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신처럼
- 작성일 2025-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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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신처럼
이승우
뱀이 여자에게 물었다. "하나님이 정말로 너희에게, 동산 안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느냐?"
여자가 뱀에게 대답하였다. "우리는 동산 안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 어기면 우리가 죽는다고 하셨다."
뱀이 여자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하나님은, 너희가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너희의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것을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을 슬기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였다. 여자가 그 열매를 따서 먹고,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니, 그도 그것을 먹었다.
(「창세기」 3장 1-6절, 새번역성경)
1.
뱀이 여자에게 물었다. “신이 너희에게 동산 안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했다는 게 정말이냐?” 지나치게 기다랗고 몸에 털이 없는 뱀은 동산의 어떤 생물과도 같지 않았다. 여자는 그렇게 느꼈다. 하기야 동산의 모든 생물은 다 달랐다. 모습과 소리와 걸음걸이와 습성이 제각각이었다. 모든 생물은 그렇게 지어졌다. 다른 이와 다르다는 것, 고유하다는 것, 그것이 존재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자신의 ‘있음’을 담보하는 것이 고유함이다. ‘나’는 ‘나’ 외에 누구도 아니고 ‘나’만 ‘나’이다. 있음은 선언이 아니라 상태다. 모든 있는 것들은 어떤 식으로든 남다르다. 나는 남과 다르고 남은 나와 다르다. 남다르다는 말은 존재한다는 말과 뜻이 같다. 그러니까 있음의 상태는 다른 있음, 즉 다른 남다름에 의해 보장된다. 한 고유함/있음은 다른 고유함/있음에 의존한다. 한 고유함/있음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다른 고유함/있음을 전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있는 것들은 홀로 있지 않고 더불어 있다. 그러나 뭉쳐 있지 않고 따로, 다르게, 고유하게 있다. 뱀은 동산의 들짐승 가운데서 가장 길고 매끈하고 또 은밀했다. 그것이 뱀의 남다름, 뱀의 고유함이었다. 뱀은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움직이고 소리 내지 않는 것처럼 소리 냈다. 그래서 뱀이 아주 가까이 다가오기까지, 심지어는 아주 가까이 다가와 있는데도, 그 사실을 모를 때가 많았다. 그래서 동산 안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느냐는 질문을 듣기까지 여자는 뱀이 곁에 온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뱀은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움직였고 소리 내지 않는 것처럼 소리 냈다.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우리는 동산 안에 있는 나무의 열매들을 자유롭게 먹을 수 있다.” 동산 안에는 나무들이 많았다. 나무들은 줄기가 가늘거나 굵고 잎이 넓거나 좁고 열매가 크거나 작았다. 각기 달랐지만 다 보기에 좋았고, 열매들은 먹음직스러웠다. 남자와 여자는 동산의 열매들을 마음대로 따 먹었다. 먹고 싶을 때는 먹고 먹고 싶지 않을 때는 먹지 않았다. 그들의 신이 그렇게 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동산에 있는 과일들을 마음대로 먹어라, 라고 신이 말했다, 라고 남자는 여자에게 알려 줬다. 그런데 뱀은 신이 동산의 모든 과일들을 먹지 말라고 했는지 물었고,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으므로 여자는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먹고 싶은 과일을 마음대로 따 먹었으니까. 먹고 싶은데 먹지 못한 과일은 없었으니까. 신이 그것을 허용했으니까.
뱀은 말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여자는 자신을 꿰뚫어 보는 것 같은 시선을 느꼈다. 그러자 그들이 먹으면 안 되는 과일이 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신이 동산에 있는 모든 열매를 마음대로 먹게 하면서 한 나무의 열매만은 먹지 말라고 했다는 말을 남자로부터 들었다. 그 나무는 동산 한가운데 있었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과일이 열린다고 했다. “그 과일만은 먹지 마라. 먹으면 죽을 것이다.” 신이 그렇게 말했다고 남자가 여자에게 알려 줬다. 사람은 죽음이 무엇인지 몰랐다. 선과 악을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모르는 것에 대한 호기심이 그들에게는 없었다. 사람이 그 과일을 따 먹지 않은 것은 죽음이 무서워서가 아니고(죽음이 무섭다는 것도 그들은 몰랐다), 선과 악을 아는 것이 위험해서도 아니었다(선과 악을 아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도 그들은 몰랐다). 신이 먹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먹지 않았다. 먹지 말라는 것을 먹지 않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것 말고도 동산에는 보기에 아름답고 맛도 좋은 과일들이 매우 많았기 때문이다. 굳이 먹지 말라는 과일을 먹으려고 할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먹고 싶을 때는 손을 뻗었고, 먹고 싶지 않을 때는 손을 뻗지 않았다. 부족하지 않았고 아쉬운 것도 없었다. 신이 말한 그 나무가 다른 나무보다 더 아름다워 보이지도 않았고, 그 나무의 열매가 다른 나무의 열매보다 더 맛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그 나무가 아름답지 않다거나 그 나무 열매가 맛있어 보이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동산의 모든 나무가 다 제각기 아름답고 동산의 모든 과일이 다 제각기 맛있어 보였다는 뜻이다. 그 나무만 더 아름답거나 그 나무의 과일만 유독 맛있어 보였다면 혹시 모르지만, 그렇지도 않았으므로 그 과일을 향해 손을 뻗을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이 먹으면 안 되는 과일이 있다는 사실을 거의 자각하지 못한 채 동산에서 살았다.
먹지 말라는 명령은 먹지 않을 이유였지 먹을 구실이 아니었다. 사람에게는 그 나무를 제외한 동산의 모든 나무 열매가 허용되었다. 한 나무의 열매만을 금한 것이 동산의 모든 열매를 허용하는 신의 방법이었다. 신은 허용하기 위해 금했다. 그 금지된 하나를 통해 동산이 유지되고 사람이 동산을 누리게 되리라는 것을, 사람은 몰랐지만, 신은 알았다. 어떤 제한도 없이 모든 것이 완전히 허용된다면 동산이 훼파될 것을, 사람은 몰랐지만, 신은 알았다. 사람은 그런 자유와 그럴 가능성을 가진 존재니까. 한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신의 법은 사람이 가진 이 자유와 가능성 위에 세워졌다.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없는 이에게 먹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불필요하고 불가능하다. 행할 가능성과 능력이 없는 이에게 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 역시 불필요하고 불가능하다. ‘하지 말라’는, 그 명령에 따르지 않을 자유를 가졌고 그럴 가능성과 능력을 갖춘 이에게만 의미 있는 명령이다. 사람에게는 ‘하지 말라’는 것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고, 그럴 가능성과 능력도 있다. ‘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신은 법을 주고 법을 범할 자유도 주었다. 아니, 자유가 먼저다. 자유가 주어졌기 때문에 법이 필요해졌다. 신은 자신의 ‘형상’을 사람에게 부여했다. 자유는 그 ‘형상’ 가운데 중요한 요소였다. 자유가 없다면 법도 없었을 것이다. 사람은 그 자유를 가지고 법을 지킬 수도 있고 범할 수도 있다. 지키는 사람도 자유를 사용하고 범하는 사람도 자유를 사용한다. 동산의 모든 열매를 마음대로 취하기 위해 사람은 금지된 하나의 나무에는 접근하지 않는 편을 택했다. 아니, 선택이라고 할 수 없다. 그들은 그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사람은 허용된 것들로 만족했으므로 금지된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금지된 것이 있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했다. 유혹은 없었다.
뱀이 말을 걸어오기 전까지 동산에서 금지된 나무의 열매는 허용된 다른 나무의 열매들과 구별되지 않았다. 그 나무는 고유하고 남달랐지만, 그러나 공원의 다른 나무들도 고유하고 남달랐다. 그 한 그루 나무를 동산의 다른 나무들로부터 구별해 낸 것은 뱀이었다. 뱀은 영리하고 은밀했다. 뱀은 은밀하게 다가와서 영리하게 물었다. “신이 너희에게 동산 안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했다는 게 정말이냐?” ‘모든 나무’에 대한 뱀의 언급이 동산 한가운데 있는 한 그루의 나무와 그 나무를 제외한 모든 나무의 구별을 만들어 냈다. 그 말이 동산의 ‘모든 나무’가 그들에게 허용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떠오르게 했다. 신의 말은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를 마음대로 먹어라, 단 한 그루의 나무 열매만 빼고’였다. 그러나 뱀은 “동산의 모든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를 신의 말로 불러왔다. 그것은 명백하게 사실이 아니었다. 신의 말의 핵심은 “먹어라.”였는데, 뱀은 “먹지 말라.”로 초점을 옮겼다. 신은 ‘한 그루의 나무 열매’를 예외로 설정했는데, 뱀은 ‘모든 나무’라고 함으로써 예외를 제거했다. ‘모든’ 열매를 먹을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모든’ 열매를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예외가 있었다. 뱀은 ‘모든’이라는 단어를 앞세움으로써 ‘모든’에 들어가지 않은 한 그루 나무를, 예외를, 여자의 머릿속에, 오롯이 떠오르게 했다. 뱀이 말하기 전에 신의 말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동산과 동산의 열매들은, 하나의 예외에도 불구하고, 허용된 것이었다. 그러나 뱀이 말을 하자 동산과 동산의 열매들은, 하나의 예외로 인해, 금지된 것이 되었다. 되짚어 볼 이유가 없던 신의 말은 되짚어 볼만한 것이 되었다. 동산과 동산의 열매들은 은혜만은 아닌 것이 되었다. 은혜는 지워지고 금지의 법이 도드라졌다. ‘마음대로 먹을 수 있다’는 희미해지고 ‘먹을 수 없다’는 뚜렷해졌다. 허용된 나무들은 뒤로 물러나고 금지된 나무만 앞으로 튀어나왔다. 동산의 다른 나무와 구별되지 않던 한 그루의 나무가 특별해졌다.
여자는 말했다. “우리는 동산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마음대로 먹을 수 있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신은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죽을 거라고 했다.” 여자는 주저없이 말했지만 자기가 뱀의 화법을 모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뱀은 신의 말을 교묘하게 왜곡했고 또 과장했다. 신이 애초에 한 말과는 달리 동산의 ‘모든’ 나무의 열매가 금지된 것인지 물음으로써 여자의 머릿속을 휘저었고, 그게 정말이냐? 라고 의외의 소식에 놀란 것처럼 과장함으로써 여자의 마음을 얻으려고 했다. 뱀은 영리하고 교묘했다. 여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뱀은 사람을 걱정하는 것처럼 말했다. “세상에! 그렇게 말했다는 게 정말이냐?” 여자는 자기를 위하고 걱정하는 것 같은 뱀의 ‘말’에 넘어갔다. 뱀의 마음은 보이지 않았으므로 말에 걸려들었다. 금지된 한 나무에 대해 해명하려는 것이 여자의 뜻이었다. 그 과정에서 모방이 일어났다. 여자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신이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했다고 말할 때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뱀의 화법을 모방했다. ‘만지지도 말라’는 신이 한 말이 아니었다. 신은 ‘먹지 말라’고 했으나 여자는 거기에 ‘만지지도 말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 열매를 만지지도 않은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이 신의 말에 자기 말을 첨가하고 있다는 걸 의식하지 못했다. ‘먹지 말라’는 신의 말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만지지도 않았다. 다가가지도 않았다. 억지로 지킨 것이 아니라 마땅히 지켰다. 먹을 마음이 없었으므로 만지려는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그러니까 여자에게는 먹지 않는 것과 만지지 않는 것에 차이가 없었다. 뱀과 대화하는 그 순간에 그 둘은, 그녀의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구별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먹지 말라는 명령은 만지지 말라는 명령과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아니,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 말을 할 때 그녀는 뱀의 섬세하고 영리한 말의 기술에 넘어갔고, 자기를 걱정하는 듯한 뱀의 수작에 유혹되었고, 그래서 자기를 위하는 (것처럼 보이는) 뱀의 마음에 들 만한 말을, 자기도 모르게 하고 말았다. 첨언, 과장, 그리고 왜곡. 그녀는 자기가 뱀의 화법을 흉내 내고 있다는 걸 몰랐다. 신의 말에 자기 생각을 덧댐으로써 정언(定言)인 신의 말을 수정과 변경이 가능한 일종의 의견으로 만들고 있다는 걸 인지하지 못했다. 그 말을 지키지 않으면 죽을 거라고 했다고 말할 때 여자는 거의 고자질하는 사람처럼 되었으나 그녀는 그 역시 알지 못했다. 그 순간, 신은 금지하고 경고하는(“열매를 먹지 말고 만지지도 말라. 그렇지 않으면 죽을 것이다.”) 이였고, 뱀은 위하고 걱정하는(“신이 열매를 먹지 말라고 했다고, 그게 정말이냐?”) 이였다. 위하고 걱정하는 이 앞에 금지하고 경고하는 이가 고발당하는 형국이었으나 여자는 그것을 몰랐다.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흐릿한 불안이 안개처럼 여자의 내부로 스며들었다. 곧 여자의 마음속은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의 땅처럼 되었다.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었다.
2.
혼돈하고 공허하며 깊은 어둠에 잠긴 여자의 내면을 휘젓기라도 하려는 듯 뱀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여자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 동작은 느리지만 현란했다. 현란하지만 조용했다. 여느 때처럼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움직이고 소리 내지 않는 것처럼 소리 냈다. 그래서 뱀이 그리는 곡선은 야릇했다. 하늘과 땅이 크고 부드러운 곡선으로 연결된 듯했다. 여자는 뱀의 움직임에 시선을 빼앗겼다. 뱀이 자기 몸을 이상하게 비틀어 꼬아 찌그러진 원을 만들 때 여자는 포위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 열매를 먹어도 죽지 않을 것이다. 너희가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신처럼 될 것이다. 신은 너희가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신처럼 되어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것을 알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너희가 신처럼 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말한다. 너희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너희는 신처럼 될 것이다.” 뱀이 선언하듯 말했다. 여자는 죽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으므로 죽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뱀은 그 열매를 먹으면 눈이 밝아질 거라고 하고 선과 악을 알게 될 거라고 했다. 그러나 여자는 눈이 밝아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고,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다. 여자는 눈으로 동산에 있는 모든 것을 보고 있었으므로 자신의 눈이 밝아져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고, 선과 악을 알지 못했으므로 그것을 아는 것이 왜 중요한지, 혹은 위험한지 이해할 수 없었다. 동산에서 그들은 부족한 것이 없고 불만도 없었다. 무엇이 더해져야 할 상태가 아니었으므로 여자는 뱀의 말이 의아했다. 뱀이 약속한 것에 마음이 가지 않았다. 뱀은 여자에게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여자의 부족과 결핍을 부각하려 했지만, 여자는 자신이 부족과 결핍의 상태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나아질 거라는 기대를 가질 수도 없었다. 현재 상태에 대해 불만이 없는 사람은 그 상태를 바꿀 욕망도 갖지 않는다. 욕망은 일종의 메우려는 마음 같은 것이다. 욕망은 메울 것이 없는 상태에서 출현하지 않는다. 눈이 밝아지고 선과 악을 알게 되리라는 약속은, 뱀의 의도와는 달리, 여자의 마음을 흔들지 못했다. 여자의 마음을 흔든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신처럼 될 것이다’였다. 눈이 밝아지는 게 어떤 것인지 선과 악을 알게 되는 게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래서 흔들리지 않았지만, ‘신처럼 될 것이다’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신을 알았고, 신처럼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어렴풋이 알았다. 신은 사람인 그들과 달랐다. 그 말은 사람인 그들이 신과 다르다는 뜻이었다. 신과 사람은 하늘이 땅에서 먼 것처럼 멀었다. 하늘은 땅을 알지만 땅은 하늘을 알지 못한다. 신은 사람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지만, 사람은 신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사람이 신에 대해 아는 것은 알 수 없다는 것뿐이었다. 그렇지만 여자는 한 번도 신의 상태를 동경하지는 않았다. 신은 신이었고 사람은 사람이었다. 그것은 하늘이 하늘이고 땅이 땅인 것처럼 당연했다. 사람은 사람으로 만족했다. 만족을 위해 무엇이 더해져야 하거나 다른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만족하고 있는 동안은 더 큰 만족에 대한 바람은 생기지 않는다. 더 큰 만족에 대한 바람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만족하지 않고 있는 사람이다.
신은 경외의 대상이었지 선망의 대상이 아니었다. 따라서 신을 시샘하거나 부러워하지 않았다. 그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신처럼 될 거라는 말을 들었을 때, 여자의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그의 내부에 갑자기 메워야 할 빈 공간이 생겼다. 신의 남다름이 부러워지는, 불가능한 일이 일어났다. 뱀은 여자가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했던, 자기 안에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던 것을 욕망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 그녀는 신이 부러워졌고, 신처럼 되고 싶어졌다. 눈이 밝아지고 선과 악을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여전히 몰랐지만, 그것은 그녀가 신처럼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어렴풋하게 그것을 느꼈고, 그러자 신처럼 되어 눈도 밝아지고 선과 악을 아는 게 무엇인지도 알고 싶다는 욕망이 속에서 들끓었다. 신은 먹지 말라고 했고, 먹으면 죽을 거라고 했다. 그러나 뱀은 먹으라고 했고, 먹어도 죽지 않을 거라고 했다. 죽지 않을 뿐 아니라 신처럼 될 거라고 했다. 신처럼 되어 앎을 얻게 될 거라고 했다. ‘신처럼.’ 그녀는 그 말에 붙들렸다. ‘신처럼 되리라.’ 그 문장이 그물이 되어 그녀를 포획했다. 이제까지 없던 욕망이 여자를 움직였다. 그 순간 신은 그녀가 욕망할 수 있는 대상,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부러움과 모방의 대상, 탐하고, 어쩌면 취할 수도 있는 대상이 되었다. 욕망이 그녀를 이끌어 신의 말 대신 뱀의 말을 듣는 쪽을 선택하게 했다.
뱀은 현란한 곡선을 그리며 앞장섰다. 앞장섰지만 고개는 뒤로 돌려 여자에게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여자는 그 눈길에 제압당했다. 여자는 홀리는 듯한 뱀의 움직임에서 눈을 돌리지 못했다. 그들은 어느새 동산의 한가운데 이르러 있었다. “보아라, 나무를.” 뱀이 고개를 치켜들고 두 갈래로 갈라진 혀를 날름거렸다. 뱀이 말하자 여자의 눈길이 옮겨 갔다. 그곳에 그 나무가 있었다. 신에 의해 먹는 것이 금지된 열매를 매달고 있는 나무. 여자는 보았다. 동산의 다른 나무와 마찬가지로 그 나무도 열매를 가득 매달고 있었다. 보기에 좋았고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동산의 다른 나무와 다르지 않았다. 동산의 나무는 하나같이 아름답고 맛있어 보이는 과일을 맺었다. 이 나무는 무엇이 다른가. “보아라, 열매를.” 뱀이 말했고, 여자는 보았다. 그 나무에 달린 열매들은 아름답고, 먹음직스러웠고, 그것은 동산의 다른 나무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뱀은 열매를 보라고 했고, 여자는 보았고, 여자는 그 나무의 열매에서 다른 걸 보았다. 그냥 보기 좋고 먹음직스럽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식욕이 아니라 다른 게 그녀의 내부에서 꿈틀거렸다. 그것이 무엇인지 여자는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그러나 곧, 혼란 속에서 여자는 자기가 그 열매를 먹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가지고 싶어 한다는 것을 어렴풋하게 느꼈다. 그 느낌은 낯설었다. 사람은 동산에 있는 모든 것을 누렸다. 동산에 있는 어떤 것에 대해 누구의 소유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의 것이 아니었지만 그들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신의 것이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그저 있고, 고유한 존재로 있고, 서로에게 서로를 내주며 있었다. 모든 것은 탐하거나 취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탐하고 싶다니! 취하고 싶은 마음이 들다니! 그런 마음을 가진 적이 없었다. 어떤 나무의 어떤 열매도 그런 마음을 주지 않았다. 그런 마음이 어디서 생겨난 것일까. 그녀는 흔들렸다. 대체 그 마음은 어디에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 그녀를 흔드는 것일까. 여자는 자기도 모르게, 탐스럽다, 라고 중얼거렸다. 그 말이 그녀의 입술을 열고 빠져나오자마자, 아니, 빠져나기도 전에 뱀이 그녀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부드럽게 말했다. “지혜롭게 할 만큼.” 각기 다르게 발화된 두 마디 말이 한 문장으로 완성되었다. 그 순간 신처럼 되리라는 말이 여자의 귓속에서 맴돌았다. 그것은 뱀이 한 말이었다. 여자는 짜릿한 흥분을 느꼈다.
신은, 그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죽을 거라고 말했다. 뱀은, 그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신처럼 될 거라고 말했다. 뱀의 그 말이 신의 말을 해석하는 척도로 작용했다. 먹으면 죽기 때문이 아니라 신처럼 되기 때문에, 신처럼 되어 선과 악을 분별하게 되기 때문에, 신처럼 지혜로워지기 때문에 금한 것이구나. 신은 신이 아닌 누군가가 신처럼 되는 것을 원치 않는 거구나. 뱀의 말이 기준이 되자 모든 것을 허락하기 위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신의 다정한 충고는 신처럼 되는 것을 막기 위한 위협으로 바뀌었다. 나무의 열매가 탐스러워 보인 이후 그녀는 걷잡을 수 없어졌다. 나무의 열매는, 그 순간, 그녀의 눈에, 신처럼 되게 할 만큼 탐스러웠다. 그녀는 열매를 먹고 싶어 한 것이 아니라 탐내었다. 신처럼 되게 할 만큼 탐스러워서 탐내었다. 그 순간 그녀가 탐낸 것은 무엇을 먹거나 갖는 것이 아니라 ‘누구처럼’ 되는 것이었다. 신이 가진 과일이 아니라 신 자신이 여자가 욕망하는 대상이었다. 먹지 말라고 한 것을 먹지 않는 것은 이제 어려워졌다. 그녀는 손을 뻗었고, 과일을 만졌고, 따서 먹었다. 그것은 신의 말을 따먹는 것과 같았으나 그녀는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3.
여자는 그 나무의 열매를 따서 먹고 남자에게 주었다. 남자도 그것을 먹었다. 그러자 뱀이 말한 일이 정말로 일어났다. 그들의 눈이 밝아졌다. 눈이 밝아지는 것이 어떤 상태인지 그 말을 들을 때는 물론 과일을 먹기 전까지도 몰랐다. 과일을 먹자 저절로 알게 되었다. 전에 보이지 않던 것이 보였다. 뱀이 말한 대로였다. 그러나 뱀이 말한 그대로는 아니었다. 밝아진 눈으로 그들이 맨 먼저 본 것은 자기들의 벌거벗은 몸이었다. 여자는 남자의 벌거벗은 몸을 보았고, 자기 역시 남자와 마찬가지로 벌거벗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남자는 여자의 벌거벗은 몸을 보았고, 자기 역시 여자와 마찬가지로 벌거벗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들은 처음부터 벌거벗고 있었으나 그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벌거벗은 몸은 처음부터 그들의 존재 상태였고, 그러므로 의식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들은 둘이었지만 한 몸과 같았으므로 벌거벗고 있으면서도 서로의 벌거벗은 몸을 보지 않았다. 그들은 둘이었지만 한 몸과 같았으므로 상대의 벌거벗은 몸을 다른 몸으로 구분하지 않았다. 눈이 밝아지자 갑자기 상대의 벌거벗은 몸이 보였다. 벌거벗은 몸을 한 다른 사람이 비로소 보였다. 벌거벗은 여자는 벌거벗은 남자를 보았고, 벌거벗은 남자는 벌거벗은 여자를 보았다. 그것은 그들이 한 몸과 같은 상태를 상실했음을 의미한다. 그것이 눈이 밝아진 사람에게 나타난 현상이었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한 사람이 아니었다.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었던 여자는 남자에게 다른 사람이 되었고, 남자 역시 여자에게 다른 사람이 되었다. 서로는 서로에게 남이 되었다.
그들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들은 서로를 볼 수 없었다. 상대가 벌거벗고 있었기 때문이고, 벌거벗고 있는 자신을 상대가 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상대에게 자신의 벌거벗은 몸을 보일 수 없었다. 그들은 상대의 벌거벗은 몸을 볼 수 없었다. 그들은 외면하고 피했다. 다른 사람(의 벗은 몸)을 의식할 때 이런 감정이 생긴다는 걸 그들은 알게 되었다. 누군가 다른 이의 존재가 부끄러움의 생성 조건이라는 걸 그들은 알게 되었다. 그가 다른 사람이 아닐 때 그녀가 느끼지 않았고, 그녀가 다른 사람이 아닐 때 그가 느끼지 않았던 부끄러움이 그들 속에서 발생했다. 혼자 있으면서 부끄러움을 느낄 때가 없지 않지만, 그것은 누군가 다른 이를 떠올리거나 어떤 상황을 상정할 경우이다. 그 경우가 아니면 사람은 결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 다른 사람 앞에서라면 마땅히 부끄러움을 느낄 만한 행동을 하고도 아주 친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예컨대 한 몸과 같다고 여기는 사람 앞에서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부끄러움은 벌거벗음을 자각한 데서 말미암은 무의식적인 반응이 아니라 타인의 존재를 인식한 데서 말미암은 의식적인 감정이다. 부끄러움은 어떤 행동이나 상태의 옳고 그름에 대해 말하지 않고, 그 행동이나 상태를 보는 ‘밝은’ 눈, 그 눈을 가진 어떤 사람에 대해 말한다. 그러니까 벌거벗음은 부끄러움의 조건이 아니다. 그동안 그들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이제 그들은 벌거벗음을, 벌거벗었기 때문이 아니라 벌거벗음의 상태를 보는 다른 사람의 눈, 그 눈을 가진 사람으로 인해 부끄러워한다. 부끄러워서 그들은 서로의 눈을 피하고 몸을 감춘다. 그들은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몸을 가렸다. 그것이 그들의 첫 치장이었다. 치장의 동기는 감추기였다. 그들은 감추기 위해 꾸몄다. 치장은 위장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보았다. 그들 앞에서 그들을 보고 있는 뱀은 누구보다 벌거벗은 몸이었다. 동산의 어떤 동물도 그처럼 벌거벗지는 않았다. 뱀은 처음부터 벌거벗고 있었으나 그들의 눈에는 그제야 보였다. 그들은 뱀이 그들과 마찬가지로 벌거벗고 있다는 사실에 당황하고, 뱀이 동산의 누구보다 더 벌거벗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동산에서, 그들 말고는 뱀처럼 벌거벗은 자가 없었다. 벌거벗은 그들은 벌거벗은 뱀과 같았다. 그 사실이 그들의 마음을 어지럽게 했다. 그들은 신의 형상으로 태어났으나 이제 뱀과 닮아져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느꼈다. 신의 형상을 잃은 그들은 뱀처럼 되었다. 그것이 밝아진 눈으로 그들이 알게 된 지식이었다. 뱀은 ‘신처럼 되리라’고 말했지만 그들이 본 것은 뱀처럼 된 그들의 모습이었다. 그러자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들에게 지키라고 주어진 신의 말이 그 순간 크게 들려왔기 때문이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마라. 먹으면 죽을 것이다.”
부끄러움은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부끄러움은 다른 사람을 의식할 때 생기지만 두려움은 신을 의식할 때 생긴다.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용감한 사람이 아니라 신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이다. 의식 속에 신이 없으면 두려워할 일을 하고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두려워할 일이란 게 없으므로 두려워하지 않는다. 신의 말/계율을 의식에서 제거할 때 인간의 어떤 행동도 두려움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죄‘의식’을 가진 사람이 두려워한다. 죄를 지은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 그동안 동산의 남자와 여자에게 신은 의식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들은 동산에 있는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신 역시 의식하지 않았다. 신은 단지 있었다. 그들의 의식과 상관없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금지된 나무의 열매를 먹고 눈이 밝아진 사람은 신을 의식하고 인식하는 자가 되었다. 남자와 여자는 보고 파악하고 판단하는 신의 시선을 의식했다. 신에게 사람이 그런 것처럼 사람에게 신은 인식의 대상, 파악과 판단의 대상이 되었다. 뱀이 고자질한 바에 따르면, 그것은 신의 권한이었다. 사람에게는 불필요하거나 거추장스럽거나 해로운 능력이었고, 그래서 허락되지 않았지만, 그것이 주어지기 전에는 그렇다는 걸 몰랐고, 그래서 탐냈고, 이제 사람은 자기가 먹은 열매의 효과를 회피할 수 없었다. 사람은 사람에게 부끄럽고 신에게 두려움을 느끼는 존재가 되었다.
4.
날이 저물어 갈 무렵 동산에는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거닐기 좋은 시간이었다. 선악과를 먹기 전에 남자와 여자는 그 시간에 간혹 신을 만났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는 여느 때처럼 신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자 여느 때와는 달리 그분의 얼굴을 피해 나무 사이에 몸을 숨겼다. 엄습하는 두려움이 신으로부터 달아나게 했다. 그러나 물론 신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다는 걸 그들은 모르지 않았다. 사람은 달아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달아나려고 했다. 두려움 때문이었다. “사람아, 어디 있느냐?” 신이 그들을 불렀다. 목소리는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여느 때와 달리 신이 그들을 나무라고 있다고 느꼈다. 듣는 이의 기분이나 상태가 발화된 말에 감정을 부여한다. 물론 말하는 이의 기분이나 상태에 따라 말에 감정이 담기는 게 우선이다. 그러나 말하는 이의 감정과 상관없이 듣는 이의 기분이나 상태에 따라 감정이 발생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때 발생한 감정이 말의 뜻을 규정하는 일도 일어난다. 가령 신이 사람에게 “어디 있느냐?”고 물었을 때 신이 묻고 있는 것은, 아마도 위치였을 것이다. 사람이 있는 장소를 신이 몰랐을 거라는 뜻은 아니다. 신은 사람이 어디 있는지 알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렇게 질문하는 것이 부질없거나 이렇게 물으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앎에도 불구하고 묻는다. 혹은 알기 때문에 묻는다. 신이 하는 말의 불가피한 특징이다. 모르는 것만 물어야 한다면 신은 아무것도 묻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신은 모르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신이 가진 속성으로 전제된 전지(全知)함이 제거된다. 아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묻는 것은 아는 것과 말하는 것, 혹은 말하는 것을 듣는 것이 다른 차원에 속하기 때문이다. 신은 알지만, 혹은 알기 때문에 묻는다. 사람이 말하는 것을 듣기 위해서 묻는다. 그런 물음이 있다. 사람은 그런 물음에 답함으로써, 그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무언가를 깨닫는다. 특히 자신에 대해 몰랐거나, 모르지는 않았지만 간과하고 있던 어떤 것에 맞닥뜨리는 경험을 한다. 그런 질문을 받은 사람은, 알고 있으면서 왜 묻느냐고 되물을 수 없다. 몰라서가 아니라 알고 있으면서 묻는 이가 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어디 있느냐?”는 질문을 받은 남자와 여자는 자기들이 어디 있는지 위치를 알려야 했다. 그러나 두려움에 사로잡힌 남자와 여자는 신의 말에서 책망과 나무람을 느꼈기 때문에 신이 그들의 위치를 묻는 게 아니라 왜 거기 있느냐고 묻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두려워서 숨었다고 대답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벗었으므로 당신이 두려워서 숨었습니다.” 그들이 벗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맨 처음 찾아온 것은 부끄러움이었다. 두려움이 아니었다. 벌거벗은 자기의 몸을 바라보는 타인의 벌거벗은 시선이 부끄러움을 느끼게 했다. 벌거벗은 타인의 몸을 바라보는 자기의 벌거벗은 시선이 부끄러움을 느끼게 했다. 그래서 그들은 나뭇잎을 엮어서 몸을 가렸다. 다른 이의 시선으로부터 자기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그런 치장이, 위장이 필요했다. 그런데 그들은 지금, 왜 벗었다고 말하는 것일까. 그들은 벗은 몸을 가리기 위해 나뭇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 나뭇잎으로 만든 옷이 그들의 벗은 몸을 가리고 있다. 벌거벗음의 상태는 해소되었다. 부끄러움도 아마 해소되었을 것이다. 그래야 마땅하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의 치장은 무익하고 부질없는 짓이 되고 만다. 그런데 왜 그들은 “우리가 벗었으므로”라고 말하는 것일까. 입었으면서, 가렸으면서 여전히 자기들이 벗었다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가렸지만 가려지지 않았다고 고백하는 것일까. 숨기려 했지만 숨겨지지 않았다고 선언하는 것일까. 모든 것을 보는 신의 눈을 어떤 위장으로도 피할 수 없다고 진술하는 것일까. 아마도. 몸을 가릴 때 가려지는 것은 몸이다. 몸 말고는 없다. 그러나 몸에만 머물지 않는 신의 눈앞에서 사람의 벌거벗음의 상태는 결코 해소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나무 사이로 몸을 숨긴다. 그러나 그들이 몸을 숨긴, 잎이 울창한 나무도 그들을 감춰 주지 못한다. 무엇으로도 감출 수 없다. 어디를 가도 신의 눈을 피할 수 없다. 벌거벗었다는 것이 그런 뜻이라는 걸 선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그들은 안다. 그래서 신의 눈을 의식할 때 부끄러움이 아니라 두려움이 몰려온다. 아니, 신에 대한 부끄러움이 두려움으로 나타난다. 그들은 이제 신의 눈을 피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신 앞에 나타날 수 없다. 숨었지만 신은 그들을 보고, 숨었으므로 그들은 신을 보지 못한다.
“그대들이 벗은 것을 누가 알려 주었느냐?” 이번에도 신은 물었다. 물음의 형식으로, 남자와 여자가 처음부터 벗고 있었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그것이 사람의 원래 상태였음을, 벗고 있었지만 벗고 있다는 걸 의식할 필요가 없었음을 상기시켰다. 그들이 벗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누군가 알려 주었기 때문임을 알게 했다. 그랬다. 금지된 나무의 열매를 먹자 눈이 밝아졌고, 그러자 남자와 여자는 자신들이 벌거벗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앎이 부끄러움으로 이어졌다. 벌거벗어서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벌거벗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서 부끄러웠다. “내가 먹지 말라고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구나.” 남자와 여자의 귀에 이어진 신의 목소리는 한탄하는 것처럼 들렸다. 자신의 말을 범한 사람에게 실망하고, 사람에게 자신의 말을 범할 자유까지 부여한 것을 후회하는 것처럼 들렸다. 사람은 신으로부터 받은 그 자유를 신의 말을 범하는 데 사용했다. 신이 금지한 것은 허락하기 위해서였다. 하나의 금지를 통해 전부를 허락하는 것이 신의 법이었다. 심지어 신은 그 법을 범할 자유까지 허락했다. 사람은 신과 다른 존재였고, 신의 무한을 결코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신이 될 수 없지만, 그러나 신은 사람이 신과 함께, 신처럼 살기를 원했고, 그래서 법을 주었다. 신의 법은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 신과 함께 살 수 없는 사람이 신과 함께 살 수 있었던 것은 그 법 때문이었다. 허락을 위한 신의 금지를 뱀은 금지를 위한 허락으로 왜곡했다. 그들이 그 나무의 열매를 먹고 신처럼 될까 봐 모든 것을 허락한 것인 양 현혹한 거라고 신을 고발했다. 사람은 이미 동산에서 신처럼 되어 살고 있었지만, 사람은 그것을 몰랐고, 뱀은 그 사실을 이용했다. 동산 한가운데 있는 한 그루 나무가 금지된 것은 동산 전부가 금지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주입해 사람을 속이고 신의 말을 의심하게 했다. 신의 선한 법은 뱀에 의해 나쁜 법으로 둔갑했다. “신처럼 되리라.” 뱀의 현혹은 성공했다. 사람은 ‘신처럼’ 되려는 욕망에 미혹되어 ‘신과 함께’ 사는 삶을 잃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신의 얼굴을 피해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어디를 가도 신의 눈길을 피할 수 없다는 걸 그들은 알았다. 그래서 더 두려웠다.
남자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신에게 어떤 것도 숨길 수 없다는 걸 알고 대답했다. “당신이 나와 함께 있게 한 여자가 먹으라고 주어서 그 과일을 먹었습니다.” 남자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고, 그 말을 하면서 수치심을 느꼈다. 사실에 어긋난 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참된 말을 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신이 여자를 데려왔고, 그 여자가 과일을 먹으라고 준 것도 사실이지만, 사실인데도 그런 말을 하는 자기가 어쩐지 떳떳하지 않았다. 변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변명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변명을 하는 사람은 떳떳해질 수 없다. 사실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무슨 뜻으로, 어떤 마음으로 그 말을 하느냐가 관건이다. 변명을 위해 동원되는 순간 사실의 가치는 처분된다. 남자는 신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신에게는 사실을 확인할 의도가 없었다. 신은 여자를 향해 어째서 그렇게 했느냐고 물었다. 이때 신은 아마 한숨을 쉬었을 것이다. 여자는 뱀이 꾀어서 먹었다고 대답했는데, 그녀 역시 그 말을 하면서 수치심을 느꼈다. 그 역시 변명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에 어긋난 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참된 말을 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뱀이 현혹한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인데도, 그런 말을 하는 자기가 어쩐지 떳떳하지 않았다. 남자는 물론 여자도 자기들이 입에 올리지 않은 말이 무엇인지 모르지 않았다. 그들이 신에게 고해야 하는 말이 무엇인지 모르지 않았다. 그것은 ‘신처럼 되리라’는 뱀의 말이었다. 뱀으로부터 그 말을 들을 때 여자의 내면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꿈틀거렸었다. 여자로부터 그 말을 들을 때 남자의 내면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꿈틀거렸다. 그들은 신처럼 되고 싶었다. 그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말을 하지 못했다.
5.
신은 사람을 동산에서 쫓아냈다. 신처럼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신처럼 되어 있는 원래의 상태를 잃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동산에서 신처럼 되어 있었던 것은 신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의 말을 듣는 것, 그것이 신과 함께 있기 위한 조건이었고, 신과 같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이제 사람은 신의 말을 범했고, 눈이 밝아져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을 가졌다. 눈이 밝아진 사람은 이제 신의 말이 아니라 자신의 판단에 따라 선과 악을 결정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동산은 어지러워질 것이다. 사람은 남자와 여자, 나와 남, 정신과 몸, 흩어진 여럿인가 하면 각자이고, 이곳과 저곳, 지금과 나중에 따라 흔들리고 요동치는 존재여서 사람의 어떤 판단도 완전할 수 없고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다. 우연적이고 일시적이고 임시적일 것이다. 이 판단과 저 판단이 부딪칠 것이다. 이 지식과 저 지식이 충돌할 것이다. 주장과 의견이 싸울 것이다. 어떤 판단이나 지식도 절대적일 수 없을 것이다. 동산은 불가피하게 훼손될 것이다. 신이 될 수 없는데 신이 되려고 해서, 신을 경배하는 대신 선망하고 모방해서, 신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말을 앞다투어 내놓으려고 해서 사람들의 세상은 어지러울 것이다. 그래서 신은 사람들을 쫓아냈다. 다시 들어오지 못하도록 동산의 동쪽에 천사들을 배치하고 불칼로 지키게 했다. 사람을 그들의 근본 원소인 땅을 경작하며 땅과 함께 살게 했다. “땅은 너희에게 가시와 엉겅퀴를 낼 것이다. 너희는 이마에 땀을 흘리며 고되게 일을 해서 먹고 살다가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너희가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흙이므로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동산에서 추방하기 전에 신이 그렇게 선언했다.
사람은 이제 동산 밖에서 살았다. 동산 밖에서 사람의 삶은 의무가 되었다. 자유로 주어졌던 생명이 의무로 바뀌었다. 그들은 살도록 규정되었다. 그들은 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삶은 누리는 대신 감당해야 하는 것이 되었다. 수고와 굴욕과 자의식이 사람에게 더해졌다. ‘신과 함께’ 하는 삶을 잃고 ‘뱀처럼’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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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 2025-04-01
성한 입 이현석 아기 앓는 소리에 눈을 떴다. 박명이었고 아직 분유 먹일 시간은 아니었다. 어두운 잠귀를 이유로 밤 당번을 자처한 것은 나였으나 의지와 달리 본성은 강했다. 아내가 자리끼 컵을 산산조각 냈을 때도 세상모르고 코만 곯았다는데 율이와 둘이 잔 뒤로는 아이가 내는 작은 소리에도 눈이 금방 뜨였다. 바닥에 깔아 둔 매트리스에서 몸을 일으킨 나는 아기 침대를 내려다보았다. 율이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두 눈을 꼭 감은 채 입을 오물거렸다. ‘아빠가 또 속았네.’ 잠은 설쳤어도 흐뭇했다. 이 작은 목숨이 간밤을 또 무사히 넘겼구나. 그 마음을 얹고 도로 몸을 뉘었는데 다시 잠에 들지는 못했다. 아기방 창문에 맺힌 물방울이 거슬렸다. 창문은 밤새 돌린 가열식 가습기 탓에 부러 흩뿌린 것처럼 흥건했다. 문득 재건축 조합 단톡방에서 보았던 잡담이 떠올랐다. 유명 로펌을 다니느라 바쁜 딸과 얼마 전 개원한 의사 사위를 대신해 손주 둘을 보느라 겨우내 가습기를 틀었더니 옷장 안에서부터 피어난 검은 곰팡이가 벽면 한쪽을 잡아먹었다는 이야기였다. 시황 따라 일이 억은 우습게 에누리하는 아파트에서 곰팡이 걱정이라니. 직면한 현실과 지난봄 우리 부부가 치른 비현실적인 가격 사이의 뚜렷한 차이에 헛웃음이 나왔다. 물론 현실만 따지면 놀랍지 않았다. 아파트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박정희 정권이 삼화토건 회장 도예종, 매일신문 기자 서도원, 경북대학교 총학생회장 여정남 등 여덟 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예비음모 등으로 사형을 선고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형을 집행했던 바로 그해에, 여의도의 다른 구축 아파트와 마찬가지로 박정희의 명령으로 완공됐다. 반세기가 넘은 건물이었다. 근대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곰팡이는 당연했다. 화장실에서 바퀴벌레를 보아도 놀랄 것이 없었고, 개수대에서 썩은 내가 올라와도 그러려니 했다. 아내와 함께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여름밤에는 통통하니 살이 오른 쥐가 아파트 복도 반대편으로 내달리는 모습을 본 적도 있다. 기함할 듯 놀란 나와 달리 아내는 대수롭지 않아 하며 현관문을 열었다. “오빠, 견뎌. 이게 실거주 투자의 현실이야.” 아내는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말했으나 나는 그 말을 묵직이 받아들였는데 싱글일 때부터 정석대로 자산을 늘려 온 아내의 투자 이력을 알아서였다. 현관문을 잽싸게 닫은 나는 만삭이 된 아내의 배를 쓰다듬으면서 “충성충성”이라고 촐싹댔다. 사실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만 해도 실감하지 못했다. 벌레나 쥐가 부르는 본능적인 혐오도 자산 증식이라는 대명제 앞에선 한낱 농담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곰팡이조차 농담일 수 없었다. 집에는 율이가 있었다. 가습기를 끈 나는 전날 벗어 둔 티셔츠를 집어 들었다. 율이가 깨지 않게 까치발로 창문에 다가갔다. 물기를 닦고서 창문을 미세하게 열었다. 서늘한 외풍이 실낱처럼 들어왔다. 재건축 단톡방에 상주하는 어르신들은 아침에 잠깐씩 이렇게 해 두면 곰팡이도 예방하고 아이
- 관리자
- 2025-04-01
흰옷 빨래의 날 안담 오늘은 마지의 기일이니까 흰옷을 모아 빨래를 한다. 마지가 유니폼처럼 자주 입던 크림색 티셔츠도 잊지 않고 꺼내서 빤다. 아마도 처음 살 때는 흰옷이었을 거다. 내가 애용하는 독일 브랜드의 캡슐 세제는 성능이 뛰어나다. 이 티셔츠에서는 마지의 냄새가 사라진 지 오래다. 이제는 나도 마지의 냄새를 잘 떠올릴 수가 없다. 꽤 강한 냄새였는데, 그런 냄새가 잊히기도 한다는 게 신기하다. 가끔 그 냄새를 다시 기억해 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4년 전 마지와 내가 처음 만났던 장소인 모둠 전집에 간다. 전을 굽는 작업대가 가게 밖으로 툭 튀어나와 있어서 포장 손님도 많은, 반은 노점인 그런 가게. 튀는 기름을 막기 위해 조리대 틈새와 철판 모서리에 은색 호일이 덧대어져 있고, 그럼에도 철판 가장자리나 작업대 위 처마에 쌓이는 기름때를 막을 수는 없다. 조용히 질색하며 지나치는 행인들, 저 시커먼 데서 맛이 나오는가 보다고 농담하는 손님들, 그런 사람들 사이에 섞여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기름 냄새를 맡는다. 이 냄새와 비슷했던 것 같아. 열과 기름과 사람이 합쳐서 내는 냄새. 전혀 아닐 수도 있지만. 적어도 이 냄새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기억만큼은 선명하다. 내 동거인의 냄새, 홍제천 스리룸의 주방 맞은 편 작은 방의 냄새, 마지의 냄새. 앞으로는 누구와 같이 살 생각이 없다. * 윤석열 나이로 스물아홉이 되던 2021년 겨울, 나는 당근마켓을 통해 홍제역 인근 스리룸의 하우스메이트를 구하고 있었다. 마지는 그 글을 보고 연락한 세 번째 사람이었다. 일반적인 시각에서 좋은 집으로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백련산과 홍제천이 코앞이고 인왕산이나 북한산도 비교적 멀지 않다는 점을 제외하면 인프라랄 게 없는 집. 인적 드문 가파른 언덕에 있고 북향이라 볕이 잘 들지는 않으며 어떤 역에서든 멀었다. 낡은 건물인데 월세는 70만 원으로 센 편이었다. 월세를 제외하면 그 집의 여러 요소는 내게는 장점이었다. 크고 힘 좋은 내 개와 오를 산이 있고 사람은 만나기 힘들다는 게. 스리룸에 방들이 크고, 연식이 오래된 집의 컨디션을 의식한 집주인이 못 박기를 포함해 여러 변화를 허용해 준다는 점도 좋았다. 나부터가 담배를 피우기 때문에 흡연자도 좋았다. 내가 대형견과 산다는 사실은 누군가에게는 극단적인 장점이고 누군가에게는 극단적인 단점이었을 테다. 내 개는 순하다 못해 맹한 편이었지만, 글에는 남자나 키 큰 사람에게는 경계심을 보인다고 적었다. SNS로 하메를 구하는 여자에게 피곤한 사람이 얼마나 꼬이는 줄 아냐고 으름장을 놓은 지인이 많았기 때문이다. 지인 소개가 낫지 않냐는 조언도 숱하게 들었지만, 지인의 지인이 길거리에 다니는 아무개보다 더 좋은 사람일 거라는 전제에 동의가 잘 안되었거니와, 하우스메이트가 맘에 안 들었을 때 소개해 준 지인의 체면까지 고려해야 하는 상황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나의 구인 글은 짧아졌다 길어졌다를 반복하다가 이런 형태가 되었다. ‘홍제역 인근 스리룸 하메 구합니
- 관리자
- 2025-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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