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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희

  • 작성일 2026-05-01

보희

 

공현진

 

*

 

  아이돌을 넘어 훗날 국제 영화제를 휩쓸며 글로벌 스타가 될 연습생 보희는 세 달 넘게 생리를 하지 않았다. 네 달이었나? 가물가물한 만큼 보희는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원체 생리 주기가 불규칙했다. 두 달을 넘기기는 예사였고 반년 가까이 생리를 하지 않은 적도 있었다. 그에 대해 불안하게 여겨본 적은 없었다. 보희를 불안하게 하는 건 피 따위가 아니었다.

  일주일 단위로 레벨 테스트가 치러졌고, 월말마다 방출과 잔류가 결정됐다. 노래와 춤 연습을 치열하게 하는 건 당연했다. 땀은 흘리되 먹지는 않아야 했다. 탄수화물이 극도로 제한된 식단을 유지했다. 습관이 되어 어렵진 않았지만 간혹 컵라면이나 순댓국 같은 게 불쑥 머릿속을 떠다니면 명상에 들어갔다. 소용없으면 밖으로 나가 달렸다. 가로수와 반짝이는 건물들과 주인을 앞지르는 개들을 지나며 달렸다. 토할 때까지 달렸다. 먹은 게 없어도 몸 안에서 쏟아지는 것들이 있었다. 몸 안에 들인 적 없는 것 같은 토사물을 확인하며 보희는 안도와 두려움을 느꼈다. 반신욕을 하며 두려움도 몸 밖으로 쫓아내고자 애썼다. 피곤도 근심도 없어 보이는 맑은 피부를 위해.

  살면서 노력이 배신당하는 일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가 특별한 경우라 할 수 있다. 속상하고 억울해도 별수 없다. 세상은 노력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다행히 보희는 노력이 배신당하지 않는 특별한 쪽에 속했다. 타고난 능력도 있었다. 아름다운 몸, 보희는 자신의 몸이 타고난 재능이라는 것을 알았다. 간혹 몸을 껍데기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었다. 내면의 아름다움이 더 중요하다 운운하는 이들도. 보희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잠시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가엾게 여기지 않으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보희 역시 몸은 껍데기라 생각했다. 하지만 껍데기라 하여 왜 중요하지 않은가. 외면과 내면의 경중을 따지는 것이 더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보희는 굳이 반박하지 않고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이들의 곤혹을 헤아리는 마음으로.

  열여섯 살의 보희는 특출나게 아름다웠다. 저녁이 되어 소속사 근처 샐러드 가게에 가면 가게 사장은 보희가 세계적 스타가 될 거라고 단언했다. 사장은 자신의 젊은 시절이 걸어오는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떨면서, 수많은 연예인을 보았지만 보희가 뿜어내는 찬란한 빛은 본 적 없다고 말했다. “얼굴에 아무것도 하지 마. 네 나이 때는 네가 얼마나 예쁜 줄 모르겠지만 말이야.” 보희는 소스를 뿌리지 않은 샐러드를 먹으며, 맞은편에 자리 잡고 앉은 사장의 말에 은은한 미소로 화답했다.

  보희는 모르지 않았다. 지금 자신이 얼마나 어리고, 얼마나 예쁜지. 보희는 꽤 객관적으로 자신의 외모와 매력을 판단했다. 자기 객관화가 상당했기에 자신감과 불안이 함께했다. 소속사에서 가상으로 데뷔 그룹의 조합을 짤 때마다 늘 그 안에 들어갔다. 대개 메인 자리를 차지했다. 그렇다고 보희는 과도한 자신감으로 자신을 망치지 않았다. 그런 어리석음으로 결국 이곳을 떠난 얼굴들을 알았다. 다른 연습생들의 부러움과 질투 앞에서 보희는 사람들의 호감을 살 만큼 당당했고, 필요한 만큼 겸손했다. 겸손은 불안의 다른 얼굴이기도 했다. 보희는 나이와 외모, 신체 조건 같은 것은 상대적이며 영원불변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러므로 보희는 어리고 예쁘다는 말을 칭찬으로 들으면서도 칭찬으로 듣지 않았다. 열여섯의 나이가 마냥 어리진 않다고도 생각했다. 해마다 더 어린 친구들이 나타났다. 보희는 어떤 순간에는 나이가 많다는 생각에 무력했고, 어떤 순간에는 나이가 어리다는 생각에 안심했다. 열한 살부터 줄곧 데뷔 가능 멤버였다. 가능성이 있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보다 어린 나이에 데뷔하는 이들이 나오면 마음을 다스려야 했다. 아직 실패한 건 아니야. 보희는 거울을 보며 다독였다. 하루하루가, 매시간 매분 매초가 인생의 고비이자 큰 갈림길로 여겨졌다. 방금 어떤 기회가 지나가 버렸으면 어떡하지? 걱정하며 보희는 영어와 중국어 단어를 외우고, 신문을 읽었다. 시사와 역사 공부도 게을리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을 건 꿈이 손에 닿을락 말락 했다. 삶의 의미와 목적이 송두리째 왔다 갔다 하는 순간에 불규칙한 생리 주기 같은 것이 고민의 비중을 차지할 순 없었다. 단언하건대 보희로서는 그건 손톱만큼도 고민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리고 솔직히 피를 흘리지 않아서 편리하다고도 생각했다. 생리하면 아프고 귀찮기나 하지. 그렇게도 생각했던 탓에 보희는 생리하지 않는 상태가 매우 편리할뿐더러 어느 정도 다행이라고, 아니 사실 행운이라고 내심 생각했다. 피를 쏟으면서 세차게 춤을 추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고통을 떠나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야 했다.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고 장기들은 뒤틀리고 아래에서는 핏덩이가 쑥쑥 빠져나가는데 산소 같은 미소를 띠고 전사처럼 춤을 추었다. 고통 따윈 없는 몸처럼. 월말 평가 전에 화장실에서 생리대를 갈고 나온 여자애들은 99% 저조한 성적을 받았다. 분노한 트레이너로부터 “너 연습 안 했어? 그럴 거면 그만 둬.” 소리를 듣고야 말았다. 보희는 일 년에 생리를 적게 하는 덕분에 그만큼 위기의 순간에 적게 직면할 수 있었다.

  보희가 어떻게 그렇게 자신의 몸 상태에 대해 안일하고 어리석을 수 있었는지 묻는 것은 뒤로 미루자. 그래도 병원에 한 번쯤은 가봤어야 했을 텐데 보희는 그마저도 시간이 아까웠다.

  어차피…… 남자랑 잔 적도 없잖아? 뭐가 걱정이야?

  라고 단순하게 생각했을 뿐이다. 터무니없이 순진하고 어린 생각이었는데 실제로 보희는 어렸다. 특히나 자신의 몸과 성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회사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성교육을 받긴 했지만 그것들이 생리에 대한 건 아니었다. 그 무렵 보희는 생리하지 않는 것을 위기나 재난으로 여기지 않았다.

 

  불안의 시간을 좀 더 견딘 끝에 보희는 열여덟 살에 2인조 걸그룹으로 데뷔했다. 보희가 속한 그룹 ‘소녀들’은 바로 정상을 차지했다. 데뷔곡은 주요 음원 차트 1위를 차지했다. 복숭아나무 아래 쏟아지는 꽃잎을 맞으며 두 소녀가 악수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뮤직비디오는 공개되자마자 이틀 만에 유튜브 조회수 천만 뷰를 달성했다. ‘소녀들’의 음악과 패션, 말, 근황 등 모든 것이 화제였다. 보희의 귀걸이, 보희의 원피스, 보희의 카디건, 보희의 니트, 보희의 구두, 보희의 백 같은 제목을 단 기사가 쏟아졌다. 그녀가 걸치고 입고 두른 모든 것이 구매 대란을 일으키며 금세 품절됐다.

  활동하는 내내 보희는 화제성 1위에 올랐다. 그룹이 해체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걸그룹 ‘소녀들’은 5년 활동 끝에 해체했고, 이후 보희는 스물셋의 나이에 솔로로 데뷔했다. 솔로 데뷔 역시 성공적이었다. 보희에 대한 기사나 인터뷰에서는 그녀가 무명 시절도 없이 언제나 시대의 아이콘이었다고 말했다. 사실이었기에 보희는 손사래 치지 않았다. 지나치게 겸손하지 않아서 그녀를 좋아하는 이들이 많았다. 모두 보희를 가리켜 스타가 되기 위해 태어났다고, 연예인이 될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정말 그랬다. 보희는 무명 시절도 없었고, 고난도 없었다. 그녀가 스타로 있는 내내 그랬다. 산도 협곡도 없는 탄탄대로의 길이 오직 보희만을 위해 닦인 것처럼 보였다. 방향을 꺾어 다른 길로 가도 걸음걸음 매끈한 길을 내디뎠다. 연기 경험도 없던 그녀가 곧장 드라마 주연을 맡아 우려의 목소리가 컸지만 방영이 시작되자 언론은 그녀의 연기에 호평을 쏟아냈다. 압도적인 시청률과 화제성을 기록했고, 연말에는 최우수 연기상을 받았다. 이후 그녀는 연기에 집중했다. 그녀가 출연하는 작품은 믿고 본다는 평이 따랐다. 국제 영화제에서 무수히 수상했던 국내의 유명 감독이 보희와 함께 영화를 찍기 원했다. 이내 서른 살의 보희는 국제 영화제를 휩쓸었다.

  “시카고로 와요.”

  보희는 할리우드 영화 제작자의 눈에 들었다. 블록버스터 영화를 준비 중인 산드라의 적극적인 권유에 보희는 시카고로 갔다. 시카고 강변을 지나 우뚝 솟은 빌딩 가운데 하나로 들어갔다. 오디션은 생각했던 것만큼 분위기가 딱딱하지 않았다. 산드라와 세 명의 제작진이 더 앉아 있었고 테이블에 피자가 놓여 있었다. 오디션을 위한 소품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유명한 피자가게에서 방금 사 왔다고 산드라는 말했다. 산드라는 피자 한 조각을 들어 올리면서 보희를 보며 다른 한 손으로 피자를 가리켰다.

  “시카고에 왔으면 이건 먹고 가야죠.”

  토마토 소스가 듬뿍 올라간 딥 디시 피자였다. 보희는 할리우드의 오디션이 원래 이런 분위기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다른 이들의 오디션이 모두 끝나고, 이들이 저녁을 먹는 와중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환대인지 아닌지 헷갈렸으나 다들 손에 피자 조각을 얹고 크게 웃었다. 마치 피자가게에 앉아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것 같았다. 보희는 손을 뻗어 피자를 집었지만 입에 대지는 않았다. 잠깐 망설였다. 피자를 먹는 것이 분위기에 더 어울리는 것 같았다. 분위기를 망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보희는 피자를 그대로 포장 박스 끝에 내려놓았다.

  오디션에 합격했다는 통지를 줌 화상 회의로 통보받던 순간 보희는 연습생 시절 수없이 발음했던 영어 단어와 문장들을 떠올렸다. 그 시절을 허투루 보내지 않은 노력이 보답받는 듯했다. 순간 보희의 몸을 훑으며 손가락에 묻은 소스를 입으로 핥던 제작진의 모습이 떠올랐다. 환대라고 생각하면 환대라고, 받아들이기 나름이라고 보희는 생각했다. 밤이 되어 욕조에 따듯한 물이 채워지기를 기다리며 보희는 거실에서 한강의 야경을 바라보았다. 시카고의 밤을 떠올리면서. 오디션이 끝나고 산드라는 보희를 존 핸콕 센터 95층 라운지로 데려갔다. 도시의 뼈를 드러내듯 노랗게 빛나는 빌딩들이 끝없이 펼쳐졌다. 산드라는 보희가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산드라는 약간 술에 취했다.

  “슬픈 눈을 한 인형 같아요. 표현이 기분 나쁘다면 미안해요.”

  산드라는 보희의 손을 잡고 자신이 찾던 아시아인이라고 말했다. 또다시 미안해요, 덧붙였고 그러자마자 하지만 솔직히 그래요, 하고 어깨를 으쓱했다. “이런 게 인종차별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나도 할머니가 중국인이라고요.”

  산드라는 특정 영화나 특정 배우를 거론하며 거칠게 욕했다. 할리우드를, 아니 영화산업을 망치는 자들이라고. 한국이라면 그런 대화에 웃는 것을 꽤 신경 썼을 텐데 보희는 산드라가 웃을 때 따라 웃었다. 산드라의 말을 이해하는 것이 한발씩 늦는 까닭도 있었지만 솔직히 그의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산드라의 등 뒤로 도시의 화려한 불빛이 내려다보였다. 이곳만큼 당신과 어울리는 곳이 없다는 말에 보희는 마음이 동하며 전율이 일었다. 자신의 오랜 꿈이 이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동시에 진짜 오디션은 지금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산드라는 보희에 대해 궁금해하기보다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이혼한 전남편과 여자친구를 모두 약 때문에 잃었다고 하더니 보희에게 외로움을 조심하라는 당부를 반복했다. 꽤 취한 듯했다.

  “사람은 한순간에 잘못될 수 있잖아요. 무섭게도.”

  산드라는 말했다. 헤어지기 전 산드라는 보희에게 한잔 더 같이 마시러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산드라가 자신에게 기대하는 것이 아시아인인지 친구인지 연인인지 알 수 없었다. 보희는 간신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보희가 할리우드 영화에 출연하게 되었다는 소식이 기사로 쏟아졌다. 보희는 할리우드 영화의 대본을 쥐었다. 보희는 영화의 주연인 남자의 아내 역할이었다. 초능력을 지닌 백인 남자가 도시의 악당들을 벌하는 상투적인 내용이었지만 출연하는 배우들의 이름이 화려했다. 영화는 권선징악과 해피엔딩을 선명하게 지향했다. 수많은 건물과 도로와 나무들을 경쾌하게 파괴했고, 유쾌한 농담들이 쏟아졌다. 유일하게 현실적이고도 비극적인 장면은 주인공의 아내, 보희가 마트에서 하혈하며 아이를 유산하는 장면이었다. 처음에 대본을 받아들고 보희는 그 모습이 자신과 이질적이라 여겨져 괴리감을 느꼈다. 병원에서 진단을 받은 건 아니지만 막연히 자신은 아이를 가질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아이를 가질 수도 잃을 수도 없을 텐데, 생각하며 보희는 대본을 살폈다. 하지만 겨우 피 때문에, 인생의 기회를 날릴 수는 없었다. 늘 그런 마음이었기에 지금의 자리에 올 수 있었다고 보희는 마음을 다잡았다.

  보희는 훌륭하게 연기를 해냈고 큰 호평을 받았다. 보희가 하혈하는 장면에서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같은 아픔을 지닌 사람으로서 위로를 받았다는 메시지도 있었다. 보희는 다른 이의 삶을 훔쳐온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그런 게 연기지, 연기를 한 거잖아, 되뇌며 보희는 촬영 현장을 떠올렸다. 분장팀에서 보희의 허벅지 아래로 붉은 액체가 흐르도록 꾸몄다. 보희는 발아래 고인 붉은 액체를 손으로 만지며 오열했다. 그 연기를 하던 순간을 떠올렸다. 실제로도 그럴까. 그렇게 피가 웅덩이처럼 고일까. 그런 생각을 아주 잠시 했다. 오래 하지는 않았다.

  보희는 곧 세계가 주목하는 배우가 되었다. 그렇게 승승장구하는 내내 보희는 여전히 불안 속에 있었다. 실패의 경험이 없다는 것이 자신을 실패하게 할까 봐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불안이 자신을 돕는다고 믿었다. 언제나 좋은 쪽으로. 늘 그러했듯이.

 

*

 

  보희는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활발하게 활동했다. 십여 년의 시간이 금세 지나갔다. 그간 여덟 편의 할리우드 영화와 다섯 편의 한국 영화에 출연했다. 주연과 조연을 가리지 않았다. 더 유명해졌고 더 많은 부를 축적했다. 결혼은 하지 않았다. 동물도 식물도 키우지 않았다.

  마흔세 살이 된 보희는 한국의 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오랜만의 예능 출연이었다. 인터뷰를 진행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인터뷰는 보희의 화려한 행보를 훑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주고받은 대화가 특별하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할리우드에 처음 진출했을 때 기분이 어땠나요? 연기하며 어려웠던 점은 없나요? 지금도 데뷔 때와 똑같이 너무 날씬합니다. 몸매의 비결이 무엇인가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까닭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어떻게 기억되고 싶으세요? 늘 받았던 질문과 어디선가 여러 차례 거듭했던 대답이 오갔다.

  말을 하면서 보희는 앞으로도 이런 대화 속에 자신이 계속 끼어있을 것 같다고 느꼈다. 이상한 생각이지만 하나의 대화가 아주 긴 시간 동안 지속되는 것 같았다. 말이라는 것이 거대하게 몸집을 불린 끈적한 액체처럼 느껴졌고, 십 년 후에도 이 대화가 똑같이 흐르고 있을 것 같았다. 자신보다 먼저 십 년 후의 시간에 도착한 대화 속에 허겁지겁 달려가 자신의 몸을 욱여넣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런 생각을 잠깐 하며 능숙하게 답변을 마무리했다. 보희 스스로는 기시감을 느꼈지만 보희가 출연한 프로그램은 한동안 화제가 되었다.

  녹화가 끝난 후에 예능 프로그램 제작진은 보희를 위해 케이크와 꽃다발을 준비했다. 보희의 생일이 이틀 뒤에 있었다. 케이크와 꽃다발을 챙겨 집으로 돌아온 보희는 비싸고 안락한 소파에 앉아 녹화 때 했던 생각을 이어 했다. 같은 대화 속에 있다고 해서 자신의 삶이 지루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바라던 삶을 살고 있었다. 앞으로도 그러기를 바랐다. 그런 기분보다는 다른 표현이 어울리는 것 같은데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소파에 앉아 한참 적절한 표현을 찾기 위해 애썼다. 잠들 때까지 떠오르지 않았다.

  새벽에 보희는 잠에서 깼다. 소파에서 깬 보희는 거실의 가구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가구들이 그대로 있는데도 미묘하게 위치가 바뀐 것 같은 기분이었다. 초록색 러그가 보다 왼쪽으로 치우친 것 같았고, 벽에 걸린 그림들도 약간 위로 올라간 듯했다. 조명의 각도도 생경하게 느껴졌다. 가구들을 하나하나 빤히 바라보다가 보희는 식탁 위에 놓은 케이크를 보았다. 먹기 위해 들고 온 것은 아니었다. 버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급격히 허기가 몰려왔다. 보희는 케이크에 달려들어 먹기 시작했다. 한 조각을 다 먹었는데도 허기를 참을 수 없었다. 물을 한 잔 마시고 케이크를 더 먹었다. 케이크의 절반을 먹어 치우고 보희는 정신을 차렸다.

  거대한 허기. 허기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어쩌면 잠들기 전까지 자신이 찾던 단어가 이것일지도 몰랐다. 보희는 반쯤 남은 케이크를 쳐다보았다. 아직도 배가 고팠다. 어떻게 된 거야? 손으로 이마를 짚는데 갑자기 자신의 몸 안이 텅 빈 것처럼 느껴졌다.

  보희는 고개를 저었다. 몸 안이 텅 빈 기분이 말이 돼? 무슨 결핍 같은 것일까? 하지만 보희는 자신의 삶에서 결핍을 느끼는 것도 이상하다 생각했다. 자신에겐 없는 것이 없었다. 원하는 것들을 원하는 대로 이루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 명백했다. 보희는 자신에게 무엇이 없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남편이라든가 아이는 아니었다. 결혼과 출산 모두 원한 적이 없었기에 그에 대해 결핍을 갖진 않았다. 그런데 왜 허기진 걸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이 허기가 무얼까. 보희는 이를 닦고 새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침대에 누워 이불의 바스락대는 감촉을 느꼈다. 그러다 번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가만. 생리를 안 한 지 얼마나 됐더라?

 

  보희는 여전히 생리를 가끔 했다. 일 년에 한두 번 하는 경우도 있었다. 보희는 오랫동안 그것이 병원에 갈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를 질병의 문제로 여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마흔이 넘도록 병원에 단 한 번도 가지 않은 건 아니다. 할리우드에 진출하기 전이었던 스물여덟, 이 역시 매우 늦은 감이 있지만, 그때 보희는 산부인과에 갔다. 생리불순이 심각한 문제인지 의사에게 물었다.

  보희가 병원에 갔던 건 헤어진 남자의 말 때문이었다. 당시 보희는 유명 야구 선수와 만나다 헤어졌다. 그는 느낌이 나지 않는다며 콘돔을 끼지 않았다. 보희는 그가 피임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해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 보희도 그가 콘돔을 낀 것보다 끼지 않은 것이 좋았다. 하루는 통화를 하면서 그는 보희에게 혹시 생리를 했느냐고 물었다. 보희는 아니라고 답했다. 이후로 그는 수시로 보희에게 생리를 했는지 물었다. 보희는 느긋하게 “아직”이라고 대답했다. 어느 날 갑자기 남자는 욕실에서 면도를 하다가 달려 나와 화를 냈다. 보희가 자신의 발목을 잡으려 한다며 분노했다. “내가?” 보희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다가 “임신했을 리 없어.” 답했다. 나는 원래 생리를 좀 많이 늦게 한다고, 세 달에 한 번씩 하는 게 예사라고, 보희는 말했다. 며칠 지나 남자는 요즘 스트레스가 많아 예민해져서 화를 냈다고 사과했다. 세 달이 지나서 보희는 생리 중이라고 남자에게 말해줬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남자는 보희에게 헤어지자고 했다. 그는 보희가 무섭다고 말했다. 보희는 무섭다는 것이 자신과 섹스하기가 무섭다는 말인지, 자신의 몸이 무섭다는 말인지 되물었다. “같은 거 아냐?” 남자는 그렇게 대답했다. 보희는 남자와 헤어진 것엔 크게 상처받지 않았지만 때때로 그의 말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무서운 몸. 몸을 큰 자산이자 재능으로 여겨왔는데, 자기 몸을 그렇게 느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게 슬펐다.

  의사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보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의사는 호르몬 불균형이 초래하는 여러 문제들, 또한 임신의 어려움과 조기 폐경을 말했다. 보희는 임신과 출산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의사의 말을 건성으로 흘려들었다. 몸이 망가진다는 의사의 말은 비단 임신 불가능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여자의 몸과 성에 대한 보희의 지식은 열여섯 살로부터 크게 나아진 바가 없었다. 병원에 갔던 스물여섯 살 때도, 부드러운 침대에 누워 그때를 떠올리는 지금도. 그런 걸 보희에게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보희도 알려 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다 보면 늦긴 해도 어느샌가 피가 나왔다. 그냥 그런 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자신의 몸이 낯설게 느껴졌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무언가 부끄러웠다. 제때 피를 흘리지 않는다고 부끄러울 까닭은 없었다. 그렇지만 그런 몸을 자세히 살피지 않았다는 사실이 창피했다. 열여섯 살로 돌아가 우두커니 멈춰 서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이 뭔가를 잃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게 뭔지는 확실하지 않아도, 자기 몸에는 분명 문제가 있었다. 위기를 모른 채 살아왔던 날들이 기만처럼 느껴지며 머릿속에 경고음이 울렸다.

 

*

 

  마흔세 번째 생일을 앞두고 보희는 생리를 안 하는 것이 께름직해졌다. 내 몸이 왜 그렇게 됐는지 따져 물었다. 보희는 혹독했던 연습생 시절을 내내 자랑스럽게 여겨왔다. 자신을 가혹하게 몰아붙였던 그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의 영광이 있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피를 흘리는데 나만 피를 흘리지 않았던 거잖아. 어떻게 그걸 아무렇지 않게 여겼을까. 심지어 축복이자 기회로 여겼을까.

  보희는 이내 자신만 그랬던 것인지 궁금해졌다. 누구에게도 물어본 적 없었다. 그런 문제를 들은 바도 없었다. 어쩌면 열여섯 살 때 친구들과 주고받았어야 했던 대화는 이런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너는 생리를 지금 하고 있느냐고, 나는 지금 생리를 하지 않는다고, 몇 달간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것이 문제인지를 몰랐기에 그런 고민을 털어놓은 적 없었고, 피 흘리는 친구들을 애석하게만 생각했다. 다이어트가 잘 되고 있는지, 노래와 춤 연습은 어디까지 했는지, 지난달에 잘린 애가 누군지 들었는지, 같은 대화만 주고받았을 뿐이다.

  너는? 너는 어땠어?

  누구에게 물었어야 했나 생각하다 문득 한 얼굴이 떠올랐다. 보희는 떠오른 얼굴을 향해 물었다. 그 얼굴은 지미였다. 궁금했다. 지미는 과연 생리를 제대로 했는지. 지미는 이런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는지. 지미에게 묻고 싶었다. 하지만 지미는 보희와 연락이 끊어진 지 오래였다.

 

  지미는 보희와 2인조 걸그룹 ‘소녀들’로 함께 데뷔했던 멤버였다. 소속사에서 보희만큼이나 오랫동안 연습생 생활을 한 동갑내기 친구이기도 했다. 보희는 열한 살부터 연습생 생활을 시작했고, 지미는 일 년 뒤에 연습생으로 뽑혔다. 보희가 연습생 시절 내내 안정적으로 상위권을 차지한 것과 달리 지미는 극과 극의 성적을 오갔다. 지난달의 월말 평가에서 방출 경고를 받았다가 다음 달에 전체 연습생 가운데 1위를 차지하고, 그다음 달에는 다시 방출 위기 경고를 받는 식이었다. 지미가 하위권에 해당하는 평가를 받을 때는 과하고 부담스러워서 매력적이지 않다는 지적이 따라붙었다.

  보희는 지미와 함께 데뷔하게 될 거라는 회사의 이야기를 듣고 당황스러웠다. 두 사람은 결이 너무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울리느냐고 묻는 보희에게 회사는 두 사람이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좋은 조합이라고 설명했다. 회사는 보희의 우아하고 청순한 이미지와 지미의 당돌하면서도 활달한 이미지를 강조했다. 다른 듯한 두 사람의 우정, 자유, 믿음을 내걸었다. 거기에 사랑까지. 회사의 전략은 대중에게 먹혀들었다. 방송에서 지미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을 쏟아내다 벌떡 일어서면 보희가 지미의 손목을 지긋이 잡아끌었다. 보희가 차분한 말투로 앨범에 대한 설명을 진지하게 늘어놓으면 지미는 “우리 노래가 그런 거였어요?” 지금 알았다는 듯이 물으며 사람들을 웃게 했다. 서로 달라도 함께할 수 있다고, 보희와 지미처럼 소중한 관계가 될 수 있다고, 팬들은 말했다.

  보희는 지미에게도 자신과 같은 문제가 있었는지 궁금했다. 함께 활동하며 붙어 다니는 내내 두 사람이 생리 문제를 공유한 적은 없었다. 지극히 일상적인 이야기인데도 생리에 대해 서로 말한 적은 없었다. 하긴, 생리 얘기만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방송에 나와서는 누구보다 살뜰한 사이처럼 굴었지만 사실 두 사람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받을 만큼 가깝지 않았다. 사람들은 두 사람에게서 우정과 연대의 가치를 발견했지만 둘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다. 보희는 지미가 너무 충동적이라고 생각했고, 지미는 보희가 지나치게 계산적이라고 생각했다. 함께하는 시간이 지속될수록 두 사람은 서로에게 냉담해졌다. 이동하는 차 안에서는 둘 다 입을 열지 않았다.

  만일 그 시절에 보희와 지미가 각자의 문제를 서로 터놓고 나눴더라면 두 사람의 관계가 조금은 나아졌을까? 모를 일이다. 하지만 가정은 어차피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것이니 그런 가정을 오래 붙들 필요는 없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일어난 일은 현재의 두 사람이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룹이 해체된 이후, 보희가 승승장구하는 동안 지미는 내리막길을 향했다. 지미는 보희와 함께 정상의 영광을 누렸으나 그녀 인생에 있어 그 시기는 길지 않았다. 보희의 솔로 데뷔가 성공적이었던 것과 달리 지미의 솔로 데뷔는 처참한 성적을 거두었다. 사람들은 지미의 무대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맘때 대중들에게 지미의 이미지는 점점 나쁜 쪽으로 기울었다. 지미는 입담이 좋은 편이라 예능 프로그램에 꽤 출연했는데 그것이 독이 되었다. 이전에는 가식 없고 당당하다는 인상을 주었던 지미의 거친 말들은 어느샌가 사람들에게 불편한 것이 되었다. 무례하고 시끄럽다는 말들이 하나둘 쌓이자 대중에게서 금세 지미의 이미지가 돌변했다.

  멍청하면 제발 입 좀 다물고 있어.

  어떤 누리꾼이 지미의 SNS에 남긴 댓글이었다. 지미는 참지 않았다. 댓글을 단 이와 설전을 벌였다. 지미는 대중들에게 비호감 이미지의 대명사가 되었다. 한번 비호감 이미지로 낙인이 찍힌 이상 돌이킬 수 없었다. 지미가 무슨 말을 하든, 무슨 짓을 하든. 사람들은 지미를 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지미는 방송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지미는 사람들에게서 잊히지 않았다. 지미가 사람들에게서 잊힌 존재가 되었더라면 차라리 나았을지 모른다. 지미는 거듭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지미에 대한 각종 구설수와 소문이 돌았다. 재벌 스폰서가 있었다거나 지미가 산부인과에서 애를 떼고 나오는 걸 봤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었다. 비단 소문만 그녀를 따라다닌 것이 아니다. 그녀는 사건 사고로 뉴스에 등장했다. 남자친구와 쌍방 폭행으로 경찰서에 갔고, 술집에서 옆자리 일행과 폭행 시비가 붙어 또 경찰서에 갔다. 음주운전. 도박. 사기. 약물 논란. 걷잡을 수 없이 지미는 추락했다. 돌이켜 다른 길로 향하려 애쓸수록 상황은 더 나빠졌다.

  보희가 마지막으로 지미의 소식을 접한 건 지미가 사기죄로 교도소에 수감됐다는 뉴스를 통해서였다. 5년 전쯤 그런 뉴스를 보았던 기억이 났다. 뉴스를 보면서 보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지미를 특별히 응원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추락하기를 바란 적도 없었다.

  지미가 솔로 데뷔를 했을 당시 보희의 회사에서는 대책 회의가 열렸다. 지미의 인터뷰 내용 때문이었다. “먼저 솔로로 출격한 보희 씨와 이제 선의의 경쟁을 하게 되었는데요. 보희 씨가 어떤 응원의 말을 해준 게 있나요?” 묻는 기자의 질문에 지미는 대답했다. “어떤 말도요. 응원의 말을 들은 건 없어요.” 두 사람의 불화설이 불거졌고 회사에서는 어떻게 대처할지에 대해 의논했다. 지금이라도 보희가 SNS에 지미의 활동을 응원한다는 글을 올리는 건 어떤지, 보희가 다른 주제로 인터뷰를 하면서 마지막에 지미에게 보내는 응원 메시지를 덧붙일지, 아니면 지미에게 커피차라도 보낼지. 보희는 가만히 있는 것을 택했다. 지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자신이라면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보희는 생각했다. 두 사람의 불화설은 이내 잠잠해졌다. 두 사람의 불화설보다 더욱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정치계의 이슈가 터졌다. 그런 덕분에 그 일이 보희의 이미지에는 별다른 타격을 주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응원의 말도, 다른 어떤 말도 오가지 않았다. 각자 자기의 방향으로 걸어가면 된다고 보희는 생각했다. 삶 전체를 놓고 보면 지미는 한 마디 정도의 시절을 함께 일한 사이였다. 지미에게 닥치는 불행들은 지미의 것이라고, 보희는 여겼다. 보희는 자신의 냉담함과 무심한 마음을 무섭게도 슬프게도 여기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왕래가 없었고, 지난 시절은 온전히 지나간 시간으로 남으려 했다. 그러다 한번, 보희는 지미와 다시 마주했다. 10년 전 가을이었다. 서른세 살이었던 보희는 출연한 할리우드 영화의 성공으로 할리우드 배우로서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다. 한국에 돌아오면 각종 방송에서 섭외가 물밀듯 들어왔다. 보희는 당시 본인의 물건들로 플리마켓을 열고 수익금을 기부하는 국내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합정동의 한 상가에서 플리마켓을 진행했다. 늦은 저녁, 슬슬 녹화를 마무리하려고 준비하던 시점이었다. 그때 지미가 나타났다. 초대되지 않은 방문자였다. 예정에 없던 지미의 등장에 제작진은 당황했지만 화제가 될 수도 있었기에 지미에게 마이크를 채웠다.

  “오랜만이야.”

  “그러게. 정말 오랜만이야.”

  두 사람의 대화는 어색했다. 특별한 대화가 이어지지도 않았다. 보희는 지미가 갑자기 나타난 의중을 헤아리느라 긴장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다. 침묵만이 계속됐다. 방송으로 내보낼 만한 이야기도 감동도 자극도 없었다. 지미는 자신의 방문에 대해 어떤 설명도 하지 않았다. 지미는 테이블 위에 남아 있는 보희의 가방, 청바지, 점퍼, 재킷 같은 것들을 둘러보다가 스카프 하나를 집어 들었다.

  “나는 이게 마음에 드네. 이걸로 줘.”

  지미가 등장한 부분은 방송에 나오지 않았다. 밝고 유쾌한 톤으로 편집되었던 방송에 지미가 나온 부분은 어울리지 않았다. 둘의 관계를 보여줄 만한 설명도 담지 못했다. 불친절한 긴장감만이 흐를 뿐이었다. 그래서 PD는 지미가 등장한 녹화분을 삭제했다.

  살면서 보희는 종종 지미가 자신에게서 스카프를 사 갔던 순간을 떠올렸다. 언젠가 한번은 자신을 도와달라며 지미에게서 연락이 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미로부터 그런 연락이 온 적은 없었다.

 

  도와달라고 연락한 것은 보희였다. 보희는 인터넷으로 지미에 대한 소식을 찾아보았다. 교도소에서 2년 9개월의 복역을 마치고 나왔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리고 한참 검색한 끝에 또 다른 근황을 찾았다. 1년 전쯤에 네일샵을 연 듯했다. 다녀온 고객의 후기가 블로그에 올라와 있었다.

  보희는 지미를 찾았다. 네일샵 문을 열고 들어가자 지미가 앉아 있었다. 얼굴이 많이 변해 있었다. 하지만 아무 말 없이 자신을 쏘아보는 눈빛에서 변하지 않은 지미의 모습을 발견했다. 네일샵에는 손님이 없었다. 혼자 손톱을 갈고 있던 지미는 짓궂은 표정으로 말했다.

  “할리우드 스타가 내 가게에 들어오다니.”

  “잘 지냈어?”

  보희의 말에 지미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늘 잘 지내려고 하지. 내 삶이 내 뜻대로 안 돼서 문제지.”

  지미는 커피나 녹차를 마시겠냐고 물었다. “아무거나.” 보희가 말하자 지미는 일어나서 캡슐 커피 기계로 향했다. 커피가 기계에서 추출되는 동안 보희는 지미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지미는 컵에 뜨거운 물을 더 부으면서 말했다.

  “너는 이제 내가 안 무서워?”

  “무섭다니?”

  “너는 늘 나를 무서워했잖아.”

  “무슨 소리야? 그렇지 않아.”

  “다행인지 아닌지 모르겠네.”

  지미는 웃었다. 지미가 커피가 담긴 머그컵을 보희에게 내밀며 물었다.

  “무슨 일이야?”

  “나 좀 도와줘.”

  “내가 너를 어떻게 도와줘?”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어.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너 말고 떠오르지 않더라.”

  “우리가 그런 사이였나.”

  지미는 보희 앞에 서 있었다. 보희는 지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사실 궁금한 게 있어서 왔어.”

  보희는 자신의 문제를 털어놓았다. 입이 떨어지지 않을 줄 알았는데 머릿속으로 여러 번 대화를 나눈 상태로 와서 그런지 생각보다 쉽게 말이 나왔다. 자신은 연습생 시절부터 생리를 거의 하지 않았다고. 혹시 너는 어땠느냐고. 보희의 말을 듣고 지미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싸늘하게 말했다.

  “지금 그게 궁금해서 온 거야? 생리를 안 한다고? 뭐 그게 산재라도 되는 것 같아서 나한테 온 거야?”

  보희는 지미의 차가운 반응에 당황했다.

  “그러니까 지금 네 몸은…… 망가졌다는 거네?”

  보희는 지미가 왜 자신을 향한 적대를 드러내는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하며 뜨거운 컵을 매만졌다.

  “그런데 보희야. 생리 얘기라니, 너무 가혹하지 않니? 네가 나한테 이러는 건?”

  보희는 지미가 들고 있는 컵에 눈이 갔다. 펄펄 김이 올라오고 있는 뜨거운 머그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번뜩 떠올랐다. 생리 문제를 두고 왜 지미의 얼굴이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했지만 그건 게으른 생각이었다. 기억이 편의적이고 이렇게나 게으를 수 있다는 것을 보희는 깨달았다. 여기에 오기 전에 깨달았어야 했다. 보희는 몸이 떨렸다.

 

  무얼 기대한 걸까. 지미도 나와 같다고 털어놓기를 기대한 걸까? 그러면 내 상황이 더 괜찮아질 것 같아서? 아니면 더 나빠질 것 같아서? 보희는 차를 몰면서 생각했다. 생리에 관해서라면 지미도 뭔가 할 말이 있지 않을까, 내심 그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고. 지미의 네일샵에서 빠져나온 후 보희는 서둘러 차로 향했다. 네비게이션도 작동시키지 않은 채 차를 몰기 시작했다.

  만남은 보희가 생각한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하지만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날 수는 없었다. 지미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너는 완전히 잊었구나.” 지미는 보희를 원망하듯 말했다.

  지난 시절에 대해 보희는 자주 회상하는 편은 아니었다. 현재에 만족하지 못할수록, 미래로 향할 자신이 없을수록 지난 시간을 자주 돌이키는 법이라고 생각했다. 과거에 젖어 과거의 자신을 꺼내는 사람들을 조심해야 한다고도 여겼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보희는 인생의 전환점이라 할 만한 때를 선명히 기억했다. 그 순간의 빛과 공기, 냄새는 삭지 않았다. 가령 할리우드 오디션장에서 맡은 피자 냄새라든가, 시카고 빌딩들의 불빛, 밤에 마신 와인의 향, 대각선 테이블에 앉았던 일행의 웃음소리 같은 것들은 섬세하게 보희의 기억 속에 내려앉았다.

  그래서 지미가 꺼내는 기억이 자신의 기억 속에도 꽁꽁 숨어 있었다는 것을 깨달을 때마다 보희는 놀랐다. 부끄러운 만큼 두려웠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지미의 눈은 자신의 두려움을 눈치챈 것 같았다. 지미는 차츰 한탄에 가까운 말투로 보희에게 말했다.

  “우리가 왜 해체했는지 정말 기억 안 나?”

  보희는 계약 기간이 만료되었고 둘 다 계약을 연장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그러나 지미는 고개를 저었다.

  “내 이미지가 바닥을 쳤잖아. 빌어먹을 생리 때문에.” 

  지미의 말이 맞다. 사실은 보희도 알고 있었다.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잊지 않았다. 지미의 이미지가 우스꽝스러운 것이 된 건 생리 때문이었다. 여느 때처럼 보희와 지미는 무대에 올랐다.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음악 방송이었다. 그날 입은 무대 의상이 문제였다. 두 사람은 몸에 달라붙는 H라인의 흰색 원피스를 입었다. 보희와 지미를 위해 특별 무대가 준비되었고, 두 사람이 데뷔했던 때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게 무대가 꾸려졌다. 조화로 된 복숭아나무 주위로 가짜 꽃잎들이 흩날렸고, 그 아래 나무 벤치가 놓여 있었다. 두 사람은 벤치에 앉아 서로를 마주보며 노래했다. 후렴 부분에 이르렀을 때 두 사람은 함께 일어섰고, 노래가 끝날 때쯤 천천히 뒤로 돌았다. 그날 방송이 끝나고 ‘소녀들’의 음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지미의 원피스 엉덩이 부분에 빨간 피가 선명하게 번졌다. 물이 고인 웅덩이처럼. 지미는 그때 수군거리는 사람들도 싫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보희가 더 원망스러웠다고 말했다.

  “비싼 원피스가 망가졌다고 화를 내는 실장 앞에서 너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더라. 난 억울했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을까.”

  그때 보희는 지미가 잘못했다고 생각했다. 왜 그런 실수를 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칠칠치 못하다, 천박하다, 경박하다, 지미가 들어야 했던 말들은 곧 그룹의 이미지가 되었다. 지미의 옆에 있으면 보희도 함께 우습고 철없는 소녀가 되었다. 회사는 이미지가 오염된 ‘소녀들’을 버리기로 결정했다.

  보희는 사과를 바라느냐고 지미에게 물었다. 지미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전에는 그랬어. 지금은 아니야.”

  그리고 다짐하듯 아랫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나는 너를 도와주지 않을 거야.”

 

  보희는 다시는 지미를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지미를 찾을 일도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 생각이 강하게 머리에 박힌 탓인지 꿈에서 지미를 만난 것인데도 보희는 깜짝 놀랐다. 보희는 지미에게서 연락이 온 것도, 또한 지미가 자신의 연락처를 안 것도 당황스러웠다. 어떻게 연락처를 알았느냐고 묻지 않았는데 지미가 먼저 말했다.

  내가 모두와 연락이 끊긴 건 아니야.

  지미는 여전히 보희에 대한 원망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형편없는 인간이야. 지금 내 꼴이 우스운 건 나도 알아. 하지만 보희야, 나는 너보다 나은 인간이 될 거야. 그래서 연락했어. 내가 너를 어떻게 도와줘?

  보희는 지미가 갑자기 전화를 끊어버릴까 봐 걱정됐다. 초조한 마음으로 보희는 지미에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말했다. 어느 정도 누그러진 목소리로 지미는 물었다.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면 그게 서로에게 도움이 될까?

  보희는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하지만 열여섯 살, 열여덟 살로 돌아가 지미 너에게 말을 걸고 싶다고 말했다. 말해 봐. 지미가 말했다.

  보희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지미는 보희의 말을 끊지 않고 한참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서운함과는 별개로 솔직하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네가 미워서 네 몸이 망가졌다고 말했지만. 사실 나도 문제가 있어. 나는 생리를 너무 많이 하는 게 문제였어. 평생. 한 달에 한 번이 아니라 열 번 스무 번을 생리를 하는 거야. 너무 무서웠지. 하지만 누가 알게 될까 봐 그게 더 무서웠어.

  무서웠겠다.

  무서웠지.

  두 사람은 열여섯 혹은 열여덟 살로 돌아간 것처럼 느끼며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전화를 오래 귀에 대어 한쪽 귀가 얼얼해지고 빨개질 때까지.

  긴 꿈이었다. 뜨거운 귀의 감각이 생생했다. 잠에서 깬 보희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어디부터 꿈이길 바라는지 생각하면서. 바로 다시 잠이 들면 같은 꿈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

 

  어느 순간 보희는 인터뷰를 할 때마다 생리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을 보희의 인기가 저물기 시작하던 때로 봐야 할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비단 그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출연한 작품의 잇따른 흥행 실패와 많은 나이, 대중의 피로도 등이 모두 요인이 된다고 보는 시각이 있었다. 어떤 스타도 산 채로 영원할 수는 없는 법이라고, 누군가는 말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런 하락세로 접어들기 시작한 시점에 그녀의 생리에 대한 발언들이 겹쳤고, 그건 많은 대중에게 매력적인 요소는 아니었다. 물론 더욱 그녀를 좋아하는 지지층이 생겨나기는 했다. 이전까지 전혀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생리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 이후로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고백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건 일부였다. 이전의 보희가 인기의 정점에 설 수 있던 것은 거슬리지 않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특정한 신념이나 가치관, 종교, 정치색 모든 것이 그녀와 거리가 멀었다. 사람들은 보희를 좋아하는 이유를 그녀가 당당하고 우아해서라고 말했다. 모두에게 당당하고 우아하기 위해서는 모두에게 해가 되지 않아야 했다. 자신과 타인 모두 얼굴을 붉힐 일이 없는 말들, 뼈 없는 말들, 피 흘리지 않는 말들이 오가야 했다.

  생리에 대한 발언이 한두 번에 그쳤으면 썩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 불편함을 어느 정도 감수하기로 마음먹고, 자신 안에 깃든 혐오를 밀어내려 했던 이들이 몸서리칠 정도로 보희는 과하게 생리에 대한 말들을 쏟아냈다.

  한편으로 그런 보희의 모습은 괴이하게 비쳤는데 보희가 어떤 목적을 지닌 것 같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가령 여성의 몸의 특수성이라든가 혹사당한 몸에 대한 각성이라든가 여성의 권리 신장이라든가…… 를 주장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여자들은 원수에게도 생리대를 빌려준다는 농담이 있잖아요. 저는 그런 농담에 한 번도 웃어본 적이 없어요. 그런 경험이 없으니까요.” 보희는 웃지 않고 말했다. “연습생들이 혹사당하는 산업 구조가 여성의 몸을 억압하고 훼손하는 경험에 대해 공유하며 이를 공론화하고 싶은 거죠?” 기자가 물으면 보희는 놀란 얼굴로 대답했다. “제 몸이 훼손됐다고 말하지 말아 주세요.” 대체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는 비아냥을 보희가 듣기도 했던 이유이다. 생리 얘기를 하는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비난이 따랐다.

  보희는 생리에 사로잡힌 것이 분명하다고 누군가 말했다. 귀신이 들리듯. 신이 임하듯. 그녀의 몸에 생리가 씌었다고.

  보희는 혼자 집에서 죽음을 맞았다. 사인에 대해서는 의혹이 있었다. 수면제 과다 복용이 원인으로 지목됐는데 그것이 사고인지 자살인지 규명되지 않았다. 다만, 그러니 결혼을 했어야 했다고, 아무리 화려한 삶을 살아도 혼자면 그렇게 외롭다고, 보희의 죽음과 상관 없는 말들이 그녀의 죽음을 가리켰다. 보희의 장례식장에 지미는 조문을 갔다. 지미가 조문을 마치고 나오는데 한 기자가 그녀를 알아보았다. 보희가 당신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보희를 어떻게 기억하는지 물었다. “당신은요?” 지미의 대답은 기사로 실리지 않았다. 대신 보희의 장례식장에 조문을 온 유명인들의 사진이 기사로 떴는데 그 가운데 지미의 사진도 있었다. 오래전 보희에게서 사간 스카프를 두른 지미의 모습이 사진으로 남았다.

 

  시카고의 환한 밤, 존 핸콕 센터 95층 라운지에서 산드라는 한 신인 여배우를 앞에 두고 말했다. “참 안타까운 일이야.” 이제 막 할리우드에 입성한 여배우는 미소를 지으며 “그러게요.” 대답했다. 두 사람은 한순간에 걷잡을 수 없이 추락한 스타들에 대해 차례차례 이야기했다. 영원히 빛날 것이 분명한 도시의 불빛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면서. 바의 테이블은 가득 찼고, 사람들은 사랑과 영원을 속삭였고, 종업원은 술이 찰랑이는 잔을 부지런히 옮겼다. 산드라와 여배우는 행복이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여겼다. 행복은 쉽고 분명한 곳에 있었다. 손을 뻗으면 곧 닿을 곳에.

  포크와 칼이 접시에 부딪는 소리, 잔들끼리 맞닿는 소리, 또렷한 웃음소리 속에서 확실한 행복을 발견하며 두 사람은 잠깐 보희를 떠올렸다. 어디선가 취한 사람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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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숲

우리는 숲 공현진 시간이 아주 흘러 우리가 만두 가게를 열게 되는 것이 지금 하려는 이야기의 마지막이다. 만두 가게를 여는 날, 동네 사람들이 몰려와 축하하고 웃으며 그들이 착하고 따듯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려 하는 날, 그러니까 찜기가 내뿜는 하얀 수증기 속에 많은 말들이 오가며 갇히고, 그러나 결국에 너희가 잘못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내용의 말들이 한꺼번에 가게 밖으로 빠져나간 후에, 부엌 벽에 집기들을 걸면서 나는 오래전 동생과 집 안의 사물들을 처치하기 시작했던 때를 떠올렸다. 원래 나와 동생은 눈에 보이는 물건들을 모조리 없애려 했다. 나무 주걱과 튀김 냄비, 천사 엉덩이가 벗겨진 접시, 티스푼, 도마, 전선, 플라스틱 수초가 깔린 어항, 조립식 서랍장, 블랙앤데커 사의 전동 드라이버 세트, 성경 구절이 적힌 달력과 야곱이 무릎을 꿇고 있는 쿠션. 부피가 커서 위험하다 싶은 물건들 위주로 먼저 없앴고, 눈에 띄거나 거슬리는 것들, 발에 차이고 밟히는 것들을 닥치는 대로 내다버렸다. 그건 손에 짚이는 족족 게걸스레 음식을 집어 삼키는 일만큼이나 쓸쓸한 일이었다. * 여름이 시작되기 전이었다. 눈을 떴는데 엄마 아빠가 없었다. 재개발이란 단어가 동네 사람들을, 사실 재개발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까지 들썩이게 하던 사월이었다. 동네 어딜 가든 모래 더미가 쌓여 있었고, 바람이 불면 짙은 연못 냄새 같은 것이 났다. 낮과 밤의 온도는 아주 달랐지만 우리는 낮과 밤에 같은 냄새를 맡았고 같은 꿈속을 헤맸다. 집 근처에선 생선 냄새가 났다. 주말이면 이모는 서울로 올라왔다. 우리가 잘 있는지 보기 위해서. 이모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거실에 빨래건조대를 펼쳤다. 말린 생선을 하나씩 노끈에 꿰어 빨래건조대 위에 걸었다. 세탁기를 간신히 놓은 좁은 베란다에도 생선을 매단 옷걸이가 화분걸이와 함께 공중에 걸려 있었다. 동생 미영은 독감을 심하게 앓았다. 독감을 앓은 후에 미영에게 사물들이 말을 걸기 시작했다. 이모는 미영의 정신이 이상해진 게 아닌지 의심했다. “그것이 다 혼이 빠져서 그렇다. 헛것이 보이는 거야.” 이모는 해남 바다에서 말린 귀한 것을 가져왔다며 몇 달 동안 우리에게 말린 생선을 쪄서 먹였다. 미영은 생선 살점을 입에 넣기도 전에 헛구역질을 했다. 그래도 이모는 억지로 먹게 했다. 미영의 허벅지와 팔이 앙상한 것을 두고도 이모는 못마땅해 했다. 이모는 하루는 보약을 지어 왔고, 하루는 실력이 좋다고 소문난 집에 가서 부적을 받아왔다. 미용실에 갔다가 누군가의 말을 듣고 회충약도 사왔다. 이모가 돌아간 후에 미영은 변기에 얼굴을 처박았다. 억지로 삼킨 알약을 뱉고 싶어 했다. 미영은 벌레들이 입으로 쏟아져 나올까 봐 겁내면서도 알약을 빼내기 위해 토악질을 했다. 바보야, 어차피 벌레들은 똥구멍으로 쏟아지는 거야. 내가 겁을 주면 미영은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울지는 않았다. 이모는 대수롭지 않은 척했지만 자신이 알거나 또 알지 못하는 방법들을 끊임없이 가져와

  • 공현진
  • 2023-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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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판다곰젤리
    최고에요

    우리는 보희의 트루먼쇼를 보고 있다. 그녀는 일생을 생리에 대한 찜찜한 의식과 불안한 의심을 품고 살아간다.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인기 연예인이라는 이유로 스토킹하는 이러한 사회는 한 개인의 사실적 사건을 입맛대로 재단하면서 일생을 옭아매게 된다. 그러나 보희는 사회가 만든 무대 안에서 평생을 살아왔기에 저항할 수 없었고, 그녀의 죽음마저 해석의 대상이 되기에 이른다. 이제 대미를 장식하고 축하연이 열리는 밤, 이 사회의 연출자들은 또 다른 보희를 위해 술잔을 기울인다. 예전 생리혈이 묻은 걸로 (화제)가 된 지미를 재데뷔시키기 위해. 지미 목에 둘러진 보희의 (스카프)는 서서히 그녀의 목마저 옭아맬 것이다. 이 사회는 또 다른 부속품이 필요할 뿐이다.

    • 2026-05-11 21:03:24
    판다곰젤리
    최고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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