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거짓말은 하얗게

  • 작성일 2025-06-01

   거짓말은 하얗게


김화진


   여름까지 나는 지옥에 사는 것 같았다. 그간 나를 못살게 군 건 단 두 가지뿐이었는데, 그게 하필 내가 끼고 살던 전부였다. 날아간 보증금, 사라진 남자 친구. 그 모든 걸 겪어 내는 동안 미친 듯이 찌는 혹독한 여름 날씨와 함께였다. 찜통 지옥. 전세 사기 지옥. 이별 지옥. 모든 일이 일단락이 되고 거짓말처럼 가을바람이 불었다. 나는 드디어, 모든 손해와 마음에 남은 생채기와 우울감에도 불구하고 후련함을 느꼈다. 사실상 서로 아무 상관이 없는데도 서로가 단단히 엉켜 있는 것처럼 보이는 고민과 생각을 조금 내려놓아도 된다는 게 기뻐서, 얼굴은 여전히 우울한 표정을 하고서도 출근하는 걸음만은 비교적 가벼웠다.

   나는 베이비슈가 유명한 빵집 겸 카페에서 슈를 굽고 크림을 짜 넣는 일을 한다. 다른 빵도 굽지만, 그래도 슈를 가장 많이 굽는다. 빵집에서 하루 종일 서서 일하다 보면 다리가 퉁퉁 붓는다. 그래도 이 일이 좋다. 처음 시작했을 때는 앉아서 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젠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바삐 손을 움직이는 직업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더 크다. 집에 돌아가서 다리를 마사지하는 시간도 좋다. 디저트를 만드는 걸 좋아하지만, 사실 나는 단 걸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만드는 빵 중 짭짤한 치즈와 올리브가 들어간 발효빵을 가장 좋아한다. 하지만 내 빵 취향과는 상관없이 빵을 만드는 일은 좋다. 하얀 반죽을 만드는 일을, 하얀 크림을 짜내는 일을 좋아한다. 그게 단 빵일지라도. 그것의 맛을 죽도록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맛을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일하는 빵집의 외관은 흰 벽에 오렌지색 간판과 차양이 포인트인 유럽풍의 디자인이다. 나는 유럽을 가 본 적이 없지만, 그것이 유럽풍인 것만은 알 수 있다. 가끔 대청소를 하는 날이면 호스를 끌어다 흰 벽에 뿌려 밀대걸레로 쌓이고 덮인 먼지를 닦는데, 고되지만 그 작업도 좋다. 눈에 띄게 희어진 벽이 보기 좋아서 가끔 집에 혼자 누워 있을 때, 머릿속이 생각으로 뒤죽박죽되었을 때도 밀대걸레로 머릿속에 쌓인 생각들을 밀어 버리는 상상을 한다. 그러면 진짜로 좀 한결 나아진다. 몇 초도 지나지 않아 또다시 생각들이 꾸물꾸물 밀려오는 게 느껴지지만 그러면 한 번 더 싹. 그 상상을 몇 번이고 반복하다가 잠이 든다.


   내가 가장 많이 하는 생각들은 당연하게도, 여름까지 있었던 불행을 시간순으로 정리하는 것이었다. 이미 다 벌어진 일을 왜 몇백 번이고 다시 정리하는 걸까, 나도 모르지만 이유를 모르는 와중에도 생각은 계속되었다. 그 일로 책을 쓰려고 그러나 왜 자꾸 시간대를 맞춰 보는 거야? 시작은 전세 사기였다. 그것은 봄부터였다. 이 가게에 출근하기로 결정된 것이 봄이어서였다. 지금 일하는 가게에 출근하기 전까지 나는 조금 쉬고 있었다. 원해서는 아니었고, 조금 쉬고 싶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일을 그만두고 싶다는 마음은 아니었는데 이전에 일하던 가게에서 해고당했다. 그 일을 지옥에 포함시키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억울하거나 화가 나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렵게 어렵게, 두꺼운 손을 꾹꾹 주무르며 장사가 너무 안된다는 말을 하는 육십오 세의 사장님에게 나는 오히려 측은함을 느꼈다. 가게와 내가 함께 정리되었는지, 아니면 내가 정리되고 가게는 살아남았는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그 일은 내게 나쁜 일은 아니었다. 타의에 의해 일을 그만두고 쉬는 것도 생각보다 좋았다. 내 의지로는 그만둘 순 없었을 텐데, 잘려도 의외로 기분이 괜찮다는 것이 신기하고 좋았다. 낮에 낮잠을 자는 일. 남이 만들어 주는 빵을 먹으러 나가는 일. 낮에 집안일을 하는 일. 영화관에 가고 친구를 만나러 나가는 일. 그런 일들을 하며 좀 설렜다. 어른이 되고 아주 오랜만에 자려고 누웠을 때 내일 뭐 하고 놀지, 하는 생각을 했고 그런 생각을 한 내가 좀 귀여워 풋 웃었던 밤이 있었다. 불행의 기미는 초조함과 함께 왔다. 웃으며 잠드는 밤 사이에 불안하고 서늘한 심장 박동이 끼어든 것은 쉰 지 육 개월쯤 되었을 때였다. 어느 밤, 심장이 두근, 하고 뛰었는데, 그것을 시작으로 쫓기는 기분이 몰려들었다. 이제 슬슬 뭔가 해야 해. 날카로운 목소리도 날아들었다.

   급속도로 달궈진 마음을 양손으로 앗 뜨거 앗 뜨거 번갈아 쥐며, 제빵사를 필요로 하는 카페 대여섯 군데에 동시에 지원했고 몇 번의 탈락과 몇 번의 합격을 받아 들고 지금 일하는 곳에서 일하기로 결정했다. 이곳은 내가 이전에 살던 곳과 꽤 멀었고, 그래서 나는 이사를 하기로 했다. 환경을 조금 바꿔 새 마음으로 시작하고 싶었다. 전보다 더 단정하고, 더 씩씩하게. 그래서 평소라면 변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성격이지만 기운차게 집을 알아보러 다녔다. 잰걸음을 걸을 때에는 초조함이 지워졌고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가게와 가까운 곳에 공실이 많았다. 이전보다 조금 더 넓고 조금 더 깨끗한. 그런 방들을 보니 그래 원래 앉아 있던 곳에서 일어서 보길 잘했어,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 게 욕심이었을까. 숨이 트이는 여유 공간, 걸어서 출근할 수 있는 거리를 원했던 것이? 그것 때문에 마음이 급해져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계약을 하고 이사 날짜를 잡은 게 잘못이었을까? 나는 그것을 수백 번 되물었다. 답은 그렇다일 때도 있고 아니다일 때도 있었지만 분명한 것은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나아가기로, 변화하기로 결심하고 듬뿍 추가한 용기가 나를 주저앉혔다. 밍밍한 찌개를 살리려 넣었던 소금이 실은 설탕이었던 것이다. 아니면 설탕도 아닌 독이었거나.

   짐을 풀고, 이사를 하고, 정신없는 틈에 집주인이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실 일이 눈앞에 놓이기 전까지 원래 집주인은 연락이 잘되지 않는 사람인 줄만 알았다. 의심도 해 본 사람이 해 보는 것이다. 뉴스에 하루가 멀다 하고 오르내리는 전세 사기를 나도 당했고, 전셋집에 모든 걸 옮겨 놓은 와중에 사천오백만 원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대출을 제외한 사천오백만 원만이 내 돈이었다. 몇억씩 사기당한 사람들에 비해 내 전 재산 사천오백만 원은 너무 적은 걸까? 같은 일을 당하고 더 많은 돈을 잃고 더 많은 빚을 져서 자살한 사람들의 뉴스를 보면 피해자인데도 기분이 이상해서 밥이 잘 안 들어갔다. 먹어도 맛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어느 정도 이상으로 짜야 맛이 나네, 할 뿐. 저녁에 집에 돌아오면 감자칩이나 김치를 놓고 소주를 한 병 마셔야만 잠에 들 수 있었다. 고통은 그런 것이군, 내가 당한 고통만을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별별 생각들이 나를 점점 더 망치는 것이군, 그런 생각으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낮에는 텅 빈 눈으로 가게에 나갔다. 집에서 나서는 순간부터 가게로 향하는 길 내내 골목골목을 두리번거리며 이 동네가 뭐라고 나한테 이런 개 같은 일을 겪게 하지? 라고 분노를 뿌렸다. 이런 일을 당하고도 일하러 나가야 하나? 하지만 안 하면 또 어쩌겠는가 뭘 하겠는가 하며 터덜터덜 걸어 가게에 도착하는 것이다. 가게에 도착해서도 분노는 혼자 지글지글 끓었다. 이 가게에서 일하려고 내가 그 좆같은 일을 당한 거야? 라고 생각했던 순간이 있었으나 몇 주 내내 그러고 출퇴근을 하다 보니 원망을 하기에도 지쳐 버렸고 나는 체념했다. 그래 이 일자리라도 사랑하기로 했다. 미워해야 할 게 너무 많아서 새 일자리까지 미워할 수 없었다. 그러면 나는 탈진해 죽을 것 같았다. 이사 잘했어요? 라고 묻는 직원들에게 방긋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직 엉망이에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신세를 구구절절 말하는 것보다 그게 훨씬 말하기 쉬웠고 그렇게 말하면 사실보다 나은 느낌이 들기까지 했다. 일을 하며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좀 나았다. 그게 문제없는 세상처럼 느껴지니까.

   마음이 바싹바싹 마른 채 어느 새벽에는 눈이 왔다. 커튼이 반쯤 쳐진 창문 밖으로 희끄무레한 것들이 너울너울 비치는 것 같아 창문을 열어 보니 눈이었다. 4월인데, 라고 무심결에 중얼거리다가 4월이 되었음을 곱씹었다. 4월이 돼 버렸잖아. 할 수 있는 일 없이 분주한 채로 4월이 되었어. 방충망도 없는 창문이었다. 방으로 고스란히 들어오는 작고 하얀 눈 알갱이들을 얼굴로 맞았다. 정말 눈이네. 눈이 오네, 라고 중얼거렸는데 그 말이 금고의 비밀번호인 듯 뭔가가 열렸고 눈물이 쏟아졌다. 스스로도 좀 어이가 없었지만 확실히 좋았다. 뭐가 나를 울게 해 주면 얼마나 좋은지 몰라. 고마운지 몰라. 

   그런 새벽보다는 상태가 좋은 낮에도 가끔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충동이 들 때가 있었다. 그때 나는 쉬는 시간마다 남자 친구와 통화하며 그런 말을 했었다. 나 칼로 누굴 찌를 수도 있을 것 같아. 특히 돈이랑 집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게 진심이었다. 다른 것은 다 거짓말. 특히 웃는 얼굴은. 일하는 베이커리 주방에서 창고를 오가며, 홀에 앉은 손님들의 대화를 듣거나 테이블마다 앉아 있는 손님들의 얼굴을 볼 때 특히 그런 마음이 들었다. 죽이고 싶다. 항상은 아니고 가끔. 일하는 가게에는 중년 남녀가 자주 드나들었는데, 대화의 세부를 모르고 들어도 느낌만으로 그들이 어떤 주제로 얘기를 나누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느 정도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부동산 얘기를 했다. 그걸 팔아야 한다느니 지금 사야 한다느니, 그렇게 말하는 놈은 사기꾼이라느니 왜 그 사람 사정을 봐줘야 하냐느니 그런 말들이었다. 계약서나 서류 같은 걸 가운데 두고 전문적인 목소리와 리듬으로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정확히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르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나는 혐오감이 일었다. 때리고 싶고 죽이고 싶고, 그랬다. 후루룩 차를 마시고 내가 구운 베이비슈를 쩝쩝 먹는 그 주둥이를 쳐 버리고 싶었다.

   잊자고 마음먹었는데 그런 대화를 들어 버린 날이면 자꾸 돈 생각이 났다. 그 돈이 사라진 게 뭐 대수냐, 어차피 눈에 안 보이는 돈이었는데, 라는 생각과 그 돈이 야금야금 모인 시간과 그 돈을 모으던 훨씬 어렸던 나를 생각하면 가슴이 콱 막히면서 앞도 뒤도 없다는 마음이 꽝꽝 부딪혔다. 실제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면서 가슴에서 깨어지는 파편을, 격렬한 진동을 느꼈다. 폭발은 언제 어디서든 찾아와서 나는 속에서 다이너마이트 같은 걸 터뜨리며 두 손은 부드럽고 말랑한 반죽에 넣고 있었다. 같이 일하는 서버들과 점심을 먹으며 웃었지만 주방 마감을 하면서는 이를 악물고 있었다. 그 순간에도 예고 없이 가슴 속 밑바닥에서 폭발음이 들렸다.


   그런 마음으로, 격렬한 마음으로 새 일자리에, 하얗고 오렌지빛인 가게에 적응을 해 가던 때. 내가 안팎이 두 조각 난 채로 정신이 팔려 있을 무렵 남자 친구는 바람이 났다. 내 마음에 정신이 팔려 남자 친구의 마음도 두 조각이 나는 걸 보지 못한 것이다. 인생에서 바람이 났다는 표현은 정말이지 쓰고 싶지 않았는데. 그렇게 되었다. 상대는 나와 함께 아는 친구였다. 그 친구도 물론(?) 만나던 남자 친구가 있었다. 그럼에도 쿵짝이 잘 맞는다고 언젠가부터 둘이서 자주 보더라니. 둘이서만 만나도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았던 나는 내 남자 친구였던 사람이, 이제 그 애의 남자 친구가 되고 싶다고 털어놓을 때 너무 놀라서 내가 매일매일 만드는 흰 반죽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물렁물렁할 뿐이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그러니까 내가 그들의 심상치 않은 사이를 먼저 눈치챘다는 것을 그에게 말하지 않았다. 글쎄, 왜인지는 몰라. 그런 이상한 일은 그냥 물끄러미 바라만 보게 된다. 내 일이 아닌 것처럼. 날아간 사천오백만 원이 진짜 내 수중에 있었던가 하고 스스로를 의심하게 되었던 것처럼. 나는 어느 날 몰래 보기만 하던, 그들이 주고받은 메일과 카톡을 전부 캡처했다. 그것을 내 휴대폰으로 옮겨 두고 나서야 남자 친구에게 헤어지자고 했다. 이유는 말하지 않고. 네가 바람이 났잖아, 하고 말하지 않고 그냥 더는 못 만나겠다고 했다. 어쩐지 이유를 알려 주고 싶지 않았다. 얘가 아나? 모르나? 하고 사는 내내 살살 찔렸으면 좋겠다는 마음인지 뭔지. 바람이 난 건 저쪽인데도 헤어지자고 말하는 일은 어려웠다. 하나씩 캡처를 하고 그것을 몇 번이고 다시 읽어 본 뒤에야 용기가 났다. 그전까진, 헤어질 힘도 없었다. 오히려 그것들을 읽으며 누군가가 이렇게 헤어져야만 하는 이유를 정확하게, 빼도 박도 못하게, 모호하지 않게 건네준 것이 고맙기까지 했다. 부동산과 비교하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부동산과 얘기할 때는 무엇 하나 후련한 게 없었다. 뭘 얘기해도 방법이 없다는, 어렵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후련한 건 후련한 거고 남자 친구에게도 복수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루이틀 한 게 아니었다. 나는 생각 과다와 위염과 불안증을 얻을 동안 저 혼자 재미란 재미는 다 보고 다녔을 거라고 생각하니 괘씸해 죽을 것 같았다. 그때부터였다. 하얀 거짓말이 현장보존선처럼 내 몸 테두리에 온통 묻어 있기 시작한 것. 남들은 보지 못해도 내 눈엔 보이기 시작한 것이. 

   그것은 내가 하는 거짓말이었다. 하얀 가루로 보이는 거짓말. 그때부터 나는 습관적으로 내 몸을 툭툭 치는 버릇이 생겼다. 하얀 가루가 된 거짓말이 보일까 봐 걱정하는 것이다. 거짓말을 그만두지는 못하니까.

   이런 일이 있기 전에도 나는 자주 거짓말을 했다. 별거 아닌 것도 그냥 했다. 왜 하는지 잘 모르겠다. 언제부터 이렇게 습관이 되어 버렸는지. 한 가지 아는 것은 언제나 뭔가가 ‘싫어서’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설명하기 싫어서. 혼나기 싫어서. 눈물을 보이기 싫어서. 책임지기 싫어서. 나쁘게 보이기 싫어서. 실망시키기 싫어서. 멍청해 보이기 싫어서. 뭐가 좋아서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경우는 잘 없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거짓말을 잘한다는 건 어떤 걸까? 자주 한다는 의미에 가까울까, 들키지 않는다는 의미에 가까울까. 둘 중 굳이 분류하자면 나는 자주 한다는 쪽이다. 안 들켰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얼마나 자주 하는지는 셀 수 있으니까. 나는 본심을 말하는 순간이 적고 거짓말을 하는 순간이 더 많은 것 같다. 가장 많이 하는 거짓말은 ‘좋아!’다. 

   봄과 여름을 지나며 내가 가장 많이 한 거짓말 역시 ‘좋아’였다. 혹은 ‘좋아’의 여러 변주. 좋지, 그럼, 괜찮지, 아무렴··· 그런 말이었다. 다른 말을 할 힘이 없었다. 아니, 싫어, 안 괜찮아, 죽을 것 같아, 죽이고 싶어, 같은 말을 하면 듣는 사람들은 여지없이 왜! 무슨 일 있어? 하고 물어 올 것이고 나는 긴긴 이야기를, 내 이야기를 할 자신이 없다. 기초 회화 책에 등장하는 다이얼로그처럼 내가 가능한 대화는 정해져 있었다. 윤우 씨 괜찮아? 그럼! 주말에 대타 좀 해 줄 수 있어? 그럼! 오늘 가게 어땠어? 괜찮아! 오늘 컨디션은 어때? 좋아! 끝나고 맥주 마시러 갈까? 좋아! 나는 토 달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거짓말을 일삼기 시작하며 나는 나트륨 중독이 되었다. 거짓말이 하얀 가루로 남게 된 일은 어쩌면 당연한 인과인지도 몰랐다. 그게 뭐가 당연하냐고 묻는다면··· 내게는 해 줄 말이 많다. 부동산에서 계약을 했는데 집주인이 나른 건 말이 되고? 내 친구랑 내 애인이랑 바람 나는 건 말이 되고? 이것 역시 억지지만, 그렇게 치면 억지 아닌 게 어디 있냐는 말이다. 

   하루 동안 뱉은 거짓말은 퇴근 무렵 잘 말라 있다. 바닷물이 말랐을 때처럼 흰 소금 같은 가루를 남기고. 정말로 소금과 비슷한 성질인지 손으로 찍어 혀에 대 보면 아주 은은하게 짭짤한 맛이 났다. 거짓말은 바닷물 같은 건가 봐. 불순하고 하얀 것. 물처럼 섞인 다른 마음을 증발시키면 남는 것은 소금처럼 하얀 거짓말.

   그게 그냥 정신병인지도 모른다. 나에게만 보이는 하얀 거짓말 가루와 그것을 찍어 맛보는 손가락과 정말로 짠맛을 느끼는 내 혀는. 그렇지만 정신병이 안 올 수 있냐는 거다. 오는 게 정상이라는 거야. 눈에 보이는 거짓말의 하얀 가루는 내게 아무 일도 아니었다. 그보다 더 큰일은, 권순겸 같은 거다.


*


   권순겸은 내가 일하는 베이커리 카페의 서버다. 내가 들어온 지 몇 주 후 권순겸이 들어왔다. 권순겸이 아니었다면 나는 하루 종일 말을 하지 않고 지낼 수 있는데, 그럴 때 즈음 권순겸이 말을 건다. 대부분 시답지 않은 말이다. 저희 회식 안 하나요? 넷플릭스 그 드라마 보시나요? 새로 나온 빵 진짜 맛있네요. 그런 말들이다. 시답지 않은 말들인데 어떤 것 하나도 대답이 쉽지가 않다. 정확히 말하자면 대화로 이어지기가 어려운 말들. 나는 주로 네, 아니오, 그런가요··· 라고 대답을 하고 권순겸에게도 뭔가를 물어봐 줘야 하나 고민한다. 고민하는 사이에 권순겸은 다시 서빙을 하기 위해 홀로 휙 나가 있는 식이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그냥 말하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는 건가? 나는 자주 갸우뚱하지만, 오래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런 걸 생각할 뇌의 공간이 별로 없는 것 같다.

   뭘 잘 물어보는 권순겸은 첫인상만 보면 누가 뭘 물어봐도 대답하지 않을 것처럼 생겼다. 블러셔가 진하고 마스카라가 인상적이다. 저게 인터넷으로만 봤던 숙취 메이크업이라는 건가···. 손톱도 이삼 주에 한 번꼴로 색이 바뀌었다. 접객 태도도 너무 쿨해서, 가끔 보면 손님이 무안할 정도로 쿨해 보일 때가 있다. 아메리카노 시키셨죠? 덥석 내려놓기. 소금빵 드릴게요~ 심드렁. 조금 더 조심스럽고 친절한 말투와 태도가 좋을 텐데, 라고 생각하지만 차마 말하지는 못한다. 내게 하라면 그렇게 할 수 있나? 하는 고민이 따라붙어서다. 나도 못 한다, 는 결론이 났고 권순겸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손님을 대하는 나를 상상해 보면 자신이 없고 주눅이 들고 그냥 입 닫고 빵이나 만들게 된다. 그게 나의 최선.


   저는 래퍼예요.

   매장이 한가하던 어느 날이었다. 갑자기 권순겸이 말했다.

   아, 그래요.

   랩을 시작할까 봐 겁이 났다. 다행히 권순겸은 그러지 않았고.

   언제 노래방이나 같이 가죠.

   그런 말을 했다. 무섭긴 매한가지였다. 그런데 갑자기 나한테 그 말을 왜 했지? 싶었는데 권순겸은 그러니까 오해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

   제가 서빙 안 할 때 휴대폰을 보고 있으면 그게 딴짓하는 게 아니라 가사 쓰는 거거든요. 사장님이 자꾸 꼽을 줘서요.

   아, 그렇군요, 라고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그게 딴짓이잖니? 하고 생각했다. 여느 때처럼 나는 속마음과는 상관없는 대답을 했고 권순겸에게도 그런 내 대답이 진짜인지 거짓인지 상관없어 보였다. 

   언제부터 래퍼가 되고 싶었어요?

   초등학생 때부터요.

   오··· 롤 모델이 있어요?

   아뇨. 요즘 래퍼 중엔 없어요. 차라리 록스타 쪽이 롤 모델에 가까워요.

   그렇구나···.

   근데 윤우 님,

   네?

   혹시 이번 주 휴무에 시간 되세요?

   왜요?

   대타 좀 부탁해도 될까 해서요. 그날 공연이 있는데, 다른 시간 서버들 다 안 된다고 해서.

   역시. 나는 권순겸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자기 얘기를 많이 하나 싶었다. 전 최대한 사람들 얼굴을 보지 않고 주방에서 빵이나 만들고 싶은데요···. 그게 내 속마음이었지만 결국 나는 또 흔쾌히 대답하는 쪽을 택했다. 어쩌죠 그날 저도 약속이 있어서, 라고 거짓말을 할까 하다가 할 일도 없는데 일이나 하고 돈이나 받지 뭐, 라고 마음을 바꿨다. 거짓말로 대답한 건지 정직하게 대답한 건지 헷갈리긴 했지만 어쨌거나 마음은 다스려야 했다.

   네, 그럼요. 돼요.

   진짜요? 감사해요. 제가 저녁 살게요.

   저녁 안 사도 되는데. 나는 그냥 아무 얼굴도 마주 보지 않고 집에 가서 치킨이나 시켜 먹고 싶은데···. 그게 내 속마음이었지만 이번에도 역시 부글거리는 뭔가를 누르고 네, 라고만 대답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내 발밑으로 흰 가루가 만든 꼬리가 길게 길게 늘어지겠지.


*


   권순겸은 정말로 내게 저녁을 샀다. 노래방까지 코스였다. 언제 한번 노래방 가죠, 같은 말을 듣고 머지않아 진짜로 노래방에 가게 되는 일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아마도 필연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했다. 가게 근처 텐동집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나는 어쩌다가, 잘 알지도 못하는 권순겸에게 지금 살고 있는 집 전세 계약에 문제가 있어 사천오백만 원을 날렸다는 말을 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누군가와 저녁을 먹어서 나누는 이야기의 수위 조절에 실패한 건지, 바삭거리는 새우튀김에 마음이 흐물해진 건지, 아무 얘기나 덥석덥석 꺼내는 권순겸의 화법에 말린 건지 알 수 없었고 뱉은 즉시 후회했지만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내 얘기를 듣고 권순겸은 꽈리고추튀김을 씹다가 말했다.

   피해자네요.

   나는 나를 피해자라고 부르는 게 싫었다. 이상하게 그런 게 싫었다. 내 이야기를 하면 누군가가 나를 동정한다는 사실이. 하지만 살짝 동정을 받고 싶기도 했는데, 동정을 받고 싶다가도 피해자라고 이름 붙여지면 싫었다. 이건 무슨 심보인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뜸 말해 버리는 권순겸의 화법이 그 순간은 짜증스럽게 싫었다. 너랑은 여기까지다, 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아니었고 남은 밥을 마저 먹어야 했다. 

   저는 가해자예요.

   권순겸이 말했다. 저는 래퍼예요, 라고 말할 때와 비슷한 말투였다. 그래서 아 그래요? 라고 습관적으로 끄덕거리려다가 한 번 더 생각하고 나서야 대답할 수 있었다. 뭘 생각했느냐 하면, 뭐라고 되물어야 할지를 생각했다. 결국 내 입에서 나온 말은,

   무슨···?

   두 글자가 전부였다.

   기물을 파손했어요.

   뭘요?

   자동차요.

   왜요?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냥, 래퍼니까요.

   권순겸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남은 튀김을 먹었다.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안 들어도 될 것 같았다. 들으면 재밌을 것 같았지만, 들으면 내 이야기도 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텐동집을 나와 노래방 가실래요? 라고 묻는 권순겸에게 나는 “제가 집에 일이 있어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요···.”라고 거짓말하지 못하고 “좋죠···.”라고 거짓말했다. 같은 거짓말인데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사실 나는 권순겸이 내게 냅다 래퍼라고 고백한 순간, 언제 노래방이나 가자고 말한 순간부터 그날이 올까 봐 은근 떨었다. 막상 그날이 오니, 어떤 일이든 직면하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권순겸과 함께 온 노래방은 생각보다 어색하지 않았다. 우리는 사이좋게 노래를 불렀다. 권순겸은 발라드와 랩을 번갈아 불렀는데 둘 다 그냥··· 그랬다. 소름 끼치게 잘하진 않는데? 나는 콜라를 빨아 마시며 생각했다. 입 밖으로 뱉지는 않았다. 대신 역시 잘하네요, 라고 했는데 귀가 후 내 몸에 묻어 있을 하얀 거짓말 가루가 대번에 보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권순겸의 성공 가능성에 대해서는 보류해 두었다. 이 시대는 비웃음을 사던 사람이 몇 년 만에 존경을 사게 되기도 하는 시대니까. 나는 권순겸을 비웃지 않기로 했다. 내가 누굴 비웃냐는 자조도 그 판단에 한몫했다.

   한가하고 이른 저녁 시간이라 그런지, 노래방 사장님은 자꾸 서비스를 넣어 줬다. 부르고 불러도 시간이 생겨났다. 돈이나 이렇게 충전되면 좋겠네··· 라고 생각하다가 자꾸만 돈 생각을 하는 내가 또 싫어져서 시무룩. 그러자 피해자라는 말을 들었던 게 또 마음에 걸리고, 생각이 생각을 부르는 일에 넌더리가 나서 나는 열심히 노래방 책자를 정독하며 부를 노래를 고르는 권순겸에게 말을 걸었다.

   그 있잖아요. 자동차요.

   네.

   안 들켰어요? 부수고.

   많이 안 부쉈어요.

   안 들켰냐고요.

   들켰죠.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물어 줬죠. 지금 빚 갚는 중이에요.

   얼만지 물어봐도 돼요?

   저도 한 삼천? 그쯤 되는 것 같았는데.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이유를 물었다. 래퍼인 건 알겠는데··· 다른 이유로는 왜 그러셨는지 물어봐도 돼요? 권순겸은 마이크에 대고 말해 줬다.

   아, 같이 공연하던 애랑 사귀었는데 걔가 차에 딴 여자를 태우고 가더라고요. 택시 타고 따라갔는데 백화점 주차장인 거예요. 따라 들어가서 벽돌로 자동차 찍었죠. 신나게 쇼핑하고 나오는 길에 더 신나라고.

   어머···.

   나도 권순겸을 따라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에코 섞인 감탄이 주주노래방 3번 방에 울려 퍼졌다. 

   바람 맞아요?

   맞아요. 원래 좀 껄떡거리는 애라서.

   고소하거나 그러지 않겠대요?

   돈 받으면 됐다고 합의 본 거죠. 여자는 좋고 소문은 무섭고 그런가 봐요. 덕분에 차도 부숴 보고 가사에도 쓰고 좋죠 뭐···.

   나는 권순겸에 대한 존경심이 밀려드는 걸 느꼈다. 나도 저렇게 말해 보고 싶다···. 저렇게 말하기 위해선 저렇게 살아야겠지. 연속한 불행에 점점 입을 다물고 그때 이야기를 하려고만 하면, 혹은 그 이야기엔 근처에도 가지 않았는데 누가 실수로 들출까 내 약점 같은 시간을 건드릴까 잔뜩 경계하는 채로 살지 말고···. 그런데 그렇게 살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데. 복잡해지는 마음은 빠르게 무거워졌다.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턱 막힌 입을 그나마 조금 움직여 권순겸에게 물었다.

   살 만해요?

   네, 그럼요.

   래퍼는 대답했다. 손 모양은 록스타의 것을 하고서.

   좋아 보여요. 나도 적당히 후회하고, 적당히 털고 일어나 살았으면 좋겠다.

   뒷말은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말이었다. 말하자면 꾹꾹 숨기다가 말라 버려 하얀 가루가 된 거짓말 같은, 참았던 속마음이 아니라 마르기 전 바닷물처럼 흘러넘친 말. 권순겸은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그러고 있잖아요.

   ···.

   그래 보이는데?

   권순겸은 랩으로 감동을 주진 못했지만 내 고개를 슬며시 들어 올려 주긴 했다. 그 말을 노래방 마이크에 대고 했다. 그렇다면 그걸 랩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 


*


   고양이를 발견한 것은 노래방에서 나왔을 때였다. 아홉 시가 조금 넘은 시간. 흰 고양이라, 까만 밤에 더 잘 보였다. 평소에 보던 것과 달리 뭔가 이상하다는 것도. 그 고양이는 늘 후다닥 도망가는 고양이였다. 언제나 가게 바로 옆 건물에서 튀어나왔는데, 사람과 눈이 마주치면 2초 간의 경계 끝에 튀어나온 건물 사이로 다시 휙 뛰어 들어갔다. 그런데 그날은 고양이가 엉거주춤, 뛰어 도망가지 않았다. 어딘지 뒤뚱거리는 듯 움직이다가 그 자리에 앉았다. 권순겸과 나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고양이, 이상한데? 같은 생각을 한 것 같았다. 밤이라 잘 보이지 않았지만, 고양이의 흰털 아래쪽, 배와 다리 사이 쪽이 거뭇해 보였다.

   피!

   먼저 소리친 것은 권순겸이었다. 고양이한테 큰소리 내면 안 돼요, 하고 권순겸의 팔을 건드리는 내 손보다 빠르게 권순겸의 다리가 고양이 쪽으로 성큼성큼 움직였고, 고양이보다 권순겸의 기가 셌는지 고양이는 저항하지 못하고 권순겸의 양손에 덥석 잡혔다. 잡히고 2초쯤 뒤, 동네 사람들아 이것 좀 봐라··· 라고 알리는 듯 고양이가 쩌렁쩌렁 울었다. 우리는 당황해서 고양이를 들고 뛰었다. 간간이 눈을 마주치며 터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무슨 고양이 납치범 같네···.

   동물병원 가는 길 맞죠?

   맞죠. 역 옆에 동물병원!

   큰 데요? 작은 데요?

   아··· 모르겠네. 작은 데? 몇 시까지 하는지 좀 봐 주세요.

   아홉 시요. 큰 데로 가야겠다. 거긴 열 시.

   네.

   건너요!

   우리는 러닝메이트처럼 함께 뛰었다. 뛰는 내내 고양이도 울었다. 어차피 우는 거 천천히 걸어갈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럼 걷는 동안 늘어난 시간만큼 고양이가 울 테니··· 뛰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권순겸도 같은 생각을 한 것처럼 보였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권순겸의 목덜미에는 땀이 흐르고 있었다. 내 등과 겨드랑이도 젖어 있긴 마찬가지였다. 카운터에 고양이를 내려놓자 안쪽에서 간호사 한 명이 나와 어유, 얘 먼저 데리고 들어갈게요, 라고 했다. 땀범벅이 된 채 주억거리는 우리를 향해 데스크에 앉아 있던 다른 간호사가 물었다.

   고양이 이름은요?

   네?

   뭐라고 하지, 라는 표정으로 권순겸을 쳐다보다 권순겸이 말했다.

   소금이요.

   소금이?

   하얀색이니까요.

   이름을··· 잘도 짓네요.

   래퍼 맞죠?

   ···.


   잠시 뒤 우리는 나란히 서서 소금이가 상처 부위를 응급 처치 받는 걸 지켜보았다, 나는 소금이가 겁에 질린 모습을 보며 함께 겁에 질렸다. 미간이 알아서 찌푸려져 펴질 줄을 몰랐다. 손끝 살을 다 뜯어 병원 바닥에 흘렸다. 무섭고 긴장될 때마다 손톱 근처의 거스러미를 포함한 딱딱한 살을 뜯는 게 습관이었다. 사람의 거짓말이 하얀 가루가 되어 떨어지는 것이라면, 사람의 겁은 각질이 되어 떨어지는 것이 아닐까···. 긴장한 채로 그런 헛된 생각을 했다. 한 번씩 권순겸 쪽을 보았을 때 그는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고양이 소금이는 지쳐 보였다. 반항도 하지 못하고 가끔 손을 뻗어 뭔가를 움켜쥐는 것 같은 몸짓을 했다. 그륵··· 하고 짧은 소리도 냈다. 그 소리와 몸짓을 보자 걷잡을 수 없이 슬퍼져 나는 울고 말았다. 작은 몸은 힘들어 보였고, 도대체 뭐가 이렇게 힘드냐, 매번 난데없이 힘든 일을 겪어야 하고 아무 일 없던 몸으로 돌아오는 건 왜 이렇게 힘드냐, 하는 원망이 벼락처럼 나를 관통했고, 그것이 눈물 입구를 연 것 같았다. 멍하니 서 있던 권순겸이 나를 보는 게 느껴졌지만 쏟아진 눈물은 멈출 수 없었다.

   안 죽어요.

   권순겸이 말했다.

   어떻게 알아요.

   아까 우는 거 못 봤어요? 그렇게 잘 우는 앤 안 죽어요.

   ···.

   치료하고 약 먹으면 돼요.

   권순겸이 내 곁에 조금 더 붙어 서며 말했다.

   사람이고 고양이고 아프면 똑같이 치료하고 약을 먹으면 돼요.

   나는 권순겸의 둥근 등을 안았다. 나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다. 낯선 어깨에 턱을 얹고 엉엉 울었다. 


*


   고양이는 입원했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어느새 깊은 밤이었다. 긴장이 풀린 몸이 흐느적거렸다.

   패배감은 흡혈귀 백작처럼 낮엔 숨고 밤에 몸집을 키운다. 분명 내 뱃속 어딘가에서 꾸물꾸물 기어 나오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삽시간에 내 몸보다 크기를 키워 나를 덮어쓴다. 패배감의 이불 아래서 나는 영혼에 진 인간이 되어 울적하게 몸을 웅크린다. 나는 영원히 혼자인 것 같고, 시기를 놓친 것 같고, 모든 일이 안 풀리는 인간 같고, 다시는 희망 따윈 없을 것 같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고, 이 세상에 내가 있다는 사실이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 같고, 내가 사라져도 세상엔 슬픔이 발생하지 않을 것 같다. 슬픔이 발생하기는커녕 명료하고 단순해질 것 같다. 흡혈귀 백작 같은 패배감은 정말로 내 피나 피와 비슷한 여유 같은 걸 빨아먹는 것처럼 나를 바싹 말리고 전전긍긍하게 한다. 조바심으로 가득 찬 밤은 지루하고 길다. 생각 없이 까무룩 잠에 들면 한 토막인데 잠들지 못하고 생각에 빠지면 억겁 같은 것이 밤이다. 그게 무섭고 이상하다. 아침만 되면 싸그리 잊어버리는 일을 계속 반복하는 시간이라는 게 두렵고 저주 같다.

   그러다 갑자기 권순겸 생각을 했다. 나도 그에게, 그처럼, 모두 털어놓고 싶다는 생각을, 전화를 걸어서 내 얘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면 아무 얘기나, 심지어 권순겸이 랩이라도 해 줬으면 싶었다. 소금이 핑계를 대면 되지 않을까? 너무 추접스러워서 입 밖으로 꺼냈다면 내 손으로 내 뒤통수를 치고 싶은 생각이었다. 다행히 생각으로만 남기고 다시 삼켰다. 한동안 그런 생각을 한 것에 부끄러워하며 누워 있었다. 권순겸은 내게 의미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이 시기에 유일하게 그나마 가까워진 사람. 래퍼라는 것 말고는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 사람. 흡혈귀 백작의 손아귀 안에서는 권순겸마저 선택받은 기사가 되는 것이다. 나를 구해 줄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는 내 하찮은 생각에 좌절했다. 같이 노래방에 가고 고양이를 구조하고 우는 나를 한 팔로 안아 주고. 그런 사람이 너무 오랜만이어서 그런가 봐. 되뇌어 봐도 낯이 뜨거웠다. 하지만 정말이지,

   내겐 아무도 없었다. 곁에 아무도 없어서 가장 가까운 사람을 아무나 떠올릴 만큼, 아무나에게 아무에게도 하지 않은 이야기를 하고 싶을 만큼 나는 너무 외로웠다. 너무 외로워서, 곁에 누구라도 있었으면 싶었다. 그게 권순겸이든 누구든 상관없었다. 그 비렁뱅이 같은 마음을 겨우 꾹꾹 눌러 참았다. 진짜로 실천했다가 우스운 사람이 되면 안 되니까. 달이 가고 해가 오는 동안 흡혈귀 백작의 손아귀 힘은 점점 풀릴 것이고 그렇게 밤은 지나가니까. 아침이 오면 또 이 모든 충동과 욕망을 잊는다···. 그것만을 생각하며 눈꺼풀에 힘을 주어 억지로 눈을 감았다. 여전히 잠이 오지 않지만 소금이 핑계로 권순겸에게 갑자기 연락을 해 볼까 했던 사춘기 같은 마음에 침을 뱉고 발로 차는 상상을 했다. 그만, 그만 좀 해라. 

   그리고 이렇게 약해져 있을 때, 그나마 곁에 있는 게 권순겸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날 더 우스워하고 경계할 사람일 수도 있었는데, 몇 마디 섞어 보고 저 사람 애정 결핍에 좀 이상한 사람인 것 같아, 하고 일터에 소문을 낼 사람일 수도 있었는데, 그런 사람이 아니라 그나마 내게 관심도 없고 속도 없어 보이는 권순겸인 것이. 생각만 했을 뿐인데 안도의 한숨이 뱉어졌다. 그러나 그마저도 권순겸의 말투로 재생되어 괴로웠다. 나도, 사람은 좋고 소문은 무섭고 그런가 봐.


*


   권순겸이 눈치챘을지는 모르겠으나, 그날 이후로 나는 어쩐지 권순겸을 좀 멀리했다. 어느 밤 내가 했던 생각이 수치스러워서 자연스럽게 그에게 어떤 것도 묻고 답할 수가 없었다.

   전세 사기를 알게 되고 남자 친구의 바람을 알게 된 어떤 시기처럼 나는 그저 시간이 가길 기다렸다. 빨리 그 구덩이가 지나가길. 시간이 지나가며 흙을 밀어다 주어서 패였던 구덩이가 다시 덮여 메워지길 말이다. 이번 구덩이는 내가 팠다는 게 좀 다른 점이지만. 


   여름과는 또 다르게 정신이 빠질 정도로 분주하게 살다 보니 앞머리가 눈에 띄게 길어 있었다. 빵을 만들 때도 집에서 혼자 유튜브를 볼 때도 영 거슬렸다. 앞머리를 자르기로 했다.

   이전에도, 좀 달라지고 싶을 때면 앞머리를 잘랐다. 평소보다 짧게, 눈썹 위로 깡총하게. 그러면 순식간에 다른 사람이 된다. 가위가 몇 번 내 이마 위를 지나갔을 뿐인데 거울 속의 나는 이전과 분명히 너무나 달라져 있다. 성격도 생활도 이전과 똑같으면 안 될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 앞머리가 달라져서 그 아래 눈썹부터 눈‧코‧입술과 턱까지 전체적인 인상을 무척 다르게 보이게 하고 그것은 또 그렇게 생긴 사람처럼 행동할 이상한 자신감을 주어서, 나는 정말로 앞머리를 자르고 앞머리를 자르기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 간다. 앞머리를 자르기 전에 하지 않았던 말을 하고 앞머리를 자르기 전에는 입지 않았을 옷을 입는 것이다. 신기하지. 우린 그냥 그런 것이다.

   오랜만에 가위를 들고 앞머리를 자르며 생각했다. 언젠가 내가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 했다는 것을. 찔러 죽이는 상상을 가장 많이 했던 것 같다. 높은 곳에서 떠밀거나 총으로 쏘기에는 어려우니까, 아무래도 날카로운 것으로 찔러 죽이는 모양새가 되지 않을까 상상했었다. 앞머리를 자르기 위해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가위를 보자 그 생각이 났는데, 아무래도 이런 가위로는 못 죽이겠지··· 하는 생각이 따라붙었다. 그리고 또, 한 두어 걸음 뒤에 뒤처져 따라오는 생각 하나. 지금은 아니야. 죽이고 싶던 적이 있지만. 누군가를 찌르고 싶었는데,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야. 진짜로 찌르고 싶지는 않아. 사실 그때도 그랬어. 진짜로 죽이고 싶지는··· 않았어. 내가 살면서 품어 온 아주 강렬한 분노, 그것마저 거짓말이라는 사실이 왠지 조금 슬펐다. 진짜라고 믿은 분노와 증오도 사실은 진짜가 아니라는 게. 하지만 동시에 다행이기도 하다. 그런 게 거짓이어서 다행이야. 두 마음이 한데 있었다.

   어릴 때 잠깐 미술학원에 다닌 적이 있다. 내가 사는 단지가 아닌 다른 아파트 단지 상가의 작은 학원이었고 내가 가는 시간엔 늘 사람이 없었다. 초등학생들이 집에 가는 시간과 고등학생들이 아직 오지 않는 시간, 그 사이에 중학생인 내가 그 화실에 갔던 것 같다. 이젤 앞에 앉는 일은 어색했지만 곧 좋아졌다. 원통과 원뿔과 정사각형과 직사각형을 그리는 일도. 연필로만 그린다는 것도 좋았다. 그리는 도구는 그리는 도구, 지우는 도구는 지우는 도구라고 생각했는데 지우는 도구로도 그릴 수 있다는 걸 알려 준 곳이었다. 연필로 데생한 부분을 완성하는 건 지우개로 필요한 부분을 지워 나갈 때였다. 지우개가 지나가면 번지거나 옅어지거나 다시 환하게 흰색이 되는 그 순간을 좋아했다. 애써 까맣게 칠해 놓고 중요한 순간에는 하얗게 지워야 하는구나,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 재밌고 좋았다. 세상일이란 게 순방향만이 아니라는 걸, 있게 했던 걸 없게 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란 걸 미술학원에서 처음 배운 것 같다는 생각도 뒤늦게 들었다. 

   가위를 들고 앞머리를 자르다가 생각이 어릴 적 다녔던 미술학원까지 갔다. 멀리도 갔네. 나는 콧잔등과 눈가에 내려앉은 잘린 머리카락을 오래 털었다.


*


   가게 화장실 문 앞에서 떡하니 마주쳤을 때, 권순겸의 얼굴을 아주 오랜만에 본다는 게 실감이 났다. 권순겸은 일 초도 망설이지 않고 물었다. 

   점심 드실래요?

   나는 아니요, 약속이 있어서, 라고 대답하려고 했다. 이번에야말로. 그러나 권순겸은 내가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연이어 물었다.

   앞머리 자르셨어요?

   어, 네. 이상해요?

   아이돌 같아요.

   아. 권순겸에게는 사람의 유형이란 아이돌, 래퍼, 록스타 등등인 것 같다. 내가 깨달음에 고개를 끄덕거리는 사이 권순겸은 잔치국수 어때요? 라고 말했고 나는 계속 끄덕거렸다. 

   잔치국수 좋죠.


   권순겸은 잘 먹고 다니는 사람 같았다. 결론을 내리기엔 좀 성급한 면이 있지만 최초의 식사였던 텐동집과 이번 점심의 잔치국수집 모두 성공적이었기 때문이다. 튀김 한 입, 국물 한 모금만 먹어 보면 알 수 있었다. 권순겸의 놀라운 면은 일단 가게를 잘 찾는 것도 잘 찾는 것인데, 매번 메뉴를 빠르게 고른다는 점도 있었다. 최초의 저녁 식사 약속 때도 권순겸은 잠깐 눈을 감고 미간을 찡그린 채 고민하더니 텐동 어떠세요, 라고 말했다. 이번 점심 식사 약속을 잡을 때처럼. 은은한 짠맛, 멸치 육수 향이 깊게 밴 듯한 잔치국수집에 마주 앉아 나는 열없이 그런 걸 물었다.

   메뉴 선정을 좀 잘하는 편이죠?

   네.

   어떻게 하면 그렇게 잘해요?

   집중을 해야죠. 내가 지금 원하는 간이 어떤 간인지···.

   그러면 돼요?

   아뇨. 사실 다 구 남친이랑 쏘다녔을 때 알게 된 가게들이에요. 미식가라고 개유난 떠는 스타일이었거든요.

   어어···.

   레거시죠 뭐.

   그쯤 되자 나도 뻣뻣한 얼굴을 거두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안 웃어···. 레거시라는데···. 내가 웃는 걸 보고 권순겸도 푸흐흐 하고 웃었다. 웃을 때 보니 영락없이 어린 여자애 같았다. 그릇째 들어 국물을 한 모금 마시고 권순겸은 말했다.

   윤우 님 어떻게 사셔야 되는지 제가 알려 드릴게요.

   예? 저요?

   네.

   어떻게 살아야 되는데요.

   항상··· 뭐가 먹고 싶은지 생각하면서 사세요.

   진짜 어이가 없네···.

   아, 오해하지 마세요. 윤우 님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만 생각한 게 아니라 저 어떻게 살지 생각하다가 윤우 님 생각도 한 거예요.

   어떻게 살기로 하셨는데요?

   권순겸은 고양이를 데리고 살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자 나도 모르게 팩 하고 쏘아붙이듯 반응한 게 멋쩍어졌다. 얜 말을 왜 이런 식으로 하는 거야···.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머쓱한 채로 국수 그릇에 젓가락을 집어넣고 괜히 휘휘 저었다. 걸리는 국수 가락이 없는데도. 권순겸은 언제나 그렇듯 내 반응은 신경 쓰지 않고 내게 들려줄 말만 들려주었다.

   좀 더 건강해지면 중성화 수술도 해야 해요.

   나는 수술비의 반을 보태겠다고 했다. 권순겸은 그 말엔 딱히 대답하지 않고 딴소리를 했다.

   얜 래퍼의 마스코트가 되는 거예요.

   그 자신만만한 말이 웃겨서 나는 큰소리로 웃었다. 이번엔 권순겸이 나를 따라 웃지 않고 뭐가 웃겨요, 하면서 언짢다는 표정을 지었는데 그 표정까지 웃겨서 조금 더 웃었다. 웃음을 그칠 때, 나는 내가 아주 오랜만에 호탕하게 웃었다는 걸 알았다. 한창 점심을 먹는 와중이었는데 벌써 소화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배가 고프네. 그것 역시 아주 오랜만에 든 생각이었다. 허기가 지는 게 아니라 배가 고픈 것. 두 느낌은 명확하게 달랐다. 권순겸이 살라는 대로 살아야 하나. 항상 먹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면서.

   이 동네 좋죠?

   권순겸이 가게를 둘러보며 말했다. 

   이렇게 맛있는 잔치국수집도 있고. 친절한 동물병원도 있고.

   음···.

   나는 이 동네가 좋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전세금을 날리고도 깔고 앉아야 하는 방이 있는 곳, 편한 일터에 다니려고 하다가 불행만 잔뜩 안겨 준 곳이라고는 생각했지만. 내가 덥석 대답하지 않자 권순겸은 한 마디 더했다.

   우리 가게는 진상도 적잖아요.

   맞아요. 나는 멸치 맛이 많이 나는 잔치국수 국물을 마시고 대답했다. 

   좋은 동네 같아요.

   내 입으로 그렇게 말해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렇게 말하며 거짓말 가루가 떨어졌을까, 잔치국수가 처음보다 짜졌을까 입맛을 짭짭 다셔 보았다.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대낮이라 그런가. 이 동네가 처음처럼 짜증스럽고 원망스럽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


   권순겸과 함께 점심을 먹은 다음 날은 나의 휴무 날이었다. 느지막히 일어나서 나는 권순겸네 집에 가 있을 고양이를 생각했다. 아늑한 곳에 가서 좀 좋으려나. 권순겸에게 물어볼까 하다가 오늘 휴무인 건 나뿐이고 권순겸은 출근했다는 사실이 떠올라 이따 저녁에 물어보기로 했다.

   늦은 점심으로는, 뭘 여러 개 집어 먹는 게 귀찮아 소금 파스타를 만들기로 했다. 유튜브에서 본 레시피를 늘 한번 따라해 보고 싶었다. 면을 삶고 소금을 많이 넣고 오일과 버터에 볶는다. 유튜버는 면이 ‘반짝반짝하게 볶아지면’ 기호에 따라 후추나 치즈를 갈아 넣으라고 말했다. 마늘도 괜찮다. 유튜버는 너그럽게 말해 주었다. 뭐가 자꾸 추가되네. 동전 수프 만드는 법 같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의 말을 따라 충실히 면을 삶고 건지고 후추와 소금을 뿌려 간을 맞춰 보았다. 특히 그 ‘반짝반짝하게 볶아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게 좋았다.

   힘들지 않아. 중얼거렸다. 난 괜찮아. 사라락. 하얀 소금이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손끝으로 하얀 결정을 굴려 보았다. 괜찮아. 한 번 더 사라락. 거짓말이어도 좋았다. 오랜만에 입맛이 돌아서 내가 한 말이 거짓이건 아니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만든 파스타가 사랑스러워서 사진을 찍고 반짝반짝 버터를 입은 면을 포크에 둘둘 말아 첫입을 가득 먹었다. 우걱우걱 소금 파스타를 씹고 있는데 권순겸에게 메시지가 왔다. 고양이 사진과 함께.

   -천재 고양이예요. 벌써 말을 알아들어요.

   나는 권순겸의 메시지를 일 초 만에 확인했는데 답장을 쓰기 전 삼십 초를 더 기다렸다. 그리고 무뚝뚝한 답장을 보냈다.

   -거짓말하지 마요.

   그러나 권순겸은 개의치 않았다. 그게 내 캐릭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맞아요. 거짓말이에요. 

   -자꾸 이불에 오줌을 싸요. 한숨도 못 잤어요. 

   -뭐가 불만인지 모르겠네.

   나는 권순겸에게서 우다다 도착한 메시지를 읽으며 웃었다. 맞아요. 거짓말이에요. 권순겸의 넋두리가 좋아서 몇 번 다시 읽어 보았다. 그리고 소금이 사진을 다시 올려 보며 소금 파스타를 한 입. 그사이 파스타는 조금 식었지만 짜지는 않았다. 간은 적당했다.

추천 콘텐츠

히데오

히데오 서장원 히데오에겐 몇 가지 비밀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그의 친부가 일본인이며 그가 어린 시절을 일본 교토에서 보냈다는 것이다. 어느 저녁나절, 한적한 거리를 걷던 중에 히데오는 이 사실을 내게 말해 줬다. 이후 히데오는 어린 시절에 대해 조금씩 더 들려주었고, 나중에 나는 히데오의 생애 초반에 일어난 일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꿸 수 있게 됐다. 히데오가 태어난 곳은 교토 외곽으로, 한국 사람들이 떠올리는 여행지 교토와는 거리가 먼 평범한 주택가였다. 히데오는 그곳을 자세하게 기억하지는 못했다. 습한 여름 날씨나 우듬지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거대한 나무들에 대해 말하면서도 그것이 정말 자기 기억인지 교토에 대해 보고 들은 뒤 상상해 낸 이미지인지 구분하기 어렵다고 덧붙이곤 했다. 교토에서 있었던 일 중 히데오가 확실하게 기억하는 건 모두 나쁜 경험이었다. 이를테면 초등학생 시절 책상 가득 자이니치나 조센진, 총 같은 단어가 적혀 있던 풍경이나 동급생 남자애들이 그의 가방을 걷어차며 드리블 시합을 했던 일, 그를 조롱하려고 반 아이들이 케이팝 노래를 개사해 불렀던 일, 그런 사건들. 한번은 같은 반 아이들에게 얻어맞아 코뼈가 부러진 적도 있었다. 그날 저녁에 히데오의 부모는 아들을 위해 나고야로 이주하는 일을 의논했다. 히데오의 아버지는 아들을 불러 앉히고 나고야에서는 어머니가 한국 사람이란 사실을 숨겨야 한다고 경고했다. 히데오는 그 말에 깜짝 놀라서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어머니를 바라봤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말에 동의했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히데오가 아는 한, 히데오의 어머니는 자신이 한국인임을 숨기려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 순간 어머니는 눈을 내리깔고 남편도 아들도 바라보지 않았다. 아버지가 다시 말했다. “어쨌든 우리는 여기서 계속 살 거니까, 그렇게 하기로 하자.” 그날 밤, 히데오는 코의 통증과 식도로 넘어오는 피, 어머니의 고요한 얼굴과 나고야에서 보낼 새로운 나날의 환영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만 히데오의 부모는 나고야행을 두고 갈팡질팡했고, 히데오로서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과정을 거쳐 이혼을 결정했다. 이혼 후 히데오의 어머니는 아들을 데리고 경기도의 친정으로 돌아갔다. 이후 히데오는 일본인 아버지와 일본에서의 삶을 철저히 숨겼다. 나에게 고백하기 전까지 누구에게도 자신의 첫 번째 이름 히데오를 말해 주지 않았다. 내가 히데오를 처음 본 건 연극원 강의실에서였다. 아직 벚꽃도 피지 않은 3월, 나와 히데오를 포함해 여덟 명의 학생이 강의실에 책상을 둥글게 붙여 앉았다. 그해 연극원에서는 입학이 예정된 학생들을 모아 15분 내외의 단막극, 일명 “짤막극”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신설했다. 입학 전에 그룹별로 모여 공연을 준비하고, 3월 개강과 동시에 연극원 소극장에서 공연을 올리는, 이색적인 신입생 환영회라 할 수 있었다. 학보사는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신입생 그룹 중 하나를 인터뷰하기로 결정했는데, 그해 들어 나에게 처음

  • 관리자
  • 2025-06-01
그리고 밤과 가을이

그리고 밤과 가을이 김연수 1 지난여름, 정기에게는 세 가지 고민이 있었다. 하나는 눈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 길을 걸어갈 때면 날벌레들이 달려드는 것 같아 혼자 손사래를 친 적이 여러 번이었다. 기사를 쓰려고 책상 앞에 앉으면 머리 뒤쪽에서 번개 같은 게 번쩍이기도 했다. 노안이 찾아온 건 벌써 몇 년 전의 일이었다. 그때 안과에 가서 진료를 받고 안경도 새로 맞췄다. 나이가 들면 서서히 시력이 나빠지리라고만 생각했지, 거기에 더해 전에 없던 것들이 보이는 증상까지 생길 줄은 미처 몰랐다. 그런 처지가 되고 보니 책 읽는 일이 힘들어졌다. 평생의 즐거움이었던 독서가 성가신 일이 되면서 생활은 성기어지고 마음은 허술해졌다. 더 오래전, 나이가 들면 활자 같은 건 멀리하고 자연을 벗 삼아 소일하며 세속적 가치관에 물든 마음을 고치리라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은근히 노년을 기대하기도 했지만, 그런 시절은 너무나 빨리 지나갔다. 두 번째는 포항에서 에너지공학과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딸 민지와의 관계가 점점 멀어진다는 점이었다. 그건 서울과 포항이라는 지리적 거리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작년에 집을 새로 구하면서 민지는 아빠인 정기에게 도와달라고 부탁을 해 왔다. 그 과정에서 이사의 이유가 언제부터인가 짝꿍처럼 붙어 다니던 여자 선배 희선과 같이 살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그는 알게 됐다. 그는 민지와 희선이 단순한 선후배 사이가 아닐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몇 번 딸에게 희선에 대해 물었지만, 민지의 반응은 모호했다. 그러다가 정기는 그 일에 대해 더 묻지 않게 됐다. 한 번은 민지가 “나는 아빠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닐 수도 있어요”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앞뒤 대화의 맥락으로는 그 일에 대한 답변이 아니었음에도 정기는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질문의 대답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마지막 고민은, 자신이 담당한 부고란에 누구의 죽음을 다룰 것이냐는 점이었다. 최종 후보는 미국의 SF 소설가와 전 여당 대표, 둘 중 하나였다. 아무도 읽지 않는 신문 부고란에 누구를 쓰든 무슨 상관이겠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정기에게는 앞의 두 고민만큼이나 심각한 고민이었다. 앞의 두 고민은 과거의 일에서 비롯된 결과를 수습하는 것이었지만, 세 번째 고민은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라고 정기는 생각했다. 과연 소설가냐, 정치인이냐. 정기의 고민은 여름만큼이나 깊어졌다. 2 노트북 화면 너머로 신문사 후배인 은영이 지나가고 있었다. “휴가는 즐거웠어?” 정기가 알은체를 했다. “줄곧 비만 내렸잖아요. 태풍이 온다는데 어떻게 해요?” 잔뜩 낯을 찌푸리며 은영이 말했다. “태풍이 온다는 예보가 있었으면 가지 말았어야지.” “그런 거 따지고 들면 아무 데도 못 가죠. 태풍 지나갈 때 제주 안 있어 봤죠? 그게 진짜 여름이더라구요. 바람이 몰아치는데, 어휴, 엄청났어요. 그러더니만 휴가 마지막 날이 되

  • 관리자
  • 2025-06-01
바람 부는 날

바람 부는 날 정기현 단지는 어둠에 잠겨 있었다. 펜스와 인접한 아파트 건물들은 가로등 불빛을 받아 그 형태를 짐작할 수 있었으나, 단지 안쪽으로 시선을 옮기면 어둠의 수심이 깊어져 모든 것이 감추어졌다. 아침이고 저녁이고 긴긴 태양 볕 아래 그 흉물스러움을 남김없이 드러내던 여름과는 달리, 겨울의 단지는 어딘가 의뭉스러워 보였다. 이야기를 가득 품은 고성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내가 살고 있는 주택 앞, 단군 이래 최대 규모의 재건축 단지라는 별칭이 붙은 아파트 단지는 조합원과 건설사 간 충돌로 공사가 중단되어 짓다 만 아파트 건물들이 2년 동안 그대로였다. 1만 5천 가구를 수용할 수 있다며 대대적으로 착공에 들어갔던 대규모 단지는 2차선 통행로를 중심으로 양분되어 있었는데, 문득 그 길을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이번 겨울부터였다. 출근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까지 가려면 펜스가 세워지기 전보다 30분씩은 더 둘러 걸어야 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아직 잠에서 온전히 깨어나지 못한 상태로 정류장까지 걸을 때면 아파트 중앙 통행로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솔바람, 산들바람 아니고 토네이도에 가까운 세기였다. 물론 토네이도를 직접 겪어 본 적은 없지만···. 사람 하나는 거뜬히 날려 버릴 듯 기세 좋은 바람이었다. 단지 바깥은 바람 한 점 없이 잠잠했으므로, 이는 분명 바람길을 잘못 낸 시공 탓에 불어 대는 건물풍일 터였다. 거센 바람에 펜스가 흔들리며 콰챵- 하는 소리를 낼 때면 살을 에는 새벽녘 추위도 어쩐지 더욱 견디기 어려워져 굳게 잠긴 펜스를 원망하게 되었다. 자물쇠를 열고 단지 가운데 통행로로 다닐 수 있다면 그 끝의 버스 정류장에 금세 도달할 텐데. 아침마다 30분씩은 더 자고 나올 수도 있을 텐데. 내게는 바람쯤이야 잠을 조금이라도 더 잘 수 있다면 얼마든지 견딜 수 있는 문제였다. 한파 특보 경보 문자가 알람보다도 일찍 울려 잠을 깨웠던 날, 나는 빌라 현관을 벗어나 오른쪽 인도로 걷는 대신 길 건너 펜스 쪽으로 향했다. 펜스 출입구에는 주먹만 한 자물쇠가 굳게 걸려 있었다. 화풀이라도 하듯 자물쇠를 세게 두 번 당겨 보았는데 그것만으로도 자물쇠가 훌렁 풀려 버렸다. 펜스 안쪽으로 손을 쏙 넣어 자물쇠가 걸려 있던 걸쇠를 풀고 출입문을 열자 눈앞에 펼쳐진, 소리로만 접하던 바람의 길. 이용자가 나 혼자뿐이라 길은 실제 너비보다도 광활해 보였다. 건축 자재들, 내부 설비들이 군데군데 널브러져 있었고 고목처럼 주차되어 있는 승합차도 몇 보였다. 길 가장자리에도 단지로의 진입을 막는 펜스가 설치되어 있어 잠시 길과 나뿐인 세계에 진입한 것만 같았다. 통행로는 야트막한 고갯길이었다. 바람은 듣던 대로 거세었다. 나는 두 손으로 외투를 꼭 여민 채 거센 바람에 맞서 걸었다. 두 발이 동시에 떨어지는 순간 바람에 휘말려 공중으로 붕 떠오를 것 같아 한 발이 떨어지면 다른 한 발은 땅에 꼭 붙어 있도록 의식하며 걸어야 했다. 고갯길의 고

  • 관리자
  • 2025-06-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