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 작성일 2025-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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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박솔뫼
어느 날 아침 애리는 자신이 오랜 시간 흔들리는 창을 보며 시간을 보내왔음을 알았다. 일을 하러 가는 길이었고 이곳에 이사와 이 열차를 탄 것은 1년 7개월째였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학교에 들어가기 전 아이일 때 모든 것이 멈춰 서 있고 시간이 영원한 것처럼 느껴지던 때부터 탈 것에 올라타 멀어지는 집과 나무들을 보아 왔다고 느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텐데 왜 그제야 그것이 새삼스럽게 느껴진 것일까. 어딘가로 향하는 감각과 함께 창 너머 공터와 집들과 골목들을 실제로 걷는 일은 왜인지 일어나지 않을 일처럼 느껴지고 언제까지나 좌석에 앉아 멀어지는 사람과 집들과 빨래와 커튼을 보고 있을 것 같다.
애리는 사원 숙소를 제공하는 회사에서 오랫동안 일을 하다 그만두고 나와 집을 구해 살다 사회복지와 개호 관련 자격증을 따고 이후에는 자격증과 상관없는 일을 몇 년을 하였다. 그러다 역시나 숙소를 제공하는 지금의 회사에 다니게 되었다. 회사는 큰 항구가 있는 대도시와 인접한 소도시에 있었고 숙소는 회사 직원만이 아니라 해당 지역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한 곳이었기 때문에 회사와는 아주 가깝지는 않았다. 그 때문에 예전 회사는 숙소에서 회사까지 걸어갈 수 있었지만 지금 회사에 가기 위해서는 숙소에서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역으로 가서 다시 20분가량 열차를 타야 했다. 숙소 앞에서 버스를 타는 방법도 있었고 버스를 타는 것이 여러모로 더 편했지만 버스는 늘 같은 회사 사람들로 붐볐고 앉아 가기가 힘들어서 애리는 보통 열차를 탔다.
오랜 시간 흔들리는 창을 보며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자 곧이어 오랜 시간 기숙사에서 공동 부엌에서 공용 생활공간에서 얼굴만 익숙한 사람들과 살아왔다는 사실이 마치 연결된 문제처럼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둘은 전혀 상관없는 일인데. 마음을 먹자면 살 곳을 구해서 혼자 사는 것이 가능했던 것도 같지만 애리는 왜인지 그럴 마음을 쉽게 먹지 못했다는 생각을 한다. 이렇게 나이가 들어서 공동 숙소에서 사는 것이 부끄럽거나 괴롭지는 않고 돈을 아낄 수 있고 여러모로 편리한 점도 많았지만 혼자 살 집을 찾아 오래 쓸 가구를 사는 일에 겁을 먹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냉정하게 바라본다. 창은 여전히 흔들리고 창밖으로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터가 보인다. 공터 구석에서는 무언가 야채 같은 것을 심는 것도 같지만 대부분은 아무것도 없는 공터. 도시 어느 한구석의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터는 드물다는 생각을 한다. 가끔은 누군가의 넓은 방과 책장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가도 애리는 동시에 이것저것 모든 것을 한 번에 버리고 어딘가로 금세 떠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고 그것이 실제로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지금 생활은 지금 생활대로 좋다고 여기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누군가의 텅 빈 방 (떠올려 보면 아주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는)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 그것을 원하는 마음은 원하는 마음으로 눈에 보이는 곳에 확실하게 붙여 두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텅 빈 방의 모습이 뚜렷해질 때 언젠가 그것을 가졌던 것 같고 지금은 잠시 회사 숙소에서 나와 살지만 사실은 나에게는 돌아갈 집이 있고 거기에서 나는 생활하고 있다는 실감이 애리를 찾아오기도 한다.
애리는 일주일에 4일 출근을 했다. 나머지 3일은 그때그때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짧게 여행을 가기도 가끔은 영화를 보러 가기도 했지만 대개는 산책을 하거나 공원에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회사 일이 익숙해지기 시작한 1년 전부터는 역시나 열차를 타고 40분쯤 가야 하는 역 근처 오래된 카페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애리가 일하는 카페는 20세기 중반 문을 연 오래된 카페로 원두의 작황이 어려워져 점차 카페가 사라지기 시작했을 때 한 번 문을 닫은 적이 있지만 그때를 제외하고는 지금까지 계속 운영하고 있는 곳이다. 문을 닫았던 시기도 폐업이라기보다 앞으로 변화할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내부 상황을 점검하였다고 하는 편에 가까울 것이다. 카페는 오래 거래하던 농장과 계약을 새로 맺고 그에 맞춰 가격을 올렸고 직원 교육에 더 신경을 썼다. 이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는 아닐지 모르지만 가장 오래된 곳에 가까운 이 카페는 대부분의 카페가 문을 닫고 사라진 후에도 역사와 전통을 간직한 곳으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애리는 이러한 내용을 직원 모집 공고와 함께 붙은 공간 설명을 보고 알게 되었다. 이러한 카페의 성격 때문인지 혹은 카페 자체가 드물어졌기 때문인지 주말에 일을 해도 괜찮을 것 같아서 지원한 애리 외에 다른 직원들은 모두 커피라는 것에 진지하게 임하고 싶어서 이곳에 지원한 경우였다. 애리는 카페에서 일을 하는 것에 익숙해지자 커피와 구운 과자 그들이 풍기는 냄새 커피를 내리는 도구 같은 여러 요소들을 그럭저럭 좋아하게 되었지만 자신의 급여로는 한 달에 한 번쯤 마음먹어야 마실 수 있는 커피에 아주 진지하게 임하게 되지는 않았다. 진지하게 임하게 되지 않았다기보다 망설임 없이 좋아하게 되지는 않았다. 집에서는 물을 끓여 마셨고 무언가 마시고 싶다면 식품 회사에서 만든 커피나 홍차 대용 음료를 마셨다. 커피에 강한 의욕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하는 일에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필요한 만큼 성실하게 일을 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애리는 종종 생각했다. 지난 1년 사이 커피에 대한 고민으로 일을 그만둔다고 말한 직원을 두 명이나 보았기 때문이다. 애리는 자신이 채용된 것도 어쩌면 일을 그저 일로만 대하고 있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주말에 종종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된 선호를 알게 된 것도 이 카페에서였다. 커피의 작황이 점점 어려워지고 가격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가자 여러 식품 회사에서는 원두를 넣지 않거나 줄이면서도 커피 맛과 비슷한 음료를 개발하기 시작했는데 선호는 그런 세계적인 식품 가공 회사에서 제품 개발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제 커피라는 것은 이전 같지 않고 사람들은 커피가 거의 들어가지 않은 커피의 맛을 구현한 무언가를 사 마시는데 그걸 만드는 게 선호의 일이었고 동시에 선호는 지나치게 비싸진 커피에 기꺼이 돈을 지불하는 사람이었다. 애리는 주말에만 일을 했지만 선호는 일주일에도 두어 번 카페에 왔으니 두 사람은 곧 얼굴을 익히고 가볍게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선호는 처음에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말을 해 주지 않았는데 커피를 그렇게 좋아한다고 말하면서 커피 비슷한 걸 만드는 일을 한다고 말하는 것은 늘 가벼운 비웃음을 사고는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슨 일을 한다고 말을 하지 않아도 선호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사무실에서 일을 하는 사람의 몸가짐이 느껴졌고 현재 하는 일에 큰 불만 없이 성실하게 임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었기 때문에 애리를 비롯해서 카페의 사람들은 어떤 회사인가에서 오래 일한 사람일 것이라고 막연히 짐작했다.
애리는 주말의 일이 끝나면 근처 오래된 상점가에서 두부와 두유와 야채를 사서 다시 열차를 타고 숙소로 돌아갔다. 직원용 기숙사가 있는 동네는 공장과 숙소만을 위해 30여 년 전 농지를 허물고 몇 안 되는 주민들을 이주시켜 만든 지역이었는데 몇 년을 채우다 직장을 그만두거나 대도시로 집을 구해 나가는 사람이 대다수여서인지 동네에는 시장도 큰 슈퍼마켓도 없었다. 오래된 상점가의 야채 가게는 상처가 나거나 알이 약간 작은 과일이나 숨이 조금 죽어서 익혀 먹기 적당한 야채들을 팔았다. 두부는 여름에는 쉽게 상하니 가을 겨울에만 사 올 수 있었고 애리는 대개 야채와 콩과 국수 같은 것을 사서 돌아오고는 했다. 야채를 품에 안고 밤의 열차를 타고 이제는 먼 곳에서 불이 깜박이는 것을 애리는 역시나 열차의 창을 통해 보고 있다.
어느 날 아침 흔들리는 창을 바라보고 있을 때 애리는 문득 어쩌다 이곳까지 흘러오게 된 거지 전혀 연고도 없고 관심도 없던 곳에서 살아가게 된 것이지 하고 놀라게 된다. 그것도 여러 번 새삼스럽게 놀라고 그러다 곧 그런데 일을 할 곳이 있었고 잠을 잘 곳이 있었잖아 하고 애리는 금세 납득한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어느 날 밤에는 일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느끼고 침대에 누워 언제 어느 곳에 있든지 잠은 나와 함께 한다고 스스로에게 말하게 된다. 애리는 잠이라는 상태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잠이라는 장소가 자신에게 주어졌다고 여긴다. 어느 곳에서 살든지 나에게 잠이라는 곳이 있고 나는 잠을 잘 때 그 곳에 가면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텅 빈 방 넓고 필요한 만큼 해가 드는 방에 대한 생각은 종종 애리를 떠나지 않는다. 애리는 거기에 침대를 두고 어떨 때는 책상과 의자를 그 앞에 둔다.
처음 선호의 집에 갔을 때 조금 놀랐던 것은 애리가 머릿속으로 그려 본 텅 빈 방과는 달랐지만 선호의 집에는 그 나름의 텅 빈 방이 있다는 것이다. 침대가 있고 책장이 있고 책상과 의자가 있었지만 가구들 사이 텅 빈 구석들이 있는 넓은 방이었다. 선호와 처음 길게 이야기하게 된 것은 여느 때처럼 카페 근무를 마치고 상점가에서 두부를 사고 근처 식당에서 국수를 먹고 있을 때였다. 이어서 들어온 선호와 카페에서처럼 인사를 하고 같은 테이블에서 국수를 먹게 되었다. 애리는 카페에서 인사만 하던 선호와 막상 이야기를 시작하자 편하고 재미있다고 느꼈다. 동시에 애리는 문득 나쁘지는 않지만 가까워지지는 않던 평일의 회사와 주말의 카페의 동료들을 떠올렸다. 어쩌면 선호가 이 도시로 이사 온 후 처음으로 가까워진 친구 비슷한 것이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아니면 이렇게 회사든 카페에서든 오래 자리를 지키다보면 비슷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몇몇과 지금보다 더 가까워질지도 모르겠다. 애리는 숙소가 있는 소도시의 이름을 말하고 아무것도 없는 곳이라고 덧붙이고 선호는 어딘지 안다고 자신은 이 근처에서 산다고 말한다. 그게 조금 의외였는데 이 부근은 이전에 비해서는 많이 평범해졌지만 20세기에는 일용직 노동자들과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들의 거리로 불리던 곳이었고 이 도시 어느 곳이나 그렇듯 역 주변은 평범한 신축 건물로 채워졌지만 골목 안쪽으로 가면 여전히 오전부터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나 홈리스들이 공원 벤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의외라고 말하자 선호는 카페가 있는 쪽이 아니라 역의 반대편 출구로 나가서 좀 더 걸으면 그쪽은 또 다르다고 말했다. 도시는 블록 하나로 육교나 횡단보도 하나로 다른 생물처럼 분위기가 바뀌니까요. 애리는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하면서도 생물처럼 분위기가 바뀐다는 말이 어딘가 꾸며 낸 표현 같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 말을 조급하지 않게 천천히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그대로 말하는 리듬으로 말을 했기 때문에 결국 이 사람은 그런 생각을 하는구나 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선호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커피를 좋아하셔서 그 영향으로 커피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선호가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돌아가셨는데 아직 어렸기 때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서야 처음 카페로 가서 커피를 마셔보았다고. 처음에는 호기심이었지만 아버지는 이런 걸 좋아하셨구나 생각하며 그 이후로도 몇 번 마시다 보니 어느새 좋아졌다고 했다. 그러는 사이 해가 다르게 기후는 급변하고 작황은 어려워지고 가격은 치솟아서 커피라는 것을 이전처럼 매일 같이 마시기는 어려워졌다. 선호는 아버지는 커피에 관해서라면 가장 좋을 때를 누리고 가신 거라고 했다. 세계 여러 곳에서 여러 농장들의 커피를 수입해서 가장 맛있는 맛을 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말하자면 황금기를 누리신 거라고. 선호는 황금기를 golden era라고 말했고 이 역시 천천히 자연스럽게 말을 해서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애리는 골든 에라 라고 말하는구나 하고 잠깐 생각했다. 하지만 성공적인 투자자였던 아버지는 분명 모든 것을 예측하셨던 것 같다며 아버지의 방에 잘 보관된 상태 좋은 생두가 몇 킬로나 있었다고 말했다. 지금이라면 그 원두를 잘 로스팅할 수 있겠지만 그때는 잘 몰라서 어머니가 주변에 선물하거나 근처 카페에 로스팅을 부탁하거나 하는 식으로 가볍게 처리했는데 그게 가끔 후회가 된다고 했다.
이후로도 애리는 선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선호는 자신의 일을 둘로 나누어서 생각했다. 하나는 이제는 사람들이 많이 잊어버린 진짜 커피에 가까운 맛을 그에 가깝게 구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예 커피가 무엇이었는지 혼란스럽게 할 수 있는 완전히 다른 맛에 가까운 무언가를 하지만 마실 만한 무언가를 만들어 내고 그것을 커피라고 말하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흥미로운 일이며 선호는 자신은 원두를 내려 마시는 커피를 좋아하지만 자신이 하는 일도 그만큼 아니 그 이상 좋아하고 있다고 말했다. 애리는 자신은 그 둘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느꼈다. 진짜 커피에 가까운 것을 이전부터 마셔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가끔 마신 커피들이 나름의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기는 하지만 결과물을 정확히 구분할 자신은 없었고 어쩌면 커피를 구분하는 일에 흥미가 아니면 의욕이 없는 것도 같았다. 무엇이든 마실 만하면 마시지 않을까. 선호는 현재 개발 중인 두 번째에 해당하는 신제품이 나오면 곧 갖다주겠다고 했다. 애리는 커피와 완전히 다른 맛인데 사람들이 커피라고 생각할 만한 무언가가 어떤 맛일까 잠깐 생각했다. 애초에 다른 맛을 상정한다는 것이 조금 거짓말 같다고 느꼈는데 그러다가도 실제 카페에서 일을 하며 마셔 본 여러 커피들의 맛이 다양했던 것을 떠올리며 가능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다가 그래도 조금 석연치 않다고 느꼈다.
많다고 하면 많다고 할 수 있는 나이를 먹은 두 사람은 (하지만 여기에 많다고 하면 많고 적다고 하면 적다고 할 수 있는 같은 흔히 쓰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았는데 두 사람은 경우에 따라 많지 않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어리다고는 할 수 없는 나이였기 때문이다) 보통은 한 달에 두어 번 어떨 때는 주말 내내 함께 시간을 보내고는 했다. 주말 내내 시간을 보낼 때는 선호의 집에서 자고 일어나 미리 세탁해 둔 유니폼을 챙겨서 카페로 출근하고는 했다. 두 사람은 카페에서 가볍게 인사를 하고 평소와 같이 손님과 점원으로 상대를 대했다. 하지만 연락을 자주 하지는 않았고 그래서 따로 만나지 않을 때는 한 달 이상 만나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손님과 점원으로 서로를 마주할 때는 언제나 반갑게 인사를 했다. 선호를 만나지 않을 때 애리는 그제야 주변을 돌아보며 자신이 살고 있는 숙소 주변을 너무 모른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이 주변에서 뭔가 모르는 무언가를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버스를 타고 주변을 살펴볼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퇴근을 하고 나면 그런 열망도 사그라들었다. 대신 같이 일하는 이 지역 출신 직원에게 주변에 갈 만한 곳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는데 그 친구는 주변에 뭐가 없어서 어릴 때부터 주말이면 가족들끼리 차를 타고 멀리 나가는 쪽이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아마 직원 숙소에서 버스를 근처에 오래된 절이 있었던 것 같은데요.
걸어서도 갈 수 있을까.
한 40분 정도? 50분 정도 걸으면 될 거니까 천천히 걸으면 갈 수도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회사 가는 방향 말고 반대 방향으로요.
애리는 언젠가 그곳에 가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절까지 가는 길에는 몇 개의 통조림 공장을 지나야 할 것이다. 걸어서 갈 만한 길일까. 애리는 아직 가지도 않은 그 길 위를 차도 옆 풀이 난 길을 걷는 자신이 왠지 그려졌다. 인도가 따로 없고 가끔 뒤에서 자전거가 자신을 앞질러 가고 일단 버스를 탄 채 어떤 길인지 창을 통해 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애리는 어디로도 출근하지 않는 날 시도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느 오후 공장을 따라 걷는 사람 그 사람은 조금 서두르는 걸음으로 하지만 구체적인 용건은 없는 것 같은 얼굴로 앞으로 앞으로 풀이 난 길을 따라 걷고 있다.
선호는 어릴 때 상하이에 있는 국제 학교에 다녔다고 했고 그곳 친구들 중에 회사원은 자기밖에 없다고 웃으며 하지만 그런 말까지도 정해진 농담처럼 여유 있게 이야기했다. 여름이 되면 자신이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부모님이 미리 사 둔 바닷가 근처 작은 건물에 애리와 함께 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애리는 모래 묻은 발을 털고 계단을 올라가는 광경을 떠올렸다. 선호는 어릴 때는 그곳에 몇 번 갔지만 한동안 다른 사람에게 세를 주어서 들르지 못하다가 몇 년 전부터 자신이 관리하게 되어 일 년에 몇 차례 들른다고 했다. 이전처럼 여러 곳에 세를 주고 있지만 바다가 가장 잘 보이는 조용한 방은 자신이 쓰고 있으니 여름에 그곳에 가면 좋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요. 그러면 좋을 것 같아. 정말로 나쁠 것이 없는 일이고 좋기만 한 일일 것이다.
선호는 언제까지 지금 회사에서 일을 할 것인지 동시에 언제까지 카페에서 일을 할 것인지 종종 물었는데 그것은 늘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다음 달이라도 당장 그만둘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면서 꽤 오래 다닐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왜인지 글쎄 당분간은 다니지 않을까 라고 답하게 되었다. 일이 필요하고 돈이 필요해요 세상 모든 사람들처럼 간절하게. 그것이 가장 정확한 답이었는데 정확한 답을 어떻게 자연스럽게 도시는 다른 생물처럼 모습을 바꾼다고 말할 수 있을지 애리는 그게 늘 어렵다고 느꼈다. 애리는 그러나 자신이 무엇을 하든 어디에서 살아가든 자신은 잠으로 갈 수 있다고 말했다. 선호에게 직접 그런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잠을 확실히 인지하고 있다고 나는 그러한 공간이 있고 그것을 잘 알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바다가 잘 보이는 방에서 아침을 맞이할 때도 언제나처럼 애리의 잠은 단단하고 부드럽게 애리를 지지할 것이다.
선호가 해외 출장에 가야 한다고 식물에 물주기를 부탁했을 때가 아마 두 사람이 가장 친밀했을 때일 것이다. 애리는 선호의 집에서 출퇴근을 하였는데 거리로는 분명 숙소보다 더 가까울 그곳이 열차를 탈 경우 한 번 갈아타야 해서 걸리는 시간은 비슷했다. 애리는 선호의 집에 앉아, 1층 작은 소파에 앉아 집이 내는 소리를 들었다. 선호의 잘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확인한 뒤 소파에 몸을 기댔다. 구석에는 다 탄 향의 재가 작은 접시에 남아 있었고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연하게 향이 맡아졌다. 선호를 만나 이 집에서 종종 시간을 보냈고 두 사람은 연인이 되어도 좋을 만한 정신적 육체적 친밀함이 있었지만 애리의 마음속에는 누가 물어보지도 않았지만 나에게는 잠이라는 갈 곳이 있다고 주장하고 싶어졌고 선호는 점점 애리가 길에 서서 흙이 묻은 감자를 굳이 씹어 먹는 사람이라고 느끼기 시작했다. 길에서 뭔가를 먹을 필요가 있을까. 그게 사과나 귤이라고 해도 이해가 안 되는데 왜 흙이 아직 묻은 감자를 씹어 먹는 걸까. 선호는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은 없었고 상대방의 기분이 상할 만한 말을 할 사람은 아니었으니 앞으로도 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선호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도 애리는 스스로를 변호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익히지 않은 감자를 굳이 먹는 사람은 없다는 것쯤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애리는 입을 벌려 내가 먹던 건 사과라고 보여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과를 감자로 보고자 하는 사람에게 사과가 사과임을 증명하는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애리는 선호가 준비해 둔 이라기보다 평소와 같이 갖추어 둔 여러 가지 것들. 커피와 깨끗한 물과 흠이 나지 않은 싱싱한 과일을 먹었다. 텅 빈 방에 누워 사실 텅 비지 않았고 카펫과 커튼과 의자와 책상과 햇볕 냄새가 나는 수건들과 잘 개어진 옷들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텅 빔과 여유를 품은 공간에 앉거나 누워 방이 내는 소리와 지금이라는 순간을 집중하고 느꼈다. 이것은 이것대로 여기에 있는 것이야. 나의 잠이 늘 내게 자리를 펴 주는 것처럼 애리는 아침에 사과를 깎아서 먹었다. 사과를 먹고 커피를 마시고 일을 하러 갔다. 선호의 집을 좋아하고 가지고 싶다고 말하면 그 말이 금세 빗방울처럼 눈에 보이는 것으로 쏟아져 창문을 두드릴 것 같다. 그래서 마음속으로도 그 말을 하지 않았다. 애리는 그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가 조금 어리석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런 마음이 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선호의 집에서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는 지금처럼 선호와 가깝게 지내면 되는 걸까 아니 생각해 보면 선호가 오래오래 해외 출장을 가는 방법도 있을 것이고 당분간은 그것이 더 괜찮은 방법처럼 느껴졌다. 너는 아버지가 사 둔 바닷가 근처 작은 집으로 샌들을 신고 모래밭에 누워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면 더 바랄 것이 없다는 그곳에서 살면 되지 않을까. 그 순간 애리는 그 모든 생각이 피곤하게 느껴져 밖으로 나와 근처를 조금 걷다 들어와 잠이 들었다.
중간에 하루 옷을 갈아입기 위해 직원 숙소로 돌아왔을 때 순간 애리는 방이 이전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잠시였고 어느새 원래 알던 매일 같이 시간을 보내던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있었다. 창 너머로 누군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갔다. 그리고 새로 이사 온 옆방 직원은 창문을 열고 베란다에 무언가를 내려놓고 있었다. 화분일까. 이어서 빨래를 너는 소리가 들렸다. 나의 잠이 어느 때나 변함없이 때로는 새롭게 스스로를 펼치며 나타나는지 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 애리는 씻고 나와 며칠간 선호의 집에서 지내기 위한 짐을 챙기고 며칠 만에 숙소에서 잠이 들었다. 잠시 꿈을 꾸었던 것 같은데 아침이 되자 잊어버렸다. 잠과 꿈은 서로 다른 존재로 잠은 자신에게 주어진 장소이고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공간이었다. 꿈은 애리가 가끔 볼 수 있는 것이었는데 그래서 애리는 잠을 자지 않을 때 깨어 있을 때도 가끔 꿈을 꿀 수 있었다. 아주 명료한 상태로 애리는 가끔 꿈을 보았다.
애리는 금세 선호의 집에 적응하였다. 이전에는 옷을 벗고 서로 함께하기 위해 누웠던 침대에서 애리는 혼자 잠옷을 입고 잠을 잤다. 아침에는 사과를 깎아 먹었다. 사과는 적당히 시고 달았고 아주 오랜만에 먹어 보는 맛있는 사과였다. 선호의 집에 지내며 애리는 왜인지 점점 더 선호에 대해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그 사람이 사는 공간에 있기 때문인지 더욱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지지 않았고 오히려 점차 선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흐려지고 잊어 가고 있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선호가 출장을 갈 즈음 두 사람은 하루에도 몇 번씩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애리가 선호의 집에 머물면서 연락은 점점 줄어들고 애리는 가끔 잘 자라고 있는 화분 사진을 보냈다. 침실 창으로 처음 보는 작은 새들이 늘 지저귀고 있었다. 주말에 카페에 출근하기 위해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비가 오고 있었다. 잠결에 빗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비가 오고 있었다. 비 냄새가 맡아졌다. 애리는 커튼을 걷고 창문을 살짝 열고 비 냄새를 맡았다. 평소보다 일찍 눈이 떠졌고 시계를 확인한 뒤 조금씩 밝아져 가는 아침 공기를 바라보았다. 한참 먼 곳을 바라보고 있을 때 건너편에서 크고 튼튼한 우산을 쓴 선호가 네이비색 슈트를 입고 오래된 가죽 여행 가방을 손에 쥔 채 다가오고 있었다. 지금까지 본 적 없던 선호의 모습이었다. 선호는 저런 옷을 입고 출장지에서 일을 하고 있을까 애리가 본 적 없는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애리는 선호의 모습을 보면서 비 냄새를 맡다가 창을 닫았다. 애리는 나중에 슈트를 입고 가죽 가방을 든 선호가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선호에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이야기를 할 기회는 없을 것 같다고도 느꼈다. 눈을 감았다 뜨면 사라지고 가만히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부는 것을 바라보면 다가오는 것들을 이야기할 기회는 없을 것이다.
선호의 집 근처 역과 역까지 가는 길의 집들과 가게들이 이제는 완전히 눈에 익게 되었다. 퇴근한 뒤에는 돌아와 주방에서 가볍게 음식을 만들어 식탁에 앉아 먹고는 했다. 목제로 만들어진 4인용이라기에는 약간 작고 두 명이 쓰기에는 충분한 식탁이었다. 식탁 위에 새겨진 작은 스크래치들의 위치도 촉감도 외우려고 한 것이 아닌데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선호는 해외 출장 중이고 아직 돌아오기로 한 날이 아니니 이 집에 없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도 애리는 선호가 사라진 것 같다고도 느꼈다. 그렇게 느끼기 시작하자 선호를 떠올리면 왠지 모를 슬픔이 솟구쳤다. 선호에게 여러 가지 것을 그러니까 애리 자신에 대해 설명하고 설득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을 줄곧 가졌기 때문일까 애리는 선호와 함께하는 시간이 즐거우면서도 늘 마음 한구석에서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는데 막상 선호가 사라졌다고 생각하자 선호는 유쾌한 사람이었고 성실한 사람이었다는 결론적으로 꽤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내릴 수 있었다. 사라진 것이 아니고 곧 만나게 될 것이었고 그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아마 일주일 뒤 만나게 되면 출장에서 어떤 일이 있었냐면 하고 재미있는 것을 이야기하는 표정으로 여러 이야기를 해 줄 것이다. 그 시간이 찾아오면 애리는 아 역시 선호는 자신의 일을 좋아하고 함께 있으면 즐거운 사람이야 라고 아무 의구심도 없이 기쁘게 생각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애리는 그 모든 이야기를 당연히 듣게 될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도 같다고 느꼈다.
이후 선호가 해외 출장에 다녀온 후 두 사람의 사이는 서서히 멀어졌기 때문에 애리의 예감처럼 선호의 집에서 출장지에서의 이야기를 듣는 일은 없었다. 애리는 종종 그때 느꼈던 막연한 슬픔이 선호가 실제로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더 이상 이전과 같이 두 사람이 함께할 수 없음에 대한 예감이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아직 그 선호는 해외 출장 중이고 애리는 선호의 집에서 텅 빈 방에서 아침을 맞이하고 조용한 저녁 시간을 보낸다. 자신이 이곳에 익숙해진 것처럼 이곳 역시 자신에게 익숙해져 가고 있다고 느끼면서.
평일 근무를 마친 애리는 그새 늘어난 옷과 물건들을 챙겨 숙소로 돌아갔다. 다음 날 입을 유니폼을 세탁하고 짐을 간단히 준비해 두었다. 짐을 챙겨 숙소에서 나와 역을 향해 걸으며 이 반대편 어딘가에 있다는 오래된 절을 떠올렸다. 열차에 올라 어두운 밤 멀리서 하나둘 반짝이는 불빛을 보며 어느 오후 혼자서 공장을 따라 걷는 어떤 사람을 떠올리고 그 사람의 집은 어디일까 그 사람은 어쩐지 며칠 전 아침에 본 가죽 가방을 든 선호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하루 만에 만난 선호의 집은 여전히 아늑했고 애리는 짐을 내려놓고 소파에 앉아 선호가 돌아올 날을 손으로 꼽아 보다 잠이 들었다. 다음 날에는 평소보다 일찍 카페에 도착해 청소를 하고 일을 시작하였다. 점장은 유니폼을 갈아입고 나와 인사했다.
요즘 그 손님 안 보이네.
누구요?
매일 같이 오는 분 있잖아.
점장은 아주 괜찮고 여유가 넘치는 사람으로 선호를 묘사했고 그 묘사는 어딘가 돈이 많아 보이는 사람있잖아 라는 말을 다른 방식으로 점잖게 하기 위함이라고도 애리는 생각했지만 아 그러게요. 그러고 보니 출장을 자주 간다고 했던 것 같아요 라고 대답한다. 선호는 애리가 일을 하지 않는 날에도 꽤 자주 들르는구나 하고 잠시 생각했다. 점장은 오늘 이전에 아주 오래 일했던 직원 한 명과 지금까지 애리가 쉬는 날에만 들렀던 사장이 함께 들를 것이라고 전한다. 애리는 면접을 볼 때 보았던 나이 든 남자의 얼굴을 떠올린다.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할 수 없는 얼굴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은데. 영업을 준비하고 손님들을 맞이하고 그러는 사이 사장은 가게로 들어오고 애리는 자신의 기억보다 조금은 밝아 보이는 얼굴의 사장을 자리에 안내하고 문득 이 사람은 20세기 중반 이 가게를 처음 연 사람과 무슨 관계일까 잠깐 생각하다 말았다. 친인척이라는 이야기는 얼핏 들은 것 같은데 직접적인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었다. 여전히 원두와 매장을 관리한다는 사장을 보며 전혀 닮지도 나이대도 조금 차이가 있을 테지만 본 적도 없는 선호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왜인지 사장과 선호의 아버지는 친했을 것이고 두 사람은 커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 같다. 불과 몇십 년 전의 이야기일 그것이 왜인지 너무나 먼 세계의 일처럼 순간 느껴졌다. 한국에서 전쟁이 끝나고 일본은 경제 성장기를 맞이하고 베트남 전쟁이 벌어지고 학생들은 전쟁에 반대하고 그리고 그런 책에서 보던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규칙과 내면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의 이야기 같다고 느꼈다. 하지만 사장에게 물을 따라 주어야 했기 때문에 그 생각은 곧 잊어버렸다.
며칠 뒤 선호는 출장에서 돌아왔고 그 전에 애리는 아침 일찍 일어나 청소를 하고 짐을 챙겨 출근을 했다. 그 뒤로도 가끔 두 사람은 식사를 하거나 카페 근무가 끝나고 이야기를 하고는 했으나 이전처럼 자주 보게 되지는 않았다. 두 사람이 가까웠을 때 두 사람은 주로 선호의 집에서 만났다. 이제 더 이상 만나지 않게 된 지금 애리는 선호의 집에 갈 일이 없어졌고 가끔 텅 빈 방을 떠올릴 때 선호의 방이 겹쳐져 떠오르게 되었다. 애리는 가끔 자신이 느꼈던 답답함을 떠올리거나 단지 사과를 먹고 있었을 뿐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다. 애리가 그런 이야기를 하면 선호는 잘 들어줄 것이다. 잘 듣고 난 뒤 가볍게 웃으며 그런 게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막상 이야기를 꺼내면 애리의 예상과는 달리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가 시작될지도 몰랐지만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애리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선호에 대한 어디서 온지 모를 가벼운 비웃음이 생겨날 때도 있었지만 그것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자 그저 더 많은 길과 골목을 흔들리는 창과 그 너머를 헤매고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하지만 선호에 관해 유일하게 순순히 아무런 답답함도 껄끄러움도 없이 떠올리게 되는 일이 있었는데 함께 근처 공원에서 선호가 내려온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했던 어떤 날이었다. 그때 선호는 아버지가 병으로 비교적 일찍 세상을 떠나셨기 때문인지 늘 건강에 신경을 쓰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에 대해 생각하면 늘 아버지를 동경했던 것과 함께 자신도 일찍 병에 걸리게 되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에 휩싸였다는 이야기였다. 십대 시절은 늘 곤두서있고 불안한 상태였던 것 같은데. 십 대는 다 그렇겠지만. 아이보리색 병원의 복도와 이제는 거의 만나지도 않는 친척들의 얼굴과 언제부턴가 결혼식도 장례식도 참석하지 않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애리는 아주 어릴 때부터 흔들리는 창을 보아 온 것처럼 아주 오래전부터 아이보리색 벽과 불편한 대기실의 의자와 복도를 비추는 오후의 햇볕 아래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언제나 그것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것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였음을 늘 언제나 흔들리는 창을 마주하고 있었다는 것을 애리는 확실히 알게 되고 애리는 병원 복도에 서 있는 자신을 확인하고 그 너머로 마음대로 자라난 풀을 밟으며 공장을 지나가는 가죽 가방을 든 남자를 바라보며 아주 짧은 순간 우리라고 묶일 만한 순간을 방금 지나쳤음을 알았다. 늘 어느 복도에 앉아 검사 결과를 기다리던 중학생 남자애와 회색 대기실의 의자에 앉아 3시간 넘게 병원 홍보 영상을 보고 있는 언젠가의 애리는 각자가 알지 못하는 사이 잠시 우리로 묶였지만 곧 누군가의 손을 잡고 혹은 문을 열고 나와 버스를 타고 사라진다.
한동안 선호는 애리가 일하는 주말에는 카페에 오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두 사람은 아예 만나지 않게 되었는데 그러던 어느 날 주말 애리는 어딘가 야위고 지친 얼굴의 손님을 자리로 안내하게 되고 주문을 받으러 다가갔을 때야 그 사람이 선호임을 알아보고 웃으며 인사를 건넨다. 선호 역시 잘 지냈느냐고 안부를 물었지만 얼굴을 마주한 두 사람은 이제 서로가 낯선 사람으로만 느껴졌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평범한 손님과 점원으로 친절하게 웃으며 서로를 대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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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싶습니다 최재영 가끔 인생이 내게 애벌레가 파먹는 중인 사과를 베어 물도록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토요일 저녁 아홉 시 뉴스에선 오늘도 전 세계 기아들이 굶고 있고 남미 쿠데타 정부의 진압 몽둥이에 시민들이 맞고 있으며 전장의 포탄은 군인과 민간인들을 죽인다. 그러나 우리 집 안방엔 세 살 연상 아내와 세 살짜리 딸이 곤히 잠들어 있다. 비록 내일이면 공룡 박사 딸은 파키케팔로사우루스 흉내 내며 내 턱에 박치기를 날릴 것이고 아내는 원시인 사냥꾼처럼 괴성을 지르며 딸을 쫓을 것이지만··· 서른여섯 살의 나는 대한민국 성남시의 아파트에, 지금 여기에, 우리 세 가족과 잘 있고, 그것참, 다행이다. 내가 베어 문 사과 반쪽에 벌레가 없어서. 뉴스에 어느 북한군이 등장한 건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전장이었다. 한 북한군이 부상 때문에 낙오했는지 홀로 하늘을 보며 누워 있었다. 러시아 것인지 우크라이나 것인지 모를 드론이 공중에서 그를 촬영하고 있었다. 곧 드론은 부드럽게 수직 하강하며 그에게 다가갔고 그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쓰으윽- 줌인 됐다. 뉴스 진행자와 패널들이 호들갑 떨었다. “너무나 리얼합니다!” 무슨 아는 사람이라도 본 것처럼 오바하네. 나는 그들의 반응에 코웃음 치며 손에 든 캔맥주를 쓰으윽- 들이키려다, 멈칫했다. 아는 사람 같았다. 낯이 익었다. * 약 15년 전 여름, 나는 백령도에 주둔한 해병대 6여단 영창에 15일간 구금되어 있었다. 죄명은 후임 폭행이었다. 막 상병이 됐을 때 생긴 일이었다. 영창의 개인 감방에 들어서자 정말이지 감옥처럼 생겨서(정말 감옥이긴 했지만) 울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철커덩 자물쇠가 닫히는 소리와 함께 스물한 살에 인생이 망해 버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감방 철창 너머론 건물의 입구와 헌병 하나가 근무하며 감시하는 공간이 보였다. 그 공간을 기준으로 네 개의 감방들이 반원을 그리며 각각 1호 창, 2호 창, 3호 창, 5호 창이라는 이름으로 있었다(4호 창은 없었다, 해병대에선 숫자 4를 쓰지 않으니까). 나는 3호 창에 수감됐다. 감방 안에 앉아 있으면 보이는 건 꾹 닫힌 건물 문, 그리고 중앙의 그 헌병밖에 없었다. 양옆의 다른 감방들은 시야에 아예 들어오지 않았다. 1호 창과 5호 창에도 수감자가 한 명씩 있다는 것만 알 뿐이었다. 단 2호 창만은 비어 있다고 했는데 폭행 사건이 일상적이라 항상 미어터지던 백령도 해병대의 영창에선 이례적인 일이었다. 나중에 듣기론 당시 북쪽 상황이 심상치 않아 각 부대들의 징계 절차가 보류됐기 때문이라고 했다. 감방 안은 어두컴컴하고 축축했다. 폭은 누워서 다리를 뻗지 못할 정도였다. 물론 화장실은 따로 없었다. 안쪽으로 세 걸음 가면 구석에 수도꼭지를 비롯해 쪼그려 앉아 일을 보는 일명 고무신 변기가 있었다. 무릎 정도 높이의 아담한 담만이 가림막을 해 주었다. 큰 것이든 작은
- 관리자
- 2025-07-01
프레살레 반수연 홍은 미로처럼 이어진 길을 솜씨 좋게 빠져나갔다. 홍을 놓칠세라 일행들은 빠른 걸음으로 따라붙었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공항은 번잡했다. 챙이 넓은 홍의 검은색 모자는 인파 사이에서 사라졌다가 나타나곤 했다. 모자가 사라질 때마다 짧은 불안이 스쳤다. 우리 중 누구도 파리에 처음 오는 이는 없었다. 정아는 작년 패션 위크에도 왔다고 했다. 하지만 출구로 빠져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홍을 만난 순간, 홍이 웰컴 투 패리스, 라며 환하게 웃던 순간, 제가 잘 모시겠습니다, 라며 농담과 카리스마가 뒤섞인 환영 인사를 건네는 순간, 홍은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깃발이 되었다. 몇 개의 건물과 긴 복도를 통과해 홍이 예약해 둔 렌터카 사무실에 도착했다. 미리 맡겨 두었다는 홍의 짐이 사무실 모퉁이에 쌓여 있었다. 각지고 거대한 두 개의 캐리어, 명품 마크가 선명한 가죽 배낭과 보스턴백, 두 개의 쇼핑백도 포개져 있었다. 캐리어 계의 에르메스라는 바로 그 리모와 아닌가요? 색깔 너무 이쁘다. 이삿짐을 떠올리게 하는 홍의 짐에 약간의 충격을 받은 나와는 달리 정아는 레몬색 캐리어에 먼저 관심을 보였다. 자기야, 그건 좀 그렇지 않아요? 에르메스야 버킨 말고는 뭐가 있나. 홍과 정아의 대화를 들으며 나는 며칠 전 정아가 단톡방에 올린 메시지를 떠올렸다. 유럽 항공은 수하물 분실이 잦으니 위탁 수하물 없이 기내용 캐리어와 작은 손가방으로 짐을 제한해요! 정아는 해당 항공사의 기내 반입 수하물 규정을 캡처해서 올리며 당부했다. 같은 옷을 이틀 연달아 입거나, 옷과 콘셉트가 맞지 않는 신발이나 가방을 견디지 못하는 예민한 패션 감각의 소유자인 정아가 분실이 두려워 그런 제안을 한다는 건 조금 의외였다. 그런데 이제 보니 정아는 홍의 짐이 어마어마하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정아가 홍을 위해 우리 짐을 단속했다는 사실보다 진실의 내막을 뒤틀었다는 것이 묘하게 신경을 긁었다. 독일제 7인용 SUV 차량의 마지막 3열을 접어 트렁크의 공간을 넓혔다. 홍의 캐리어를 먼저 싣고 그사이에 네 개의 기내용 캐리어를 테트리스 하듯 넣었다 뺐다 씨름하느라 손가락이 욱신거렸다. 어찌어찌 짐을 욱여넣고 나니 트렁크는 룸미러로 후방이 보이지 않을 만큼 꽉 찼다. 배낭이나 손가방은 발아래에 두거나 안고 타면 될 거라고 홍이 운전석으로 올라타며 말했다. 나는 노트북과 파우치와 책이 담긴 배낭을 가슴에 안고 뒷좌석에 올라 안전띠를 당겨 맸다. 짐과 사람이 뒤엉켜 숨 쉴 공간마저 충분치 않게 느껴졌다. 답답함이 불안으로 바뀌며 숨이 가빠 왔다. 다른 일행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프로작을 한 알 꺼내 입에 물고 창을 조금 열었다. 약기운이 신경을 눌러 주기를 기다리며 눈을 감았다. 파리는 오전 열한 시, 한국은 오후 여섯 시였다. 지금쯤이면 윤수는 일어났을 것이다. 냉장고 제일 위 칸에 김치찌개 있어. 냉동실에 육개장도 얼려 두었어.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어. 공항으로 출발하기 전 나는 신발을 신다 말고 식탁에 앉아 짧
- 관리자
- 2025-07-01
헝가리 워터 홍성구 은수는 자신을 대학주보 기자라고 소개하였다. 나와 동문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걸로 봐서는 한국적 정서에 기대는 MZ인 듯했다. 속단하는 부류에 드는 건 꺼림칙하지만, 곤란할 때는 한국식 정을 부르짖다가 느긋할 때는 서양식 합리를 따져 보는 MZ를 몇몇 봐 온 탓에 스마트폰 너머에서 이제 막 알게 된 후배가 나를 선배님이라고 부른 것은 오히려 경계심이 들게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인터뷰는 성사되었다. 은수의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남자 조향사라서 관심이 생겼어요. 의문이 들었다. 남자는 향수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뜻일까. 남자가 조향사라는 게 관심이 생길 만한 일인가. 인터뷰하러 온 은수는 아무런 옷도 걸치지 않았다. 그녀의 나신(裸身)에 미간이 찌푸려졌을 것이다. 향수는커녕 화장수조차 뿌리지 않았다니. 매일 밤 샤넬 No. 5를 입고 잠든 마릴린 먼로가 알았다면 야만적이네요, 라고 말했을 것이다. 하얀 치맛자락을 바람에 날리면서. 어떠한 향도 느끼지 못했다면 오히려 좋았을 텐데, 은수의 반소매 니트 티에서 플로랄 계열의 향이 풍겼다. 흔한 싸구려 섬유유연제 냄새. 합성 향료의 조악한 외피를 두르고 있으니 누더기 정도는 걸치고 있는 건가. 나와 꼭 인터뷰하고 싶었다는 은수의 말이 진심인지 의심이 들었다. 은수는 향수에는 문외한인 데다 향수를 뿌리는 문화적 행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야생의 신입생처럼 보였다. 인터뷰는 지루하고 단조로웠다. 은수는 예상이 가능한 질문의 목록을 들추었고, 나는 잡지인지 유튜브인지 출처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인터뷰 답변을 하나둘 꺼내서 내놨다. 하품이 나는 걸 간신히 참아야 했다. 그러나 은수가 노트북 화면을 덮자 드러난 그녀의 오른손 때문에 졸음기가 싹 사라졌다. 저런 손으로 타이핑한 건가. 은수의 오른 손목 부근에서 검지에 이르는 데까지 초록뱀 한 마리가 몸을 펼치고 있었다. 은수는 노트북을 가방에 넣으려다가 뭔가 잊은 게 있는지 화면을 다시 열었다. 테이블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화면은 바닥에서 15° 정도 위로 펼친 탓에 초록뱀이 키보드를 누비며 꿈틀거리는 게 여실히 보였다. 은수가 검지를 까닥일 때마다 뱀이 혀를 날름거리는 것은 아닌지 움찔 몸서리가 났다. 마을에서 독수리 삼촌, 용 삼촌, 호랑이 삼촌으로 불리던, 혈연이 아닌 삼촌들이 떠올랐다. 친숙함의 범위에서 한껏 벗어나 있지만, 두려움의 실체를 덮으려는 마을 사람들 때문에 정반대의 호칭을 얻은.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낸 독수리,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 당장 달려들 듯 노려보는 호랑이가 등에 새겨진 삼촌들. 대중목욕탕의 온탕에서 독수리, 용, 호랑이가 물 파편을 튀기며 솟구치면 따뜻한 물속인데도 온몸이 쪼그라들었다. 유독 샅이 근질거렸다. 마을 사람들은 아이들한테 삼촌이라고 부르라 하고 정작 그네들은 육시랄 놈, 벼락 맞을 놈, 급살 맞을 놈, 욕했다. 호랑이 삼촌이면서 육시랄 놈이 나를 불러 세운 기억이 난다. 다섯 살 연상인 그는 한참 어른 같았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나에게 그가 물었다. 요새 너
- 관리자
- 2025-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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