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에 없는
- 작성일 2007-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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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에 없는
염승숙
1. 정의를 위해서
이야기는 아주 엉뚱한 곳에서, 어쩌면 조금은 사소하달 수도 있는 사건으로부터 시작된 것 같았다.
부동산 중개업자 29년 경력의 김씨는 햇볕이 잘 들고, 보증금 천오백만원 정도의 방을 원하는 손님에게 꼭 맞는 옥탑방을 보여주려다가 서울시 은평구 불광동 1-173번지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이곳을 잘 좀 봐주세요. 여기가 청과물점이고, 저기가 정육점이고, 좀 더 올라가면 슈퍼가 있잖아요. 이 꼭대기에 슈퍼가 있네? 하면서 싹, 오른쪽으로 도는 겁니다. 그럼 거기서 1-173번지가 나와야 한다, 바로 이 말이죠.”
김씨는 손에 말아 쥔 지도를 펴들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하철 3호선과 6호선으로 연결되는 불광역을 기점으로 불광초등학교와 북한산 현대홈타운에 크게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그 사이에 ‘불광동길’이라고 세로로 인쇄되어 있는 글자를 짚으며 김씨는 “지금 우리가 여기 서 있는 거란 말이오.”하고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빠른 속도로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경사는 가팔랐고, 1-173번지로 오르는 길은 꽤 멀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슈퍼를 지나 오른쪽으로 몸을 틀었을 때 분명 1-173번지로 들어가는 좁다란 골목이 있어야 했다. 그곳은 폭이 1미터가 채 되지 않는데다 담장 없이 바짝 붙어 늘어서 있는 집들이 판자를 서로의 지붕에 얹고 얼기설기 얽어져 있었기 때문에 높이 또한 2미터를 넘지 못했다. 장마라도 지면 곧 무너질 모양새의 빗물받이와 보일러실에서 이리저리 잡아 뺀 환기통들이 어깨를 맞대고 있었다. 1-173번지로 들어가는 입구에 위치한 골목은 그 모양새만큼이나 음산하고 습한 기운을 풍겼다고, 김씨는 덧붙였다.
“그렇다고 사람이 안 산 것도 아닙니다. 난 불광동서 나고 자란 이곳 토박이고, 은평구 땅이며 집이며, 전월사글세를 통틀어 내 손을 안 거쳐 간 게 없다고 보면 돼요. 근데 이게 무슨 황당한 일이랍니까?”
김씨는 호쾌한 발걸음으로 손님과 함께 청과물점을 지나, 정육점을 지나, 슈퍼에 이르렀다. 그와 동시에 “보세요, 손님. 이 꼭대기에 슈퍼가 있죠? 다 왔습니다.” 하면서 싹, 오른쪽으로 돌았지만 1-173번지로 들어가는 골목은 없었다. 그곳엔 그저 오래된 잿빛 시멘트벽만이 아이들의 낙서와 취객의 오물, 온갖 먼지와 쓰레기를 뒤집어쓰고 견고히 서 있었다.
“난 중개업자이지만, 일평생 내가 만든 지도를 사용해 왔어요. 관할 동사무소나 시청, 지도 판매업자들에게서 지도를 받아 사용해 오진 않았단 뜻입니다. 그런데 이걸 좀 봐 주시겠소? 손님이 돌아간 즉시 확인해 보니 불광동 1-173번지는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디다.”
김씨는 ‘대한민국최고지도’라고 인쇄된 코팅지를 무력하게 구겨버렸다. 그러고는 자신의 바지 뒷주머니에서 금방이라도 찢어질 듯 나달나달한 4절지를 꺼냈다. 색색의 연필과 볼펜, 형광펜으로 쓰고 그린 불광동이 펼쳐졌다. 셀 수 없이 많은, 이와 같은 크기의 지도가 방 한 칸을 모조리 차지하고 있을 정도라며 그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불광동 땅의 든 자리와 난 자리는 모조리 외운다 이 말입니다. 상호가 변경되면 그마저도 고쳐서 다시 적어 놓습니다. 그런 제가, 서울시 은평구 불광동 1-173번지는 원래 없는 곳이니 그렇게 믿어라, 하면 믿어야 한다 그 말입니까? 청과물점을 지나고, 정육점을 지나면 슈퍼가 나오는데 거기서 오른쪽으로 싹, 돌기만 하면 있었던 1-173번진데, 분명히 있었던 1-173번진데, 원래 없었다고요. 그걸 지금 나보고 믿으라 그 말이요?”
재개발지역으로 구분되어 불도저에 의해 사라진 것도, 순우리말 길 이름 짓기 운동으로 인해 번지수가 바뀐 것도 아니었다. 김씨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전혀, 1-173번지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의아하다고 말했다.
“29년차 중개업자라고 하셨습니까? 저는 31년차 공무원입니다.”
하물며 동사무소에 가서 확인을 해봐도, 은평구 불광동 1-173번지라는 주소는 존재하지 않았다. 낡은 감색 양복을 입은 31년차 공무원은 손바닥에 침을 뱉어 옆머리를 가지런히 매만진 후 절도 있는 동작으로 의자에 앉았다. 계속 찾아봐도 마찬가지였다. 1-173번지는 지금으로부터 십년 전, 이십년 전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았고, 불광동에서 삼십여 년이 넘도록 살아온 사람들의 기억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고로 1-173번지는 아무 곳에도 없는 곳이었다.
“내 마누라마저 날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지 뭡니까. 잔뜩 의심스러운, 그러나 겁먹은 눈초리로 말이오. 이 양반이 이제 갈 때가 된 건가, 둘째가 대학을 마치려면 아직 3년은 더 있어야 하는데 이걸 어쩌나, 하는 눈이었어요. 1-173번지는 정말로 있다! 라고, 한밤중에 고래고래 소리라도 질렀다면 그 즉시 수화기를 들었을 겁니다.”
김씨는 싸움에 진 아이처럼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더 황당한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습니다. 햇볕이 잘 들고, 보증금 천오백만원 정도의 방을 원했던 바로 그 손님 말이오. 가파른 경사로 탓에 힘들게 모시고 올라갔는데 허탕이었으니 내 입장이 뭐가 됐겠어요. 감기가 들었는지 자꾸만 코를 훌쩍이는 탓에 고생을 시킨 것 같아 미안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명색이 29년 경력의 중개업잔데 이 손님이 나를 얼마나 맹물로 볼까 자존심이 상하더이다.”
김씨는 가겠다는 손님을 어르고 달래 사무실로 데려왔다고 했다. 차를 한 잔 내주고 알맞은 방이 있는지 다른 중개소로 전화라도 돌려볼 요량이었다. 그런데 소파에 앉아서도 손님이 계속 코를 훌쩍이는 통에 힐끗힐끗 얼굴을 들여다보니 아니 이게 웬걸, 김씨는 반가움을 감추지 못하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얼굴이 많이 까매지고 살이 제법 두툼히 붙은 것을 빼고는 달라진 게 없었어요. 분명 그 사람이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쯤, 바로 그 1-173번지의 옥탑방에 살았던 청년. 맞아요, 그 때도 비염이 있어 언제나 코를 훌쩍거렸어요. 이따금씩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아 갑갑한지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힘들어하곤 했었다는 기억도 났지요. 나는 아니 어떻게 이곳으로 다시 돌아왔느냐, 옛 생각이 나서 다시 돌아오려 하느냐, 웃으며 반갑게 물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재채기를 연달아 다섯 번이나 하느라 김씨의 말에 대꾸할 겨를이 없었다. 김씨는 탁자 위에 놓인 티슈를 뽑아 건네며 안쓰러운 듯 “거 참, 비염은 불치라더니 여전히 잘 낫지 않는 모양인가 보오.”하고 말했지만 그마저도 그의 코 푸는 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전혀 기억을 못하는 겁니다. 기억상실증이라도 걸렸나 궁금해서 혹시 교통사고가 난 적이 있느냐고 넌지시 물었지만 그런 적도 없다더군요. 잘 떠올려봐라, 15년 전에 당신은 스물네 살이 아니었느냐, 꽃가루가 눈처럼 풀풀 날리던 일요일 오후에 남색 용달을 끌고 이사 오지 않았느냐, 그 집이 바로 아까 올라가서 보여주려 했던 1-173번지의 옥탑방이다……, 나는 주저리주저리 설명을 늘어놓았지만 분위기는 점점 싸늘해졌어요.”
그는 김씨가 당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듯 노골적으로 눈살을 찌푸린 후 “글쎄요. 제가 이사를 좀 자주 다니는 편이라서 말입니다.”하고 대꾸했다.
“1-173번지 말이오. 북한산이 바라다 보이던 그 옥탑방.”
“제가 기억력도 좀…… 없는 편이라서 말입니다.”
“내 얼굴을 찬찬히 봐요. 물론 그 때보다야 좀 늙었지만 난 마른 체격도 여전하고, 여기 왼쪽 눈 옆에 있는 사마귀…… 이거 보이오? 사무실도 29년째 이 자릴 지키고 있는 걸, 뭐.”
마음이 조급해진 김씨는 흡사 애원조로 말했지만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외려 답답하다는 시늉을 하며 그는 다음에 다시 오겠다는 말만 남기고는 가버렸다.
“그 즉시 시청으로 가서 지도 한 장을 사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케케묵은 먼지들을 털어내며 장부를 뒤지고 또 뒤졌죠. 밤을 꼴딱 새워 장부를 넘긴 후에야, 15년 전에 1-173번지의 옥탑방에 살았던 그 청년에 대한 기록을 찾아낼 수 있었어요. 그런데 왜, 기억하지 못할까요. 그 청년은 계약 기간인 2년을 채우지 못하고 방을 비웠지만, 사는 동안 나랑은 꽤 돈독했어요. 나는 끔찍이도 추웠던 그 해 겨울엔가 보일러가 얼어서 동사 직전이었던 청년을 우리 집에 데려와 일주일가량 먹이고 재워줬던 적도 있었다 이 말입니다.”
오래된 장부들을 베고 누워 김씨는 탈진해서 중얼거렸다. 소리는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혀끝에서만 뱅뱅 돌았다.
나를, 모르겠다고……?
자신이 평생을 두고 오르내린 불광동 1-173번지가 없어졌다는 사실만큼이나, 그것은 김씨에게 충격적인 일이었다. 불광동서 나고 자란 이곳 토박이고, 은평구 땅이며 집이며 전월사글세를 통틀어 자신의 손을 안 거쳐 간 게 없다고 믿고 있는 29년 경력의 중개업자인 김씨. 이 가파른 불광동 땅으로, 정성을 다해 무수한 사람들을 들이고 또 내보냈는데, 누구보다도 자부심을 갖고 이곳에 붙박여 살았는데, 분명 친밀히 알고지낸 사람인데, 도대체 왜 기억을 못하는 것일까.
“그러니 나는 꼭, 찾아내야만 했습니다.”
자신이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아내와 자식들의 손에 이끌려 병원에 감금당하지 않기 위해서, 아니 보다 더 절실한 심정을 다해 말한다면 불광동 1-173번지는 정말로 있었으며 자신이 바로 그 1-173번지에 사람을 들이고 또 들였던 29년 경력의 중개업자라는 사실을 확인받기 위해서, 김씨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5년, 그 5년여의 시간 동안 1-173번지의 옥탑방을 거쳐 갔던 이들을 찾아 나서겠다고 결심했노라고 말했다. “정의를 위해서.”라고도, 김씨는 덧붙였다.
2. 나름대로 로망
29년차 중개업자인 김씨의 장부에 적힌 기록에 의하면 지난 5년간 1-173번지의 옥탑방엔 모두 다섯 명의 젊은이들이 머물렀다. 그들은 모두 이십대의 젊은 남자였고, 독신이었으며, 옥탑방에서도 물론 혼자 살았다. 김씨의 장부에는 그들의 세세한 살림살이와 옥상의 활용 여부에 관한 사항마저도 보고서처럼 빼곡하게 적혀 있었는데 각기 다른 다섯 명의 살림살이는 마치 한 명의 젊은이가 오년 동안 살았다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변화 없고, 무료했다.
“모두 일 년이 채 못 되어 옥탑방을 떠났습니다. 가장 오래 머물렀던 사람도 일 년을 조금 넘겨 살았을 뿐이었어요. 뭐, 그럴 만도 했겠죠.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춥고…… 무엇보다 북한산이 가까워 별의별 벌레들이 다 극성이었을 겁니다. 공기 좋고, 경치도 나무랄 데 없었겠지만 이런 곳에서 혼자 산다는 건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니까 말이오. 하지만 이게 다, 젊었을 때 아니면 또 경험할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나는 조건만 맞는다면 부러 그 옥탑방을 추천하기도 했는데요.”
김씨는 은근히 자랑스레 장부를 펼쳐보였다. 장부에 적혀진 대로라면 분명, 1-173번지는 존재해야 마땅했다. 다섯 명의 청년들 중 단 한 명이라도 찾아내기만 한다면야 김씨가 그토록 주장해 마지않는 1-173번지를 증명해내는 일은 어려워 보일 것 같지 않았다. 김씨는 한 손엔 지도, 한 손엔 장부를 들고 뒷주머니엔 29년째 붓고 있는, 만기를 고작 1년 앞둔 적금통장을 야무지게 찔러 넣은 후 결연히 길을 나섰다며 눈에 힘을 주었다.
가장 최근까지 1-173번지의 옥탑방에 살았던 남자는 ‘갑’으로, 29세였고 여전히 독신이었다. 갑은 아현동의 허름한 오피스텔을 얻어 사무실 겸 살림집으로 쓰고 있었다.
“잘 오셨습니다. 어떻게 아리따운 신부님과 함께 안 오시고 신랑님 혼자……?”
만면에 미소를 띠고 두 팔 벌려 김씨를 맞이하는 바람에, 그는 사뭇 긴장했다. 사무실이라고는 하지만 온갖 쇼핑몰 전단지와 상호 불명의 중화반점 스티커가 먼지를 뒤집어쓴 채 나뒹굴고 있었고, 비서 한 명 없이 달랑 하나의 책상과 어디선가 주워왔을 법한 소파 그리고 때에 전 간이침대가 놓여 있을 뿐이어서 어딘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마저 풍겼다.
“조금 불편하시겠지만, 그래도 앉으시죠.”
소파는 뜯겨진 천 틈새로 솜과 스프링이 흉물스럽게 튀어나와 있었다. 주춤거리며 엉덩이를 붙이면서도 김씨는 갑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월세 없이 보증금만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방이었으면 좋겠다고, 잠만 잘 곳을 구하고 있으니 방이 그다지 좋지 않아도 관계치 않겠다고, 부동산에 들어서서 씁쓸히 말을 뱉어내던 갑이 맞는 것 같았다.
“신부님과 함께 오시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제가 충분히 신부님 마음에 드실 만한 상품으로 골라 드릴 테니까요. 아무런 걱정도,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자, 그럼 카탈로그를 함께 보실까요?”
종이컵에 녹차 티백을 넣고 뜨거운 물을 담아온 갑은 짐짓 활기찬 목소리로, 책자 형식의 상품 목록을 첫 장부터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갑의 머리엔 까치집이 지어져 있는 데다 눈가엔 미처 떼지 못한 눈곱마저 끼어 있었다.
“저기…….”
“아유, 신랑님. 긴장하실 것 없습니다. 녹차부터 한 잔 쭉 들이켜세요. 늦장가 가신다고 친구 분들께 놀림을 많이 받으셨나 보죠? 요즘 세상에야 나이 마흔 넘어 결혼하는 것쯤은 예삿일도 아닙니다. 쉰, 예순에 새 인생 시작하시는 분들도 수두룩하다니까요? 그럼요, 그럼요. 다만 경제위기를 극복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이때에, 대한민국 중산층이 픽픽 쓰러져 나간다는 이때에, 일생일대의 결혼식을 얼마나 알뜰하게 그러면서도 신랑신부님 마음에 꼭 들게 치러내느냐, 그것이 문제 아니겠습니까! 네, 바로 그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식 날짜는 언제쯤으로 생각하고 계신지 찬찬히 이야기 좀 나누어 보실까요?”
오피스텔 문 앞에 ‘알뜰결혼식추진위원회’라는 문패가 달려 있었던 것을 생각하며 김씨는 어느 타이밍에 맞춰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했다.
“나…… 모르겠습니까?”
김씨는 열의를 다해 불광동의 29년차 중개업자인 자신을 소개했다. 1-173번지의 옥탑방을 주선 받고 수수료 10만원을 지불하지 않았느냐고, 지난해 봄에 이사와 가을이 끝날 때쯤 이사 가지 않았느냐고, 혹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겠느냐고 설명했다. 갑의 얼굴에 잠시 당혹스러운 표정이 어리는 것을 김씨는 보았다.
“그, 글쎄요. 제가 이사를 좀 자주 다니는 편이라서 말입니다.”
“1-173번진데, 젊은이. 북한산이 바라다 보이던 옥탑방 말이야.”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한동안 곰곰 기억을 더듬던 갑은 김씨 앞에 놓아두었던 녹차를 한입에 들이킨 후에야 다시금 미소를 되찾았다.
“제가 기억력도 좀…… 없는 편이라서 말입니다.”
갑은 부러 헛웃음을 지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정말이지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모습이어서, 김씨로서는 더 이상 다그치기도 민망해졌다.
“주위에 형편이 어려워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고 계신 신랑신부님들 계시면 중개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저희가 합동결혼식 전문인데, 그게 또 막상 해보시면 나름대로 로망이 있거든요. 그럼,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발걸음을 돌리는 김씨의 등에 대고 갑은 “꼭 연락주세요!”하고 소리쳤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바로 지난해까지 자신이 계절을 넘기며 살았던 곳을 기억하지 못한다니요. 이게 말이나 됩니까? 1-173번지가 애초에 없는 곳이라는 말보다 더 어이가 없었습니다.”
김씨는 아직도, 오피스텔을 나서며 등 뒤로 들려오던 갑의 활기찬 목소리를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명랑한 음색에 가려진 피로한 얼굴이 떠올라, 더 이상 따져 물을 수도 없었다고 김씨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3. 차원이 다르다
갑이 이사 오기 전에 1-173번지의 옥탑방에 살았던 남자는 ‘을’로, 27세였고 여전히 독신이었다. 대학을 갓 졸업한 을은 인력 소개 전문 업체에서 일하고 있었다. 인부 관리팀에 소속되어 근무하는 을을 만나기 위해 김씨는 새벽 4시 반까지 영등포역으로 나가야 했다.
“저기……, 누굴 좀 만나러 왔는데요.”
“일단 기다려 주세요. 저희 업체에서는 정확히 1시간 반의 교육을 마치신 분들께만 현장에 배정받으실 수 있는 기회를 드립니다. 협조해주시길 부탁드릴게요. 자, 들어가세요.”
김씨는 직원의 억센 힘에 밀려 비좁은 컨테이너 박스로 들어갔다. 커다란 화이트보드를 앞에 두고 대략 50여 명의 인부 지원자들이 긴장된 표정으로 복작복작 모여 있었다. 김씨는 오로지 을을 만나야 한다는 일념하에 그 틈바구니로 끼어들었다. 잠시 뒤 들어온 을은 컨테이너 박스가 흔들리도록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연령대! 다양한 기술 인력! 아버님들이야말로 21세기를 이끌어가는 최첨단 멀티플레이어이십니다. 바로 제가, 그것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드리겠습니다. 못 박고, 지붕 고치고, 도로의 보도블록 하나 놓는 데만 해도 우리 아버님들이 하시면 수준이 다르고, 차원이 다르다는 걸 보여주십시오. 결단코, 좌절하시면 안 됩니다.”
을의 뒤로는 도합 세 명의 직원이 각기 색깔만 다른 티셔츠를 입고 서 있었는데, 가슴에는 제각각 ‘일하고 싶은 당신’, ‘당신의 잠재된 능력을 보여주세요’, ‘바로 이곳, 현장인력에서!’라는 문구를 새긴 채였다. 인부 지원자들 모두 두 눈을 빛내며 을의 강연을 들었다. 을이 저런 청년이었던가를 확인하기 위해 김씨는 몰래 장부를 펼쳐보았다.
“시 쓰는 걸, 좋아하거든요.”
김씨의 장부에 따르면 1-173번지의 옥탑방에 살았던 을은 제대 후 복학을 앞두고 서울에 올라온 학생이었다. 짐이라고는 간단한 취사도구와 책상, 몇 권의 시집뿐이라던 을의 말과는 달리 정작 이사 당일 그가 방에 늘어놓은 시집의 양은 상당했다. 보일러와 수도, 전기 등이 이상 없이 돌아가는지 점검 차 들렀던 김씨는 놀라 이 많은 시집들이 모두 을의 것이냐고 물었다. 그리고 그런 김씨에게, 을이 멋쩍은 듯 웃으며 한 마디 수줍게 뱉은 것이 “시 쓰는 걸 좋아하거든요”였다. “미래의 시인에게 사인이라도 받아둬야겠네!”하고, 짓궂게 장부의 흰 면을 펼쳐 내밀었던 일이 기억났다.
“아버님들이야말로 위풍당당하게 일하고, 정정당당한 대우를 받아야 할 권리가 있습니다. 저희 현장인력에서는 아버님들께서 오랜 세월 축적해 오신 사회 경험과 풍부한 노하우를 높이 평가합니다. 본격적으로 일하시기에 앞서 저희가 짧게나마 실시하는 이런 교육들은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멀티플레이어로서 일하시게 될 아버님들께 보다 더 실제적인 문화와 교양을 습득시켜드리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저 재밌게 들으시고, 기운을 북돋아 가신다, 그렇게 여겨주시면 됩니다.”
을은 웅변대회에 나온 어린 아이처럼 긴장돼 보였고, 실제로 씩씩한 말솜씨이긴 했지만 간간이 떨려나오는 음색을 감추진 못했다. 말이라도 붙여보려면 교육을 끝까지 받는 수밖에는 별다른 도리가 없겠다고, 김씨는 팔짱을 끼며 생각했다.
“당까이노 세다이, 이 말은 현재 일본의 50대 후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흔히 단카이 세대로 일컬어지는데요. 황폐한 사회, 최악의 경제 상황 속에서도 아이들은 끊임없이 태어나게 마련이잖아요. 2차 대전 이후 일본에서도 베이비붐이 일어났습니다. 신생아들이 많이 출산되었다는 의미로 단괴, 덩어리, 즉 단카이 세대로 부르는 것입니다. 그들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전후 일본 사회를 오늘날 이만큼 건설시킨 주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50대 후반, 고령화 시대를 앞당기는 사회 문제로 논의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죠. 직장에서 물러난 단카이 세대를 재교육시켜 사회 인력으로 거듭나게끔 만드는 것이 일본에서도 주요한 과제로 인식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합니까! 사오정, 오륙도가 난무하는 대한민국은 지금 대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이제 저희 현장인력이, 정부가 하지 못하는 일을 맡겠습니다. 아버님들께서는 그저 저희만 믿고, 따라오시면 됩니다!”
을은 얼굴이 벌게진 채로 목에 핏대를 세웠다. 컨테이너 박스를 가득 채운 인부 지원자들은 박수를 치며 ‘현장인력! 현장인력!’하고 복창했다. 을의 뒤에 선 세 명의 직원들이 색색의 티셔츠를 펄럭이며 분위기를 주도했다. 김씨 역시 얼결에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려 박수를 쳤다.
“나…… 모르겠습니까?”
교육이 끝나고 밖으로 나가려는 을의 팔을 필사적으로 붙든 김씨는 숨을 몰아쉬며 불광동의 29년차 중개업자인 자신을 소개했다. 1-173번지의 옥탑방을 주선 받고 수수료 10만원을 지불하지 않았느냐고, 지지난해 여름에 이사와 겨울이 끝날 때쯤 이사 가지 않았느냐고, 혹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겠느냐고 설명했다. 을의 땀에 전 이마가 짜증으로 찌푸려지는 것을 김씨는 보았다.
“그, 글쎄요. 제가 이사를 좀 자주 다니는 편이라서 말입니다.”
“1-173번진데, 젊은이. 북한산이 바라다보이던 옥탑방 말이야. 경치가 좋아 시가 잘 써질 것 같다고 하지 않았나.”
김씨의 말을 듣는 을의 양 눈썹은 점점 더 꿈틀거렸다.
“현장 배정을 받으실 거라면 신원확인서를 작성해주시고, 좀 더 생각해보셔야 할 것 같으면 다음 주 이 시간에 다시 방문해주십시오. 오로지 저희 현장인력만이 업계 최저수수료를 고집하고 있다는 점을 명심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고개를 수그리고 걸어가는 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김씨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불광동 1-173번지 말이야! 1-173번지!”
발악하듯 소리를 지르는 김씨를 많은 인부 지원자들이 지나쳐갔다. 김씨는 점차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으나,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장부엔 아직 1-173번지에 살았던 이들의 기록이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1-173번지가 있었다는 사실을 진실로 증명해줄 청년들이, 분명 어디선가 살아가고 있을 터였다.
“정말 기억이 나질 않았던 건지, 아니면 일부러 모른 척한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소리를 쳤는데, 뒤도 한번 안 돌아보고 가더군요.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김씨는 아직도, 땀이 밴 을의 이마가 잊히질 않는다고 말하며 두 손에 힘을 주어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4.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을이 이사 오기 전에 1-173번지의 옥탑방에 살았던 남자는 ‘병’으로, 26세였고 여전히 독신이었다. 김씨가 병을 찾아낸 곳은 마침 그날 처음으로 문을 연 상계동의 ‘369신용금고’였다.
“369는 무슨 놈의 369야! 장난해?”
제복을 입은 경비원 두 명에게 두 팔이 붙들린 채 병은 발버둥을 치고 있었고, 김씨는 곁에서 병의 얼굴을 꼼꼼히 뜯어보며 장부에 기록된 그 젊은이가 맞는지 확인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작달막한 키의 병은 귀가 아주 큰 탓에 눈에 띄는 인상이었다. 게다가 친절한 성격에 사교성이 좋았고, 특히 어른을 공경하는 마음씀씀이가 기특했던 청년이었다. 이사 온 첫날, 자신은 현재 대학에 다니고 있지 않고, 컴퓨터 부품을 조립하는 회사에 다니면서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중이라고 싹싹하게 대답하던 것이 기억났다.
“음료수 한 잔 드시겠어요?”
먼지 묻은 목장갑을 벗고도 한참이나 바지에 손을 문지른 뒤에야 손수 종이컵에 음료를 따라 건네주던 병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일까. 분명 1-173번지에 살았던 병이 확실한데, 다른 곳도 아니고 하필이면 신용금고 안에서 경비원들에게 팔이 붙들려 버둥거리고 있다니 무슨 사연일까 싶어 김씨는 걱정이 앞섰다. 그때 369신용금고의 지점장이 넥타이를 추스르며 나타났다. 오전이라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 것은 아니었지만 새로 개점하는 날이었던 데다, 큰소리가 나자 웬 소란인가 싶어 이웃한 상가의 장사치들이 모두 몰려든 상황이었다.
“반갑습니다. 저희 369신용금고를 찾아와주신 고객님께 마음으로부터 크나큰 감사를 드립니다. 무슨 불편한 사항이라도 있으십니까?”
지점장은 머리가 희끗하고 한눈에 보아도 나이가 있어 보였지만 이십대 후반의 병에게 깍듯이 예의를 차렸다. 다분히 기계적인 어투에 입을 삐죽대는 구경꾼들이 두어 명 남짓 눈에 들어왔다.
“당신들 말이야…… 이러는 거 아냐, 진짜!”
흥분한 기색이 역력한 병이 거의 울부짖는 수준으로 소리쳤으나 지점장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고객님, 저희 369신용금고는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부담 없이 저금하고, 박수치며 예금을 찾아가는 그날까지 정성을 다해 봉사하겠다는 자세로 업무에 임하고자 합니다. 개점 한 달 내에 통장을 개설하시는 고객 여러분께는 특별히 창구에서의 이체?송금 시 수수료를 면제해 드리며, ‘재해 보장 369짝짝’ 보험까지 무료로 가입해 드립니다. 불만 사항이 있으시면 부디 기탄없이 말씀해 주십시오. 의견 수렴 즉시 개선하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지점장이 “그 손 좀 놔드리지.”하고 경비원들에게 이야기하자 병의 팔은 자유로워졌다. 병은 왼쪽 어깨를 주무르며 울 듯 말 듯한 표정으로 따지듯 항변했다.
“내가 일주일 전부터 문 앞에 붙여놨잖아요. 보고도 모른 척하는 게 사람 무시하는 게 아니고 뭐예요. 내가 그렇게 내 이름 쓰지 말라고 했는데 왜 쓰는 거예요. 이게 당신 이름이라고 생각해보란 말이에요, 기분이 좋은가 안 좋은가! 신경이 쓰이나 안 쓰이나!”
병의 말인즉슨 이러했다. 개점을 앞두고, 369신용금고는 대대적인 홍보 행사와 함께 각 동의 곳곳에 현수막을 내걸었다. 이체?송금 시 수수료 면제와 ‘재해 보장 369짝짝’ 보험의 무료 가입 선전도 잊지 않았다. 전단지가 나붙었고, 지점장이 직접 출연해 예의 그 번듯한 미소를 지으며 지역 유선방송의 전파도 탔다. 그에 발맞춰 병 역시 개점 일주일 전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나와, 셔터가 내려진 369신용금고의 문 앞에 정성스레 종이를 붙였다.
〈제 이름은 홍길동입니다. 부디 귀 지점의 예금 또는 출금?신탁?보험?신용카드 가입?해지 등 관계된 모든 용지의 예시에 제 이름을 사용하지 말아주십사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귀 지점의 무궁한 발전을 빕니다.〉
어찌된 일인지 아침에 오면 종이가 바닥에 떨어져 있거나, 어디론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병은 개의치 않고 일주일 동안 똑같은 내용의 종이를 곧 개점할 신용금고의 문 앞에 붙였다고 했다. ‘이쯤 했으면 당연히 쓰지 않았겠지.’하고 생각했던 병은 그러나,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확인 차 들른 개점 첫날의 369신용금고에서 또 다시 자신의 이름을 발견하고는 흥분했다. ‘보시고 따라하세요!’라고 친절히 써 있는 손글씨 밑으로 ‘예금주 홍길동’이라고 적혀진 모습을 보는 순간, 병은 피가 거꾸로 솟았던 것이다.
“각 지역의 관할 시청, 동?읍?면사무소, 각종 교과서와 참고서, 정부간행물?신문?잡지, 하다못해 다종다양한 헬스클럽과 찜질방, 인터넷 쇼핑몰에서까지 모든 예시와 결제 안내 등에 제 이름을 사용해요. 그리고 이제는 당신네들 같은 별 요상한 이름의 신용금고에서까지 제 이름을 써 대고 있어요. 왜요? 왜요? 대체 왜 그렇죠? 왜 제 이름이죠?”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얼굴로 병은 따져 물었다.
“그까짓 이름 같고 웬 소란이냐, 이름을 바꿔라 하는 사람들도 많았어요. 하지만 내가 왜 멀쩡한 내 이름을 바꿔야 하나요? 부모님이 계셨다면 저도 생각해 봤겠죠. 어머니 아부지, 왜 제 이름을 이렇게 지으신 거죠? 이제는 제 이름 좀 바꿔도 될까요? 하지만 여쭤볼 부모님이 없어요. 그러니 바꿀래도 바꿀 수가 없어요. 동사무소에 가서, 시청에 가서 항의를 해도 알았다고만 웃고 넘길 뿐, 바꿔주지 않아요. 덕분에 사람들은 매일 매일 예금주 홍길동, 세대주 홍길동, 전입신고자 홍길동을 입에 달고 살죠. 369는 뭐가 잘났어요?”
병은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따발총처럼 쏘아붙였다. 지점장은 점차 얼굴이 벌게졌고, 입가의 근육이 씰룩거렸다.
“369는 뭐가 잘났냐고요! 도대체 홍길동보다 뭐가 잘난 이름이라서, 남이 애써 한 부탁도 무시해버리고 당신들 이름도 아니면서 내 이름을 함부로 쓰는 거예요? 예시 인생은 이제 지긋지긋하다고요!”
“내 이름도 홍길동이다, 이 망할 놈의 자식아!”
지점장은 폭발하듯 소리를 지르며 넥타이를 풀어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지점장 홍 길 동’이라고 쓰인 은빛 명찰이 지점장의 양복 오른쪽 가슴 부분에서 흔들렸다. 겁에 질린 여직원 한 명이 지점장의 이름이 쓰인 원목 명패를 들고 달려와 라운드 걸처럼 머리 위로 높이 들었다. 병을 붙들었던 경비원들은 허겁지겁 달려가 지점장의 팔을 붙들었다.
“내가 썼다, 아무도 모르게 새벽에 출근해서 내 이름 내가 썼어! 사내자식이 그깟 이름이 뭘 어쨌다고 울고불고 생난리야! 홍길동이 어때서! 그 훌륭한 홍길동 선생이 부끄럽다 이거냐?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이름이니 시청이며 동사무소며 은행이며 신문이며 번쩍 번쩍 새겨지는 게 당연하지, 뭐가 그리 싫다고 질질 짜, 짜기를! 너 이 새끼, 이리 와! 내 아들이었으면 넌 허리꺾기 16회, 쪼그려 앉아 뛰기 139회, 팔굽혀펴기 455회야! 당장 이리 와! 어쭈, 이리 못 와?”
병은 서러운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는 엉엉 눈물을 흘리며 369신용금고를 뛰쳐나갔다. 사람들은 휑하니 달려가는 병의 뒷모습과 분노로 침을 한 대야는 쏟아놓고 씩씩대는 지점장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사람 소리 지르는 거 처음 봅니까? 할 일 없으면 당장 집에 가서 구들장 지고 썩어가는 십 원짜리나 한 자루씩 모아 와욧! 좌로 정렬, 하낫 둘! 모두 앞으로 갓!”
지점장은 바닥에 떨어진 넥타이를 낚아채며 호통을 쳤고, 사람들은 화들짝 놀라 허둥지둥 열을 맞춰 신용금고를 빠져나갔다. 김씨 역시 어리둥절하게 서 있다가는, 병이 사라진 방향으로 젖 먹던 힘을 다해 달렸다. 1-173번지의 옥탑방으로 이사 오겠다고 결정한 후 입주계약서를 작성하면서 “제 이름이 좀 웃기죠?”하고 배시시 웃었던 병의 앳된 얼굴이 도로를 가로지르는 김씨의 머릿속에 스쳐지나갔다.
“나…… 모르겠습니까?”
김씨는 주택단지로 들어가는 입구의 공원에 앉아 있는 병을 가까스로 찾아냈다. 그러고는 땀을 뚝뚝 흘리며 열의를 다해 불광동의 29년차 중개업자인 자신을 소개했다. 1-173번지의 옥탑방을 주선 받고 수수료 10만원을 지불하지 않았느냐고, 지금으로부터 3년 전쯤의 겨울에 이사와 일 년 가까이 머물다 이사 가지 않았느냐고, 혹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겠느냐고 설명했다. 병의 얼굴은 눈물로 번들거리고 있었는데, 그의 눈동자에 잠시 경계의 빛이 어렸다 사라지는 것을 김씨는 보았다.
“그, 글쎄요. 제가 이사를 좀 자주 다니는 편이라서 말입니다.”
“1-173번진데, 젊은이. 북한산이 바라다보이던 옥탑방 말이야. 이사 오던 날 나한테 음료수도 따라 주지 않았나, 왜. 검정고시를 본다고 했었지 아마? 지금쯤이면 대학생이 되었겠군 그래?”
병은 조심스레 김씨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자신에 대해 상세히 알고 있는 눈앞의 낯선 인물이 의아하다는 듯, 그러나 전혀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김씨는 인내심을 갖고 기다렸다. 병이 1-173번지에 살았다는 사실만 떠올려 준다면, 1-173번지의 옥탑방을 소개해주고 이삿날 음료수까지 함께 마셨던 자신을 기억해준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을 것 같았다.
“죄송해요. 기분이 좋지 않아선지 지금은 아무것도, 기억이 나질 않네요.”
“불광동 1-173번지의 옥탑방을 모르겠단 말인가? 자넨 거기서 1년이나 살지 않았나.”
“모르겠어요,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도, 기억하고 싶지도 않아요. 죄송해요, 아저씨.”
“지금 살고 있는 집도 옥탑방인 걸요…….”라고도, 병은 웅얼거렸다. 김씨는 터질 듯 가슴이 답답해져왔다. 터덜터덜 걸어 공원을 빠져나오면서 김씨는 땀 찬 손에 들러붙은 장부를 펴고 목록에서 병의 이름을 지웠다.
“정말이지 캄캄했지만, 한편으론 그래 괜찮다, 이제 겨우 세 명의 젊은이만 만나봤을 뿐이야, 아직은 괜찮아, 라고 주문을 걸듯 중얼거렸습니다. 정말 그랬거든요. 눈이 퉁퉁 부은 스물여섯의 젊은이를 계속 닦아 세우고 싶지도 않았고, 내겐 1-173번지에 살았던 또 다른 젊은이가 아직 남아 있었으니까, 괜찮았다 이 말입니다.”
그 다음 날 369신용금고 앞을 지나쳐 가며, 김씨는 건물에 커다란 현수막이 드리워져 있는 것을 보았다. “아주 유쾌한 광경이었습니다.”하고 김씨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길동아, 울지 마라. 369신용금고가 있다! ?지점장 홍 길 동〉
5. 정확히 3분 소요
병이 이사 오기 전에 1-173번지의 옥탑방에 살았던 남자는 ‘정’으로, 23세였고 여전히 독신이었다. 장충동의 어느 찌개 요리 전문점에서 정을 찾아낸 김씨는 그가 앞치마 대신 머리띠를 두르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식당 입구에는 정을 포함해 대략 40여 명의 장충동 식당 종업원들이 모여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멀리서도 그들의 이마에 붙여진 ‘각성하라!’, ‘전면 개선’, ‘고통 근절’ 등의 격정적인 문구들이 눈에 띄었다.
“가스렌지의 휴대화를 가능하게 만든 부르스타! 우리는 당신들의 노고를 치하합니다. 그러나 장충동 내 40여 명의 요식업 종사자 여러분, 우리가 일하는 식당의 모든 부르스타를 꺼내 확인해 보십시오! 용기 탈착 레바가 제자리에 붙어 있는 게 당최 몇 개나 되는지! 부탄가스 넣고, 점화 손잡이 돌리기 전에 우리는 먼저 안전에 유의하여 빠르고 정확하게 용기 탈착 레바를 내려야 합니다. 하지만 플라스틱이 떨어져 나간 레바를 엄지손가락으로 내려야 할 때의 그 공포! 아으, 그 공포……!”
“아으, 그 공포……!”
정이 확성기에 대고 몸서리를 치자, 40여 명의 장충동 식당 종업원들이 아스팔트에 주저앉은 채로 똑같이 몸을 배배 꼬았다. 지나는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췄고, 이웃한 상점의 사람들이 전부 몰려들었다.
“우리 요식업 종사자들은 이미 지난해 봄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본사에 리콜을 신청한 바 있습니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장충동 내 일반음식점으로 등록된 모든 업소의 부르스타를 모은다. ② 플라스틱이 떨어져 나간 레바의 개수를 조사한다. ③ 각 부르스타의 구입 시기와 레바가 고장난 날짜를 적어 문서화한다. ④ 부르스타 본사에 리콜을 요청한다. 그러나 현재 본사에서는 아무런 조치도, 취해주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동지 여러분,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이래서는 일할 수 없다! 이래서는 일할 수 없다!”
모두들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기세였다. 장충동의 도로 일부를 점거하고 농성에 들어간 식당 종업원들로 인해 자동차들은 연신 경보음을 울려댔고, 어떻게 알았는지 무장한 의경들을 태운 버스 한 대가 달려와 멀찌감치 주차했다. 김씨는 아무리 장부와 정을 번갈아 들여다보아도 자신이 불광동 1-173번지의 옥탑방을 소개해 주었던 그 청년이 맞는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딱 세 달만 다녀오는 거야. 가을 학기가 시작되면 올라올 거니까.”
“…….”
“쌀 있으니까 밥 해먹고, 학교 갔다 오고, 밤에는 문단속 잘 하고 자면 되는 거야.”
“…….”
“금방 온다. 방학 동안만, 버텨 줘.”
“…….”
이사 온 첫날, 정의 형은 따로 짐을 꾸려 어깨에 멨다. ‘형님 다녀오마.’하고 눙치듯 정의 머리칼을 흩뜨렸지만 정은 끝내 단 한 번도 입술을 떼지 않았다. 그 때의 불광동은 막 초여름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옥탑방을 벗어나 불광동 길을 따라 내려가는 형의 뒷모습은 뜨거운 햇볕에 닿아 녹을 듯 흐느적거렸다. 김씨는 단출한 이삿짐을 부려놓을 생각은 않고 부동자세로 서서 제 발치만 내려다보던 정이 아주 작은 몸짓으로 어깨를 들썩이던 것을 떠올렸다. 이후 아침저녁으로 터벅터벅 가파른 경사로를 오르내리던 정의 모습을 보긴 했지만 늦가을쯤엔가 올라가 본 옥탑방은 문도 잠겨 있지 않은 채로 덜렁덜렁 바람에 휘둘리고 있었다. 보증금도 없이 월세 25만원으로 급히 계약을 했던 터라 주인은 별 수 없다는 듯 다시 입주자를 물색했지만 김씨로서는 내심 그들 형제의 일이 궁금하고, 걱정되었다. 그러나 그 때의 그 뜨겁던 여름, 이도 저도 시선을 둘 곳 없이 홀로 서 있었던 작은 소년이, 도로의 한복판에서 확성기를 든 정이 맞는지의 여부에 관해서는 도무지 확언할 수 없었다.
“우리는 주문에서 세팅까지, 그리고 계산에서 테이블 정리, 다시 세팅까지 정확히 3분 소요를 목표로 합니다. 온종일 부르스타를 들고 나르고 종횡무진 식당을 누벼야 하는 우리 종업원들에게 있어 고장난 레바의 리콜 문제는 아주 중대한 사항입니다. 살갗이 벗겨지고, 물집이 미처 아물지도 못하고 다시 터집니다.”
정의 말에 40여 명의 식당 종업원들은 “옳소! 옳소!”하고 맞받았고, 이후 순번을 정해 돌아가며 확성기를 손에 들었다.
“주인은 온종일 같이 있어 봤자 레바엔 새끼손가락도 대려 하질 않습니다. 무조건 저를 부릅니다. 내 손가락은 뭐 고무나 납덩인 줄 안다고요…… 흑!”
“이건 우리 요식업 종사자들의 생존권에 관한 문제나 마찬가지예요. 엄지손가락 찢어진 게 한두 번인 줄 아세요? 아침부터 피 보면 기분이 얼마나 더러운지, 아니 얼마나 기분이 나쁜지 아시냐고요!”
“손님들이 뻔히 쳐다보고 있는데 손가락 아프다고 행주를 사용하거나 옷깃을 끌어당겨 레바를 내릴 순 없잖아요. 이건, 아으 정말이지 이건, 쪽팔림의 문제이기도 해요!”
김씨는 정의 가까이로 다가가 보다 자세히 얼굴을 들여다보고 싶었으나 점차 늘어나는 구경꾼들에게 밀려 부유하듯 제자리만 맴돌았다. 종업원들이 각자의 고충을 이야기하는 동안 정이 농성 대열을 추슬러 퇴계로를 향해 진군할 채비를 마치자 김씨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김씨는 장부를 부여쥐고 “부르스타, 거 참 손 아프죠.”, “레바 좀 제대로 만들지 않고.”하고 부러 큰 소리를 내가며 시나브로 정 가까이 다가갔다. 끝끝내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김씨의 손엔 ‘현대인은 보다 더 능동적이고 진취적으로 자신의 삶의 질을 개선해야 할 필요가 있다?부르스타 용기탈착레바 리콜신청협의회 장충지부’라고 인쇄된 흰 깃발이 들려져 있었다.
“나…… 모르겠습니까?”
김씨는 더운 김이 오르는 정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 준 후 열의를 다해 불광동의 29년차 중개업자인 자신을 소개했다. 지금으로부터 4년 전쯤의 초여름에 형과 함께 1-173번지의 옥탑방에 이사 오지 않았었느냐고, 중개 수수료 10만원도 큰맘 먹고 받지 않았으며 이삿날 짐도 같이 날라주었는데 혹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겠느냐고 설명했다. 정은 사색이 된 얼굴로 김씨를 돌아보며 간신히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 글쎄요. 제가 이사를 좀 자주 다니는 편이라서 말입니다.”
“1-173번진데, 젊은이. 북한산이 바라다보이던 옥탑방 말이야. 형이 자네만 남겨 두고 어딘가 다녀온다고 하지 않았었나, 왜. 형하고는 어떻게, 지금 같이 살고 있는 건가?”
“누구신지 모르겠습니다만 좀 비켜주세요.”
김씨에게 돌아오는 것은 감정 없이 차디찬 음성뿐이었다. 김씨는 매몰찬 반응에 섭섭함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김씨의 어깨를 비껴가는 정의 표정에서 그가 4년 전에 불광동 1-173번지의 옥탑방에 살았던 젊은이라는 사실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정이 맨 머리띠가 땀에 젖어 자꾸만 흘러내렸습니다. 머리띠를 추키며 정이 계속 걸어가는데, 가만 보고 있으니 등뼈가 찌르찌르 아파옵디다. 여관방에서 파스를 붙이고 끙끙대는데 내가 왜 지금 이 짓을 하고 있나, 하는 생각에 불현듯 서러워지더군요. 1-173번지가 없었다고는, 지금도 인정할 수 없어요. 정말로 있었으니까요, 1-173번지는. 하지만 혼란스러운 것만은 분명했다 그 말이죠. 나만 알고 있으면, 나만 기억하고 있으면 된 게 아닌가? 나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큰 놈은 딴생각 안 하고 공무원시험 준비 잘 하고 있나? 작은 놈은 방학한 지 꽤 됐을 텐데 아르바이트라도 하고 있나? 마누라는 남편이 집 나가 죽었다며 벌써 장례라도 치러버리고는 동네 아낙들과 질펀히 모여 앉아 ‘별 이상한 놈팽이도 다 있었지 뭐유.’하고 지껄이고 있는 건 아닌가? 별별 잡생각이 다 들어서 화도 내고, 소리도 질러보고, ‘병신, 내가 병신이다’ 가슴도 쳤습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등에 붙인 파스는 너무도 뜨끈뜨끈하고 화끈거리더군요.”
김씨는 여관방의 때 묻은 이불을 껴안고 장부의 목록에서 정의 이름을 지웠다고 말하며 쓸쓸히 웃었다.
6. 고! 고를 해야죠!
이후 김씨는 한 달간,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노라고 고백했다. 이제 남은 청년은 단 한 명이었으므로, 앞선 이들이 그러했듯 마지막 청년마저 불광동 1-173번지의 옥탑방에 살았던 사실을 기억해내지 못한다면 김씨의 노력은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고 수포로 돌아가게 될 터였다. 찾아갈 것인가, 말 것인가. 어느 쪽을 택한다 하더라도 두려움의 크기는 달라질 것 같지 않았다. 김씨는 볕이 들지 않는 여관방에 누워 천장만 바라보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지난해 장마에 빗물이 스며들었는지 천장엔 얼룩덜룩한 자욱이 쥐 오줌처럼 번져 있었고, 도무지 열래야 열리지 않는 창문이 바람결에 덜컹이는 통에 깊은 잠을 이룰 수도 없었다. 살풋 선잠이 들었다가 꿈결에 화들짝 놀라 깨는 일이 반복되었다.
“술 좀 들어, 쭉 쭉. 옳지…… 잘 먹는다.”
김씨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잠에서 깨어나도 눈을 뜨지 않았다. 아버지는 환하게 미소지었고, 소주잔을 건네며 말랑말랑한 몸짓으로 술을 권했다. 한평생 허리를 구부리고 일해 아들 넷, 딸 둘을 먹이고 입혀 키워낸 아버지는 일흔을 조금 넘겨 정신을 놓으셨다. 아내는 시어머니가 없어 편히 산 덕으로 말년에 시집살이를 하고 있다며 툴툴거렸지만 이날 입때껏 두 아들 뒷바라지에 고생 많은 것을 알고 있기에 뭐라 한 마디 대꾸하기에도 눈치가 보였다. 근면 성실을 입에 달고 살아온 아버지는 과음을 싫어했고, 화투장 한 번 손에 쥐는 법이 없던 분이었다. 그런데 치매 노인의 우울증 치료에 효과가 있다기에 가르쳐드린 화투를 아버지는 의외로 재미있어 하셨다. 온종일 집안의 식기란 식기는 모조리 꺼내 일을 벌여놓아 아내에게 호통을 듣고서도, 김씨가 집에만 들어서면 소주잔을 들고 달려 나오시곤 했다.
“한 잔만 해, 아범. 딱 한 잔만. 응?”
아들이 목울대를 넘기며 술 한 잔을 맛있게 받아 마시고 나면, 아버지는 당신의 방으로 들어가 낑낑대며 두꺼운 모포를 펼치고 화투장을 죽 벌여놓았다. 잔뜩 굽은 허리와 부지깽이처럼 마른 몸, 편찮으시기 전엔 거동조차 불편하셨던 아버지의 몸, 그 어디서 그런 기력이 솟아나는지 김씨로서도 영문을 모를 일이었다. 저리 정정하신데 치맨들 어떠랴, 저리 즐거워하시는데 졸린 게 뭐 그리 큰 문젤까. 김씨는 기꺼이 밤을 새워 아버지와 함께 화투를 쳤다. 매화가 피고, 학이 날고, 아버지가 마른 뱃가죽을 부여 쥐며 껄껄 소리 높여 웃었다. 장성한 아이들 덕에 부엌 옆의 곁방에서 주무시면서도 불편한 내색조차 않던 아버지. 아버지의 그 좁다란 방 안에서 벌어지는 화투판은 그래서, 그 자체만으로 부자(父子) 간의 눈부신 소풍이자 조촐한 축제였다.
여관방에 누운 채로 김씨는 아버지의 화투장을 손에 쥐고 “아이고 아버지, 고! 고! 고를 해야죠!”라고 외치던 자신의 모습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아버지가 주름이 자글자글한 입으로 오물오물 발음하던 “옛다, 고!”가 귓바퀴에서 맴을 돌며 사그라지지 않자 김씨는 그제야, 얼얼한 허리춤을 부여잡고 일어났다. 마지막 눈 감으시던 날, 아버지가 김씨의 축축한 두 손을 부여잡고 해주었던 말 또한 바로 그것이었다.
“아범아. 고……, 고 하자. 옛다, 고!”
김씨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지만, 아버지는 아주 편안하고 해낙낙한 표정이었다. 좀 더 평수를 늘려 이사 가게 되면 꼭 널찍한 방 하나 내어드려야지 했는데, 3년 아니 2년 아니 적어도 1년만 더 기다려주셨으면 됐는데, 불초한 자식 맘도 모르고 아버지는 웃으며 ‘고’를 외쳤다.
“아버지, 나도 곱니다! 나도 고!”
면도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김씨는 결연히 여관방을 나섰다. 햇볕이 푸지게 쏟아지는 거리를 하염없이 걷고 걸어 앞으로 나아갔다. 마지막 청년을 찾든 찾지 못하든, 불광동 1-173번지를 기억하든 기억하지 못하든, 자신을 알아보든 알아보지 못하든, 김씨는 무조건 ‘고’해야만 했다.
7. 브이를 만들며
그리하여 김씨는 마지막으로, 정이 이사 오기 전에 1-173번지의 옥탑방에 살았던 ‘무’를 찾아갔다. 26세의 그는 여전히 독신이었다. 김씨는 무를 보자마자 그가 1-173번지의 옥탑방에 올라와 가장 처음으로 했던 말을 기억해냈다.
“와우, 요 쏘 나이쓰! 나이쓰 뷰우! 유 노우 와람쎄잉?”
스물이 갓 넘어 보이는 앳된 얼굴의 무는 온통 영문으로 프린트된 모자며 티셔츠, 청바지를 걸치고 있었는데 그마저도 바지는 너무 크고 길어서 죄다 제 운동화로 밟고 다녔고, 팔이며 목에는 온통 쇠줄 같은 현란한 장신구를 달고 있어서 움직일 때마다 쟁강쟁강 소리를 냈다. 김씨는 커다란 카세트 플레이어를 어깨 위에 올려놓고 사지를 흐느적거리면서 지하철 역과 1-173번지의 옥탑을 오가는 무를 바라보며 어이없이 웃곤 했던 것이 생각났다.
무는 명동 한복판에 서서 예의 그 흐물흐물한 몸놀림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 전단지를 나누어 주고 있었다. 김씨는 비슷한 또래의 젊은이들이 여남은 명 정도 함께 모여 있는 데다, 모두 같은 옷차림을 하고 있어서 처음에는 도대체 누가 무인지 잘 분간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헐렁한 티셔츠를 입은 한 청년이 납작한 모자를 비뚜름하게 쓰고 “요 쏘 섹시 아가씨, 이거 좀 종이 좀 받아 봐봐봐!”하고 노래하듯 소리쳤을 때 김씨는 비로소 그를 찾았다는 마음에 나지막한 탄성마저 자아냈다.
“쿨, 쿨, 우린 모두 쿨, 쿨, 쿨 드링커가 되어야 햇! 너도 쓰고 나도 쓰는 햇, 햇, 그러나 우리는 쿨 드링커가 되어 웃어야 햇!”
무가 입고 있는 주황색 티셔츠에는 ‘건전한 음주문화에 앞장서는 Cool Drinker!’라는 글자가 초록색으로 현란하게 페인팅되어 있었다. 김씨는 천천히 무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어쩐지 긴장이 되어 한 마디도 꺼낼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무는 어깨를 으쓱해 보인 뒤 김씨에게 전단지를 건네주었다.
“요 쏘 아저씨, 아저씨도 이젠 쿨, 쿨, 쿨을 알아야 햇! 첨잔은 노, 첨잔은 노……”
무는 두 발을 차례로 교차시키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몸을 움직이더니, 쿨 드링커가 되기 위해 알아야 할 계명을 외우기 시작했다. 전단지를 마이크처럼 말아쥐고 ‘안주는 필수, 음주 속도 천천히’와 같은 내용을 노래하듯 쏟아내는 무 앞에서 김씨의 등이 땀으로 축축해졌다.
‘어디 조용한 데라도 들어가서 이야기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발 디딜 틈 없이 복작거리는 명동 한복판에 서서 불광동 1-173번지의 옥탑방에 살았었느냐고 묻는다는 건 어쩐지 생뚱맞게 여겨졌다.
“나…… 모르겠습니까?”
무는 김씨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모자를 매만지며 돌아섰다. 동시에 무릎의 관절을 꺾어 바닥에서 빙그르르 돌아 보였다. 흡사 바지로 바닥에 커다란 원을 그리며 주저앉는 모양과 같았는데 놀랍게도 무는 몸에 스프링이라도 매단 것처럼 빠르게 상체를 일으켰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깔깔거리자 무는 손가락으로 브이를 만들며 “옙, 베이비.”라고 말했다. 가사를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와 마구 뒤섞였고, 오가는 사람들로 거리는 장사진을 이뤘으므로 김씨는 도저히 무에게 말붙일 기회를 얻지 못했다.
김씨는 오후 네 시부터 아홉 시까지 꼬박 다섯 시간 동안 무를 기다렸다. 무는 같은 옷을 입은 무리들과 함께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기도 하고, 골목으로 들어가 밥을 먹기도 하면서 자신들의 키만큼 높이 쌓아 올려졌던 상자 안의 전단지들을 모조리 사람들 손에 쥐어주었다. 사람들은 받고 나서 바로 바닥에 흘려버리거나, 손안에서 구겨버렸으나 그것 역시 이내 바닥으로 던져졌다. 골목에 비껴선 채로 멍하니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 있던 김씨는 무가 탈진한 표정으로 모자를 깊숙이 눌러 쓰는 모습을 보고는 서둘러 걸음을 떼었다.
“나…… 모르겠습니까?”
상자를 챙기고 신발에 밟힌 전단지 몇 장을 들어 올리던 무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김씨는 다시금 열의를 다해 불광동의 29년차 중개업자인 자신을 소개했다. 1-173번지의 옥탑방을 주선 받고 수수료 10만원을 지불하지 않았느냐고, 지금으로부터 꼭 5년 전쯤의 봄에 이사와 일 년을 조금 넘겨 살다 이사 가지 않았느냐고, 혹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겠느냐고 설명했다. 무는 입술을 꼭 다물고 머릿속으로 생각해보는 시늉을 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무 역시 불광동 1-173번지의 옥탑방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이미 앞서 네 명의 젊은이들을 만나고 온 김씨로서는 예상하지 못했던 일도, 당황스러워할 일도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만은 감출 수 없었다. 몸살이 날 듯 한기가 느껴졌다. 김씨는 미안하다고, 사람을 잘못 본 모양이라고 에둘러 말하며 돌아섰다.
“그 때의 기분을 잊을 수가 없어요. 처음에야 다섯 명을 모두 찾고도 1-173번지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내지 못할 줄은 꿈에도 몰랐죠. 분명히 있었으니까,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찾아내기만 한다면야 어려울 게 뭐 있으랴 싶었던 거예요. 하지만 놀랍게도 다들 기억하지 못하더이다. 불광동 1-173번지의 옥탑방에 살았던 사실도 기억하지 못하는, 혹은 기억하려 들지 않는 이들에게 늙고 추레한 얼굴을 들이대며 기억하냐고 묻는 것도 어리석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죠. 화가 나야 정상일 텐데 오히려 후련했으니 말이오.”
8. 묘하게 슬프면서 웃기기도
애초에 1-173번지를 기억하냐고 묻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었다고 김씨는 말했다. 이렇게나 빡빡하게, 삶을 살아가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무언가를 기억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부터가 너무도 가혹한 일이 아니었겠냐고 되묻기도 했다.
“허청허청 명동역으로 걸어가는데 아내 얼굴만 둥둥 떠오르더군요. 나이 먹고 할 짓이 없어서 밖으로 도냐고, 악다구니를 써댈 모습이 눈에 선했어요. 그래도, 보고 싶지 뭡니까. 퍼질 대로 퍼진 아내의 그 물큰한 엉덩잇살마저 그리워지지 뭡니까. 다 늙어 주책입디다, 눈물까지 핑 돌았으니.”
붉어진 얼굴로 혀를 끌끌 차며 김씨는 “명줄 끊어지는 줄 알았지 뭐요. 삼일 밤낮을 싹싹 빌어서 간신히, 안방에 들어갔어요. 남우세스러워 혼났습니다, 거 참.”하고 덧붙였다. 집으로 들어간 날 밤, 아버지가 웃으며 ‘옛다, 고!’를 외쳤던 방에 누워 김씨는 곰곰 생각해 봤다고 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먼지 쌓인 사무실에서 나름대로 로망 있는 합동결혼식을 준비하는 갑, 이 나라의 중년들을 멀티플레이어로 만들겠다고 목놓아 부르짖는 을, 자신의 이름이 도용되는 것을 막고자 가로 뛰고 세로 뛰는 병, 요식업 종사자들의 엄지손가락 안전을 사수하기 위해 부르스타의 레바 리콜을 요구하는 정, 이 사회를 쿨 드링커들로 채워 건전한 음주문화를 사수하겠다고 노래하는 무, 그리고…… 이제 와 새삼 그들을 찾아다니며 불광동 1-173번지에 살았던 것을 기억하느냐고, 나를 알아보지 못하겠느냐고 애원하듯 물어 보는 김씨 자신.
“지금으로서는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지조차 사실 잘 분간이 가질 않습니다. 분명 다섯 명을 만났는데, 꼭 한 사람을 만나고 온 것 같은 느낌이란 말이오. 어쩐지 기분이 묘하기도 하고, 묘하게 슬프기도 하고, 묘하게 슬프면서 그게 또 웃기기도 하고…….”
그래도 김씨는, 그나마 아내와 아이들이 자신을 잊지 않고 맞아준 게 다행 아니냐며 멋쩍은 듯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그래요, 서울시 은평구 불광동 1-173번지는 이제 없습니다. 원래 없었다는데, 기억이 안 난다는데, 지도에 없다는데, 어쩌겠어요. 내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금세 환갑이 될 테고, 머지않아 아버지처럼 ‘옛다, 고!’를 외칠 텐데. 그래요. 없다고 쳐도 좋다 이 말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1-173번지는 있었습니다. 잊어도 상관없어요.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1-173번지는 정말로 있었으니까요. 청과물점을 지나고, 정육점을 지나면 슈퍼가 나오는데 거기서 오른쪽으로 싹, 돌기만 하면 있었던 1-173번지 말입니다. 응? 그걸 누가 믿느냐고……?”
김씨는 주섬주섬 자신의 물건들을 끌어당겨 코앞에 대고 흔들어 보였다.
“거 사람 참. 여기 있질 않소, 내 지도랑 장부. 이걸 양손에 쥐고 있는 한, 나는 아직 끄떡없습니다. 불광동 1-173번지의 옥탑방에는 십년 전, 이십년 전에도 분명, 사람이 살았었으니 말이오. 여기 다 써져 있어요. 그러니 고! 고를 해야 한다 그 말씀!”
햇볕이 잘 들고, 보증금 천오백만원 정도의 방을 원하는 손님에게 꼭 맞는 옥탑방을 보여주려다가 서울시 은평구 불광동 1-173번지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한 부동산 중개업자 29년 경력의 김씨는 “그래서 이야기가 좀 길어졌는데 말입니다……” 하며 다시금 자신의 낡은 지도를 조심스레 펼쳐 들었다. 깨알같이 작은 크기의 주택, 상점, 도로, 골목들이 이름표처럼 번지수를 매달고 고스란히 옮겨져 있었다. 북한산 바로 아래 놓인 1-173번지에는 빨간색 색연필로 거듭 동그라미가 둘러져 있어 금방이라도 구멍이 뚫릴 것만 같았다. 김씨는 제법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이게 내 지도입니다. 보세요. 여기 분명히 1-173번지가 있지요?” 하고 물었다.
“다시 말하리다. 맨 처음에도 밝혔듯이 난 불광동서 나고 자란 토박이죠. 은평구 땅이며 집이며, 전월사글세를 통틀어 내 손을 안 거쳐 간 게 없다고 자부하는 사람이에요 내가. 일평생 내가 만든 지도로, 그 누구의 눈도 믿지 않고 오로지 내 발품만 믿고 살아왔는데 나를 알아보지 못하겠습니까?”
김씨는 주름진 얼굴을 바투 들이대고는 코를 벌름거렸다.
“자세히 좀 봐요. 지금으로부터 13년 전의 늦여름에 내가 불광동 1-173번지의 옥탑방을 주선해줬는데 기억이 안 나요? 1-173번지에 살았던 일이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고요? 거 왜, 이삿날 장대비가 내리는 바람에 온몸이 쫄딱 젖어가며 짐을 나르지 않았소. 빗물이 들어갈세라 다 부서져가는 고추장 항아리를 두 시간이나 온몸으로 덮어 껴안고 있었는데, 그런 내가 정말로 기억나지 않아요? 나를, 나를 정말 잊었단 말이오?”
그러니까 생각해 보면 이야기는 아주 엉뚱한 곳에서, 어쩌면 조금은 사소하달 수도 있는 사건으로부터 시작된 것 같기는 했다.《문장 웹진/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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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와 황새 양선형 너는 기계, 껍데기가 회색인 오토마타. 너는 네가 저질렀던 끔찍한 죄의 내용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너는 기나긴 시간 동안, 어쩌면 인간으로 살았던 시간을 초과할 만큼 오랫동안 작동했다. 너는 네게 주어진 원통형의 한계 속에 틀어박혔다. 그것이 너였다. 배터리와 부품이 망가지면 너를 수리하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도착했고, 너는 네 작동을 중지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음은 물론 작동을 중지하고 싶은 욕망 또한 갖지 않았다. 그것은 불가능했다. 형벌이 단호하게 집행되었고, 너는 눈을 감았으며, 숨이 끊어지기 직전 너는 이후로 반복할 수밖에 없는, 줄곧 반복해야만 하는 한 줄의 기억 타래를 선택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인간이었던 시절의 작은 파편으로서 오토마타로 개조된 네 머리통 안에 각인될 예정이었다. 누군가 드러누운 네 팔뚝에 주사를 놓았다. 나른한 의식은 감은 눈 속으로 어른거리는 박쥐 모양의 환영과 함께 서서히 사라졌다. 기억 타래는 네가 과거에 살과 피를, 얼굴과 자의식을 가졌던 한 명의 인간이었음을 의미했다. 인간인 너와 오토마타인 너를 잇는 개체로서의 동일성을, 속죄를 끝마치고 형기가 만료될 때까지 네가 감당해야만 하는 과오와 책임의 연속성을 말이다. 따라서 기억 타래는 네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로 인해 극형에 처해진 바로 그 범인임을 증명하는 전자 신분증이자 영혼의 낙인으로 비유될 수 있었다. 네가 죄수임을 공인하는 사법 기관의 서명, 특수한 일련번호, 기계의 머리통 안쪽에 새겨진 자아의 조각, 네 유한하며 어리석었던 시절의 잔류 데이터. 그러나 너는 네가 다른 기억들 가운데 하필이면 이 기억 타래를 골랐던 이유를 떠올릴 수 없었다. 그것을 떠올릴 수 있는 네가 없었기 때문이다. 무의미한 기억들 가운데 이 기억만이 각별했기 때문인지, 각별했던 기억들 가운데 이 기억만이 무의미했기 때문인지. 너는 카메라처럼 무감하게 눈을 떴으며, 끊임없이 부글거리며 딸깍거리는, 앵앵거리고 번쩍거리는 전자 신호의 포로가 되어 있었다. 네 머리통 안에는 한 줄의 기억 타래만이 남아 있었다. 너는 기계, 껍데기가 회색인 오토마타. 너는 정확하게 움직이는 효율적인 무력함이었고, 그 무력함 속을 공회전하는 짤막한 분량의 이미지 찌꺼기였다. 너는 스크린을 향해 강제로 조향된 인형의 냉담하며 거짓된 눈알처럼 기억의 이미지를 주시했고…… 주시하지 않았으며, 사나운 파도처럼 우윳빛으로 들이닥치는 심신상실이 환하게 빛나는 스크린 주위를 에워쌌다. 네 머리통 안의 암실에서는 언제나 한 줄의 기억 타래가 상영되었다. 너는 기억 타래를 출력하는 영사기이자 영사막이자 영사기사였으며, 성자와 성부와 성령과…… 세 가지 작동인 사이를 그치지 않고 순환하는 자율적인 엔진에 가담하고 예속된 상태였으나, 대부분 네 기억의 관객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곳엔 네 기억의 관객일 수 있는 네가 없었기 때문이다. 너는 너의 ON이었다. 너는 네 신경망에 폭포처럼 흐르는 전류를 자발적으로 차단할 수 없
- 관리자
- 2026-02-01
도래의 얼굴 최정나 한 남자가 길을 걷는다. 남자의 이름은 웅현이다. 웅현은 은행나무길 한가운데로 들어선다. 노랗게 물든 황금 터널 안에서 잎사귀 사이로 비치는 햇빛을 본다. 바람이 일자 은행잎들이 햇살을 따라 휘돌다가 천천히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웅현은 꽃잎처럼 흩날리는 노란 잎사귀들을 휴대폰 카메라에 담는다. 길을 걷는 사람들이 카메라에 포착된다.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들려오는 바스락거리는 소리, 그 위로도 햇살이 부서진다. 바람을 받은 잎사귀들이 다시 허공으로 번져 오르다가 방향을 살짝 틀어 다른 데로 이동한다. 웅현은 눈에 비친 풍경을 화면에 담아보려고 하지만 잘되지 않는다. 웅현은 얼마 전 도래와 이별했다. 그래서 길에서 스치는 사람이 모두 도래로 보인다. 도래가 홀로 걷고, 도래가 누군가와 함께 걷고, 떨어지는 낙엽을 올려다보고, 사람들의 발걸음을 내려다보고···. 도래는 출몰하듯 나타나 웅현 곁을 스쳐 지난다. 옆에 있는데도 먼 얼굴, 도래가 자신을 불러내는 건지 자신이 도래를 불러내는 건지 웅현은 알 수 없다. 이윽고 수많은 도래가 다른 사람들의 얼굴로 변한다. 도래와 함께 떠난 얼굴들, 이름들이 한꺼번에 떠올라 웅현은 하늘을 본다. 사랑을 놓쳤니? 황금빛 사이로 겹쳐 들려오는 그들의 목소리에 웃음이 배어 있다. 왜 웃는 거지? 웅현은 누군가 보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린다. 놀림 받은 기분이다. 하지만 웅현은 그들이 남겨진 자의 무게를 감당하지 않아도 되니 오히려 다행이라고 여긴다. 그렇더라도 역시 함께 있는 편이 나을 거라고 생각을 바꾸고, 곧이어 떠난 이유를 알 수 없어 먹먹해진다. 나를 이해해 줘···, 도래의 마지막 말은 웅현의 머릿속에서 자꾸만 변형되다가 서서히 형태를 찾는다. 빛은 따뜻하고 세상은 노랗게 물들었지. 황금빛 계절이거든. 웅현이 말을 건넨다. 빛의 터널을 나오는 웅현의 눈에 그들이 비쳐 든다. 도래가 없는 집으로 돌아가는 웅현의 발걸음은 더디다. 노란빛이 주황빛으로 물들고 거리는 붉은빛에 휩싸인다. 사랑해!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여자의 커다란 목소리가 웅현의 귓가에 닿는다. 여자는 붉게 물든 나무 아래 붉은 낙엽을 밟고 서 있다. 이어 들려오는 맞은편 남자의 웃음소리, 여자가 낙엽을 그러모아 허공에 뿌린다. 그러고는 다시 외친다. 사랑한다고! 붉은색이 그들 주위로 날아올라 빛처럼 흩어진다. 여자는 대답을 들을 때까지 소리칠 기세지만 남자는 계속 웃기만 한다. 웅현은 그들이 붉은 구체 안에 있는 듯하다. 그 순간 저 멀리서 나도 사랑해! 하고 외치는 목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번져온다. 연인이 낯선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웅현도 소리 나는 데로 시선을 돌리지만 목소리의 주인은 보이지 않고 조금 전까지 머물러 있던 은행나무길이 보일 뿐이다. 웅현은 가벼운 듯 장난스러운 남자의 목소리를 아는 듯하다. 웅현은 도래와 함께 걷던 길을 홀로 걸으며 그녀와 함께였던 어느 날을 떠올린다. 그러자
- 관리자
- 2026-02-01
아직 이른 마음 박하신 섬으로 내려가는 길은 무성했다. 초여름을 맞는 버드나무 녹음이 무성했고, 고속도로에 바닷가 갯강구들처럼 달라붙은 자동차 정체 행렬이 무성했고, 하늘에 모둠 지은 뭉게구름 떼가 켜켜이 무성했다. 구름으로 말하자면 경부 고속도로 운전자들의 한숨이 한데 모인 것 같은 풍성함이었고 눅진함이었다. 사이사이 파고드는 여름 볕은 쨍쨍하기만 해서 자동차 갯강구들이 아지랑이 같은 김을 뿜어내며 느릿느릿 익어 가고 있었다. 올여름 재해에 가까운 폭염이 찾아온다고 했다. 창문을 내리고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담배를 끊어야 할 텐데. 지난 건강검진에서 의사는 금연을 강한 어조로 권고했다. 그게 벌써 3년 전이다. 라디오에선 올해 메탄가스와 일산화탄소 배출량이 다시 한번 고점을 돌파했다는 소리가 들렸다. 고속도로 솥단지를 가득 메운 자동차 행렬을 보니 이해가 안 갈 바도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내 차도 노후 경유차라며 폐차를 권고하던데··· 때마침 창밖에서 도로변 축사 냄새가 매연에 엉킨 채 훅 끼쳤다. 과연 오존을 뚫어 버릴 것 같은 유독함이다. 이게 다 나 때문인가. 그렇다고 하기엔 앞차 배기의 색깔도 심상치 않다. 그래, 어차피 다 같이 찜 쪄지는 마당에 잘잘못은 논하지 말기로 하자. 이미 벌어진 일과 잃어버린 것. 재해에는 고민한들 거스를 수 없는 면이 있고 그렇기에 말 그대로 재해인 게 아닐까. 그러니까, 이건 암 같은 거다. 분명한 업보지만 돌이킬 수 없는. 그런 건 받아들이는 편이 낫지. 그래, 평일 오전부터 고속도로에 갇혀 소들 방귀나 맡고 있게 된 것도 말하자면 재해 같은, 암 같은 소식 때문이었다. 그건 폭발에 대한 것이었다. 동선의 묘지가 폭발할 거라는 소식을 들은 건 이른 열대야에 허덕이던 어제저녁이었다. 낯선 번호로 수차례 전화가 걸려 온 것인데 상대방은 대뜸, 동선 씨 친구분 되십니까? 물었다. 그렇다고 말하자 그는 자신을 매봉도 수호행동위원장이라고 간략히 소개했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 ―틀림없이 폭발합니다··· 땅속에 매설된 니트로글리세린과 질산암모늄 수천 킬로그램이··· 당신 친구의 묘지를 박살 내 버릴 거라구요···. 상대방은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고 했다. 거대한 세력이 묘지를 파괴하기 일보 직전이라며 호소했다. 그것도 폭약을 심고 아주 섬을 통째로 날려 버린다고 했다. 그는 동선의 묘소를 지키고 싶다면 나더러 당장 매봉도로 달려오라고 촉구했다. 여기··· 당신처럼 무언가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습니다. ―내일까지···. 가능하면 내일까지 와 주십시오···. 불가능해도 내일까지 오십시오. 체념하지 않는다면··· 지킬 수 있습니다. 모
- 관리자
- 2026-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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