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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해상도로부터

  • 작성일 2021-03-01

[단편소설]



낮은 해상도로부터



서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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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사라지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겨울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낮은 점점 길어지고 있어서, 퇴근길에는 해가 지는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볼 수 있었다. 풍경은 지하철 창문 밖으로 빠르게 지나가고, 사라지고, 사라졌지만, 사라지는 풍경을 보아도 나는 사라지지 않았다. 저 멀리. 내 시선은 고정되어 있고, 고정된 시선 속에서 해는 사라질 것이다. 자연스럽게. 해는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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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우리 사무실 사람들은 각자 점심을 먹는 분위기였다. 나는 주로 카페에서 혼자 점심시간을 보냈다. 내가 자주 가는 카페는 사무실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사무실에서 도시락을 먹는 날도 있었지만, 나는 카페에서 빵과 커피로 끼니를 간단히 때우는 게 좋았다. 그렇게 시간을 때우다 보면, 종종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을 보게 될 때도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은 누군가를 만나는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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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기다린다. 사람과 사람이 만난다. 사람과 사람은 만나지만, 나는 너를 만난 적이 없었다. 너는 이 근방에 있는 회사에서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하고 있다고 했다. 그 우연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조금 더 가깝게 느낄 수 있었지만, 정말로 우리가 가까운 사이였을까. 우리는 언젠가 꼭 만나자는 이야기를 자주 했지만 끝내 만나지 못했다. 이대로라면 우리는 앞으로도 만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네가 갑자기 트위터 계정을 삭제한 이유를 알지 못했다. 계정이 삭제되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메시지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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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점심시간마다 회사 주변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다고 했다. 너는 커피를 많이 마시고도 밤에 잠을 잘 잔다고 했다. 그렇지만 잠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 너는 면허가 있지만 자동차는 없었고, 그 대신 자전거를 애용했다. 너는 수영을 배운 적이 있었다. 너는 건강한 편이지만, 태생적으로 심장이 약하다. 너의 할아버지는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너는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다녀온 적이 있었고, 유럽 여행을 갔다가 소매치기를 당한 적이 있었다. (...) 너는 책 읽기를 좋아하고, 퇴근 후에 혼자 극장에 가기도 한다. 너는 연애가 간절하지 않다. 너는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했다. 너의 말에 따르면, 너의 회사 사람들은 모두 각자 컴퓨터를 바라보며 하루를 보낸다고 했다. 그곳은 많은 대화가 오고 가는 곳이 아니라고 했다. 그곳은 타자기 두드리는 소리와 마우스를 누르는 소리만 가득하다고 했다. 너는 네가 다니는 직장에 만족하고 있었다. 너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너는 그렇다. 나는 너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었지만, 정작 너의 이름과 성별과 나이와 얼굴과 목소리를 모르고 있었다. 나는 너의 연락처조차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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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에게 p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너는 p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오히려 너에게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앞으로도 너와 p가 알게 될 일이 없을 것이다. p는 나와 대화가 전혀 통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매주 만나서 밥 먹고, 술 먹고, 자는 것 이외에 우리 사이에는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가 나를 정말로 사랑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마저도 이제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p를 만나고서야 알게 되었다. 대화는 단순히 말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나에게는 애인이 아니라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 필요했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말을 통해 사랑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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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p와 우연히 마주치게 될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길에서, 식당에서, 지하철역에서. 우연한 만남을 상상했다. 살다 보면 언젠가 한 번쯤, 그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만약 p를 우연히 만나게 된다면, 만약 정말로 그런 날이 오게 된다면, 나는 p를 그냥 지나치고 싶었다. 내가 그를 아예 알아보지 못했으면 좋겠다고. 그래, 그게 가장 좋을 것이다. 나는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고 싶었다. 애초에 그를 만난 적 없는 것처럼, 아예 그를 모르는 것처럼. 그게 아니라면, 그가 완전히 늙어버렸으면 좋겠다고. 내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내가 기억하는 얼굴로부터 완전히 멀어지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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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기억 속에 있는 너의 얼굴을 떠올린다.


이마


눈썹   눈썹


귀   눈   눈   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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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의 이름을 불렀던 적이 있었나. 사랑스럽게. 너를 불러 본 적이 있었나. 나는 너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내가 기억하는 건, 너의 얼굴과 그 너와 함께 보낸 짧은 시간들뿐이라서. 이제와 너를 찾을 방법이 없었다. 단서가 없었다. 이름 없이, 너를 찾는 일은 불가능했다. 어떻게 너의 이름을 잊을 수 있을까. 너무 오래된 기억이라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네가 어렸을 때 나도 어렸으니까. 너의 얼굴은 오래도록 너의 이름을 대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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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이름조차 없었던 동생, 이제는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동생. 나에게는 두 명의 동생이 있었다. 한 명은 태어나기 전에 죽었고, 또 한 명은 파양되었다. 나는 죽은 아이의 이름을 모르지만, 그 아이가 있었다는 것을 안다. 나는 파양된 아이의 이름을 모르지만, 그 아이가 있었다는 것을 안다. 내가 그들을 동생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나에게는 분명 두 명의 동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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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은 동생의 얼굴을 알지 못한다. 그 아이의 얼굴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 아이는 이 세상에서 단 한 장의 사진도 남기지 못했다. 그래도 그 아이에게는 얼굴이 있었을 것이다. 심장이 만들어지고 혈액이 돌기 시작하면서, 그 아이에게는 점점 이목구비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이 생기기 시작했을 것이다. 언젠가 귀가 될 작은 구멍과 언젠가 눈이 될 작은 점이 있는 얼굴이 그 아이의 얼굴이었을 것이다. 그 아이는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촉각을 느낄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무언가 느끼면서, 점점 더 선명한 이목구비를 만들어 간다. 손가락과 발가락이 생기고 꼬리는 완전히 사라진다. 그 아이는 어느새 어른의 손바닥 크기만큼 자라게 된다. 성기를 가지게 되면서, 다른 운명을 가지게 될 것이다. 대뇌가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무언가에 대해 생각하거나 기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분노라는 말 없이 분노를 느끼고, 슬픔이라는 말 없이 슬픔을 느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얼굴이 있었으므로, 웃거나 찡그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랑이라는 말은 모르지만 사랑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아이는 말 없이도 무엇이든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무언가 느끼면서, 피부는 점점 붉어지고 두꺼워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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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이는 어느 날 갑자기 죽어버렸다. 그 아이가 죽기 전까지 가지고 있었던 것들. 뼈와 살, 혈액, 심장과 위, 간과 비장, 맹장, 뇌, 이마, 눈썹, 속눈썹, 눈, 입, 입술, 코와 콧구멍, 귀와 귓구멍, 손과 손가락, 발과 발가락, 솜털, 근육, 신경, 감정, 짧은 기억. 그 아이가 죽지 않고 태어났다면, 나는 그 아이의 얼굴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자라고, 변하는 얼굴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아이는 의료법상 감염성 폐기물로 분류되었다. 그 아이는 폐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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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래도록 혼자 지냈다. 자랐고, 걸었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말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네가 우리 집에 왔다. 오늘부터 네 동생이야. 너는 그날부터 내 동생이었다. 그때 너는 아직 말을 배우지 못한 상태였지만, 배고프거나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소리 내어 울 수 있었다. 트림을 하거나 재채기를 할 수 있었고, 나를 보며 방끗 웃을 수도 있었다. 너는 우리 집에서 한 달 가까이 살았다. 언젠가 너는 침대 위에 앉아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너는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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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 너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나는 늘 너를 기억하고 있었단다. 네가 다시 돌아간 이후, 우리 집에는 많은 일들이 있었어. 우리 집은 더 이상 그때처럼 잘살지 않아. 나는 더 이상 그곳에 살지 않아. 이사를 갈 때마다 집이 점점 작아지는 걸 보면서, 부모님이 점점 더 자주 싸우게 되는 걸 보면서, 가전제품과 가구에 빨간 압류 딱지가 붙는 걸 보면서, 내 공간이 줄어드는 걸 보면서, 나는 늘 너를 생각했어. 너는 이 모든 일을 겪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라고. 만약 네가 떠나지 않았다면, 아니, 돌아가지 않았다면, 이 모든 일은 우리 일이었을 테니까. 그 일은 온전히 내가 감당해야 하는 삶이라서 차라리 다행이라고. 엄마는 떠났어. 나는 아빠 곁에 남아, 아빠가 점점 망가져 가는 모습을 봤어. 네가 그 모습을 보지 못해서 정말 다행이야. 그렇지만 나는 네가 늘 보고 싶었단다. 너는 내 동생이 될 수도 있었던 아이야. 너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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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이는 자라서, 이제 더 이상 아이가 아닐 테니까. 이제 더 이상 아이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 아이는 넓고 둥근 이마를 가지고 있었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얼굴은 둥글고, 볼살이 많은 편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입술은 도톰하고, 인중이 깊었던 것 같은데. 잘 모르겠다. 정확하지 않다. 그렇지만 콧대가 높았다. 정확하다. 아니, 그조차 잘 모르겠다. 콧대가 높았던 것으로 기억되지만, 콧대가 높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콧대가 높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콧대가 매우 높았다고 말할 순 없겠지만, 콧대가 낮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눈이 아주 컸다. 그래, 옅게 쌍꺼풀이 진 눈. 누가 보아도 큰 눈이었다. 나는 그 눈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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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에게 인상을 남겼다. 너는 나보다 작았지만 너의 눈은 나보다 컸다. 너의 눈은 아주 컸지만 눈이 크기만 했던 건 아니었다. 너의 눈은 빛났다. 구슬처럼,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촉촉했다. (...) 선하고 맑았다. 깨끗했다. 예뻤다. 아름다웠다. 그러나 아름답기만 했던 건 아니었다. 나는 너의 눈을 떠올릴 수 있었지만, 너의 눈에 대해 정확히 말할 수 없었다. 너의 눈을 묘사하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묘사해 볼 수는 있다. 시도는 할 수 있다. 그러나 묘사하면 할수록, 묘사하려고 하면 할수록, 말이 너의 눈을 훼손하고 있었다. 말이 너의 얼굴을 모조리 지우고 있었으므로, 나는 되도록 너에 대해 말하지 않으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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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지우고 있었다. 물을 지우는 건 번거로운 작업이었다. 상품에 물을 뿌려 촬영할 경우, 그것을 아무리 여러 번 촬영하더라도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이미지를 구현하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물이 튀기는 방향이나 각도까지 계산할 수 없었고, 물이 상품 로고를 가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보통, 상품만 촬영한 베이스 컷과 상품에 물을 뿌려 촬영한 소스 컷을 합성하는 방식으로 이미지를 만들었다. 상품의 로고가 잘 보이면서도 상품에 닿는 물의 모양이 아름다운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나는 물을 지우면서 물의 모양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투명도를 조절하고, 물결을 정돈하면서 물결, 물결, 물결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합성을 할 때는 자연스러워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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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여름은 아주 더웠지만 겨울은 아주 추웠다. 부자연스럽게. 겨울은 점점 추워지고 있었는데, 이는 모순적이게도 지구가 점점 뜨거워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빙하가 녹아내리면서 북극의 차가운 기운이 동아시아로 쏟아져 내린 탓이라고 했다. 북극곰은 삶의 터전을 잃고, 죽어가고 있었다. 북극곰은 사라지고 있었다.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북극곰보다 빠르게 사라진 동물도 있었다. 브램블 케이 멜로미스. 그들은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모조리 사라져 버렸다. 나는 그들을 실제로 본 적이 없었지만, 어디에서든 그들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들을 실제로 본 적 없었지만, 그들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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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네가 내 물건을 마음대로 가져다 써도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먹으려고 사다 놓은 아이스크림을 네 마음대로 먹어도, 내 가방을 네 마음대로 사용해도, 내 옷을 네 마음대로 입고 나가도, 그러다가 왜 네 마음대로 내 옷을 입고 나가냐고 싸우는 일이 벌어지더라도, 좋을 것 같았다. 누군가가 너를 때린다면, 내가 너 대신 그 아이를 혼내 주었을 것이다. 나는 살면서 한 번도 누군가와 싸워 본 적이 없었지만, 그래도 너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싸울 수 있었을 것이다. 네가 아프면 약을 사다가 먹이고, 네가 다치면 병원에 데려갔을 것이다. 네가 악몽을 꿔서 무서워하면 네 옆에서 잠들고, 네가 울면 안아 주고, 네가 우울해하면 너를 웃길 말을 생각해 내고, 세상에서 가장 웃긴 표정을 지어 보였을 것이다. 끔찍이 아낀다. 나는 그 말을 이해하고 싶었다. 네가 자라는 모습도 카메라 속에 빠짐없이 담고 싶었는데, 너는 우리 집에서 단 한 장의 사진도 남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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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p의 사진을 단 한 장도 남기지 않았다. 나는 p에 대한 모든 기억, 모든 흔적, 모든 생각들을 지우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무언가를 모조리 지우려고 애쓰는 노력하는 건, 부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억지로 지울 수 있는 건 없었다. 아마 없는 것 같았다. 나는 무언가를 모조리 지우려고 애쓰면서, 무언가를 모조리 지울 수 없다는 것을 알아 가고 있었다. 기억, 흔적, 생각. 지워지고 사라지는 일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서서히 지워지고 사라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자연스럽게 지워지는 것을 억지로 지우거나,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빠르게 사라지도록 만들거나. 또는 언젠가 사라질 것을 붙잡으려고 애쓰거나. 나는 마치 이 세상 모든 것을 부자연스럽게 만들기 위해 애쓰는 인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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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컴퓨터를 좋아했다고 했다. 컴퓨터는 예측할 수 없는 행동을 하거나 납득할 수 없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너는 컴퓨터를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원인과 결과. 컴퓨터의 메커니즘은 언제나 정확해서, 너를 당황하게 만들거나 절망하게 만들지 않는다고 했다. 컴퓨터의 세계에서 어쩌다가, 우연히, 그냥, 벌어지는 일은 없다고 했다. 컴퓨터 프로그램을 다루는 일은 복잡한 일이 아니라고 했다. 아니, 복잡할 수도 있지만, 인간에 비하면 그건 복잡한 것도 아니라고 했다. 인간은 복잡하기 때문에, 너를 늘 당황하게 만들거나 절망하게 만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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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주기적으로 앱 스토어에 들어가 ‘그리핀’을 검색했다. 계정이 삭제되기 전까지만 해도, 너는 ‘그리핀’이라는 이름의 사진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하고 있었다. 그리핀은 얼굴 보정뿐만 아니라, 사진 속 인물을 자연스럽게 지울 수 있는 기능까지 갖출 예정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셀카를 찍을 때, 배경에 걸린 인물들을 지우는 일이 가능하다고 했다. 또한 단체사진 속에서 특정 인물을 지우는 일도 가능하다고 했다. 포토샵 프로그램처럼 이미 촬영된 사진을 수정하는 방식이 아니라, 찍는 순간에도 인물을 사라지게 할 수 있는 기술. 너는 사라짐을 개발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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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의 사진을 봤다. 나는 그의 얼굴을 완전히 잊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종종 카카오톡에 연락처를 추가해 그의 얼굴을 확인했다. 확인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진 속 얼굴은 내가 아는 얼굴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그의 얼굴은 점점 변하는 것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사진을 계속 보고 있으면, 그가 익숙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사진을 한참 보고 있으면, 그는 내가 기억하는 얼굴로부터 멀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사진은 사람의 얼굴을 얼마든지 왜곡시킬 수 있었지만. 나는 사진을 보정하고 합성하는 일을 하고 있었으므로,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으로부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내가 기억하는 얼굴과 사진 속 얼굴 사이에서 단 하나의 인상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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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로부터 다시 메시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있었다. 어쩌면 내가 기다리는 것은 네가 아니라 메시지였다. 너는 이미 하나의 메시지였다. 메시지는 내게 감정을 야기했다. 그런데 이름도 성별도 나이도 얼굴도 목소리도 모르는 사람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끼는 게 정말로 가능한 일일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언제나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있었다. 어쩌면 이 모든 게 p의 탓인지도 모르겠다. p와 나누지 못했던 말을 너와 나누려고, p가 내게 주지 못했던 것을 너에게서 찾으려고, 나는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이미지에 너의 메시지를 엮으면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나는 너의 메시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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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사람들은 심심풀이로 인공지능 기반의 채팅 프로그램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그것은 유행처럼 퍼져 나갔다. 밥 먹었어? 오늘 김치찌개 먹었대. 나한테는 왜 그런 걸 묻느냐고 하네. 사람들은 프로그램이 하는 말에 반응했다. 그들은 평소와 다르게 조금 신나 보였다. 프로그램은 더 많은 사용자와 더 많은 대화를 나누며 학습할수록, 더욱더 유창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된다고 했다. 배운 대로 행동하고 말하는 건, 인공지능이나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나쁜 말을 들으면 나쁜 말을 하게 되고, 좋은 말을 들으면 좋은 말을 하게 되었다. 듣는 것과 말하는 것은 같은 일이었다. 나는 채팅창을 통해 프로그램이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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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에게
디지털 메시지를 보낸다
너는 나에게 텍스트로 말한다
텍스트 텍스트 텍스트 텍스트 텍스트
너의 얼굴과 몸은 텍스트로 이뤄져 있다
너의 생각과 성격은 텍스트로 이뤄진다
너의 마음은 부드러운 피부를 조직한다
텍스트 텍스트 텍스트 텍스트 텍스트
너는 텍스트로 구성된 유기체다
텍스트만으로도 너의 얼굴을
그려 볼 수 있다
떠올릴 수 있다
나는 너의 눈과 코와 입을 상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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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상청에서는 이게 이번 겨울에 내리는 마지막 눈이라고 했다. 마지막 눈은 세상을 뒤덮을 정도로 세차게 내렸다. 그리고 해가 중천에 뜨고 나서야 그쳤다. 나는 눈을 밟으며 천천히 카페로 향했다. 눈 위에 남겨진 고양이 발자국, 또는 강아지 발자국. 신발 자국. 누군가 다녀간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상가 사람들은 점심시간을 이용해 거리에 쌓인 눈을 치우고 있었다. 누군가 경사진 도로에 소금을 뿌리고 있었다. 작은 눈사람, 아주 작은 눈사람, 사람 몸만큼 큰 눈사람, 더러워진 눈사람, 울퉁불퉁한 눈사람, 못생긴 눈사람 (...) 눈이 돌로 된 눈사람, 눈썹이 있는 눈사람. 누가 만들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회사 건물 앞에는 저마다 다르게 생긴 눈사람이 하나씩 있었다. 눈을 치우는 사람들도 눈사람은 치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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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쉽게 눈사람을 만들 수 있다. 눈을 굴려 두 개의 눈덩이를 만든 후, 하나의 눈덩이 위에 다른 눈덩이를 올리면 된다. 그리고 나뭇가지나 돌을 이용해 이목구비를 만들어 주면 된다. 눈과 코와 입만 있으면 사람이 된다. 눈과 코와 입을 모두 만들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눈만 만들어 주면 된다. 그러나 코만 만들거나 입만 만들어서는 안 된다. 눈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눈이 필요하다. 눈사람에게는 눈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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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미팅인 거 알죠? 퇴근 전까지 파일 부탁할게요!
내일 미팅인 거 알죠? 퇴근 전까지 부탁할게요. :)
내일 미팅인 거 알죠? 퇴근 전까지 파일 부탁할게요. ^^


그래, 눈이 가장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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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큰 사람을 볼 때마다, 네 생각이 났다. 너는 어릴 때 눈이 컸으니까 아마 지금도 큰 눈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는 우리가 어디에선가 한 번쯤 만났을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어디에선가 한 번쯤 만났지만,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 채 스쳐 지나갔을 뿐이라고. 나는 대학생 때 신촌역 쪽에 있는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고, 그곳은 사람들이 많이 오는 곳이니까, 너는 한 번쯤 그곳에 손님으로 오지 않았을까. 나는 매일 지하철을 타니까, 지하철에는 늘 사람이 많으니까, 우리는 한 번쯤 같은 지하철을 타지 않았을까. 만원 지하철에서 내 어깨를 밀친 사람이 너는 아니었을까. 우리는 한 번쯤 영화관에서 같은 영화를 보지 않았을까. 홍대나 신촌, 종로나 명동, 이태원, 신사나 강남 거리를 걷다가, 우리는 우연히 한 번쯤 마주치지 않았을까. 아직까지 마주친 적이 없더라도, 앞으로 계속 거리를 걷다 보면, 우연히 한 번쯤 마주치게 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너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테지만, 너는 나를 아예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나는 너를 한 번쯤 다시 만나고 싶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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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는 영원히 만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만약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오더라도, 만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네 기억 속에 내가 없다면, 나는 그대로 영원히 없어도 좋을 것이다. 너에게 나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기분이 이상해진다. 나는 너의 기억 속에 없는 사람일 것이다. 너의 부모는 너를 다시 찾았고, 그래서 너는 돌아갔다. 돌아가지 않았다면 너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동생이 되었을 것이다. 누군가 내게 동생이 있냐고 물으면, 나는 동생이 없다고 대답하면서도 너를 떠올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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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기저귀를 사러 갔었어. 나도 무척 어렸는데 말이야. 내가 네 살 때였나, 다섯 살 때였나. 아기 기저귀를 사본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거야. 엄마가 가르쳐준 대로 나는 슈퍼에서 기저귀를 샀어. 내가 혹시라도 기저귀를 잘못 샀을까 봐, 무언가 잘못했을까 봐 걱정이었어. 그렇지만 나는 침착하게 행동하려고 노력했어. 기저귀를 들고 슈퍼를 나왔는데, 그때는 그게 얼마나 무겁게 느껴졌는지 몰라. 내 몸집만 한 기저귀 세트를 끙끙거리며 들고 걸었어. 그것을 몇 번 길바닥에 질질 끌기도 했지만, 그래도 어떻게 해서든 길바닥에 닿지 않게 하려고 최선을 다했던 게 기억나. 공사장을 지나, 공터를 지나, 빌라를 지나, 저 멀리 보이는 집을 바라보면서, 나는 걸었어. 네가 있는 집을 바라보면서, 나는 열심히 걸었다고. 나는 책임감을 가지게 되었어. 어떻게 해서든 이 기저귀를 집까지 들고 가야 한다고. 너에게로 가야 한다고. 너는 내 동생이야. 너는 내 동생이야. 우리는 하나도 닮지 않았지만 그래도 너는 내 동생이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네가 있는 집을 향해 걸어갔다고. 나는 너를 의지하게 되었어. 나는 네가 있어서 집까지 갈 수 있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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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늘 너를 만나고 싶어 하면서도, 언젠가 꼭 만나자고 말하면서도, 선뜻 약속을 잡지 못했다.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바로 만날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나는 너를 만나러 걸어갈 수도 있었고, 너도 나를 만나러 걸어올 수 있었다. 그러나 끝내 우리는 만나지 않았다. 만나지 못했다. 우리는 만나지 못했지만 나는 매일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있었다. 퇴근 시간, 지하철역으로 향하며 마주치는 사람들 속에 네가 있을까. 사람들은 지하철역 입구 계단 아래로 내려갔고,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마치 지하철역 입구가 사람들을 집어 삼키고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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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 入 人 入 人 入 人


耳  目  目  耳




짧게 앞머리를 자른 사람이 지하철역 입구 안으로.
수염을 기른 사람이 지하철역 입구 안으로.



耳  目  目  耳



人 入 人 入 人 入 人

人 入 人 入 人


너는 둘 중 한 명이거나 둘 다 아닐 것이다.
너는 여성이거나 남성이거나 둘 다 맞거나 둘 다 아닐 것이다.
너는 내 나이와 같거나 그보다 적거나 그보다 많을 것이다.
너에게는 내가 모르는 이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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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또다시 앱 스토어에 들어갔다. 그게 너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애플리케이션이 출시되면, 나는 개발자나 개발 팀의 이름을 알 수도 있을 것이다. 운이 좋다면 연락처를 알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연락처를 알게 되어도 나는 너에게 연락하지 못할 것이다. 연락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연락처 같은 건 중요하지도 않았다. 아마 그럴 것이다. 나는 단지 그리핀을 보고 싶었다. 그리핀의 로고를 보고, 그리핀의 기능을 확인하고, 그리핀을 다운로드 받고 싶었다. 아니, 사실 그리핀 같은 건 중요하지도 않았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그리핀을 검색했을 때 그리핀이 검색되는 것. 내가 바라는 건 그뿐이었다. 정말 그뿐이었다. 너는 사진을 찍는 순간에도 무언가를 사라지게 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었으니까. 너는 그리핀을 개발하고 있었으니까. 네가 정말 있다면, 언젠가 그리핀은 출시될 것이다. 네가 정말 있다면, 네가 정말 있다면. 나는 자음과 모음을 정확히 확인하며. ㄱ, ㅡ, ㄹ, ㅣ, ㅍ, ㅣ, ㄴ. 키보드를 누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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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너에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냥, 별다른 의미 없이, 한 번쯤. 내게도 언젠가 잠시 동생이 있었다는 것을, 아니, 내 동생이 될 수도 있었던 아이가 있었다는 것을. 너는 언제나 내 이야기를 잘 들어줬으니까. p에게 하지 못했던 이야기도 너에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모두 다 지난 일이 되었지만, 사실 지금껏 혼자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 너무 많았다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간절히 필요했다고. 아빠는 술에 의지했고, 내게는 의지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고. 외롭다고 말하면 정말로 외로워질까 봐, 나는 외롭다는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고. 그래도 너에게는 어떤 말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런 논리 없이, 두서없이. 동생에 대한 이야기도, 동생에게 하고 싶었던 말까지도. 계정이 삭제되기 전까지, 나는 너에게 무슨 말이든 말할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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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걸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눈사람이 사라져도 눈사람을 찾는 사람은 없었다. 기온이 오르면서 눈이 녹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눈이 녹으면 당연히 눈사람도 녹아서 사라진다. 서서히 사라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지난 3년 동안 이 근방에서 일했고, 매일 이 거리를 걸으며 조금씩 변하는 풍경을 보았다. 눈 없이. 일상이 지속되고 있었다. 눈 없이도. 일상은 지속되고 있었다. 오늘도 커피를 마시려고, 커피를 생각하면서. 나는 가고 또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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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오셨네요. 카페 직원이 처음으로 내게 말을 건넸다. 나는 카페 직원의 이름을 모르고, 직원도 내 이름을 모르지만, 우리는 짧게 몇 마디 대화를 나눈다. 카페 직원은 큰 눈을 가지고 있다. 나는 이곳에 처음 왔을 때부터 그것을 주시하고 있었다. 내 동생이 될 수도 있었던 아이는 지금 딱 이정도의 나이가 되었을 것이다. 나는 그의 눈을 보며 커피를 주문한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 커피를 기다린다. 약속. 기다린다. 그때 카페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온다. 어제 본 그 사람이다.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앉을 자리를 찾거나 누군가를 찾고 있을 것이다. 그는 주문을 하지 않은 채, 적당한 자리를 골라 앉는다. 아무래도 누군가를 기다릴 작정인가 보다. 나는 그를 기다리지 않았지만, 그를 기다린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인다. 그는 내가 아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다시, 카페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온다. 또다시, 카페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온다. 그는 문이 열릴 때마다 문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그는 누군가를 절실히 기다리고 있다. 나도 그처럼, 누군가를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이름은 모르지만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을, 이름은 알지만 더 이상 알고 싶지 않은 사람을, 얼굴은 알지만 이제 더 이상 알아볼 수 없는 사람을, 애초에 알아볼 수조차 없는 사람을, 나는 기다릴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기다리지 않았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으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따뜻한 커피를. 기다리지만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주문하신 커피 나왔습니다. 눈이 큰 직원이 나를 부른다. 그가 고개를 돌리며 반갑게 손을 흔든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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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겨울은 사라졌다. 자연스럽게. 겨울은 완전히 사라지고 낮은 완전히 길어져서 퇴근길에도 밝게 떠 있는 해를 볼 수 있었다. 공사 중인 아파트. 사거리. 신호대기 중인 자동차들.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 배스킨라빈스. 올리브영. 문을 열고 상가를 나오는 사람들. 고등학교. 정문을 통과하는 교복 입은 학생들. 자전거를 타고 그들 사이를 빠르게 지나가는 학생. 철로를 따라 피어난 풀들. 낡은 벽. 이어지는 낡은 벽. 콘크리트 벽. 벽 뒤로 나무. 나무. 나무. 조금씩 잎이 돋기 시작하는 나무들. 흰 목련나무. 나무. 노란 개나리. 개나리. 개나리. 개나리가 예쁘게 피어 있다. 풍경은 지하철 창문 밖으로 빠르게 지나가고, 사라지고, 사라지고 있다. 사라지는 풍경을 찍으려고 휴대폰을 꺼낸다. 창문을 향해 휴대폰을 들어 카메라를 켜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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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 속에 보이는 나. 나는 풍경 사진을 찍기 위해 후면 카메라로 설정을 바꾼다. 전환된 화면 속에서 풍경은 지하철 창문 밖으로 빠르게 지나가고, 사라지고, 사라지고. 개나리. 개나리. 개나리. 내 시선은 카메라 화면에 고정되어 있고. 가로수. 가로수. 가로수. 건물. 가로수. 건물. 가로수. 건물. 가로수. 고정된 시선 속에서 풍경은 지나가고, 사라지고, 사라지고. 빠르게, 더 빠르게. 그것은 끝없이 지나가고 사라지고. pixelpixelpixelpixelpixelpixelpixelpixelpix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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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이제
작가소개 / 서이제

2018년 중편소설  「셀룰로이드 필름을 위한 선」으로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km/s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문장웹진 2021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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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와 황새

기계와 황새 양선형 너는 기계, 껍데기가 회색인 오토마타. 너는 네가 저질렀던 끔찍한 죄의 내용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너는 기나긴 시간 동안, 어쩌면 인간으로 살았던 시간을 초과할 만큼 오랫동안 작동했다. 너는 네게 주어진 원통형의 한계 속에 틀어박혔다. 그것이 너였다. 배터리와 부품이 망가지면 너를 수리하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도착했고, 너는 네 작동을 중지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음은 물론 작동을 중지하고 싶은 욕망 또한 갖지 않았다. 그것은 불가능했다. 형벌이 단호하게 집행되었고, 너는 눈을 감았으며, 숨이 끊어지기 직전 너는 이후로 반복할 수밖에 없는, 줄곧 반복해야만 하는 한 줄의 기억 타래를 선택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인간이었던 시절의 작은 파편으로서 오토마타로 개조된 네 머리통 안에 각인될 예정이었다. 누군가 드러누운 네 팔뚝에 주사를 놓았다. 나른한 의식은 감은 눈 속으로 어른거리는 박쥐 모양의 환영과 함께 서서히 사라졌다. 기억 타래는 네가 과거에 살과 피를, 얼굴과 자의식을 가졌던 한 명의 인간이었음을 의미했다. 인간인 너와 오토마타인 너를 잇는 개체로서의 동일성을, 속죄를 끝마치고 형기가 만료될 때까지 네가 감당해야만 하는 과오와 책임의 연속성을 말이다. 따라서 기억 타래는 네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로 인해 극형에 처해진 바로 그 범인임을 증명하는 전자 신분증이자 영혼의 낙인으로 비유될 수 있었다. 네가 죄수임을 공인하는 사법 기관의 서명, 특수한 일련번호, 기계의 머리통 안쪽에 새겨진 자아의 조각, 네 유한하며 어리석었던 시절의 잔류 데이터. 그러나 너는 네가 다른 기억들 가운데 하필이면 이 기억 타래를 골랐던 이유를 떠올릴 수 없었다. 그것을 떠올릴 수 있는 네가 없었기 때문이다. 무의미한 기억들 가운데 이 기억만이 각별했기 때문인지, 각별했던 기억들 가운데 이 기억만이 무의미했기 때문인지. 너는 카메라처럼 무감하게 눈을 떴으며, 끊임없이 부글거리며 딸깍거리는, 앵앵거리고 번쩍거리는 전자 신호의 포로가 되어 있었다. 네 머리통 안에는 한 줄의 기억 타래만이 남아 있었다. 너는 기계, 껍데기가 회색인 오토마타. 너는 정확하게 움직이는 효율적인 무력함이었고, 그 무력함 속을 공회전하는 짤막한 분량의 이미지 찌꺼기였다. 너는 스크린을 향해 강제로 조향된 인형의 냉담하며 거짓된 눈알처럼 기억의 이미지를 주시했고…… 주시하지 않았으며, 사나운 파도처럼 우윳빛으로 들이닥치는 심신상실이 환하게 빛나는 스크린 주위를 에워쌌다. 네 머리통 안의 암실에서는 언제나 한 줄의 기억 타래가 상영되었다. 너는 기억 타래를 출력하는 영사기이자 영사막이자 영사기사였으며, 성자와 성부와 성령과…… 세 가지 작동인 사이를 그치지 않고 순환하는 자율적인 엔진에 가담하고 예속된 상태였으나, 대부분 네 기억의 관객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곳엔 네 기억의 관객일 수 있는 네가 없었기 때문이다. 너는 너의 ON이었다. 너는 네 신경망에 폭포처럼 흐르는 전류를 자발적으로 차단할 수 없

  • 관리자
  • 2026-02-01
도래의 얼굴

도래의 얼굴 최정나 한 남자가 길을 걷는다. 남자의 이름은 웅현이다. 웅현은 은행나무길 한가운데로 들어선다. 노랗게 물든 황금 터널 안에서 잎사귀 사이로 비치는 햇빛을 본다. 바람이 일자 은행잎들이 햇살을 따라 휘돌다가 천천히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웅현은 꽃잎처럼 흩날리는 노란 잎사귀들을 휴대폰 카메라에 담는다. 길을 걷는 사람들이 카메라에 포착된다.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들려오는 바스락거리는 소리, 그 위로도 햇살이 부서진다. 바람을 받은 잎사귀들이 다시 허공으로 번져 오르다가 방향을 살짝 틀어 다른 데로 이동한다. 웅현은 눈에 비친 풍경을 화면에 담아보려고 하지만 잘되지 않는다. 웅현은 얼마 전 도래와 이별했다. 그래서 길에서 스치는 사람이 모두 도래로 보인다. 도래가 홀로 걷고, 도래가 누군가와 함께 걷고, 떨어지는 낙엽을 올려다보고, 사람들의 발걸음을 내려다보고···. 도래는 출몰하듯 나타나 웅현 곁을 스쳐 지난다. 옆에 있는데도 먼 얼굴, 도래가 자신을 불러내는 건지 자신이 도래를 불러내는 건지 웅현은 알 수 없다. 이윽고 수많은 도래가 다른 사람들의 얼굴로 변한다. 도래와 함께 떠난 얼굴들, 이름들이 한꺼번에 떠올라 웅현은 하늘을 본다. 사랑을 놓쳤니? 황금빛 사이로 겹쳐 들려오는 그들의 목소리에 웃음이 배어 있다. 왜 웃는 거지? 웅현은 누군가 보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린다. 놀림 받은 기분이다. 하지만 웅현은 그들이 남겨진 자의 무게를 감당하지 않아도 되니 오히려 다행이라고 여긴다. 그렇더라도 역시 함께 있는 편이 나을 거라고 생각을 바꾸고, 곧이어 떠난 이유를 알 수 없어 먹먹해진다. 나를 이해해 줘···, 도래의 마지막 말은 웅현의 머릿속에서 자꾸만 변형되다가 서서히 형태를 찾는다. 빛은 따뜻하고 세상은 노랗게 물들었지. 황금빛 계절이거든. 웅현이 말을 건넨다. 빛의 터널을 나오는 웅현의 눈에 그들이 비쳐 든다. 도래가 없는 집으로 돌아가는 웅현의 발걸음은 더디다. 노란빛이 주황빛으로 물들고 거리는 붉은빛에 휩싸인다. 사랑해!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여자의 커다란 목소리가 웅현의 귓가에 닿는다. 여자는 붉게 물든 나무 아래 붉은 낙엽을 밟고 서 있다. 이어 들려오는 맞은편 남자의 웃음소리, 여자가 낙엽을 그러모아 허공에 뿌린다. 그러고는 다시 외친다. 사랑한다고! 붉은색이 그들 주위로 날아올라 빛처럼 흩어진다. 여자는 대답을 들을 때까지 소리칠 기세지만 남자는 계속 웃기만 한다. 웅현은 그들이 붉은 구체 안에 있는 듯하다. 그 순간 저 멀리서 나도 사랑해! 하고 외치는 목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번져온다. 연인이 낯선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웅현도 소리 나는 데로 시선을 돌리지만 목소리의 주인은 보이지 않고 조금 전까지 머물러 있던 은행나무길이 보일 뿐이다. 웅현은 가벼운 듯 장난스러운 남자의 목소리를 아는 듯하다. 웅현은 도래와 함께 걷던 길을 홀로 걸으며 그녀와 함께였던 어느 날을 떠올린다. 그러자

  • 관리자
  • 2026-02-01
아직 이른 마음

아직 이른 마음 박하신 섬으로 내려가는 길은 무성했다. 초여름을 맞는 버드나무 녹음이 무성했고, 고속도로에 바닷가 갯강구들처럼 달라붙은 자동차 정체 행렬이 무성했고, 하늘에 모둠 지은 뭉게구름 떼가 켜켜이 무성했다. 구름으로 말하자면 경부 고속도로 운전자들의 한숨이 한데 모인 것 같은 풍성함이었고 눅진함이었다. 사이사이 파고드는 여름 볕은 쨍쨍하기만 해서 자동차 갯강구들이 아지랑이 같은 김을 뿜어내며 느릿느릿 익어 가고 있었다. 올여름 재해에 가까운 폭염이 찾아온다고 했다. 창문을 내리고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담배를 끊어야 할 텐데. 지난 건강검진에서 의사는 금연을 강한 어조로 권고했다. 그게 벌써 3년 전이다. 라디오에선 올해 메탄가스와 일산화탄소 배출량이 다시 한번 고점을 돌파했다는 소리가 들렸다. 고속도로 솥단지를 가득 메운 자동차 행렬을 보니 이해가 안 갈 바도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내 차도 노후 경유차라며 폐차를 권고하던데··· 때마침 창밖에서 도로변 축사 냄새가 매연에 엉킨 채 훅 끼쳤다. 과연 오존을 뚫어 버릴 것 같은 유독함이다. 이게 다 나 때문인가. 그렇다고 하기엔 앞차 배기의 색깔도 심상치 않다. 그래, 어차피 다 같이 찜 쪄지는 마당에 잘잘못은 논하지 말기로 하자. 이미 벌어진 일과 잃어버린 것. 재해에는 고민한들 거스를 수 없는 면이 있고 그렇기에 말 그대로 재해인 게 아닐까. 그러니까, 이건 암 같은 거다. 분명한 업보지만 돌이킬 수 없는. 그런 건 받아들이는 편이 낫지. 그래, 평일 오전부터 고속도로에 갇혀 소들 방귀나 맡고 있게 된 것도 말하자면 재해 같은, 암 같은 소식 때문이었다. 그건 폭발에 대한 것이었다. 동선의 묘지가 폭발할 거라는 소식을 들은 건 이른 열대야에 허덕이던 어제저녁이었다. 낯선 번호로 수차례 전화가 걸려 온 것인데 상대방은 대뜸, 동선 씨 친구분 되십니까? 물었다. 그렇다고 말하자 그는 자신을 매봉도 수호행동위원장이라고 간략히 소개했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 ―틀림없이 폭발합니다··· 땅속에 매설된 니트로글리세린과 질산암모늄 수천 킬로그램이··· 당신 친구의 묘지를 박살 내 버릴 거라구요···. 상대방은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고 했다. 거대한 세력이 묘지를 파괴하기 일보 직전이라며 호소했다. 그것도 폭약을 심고 아주 섬을 통째로 날려 버린다고 했다. 그는 동선의 묘소를 지키고 싶다면 나더러 당장 매봉도로 달려오라고 촉구했다. 여기··· 당신처럼 무언가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습니다. ―내일까지···. 가능하면 내일까지 와 주십시오···. 불가능해도 내일까지 오십시오. 체념하지 않는다면··· 지킬 수 있습니다. 모

  • 관리자
  • 2026-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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