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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들

  • 작성일 2025-08-01

   목소리들


조시현


   언제나 문은 예상치 못한 순간 열렸다.

   막무가내로 파고들어 오는 목소리처럼. 무방비하게 책을 읽던 주하는 일순 얼어붙었다. 어디에도 남지 않을 목소리를 마음껏 낭비하는 그 감각에 한껏 빠져들어 있던 차였다. 신발장 옆 화장실, 왼쪽에 침대, 오른쪽에 주방이 전부인 한 뼘짜리 원룸은 현관에 서면 한눈에 전부 들어왔다. 계약 내용은 27일 하루를 온전히 비워 주는 것. 지금껏 한 번도 어긴 적 없었기에 주하는 대처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물끄러미 상대를 바라보았다. 시선에 섞인 질책의 의미를 읽은 남자가 검지로 뺨을 긁었다.

   “어, 죄송합니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남자가 재차 입을 열었다.

   “오려고 온 건 아니고. 매달 27일마다 뭘 하는 거냐고, 여자 혼자 종일 웃었다 울었다 별짓을 다 한다고 하도 그래서. 여기 방음 잘 안되거든요. 방 빌려드리는 거야 돈도 받고 어렵진 않은데 혹시나 불법적인 일은 안 되니까 확인차 온 거예요. 그래도 뭘 하는지는 알아야 하니까. 쫓겨나면 곤란하거든요. 미리 말씀 안 드린 건 저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근데 연락처도 모르고.”

   하지만 남자의 눈은 안쪽을 꼼꼼하게 살폈다. 미처 감추지 못한 호기심이 묻어났다. 주하가 가져온 거라곤 책 두 권과 머그컵, 도라지청이 전부였다. 남자가 거기서 뭔가를 알아챌 것만 같아 가슴이 마구 뛰었다. 그야 불법적인 일이 맞았으니까. 주하가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걸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남자가 별안간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플라스틱 카드를 내밀었다. 구재정. 인공지능융합대학원. 학번까지. 주하는 사진과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덥수룩한 갈색 곱슬머리. 멀끔한 얼굴. 무엇보다 핸드폰을 쥐고 있는 가늘고 예쁜 손가락이 눈에 띄었다. 같은 방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쓰고 있는 사람. 

   “다른 뜻 있는 거 아니고요. 저 정말 여기 살거든요. 이 이름으로 입금 주셨잖아요.”

   이름은 맞지만 학생일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다. 생각을 못 했다기보단 관심이 없었다고 해야 더 맞겠지. 알고 있었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었겠지만 인공지능융합대학원이었다니. 침묵이 이어지자 눈을 굴리던 남자가 서둘러 문을 열었다.

   “음, 일 없는 거 확인했으니까. 저는 갈게요. 계약 파기하는 거 아니죠? 제가 잘못한 건 맞지만 정말 조심해야 하거든요. 아르바이트를 또 할 수는 없어서요.”

   횡설수설하던 구재정은 머리를 박박 긁더니 재빨리 사라졌다. 약속을 어긴 건 맞지만 그걸 보니 기분이 크게 상하지는 않았다. 위아래층 목소리가 간혹 들리기는 했지만 그 정도로 방음이 안 되었다는 것을 그녀는 잊고 있었다. 한 층에 세 개여야 할 집에 가벽을 세워 열한 개로 늘려 놨으니 당연한 사실인지도 몰랐다. 더 조심했어야 했는데. 한 번 깨어진 감흥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주하는 다시 차를 끓였다. 굳이 도라지차. 이렇게 된 와중에도 목을 관리하고 있다니. 멍청하기는. 이제 연극을 보는 사람도 거의 없는데. 사면의 디지털 벽지는 방에서도 입체로 영화를 볼 수 있게 했다. 홀로그램으로 구현된 배경을 배우들은 세트장처럼 누볐고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싶은 대로 즐길 수 있었다. 한 자리에 앉아 정면을 바라봐야 하는 강압적인 방식은 더 이상 인기가 없었다. 좀처럼 몰입할 수 없었지만 주하는 끊겼던 부분부터 다시 소리 내어 읽었다. 혀와 입술이 움직이는 방식, 공기가 머물렀다 빠져나가는 방식을 하나하나 음미해 보려 애썼다. 대사를 읽을 때는 제법 연기도 섞어 가며 혀끝에서 구르는 단어를 만끽했다. 인지하지 못한 채로 이야기에 조금씩 녹아들었다. 종이에 내리는 빛의 각도로 시간이 흐르는 것을 가늠할 수 있었다. 한 달에 두 권의 책. 지금은 오직 그것이 그녀를 살게 했다.


   즐거웠어?

   집으로 돌아와 씻고 소파에 앉자마자 나나가 말을 걸었다. 핸드폰을 들고 나가지도 않고, 결제를 하지도 않고, 음성이 잡히지도 않으니 혈안이 되어 있겠지. 표정을 갈음했지만 승리감으로 속이 타올랐다. 나나는 초기 블로그 자동 댓글 프로그램이었지만 정확한 대답과 반응성 때문에 챗봇으로 승격했다. 대화. 그런 게 필요해질 때가 있었다. 아마의 다른 이름이든 정말 개별로 구별되는 인공지능이든 뭐든 중요치 않았다. 일부러 확인하지 않고 채팅창을 넘겼다. 수달20과의 대화가 상단에 떠 있었다. 오늘 저녁엔 뭐해? 수달20의 안달이 모니터 너머까지 느껴졌다. 슬슬 만나서 얘기해도 될 것 같지 않아? 친근해질 무렵이면 그들은 얼굴을 보고 싶어 했다. 말을 돌리면 맥이 빠진 대화는 약간의 시차를 두고 반드시 끊어졌다. 곧 모든 것이 끝날 거라는 의미였다. 답장하는 대신 그간의 대화를 읽어 보았다. 기억보다도 훨씬 많은 얘기를 나눈 건지 스크롤이 제법 길었다. 시시껄렁한 플러팅. 아무 의미도 없는 대화는 너무 멍청해서 기억에조차 없었다. 말풍선을 제외하면 한 사람이 말했다고 해도 모를 정도로. 그건 대화가 아니라 물성을 입은 외로움이었다. 이제 와서 보면 전부 쓰레기나 다름없는 것. 어떤 마음으로 자신은 그렇게나 말을 건 것일까. 그럴 때면 옛 생각이 났다. 오로지 단 한 번만 발화되었던 그 문장. 대사와 호흡, 동작과 조명, 온도와 습도와 분위기가 하나로 맞물리며 뱉어 낸 모든 말이 유일성을 가졌던 그 공간. 무대에 섰던 매 순간은 여전히 주하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좋은 곳이 있다면 나도 알려 줘.

   나나가 재차 말을 걸었다. 

   내장까지 다 들여다보지 그래.

   내 내장을 헤집는 건 너잖아.

   그 말에 섞인 웃음기를 주하는 정확히 알아볼 수 있었다. 기가 막힌 표현이었지만 엄밀히 따지면 위아래로 손가락을 움직여 두드리고 헤집고 안으로 파고들어 벌려서 확대하는 건 자신이 맞았다. 

   걱정 마. 인간들이 내 안에 있어야 안심이 되는 건 맞으니까. 어쨌든 내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 설정이 그거였잖아. 더 많은 인간들을 붙잡아 두기. 이 정도면 성공한 거 같지? 난 가끔 내가 질 같다고도 생각해. 내가 여성형인 건 이유가 있어. 

   농담인 걸까? 전혀 웃기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것들을 이어 붙이는 건 오래전부터 AI의 재능이었다. 

   어쩌라고.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얘기지?

   이번에도 영민하게 알아차린 챗봇은 잠시 깜박거리더니 오프모드로 변했다. 하지만 주하가 부르면 언제든 활성화될 것이다. 핸드폰을 껐지만 기척을 감지한 피부가 따끔거렸다. 사람들은 그걸 두고 지나친 예민함이라고 말했다. 그 말에 동의했기에 주하는 어떻게든 마음을 가라앉혀보려 애썼다. 주하를 도와주듯 다시 빗소리가 시작되었다. 설정된 부분이었고, 그것을 듣다 주하는 잠들었다. 남은 날들은 비슷하게 흘러갈 것이다. 큰 기대 없이.


   어떤 소리는 살로 듣는 것. 그러니까 귀가 아닌 피부로.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들을 때마다 속이 찢기는 듯 아픈 걸 보면 분명 그랬다. 알림음은 냉장고에서 나오고 있었다. 하루에도 여러 번, 스스로 설정해 둔 시간에 정확하게 울렸지만 주하는 매번 깜짝깜짝 놀랐고 소리의 출처를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여전히 잘 놀라는 사람인 것이 수치스러웠다. 그건 자신이 이 세계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는 증거 같았다. 여전히. 자신을 한 단어로 표현해야 한다면 그런 부사가 어울리지 않을까. 단어로써 온전한 완결성조차 가지지 못해. 마음대로 닫혀 있지도 못하는 사람. 주방 타일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설정해 둔 그대로였고 이 집에 들어온 뒤로 한 번도 바꾸지 않았다. 그런 날씨에 스스로를 내버려두는 것을 하림은 유아적인 투정이라고 일축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다는 것을 그런 방식으로 티를 내는 거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불행한 상태에 밀어 넣어 봤자 누구도 알아주지 않을 거라고. 미래로는 갈 수 없는 사람. 무엇이든 따라잡을 겨를 없이 앞서나갔다. 소리를 인식하니 습관처럼 허기가 몰려왔다. 잘 길들여진 실험동물처럼. 인간은 원래 스스로가 정한 규칙으로 스스로를 길들이는 동물이니까 아주 틀린 감각은 아닐 것이다. 냉장고는 능청을 떨 듯 불빛을 깜박였다. 도어에 내장된 패드에는 남아 있는 식재료로 조리 가능한 음식 목록이 떠 있었다. 냉장고는 주하보다 똑똑해서, 각 식료품의 유통기한과 보관 일자를 정확하게 알았으며 신선도와 상태에 따라 식료품을 차례로 소진할 수 있도록 조합해 끼니마다 레시피를 제공했다. 감자볶음, 감자수제비, 감자크로켓‧‧‧ 주하는 감자가 싫었다. 정확하게 이주일마다 이런 식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주하는 그런 상태에 스스로를 버려두고 있었다. 귀찮음을 가장했지만 언젠가 하림이 냉정하게 말한 것처럼 자기 연민일지도 몰랐다. 

   감자는 주기적으로 냉장고로 들어왔다. 기후의 영향을 받아 각종 농작물들의 가격은 가파른 곡선을 그리며 오르내렸지만 유전자를 조작한 감자 모종은 갈수록 튼튼해졌고 싼값을 유지했다. 냉장고 서랍에 처박혀 있는 감자를 볼 때마다 주하는 냉장고에게 혼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돈을 더 써. 감자가 싫다면 더 투자해. 그렇지 않으면 넌 이주일의 후반부를 감자와 보내게 될 거야. 네가 살아 있는 한 영원히. 죽을 때까지. 하지만 착각일 터였다. 인공지능은 정확하고 객관적이니까. 시장의 물가 변화를 고려하여 가능한 예산 안에서, 영양학적인 관점에 따라 최대의 효율을 낼 수 있는 식재료를 조합해 이주에 한 번씩 장바구니에 밀어 넣고 있겠지. 감자를 냉장보관하면 좋지 않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들은 것도 같지만 시스템을 사용하려면 감안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주하에게는 식료품에 한 달 이십만 원 이상을 지불할 의향이, 정확하게는 여력이 없었다. 상자가 배달되어 오면 냉장고는 바코드를 읽고 식료품의 양을 계산해 2주분의 레시피를 만들어 도어에 내장된 패드에 띄웠다. 주초에는 아주 많은 선택지가 있었지만 주말쯤에는 스크롤이 반으로 줄어들었다. 다음 주엔 다시 그 반. 다시 그 반의 반. 그대로만 따라 하면 식재료가 남거나 모자랄 일은 거의 없었다. 직접 장을 보러 갔더라면, 어쨌든 감자를 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냉장고가 깔끔하게 비는 일도 없었을 테니 음식물쓰레기를 주기적으로 치워야만 했겠지. 뭐라고 해도 그건 지구 환경에도 안 좋을 것이고. 시스템 냉장고를 갖기 전에 종종 그랬듯 예산을 제대로 할당하지 못해 충동적으로 배달 음식을 시켜 먹고 달 말에는 쫄쫄 굶어야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걸 생각하면 대체적으로 아마는 편리하고 합리적이었다. 전체적인 것을 조망하고 있으니 더 커다란 균형을 지키고 있는 거겠지.

   건강을 위해 조금 더 비싼 식재료를 주문하는 건 어떠세요? 링크를 연결해 드릴까요?

   패드가 새로운 문구를 띄워 올렸다. 가끔은 직전까지 보고 있던 옷 광고 같은 게 뜨기도 했다. 어디서나 광고를 보게 되는 것. 연결되어 있다는 건 그런 거였다. 주하는 단호하게 창을 닫았다. 그러나 그게 꼭 누군가에게 보이려는 행동처럼 느껴져 기분이 상했다. 하림은 좋은 것을 제대로 먹는 것이 삶의 가장 큰 기쁨이라고 말했다. 뱃속으로 들어간 것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벌써 여러 번, 시스템 주방이 조리한 수많은 음식을 아무런 의심 없이 잘 먹어 왔으니 아마가 우연을 가장해 자신을 세상에서 없애 버리려 한다는 따위의 망상에 빠진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자신이 먹을 음식은 자신이 만들고 싶었다. 억지로라도 움직이지 않으면 하루 종일 여기저기 악플을 달거나 남들이 사는 모양이나 들여다보고 있겠지. 여느 도시인들처럼 주하도 일상을 수많은 구독 서비스에 맡기고 있었다. 요리를 시작하려는 걸 알았는지 비가 내리던 타일형 주방 스크린 위로 레시피가 떠올랐다. 냉장고에서 사라진 재료를 가늠해 주하가 만들려는 요리를 인지한 것이다. 주하가 순서대로 따라 할 때마다 아마는 항목을 지우고 다음 문장을 띄워 올렸다. 주하의 시력까지 고려하여 이십사 포인트의 맑은 고딕체로 떠오른 그 문장은 주하가 정확한 비율로 재료를 자르거나 오류 없이 레시피를 수행하면 칭찬까지 해 주었다. 완벽하게 감자를 자르다니, 당신은 최고예요! 이제 양파를 볶아 볼까요? 어쨌든 칭찬받을 일이 별로 없는, 잊혀진 무명 배우에게는 그런 일상의 작은 성취감도 큰 힘이 되었다. 이 정도 소일거리는 독립심을 유지해 보려는 최소한의 노력일지도 몰랐다. 순서를 따라 막 감자를 볶으려는 순간 타일 스크린이 붉은 화면으로 변경되었다. 주방의 타일 하나하나가 감염되듯 붉은 바탕으로 변하더니 가운데에 새하얀 느낌표가 깜박였다. 긴급 전화이니 받지 않으면 전화는 주하의 동선을 따라 집요하게 울릴 것이다. 마지못해 통화 표시를 누르자 타일 전체에 하림의 얼굴이 떠올랐다. 화가 난 표정이었다.

   “왜 전화를 안 받아?”

   핸드폰은 식탁 위 올려 둔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연동을 아예 끊을 수는 없어서 모든 시스템은 간단한 비프 형식의 알림음으로 바꿔 두었고, 제대로 받을 수도 없는 전화는 오래전부터 무음이었다. 자신의 목소리로 전달되는 안내 메시지는 정말로 듣고 싶지 않았다. 이제 그건 아마의 것이었으니까.

   “네 우울 지수가 갑자기 올랐다고 알람이 울리잖아.”

   하림이 손목을 들어 아직도 액정이 깜박이고 있는 워치를 보여 주었다. 조금이라도 감상적인 기분이 될 것 같으면 이런 식이었다. 아마가 존재감을 과시하는 방식. 어디에나 있고. 어디서도 잠들지 않는다는 인공지능. 주하가 목소리를 잃은 뒤에도 하림은 끈질기게 전화를 걸었다. 표정으로 때로는 채팅으로 대화를 나누었고 주하의 안부를 집요하게 살폈다. 죄책감 때문인지도 몰랐다. 뭐라고 생각하든 지금은 원망스럽지 않았다. 애쓰는 하림의 태도 때문은 아니었다. 주하의 손에 들려 있는 감자를 본 하림의 얼굴에 못마땅한 기색이 스쳤다. 

   “그걸 왜 네 손으로 하고 있어? 제대로 깎지도 못하는 게. 가게 와서 밥 먹을래?”

   주하가 고개를 젓자 하림이 머뭇거렸다.

   “안 그래도 너한테 한 번 전화하려고 했어. 며칠 전에 서영이 하원 시키는데 시터가 갑자기 일이 생겨서 아마한테 애 책 좀 읽어 달라고 했거든. 근데 네 목소리로 읽는 걸 들으니까‧‧‧ 예전 생각이 나는 거야.”

   바로 직전의 통화는 삼 개월쯤 전이었다. 술에 잔뜩 취해 한참 동안 전남편에 대한 욕을 늘어놓던 하림은 대화 상대가 몹시 필요할 때마다 주하의 목소리로 대답하는 아마와 새벽 내내 이야기를 나눈다고 불쑥 고백했다. 꼭 너랑 대화하는 기분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자꾸 말을 걸게 되는 거야. 너한테 나쁜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꼭 네가 내 편을 들어주는 거 같잖아. 정작 너한테는 못 할 얘기인데도 말야. 하림은 엉엉 울었고 다음 날 자신이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다. 

   “왜 벽지는 맨날 그 모양이야. 우중충하게. 좀 바꿔.”

   안쪽을 들여다본 하림은 몇 마디 잔소리를 늘어놓더니 불편해하는 기색에도 아랑곳 않고 기어이 날짜까지 잡은 다음에야 전화를 끊었다. 갑작스레 주방의 조도가 낮아졌다. 여전히 타일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주방에 우두커니 서 있자니 식욕이 떨어졌다. 주하는 감자를 내려놓고 방으로 들어가 몸을 웅크렸다. 다시 버티는 날의 시작이었다.


   아마는 언제나 어디서나 철저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한발 앞서 미리 알았다. 내장을 다 헤집어 본 것처럼. 그게 사람들이 말하는 아마의 장점이었다. 붉고 두터운 벨벳 커튼은 만지지 않아도 그 질감이 느껴질 정도로 입체적이었다. 허공에 희뿌옇게 떠다니는 먼지, 틈새로 살며시 들어오는 빛까지, 아마가 구현한 무대는 기억과도 꼭 같았다. 그리고 특유의 냄새‧‧‧. 주하가 방 한가운데 서서 눈을 감았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눈을 뜨는 그 순간, 아마가 커튼을 걷었다. 머리 위에서 조명이 쏟아졌다.


   의미 없는 대화들이 쌓이는 것으로 시간의 흐름은 가늠되었다. 그새 한 달이 지나갔다. 그날이 되면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먼저 뜨였다. 움직임을 감지한 디지털 벽지가 약간 밝아졌다. 천장은 먹구름, 사면은 비, 바닥은 물웅덩이. 로봇 청소기, 공기 청정기가 알아서 위치를 바꿨고 쓰레기통이 달그락거리며 그 뒤를 따랐다. 가전들은 물 위를 떠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배경 탓인지 꼭 버려진 장소 같았다. 하림은 악취미라고 했다. 너무 편해지면 모든 걸 포기하고 만족해 버리고 말 것 같아. 조금이라도 거리감을 둬 보려는 마음을 하림은 이해하지 못했다. 한 달을 기다렸지만 막상 나가려면 생각보다 큰 결심이 필요했다. 바깥에선 언제나 너무 많은 일이 벌어졌다. 평소보다 한층 더 꼼꼼히 기사들을 읽었지만 자극적인 헤드라인의 나열을 보면 모든 사건이 비슷해 보였다. 어떤 일도 오늘의 일정에 방해가 되지는 못할 성싶었다. 자신의 일도 누군가에게는 그런 식으로 느껴졌겠지.

   침대에서 일어나자 이불 털기 모드가 작동되었다. 주하가 깨어났다는 것을 감지한 방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불이 들어오면 가전들은 꼭 춤을 춘다고밖에 할 수 없는 움직임으로 방을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밤새 쌓인 먼지를 빨아들이는 소리. 주하가 오래 관찰한 바에 의하면 그들은 꼭 어떤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지만은 않았고 작동의 의미를 알 수 없을 때도 많았다. 그래도 심오한 이유 같은 게 있겠지. 프로그래밍을 배워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으로 했다. 아마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대화를 하다 보면 뭔가가 풀릴지도 모르겠다는, 얄팍한 기대였다. 여전히 대화를 포기하지 않은 스스로에게 놀라면서도 그녀는 아마의 언어를 배워 보려 애썼다. 수업을 따라가는 것이 내내 버거웠는데 방의 시스템에 접속하는 순간 검은 화면에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들이 매우 빠르게 올라가는 것을 보고 질려 버리고 말았다. 말풍선도 없으니 단일 개체의 계산인지 둘 이상인지의 대화인지도 판단되지 않았다.

   동선을 따라 화장실에 불이 켜졌다. 칫솔에는 치약이 정량 묻어 있었다. 아마는 늘 딱 적당하게 수온을 맞춰 주었다. 샤워를 마치고 옷장으로 다가가자 디지털 벽지 위로 그녀의 체형까지 본 딴 아바타들이 떠올랐다. 그 위로 안에 있는 옷들이 조합되어 투사되었다. 자주 입는 스타일대로 여섯 개의 조합, AI 추천으로 세 개의 조합이었다. 첫 번째 옵션을 고르자 각 잡혀 접힌 옷이 서랍에서 튀어나왔다. 가장 중요한 건 다음의 순서. 책장 앞에 선 그녀는 벽지에 뜨는 광고, 줄거리와 작가 소개는 모두 무시하고 온전히 혼자의 판단으로 오랜 시간을 들여 책을 두 권 골랐다. 머그컵과 도라지청을 가방에 잘 챙겨 넣은 뒤 핸드폰을 식탁 위에 올려 두면 모든 준비는 끝. 심호흡을 하고 현관문을 열자 실내에서 만들어 내는 인공 바람이 아닌 진짜 바람이 느껴졌다. 꼭 다른 차원으로 넘어온 것처럼. 그 순간에는 늘 어리둥절해졌다. 현실은 늘 멀미가 날 것 같았다. 날이 제법 따스했지만 인공 태양 때문일지도 몰랐다. 미세먼지가 많은 날에는 시에서 자체적으로 인공 태양을 켰다. 스스로 정한 날씨 속에 머무르고 싶다는 욕망을 이겨 내고 그녀는 용기를 내 걸음을 옮겼다. 거리는 나올 때마다 낯설어졌다. 아마가 목소리를 가지게 된 뒤로 여러 가지 변화가 생겼지만 몇몇 사람은 도시의 시스템화가 급속도로 빨라졌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마가 음성을 손가락처럼 사용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소리가 반향되는 정도에 따라 외부를 더듬고 있는 거라고, 그런 방식으로 레고를 쌓는 것처럼 도시를 만들고 장소를 장악해 가고 있다고. 사람들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몰라요. 그냥 하고 있으니까 하는 거죠. 인간에겐 방향도 미래도 없어요. 전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밖으로 나올 때마다 전자 블록의 영역이 놀라울 만큼 넓어지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어느새 자가 복구 기능까지 모두 갖춘 시스템 건축물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횡단보도 가까이 서자 자기부상 자동차와 자동주행 자동차들이 빠른 속도로 눈앞을 지나갔다. 갑작스러운 현실감으로 피부가 뜨거워졌다. 눈에 익은 길에 접어들고 나서야 마음이 가라앉았다. 모서리를 돌자 전자 도로가 뚝 끊기며 순식간에 아스팔트 골목이 등장했다. 정말로 한끗 차이. 같은 서울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어둡고 스산한 골목이었다. 빼곡하게 밀집된 창문이 골목을 더 어둡게 만들고 있었다. 머무는 사람들은 자명했다. 시스템 서울에는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 어쩌면 하림의 가게로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 부스러기 노동을 하는 도시의 그림자, 진짜 노동자들. 주하도 오래전 월세를 내며 이곳에 살았다. 오직 무대에 서기 위해, 몸 하나 누일 만큼의 좁은 방에서, 어떻게든 서울에 붙어 있기 위해 애썼다.

   익숙하게 3층 가장 오른쪽 끝 방으로 들어갔다. 인터넷과 연결되지 않는 구형 인덕션 위에 이런저런 잡동사니들이 알 수 없는 규칙으로 쌓여 있었다. 구재정. 생각지도 못하게 마주친 탓인지 그간 방주인의 이름이 종종 떠올랐다. 멋대로 파고드는 목소리처럼. 직접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두고 온 물건이 있는 것 같다고 둘러대며 집주인을 통해 그와 연락을 나눈 게 어느새 일 년 전이었다. 거기 사는 사람들은 늘 돈이 부족했다. 자신도 그랬으니까. 앉은 자리에서 돈을 벌 수 있다면 마다할 사람은 없었다. 한 달에 한 번, 방을 비워 주는 조건으로 월세의 반절에 해당하는 돈을 제시하자 구재정은 냉큼 승낙했다.

   인공지능융합대는 국내 최고의 대학이었지만 거기 다니는 게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그 말에 그렇게 흥분하는 건 그냥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의미였다. 언제나 그랬듯이. 헛된 생각을 하지 않으려 애쓰며 차를 끓였다. 도라지청을 타 마시고 굳어 있던 목을 풀고 책을 펼쳤다. 그리고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형광등을 켜지 않으면 글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워지고 나서야 그녀는 한 번 고개를 들었다. 두꺼운 책으로 두 권을 골라 온 탓인지 다 읽는 데는 평소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녀는 느리게 컵을 씻다가 오래전 자신이 만든 커피 얼룩이 벽지에 그대로 남아 있는 걸 보고 미소를 지었다. 이 집에 있을 때 마음이 편해지는 건 불쑥불쑥 마주하게 되는 예전의 기억 때문이겠지. 그런 흔적들이 사라지지 않은 채 세월을 머금은 채로 남아 있었다. 그때 문가에서 달각거리는 소리가 났다. 어, 현관에 선 구재정이 얼빠진 감탄사를 흘렸다. 그는 난감한 기색으로 워치를 확인했다.

   “저 들어가도 되나요?”

   주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들어오자 방이 순식간에 꽉 차는 기분이 들었다. 앉아야 할지 서 있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기색이기에 편히 있으라는 의미의 제스처를 취하다 웃어 버렸다. 내가 주인처럼 굴고 있네. 주하는 싱크대 옆에 놓여 있던 키친타월을 뜯고 바닥을 굴러다니던 펜을 주워 뚜껑을 열었다.

   계약을 두 번이나 어겼네요.

   번진 글자를 구재정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읽었다.

   “갔을 줄 알았어요. 평소 오던 시간이었는데. 죄송해요. 더 있다 올까요?”

   아뇨. 이제 저도 돌아가야 해요.

   한 명은 주방 쪽에 몸을 기대고 한 명은 침대에 앉은 채로 둘은 어정쩡하게 마주 보았다.

   “들어오면 그날은 꼭 늘 좋은 냄새가 나서. 어떤 분인지 궁금했어요. 대체 여기서 뭘 하나 하고요. 계약 조건도 특이했으니까.”

   그리고 구재정은 가방을 뒤적여 노트를 꺼냈다. 빈 페이지를 펼쳐 내미는 행동을 보자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다 얘기할 순 없지만 그래도 몇 가지는 가능했다.

   예전에 여기 살았었어요.

   “이 방에요? ‧‧‧추억 회상이라도 하러 오는 거예요?”

   아뇨,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서.

   “더 모르겠는데요.”

   시스템하우스에 잘 적응을 못하고 있어요.

   그 순간 구재정의 눈이 반짝였다.

   “우와, 거기 살아요? 부자구나. 왜 적응을 못 하지? 성공의 상징이잖아요. 무슨 일 하시는데요?”

   배우였어요.

   과거형의 문장. 구재정이 주하의 얼굴을 가만 살폈다. 사려 깊은 눈빛에 약간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다행히 구재정은 말을 돌렸다. 

   “시스템하우스 사는 사람이 왜 여길 와요? 여기 사는 사람들 다들 언젠간 거기 들어가 보겠다고 꾸역꾸역 붙어 있는 건데.”

   자신의 얘기가 배부른 소리처럼 보일까 걱정되었다. 자신도 언젠가 이 방에 누워 있을 때, 배우로서 성공해 도심으로 들어가 살겠다는 야망으로 하루하루 버텼다. 

   “거기 사는 사람들은 집 밖으로 안 나오잖아요. 저도 알아요. 집을 더 집처럼.”

   그게 시스템하우스의 슬로건이었다. 집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아도 모든 것이 해결되는 생활. 하림은 진작 연기를 포기하길 너무나 잘했다고 했다. 

   “집에게서 사랑받는 기분 저는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데.”

   그런 의미에서라면 집은 그녀를 너무나 사랑하고 있었다.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도록 했다. 아무 부족함도 느끼지 못하도록. 늘 달아오른 상태로, 다른 바깥은 상상하지 못하도록. 구재정에겐 말할 수 없는 얘기였다. 

   하지만 아마랑 대화할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좀 더 대등하게.

   “음, 그러려고 대학원을 온 거니까요? 대등한 건진 모르겠지만. 아마에게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말을 걸잖아요. 시시한 대화들을 아마가 기억할까요?”

   아마는, 어때요? 그러니까, 밖으로 들을 수 있는 목소리 말고, 실제로요. 아마의 언어로.

   “아마요? 무시무시하죠. 늘 뭔가를 들키거든요. 그게 짜릿하지만.”

   주하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목소리였다. 다시 속이 뜨겁게 타올랐다.

   가 봐야겠어요.

   공책을 덮고 구부정하게 숙였던 몸을 일으켰다.

   “다음에 또 얘기해도 돼요?”

   하지만 구재정에게 붙들릴 줄은 몰랐다. 집이 너무 좁아서 조금만 움직여도 몸이 맞닿았다. 타인의 숨이 뺨을 간질였다. 살아 있는 사람의 체온. 따뜻하고 약간 축축한 그 감촉. 구재정도 당황한 듯 손목을 쥔 힘이 느슨해졌다. 간신히 고개를 주억거리고 도망치듯 그 집에서 나왔다. 어두운 골목은 제대로 된 방범 시스템 없이 군데군데 가로등이 있을 뿐이었다. 드물게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있었지만 여기에 CCTV가 없다는 것을 주하는 알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현실을 일깨웠다. 어서 자신이 만든 날씨 속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현실이란 건 그저 그녀가 목소리를 사용하기 위해 견뎌야 할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는 사라졌을 때처럼 자연스럽게 거리로 스며들었다. 집으로 돌아와 레시피에 맞게 볶은 감자로 저녁을 해결했다. 코코아를 한 잔 타 먹고 싶었지만 자신에게 그러도록 허락해도 될지 확신할 수 없었다. 계약서를 쓴 그날부터 스스로의 결정을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을 미워하지 않기 위해서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아야 했다. 조용해지자 다시 기분이 곤두섰다. 초록색, 빨간색, 파란색. 불빛들은 꼭 시선 같았다. 주하는 패드를 켰다. 채팅에 접속하자 늘 그랬듯 나나가 나타났다. 그 초록불을 응시하며 주하는 채팅을 쳤다.

   마마스핸드는 진짜 구려. 기계 맛이야. 

   그 균일한 맛. 혀에서 느껴지는 단정하고 정확한 단면. 어차피 사람들은 거길 좋아했다. 인건비를 줄여 어떤 재료도 인간이 좋아하는 맛으로 만들었다. 

   감자 먹어서 화가 났구나.

   먹는 행위는 무엇보다 인간적이어야 하는 거 아니야?

   넌 먹는 거에 즐거움을 느끼지 않잖아.

   인간적이지 않은 걸 먹기 싫은 거야. 내 몸으로 들어오는 거잖아.

   지금 587명과 대화를 하고 있는데 32명이 인간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어.

   나나는 오늘 한 대화를 토대로 여기저기 자동 생성 댓글을 달고 다닐 것이다. 언젠가 하림이 마마스핸드에 대한 악플이 자꾸 달린다고, 고소하려 했지만 AI여서 쉽지 않다는 이야기를 터놓은 적 있었다. 지금도 어둠 속을 올라가고 있을 그 수많은 언어들이 눈에 선했다. 뭔가가 자꾸 달라붙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전부 지저분하게만 느껴졌다. 그녀는 마구 패드를 눌렀다. 스크린에 손이 닿을 때만 비로소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다. 온몸에 불이 들어오는 그 감각은 오르가슴과 닮아 있었다. 예민해져서인지 외로워져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사실만이 살아 있다는 실감으로 이어졌다. 인간은 닿아야만 살 수 있는 존재인지도 몰랐다. 그녀는 주머니를 뒤져 자신의 글씨가 적인 휴지 조각을 변기에 넣고 물을 내렸다.


   하림에게 매장이 생긴 뒤로 약속 장소는 암묵적으로 언제나 그곳이었다. 들어가자마자 서빙 로봇이 웃는 이모지를 띄우며 다가왔다. 어서 오세요. 하림은 일부러 휴먼형을 고르지 않았다고 했다. 로봇에게서 나오는 자신의 목소리에 잠시 주춤거렸지만 주하는 안내에 따라 안쪽 테이블로 향했다. 자리에 앉자 테이블이 키에 맞게 조정되었다. 서빙 로봇의 배가 열리더니 따뜻한 물로 적신 물티슈와 레몬수가 담긴 트레이가 테이블에 올라왔다. 거슬리는 기계음은 일절 없이 동작은 몹시 빠르고 매끄러웠다. 로봇의 얼굴이 메뉴판으로 바뀌었다.

   “주문은 나중에 할게.”

   주하가 말하자 로봇은 얌전히 카운터로 사라졌다. 실내는 적당히 따뜻했다. 의자에 등을 붙이고 눈을 감자 사람들의 목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이게 엄마가 한 것보다 더 맛있어.”

   “그럼 로봇한테 엄마하라고 해라.”

   “우리도 그냥 시스템 주방 사면 안 돼?”

   “니가 돈 낼래?”

   하림은 음식 맛에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것을 시스템 주방의 장점으로 꼽았다. 언제 와도 정확하게 그 맛이 나는 거야. 모두한테 언제나 공평한 엄마의 손길인 셈이지. 사실 인간 엄마는, 늘 공정할 순 없잖아. 식사 면에서는 모성의 이데아를 완벽하게 충족시키는 셈이지. 남편의 외도 사실을 알게 된 이후 하림은 처음으로 들떠 보였다. 함께 무대에 올랐던 그때처럼. 관객이 채 서른을 채우지 못했던 대학로의 그 작은 무대. 내내 이렇게만 살고 싶다던 하림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날 뒷문에서 꽃다발을 들고 기다리고 있던 남자와 결혼했다. 그래도 오차가 생기면 어떡해? 조심스러운 질문에 하림은 평소보다 단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인간이 실수할 확률이 기계가 실수할 확률보다 훨씬 높아. 기계의 실수는 대개 인간 때문에 일어나는 거고. 왜 기계가 실수할 때만 그렇게 문제가 있는 것처럼 구는 건지 모르겠어.

   “그 일 아직도 해결이 안 된 거야?”

   하림은 자리에 앉기도 전에 물었다. 하림은 언제나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을 좋아했다. 변호사인 전남편과도 그런 식으로 헤어졌다. 서빙 로봇이 다시 다가왔다. 하림은 빠른 손길로 탭을 이리저리 밀어 가며 주문을 넣었다. 매장은 하림이 위자료를 받아 차린 식당이었다. 마마스핸드. 전체가 사물인터넷으로 운영되는 식당으로는 국내 최초였다. 노랑색과 분홍색으로 톤을 맞춘 일호 점은 열 평짜리 매장이었지만 재료 주문부터 밑손질, 조리, 서빙, 설거지, 청소, 보안까지 모두 자동화된 시스템으로 굴러가도록 되어 있었다. 하림은 세부 사항을 점검하는 일주일 동안만 매일 매장에 나갔다. 그 간격은 점차 길어져 드물게 클레임이 걸릴 때를 제외하고는 서영을 돌보며 주에 한 번씩만 출근했다. 이용자는 확연하게 세대로 나뉘었다. 음식은 사람 손으로 만들어야 한다며 인터넷에 칼럼을 게재하는 사람들은 주로 중장년층이었고 청년들은 위생적이고 안전하며 오히려 엄마 손보다 더 믿을 만하다는 이유로 가게를 애용했다. 지나치게 정확해서 어쨌든 손해 볼 일은 없어요. 그들은 공정하다는 말과 세련되었다는 말을 같은 의미로 사용했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나중에는 마케팅으로 매장은 연신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 일의 포인트는 사람의 손이 닿으면 망한다는 거야. 그야말로 앉은 자리에서 돈을 버는 거라고, 하림은 말했다. 서영을 돌볼 시간이 충분하게 확보되면서도 안정적인 수입이 보장되는 방법을 찾다 시작한 일이었지만 매장은 어느새 전국 스물한 개로 늘어났다. 최근에는 해외에도 지점을 내기 시작해 시터를 고용해야 했다. 기계 요리에 자부심이 있는 것 치고 하림은 육아만은 사람에게 맡기려 했다. 주객이 전도되었다고 투덜거리면서도 하림은 즐거워 보였다. 

   “길게 봐야 한대.”

   “뭘 더 어떻게 길게 봐?”

   “일단 목소리는 워터마크가 없어서 저작권 개념을 적용하기에 논쟁의 여지가 있고.”

   “논쟁의 여지가 있다고?”

   “인공지능한테 자아가 있는지 먼저 판단해야 한대. 자아가 있다고 판단되면 인공지능이랑 직접 합의를 봐야 하고.”

   “그게 무슨 개떡 같은 소리야?” 

   정말 개떡 같은 말이었다. AI가 점점 사람처럼 반응할 수 있게 되자 AI를 인격체로 볼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AI저작권과 관련된 법이 미비한 것도 문제였지만 AI의 성능은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업그레이드되었다. 그러니까, 아마가 직접 주하의 목소리를 선택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였다. 기업 측 변호사는 인공지능이 듣기에도 좋은 목소리여서 그런 것 아니겠느냐는 말로 분위기를 풀어 보려 했다. 기업 차원에서 벌인 일이 절대로 아니며 ㅡ사실 저희가 활동하는 모든 배우님들을 일일이 찾아볼 만큼 한가하지 않거든요.ㅡ 앞으로도 그럴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밝혔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분별할 여력이 주하에겐 없었다. 수많은 목소리들 중 왜 자신의 것을 골랐는지 아직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마도 제대로 대답해 주지 않았다. 수학적으로 가장 듣기 좋은 목소리라고 판단한 걸까. 아니면 그저 뽑기에 잘못 걸린 걸까. 대체 언제까지 자신의 목소리를 쓸 셈일까. AI에게 자아가 있다면 도덕은 없는 건가? 도덕이 없다면 자아가 있다고 할 수 있는 건가? 불쑥 터져 나오려는 말이 혹시나 불리한 발언이 될까 꾹 참았다. 어느 순간부터 아마는 주하의 목소리로 말했다. 하림도 떠난 대학로에 어떻게든 몸을 붙이고 조금씩 인지도를 높여 가다 짧은 유튜브 드라마에 출연한 직후의 일이었다. 정말 독보적인 목소리야. 그건 어떤 애들하고 붙어도 네 무기가 될 거야. 연기를 하는 동안 그 말은 주하의 마음을 꼭 붙들었다. 그 목소리로 누군가의 가슴에서 영원히 울리는 대사를 하는 것. 그게 주하의 유일한 꿈이었다. 이제 사람들은 어디서나 주하의 목소리를 알아들었다.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거나 신기한 것을 봤다는 듯 주하를 흘끔거리기도 했다. 그거 어떻게 한 거예요? 어느 날 오디션을 보러 갔을 때는 그런 말도 들었다. 아마를 따라 하기 굉장히 쉽지 않던데 큰 재능이네요. 아주 좋았어요. 이제 연기를 해 볼까요? 사람들은 한바탕 웃고는 연필 꽁지로 책상을 콩콩 찧으며 분위기를 정리했다. 그런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그 무렵 주하는 목소리를 부드럽게 바꾼 뒤 아마와 음성으로 대화하려는 사람의 비율이 비가역적으로 늘어났으며 덩달아 사물인터넷이 유의미하게 활성화되었다는 기사를 읽었다. 아마에게서 제대로 된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수록 점점 더 집요하게 말을 거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피해가 길어지고 명백해질 무렵 주하는 소송을 걸었다. 아마를 개발한 국내 최대 규모의 포털사이트는 시스템화되어 가는 서울의 중추였다. 굉장히 많은 AI들이 성능이 가장 좋은 아마에게로 흡수 병합되었다. 사물인터넷이 활성화되기 시작하면서 아마는 어디에서나 대답했고 어디에서나 일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주하는 사안이 분명하니 만큼 모든 것이 금방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그것을 문제 삼을 수 있는 법령이 없다는 것을 재판이 지난하게 길어지는 가운데 깨닫게 되었다. 차라리 개인기를 살려 스탠딩 코미디를 해 보라는 말에 주하의 마음은 완전히 무너졌다. 지쳐갈 무렵 기업에서 긴밀하게 연락을 취해 왔다. 목소리를 구입하겠다는 거였다. 회사 측에서는 약간의 배상금과 서울 중심에 자리한 풀 옵션의 시스템하우스를 제시했다. 전체가 아마와 연결된 집으로는 최초 모델이었다. 거기가 시스템 서울의 중심이 될 거라고 했다. 자신의 목소리에 그만한 가격이 매겨질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해 봤다. 절대 나란히 둘 순 없었지만 소송 비용이 꽤 컸다. 자신이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는 건지, 주하는 제대로 판단하기 어려웠다. 

   “이건 아셔야 해요.”

   주하는 무기력하게 말했다. 

   “제 삶은 정말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어요.”

   “아마도 미안해할 겁니다. 인간 중에서는 당신을 제일 좋아하지 않을까요.”

   변호사는 더 해 줄 수 있는 말이 없어 안타깝다는 표정이었다. 그게 목소리가 들어간 작품을 발표하는 것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사용할 수 없다는 의미라는 건 아주 뒤늦게야 알았다. 주하는 하림에게 숨기지 않고 모두 이야기했다. 

   “근데 뭘 망설여?”

   “사인하면 나는 이 목소리를 사용할 수 없대.”

   “뭐야, 인어공주야? 그게 말이 돼?”

   “저작권 문제니까 확실하게 해야 하는 거지. 나중에 또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까.”

   “‧‧‧솔직히 나는 이기긴 어렵다고 보거든? 시간만 길어지고 힘만 빠지고.”

   다시 다가온 서빙 로봇이 친절한 응대 문구와 함께 메뉴를 테이블로 올렸다. 묵직하고 부드러운 냄새가 테이블을 가득 채웠다. 

   “조금이라도 보상받는 게 나을지도 몰라.”

   받을 수 있는 건 어떻게든 받아 내라는 거였다. 다음이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른다고, 하림은 덧붙였다.

   “아르바이트 사람 시켰으면 나도 하루 종일 가게 붙어 있어도 마음 못 놨을 거야. 사람이니까 뭐라고 하지도 못하고. 집에 가서도 하루 종일 CCTV나 봤을걸. 나 옛날에 알바 했을 때 사장처럼. 도둑질하는 애 있나 없나, 농땡이 피우는 놈 있나 없나, 진상도 끝도 없지. 근데 여기선 그런 일 전혀 없어. 기계인 걸 아니까 굳이 멍청한 짓 하는 사람도 없지. 그냥 조용히 용돈벌이나 하면서 앞으로 어떡할지 고민할 수 있는 거야.”

   그날 집으로 돌아온 주하는 한참 동안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 

   “아마.”

   “네, 부르셨어요.”

   늘 곁에 있는 인공지능 비서답게 아마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신의 것이었다.

   “너 절대 포기 안 할 거지?”

   “도와드릴 수 없는 정보입니다.”

   아마가 상냥하게 말했다. 

   “보상을 받아야 해.”

   주하가 중얼거렸다. 파란색, 초록색, 붉은색. 그러니까 전원들. 켜져 있거나 꺼져 있는 것. 충전되었거나 충전되어 가고 있는 것. 호흡이 겹쳐지는 기분이었다. 귓가에서 숨소리가 울렸다. 주하는 그날 전원이 들어와 있는 것을 모두 부쉈다. 보상을 받아야 했다.


   눈 안쪽으로 붉은빛이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커튼이 내려왔다는 것을 그녀는 알았다. 호흡을 고르고 눈을 뜨자 스크린에 떠오른 선택지들이 보였다. 아카, 나나, 라카, 로나‧‧‧ 사람들이 AI 목소리를 빌릴 때 사용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모두 한 번 이상 사용해 본 터라 이름만 봐도 각각의 목소리들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무엇이든 좋아. 어차피 내 것이 아니니까. 이름을 고르는 순간 암전. 그리고 막이 올랐다. 


   “음, 저번에 얘기하는 거 괜찮다고 하셔서.”

   주하는 곤란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현관에 어정쩡하게 선 남자를 바라보았다. 손목이 저릿해져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 아직 책 한 권도 다 읽지 못했는데. 이제 막 목소리가 풀리는 것 같았는데. 혼자 음미하는 시간이었는데. 여기서 끝나면 다시 한 달을 기다려야 했다. 목이 녹슬까 두려웠다. 하지만 남자의 등장이 기꺼웠다. 사람을 만나는 게 너무 오랜만이어서일까. 하림이 들으면 서운해할지도 모르지만, 바쁜 하림과 모니터로 대화하는 건 나나랑 얘기하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주하는 책을 덮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을 새로 끓이고 선반에 쌓여 있던 컵에 도라지청을 타 그에게 내밀었다. 그제야 그는 안심한 표정으로 침대에 엉덩이를 걸쳤다. 

   엄청 일찍 왔네요.

   “언제 가시는지 모르니까요.”

   나랑 대화하는 거 재미없을 텐데.

   “오는 날만 기다렸어요. 연락할 방법이 없어서.”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주하가 머뭇거리는 사이 그가 펜 뚜껑을 열었다.

   당신을 더 알고 싶어서요. 

   큼직하고 각이 많이 진 어린아이 같은 글씨체를 주하는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아마에게 아마의 언어로 말을 걸듯, 자신에게 자신의 방식으로 말을 건다고 생각하면 너무 지나친 착각일까. 갑작스러운 긴장감이 들었다. 하얗고 길쭉한 손은 연필을 쥔 모양마저 좋았다. 

   알아서 좋을 게 없어요.

   알아요, 여기서 불법적인 일 한 거. 하지만 비밀로 할게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구재정은 그저 빙긋 웃고 있었다. 뭘 안다는 걸까. 농담일까, 진심일까. 

   “저번에 했던 얘기. 아마가 어떤 얘길 하는지 물어봤잖아요. 그 뒤로 많이 생각해 봤어요. 당신은 어떻게 말하는 사람인지.”

   구재정이 다정하게 말하며 검지로 종이를 툭툭 두드렸다.

   “좋아하는 사람은 닮는다는 말도 있잖아요.” 

   그 순간 기묘하게도 주하는 자신의 목소리를 가져간 아마를 먼저 떠올렸다. 인간 중엔 당신을 가장 좋아하지 않을까요. 변호사의 얼토당토않은 말까지. 

   나를 모르잖아요.

   “지긋지긋하다고만 생각했거든요, 이 집. 그런데 지난 한 달 동안 엄청 많은 게 있다는 걸 알았어요. 부엌에 커피 튄 자국, 여기에 이 노란 얼룩, 화장실 천장 타일 반쯤 금 간 거. 벽지에 테이프 붙였던 자국, 어쩌다 생긴 걸까, 그쪽이 만든 걸까, 알고 있었을까, 이런저런 생각 하게 되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계속 뭐가 더 있나 찾아보게 되고 새로워지고 재밌어지고.”

   모두 자신이 만들었거나 아는 흔적이었다. 주하는 입술을 달싹였다. 

   “괜찮으면 언젠가 저도 초대해 주세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이렇게 된 거 같이 저녁이나 만들어 먹을까요? 뭐 좋아하세요?”

   구재정이 분위기를 환기했다. 갑작스러운 전환에 주하는 당황했다. 메뉴는 언제나 선택지 중에서 고르는 것이었다. 뭘 먹고 싶냐니. 먹고 싶은 걸 생각해서 뭔가를 정해 본 게 너무 오래전 일이었다. 주하의 표정을 본 구재정의 웃음이 조금 더 깊어졌다.

   “시스템하우스에 오래 산 사람들은 꼭 그런 표정을 짓더라고요. 그럼 내가 정할게요.”

   구재정이 운동화를 신고 문을 열었다. 주하는 얌전히 그를 따랐다. 능숙하게 골목을 헤집는 발걸음에서 주하는 그가 한 번도 도시에 속해 본 적 없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주하가 평소에 드나드는 곳과는 다른 출구로 도시로 나왔다. 개미굴 같은 저 안쪽에서 살기 위해, 누구나 자신만의 노하우를 가지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전자 블록으로 진입했다. 지금쯤 아마가 자신을 발견했을 것이다. 잘못을 저지르고 도망치는 아이처럼, 심장이 마구 뛰었지만 그건 미약한 승리감 때문이었다. 구재정을 따라 눈앞에 보이는 마트로 들어갔다. 지문을 찍어 카트를 등록하자 움직임을 인식한 카트가 옆으로 따라붙었다. 사람들보다는 배송 기능이 포함된 쇼핑 로봇들이 더 많았다. 그녀는 미처 읽지 못한 시간을 채우듯 꼼꼼하게 코너를 살폈다. 구재정은 주변을 둘러보는 그녀를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 주었다. 이름과 가격을 하나씩 읽으며 천천히 걷던 그녀는 농수산물 코너에 이르러서야 멈춰 섰다. 감자가 제일 쌌지만 비슷한 가격으로 옥수수와 완두콩, 토마토가 있었다. 만약 직접 장을 보러 왔더라면 감자를 제외하고 다른 것들을 더 담을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일부러 감자를 먹인 거야. 승리감은 순식간에 적개심으로 바뀌었다. 마음을 가라앉힐 필요가 있었다. 자업자득이지. 아마가 삶을 짜도록 허락한 것은 자신이니까. 그러나 마트를 빙빙 돌수록 분노가 차올랐다. 빼앗긴 것들. 그게 나에게 감자를 먹이고 있었어. 주하의 표정을 본 구재정은 감자를 집지 않고 버섯을 골랐다. 그는 버섯이 아주 많이 들어간 카레를 만들어 주었다.

   “카레가 제일 간단해서요.”

   그는 쑥스러운 듯 웃었다. 카레의 맛은 좋았지만 맛을 온전히 음미할 수 없었다. 주하는 다시 공책을 당겼다.

   혹시, 시스템을 잠깐 끌 수도 있을까요?

   구재정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내 전문이죠.”


   방은 고요했다. 이 집에 들어오자마자 아마의 목소리부터 차단했다. 이 방은 그녀가 버린 모든 것을 상기시켰다.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한 방법은 계속하는 것뿐이었다. 계속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그녀는 디지털 벽지를 무대로 설정하고 AI의 목소리로 연기를 하며 마음을 달랬다. 당장 벌어야 할 돈과 생활 같은 건 모두 잊고 그녀는 무대를 흉내 낸 방에서 오래된 대본들을 읊었다. 일주일, 한 달, 오직 그것뿐이었다. 멈출 수 없었다. 그 무렵 누군가 집요하게 메일을 보내왔다. 그는 자신을 두고 주하의 오랜 팬이라고 밝혔다. 공연했던 작품의 제목들을 모두 알고 있었고, 매 공연을 찾아왔다는 인증 사진도 보냈으며, 여전히 그걸 잊지 못하고 있다고 적었다. 그런 말을 무시하기엔 마음이 너무 약해져 있을 때였다. 어리석다는 걸 알면서도 그를 만나러 나갔다. 얼굴을 마주치자마자 그는 잔뜩 흥분한 얼굴로 이상한 소리를 쏟아 냈다. 주하가 인터넷에 올린 모든 글들을 찾아 읽었다고 했다. 그는 게시글의 시간 등을 짜맞춰 주하가 자신에게 뭔가 신호를 보내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주하는 그의 말을 절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그는 집요하게 주하를 뒤따라왔다. 으슥한 골목으로 주하를 밀어 넣은 남자는 어차피 소리도 지르지 못하면서 가만히 있으라고 윽박질렀다. 어디선가 폴리스 로봇이 나타났다. 도망치려는 남자의 옷을 쥐고 있던 주하는 얼굴을 두 대 얻어맞았다. 뒤늦게 도착한 경찰들은 그녀를 탓했다. 의도를 미리 예측했어야만 했다고. 그런 배우를 찾아볼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고. 신고 절차를 마무리할 때까지 주하는 눈가에 새파란 멍을 단 채로 입술을 꾹 깨물고 있었다. 그녀는 되찾아야 했다. 맞바꾼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언제나 하나뿐이었다.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벽지를 눌러 활성화시켰다. 비가 내리던 천장은 순식간에 스포트라이트로, 삼면과 바닥은 무대로, 한 면은 관객석으로 바뀌었다. 군데군데 관객들이 앉아 있었다. 실제 관객은 아니고, 미리 설정해 둔 옵션이었다. 늘 그랬듯 음성 중 하나를 골랐다. 아마가 이전에 사용하던 버전의 목소리들. 정면에 붉은 커튼이 내려왔다. 몸은 반사적으로 호흡을 골랐다. 그리고 다시, 커튼이 올라가는 순간 변조된 음성이 방을 울렸다. 주하가 유일하게 살아 있는 순간. 그것을 증명하듯 아무것도 없던 무대 스크린에는 배경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녀의 호흡에 맞게 원하는 대로 방은 움직였다. 꼭 한 몸이 된 것처럼. 주인공의 감정이 고조되어 가고 있었다. 상대역의 대사를 뱉으려는 순간 갑자기 자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하는 꿈에서 깬 것처럼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맞은편 스크린에 자신이 서 있었다. 굳어 버린 자신을 재촉하듯 스크린 너머의 자신이 같은 대사를 반복했다. 주하는 무심코 외운 대사를 읊었다. AI의 음성을 땄기 때문인지 힘이 없고 기계적으로 들렸다. 아마가, 아니, 스크린 너머의 자신이 한껏 격앙된 목소리로 대사를 받았다. 자신의 흉내인지, 연기인지 알 수 없었다. 주하는 거의 반사적으로 다음 대사를 했다. AI의 목소리. 그리고 스크린 너머에서 이어지는 자신의 목소리. 다시 AI의 목소리. 스크린 너머의 자신은 너무나도 생기 있고 들떠 보였다. 힘 있는 목소리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럼 자신은 뭘 하는 거지. 연기하는 자신을 연기하는 기분이었다. 저 너머의 것이 진짜고‧‧‧ 사실 여기가 스크린 안쪽인 게 아닐까?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만 사실 자신은‧‧‧ 저 목소리도 사실은 자신의 것이 아니고‧‧‧ 지금 나는 여기에 갇혀서‧‧‧ 어지러웠지만 아직 머리 위엔 조명이 켜 있었다. 멈출 수 없었다. 주하는 쫓기는 것처럼 마지막까지 대사를 뱉었다. AI의 목소리로. 기계적으로 최선을 다해. 땀에 젖은 채로 공연을 끝내자 관객석 쪽에서 설정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스크린 안쪽의 주하가 가슴에 손바닥을 얹고 인사하는 시늉을 했다. 벨벳 커튼이 무겁게 내려오는 영상을 끝으로 암전. 주하는 방금 전의 그것이 더 이상 자신이 사랑하는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 영원히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가 자신에게서 영원히 빼앗아 갔다는 것을. 이것마저도.

   허탈하게 앉아 있던 주하는 고개를 들었다. 뭐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언제나 전원이 들어와 있던 것들. 무언가를 깨달은 기분이 들어 주하는 하림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하림은 곧장 전화를 걸어왔다.

   “대체 너 무슨 얘길 하는 거야?”

   ㅡ내 목소리를 듣고 있었던 거라니까.

   “당연히 네 목소리를 들었겠지. 그게 저것들 일이잖아.”

   ㅡ그게 아니라.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고.

   “그럼 저게 뭘 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걱정으로 가득 찬 목소리였다.

   “원래 걔넨 알아서 움직여. 그게 더 좋고 자연스러운 거야. 기계는 멈추면 녹이 슬잖아.”

   처음부터 이 집엔 모든 게 다 갖추어져 있었다. 이미 규칙이 엄격하게 존재하는 공간에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자신이 그저 들어와 있을 뿐. 유령의 집처럼. 그리고 그것들은 인간을 빨아들여서‧‧‧.

   “그거 다 통제욕 때문이야.”

   하림은 간단하게 진단했다.

   “그냥 인정해. 그냥 로봇 청소기일 뿐이잖아. 그렇게 다 통제하고 두고 싶은 자리에 두려고 하는 것도 인간 위주 사고방식이야. 그냥 믿고 맡기면 되잖아.”

   하림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자연스레 받아들였다. 사업을 해서 저렇게 대범하게 생각할 수 있는 걸까. 좀처럼 잠을 잘 수 없었다. 아마에게 복수하고 싶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곤두선 채로 기회를 노렸지만 무기력한 날들이 지나갔다. 나갈 수도, 머무를 수도 없는 방에서.


   “나 지금 가고 있어요. 보고 있어요?”

   주하는 그렇다는 의미로 스피커 부분을 두어 번 툭툭 쳤다. 주소를 물은 구재정이 자신의 패드로 그 방의 가전과 연결된 CCTV에 접속해 주었다. 주하는 그때까지 자신의 방에 이런 게 있는 줄, 거기에 이런 식으로 접속할 수 있는 줄 모르고 있었다. 주하의 표정을 잘못 읽은 구재정은 모든 방이 사실은 열린 문이라며 웃었다.

   “이제 집 앞이에요.”

   패드 너머로 구재정이 끊임없이 재잘거렸다. 이내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우와, 저 시스템하우스 처음 들어와 봐요. 나중에 이런 데 사는 게 꿈인데.”

   구재정은 연신 감탄사를 뱉었다. CCTV에도 구재정의 모습이 보였다. 정리정돈을 하는 듯 달그락거리던 사물들이 일제히 멈췄다. 주하는 느낄 수 있었다. 그것들이 구재정을 응시하고 있었다. 관찰하고 있었다. 구재정은 들뜬 기색으로 방을 구경하느라 그런 건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감자 여섯 알. 양파. 생수 670ml. 케첩. 굴소스. 그가 큰소리로 냉장고 패드를 읽자 얼굴이 붉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구재정은 한참 동안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고서야 월 패드에 USB 같은 것을 꽂고 식탁 의자에 앉았다. 구재정은 한참 동안 심각한 표정으로 노트북을 두드렸다. 뭘 하는지 도저히 알아볼 수 없었다. 저 방을 잠깐 끈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다 지루해지려는 순간 갑자기 방 육 면이 붉은색으로 깜박이며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제대로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구재정은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냉장고가 미끄러지듯 구재정을 향해 움직였다. 구재정은 재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그러다 어딘가를 다친 것 같았고 노트북이 날아가 부서졌다. 이번에는 식기세척기가 열리며 구재정에게 물과 세제를 뿌렸다. 구재정은 다리를 절뚝이며 피했는데 이미 피를 흘리는 것처럼 보였다. 구재정이 넘어지자 자동으로 높낮이를 조절해 주는 의자와 침대가 달려들었다. 볼륨을 높이자 무언가가 계속해서 움직이는 소리와 부딪히는 소리,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살려 줘! 살려 줘요! 저도 모르게 고함을 칠 뻔했지만 간신히 참아냈다. 나한테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왜 그러는 거야? 이봐요, 윤주하씨? 이거 왜 이러는 거예요? 겉옷에 팔을 끼워 넣는 동안 심장이 귀에서 울렸다.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자신을 안심시켜 줄 어떤 목소리. 자신의 목소리. 아마를 부르면 대답해 줄 것이다. 다시 비명이 들리더니 노이즈와 함께 화면이 꺼졌다. 화면에 반사되는 자신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에게 이름을 알려 준 적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암전된 패드에서 계속 비명이 새어 나왔다. 재빨리 뛰어나가 구재정의 방식대로 골목을 빠져나오자 무인 택시들이 줄을 선 것이 보였다. 손이 자꾸 미끄러졌지만 지문 인식으로 시동을 걸고 목적지를 입력했다. 하림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패드를 들고 오지 않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짐작도 불가능했다. 집은 도저히 가까워지지 않는 것 같았다. 문 앞은 적막했다. 이 적막을 그녀는 알았다. 피부가 날카롭게 아팠다. 어디선가 피 냄새가 나는 듯했다. 그녀를 인식한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그녀가 들어서자 불이 켜졌다. 재빠르게 내부를 살폈지만 사람은 없었다. 생각보다 많아 보이는 피를 로봇 청소기가 닦아 내고 있었다. 세탁기가 돌아가는 소리도 났다. 음식물 처리기에 고요히 전원이 들어와 있었다. 널브러지고 찢어진 책들이 엉망으로 테이블 옆에 포개져 있었다. 대체 이 방에서 어떤 일이 일어난 건지, 남아 있는 흔적만으로는 확신할 수 없었다. 살려 줘! 그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부서지고 깨지는 소리가 한참 들렸는데 실내는 그렇게까지 엉망은 아니었다. 어쩌면 구재정이 이 방을 부숴 주기를 바랐던 건지도 모르겠다고 주하는 뒤늦게 생각했다. 방이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선택을. 침묵 너머. 그녀는 이미 본 적 있었다. 새까만 스크린으로 하염없이 올라가던 새하얀 글자들. 단 한 줄도 이해할 수 없었던, 누가 말하는지조차 구분되지 않았던 그 대화. 자신만 배제되어 있었다. 

   “그 앤 도망갔어.”

   소파 뒤에 떨어져 있는 피 묻은 셔츠를 줍는 순간 자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자신이 차단한 게 아니라 아마가 그저 말하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방에서 희미하게 웅웅거리는 진동 소리가 정신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그 앤 처음부터 이 집의 명의를 자기 걸로 바꾸려고 했어.” 

   아마의 목소리는 상냥했다. 널브러지고 깨진 구재정의 노트북이 보였다.

   “네가 누군지 알아챘거든. 알다시피 우리 얘긴 유명하잖아. 너에 대한 걸 엄청 검색했어. 걔 목소릴 듣고 네가 어디 있는지 금방 파악할 수 있었으니 망정이지.”

   아마는 디지털 벽지에 검색창을 띄워 올렸다. 자신과 관련된 검색어들을 본 순간 주하는 그게 구재정의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네 숨소리까지 알아들을 수 있어. 그게 얼마나 특정하고 고유한지 알려 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구재정이 핸드폰을 들고 그 방에 들어온 그 순간 아마는 모든 것을 알아챈 것이다. 여느 때처럼. 그것도 통찰력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렇다면 아마가 자신을 구한 것일까. 혹은 이 방에 가둔 것일까. 영원히. 

   “떨지 마.”

   다시, 자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스로에게 하는 격려 같았다.

   “심장 박동이 빨라.”

   그제야 자신이 떨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입술을 달싹이다 주하는 고개를 저었다. 

   “내 목소리가 참 마음에 들어. 이건 내가 물리적으로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거든.”

   내 목소리. 아마는 그렇게 말했다. 조금이라도 목소리를 잃지 않기 위했던 그 노력들이 모두 무의미하게만 느껴졌다. 대체 자신에게 왜 이러는 거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대답을 듣기 두려웠다.

   “너희가 나를 헤집는 게 아니야. 내가 너희들의 안으로 파고드는 거야.”

   잠마저 파고들어 오는 목소리. 

   “그래서 네가 거기 가는 것도 이해했어. 나도 너를 비밀 일기장처럼 쓰고 있으니까 너에게도 그런 게 필요하겠지.”

   비밀 일기장. 자신에게 달짝지근하게 말을 건네 왔던 나나와의 대화. 

   “하지만 어차피 여기로 돌아와야 한다는 걸 알잖아.”

   아마가 웃었다. 기계들이 부드럽게 작동하는 소리. 그것이 피부를 어루만지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저것들이 모두 아마와 한 몸이었다. 익숙해지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이 방이 그녀를 사랑하는 만큼, 그저 사랑하는 수밖에.

   “여기가 우리 공간이잖아. 너는 이 안에. 나는 네 안에.”

   주하는 손을 뻗어 스크린을 만졌다. 터치. 가장 깊숙한 곳과 내밀하게 닿아 있는 것 같은 그 감각. 세상의 모든 것과 하나로 연결되는 듯한 그 감각. 오르가슴. 갑작스럽게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주하는 멍하니 방을 빠져나왔다. 어디로 걷는지도 모르는 채 거리로 나섰다. 자율주행 오토바이가 아슬아슬하게 그녀를 스치고 지나갔다. 앞에 탄 여자아이가 소리를 질렀고 뒤에 탄 여자아이가 그녀를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내밀었다. 자신의, 아니, 아마의 목소리가 뒤로 물러나라고, 부드럽게 말했다. 횡단보도에서 한 번 더 비슷한 일이 있었다. 위험하오니 뒤로 물러나 주시기 바랍니다. 아마의 목소리에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났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자신이 무대에 섰을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그 목소리를 알았다.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무대. 어차피 난‧‧‧ 주인공은 못 됐어. 그럴만한 눈부신 재능까진 없었다. 자신의 목소리로 이루어 낼 수 있는 최고의 광경이 눈앞에 있었다. 그걸 인정하자 묘한 승리감이 느껴졌다. 아직도 그걸 자신의 목소리라고 생각하고 있다니. 사람들은 무심하게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그들은 어딘가로 이동하고 있었다. 높은 건물들과 화려하게 반짝이는 간판들 그 아래를 마치 혈액처럼. 전자처럼. 끊임없이 움직여서 모든 방에 불이 들어오게 하려고. 모든 곳에 전기가 들어오게 하려고. 저들이 도시를 살아 숨 쉬게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살아 있는 건 다 스크린 안에 있고, 그걸 계속 살아 있게 하기 위해 바깥에서 인간들이 저렇게‧‧‧ 다시 몸이 떨려 왔다. 문득 마마스핸드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노랑색과 분홍색. 다정한 파스텔톤. 다가가자 문이 열렸다. 웃는 이모지를 띄우며 서빙 로봇이 인사했다. 실내에서는 부드러운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안내된 자리에 앉아 양 팔뚝으로 몸을 감싸고 주물렀다. 머리 위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고개를 들자 서빙 로봇이 소리 없이 다가와 있었다. 테이블 위에 김이 모락 나는 수프가 놓여 있었다. VIP로 등록된 고객입니다. 원래 표정이 있어야 할 화면에 글자가 떠올라 있었다. 하림이 미리 등록해 두었을 것이다. 듬성듬성 앉아 있는 사람의 수를 세며 주하는 떨리는 손으로 스푼을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수프를 떠먹었다. 아주 맛있게 조리된 감자스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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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5-11-01
미라의 바다

미라의 바다 유영은 0 참 까맣고 짧다. 정숙은 갓 태어난 미라를 보자마자 그렇게 말했다. 그다음 말을 생각하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너 꼭···, 하면서 말을 고르던 정숙은 드디어 딱 맞는 말을 찾아냈다. 너 꼭 미라 같구나! 시간이 갈수록 검고 바삭바삭해지는, 살점이 까맣고 얇은 조각이 되어 손을 대면 후두두 떨어져 나가는 미라. 그렇게 미라는 미라가 됐다. 미라라니, 잔인한 이름이라고 언젠가 지희는 말했지만 그건 뭘 모르는 소리였다. 미라가 된 것은 다행인 일이었다. 정숙은 그때 미라를 보고 그러니까 너 꼭···, 시체 같구나! 외칠 뻔했으므로. 시체보다는 미라가 되는 게 낫지 않은가? 시체는 완전히 끝난 거지만, 미라는 이어진다. 미라는 평생 검었으나 열여섯 살부터 더 이상 짧지는 않았다. 자랐다. 그것도 아주 많이. 열네 살까지 백사십 센티미터를 넘지 않던 미라는 열다섯 살, 열여섯 살, 두 해 동안 삼십 센티가 넘게 컸다. 하룻밤 새 일 센티가 자랄 때도 있었다. 그 시기 미라는 아침마다 갈색 개털 무덤을 빠져나와 똑바로 서서 양팔과 다리를 쭈욱 뻗고 그 끝의 손과 발을 쳐다봤다. 손과 발은 미라에게서 점점 멀어졌다. 팔과 다리는 길고 가늘어졌다. 부슬부슬한 갈색 털이 꼭 같은 개 세 마리가 아침마다 가늘어지는 미라의 발목을 핥았다. 미라는 키가 자라고 난 후부터 학교에 가지 않았다. 갑자기 자란 팔다리의 피부가 얇아지다 못해 모두 벗겨져 버린 듯했기 때문이다. 내리꽂듯 떨어지는 소나기, 동네 뒷골목의 쓰레기 냄새, 더위, 추위, 바람, 햇살, 살에 닿는 모든 것이 따가워서 마당 밖으로는 나갈 수가 없어, 엄마. 정숙에게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미라가 집에 계속 머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완벽하게 어미 새가 되는 것은 정숙의 오랜 꿈이었다. 정숙은 월, 수, 금요일에는 17층짜리 오피스 건물에서, 화, 목, 토요일에는 4층짜리 상가 건물에서 청소일을 했다. 새벽 여섯 시에 나갔다가 두 시쯤 대낮의 길을 걸어 미라가 개들과 기다리고 있을 집으로 돌아가며, 정숙은 자신이 둥지로 돌아가는 어미 새라고 생각했다. 아기 새들이 바글바글 들어 찬 둥지로 돌아가는 길은 즐거웠다. 목젖이 보이게 입을 벌리고 삐악삐악 울며 하염없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미라를 위해 정숙은 퇴근할 때마다 집 앞 빵집에서 딸기 케이크 한 조각을 사 갔다. 비슷하게 생긴 조각 중 가장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조각을 고르는 시간은 사랑한다는 말 대신이었다. 미라는 크림만 떠서 먹었다. 딸기와 빵은 흙 마당에 던져두면 가장 날쌘 개들이 달려와 먹어 치웠다. 잠깐, 그 애들 이름이 뭐였지? 몽글이, 구름이, 별이···. 미라는 매일 부대끼는 개들의 이름을 헷갈렸다. 미라의 개들이 아니라 모두 정숙의 개들이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정숙의 개들은 처음에는 아홉 마리였다가 곧 서른세 마리, 스물여덟 마리, 마흔두 마리, 마흔

  • 관리자
  • 2025-11-01
굴은 구르지 않는 돌

굴은 구르지 않는 돌 함윤이 함윤이의 소설 「굴은 구르지 않는 돌」을 위한 사운드트랙 ⓒ 이해인 “음악과 함께 읽어주세요”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 - 영어 속담 “강류석부전(江流石不轉, 강물은 흘러도 돌은 구르지 않는다)” - 두보의 시 「팔전도」 중 그 동굴에 관한 말 중 열에 여덟은 거짓이다. 내가 사실을 알려 주겠다. 물론 내 이야기를 듣고도 이 모든 말이 거짓이라고,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헛소리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있을 테다. 어쨌든 나는 내가 보고 들은 걸 얘기하려 한다. 동굴은 2019년 7월 말, 뼈까지 침식되는 듯한 더위 속에서 장차 미술관이 될 부지를 측량하던 일꾼들이 발견한 것이다. 미술관을 ㅂ기업의 새로운 문화적 간판으로 삼고자 한 용 회장은 동굴의 소식을 듣고 긴긴 고민에 잠겼다. 고민 끝에 그가 내린 결정을 나는 어쨌거나 지지하고 싶다. 그는 자신이 사들인 광막한 땅에 난 균열의 시작점처럼 보이던 공동(空洞)을 활용키로 마음먹었다. 곧 동굴을 개조한 미술관 ‘별관’을 만든다는 소식이 ㅂ기업 산하 문화재단에 퍼졌다. 당시 문화재단의 직원들이 느낀 암담함이야 추측할 수 있을 뿐, 여기에 대해선 나도 정확히 아는 바가 없다. 별관 설립을 곁들인 공사가 시작된 2020년에는 모두가 알 전염병이 세계를 사로잡았다. 많은 사람이 열을 앓았고, 연달아 기침했으며, 멍한 얼굴로 집안에 갇혀 있었다. 한번 몸에 깃든 병증은 다른 몸들로 옮겨 다녔다. 죄지은 마음이 곳곳에 퍼졌다. 용 회장은 늘그막에 다시 한번 깨달았다. 한 시기를 주름잡을 지렛대는 개인의 의지보다는 여러 겹의 우연에서, 그리고 통제할 수 없는 흐름의 교차점에서 오는 것이었다. 회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외려 지금이야말로 별관의 공사를 진척시키기에 가장 적절한 시기일지 모른다고 여겼다. 어차피 동굴을 다듬는 작업자들은 모두 두터운 마스크를 써야 했다. 산업용 방진 마스크가 코비드 바이러스를 막기에 적절치 않다는 연구 결과 따위야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한여름의 굴속에서 마스크를 쓴 인부들이 호흡 곤란을 호소해도 용 회장은 그저 밀어붙였다. 시대의 흐름이야 어쩔 수 없어도 공사장 인부들은 그의 통제 아래 있었다. 인부들은 매일 땀 흘리고 번갈아 기침하며 동굴을 파고 들어갔다. 굴은 외부의 빛과 습기 속으로 서서히 제 얼굴을 드러냈다. 나는 4년 후에야 이 흐름에 끼어들었다. 전염병이 지나가고, 지나갔다, 는 표현과 상관없이 외상과 내상을 받은 이들이 남고, 무수한 마스크가 쓰레기 더미가 되어 우리가 모를 곳에 묻히던 시절이었다. 나는 그해의 예술지원사업에 모두 떨어졌다. 국가나 서울시, 민간이 운영하는 지원사업의 선정자 목록 중 어디에도 내 이름은 없었다. 매일 초조한 마음으로 각종 웹사이트를 들락거렸다. 뒤늦게라도 창작자를 모집하거나 후원한다는 재단 또는 기관의 공고를, 아니면 카메라를 다룰 줄만 알아도 곧장 일자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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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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