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 사는 개
- 작성일 2026-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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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 사는 개
이종산
섬에는 버려진 개들이 많다. 휴가철에는 그런 개들이 특히 많이 늘어난다고 한다. 하지만 이 섬은 일 년 내내 여행객들이 찾아오는 곳이기 때문에 계절과 상관없이 사람들이 자신이 키우던 개를 버리고 간다. 개나 고양이, 혹은 사람이 버려질 수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리고 개나 고양이를 버리는 것은 자신이 키우던 아이를 버리는 것만큼이나 비도덕적이고 파렴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섬에는 버려진 개들이 많은 만큼 동네를 떠돌아다니는 개의 주인을 찾는 글도 동네 커뮤니티에 자주 올라온다. 이 섬에는 걷기 좋은 길이 많고, 그런 길을 걷다 보면 목줄 없이 돌아다니는 개를 만나게 될 때가 종종 있다. 항상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길에서 그런 개를 마주치면 나는 매번 아주 당황한다. 나는 개를 무서워한다. 주인이 있는 개는 괜찮지만, 목줄 없이 혼자 돌아다니는 개는 무섭다. 그 개가 어떤 성격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나에게 개는 미지의 존재다. 이빨이 달리고, 나보다 훨씬 빠르게 달릴 수 있는, 야생성이 남아 있는 동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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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월요일에 나는 새로운 산책길을 걸었다. 내가 지내는 집에서 동쪽으로 조금 더 내려가면 아주 맛있는 브런치 식당이 있는데, 그 집이 몇 달이나 문을 닫았다가 이번에 다시 장사를 시작했다. 주인은 바뀌었지만 메뉴는 그대로라고 했다. 나름대로 애정이 있던 식당이라 꼭 다시 가 보고 싶었다. 맛이 그대로일지 어떨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나는 버스를 타고 그곳에 갔다. 그곳은 버스로 십 분이 조금 넘게 걸렸다. 버스를 타고 가면 아주 가깝지만, 걸으면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였다. 브런치 식당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실망스러웠다. 식당이 올린 공지에서 봤던 대로 메뉴는 그대로였지만, 분위기도 맛도 달랐다. 사진으로 보기에는 같은 메뉴 같았는데 직접 먹어 보니 원래 팔던 음식이 아니었다.
내가 그 브런치 식당의 음식을 좋아했던 이유는 맛이 과하지 않고 신선해서였다. 그러나 주인이 바뀐 그 식당의 음식은 다른 평범한 식당들에서 파는 음식과 비슷한 맛이 났다. 특히 소스가 너무 많고 기름졌다. 전반적으로 짠맛이 강해져서 신선하고 산뜻한 느낌이 사라져 버렸다. 나는 이전에 팔던 메뉴와 아예 다른 음식이 된 아보카도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슬픔을 느꼈다. 식당에서 나올 때는 잘 먹었다는 인사를 하고 나왔지만, 사실은 다시는 오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내가 사랑하던 그 식당은 영영 사라져 버렸다.
주인이 바뀌면 맛도 아예 바뀌어 버리는 것이구나. 나는 그 사실에 씁쓸함을 느꼈다. 이전의 주인은 그가 만드는 음식처럼 산뜻하고 세련된 사람이었다. 그러나 바뀐 주인에게 그런 느낌은 전혀 없었다. 바뀐 주인의 응대는 무척이나 투박하고 무뚝뚝했다. 이제 막 식당을 열었는데도 활기가 없고 망한 식당을 몇 년째 운영하고 있는 것처럼 인상이 어두웠다. 그렇게 어두운 얼굴로 식당을 할 거라면 왜 저곳을 인수했을까? 그런 의문이 들 정도였다.
나는 마치 바뀐 주인이 원래 주인에게 식당을 뺏기라도 한 것처럼 그가 원망스러워졌다. 건강한 음식을 먹고 싶어서 찾아간 것인데 변한 음식은 속을 더부룩하게 만들어 놓았다. 나는 내 위장 안에 들어간 그 음식을 얼른 소화시키고 싶었다. 빵에 듬뿍 발린 느끼한 머스터드소스를 나이프로 긁어냈지만, 이미 소스의 절반은 빵에 스며들어 있어 어쩔 수 없이 어느 정도는 먹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평소에 묵직한 소스는 잘 먹지 않는다. 잼은 좋아하지만, 기름 맛이 나는 묵직한 소스는 위장에 부담이 된다. 이전 주인은 샌드위치에 소스를 그렇게 듬뿍 바르지도 않았고, 그렇게 기름진 소스를 쓰지도 않았다. 그 소스는 바뀐 주인이 마음대로 추가한 것인 듯했다. 샌드위치가 그 기름진 소스에 범벅이 되어 있어서 나는 사실 입맛이 뚝 떨어졌지만, 그렇다고 몽땅 두고 나올 수도 없어서 억지로 반쯤은 먹었다. 나머지 반은 도저히 먹지 못하겠어서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도망치듯 서둘러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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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에서 나온 나는 집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앞서 말했듯 위장에 들어간 음식을 조금이라도 빨리 없애고 싶었다. 속이 느끼하고 더부룩해서 이대로 집에 돌아갔다가는 종일 괴로울 것 같았다. 소화에는 걷는 것이 최고다.
마침 식당에서 집까지 가는 길은 바다를 보며 걷기 좋았다. 바다를 보며 걸으려면 큰길로 가는 것보다 시간이 훨씬 더 걸리기는 했지만, 나는 빨리 가는 것보다는 경치가 좋은 쪽을 선호한다. 식당에서 집까지 가는 그 길은 내가 매일 산책하는 길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내가 산책하는 길이 아기자기하다면, 식당에서 집까지 가는 길은 약간 삭막하고 자연과 가까운 느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산책하는 길에는 사람들이 사는 동네가 근처에 붙어 있지만, 식당에서 집까지 가는 길에는 사람들이 사는 집들이 보이는 대신 수풀이 우거져 있다. 바다 반대편이 그렇다는 것이다.
대신 식당에서 집까지 가는 길에는 내가 매일 산책하는 길에서는 볼 수 없는 생물들이 많았다. 특히 작은 게들이 많았는데 나중에 보니 몇 년 전에 일부러 그 게들을 그쪽 바닷가에 풀어놓았다고 한다. 개체수가 줄어서 그런 방책을 생각해 낸 모양이었다.
작은 게들은 길 위에도 있었고, 돌 틈에 숨어 있다가 나오기도 했고, 길 위에 있다가 돌 틈 사이로 들어가기도 했다. 게들은 재빠르고 귀여웠다. 바다와 길 사이에 있는 검은 돌들과 비슷한 어두운 색의 게들이었다. 돌 틈에 있으면 게와 돌은 색깔이 정말 비슷해 보였다.
걸을수록 게들은 점점 더 많이 보였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라 더 많이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잠시 멈춰서 게들을 관찰하기도 했다. 내가 다가가자 길 위에 있던 게들은 부지런히 옆으로 걸어갔다. ‘게들은 정말 옆으로 걷는구나.’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그들에게는 그들보다 커다란 게와 똑같이 집게발이 두 개 있었다. 검은색이라고 딱 잘라 말할 수는 없는 현무암처럼 어두운 색의 집게발이었다.
나는 게들을 건드릴 생각은 없었다. 게들에게는 집게발이 있고, 나는 집게발이 내 손가락을 아프게 꼬집을까 봐 두려웠다. 어릴 때 보던 삽화가 있는 동화책에서는 그런 장면들이 자주 나왔다. 게를 함부로 집었다가 집게발에 물려 아파하는 사람을 그린 그림들. 나도 어릴 때 한 번쯤은 게의 집게발에 물려 보았던 기억이 어렴풋이 있었다. 아마도 아팠던 것 같다. 나는 아프고 싶지 않기에 게를 집어 올릴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몸을 지킬 방어구가 있다는 것은, 그것이 누군가가 보기에는 아주 작고 사소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중요하다. 무엇이라도 있는 것이 낫다.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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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게들을 구경하는 재미에 푹 빠져 길을 걸었다. 비가 내리기는 했지만, 우산도 있고 그야말로 추적추적 내리는 정도라 산책에 크게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비 오는 날에만 볼 수 있는 풍경들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코너로 휘어지는 길을 돌 때 그 개가 나타났다. 처음 봤을 때 그 개는 어떤 사람과 함께 달리고 있었다. 개가 너무 즐거워 보였기 때문에 나는 그와 함께 달리는 사람이 그 개의 주인 혹은 친구라고 생각했다. 개와 함께 달리던 청년은 개를 조금도 불편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는 아마도 매일 달리는 사람 혹은 적어도 달리는 것이 익숙한 사람으로 보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자주 달리는 사람의 몸이었다. 팔도 다리도 근육질이었고, 민소매와 반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그것도 달리기를 자주 하는 사람이 입을 법한 옷이었다. 아마 그가 신은 신발도 달리기에 적당한 운동화였을 것이다.
개는 그 사람의 약간 앞쪽에서 달리고 있었다. 개는 그 사람의 좋은 달리기 파트너처럼 보였다. 빗속에서 힘든 기색 없이 달리고 있는 개와 사람. 그 사람이 하얀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더 눈에 잘 띄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보기 좋은 풍경을 편안한 마음으로 바라보며 걸었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하게도 그 개가 나를 향해 오기 시작했다.
달려온 것은 아니다. 그 개는 속도를 줄이며 나에게 왔다. 쫄래쫄래 따라왔다고 하는 것이 알맞은 표현일 것 같다. 나는 무척 당황했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개가 따라올 때는 멈추지 말고 계속 가던 길을 가는 편이 낫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들어서 알고 있었다. 곰이든 개든 어떤 동물이 나타났을 때 무작정 멈춰 있는 것은 위험한 일 같았다.
나는 개를 쳐다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시선을 부러 멀리 던져 달리는 청년을 바라보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 개가 그 청년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년은 개가 어디로 갔든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달리기를 계속했다. 그가 달리던 페이스 그대로.
그제서야 나는 상황을 파악했다. 개는 청년을 따라온 것이고, 이제는 나를 따라올 작정이었다. 예전에도 몇 번, 여행 중에 우연히 마주친 개가 따라올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매번 나에게 일행이 있었다. 다행히도 나와 함께 있던 사람들은 모두 개를 좋아해서 개가 그렇게 따라오는 상황이 되었을 때 당황하지 않고 개와 함께 놀아주었다. 개들은 한바탕 실컷 놀아주고 나면 자기 갈 길을 가거나, 따라오더라도 어떤 경계선까지만 왔다. 아마도 개들에게는 자신이 정한 영역이 있는 듯했다.
그런 경우에는 나도 웃으며 개를 바라볼 수 있었다. 나와 함께 있던 일행이 개와 놀아 주는 모습은 보기 좋으면서도 애틋한 면이 있었다. 내 일행이었던 친구들은 개와 한바탕 놀아 주고 나면 애잔한 눈빛으로 개를 쓰다듬어 주고 이제 가라고 손짓했다. 그러고는 개가 사라질 때까지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볼 때도 있었다. 그들은 한때 개와 함께 살았던 적이 있는 친구들이었다.
그러나 나는 개와 함께 살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어릴 때는 개를 키우고 싶어서 부모님에게 조르기도 했지만, 엄마가 개를 워낙 무서워해서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나와 동생이 합심해서 개를 키우자고 조를 때면 엄마는 항상 같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엄마가 어릴 때 동네에 송아지만큼 커다란 개가 있었는데, 엄마는 그 개를 아주 무서워했다. 그 개는 마당에 목줄로 묶여 있었다. 엄마가 그 집 앞을 지나갈 때마다 그 개는 엄마를 보고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댔다. 그래서 엄마는 그 집 앞을 지나갈 때마다 무척 긴장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그 집 앞을 지나가는데 그 개가 엄마에게 달려들어 다리를 콱 물었다. 그날따라 목줄이 느슨해졌던 건지 어쨌든 풀어진 모양이다. 송아지만 한 커다란 개가 겨우 일곱 살이었던 엄마, 체구가 작은 여자아이였던 엄마를 덮쳤다. 그 순간의 공포를 엄마는 잊지 못했다. 엄마의 다리에는 개가 문 자국이 아직 남아 있었다. 엄마는 하얀 선처럼 남아 있는 그 흉터를 우리에게 보여 주고는 했다. “이게 그 개가 문 자국이야. 아직도 이빨 자국이 남아 있어.”
그 흉터를 보고 나면 엄마에게 개를 키우자는 이야기를 더 할 수 없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엄마는 남의 집에서 개가 사람을 물면 우리에게 그 이야기를 꼭 해 주었다. 그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 그 조그만 것이 갑자기 이빨을 드러내면서 사나워져서 그 집의 누구를 물었다더라. 그 뒤에 개를 훈련시키는 TV 프로그램에서 사람을 무는 개들을 봤다. 개들에게는 사람을 무는 이유가 있었다. 그중 하나는 그들에게 야생성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혹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개들은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거나, 진짜로 물기도 한다. 나는 뱀보다 개가 무서웠다. 뱀은 기어다니는 동물이기에 피하려면 피할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개가 빠르게 달려들면 도망칠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달리기가 느린 편이고 오래 달리지도 못한다. 그에 비해 개들은 나보다 훨씬 빠르게 달리고 오래 달릴 수도 있다.
언젠가부터 나는 개를 보면 엄마가 해 준 이야기가 반사적으로 떠오르게 됐다. 엄마의 다리에 남은 하얀 흉터와 함께. 개가 엄마 다리를 놓지 않아서 살덩이가 덜렁거리고, 피가 바닥에 흥건했다고 한다. 엄마는 버스 사고를 당한 적도 있지만, 버스 사고보다 개에게 물렸던 일이 더 커다란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듯했다.
나는 여섯 살이나 일곱 살 무렵부터 그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엄마가 개에게 물렸던 나이쯤부터. 내가 개 공포증이 있는 엄마 대신 개를 무척이나 사랑하는 엄마의 손에서 자랐다면 나도 개를 무서워하지 않고 길에서 갑자기 나타난 개를 다정한 마음으로 쓰다듬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개 공포증이 있는 엄마의 손에서 자라 개를 무서워하는 사람으로 자랐다.
독립을 하고 나서라도 개와 함께 살거나 돌본 경험이 있다면 나는 개를 덜 무서워하게 됐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나는 주인과 함께 있는 개는 별로 무서워하지 않는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낯선 개들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개들. 나를 물지, 물지 않을지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들. 강한 이빨과 재빠른 몸을 가진 야생성이 남아 있는 동물.
누군가는 개들은 아기나 천사와 같은 존재라고 한다. 그러나 섬에서 산책하거나 달리는 사람들은 주인 없는 들개를 조심하라고 말한다. 섬에는 버려진 개들이 많고, 버려진 개들은 들개가 된다. 하루아침에 사람과 함께 집에서 살던 개에서 주인 없는 들개로 신분이 바뀌는 것이다.
섬에서는 원래부터 길에서 태어난 개와 사람과 함께 버려진 개를 구분하기 어렵다. 개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구분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나는 잘 구분하지 못한다. 그 개도 그랬다. 하지만, 사람을 그렇게 좋아하면서 무작정 따라오는 것을 보니 그 개는 그냥 들개가 아니라 사람 손을 탔던 개일 것 같았다.
이 개는 버려진 것일까? 아니면 그저 목줄 없이 동네를 돌아다니는 시골 개일까? 시골에는 그렇게 빨빨 다니고 돌아다니다가 저녁이 되면 집으로 돌아가는 개들이 있다. 그러나 이 섬은 시골이면서도 보통의 시골은 아니었다. 사람이 많이 드나드는 관광지이기도 하고, 어디서나 바다가 보이는 섬이기도 했다. 내가 알기로는 이 섬의 사람들은 개를 함부로 풀어놓고 키우지는 않았다. 워낙 뜨내기들이 자주 드나들기 때문에 매일 같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그런 시골과는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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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개가 나를 따라오기 시작한 것이 아주 난처했다. 개는 별로 크지는 않았다. 전에 섬에서 마주쳤던 개들은 진돗개 정도의 크기일 때가 많았다. 보통은 온몸이 희고 눈은 동그랗고 천진난만한 분위기를 풍기며 혀를 헥헥거리듯 쑥 내밀고 있다. 그런 개들도 나 혼자 마주쳤다면 무서워했을지 모르지만, 일행과 함께 있을 때는 그다지 두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반면 지난주에 그 길에서 나를 따라온 개는 몸집이 작은 편이었다. 아주 어린 강아지는 아니었고, 적어도 세 살 정도는 되어 보였다. 그러나 나는 개의 나이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세 살 정도 되어 보였다는 것은 그저 나의 짐작일 뿐이다. 그 개는 천진난만하게 나를 따라왔다. 그 개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 개는 사람을 좋아하고, 나는 그 개가 길에서 마주친 사람이었다. 그 개는 그런 이유만으로 즐거워하며 나를 따라왔다.
그러나 나는 불행하게도 개를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다. 개는 내가 두려워하건 말건 나를 따라왔다. 내가 두려워한다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 혹시라도 두려움의 냄새를 풍기면 개의 태도가 달라질까 봐 나는 그 개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굴었다. 나는 개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앞만 보며 걸었다. 나는 내가 무심하게 굴면 그 개도 금방 나를 떠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개는 내가 마치 오래된 친구나 그의 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당연하다는 태도’로 내 옆을 졸졸 따라왔다.
개라는 동물 혹은 종족의 그런 태도는 항상 나를 당황시킨다. 우리는 초면인데 왜 그는 그렇게 허물없이 나를 대하는가? 어째서 조금의 경계심도 갖지 않고 나를 따라오는가?
그 개는 나와 놀고 싶은 듯 보였다. 그러나 나는 그 개와 놀아 줄 여유가 없었다. 비는 점점 더 많이 내리고 있었고, 나는 지쳐 갔다. 사실 나는 젖는 것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옷과 신발이 축축해지고 내가 가진 물건들이 젖는 것이 유쾌하지 않다. 비를 맞으면 몸에서 냄새가 나는 것도 싫다.
나는 우산을 쓰고 있었지만 조금씩 축축해지고 있었다. 개는 우산이 없었기에 온몸이 푹 젖어 있었다. 하지만 개는 비가 와서 더욱 즐거워진 것 같았다. 살짝 들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개가 조금이라도 정신이 이상해 보였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 개는 미친개는 아니었다. 나는 광견병에 걸릴까 봐 하는 걱정까지는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개는 총명하고 정신이 맑아 보였다. 아마 나보다도 훨씬 정신이 건강할 것이다.
그의 해맑고 강한 힘에 비해 나는 나약하고 겁이 많았다. 그는 길에서 마주친 누구와도 어울릴 수 있는 존재였다. 달리는 사람이 나타나면 함께 달리기를 하고, 산책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속도를 맞춰 함께 걸었다. 그런 것이 그의 일과일지도 모르겠다.
여유로운 그와 달리 나는 집으로 어서 돌아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나는 그 개를 감당할 수 없었다. 실은 그 개가 갑자기 돌변하여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댈까 봐 두려웠다. 그러다 나를 날카롭고 강한 이빨로 콱 물고는 놓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
그 개는 요크셔테리어 같은 소형견보다는 컸고, 특별히 어떤 품종이 두드러지지 않는 믹스견 같았다. 털이 젖어서 축 쳐져 있기는 했지만, 건조하고 맑은 날에는 그렇게까지 볼품없어 보이지는 않을 듯했다. 그 개 옆에 주인이 있었거나 혹은 어떤 사람이 그 개를 잘 씻겨서 인스타그램 릴스로 올려놓았다면 나는 그가 참 귀엽고 사랑스러운 개라고 느꼈을 수도 있다. 나는 그런 안전망이 있어야만 개를 귀여워할 수 있다.
개는 마치 건강한 남자아이처럼 씩씩하게 나를 따라왔다. 꼭 축구를 좋아해서 매일 땀에 푹 절어 있고 몸에서는 열이 나는 초등학생 남자아이 같았다. 내가 개를 예뻐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나도 행복하고 그 개도 행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개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만한 인간이 되지 못했다. 개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쓰다듬어 주고, 놀아 주고, 단 몇 분이라도 함께 시간을 보내 주었다면 아마 충분했을 것이다. 어디선가 먹을 것을 구해 와 건넸다면 그것도 나쁘지는 않았을 테지만, 개가 원하는 것이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그것을 알면서도 개와 놀아 주지 못했다. 이대로 그에게 관심을 주지 않고 걷다 보면 그가 떠날 줄 알았지만, 그는 내 곁을 떠날 기미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다른 사람, 자신과 놀아 줄 만한 또 다른 누군가가 나타나야만 나를 떠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비가 꽤나 내리는 날인 데다 원래 인적이 드문 길이라 다른 사람이 나타날 것 같지가 않았다.
나는 울고 싶어졌다. 그 개는 언제까지나 나를 따라올 듯했다. 그리고 나는 그 개가 무섭기만 했다. 개가 심사가 뒤틀려 갑자기 날 물기라도 한다면 손쓸 도리가 없을 터였다. 나는 그 개를 때리거나 뒷목을 움켜잡고 멀리 던져 버리거나 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었다. 개가 나를 문다면 나는 비명을 지르는 것밖에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기껏해야 간신히 힘을 내어 휴대전화를 꺼내 119에 전화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그러나 119가 오려면 시간이 한참 걸릴 테고(섬은 도시와는 사정이 달라서 20~30분은 족히 걸릴 수도 있다. 아니, 그건 운이 좋은 경우이고 아마 한 시간은 걸릴 것이다) 그동안 나는 개가 나를 놓아줄 때까지 그저 물리고 있는 수밖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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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면 그 막막한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았다. 아마 5분이 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충분히 긴 시간이었다. 그런 상황이 조금만 더 길어지면 식은땀이 날 것 같았다. 그렇게 막막하던 때에 내 앞에 해변이 나타났다. 나에게는 그 해변이 상황을 바꿀 수 있는 기회 같았다. 어쩌면 개는 모래사장을 별로 안 좋아할 수도 있었다.
나는 무작정 해변의 모래사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나 막상 모래를 밟아 보니 개는 모래사장을 보통 길보다 더 좋아할 것 같았다. 오히려 내가 해변으로 들어간 것을 자신과 놀자는 신호로 받아들일 것 같기도 했다. 개를 떼어놓고 싶은 마음이 앞서서 판단력이 흐려졌던 것이다.
역시 개는 더욱 신나서 나를 쫓아왔다. 개는 모래를 싫어하지 않았다. 개는 즐겁게 꼬리를 흔들며 나에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방황하듯 바다에 아주 가까이 갔다가 그렇다고 물속에 들어갈 수도 없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다시 뒤로 물러나 모래사장 위쪽으로 올라왔다. 비가 쏟아지고 있어서 바다에 들어가는 것은 위험했다.
내가 모래사장 위쪽으로 올라가자 개는 이제 정말 자신과 놀아 주는 것이겠거니 해서 내 발치까지 와서 깡총거렸다. 개가 내 다리에 닿을 정도로 가까워지자 나는 더 이상 공포를 참을 수 없어 비명을 질렀다. 비명을 내려 해서 나온 것이 아니라 공포심이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개는 내가 자기를 무서워해서 비명을 지른 줄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왜냐하면 내가 비명을 지르자 더욱 신나 보였기 때문이다.
개는 나의 비명을 즐거운 소리로 받아들인 듯했다. 놀이의 신호 같은 것으로 말이다. 개는 짖지는 않았고, 웃는 것처럼 입을 벌리고 헥헥거리며 자기랑 놀자고 깡총거렸다. 나는 개가 깡총거리는 것을 특히 무서워한다. 그 힘이 느껴지는 점프가 두렵게 느껴진다. 개가 점프를 하다 흥분해서 나를 덮치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개가 깡총거릴 때 나는 개의 묵직한 무게와 힘을 느낀다.
생각해 보니 나는 동물의 묵직함을 무척이나 두려워하는 것 같다. 묵직한 동물은 나에게 그가 가진 생명의 무게를 떠올리게 하고, 생명의 무게는 왠지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진다. 묵직한 동물은 살과 피와 뼈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그 점이 무섭다. 동물이 묵직하다는 걸 생각하면 그 동물을 누군가가 몽둥이 같은 것으로 때리는 모습이 떠오른다. 개를 때려잡는 이미지. 도축의 이미지. 소와 돼지의 죽음. 말의 죽음.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묵직한 동물들을 때리고 죽이며 내가 그렇게 만들어진 고기를 일상적으로 먹으며 살아간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인간의 잔인함과 나의 잔인함, 인간의 이중성과 나의 이중성을 마주하게 만든다. 인간의 비도덕과 나의 비도덕, 살육과 살해를 떠올리게 된다.
그래서 나는 개가 두렵다. 개는 인간에 의해 쉽게 학대당하고 너무나 자주 버려진다. 실은 개가 나보다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개보다 신체적으로 강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개가 두렵다. 개는 너무나 인간을 쉽게 따른다. 그 점 때문에 개가 두렵다.
또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내면 이 글을 읽는 당신을 지겹게 만들 것 같아 미안하지만, 지금은 이 기억이 내 머릿속에 붙어서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게 하고 있다.
어릴 적에 나와 동생은 방학마다 외가나 친가에 맡겨졌다. 두 할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셔서 외가에도 친가에도 할머니만 계셨다. 그러니까, 외할머니에게 맡겨졌던 어느 방학 기간에 나와 동생은 외갓집에 둘이서만 남겨졌다. 외할머니는 마실을 나간다고 잠시 외출을 하셨다. 우리는 이미 몇 번이나 외할머니에게 맡겨진 적이 있었고, 외할머니는 이웃집에 잠깐 간 것이기 때문에 서로 별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별일이 일어났다. 어린아이들만 있으면 별일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당시에 외할머니의 집에는 강아지들이 있었다. 하얗고 귀여운 어린 강아지들이었다. 강아지들은 아마 마당에 풀어져 있었던 것 같다. 나와 동생이 외할머니의 집 안에 있을 때 어린 강아지 한 마리가 우리가 있는 방으로 들어오려 했다. 나와 동생은 외할머니가 옆에 있을 때는 그 강아지들을 귀엽게 바라볼 수 있었지만, 막상 그 중 한 마리가 우리가 있는 방으로 들어오려 하자 덜컥 겁이 났다. 내 동생은 나만큼이나 겁이 많은 아이였다.
강아지가 마루로 올라와 우리가 있는 방 안으로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자 동생은 나에게 “어떡해, 누나.”하고 말하며 울상을 지었다. “나도 몰라.” 나는 그렇게 대답하면서 일단 방문에 달린 고리를 잡았다. 당시에 외할머니의 집은 시골집이라 문이 현대식이 아니라 나무 살에 창호지가 붙은 크지 않은 문이었다.
강아지는 아마도 그저 사람을 좋아해서 우리에게 다가왔을 것이다. 그러나 나와 동생은 강아지와 살아 본 경험이 없었고 어린 나이이기도 해서 강아지가 우리에게 왜 다가오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강아지가 마침내 우리가 있는 방 안으로 들어오려는 찰나, 나는 문을 닫았다. 원래는 강아지가 들어오기 전에 문을 닫으려 한 것이었지만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 끔찍하게도 강아지의 목이 문 사이에 끼었다. 당연히 강아지는 살려고 버둥거리며 낑낑거렸고, 나와 동생은 그런 강아지를 보며 울기 시작했다.
문을 놓으면 됐는데 그때는 그래도 된다는 걸 몰랐다. 나와 동생은 엄마에게 ‘무는 개’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그래서 그렇게 작은 강아지에게도 큰 두려움을 품었던 것 같다. 나는 문을 놓으면 강아지가 방 안으로 들어와 우리를 물 것이라 생각했다. 우리가 그 강아지의 목을 문으로 졸랐기 때문에 강아지가 매우 화가 났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걸 안다. 강아지는 화를 내기는커녕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강아지는 우리를 공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외할머니가 금방 돌아왔다는 것이다. 외할머니는 정말 옆집에 가 있었고 강아지가 신음하는 소리와 두 아이가 엉엉 울어 대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인가 싶어 바로 돌아왔다. 그 덕에 나와 동생은 강아지를 죽이지 않을 수 있었다.
내가 동물의 묵직함을 두려워하게 된 것은 그때 내가 느낀 무게를 기억하기 때문인 것 같다. 내가 문으로 그 어린 강아지의 목을 조르고 있었을 때의 그 끔찍한 무게. 나는 지금도 그 무게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 뒤에 오랜 시간이 지나서 내가 삼십 대가 되었을 때 나는 매해 그랬던 것처럼 외할머니 집에 갔다. 외할머니는 아흔이 넘으셨다. 외할머니는 유모차가 없으면 걷지 못하게 되셨고, 보청기가 없으면 듣지 못하게 되셨다. 나이가 드신 것이다. 외할머니 집 마당에 들어갔을 때 나는 내 동생과 다른 외사촌들과 함께 있었다. 마당에 들어가 보니 하얀 강아지들이 있었다. 몇 십 년 전, 내가 일곱 살이나 여덟 살쯤이었던 그때 외할머니 집 마당에 있었던 강아지들과 똑같이 생긴 강아지들이었다. 우리는 그 강아지들이 왜 거기 있는지 잘 몰랐고, 나는 옛날의 그 강아지를 떠올리면서도 마당에 있는 강아지들을 귀여워했다. 삼십 대가 된 나는 어린 강아지는 두려워하지 않게 됐다. 두려워하지 않고 안을 수도 있고, 쓰다듬을 수도 있다. 옛날의 그 강아지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기는 하지만 말이다.
나중에 외가의 어른 중 하나가 외할머니 집 마당으로 들어섰다. 우리는 그 강아지들이 왜 거기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외가의 어른은 그 강아지들은 키워서 잡아먹는 거라고 했다. 그 강아지들은 ‘보신탕용’이었던 것이다.
이런 식의 끔찍한 일들을 나는 많이 알고 있다. 아마 이 세상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
나는 이제 제발 개가 나를 떠나 주기를 바랐다. 내가 그와 어울릴 만큼 괜찮은 인간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나를 저버렸으면 했다. 나는 우산을 쓰고 있던 팔을 내려 나와 그 사이를 가렸다. 우산을 방어막으로 삼은 것이었다. 그것으로 그와 어울릴 생각이 없다는 나의 의사가 전달되기를 바랐다.
그는 내가 새로운 놀이를 시작한 줄 알고 더욱 신나게 폴짝거렸다. 그에게는 나와 그 사이를 가린 우산이 놀이를 위한 장난감처럼 보인 듯하다. 나는 지치고 절망에 빠져 “저리 가”라고 말하며 우산을 계속 나와 그의 사이에 두고 움직였다. 그렇게 해서 겨우 모래사장 위까지 올라왔다. 나는 우산으로 내 다리를 가리며 서둘러 그에게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갔다.
그 사이에 그는 내게서 흥미를 잃고 해변에 세워진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덕분에 나와 그 사이에는 꽤 적절한 거리가 생겼다. 나는 먼발치에서 그를 바라보고 해변을 둘러보았다. 해변에는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몇 있었다. 그들은 가족끼리 와 있거나 친구끼리 있거나 했다. 개는 그들에게 갈 생각은 없어 보였다. 해변에서 처량하게 혼자 있는 것은 그와 나뿐이었다.
비가 정말 거세게 쏟아져서 사람들은 비를 피해 화장실로 갔다. 해변의 화장실은 간이식이 아니라 탈의실과 샤워실까지 있는 번듯한 건물이었다. 사람들은 화장실이 있는 건물의 비가 닿지 않는 현관 쪽에 서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서 있었다. 비가 언제 멈출지 예측할 수 없어서 그랬을 것이다.
그들에게 개는 없는 존재나 다름없었다. 개는 화장실 건물에서 멀찍이 떨어진 천막 안에 있었고, 덩치가 애매한 데다 쫄딱 젖어 볼품도 없었으니 말이다. 날이 흐리고 어두워서 그들에게는 개가 정말 보이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개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잠시 화장실 건물 쪽으로 가서 비를 피했다. 나 또한 다른 사람들처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잠시 멍해졌다.
*
다행히 비는 멈추지 않을 것처럼 퍼붓다가 갑작스레 잦아들었다. 바닷가에 내리는 비는 그런 식이다. 아주 제멋대로여서 전혀 예측이 되지 않는다. 기상청의 날씨 예보도 가끔은 맞고 대개는 빗나간다. 여름철에는 특히 그런 듯했다. 비구름은 자기들 멋대로 마구 묵직해졌다가 아무 때나 쏟아져 내렸고, 어떤 때는 찔끔찔끔 떨어지고 마는가 하면 또 어느 때는 폭력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거세게 쏟아졌다. 몇 분 만에 그칠 때도 많았고, 종일 내릴 때도, 밤새 내릴 때도, 한 시간이나 두 시간만 내릴 때도, 아침 일찍 잠시 내렸다가 말 때도, 오후나 저녁에 몇 분 간격으로 쏟아졌다 그쳤다 할 때도 있었다.
천막 안에는 한 사람이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는 개에게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개는 그에게 관심이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적극적으로 놀아 달라고 하지는 않았다. 화장실 건물에 서 있던 사람들은 비가 잦아들자 일시 정지가 풀린 것처럼 다시 움직여 해변으로 나갔다. 그들 중 누군가는 해변에서 다시 놀이를 시작하려는 듯했고, 또 누군가는 서둘러 자리를 정리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는 듯했다.
나는 집에 가야 했다. 집까지 가려면 아직 한 시간은 더 걸어야 했다. 지금 와서 버스를 탈 수도 없었다. 몸이 너무 젖은 데다 버스 정류장까지 가려고 해도 너무 멀었다. 그리고 지금 버스를 탄다면 에어컨 바람 때문에 감기에 걸릴 것 같기도 했다. 무엇보다 나는 사람들이 탄 버스보다는 혼자 걷는 편을 좋아하기도 했다.
나는 지쳐서 터덜거리는 걸음으로 화장실 건물에서 나왔다. 그러자 개가 기다렸다는 듯 나를 보고 꼬리치며 다시 내 쪽으로 오기 시작했다. 나는 일부러 개를 쳐다보지 않고 뚜벅뚜벅 내 갈 길을 갔다. 걷는 속도를 높였다. 나는 그를 상대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힘이 남아 있다면 집으로 가는 데에 써야 했다.
그러나 개는 나의 마음도 모르고 아까와 똑같이 천진난만하게 나를 따라왔다. 그는 나를 새로운 주인으로 점찍기라도 한 걸까? 나는 그가 집까지 따라올까 봐 겁이 났다. 나는 고양이에게 간택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어느 날 길에서 고양이가 집까지 따라와서 그 고양이와 살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 말이다.
개도 그럴까? 고양이가 그랬다는 이야기는 종종 들어봤지만, 개가 집까지 쫓아왔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개는 우리가 오래된 친구 사이나 되는 듯이 내 옆에 붙었다. 나는 이제 그가 두렵다기보다는 성가셨다.
“저리 가.”
나는 다시 한번 말했다. 이번에는 나와 그 사이를 우산으로 막지는 않았다. 아직 비가 오고 있었고, 나는 비를 맞고 싶지 않았다. 비가 너무 거세게 내렸기 때문에 나도 이제는 많이 젖어 있었다. 내 몸에서는 물비린내가 났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젖어 있었고, 아마 가까이 코를 대보면 내 몸에서 나는 것과 거의 비슷한 물비린내가 날 터였다.
지금은 그런 상상을 할 수 있다. 그가 내 옆에 있지 않은 지금은, 그를 깨끗하게 씻기는 상상을 한다. 거품을 내서 그의 털을 문지르고 투명한 물로 그를 씻기는 상상을 할 수 있다. 그의 젖은 몸을 수건으로 닦아 주고 털을 말리는 상상을 할 수도 있다. 그는 뽀송해질 것이고 나른해져서 내 옆에서 잠이 들지도 모른다. 나는 깨끗해진 그를 쓰다듬을 것이고 그러다 나도 나른해져서 늘어지게 하품을 할 수도 있다.
어쩌면 그도 그런 상상을 하지 않았을까? 비가 쏟아지는 날, 길에서 우연히 만난 나를 보고서 그러한 장면을 그려 본 것은 아니었을까? 그와 내가 말이 통했다면 우리는 잠시 대화를 나눴을지도 모른다.
“너 나와 함께 집에 가고 싶니?”
“그래.” (혹은 “아니. 나에게는 집이 있어.”)
“나도 임시로 빌린 집에 살고 있어서 오래 같이 있을 수는 없어. 하룻밤만이라도 괜찮다면 같이 가든지.”
“그래.” (혹은 “됐어. 나도 갈 데가 있어서.”)
그러나 나는 개와 말하는 방법을 몰랐다. 개도 딱히 나와 대화를 나누고 싶은 것은 아닐 것 같았다. 개는 단지 심심해서 한바탕 신나게 놀고 싶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다른 존재의 체온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따뜻한 날이었지만, 비가 와서 바람이 불 때는 조금 쌀쌀하기도 했으니까.
나는 그에게 말하고 싶었다. 나는 지금 집에 가야 하고 그래서 너와는 놀 수 없다고. 너와 집에 가고 싶은 마음도 아예 없지는 않지만 그 집은 내 것이 아니라고.
그도 나에게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나는 그저 너와 아주 잠깐만 놀고 싶은 거라고. 나에겐 나의 집이 있고, 그 집에 함께 사는 친구도 있다고. 나는 그저 네가 혼자이고 무척 쓸쓸해 보이길래 잠시 너와 시간을 보내 주고 싶었던 것뿐이라고.
그러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고 앞만 보며 내 갈 길을 갔다. 그는 한동안 나를 쫓아오다가 결국에는 어떤 경계선에서 멈추어 섰다. 그 경계선 안에 그의 집이나 그와 친밀한 누군가가 있을까?
그는 나를 배웅하듯 꼬리를 흔들었으나 나는 그에게 손을 흔들지 않았다. 마치 화가 난 것처럼 그에게 등을 돌리고 걸었다. 그날 밤에 나는 다음 날 날이 밝으면 그가 있던 자리로 돌아가 볼까 생각했다. 개를 위한 통조림이라도 하나 사 들고서. 그에게 통조림을 주고, 따뜻한 손으로 그의 등허리를 쓰다듬어 주고 오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았다.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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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겨울은 내게 백가흠 방안에 어둠이 번지며 축축한 기운이 무겁게 내려앉는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찬 공기가 몸 안에 가득 차며 퍼진다. 가스가 끊긴 지 두 달 전이다. 조금만 견디면 겨울은 가고 봄이 올 것이다. 나는 차가운 겨울의 한복판에 서 있는 중이다. 내게는 겨울이 ‘가혹하다’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다음 겨울을 내 생에서 다시 맞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을 만큼 나는 혹독한 시절을 지나고 있다. 매일 나는 마음의 절벽 위에 위태롭게 서 있다. 마흔다섯 번째 겨울을 나는 강원도의 한 작은 도시에서 버티고 있다. 하루하루가 힘겹게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원룸 안에 텐트를 치고 그 안에서 생활한다. 웬만한 추위를 견디는 데 불편이 없었지만, 며칠 전부터 엄청난 한파가 시작된 뒤로는 소름 끼치는 한기가 등에 붙어 나를 괴롭힌다. 추위를 이기기 위해 갖은 애를 써도 별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동네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냈다. 내가 책을 좋아하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도서관은 따뜻하고 읽는다는 일거리가 있어서 좋다. 나는 휴대용 버너에 물을 올린다. 텐트 안에 습기가 차며 물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텐트 안에 누워 밤이 시작되는 것을 가만히 바라본다. 지루한 삶의 권태와 살이 갈라지는 듯한 추위와 배고픔의 고통 사이 내 밤이 놓여 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권태와 생의 존속을 위한 고통 사이 내 하루가 있다.1) 핸드폰은 정지된 지 몇 주가 지났다. 내게서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점점 사라지는 중이다. 나를 걱정하는 어머니, 친구에게 안부를 전해야 하는 일 빼면 전화기는 내게 불필요한 물건이었다. 평생 내가 맺은 사람과의 관계라는 것은 딱 그 정도였다. 나만 외롭고 쓸쓸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해도 한동안은 그간 살아온 내 삶의 방향에 대해 곰곰 해질 수밖에 없었다. 금세 주전자가 울기 시작한다. 고요함이 물러간다. 가끔 이는 소란스러움이 내게는 퍽 소중하다. 나는 따뜻한 물을 한 잔 천천히 마신다. 추위가 잠시 녹는다. 뜨거운 물을 물통에 담아 꼭 껴안는다. 다른 하나는 침낭 안에 넣어 둔다. 얼어붙었던 하루의 고뇌가 녹는 것 같다. 온종일 먹은 것이 없으니 배고픈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언젠가부터 이런 허기짐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나는 내가 처한 어려움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줄 알게 되었다. 그제는 한 끼라도 먹었으니, 어제, 오늘은 굶을 수도 있는 게 우리의 인생이라고 여길 줄 아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배고픔을 잊을 수 있는 사람은 되지 못했다. 오늘도 도서관에서 하루 종일 책을 읽으며 굶었다. 끼니를 때우는 대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마지막 남은 돈으로 소주 두 병과 담배를 샀다. 마지막까지 나는 무얼 먹을까 고민했다. 그러나 배고픔을 견디기로 했다. 소주와 담배만큼은 쉬이 참을 수 없었다. 술이 없으면 한잠도 잘 수가 없고 담배가 없으면 숨을 쉴 수가 없다. 담배는 허기를 채워 주는 묘약이다. 소주는 내 안에서 끓고 있는
- 관리자
- 2026-03-01
서브리미널 안종성 여러 대의 카트가 교차 레일 지점을 충돌 없이 지나갔다. 높은 위치를 누비면서도 질서 정연히 움직일 줄 알았다. 출로에 다다를 때쯤 천천히 감속하더니 허공에 뚫린 검은 구멍 안으로 사라졌다. 윤무의 눈동자는 천장 주행 장치의 행렬을 따라가는 중이었다. 그 장면으로부터 슬픈 기분을 느끼고는 습관처럼 뒷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떠오르는 생각을 어떻게 붙잡아 두는가? 그러나 기록할 도구를 찾지 못한 윤무는 걷기로 했다. 산책하며 생각을 정리하기로 한 것이다. 벽과 바닥의 경계를 구분할 수 없을 만큼 흰 공간이 광활하게 펼쳐졌다. 소리와 냄새, 온도, 어떤 예감마저 느낄 수 없었다. 윤무는 이곳을 알 것만 같았다. 얼마 전 필경사와 무한한 흰 공간 이야기를 나눴기 때문이다. 필경사는 권면에 들기 전 미리 가서 둘러볼 것을 권했다. 깨어날 때 부분적인 기억상실이 있을 테지만 영원히 망각한 게 아니라서 살다 보면 어느 순간 권면 전의 삶이 되돌아올 것이라고 했다. 필경사는 뇌의 저장 용량을 컴퓨터 저장 단위로 환산하면 2.5페타바이트에 달함에도 인간의 상상력이 쉼 없이 활동하므로 정보를 선택적으로 보관한다고 말했다. 필경사는 인간의 신체가 권면과 죽음을 구분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필경사는 기억 편람의 업로드가 끝나면 직계 가족이라 할지라도 오십 년 뒤에나 조회할 수 있다고 했다. 필경사는···. 구축 아파트에서 볼 법한 편복도를 지날 때 윤무는 재건축 직전의 폐허에 온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호수마다 잡동사니가 나뒹굴거나 무가지가 쑤셔 박혀 있었다. 앞바퀴 없는 자전거도 복도를 비좁게 만들었다. 윤무는 그중 현관문이 열린 곳에 서 있다가 인기척을 듣고는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그곳에는 회색 정장 차림의 남성이 있었다. 그 역시 깨어난 게 얼마 되지 않았는지 윤무에게 여러 번이나 같은 내용을 물었고─여기 당신의 집인가요? 다른 누가 또 살고 있습니까? 식사했습니까?─결국 이들은 임장하러 온 일행처럼 나란히 집 안을 둘러보게 되었다. 내부는 따로 특별한 게 없는 가정집이었다. 통유리에 붙은 주먹만 한 크기의 스테인리스 휠을 돌려 보거나 싱크대 위에 널브러진 여러 가재도구를 들춰 보던 윤무는 커피믹스를 발견하고 남성을 향해 들어 보였다. 포장 비닐이 아침의 배경 앞에서 가볍게 바스락거렸다. 두 사람은 함께 커피를 마셨다. 스스로 마토메라 밝힌 남성은 일본 전자상거래 업체를 다니고 있지만, 서울 출장 경험이 잦아서 한국어를 유창하게 할 줄 안다고 말했다. 윤무는 소파에 앉은 마토메의 다부진 체격, 이름과 어울리지 않는 이국적인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런 외형만큼이나 독특한 건 마토메의 상태였다. 한눈에 보더라도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머그잔에 담긴 커피를 내려다보는데 호흡이 불규칙했으며 눈을 여러 번 깜빡거렸다. 윤무와 얼굴을 마주치려고도 하지 않았다. 업무차 여기에 온 건가요? 윤무는 낯에 익은 그의 정체를 알고 싶었다. 무대를 오며 가며 보았을 조
- 관리자
- 2026-03-01
우주의 영향 아래 임수지 언젠가 우주에게 내가 어릴 적 살았던 마을에 함께 가 보자고 말한 적 있다. 거기에 가면 세상에서 가장 큰 나방을 보게 될 거야. 팅커벨은 환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거야. 화장실에 다녀오면 문 앞에서 두꺼비가 널 지키고 있을 거야. 두꺼비들은 착하다. 두꺼비들은 두껍두껍 울지 않아. 걔들이 울면 동그란 구슬이 와르르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정말이야. 내가 그렇게 말하면 우주는 그곳은 꿈과 환상의 나라네, 하며 웃기도 했었는데. * 기사는 나를 미림슈퍼 앞에 내려 주었다. 멀어지는 택시의 후미등을 잠시 바라보다 미림슈퍼 옆으로 난 골목으로 들어갔다. 좁은 골목을 두 번 꺾어 집 앞에 서서는 주먹으로 대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차가운 밤공기와 함께 바다 냄새가 몸속 깊이 들어왔다. 버스터미널에서는 맡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서울에서 출발하기 전에 분명 전화를 했는데도 할머니는 정말 내가 곧장 올 거라곤 생각하지 못한 것 같았다. 문을 열어 준 할머니의 짧은 파마머리가 멋대로 눌려 있었다. 할머니는 내게 짜증을 조금 부리다가 곧 이불을 내어주었다. 날 밝을 때 오지, 뭐 하러 이 늦은 시간에 와. 궁금해서 물어본 건 아닌 것 같았다. 보일러를 안 틀었나? 얼굴과 손발을 대충 씻고 작은방에 깔아 둔 이불 속으로 들어갔는데 이불이 너무 차가워서 깜짝 놀랐다. 안방에서 자는 할머니를 깨워 물어볼까 고민하는 동안 내 체온에 맞춰 이불이 천천히 데워졌다. 이불을 코까지 덮은 채로 가만히 천장을 바라봤다. 내가 데운 이불이 다시 나를 데우며 조금씩 따뜻해졌다. 머리맡에 놓아둔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12시가 지나 있었다. 눈을 감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오늘은 우주의 기일. 오늘 나는 우주의 흔적이 없는 곳에서 잠들 것이다. * 우주가 내 방에 머물 때 입던 품이 큰 티셔츠와 트레이닝 바지는 잘 개켜 종이 가방에 넣고 옷장의 가장 깊숙한 곳에 두었다. 나는 그걸 다시 꺼내 본 적 없다. 우주가 쓰던 면도기나 낡은 양말 같은 것들도 진작 정리했다. 이제 내 방에 우주의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사용 기한이 지난 음식점 할인 쿠폰 같은, 우주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것들이 쓸고 닦아도 계속 생겨나는 먼지처럼 어딘가에서 자꾸만 하나씩 발견되었다. 청소를 하다 그런 것들을 찾아낸 날이면 나는 자꾸만 골똘해졌다. 2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있다니. 그런데 2년이 그렇게 긴 시간인가? 2년이라는 시간은 하루이틀 사이에 지나가 버린 것 같기도, 사실은 하루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2년이 흘렀다고 누군가 나를 속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며칠 전에는 매트리스와 벽 사이에서 영화 티켓을 발견했다. 어쩌다 여기에 티켓이. 영화 제목을 보니 그때가 떠올랐다. 그날 관객은 다섯 명뿐이었다. 재미가 없는 영화인가. 영화 선택은 언제나 나의 몫이었으므로 나는 조금 민망해져서 옆에 앉은 우주에게 작게 말했다. 전세 낸 것 같고 좋은데
- 관리자
- 2026-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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