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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링 파트

  • 작성일 2026-06-01

  킬링 파트


최미래


  연애는 그리워할 연에 사랑 애. 단순히 좋아하는 마음이 아니야. 그리움을 팍팍 집어넣어야 한다. 상대와 눈 맞추는 와중에도 나는 네가 그리워, 보고 있어도 보고 싶어. 더 자세히. 연애의 포인트는 거기에 있다고. 성적인 매력에 이끌리는 것이 연애의 주라고 여겨지지만 그게 아니야. 심적인 친밀감, 동경, 흠모. 왜 그리워할 연이겠어. 연애 감정은 거기에서 온다. 그러니까 재밌는 거지. 하지만 정말 성적 매력을 뺀 연애가 가능할까?

  일반인이 등장하는 연애 프로그램을 보면서 백진주는 진정으로 연애를 즐겼던 자신의 한때를 떠올렸다. 그리고 만약 자신이 연애 프로그램에 나간다면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말을 할까 곰곰이 망상에 젖었다. 얼굴과 직업 등 개인 신상을 드러내고 출연하는 방송 특성상 연애 프로그램의 진짜 연애는 다른 출연자들이 아닌 시청자랑 하는 거였다. 방송 나온 후에 인플루언서로 전향해서 공동구매하고 유튜버하고. 끼 발산하면서 돈까지 쓸어 담으면 얼마나 좋아. 조금 더 멀리 봐야 할 텐데. 민숙 님, 갑갑하네. 짜증 난다고 티를 그렇게 내면 안 되지. 민감한 이야기일수록 천진하되 차분하게 찔러넣어야지. 상대 눈 제대로 맞추고. 카메라는 절대 의식하지 말고. 자존심을 지키려 센 척하거나 기분 나쁜 티 내면 조지는 거지 뭐. 백진주는 참으로 답답했다. 민숙이라는 닉네임의 참가자 때문이었다. 민숙은 자신의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남성 참가자들에게 데이트 선택을 받지 못하면 표정과 말투가 날카로워졌고 다른 참가자들에 대한 섣부른 판단도 서슴지 않았다. 반대로 기분이 좋으면 카메라가 돌고 있다는 사실을 잊었다는 듯 콧노래를 불렀다. 애교 섞인 말투와 윙크 등 플러팅도 마구 해댔다. 으 어떡해. 백진주는 그런 민숙의 행동 하나하나에 인상을 찌푸렸다. 마치 자신이 민숙이라도 되는 듯 대리 수치심을 겪었다.

  엄마도 연프 나가 봐. 요즘엔 돌싱 특집이 더 인기 많더라. 근데 민숙 저 여자는 진짜 이상하다. 저러면 남자들이 부담스러워할 텐데. 그치?

  소파에 옆으로 누워 뻥튀기를 먹으면서 서준은 민숙의 언행을 평가했다. 남자 출연자의 머리숱과 직업, 여자 출연자의 명품 아이템을 줄줄이 읊고 점수를 매겼다. 앞머리를 내면 더 귀여울 거라는 둥 스타일에 대한 조언도 아낌없이 퍼부었다. 백진주는 서준을 멍하니 바라본 후 텔레비전을 껐다. 아무리 사춘기가 빨라졌다지만 무슨 초등학생이 이래.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딸이 낯설었다. 서준은 콧노래를 부르며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바짝 올려 묶은 머리카락 옆으로 작은 링 귀고리가 반짝였다. 방송 댄스 학원에 다니게 된 이후, 어지간한 일에는 한 마디 짜증 없이 컨디션이 좋았다. 좋겠지, 그럼. 보름 동안 방문을 잠그고 울기만 해서 쟁취한 건데. 이렇게 좋아할 거였으면 진작에 보내줄 걸 그랬나 싶었지만, 춤을 배우면서 점점 더 되바라져 가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찌 되었든 당장은 나아졌으니까. 백진주는 덮어놓았던 걱정과 불안이 올라오기 전에 눈을 감았다. 어쩌면 컨디션 조절은 서준이 아니라 백진주에게 더 필요한 것일지도 몰랐다.


  곧 방문 너머로 책이 방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바쁘게 발이 오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헤드폰을 쓰고 방에서 춤 연습을 하는 게 분명했다. 뭐든지 열심히만 한다면 나쁘지 않았다. 서준은 틈만 나면 제 방문을 잠그고 춤을 추었다. 그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은지 까치발을 하고 조용히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백진주가 방문 앞에 가까이 붙어 서 있으면 그 안에서 멜로디를 흥얼거리는 작은 목소리와 거친 호흡이 들렸다. 그러다가 삼십 분 뒤에 땀 흘리고 물 마시러 나오겠지. 아무것도 안 했다는 듯이 눈치를 살피는 민망한 얼굴. 귀여워. 아직은 아기라니까. 생각해 보면 댄스 학원은 그렇게 이상한 요구도 아니었다. 요즘 애들 아이돌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데 춤 좀 추고 싶고, 친구들이랑 어울리고 싶은 건 당연한 거지. 서준은 올해 초 월경을 시작했다. 중학생 때 시작한 자신에 비해 열두 살은 너무 이른 게 아닌가 싶었으나, 부랴부랴 조사한 결과 평균 시작 나이에 해당했다. 느린 건 자신이 엄마로서 성장하는 속도였다는 걸 백진주는 인정해야 했다. 갑작스럽게 많이 것들이 바뀌고 있었다. 처음에는 생일 선물로 귀를 뚫어 달라는 부탁이었다. 어디서 알아낸 건지 눈썹 칼을 구매해 코 밑에 난 솜털을 밀고, 혼자 눈썹 정리를 하다가 반 가까이 깎아 먹기도 했다. 사춘기라는 이름 아래 어디까지 해주어야 할지, 자신의 걱정이 노파심에 지나지 않는 것일지 백진주는 알 수 없었다. 특히 연애에 관해서라면 더욱 그랬다.

  연애는 백진주가 가장 잘하고 또 자신 있어 하는 종목이었다. 연애 재밌잖아.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에 힘과 시간을 쏟는 거. 상대에 대한 마음을 키워나가는 거. 백진주는 연애에 자신감이 있었고 자기 자신을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만드는 데 심혈을 기울였던 적 있었다. 사실 인생 대부분이 그랬다. 이전 연애가 끝나면 곧바로 또 다른 연애를 준비하고 이행했다. 연애하지 않던 시기에도 연인으로 발전될 수 있는 사이를 여럿 만들어놓았다. 호기심과 즐거움을 넘어 누군가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데 안도감을 느꼈다. 나는 연인이 있어. 나라는 사람은 사귈 가치가 있어. 하지만 다 지나간 시간이고, 이런 얘기는 좀 지겹잖아. 그냥 그럴 때가 있었다는 거지. 중요한 취미로써 연애를 즐기던 때가. 백진주는 연애라는 길을 걷다 보면 어딘가 도착할 줄 알았다. 둥글고 단단한 가정의 울타리 같은 곳에. 그래서 장독을 채우듯 연애 상대에게 자신이 가진 모든 걸 내보였으나, 인간은 밑 빠진 독과 다름없었다. 수많은 연애가 끝날 때마다 백진주는 그 사실을 뼈저리게 배웠다. 그리고 그 구멍을 또 다른 연애로 채우기를 반복했다. 그 끝에는 지지부진한 갈등으로 채워졌던 짧은 결혼 생활이 있었다. 그러니 연프에 나가보라며 뼈를 발라내듯 출연자들의 조건을 하나하나 뜯고 있는 딸에게 조바심을 느끼는 건 연애를 즐겼고 또 시달렸던 백진주에게 어쩌면 당연한 절차였다. 그렇게 안 키우려고 지랄발광을 떨었는데.


  비록 생계에 치여 딸내미 첫 월경 시기조차 파악하지 못한 엄마지만 백진주는 육아에 꽤 진심이었다. 개인의 불안을 연애에 의지해서 해결하지 않도록, 쉽게 말해 서준이 자기처럼 물컹한 여자가 되게 하지 않으려 애썼다. 모든 건 자립심에서 나온다는 결론에 이르러 나름의 육아 방향을 설정했다. 굳은 마음을 먹고 가장 처음으로 한 일은 여기저기서 선물 받은 분홍색 공주 드레스를 창고에 집어넣은 거였다. 패션에 까다로운 유치원생이 되어 또래 아이들에게 영향받은 공주화를 피할 수 없었을 땐 드레스를 노란색, 파란색, 녹색, 흰색 등 색깔별로 사다 주어 기분에 따라 골라 입게 했다. 물의 요정이니 숲의 정령이니 이것저것 지어내 이름 붙이느라 머리를 쥐어 짜내던 나날이었다. 휴일마다 여성 과학자 기획전에 가고, 코딩과 로보틱스 체험에 참여했다. 체력은 정신력의 기반이라는 점에서 태권도와 풋살을 배우게 했다. 튼튼하게 자라라.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서준은 정말 튼튼한 아이로 자랐다. 동갑인 남자아이와 몸싸움을 벌여 이길 정도로. 다행히 아무도 안 다쳤고 은혁이 부모님께서도 별말씀 없으셨어요. 그런데 제가 따로 연락드린 이유는……. 담임선생님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사춘기 영향도 있고 감정 표현이 서투른 편이라고 돌려서 이야기했으나 서준의 성격이 드세며, 여자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미 백진주도 잘 알고 있는 면모였다. 서준은 물컹한 여자 대신 아주 딱딱한 고집을 부리는 아이가 되었다. 귀걸이, 화장품, 크롭 티, 방송 댄스. 다른 아이들은 가졌지만 자신은 갖지 못한 것들의 목록을 줄줄이 늘어놓으며 서준은 말했다. 엄마는 내 가장 친한 친구라고 해놓고 내 말은 하나도 안 들어줘. 이게 무슨 친구야. 그냥 엄마지. 백진주는 이러다 정말 큰일 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준의 목적은 춤이 아니라 여자애들 무리에 섞이는 것에 있었다. 주말에 수영장에서 모이고 문구점과 올리브영에 가 쇼핑하고 생일 파티도 여는 그 무리. 한 반에 서너 개의 무리가 있지만 서준은 어느 곳에도 들지 못했다. 친하다고 생각했던 짝꿍의 생일 파티에 초대받지 못한 다음 날 서준은 하루 세 끼를 꼬박 굶었다. 전례 없는 일이었다.

  

  그동안 백진주는 나름대로 노력했다. 피부 커버용 파운데이션이 아닌 어린이용 무기자차 톤업 선크림과 로드숍 틴트 대신 백 퍼센트 유기농 유래 성분의 붉은 색 립밤을 사주었다. 이번에도 못 할 건 없었다. 방과후학교 방송 댄스부는 그야말로 운빨의 세계였다. 말도 안 되는 대기 번호를 받은 서준은 포기하지 않고 바로 두 번째 플랜을 제시했다. 추첨에서 떨어진 아이들은 학교 앞 댄스 스튜디오에 몰렸다. 문제는 돈이었다. 학원은 방과후학교에 비해 수강료가 서너 배는 더 비쌌다. 백진주는 울적해졌다. 다른 무엇보다 앞으로 다달이 빠져나갈 학원비가 가장 먼저 걱정되어서. 사실은 돈 문제였었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 우선순위가 바뀌었잖아. 첫 수업을 수강하고 돌아온 서준은 밥 먹고 양치하는 와중에도 몇 번씩 골반을 튕기고 웨이브를 연습했다. 여자 아이돌 노래를 잠들기 직전까지 들었다. 그래 그게 문제였다. 돈 문제에 밀릴 뻔했지만 진짜 걱정했던 건 이거지.

  많은 여자 아이돌이 다양한 스타일과 주제에 접근하고 있다지만 여전히 아이돌 노래 대부분은 관심과 사랑을 갈구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하자, 나만의 길을 구축하자는 당찬 가사와 달리 하나같이 메마른 몸매를 과시했다. 인기, 관심, 사랑. 그리고 연애가 판치는 세상이었다. 서준은 연애 프로그램이 방송되면 득달같이 달려왔다. 연예인의 연애, 연예인 자녀의 연애, 청춘들의 연애, 모태 솔로들의 연애, 이혼 남녀들의 연애, 노년의 연애. 연애, 연애, 연애. 연애에 잘 먹히는 패션, 얼굴, 직업, 몸매. 백진주의 눈에 서준의 어설픈 댄스와 연애 프로그램 참가자들의 자기소개가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연애 프로그램에 나와 인기를 얻지 못하는 참가자들과 여자애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서준의 모습이 겹쳤다. 서준이 영원히 겉도는 인간이 될까 봐 그 두려움에 떠밀려 댄스 학원 결제 카드를 내민 자신이 징그러웠다. 그래서 백진주가 한 선택은 이거였다. 적당한 화장품을 쥐여주고, 연애 프로그램 참가자들을 다방면으로 품평하는 서준을 꾸짖지 않는 것. 자기 딸이 하자 있는 취급을 받는 것만은 죽어도 볼 수 없었다.


*


  건조된 수건에서 풍기는 인위적인 꽃향기에 두통이 일 정도였다. 관장은 오래된 수건의 낡은 냄새를 가리기 위해 세제, 특히 섬유유연제를 듬뿍 넣으라고 했다. 백진주는 다른 트레이너들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출근했다. 건조기에서 수건을 꺼내 손바닥으로 쫙쫙 펼친 후 수건함에 채워 넣기 위해서였다. 어차피 백진주가 리넨 관리를 담당하게 되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었지만, 남들 눈앞에서 대놓고 수건을 옮기는 것과 쥐새끼처럼 조용히 처리하는 건 전혀 달랐다. 이 일을 제안받았을 때 크게 날아간 자존심이 아직 남아 있긴 한 모양이었다. 걸어서 오 분도 안 되는 거리에 대형 피트니스 체인점이 들어선 후 관장의 신경이 예민해졌다. 거기에 백진주의 피티 수업이 눈에 띄게 줄자 본격적으로 눈치를 주었다. 제가 데스크 보라고요? 그게 아니고, 보조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나와서 할 거 없으면 본인도 힘드실 텐데 배려죠.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고정된 개인 업무 외 잡일은 트레이너 가운데 가장 여유로운 사람에게 분배되었다. 가장 여유롭다는 건 인기와 매출이 가장 낮다는 뜻이었다.

  아무도 없는 헬스장은 고요했다. 이 시간이 되면 백진주는 약간 시무룩해졌다. 서준을 낳자마자 헤어진 전남편이 불쑥 떠올랐다. 말이 안 통하고 자기만 아는 사람이었다. 참고 살다가 이혼을 조금 미뤘더라면 형편이 나았으려나. 형편 대신 다른 쪽이 엉망으로 기울어졌겠지. 이럴 때만 전남편이 떠오르다니 사람 마음 참 간사해. 헛웃음이 하품으로 이어졌다. 그때 헬스장의 투명한 유리문이 활짝 열렸다. 멍하니 잡생각 속을 헤매던 백진주의 영혼이 문에 달린 종소리와 함께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왜 이렇게 일찍 오셨어요? 이고 온 물통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재철이 미소를 지었다. 낯가리는 사람인 줄만 알았는데 저렇게 웃기도 하네. 

  진주 님한테 꼭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요.

  이온 음료를 건넨 후에 재철은 백진주에게 커플 헬스 파트너십을 제안했다. 노트북을 꺼내 엉성하지만 정성스레 만든 기획안을 펼쳤다. 자기가 무얼 하고 싶은지, 그 일에 왜 백진주가 필요한지, 두 사람에게 어떠한 긍정적인 효과를 불러일으킬지 등등. ‘커플 헬스 파트너십’은 명칭만 그럴듯하게 지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이 연애적으로 친밀한 관계인 척하며 다양한 콘텐츠를 생성하자. 커플만 할 수 있는 운동 콘텐츠를 찍자. 커플 대상 수업을 열자. 백진주는 연애적으로 친밀한 관계라니 이름을 참 잘도 갖다 붙였다고 생각했다.

  유사 연애하면서 인플루언서 하자는 거네요.

  듣고 보니 그러네요. 재철은 바로 수긍했다. 그리고 설득을 이어 나갔다. 연애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참가자들의 인기, 다양한 커플 브이로그 등이 커플 파트너십을 해야 하는 근거가 되었다. 빨리빨리의 나라잖아요. 요새 삼사십 대 연프가 더 인기 많은 거 알죠? 노련하니까. 알 거 다 알고, 잴 거 다 재고, 솔직하고 진도 빠르고 도파민 폭발이거든요. 재철은 말을 멈추고 잠시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백진주와 눈을 마주쳤다. 강요할 생각은 없지만 자신의 제안을 꼭 들어주면 좋겠다는 진심을 전해왔다. 수업 기획도 그렇고 촬영 편집 업로드까지 다 제가 할게요. 진주 님은 함께 해주시기만 하면 되는데, 어때요?


  선택 앞에서 백진주는 둔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뭐 하나에 꽂히면 그 외의 다른 사항은 흐린 눈으로 보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재철은 예상치 못한 사건이 발생할 경우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했다. 이유 불문 백진주가 원한다면 온라인에 노출된 콘텐츠를 다 내리고, 이 약속을 문서로 남기자는 말도 해왔다. 잘 되면 수업 늘고, 안 되어도 손해 볼 거 없잖아. 유사 연애 파트너십이라는 게 어떤 지점을 노리고 무엇을 자극하는 사업인지, 본인의 신념과 어떤 부분이 어긋나는지는 생각할 겨를도 의지도 없었다. 백진주는 선택지 앞에서 언제나 가장 원하는 선택을 했고, 그럴 때마다 공들여 형성해 온 마음가짐 일부를 죽였다. 그리고 자신이 죽여버린 것들을 절대 뒤돌아보지 않았다. 백진주의 머릿속에 희한한 장면 하나가 그려졌다. 어느새 중학교에 입학했는지 교복을 입은 서준이 엄정화의 ‘Festival’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 활짝 웃는 얼굴로 가사를 따라 부르며. 움츠린 어깨를 펴고 이 세상 속에 힘든 일 모두 지워버려.

  친한 사이는 아니었으나 백진주는 재철을 꽤 괜찮은 사람으로 보아왔다. 지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회원의 몸 상태에 따라 커리큘럼을 매번 다르게 준비했다. 철두철미하고 성실하네. 백진주는 네 살이나 어린 재철이 자기보다 업에 대한 전문성과 마음가짐은 더 뛰어나다는 걸 알고 있었다. 회원의 운동 의욕을 돋우는 모습을 흘깃거리며 이런 건 정말 본받을 만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자신이 하는 일에 애정과 자부심을 지니고, 성공하겠다는 야망마저 품고 있는 사람이라니. 따라갈 만하지 않은가. 게다가 백진주는 재철이 왜 이 같은 일을 꾸미는지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었다. 움츠린 어깨를 펴고 활짝 웃는 서준의 얼굴, 파이팅으로 똘똘 뭉친 재철, 댄스 학원비. 백진주는 커플 헬스 파트너십을 맺었다.

  거짓으로 속이는 건 하고 싶지 않아요. 커플로 보여야 하는 걸까 봐 걱정하는 백진주의 말에 재철이 대답했다. 네.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첫 영상은 자기소개였다.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고 밝혔는데도 댓글 창은 연상 연하 커플을 위한 응원으로 가득했다. 어차피 사귈 거 다 안다, 철이 님은 계속 펄 님만 바라본다, 좋아하는 게 틀림없다, 펄 님 완전 몸매 죽이는 골드미스. 백진주는 속인 거 하나 없이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재철이 정말 영상 내내 자기를 보고 있는지 확인했다. ‘임산부를 위한’, ‘권태기가 고민이라면’, ‘결혼을 앞둔 예비 쀼에게 추천하는’ 등등 간단한 운동에 이름을 그럴싸하게 붙이는 건 재철의 능력인 것 같았다. 광고를 돌린 건지 우연인지 높은 조회 수를 기록한 영상 두어 개가 각종 커뮤니티와 SNS를 탔다.


  헬스장 회원이 눈에 띄게 늘었다. 백진주는 리넨 관리 담당을 벗어났다. 관장은 두 사람의 콘텐츠 제작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운영 시간이 끝난 후에도 헬스장에서 촬영하도록 장소를 내주었다. 재철은 에너지가 대단했다. 수업을 풀로 뛰고도 영상 업로드를 밀리지 않았다. 백진주는 젊은 여성 피티 수업이 잡혔다. 원래는 자세 교정과 재활을 위한 어르신들이 주요 회원이었다. 필라테스 경력을 살리는 건 보람 있었지만, 비싼 수강료 때문인지 어르신들의 수업 참여는 단발성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재철은 제 일처럼 기뻐하며 말했다. 연애와 인생 조언에 빠삭한 언니 스타일로 가요. 진주 님 골드미스로 알고 있는 구독자 많잖아요. 그 이미지 때문에 찾아온 거일 테니까요. 일리 있다고 생각했다. 예전에 혼자 아이를 키운다는 회원의 말을 듣고 자연스럽게 미혼모임을 밝혔다가 소문이 난 적 있었다. 사실이니까 소문은 상관없었으나 문제는 회원의 이탈률이 급격하게 늘었다는 거였다. 인간 심리에 빠삭한 친구는 백진주에게 말했다.

  진주야. 피티 비용 만만치 않아. 너 같으면 어떤 선생님한테 배우고 싶겠니. 사람 마음이 그래. 다 닳은 신발 신은 외국인 노동자한테 골프 배우고 싶지 않은 거야. 당당하고 세련되고 자기 인생 잘 가꾸는 거 보여줘야지. 동정이 끼어들면 무조건 손해라고. 

  그치. 불쌍해 보일 필요는 없지. 그때부터 백진주는 안타까운 사람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 언행을 조심했다. 헬스로 건너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어쩌면 필라테스 세계에서 자리를 잃어버린 건, 젊은 여자 강사들에게 나이뿐 아니라 자신감에서 밀린 탓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엄청난 증가는 아니었지만 유튜브 채널 구독자 수가 차근차근 올라갔다. 재철은 하여간 감이 좋았다. ‘사랑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연인을 위한 풋풋한 스킨십’부터 ‘오랜 연인의 뜨거움을 되찾는 고급 스킬’까지 수위를 오가며 관심을 끌었다. 백진주는 그 채널 속에서 몸매와 인생을 건강하게 잘 가꾸는 당찬 동안녀였고, 재철은 한 사람만을 바라보며 짝사랑 중인 순애보였다. 캐릭터가 만들어지니 서사는 저절로 붙었다. 구독자들의 상상력은 대단했다. 다들 할 일이 그렇게 없나 싶을 정도로. 재철은 상상력에 불을 지폈다. 고의로 실수를 일으켜 돌발 스킨십을 만들어 낸 후 얼굴을 붉히며 쑥스러운 목소리로 사과했다. 그 모습을 전부 영상에 담았다. 이런 연출까지 준비하다니 정말 야망이 대단한 놈이야. 어처구니가 없다가도 웃기고 귀여웠다.


  커플 헬스 파트너라니. 커플이면 커플이고 헬스 파트너면 파트너지. 연인은 아닌데 연애 감정을 유발하는 게 말이 되나. 그게 정말 되나. 응, 돼. 돈이 돼. 할까 말까 선택 앞에서 머뭇거렸던 게 무색할 정도로 커플 헬스 파트너십은 백진주의 적성에 잘 맞았다. 시간 낭비라고 여겼던 연애도 경력이 되는구나. 그것도 아주 많이. 백진주는 이 분야에서 베테랑이었다. 노래에는 흐름이 있어. 벌스, 빌드업, 훅, 아웃트로. 연애도 마찬가지지. 단순히 예쁘게 보이는 게 아니라 마음을 던지고 긴장을 고조시키는 전체적인 흐름을 살펴야지. 노래마다 가장 중독성 있는 킥이 있잖아. 연애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바로 나라는 사람에 킬링 포인트를 심는 것. 이탈이 발생하지 않도록. 설렘, 성적 긴장감, 반들거리고 수줍은 미소. 나는 당신의 일상, 마음, 과거 모든 게 궁금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잠시 내려놓고요. 우리만 나눈 이야기가 있잖아요.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긴밀하게 이어져 있다는 거 나도 알고 당신도 알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서로가 있기에 내일이 기대되고 보고 싶고. 향수는 시간 차를 두고 덧뿌려야 입체적인 향이 납니다. 다크 초콜릿은 달면서도 쓴맛. 당신을 생각하면 하루 더 살고 싶어지지요.

  백진주의 피티 스케줄표가 빈틈없이 채워진 날, 재철은 꽃다발을 건넸다. 서프라이즈는 고스란히 영상으로 담겼다. 장미 백 송이라니 직장 동료 축하를 누가 이렇게 해요, 대놓고 고백이지! 재철은 소주잔을 채우며 마음에 드는 댓글을 읽었다. 자신의 제작 의도가 그대로 먹혀들어 기분이 좋아 보였다. 두 사람은 가까워졌다. 동료로서, 인간 대 인간으로서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재철은 백진주만큼은 아니었으나 인기가 시들해 가던 트레이너였다. 영리한 것만으로는 헬스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재철의 외모와 몸매는 원래부터 경쟁력이 그리 높지 않았다. 거기에 삼십 대 끝자락이 되었으니 알 만했다. 백진주는 재철이 기획을 들고 왔을 때부터 알았다. 위기감에 잠 못 들다가 어떻게든 먹고 살아보겠다고 돌파구를 찾아왔구나.

  진주 님 최근에 배달 거지 기사 봤어요? 배달 음식 잘 받아서 처먹어 놓고 못 받았다고 거짓말해서 돈 돌려받던 진상이요. 잡고 보니까 그 사람도 라이더였대요. 대박이죠. 제 친구가 검도 학원 운영하거든요? 우리 생각에는 진상이라 하면 학부모를 떠올리잖아요. 그런데 사실 학원끼리 서로 그렇게 민원을 넣어댄다는 거예요. 

  백진주는 혹여나 재철이 여적여 같은 혐오 표현을 꺼낼까 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이야기는 거기서 그쳤다. 요는 이거였다. 그 세계의 생리에 대해 잘 알기 때문에, 오히려 동종 업계에 종사하는 이들끼리 더 물고 뜯는다는 것. 요새 무슨 일 있느냐는 물음에 재철은 그런 거 없다고 했다. 진주 님은 갑작스럽게 느꼈겠지만 저 이거 되게 오랫동안 준비한 거거든요. 처음부터 파트너 상대 오로지 진주 님만 고려하고 기획한 거예요. 이른 시간에도 완벽한 모습으로 출근하고, 회원들한테 항상 상냥하게 대하시잖아요. 그 말을 하면서 재철은 백진주의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잔을 부딪칠 때마다 손가락과 손가락이 닿았다. 술자리 이후 재철은 백진주를 누나라고 부르게 되었다. 댓글 창은 아주 난리가 났다.


  원래도 백진주는 헬스 트레이너가 강도 높은 감정 노동직이라고 생각했다. 회원들의 하소연을 들어주는 데 기가 쫙쫙 빨렸다. 최근 들어 그로 인한 스트레스가 극심해졌다. 눈치 없이 치근덕거리는 일부 회원들 때문이었다. 그들은 식단 사진과 함께 쓸데없는 얘기를 늘어놓았다. 선생님, 혹시 지금 주무세요? 자정이 넘은 시간에 깨어있냐는 물음부터 책 추천, 날씨에 따른 옷차림 걱정, 술자리 초대 등등. 아무리 짜증 나도 회원들의 메시지를 무시할 순 없었다. 친절함을 유지하되 사적인 질문을 공적인 대답으로 받아쳐 선을 그었다. 한심한 새끼들. 감주나 갈 것이지 왜 헬스장에서 연애를 찾아. 재철의 추천대로 업무용 핸드폰을 하나 더 개통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백진주는 선생님,으로 시작되는 메시지에 노이로제가 걸려 있었다. 아주 꼴도 보기 싫었다. 그런 상황에서 선생님, 선생님 애교 섞어 부르는 어린 딸의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백진주는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밤 열 시. 통화하기에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사춘기에 접어든 초등학생과 선생님 관계라면 더더욱.

  짧은 통화를 끝낸 서준이 어깨를 들썩거리며 거실로 나왔다. 생각한 것처럼 잘 안되는지 같은 동작을 천천히 반복했다. 골똘한 얼굴로 어깨만 빠르게 움직이는 모습이 망가진 인형처럼 영 기괴했다. 엄마, 인스타 봤어? 민숙은 방송 끝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욕먹더라. 사람들이 너무 욕하니까 좀 불쌍해. 백진주는 몰아붙이면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는 걸 알았다. 댄스 학원 선생님은 애들이랑 친하게 지내는지, 맨날 춤추실 텐데 아프신 곳은 없는지 괜한 질문을 던졌다. 엄마, 왜 쌤 얘기만 하고 나 요새 무슨 춤추는지 안 물어봐? 다음 주에 춤추는 영상 찍는대. 릴스는 인스타에 올라가고 풀 버전은 유튜브에 올릴 거래. 근데 너무 못 추면 안 올라갈 수도 있대. 서준은 촬영 날 입을 옷을 사러 가기로 했으니 카드를 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했다. 뒤늦게 든 바람이 무섭다고 했던가. 성적은 떨어지고 겉멋은 잔뜩 들고 버르장머리는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백진주는 서준의 핸드폰을 빼앗았다. 이런 건 초반부터 제대로 잡아야 했다. 최근 통화 기록에는 선생님이 아니라 ‘유선민 선배’가 찍혀 있었다. 같은 댄스 학원에 다니는 언니였다. 언니를 왜 선생님이라고 부르냐는 질문에 서준은 소리를 빽 지르고 방에 들어가 버렸다.

  선생님이 뭐 별거야? 배울 게 있는 사람이면 다 선생님이지!


*


  너는 귀 안쪽 면이 시원하게 트여 있어서 이너컨츠 자리가 딱인데, 하나 더 뚫어 봐. 재인의 추천에 백진주는 인상을 쓰며 고개를 저었다. 귀걸이용 구멍을 피어싱 침 굵기로 방금 막 확장한 참이었다. 귓불이 뜨겁고 욱신거렸다.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귀 뚫는 사람이 많다던데 아프기만 했다. 재인은 백진주의 가장 오랜 친구였다. 그만큼 싸우기도 많이 싸웠고, 서로의 내밀한 사정을 모조리 다 알고 있었다. 백진주의 역겨운 첫사랑과 연애를 취미로 즐겨온 인생사는 물론, 안정감을 원하던 백진주가 교제한 지 불과 몇 달 만에 결혼식장에 들어선 것, 아이를 원하지 않았으면서 당연한 과정이라는 듯 임신하고, 이혼하고도 반년이 지나서야 그 사실을 알려온 일까지 재인은 다 기억했다.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백진주가 왜 자신에게 이혼 사실을 뒤늦게 말했는지도 꿰뚫고 있었다. 백진주는 결혼을 준비하는 내내 은근히 재인을 닦달했다. 나이 들어갈수록 혼자 사는 거 쉽지 않아. 어느 날 술을 많이 마신 백진주가 후회와 질투, 사과가 뒤엉킨 속마음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재인은 백진주를 다시 보지 않았을 것이다.

  완전히 춤에 미쳐 있다니깐. 일어나서 등교 준비하는 내내 케이팝을 틀어놔. 그래야 몸이 잠에서 깨고 빨리빨리 잘 움직인대. 이제는 앨범 산다고 용돈이랑 별개로 문화비를 달라신다. 돈 들어갈 데 천지야 아주.

  서준이 많이 컸네. 드디어 덕질의 세계에 들어올 때가 되었구나. 이모는 환영이다.

  너 아직도?

  거기까지 묻고 백진주는 말을 아꼈다. 아직도,라는 말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아직도 어린애들 따라다니면서 돈과 시간을 물 쓰듯이 쓰는가, 아직도 현실이 아니라 유사 연애에 빠져 있는가, 십 대 시절을 쏟아부은 걸로 모자라 다른 사람들은 애도 낳고 집도 사는 사십 대에 똑같이 한심한 짓거리를 이어가고 있는가. 백진주는 자신이 말실수했다는 걸 알면서 한편으로는 아이돌에 연애 감정 품는 게 현실적이진 않다고 생각했다. 재인은 그 말이 웃겼다. 정확히는 그런 말을 백진주가 하는 것이 우스웠다.

  너 지금 돈 어떻게 버는데. 나 같은 사람이 있으니까 네가 먹고사는 거 아닐까. 즐겁게 잘 살아야지. 너 연애하는 거 좋아했잖아. 나도 비슷해. 이게 내가 찾은 방법인 거야.


  연애 프로그램이 한참 방영 중일 때 민숙이 욕을 먹은 이유는 가감 없는 감정 표현 때문이었다. 직장 동료 등 아는 사람들이 다 볼 텐데 저렇게까지 솔직해야 하냐는 것이었다. 직설적인 화법, 다채로운 표정, 거침없는 애정 공세는 시청자의 관심을 독차지하기에 충분했다. 방송이 끝나고도 지속해서 화제가 된 이유는 해당 연애 프로그램의 한 애청자가 민숙의 언행 하나하나를 분석해 커뮤니티에 올린 게시물 때문이었다. 그 글 속에서 민숙은 사랑받기 위해 미친 사람이었다. 관심 가는 상대는 물론 호감이 없는 상대에게까지 플러팅을 일삼고, 노출이 심한 옷차림을 즐기는 걸로 보아 관심받기 위해서라면 성적인 어필도 서슴지 않았다. 열정적인 사랑을 꿈꾸고, 그 배경에는 인터뷰를 보면 알 수 있듯 부모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 어린 시절이 있었다. 솔직함, 열정, 섹스어필, 애정 결핍이 뒤섞인 게시물은 이해할 수 없는 인간에 대한 네티즌들의 갈증을 해소해 주었다.

  욕을 많이 먹으니까 누나 눈에는 안타깝게 보이겠지만, 사실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똑똑한 거죠. 욕먹는 게 두려웠으면 출연 자체를 고사했죠. 민숙 그 사람 계속 콘텐츠 올리잖아요. 유명 유튜버랑 협업하고 피부과 시술 협찬받고, 이번에 광고도 찍었던데. 제 생각엔 처음부터 짝 찾으려고 나간 게 아니라 방송일에 뛰어들려고 캐릭터 완전히 자극적으로 잡은 거예요.

  민숙이 방송일 하려고 의도적으로 그랬든 말든 그 게시물은 참 별로였다. 지나가듯 한 말에 마치 중요한 의미가 숨어 있다는 듯 해석하는 것도 그렇고, 방송에 나와서 보여준 일부 행동으로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을 모조리 파악한 것처럼 구는 것도 이상했다. 하지만 백진주는 굳이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민숙의 행보를 보면 볼수록 재철이 떠올랐다. 재철은 커플 헬스 파트너십에 도취해 있었다. 파트너십이라는 단어는 흐려지고 커플과 헬스만 머릿속에 남은 것 같았다. 재철은 요새 사소한 것까지 챙겨주며 다정하고 친근하게 굴었다. 부탁한 적 없는데 백진주의 손에서 음료수를 가져가 뚜껑을 열어주었다. 누나, 누나 부르는 호칭에 애교가 묻어있었고, 손이나 어깨가 스치는 정도의 스킨십은 당연해진 지 오래였다. 얘가 나를 좋아하나. 너 왜 이렇게 친절해, 나 좋아하는 거 아니야?

  네. 저 누나 좋아해요. 인간적으로요. 누나 제가 왜 커플 헬스 같이하자고 한 줄 알아요?

  회원도 줄고, 우리 처지가 비슷해서?

  예뻐서요.

  장난스럽게 던진 질문에 예상치 못한 대답이 나왔지만 백진주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안 친했을 땐 낯가리고 진지하던 애가 가끔 이렇게 능구렁이 같은 모습은 보인다니까. 사람이라는 게 이랬다가 저랬다가 참으로 신기하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생각이 끼어들 틈도 없이 좋아한다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라니. 재철은 그 이후 백진주에게 사귀자거나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하지 않았다. 스킨십은 조금 늘었다. 오늘도 힘내라며 두 손을 몇 초 동안 꼭 잡았다가 놓는 식이었다.


  불편한 대화를 나눈 후 백진주는 재은에게 별다른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 재은의 말이 다 맞았다.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을 응원하고 즐기는 데 많은 돈을 쓰든, 그들과 유사 연애를 하든 그건 본인의 선택이었다. 재은은 백진주가 되고 싶었던 자립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주변의 시선에 휘둘리지 않는 심지가 있었다. 부모님의 지원이나 대출 없이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피어싱 숍을 차리고, 취미를 즐기고, 연애와 결혼에 많은 것을 내걸지 않았다. 부러운 마음에 남의 인생을 꼬투리 잡아 함부로 깎아내렸다는 걸 백진주는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문제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고, 그래서 어떻게 먼저 연락해야 할지 고민에 휩싸였다. 서준은 그런 백진주의 마음도 모르고 딸기 스무디를 먹으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오랜만에 카페에 와서 신이 난 듯했다. 그때 누군가 백진주에게 아는 척 다가왔다. 얼마 전 헬스장에 새로 온 신입 트레이너였다. 이 사람도 다른 일을 하다가 헬스에 뛰어든 모양인지 회원들을 노련하게 대했다. 신입의 시선이 서준에게 가 닿았다. 제 딸이에요. 백서준 인사 똑바로 해야지.

  응 그래 반가워. 아줌마는 엄마 회사 친구야. 친근하게 서준의 인사를 받은 신입은 잠깐 시간 좀 내주라며 카페 밖을 가리켰다. 재철이 다른 여자를 만나는 걸 봤다고 했다.

  두 분 사귀잖아요. 커플 유튜버 활동도 하는데 어떡하나 걱정되어서 말해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한데 안 사귀어요. 파트너일 뿐이에요.

  파트너라는 말을 듣고 불경한 걸 보듯 여자의 안색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백진주는 급하게 덧붙였다.

  아니, 다른 게 아니라 업무 파트너.

  그 일을 전하자 재철은 바로 수긍했다. 아마도 신입이 본 여자는 결혼을 약속한 여자 친구일 거라고 말했다. 여자 친구가 커플 헬스 파트너십에 대해서 아느냐는 질문에 재철은 당연하죠, 유쾌하게 웃었다.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일인 거 다 아니까 이해해 준다고 했다. 저한테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것도 알아요? 재철은 더 이상 웃지 않았다. 우리가 뭘 했는데요? 잤어요? 데이트했어요? 친구끼리도 손잡지 않아요? 제가 손을 잡았지 핥았어요? 누나 제가 많이 도와줬잖아요. 그건 생각 못 하고 참. 맞아요. 저 누나 좋아요. 좋아하는 게 죄는 아니잖아요. 저 아직 결혼 안 했으니까 문제 될 거 하나도 없어요. 누나, 우리 커플 헬스 파트너로 또 인생 동료로 그렇게 친하게 지내요. 피차일반이잖아.

  

  피차일반. 그 말이 무얼 뜻하는지 백진주가 모를 수 없었다. 너랑 나랑 같은 부류잖아. 너도 즐겼잖아. 그렇게 말하는 눈빛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연애 감정을 즐기고, 누리고, 이용할 줄 아는 사람. 재철이 백진주를 유사 연인처럼 대하며 재미 보고 콘텐츠 만들고 수익화하여 득을 본 것과 같이, 백진주 또한 회원들을 그렇게 대하지 않았나. 선만 안 넘으면 된다고 합리화하면서 아슬아슬한 거 즐겼잖아. 백진주는 그제야 재철이 왜 자신에게 커플 헬스 파트너십을 제안했는지 알 것 같았다. 두 사람이 똑같이 밀려나는 처지에 놓여서가 아니었다. 동종 업계 사람들끼리만 통하는 눈치가 있어. 재철은 백진주를 알아보았다. 문제는 백진주가 연애를 즐기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연애라는 올가미에 오랫동안 마음이 묶여 있던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이 더 크다는 거였다.

  고등학생 때부터 절친했던 재은만 알고 있는 사실. 백진주의 첫사랑 상대는 나이 차가 열 살이 넘는 입시 학원 선생님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철부지 여고생의 짧은 연애사였다. 일반인 연애 프로그램 애청자가 민숙에 관해 올린 게시물 방식대로 말하면, 그 시간 속에서 백진주는 사랑받기 위해 미친 사람이었다. 선생님과의 비밀 연애에 취해 연애라고는 관심도 없는 또래 애들을 어린 취급하고, 아이돌 따라다니며 만지지도 못하는 대상에 울고 웃고 마음과 돈을 퍼붓는 애들을 한심하게 여겼다. 그 배경에 대하여 백진주의 가정사를 들먹이며 손쉽게 글을 마무리 지을 수도 있겠으나, 그걸로 정말 괜찮을까. 입시 학원 선생님이라는 그 성인 남자가 어떤 점에서 미성년자 백진주를 연애 대상으로 보았는지, 백진주 외 다른 여고생을 몇 명이나 만났는지, 그가 만나는 여고생들은 왜 하나같이 외로운 얼굴로 골목을 서성이는지. 애청자라는 그 글쓴이는 관심 없겠지. 이런 얘기는 돈이 안 되니 당연한 일이다.

  누구의 탓도 할 수 없었다. 커플 헬스 파트너십. 백진주는 이름부터 조잡한 그 제안의 의도를 알고 동참했다. 여자 회원과 남자 회원에게 다른 캐릭터를 내세워 수업했다. 그들을 한심하고 우습게 보았던 시선이 이제 백진주 본인에게 향하고 있었다. 가장 원하는 것을 취하기 위해 죽여버렸던 많은 여자 중 한 명이 백진주의 귀에 대고 말했다. 누구보다 그 안에 깊숙하게 들어앉아 있으면서 아닌 척하는 게 아니꼬운 거야. 반박할 수 없이 백진주는 그 말을 들으면서 침묵을 지켰다. 함정에 빠진 기분이었다. 그 함정 속에서 백진주는 자신이 져버린 여자들을, 그러니까 많은 선택의 순간에서 떠밀려 사라진 백진주들을 만났다. 그러는 와중에도 일상은 계속되었다. 재철은 상냥했고, 깊은 밤 안부를 물어오는 회원들의 메시지가 늘었다.


  백진주는 또다시 선택지 앞에 섰다. 커플 헬스 유튜브 최신 영상에 올라온 장문의 댓글 때문이었다. 자신이 오랜 구독자, 특히 철이 님의 팬이라고 밝힌 댓글 작성자는 백진주에 관하여 폭로했다. 골드미스라고 이미지 팔아먹고 비싼 척 고고하게 굴더니 애가 있더라. 심지어 초등학생. 작정하고 숨긴 거죠. 철이 님까지 속인 것 같아요. 왠지 언젠가부터 철이 님이 펄 님을 잘 안 쳐다보더라고요. 자기 운동에 집중하고, 카메라만 응시하고. 아마 그 시점에 아이 있는 거 들킨 모양. 철이 님이 펄 님한테 장미 백 송이 줬잖아요. 진심으로 좋아했던 모양인데, 철이 님도 속이고 구독자도 속인 거예요. 철이 님 진짜 대단하네요. 좋아하는 여자 지켜주려고 영상에서 티 절대 안 내고, 계속 같이 영상 찍고. 얼마나 배신감이 들었을까. 원래 그런 사람들 있잖아요. 남자라면 다 연애 상대로 보고 아무한테나 잘해주는 여자들. 그런 과인 듯. 헬스장 후기 보면 각 나오던데요.

  거짓을 말하거나 일부러 속인 적은 없었다. 굳이 말을 안 했을 뿐. 재철은 구독자가 떨어져 나갈까 전전긍긍했다. 방구석에서 말만 많은 한심한 인생들이라며 짜증을 부렸다. 그리고 잔머리를 데굴데굴 굴려 두 가지 제안을 해왔다.

  첫 번째. 사죄 영상 게시 후 자숙하다가 복귀하기. 자숙 기간 동안 재철은 신입 트레이너와 콘텐츠를 만들어서 올린다고 했다. 고양에 제 업장 낼 건데 누나도 같이 가요. 저희 꽤 잘 맞잖아요.

  두 번째. 온갖 시련을 겪고도 아름다움과 자신감을 지키며 당차게 살아가는 미혼모 콘셉트 추가하여 활동 재개. 제가 누나를 좋아한다는 어필을 더 하면 분명 반응 좋을 거예요. 연하 미혼남이 연상인 이혼녀에게 자녀가 있다는 걸 알면서 여전히 끌린다? 자극적이잖아요. 제가 서준이랑 놀아주는 영상도 올리고. 제 이미지도 좋아지고요. 저는 누나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 채널 진짜 열심히 끌어올렸는데 모두를 위해서 두 번째로 가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위기를 기회로 삼으라는 말도 있잖아요.

  제안을 다시 읽어볼수록 백진주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 와중에 서준은 거울을 보며 치명적인 표정을 연습했다. 아주 꼴도 보기 싫었다. 요새 친구들이랑은 잘 지내냐는 물음에 서준이 흥겨운 목소리로 답했다. 아니. 근데 괜찮아. 학원에서 언니들이 잘해줘. 언니들이라는 말에 교복 치마를 짧게 수선하고 귀에 피어싱을 세 개씩 박은 중학생이 그려졌다. 걱정스러웠지만 예전보다 확실히 서준의 자신감이 붙긴 했다. 댄스 영상을 찍은 날 선생님한테 칭찬을 많이 받은 후 더 열심히 학원에 다녔다. 엄마 나 섹시해? 백진주의 기분이 별로 안 좋은 걸 눈치챘는지 서준이 장난을 치며 다가왔다. 엄마 나 프레임 안무 담당이야. 내가 액자 틀처럼 프레임을 만들면 다른 사람이 이 안으로 들어오는 거야. 서준은 두 팔로 큰 원을 만들어 보였다. 엄마, 머리부터 구멍에 넣어 봐. 내가 살짝 웨이브 넣어서 구멍 속으로 들어오라고 유혹할게. 엄마 들어오라고 구멍 속으로. 구멍!


  방문이 부서질 듯 큰 소리를 내며 닫혔다. 백진주는 괜히 성적을 들먹여 서준에게 잔소리한 것을 곧바로 후회했다. 댄스 학원에 다니며 성적이 떨어지고 어쩌고 떠들고 다녔지만, 사실 백진주는 서준의 성적을 걱정하지 않았다. 서준의 성적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문제가 너무 커 거기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남자애들이랑 싸우고, 여자애들 사이에는 못 끼는 나날이 이어지며 서준은 크게 괴로워했다. 자기가 이상한가 보다며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것처럼 굴었다. 잘 입던 옷을 갖다버리고, 쌀뜨물을 받아다가 세수하고, 때수건으로 팔꿈치가 붉어질 때까지 밀었다. 작은 농담도 예민하게 받아들여 말 그대로 툭 치면 울었다. 성적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애가 뭣 모르고 섹시하냐고 물을 수도 있지. 왜 혼냈을까. 재은의 말이 맞는 걸까. 아침에 대충 확인하고 덮어두었던 메시지를 다시 열었다.

  링크와 함께 장문의 편지가 와 있었다. 문장에 분노가 그대로 묻어있었다. 참고 참다가 보낸 티가 역력했다. 너 예전에도 나한테 팬심이니 덕질이니 잘 알지도 못하고 막말해서 미안하다며. 나한테 했던 거 서준이한테 그대로 할 거니? 걔가 뭘 했어. 진주야 대충 사과하고 같은 잘못 또 할 거면 그냥 사과하지 마. 나에 대해서든 너에 대해서든 같잖은 생각을 진짜로 내려놓은 다음에, 그게 되면 연락해. 정신 차린 기념으로 귀에 구멍 공짜로 내줄 테니까. 농담 같은 말로 마무리하고 있지만, 재은의 진심이 느껴졌다. 그래서 무서웠다. 백진주는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같잖은 생각들, 다른 사람이든 자기 자신이든 우습고 한심하게 보지 않는 거 할 수 있을까. 재은이 보낸 링크를 누르자 서준이 다니는 댄스 학원의 공식 유튜브 채널이 열렸다. 재생 버튼을 누르지도 않았는데 영상이 시작되었다.

  일시 정지를 하고 다섯 명의 아이들을 한 명씩 자세히 뜯어본 후에야 서준을 발견했다. 서준은 대형의 맨 끝자락에 있었다. 그마저도 단체 군무할 때만 모습이 보이고, 단독으로 잡히는 파트가 없었다. 백진주는 열심히 눈으로 서준을 좇았다. 어린 여자애들이 자기 뺨을 두드리고, 윙크하고, 입술에 립스틱을 칠하는 듯한 안무를 했다. 다들 예쁘네. 플라스틱 손거울을 보는 척 사랑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연기도 잘하네. 정말로 사랑에 빠져본 적 있는 것처럼. 곡의 말랑하고 귀여웠던 무드는 훅으로 넘어가며 돌변했다. 중독성이 강하고 강렬한 힙합 비트가 휘몰아쳤다. 크롭티를 벗어던지고 스포츠 브라를 입은 아이들이 하나같이 어디론가 달리기 시작했다. 매서운 눈으로 카메라를 바라보며. 머리카락이 마구잡이로 흩날렸다. 서준은 그 파트에서 오브제였다. 두 팔로 큰 원을 만들고 서 있자, 아이들이 서준이 만든 구멍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례로 통과하며 개인 안무를 펼쳤다. 서준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백진주는 그래서 웃겼다. 무슨 구멍 역할이 이렇게 진지해. 서준에게서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백진주는 연애를 잘하고 또 좋아했다. 긴 시간 동안 내내 해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습득한 능력에 가까웠다. 그런데 연애 말고 또 내내 해온 다른 게 있었네. 여자로 사는 거. 먹고 살고, 휘둘리지 않는 인생 만드는 거. 여전히 잘은 모르지만 이 분야에 대해 알기는 알아. 거기에 모든 걸 걸어왔으니까. 하지만 작은 화면 안에서 백진주가 전혀 모르는 다른 여자의 인생이 리드미컬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두 팔로 원을 만들면서 서준은 백진주에게 말했다. 구멍 속으로 들어오라니까! 엄마, 구멍은 통과하는 거야.

  백진주는 여전히 어떤 순간 앞에 서 있었다. 재철이 제시한 두 가지 선택지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백진주는 영상 다시 보기 버튼을 눌렀다. 두 가지 선택지 위에 팔로 만든 구멍이 하나, 둘, 셋, 넷, 다섯 개. 플라스틱 손거울을 멀리 내던지고 매서운 눈으로 내달리는 아이들. 보고 있어도 보고 싶어. 더 자세히. 밀려드는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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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소설

항아리를 머리에 쓴 여인

항아리를 머리에 쓴 여인 최미래 눈꺼풀 위로 햇살이 드리웠다. 나는 감은 눈 안에서 눈동자를 굴렸다. 요즘에는 낮이고 밤이고 쉽게 졸았다. 하지만 막상 작정하고 자려고 하면 깊은 수면에 들어가지도 꿈을 꾸지도 못했다. 얕고 미지근한 물에 몸을 반쯤 담그고 있는 것 같은 느낌으로, 아 내가 잠 속으로 향하는 어딘가에 머물고 있구나. 완전히 잠에 빠져들기까지의 시간은 참 길고 아득해. 둘러볼 풍경도 없고. 하지만 지루하지는 않다. 가만히 기다리는 기분이야. 기다린다는 건 무언가 내 앞에 당도할 때까지 버티는 것. 무엇이든 어떤 일이든 시작할 수 있다는 기대와 믿음을 유지하는 것. 나는 나조차도 뭔지 모르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기다림이라는 걸 하고 있다는 데서 안도한다. 걱정을 내리누르는 적당한 어둠. 좋다. 영원히 헤매도 괜찮을 만큼. 그런 생각을 멈추지 못하면서 졸음 그 자체를 누렸다. 시간을 확인하니 알람이 울리기까지 20분이 남아 있었다. 나는 이불을 만지작거리며 오후 5시라는 시간에 대해 생각했다. 퇴근을 앞둔 직장인들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 느리게 흐르는 시간. 은근슬쩍 가방을 챙기거나 퇴근 시간까지 업무를 끝내기 위해 바빠지기도 할 것이다. 몇 개월 전의 나였다면 하루의 두 번째 아침을 맞이한 사람처럼 뭐라도 하기 위해 조급해질 시간이었다. 아침부터 시작한 일을 마무리하고 또 다른 일을 해치우기 위해 간단히 끼니를 때우고 있었을지도. 하지만 이제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토록 아름답게 늘어지는 저녁 해를 그때는 누리지 못했고, 오후 5시는 이제 내게 서라를 데리러 가야 하는 시간일 뿐이었다. 이불을 침대에 잘 개어 놓고 방과 거실을 오가면서 간단한 정리 정돈을 했다. 서라가 아침에 벗어 놓은 잠옷은 세탁 바구니에, 머리띠나 인형 같은 건 작은방에 대충 집어넣었다. 방 두 개가 딸린 아담한 집이었다. 나는 언제나 이 정도 평수의 집에서 혼자 살기를 원했다. 오후에 느지막이 일어나 커피를 내리고 시간에 쫓기지 않는 일상. 어떻게 보면 반의반 정도는 이루어진 것 같지만, 어떻게 보면 희망사항에서 더욱 멀어졌다고도 볼 수 있었다. 이 집은 거실, 침실 할 것 없이 아기 냄새가 진동했다. 아이가 있는 집 특유의 포근하고 찌뿌둥한 냄새는 이상한 자책감을 일으켰다. 나는 완전히 깨어나기 위해 슬슬 걸으며 차가운 보리차를 꺼내 마시고 머리를 묶었다. 머리카락을 하나로 모으는 동안 냉장고에 붙어 있는 사진 속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서라와 얼굴을 맞댄 이 여자는 아마 서라의 엄마일 것이다. 모녀는 선한 눈매와 작은 입술이 꼭 닮아 있었다. 내가 당신의 아이를 돌보고 있어요. 나는 당신 없는 이 집에서 돈을 개꿀로 벌고 있어요. 당신은 어디 있어요? 여자는 미소만 지어 보일 뿐 답이 없었다. 서라야. 안녕히 가세요, 소리 내어 말하면서 배꼽 인사 할까? 유치원 선생님은 서라를 가뿐하게 안아 버스에서 내려 주었다. 서라는 두 손을 공손하게 배 위에 얹고 허리를 숙인 뒤 내 옆에 섰다. 이모님 보셨죠? 서라가 아직도 말을

  • 최미래
  • 2023-11-01

문장웹진 소설

어린 이의 희박한 자리

[단편소설] 어린 이의 희박한 자리 최미래 묵인은 많은 것을 자라나게 한다. 나는 키가 큰 사람이 되었다. 두애는 방문을 잠그고 한나절 동안 나오지 않는다. 종종 이런 시간이 필요하다. 월경 주기처럼 규칙적으로 그러나 불현듯 찾아오는 이 날에 나는 그다지 날카롭지 않은 칼을 쥐고 두애를 기다린다. 껍질이 끊어지지 않고 길게 길게 이어지도록 사과를 깎는다. 칼은 순간의 세계. 방 쪽에 귀 기울이며 멈칫하다가는 손가락이 베이거나 껍질이 끊어질 것이다. 두애는 자기만의 시간과 생각 속에서 내가 모르는 불행을 견디고 있다. 그런 시간들을 보내고 문을 열 때마다 완전히 지친 모습이고, 먼 미래를 미리 보고 온 사람처럼 허탈한 동작과 표정으로 걸어 나온다.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나마 덜 갈변된 사과를 한 조각 건넬 것이다. 두애는 사과를 손바닥에 올린 채로 소파에 늘어져 있다가 결국 먹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 과정은 조립식 가구를 만드는 것처럼 당연한 절차가 되어버렸다. 나는 사과의 속살로 미끄러지는 칼날과 그 감각에 집중한다. 두애의 방문을 의식하지 않는다. 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껍질이 끊어지지 않게 사과를 깎는다는 것은 한 순간 순간이 길게 이어져야 하는 일이다. 이 순간들에 몰두하기 위해서는 그냥 지나쳐야 하는 다른 순간들이 있기 마련이다. 비가 잠깐 쏟아졌다 그치고 해가 어느 쪽으로 기울며 가라앉고 잠자리가 베란다 창에 부딪히는 일들을 모르는 하루. 나는 두애가 나오기 전까지 계속해서 몰두한다. 간단한 일도 몰두해서 하려고 한다. 온갖 쓰레기가 널브러진 거실을 걸으면서 재활용이 가능한 쓰레기만 줍고 그다음엔 종이로 된 것만 줍고, 그러다 보면 신발장 앞에 쓰레기봉투가 여섯 개 정도는 금방 쌓인다. 그래도 혼자는 외롭고 시간이 잘 가지 않는다. 두애의 방문 그 단단한 손잡이를 바라보고 있으면 간신히 먼 곳에 떨어뜨려 놓았던 어떤 기분들이 머릿속으로 밀려들기 시작한다. 미루어 놓았던 만큼 매끈하게 성장해 있는 그것들은 작고 단단한 돌멩이 같은 것이다. 어렸을 때의 나는 미끄럼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시간을 때우는 것에 익숙했다. 벤치에는 옆집 할아버지가 앉아 있었다. 그와 나는 서로에게 단 한 번도 먼저 인사를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른 새벽 분리수거함을 뒤지는 것, 경비와 사이가 좋지 않은 것, 혼자 사는데 찾아오는 손님조차 없다는 그의 사정을 내가 알고 있듯이 그도 나의 지난한 가정사를 알고 있을 게 뻔했다. 어둑어둑 해가 다 저문 뒤의 놀이터에 끝까지 남아 있는 사람은 우리 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는 계속해서 터져 나오는 기침 때문에 손으로 입을 막았다. 휴지나 물, 뭐든지 간에 도움이 필요해 보였지만 나는 미끄럼틀에 가만히 앉아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이'의 어디쯤에서 생각이 멈춰 있었다. 할아버지는 내 쪽으로 걸어오면서 토를 했다. 토사물은 별것 없이 묽게 흘렀다. 그는 내게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토하기라도 한

  • 최미래
  • 2020-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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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두더지왕

    잘 읽었습니다.

    • 2026-06-05 20:29:18
    두더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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