이 더욱 격해졌다. 비품을 채우러 다이소에 들르거나 커피 심부름하는 것보다도 이해할 수 없다고,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다고 했다. 그런 기본적인 업무를 할 줄 알아야 메인작가도 되는 거라 다독였지만 막내는 거듭 하소연했다. 

  이런 잡무를 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선배 대단하다. 이런 짓을 몇 년씩이나 하면서 어떻게 버텨요? 정신병 오겠네.

  나는 잠자코 투정을 들어줬다. 나까지 이런 것도 못 하냐며 핀잔을 줬다간 당장이라도 그만둘 것 같았으니까. 어르고 달래며 막내가 실수하지 않도록 체크해 주는 일. 그게 서브작가의 잡무였다.

  그러던 지난 월요일 아침, 작가 팀 톡방이 잠잠했다. 보통이면 막내의 현황 보고 카톡으로 도배가 되는데, 알림이 울리질 않았다. 막내의 업무는 내 업무가 됐고, 나는 곧바로 현황을 보고했다. 한마디 하겠다는 각오로 막내에게 전화했지만, 일요일 새벽까지 자료 조사를 하느라 고생했을 게 생각나서 두 번 전화하지는 않았다.

  막내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막내 책상에 앉아 마우스를 움직였다. 절전 모드에 들어가 있던 컴퓨터는 곧 퍼질 것 같은 소리를 내며 재부팅됐다. 막내가 뽑히진 않았지만 새로운 막내를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됐다. 컴퓨터 메모장엔 업무 체크리스트와 함께 박명수의 명언이 적혀 있었다. 참을 인(忍) 세 번이면 호구. 막내는 무한도전을 2회 정주행한 걸 자랑스럽게 여기던 사람이었다. 방송작가에 대한 환상을 심어 줬던 것도 〈무한도전〉이었다. 인터넷 창에는 업무 중간중간에 봤을 무한도전 클립과 수련하는 한 남자의 영상이 떠 있었다. 인터넷 캐시를 지우고 그간 막내가 관리하던 파일을 USB로 옮기는 동안, 그가 자신의 개인 정보를 하나도 남기지 않았음을 알아차렸다. 

  지문 등록은 입사 후 석 달이 지난 시점에야 가능하니 주말에 물건을 가져가는 건 불가능하다. 출근할 때마다 회사 문을 열어 줬던 것도 나였다. 즉, 막내는 최소한 일주일 전부터 자신의 흔적을 지워 가고 있던 셈이다. 막내의 책상에는 먹다 남은 아메리카노와 다 써 가는 립밤 하나가 놓여 있었다. 불현듯 마지막을 준비하며 옷가지를 태우던 100세 할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장수 특집 촬영을 위해 찾아갔던 100세 노인의 집엔 한복 한 벌과 속옷 두 개뿐이었다. 그는 이별 앞에서 의연했고, 매일 본인의 물건을 태웠으며, 우린 그걸 방송에 내보냈다. 책상 서랍을 뒤적거리며 막내가 놓고 간 물건이 있는지 확인했으나 싹 비워져 있었다. 이외에도 몇몇 비품도 함께 사라져 있었는데, 집에 구멍이라도 난 건지 본드와 테이프가 뭉텅이로 사라져 있었다. 채워야 할 비품을 체크하던 내 어깨를 두드린 건 막내 조연출이었다. 

  “작가님, 막내도 도망친 마당에 업무를 또 하게 만드는 것 같아서 죄송하지만 법인 카드 영수증을 경리부에 제출해야 해서요.”

  “아, 법인 카드 내역이요. 그럼요 제가 해야죠. 저는 이제 이도저도 아닌 몸이니까···.”

  “그나저나 작가님. 이번 막내 좀 싸하지 않았어요?”

  “그랬나요?”

  “뭐랄까···. 도망치는 막내들은 다 특징이 있잖아요.”

  “어떤?”

  “일단 기본적으로 곧 죽을 것처럼 울상이고···. 별안간 안 쓰던 안경을 쓰고···. 정신과 약을 타 와서 약봉지를 티 나게 버린다거나···. 담배를 20분에 한 번꼴로 태우거나···.”

  “그런가요?”

  “네, 그래서 작가님은 그만두지 않을 거란 확신이 있었어요. 근데 막내 걔는 뭔가 처음부터 느낌이 싸했어요.”

  느낌이 싸했다라···. 왜 본인이 느낀 바는 꼭 상황이 일어나고 나서야 얘기해주는 걸까. 그럴 줄 알았다면, 그 낌새를 느꼈다면 미리 말 좀 해 주지···. 면접을 봤을 때부터 싸했으면 뽑지를 말지 왜 뽑아서 나를 고생시키는 걸까. 무한으로 반복되는 막내 돌려막기에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무한으로 도전해 주는 막내들이 있다는 것이지만 그마저도 이젠 끝물이다. 영상 플랫폼이 부각되는 요즘, TV 방송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막내들은 점차 사라져 가고 있다. 막내가 사라졌으니 누군가는 막내가 되어야 한다. 그게 흔한 중소기업의 이치다. 나는 숨겨 둔 법인 카드와 영수증을 확인하기 위해 책장을 뒤적거렸다. 하지만 분명 카드가 있어야 할 자리에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았다.

  “법인 카드가 없다고?”

  “영수증도 모아 뒀을 거라 생각했는데 감쪽같이 없어졌어요. 영수증 재발급받으려면 법카 카드 번호랑 CVC가 필요한데 어쩌죠?”

  “경리부에서 우릴 아주 등신으로 보겠네. 어쩌다 그런 년이 막내로 뽑혀서. 넌 그런 것도 확인 안 하고 뭐 했어?”

  “됐고, 영진이 네가 고생 좀 해야겠다. 일단 일은 벌어졌으니까 당장 잡아 와야지.”

  결국 내게 특명이 내려졌다. 법인 카드 내역 보고 전에 막내를 잡아서 법인 카드를 되찾아 오는 것. 나는 얼떨결에 술래가 됐다. 

  막내의 흔적을 찾기 위해 방송작가 단체 카톡방을 뒤졌다. 3,000명이 속한 방송작가 단체 카톡방은 우거진 숲과 같았다. 수많은 채용 공고와 연락처 수배 메시지 속에서 나는 부러진 나뭇가지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커피 심부름을 가는 길이나, 변기에 앉아 있는 동안 나는 스크롤을 올리며 이름을 대조했다. 인고의 시간 끝에 거대한 나무줄기처럼 솟아오른 장문의 카톡들을 헤집고 기어이 막내의 마지막 흔적을 찾아냈다. 

    

  안녕하세요 작가님들 :) 연락처 수배가 어려워 여쭙니다! <기인열전> 368회에 출연한 김창식 님 연락처 아시는 작가님 계신다면 공유 한번 부탁드리겠습니다!

    

  마지막 흔적치곤 너무 생뚱맞은데···. 방송작가들은 방송작가 단체 카톡방에서 출연자의 연락처를 공유한다. 3,000명이 있다지만 사실 카톡방에서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몇 안 되고, 그중 대다수가 막내들이다. 출연자의 연락처를 구해 오는 것은 막내의 업무니까. 하지만 문제는···. 우리 팀 그 누구도 산에서 수련 중인 김창식 씨의 연락처를 구해 오라고 시키지 않았다. 

  우리 팀 모두를 차단했는지 막내는 무수한 전화 세례에 응답하지 않았다. 이럴 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측근에게 연락하는 것이다. 나는 팀 문서가 정리되어 있는 파일철에서 막내의 이력서를 찾았다. 막내작가는 계약서를 쓰지 않기 때문에 사라진 막내의 정보를 알 수 있는 건 이력서뿐이다. 계약서가 없으니 막내작가들은 고용 불안에 쫓기지만, 이런 관례에 불만을 품는 사람은 딱히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덕분에 불합리할 정도로 높은 강도의 업무를 부여받을 경우 방송으로부터 도망치기도 쉽다. 방송아카데미까지 나온 사람이 대체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결국 그 나물에 그 밥이고 끼리끼리 만나는 게 방송인데. 막내는 도망자로 낙인 찍혔다. 

  막내를 찾는 일과 별개로 방송은 진행되어야 한다. 우리는 <다큐 3일>보단 라이트하고 <생생정보통>보단 헤비한 방송을 위해 주야장천 사무실에 박혀 있다. 내가 몸담고 있는 <행복을 찾아서>는 장수 프로그램으로 케이블방송국에서 런칭 한 지 20년 된 프로그램이다. 나는 그중 일부인 4년간 이 방송에 몸담고 있다. 

  나는 다음 촬영과 관련된 자료 조사 파일을 단체 카톡방에 업로드한 뒤, 차에 몸을 실었다. 조연출과 함께 다음 촬영지인 안양중앙시장에 로케를 다녀와야 했다. 물론 이것 또한 막내의 업무였다. 막내도 아니고 중간도 아닌 내 상황이 꼭 <행복을 찾아서>와 다를 바 없었다. 안양으로 내려가는 길, 조연출은 역시 그럴 줄 알았다며 대차게 막내를 씹어 댔다. 또한 막내가 법인 카드를 사적으로 사용했을 경우 법적 처벌 대상이 된단 얘기를 해 줬다. 

  “그러니까···. 사용처를 알고 싶어도 그걸 물었다간 카드사 측에서 카드의 소재지를 묻는다는 거죠?”

  “네, 맞아요.”

  “이거 아무래도 곤란하게 됐네요. 막내가 지금 쓰고 있어도 추적하기 어렵단 뜻이니까.”

  “지금으로선 카드를 소지만 하고 있길 바라는 게 최선이죠. 지난주에 막내작가가 카드 들고 나가는 걸 보긴 했는데···.”

  “그래요? 뭣 때문에요?”

  “그야 저도 모르죠. 빈손으로 돌아오는 것까진 봤어요.” 

  어느 순간부터 나는 조연출과의 대화가 취조로 변질됐음을 깨달았다. 최초 목격자를 붙들고 질문을 해대는 것처럼. 이 숨바꼭질을 끝내기 위해선 카드를 찾아야 하지만, 우선은 일이 먼저다. 나는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막내에 대한 언급을 자제했다. 

  우리는 안양중앙시장 깊숙한 곳에 있는 냉동 창고로 들어갔다. 얼음장 같은 창고에는 도축된 돼지들이 줄줄이 걸려 있었다. 피비린내조차 얼어붙은 창고에서 돼지들을 헤집고 선별 작업 중인 사장님과 조우했다. 

  “연락 줬던 아가씨는 안 오고 웬 남정네들이래?”

  “그분은 오늘 아파서 출근을 못 했어요.”

  조연출은 내 옆에서 카메라를 설치하고 천천히 냉동 창고 내부를 촬영했다. 방송이 시작될 때 인서트를 따기 위함이었다. 냉동 창고에서 사장님의 모습을 담으며 짧게 인터뷰하면 오늘 할 일은 끝이 난다. 내부는 어찌나 추운지 딱히 잘못도 하질 않았는데 얼어죽일 놈이 되어 버린 느낌이었다.

  “그래서 내일 촬영 내용이 뭐요?”

  “아이위시라고 요즘 뜨고 있는 아이돌 아세요? 거기 막내 멤버가 와서 사장님 정형하시는 걸 도와드릴 거예요. 지금보단 조금 더 밝은 표정으로 알려 주시면 돼요. 저희 방송 이름이 행복을 찾아서잖아요.”

  “별거 없고만.”

  “사장님은 별일 없으시죠?”

  “요즘 자식새끼 때문에 그렇지도 않아요. 뭘 그렇게 허튼짓을 해 싸는지. 행복이고 뭐고 나 먼저 속 터져 뒈져 버리겠어.”

  “그런 말씀만 내일 안 하시면 돼요. 최대한 행복하게. 편집은 저희가 해 드릴 테니까 걱정 마시고요.”

  냉동 창고 한가운데에 플라스틱 의자를 가져다 둔 조연출은 인터뷰 구도를 잡았다. 화면에 내걸린 돼지가 적어도 2개는 들어와야 한다며 최적의 구도를 잡기 위해 애썼다. 얼어 죽겠는데 구도는 대충 잡으면 안 될까 싶다가도 편집팀으로부터 들을 잔소리를 생각하니 그의 발악이 이해됐다. 드디어 준비가 된 조연출은 사장님을 의자에 앉혔다. 

  “사장님, 스마일. 갑자기 질문해도 당황하지 마시고요, 빨간불 들어오면 시작할게요.”

  투박한 스타일의 사장님은 웃음이란 걸 까먹은 사람처럼 무덤덤하게 앉아 있었다. 나는 그의 옷가지를 정리하는 척 다가간 뒤 그의 앞에서 해맑게 웃어 보였다. 

  “최근 들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있으실까요?”

  그건 방송 특성상 모든 출연자에게 물어보는 공통 질문이었다. 나는 인터뷰지를 정리할 때마다 그 질문을 맞닥뜨리곤 하는데, 정작 내게 물어본 적은 없었다. 마치 병원에 갔을 때 의사가 물어볼 것 같은 질문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마를 짚고 고민하는 사장님에게 나지막이 스마일, 이라고 말했다. 

  “아무래도 좋은 질의 고기가 들어올 때···. 그럴 때 행복하죠. 자주 오는 손님들은 금방 알아차리고 사 가거든요. 고생하는 걸 알아주면 좋죠.”

  “장사가 잘 되시니까 가족분들도 행복하시겠어요.”

  “와이프랑은 이혼했고, 자식들은 지네 엄마랑 살아요. 다들 돈 달라고 하기 바쁘지. 그래도 가족한테 연락 오면···. 돈 보내 주고 그러지. 정 없는 아빠는 아니에요 내가.”

  출연자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말하지 않는다. 이를 정리하는 건 작가의 몫이다. 나는 머릿속으로 사장님의 어순을 정리했다. 가족한테 연락 오면···. 그럴 때 행복하죠. 고생하는 걸 알아주면 좋죠. 나는 조연출에게 인터뷰 편집점을 공유한 뒤 업무를 마무리했다. 편집하지 않으면 세상은 너무 직설적이며 차갑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모든 것이 돈으로 귀결되곤 하니까. 시청자들은 시간을 들여 남의 불행을 엿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의 입맛에 맞게 편집하는 것도 중요하다. 우리는 행복을 찾는 것처럼 보여야 하는 방송이다. 

  막내는 물어뜯기 쉽게 편집됐다. 출근길이 복잡해서 커피를 주문받고 사 오는 게 힘들어요. 주말이라도 푹 쉴 수 있게 일을 안 시킬 순 없을까요? 막내는 평범한 직장인이라면 응당 누려야 할 권리를 주장했을 뿐이다. 그 두 문장은 커피를 안 시킬 순 없을까요? 로 합쳐졌다. 

  24시간 동안 뼈 빠지게 요약했더니 그걸 10초로 또 요약하더라고요. 

  막내는 밤을 새워 가며 조사한 자료를 선배들이 단 10초도 보지 않는 것이 불만이었다. 한 회차당 50p 가까이 되는 자료를 팀원들 머릿수만큼 출력하여 각자 자리에 오와 열을 맞춰 정리하는 것도, 클립의 방향이 틀려 혼난 것도, 포스트잇을 여러 색깔로 준비하지 않아 욕을 먹은 것도 납득하지 못했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 막내는 그 말을 참 많이 했다. 막내가 나를 붙잡고 1시간 동안 하소연했을 땐, 자신이 생각해 낸 아이템을 눈앞에서 뺏겼던 날이었다. 선배 작가는 구성회의 때 기가 막힌 아이디어가 생각났다며 왕작가에게 아이템을 전달했고, 왕작가는 그것 참 기똥차다며 선배 작가를 칭찬했다. 그런 건 종종 있는 일인데 얘기해 줬어야 됐나···. 막내는 옥상에 올라 꺼이꺼이 울었고, 나는 다른 회사들도 비슷할 거다, 라고 말하려다가 다른 방송들도 비슷할 거라며 다독여줬다. 

  그래요, 이게 다 무슨 소용이겠어요.

  선배들은 잘해 줘봐야 소용없다면서 쉴 새 없이 막내를 씹어 댔다. 세상에 이런 막내가 어디 있어? 우리 막내 때는 더 심했어. 근데 얘는 틈만 나면 힘들다고 찡찡거렸잖아. 요즘 세상 좋아진 줄 모르고 어딜 건방지게. 막내가 건방졌나. 듣다 보니 어쩌면 그랬던 것 같기도 했다. 

  사무실로 돌아온 나는 멈추지 않는 욕설을 듣기가 버거워 담배를 문 채 흡연장으로 향했다. 그때, 흡연장 깊숙한 곳으로부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혼자 생각할 시간 버는 걸 좋아하는 나로선 이 정도의 소리조차도 공해였다. 다시 돌아가서 조금 있다 내려올까 싶던 찰나, 익숙한 목소리가 내 귀에 꽂혔다. 

  “작가들한테 어떻게 말해.”

  언젠 말 가려서 했다고. <행복을 찾아서> 메인PD는 자기 말을 거침없이 하는 사람이었다. 연출팀은 직급에 관계없이 작가 팀을 존댓말로 존중하는 게 관례지만, 메인PD는 그런 거 없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말할지 고민하는 모습이 내 흥미를 끌었고, 난 멀찍이 떨어져 조용히 불을 붙였다. 

  “이야. 이 방송도 없어지긴 하는구나. 요즘엔 장수 프로그램이라고 해도 얄짤없다니까? 돈 안 되면 바로 폐지야. 하긴 플랫폼이 워낙 많아졌으니···. 맨날 똑같은 방식이라 편집도 편했는데 이 짓도 이제 끝났네.”

  두 달 전에 원룸 재계약도 했는데···. 없어질 거면 진즉에 없어지던가. 새롭게 임명된 대표가 방송 프로그램을 대대적으로 개편하고자 했고, 지난번 녹화본 편집을 끝으로 <행복을 찾아서>는 종영을 맞이하게 됐다. 장수 프로그램치곤 다소 허무한 결말이었다. 담배를 피우고 올라온 메인PD는 그답지 않게 정중한 태도로 이제 작가 팀 전원이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고 전달했다. 방송국 소속인 PD들은 새로운 방송을 기획하기 위해 남겠지만, 프리랜서 신분인 우린 사무실을 비워야 했다. 순식간에 실업자가 된 우린 벙찐 얼굴로 <행복을 찾아서> 3월 스케줄표를 바라봤다. 그래서 우린 20년 동안 행복을 찾긴 했나?

  왕작가님은 20년간 이어져 온 <행복을 찾아서>가 없어지는 것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최근 두 달 동안 월급이 밀린 것도 넘어가 줬는데 이런 식의 통보는 용납할 수 없다며 당장 대표실로 올라가겠다는 걸 선배들이 말렸다. 언니, 그랬다가 소문나면 저희 일 끊길지도 몰라요. 그 말엔 선배는 짬밥이 있어서 다른 방송에서 모셔 가겠지만 우린 아니라고요, 가 기저에 깔려 있었다. 왕작가 님은 밀린 월급을 어떻게든 받아 내겠다며 우리를 안심시켰다. 

  “영진아 저거 다 떼야겠다. 컴퓨터에 자료는 꼼꼼히 다 지우고. 다음 팀이 우리 문서 틀 그대로 쓰는 꼴 난 못 본다.” 

  방송이 없어졌으니 우린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깔끔하게 정리해야 됐다. 막내의 컴퓨터를 초기화했을 때처럼 내 컴퓨터를 정리해 나갔다. 적은 확률이지만 대표의 결정이 번복될지도 모른다는 말에 자료들은 외장하드에 백업해 뒀다. 컴퓨터 다음은 사무실이다. 벽에 붙어 있는 섭외된 연예인 사진과 일반인 사진, 스케줄표를 찢었다. 노트북 앞에 잠자코 앉아있던 왕작가 님은 팀원들에게 당장 남아있는 비품을 챙기라고 시켰다. 

  “어차피 우린 여기 소속 아니니까 챙길 수 있는 건 다 챙겨. 상도덕 없는 놈들한텐 상도덕 없게 굴어야지.”

  그렇게 말한 왕작가 님은 아들 가져다준다며 사인펜 세트와 보드마카를 챙겼다. 촬영을 하루 앞둔 시점에서 방송이 엎어진 것에 화가 난 건 메인PD도 마찬가지였다. 막내 조연출은 구매한 소품들의 환불 정책을 알아보느라 바빴다. 사무실 정리는 어렴풋이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지만, 내겐 아직 정리해야 할 것들이 남아 있었다. 

  나는 서둘러 촬영 협조를 부탁했던 도축업 사장님께 전화를 했다. 방송이 한순간에 사라졌으니 섭외했던 모든 출연자에게 사정을 설명해야 됐다. 번잡한 시장에 주차 공간을 마련하고 촬영을 위해 돼지를 빼 뒀던 사장님은 내게 버럭 화를 냈다. 사장님은 대통령도 이렇게 통보하지 않을 거라며 내게 따졌다. 

  “그딴 식으로 방송하지 마세요. 질 좋은 고기 빼 뒀더니 뭐? 이거 A급이라 오늘 팔았으면 20분 안에 다 팔려요. 이거 보상해 줘야겠습니다. 안 그러면 고소할 거예요.”

  나는 거듭 죄송하다고 답하며 어떻게든 보상해 드리겠다는 말과 함께 사장님의 화를 잠재웠다. 문제는 아직 전화할 곳이 한군데 남아 있단 사실이다. 긴장감 탓에 발신음이 가는 동안 손톱 물어뜯는 걸 주체하지 못했다. 나는 아이위시 담당 매니저에게 전화해 사정을 설명했다. 

  “저희 신인이라 요즘 스케줄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요? 간신히 빼서 시간 내드린 건데 이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하죠. 저희 스케줄 한 번에 1,000을 벌어요. 200에 출연시켜 드린 것도 고마운 줄 아셔야지.”

  5인조 그룹이니까 산술적으로 200만 원이 맞는 건데 미친 새끼야,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꾹 눌러 참아 냈다. 방송 일을 하다 보면 언제 또 마주칠지 모르는 사람이었다. 최대한 감정을 절제해야 됐다. 매니저는 선입금 한 100만 원을 펑크 낸 대가로 가져가겠다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어버렸다. 5분간 죄송하다고 한 것이 무색할 만큼 매몰찬 태도였다. 나는 이 일을 상부에 어떻게 보고할지 머리를 굴렸다. 순간적으로 어지러워지며 머리가 핑 돌았다. 아, 내 행복은 어디 있나. 

  내 행복은 주로 탕비실에서 찾았다. 하지만 전화한답시고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내 행복이라 믿었던 것들이 각자 주인을 찾아 떠나 있었다. 나의 행복은 남의 행복이 될 수 없는데. 수납장들은 대부분 열려 있었으며, 이는 흡사 지각한 사람의 방 같기도 했다. 탕비실 바깥에서 선배들이 과자 봉지를 가방에 억지로 욱여넣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충 벗어던진 와이셔츠처럼 열려 있는 냉장고엔 유통기한 지난 우유와 물러 터진 귤뿐이었다. 설마 얼음까지 가져가려 했던 건 아니겠지. 제빙기가 있으면 좋겠다는 막내의 말에 얼음 얼리는 것도 월급에 포함되어 있단 농담을 한 건 나였다. 

  다행인 건지 까치발을 들어야 손이 닿을 서랍은 아직 굳게 닫혀 있었다. 애초에 입사하고 저 서랍을 써 본 적이 있던가. 용도 모를 서랍을 열자 동그란 테이프가 툭, 하고 떨어지며 추진력을 얻더니 굴러서 탕비실 문을 통과했다. 서랍을 뒤적거리자, 사라졌던 본드와 테이프 뭉텅이가 손에 잡혔다. 그때, 별안간 벽에 붙어 있던 벽걸이 휴지 디스펜서가 떨어졌다. 그리고 그 뒤편엔 본드를 덕지덕지 칠한 흔적과 접착력을 잃은 양면테이프가 어설프게 매달려 있었다. 디스펜서에 휴지를 채워 넣는 일도 막내의 잡무 중 하나였다. 나름대로 버티려고 했구나. 어쩌면 여길 집이라 생각했던 건 막내와 나뿐일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퇴근한 저녁, 나는 사무실에 남아 작가 팀의 마지막 흔적을 지웠다. 그간 쌓아 뒀던 모든 문서를 파쇄하는 일은 오래 걸렸다. 세월이 세월이다 보니 누렇게 변한 종이들도 가득이었다. 드디어 끝이 보일 때즈음, 아까 챙겨 뒀던 막내의 이력서를 쭉 훑어봤다. 나는 긴급 연락망 칸에 적혀 있는 어머님 연락처를 내 핸드폰에 옮겨 적었다. 막내 이력서를 파쇄기에 넣으며 적어 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어머님. 저는 행복을 찾아서 작가 팀의 문영진이라고 합니다. 예진 씨 선배 되는 사람이에요.”

  “누구요?”

  “한예진 씨 어머님 아니세요?”

  “누구 어머님?” 

  “네?”

  수화기 너머의 사람도, 나도 물음을 멈출 생각이 없었다. 별다른 대답을 듣지 못했음에도 나는 알 수 있었다. 인적 사항에 적힌 부모님의 전화번호는 거짓말이었으며, 상대방은 완전 생뚱맞은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하기야 막내 작가의 인적 사항을 검증해 볼 필욘 없으니까. 막내작가로 취업할 땐 계약서를 쓰지 않으니, 주민등록등본을 비롯한 개인정보도 요구하지 않는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수화기 너머 수신자를 조금 떠봤다. 

  “어머님. 예진 씨가 도망치는 걸 도와주시면 도리어 불리해져요. 앞으로 방송계 취업도 곤란해질 거고요.”

  “글쎄 전 모르는 일이라니까요. 내 첫째 딸이 7살인데 무슨.”

  상대방은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은 채 불쾌하다는 듯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 나는 막내의 이력서를 마지막으로 파쇄기의 전원을 껐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건 엊그제 막내가 수소문한 기인 김창식 씨에게 가 보는 일이었다. 나는 막내가 했던 대로 방송작가 단체 톡방에 김창식 씨의 연락처를 물었고, 머지않아 다른 방송작가가 개인톡으로 내게 번호를 전달해 줬다. 

  김창식씨가 무슨 일이라도 저질렀나요? 요즘 찾는 사람이 많아서요.

  아니요 그런 건 아닙니다. 연락처 공유 감사드려요 :)

  막내와의 숨바꼭질을 끝내고 싶은 마음뿐인 나는 곧장 김창식 씨에게 촬영 섭외차 방문이 가능한지 연락했고, 김창식 씨는 별다른 말 없이 본인의 주소를 공유해 줬다. 김창식 씨가 거주하고 있는 곳은 차로 1시간 30분 거리의 가평 외곽에 있는 산골이었다. 나는 김창식 씨와의 연락을 마친 뒤 마지막으로 내일 내가 해야 할 일을 정리했다. 마지막 방송 편집본 자막 검수, 법인 카드와 함께 사라진 막내 찾기. 아침 일찍 가평을 다녀오면 자막 검수를 할 때즈음 서울에 도착할 테니 시간이 얼추 맞을 것 같았다.

  평일 오전 10시라 내부순환로는 한적했고, 금세 구리 IC를 빠져나왔다. 가평으로 가는 동안 나는 태블릿에 김창식 씨가 출연한 <기인열전> 368화를 틀어 놓았다. 사업 실패 후 많은 것을 잃은 52세의 김창식 씨는 무술을 단련하기 위해 별안간 산으로 들어갔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아요. 중요한 건 ‘기’입니다. ‘기’를 통해서 화를 억제하면 세상이 다르게 보이기 마련이오. 요즘 사람들 화가 얼마나 많습니까? 한데 여기 와서 수련을 하면 그 화가 다 빠져나간다 이 말입니다. 제가 그렇게 갱생시킨 사람들이 한 트럭이오. 김창식 씨는 높아 보이는 나무 한가운데에 올라 위태로운 가지에 앉아 한동안 명상을 했다. 덩치가 있어 보였는데도 흔들림 없이 얇은 나뭇가지에서 오랜 시간 버텼다. 그야말로 기인이었다. 그 높은 곳에서 어떻게 내려올 것이냐는 PD의 걱정 어린 물음을 뒤로하고 김창식 씨가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날아가야지. 그는 현란한 점프와 함께 훌륭하게 착지했다. 실로 기이한 일이었다. 김창식 씨는 대뜸 공중 부양을 하겠다며 자신이 만든 삼지창 앞에 섰다. 그리곤 얇디얇은 삼지창에 배를 고정시켜서 1분간 공중에 떠 있었다. 거참 대단한 균형 감각이다, 감탄하던 순간 내비게이션이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알려 줬다. 

  가평 산골에 도착한 나는 어떻게든 차로 김창식 씨의 집까지 올라가려 했지만 잘못했다간 바퀴가 진흙에 빠질 것 같아 갓길에 차를 세워 뒀다. 비포장된 산길을 걸으며 내 선택이 옳았음을 다시 한번 느꼈다. 비포장도로 끝엔 어떻게 옮겼는지도 모를 컨테이너 하나가 덜렁 놓여 있었다. 흰색 도복을 입은 김창식 씨는 불이 피어오르는 드럼통 앞에서 가부좌 자세로 앉아 있었다. 나는 잠자코 그의 행위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담배를 3개쯤 연달아 피웠을 때, 김창식 씨가 나를 불렀다. 나는 최근 그에게 한 젊은이가 찾아오지 않았냐고 물었다. 

  “맞아요. 한 아가씨가 왔었죠.”

  “방송 섭외 때문에 왔던 건가요?”

  “제가 하는 수련을 배워 보고 싶다면서 이틀 정도 묵었다 갔습니다. 어제 여길 떠났죠.”

  너무나도 생뚱맞은 대답에 나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수련이요? 그분이 나무에 올랐다고요?”

  “나무를 왜 못 올라가요.” 

  김창식 씨는 고목으로 가득 차 있는 숲 한가운데로 나를 데려갔다. 그는 높아 보이는 나무에 사다리를 가져다 대곤 아무렇지 않게 오르더니 그리 높지 않은 나뭇가지에 걸터앉았다. 

  “여기서 산의 정기를 받는 거예요. 그러면 정신이 말끔해진다고. 그 아가씨처럼 환청이 들리는 사람들한테 효과가 좋아요. 나도 그런 이유로 여길 왔었거든. 내가 도시에 오래 살았단 말이오. 그러다 보면 오만 사람이 다 자기를 부르는 것 같단 말이지. 창식아, 창식아 하고. 지금은 도복을 입고 있지만 그땐 작업복 입고 경영을 했었지. IMF 터지기 전엔 기업 가치가 거의 100억이 넘어가는 나름 잘나가는 기업이었단 말이야.”

  지금 김창식 씨가 말하고 있는 본인의 약력은 <기인열전>에서도 읊었던 말이었다. 자칭 도사들은 본인의 과거 얘기를 반복하는 걸 좋아한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기 때문에 구태여 귀담아듣지 않고 그의 수련을 지켜봤다. 그는 산의 정기를 받기엔 그리 높지 않은 곳에서 멋없게 점프했고 난 <기인열전> 편집팀의 편집 실력에 탄복했다. 방송 일에 나름 몸담았던 나조차도 가끔 방송이 거짓부렁으로 점철됐다는 사실을 망각하곤 한다. 하기야 원숭이도 아니고 이런 고목을 오르는 게 말이 되겠냐만. 하지만 삼지창에 올라서 버티는 것만큼은 진짜였다. 그는 자신의 배를 보여 주며 세 군데의 굳은살을 짚어 줬다. 김창식 씨는 자신의 기를 느끼기 위해 찾아오는 수련생들이 많다며 본인의 수련 방식을 예찬했다. 거참 멋없는 기인이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순간적으로 막내의 얼굴이 스쳤다. 혹시 막내가 수강료를 결제했을까 하는 생각에 그에게 물었다. 

  “혹시···. 그 젊은 사람이 여기서 카드를 쓰진 않았나요?” 

  “이런 오지에 카드기가 있겠어요? 죄다 계좌 이체로 하지. 출연료 입금해야 될 테니까 받아 적어요. 농협···.”

  나는 그의 말을 끊고 솔직하게 지금의 상황을 전달했다. 방송에서 보여 줬던 모습을 미뤄 보면 김창식 씨는 불의를 못 참는 성격의 사나이였다. 내 사정을 얘기했을 때, 막내의 행방을 알고 있다면 솔직하게 말해 줄 것 같았다. 

  “수강하는 걸 좀 고민하더라고. 내가 기를 쓰는 무술을 가르치다 보니 가격이 조금 비싸. 그래서 인근 절에 잠시 지내다가 마음 정리하고 오라 그랬지. 그것도 어찌 보면 훈련의 일종이야. 기를 누르다 오는 거니까.” 

  나는 차로 돌아와서 내비게이션에 봉암사를 입력했다. 인근에 있는 조그만 절이었다. 만약 절에서 막내와 마주한다면 카드를 돌려받은 뒤 마음의 짐을 덜어 줄 생각이다. 방송사 사장이 우리 프로그램을 접으라 했고, 이제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으니 도망친 것에 죄책감을 느끼지 말라고. 

  봉암사는 작은 크기에 비해 나름 체계가 있는 절이었다. 김창식 씨가 풍기는 기운과는 멀어 보이는, 국가에서 정식으로 인정된 절이었다. 나는 출입관리원으로부터 출입증을 전달받은 뒤 봉암사에 발을 들였다. 인기척을 느낀 건지, 마당에 풀어져 있던 조그만 삽살개가 꼬리를 흔들며 내게 다가왔다. 

  “무상입니다.” 

  “네?”

  “강아지 이름이요.”

  나이가 지긋한 스님이 다가와 나로부터 강아지를 떼어 냈다. 무상이라, 인생무상(人生無常)이다 이건가. 절에서 키우는 강아지다운 이름이었다.

  “데려오는 데 돈이 안 들어서 무상이라고 부릅니다. 저희 절엔 어떤 일로 오셨을까요?”

  “아, 실례지만 혹시 젊은 여성분이 여기 묵고 있나요?”

  “어떻게 오셨는지를 먼저 말씀해 주셔야죠.” 

  스님은 경계하는 듯, 한발 물러서더니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했고, 법인 카드만 돌려받고 돌아가겠다는 약속을 했다. 스님은 대웅전으로 나를 안내했고, 그곳에서 절을 반복하고 있는 막내의 뒤꿈치를 마주할 수 있었다. 막내의 도복은 거듭되는 절로 땀범벅이었다. 나는 그 행위가 끝날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막내는 대웅전을 나오면서 나 대신 불상을 향해 가볍게 목례를 했다. 

  “미쳐 버릴 것 같아서 그냥 나왔어요.”

  어느 정도 예상했던 말이었다. 지난 3개월간 시도 때도 없이 투정했던 사람이니 그리 놀랍지도 않았다.

  “솔직히 선배는 막내가 필요한 거잖아요. 제가 없으면 잡무를 본인이 하니까. 노예를 찾는 거라면 잘못 찾아오셨어요. 선배, 제발 다른 일 찾으세요. 그 돈 받고 그 고생하고 싶으세요? 갈려 나가는 사람을 그렇게 보고도 아직 모르나···.”

  “그렇다고 다 던져 버리고 가면 어떡해. 사회에는 정해진 룰이라는 게 있잖아. 네가 무책임하게 행동하면 취업에 제약이 생길 수도 있다고.”

  “계약서도 안 쓰는 회사에서 무슨 규칙이요. 요즘 세상에 주말 내내 인생 갈아 넣어야 하는 회사가 어디 있어요. 그딴 사람들한테는 배울 것도 없어요. 그리고 방송은 이제 쥐뿔도 관심 없어요.”

  “이미 한 짓이 있어서 블랙리스트에 오를 수도 있는데, 그건 최대한 막아 볼게. 그러려면 일단 법인 카드를 돌려줘야 해.”

  “선배, 얼마 전에 아카데미 동기가 초대한 익명 단톡에서 리스트를 공유 받았거든요? 거기에 선배 이름이 있더라고요. 저한테는 너무 좋은 선배였는데, 그걸 적은 사람한테는 그렇지 않았나 봐요. 제가 습득을 못해서 그렇지 전 선배한테 배운 게 많거든요. 솔직히 오지랖 부려서 반박할까 싶기도 했는데, 그러진 못했어요. 그나저나 법인 카드는 무슨 말이에요. 제가 법인 카드 훔칠 정도로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처럼 보이세요? 막내면 변기 내리는 법도 모를 것 같고 그래요?”

  낙인은 막내들에게만 찍히는 건 아니니까. 막내 블랙리스트만 있으란 법은 어디에도 없다. 지난 4년간 내 옆에서 도망친 막내들을 머릿속으로 나열해 봤다. 그건 범인을 색출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쫓는 건 법인 카드의 행방만으로도 충분했다. 누군가에겐 최고의 선배가 누군가에겐 최악의 선배로 남을 수 있다. 내가 손쉽게 버텨 왔던 일이 누군가에겐 본드를 덕지덕지 발라야 하고, 테이프가 필요한 일이 될 수 있단 걸 망각했다. 어쩌면 난 지금껏 버티려는 막내들에게만 살가웠을지도 모르겠다. 

  “혹시 어머님은 네가 여기 와 있는 거 알고 계셔?”

  “당연히 모르죠. 방송작가 하겠다고 그렇게 떵떵거렸는데 일 그만뒀다고 어떻게 말해요.”

  “방송 없어졌으니까 집으로 맘 편히 돌아가. 네 탓 아니야.”

  술래잡기는 맥없이 끝났다. 힘들게 동네를 뒤져서 찾았는데 방에 앉아 티비를 보고 있는 친구를 마주했을 때처럼, 허무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 잠시 한눈판 사이에 신사역 방면으로 빠지는 길목에서 줄을 잘못 서고 말았다. 서행을 하다가 무리해서 끼어들었지만, 하필이면 애매한 위치에 멈춰 서고 말았다. 5차선과 6차선을 둘 다 걸치고 있는 자세. 주위에선 경적을 쉴 새 없이 울려 댔다. 올림픽대로에서 울리는 모든 경적 소리가 나를 향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돌아갔어야 했나. 하지만 난 행복을 찾으러 가야 했다. 

  자막 검수를 위해 사무실에 마지막으로 출근했다. 조연출은 아직 오질 않았는지 편집실은 잠겨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작가 팀 책장을 다시 살펴봤다. 발이라도 달린 건지··· 카드가 원래 있어야 할 곳에 꽂혀 있었다. 수백 번 뒤져 봤던 곳이기에 분명 내 실수는 아니다. 누군가가 가져다 놓은 것이 확실했다. 나는 범인을 찾기 위해, 더불어 영수증을 재발급 받기 위해 카드사에 전화하여 내역서를 뗐다. 머지않아 팀 메일로 내역서가 전송됐고, 나는 떨리는 마음과 함께 최근 내역을 살펴봤다. 다*소 가산점 8,900. 회사는 마포에 있고 나와 막내는 최근에 다이소에 들른 적이 없다. 가산에 사는 사람은··· 왕작가 님이다. 왕작가 님에겐 10살짜리 아들이 있고 지금은 3월, 학용품을 사기에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카드가 없어진 이틀간 사용된 건 단 8,900원. 비리라고 하기엔 뭔가 애매한 금액이었다. <다큐 3일>보단 라이트하고 <생생정보통>보단 헤비한 <행복을 찾아서>와 다를 것 없는.

  방송이 없어진다고 해서 곧장 방송이 종영되는 건 아니었다. 막내 조연출은 다른 팀원들이 강제로 휴가를 가게 됐음에도 본인만큼은 출근해야 하는 현실에 불만이 가득해 보였다. 그래도 이성이 남아있는지 동병상련인 내겐 그다지 투정부리진 않았다. 그는 고생이 많다며 내게 아메리카노를 건넸다. 우리는 모니터에 편집본을 틀어 놓고 이를 꼼꼼히 모니터링했다. 뭐가 맞고 뭐가 틀린지를. 20년 역사의 마지막을 장식할 <행복을 찾아서> 제주 해녀편. 한 해녀가 치매를 앓고 있는 남편에게 무어라 중얼거린다. 나 어시민 못살메, 이추룩 조꼬띠 이서도 못 사는디. 막내가 이딴 작업을 해야 하냐며 투덜거렸던 대목이다. 나 없으면 못 살지, 이렇게 곁에 있어도 못 사는데. 해녀는 남편에게 그리 말했다. 투덜거리면서도 자막은 넣어 놨구나. 행복은 어디 있을까. 편집본이 끝났을 때 나는 조연출에게 물었다. 우리는 아무런 대화를 하지 않은 채 멈춰 있는 모니터 속 <행복을 찾아서> 로고를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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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1-01
오경보

오경보 김슬기 청포수영센터 아쿠아로빅 새벽반 6월 마지막 수업 일이었다. 회원들은 수업 20분 전부터 이미 샤워하고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수영장에서 몸을 풀고 기다리는데, 담당 강사는 수업 시작 시간이 지났는데도 도착하지 않았다. 경보는 강사의 휴대전화 번호를 입력했다. 길게 통화 대기음이 이어지다가, 이내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자동 응답 메시지가 흘러나왔다. 경보는 쉬지 않고 강사의 휴대전화 번호를 입력하고 또다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전화는 끝내 연결되지 않았다. “경보 씨는 쓸데없이 이런 데 집착하는 경향이 있어.” 사무용 의자에 앉아 긴 하품을 하던 미경이 핀잔을 주었다. 미경이 보기에 강사의 펑크는 예견된 일이라는 것이었다. 자신은 벌써 알아차렸다고 덧붙였다. 미경은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어떻게 미리 아는 것일까. 경보도 나름의 예견을 해 보기 위해 애썼다. 그러다 매일 아침 강사에게서 희미하게 번져 나오던 술 냄새를 떠올렸다. 술을 좋아하면 그럴까요. 경보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미경이 눈을 흘기며 대답했다. 술이 문제가 아니죠. 경보 씨도 퇴근하고 술을 마시는데 지각은 안 하잖아요. 경보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경이 말에 리듬을 붙여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말했다. 그렇게 생긴 사람들은 뺀질뺀질할 수밖에 없어요. 센터에서 일하는 6년 동안 단 한 번도 결근이나 지각 따위 하지 않은 경보는 죽어도 이해하지 못할 그런 노랫말. 경보는 알아들은 척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센터의 오랜 회원인 김금자가 맨발로 경보와 미경이 앉아 있는 안내 데스크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맨발이 바닥에 닿을 때 찹찹찹, 재촉하는 듯한 소리가 났다. 두꺼운 투명 가림막 앞에 선 김금자의 눈이 수영모 때문에 한껏 치켜 올라가 있었다. 그녀가 진짜로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경보는 알아차리기 힘들어, 입을 꾹 다물고 눈을 내리까는 편을 택했다. “회원님. 아무리 급해도 슬리퍼는 신고 나와야지. 바닥에 뭐라도 있어서 발 다치시면 어쩌시려고 그래요. 나 그러면 마음 아파.” 미경은 센터의 주 고객인 중년 여성들을 잘 다루는 방법을 알았다. 유리할 때는 반말을, 불리할 때는 깍듯한 존댓말을 썼다. 유불리가 애매할 때는 그것들을 적절히 섞을 줄도 알았다. 김금자는 나긋한 말투로 강사의 행방을 물었다. 미경은 또 한 번 강사의 행방과는 전혀 상관없을 김금자의 발 상태를 걱정하는 말을 하고선,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슬픈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강사님이 요 앞 사거리에서 가벼운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미경의 뻔뻔한 거짓말에, 경보도 깜빡 속아 넘어갈 뻔했다. 김금자는 눈앞에서 교통사고를 직접 목격한 사람처럼 안타까워하며 혀를 끌끌 찼다. “그럼, 우리 미경 씨가 오늘 아쿠아로빅 수업 좀 해 주면 되겠네. 키도 크고, 늘씬하고··· 미경 씨가 딱 맞구먼.” “잘생긴 남자 강사님들만 보시다가, 제가 가서 이리 흔들고 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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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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