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이스 섹스올로지
- 작성일 2025-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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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이스 섹스올로지
김인숙
그즈음 유자는 자주 암벽 공원을 찾았다. 동네에 그런 곳이 있었다. 넓은 공원 한 곳에 높은 암벽을 세우고, 예쁜 색깔의 조약돌 같은 돌들을 색색이 박아 놓았다. 사람들이 그 돌을 손으로 잡고 발로 짚으며 올라가는 것을 보지는 못했다. 몇 달 가까이 그 동네에 살고 있었고, 그즈음에는 거의 매일 공원을 산책했음에도 암벽은 늘 아무 방해 없이, 아무 매달리는 것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그곳에 멈춰 서서 고개를 쳐들어 꼭대기를 바라보는 사람도 대체로는 그녀뿐이었다. 경고판이 붙어 있었다. 안전 요원 없이 등반을 금지한다는. 아마도 특정한 날에만 운영을 하는 시설인 것 같았다. 그녀가 그곳을 산책하는 시간은 그 특정한 때의 밖이거나. 아니면 그녀의 시간이 특정했을지도.
그녀는 ‘특정’이라는 말을 생각했다. 그즈음에는 말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험한 말을 많이 듣게 된 탓일 수도 있었고, 그 말들을 그릇 씻듯이 좀 씻어 버리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른다.
암벽 접근을 막는 펜스 바깥에는 벤치가 있었다. 잔디밭 바깥에 있는 벤치가 아니라 넓은 잔디밭 한가운데. 평생 ‘밟지 마세요’라는 표지판만 보고 살아온 유자는 걱정 없이 잔디를 밟고 들어가 앉을 수 있는 그 벤치가 좋았다. 그게 실은 들어가 앉으라는 것이 아니라 조경용이라는 걸 몰랐을 때까지는 그랬다. 그 후에도 가끔씩 잔디밭 안으로 들어갔지만 전처럼 생각 없이 그곳에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암벽 앞에도 벤치가 있었다. 그녀는 이제 암벽을 등지고 앉아 잔디밭 한가운데의 벤치를 바라보았다. 잔디를 밟을 때의 폭신하고, 미끌하고, 심지어는 바삭하기까지 한 감촉이 그리움처럼 남았는데, 그게 아무것도 몰랐을 때의 기억인지 금지된 것을 안 후의 느낌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도 후자일 것이다. 때때로 발밑이 아찔한 것을 보면.
가끔씩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이 암벽 앞을 지나갔다. 개도 사람도 그녀를 바라보지 않았다. 암벽도 바라보지 않았다. 그녀가 그곳에 앉아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암벽 사진을 찍으려는 듯 핸드폰을 들어 올렸던 사람도 그녀를 발견하고는 다시 손을 내렸다. 그녀가 앉아 있는 벤치는 지나치게 좋은 자리, 혹은 지나치게 나쁜 자리에 있는 것 같았다. 혹은 그녀가 그런 사람이거나.
그렇다고 해서 일어설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시는 그 어떤 곳에서도 일어서고 싶지 않다는 생각은 딱 그곳에 앉았을 때만 들었다. 그러니까 그렇게 소박하고 희미한 저항. 낯간지럽고 귀여운 의지‧‧‧. 그렇다. 그녀는 아직도 자신을 귀엽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있었다. 얼마나 징그러운 사람이면, 아직도.
유자는 그 벤치에 앉아 말에 대해 생각했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하는 말을 생각하다 보면 타는 말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됐다. 장기 말도 생각하게 됐다. 그녀는 말을 타 본 적이 없었다. 달리는 말을 본 적은 있었다. 제주 어디 해안에서였는데, 곧 폭풍이라도 몰아칠 듯 어둑한 해변을 말 한 마리가 달려왔다. 유자는 그 말의 억세고 매끄러운 근육, 거센 바닷바람에 부서지듯 흩날리는 갈퀴에 홀렸다. 그곳이 승마 코스라는 건 해변에서 돌아 나올 때 알게 되었다.
공원 벤치에서 암벽을 등지고 생각할 때는 다른 말이 떠올랐다. 그곳도 해변이었는데, 관광객들을 태워 주는 말이 있었다. 그 말은 땡볕 아래에서 졸고 있었다. 선 채로 해변 난간에 턱만 고인 채. 등에 얹힌 안장이 꽉꽉 눌러 채운 소금 포대처럼 보였다. 어렸을 때 읽었던 이솝우화 속 당나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당나귀가 등에 졌던 무거운 소금 포대. 그다음엔 뭐였더라. 솜이었던가. 무겁다가 가벼워지는 것, 가볍다가 무거워지는 것.
말은 서서 잘 때도 다리가 꺾이지 않는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었다. 아니다. 글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는 책을 읽지 않았다. 그럴 시간이 없었다. 그러니 아마 가게에 켜져 있던 티브이에서 들었던 것일 테다. 말은 위험이 나타나면 곧바로 달릴 수 있도록 다리 근육을 잠가 놓는다고 했다. 그래서 잠깐 졸 때도 잠을 자는 것은 엉덩이 큰 근육뿐이라는 것이다. 그 말이 기억에 남았던 건 그때 유자에게도 그런 게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잠깐은 엉덩이만 자고, 잠깐은 다리만 자고, 또 잠깐은 눈이나 코, 입 같은 걸 번갈아 가며 잘 수 있다면. 손님에게 국수를 내놓으며 맛있게 드세요 라고 말하며 활짝 웃을 때에도 실은 자신의 등이나 어깨 어느 한 근육, 혹은 엄지발가락과 검지 발가락은 침을 흘리며 자고 있다면.
물론 다 깨어 있는 것이 더 낫다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국숫집 육수와 면발에 자부심을 가졌다. 지단은 그야말로 예술적으로 부쳤다. 모든 근육이 다 깨어 있어서 할 수 있었던 일이었다. 그러나 나쁜 일이 생긴 후로는 많은 게 달라졌다. 무엇보다도 생각이 달라졌다. 이제 그녀는 자신에게 필요한 근육은 아무 때나 깨어날 수 있도록 언제나 잠가 놓는 근육이 아니라 그냥 언제나 풀어놓을 수 있는 근육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똥을 누는 말을 본 적도 있었다. 딸과 함께 갔던 동물원에서였다. 똥을 누는 엉덩이를 보면서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은 꽤 이상한 일일 수도 있겠으나, 그 말은 그랬다. 얼마나 태연한 엉덩이인지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든, 무엇을 쏟아 내든 그건 그냥 생생하기 짝이 없는 삶의 덩어리일 것 같았다. 해변에서 졸고 있던 말은 그러지 못했다. 자고 있던 엉덩이 근육이 씰룩씰룩하더니 눈을 떴는데, 뭔가를 어리둥절해하는 것 같았다. 깨어나긴 했으나 엉덩이가 소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라서. 자신의 엉덩이가 어이없기 짝이 없어서.
유자는 딸 은율의 책상에서 발견했던 말도 생각했다. 이번에는 타는 말이 아니라 하는 말. 듣는 말. 쓰는 말. 이런저런 말. 사람들이 하는 말. 똥 누는 말에 대해 생각을 했던 것도 결국은 그 말을 생각하기 위해서였던 셈이다.
‘잘라 버릴까.’
그즈음 은율이 기획하고 있는 전시회의 포스터에서였다. 아직 시안인 포스터의 제목은 ‘가제’라고 되어 있었다. 정작 가제가 무엇인지는 쓰여 있지 않았다. 그러니 가제야말로 혹시 진짜 제목일지도 몰랐다.
유자는 은율의 전시회에 가 본 적이 있었다. 무제라는 제목이 제일 많이 눈에 띄었던 전시회였다. 이상한 제목들도 많았다. 국어 교사를 걱정시킬 만한 제목들. 그래도 유자는 진지하게 작품들을 둘러보았다. 전시를 보러 간 게 아니라 딸을 보러 갔다는 걸 들킬까 봐 그랬다. 그곳에서, 예술을 한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렇게 멋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내딸은율이 얼마나 빛나는지 홀린 듯 쳐다보는 걸 들킬까 봐.
‘잘라 버릴까’라는 말은 포스터의 공백에 둥둥 뜬 것처럼 쓰여 있었다. 은율이 펜으로 직접 쓴 것이었다. 형광펜으로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고, 또 이런 글이 덧붙여져 있었다.
싹둑!
예전이라면 유자는 은율에게 왜 그런 말을 써 놓았냐고 물어볼 수 있었을 것이다. 내딸은율이 얼마나 빛나는지 보려고 그 이해할 수 없는 그림들을 보러 가기도 했던 그런 때라면. 그랬던 시간들이 있었다. ‘너 하는 일이 뭐야?’ 물으면 은율은 웃으며 ‘나, 노가다야, 엄마. 나 막노동해’ 라고 말했었다. 그때 은율은 그런 말조차 솜사탕처럼 했다. 그 아픈 말이 끈적하게 남아 유자의 마음 역시 아프게 했지만, 그래도 그건 설탕에서 남은 끈적함이었다. 그즈음에는 달랐다. 같은 말을 해도 사탕의 맛 같은 건 없었다. 대개는 집어던지듯 말했고, 악을 쓰며 말할 때도 많았다. 아예 말조차 하지 않을 때가 더 많았다.
다음 날, 은율의 책상 위는 비어 있었다. 포스터는 보이지 않았고 깔끔히 정리된 자리만 남아 있었다. 은율은 정리정돈에 강박이 있었다. 그래서 사라진 자리까지 보였다. 모든 게 지나치게 반듯하면 사라진 자리까지 남게 되는구나, 유자는 그런 생각을 했다. 심지어는 사라진 자리까지 반듯하구나. 유자는 그 빈 자리에 슬몃 자신의 손자국을 남겼다. 잠시 후 얼른 지웠으나 손자국이 사라진 자리 역시 남았다. 마치 길 위에 남은 손자국 같았다.
유자는 딸 은율을 구급차 안에서 낳았다. 성미도 급하지. 아니면 참을성이 부족했거나. 당연히 은율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 하는 생각이었다.
산부인과에는 태어났다기보다는 아직도 태어나는 중인 것 같은 아이와 함께 도착했다. 임신 진단을 받을 때부터 담당의였던 의사가 이제 태명을 벗게 된 아이의 이름에 대해 물었다. 무슨 뜻인지를 물어 놓고는 자신이 먼저 말했다. 은혜와 율법 안에서 크라고 지어 준 이름이냐고.
교회를 다니는 의사였다. 진료실 문을 열면 나무 십자가가 제일 먼저 보였다. 출산까지 한 번도 문제가 있었던 적이 없었다. 가벼운 빈혈, 가끔씩 다리에 쥐가 나고 소염증 때문에 고생을 했던 정도. 그래서 진료를 기다리는 시간도 대체로는 편안했다. 산부인과 대기실의 창밖으로는 오피스텔 건물이 정면으로 바라보였다. 은율이가 배 속에서 커 가는 동안 겨울이 다가오고 깊어졌다. 저녁도 점점 더 빨리 왔다. 어느날, 늦은 시간의 진료를 기다릴 때, 그 오피스텔의 창에 불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어둠은 빨리 내려앉고 불은 점등 행사라도 하듯이 여기저기, 불규칙하게, 그러나 마치 시간의 간격을 맞춘 것처럼 하나둘씩 그러다가 일제히 켜졌다. 고작 그런 불빛이 은혜롭고 성스럽게 보였다. 아이를 배 속에 품고 있다는 건 그런 일이었다. 난데없는 공포와 견딜 수 없는 서러움, 그런가 하면 또 난데없이 들려 올라가는 듯한 성스러움.
딸의 이름은 종교적인 의미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소리가 이뻐 먼저 지어 놓은 후 한자로 좋은 뜻을 찾아 붙였던 것이다. 숨길 은(隱)에 법칙 율(律). 덕과 재능으로 많은 사람을 품어 안으라는 뜻이라고 했다. 어느 모로 보나 안기라는 뜻보다는 품어 안는 쪽이 나을 것 같았다. 그때는 그랬다. 크게 될 사람이라는 뜻으로 읽히기도 해서 그게 더 좋았다. 의사의 해석을 들은 후에야 그 이름이 종교적으로 들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작 의사는 아이를 은율이라고도 부르지 않고, 그때까지 부르던 태명 ‘보들이’라고도 부르지 않고, ‘길이’라고 불렀다. ‘이놈, 길이!’ 이런 식으로.
병원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양수가 터졌다. 발밑으로 내려놓고 있던 출산 가방이 젖는 것을 보면서도 그것이 자신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물인 줄 몰랐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몸에서 그런 물이 흘러나올 수도 있다는 걸 몰랐다고 하는 것이 옳을 테다. 그래서 ‘기사님‧‧‧. 기사님‧‧‧.’ 속삭이듯이 기사를 불렀다. 운전기사는 그녀보다 더 놀랐다. 그냥 더 놀란 정도가 아니라 기겁을 했을 정도로. 속도를 높여 병원까지 달려가는 대신 허겁지겁 차를 세우고 119에 전화를 걸었다.
무슨 그런 일이 있는지. 아이를 그런 곳에서 낳아 버리다니.
아이가 아직 어렸을 때, 유자는 은율의 복숭아 같은 뺨을 두 손으로 잡고, 그 말랑한 뺨을 감싸쥐고는 눈을 맞춰 말하곤 했었다,
내가 널 어떻게 낳았는데‧‧‧.
은율의 기억은 달랐다. 훗날, 엄마에게 뺨 같은 것은 내주지 않는 나이가 된 은율은, 사랑으로도 미움으로도 뺨 같은 것은 빌려주지 않게 된 은율은 악을 쓰며 말했다.
그게 자랑할 만한 얘기야? 왜 그따위 걸로 나를 압박했던 거야? 왜 그랬던 거야, 도대체!
그러니까 ‘내딸은율이’가 기억하는 유자의 말은 ‘내가 널 어떻게 낳았는데‧‧‧’ 가 아니라 ‘내가 널 어떻게 낳았는데!’였다는 것이다. 몸속의 가스가 터지듯이 와락, 펑! 서서히 차오르던 가스가 한 입자의 빈틈도 없이 팽팽히 차오르다가 양수가 터지듯, 펑.
그리고 또 이런 말도 했다고 했다.
내가 널 길 한복판에서 낳았어, 징그럽게.
그렇게 말할 때는 펑 하고 터지는 대신 피시식 새어 나왔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그런 걸 혐오라고 말했다. 혐오란 그런 것이라고, 터지는 게 아니라 새어 나오는 것이라고. 엄마가 내게 그랬다고.
은율의 기억은 틀렸다. 그럴 리가 없었다. 자신이 그런 말을 했을 리 없고, 설령 했다고 한들 그런 식으로 했을 리도 없었다.
내 몸으로 내 새끼를 낳는 일이 어떻게 징그러운 일일 수가 있겠는가. 게다가 그게 왜 길 한복판인가. 구급차 안과 길 한복판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렇게 따지면 병원도 길 한복판이 아닌가. 지구라는 구체 위에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다. 설령 그곳이 바다 한가운데거나 깊은 산 속이더라도 당신이 흔적을 남기는 순간, 그곳은 당신의 길 한복판이 아닌가.
구급대원들은 아이를 보러 왔다. 병원까지 찾아와서 신생아실에 있는 아기를 창밖에서 보다가 남자인 구급대원 둘이 서로를 연인처럼 바라보며 기쁘게 웃더라고 했다. 그리고 간호사에게 아기 선물을 맡겨 두고 갔다. 양말과 턱받이, 그리고 아이가 1년쯤은 커야 신을 수 있을 것 같은 신발이었다. 신발도 작고 양말도 작았다. 턱받이와 양말은 무늬가 없는 흰색이었지만 신발에는 꽃무늬가 있었다. 이제 세상을 걷게 될 ‘길이’의 신발. ‘길이’가 평생 꽃길만 걷기를 바랐던 구급대원들의 꽃 같은 마음.
신발은 너무 작아서 유자의 손바닥 바깥으로 벗어나지도 않았다. 아기의 작은 신발 바닥과 그녀의 손바닥이 만나 바삭하고 따듯한 온기를 일으켰다. 그때 울컥하던 마음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울컥했는데, 창피함을 견딜 수 없던 기억도. 구급차 안에서 어린 구급대원들이 지르던 소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어, 나온다 나와‧‧‧ 어어어어.
어어, 어어어어어‧‧‧.
그녀의 내딸은율이는 그렇게 세상에 도착했다. 아니 길 위에 도착했다고 해야 하려나. 그녀가 아무리 기를 쓰고 부정해도 결국 길 위였으려나.
가끔은 은율이 아니라 자신의 기억이 틀렸을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생각 없이 내뱉은 말 중에 그런 말이 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전남편과 헤어지던 무렵에는 그러고도 남았을 것이다. 남에게는 흔하고 구차하고 진부하고, 그래서 지루하기 짝이 없게 들릴 사연으로 이혼에까지 이르렀으나 그런 사연일수록 본인들에게는 환장하고 죽을 맛이고, 슬프고 괴로운 일이라 신파와 신랄함 사이를 하루에도 열두 번씩 종횡무진하던 시기였다. 그 신파 속에는 은율이를 서로 차지하겠다고 팔다리를 양쪽에서 붙잡고, 아이야 찢어지든 말든 죽을힘을 다했던 싸움도 있었다.
그때 유자는 아마 말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내가 널 길 한복판에서 낳았어. 그런데 내가 널 어떻게 놔.
그리고 어쩌면 은율이는 그때 생각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엄마 아빠는 자기를 가지려고 딸의 팔다리가 찢어지거나 말거나 죽어라고 붙잡고 있는 게 아니라고. 실은 먼저 놓을 수 있는 순간을 노리고 있는 거라고. 누군가 먼저 손을 놓으면 동시에 나자빠지겠지. 그리고 아마 곰곰 생각했을 것이다. 누군가 먼저 손을 놓아 버려 동시에 자빠진다면 쓰러지는 건 둘일까, 셋일까. 혹은 하나일까.
그 후 20년 넘는 세월이 흘렀다. 모든 게 달라졌다. 심지어는 기억조차도. 더 심지어는 기억 속의 사실조차도.
한동안 은율의 노트북에 문제가 생긴 적이 있었다. 슬리핑 모드가 작동이 되지 않아 계속 노트북 화면이 켜져 있었다. 은율은 그런 상태인 노트북을 당장 고치려고 들지 않았다. 회사에 들고 다니는 노트북이 아니었고, 그때는 유자가 그녀에게 얹혀살던 시절이 아니었다. 버스를 두 시간 반쯤 타고 가끔씩 은율의 집에 가곤 했는데, 그때는 사이가 좋았던, 자신들에게조차도 그렇게 보이던 시절이었으므로 은율은 잠깐 방문하는 엄마 때문에 노트북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은율의 집은 복층 오피스텔이었다. 복층이라고는 하지만 2층은 일어서서 움직일 수 있는 높이가 아니었다. 은율은 그곳에 프레임 없는 얇은 매트리스를 놓았다. 낮은 좌탁과 스탠드도 놓았다. 유자가 자고 갈 때를 위해서였다. 버스로 두 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기는 했지만, 저녁을 같이 먹고 잠깐 노닥거리다가 집으로 돌아오기에는 충분한 거리였다. 그래도 유자는 가끔 은율의 오피스텔 복층에서 하룻밤씩 자고는 했다. 은율이 마련해 놓은 잠자리가 다정하고 고마워서였다.
그렇더라도 바뀐 잠자리가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라 유자는 새벽에 자주 깼다. 복층 오피스텔은 층고가 높아 2층에서 내려다보는 거실이 아득했다. 거실 창 앞에 놓인 은율의 책상이 2층에서는 아래쪽 정면으로 보였다. 일어나 앉는 대신 몸만 돌려 누워 1층을 내려다보면, 그 책상 위 은율의 노트북 불빛이 보였다.
어떤 새벽에는 그 불빛이 꽤 환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그런 불빛을 보고 있으면 들킨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대체로는 은은했다. 아이가 잠들기 전까지 타이핑을 하던 소리를 떠올렸고, 그 소리에 은은하게 물들어 잠으로 들어가던 시간을 기억하는 게 좋았다. 아이의 등을 바라보는 일이 참 좋았다. 얹혀살지 않던 때는 그랬다.
유자에게 돌아갈 집이 없게 된 후로 은율은 책상을 자기 방안으로 옮겼다. 은율의 오피스텔은 1.5룸형이었다. 유리문으로 칸막이를 할 수 있는 방이 있었다. 그러나 겨우 침대 하나 들어갈 수 있던 공간에 책상까지 들어가자 사람이 사는 방이 아니라 가구가 사는 방처럼 변했다. 침대에서 돌아눕다가 책상 모서리에 이마를 찧는 일도 있는 모양이었다. 아이씨! 잠결에 은율이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은율의 삶은 재앙으로 변했다. 좁은 오피스텔의 모든 공간을 엄마가 차지했다. 사기를 당한 엄마, 집을 날린 엄마, 멍청한 엄마, 심지어 징그럽기까지 한 엄마가.
유자는 은율의 오해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멍청한 건 사실이었다. 오죽하면 집과 가게까지 날렸을까. 그러나 은율이 생각하는 것처럼 자신은 징그러운 사람이 아니라는 걸, 그걸 꼭 말하고 싶은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그걸 곰곰이 궁리하다가는 곧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곤 했다. 돈을 찾아야 했고, 갈 곳을 찾아야 했고, 다시 그녀의 삶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는 게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다시는 예전과 같은 삶으로 돌아가지 못할 거라는 결론에 또 도달하게 되었고, 그러면 그때부터는 우울과 무력감에 빠져 설명이고 뭐고, 오해고 뭐고 다 귀찮다 싶어졌다.
산책을 하더라도 은율이 퇴근해 들어온 후 저녁에 하면 좋을 터였다. 그러면 다만 한두 시간이라도 은율에게 자기 공간을 내줄 수 있을 테니. 그러나 산책을 하고 싶다는 생각도 편안한 마음일 때나 드는 것이라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갈 생각도 은율이 집에 없을 때야 들었다. 그녀는 은율이 출근을 한 후에야 움직이기 시작했고, 공원을 산책했다. 커피가 생각나는 것도 그때뿐이라 은율이 던져 놓듯 식탁 위에 놓고 간 돈으로 테이크아웃 커피를 사서 공원에서 마셨다.
커피를 마시면 별수 없이 사기꾼 최가 생각났다. 그리고 은율에게 하고 싶은 말들이 떠올랐다. 유자는 사기꾼 최와 연애를 했던 게 아니었다. 그러나 곧이어 과연 그런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게 아니라면 뭐였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면 죽을 만큼 창피한 마음이 들었다. 온몸이 뜨거운 프라이팬에 볶이는 듯 펄펄 뛰게 화가 나던 마음이 부끄러움과 괴로움으로 자글자글 끓었다. 그런데 부끄러운 것보다 더 부끄러운 것은 어떤 말로 할 수 있는 걸까. 부끄러운 것보다 더 부끄러운 것은 없어서 자꾸 설명을 하려고 들게 되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최가 카페에서 권해 주던 커피의 맛이 떠올랐다. 그게 자신이 줄곧 마시던 커피와 뭐 그리 다른 맛이었겠나. 최도 그렇게 말했었다. 잔만 이쁘고 값만 비싸지 뭐‧‧‧ 이러면서. 그리고 웃어 보였다. 과해 보이지 않는 웃음이었다. 과해 보였다면 의심했을 것이다. 그녀의 호감을 사려고 노력한다거나 무슨 선물을 한다거나 난데없이 아리송한 시간에 애매한 뜻의 카톡을 보낸다거나 그랬다면. 그러나 최는 그러지 않았다. 그것에 속아 집과 가게를 날렸다. 빚까지 생겼다. 은율은 이제 얹혀사는 그녀를 감당해야 할 뿐만 아니라 빚도 갚아야 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것일까. 생각은 덜컥덜컥 소리를 냈다. 마치 10미터마다 방지턱이 나타나는 길을 달리는 것 같았다. 어쩌다가 그런 일에까지 손을 대게 된 것일까. 국숫집 단골이던 최가 경매를 잘 배우면 큰돈은 못 만져도 소소히 돈을 벌 수 있고, 그러다가 꾼으로까지 발전하면, 물론 그러기는 정말 힘들겠지만, 집도 한 채 가질 수 있게 된다는 말에 홀렸다. 꾼이라는 말이 아니라 그렇게 되기는 정말 힘들 거라는 말에, 그렇게 말하는 최에게 홀렸다. 최는 이런 말도 했다.
이게 좀 그렇긴 하죠?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살던 집을, 살다가 뺏긴 집을 헐값에 가지려고 하는 게 경매였다. 그런데도 최가 부드럽게 웃는 표정으로 그런 말을 할 때, 유자는 ‘그렇지 않은’ 마음이 되어 버렸다. 기획 부동산이라는 말조차 몰랐을 때, 알았더라도 자신은 그런 것에 걸려들 주제도 못 된다고 생각했겠지만, 어쨌든 최의 말은 그저 돈 없는 사람들끼리 돈을 모아 시세보다 싼값에 집을 사고, 그렇게 번 돈을 나눠 가지는 방법이 있다는 말로 들렸다. 마음이 놓였던 것도 그래서였다. 그런 일을 여러 번 하다 보면 그런 미안한 마음 같은 것도 없어질 거라는 최의 말을 이해했고, 이해한다고 믿었고, 자신에게 그런 미안한 마음이 있다는 걸 알아봐 주는 최가 좋았고, 그런 와중에도 미안함 운운하며 순진한 채 하는 자신의 징그러움을 기꺼이 무시할 수 있었다.
시작은 그랬다. 그게 점점 커져 집과 가게를 날릴 때까지 은율은 유자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을 제대로 알지도 못했다. 은율은 착한 딸이었다. 은율이 착한 딸이 되려고 기를 쓰며 살았다는 걸 유자는 알았다. 그게 유자에 대한 원망과 분노와 증오, 때로는 앙심 때문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런 모진 마음인 채로 그대로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걸 죄책감으로 삼아 살았다. 자기를 먼저 놓아 버린 아빠 대신 쩔쩔매다가 자기를 놓아 버리지도 못한 엄마를 미워했던 건 그게 쉬웠기 때문이라고, 나중에 사이가 나빠진 후 은율은 서슴지 않고 말했다. 매일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잠을 자는 엄마는 할퀴기도 쉽고 꼬집고 물기도 쉬웠다고. 꿈속에서는 주먹질도 했다고. 유자는 이해했다. 한 달에 한 번씩 만나다가 나중에는 일 년에 한두 번도 안 만나게 된 아빠에게는 품고 있는 마음이 무엇이든 그걸 보여 줄 수 있는 시간이 너무 부족했을 테니까. 잔뜩 준비를 하고 나가도 다 쏟아붓기는커녕 잠깐 미워하기도 전에 각자 자기의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어 버렸을 테니까. 그는 은율을 집으로 보낼 때마다 버스 창밖에서 손을 흔들었다고 했다. 나의 상처야, 안녕. 해맑은 웃음을 감추지도 못하며. 그래도 너무 해맑게 보이는 건 아닐까 잠깐씩 망설여 가며.
그렇게 집에 돌아오면 또 다른 원수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매번, 항상.
그런 마음은 얼마나 깊은 상처가 되는 것일까. 얼마나 지독한 죄책감이 되는 것일까. 유자는 몰랐다. 그런 죄책감 때문에 착한 딸이 되려고 기를 썼는데, 평생 노력했는데, 엄마가 다 망쳐 버렸다고 은율은 악을 쓰기만 했다. 그러다가 말했다.
잤지? 잤어! 그 새끼랑 잔 거잖아!
그렇게 악을 써 놓고는 얼굴이 더 하얗게 질려 버린 건 은율 본인이었다. 양수가 터지듯이 밀려 나온 말은 참지 못했으나, 그래도 다 쏟아 내서는 안 될 말이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아 버린 얼굴이었다. 창백한 얼굴, 어리둥절한 얼굴‧‧‧. 당연히 유자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딸에게 그런 말을 들은 게 너무 창피해서가 아니라, 나중에는 그랬지만, 그때는 왜 은율이는 다른 말을 다 놔두고 저렇게 말할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기 때문이다. 다른 좋은 말도 있을 텐데, 에둘러 가는 다른 말도 있을 텐데‧‧‧. 엄마를 안 창피하게 하는 말이 분명히 있을 텐데.
그런데 은율은 뭐가 그렇게 어리둥절했을까. 멍청하기 짝이 없는 엄마가 눈 앞에 있는데 정작 멍청한 게 무엇인지를 몰라서, 집을 날려서, 아니면 사기꾼과 그런 짓을 해서… 평생 국수를 썰고 마느라 쭈글쭈글한 손, 저 손을 잡으라고 징그럽게 내줘서… 그것도 수줍은 얼굴로 그랬겠지… 저 나이에, 저 나이에…. 아니면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기막혀서… 제일 싫은 건 바로 그런 말을 내뱉은 자신이어서. 은율은 어쨌든 누가 뭐래도 교양인이었으니까.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그런 말을, 딸이라면 해서는 안 될 것 같은 말을 결국 내뱉어 버린 후 팽팽하게 차올랐던 가스가 새기 시작했다. 은율이 유자의 나이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그랬다면 은율은 아마 이렇게 말해야 했을 것이다. 그게… 뭔지도 알 수 없는 그게…마치 요실금처럼 새어나왔다고. 그리고 마침내 펑 젖어버렸다고. 어떻게 새어나왔든, 은율은 포기했다. 다 젖어 버렸으니까. 이제는 어쩔 수 없네 하듯이. 이제 별수 없게 되어 버렸네 하듯이.
은율이 유자의 신발을 전부 내다 버린 것이 그 직후였다. 유자가 또 최를 만나러 나갈까 봐 그런다고 했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을까 봐, 또 살랑살랑 그 새끼를 만나러 나갈까봐 쓰레기를 버리듯 종량제 봉투에 한꺼번에 쓸어 담아 버렸다. 딸의 머리를 자르는 이야기도 옛날 옛적 이야기에나 나오는 걸로 알았는데, 딸에게 머리를 깎일 줄은 몰랐다.
스페이스 섹스올로지. 가제라고 되어 있던 전시회의 제목이었다. 시안과는 달랐으나 그렇다고 많이 다르지는 않은 것 같은 포스터가 다시 은율의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시안이 아닌 것을 안 건 그 포스터에는 아무 낙서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뭘 잘라 냈는지, 그것도 싹둑 잘라 내 버렸는지는 알 수 없었다.
네이버에서 스페이스 섹스올로지란 말을 찾아봤다. 검색 결과를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영어로 된 위키피디어는 금방 보였다. 유자는 번역기를 쓸 줄 알았다. 그녀의 국숫집 단골손님들 중에 이주 노동자들이 꽤 있었다. 그들을 위해 국수 메뉴 개발을 하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태국식 볶음면, 캄보디아식 카레 국수 그런 것들. 닭고기와 카레를 넣어 만드는 캄보디아 국수가 있는데, 그 이름이 놈반쩍섬러까리라는 말을 단골손님 썸낭이 알려 주었을 때 단념했다. 만들 자신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걸 주문받을 때마다 웃음이 터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번역기 쓰는 걸 배운 건 썸낭에게서였다. 썸낭, 네 이름에도 뜻이 있어? 물어봤을 때 한국말을 곧잘 하는 그가 굳이 핸드폰의 번역기 화면을 보여 줬다. 행운. 한국어로 된 그 글자보다 동글동글하고 꼬물꼬물거리는 그 나라 글자가 더 눈에 띄었다. 아, 너네 나라 글자는 이렇게 생겼구나. 그리고 그날 유자가 말했다.
나는 유자야.
그 말을 할 때 왜 갑자기 달콤하고 동글동글한 기분이 되었을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평생 누구 엄마로만 살아오는 동안 자기 정체성을 잃어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잃어버려서‧‧‧ 어쩌구저쩌구하는 그런 낯간지러운 이유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혹시 썸낭에게도 설렜었나‧‧‧.
자신은 그렇게 징그러운 사람이었나‧‧‧.
영어사전에 의하면 스페이스 섹스올로지는 우주의 성과학이라고 했다. 유자는 스페이스의 뜻을 공간이라고 짐작했었다. 아마도 이 말은 연애를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야 할 공간, 말하자면 방에 관한 것일 거라고. 잠을 자기 위한 것이든, 뭣을 하기 위한 것이든, 어쨌든 없으면 안 될 그런 공간에 관한 것일 거라고. 그러므로 네이버 검색까지 할 생각을 한 것은 찔리는 마음 때문이었다. 은율과 은율의 애인에게 필요한 방을 자신이 차지하고 있어서. 은율의 남자 친구 슬리퍼를 대신 신고 있어서. 그리고, 은율은 쓰지 않고 은율의 남자 친구만 쓰는 치실을 자신이 쓰고 있어서. 그 치실을 끊을 때마다 자신 역시 싹둑싹둑 끊기는 것 같아서.
그런데 사전의 설명이 유자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스페이스 섹스올로지는 ‘우주의 성과학, 지구 외부 생물체의 성에 대한 연구’라고 했다.
뭐라고?
제일 먼저 든 생각이었다.
이건 혹시 유에프오 따위를 믿는 사람들에 관한 건가. 그렇다고 해도 그렇지‧‧‧. 외계인의 성관계 따위를 알고 싶을 이유가 뭐란 말인가. 망측하기도 해라, 유자가 유자의 엄마였다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아니면 혹시 외계인이랑 하는 성관계인가‧‧‧. 망측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번역기를 써 가면서까지 위키피디아를 읽어 본 이유는 그래서였다. 너무 망측해서. 우주 성학은 우주 탐사와 외계 환경에서의 인간관계, 성별 역학 및 성행동에 관한 연구라는 좀 더 그럴싸한 설명을 읽게 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어리둥절한 기분은 마찬가지였다. 망측함은 옅어졌으나 알지 못하는 말들 사이로 둥둥 떠 버린 느낌이었는데, 그게 좀 더 어지러운 기분이었다.
그 와중에도 유자는 스페이스, 스페이스 중얼거렸다. 나는 유자야, 말하면 유자가 되는 것처럼, 스페이스 스페이스 말하면 틈이 벌어지고 그 틈이 서로를 밀어내 점점 더 큰 공간이 생길 것처럼. 스페이스라고 불리는 우주는 혹시 그렇게 생겨난 것이 아닐까. 콩알만 한 것이 생기고, 또 콩알만 한 것이 생긴 후 서로를 밀어내다가 생긴 공간. 그리고 그 우주에 생긴 또 콩알만 한 것들‧‧‧. 그중에 기어코 서로 붙어먹고 싶은 것들이 생겨 애도 낳고, 쌈박질도 하고, 사기도 치고‧‧‧ 사기를 당했는데도, 뭣에 당한 건지를 몰라서, 그렇게 멍청해서 맨발로 거리를 걸어 다니겠지.
그러니까 스페이스 섹스올로지는 여전히 평범한 사람들, 그래서 멍청한 사람들, 그러나 여전히 자기 방이 필요한 존재들에 대한 얘기로 이해됐다. 스페이스라는 영어가 좁디좁은 한 칸 방이라고 해석되든 무한하거나 광활한 우주로 해석되든 그건 마찬가지였고, 자신의 이해가 틀렸든 아니든 역시 마찬가지였다.
유자는 전시회를 보러 갔다. 그날 은율은 서울에 없을 거라고 했다. 서울에 없으면 어디에 있겠다는 건지, 은율이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나 늦어”라고만 했을 때, 유자는 실망했다. 늦을 거라는 말 때문이 아니라 늦게라도 돌아온다는 말에. 그즈음 유자는 은율에게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래도 유자는 약간 들뜨기는 했는데, 은율이 멀리 있을 때, 그래서 자신의 공간을 잠시나마라도 다 가진 것 같은 기분일 때, 평소와는 다른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하나뿐인 낡은 운동화를 신고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삼청동에 있는 갤러리를 찾아갔다. 갤러리의 창이 넓어서 길에서도 안이 환히 들여다보였는데, 전시를 보고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내딸은율이는 노가다를 해 가며 전시회를 여는데, 그것도 우주에 관한 전시회를 여는데, 그토록 어마어마한 전시회를 여는데, 그 전시회에는 사람들이 오지 않는구나 생각하니 쓸쓸해졌다. 콩알만큼 쪼그라드는 기분이기도 했다.
전시실에는 그림과 사진들이 있었다. 광활한 우주가 있지는 않았고, 촉수가 달린 채 서로를 애틋하게 사랑하는 외계인이 있지도 않았다. 그림과 사진 속에는 그냥 지구의 사람들이 있었다. 전쟁을 하는 사람들, 피난을 가는 사람들, 그리고 그녀의 칼국숫집에 오던 손님들과 똑같은 사람들, 국수를 마는 그녀와 다를 바가 전혀 없어 보이는 여자들, 사기꾼 최처럼 웃고 있는 남자들, 썸낭과 같이 젊고 건강한 남자들, 그리고 내딸은율과 같이 어리고 불안해 보이는 여자들이 있었다. 우주와 관련된 작품도 있었다. 외계인이 아니라 우주인인 여자가 무중력 실험실에서인지 우주 한복판에서인지. 아무튼 어떤 곳에서 둥둥 떠 있는 사진이었다. 어찌나 둥둥 떠 있는지, 어찌나 어찌나 그러한지, 유자의 몸도 같이 떠오르는 듯했다.
우주인은 등에 산소통 같은 걸 매고 있었고, 그 산소통에는 탯줄 같은 것이 달려 있었다. 그게 우주선과 연결된 것인지, 어디에 매달려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탯줄은 작품 바깥으로 이어져 있었다. 어쩌면 멀고 먼 우주를 건너 지구에까지 닿아 있을지도 몰랐다. 지구의 사람들, 그러니까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부터 썸낭을 욕설로 부르는 사람들에게까지, 내딸은율이를 만지는 인간들, 사기를 치는 놈들에게까지…. 그러나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은, 자신처럼 멍청한 인간들에게까지…. 유자는 그들의 이름에 매달려 있을 탯줄을 상상해 보았다. 그녀가 누군가. 큐레이터의 엄마였다. 그러니 그 정도의 예술적 상상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우주인의 탯줄은 그 멍청한 사람들의 울음, 그들의 울음에 붙여진 이름들, 어리둥절함에 붙여진 이름들, 속수무책에 붙여진 이름들에 매달려 있는 게 아닐까 라고.
전시회에서 돌아오는 길에 유자는 또 공원에 갔다. 벤치에 앉지도 않고 길 한가운데 서서 고개만 쳐들어 암벽 꼭대기를 바라봤다. 그리고 밀어내는 힘에 대해 생각했다. 전시회에 다녀온 여파 때문이었다. 끌어당기는 힘이 있으면 밀어내는 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사과를 단숨에 떨어트리는 힘이 있듯이 사과나무를 뿌리째 한 번에 밀어 올리는 힘도 있지 않겠나.
은율이 방문을 닫아걸고 전화 통화하는 걸 들은 적이 있었다. 은율의 오피스텔은 너무 작아서 안 들으려야 안 들을 수가 없는 말들이 너무 많았다. 그 새끼가 날 만졌다고요! 악을 쓰던 소리를 들었다. 그 새끼가, 그 늙은 놈이, 지 작업실에서, 아무도 안 보는 데서! 그때는 은율과 사이가 좋은 때였는데도 차마 누가 널 만졌니, 물어보지 못했다. 대답을 듣고 나면 더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까 봐 무서웠다. 무서우면서도 그런 걸 무서워하는 엄마인 자신이 부끄러웠다. 은율이 이렇게 소리를 지르는 날도 있었다. 왜 내가 참아야 하는데! 왜 항상 참는 건 난데! 어떤 날은 ‘우리’라고도 했다. 왜 항상 우리만 참아야 하는 거냐고! 그때 은율의 ‘우리’는 누구일까 궁금했는데, 역시 묻지 못했다.
작가들과 단둘이 있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건 종종 들었던 얘기였다. 그러나 그때 은율은 좋은 얘기만 했었다. 유자와 은율의 사이가 좋았던 때는 그랬다. 얼마나 유명한 작가를 만났는지, 그 작품이 얼마나 황홀했는지, 그런 말들. 직장 동료나 상사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문득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그 좁은 동네에서는 한 다리만 건너면 다 아는 사람들인데, 그런데도 뻔뻔하기가 그지없다고. 다 사기꾼들이라고. 그러다가는 혼자 생각에 빠져서 ‘그래서 뻔뻔한가’ 중얼거리기도 했다. 그리고 나서는 또 활짝 웃으며, 그래 봤자 유자를 걱정시키지 않으려는 것이었겠지만, 또 말하기도 했다. 세상에 사기꾼 아닌 놈이 있나, 뭐.
대놓고 사기꾼인 최에게 당한 그녀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멍청하게 사기를 당하는 사람은 세상에 그녀 하나뿐인 것처럼 말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냐고! 악을 썼다.
암벽에 박힌 색색의 돌들. 그 돌들은 너무나 앙증맞아서 아무리 밟고 올라가더라도 꼭대기에는 미치지 못할 것 같았다. 설령 이른다 한들 최종 종착지는 ‘떨어지는 곳’밖에 더 될까 싶었다. 다 올라가든, 다 올라가지 못하든 떨어지는 것 말고 달리 무슨 방법이 있겠나.
저녁 때가 되면 유자는 괴롭기 짝이 없는 마음으로 은율의 오피스텔로 돌아갔다. 그리고 매일 저녁 은율의 저녁밥을 차렸다. 은율은 먹지 않았다. 엄마가 해 주는 밥이 싫어서, 바쁜 애인의 회사까지 찾아가 애인이랑 밥을 먹고 들어왔다. 밥만 먹으면 좋을 텐데 엄마한테 다 하지 못한 분풀이를 애인한테 했고, 그러다가 대판 싸웠고, 그래서 여전히 고픈 배를 채우느라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을 사 먹었다. 집에 들어오면서는 현관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식탁을 바라보지도 않고 자기 방으로 갔다. 잠시 후에 나와 욕실에 갔고, 그 후에는 다시 자기 방으로 들어가 커튼을, 그것도 암막 커튼을 쳤다.
그래서 유자가 은율을 편히 볼 수 있는 시간은 창을 내다볼 때뿐이었다. 은율이 집으로 돌아올 즈음 창가에 서서 13층 아래를 내려다봤다. 편의점에서 나와 건널목으로 오는 은율을 봤다. 빨간 불이 길기를 바랐다. 은율이 조금이라도 늦게 돌아왔으면 해서. 마음은 그런데도 기억은 그들이 좋았던 시절을 더듬었다.
은율이 아이였을 때, 자신한테 붙어서 한 순간도 떨어지려고 하지 않던 아이였을 때, 엄마가 멀리서 보이기만 하면 두 팔을 흔들며 달려오던 은율을 기억했다. 그때는 그녀도 달려가고, 은율도 달려왔다. 서로를 향해 힘껏 달렸다. 그리고 철썩 달라붙었다. 달라붙어 꼭 안고 말했다.
내가 널 어떻게 놔. 내가 널 어떻게 낳았는데.
전시회에 다녀온 날, 늦게 귀가하는 은율을 기다리며 창가에 서서 유자는 잠깐 뛰어내릴까 생각해 봤다. 오피스텔의 창문은 작았다. 환기를 위한 손바닥만 한 창이 전부였다. 떨어져 죽을 수도 없었다. 둥둥 뜨기 위해 뛰어내릴 수도 없었다.
그러니 철썩 달라붙는 것밖에 더하겠어. 징그러워도 그럴 수밖에 더 있겠어.
그런데도 무서웠다.
그런데도 무섭다고, 은율에게는 결코 한 적이 없는 말을, 그렇다고 믿는 말을 유자는 그날 밤 창가에 서서 혼잣말로 말했다. 은율에게는 하지 않았으나 최에게는 했던 말. 그 사기꾼이 얼마나 모든 말을 다 들어주는 척했던지, 해서는 안될 말까지 술술 나와서, 그래서 했던 말들.
그런데 나는 뭐가 그렇게 무서웠던 걸까. 국수만 말며 사는 게 무서웠을까, 국수만 말다가 죽는 게 무서웠을까. 아니면 국수가 무서웠나…
유자는 잠깐 웃고, 다시 이어 말했었다.
국수를 썰 때마다 싹둑싹둑싹둑싹둑…. 그 소리가 싹둑싹둑싹둑….
그렇게 싹둑 소리만 스무 번쯤 했을 때, 최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만 썰라는 듯이. 그리고 말했다.
누구나 무서워.
그리고 또 말했다.
나는 안 무서울 거라고 생각하니. 너는 내가 그럴 거라고 생각하니. 나도 가끔은 정말 무서워. 나도 내가 정말 무서워.
여전히 그 말만큼은 진심이었다고 믿는 유자는, 그러므로 사기를 당해도 싼 유자는 건널목으로 걸어오는 내딸은율이를 발견하는 순간, 마침내 창문을 열었다. 마치 유치원에서 돌아오던 어린 딸에게 “은율아!” 소리를 지르던 그때처럼.
손바닥만 한 환기창은 손바닥만큼만 열렸다.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죽고 싶었던 건 아니니까. 죽고 싶기는 했지만 정말 죽을 생각인 건 아니니까. 죽을까 라고 생각한 후에는 항상 살까 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므로 그녀가 그날 창문을 연 건,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저 그냥 한 번만 뛰어내려 보고 싶어서일 뿐이었다. 비록 손바닥만 한 환기창을 뚫고 나가려면 상자 속에 몸을 구겨 넣는 마법 같은 기술이 필요하겠지만. 그러니까 마술, 혹은 사기‧‧‧. 삶이든 중력이든, 그런 것에 반하는 것이 꼭 필요하겠지만.
그러나 둥둥 뜬다는 것이야말로 바로 그런 것일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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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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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장지기
- 2025-02-01
쌍두몽(雙頭夢) 구병모 굴속에 두고 온 겨울잠이 나를 엄습한다. 한순간 새의 노랫소리가 뒷덜미를 잡아채는데, 그것이 숲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건지 내 몸속에서 흘러나온 건지 알 길이 없다. 바람과 모래와 나무 사이에서 닳아 가는 의식이 육(肉)의 허물을 벗겨 낸다. 소리만이 텅 빈 몸속에서 진동한다. 한 마리의 새는 광막한 하늘에서 탈각된 가피(痂皮)일 뿐이다. 정처 없던 사고는 짓이겨져 새의 몸을 살찌우고 그 날개 아래 영원히 유폐된다. 나는 내 존재에 그어진 선명한 취소선 두어 줄을 느낄 수 있다. * 시간의 손톱이 할퀴고 지나간 살갗마다 앉은 흉터 아래를 탐침하고자 하는 이들이 기억 집담회에 모인다. 이는 기억의 회의라고도 하고, 기억 세미나 혹은 기억의 제의라고도 불린다. 그들은 기억이 열리는 나무 밑에 둘러앉아 나무 열매를 따서 나눠 먹고—그 씨앗은 다시 땅속에 묻는다, 그것이 무엇으로 열리든지, 그대로 흙의 일부가 되더라도—손을 잡고 앉아 기도를 올리는 것 같은 몸짓을 유지한 채 서로의 이야기를 듣거나 말하는데, 이는 체온을 전달하기 위한 행위로, 축축한 땀이 차오르는 타인의 손바닥을 신경 쓰는 이는 참석이 불가하다. 소중한 기억을 간직하기 위한. 혹은 영원히 떠나보내기 위한. 어쩌면 이미 휘발되어 떠나간 지 오래여서 창궐하는 유령처럼 사방을 배회하며 약탈할 몸을 찾는 기억을, 원래의 소유자에게로 다시 데려오기 위한. 그러므로 그 자리에 모인 이들의 구성원은 다음과 같다. 단순 건망증이 있는 이들, 빈지 워치 시대의 보편적인 디지털 중독자들, 인지증 진단을 받은 이들. 최초의 기억 집담회가 자생적으로 싹텄을 때는 인지증 환자와 그 보호자들을 위한 나눔과 위로의 성격이 강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기억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약간의 포즈, 실제로 기억 증진에 도움이 되는지 아닌지는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행위들. 누군가는 좋아하는 시 한 편을 암송하고 (틀리거나 일부 구절을 건너뛰어도 좋다), 누군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본 영화 속의 인상적인 한 장면을 묘사하고, 누군가는 40년 전 자기가 입었다던 삭기 일보 직전의 배냇저고리를 공개하면서 여밈 부분에 묻은 얼룩의 기원을 상상하여 들려준다. 상상은 기억의 일부라고 할 수 있을까. 좌우로 기우뚱하는 고개들. 기억은 자신의 해석에 따라 변형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점에서 상상과 크게 다른 범주라고 할 수 있는가. 기억을 간직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기억을 간직하고자 하는 마음을 간직하는 것이라면, 상상은 웬만큼 도움이 되리라고, 사람들은 수긍한다. 처음 문턱을 넘을 때는 다소 회의적이었다. 흔히 있는 최면 센터일지도 몰라. 그게 아니라면 마음 다스림을 빌미로 삼은 장삿속. 유쾌한 기억, 트라우마로 남은 기억, 잊고 싶은 기억, 왜곡된 기억 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번드러운 말로 시선을 끌고 기억전시회라는 것을 열어서 그림과 소조(塑造)와 글로 기억 구조물이라는 것을 세워다가 춤, 노래, 연주, 꽃 무엇으
- 문장지기
- 2025-02-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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