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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두기 연습

  • 작성일 2026-05-01

  그만두기 연습


차현지


  올리브는 무언가를 그만두기로 결심했을 때마다 적외선 치료기의 빨간 불빛을 떠올리곤 했다. 훈련이 끝나면 이비인후과에 가서 대기실 벽 한쪽에 나란히 걸려 있던 길쭉한 원통형 기계의 전원을 켰다. 벽을 마주 보고 앉아 수화기를 들 듯 치료기를 한쪽 귀에 대고 꾸벅꾸벅 졸았다. 염증으로 늘 귓구멍이 빨갛게 부어 있었다. 뜨겁고 날카로우며 압력이 가득 차는 듯한 통증은 아직도 생생했다. 

  언젠가 잠수 훈련을 하던 날이었다. 손가락으로 모자이크 타일을 하나씩 짚을 수 있을 만큼 수영장 바닥 가까이 내려가 잠영하던 중, 갑자기 퍽 소리가 나면서 뭔가가 찢기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얼마 안 있어 수경 너머로 연한 선홍빛 액체가 서서히 퍼지는 것이 보였다. 올리브의 오른쪽 귀에서 난 출혈이었다. 몸을 밀어 올려 수면 위로 향하는 아주 짧은 순간에 올리브는 생각했다. 이제 더는 지금처럼 수영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그즈음 올리브는 사춘기에 막 접어들었다. 하루에 많게는 반나절 가까이 물속에서 체력을 다 소진한 탓에 베개에 늘 침 자국을 잔뜩 내며 꿀잠에 들곤 했었는데, 언젠가부터 잠에 드는 것이 어려웠다. 누우면 자꾸 잡생각이 났다. 하계 수련회에 갈 때 버스는 누구랑 같이 타지. 정혜는 짝을 구했나. 왜 나는 단짝 친구 하나 없는 거지. 이게 다 수영 때문이야. 아, 수영하고 싶다. 그렇게 생각의 꼬리를 물다 보면 금세 자정이 가까워졌다. 

  훈련하느라 올리브는 늘 혼자였다. 친구들이 모닝글로리에 가서 샤프펜슬을 살 때도, 삼삼오오 모여서 만화를 그릴 때에도 올리브는 그들 사이에 끼지 못했다. 심지어 같이 수영을 시작한 친구들이 샤워실에서 그녀를 못 본 척 짝지어 수영복 물기를 짜고 있을 때도. 넌 선수반 갔잖아, 이제 우리랑은 못 놀지. 그 애들이 샤워실 밖으로 나갈 때까지 올리브는 연신 샴푸질을 했다. 거품이 많아져 눈꺼풀에까지 흘려내려도 쓱쓱 닦아내면서. 그러고는 아무도 없을 때 수영복의 물기를 짰다. 너무 많이 짜서 손아귀가 얼얼할 만큼. 됐어, 혼자여도 괜찮아, 까짓거. 주문을 외듯 혼잣말을 하면서. 올리브는 물속에 있는 것보다 물 바깥의 생활이 더 갑갑했다. 레인 안에서 일렬로 쭉쭉 직진, 턴, 직진, 턴만 하면 되는 반복적인 훈련이 그리웠다. 오로지 숫자와 기록으로만 이루어진 세계, 사회적 교감 따위 없는 속 편한 물속이.

  너무 외롭다는 느낌이 들 때면 올리브는 심야 라디오에 편지를 썼다. 직접 손 글씨를 쓰며 사연 받을 주소를 불러주던 디제이가 더듬더듬 영…등…포구…… 여의…도…동…… 하며 나직하게 말을 이을 때면 올리브도 똑같이 편지지 봉투에 주소를 또박또박 적곤 했다. 사연이 채택되지는 않았다. 중학생은 너무 어리단 건가. 그래서 다음엔 대학생인 척 보내보았다. 봄이 되면 새내기 대학생들 사연을 자주 읽어주었던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올리브는 성별과 직업을 바꿔가며 계속 사연을 보냈다. 우푯값이 좀 아까워질 무렵, 처음으로 편지가 읽혔다. 평소보다 무거운 목소리의 디제이는 그간 제각기 다른 사람인 척 사연을 보내오는 분이 계신다고, 그런데 그분의 손 글씨는 늘 똑같고, 보내오는 주소도 한결같다고. 읽어드리지 못해 죄송했으나, 그래도 저는 진실한 사연만을 소개하고 싶다고 전했다. 조심스럽지만 제법 단호하게 들렸다. 아무도 올리브가 누군지 모르고, 아무도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지만, 올리브는 발가벗겨진 기분이 들었다. 그 뒤로 한동안 올리브는 그 프로그램은 물론 라디오를 듣지 않았다. 대신 보내지 않을 편지를 계속 쓰게 되었다. 

  “그게 나름 재밌었거든요. 혼잣말이 주렁주렁 나오는 게.” 

  라디오 사연은 다른 사람인 양 거짓으로 문장을 꾸미게 된 태초의 글쓰기였다. 물론 내가 아닌 척 쓰는 것이지만, 그래도 누군가에게 말하고 있다는 기분이 좋았어요. 정말 읽었을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그래도 수취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대화하는 느낌이었거든요. 시차를 두고 내 이야기가 나에게서 어딘가로 건너간다는 감각, 그걸로도 조금은 숨이 트이는구나 싶었고…… 그러다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고요. 올리브는 잠시 말을 멈추다가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검은 웻수트를 입은 서퍼들이 하나둘 뭍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적막해진 사이, 올리브의 시선에 동참하며 사람들이 맞장구를 쳤다. 이렇게나 겨울인데 정말 대단해요. 여기 파도는 동절기에 더 세니까 때를 놓치지 않는 거죠. 얼마나 좋으면 저 번거로움을 다 무릅쓰고…… 사람들이 화목난로에 양 손바닥을 더 가까이 가져다 대며 어깨를 한껏 움츠렸다. 한참 서퍼들을 바라보던 올리브가 다시 고개를 돌려 사람들을 향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까지 할 수가 없어요. 빨간 불이 떴거든요. 그래서 그만두려고요.” 


*


  두부는 뜨개 모임을 통해 워크숍에 대해 알게 되었다. 해변 맞은편 골목에 있는 서점이었는데, 동절기 비시즌마다 동네 사람들을 대상으로 아기자기한 모임을 주관했다. 바캉스를 즐기러 온 피서객들, 단풍을 보러 산행을 결심한 사람들의 옷차림으로 계절을 가늠할 수 있는 휴양지의 특성상, 겨울이 되면 모든 것의 밀도가 낮아지고, 고요해지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가 다시 원래대로 멀어졌다. 더는 다닥다닥 붙어 있고 싶지 않아 이주를 택한 사람들은 그 고요하고 멀어진 틈을 타 햇볕을 쬐고 산책을 했다. 

  “어르신들만 잔뜩 있는 인구 소멸 지역에 놀러 와서는 아우토반 속도를 내면 어떡하냐고요. 진짜 인간 정나미 떨어져.” 

  두부와 함께 뜨개 모임에 참여했던 레티는 주로 툴툴거리며 대화를 전개하는 편이었다. 말끝마다 인간이 문제야, 라고 밥 먹듯 얘기하는 레티는 매일 아침 플로깅을 하며 전날 사람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를 주웠다. 다 쓰고 버려진 폭죽과 찌그러진 맥주캔, 치킨 양념 소스가 잔뜩 묻은 종이 박스나 덩그러니 천사채만 남은 회 포장 용기 같은 것들은 매번 비슷한 레퍼토리였다. 한국인들은 도무지 테이스트가 없다고 빈정거리면서도, 레티는 성실하게 자기만의 의식을 치렀다. 두부는 그런 레티가 싫지 않았다. 레티를 따라 모래사장을 샅샅이 둘러보며 허리를 반쯤 굽힌 채 남이 먹고 버린 것, 놀고 남긴 것들을 하나씩 주울 때면 수행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그런 고양감이라면 나쁘지 않다고도 생각했다. 

  뜨개 모임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두부는 얼어붙은 하천을 보며 잠시 멈춰 섰다. 외롭게나마 천변을 지키고 있던 왜가리 한 마리가 보이질 않았다. 더 큰 하천 쪽으로 이동한 듯했다. 늘 그렇듯 짤막한 탐조를 끝내려는데, 문득 왜 하필 그만두는 모임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목도리를 완성하려면 아직 한참이나 남았는데. 서점 주인은 음력 새해가 되기 전까지 그간의 업보를 모조리 청산해야 한다는 우스갯소리를 하더니, 두부에게도 신청을 권했다. 모쪼록 겨울이 길잖아요. 워크숍은 서점이 아닌 인근 서프샵에서 한다고도 덧붙였다. 배관 문제가 있어 건물 전체 내부 공사를 해야 한다고. 석 달 치 월세를 안 내도 되는 대신 당분간 서점 운영은 할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주어진 휴지기인데 여행이라도 다녀오지 그러냐는 두부의 말에 서점 주인은 안 그래도 더운 나라로 피신 가볼까 싶었지만, 막상 다 놓고 떠나려는 게 잘 안된다고, 자기 자신한테 질린다는 듯 한숨을 쉬며 답했다. 얼마나 못 그만두겠으면 워크숍까지 여는 걸까. 두부는 서점 주인의 고된 얼굴을 떠올리다 말고 머릿수라도 채워야겠다는 심정으로 워크숍 신청 폼을 클릭했다. 그런데 무얼 그만두어야 하지.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은걸. 

  이주한 지 만 2년. 두부는 그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집중했다. 일기도 쓰고 있지 않았다. 떠나오기 전까지 두부는 지나치게 많은 기록을 했다. 시시각각 변하는 환자의 상태를. 간병 일지는 무척이나 세세하고 구체적이었으며, 냉정했다. 책임을 다했다는 걸 스스로 각인하듯 기계적으로 쓰인 죽음의 과정. 장례를 치르고 나서 도망치듯 이주를 결정한 뒤에 이삿짐을 정리하면서 제일 먼저 한 일은 간병 일지를 버린 것이었다. 

  혼자가 되고 나서 꼭 지키기로 했던 것은 딱 두 가지였다. 좋은 걸 먹고 푹 잘 것. 두부는 제철에 난 식재료들을 아낌없이 소비했다. 냉이와 달래, 눈개승마와 엄두릅, 머위와 산마늘 같은 봄철 채소를 특히 잘 먹었다. 살고 싶었다. 물이 가득 차 있는 제습제처럼 죽음을 머금고 있는 기분. 오래 밴 지독한 냄새 같은 걸 떨쳐버리고 싶었다. 

  일전엔 모르고 지나치던 것들에도 눈길이 갔다. 여름 깃을 띤 새가 사라지면 겨울 깃의 새가 보였고, 무리를 지어 떠나는 새들과 홀로 이동하는 새들을 구분할 수 있었다. 도요새는 최대 6,000km를 날아 뉴질랜드에서 두 계절을 보내고, 한국이 봄이 되면 다시 돌아왔다. 도요새는 언제나 봄을 사는 종이구나. 언젠가부터 두부는 새 사진을 자주 찍었다. 그림까지 그리는 건 과하게 각 잡는 행위 같았고, 핸드폰에 내장된 카메라로 찍는 것쯤은 할 수 있었다. 새는 귀엽고 용감하고 자유로워 보였다. 도시의 비둘기를 피해 다니던 두부는 이제 모래사장 위에 작은 스탬프처럼 찍힌 새 발자국을 한참 들여다보는 사람이 되었다. 

  워크숍 신청이 완료되었다는 메시지를 확인하고 두부는 조금 후회했다. 그만둘 걸 찾는 게 번거로운 것이 아니라, 결심 비스름한 걸 해야 한다는 것이.

   

*


  워크숍 0회차는 단톡방에서 시작되었다. 서점 주인은 간략하게 모임의 규칙을 알려주었다. 모임은 동짓날부터 음력 새해 전까지 총 4회로 진행된다. 무얼 그만두고 싶은지 나누고, 왜 그만둬야 하는지 이유를 말하고, 실제로 그만두는 연습을 해보고 난 뒤, 정말 그만둘 것인지를 결정하며 끝이 난다. 참여자들은 모두 닉네임을 사용한다. 서로 간에 실제 아는 사이라 하더라도, 모임에서만큼은 익명을 고수한다. 모임에서 나눈 내밀한 사정들은 기록하거나 유포하지 않는다. 

  [자조 모임 아닌 자조 모임 같군요.] 

  [액막이하는 것 같기도.]

  [이렇게 말하니까 좀 엄밀해 보이긴 한데, 내년에는 더 잘 살자, 뭐 이런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세요.] 서점 주인의 메시지를 끝으로 대화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다들 소심하게 하트 정도만 눌렀다. 

  워크숍이 열리는 서프샵은 단독 주택을 개조해 만든 공간이었다. 1층에는 서퍼들이, 2층에는 맥주와 곁들일 타코나 잠발라야 같은 음식을 파는 매장이 있었다. 건물 외벽으로 연결된 철제 난간을 타고 올라가면 아늑한 다락이 있고, 반 층 더 올라가면 옥상이었다. 여름에는 사람들이 옥상에 타프를 쳐놓고 라탄 소파 위에 누워 태닝을 했다. 발리 스타일의 패브릭이 바닷바람에 휘날리며 둥근 반원 형태로 부풀기도 했는데, 그게 꼭 열기구 모양처럼 보였다. 청명한 날에는 오색의 천 자락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으나, 한겨울에는 빨랫감 하나 없이 밋밋했다. 

  천정이 낮은 다락 한켠에 좌식으로 빙 둘러앉은 워크숍 참여자 중에는 서로 안면이 있는 사이도, 처음 보는 이들도 있었다. 서먹한 공기를 풀어보려는 듯 서점 주인이 먼저 운을 뗐다. 

  “시작은 가볍게요. 내년에는 돈 생각 좀 그만하고 싶습니다…….”

   그러자 주전부리를 들고 오던 서프샵 관리자가 아니 그걸 관두면 어떡해요! 하고 핀잔을 주며 자리에 앉았다. 돈을 벌려거든 이런 일은 안 하는 게 맞긴 하지만, 그래도 사업자의 직분이라는 게 있는데! 관리자의 너스레로 한결 누그러진 분위기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닉네임으로 자신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참여자들은 서점 주인 이아고를 포함해 모두 일곱 명이었다. 사람들은 서점 주인에게 받은 작은 카드를 펼쳐보았다. 카드에는 ‘나는 (   )을/를 그만두기로 합니다.’라는 문장이 프린트되어 있었다. 1회차에서는 누가 무얼 그만두고 싶은지 이유를 밝히지 않고 키워드만 나누기로, 그것을 왜 그만두고 싶어하는지를 유추하기로 했다. 괄호가 다 채워진 카드는 다시 섞여 사람들에게 나누어졌다. 각자 앞에 놓인 카드를 하나씩 열어보았다. 키워드는 다음과 같았다. 


   ( 담배 피우기 )

   ( 돈 걱정 )

   ( 개 산책 )

   ( 집착하기 )

   ( 오지랖 )

   ( 유튜브 시청 )

   ( 쓰기 )


  “이거 추리 게임이에요?” 레티가 물었고, 사람들은 정말 그렇다며 웃었다. 어떤 건 보자마자 이건 그만두는 게 맞지 싶었고, 어떤 단어들은 막연하게 느껴졌다. 이아고는 쉽게 가자며 ‘담배 피우기’ 카드를 골랐다. 

  “이유가 뭐 필요해요? 작심삼일 프로젝트 1순위 아닌가.” 

  “나쁜 습관이라고 다 끊어야 할 필요는 없지 않나요. 자기만 아는 유해하고 중독적인 습성쯤은 다들 있잖아요. 음침하게 비계 파서 인스타그램 훔쳐보는 건 정신 건강에 더 나쁜데, 밤에 잠 못 자고 그래서 수면 질 확 나빠지고. 차라리 담배가 나을 듯.”

  금연 결심을 비웃기라도 하듯 대화는 건강 숭배와 몸에 대한 정상성 집착에까지 뻗어나갔다. 담배만큼 나쁘고 좋지 않은 것들을 일일이 나열하다가는, 이렇게 피곤할 바에야 그냥 계속 피우는 게 낫지 않겠는가 하는 묘한 결론에 이르렀다. 서프샵 관리자인 밍이 그래서 어쩌라는 건가요, 하며 대놓고 티를 내는 바람에 시작부터 키워드의 주인이 밝혀졌다. 규칙을 엄수해 달라는 이아고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다들 제 키워드 앞에서는 아예 말을 안 해버리기 일쑤여서 눈치껏 짐작할 수 있었다.

  “다들 마피아 게임 안 해보셨나요. 왜 이리들 못하시지…….” 

  추리가 이어지는 동안 두부는 이아고 옆에 반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올리브에게 눈길이 갔다. 지난 여름, 서점에서 진행한 <바캉스 소설 읽기 모임>에서 본 사람이었다. 모성애가 결여된 듯한 행동을 보이는 소설 속 캐릭터를 비토하는 참여자들에게 찬물을 끼얹듯 왜 꼭 공감하려 드냐며 되묻던 사람. 올리브는 그 회차 이후로 모임에 참여하지 않았고, 남은 사람들은 일전의 설전 따위는 없었다는 듯 더욱 공감에 집착하며 캐릭터에 제 모습을 투영했다. 두부는 참여자들이 제 식대로 인물을 분석하고 평가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냥 자기가 그런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거면서. 서점 주인이 실망할까 봐 꾸역꾸역 모임의 마지막 책까지 읽기는 했으나, 맞장구로만 반복되는 대화가 계속될수록 두부는 올리브의 건조한 말투를 떠올렸다. 그녀였다면 한없이 들뜨기만 한 분위기를 단박에 제압했을 텐데. 

  올리브는 이번에도 대체로 말이 없었고, 가끔 이야기가 곁가지로 빠져 많이 멀리 간다 싶을 때도 슬쩍 웃기만 했다. 참여자들 가운데 가장 포커페이스인 사람, 혹은 금방 탄로 날까 봐 아예 숨어버리는 사람. 두부는 올리브의 키워드가 무엇일지 궁금했고, 마피아도 마니또 게임도 아닌 이 허술한 워크숍의 진행 방식이 약간 흥미롭게 느껴졌다. 

  “다음 회차에는 그만두고 싶은 이유를 글로 써오시면 됩니다. 자주, 그리고 오래 생각하면서 떠나보낼 준비를 하시면 됩니다. 다들 연휴 잘 보내시고요, 음력 1월 1일 전까진 새해 인사는 하지 않기로.”

   

*


  곤히는 언니 집에 머물며 개를 돌보고 있다. 언니는 할 것도 없는 겨울에 불러 미안하다고 했지만, 곤히는 개의치 않았다. 그즈음 곤히는 동거하던 애인과 헤어짐을 앞두고 있었다. 각자의 방도 없이, 개인 소유의 물건이랄 것도 없이 오랜 시간을 함께 점유한 사이였다. 서로의 것을 나누고 짐을 빼는 것도 일이었다. 그게 힘들어서 아직 헤어지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애인과의 관계가 틀어질수록 집 정리에도 소홀해졌다. 곤히가 애인에게 준 것, 애인이 곤히에게 준 것들도 그저 빛바랜 살림이 되어 아무렇게나 포개지거나 쌓여 있었다. 바닥 가득 널브러져 있는 옷가지들이나 말라비틀어진 화분을 보며 곤히는 집에서 아끼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애인도, 그를 대하는 곤히의 마음도 이제 더는 소중하지 않았다. 언니의 여행을 핑계 삼아 곤히는 그 집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언니의 집은 단출하고 깔끔했다. 일 년에 한 계절은 꼭 더운 나라에 가 있는 언니는 그 흔한 다육식물 하나 들인 적이 없었다. 그런 언니에게 갑자기 개가 생겼다. 동네에서 집마다 밥을 챙겨주던 떠돌이 모견의 새끼였다. 장맛비가 쏟아지던 날, 언니는 어미와 떨어져 혼자가 된 개를 발견했다. 온몸이 젖은 채 덜덜 떨고 있는 어린 개를 집으로 데려왔다. 비가 그치면 내보내려 했지만, 개는 생각보다 많이 연약해져 있었다. 언니는 괜히 정붙이기 싫다며 이름도 그냥 ‘개’라고만 불렀는데, 지금까지 언니의 집에 살면서 ‘개’, ‘개-야’, ‘갸’가 되었다. 

  언니는 다른 건 몰라도 산책만큼은 꼭 시켜달라고 요구했다. 강풍이 불고 폭설이 내려도 하루에 두 번은 꼭 나가야 했다. 귀찮은 건 아니었다. 다만 개와 함께 천변을 거닐 때, 킁킁거리며 나무 밑을 탐색하는 개를 가만히 지켜볼 때, 곤히의 보폭에 맞춰 걷다 말고 힐끔 위를 올려다보는 개와 눈이 마주칠 때, 곤히는 괜스레 멜랑콜리해지곤 했다. 새가 우는 소리, 개가 내는 발자국 소리, 멀리서 들리는 일정한 파도 소리만 퍼지는 고요한 풍경 속에 아직 친하지 않은 개와 나란히 걷고 있다는 게 이상했다. 지극히 혼자가 된 기분. 곤히는 너무 멀리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개와 산책을 하면 슬퍼집니다. 그만두고 싶습니다.”

  곤히는 마지막 문장까지 다 읽고 나서 고개를 푹 파묻었다. 집사의 체력 이슈일 거라는 가벼운 추측이 무색해졌다. 사람들은 박수를 쳐야 하는 건지 멋쩍어하며 곤히와 이아고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누군가가 곤히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얼마 안 있어 상기된 두 볼을 손등으로 감싼 곤히가 창피하다며 괜히 웃어 보였다. 


  다음은 유영의 순서, 키워드는 ‘집착하기’였다. 유영은 수개월째 도전하고 있는 아사나 앞에서 여전히 막혀 있었다. 될 것 같은 날도 있고, 아닌 날도 있는데, 아닌 날이 더 많았다. 새벽 수련을 다닌 지도 어느덧 반년. 바다 수영이 좋아서 휴양지로 이주를 택한 유영은 이제 바다보다 식물원에서 하는 야외 수련을 더 즐겼다. 모처럼 기필코 제대로 하고 싶은 것이 생겼는데, 도통 되지가 않아서 절망스러웠다. 그냥 발만 담갔다는 데 의의를 두고 이쯤에서 그만둘까. 하루는 수련 도중에 왈칵 눈물이 쏟아질 만큼 화가 났다. 어떻게 해도 안되는데 왜 이렇게 못살게 굴까. 그냥 포기하면 될걸. 그러나 유영은 이미 한동안 그런 마음으로 한 시절을 살았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지만, 유영 자신만큼은 알고 있었다.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것. 아이를 유산하고 난 뒤의 일이었다. 무엇에도 욕심부리지 않았고, 애정을 다 하지 않았으며, 곁을 내주지 않았다는 걸 유영은 알고 있었다. 마음 주머니가 텅 빌 때까지, 부레처럼 둥둥 떠오를 만큼 한없이 가벼워지고 나서야 유영은 다시 무언가를 오롯이 감각할 수 있었다. 요가는 유영이 모든 걸 다 비우고 나서 다시 담기로 한 최초의 것이었다. 역동적인 시퀀스를 마치고 나서 땀에 흠뻑 젖은 채로 호흡 명상을 하는 동안 선생님은 실패에 민감해지지 말고 흘려보낼 것을 강조했지만, 유영은 그럴수록 숨이 더 가빠지는 것만 같았고, 졸지에는 켁켁거리며 중간에 찬트라를 멈추기도 했다.

  사람들은 조약돌을 쌓듯 자신만의 실패하는 아사나를 하나씩 꺼내었다. 수년째 어쿠스틱 기타를 연습하고는 있지만 레퍼토리가 전혀 늘지 않는다는 사람부터 경기 한번 뛰어보지 못한 지역 여성 배구 동호회 회원, 느린 배속으로 영상을 틀어놓고 뜨개질을 시작해도 늘 매듭 하나를 놓쳐버리고 마는 사람까지. 사람들은 생각보다 못하는 걸 못 한다고 말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었다. 잘 못하는 상태를 못 견뎌 하면서도, 그 미숙함을 견디며 뜨개질하고, 배구 동호회에 나가고, 기타 연습을 했다. 그 꾸준한 ‘못함의 목록’은 유영을 약간이나마 느슨하게 풀어주었다. 

  “유영님의 유영은 수영할 때 영법을 뜻하는 건가요?”

  좀처럼 말이 없던 올리브가 적극적으로 질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수영을 공통분모로 두 사람의 대화가 길어지자, 자연스레 잠시 쉬는 시간이 생겼다. 담배를 태우거나 화장실에 가기 위해 삼삼오오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두부는 두 사람 사이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지역민 할인이 가능한 리조트 수영장의 회원권 가격 같은 실질적인 정보를 나누다가, 조심스레 목소리를 낮춰 여름철에 자주 가는 해변을 공유했다. 외지인들은 잘 모르는 숨겨진 장소들이었다. 두부는 반사적으로 고갤 들어 올리브를 바라보았는데, 그건 올리브의 비밀 스팟 중 한 곳이 두부에게도 내밀한 장소이기 때문이었다. 기척을 느꼈는지 올리브는 두부를 쳐다보며 싱긋 눈짓을 했다. 펜션들로 막혀 있어 주차가 안 되는, 그래서 항상 건너편 논길 구석에 차를 대고 제법 걸어 들어가야 하는 해변이었다. 수심이 제멋대로여서 잘못 발을 디뎠다간 금세 정수리까지 잠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입수만 안 한다면 대체로 잔잔하고 고요하며 투명하기까지 한 바다였다.

  두부는 그 해변에서 십 년간 함께했던 고양이를 보내주었다. 유골의 반은 바다에, 나머지 반은 메모리얼 스톤으로 남겨 작은 단지에 담아두었다. 뚜껑을 열어본 적은 거의 없었다. 혹시나 상했을까 봐. 영롱한 색깔의 작은 돌멩이들이 금이 가 있거나 곰팡이라도 슬었을까 봐 두려웠다. 원인 미상의 급성 쇼크사였다. 고양이는 서른 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죽었다. 짧은 면회가 끝나고 병원 문밖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전화가 왔다. 조금 전까지 얇은 유리창 너머에서 두부의 목소리에 약하게나마 반응하던 고양이는 그 사이, 차가운 수술대 위에 누워 있었다. 땀이 뚝뚝 떨어질 때까지 심폐소생술을 하던 의사는 잔인하게도 두부에게 선고 시간을 유보했다. 초점 없이 축 늘어진 고양이의 유독 컸던 앞발을 소심하게 붙잡고 있던 두부는 모니터 경보음이 직선으로 울려 퍼지고 나서도 크게 울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고양이를 와락 껴안고 싶었는데 그것도 하질 못했다. 

  죽은 고양이가 담긴 종이 박스를 두 팔에 감싸안고서 집으로 오는 길. 삼 킬로가 넘는 거리를 걷는 동안 두부는 몇 번이나 멈춰 섰다. 팔이 너무 아팠다. 대리석 볼라드에 다리 한쪽을 올려 허벅지 위에 운구함을 내려두기를 몇 차례 반복했다. 살아생전 고양이가 늘 그렇게 두부의 위로 올라왔던 것처럼. 어깻죽지가 찢어질 것 같이 힘이 들었지만, 그럼에도 직접 고양이를 안고 걸어가기로 했다. 적어도 그만큼은 해야만 했다. 

  올리브는 날이 더워지면 줄곧 그 바다에서 시간을 보낸다고 말했다. 거칠지 않은 파도가 몸에 감길 때 찰랑이며 내는 소리만을 의식하며 유영을 하다 보면 다른 세계로 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물기로 된 커다란 막이 감싸고 있는 먹먹하고 고요한 세계. 물속에서는 언제나 노이즈캔슬링 헤드폰을 쓰고 있는 것 같아 좋았다. 올리브는 두부에게도 말을 걸었다. 

  “여름이 되면 같이 가요.”

  “좋아요.” 

  “수영을 좀 하세요?”

  “아니요…….”

  “오…… 이제 배우면 되겠네요.”

  “네? 아, 네…….”

  두부는 물속을 자유롭게 움직이는 자신을 상상했다. 어쩐지 그 물속은 고양이의 뱃살처럼 포근할 것만 같았다. 팔다리를 휘저으며 와락 껴안아야지. 사정없이 껴안아 버려야지. 햇살을 받으며 한없이 나른해지던 고양이의 얼굴을 곰곰 떠올려보았다. 이윽고 이아고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고, 테이블 중앙에 ‘유튜브 시청’ 카드가 세워졌다. 애초에 구색만 맞추려고 정한 키워드였다. 핸드폰 메모장에 짤막하게 쓴 몇 줄이 전부였던 두부는 다른 이들의 시간을 낭비하는 것만 같아서 이내 초조해졌다.  

  “저…… 지금이라도 키워드를 바꿔도 되나요.”

  “계속 유료 구독하시게요?”

  “그건 아니고…….”

  두부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그것 말고 진짜 그만두고 싶은 걸 말하고 싶다고 했다. 삼세판은 없다며 사람들이 다시 두부에게 귀를 기울였고, 두부는 집중도가 올라가는 게 새삼 부담스러우면서도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미워하는 마음을 그만두고 싶어요. 정말이요.”

   


  2회차 워크숍이 끝나고 보름간의 시간이 주어졌을 때, 참여자들은 그만두는 연습을 시작했다. 올리브는 그만두는 것에 집중하지 않고, 대신 몸을 더 혹사하는 방식을 택했다. 기상 시간을 세 시간 앞당겨 바쁘게 움직였다. 유영을 따라 요가원을 다니기 시작한 올리브는 새벽 수련을 끝내고 나면 곧장 천변 데크를 뛰었고, 아침 일찍 여는 카페에 가서 라테 한 잔을 마시고는 수영장으로 향했다. 자유 수영은 시간 제한이 없었고, 상급자 레인은 늘 한가로웠다. 올리브는 단단히 이어플러그를 낀 채 레인을 독차지하며 수영을 했다. 최대한 쉼 없이, 랩 횟수를 늘려가며. 

  올리브는 물속에 얼굴을 묻고 있을 때마다 수경 너머로 흘깃거리며 옆 레인을 관찰했다. 줄지어 수중 걷기를 하는 할머니들의 실루엣을, 색색의 킥보드를 붙들고서 하염없이 물거품을 내는 어린이들의 작은 두 발을. 스마트 워치에 찍힌 랩 횟수가 늘어날수록 올리브의 의식은 점점 물속 풍경이 아닌 곳으로, 관성적으로 옮겨 갔다. 이쯤에서 관둘까. 그런 고민은 쓰고 있지 않을 때도 디폴트 모드처럼 작동하는 것이어서, 무엇을 하고 있든 올리브를 괴롭혔다. 점심 휴식 시간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나올 때까지 올리브는 레인을 돌고 또 돌았다. 그렇게 체력을 다 쏟아내고 나면 배가 고픈 것도 까먹고 졸음이 밀려왔다. 과식하듯 거하게 낮잠을 자고 나면 리셋. 다시 공원 길을 뛰고, 동네 뒷산을 오르고, 저녁 수련을 했다. 몸을 피곤하게, 그래서 잡생각이 사라지게. 손목이 조금 시큰해도, 예전처럼 오른쪽 귀가 약간 땡땡하게 부어오르는 것 같아도 괜찮았다. 좋은 걸 먹고 푹 잘 것. 워크숍에서 두부가 했던 말과 올리브의 일상은 사뭇 다르지 않았다. 이곳에 이주하고 처음 정했다던 두 가지 목표. 잠이 늘 문제였던 올리브는 그 단순한 목표를 이루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올리브는 언제든 도망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처럼 굴곤 했다. 언젠가 어느 행사 자리에서 만난 선배는 말했다. 너는 두 발 다 담그고 있는 게 촌스러운 거 같지? 완전히 푹 들어가지도 못하잖아. 못 헤어나오고 허우적댈까 봐. 실은 엄청 좋아하면서 티도 못 내고. 선배는 너무 방어적일 필요 없다는 뜻으로 말한 거였지만, 올리브는 들켜버렸다는 생각에 몹시 당황했고, 수치스러웠다. 지가 뭘 안다고 무당처럼 구는 거야. 시간이 지날수록 선배의 말은 일종의 예지처럼 올리브를 옥죄어왔다. 끝까지 가보지도 않았으면서. 제대로 해본 적도 없으면서. 실은 선배가 한 말이 아닌 말들까지 살을 붙여가며 올리브는 스스로를 다그쳤다. 올리브는 몇 달째 작업방 문을 열지 않았다. 애초에 없는 공간인 양, 환기 한 번 시키지 않았다. 

  가끔 천변을 뛰다가 우연히 두부를 마주치기도 했다. 두부는 나무 데크에 두 팔을 걸친 채 하천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탐조 활동이 취미시구나. 그러면 두부는 아니라며 과하게 손사래를 쳤다. 적어도 이틀에 한 번꼴로 뵙는데, 이 정도면 루틴 아닌지요. 두부는 그렇게까지 작정하고 뭘 하는 건 아니라며 민망해했다. 그러나 올리브는 두부가 이 하천에 자주 오는 새들 이름을 웬만하면 다 꿰고 있다는 걸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계절에 따라 깃털 색이 달라지는 이유 같은, 올리브는 죽었다 깨어나도 알 리 없는 정보를 술술 읊는다는 것도. 두부는 밤톨만 한 새 한 마리에게도 깊은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었다. 올리브는 새들을 지켜보는 두부의 옆모습을 얼마간 바라보다가, 두부의 호기심 어린 눈빛이 유난스럽게 느껴지다가도, 솔직하게는 조금 부러웠다. 꾸준하게 무언가를 들여다보는 힘, 그 아끼는 마음이 환하게 비치는 것 같아서. 두부의 그 환한 태도가 올리브에게는 마치 한 번도 주어진 적 없는 능력처럼 느껴졌다. 


  그날, 두부는 미리 써놓은 글 한 줄 없이 즉흥으로 엄마 얘기를 꺼냈다. 죽은 엄마를 아직도 미워하고 있다는 말까지 속절없이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러나 앞선 사람들의 낭독을 들으며 두부는 정도는 다르지만 그들 역시 스스로를 부단히 참아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래서 조금은 뻔뻔해져도 될 것 같았다. 

  두부는 고양이의 죽음에 엄마가 연루되었을 거라 짐작했다. 고의는 아니었을 것이다. 비정상적으로 높아진 간 수치를 확인하던 의사는 독성이 있는 무언가를 섭취했을 가능성에 대해 언급했고, 두부는 전날 화장실 바닥에서 은은하게 올라오던 락스 냄새를 떠올렸다. 청소가 끝난 직후 화장실 문이 열려있었는지, 바닥이 마르기도 전에 고양이가 안으로 들어갔는지, 그루밍을 하면서 발끝에 묻은 독성 성분이 체내로 흡수된 건지, 그 무엇도 알 수 없었다. 다만 고양이는 자기 전에 네 발 전부를 매우 꼼꼼하게 그루밍하던 습성이 있었고, 그날 왜인지 유별나게 락스 냄새가 많이 났다는 것. 엄마는 화장실 청소조차 하지 않았다고, 하수구에서 올라오는 냄새일 거라고 억울해했지만, 다용도실 구석 어딘가 온갖 세간들 사이에 숨겨져 있던 작은 락스 통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붙이려면 충분히 이어 붙일 수 있는 단서들로 두부는 어떤 가능성을 포착한 것만 같았고, 그제야 용인하는 단계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갑작스레 벌어진 불가해한 죽음 앞에서 두부는 반드시 이유가 필요했다.

  두부는 돌봄 게이지가 있다면 엄마는 늘 최저치일 거라고, 그게 엄마의 특성이라고 생각했다. 두부가 자랄 때도 그랬으니까. 엄마는 원체 무심했고, 애정 표현도 잘 못하는 사람이었다. 학교에 갔는지, 저녁밥을 챙겨 먹었는지도 별로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래서 두부는 짧게나마 외박할 일이 있더라도, 때가 되면 전화를 걸어 고양이 밥은 챙겨주었냐고 닦달하듯 물어야 했다. 같이 살기는 했지만, 고양이는 두부만의 고양이였다. 고양이가 죽었을 때도 엄마는 습관적으로 염주를 돌리면서 다음 생에는 꼭 사람으로 태어나라고 비는 게 전부였다. 거기까지가 걔 운명이었나 보지. 남일 대하듯 툭 내뱉는 엄마의 말 한 마디에 두부는 쌍심지를 켜고 달려들어서 당장 사실을 말하라고 다그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그러나 설사 엄마가 잘못을 인정한다 한들 달라지는 건 없었다. 엄마는 두부가 집을 비운 틈에만 화장실 청소를 했다. 무독성 클리너와 리모넨 프리 세제를 잔뜩 사다 놔도 엄마는 소독력이 부족하네 미끌거리기만 하네 불평하며 잘 쓰질 않았다. 한참이 지나, 두부는 그때 그 일이 언젠가는 벌어질 일이었을지도 모른다고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고양이도 죽고, 엄마도 죽고 한참이 지나서야. 

  엄마의 투병 생활 내내 두부는 하나뿐인 혈육의 도리를 다했다. 다니던 회사를 관두었고, 전 직장 선임이 대표로 있는 곳으로부터 간간이 프로젝트를 제안 받아 생계를 유지했다. 엄마는 죽기는 내가 죽는데 왜 네가 신변 정리하듯 구냐고 타박했지만, 간병의 부담을 나눌 만한 형제도, 돈도 없었으므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헌신이나 전념 같은 비장한 태도가 아니었다. 책임지는 과정을 엄마에게 낱낱이 보여주고 싶었다. 몸을 뒤척이면 등이 배기나 싶어 베개를 더 포개주는 것. 항암 치료를 들어가기 전, 그나마 식욕이 돋아 있을 때 그간 엄마가 유튜브를 보며 먹고 싶어 하던 음식을 기억하고 사다 주는 것. 그런 사소한 것부터 전부 다. 마치 갓난아기를 닦이고 먹이고 재우는 것처럼 철저한 돌봄의 테두리 속에 엄마를 뉘어 놓고서 두부는 있는 힘을 다해 보여주고 싶었다. 이게 사랑이고, 이게 안정이고, 의존이라는 걸.

  “엄마는 내가 유일했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잖아요. 그래서 엄마 간병에 더 몰두했나 봐요. 엄마한테 해준 것보다 몇천 배는 더 해줄 수 있었는데. 그럴 시간도 안 주고 가버린 게 너무 아쉬워서, 그게 견딜 수 없이 화가 나요.” 

  두부의 떨리던 목소리는 방 안의 사람들에게도 고스란히 가닿았다. 두부의 미움이 실은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를 사람들은 감히 알 것도 같았다. 


*


  드문드문 안부를 나누던 단톡방이 유난히 시끄러웠던 날이었다. 레티가 보낸 다소 감정적인 메시지가 신호탄이었다. 일전에 워크숍에서 얘기했던 그 중국집에 찾아갔는지, 탐사 프로그램에서나 나올 법한 구도로 찍힌 식당 앞 모습과 녹슨 쇠줄에 묶여 있는 마당 개 두 마리의 사진들이 연달아 올라왔다. 개들이 묶여 있는 작은 마당은 과속으로 인해 자주 사고가 난다던 도로변과 최소한의 단차도 없이 맞닿아 있었다. 매연 때문인지 그간 씻기질 않았던 건지 그을음 수준으로 곳곳이 거무스름해진 개들은 딱 봐도 상태가 안 좋았다. 레티 말에 의하면 그 개들은 산책은커녕 그 아스팔트 마당 밖을 나가본 적이 없는 것 같다고 했다. 

  “한여름에도 그 털복숭이들을 그늘막도 없이 내깔려 둔다니까요. 겨울은 더 해. 동파되지 말라고 야외 수도꼭지에는 보온재를 칭칭 감아놨으면서 개집에는 방석 하나 없어요. 가로등도 멀찍이 있어서 밤에는 보이지도 않는다고요. 그러다 술 먹고 운전대 잡은 미친놈들이 들이박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레티는 오지랖을 그만 부리고 싶다면서도, 도저히 그 개들을 그냥 두고만 볼 수 없었다. 

  두부도 그 방면을 지날 때 그 개들을 본 적이 있다. 개집이 놓인 곳이 도로와 인접한 탓에 무척 위험해 보이기는 했다. 그 중국집뿐만 아니라, 마을 곳곳에 그런 처지의 개들을 볼 수 있었다. 딱 목줄 길이만큼의 영역이 전부인 줄로만 알고 살다 죽는 시골 개들의 숙명. 언젠가 레티는 볼트 커터를 하나 장만해서 동네를 돌아다니며 쇠 목줄을 죄다 끊어줄 거라고 했다. 마침 관리가 잘 된 리트리버와 보더콜리 같은 커다란 개들이 밤 산책 중이었다. 적어도 개 팔자 바꾸는 건 어렵지 않잖아요. 백날 티브이에 강형욱 나오면 뭐 하냐고. 노인네들은 아직도 개들을 무슨 캡스 경보기쯤으로만 알지. 그런 까닭에 두부는 레티의 어깃장이 그저 과한 감정 표출로만 느껴지지 않았다. 

  [작전을 짜고 있는 중입니다.]

  사람들은 군청 담당 부서 연락처나 제보할 만한 민간 보호단체의 소셜 계정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내심 신고를 한다고 해도 크게 달라질 게 없다는 걸 알았다. 그렇게 따지면 계곡 인근 펜션에서 키우는 비쩍 마른 달마시안도, 산사 근처의 깊숙한 산골 마을에 사는 동네 개들도 전부 신고 대상이었다. 동절기에는 저녁 장사를 안 한다는 중국집은 해가 지면 주인들은 떠나고 개들만 남는다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짜장면 사진이 한 장 올라오더니, 레티는 건물 외곽을 비추는 CCTV는 따로 없는 것 같다면서 오늘 밤에 실행하려 한다는 계획을 거칠게 내뱉었다. 두부는 메시지 창을 쉽게 닫지 못하고 한참을 띄워놓았다. 정말 뭐라도 하려는 걸까. 졸인 마음으로 메시지를 쓸까 말까 고민하던 와중에, 올리브가 태클을 걸었다. 

  [그래도 그건 범죄인데요.] 

  두부는 올리브의 메시지를 조심스레 더블클릭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하트 개수가 쌓였다. 약간의 시차를 두고 레티의 답변이 올라왔다. 

  [저렇게 방치되는 걸 계속 보는 것도 죄예요.]

  레티의 말이 일견 맞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올리브의 반격도 거침이 없었다. 

  [그렇게 따지면 세상에 벌어지는 웬만한 일을 다 방관하고 있는 거 아닌가요.]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되죠. 모르는 척하지 말고.]

  [레티 씨의 몫을 우리한테까지 넘기지는 마세요.] 

  설전이 길어지자, 참여자들이 메시지를 확인하는 속도도 더뎌졌다. 즉각적으로 사라지던 읽지 않음 표시 수가 점차 늘어나더니, 한동안 5에 머물렀다. 이아고의 중재가 있기 전까지 사람들은 단톡방을 열어보지 않았다. 

  서프샵 관리자인 밍은 포항에서 열리는 서프 대회 준비를 핑계로 참여 중단을 알리며 슬쩍 단톡방을 빠져나갔다. 밍의 예정된 일정이었다고 이아고는 부연했지만, 사람들은 무언가 찜찜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두부는 그간 참여했던 서점에서의 모임을 떠올렸다. 감상 후기가 약간씩 갈리는 독서 모임 정도를 빼고는 이렇게까지 대차게 각을 세운 적은 없었다. 익명을 보장하면서까지 서로 간의 개인적인 얘길 나눈 적도 없었지만. 두부는 이번 워크숍의 성질이 유독 끈적거린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어찌 보면 그건 당연했다. 그만두고 싶을 만큼 무겁고 간절한 것, 지독하게 힘이 드는 것들을 나누었으니까. 실은 매 순간 민감한 상태로 만나 서로의 몸짓과 눈길에 조심스레 반응했을 것이었고, 집으로 돌아가선 내가 했던 말과 상대가 했던 말들을 복기하며 혹여 실수한 게 없나 살펴보았을 것이었다. 두부는 이아고가 너무 쉽게 워크숍의 주제를 정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펼쳐두었던 마음이 미모사처럼 순식간에 오므라들었다. 다시 바짝 경계하려는데, 메시지 알림음이 울렸다.

  [제가 레티 씨 있는 곳으로 갈게요.]

  곤히였다. 


*


  그날은 여섯 사람이 모인 마지막 날이기도 했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뒤풀이를 앞당겨 한 셈이었다. 곤히의 메시지를 받고 난 뒤 사람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중국집에 하나둘씩 집결했다. 가장 먼저 도착한 곤히는 맥주 한 병을 주문하고는 레티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개 산책을 해주는 건 어때요.” 

  “곤히 씨네 개요?”

  “아뇨. 이 집 개들이요.”

  “제가요?”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면서요. 목줄 풀어주는 것보다 안전하고, 개들도 좋아할 거고.”

  “산책만 하면 뭐해요. 들어오면서 안 보셨어요? 물그릇이라곤 죄 얼어있고, 개집은 말할 것도 없고…….”

  “산책하는 게 어디예요. 어쨌든 지금보다야 낫겠죠.”

  두 사람 앞에 각각 맥주잔이 놓였다. 레티는 곤히가 따라주는 맥주를 잠자코 보다가는 한 번에 들이마셨다. 곤히의 제안을 딱히 반박하기가 어려웠다. 때마침 이아고와 두부가 연이어 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영이, 그리고 올 거라고 예상 못 했던 올리브까지 도착했다. 단톡방에서 나눈 어마무시한 계획을 알 리 없는 노부부는 레티의 테이블에 합석하는 공모자들을 세상 친절하게 맞이했고, 그 덕에 사람들은 괜히 더 죄스러워졌다. 중국집만큼이나 연식이 오래돼 보이는 나무 의자에 정물처럼 앉아 있던 노부인이 천천히 일어나서 다다미로 된 방문을 열어 보였다. 6인용 원탁 테이블이 있는, 그 중국집의 유일한 단체 룸이었다. 

  원탁 테이블에 둘러앉아 수타면으로 만든 짜장면과 탕수육을 앞에 두고, 워크숍 참여자들은 마지막 결정을 내리기로 했다. 예정된 날짜는 아니었지만, 이왕 이렇게 모인 김에 오늘 다 끝내자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이아고부터 시계방향으로 발언 순서를 정했다. 결정의 이유를 꼭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이아고는 너무 고민들 하지 말라며 소맥 한 잔을 원샷하더니, 곧장 그만두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돈 걱정 안 하고 사는 건 생활인의 윤리에 심히 어긋나는 거 아니겠습니까. 살 궁리는 해야죠. 사람들은 당연한 거라며 공감했다. 자연스럽게 유영이 바톤을 이어 받았다. 유영은 그만두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집착이 아니라, 몰두하는 거라 생각하려고요. 어감이 다를 뿐이지, 집착이나 몰두나 실은 같은 거니까. 될 때까지 몰두해보겠습니다.”

  개 산책을 그만두고 싶어 하던 곤히 역시


  “그만두지 않겠습니다.”라고 나지막이 선언했다. 다음은 오지라퍼 레티 차례였다.  

  “이거 무슨 게임인 거죠? 왜 다 똑같이 말해.” 

  핀잔조로 농을 치던 레티는 이내 곤히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만두지 않으려고요. 곤히 씨 개 산책도 도와줄게요.”

  “저희 개를요?”

  “혼자 청승 떠니까 슬프다며요. 오지랖 부리는 김에 같이 하죠, 뭐.” 

  그러자 곤히는 아침 플로깅 시간에 개를 데리고 나가겠다고 했다. 아마도 그 산책에는 아직 곤히와 레티밖에 모르는 비밀 멤버들도 합류할 것이었다. 남은 건 두 사람. 두부는 입가에 묻은 짜장 소스를 닦아내며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올리브가 발언하는 동안, 두부는 뭐가 됐든 선택을 해야 했다. 미워하는 걸 그만두지 않겠다고 말하려니 나쁜 사람이 된 것 같고 이상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그만둘 수 있지. 두부는 오랜만에 마신 맥주 때문인지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이윽고 올리브가 입을 뗐다. 

  “결정하지 않겠습니다.” 

  보류 옵션을 생각지도 못했던 두부는 약간의 안도감을 느꼈다. 뒤이어 올리브가 계속 말을 이었다.

  “언젠가 누군가가 선물해 준 책 제목이 떠오르지 않아서 한참 거기에 매달려 있었어요. 책 표지가 예쁜 원서였는데, 작가도 제목도 기억나질 않더라고요. 이렇게 그냥 까먹나 보다 싶어 며칠을 그냥 흘려보냈죠. 그러다 어느 날, 그 까먹은 얘기를 적어두려고 일기를 썼어요. 습관적으로 줄글을 이어가는데, 신기하게도 그 책을 준 사람의 이미지가 스르르 떠올랐어요. 주중에는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주말에는 포크 밴드에서 기타와 춤을 춘다던 백인 여자였어요. 항상 자신을 시인이라고 소개했었다는 문장까지 쓰고 나니까 갑자기 그녀가 준 책의 제목과 작가 이름, 그리고 그 책을 받았던 그녀의 집, 그때 들려오던 노래까지 전부 다 어제 일처럼 선명해지는 거예요. 단지 일기를 썼을 뿐이었는데. 한편으론 내 삶의 구체적인 순간들은 늘 쓰기로부터 소환되고, 그것에 매번 의존한다는 게 무섭고 징그럽기까지 해요. 그래서 결정을 못 하겠어요. 어쩌면 그건 내가 선택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도 들어요.”

  얼마간 고요함이 찾아왔다. 제가 좀 무턱대고 무거웠죠, 하며 올리브가 다시 말을 꺼낼 때까지. 사람들은 올리브의 얘길 듣는 동안 각자의 키워드를 꺼내 보았다. 혹은 키워드가 아니더라도 마음의 무게추를 한껏 무겁게 만드는 것들을. 그것은 사랑이었다가, 죄책감이었다가, 다시 사랑이었다가, 무력감의 모양을 띤 채 원탁 테이블 위를 유령처럼 흘러 다녔다. 그게 보이기라도 하는 듯 허공에 시선을 둔 채 잠시 말이 없어지기도 했다. 어느덧 마지막 두부의 순서가 다가왔고, 두부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말할 수 있었다. 

  “결정하지 않겠습니다.” 

  납득한다는 듯 사람들은 다들 박수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음력 새해가 되려면 이틀이 남아 있었다. 참여자들은 다 같이 노부부에게 개 산책 얘길 꺼내기로 했다. 여유가 될 때마다 돌아가며 개 산책을 해주기로. 아무것도 그만두거나 그만두길 결정하지 않은 채, 사람들은 새해 인사를 나누었다. 조금 늦었거나 아직 이른 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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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소설

트랙을 도는 여자들

[단편소설] 트랙을 도는 여자들 차현지 303호가 나간대. 요즘 머리숱이 빠져 큰일이라는 사장님의 정수리 부근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데 흘러나온 말이었다. 름이가 사는 빌라에서 한 블록을 지나쳐 왼쪽 모퉁이에 있는 지구인 슈퍼 앞에 나란히 서서 갈아 만든 배 주스를 마시던 중이었다. 햇살이 정수리 중앙보다 약간 비낀 채로 쏟아졌다. 사장님은 파라솔 안쪽으로 들어오라며 손짓을 했지만 름이는 괜찮다며 멀찌감치 서 있었다. 아이스크림 냉동고 팬 밖으로 내뱉는 뜨거운 바람이 계속 정강이를 달구었다. 일백 퍼센트 과즙이라는데, 그러기엔 너무 달지 않아? 내가 저녁마다 끼니를 챙기고 나면 무조건 배를 잘라 먹는데, 소화 잘 되라고, 근데 꼬박 일 년을 먹었는데도 이만큼 다디단 배를 물어 본 기억이 없어. 사장님의 말이 끝나자 진분홍 꽃잎이 그려진 양산을 들고 있던 아주머니가 손끝으로 사장님의 어깨를 툭 쳤다. 생 거 아니면 뭐가 들어 있는 게 당연하지. 름이의 어깨보다 폭이 좁은 양산을 들춰 쓴 아주머니는 이천년대 초반에 잠시 유행하다가 사라진, 프릴이 잔뜩 들어간 볼레로 카디건을 입고 있었다. 안 그래도 짧은 상의가 팔뚝 살에 묻혀 더 작아 보였다. 아주머니는 그날 일어난 사건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싫은 눈치였다. 삼십 년을 넘게 살아 온 동네에 대한 애정 때문인지 그런 흉흉한 말이 나도는 걸 원치 않았다. 클로버 부동산 사장님 역시 매스컴에 노출되어 괜한 소란으로 집값이 떨어질까 염려했다. 별스러운 일도 아닌 거 갖고 야단이야. 딴 동네는 소리 소문 없이 주기적으로 생겨.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사장님 말로는 사람이 모여 사는데 죽이고 죽는 일들은 끊임없이 생기고, 그게 곧 사람 사는 모양새라는 것 같았다. 한껏 목을 뒤로 젖혀 주스를 탈탈 털어 넣더니 입가에 묻은 배즙을 단숨에 닦아낸 사장님은 어쨌거나 자기도 조심해, 라며 름이를 안쓰럽게 쳐다보았다. 여자 혼자 사는 게 뭐 쉬운 일인 줄 알아? 때 되면 시집가는 거 딱히 뭐 없어. 외로운 건 둘째치고 안전해야 할 거 아냐. 제 몸은 제가 챙겨야지. 방 보려면 얼른 와, 금세 빠지니까. 문단속 잘하고. 사장님과 볼레로 아주머니는 다 마신 주스 병을 쓰레기통에 던지고는 큰길 쪽으로 유유히 걸어갔다. 교차로 앞에서 무단횡단을 하기 위해 차들을 살피는 진분홍색 양산이 점차 멀어졌다. 내 몸은 나만이 지킬 수 있되, 안전을 위해서라면 혼자 살아서는 안 된다는 모순은 또 뭐야. 름이가 그들을 멀거니 지켜보았다. 철물점에서 키우는 개가 배를 보이고 드러누워 한적하게 볕을 쬐고 있었다. 주중의 한낮에는 그 개처럼 하릴없는 사람들이 동네를 어슬렁거렸다. 간혹 계절을 알리는 매미소리가 시끄럽게 번졌다. 지겨울 정도로 한적한 골목에서 그런 사건이 벌어졌다는 건 꽤나 레어한 일이라고 름이는 생각했다. 그러다가는 살인 사건을 레어하다고 말하는 것이 온당한가에 대해 고민했다. 얼마간 그런 생각에 빠져 있자 잠결에 들었던 여자의 비명이 환청처럼 귓속을 맴돌았다. 비명과 외침이 뒤섞여 담벼락을 뚫고,

  • 차현지
  • 2017-06-01

문장웹진 소설

운다의 전기

운다의 전기 차현지 파도에 휩쓸린 채 운다는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졌을 때, 나는 비로소 우리의 게임이 종결됐다는 걸 받아들였다. 그녀는 온전히 사라졌다. 우리는 언제나 속삭였다. 죽는다는 건 잠시 눈에 보이지 않는 것뿐이야. 사라지는 건 없어, 그저 보이지 않을 뿐이지. 누빔 이불을 정수리까지 덮고 우리는 속삭였다. 미세하게 열린 방문 밖에선 어머니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문틈 새로 비친 붉은 불빛. 어머니의 붉은 목소리. 목소리에서는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한 소절도 채 부르지 못하고 어머니는 기침을 해댔다. 붉은 기침. 문틈 밖에서는 붉은 것들이 진동했다. 우리는 누빔 이불을 정수리까지 덮어야 잠을 잘 수 있었다. 노래를 부르다 말고 누런 가래침을 뱉을 듯이 기침을 해대던 어머니는 나중에 가서는 비명을 질렀다. 공포에 눌린 비명이 아닌, 붉은 외침. 당신의 예전 목소리를 애타게 찾는 비명. 돌아와 달라는 비명. 어머니는 매일 밤 부엌 찬장을 열어 작은 철제함을 꺼냈다. 그러곤 식탁에 그것을 슬며시 두고서는 우리가 자고 있는지 확인했다. 어머니가 방으로 걸어오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운다는 말했다. 눈 감아. 숨죽인 우리를 확인한 어머니는 우리의 정수리를 몇 번 쓰다듬곤 했다. 감은 눈 안에서 눈동자는 계속해서 움직였다. 우리는 서로의 눈동자가 움직이고 있는 것을 알았다.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알고 있었다. 운다와 나는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운다는 비명을 지르는 어머니에게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어머니가 하는 말은 모두 다 거짓이야. 모세혈관처럼 갈라질 대로 갈라진 성대로 지껄여대는 게 말이라고 생각하니? 저건 다 거짓이고 가짜야. 우리는 누빔 이불 안에서 매일 밤 계획을 짰다. 어떻게든 어머니에게서 달아나야 해. 어머니는 점점 괴물이 되어 갈 거야. 마녀가 되거나. 어머니가 매일 밤 찬장에서 꺼내는 철제함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아니? 그건 누군가의 뼛가루야. 뼛가루가 뭔지 아니? 사람을 태우면 남는 재야. 그 재를 어머니는 매일 밤 와인에 타 마시고 있는 거야. 그러곤 다시 노래를 부르지. 빌어먹을 같지도 않은 노래를 말이야. 어머니는 은퇴한 오페라 가수였다. 한 번도 프리마돈나가 되어 본 적 없는 배우. 프리마돈나 곁에서 함께 흥분하고, 다독여 주며, 기뻐하고, 샘을 내는 역할만 전전하며 살아온 가수였다. 어머니는 무대 위에서 한 번도 「카르멘」의 「하바네라(HABANERA)」를 불러 본 적이 없었다. 온전히 그녀가 프리마돈나로 설 무대는 부엌뿐이었다. 천장에 매단 붉고 둥근 등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부엌. 그녀는 부엌에서 카르멘의 2악장 중 「하바네라」를 불렀다. 돈 호세를 유혹하기 위해 ‘사랑은 길들여지지 않는 새’라는 문장을 연이어 부르짖었다. 오른팔이 잘린 퇴역 장군처럼 어머니의 목소리는 더 이상 아름답지 않았으나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실 그녀의 목소리가 매혹적이었던 적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내겐 기억이 없

  • 차현지
  • 2013-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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