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밤과 가을이
- 작성일 2025-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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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밤과 가을이
김연수
1
지난여름, 정기에게는 세 가지 고민이 있었다. 하나는 눈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 길을 걸어갈 때면 날벌레들이 달려드는 것 같아 혼자 손사래를 친 적이 여러 번이었다. 기사를 쓰려고 책상 앞에 앉으면 머리 뒤쪽에서 번개 같은 게 번쩍이기도 했다. 노안이 찾아온 건 벌써 몇 년 전의 일이었다. 그때 안과에 가서 진료를 받고 안경도 새로 맞췄다. 나이가 들면 서서히 시력이 나빠지리라고만 생각했지, 거기에 더해 전에 없던 것들이 보이는 증상까지 생길 줄은 미처 몰랐다. 그런 처지가 되고 보니 책 읽는 일이 힘들어졌다. 평생의 즐거움이었던 독서가 성가신 일이 되면서 생활은 성기어지고 마음은 허술해졌다. 더 오래전, 나이가 들면 활자 같은 건 멀리하고 자연을 벗 삼아 소일하며 세속적 가치관에 물든 마음을 고치리라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은근히 노년을 기대하기도 했지만, 그런 시절은 너무나 빨리 지나갔다.
두 번째는 포항에서 에너지공학과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딸 민지와의 관계가 점점 멀어진다는 점이었다. 그건 서울과 포항이라는 지리적 거리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작년에 집을 새로 구하면서 민지는 아빠인 정기에게 도와달라고 부탁을 해 왔다. 그 과정에서 이사의 이유가 언제부터인가 짝꿍처럼 붙어 다니던 여자 선배 희선과 같이 살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그는 알게 됐다. 그는 민지와 희선이 단순한 선후배 사이가 아닐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몇 번 딸에게 희선에 대해 물었지만, 민지의 반응은 모호했다. 그러다가 정기는 그 일에 대해 더 묻지 않게 됐다. 한 번은 민지가 “나는 아빠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닐 수도 있어요”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앞뒤 대화의 맥락으로는 그 일에 대한 답변이 아니었음에도 정기는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질문의 대답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마지막 고민은, 자신이 담당한 부고란에 누구의 죽음을 다룰 것이냐는 점이었다. 최종 후보는 미국의 SF 소설가와 전 여당 대표, 둘 중 하나였다. 아무도 읽지 않는 신문 부고란에 누구를 쓰든 무슨 상관이겠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정기에게는 앞의 두 고민만큼이나 심각한 고민이었다. 앞의 두 고민은 과거의 일에서 비롯된 결과를 수습하는 것이었지만, 세 번째 고민은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라고 정기는 생각했다.
과연 소설가냐, 정치인이냐. 정기의 고민은 여름만큼이나 깊어졌다.
2
노트북 화면 너머로 신문사 후배인 은영이 지나가고 있었다.
“휴가는 즐거웠어?”
정기가 알은체를 했다.
“줄곧 비만 내렸잖아요. 태풍이 온다는데 어떻게 해요?”
잔뜩 낯을 찌푸리며 은영이 말했다.
“태풍이 온다는 예보가 있었으면 가지 말았어야지.”
“그런 거 따지고 들면 아무 데도 못 가죠. 태풍 지나갈 때 제주 안 있어 봤죠? 그게 진짜 여름이더라구요. 바람이 몰아치는데, 어휴, 엄청났어요. 그러더니만 휴가 마지막 날이 되니까 햇볕이 쩅쨍한 거 뭐예요? 제 인생이 그렇다니까요.”
은영이 웃으며 말했다. 정기도 따라 웃었다.
원래 은영의 이름은 예지였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작명가에게서 이름을 바꾸면 인생이 바뀐다는 말을 듣고 올 무렵, 인생 선배랍시고 정기는 그녀의 고민을 자주 들어줬다. 그때 은영은 약한 사람이었는데, 어떻게 용기를 냈는지 이름을 바꿨다. 그리고 모든 게 달라졌다. 삐걱거리면서도 겨우겨우 끌고 가던 결혼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고, 스스로 선택한 인생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 왼쪽 손목에 문신을 새겼다. 그 뒤에 그녀를 구한 것은 운동이었다. 필라테스와 마라톤을 거쳐 그녀는 클라이밍에 이르렀다.
“끝이 좋은 인생이 제일 좋은 인생이야.”
“제일 마지막에 제일 좋은 게 온다. 부고 담당 기자다운 말씀이네요. 첫 기사는 잘 읽었어요. 노모를 위해 강풍에도 흔들림이 없는 자이로밸런스 우산을 발명한 일본인 이야기. 휴가 때 나한테 꼭 필요했던 우산이더군요.”
은영이 말하는 첫 기사란 정기가 부고란을 담당하고 쓴 기사를 뜻했다. 최근에 죽은, 오키나와 출신의 일본 발명가 다나카 겐지의 삶과 철학을 다룬 기사였다. 그 기사가 실리자 국장은 “서 기자 아니었으면 그렇게 엄청난 발명을 하신 일본 발명가께서 작고하신 것을 모를 뻔했네”라며 비꼬듯이 말했다. 아무런 기사 가치도 없는 사람을 썼다는 질책과 일부러 그런 인물을 택한 건 아닌지 하는 의심이 뒤섞인 반응이었다. 처음에는 부고란을 맡긴 것에 대한 반발심에 그런 사람을 택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계속 쓰다 보니 흥미가 생겼다.
“그게 자이로밸런스 우산이라는 건데, 바람에 기울어지면 모양을 바꿔 가며 바람의 힘을 역이용해 다시 제대로 서는 원리라고 해. 마술 같은 방법이라 사람들은 그 사람을 반리얼리즘 발명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네.”
은영의 말에 정기가 대답했다.
“기사에서 읽었어요. ‘반리얼리스트가 되자’는 말. 또 ‘중력의 압박이 느껴진다면, 그건 반중력을 상상하라는 신호다’라는 말. 격언 같은 말들이라 은근 마음이 움직이던걸요. 발명가라기보다는 사상가에 가깝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죽기 직전에는 신비주의자 비슷한 사람이 되긴 했지. 진정한 발명가란 지금까지의 현실을 붕괴시키고 새로운 현실을 만드는 것이라고 믿었거든.”
“발명으로 그렇게까지 할 수 있나요?”
“안될 것도 없지. 스마트폰만 해도 완전히 현실을 바꿔 놓았으니까. 기사에는 쓰지 못했지만, 그 사람이 지금까지의 현실을 붕괴시키기 위해 구상한 발명품이 있어. 다나카 겐지는 그걸 궁극의 구상이라고 불렀지.”
“그게 뭔가요?”
말년의 다나카 겐지는 일종의 개념 발명가, 말하자면 아이디어만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 됐다. 그런 개념 발명 중 하나가 ‘인생게임기’였다. 인생게임기는 삶의 기로에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양자택일의 상황에서 양쪽을 선택했을 때, 각각 펼쳐지게 될 미래의 모습을 예측해 주는 시뮬레이션 장치였다. 미래를 시뮬레이션할 수 있다면, 인생의 여러 선택들은 쉬워질 것이다. 그는 이를 내비게이션에 비유했는데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었기 때문에 필요한 변수가 무한에 가까웠다. 현실적으로 그런 기계는 만들 수가 없었다.
인생게임기를 만드는 일이 사고 실험이 되자 다나카 겐지에게는 다른 아이디어가 생겼다. 변수를 예측할 수 없는 미래가 아니라 모든 변수가 드러난 과거를 대상으로 하면 어떨까? 그러니까 지금의 선택이 아니라 과거의 선택, 그러니까 과거의 양자택일 상황에서 선택하지 않은 쪽의 미래가 어떻게 전개됐을지 보여 주는 기계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변수를 다루는 것이 미래보다는 쉽지 않을까?
“다나카 겐지는 상상의 그 발명품을 ‘웜홀 창문’이라고 불렀어. 웜홀 창문이 궁극의 발명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다나카 겐지의 머리는 불타올랐지. 과거에 선택하지 않은 쪽의 미래라는 것은 지금과 다른 현재를 뜻하는 거잖아.”
“과거에 선택하지 않은 쪽의 미래, 그러니까 지금과 다른 현재라면··· 그럼 우리가 가지 않은 길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거네요.”
“이건 그 이상을 뜻해. 우리가 가지 않은 길은 하나뿐이 아니니까. 그 많은 것을 어떻게 계산하는지는 따지지 마. 인공지능의 연산 처리 능력이 특이점을 넘어서면 ‘웜홀 창문’의 제작이 가능할 것이라고 그는 내다봤지. 지금 개발되는 양자컴퓨터는 기존의 컴퓨터로는 1만 년이 걸리는 연산을 200초 만에 처리할 수 있어. 그의 예언대로 양자컴퓨터의 연산 처리 능력이 특이점을 넘어서는 때는 분명히 올 거야. 그러면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모든 삶의 현재 모습을 시뮬레이션할 수 있겠지. 그걸 가상현실로 보여 주는 거야. 그래서 ‘웜홀 창문’이라는 이름이 붙은 거지. 그때가 되면 인공지능과 대화하듯이 가상현실 속의 ‘나’와 대화할 수 있으리라고 다나카 겐지는 생각했어. 그리고 그렇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냐 하면···.”
정기는 잠시 말을 끊었다. 기사에 ‘웜홀 창문’에 대해 쓰지 못한 까닭이 거기에 있었다. 그때 정기의 전화벨이 울렸다. 국장이었다. 그는 이야기를 좀 하자고 했다.
3
웜홀 창문이라는 게 실제로 만들어진다면, 그래서 그 창문으로 다른 현실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다나카 겐지는 인공지능 기술이 발전하면 시뮬레이션된 다른 현실 속에서 성장한 모든 ‘나’들과 직접 대화하는 일이 가능해지리라고 봤다. 그렇게 되면 다른 현실이 얼마든지 가능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현실만이 실현된 이유가 바로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고 그는 봤다.
그런 사고 실험 덕분이겠지만, 말년의 다나카 겐지는 거기서 더 나아가며 발명가보다는 사상가에 가까워졌다. 그는 이 현실이 곧 ‘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불만족스러운 현실에서 탈출하는 유일한 방법은 자아에서 탈출하는 일이라고 자신의 유일한 회고록, 『발명의 이론』에 썼다. 그게 바로 부처가 말한 해탈의 의미라고 그는 봤다.
이미 몇천 년 전에 부처가 그 모든 사실을 밝혀 놓았음에도 인간의 현실은 그대로다. 자신이 직면한 현실에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은 여전히 많지 않다. 누구나 자신의 현실을 바꾸려고 한다. 그러면서도 자아에서 탈출하려는 용기를 내는 사람은 거의 없다. 현실에 불만을 품는 사람들 거의 대부분은 자신의 자아에는 만족하고 있다. 이게 바로 인간 실존의 딜레마다.
그럼에도 세상에는 자아에서 탈출해 자신을 둘러싼 현실을 바꾼 이들이 있었다. 한 사람이 현실을 바꾸면 모두의 현실도 달라진다. 그 덕분에 인류는 실현되지 않았던 가능성들을 하나씩 실현시키며 진보해 왔고, 우리는 지금과 같은 세상을 가지게 됐다. 물론 용기를 내지 못한 사람들도 죽을 때가 되면 어떻게든 자아에서, 그러니까 이 현실에서 탈출한다. 그런 점에서 가장 위대한 발명품을 발명한 이는 신이다. 현실을 단숨에 바꾸는 가장 위대한 발명품, 그건 바로 죽음이니까.
또한 『발명의 이론』에는 다나카 겐지가 웜홀 창문을 구상하는 데 도움을 받았던 꿈 이야기도 나온다.
꿈속에서 나는 오랜만에 고향 오키나와를 방문하기 위해 비행기를 탔다. 탑승할 때 〈류큐신보〉를 나눠 주길래 읽어 보니 ‘외국인 택시 강도가 5인승 차량까지 빼앗아 달아나’, ‘중부흥업, 지역 볼링 리그 우승’, ‘사라지는 노인 매주 1명씩 소재 불명’ 등 소소한 기사들이 있었다.
그다음 장면에서 나는 오키나와의 고향 동네를 걷고 있었다. 그런데 익숙한 풍경 속에 낯선 건물이 하나 들어서 있었다. 건물 1층에는 콩콩카페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그러자 커피 볶는 냄새가 밀려왔고, 갑자기 입안에 침이 돌았다.
“안녕하세요? 이런 카페가 언제 생겼죠?”
카페 안으로 들어간 내가 바 너머에 있던 바리스타에게 말을 걸었다.
“언제라는 건 중요하지 않아요. 언제든 생기니까요.”
바리스타가 대답했다. 나는 그 대답이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어쩐지 이 카페에서는 한 번도 마셔 보지 못한 커피를 맛볼 수 있을 것 같군요. 추천하는 커피가 있으면 그것으로 한 잔 주세요.”
내가 말하자 바리스타는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커피가 준비되는 동안 나는 한쪽 테이블에 가서 앉았다. 그제야 카페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잘 키운 관엽수들이 적당한 자리에 들어서 있어 눈이 시원했다. 그리고 벽에는 창이 많아 답답한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이윽고 커피를 들고 온 바리스타가 말했다.
“독재와 가난으로 사라질 뻔한 우간다 르웬조리 산지의 커피 원두입니다. 찾아보기 힘든 샌들우드 향과 우아한 꽃향기가 그대로 느껴지는 아로마를 가진 아라비카 커피죠.”
그러더니 바리스타는 르웬조리 산맥은 적도선이 지나가는 곳에 있어 날계란을 세울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아느냐고 내게 물었다. 바리스타는 핸드폰을 꺼내 에콰도르와 우간다 등 적도선이 지나가는 곳에서 실험한 여러 영상들을 나에게 보여 줬다. 적도선 남쪽에서는 고깔 모양 싱크대의 물이 시계 방향으로 소용돌이치고,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북쪽에서는 반대 방향으로 소용돌이쳤다. 그리고 적도선 위에서는 물이 소용돌이치지 않고 그대로 빠져나갔다. 이 원인이 모두 중력 때문이라면서, 그래서 계란도 어느 쪽으로도 넘어지지 않고 가만히 서 있을 수 있다고 바리스타는 말했다. 바리스타의 말대로 핸드폰 속 영상들에서 계란은 가만히 서 있었다.
바리스타가 떠난 뒤,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재배된 커피의 맛을 음미하던 나의 눈에 이상한 장면이 들어왔다. 창문 너머에 어떤 사람의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그제야 그 카페의 창이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모든 창으로는 한 사람의 모습만 보였다. 그 한 사람은 바로 나였다.
창문 안에는 다양한 인생을 살아가는 나의 모습이 있었다. 한 창에서 나는 육가공업체를 운영하며 시의회에서 활동하는 지역 정치인이었다. 30대 시절, 시장에서 식재료 도매상을 할 때 태풍으로 큰 손해를 보지 않았더라면 그게 나의 인생일 수도 있었다. 세상을 바꾸는 건 정치인에게도 발명가에게도 어울리는 일이니까.
다른 창에서 나는 추리소설가가 되어 작은 책방에서 독자들을 만나고 있었다. 학창 시절에는 나는 마쓰모토 세이초, 모리무라 세이이치 등의 사회파 추리소설을 좋아했다. 대학 시험에 떨어지지만 않았어도 소설가의 길을 걸어갔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각각의 창에 펼쳐진 수많은 내 모습을 보고 나자 내게는 궁금증이 생겼다.
‘이렇게 다양한 삶의 가능성이 있었는데, 그 가능성들은 모두 붕괴되고 이 삶만 나의 삶이 됐다면 거기에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4
국장실을 나오며 정기는 다나카 겐지의 말을 떠올렸다. ‘죽기 전에 죽어 버려라’. 죽기 전에 죽어 버린다는 것은 죽음에 의해 강제로 이 현실에서 벗어나기 전에 스스로 탈출하라는 뜻이었다. 다나카 겐지의 표현을 빌자면, 자아에서 탈출함으로써. 자아까지는 아니더라도, 회사에서 탈출하는 일에 대해 정기는 심각하게 고민하게 됐다. “다음 부고 기사는 얼마 전에 작고한 최병기 대표에 대해 쓰는 걸로 하는 게 어때?”라며, 마치 권유하는 것처럼 국장은 짐짓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말인지 금방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 거물 정치인은 사주인 회장과는 각별한 사이였다.
책상에 돌아와 앉아 있으려니 핸드폰이 알람 소리를 냈다. 정기는 안경을 이마 위로 올리고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국장이 무슨 말을 하더냐고 은영이 문자메시지로 물어왔다. 정기는 국장이 다음 부고 기사의 주인공으로 전 여당 대표를 추천했다고 대답했다. 그럴 줄 알았다며 은영은 ‘이번 주에 부장들과 만난 조찬 자리에서 회장이 선배 기사를 콕 집어 언급했대요. 입사할 때 선배가 소설가 되려고 신문사 들어온 거라고 그랬다면서, 선배 기사 보고 기자보다는 소설가가 더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말했대요’라고 메시지에 썼다.
정기는 안경을 들고 메시지를 읽은 뒤, ‘아직 쓰지도 않은 내 소설을 인정해 준 첫 번째 사람이네’라고 답을 보냈다. 호기로운 대답에도 불구하고 정기는 피곤해졌다.
다시 은영에게서 메시지가 날아왔다.
장한나 공연, 관심 있으세요?
갑자기?
다음 주말, 예술의 전당, 저녁 7시. 티켓 두 장이 있어요. 민지랑 보러 가세요. 아빠와 딸이 다시 가까워지는 방법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예요. 자주 만나 서로 솔직하게 얘기하는 거죠.
한 장 더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동거하는 친구가 있거든.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그런 자리까지 따라오진 않겠죠.
따라올 것 같아. 보통 사이가 아니야.
넘겨짚지 마시고요.
물어는 볼게.
그리고 한참 있다가 메시지가 들어왔다.
그래서 쓸 건 가요, 그 사람 부고?
글쎄, 써야겠지.
살아서도 뻔했고, 죽은 뒤에는 더 뻔한데 그런 인생에서 뭔 건질 게 있으려나?
국장의 지시니까.
회장의 지시는 아니고?
그건 내가 모르겠고.
이 사람, 어때요?
은영이 외국 신문 기사 링크를 보내왔다. 안경을 다시 올리고 정기가 그 기사를 얼른 훑어보는데, 이름이 낯이 익었다.
누구지? 나도 아는 사람 같은데. 이름이 익숙해.
미국의 페미니즘 SF 소설가예요. 작년에 82살로 죽었는데, 그 사실이 최근 밝혀졌나 봐요. 그런데 다들 충격. 동거하던 파트너에게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것 같아요. 가택 수색을 하는 과정에서 사망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니까.
살인사건?
아직은 모른대요. 파트너의 혐의라는 게 탈세라 그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그럼 내가 알 만한 사람이 아닌데. 평생 SF소설은 읽어 본 적이 없어.
그럼 이제부터 읽어요. 10분만 가면 대형서점 있잖아요. 거기 가면 책 많아요.
내가 요새 눈이 안 좋아서.
눈이 문제가 아니에요. 최병기 같은 정치인의 부고는 눈 감고도 쓰시잖아요.
정기는 은영이 보낸 마지막 문자를 한참 바라봤다.
그러게. 지금까지 눈 감고도 기사 잘 쓰고 살았네.
그럼 이제부터라도 눈뜨고 고생하며 기사 쓰시길 바라요.
그런데 이 사람 이름이 왜 이렇게 익숙하지? 분명히 들어 본 이름이긴 한데.
눈은 감아도 귀는 열렸나 보네요.
과연 내가 쓸 수 있을까? 페미니즘도 모르고, SF도 모르는데.
정기는 서점에 가 보기로 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서점에서 정기는 에밀리 해리슨의 이름을 발견하지만, 그 이름은 전혀 뜻밖의 장소에 있었다. 그러니까 자신의 바로 옆이랄까. 눈 감고도 잘 산 게 맞았다.
5
에밀리 해리슨의 책은 한 권도 없었다. 책을 검색해 본 매장 직원은 번역된 그녀의 책이 대부분 절판됐거나 품절 상태라고 정기에게 말했다. 직원은 출판사에 재고를 확인한 뒤, 만약 책이 있다면 며칠 뒤 받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그에게 말했다. 책이 없을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에 정기는 적잖이 당황했다. 그는 그 직원에게 고맙다고 말한 뒤 돌아섰다. 출판사나 도서관에 알아보면 기자인 그가 책을 구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의욕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점이었다. 에밀리 해리슨이라는 존재가 그에게는 그 정도의 의미였다. 큰 고민 없이 정치인의 부고 기사를 쓸 수 있게 됐으니 오히려 그의 마음은 홀가분해졌다고나 할까.
그렇게 돌아서는데 정기의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자신에 대해 사주인 회장이 했다는 말이 떠올랐다. 기자보다는 소설가가 더 어울리는 사람이라던 그 말. 평생 기자가 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살았는데 그런 말을 듣게 되니 처음에는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그는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부고 기사를 터무니없이 길게 쓴 것도, 한국에서는 아는 사람도 많지 않은 일본인을 첫 부고 기사의 대상으로 삼은 것도 신문사에서 요구하는 기자의 모습은 아닌 게 분명했다.
정기가 SF소설들이 꽂힌 서가를 떠나 그 정치인의 회고록이 있을 정치 코너로 가려고 발을 떼었을 때였다. 매대 위에 놓인 소설 한 권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의 시선을 잡아끈 것은 책 자체가 아니라 표지 아래쪽에 두른 띠지, 그 속의 어떤 얼굴이었다. 그런 시력은 책을 들여다볼 때의 시력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침침한 눈으로 어떻게 거기 ‘제3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이라는 글자와 함께 인쇄된 작은 얼굴을 알아봤겠는가. 그 얼굴은 분명 정기가 아는 얼굴, 그러니까 딸 민지의 얼굴이었다.
그는 책을 들어 표지를 살펴봤다. 『벽을 넘어 빛을 향해』라는 제목의 장편소설로 지은이는 서미래로 돼 있었다. 책날개에 적힌 저자 약력을 보니 서미래는 현재 대학원에서 에너지공학을 전공하며 유기 태양전지 개발에 참여하고 있다고 돼 있었다. 그건 확실히 민지의 약력이었다. 그렇다면 그 책은 민지가 쓴 첫 책, 첫 장편소설인 셈이었다. 그 사실에 기뻐하는 것도 잠시 정기에게는 그런데 왜 자신에게는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고, 금방 마음이 무거워졌다. 민지와는 좁힐 수 없을 만큼 멀어졌다는 걸 방증하는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그는 그 여름의 두 번째 고민과 직면했다.
6
작가의 말
어릴 때 아빠를 따라 처음 도서관에 갔을 때가 기억난다. 서가들은 내게 거대한 미로처럼 느껴졌다. 곧 나는 그게 나를 가로막는 벽이 아니라 책들이며, 책은 펼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펼쳐 든 책은 내 앞으로 길이 되어 주고, 내 생각에 날개가 되어 줬다. 그 뒤로 인생의 어떤 막다른 벽에 이르러서도 나는 그 벽이 펼쳐질 수 있으며 날개가 되어 줄 수 있다는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특별히 두 사람에게 감사해야겠다.
한 명은 그 도서관에서 만난 에밀리 해리슨이다. 내가 처음 읽은 에밀리 해리슨은 『엘라의 정원』이라는 책이었다. 나는 그 책을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십 대 시절을 거치며 나는 에밀리 해리슨을 따라 광활한 우주와 복잡한 캐릭터와 외계 문명과 인류의 무한한 가능성으로 상상력의 공간을 넓혀 갔다. 그 이야기들은 여전히 내 마음속에 남아 있다.
도서관에서 에밀리 해리슨의 놀라운 세계에 처음 접속하던 시절, 아빠에게는 소설가의 꿈이 있었다. 소설가가 뭐냐고 내가 물었을 때, 아빠는 이야기를 짓고 부수는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그 말은 오랫동안 내게 의문이었다. 이야기를 짓는 것이야 잘 알겠지만, 부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이제는 너무나 잘 알 것 같다. 모든 이야기는 미래의 이야기여야만 한다. 하나의 이야기가 만들어지면 낡은 이야기는 부서져야만 한다.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가 바로 그런 이야기다.
그래서 내 이름은 이제 미래다. 나의 과거는 부서졌다. 에밀리 해리슨과 아빠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2025년 여름, 서미래
7
“여보세요?”
“아빠, 저예요. 잘 지내시죠?”
“응, 나야 별일 없지.”
“뭐 하고 계셨어요?”
“소설 읽고 있었어. 오늘 서점에 갔다가 재미있는 소설을 하나 찾았거든.”
“무슨 소설인데요? 제목이 뭐예요?”
“제목이··· 다 읽고 나서 진짜 좋으면 그때 얘기해 줄게.”
“이제 책 읽을 수 있으신가 봐요. 한동안 눈이 침침하다고 그러시더니.”
“응, 괜찮아. 눈이 항상 침침한 게 아니라 보려고 욕심을 낼 때만 침침하거든. 그래서 정말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하고 있어. 그런데 어쩐 일이야?”
“저하고 같이 사는 희선 언니, 아시죠?”
“···”
“아시죠?”
“응, 계속해 봐.”
“우리가 좋아하는 카피라이터가 온다고 해서 둘이 경주에 강연을 들으러 갔거든요. 강연장에 가니까 강연 만족도 조사를 한다면서 설문지와 연필을 나눠 주더라고요. 카피라이터가 그 연필을 눈여겨봐 뒀는지 강연이 끝날 때쯤이 되니까 ‘다들 지금 연필하고 종이 있지요?’라고 말하더니 종이에다가 미워하는 사람 이름을 써 보라고 했어요. 그래서 누굴 쓸까 하고 옆을 보니까 희선 언니는 자기 아빠 이름을 쓰더라고요.”
“···그래서 너도 내 이름을 쓴 거야?”
“아빠, 저는 아빠를 미워하지 않아요. 그건 희선 언니도 마찬가지고요. 지금 그 이야기를 하려는 거예요.”
“그 사람은 이상하네. 미워하지도 않으면서 왜 그 이름을 쓴 거지?”
“이름을 다 쓰고 났더니 카피라이터가 연필 뒤에 지우개로 그 이름을 지워 보라고 했어요. 그래서 다들 이름을 지웠어요. 그랬더니 ‘이름은 지워지죠? 하지만 그 미움도 지워지나요? 안 지워질 거예요. 이름은 글자일 뿐이니까’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더니 스마트폰을 검색해서 2018년의 일들을 쭉 읊었어요. 기억나시죠? 김정은과 트럼프가 싱가포르에서 정상회담한 거. 글쎄, 그게 2018년의 일이라니. 깜짝 놀랐어요. 그때 생각하면 세상이 너무 변한 것 같은 거 있죠.”
“우리도 변했겠지.”
“물론 그렇죠. 우리도 많이 바뀌었죠. 카피라이터가 또 말했어요. ‘다 같이 2018년을 떠올려봅시다. 그리고 2018년에 제일 미워했던 사람을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그 사람 이름을 적어 보세요.’ 난 그때가 가물가물해서 무슨 이름을 적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내 이름을 적지 그랬어?”
“아빤 아니라니까! 그래서 희선 언니는 누굴 적나 봤더니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어요.”
“왜 울었대, 그 사람은?”
“카피라이터가 이렇게 말했거든요. ‘누굴 미워했는지 잘 떠오르지 않지요? 썼다고 해도 아까 쓴 이름과는 다른 이름이지요? 새로 쓴 이름도 지워 봅시다. 지워지죠? 이게 무슨 뜻인가요? 종이에 쓴 글자는 지우개로 지우고, 마음에 쓴 미움은 뭘로 지운다? 세월로 지운다. 다들 오래 사시길 바랍니다. 어떤 미움도 남지 않을 때까지.’ 그 말을 듣고 희선 언니가 엉엉 소리 내 울었어요. 다들 놀랐죠.”
“무슨 사연이 있는 모양이네.”
“2018년에는 희선 언니 아빠가 살아 계셨거든요. 강연 끝나고 둘이서 호수 길을 걸어가는데 언니가 말했어요. ‘지금은 아빠가 그냥 미운데, 그때는 진짜 미워했거든. 그래서 그 이름을 또 써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는데 그 선생님이 다른 이름이죠, 그러시더라. 새로 쓴 이름도 지워 봅시다, 하시더라. 그때까지도 나는 이름을 쓰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까 처음부터 안 썼으면 나중에 지울 일도 없었겠네 싶더라.’ 그래서 제가 말했어요. ‘그런데 울고 나서는 이름을 썼잖아.’ 언니는 배시시 웃더니, ‘그래, 울고 나서는 이름을 썼지. 우리 아빠, 유혜준 씨. 그래도 그렇게 이름을 써서 좋았단 말이야, 내 말은. 미워하든 어쨌든. 나중에 지워지든 어쨌든.’ 그렇게 희선 언니가 모는 차를 타고 경주 시내를 지나오는데, 언니가 옛날 노래를 틀었어요. 〈안개〉라는 노래 아시죠?”
“정훈희의 〈안개〉?”
“네. 영화 〈헤어질 결심〉에 나왔던 노래. 그런데 언니는 트윈폴리오가 부른 〈안개〉를 좋아하더라고요. 아빠가 자주 듣던 노래라면서. 그 노래 들으며 가는데 차창에 나방 하나가 달라붙었어요.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더라고요. 내가 나방을 신경 쓰니까 언니가 속도를 조금 높였는데도 나방은 떨어지지 않았어요. 그 나방을 보는 사이에 노래가 끝났죠. 그런데 〈안개〉의 마지막 가사가 뭔지 기억나시나요?”
“글쎄, 뭐였지?”
“그래서 저도 언니한테 한 번 더 듣자고 했어요. 이번에는 가사에 귀를 기울이며 들었죠. ‘나 홀로 걸어가는 안개만이 자욱한 이 거리, 그 언젠가 다정했던 그대의 그림자 하나’. 그리고 마지막 가사는 ‘안개 속에 눈을 떠라, 눈물을 감추어라’였어요. 가사에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니 어느새 악착같이 버티던 나방이 떨어져 나갔더라구요. 저 그때 결심했어요. 여기서 공부 그만하기로.”
“···”
“아빠, 듣고 있어요?”
“···응, 〈안개〉 가사가 그랬구나. 많이 들었는데도 몰랐네.”
“공부 끝까지 못 해 아빠한테 미안해요. 실망만 시켜드리는 것 같네요.”
“아니야. 너한테 실망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
“공부 말고 더 하고 싶은 일이 생겼어요. 차차 자세히 말씀드릴게요.”
“나도 알 것 같아.”
“정말이요? 아빠가 알 수도 있으려나?”
“다음 주말에 시간 되니?”
“다음 주말이요?”
“응. 다음 주말에 장한나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의 공연이 있어. 같이 보러 갈래?”
“그게 좀···.”
8
도서관은 산의 초입에 있었다. 계곡의 모양을 따라 나지막하고 기다랗게 나무로 지은 건물이었다. 산속에 있어 멀리서 보면 노아의 방주처럼 보이기도 했다. 시내에 현대식 신축 도서관이 있었지만, 정기는 숲이 가깝고 이용자가 많지 않은 이 도서관을 더 좋아했다. 오래전, 정기는 쉬는 날이면 어린 딸과 함께 이 도서관을 자주 찾아가 3층 열람실 구석에서 소설을 끼적이곤 했다. 아직은 미래가 불투명하던 시절이었다.
그때 민지는 1층 어린이도서관에 있었다. 그는 계단으로 올라가는 대신 1층으로 갔다. 컴퓨터로 『엘라의 정원』을 검색한 뒤, 정기는 메모지에 청구기호를 적었다. 책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이제쯤은 책이 서가에서 사라졌거나, 있다손 치더라도 수선이 필요할 정도로 낡았으리라 생각했지만 책은 멀쩡했다. 민기는 그 책을 들고 숲이 보이는 창가 자리로 걸어갔다.
한쪽에 놀이방처럼 매트를 깔아 놓아 아이들이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책을 읽고 있었다. 그 아이들을 보는데, 어린 민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정기의 가슴이 아려 왔다. 그 시절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그럴 줄은 짐작했지만, 과연 그런 시절이 내게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아득히 멀어졌다. 그럼에도 그것은 자신이 선택한 유일한 삶이었다.
아이들을 보며 정기는 그때 민지의 키가 얼마만 했나 생각했다. 오른손을 들어 가며 이 정도였을까, 라고 재 보다가 그는 중얼거렸다.
‘그때 민지는 내 가슴께쯤이었구나.’
그러자 아득했던 과거가 점차 또렷해진다. 정기는 창가 책상에서 『엘라의 정원』을 읽는 민지의 옆에 앉는다.
“무슨 책이야?”
정기가 묻는다. 민지는 눕혀서 읽던 책을 들어 표지를 보여 준다.
정기도 자신이 들고 온 책의 표지를 보여 준다. 민지는 손뼉을 친다.
“나랑 같은 책이네.”
“이 책을 네가 너무 좋아하길래 나도 한 번 읽어 보려고.”
“내가 읽어 보라고 했잖아. 그거 엄청 재미있어, 아빠.”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데?”
“아무리 끔찍한 것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소녀 엘라의 모험 이야기인데···.”
“모험이라고?”
그러자 민지는 고개를 끄덕인다.
“응. 여름방학을 맞아 엘라가 시골 할아버지 댁으로 가게 돼. 그 마을에는 옛날부터 사람들이 절대 들어가지 말라고 하는 정원이 있어. 저주받은 저택의 정원이야. 그 정원 앞을 지나갈 때면 마을 사람들은 끔찍하다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어. 하지만 엘라는 이상하기만 해. ‘뭐가 끔찍하다는 거지? 이렇게 아름다운데.’ 그래서 어느 날, 아무도 몰래 엘라가 그 정원에 들어갔다가 거기서 만난 정원사에게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는 법을 배우는 이야기인데···.”
“그런데?”
“아빠라면 아름다운 정원을 뭘로 가꿀 거야?”
“삽이랑 곡괭이, 호미··· 뭐, 그런 게 필요하지 않을까? 때맞춰 물과 비료도 주고.”
“그건 그냥 정원을 가꿀 때지. 내 말은, 아름다운 정원 말이야. 아름다운 정원을 가꿀 때는 뭐가 필요해?”
“잠깐. 그냥 정원이랑 아름다운 정원이랑 달라?”
“완전히 다르지.”
“어떻게 달라?”
“아유, 답답해. 그게 알고 싶으면 『엘라의 정원』을 읽으면 됩니다요!”
9
연주가 끝나자 지휘자인 장한나는 포디움에서 내려와 왼편 문으로 사라졌다. 청중들은 계속 박수를 치며 몇 번이나 그녀를 다시 불러냈다. 장한나와 오케스트라는 두 곡이나 앙코르에 응한 뒤에야 무대를 떠날 수 있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을 보며 정기는 좋은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정기와 민지는 통로를 따라 이동하는 사람들의 물결 속으로 들어갔다. 1층 로비로 내려가니 많은 사람들이 미샤 마이스키와 장한나에게 사인을 받기 위해 줄지어 서 있었다. 이번에는 사람들의 물결을 거슬러 두 사람을 걸었다.
밖으로 나오니 해는 저문 뒤였다. 조금은 서늘했다. 여름은 이제 그 뒷모습을 보이며 멀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밤과 가을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렇게 낮과 밤 사이, 여름과 가을 사이로 둘은 걸어갔다.
광장에서는 화려한 조명과 함께 분수가 드보르자크의 9번 교향곡의 선율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그 교향곡의 도입부를 정기가 처음 들은 건 흑백텔레비전으로 광고를 볼 때였다. 그 뒤로 그 교향곡은 태어나기 전부터 들은 곡처럼 느껴졌다. 오디오를 구입한 뒤로는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로 수없이 들었다.
민지가 태어날 무렵의 일이었다. 사귀던 여자 친구가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알았을 때, 정기는 스물여섯 살로 지금의 민지보다 어릴 때였다. 그는 대학원을 중퇴한 뒤 언론사 여러 곳에서 입사 시험을 치렀고, 너무 늦지 않게 여자 친구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 뒤로도 종종 삶은 끝난 것처럼 보이는 방식으로 계속되곤 했다.
“아홉 살이던 장한나의 첼로 연주를 듣고 마이스키가 뭐라고 말했는지 알아?”
정기가 민지에게 물었다.
“몰라요. 뭐라고 했어요?”
“한나의 연주를 듣고 저는 환생을 믿게 됐습니다. 누구도 함부로 이 아이를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
무대에서 본 미샤 마이스키의 백발을 떠올리며 정기가 말했다.
“좀 이상한 말이지 않아? 카르마 같은 게 있어 환생한다면, 이번 생의 일은 모두 정해져 있다는 뜻이잖아. 그런데 함부로 이 아이를 가르치지 말라는 건 누가 어떻게 가르치냐에 따라 한나의 미래가 달라질 것이라는 뜻이니, 앞뒤가 서로 모순되지 않나?”
“모순되지 않는 것 같은데요. 같은 카르마라도 누가 경험하느냐에 따라 저마다 다른 현실로 나타나지 않을까요?”
“나는 문제로 경험한 것을 너는 답으로 받아들이는구나. 이제 무슨 말인지 알겠다.”
“뭐를요?”
“오늘 아침에 숲속에 있는 도서관에 가서 『엘라의 정원』을 읽었거든.”
그러자 민지는 고개를 돌려 정기를 쳐다봤다.
“웬일로요?”
“내가 지금 에밀리 해리슨에 대한 기사를 준비 중이야.”
“아빠, 혹시?”
“잠깐만, 내가 먼저. 그런데 책 표지를 보는데, 옛날에 네가 한 말이 떠오르더라.”
“뭔데요?”
“그냥 정원이랑 아름다운 정원은 완전히 다르다는 말. 알고 보니 책에 답이 다 있었더라고. 그냥 정원은 엘라가 보고 있지 않은 정원이고, 아름다운 정원은 엘라가 보고 있는 정원이라고. 왜냐하면 엘라는···.”
“끔찍한 것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소녀니까.”
민지가 말했다.
둘이 그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교향곡은 주제 부분을 느리게 변주하며 끝났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물줄기는 움직임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처음부터 다시 한번 더 들어도 좋겠다고 정기가 생각하던 찰나, 스피커에서는 다른 곡이 흘러나왔다. 분수는 그 곡에 맞춰 다시 춤을 추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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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 2025-07-01
알고 싶습니다 최재영 가끔 인생이 내게 애벌레가 파먹는 중인 사과를 베어 물도록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토요일 저녁 아홉 시 뉴스에선 오늘도 전 세계 기아들이 굶고 있고 남미 쿠데타 정부의 진압 몽둥이에 시민들이 맞고 있으며 전장의 포탄은 군인과 민간인들을 죽인다. 그러나 우리 집 안방엔 세 살 연상 아내와 세 살짜리 딸이 곤히 잠들어 있다. 비록 내일이면 공룡 박사 딸은 파키케팔로사우루스 흉내 내며 내 턱에 박치기를 날릴 것이고 아내는 원시인 사냥꾼처럼 괴성을 지르며 딸을 쫓을 것이지만··· 서른여섯 살의 나는 대한민국 성남시의 아파트에, 지금 여기에, 우리 세 가족과 잘 있고, 그것참, 다행이다. 내가 베어 문 사과 반쪽에 벌레가 없어서. 뉴스에 어느 북한군이 등장한 건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전장이었다. 한 북한군이 부상 때문에 낙오했는지 홀로 하늘을 보며 누워 있었다. 러시아 것인지 우크라이나 것인지 모를 드론이 공중에서 그를 촬영하고 있었다. 곧 드론은 부드럽게 수직 하강하며 그에게 다가갔고 그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쓰으윽- 줌인 됐다. 뉴스 진행자와 패널들이 호들갑 떨었다. “너무나 리얼합니다!” 무슨 아는 사람이라도 본 것처럼 오바하네. 나는 그들의 반응에 코웃음 치며 손에 든 캔맥주를 쓰으윽- 들이키려다, 멈칫했다. 아는 사람 같았다. 낯이 익었다. * 약 15년 전 여름, 나는 백령도에 주둔한 해병대 6여단 영창에 15일간 구금되어 있었다. 죄명은 후임 폭행이었다. 막 상병이 됐을 때 생긴 일이었다. 영창의 개인 감방에 들어서자 정말이지 감옥처럼 생겨서(정말 감옥이긴 했지만) 울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철커덩 자물쇠가 닫히는 소리와 함께 스물한 살에 인생이 망해 버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감방 철창 너머론 건물의 입구와 헌병 하나가 근무하며 감시하는 공간이 보였다. 그 공간을 기준으로 네 개의 감방들이 반원을 그리며 각각 1호 창, 2호 창, 3호 창, 5호 창이라는 이름으로 있었다(4호 창은 없었다, 해병대에선 숫자 4를 쓰지 않으니까). 나는 3호 창에 수감됐다. 감방 안에 앉아 있으면 보이는 건 꾹 닫힌 건물 문, 그리고 중앙의 그 헌병밖에 없었다. 양옆의 다른 감방들은 시야에 아예 들어오지 않았다. 1호 창과 5호 창에도 수감자가 한 명씩 있다는 것만 알 뿐이었다. 단 2호 창만은 비어 있다고 했는데 폭행 사건이 일상적이라 항상 미어터지던 백령도 해병대의 영창에선 이례적인 일이었다. 나중에 듣기론 당시 북쪽 상황이 심상치 않아 각 부대들의 징계 절차가 보류됐기 때문이라고 했다. 감방 안은 어두컴컴하고 축축했다. 폭은 누워서 다리를 뻗지 못할 정도였다. 물론 화장실은 따로 없었다. 안쪽으로 세 걸음 가면 구석에 수도꼭지를 비롯해 쪼그려 앉아 일을 보는 일명 고무신 변기가 있었다. 무릎 정도 높이의 아담한 담만이 가림막을 해 주었다. 큰 것이든 작은
- 관리자
- 2025-07-01
프레살레 반수연 홍은 미로처럼 이어진 길을 솜씨 좋게 빠져나갔다. 홍을 놓칠세라 일행들은 빠른 걸음으로 따라붙었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공항은 번잡했다. 챙이 넓은 홍의 검은색 모자는 인파 사이에서 사라졌다가 나타나곤 했다. 모자가 사라질 때마다 짧은 불안이 스쳤다. 우리 중 누구도 파리에 처음 오는 이는 없었다. 정아는 작년 패션 위크에도 왔다고 했다. 하지만 출구로 빠져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홍을 만난 순간, 홍이 웰컴 투 패리스, 라며 환하게 웃던 순간, 제가 잘 모시겠습니다, 라며 농담과 카리스마가 뒤섞인 환영 인사를 건네는 순간, 홍은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깃발이 되었다. 몇 개의 건물과 긴 복도를 통과해 홍이 예약해 둔 렌터카 사무실에 도착했다. 미리 맡겨 두었다는 홍의 짐이 사무실 모퉁이에 쌓여 있었다. 각지고 거대한 두 개의 캐리어, 명품 마크가 선명한 가죽 배낭과 보스턴백, 두 개의 쇼핑백도 포개져 있었다. 캐리어 계의 에르메스라는 바로 그 리모와 아닌가요? 색깔 너무 이쁘다. 이삿짐을 떠올리게 하는 홍의 짐에 약간의 충격을 받은 나와는 달리 정아는 레몬색 캐리어에 먼저 관심을 보였다. 자기야, 그건 좀 그렇지 않아요? 에르메스야 버킨 말고는 뭐가 있나. 홍과 정아의 대화를 들으며 나는 며칠 전 정아가 단톡방에 올린 메시지를 떠올렸다. 유럽 항공은 수하물 분실이 잦으니 위탁 수하물 없이 기내용 캐리어와 작은 손가방으로 짐을 제한해요! 정아는 해당 항공사의 기내 반입 수하물 규정을 캡처해서 올리며 당부했다. 같은 옷을 이틀 연달아 입거나, 옷과 콘셉트가 맞지 않는 신발이나 가방을 견디지 못하는 예민한 패션 감각의 소유자인 정아가 분실이 두려워 그런 제안을 한다는 건 조금 의외였다. 그런데 이제 보니 정아는 홍의 짐이 어마어마하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정아가 홍을 위해 우리 짐을 단속했다는 사실보다 진실의 내막을 뒤틀었다는 것이 묘하게 신경을 긁었다. 독일제 7인용 SUV 차량의 마지막 3열을 접어 트렁크의 공간을 넓혔다. 홍의 캐리어를 먼저 싣고 그사이에 네 개의 기내용 캐리어를 테트리스 하듯 넣었다 뺐다 씨름하느라 손가락이 욱신거렸다. 어찌어찌 짐을 욱여넣고 나니 트렁크는 룸미러로 후방이 보이지 않을 만큼 꽉 찼다. 배낭이나 손가방은 발아래에 두거나 안고 타면 될 거라고 홍이 운전석으로 올라타며 말했다. 나는 노트북과 파우치와 책이 담긴 배낭을 가슴에 안고 뒷좌석에 올라 안전띠를 당겨 맸다. 짐과 사람이 뒤엉켜 숨 쉴 공간마저 충분치 않게 느껴졌다. 답답함이 불안으로 바뀌며 숨이 가빠 왔다. 다른 일행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프로작을 한 알 꺼내 입에 물고 창을 조금 열었다. 약기운이 신경을 눌러 주기를 기다리며 눈을 감았다. 파리는 오전 열한 시, 한국은 오후 여섯 시였다. 지금쯤이면 윤수는 일어났을 것이다. 냉장고 제일 위 칸에 김치찌개 있어. 냉동실에 육개장도 얼려 두었어.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어. 공항으로 출발하기 전 나는 신발을 신다 말고 식탁에 앉아 짧
- 관리자
- 2025-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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