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만년필
- 작성일 2025-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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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만년필
차영은
과장이 신제품 매출 통계를 달라길래 구글 스프레드시트 링크를 팀 채팅방에 올렸다.
요약해서 뽑아 와.
과장의 답장이었다. 통계를 A4용지 한 장에 담기는 어려웠다.
어떤 항목을 숨길까요?
재량껏 해.
글자 크기를 9포인트로 줄여도 인쇄 미리보기를 누르면 표는 여전히 용지를 벗어났다. 신제품은 최근 일 년간 출시된 것으로 한정했다. 지난해 전체 합계와 월별, 월평균, 올해 들어 지난달까지 월별 매출액, 그리고 증감률 위주로 표에 모든 정보를 눌러 담았다. 내 재량은 A4용지 다섯 장 분량이었다. 과장은 첫 장만 훑어보고는 종이들을 자신의 책상 위로 툭 던졌다.
과장이 종이를 던졌어요.
인영 선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정말 답답하네. 너 이명박 때 몇 살이었니?
선배가 답장했다.
초중고 때 대통령이 이명박이에요. 취임부터 퇴임까지 다 봤죠.
난 대학 때도 대통령이 그 사람.
선배는 나보다 일 년 먼저 입사했고 다섯 살 많다. 나이 많다고 자랑이라도 하는 건가.
선배가 과장의 자리로 갔다.
링크 한 번 띄워봐 주시겠어요. 이거 깔때기 모양 누르시고.
필터를 깔때기라고 표현하는 선배의 눈높이 교육에 감탄했다.
여기 나오는 항목 중에서 보시고 싶은 거, 체크박스에 체크하시면 표가 바뀌거든요.
나도 그건 할 줄 알아요.
과장이 말했다.
과장님 애플 모니터, 거의 영화관인데요? 뭐든 잘 보이겠어요.
선배가 과장의 모니터 앞으로 머리를 들이밀자 과장은 의자를 뒤로 뺐다. 과장은 선배를 불편해하는 것 같았다. 그럴 만했다. 선배는 가족이나 연인처럼 친한 사이에나 침투할 수 있을 법한 좁은 틈을 순식간에 뚫고 들어갔으니까.
선배는 자기 자리로 돌아와서 내게 메시지를 보냈다.
과장은 네가 표를 한 장짜리로 만들어서 뽑아 가도 뭘 생략했냐고 일일이 물어볼걸? 엑셀을 못해서가 아니라 그냥 귀찮은 거지.
과장이 귀찮은 걸 싫어하는 사람일까.
나는 뭔가를 도모하려 할 때마다 과장과 마주쳤다.
작년 말 대학 선배의 소개로 경영 컨설팅 회사의 면접 제안을 받았다. 이직되면 어떡하냐는 내 말에 대학 선배는 말했다. 되고 나서 걱정해. 청약 사이트에 시세 30억짜리 아파트가 15억에 나왔을 때 친구가 물었다. 돈 없는데 당첨되면 어떡하냐고. 나도 같은 말을 했다. 오만 명이 몰려서 서버가 다운됐어. 되고 나서 걱정해.
회사 근처 카페에서 헤드헌터와 통화를 마친 뒤에야 옆 테이블에 과장이 앉아 있었음을 알아챘다. 몇 시간 뒤 내가 이직을 준비한다는 소문이 돌았고, 곧이어 헤드헌터의 전화가 왔다. 내가 새 프로젝트에 합류하게 돼 이직을 못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사실이 아니라고 항변했지만, 컨설팅 회사는 나를 꼭 뽑을 필요는 없었는지 면접도 취소했다. 그 프로젝트는 과장이 맡을 예정이었고, 지원자 모집 공고는 뜨기도 전이었다.
인영 선배와 점심으로 포케를 먹고 옥상정원에 갔다. 스프링클러가 헤드뱅잉을 했다. 물은 찔끔 나왔다. 애쓰는 모습이 가련해 보였다.
오늘은 무지개가 잘 안 보이네.
선배가 말했다.
여기서 무지개가 보여요? 한 번도 못 봤는데.
실눈 뜨고 계속 봐.
미간을 찌푸리고 스프링클러를 보던 선배가 말했다.
물줄기가 햇볕과 닿는 각도에 따라 노란빛과 연둣빛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나는 빨강에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색, 보라색까지 갖춰져야 무지개로 취급해 왔음을 깨달았다. 흐릿한 무지개를 보러 옥상에 온 건 아닐 테고. 선배가 아무 말이 없어서 나는 아무 말을 했다.
선배, 그런데 이명박은 왜?
나 이명박 때문에 감옥 갈 뻔했잖아.
학자금 대출을 갚느라 과외에 아르바이트까지 하느라 애를 먹었던 선배는 반값등록금 집회 뉴스를 보고 바로 뛰쳐나갔다고 했다. 뭐든 끝을 보는 성격 탓에 경찰과 대치하고 있는 시위대의 선봉까지 파고들었다는 것이었다.
록 페스티벌 보면 가수가 관객석으로 뛰어들고, 관객들이 가수를 막 옮겨 주잖아. 그런 식으로 다들 날 경찰 앞으로 떠밀어서, 어느 순간 경찰 앞으로 내가 딱 뱉어진 거야.
집회에서 막 짱돌 던지신 건 아니죠?
내가 물었다.
우리는 평화적이었어.
선배가 자기 스마트폰 화면을 내게 보여 주었다. 십수 년 전 어느 신문사에서 찍은 사진 기사였다.
여기 누워 있는 게 나.
얼굴이 새끼손톱보다도 작게 찍혀 있어서 알아볼 수도 없었다.
종로경찰서로 끌려갔어.
놀라셨겠어요.
경찰이 묻더라, 한대련이죠? 나는 이렇게 생각했어. 내 앞에 앉은 건 돌이고 만년필은 칼이다. 돌의 균열을 찾자. 거기에 만년필을 꽂으면 돌은 쪼개질지도 모른다. 내가 경찰한테 되물었어. 한대련이 뭐죠?
한대련이 뭐죠?
나도 인영 선배에게 되물었다.
한국대학생연합. 경찰이 눈썹을 치켜뜨더니 컴퓨터로 뭘 두들겨 보고는 내 앞주머니로 시선을 옮겼어. 만년필이 꽂혀 있었거든. 만년필을 빼서 보여 줬지. 어떤 애들은 반성문 쓰라는 요구를 받았다고 들었어. 그러면 이 좋은 만년필로 써 볼까, 반‧‧‧성‧‧‧문‧‧‧. 세 글자. 반성문 쓰라고 해서 썼는데, 잘못됐나요? 이런 상상을 하면서 앉아 있는데 훈방됐어. 이 회사 최종 면접 때도 만년필을 재킷 주머니에 넣고 있었는데 합격했고. 그때가 종종 생각나.
면접 때요?
아니, 경찰서. 한대련을 내가 몰랐겠니? 피켓 오른쪽 아래에 한국대학생연합, 이라고 죄다 쓰여 있었는데. 아니라고 해도 됐을 텐데 왜 모른다고 했을까.
며칠 뒤 인영 선배로부터 받은 건 독일제 빨간 만년필이었다. 나는 만년필을 써 본 적이 없었기에 조금 난감했다.
받아. 그건 내 토템이거든.
j.Yoon
만년필에 저 문구만 없었어도 종종 가지고 다녔을 것이다. 내 이름이 재윤이긴 했지만 무슨 아이돌 작명하듯 남의 이름을 맘대로 저렇게‧‧‧. 게다가 나는 Yun이라고 쓴다. 여권에도 로마자표기법에 따라 그렇게 썼고. oo 대신 u가 더 짧고 효율적이다.
그동안 호의라는 포장지에 싸여 알아채지 못했을 뿐, 선물에는 일정 부분 폭력성이 있는 것 같았다. 거기에 작명까지 더해졌으니, 여러모로 폭력적이었다. 물론 이런 폭력이라면 용인할 수 있었다. 만년필은 예뻤으니까. 서랍에 모셔 두고 생각날 때마다 꺼내 보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만년필을 쓸 수밖에 없었다. 만년필을 왜 안 쓰냐고 인영 선배가 자꾸 물었으니까.
처음에는 j.Yoon이 내 몸쪽을 향하도록 만년필을 쥐고 사무실에서만 쓰다가, 만년필 쓰기에 익숙해지면서 만년필을 가지고 다니게 됐다. 만년필로 글씨를 쓰면, 펜촉이 종이 표면을 서걱서걱 긁어 균열을 낸다. 잉크는 상처처럼 미세하게 벌어진 종이 틈새를 적신다. 글씨를 종이 위에 얹는 게 아니라, 물리적으로 새긴달까. 종이에 있어서는 만년필이 주도권을 쥔 느낌이어서 좋았다.
손가락에 잉크를 묻히고 다니고, 만년필 글씨가 아이스 아메리카노 컵 표면에 맺힌 물방울에 번져도 아무렇지 않을 정도로 만년필을 달고 살 때까지, j.Yoon에 관해 묻는 사람은 의외로 두 명뿐이었다. 네가 제이 윤이야?(동기) 제이, 윤, 이거 국산인가?(과장)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였더라? 과장이 같잖아 보이기 시작한 게. 과장을 그리 볼 수밖에 없는 건 조금 전에도 이런 질문을 했기 때문이다.
재윤 씨, 회사에 학교 선배 없지?
네.
공부 열심히 했네.
감사합니다.
며칠 전에는 내가 야간 경영전문대학원 모집 요강을 회사 프린터로 출력하고 프린터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어느새 프린터기 앞에 있던 과장이 내 출력물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회사 다니면서 공부까지 하게? 엄청 부지런하네.
과장의 화법은 좋게 말하면 하고 싶은 말을 포장하는 성의가 있달까? 과장이 다음 프로젝트에 직원 몇몇을 끌어와야 해서 이미지 관리에 들어간 걸지도 모르겠다. 과장이 직원들의 상향 평가 대상에 포함되면서 겸사겸사 화법을 바꿨을 수도 있고. 물론 내게는 과장의 속내가 빤히 들여다보였지만.
과장의 화법에 추가된 건 미세 공격이었다.
큰 소리로 한숨을 쉬거나, 두 번에 한 번꼴로 인사 안 받기 등등. 나는 미세 공격이 닿을라치면 남몰래 훅, 하고 분다. 불면 휘발된다. 유효타는 많지 않다. 괜찮다. 과장의 직위와 권한만 존중하자. 과장 자리에 앉은 건 허여멀건 돌이다. 아쉬운 건 하나다. 돌이면 알록달록, 예쁘기라도 하든가.
최근 동기의 말도 묘했다. 네가 욕심이 그렇게 많아? 누가 그래? 내 물음에 동기는 답했다. 과장님이. 하루하루 살기 바쁜데 욕심낼 일이 뭐가 있겠냐고, 나는 답했다.
나는 어떤 것을 시도했고, 일말의 가능성에 다가간 적은 있으나 그 어떤 성취도 이루지 못했으며 과장이 그것을 목격했다. 그게 어떻게 욕심인가.
외근을 나갔다가 돌아온 인영 선배에게 나는 회의 때 있었던 일을 카톡으로 전했다.
회의가 끝나기 전, 과장이 나를 호명해선 재미있는 얘기를 해 보라고 했다. 여섯 살 조카에게 책을 한참 읽어 주는데 조카가 책을 덮고는 말했다. 이모, 저는 공부 쪽은 아닌 것 같아요. 과장만 빼고 다 웃었다. 내가 자기 조카를 어떻게 알아요? 회사 관련 소재 없어요? 과장이 말했다. 나는 신입사원 연수원에서 조교가 연수생들의 주류 반입을 적발하려고 숙소 서랍을 뒤져서 싸웠던 일을 이야기했다. 조교는 알바라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며 사과했다. 나는 그 말에 더 따지지 못했다는, 그다지 재미없는 이야기를 했다. 내가 이야기를 마치자 과장은 올해 자기 사주가 대체로 좋다고 자랑했는데 그거야말로 개인적인 이야기 같았다.
회사 윗사람 욕해 보라는 건데 미쳤다고 그걸 하겠어요? 저도 머리를 썼죠. 공소시효 지난 얘기만 했어요.
너, 지금 되게 꼰대 같은 거 알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인영 선배가 나보고 꼰대라고 하다니. 살짝 기분이 상했지만 부인할 수 없었다. 누구의 심기도 거스르지 않는 무해한 이야기를 하려고 노력하는 것. 그리하여 무난하다거나 합리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 꼰대들이 회사에서 살아남은 방식일지도 몰랐다. 인영 선배가 틀린 말은 안 한다.
선배의 말은 만년필로 쓴 글씨 같아서 좋다.
말이 또렷하다. 글씨를 종이 표면에 걸치는 게 아니라, 글씨가 종이를 잠식한다. 종이 뒷면에서도 글씨를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숨김이 없다. 그래서인지 나는 선배가 내뱉는 말에 집중했고, 살색 립크레용을 바르던 선배의 아랫입술이 유독 새빨개진 걸 보고도 취향이 바뀌었나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회사 로비 카페에 마주 앉아 선배가 하품하는 모습을 본 뒤에야, 선배의 혀가 색소 사탕을 먹은 듯 새빨개진 것을 알아챘다.
선배, 혓바닥이‧‧‧.
아, 만년필이 잘 안 나와서.
잉크가 빨강이에요?
잉크는 빨강이지.
빨간색은 무언가를 강조하거나 채점할 때나 쓴다고 여겼기에 빨간 잉크를 사서 만년필을 쓰는 건 사치 같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인영 선배가 덧붙였다.
이달의 목표 같은 걸 써서 책상 앞 창가에 붙여 놓고 한참 지났는데 까만 글씨는 그대로였고 빨간 글씨는 흐려졌어. 나중에 보니까 빨간 글씨로 쓴 목표만 이뤄진 거야.
무슨 목표였는데요?
책 열 권 읽기, 언제까지 시험공부 해 놓기, 이런 거?
선배가 모범생이었다는 시답잖은 농담으로 들렸다.
진짜야. 일기에는 빨간 글씨로 피아노가 없어서 슬프다, 컴퓨터가 느려서 힘들다고 썼더니 엄마가 컴퓨터를 사 주더라.
피아노는요?
엄마가 피아노 학원에 보내줬어. 피아노를 더 빨갛게 쓸걸.
인영 선배는 그 말을 하고는 혼자 킬킬거렸다.
빨간 글씨에 담긴 진심은 구부정하게 있다가 남몰래 허리를 펴는 거야. 일어나고, 떠오르고, 마침내 하늘에 계신 높은 분에게 가닿으면 색이 흐려지는 거지. 그래서 일기도 전부 빨간펜으로 썼어. 일기장은 항상 창가에 펼쳐 뒀지. 결국 내가 쓰는 건 일기가 아니라 기도문이 됐지만.
선배가 일기장을 보란 듯이 펼쳐 놨으니, 당연히 선배 어머니가 일기를 다 읽었을 것 같았다. 선배는 그것도 모르나? 물론 나는 선배에게 그 말을 하지 않았다. 해바라기하는 일기 혹은 기도문, 나도 써 보고 싶어졌으니까.
빨간색으로 이름 쓰면 죽는다잖아요.
일기에 내 이름 제일 많이 썼는데, 안 죽고 이렇게 살아 있잖아.
선배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빨대로 휘젓다가 입에 얼음을 털어 넣고는 씹었다. 입에서 달그락달그락 소리가 잦아들자
나 요새 남편 때려.
선배가 말했다.
남편이 광고대행사 다니거든. 출장 간다더니 외주 영상 제작업체 직원하고 자고 온 걸 알게 됐어. 카톡에 오빠, 라고 온 걸 열어 봤거든. 모르는 여자라고 발뺌해서, 내가 어디까지 봤는지 다 얘기해야 했지. 남편이 화가 풀릴 때까지 자길 때려 달래. 내가 발로 세게 차려고 하니까 피하더라. 나만 허리를 삐끗했어.
선배가 남편을 봐주기로 한 것 같아서 말을 보태지 않았다.
그 후로 선배는 남편을 종종 이렇게 불렀다.
나의 샌드백.
샌드백은 손에 감기는 맛으로 때려야 하는데.
선배가 섀도복싱을 했다. 원투 펀치에 힘이 하나도 없어서 체조처럼 보였다.
그냥 이혼하세요. 증거도 다 있는데.
그새 인영 선배의 가정에는 어떤 질서가 자리 잡은 것만 같았다. 선배의 남편은 죄를 짓는다. 폭력을 주문한다. 다시 죄를 짓는다. 폭력을 재주문한다.
선배는 한동안 침묵하더니 스마트폰 속 사진을 내밀며 말했다.
이제는 내 살이 닿는 것도 싫대.
사진 속은 온통 붉고 검었다. 어딘지 모르게 냉기가 도는 붉음이었다. 별이 그렇다고 들었다. 별은 뜨거울수록 파랗고, 차가울수록 붉다. 차게 식은 붉은 별 주변에 거뭇한 성운이 둘러싸인 형상. 선배가 남편의 팔뚝과 허벅지 위에 만들어 낸 것이었다.
그 뒤로도 인영 선배는 사진을 종종 보내왔다. 선배 손에 붉은 잉크가 범벅이 된 사진. 바닥에 떨어진 쨍한 빨강의 잉크 방울들. 농협 이름이 새겨진 빨간 노끈으로 묶인 남편의 두 손.
내가 완전히 미쳤다고, 나 같은 건 차라리 죽어 버리는 게 낫겠대. 맘 놓고 바람피우겠다는 거지. 누구 좋으라고.
메시지에서 선배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들려오는 듯했다. 그 말을 하면서 고개를 빳빳하게 세웠을 선배의 모습도 그려졌다.
내가 죽는 게 맞는 걸까?
불과 몇 분 뒤에 온 메시지에선 선배의 고개가 이미 수그러졌고 목소리도 기어들어 간, 선배답지 않은 느낌이 났다.
금요일 밤의 메시지 이후로 선배의 연락은 없었다. 월요일이 돌아왔지만 선배는 출근하지 않았다.
반나절쯤 지나서 과장이 공지했다. 인영 선배가 많이 다쳐서 당분간 못 나온다고. 과장은 말을 마치면서 덧붙였다.
왜 인영 씨 외삼촌이 회사에 전화했지? 인영 씨 기혼 아냐?
회사 앞 신축 빌라 아시죠? 인영 씨도 거기 살잖아요.
대리가 말했다.
누가 계단을 내려가다가 실족해서 크게 다쳤단 얘길 들었는데. 경찰차도 봤고요. 설마 그게 인영 씨려나?
나는 대리의 말을 듣자마자 선배에게 괜찮냐고 메시지를 보냈다. 전화는 받지 않았다.
회의에 가서도 스마트폰을 계속 들여다보았다. 메시지를 확인했다는 표시라도 확인하고 싶었다.
정말 답답하네.
인영 선배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회의는 답답했다.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회의는 다소 답답함에서 답답함, 매우 답답함‧‧‧ 정도의 차이만 있었으니까. 선배의 답장을 기다리며 이번 회의는 매우 답답함이구나, 생각했다.
사실 오전에 과장이 나를 옥상정원으로 불러낸 뒤로, 나는 과장을 좋게 봐야 하나 고민하던 참이었다. 과장은 아까 옥상에서 이런 걸 물었다.
재윤 씨, 회사 생활은 할 만해?
열심히 하려고 하지만 제가 부족한 점이 많죠.
과장이 맘만 먹으면 뭐든 꼬투리를 잡을 수 있을 테니 부족한 점이 많다고 선수 치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과장은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물었다.
저 꽃 이쁘다. 이름 알아?
아뇨. 회사에 있는 꽃은 왠지 이름을 알아보려는 노력도 안 하게 되더라고요. 비품처럼 느껴진달까요.
옥상으로 호출된 게 신경 쓰여서 분위기라도 좋게 하려는 강박이 들었고, 결국 쓸데없는 말을 해 버렸다.
스프링클러는 그새 수리되어 있었다. 물은 체에 거른 듯 작은 입자로 흩뿌려졌고, 바닥에 떨어질 새도 없이 공중에서 서서히 증발하고 있었다.
무지개다.
과장이 말했다. 무지개는 인영 선배와 봤던 것보다 훨씬 뚜렷했지만, 답하지 않았다. 이야기 서두가 길어질수록 불안해져서 빨리 본론으로 가기를 원했다.
저기 좀 진득하게 봐 봐. 무지개 안 보여?
보여요.
우리 일이 뭐야, 잘 파는 거잖아?
그렇죠.
지갑을 여는 게 뭐야?
수요, 구매 욕구 아닐까요.
남이 원하는 걸 잘 봐야 해. 남이 원하는 걸 내가 원하는 걸로 착각하는 게 뭐냐, 유사 욕망. 그걸 만드는 게 우리 일이니까.
과장의 말을 나는 이렇게 이해했다.
내가 원하는 걸 잘 봐라. 나를 욕망해라.
과장이 은연중에 자기 욕망을 내비친 것 같았다. 나는 과장처럼 되고 싶지는 않지만, 과장의 솔직한 면은 그나마 좋게 보였다. 나는 솔직한 사람에게는 관대해진다. 자기 욕망에 솔직한 사람은 귀하고, 솔직함으로써 취약성을 드러내기도 하니까.
과장이 스프링클러 쪽으로 다가갔다.
앗, 차가워.
스프링클러가 또 헤드뱅잉을 시작했다.
물줄기가 과장의 셔츠에 튀었고, 나는 웃었다.
너무 좋아하는 거 아냐?
과장이 내 팔을 잡아끌었다. 내 상의도 살짝 젖었다. 과장이 잠깐 쥐었던 내 오른쪽 팔이 욱신거렸다. 이렇게까지 잡아끌 일인가. 과장이 더 젖었으니 뭐라 항의하기는 애매했다.
과장이 회의를 진행하는 걸 보니, 과장을 좋게 보려던 내 생각은 짧았던 것 같았다. 과장이 뭘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과장은 원하는 바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회의를 진행해야 한다. 직원들은 과장의 의중을 맞춰야 하는 점쟁이가 아니다. 이런 와중에 여전히 인영 선배의 연락은 없었다.
회의실 테이블 상석에 앉은 과장의 셔츠 소매를 힐끗 보았다. 그새 물이 마른 듯 아무 자국도 없었다.
잘 들어 봤고요, 그러면 이제‧‧‧.
이제, 라면 방금 몇 초 전에 했던 이야기는 뭐가 되나? 기각되는 건가? 과장, 당신은 사회자인가, 중재자인가. 다들 의견을 냈으니 그걸 평가라도 해라.
의견 냈다고 안심하지 마세요. 여러분 딴짓하는지 아닌지 다 보고 있어요.
과장은 내 속마음이라도 읽은 듯 덧붙였다.
면피성 의견은 취급 안 합니다.
팀원들의 의견을 면피성이라고 퉁 치는 건 너무 게으르지 않나. 우리 부서 실적이 작년보다 20% 떨어졌다는 건 다들 안다. 그래서 되든 안 되든 이런저런 대안을 내놓고 있는데 과장은 대안도 안 내놓았으면서. 다 보고 있다는 건 또 뭔가. 협박조로 들렸다. 내가 어떤 선택지를 기웃거렸을 때마다 공교롭게 과장과 마주친 것으로만 알았는데, 어쩌면 과장은 나를 지켜보고 있던 걸까.
이제, 다 된 걸까요?
과장 너는 월급을 더 받을 뿐 결국 같은 직장인이면서, 왜 외주업체 사장 노릇을 하냐, 이 돌멩아. 짱돌도 못 되는 주제에. 돌도 과분하다. 돌을 호수에 던지면 파문이라도 일으킨다. 과장은 파문을 좇을 뿐이다. 도무지 중심이 없다. 인영 선배는 중심이 있다. 발치에 돌이 있다고 그 길을 피할 순 없다. 발로 차거나 밟고 가면 그뿐. 돌을 모퉁이 대하듯 하면 그 어디에도 도착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만년필로 보고서 귀퉁이에 낙서했다. 펜촉 끝에 힘을 주었다. 잉크가 퍼진다. 표지, 첫 번째 장, 두 번째 장‧‧‧. 종이가 젖는다. 종이가 뚫렸을 때 과장이 말했다.
오늘도 아주 좋았고‧‧‧.
인영 선배는 여전히 연락이 없었다.
오늘이야말로 아주 좆같았다. 오늘은 더욱 그랬다.
이제, 그러면‧‧‧.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이제, 그만 좀!
오른손에서 빨간 무언가가 쭈욱, 곧게 빠져나간다. 케첩 튜브를 쭉 짠 것처럼. 나는 그 궤적을 본다. 궤적은 붉은 별들처럼 공중에 흩어진다. 붉은 별들은 낙하하면서, 비행운처럼 낙하 경로를 남긴다. 별들이 과장의 뺨을 타고 붉게 흐른다. 과장의 하얀 셔츠 위로 붉은 별들이 별 무리를 이룬다.
돌이 예뻐졌다.
재윤 씨!
몇몇이 내 이름을 불렀다.
과장은 손등을 얼굴에 조심스레 갖다 댄 뒤, 다시 손등을 들여다보았다. 과장의 얼굴은 이미 별 무리에 뒤덮인 듯 붉게 상기되었다. 과장의 눈과 코끝도 잉크처럼 빨개졌다.
이게 왜 이러지?
만년필에서 새어 나온 잉크가 손바닥을 빨갛게 적셨고, 바닥으로 잉크가 뚝뚝 떨어졌다. 사람들이 나를 보며 일제히 인상을 찌푸렸고 손으로 입을 막았다. 왜 막지? 잉크는 냄새도 안 나는데.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또 다른 누군가는 나와 과장, 잉크가 떨어진 바닥을 한 컷씩 사진 찍다가 플래시를 터뜨렸다. 그는 잘못 눌렀네, 라는 말을 남기고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어느새 회의실에는 나와 과장과 대리만 남았다.
과장은 옷에 생긴 붉은 자국을 검지로 살짝 찍은 뒤 검지를 확인해 보았다. 그러고는 과장의 시선이 내 오른손에 쥐어진 만년필에 닿았다. j.Yoon이 선명하게 보였다. 만년필이 내 이름을 부르며 호통을 치는 듯했다.
그만해요, 재윤 씨.
대리가 말했다.
내가 뭘 했다고. 잉크가 샜을 뿐인데. 나는 같은 옷으로 새로 사 드리겠다는 말과 함께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회의실을 나왔다.
그런데 같은 옷이 있을까? 세상에 하나뿐인 옷이 되었는데.
사무실에 돌아왔다. 과장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컴퓨터를 켜서 카톡을 열어 보았더니 동료들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몇 달 동안 연락하지 않았던 옆 팀 직원이 내 사진을 보내고는 물었다.
이거 혹시 피 칠갑?
그럼 저는 경찰서에 있어야겠죠?
책상 위의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전화를 받으려던 찰나 진동이 끊겼다. 부재중전화 1통. 과장이었다. 과장이 통화 버튼을 잘못 눌렀나. 잠시 뒤 과장이 줄줄이 메시지를 보냈다.
다 지워졌어.
과장이 셔츠 사진과 함께 메시지를 보냈다. 셔츠에 잉크 얼룩은 없었지만, 셔츠가 묘하게 살굿빛을 띠는 것처럼 보였다.
난 괜찮으니까 새 옷 사 주면 절대 안 돼. 이 셔츠, 기념으로 더 자주 입고 다녀야지.
기념이요?
사주에 상반기 망신살이 있대. 이렇게 직관적인 망신이 어디 있어? 망신살 다 끝났고, 좋은 일만 남은 거야.
세탁비라도 드릴게요.
안 돼. 망신살을 내가 물리친 걸로 해야, 개운(開運)이 된다고.
네? 그렇게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지만‧‧‧.
말줄임표를 안 좋아하지만 달리 쓸 말이 없었다. 과장이 가끔 사주 이야기를 하긴 했다. 망신이 필연적이라 여겼던 과장에게 잉크 사건이 작지만 확실한 망신이 된 모양이었다. 과장은 얼룩을 지우고, 나를 용서하면서 망신을 극복하고 있는데 왜 내 무릎에서 힘이 빠지는 느낌이 드는 걸까. 어쩌면 나는 과장이 돌이라고 자신을 속여왔을지도 모르겠다. 돌은 못 쪼갤 것 같으니까, 모래알 따위를 돌이라고 우기면서.
잉크 사건은 내가 헤드헌터의 전화를 받았을 때보다 더 빠르게 퍼져 나간 듯했다.
사과라도 하지 그랬어?
동기의 메시지였다.
내가 사과를 안 했나? 나를 방어하기 위해서라도 조건반사처럼 튀어나오는 게 사과였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거 피 아니고, 잉크야. 잉크가 샜어.
내가 답했다.
잉크가 빨강이야?
잉크는 빨강이지.
그래서 그런가? 너, 사진에 무섭게 나왔더라.
동기는 그 말과 함께 따봉 이모티콘을 덧붙였다.
잉크가 떨어진 것이 폭력일까.
인영 선배는 남편의 허벅지와 팔뚝 곳곳에 잉크로 점을 새겼다. 점들은 꽃의 암술과 수술처럼 보였다. 점을 중심으로 멍은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들처럼 색색이 퍼져 나갔다.
잉크를 새긴 것이 폭력일까.
나는 선배와의 채팅창을 쭉 올려서 사진들을 살펴보았다. 이걸 들고 경찰서에 갈지, 아니면 선배의 외삼촌께 연락해 볼지 고민했다. 사진 속에 빨간 건, 다 잉크거든요? 이 말을 누가 믿어 줄까.
퇴근길 가까운 변호사 사무실을 검색해 찾아갔다.
형부는 가정폭력이 아니고 언니와 실랑이하다가 벌어진 해프닝이라 주장하겠죠? 폭행 혐의가 적용될 수 있지만, 반의사불벌죄라 합의 가능해요. 합의금은 어느 정도를 원하세요?
아뇨. 그 사람이 언니를 죽이려고 한 것 같아요.
고의가 입증되면 살인미수겠고요.
그건 알고요. 여기 보시면 그 사람이 언니한테 죽으라고‧‧‧.
선배가 남편과 주고받은 메시지를 캡처해 보내준 것들이 있었다. 미친 짓 좀 그만해라. 차라리 자살해라. 오늘은 안 죽었니. 내일은 꼭 부탁해. 선배 남편의 말들이었다. 선배 남편은 자기 몸 사진도 보냈다. 허벅지와 종아리, 그리고 한쪽 어깨와 팔뚝 곳곳이 붉은 점과 검붉은 피멍으로 뒤덮인 모습들이었다.
변호사는 메시지보다 사진에 눈길을 두었다.
누가 이런 거죠?
그 사람이 바람피우다 걸리니까 언니한테 때려 달래서, 언니는 시키는 대로 한 거고요.
형부가 언니를 죽이려는 것처럼 보이는 영상이 필요해요.
죽이려는 것처럼요?
네, 중요해요. 언니가 형부를 죽이려는 것처럼 보이는 영상도 어디 있겠죠? 사진이 영 그렇습니다. 요새는 금실 좋은 부부도 이런 짓 많이 해요. 더 궁금한 거 있으세요?
그 사람이 언니보고 죽으라는데, 자살 교사는 중죄 아닌가요?
언니가 돌아가시진 않았으니 미수범이겠죠. 원래 덜 다친 쪽이 더 빨리 움직입니다. 동생분도 얼른 움직이셔야죠. 그런데 형부를 감옥에 보내는 거, 언니도 동의하시죠?
그게 동의가 필요한 일인지 의문이었다. 잘못하면 감옥에 가야 하는 거 아닌가.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변호사는 이 사건을 단순 폭행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피해자의 합의를 예상한다는 것을.
그 사람은 내 형부가 아니라는 말을 하려던 것도 잊은 채 상담 시간이 십 분이나 더 남았는데도 자리를 떴다. 상담료 십이만 원이 아까워서 네이버에 영수증 리뷰를 남겼다.
‘★☆☆☆☆ 전문성 없음. 국선변호사나 나홀로소송 추천’
집에 와서 씻지도 않고 누워 있다 보니 메시지가 왔다.
척추마취 풀려서 죽다 살아났네.
선배는 오른쪽 발목뼈 일부가 조각나는 바람에 접합 수술을 받았다고 했다. 하반신 전체를 마취하는 척추마취는 효과가 여섯 시간 정도만 지속돼서, 통증이 수술 다음 날까지 이어진 거였다.
인영 선배의 두 눈가에는 눈물인지 진물 자국인지 알 수 없는 누런 딱지가 앉았다. 피부는 말갛고 보송보송해 보였다. 아주 달게 잔 것 같기도 했다. 찢어진 입가와 조금 부은 얼굴만이 간밤의 피로를 짐작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선배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남편과 싸우다가 다쳤다고 했다.
제가 변호사 상담 받았는데, 결국 증거 싸움인 것 같아요. 저쪽에선 실수였다고, 합의하자면서 선배를 괴롭힐 것 같은데.
으응.
선배는 앓는 소리 비슷하게 답했다. 말하기 어려운 듯했다. 나는 선배의 얼굴에 귀를 바싹 갖다 댔다. 선배가 목에 두른 손수건 아래 피멍이 들어 있는 걸 뒤늦게 발견했다.
일단 그 사람부터 감옥에 넣어야겠어요. 외삼촌께 변호사 상담한 내용을 말씀드릴까요?
나는 인영 선배에게 만년필과 수첩을 건넸다. 창가의 커튼 사이로 들어온 햇볕이 하얀 수첩 위로 밑줄처럼 가느다랗게 일렁였다. 선배가 만년필을 쥐었다.
―괜차나 외삼촌 다알아서
선배는 한참 걸려서 열 글자를 쓰고는 그새 피곤해졌는지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등을 돌리고 누웠다.
답답했다.
아니다. 선배는 환자다. 선배가 만년필을 들 필요가 없도록 알맞은 말들을 유동식으로 만들어서 내놨어야 했다.
나는 얕게 오르락내리락하는 선배의 어깨를 바라보았다. 선배의 어깨가 비쩍 마르긴 했지만 생각보다 넓었다. 물론 어깨가 넓다고 방어를 잘하는 건 아닐 터였다. 선배의 남편은 선배를 더 잘 때리려고 선배의 어깨를 꽉 잡아 고정했을지도 모른다. 붙잡기 좋은 어깨로 보였다.
제가 과장한테 빨간 잉크를 묻혔어요.
선배는 쌕쌕 숨소리를 냈다.
선배 입원 소식 듣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이 뭔지 아세요?
쌕쌕 소리가 들렸다.
선배가 가해자였으면 좋겠다.
쌕쌕 소리가 들렸다.
저는 앞으로 공소시효가 남은 이야기만 할 거예요.
쌕쌕 소리가 끊겼다.
인영 선배가 베개에서 머리를 살짝 들어 올리고는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선배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고 눈가에는 물기가 어려 있었다.
선배는 보호자 침대와 링거 쪽으로 몸을 바짝 붙여서 공간을 만들고는 링거 바늘을 끼지 않은 손으로 매트를 톡, 하고 가볍게 두드렸다. 햇볕이 닿는 창가 쪽 공간이었다.
나는 링거줄을 피해서 침대 모서리를 돌아 병상 한구석에 누웠다. 선배의 어깨와 닿지 않도록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공간을 남겨 두었고, 침대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몸에 힘을 주었다.
선배가 병상 위에서 다리를 구부린 만큼 나도 구부렸다. 이불도 선배가 덮고 남은 자리로 몸만 쏙 집어넣어 덮었다. 언뜻 보면 한 사람이 누워 있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이불의 무게에 햇볕까지 더해져서인지 눈꺼풀이 자꾸 감겼다. 눈을 크게 떠 보았다.
이제는 책 한 권의 두께만큼 두꺼워진 햇볕이 이불 위로 들어와 있었다. 선배는 흔들리는 햇볕을 눈으로 좇는 듯 눈을 찌푸렸다가 뜨기를 반복했다. 선배의 눈가에 있던 물기는 어느새 말랐고, 눈의 충혈기도 사라졌다.
선배는 누워서 몇 개의 기도문을 썼을지 궁금했다. 글씨를 쓰기 힘드니까 선배의 마음속에 비밀로 해 두었겠지만 말이다. 나에게도 불온한 비밀 하나가 있다. 나는 선배가 연륜이 있지만 사회가 원하는 가치는 갖추지 못한, 조금은 늦된 사람이라고 여겨 왔다는 것이다. 선배가 경찰서에서 있었던 일을 종종 생각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보다 오 년 먼저 태어난 집단에서는 저런 낭만이 유행이라도 했던 걸까. 길바닥에 누운 사람들을 다 알지 못하니까, 집회의 주최 측을 모른다는 진술을 할 수도 있지 않나‧‧‧. 그런데 어쩐지 선배와 함께 누워 있으니까 이것만은 알 것 같았다.
혼자였다면 눕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선배는 경찰 앞에서 그 사실을 모르는 척했다는 게 마음에 걸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함께 누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선배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말했다.
이제 어떻게 하죠?
나는 뭔가를 우당탕한 것 같았지만 찬찬히 되짚어 보면 내가 한 거라고는 강도 높은 호들갑에 지나지 않았다. 내 멋대로 주인공의 친구 역할을 자처했지만, 시켜 보니 별다른 기능이 없어 극에서 배제된 친구 4, 또는 친구 5의 역할에 불과했던 건 아닐까. 그런 생각에 조금 쓸쓸해하고 있는 와중에도 길쭉하게 조각난 햇볕과 선배의 숨소리가 병실을 채웠다.
그 사람이 선배를 때리고 밀쳐서 다리 다치신 거죠? 제가 관리사무소로 가서 CCTV를 보여 달라고 할게요.
선배가 협탁 위의 수첩과 만년필 쪽으로 팔을 뻗자 나는 얼른 선배 손에 그것들을 쥐여 주었다.
―걔 중환자실 굴러서
그 사람이 중환자실까지 굴러서 갔다는 건 아니죠?
실없는 농담이었지만, 그게 맞기를 바랐다. 굴러서, 가 중환자실에 간 이유가 된다면 복잡한 문제가 될 것이다.
남편이 중환자실에 있어요?
선배가 헛기침했다.
정말 답답하네.
선배가 말했다.
간호사가 말하지 말아야 빨리 낫는다고 했는데.
그러면 외삼촌께 물어볼까요? 제가 도울게요.
외삼촌도 나보고 말 아끼라고 했는데.
선배의 목소리에는 감기 기운이 섞여 있었지만, 어느새 평소 목소리 크기에 조금 가까워진 듯했다.
걔가 내 목을 조르면서 베란다 난간까지 나를 밀었어.
선배는 빌라 오 층 베란다 난간에 등이 닿았던 순간 남편의 신체에서 빈틈을, 균열을 찾아보았다. 남편이 선배를 비웃을 때 보이는 벌어진 앞니, 그 아래 겨드랑이, 가랑이‧‧‧. 가랑이를 찼지만 조금 빗나갔다. 선배는 이내 또 밀쳐졌다. 바닥에 쓰러진 순간 남편의 주먹이 날아오는 것을 보았다. 누우면 주먹세례를 받다가 죽을 것 같아서 힘겹게 일어났다고 선배는 말했다. 선배는 가까스로 집 밖으로 뛰쳐나가 112를 눌렀지만 경찰과 통화는 못 했다. 남편이 뒤에서 휘두른 발길질을 피하다가 또 쓰러진 거였다.
난 세 번 밀렸고, 세 번 다 일어섰어.
선배가 말했다.
그리고, 내가 한 번 밀었어.
어디서요?
빌라에서. 계단으로 굴렀어, 걔가.
다행이었다. 선배가 밀기라도 해서. 선배가 살아 있는 것이 중요했다. 두 사람 모두 미는 행위를 했더라도, 오 층 베란다 난간과 빌라 계단은 다르다. 난간 밖은 허공이다. 계단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이동 경로이다. 예상되는 부상 정도도 다르지 않나.
선배가 민 걸 누가 봤어요?
옆집은 사람이 없었고, 아랫집 아줌마가 올라왔더라고. 아줌마가 119에 신고했는데 경찰도 왔더라고. 감옥 갈까, 나?
선배의 말을 들을수록 선배는 도통 말을 포장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선배가 밀었다, 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는 게 못마땅했다.
선배는 남편을 잡아 주려다가 발목을 접질린 거 아녜요?
그런가? 그런가 봐. 계단에서 다리를 삐끗했던 것 같아.
선배가 이불을 슬쩍 들어 올려서 깁스한 발목이 드러나게 했다. 이렇게 선배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선배가 중환자실이 아닌 일반실에 입원 중이기에 가능했다. 선배가 일반실에 입원 중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레 다가왔다. 원래 덜 다친 쪽이 더 빨리 움직인다던 변호사의 말이 떠올랐다. 별점 한 개는 너무 야박했던 것 같다.
선배가 내 팔을 잡고 물었다.
누가 그랬어?
팔에 멍이 있었다.
이게 뭐지?
이런 게 있는 줄도 몰랐어? 정신 똑바로 차려.
선배가 내 팔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과장이 나를 스프링클러 앞으로 밀어낼 때 팔을 붙잡았던 것을 이제야 떠올렸다.
괜찮아요, 금방 흐려지겠죠.
선배는 내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병실을 흘깃 보았다. 병상과 보호자 침대와 링거와 토마토 주스까지, 병실에 있는 모든 것들은 각자의 역할이 있었고, 각자 그 역할을 의젓하게 수행하고 있었다. 나도 역할을 찾아야 할 것이다.
선배, 만년필 좀 주시겠어요?
j.Yoon이 보였다.
이제는 만년필이 온전한 내 것이 되어 가고 있다고 느낀다.
‘빨간 글씨에 담긴 진심은 구부정하게 있다가 남몰래 허리를 펴는 거야. 일어나고, 떠오르고, 마침내 하늘에 계신 높은 분에게 가닿으면 색이 흐려지는 거지.’
나는 빨간 글씨처럼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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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 2025-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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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 2025-11-01
굴은 구르지 않는 돌 함윤이 함윤이의 소설 「굴은 구르지 않는 돌」을 위한 사운드트랙 ⓒ 이해인 “음악과 함께 읽어주세요”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 - 영어 속담 “강류석부전(江流石不轉, 강물은 흘러도 돌은 구르지 않는다)” - 두보의 시 「팔전도」 중 그 동굴에 관한 말 중 열에 여덟은 거짓이다. 내가 사실을 알려 주겠다. 물론 내 이야기를 듣고도 이 모든 말이 거짓이라고,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헛소리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있을 테다. 어쨌든 나는 내가 보고 들은 걸 얘기하려 한다. 동굴은 2019년 7월 말, 뼈까지 침식되는 듯한 더위 속에서 장차 미술관이 될 부지를 측량하던 일꾼들이 발견한 것이다. 미술관을 ㅂ기업의 새로운 문화적 간판으로 삼고자 한 용 회장은 동굴의 소식을 듣고 긴긴 고민에 잠겼다. 고민 끝에 그가 내린 결정을 나는 어쨌거나 지지하고 싶다. 그는 자신이 사들인 광막한 땅에 난 균열의 시작점처럼 보이던 공동(空洞)을 활용키로 마음먹었다. 곧 동굴을 개조한 미술관 ‘별관’을 만든다는 소식이 ㅂ기업 산하 문화재단에 퍼졌다. 당시 문화재단의 직원들이 느낀 암담함이야 추측할 수 있을 뿐, 여기에 대해선 나도 정확히 아는 바가 없다. 별관 설립을 곁들인 공사가 시작된 2020년에는 모두가 알 전염병이 세계를 사로잡았다. 많은 사람이 열을 앓았고, 연달아 기침했으며, 멍한 얼굴로 집안에 갇혀 있었다. 한번 몸에 깃든 병증은 다른 몸들로 옮겨 다녔다. 죄지은 마음이 곳곳에 퍼졌다. 용 회장은 늘그막에 다시 한번 깨달았다. 한 시기를 주름잡을 지렛대는 개인의 의지보다는 여러 겹의 우연에서, 그리고 통제할 수 없는 흐름의 교차점에서 오는 것이었다. 회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외려 지금이야말로 별관의 공사를 진척시키기에 가장 적절한 시기일지 모른다고 여겼다. 어차피 동굴을 다듬는 작업자들은 모두 두터운 마스크를 써야 했다. 산업용 방진 마스크가 코비드 바이러스를 막기에 적절치 않다는 연구 결과 따위야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한여름의 굴속에서 마스크를 쓴 인부들이 호흡 곤란을 호소해도 용 회장은 그저 밀어붙였다. 시대의 흐름이야 어쩔 수 없어도 공사장 인부들은 그의 통제 아래 있었다. 인부들은 매일 땀 흘리고 번갈아 기침하며 동굴을 파고 들어갔다. 굴은 외부의 빛과 습기 속으로 서서히 제 얼굴을 드러냈다. 나는 4년 후에야 이 흐름에 끼어들었다. 전염병이 지나가고, 지나갔다, 는 표현과 상관없이 외상과 내상을 받은 이들이 남고, 무수한 마스크가 쓰레기 더미가 되어 우리가 모를 곳에 묻히던 시절이었다. 나는 그해의 예술지원사업에 모두 떨어졌다. 국가나 서울시, 민간이 운영하는 지원사업의 선정자 목록 중 어디에도 내 이름은 없었다. 매일 초조한 마음으로 각종 웹사이트를 들락거렸다. 뒤늦게라도 창작자를 모집하거나 후원한다는 재단 또는 기관의 공고를, 아니면 카메라를 다룰 줄만 알아도 곧장 일자리를
- 관리자
- 2025-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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