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게 부케 폴리시
- 작성일 2019-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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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멍게 부케 폴리시
고민실
손톱이 하나 비었다. 세이는 혀를 움직여 입안을 훑었다. 젓가락으로 봄동을 뒤적였다. 혀의 예민한 촉각에도 젓가락의 섬세한 움직임에도 걸리는 게 없었다. 된장에 무치기 전이었을까 후였을까, 검지에서 네일 스티커가 사라진 것은.
반찬이 떨어져 시장에 들렀다가 봄동까지 사왔다. 끝물인 줄 알면서도 꽃샘추위가 한창이니 아직 괜찮지 않을까 하는 셈이 있었다. 오산이었다. 데쳐 놓자 단맛도 없고 질기기만 했다. 비닐 재질의 네일 스티커를 같이 씹어도 모를 정도로. 만약 무사히 식도를 넘어갔다면 지금쯤 위산의 바다 속에 가라앉고 있겠지. 세이는 입을 오물거리며 봄동을 마저 먹었다.
네일 스티커를 사용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저렴한 가격에 끌려 한 번 써보고 획기적인 간편함에 매료되었다. 바르고 말리기를 반복하며 한 시간 넘게 걸리는 네일 폴리시에 비해 네일 스티커는 붙이고 길이만 조절하면 끝이라 기껏해야 십오 분이면 충분했다. 떼고 다시 붙일 수 있으니 실수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고, 사흘 만에 칠이 벗겨져 볼품없게 변하는 일도 없었다. 네일 폴리시를 지울 때마다 거스러미가 일어난 곳에 아릿하게 스며들던 리무버 냄새를 맡지 않아도 좋았다. 그동안 물에 손을 한참 담가도 잘 붙어 있어서 단점이라고는 없는 줄 알았다.
수채통의 찌꺼기를 음식물쓰레기 봉투에 조금씩 옮겨 담으며 살폈지만 실종된 분홍색 펄 스티커는 나타나지 않았다. 세이는 손을 씻고 봉투를 묶어 냉동실에 넣었다.
어떻게 냉장고에 음식물쓰레기를 보관해.
눈을 동그랗게 뜨던 희주의 얼굴이 떠올랐다. 원룸에서 혼자 살면 가장 작은 사이즈라도 음식물쓰레기 봉투를 다 채우는 데에 한참 걸린다. 악취가 풍기도록 두느니 그때그때 얼리는 편이 낫다고 말해도 자취를 해보지 않은 사람을 납득시키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희주는 세이가 칠이 벗겨질 때까지 손톱을 내버려두는 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네일 폴리시를 잘못 발라 리무버로 지우다가 멀쩡한 데까지 건드려 다시 바르는 번거로움이 희주의 경험에는 없었다. 같은 제품을 사용해도 희주의 손을 거치면 가장자리 선과 표면의 광택이 완전히 달라졌다. 네일숍에서 케어 받았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화장품 가게에서 네일 스티커를 본 희주가 말했다.
짝퉁 가방 같아.
빨래판처럼 찌푸린 미간을 보고 세이는 슬그머니 다른 매니큐어 제품으로 시선을 옮겼다. 친구들이 하나둘 결혼하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희주와 가까워졌다. 같이 맛있는 걸 먹으며 직장생활의 고단함을 나누기는 좋았지만 멈칫하는 일 없이 툭 내뱉는 말이 불편할 때가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네일 스티커인 줄 모를 정도로 감쪽같다거나 손재주와 무관하게 균일한 퀄리티를 보장한다고 설명해도 과연 장점으로 받아들일지 의문이었다.
잘못 붙인 걸까. 자취하면서 늘기 시작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세이는 한 손으로 배를 문질렀다. 딱히 속이 불편하지는 않았다. 희주가 알면 분명히 또 눈을 동그랗게 뜨겠지. 다른 친구들과 함께라면 모를까 단둘이 있을 때 화제에 올릴 생각은 없었다. 그보다는 아마도 말할 겨를이 주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더 컸다.
돌아오는 토요일에 희주가 결혼한다. 세이가 부케를 받기로 했다. 서른 중반을 훌쩍 넘은 나이에 부케라니 썩 내키지 않았지만 친구들 중 미혼은 세이가 유일했다. 부케만 아니면 작년 친구 결혼식에서 입었던 옷으로도 충분할 텐데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서 원피스를 새로 샀다. 결혼식에 갈 때만 꺼내 신는 구두는 굽이 반쯤 닳아 있어 수선집에 맡겼다.
세이는 설거지를 마치고 지난 주말에 널어놓은 빨래를 걷었다. 두 번 접은 수건을 다시 삼등분해 접으면서 빈 손톱을 힐끔거렸다. 주변 살에 각질이 일어나고 큐티클이 울퉁불퉁해서 낡은 액자처럼 보였다. 세이는 손을 오므려 손톱 끝을 퉁겼다. 네일숍에 꼭, 틱, 가고 싶다기보다, 틱, 아직 혼자인데, 틱, 손까지 지저분하면, 틱, 무슨 소리를, 틱, 들을지 부케도, 틱, 받아야 하고…… 자신을 설득하는 일이 끝나자마자 반으로 접은 수건을 허벅지에 올리고 핸드폰을 집었다.
"이제 일반 네일은 안 해요? 아, 젤 네일만…… 가격은 어떻게 돼요?"
비싼 줄 알면서 바로 전화를 끊기 민망해서 대화를 이어 나갔다. 젤 네일은 희주의 표현을 빌리자면 원조보다 우수한 명품 가방이다. 네일 폴리시와 바르는 방법은 비슷하지만 말리는 시간이 짧고 칠이 벗겨지지 않으면서 섬세한 표현이 가능했다. 다만 가격대가 높고 지우는 방법이 까다로웠다. 네일숍에 가면 네일 폴리시는 서비스로 지워 주지만 젤 네일은 추가요금을 받았다.
네일 스티커가 가성비 끝판왕이라면 젤 네일은 디자인 끝판왕이랄 수 있었다. 네일 스티커가 전문가가 무용한 방향으로 발전했다면 젤 네일은 전문가가 불가피한 방향으로 발전했다. 그 사이에서 네일 폴리시는 설 자리를 잃었다. 네일숍에 몇 군데 전화해 봤지만 같은 대답만 돌아왔다. 목을 길게 뻗어 잎사귀를 뜯어먹던 공룡이 하늘을 쳐다보았다. 푸르게 타오르는 운석이 그 사이로 콰앙 떨어졌다. 멸종이었다.
젤 네일이 등장하면서 기존의 네일 폴리시를 일반 네일이라고 부르게 된 지도 오래되었다. 이제는 젤 네일이 더 일반적인데도 한번 굳어진 명칭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프로그램 저장 버튼 이미지가 여전히 플로피디스크인 것처럼 화석화 되었달까. 네일 폴리시의 시대 역시 저물었고 선택하지 않음은 더 이상 유예가 아니라 다른 선택이 되어버린다. 세이는 물론 네일 스티커의 손을 들어 주었지만 네일숍에서 취급하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였다.
기본 케어만 받고 돌아와 네일 스티커를 붙일까 희주처럼 젤 네일이라는 걸 해볼까 고민하며 수건을 계속 접었다. 효성실업, 감사합니다, 동방사우나, 행복하게 살겠습니다, GM피트니스. 모서리를 맞춰도 어딘가 비뚤어지는 수건을 쌓아올리다가 '행복하게 살겠습니다' 다음으로 긴 상호 앞에서 손이 멈췄다.
아이…… 상호이니 붙여 쓰는 건 당연하지만 의미를 짐작하기 어려운 이름이었다. 아이 상승 인 파크, 아 이상 승인 파크, 아 이상승 인 파크, 아이 상승 인파 크…… 상호를 검색해 나온 주소지를 맵으로 연결해 로드뷰로 확대해 보고서야 상호의 출처를 알았다. 건물 이름이 상승 빌딩이다. 흐릿한 사진으로 이층에 옷가게가 있고 일층에 네일숍이 있는 것도 알았다. 어떤 경로로 받은 수건인지는 모르지만 주소지가 집에서 멀지 않았다.
"일반 네일 되나요? 돼요? 금요일 저녁에…… 아니면 토요일 오전에……."
대멸종에서 살아남은 데가 있었다. 네일도맑음. 상승 빌딩 일층에 위치한 네일숍 상호이다.
*
사무실 청소는 언제나 세이 몫이었다. 사무실과 붙어 있는 작업장에서 항상 농산물을 만지기 때문에 흙먼지나 모래알갱이가 날아와 하루만 청소를 안 해도 티가 났다. 실수만 했다 하면 빨리 시집이나 가지 뭐 했냐고 핀잔을 놓는 김 부장이나 치마만 입었다 하면 남자가 생겼냐고 묻고 허허허 웃는 고 부장은 없는 편이 나았다. 다행히 두 사람 다 외근이 잦았다. 세이는 청소를 마치고 믹스커피를 마시면서 더덕 까는 할머니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요즘 로스가 많다고 사장님이 아주 예민해지셨어요. 신경 써서 작업해 주세요. 그러다가 껍질 무게까지 재라고 하면 여사님들도 피곤해지세요."
손수 믹스커피까지 타주며 말했건만 셋 중 가장 머리숱이 듬성듬성한 할머니가 경상도 사투리로 구시렁댔다. 두 명은 조선족으로 손은 느려도 순순한 편인데 창원이 고향이라는 할머니는 손은 빠르지만 바로 고개를 끄덕이는 법이 없었다. 아르바이트이긴 해도 여기서 몇 년을 일했으니 그럴 만하다고 너그럽게 이해하려 애쓴 지 벌써 반 년째다. 브로콜리를 다듬으면 나오는 밑동이나 흠집이 나 상품성이 떨어지는 파프리카를 싸주며 구슬린 효과가 아주 없지는 않았으나 미미했다. 앙칼지게 을러대 볼까 하다가 주름진 얼굴을 보고 그만 또 마음이 약해져 버렸다.
사장에게 전날 수불대장을 보고하고 백화점 발주 물량을 내보내는 일로 오전이 다 갔다. 점심에 도시락을 먹는 할머니들을 두고 사무실을 비울 수 없는 탓에 할머니들이 오는 날은 늘 배달이었다. 고춧가루가 칼칼하게 들어간 순두부찌개를 먹었더니 몸이 뜨끈해지는 것 같았다. 잠깐 웹서핑을 하다가 클립보드를 옆구리에 끼고 작업장으로 갔다.
냉장창고에 들어가기 전에는 항상 손을 비벼서 체온을 올린다. 그렇게 해도 세 박스쯤 수량 확인을 하고 나면 벌써 볼펜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냉장창고 밖으로 나와 다시 손을 비비다가 잠깐 네일아트를 바라보는 게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빈 손톱에는 여분의 스티커를 붙였다. 열 손가락이 모두 똑같아졌지만 손끝이 빨갛게 얼어서 분홍색 펄이 눈에 띄지 않았다. 세이는 다음에 금색 펄이나 체크무늬 스티커를 구입하기로 마음먹었다. 봄이니까 벚꽃 무늬도 좋겠다. 이제까지 한 번도 시도하지 못한 레드나 블랙도 욕심이 났다.
둥글게 모은 손에 입김을 불고 냉장창고로 들어갔다. 밀봉된 박스는 내용물을 확인할 필요가 없으니 간단했다. 개봉한 박스라도 유기농과 무농약을 구분해 개수를 세는 것까지는 쉬웠다. 마대자루에 담긴 더덕, 우엉 같은 것들은 끄집어내서 무게를 달아야 한다. 평소에는 입고량을 더하고 출고량을 빼는 식으로 계산하지만 농산물이다 보니 상하거나 마르면서 로스가 발생했다. 세이는 매주 금요일마다 재고를 확인해 일주일 동안 누적된 오차를 수정했다. 로스가 많으면 목소리 큰 사장과 한 시간쯤 대면해야 한다.
월요일에 레드나 블랙은 피해야겠네, 중얼거리며 세이는 클립보드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십오 년 전에 머리 좋은 직원이 만들어 놓았다는 수불대장은 엑셀 함수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골치가 아팠다. 저녁에 무리하기보다 아침에 일찍 와서 입력하는 편이 실수가 없었다. 오래된 회사일수록 화석 같은 유물로 생존이 가능하구나. 운석이 떨어져도 여기는 멸종하지 않을 것 같았다.
사장은, 직원을 제 가족처럼 생각한다더니 정말 제 가족에게처럼 소리를 지르고 한여름에 삼십 도가 넘어가기 전에는 에어컨을 못 틀게 하면서 카디건은 꼭 챙겨 입게 하는 꼰대이지만 적어도 룸살롱 도우미와 얼굴을 비교하는 한심한 짓은 저지르지 않았다. 회식이 없는 것도 좋았고 주말에 로테이션 근무하는 것도 익숙해졌다. 무엇보다 낡음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나이가 들어 사무일이 어려워지면 더덕이라도 까겠다고 해볼까.
작업시간이 끝나 할머니들이 깐 더덕을 담은 비닐봉지를 들고 사무실로 왔다. 세이는 곱은 손으로 서랍을 열어 저울을 꺼냈다.
"그기 스티커라 했제?"
마지막에 무게를 재며 창원 할머니가 물었다.
"그라믄 바르는 건 안 쓸끼가? 버릴 꺼면 내 주면 안 되나?"
창원 할머니는 얼룩덜룩한 분홍색 티셔츠에 보풀이 인 자주색 카디건을 입고 있었다. 누비바지는 무릎 부근에 접힌 선이 자글자글했고 검은색 털신은 긁힌 자국마다 더께가 앉았다. 바짝 깎아 뭉툭한 손톱에 물로 씻어도 쉽게 지지 않는 흙 때가 까맣게 껴 있었다. 들은 말로는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라고…… 찰나라기에는 오랜 침묵과 무심하다기에는 동선이 긴 시선을 겨우 갈무리했다.
"갖다 드릴게요."
세이의 대답에 창원 할머니가 반 토막 난 유기농 고구마를 안겨 주었을 때보다 활짝 웃었다. 주름이 많은 얼굴이 더욱 자글자글해졌다.
"다음 주는 월수금만 나오시면 돼요."
"알았다. 밖에 춥다. 단디 싸매라."
작업장을 나가면서 창원 할머니가 살가운 인사를 건네기는 처음이었다. 세이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월요일, 창원 할머니, 네일 폴리시, 꼭 챙길 것, 별표, 별표, 별표. 스케줄러에 입력한 다음 그만 퇴근준비를 했다.
냉기가 뾰족하게 심이 박힌 손을 주머니에 넣고 칼바람이 부는 골목을 종종걸음 쳤다. 수선을 맡긴 구두를 찾고 미용실에서 머리를 다듬은 다음 국수가게로 들어가 멸치국수와 제육주먹밥을 먹고 집에 돌아왔다. 까만 창을 한 번 올려다보고 계단을 느릿느릿 올라가 도어록을 열었다.
샤워를 하고 나와 얼굴에 마스크시트를 얹은 채 손톱의 네일 스티커를 하나씩 떼어냈다. 엄지를 붙이고 손을 펼치자 열 손가락이 한눈에 보였다. 접착제 때문인지 손톱이 건조해진 것 같았다. 손을 오므려 손톱으로 마스크시트를 꾹꾹 눌렀다. 에센스가 묻은 손가락이 축축해졌다.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잠들어 알람이 울리기 전까지 눈을 뜨지 못했다. 날이 좋은지 창밖이 환했다. 세이는 두 팔을 위로 뻗어 크게 기지개를 켰다. 토요일 아침이다.
*
상승 빌딩은 사층부터 간판이 없고 대신 유리가 바둑판처럼 덮여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탈 필요는 없었지만 일부러 안에 들어가 층별 안내를 보았다. 지하 1층 세뇨르클럽, 1층 네일도맑음, 2층 아모르댄스웨어, 3층 더나은 법률사무소, 4층 아이상승인파크, 5층 아이상승인파크, 6층 아이상승인파크. 의외로 큰 회사였구나, 아이…… 상승인 파크. 세이는 공연히 엘리베이터 호출 버튼을 눌러 놓고 밖으로 나왔다.
네일숍은 입구 왼쪽에 있었다. 내향성발톱 케어를 홍보하는 현수막을 지나쳐 문을 열자 익숙한 실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네일숍은 어디를 가도 복사해서 붙인 것처럼 구조가 비슷했다. 한쪽 벽에 색색들이 네일 폴리시가 선반마다 빼곡하게 들어차 있고, 그 앞에 긴 테이블이 있어 안쪽에는 네일 미용사가 바깥쪽에는 손님이 앉고는 했다.
"어서 오세요. 예약하신 분이세요?"
안쪽에 앉은 통통한 얼굴의 여자가 틀이 잡힌 목소리로 물었다. 세이는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멈칫했다. 테이블 바깥쪽에 먼저 온 손님이 앉아 있었다. 남자였다. 머리에 새치가 잔뜩 있고 눈가에 주름이 지고 마른 몸에 배만 불룩 나온.
"일찍 오셨네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미용사의 말에 엉거주춤 소파에 앉기는 했지만 속옷가게에서 이성과 마주친 것처럼 어색했다. 오후에 결혼식만 없었어도 다음에 오겠다고 말했을 것이다. 세이는 쭈뼛거리며 미용사와 눈을 마주치려 애썼다. 이제 당신의 손님이 되었으니 불편한 마음을 신경 써달라는 신호를 보내려 했으나 미용사는 날카로운 니퍼로 큐티클을 제거하느라 고개를 들지 않았다.
"지능이 하는 일은 그거예요."
남자가 입을 열었다.
"과거의 상황을 기억해서 현재의 상황과 비교해 더 나은 선택을 하는 것."
소파에 완전히 엉덩이를 붙인 세이의 선택을 두고 한 말은 아닌 것 같았다. 남자는 세이를 한 번 쳐다보지도 않았다. 네일 폴리시가 도열한 선반을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 꼿꼿이 앉아 있다가 미용사가 케어 하던 손을 바꾸자 스위치가 눌린 것처럼 입을 움직였다.
"지능을 그렇게 정의하면 대장균도 지능이 있다고 볼 수 있어요. 먹이가 되는 화학물질이 증가하거나 해가 되는 화학물질이 감소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니까요.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 의사결정을 하는 겁니다."
미용사는 큐티클을 제거한 손톱을 면봉으로 닦고 베이스코트를 발랐다. 아무리 봐도 귀담아듣는 것 같지 않은데 남자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지능이 있는 식물도 있어요. 파리지옥이라고, 곤충을 유인하는데 첫 번째 자극에는 잎을 닫지 않아요. 너무 빨리 잎을 닫으면 먹이가 달아날 수 있으니까요. 두 번째 자극이 가해져야 비로소 잎을 닫고 소화액을 분비합니다. 같은 자극에 대해 다른 반응을 하는 경우죠."
"손님, 이쪽에 앉으세요."
거리낌 없이 남자의 말을 자르고 미용사가 세이를 불렀다. 미용사의 손이 가리키는 대로 남자 옆자리에 주춤주춤 가서 앉자 미용사가 바퀴 달린 의자를 움직여 세이 앞으로 왔다. 파일로 손톱 모양을 다듬는 동안 남자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미용사가 앞에 있을 때만 이야기한다가 남자의 규칙인 듯했다. 반대로 미용사는 세이 앞에서 말이 많아졌다.
"오랜만에 네일 하시나 보다."
손톱을 덮은 큐티클을 보더니 미용사가 말했다.
"혹시 다이어트 하세요? 손톱이 상했네요. 단백질이 부족하면 손톱이 깨질 수 있어요."
세이는 다이어트를 하지 않았다고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일 스티커를 보름 넘게 붙인 것만 제외하면 특별히 손톱에 해가 될 만한 일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럼 스트레스 많이 받으시나 보다. 손톱 영양제 사용해 보세요. 보습기능 있는 것도 있어요. 하루 이틀 발라서는 소용이 없고 한 달 정도면 너끈히 효과를 보실 거예요. 몸이 건조해서 그럴 수도 있으니까 물을 충분히 마시고 비타민도 드셔 보세요. 비타민 에이가 특히 좋대요."
미용사가 가져온 핑거볼에 따뜻한 물이 담겨 있었다. 그 안에 열 손가락을 넣자 서리처럼 돋아 있던 피로가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네일숍에 오는 이유는 미용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자신보다 더 제 몸을 아껴 주리라는 기대에 마음이 말랑말랑해졌다.
"판단을 하기 위해 감각정보가 중요해졌죠. 그래서 동물은 이동할 때 먼저 앞으로 나가는 신체 부위, 즉 머리에 감각기관이 대부분 모여 있어요. 시각, 청각, 미각 등 감각 정보를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해서 신경세포들 또한 머리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었죠. 그것이 바로 뇌입니다."
세이는 힐끔 남자를 훔쳐보았다. 투수와 포수가 편하게 신호를 주고받기 위해 손톱에 색을 칠한다는 말을 들어 보기는 했지만 남자가 야구선수로 보이지는 않았다. 젊은 사람도 아니고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사람이. 미용사의 태도를 보면 심지어 단골인 것 같았다.
"멍게는 유생일 때만 뇌를 이용합니다. 안전하고 먹이가 풍부한 곳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정착하는 순간 자기 뇌를 먹어 소화시키죠."
의자에서 일어난 미용사가 네일 폴리시를 몇 개 집어 들었다. 언젠가 한 번쯤 시도해 보고 싶었던 블랙 계열 컬러들이었다. 아, 무심코 소리를 낸 세이를 남자의 시선이 스치듯 훑고 갔다. 미용사는 남자에게 의견을 묻지 않고 바로 베이스컬러를 발랐다. 반투명한 핑크가 손톱을 발그레하게 물들였다.
"멍게는 뇌가 없는 쪽을 생존전략으로 선택했을 뿐입니다. 파리지옥과 반대로 동물이면서 식물의 생존방식을 흉내 낸 거죠. 한번 정착하면 평생 움직일 필요가 없으니 열량 소모가 심한 뇌를 제거해서 낭비를 줄이는 거예요. 아주 효율적이죠."
어쩐지 아까보다 남자의 목소리가 커진 것 같았지만 세이는 잠자코 있었다. 사실은 미용사의 솜씨에 관심이 쏠려서 남자의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멍게는 좋아하지 않기도 하고. 미용사가 작은 스펀지 조각에 블랙, 진회색, 은색 펄 순서로 네일 폴리시를 차례로 바른 다음 남자의 손톱을 가볍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사실 인간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신생아의 뇌는 매초 백만 단위의 시냅스를 형성하는데 두 살쯤에 최대치가 됩니다. 성인의 뇌는 그 절반밖에 되지 않아요. 선택과 집중을 통해 불필요한 시냅스를 소멸시킨 거죠."
세이는 감탄했다. 이제까지 네일숍에 가본 횟수는 손으로 꼽을 정도지만 미용사의 솜씨가 뛰어나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블랙에서 은색 펄로 이어지는 그러데이션이 손톱의 절반을 부드럽게 채웠다.
"평소에 인간의 눈이 일 초에 네 번 꼴로 급격하게 움직인다는 걸 아세요?"
미용사가 대답하지 않듯이 세이도 대답하지 않았을 뿐인데 남자가 억울한 듯이 쳐다보았다.
"손 움직이시면 안 돼요."
자기 몸을 돌봐주는 사람의 말은 듣게 되어 있다. 이발사라든가 의사라든가 미용사라든가. 남자는 고개를 내렸다가 들어 올리고 다시 미용사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눈은 한 번 사진을 찍은 다음에 달라지는 부분만 캐치해서 뇌에 알려줍니다. 매번 사진을 새로 찍으면 낭비가 심하니까요. 덕분에 뇌는 최소한의 활동으로 최대한 효율적으로 세상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남자는 별다른 의도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관람료도 지불하지 않고 네일아트 과정을 지켜보고 있자니 공연히 신경이 쓰여 그렇게 느꼈을지도. 혼자 떠들기보다 누군가 들어주는 편이 좋을 테니 억울할 일은 아니리라 믿으며 세이는 남자의 손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미용사는 이제 하얀색 네일 폴리시의 뚜껑을 열고 있었다. 솔이 가늘고 뾰족했다.
"온도를 느끼거나 냄새를 맡거나 전자기장을 이용해 세상을 파악하는 동물도 있어요. 어떤 생물도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건 불가능합니다. 진화를 통해 생존에 가장 적합한 형태로 세상을 인지하는 거죠."
핑크와 블랙의 경계에 하얀 섬광 무늬가 생겼다. 마치 벚꽃이 핀 언덕에 시린 밤하늘이 내려앉은 것 같았다. 손톱이 열 개의 창문이 되어 하나의 오롯한 세계를 보여주었다. 드문드문 크고 작은 별이 떠올라 비슷한 듯 다른 모양으로 빛났다. 같은 패턴이 일정하게 반복되는 네일 스티커로는 흉내 낼 수 없는 디테일이었다.
네일 폴리시 뚜껑을 닫고 미용사가 세이에게로 와 핑거볼에서 손을 꺼냈다. 큐티클 리무버를 바른 다음 돌아가 다시 남자의 손을 붙잡았다. 자신에 대해 알려고 애쓰는 생명체는 인간이 유일…… 반짝이는 스톤을 섬광 무늬에 하나씩 붙였다. 자기인식은 사회화의 부산물…… 펄이 든 투명한 탑코트를 발랐다. 부작용도 발생해…… 건조기를 가져오자 남자가 입을 다물고 바람이 나오는 곳에 두 손을 가지런히 얹었다.
"어떤 컬러로 하시겠어요?"
세이 앞으로 온 미용사가 큐티클을 제거하며 물었다. 세이는 가격표를 다시 곁눈질했다. 디자인을 추가하면 가격이 배 이상 올라간다. 한 번쯤은, 이라는 말을 넣어 두고 세이는 미리 준비해 온 대답을 내밀었다.
"파스텔핑크요. 이따 부케를 받아야 하니까 너무 튀는 색은 좀……."
"어머, 부케 받으세요? 잘해 드려야겠다."
미용사는 핑크 계열의 네일 폴리시를 세 개 골라와 손톱에 하나씩 발라 주었다. 세이가 두 번째 컬러를 선택하자 그것만 남기고 다른 건 치웠다. 베이스코트를 바르면서 미용사의 입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다음에는 젤 하세요. 일반 네일은 일주일밖에 안 가지만 젤은 보름 이상 가니까 유지 기간을 생각하면 그렇게 비싼 것도 아니에요. 회원권 끊으시면 포인트도 적립되고 젤도 무료로 지워드려요."
지우려면 또 네일숍에 와야 하고 네일숍에 오면 또 네일아트를 하게 되고…… 가격도 가격이지만 그 연결고리가 부담스럽다고 말할 수 없어 적당히 둘러댔다.
"그걸 하면 손이 답답해서……."
"안 해보신 분들이 그러시더라고요. 하다 보면 또 금방 익숙해져요. 저도 자주 하라고 말씀드리지는 않아요. 젤 네일은 아무리 잘 지워도 손톱 막이 손상되거든요. 나중에 젤 하시더라도 중간에 일주일씩 휴식기를 가지세요. 손톱도 피부라 숨을 쉬어야 해요."
손가락 끝을 빠르게 파스텔핑크로 채우고 미용사가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이건 서비스로 해드릴게요."
큐티클이 있었던 자리에 남자의 손톱에 붙였던 것과 같은 스톤을 하나 또는 두 개씩 붙였다. 그것만으로 무난하던 손톱이 특별해졌다. 탑코트를 바르고 미용사가 가져온 건조기에 손을 들이밀었다. 윙 소리를 내며 바람이 쏟아졌다. 미용사는 남자에게로 가 건조기에서 손을 꺼냈다.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다가 거울처럼 자신의 생각까지 헤아리게 되었죠. 덕분에 자신의 행동을 예측하여 긍정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게 되었지만, 행동의 결과가 예측에 미치지 못했을 때는 실망이라든가 후회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이 발생합니다."
미용사가 핸드크림을 발라 주고 손을 떼자 남자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남자는 마지막으로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고 네일숍을 나갔다. 투명한 유리문 너머로 남자가 택시를 잡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택시가 떠나자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졌다. 건조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시끄러울 정도였다.
"죄송해요. 불편하셨죠. 남자 혼자 네일숍에 앉아 있기 민망해서 그런지 항상 말씀이 많으세요. 평소에 다른 분과 겹치지 않게 예약을 받는데 오늘은 그렇게 됐네요."
남자를 배웅하고 온 미용사가 세이 앞에 앉으며 말했다. 이제야 온전히 차지한 미용사의 관심 앞에서 세이는 다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골이신가 봐요?"
"굉장히 오래된 단골 분이세요. 오실 때마다 다른 디자인으로 해달라고 하셔서 처음에는 힘들었는데 덕분에 많이 늘었죠."
"진짜 솜씨가 좋으세요. 저도 단골 할게요. 요즘 일반 네일 하는 데 찾기가 너무 힘드네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쩌죠. 저도 일반 네일은 다음 달까지만 할 거라……."
우주에서 운석이 날아오고 있었다. 여기도 멸종의 현장이구나. 세이는 실망을 들키지 않기 위해 긴 숨을 차근차근 쉬었다. 미용사가 시간을 확인하고 핸드크림을 가져와 옆에 올려 두었다.
"사실 일반 네일과 젤 네일을 같이 하면 손해가 커요. 굳기 전에 주기적으로 갈아 줘야 하는데 같이 하면 그 양이 두 배가 되니까요. 요즘은 손님들이 젤만 찾으시기도 하고…… 저분 아니었으면 저도 벌써 그만뒀을 거예요. 집이 가까운 것도 아닌데 토요일마다 오시거든요."
은밀한 이야기를 건네듯 미용사가 고개를 낮추어서 세이도 덩달아 고개를 숙였다.
"일요일에 지운다면서, 매주 네일아트를 하세요."
속삭이는 목소리가 눈을 동그랗게 뜬 희주의 목소리와 비슷하게 겹쳤다. 세이는 저도 모르게 유리문 밖을 내다보았다. 남자의 모습을 떠올리려고 했지만 그새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다. 쪼그라든 풍선 같은 몸에 달라붙은 네일아트만 기괴한 빛으로 반짝였다.
"직장 때문에 그러시는 분들이 없지는 않지만 심지어 남자분이니까…… 결혼도 안 하신 것 같더라고요."
미용사가 왼손 약지에 낀 반지를 두드렸다. 남자의 손가락은 비어 있었다. 네일아트가 도드라질 정도로 피부가 희어 여백 같은 손이었다. 미용사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반지가 없다는 건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세이는 자신의 나이를 미용사가 몇으로 가늠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일반 네일이면 몰라도 젤 네일을 매주 하면 아시다시피 손톱이…… 집에서 지우기도 어렵고요. 그래서 저분께는 젤로 바꾸라고 말씀을 못 드렸어요. 제가 힘들어서 일반 네일을 그만 한다고는 했지만……."
한숨을 쉬며 "걱정이 돼서요."라고 하는 말에 젖은 바람이 뒷덜미를 스치듯 스산해졌다. 열 개의 창문 너머로 화사하던 꽃잎이 흔들렸다. 밤이 내려앉은 지평선에 빛이 떠올랐다. 훈훈하던 바람이 거친 돌풍이 되어 밀어닥쳤다. 벚꽃 언덕 너머 섬광은 별이 아니라 운석이 충돌하는 순간이었다.
뭐가 그렇게 잘나서 결혼을 안 해!
설 연휴 마지막 날 어머니가 소리 지르며 음식물쓰레기 봉투를 집어던졌다. 세이의 다리에 맞고 허물어진 봉투가 저녁에 먹은 동태찌개의 흔적을 사방으로 퍼트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라고 또는 잘나지 않으면 결혼해야 하는 거냐고 같이 핏대를 세우며 싸웠는데 이번에는 치워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미나리와 미더덕 껍질을 주워 봉투에 담다가 망연히 서 있는 어머니를 보았다. 씻기고 먹이고 입혀 온 손으로 집어던진 쓰레기에 맞은 일이 충격이었는지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목소리에서 기운이 빠졌다.
엄마, 나는 그런 인간인걸. 왜 몰라.
자취집에 돌아와 네일 스티커를 주문하면서 레드나 블랙 대신 무난한 분홍색을 골라 담았다. 희주에게서 청첩장을 받았을 때는 다음날 결혼정보회사에 연락했다. 릴레이처럼 이어지던 결혼식이 눈앞에서 멈추고 억지로 마지막 배턴을 쥐게 되자 어디로든 달려가야 할 것 같았다. 가격이 상당해서 머뭇거렸더니 커플매니저가 일회 만남이 가능한 셀프 매칭을 추천했다. 회원가입을 하고 사진과 이름을 가린 프로필을 둘러보다가 손을 멈췄다. 아이쇼핑을 하듯이 가성비를 따지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 가만히 모니터를 노려보았다.
사라진 분홍색 펄 스티커는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뱃속에서 뭔가가 돋아나는 것처럼 불편해졌다. 손을 움직거리자 바람이 멈췄다. 미용사가 말했다.
"바쁘지 않으시면 조금 더 놔두세요. 바짝 마르려면 원래 여덟 시간은 걸려요."
손을 원래 위치로 돌려놓자 다시 바람이 나왔다. 창원 할머니가 네일 폴리시를 달라고 했을 때, 미간을 찌푸리지 않았었나. 돌이켜보려고 해도 불완전한 사진이 기억을 꽉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 그만 건조기에서 손을 꺼냈더니 미용사가 핸드크림을 발라 주었다. 파스텔핑크로 채색된 손톱에 반짝이는 스톤이 너무 예뻤다. 세이는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고 네일숍을 나왔다.
희주의 결혼식은 정해진 노선을 달리듯 무난하게 진행되었다. 샹들리에가 화려한 홀에서 신부가 던진 부케를 한 번에 받았지만 사진사의 요청으로 두 번 더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했다. 부케를 들고 오는 길에 어디에 긁혔는지 손톱에 길게 줄이 생겼다. 세이는 침대에 누워 손등이 보이도록 손가락을 펼쳤다. 아홉 개의 흠 없는 파스텔핑크와 흠이 난 한 개의 파스텔핑크가 나란히 늘어섰다. 손가락을 움직이자 스톤이 형광등 불빛을 퉁기며 궤적을 그렸다. 서른이 넘으면 세상과 불화하는 일은 있어도 자신과는 불화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탁상달력을 한참 바라보다가 리무버를 가져왔다. 화장솜에 리무버를 묻혀 네일 폴리시를 지웠다. 스톤은 잘 떨어지지 않아 손톱으로 긁어야 했다. 리무버 특유의 아린 냄새가 스며든 손가락이 가벼워졌다. 네일숍에 다시 가고 싶어지는 건 아마도 시간이 제법 지난 뒤의 일일 것이다.
*
꽃샘추위가 지나자마자 갑자기 날이 더워졌다. 후끈한 게 완전히 여름 날씨였다. 꽃이 순서를 지키지 않고 한꺼번에 피어 골목이 화사해졌다. 부케를 백일 동안 말려 신부에게 돌려주면 좋다고 해서 벽에 걸어 두었지만 사흘 만에 짓물러서 쿰쿰한 냄새가 나는 바람에 그만 떼어버렸다. 손재주가 없는 걸 빤히 알고 있으니 희주도 크게 기대하지 않았으리라.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꽃병에 꽂아 둘 걸 그랬다고 잠깐 후회했다.
동사무소에 갈 일이 있어 사무실을 나왔다가 초등학교 앞에서 창원 할머니와 마주쳤다. 창원 할머니는 미색 저고리에 연두색 치마의 한복을 입고 키가 큰 할아버지와 팔짱을 끼고 있었다. 곱슬곱슬한 머리가 풍성했다. 검은색으로 염색한다고 갑자기 머리카락이 돋아날 리 없으니 가발을 쓴 게 틀림없었다. 발을 멈출 뻔했지만 창원 할머니가 아는 체를 하지 않아 세이 또한 시치미를 떼고 옆을 지나갔다.
"요즘 게가 제철이지?"
"갑자기 게는 와? 배고프나?"
"쭈꾸미는 별로야. 턱이 아파."
"내도 쭈꾸미는 별로라. 시래기 맛난 데 있다카니 가 묵자."
세이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창원 할머니에게는 가지고 있던 네일 폴리시와 리무버까지 전부 가져다주었다. 기껏해야 분홍색이나 바를 줄 알았는데 손끝에 보이는 색은 파스텔블루였다. 잘 지워지지 않는 검은 때를 감추려는 듯이 손톱을 넘어 바깥 살까지 네일 폴리시를 두껍게 발라 놓아 껍질을 뒤집어쓴 것 같았다.
막 피기 시작한 벚꽃이 보이는 담장 아래에서 세이는 입을 벌렸다. 분명 크게 웃을 줄 알았는데 바람 빠진 풍선마냥 픽픽거리는 숨만 새나왔다. 세이는 손을 오므렸다. 거스러미와 큐티클이 제거된 손톱이 허전해 보였다. 월요일까지 참았다가, 틱, 체크무늬 스티커를, 틱, 붙이고 일요일에, 틱, 떼어서 버리자. 비행기가 낮게 나는지 하늘을 긁는 소리가 유독 시끄러웠다. 나뭇가지 사이에 낮달이 당장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위태롭게 매달려 모든 소멸하는 것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 지능과 뇌와 관련된 부분은 이대열의 『지능의 탄생』과 데이비드 이글먼의 『더 브레인』을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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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2019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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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산을 오르고 박현옥 기제와 헤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함께한 일은 산에 다녀오는 것이었다. 서울에서 차로 두 시간 반 거리에 기제의 아버지가 살았다. 거기서 차로 삼십 분을 더 가면 기제의 아버지가 소유한 선산이 나왔다. 12월 중순, 눈이 내리기 전에 다녀오자며 기제의 아버지가 기제에게 말했고, 이어 기제가 내게 주말에 같이 아버지 댁에 내려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따로 챙길 건 없으나 다만 밑창이 튼튼한 신발을 신으라고 했다. 신발장엔 바닥이 얇고 발목이 드러나는 단화나 굽이 높은 구두뿐이었으므로 나는 인터넷 쇼핑몰에서 트래킹화를 하나 주문했다. 이튿날 저녁에 택배로 받아 본 신발은 정말로 단단했다. 뒤축이 특히 단단해서 기제가 차를 세워 둔 집 앞의 큰길까지 걸어가는 동안에 벌써 뒤꿈치가 쓸렸다. 선산엔 산주였던 기제 고모의 산소가 있었다. 기제를 몇 년 동안 만났는데 고모 이야기는 그때 처음으로 들었다. 해도 뜨기 전인 새벽에 뻥 뚫린 중부고속도로를 달리며 기제는 조잘조잘 떠들었다. 십수 년 전에 남의 집 선산이었던 걸 고모가 7억을 주고 샀다고. 시장에서 방앗간을 하던 고모는 인근 광역시의 국제공항이 그 산으로 이전한다는 소문을 듣고서 평생 모은 목돈을 죄다 털었다. 산주의 처가 쪽 친척이 도시개발과 과장으로 일한다는 말에 홀린 듯 산을 사 버린 것이다. 그러나 뜬소문이 으레 그렇듯 이전이 거의 확정이라던 공항은 여러 번의 공청회 끝에 무산됐으며, 선산 역시 원래의 값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원래는 얼마였는데?” “6천만 원.” “세상에.” 누군가는 기제의 고모에게 선산에서 송이라도 나면 일 년에 한 달만 일해도 평생 먹고 살 수 있겠다며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넸다. 기제의 고모는 혹시나 하나는 마음에 몇 날 며칠 산을 헤집고 돌아다녔으나 산에는 소나무는커녕 상수리나무만 잔뜩 심겨 있었다. 상수리나무는 참나무와 달리 속이 물러 목재로도 쓸 수 없고 숯으로도 못 만든다고, 기제가 말했다. 고모가 그 산에서 발견한 건 송이도 아니고 산삼도 아니라 지천에 떨어진 도토리뿐이었다. “근데 고모도 방앗간에서 도토리 가루를 팔았거든.” 앙금을 말려 가루 낸 것으로 킬로에 만 원을 받았다. 묵으로도 쒀 먹고 전으로도 부쳐 먹고, 효능도 모르는 채 매일 티스푼으로 한 숟갈씩 퍼먹는 사람도 있었다. 기제는 그러니까 고모가 도토리를 8억 원어치 산 것이나 다름없다며 웃었다. 한바탕 웃고 난 다음엔 그 이듬해 고모가 산 중턱에서 제초제를 먹었다고 말했고 그때는 웃지 않았다. 히터를 세게 틀어 놓아 겨드랑이와 등과 발가락에서 땀이 났다. 뒤꿈치가 쓸린 곳에 땀이 닿아 한층 더 따가웠다. 내가 자꾸 발을 꿈질거리자 기제가 발이 시리냐고 물었고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런데도 기제는 진작 말을 하지 그랬느냐며 히터를 더 올려 버렸다. 나중에는 엉덩이와 오금에도 땀이 났다. 짧게 깎은 기제의 옆머리에도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 관리자
- 2026-01-01
잊고 있고 잇는 진연주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방에서 지냈다. 한 칸짜리 방. 침대가 있고 책상이 있고 책장과··· 새 둥지가 있는. 2년 전의 새는 죽었다. 좁은 방범창 안에서. 이틀을 울다가. 구구 쿼쿼. 소리가 줄어들면서. 약해지면서. 나는 소리가 완전히 죽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러고도 며칠을 더. 안전해질 때까지. 며칠 더 기다렸다가. 숨이 죽을 때까지. 숨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당황하면 안 되니까. 당황이 수습을 곤란하게 만드는 일은 그야말로 곤란한 일이니까. 며칠 더 기다렸다가. 딱딱해진 새를 치우고. 나뭇가지와 지푸라기를 거둬 내고. 방범창의 패널을 깨고. 다시는 새가 갇혀 죽는 일이 없도록. 패널을 깨고. 새는 왜 나가지 못했을까. 들어왔는데 왜 나가지는 못한 것일까. 날개를 펴서 도움닫기를 할 만큼. 공간이 충분히 넓지 않았기 때문일까. 창문의 반을 가릴 만큼. 충분히 높았기 때문일까. 방범창이. 폴리카보네이트 방범창. 폴리카보네이트. 폴리카. 나는 꿈을 꾸고 새가 죽고. 꿈에서 매번 새가 죽고. 구구 쿼쿼. 소리가 줄어들고. 약해지고. 꿈을 꾸고 새가 죽고. 매번. 나는 그 새가 알을 밴 상태였고 새가 죽으면서 알도 함께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더 슬퍼졌지만 그러한 조금 더의 슬픔이 죽은 새에게는 약간의 좋은 일이겠거니 했다. 그렇더라도 내게 그 새의 죽음은 시간의 궤도 바깥에서부터 시작된 파열음처럼 당혹스럽고 얼떨떨했다.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예기치 않은 곳에서 마주한 삶의 필연적 결말. 그런데 왜 하필 지금, 왜 하필 여기였을까. 처음부터 죽음을 예견했던 것은 아니다. 나는 그 새가 마침내 남은 삶을 향해 날아오를 것이라고, 구구 쿼쿼 우는 소리가 그러한 안간힘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켜보거나 지켜보지 않는 일만이 나의 것이었으나 그렇더라도 어느 순간에는, 그 새의 삶에 또는 죽음에 개입했어야 한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랬어야 하나. 나는 한동안 가장 익숙한 골목에서 길을 잃은 사람처럼 행동했다. 허둥대고 우물쭈물하고 두려워하고. 새로운 새가 찾아온 것은 그로부터 두 해가 지난 여름이었다. 지독하게 습하고 더운 여름의 어느 날, 어느 시간에. 반쯤은 정신이 나간 듯 갈팡질팡하며. 나는 새가 나뭇가지와 나뭇잎과 비닐 같은 것을 부지런히 실어 나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새는 한동안 가만히 앉았다가 황급히 목을 빼 주변을 둘러봤고 부리로 털을 고르거나 몸을 움직여 자리를 고르기도 했다. 가만히 앉아 떠나지 않다가 돌연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멈추고 날아오르는 일도 눈에 띄었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그곳에서 작은 알 두 개를 발견했다. 덧문 밖의 햇살처럼 뽀얗고 눈부신 데다 아주 정교하게 빚어진 도자기처럼 매끈한 것, 완벽한 형태의 생명이 그야말로 덜컥, 거기 있었던 것이다. 철골조와 앙상한 밑바닥만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는, 방범창의 한구석에 말이다. 하나의 존재와 하나의 장소, 그 둘의 대비가 너무도 강렬해서 섬뜩하게 느껴질
- 관리자
- 2026-01-01
태양에서 멀리 김채원 지금부터 아침이 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히 주어질 것이었으며 당연하게도 솔지에게도 주어질 것이었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시간을 어떠한 저항도 없이 온전히 받아들이고 나름의 궤적을 그리며 부지런히 그 시간을 사는 일. 솔지에게 그것은 꽤나 쉬운 일이었다. 그치만 어려운 일인데? 솔지는 생각했다. 꽤나 쉽고, 그치만 어려운 일이라고. 알겠습니다, 솔지는 늦저녁에 창문을 열어 두고 혼자 책 읽기를 좋아했는데 선과 악이 정해져 있는 이야기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런 이야기가 나오면 잘못 걸렸다, 하면서도 끝까지 읽기는 다 읽었다. 치워 없애야만 하는 악이 존재하고 그 악에 맞서 싸우는 선이 있다는 게 이해가 잘 안됐다. 누가 보아도 선한 (그런 게 가능하다면 말이다?) 인물들이 고통받는 이야기. 고통 속에서 발견하는 반짝이는 우정이나 사랑 같은 것들. 에구, 눈부셔라. 에구, 싫어라. 솔지는 이 모든 것에 필요 이상의 적의를 가졌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솔지의 약점을 건드리기 때문이었다. 솔지가 스스로 생각하는 자신의 약점이라는 것은 대개 이런 거였다. 솔지는 배신하기를 잘했다. 그러니까 배신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정도의 배신을 참 잘했다. 최근에 솔지는 세 사람의 친구를 배신했다. 세 사람의 친구에게 차례차례 합성 마약을 권하였다. 세 사람의 친구 민지, 차은이, 가영이가 고등학교 건물 5층 화장실 맨 끝 칸에 모여 차례차례 그것을 받아 보았다. 처음이니까 그냥 줄게. 이게 뭔데? 알지만 한번 물어볼래. 그럼 알려 줄게. 몸에 좋은 약이야. 약의 이름은 해마야. 네가 지었어? 응, 내가. 이름이 영 징그럽고 별로다. 거절해도 돼? 왜? 귀여운데···. 원래 이름은 뭔데? 나도 몰라. 요즘 입시 준비하느라 머리가 아프다며. 생리통도 심하다며. 그런데 나 지금 진짜 돈이 없어···. 괜찮아, 내가 돈이 많아! 내 지갑을 보여 줄게! 솔지의 암호 화폐 지갑은 영단어로 된 열두 개의 암호를 입력해야만 열어 볼 수 있었다. 지갑의 암호는 솔지가 좋아하는 영단어의 단순한 나열이었다. 첫 번째 단어는 window였고 두 번째 단어는 forest 그리고 마지막 단어는 mountain, 산이었다. 겨울 산을 잘게 부순 듯한 흰 알갱이들을 솔지는 차분하게 소분해 가지고 다녔다. 합성이라는 게 둘 이상의 것을 합쳐서 하나를 이루는 것인데··· 정확히 무엇과 무엇과 무엇이 기타 등등 합쳐져 마침내 하나를 이루게 된 것인지는 제조하는 역할이 아니라서 몰랐다. 예전에는 약의 성분이 비교적 단순했는데 이제는 좀 복잡해졌다고들 했다. 단속에 걸리지 않으려면 약의 성분이 계속해서 복잡해져야만 한다고들 했다··· ···전부 주워들은 이야기였다. 솔지의 역할은 제조된 물건을 가져다가 주변에 판매한다고 해야 하나 일
- 관리자
- 2026-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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