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다비드
- 작성일 2023-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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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다비드
임순옥
바람이 불 때마다 소나무 꽃이 불 켠 양초처럼 서서 가루를 흩뿌렸다. 노랗고 분분한 것이 보이지 않는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책방 곳곳에 악착같이 흔적을 남길 것이다. 마스크를 쓰고 수건에 물을 적셔 책꽂이와 창틀을 닦아냈다. 눈이 따끔거렸다. 각막을 닦아내면 노란 가루가 묻어날 것 같았다.
미닫이문을 열었다가 닫았는데 신경을 끊어 놓을 것처럼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수꽃이 소스라쳐 송화 가루를 무더기로 날려버렸을지 모르겠다. 근처 씽크대 공장에서 합판을 자르는 전기 톱날이 내는 소리였다. 씽크대 공장에 육십이 넘은 남자와 젊은 인부가 일하는데 이 달부터 오가는 길에 인사를 하고 지낸다. 가루 날리는 수꽃들처럼 이들도 악착같이 톱날을 드는 것이다.
늙은 남자가 이틀 전 어둑해질 무렵, 책방에 와서 손주 녀석이 게임을 좋아하는데 읽을 만한 책이 있냐고 물었다. 한번 같이 오라고 했더니 같은 동네에서 일 년 넘도록 지켜봤는데 오전에 책방 문 여는 걸 못 봤다며 퉁박을 놓았다. 씽크대든 책이든, 손님이 있건 없건, 물건 파는 집은 부지런해야 한다고 연설을 늘어놓았다. 아르바이트 하느라 오후 한 시에 문을 연다 했더니 무슨 일을 하는지 물었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슬쩍 대답을 피했다. 노인이 넌지시 가게 세를 물었다. 노인의 목소리가 전기 톱날이 내는 소리처럼 카랑했다.
요즘 나는 오전에 의류 쇼핑몰 건물 청소를 하고 있다. 오전 6시 출근해서 1, 2, 3층 매장에 청소기를 돌리고 밀대로 바닥을 닦는다. 계단과 엘리베이터, 화장실 물청소까지 하고 나면 겨울에도 작업복 상의에 땀 얼룩이 졌다. 계단 신주를 닦고, 바닥에 붙은 껌을 벗겨낼 때는 브래지어를 탈의한다. 한 번 벗고 보니 땀 차고 옥죄는 속옷을 고집할 까닭이 없었다. 10시까지 청소 일을 마치면 책방에 와서 샤워를 하고 소파에 누워 눈을 붙인다. 간단한 점심을 먹고 한 시에 책방 문을 연다.
그날 매출은 2만 2천 원, 팔린 책은 노인이 고른 동화책 두 권이 전부였다. 매출 0이 될 뻔한 날 처음이자 마지막 손님이었다. 덕분에 씽크대 공장 노인과 제법 길고 내밀한 이야기를 나눴다. 노인은 이 동네 가게 세가 싼 편이라 했다. 그렇죠. 그래서 인수할 수 있었죠. 나는 속엣말을 했다. 노인은 꼿꼿한 자세로 책방을 휘 둘러보더니, 부엌까지 딸린 1층 상가가 보증금 3천만 원에 월 35만 원이면 거저라고 했다. 거저라뇨, 대출금과 월세 때문에 목이 메는데. 나는 그 순간 진짜 목구멍에 찰떡이라도 낀 것 같았다. 딸 같아서 하는 이야기니 고깝게 듣지 말라며, 그래도 책 팔아서 운영비와 월세가 빠지고 생활비가 나와야 장사를 하는 거다, 아니면 빚더미에 앉기 십상이니 큰 손해 안 볼 때 접는 게 상책이라 했다. 생선가게는 생선이 귀한 데서 하고 책장사는 책이 귀한 데서 해야지, 책방 코앞에 도서관이 생겼는데 장사가 되겠냐고 했다. 그건 모르시는 말씀이라고 냉큼 받아쳤다. 도서관에서 책 대출 하는 사람들이 책방에 와서 책을 사더라고 말이다. 사실 길 건너편에 도서관과 작은 공원이 생기고 나서 매출이 늘었다. 쥐꼬리보다 좀 더 늘어난 매출 때문에 2년 전에 접으려던 책방에 미련을 못 버리고 오늘까지 온 거다. 노인은 손주 놈이 책을 읽으면 커서 좀 나은 일을 하지 않겠냐고 했다. 아이 엄마는 홈쇼핑 전화 받는 일을 하는데, 학교 마치면 할멈이 손주를 돌본다 했다. 젊은 사람들이 사느라 욕본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얹어 주었다. 책 두 권을 들고 책방을 나가는 노인의 희끗한 머리카락이 어스름 속에 묻힐 때까지 보고 서 있었다.
전기 톱날소리가 닫힌 유리문 너머에서 희미하게 울렸다. 단단한 합판이 잘려 나가고 나무 먼지가 날리고 노인은 허리를 숙여 단면의 아귀를 맞출 것이다. 내 삶의 방책은 무엇일까? 아귀를 맞춰 상책을 딱딱 계산할 수 있을까? 상책이라고 생각해 한 걸음 내딛으면 예기치 않은 복병이 나와 다시 허방으로 나를 끌고 갔다. 경험 많은 동네 노인의 눈에 이 책방이 걱정스러운 하책으로 비쳤나 보다. 자려고 누워 머릿속으로 수십 번 책방을 접었다 펴고 새로운 계책을 물었다. 이곳을 붙들고 있는 이유가 뭘까? 아파트 단지를 낀 것도 아닌, 오래된 주택이 난잡한 골목에 ‘바다가 보이는 책방’이라니. 씽크대 공장 노인도 그랬고, 책방에 처음 온 사람들은 바다가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글쎄요. 동네엔 바다가 없어요.”
내 눈동자는 뭔가가 끌어당기기라도 하듯 옆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없는 바다를 찾기라도 하듯 난감한 표정에 책방에 온 사람들은 알아서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책 속에 바다가 있잖아요.”
책방 이름도, 위치도, 하루 매상도 상책과는 거리가 있지 싶었다. 노인의 말이 뇌리에 남아 어딘가가 씁쓸해졌다.
주방으로 가서 핸드밀에 원두를 넣었다. 손잡이를 돌리자 원두가 투둑거리며 파쇄되었다. 한번 부서진 알갱이는 좀 더 부드럽게 손잡이를 돌아가게 했다. 모양의 변화가 손으로 만져질 것 같았다. 고소한 냄새가 올라왔다. 월요독회 때 콜리 쌤이 가져다준 원두다. 자메이카의 화산흙과 안개 속에서 재배된 원두라 했다. 안개를 머금은 커피 맛을 내 혀는 잊지 않았다. 원두가 물을 빨아들이면 쓴맛이 옅어져 편안한 커피가 된다고 했다. 서우 언니가 해준 이야기다. 그 시절 나는 잠을 못 자서 인스턴트커피조차 마시지 못했다. 하지만 서우 언니가 내려 준 커피는 감은 눈을 다독여 주었다. 생각해 보면 커피만이 아니었다. 언니와 함께 마시고 먹을 수 있어서 그 시간을 넘길 수 있었다. 그녀는 커피 빛깔의 얼굴색을 가진, 어깨가 벌어진 남미 여성을 닮고 싶다고 했다. 나는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스쿠터를 타던 언니를 닮고 싶었다. 콜리 쌤은 서우 언니를 처음 봤을 때의 나만큼 어린데, 그 시절의 나는 멜랑콜리보다 많이 우울했다. 커피 한 잔을 마시는 동안 아무도 책방 문을 밀고 들어오지 않았다.
전화기 울리는 소리에 생각에서 빠져 나왔다. 단골 b다. 전에 말한 에세이 작가가 북토크를 하는데 동네 책방에서 책을 구입하기로 했단다.
“여덟 권 주문요. 월요일에 찾으러 갈게요.”
b의 목소리는 담백했다. 고맙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b는 언젠가부터 책방 주인장 못지않게 책 파는 데 영혼을 담고 있다. 책 주문서를 넣는데 나도 모르게 입 꼬리가 올라갔다.
이 책방을 시작할 때는 나도 동네 큰길에 있는 화재보험 고객센터에서 일했었다. 퇴근길에 문 닫는다고 내놓은 책방을 보고는 뭐에 씐 것처럼 달려들었다. 은행대출로 전세 보증금을 만들고, 보험을 해약해 권리금을 맞췄다. 두 해째 책방 수익은 고스란히 운영비로 쓰였다. 수익이 적으면 새 책을 안 들이고 건너뛰었다. 오전 근무로 돌린 고객센터 알바비로는 대출금과 월세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나중엔 주인에게 양해를 구해 월세를 전세금에서 까고 살았다. 생활비는 아무리 줄여도 적자였다. 그때 책방을 접으려 했는데 콜리 쌤이랑 b와 몇몇 단골들이 그 달치 매출을 훌쩍 올려놓았다. 그 맛에 속아서 2년을 더 계약한 거다.
화재보험 고객센터가 건물 청소보다 돈은 나았던 거 같다. 이야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오전에만 “사랑합니다, 고객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를 수없이 반복하고 나면 책방에서도 “사랑합니다, 고객님.”이 자동으로 나오는 게 웃기지도 않았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대일로 마주하는 감정들은 거북했다. 원하는 배상처리가 안 돼 문의를 한 경우에는 이미 불쾌감을 안고 전화를 한 경우가 많았고 상담원은 매뉴얼 이상의 권한이 없기 때문에, “죄송합니다, 고객님.”이라는 구간 반복만 하게 된다. 여차하면 상사 바꿔라, 내가 호구로 보이느냐로 시작되는 십 원짜리 욕을 덮어썼다. 하루 네 시간 근무에도 채워야 하는 콜 수가 있고 성과율이 그래프로 표시되었다. 오전 근무로 바꾼 뒤로 팀장이 신입과 나를 한 세트로 불러 실적률을 따지며 연장 근무를 재촉했다. 결국 사표를 썼다. 일주일을 쉬고 건물 청소 일을 구했는데 마음은 오히려 나았다. 바닥에 묻은 때가 지워지고 일회용 컵들이 분리수거 되고, 땀을 한바탕 쏟아내고 나면 건물을 나설 때 홀가분했다.
- 신재야.
카톡 메시지를 열었다.
- 시간 날 때 남목으로 한번 와라.
서우 언니다.
- 전화 안 받아서 걱정했어. 무슨 일?
- 안 본 지 오래됐잖아. 할 말도 있고.
- 학교 나가고 있지?
- 응. 일요일 괜찮아?
서우 언니는 알까? 내가 그 이후로 남목에 한 번도 가지 않았다는 걸. 언니를 만날 때도 U시 시내에서 만났다. 일요일에 언니네 집에 가기로 했다. 남목에 가는 건 거의 20년 만일 거다. 지난해까진 페이스북을 통해 언니 근황을 읽고 있었다. 하지만 최근 몇 달간은 연락이 끊어졌고, SNS에서도 소식을 접하지 못했다. 중등 교사 일이 순조롭지 않은 것 같았다. 학교에도 정교사, 기간제 교사, 방과후 교사, 아르바이트 등 고용형태와 계약 내용에 따라 처우가 달랐다. 그곳에서도 차별과 차별에 익숙한 시선들이 있었다. 서우 언니는 기간제 교사 노동조합 일을 했다.
그녀를 처음 본 날, 지하 책방에서 술에 취해 쓰러져 잤을 것이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니 언니는 없고, 책방 민들레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언니는 전날 어떤 일이 있어도 새벽 4시에 일어나 스쿠터를 타고 신문배달을 한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다녀올게, 그녀가 배달 일을 하고 오는 동안 나는 아침 장을 봤고 음식을 했다. 생선을 구웠고, 양배추 쌈을 해 먹었다. 같이 먹는 밥이 맛있다는 것을 알았고 노동자 문학과 평화로운 삶을 이야기했었다. 밥 먹는 탁자 유리 밑에는 세계지도가 끼워져 있었다. 어디에 가고 싶은지 물었던 것 같다. 언니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지도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김포공항에서 멕시코 칸쿤을 거쳐 쿠바 아바나에서 석양을 보고 산타클라라의 체게바라 박물관을 들르면 좋겠다고 했다. 나오는 길에 마호비치에서 해수욕을 하자고 했다.
“지리 교육을 공부했는데 교생 실습 나가 보고 학교와 내가 안 맞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어. 숨이 막혔거든. 이 길로 가면 죽겠구나 해서 돌아섰어.”
이왕 돌아서려고 했다면 멀리, 다시 학교로 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언니가 결혼을 하지 않고, 내가 언니 곁을 떠나지 않고, 민들레 책방에서 책을 읽고, 카리브 해의 석양을 보러 갔다면 어땠을까. 하지만 그때 우리가 마음껏 그릴 수 있었던 건, 그것들이 붙잡을 수 없는 구름 같은 거라는 걸 어렴풋이 알았기 때문이었다.
책 주문서를 정리해서 보내고 출판사별로 급한 곳만 대금 정산을 했다. 다섯 시가 되자 어김없이 문을 긁어댄다. 노랑 여사가 앞발을 들고 서서 유리문에 얼굴을 갖다 대고 있다. 귓바퀴가 찌그러졌다. 문을 여니 잽싸게 안으로 들어와 8평 책방 안을 한 바퀴 돌아 내 발등에 배를 대고 누웠다. 오전에는 어디를 다녀왔는지, 꽃구경을 다녀왔는지, 팔자가 좋다 하며 쓰다듬어 주었다. 독서 모임에 수의사를 꿈꾸는 청년이 있는데 노랑 고양이를 보더니 열 살이 넘어 보인다고 노랑 여사님이라고 불러댔다. 노랑 여사는 고객센터 일할 때도 해 저물 때쯤 책방을 방문했다. 발등을 부비며 안부를 물었다. 입에 붙은 ‘반갑습니다, 고객님.’보다 노랑 여사와 떠드는 게 더 말 같았다. 나는 노랑 여사의 쭈그러진 귀를 펴고 사료를 부어 주었다. 사료 알갱이 씹는 소리와 물 넘기는 소리에 잠깐 평화가 내려앉았다. 그러나 여사의 꽃놀이 덕분인지 눈이 따갑고 금세 눈물이 났다. 안약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서늘한 기운이 들었다. 만나면 이야기를 꺼내 볼까, 생각이 머리를 쳐들었다. 마음이 흔들렸다. 구차하더라도 서우 언니에게 말해서 수가 생긴다면 좀 뻔뻔스러워지고 싶은 마음이었다. 여사는 한 번씩 뒤돌아 내가 서 있는지 확인하고 다시 알갱이를 씹었다.
꽃도 잎사귀도 아닌 것이 인도에 잔뜩 흩어져 있었다. 자세히 보니 벚꽃이 지고 난 뒤에 내려온 꽃받침이었다. 꽃송이 수만큼 꽃받침도 나무에 달려 있었을 것이다. 꽃받침이 눈에 들어온 적은 없었다. 일제히 떨어져 바닥을 불그스레 수놓았다. U시는 B시보다 기온이 2도가 낮아 소나무는 이제 꽃대를 세우고 있었다.
터미널에서 시내버스로 갈아탔다. B시에서는 거리 풍경을 볼 새 없이 지하철로 이동을 했는데 U시에는 지하철이 없다. 단선인 큰 도로가 네 개 방면으로 펼쳐져 길이 단순하다. 조선, 자동차, 화학 공장이 동구 북구 남구에 하나씩 자리 잡고 있어 출퇴근 시간을 피하면 도로가 정체되는 일이 없다.
창밖으로 자동차 공장의 담벼락이 길게 이어졌다. 다른 도시 사람들은 자동차 공장의 퇴근 시간을 목격하면 입이 벌어졌다. 동구 남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낮 동안 도시가 조용하다가 퇴근 시간이 넘으면 골목과 술집, 식당마다 작업복이 벅적거렸다. 내가 다닌 여고에는 다른 도시에서 살다가 새로 부임한 선생들이 많았다. 국어, 영어, 생물, 가정 선생님이 하나같이 이 도시에 처음 왔을 때 횡단보도 앞에서 얼마간 기막힌 얼굴로 서 있었다고 했다. 학교 퇴근 시간과 공장 퇴근 시간이 맞물려 쏟아져 나오는 회색의 작업복 물결을 본 것이다. 요즘에는 작업복 색깔이 다양해졌고, 퇴근 시간에 고급 자전거 복장이 쏟아져 나온다지만 그 시절에는 막무가내 회색이었다. 아파트도 옷도 둘러싼 공기조차도. 안에 사는 사람들은 일상적인 생활인데 밖에서 온 사람들에게는 진풍경이 되고 말았다. 이 장면을 이야기하는 여고 선생님들의 표정은 저마다 달랐지만 공통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언젠가 SF 영화에서 본, 외계 행성에 도착한 지구인들의 표정이 그때 선생님들의 눈빛을 불러냈다. 미지의 행성에 도착한 지구인들은 창밖으로 우글거리는 낯선 생물체들을 보고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자신보다 하등하게 여겨지는 어떤 존재들을 향해 모멸의 눈빛을 보낸다. 그 눈빛이 교단에 선 선생님들이 이 동네를 대하는 태도와 닮은 데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눈빛이 내 이마에 와 달라붙었다는 걸 알았다. 나는 그들의 눈으로 익숙한 동네를 다시 보았고, 작업복이 하등한 존재의 표식처럼 여겨졌다.
버스가 남목 고개를 넘어서자 고만고만한 아파트가 들어서 있고 그 옆으로 밀집한 조선소 공장이 보였다. 대규모 컨테이너 건물을 여러 개 붙여 놓았는데 얼핏 보이는 안은 낮에도 형광등 불빛이 켜져 있었다. 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나는 들어가 보지 못했다. 작업자들은 그날의 노동을 바깥사람들에게 시시콜콜하게 말하지 않았다. 같은 노동을 한 사람들끼리 퇴근 후 술자리에서 다 비워내고 집으로 가는 건지도 몰랐다. 아빠도 나도 서로에게 입이 무거웠다. 공장 너머에는 바다가 있을 테고 그 옆에 낮은 산도 있을 것이다. 보지 않아도 그려낼 수가 있다. 나고 자란 동네니까. 마른 미역 같은 감정들이 물을 머금은 듯 부풀어 올랐다. 기억들이 바닷물처럼 밀려왔다.
골리앗이 형체를 드러냈다. 붉은빛이 눈 속에 들어오자 눈동자가 어느새 바깥으로 돌아갔다. 앞을 보려고 하는데 내 눈은 한사코 피했다. 눈이 움직이는 이유를 마음이 짚어내지 못했다. 두려움 때문일까? 여태 이곳에 오지 않은 이유가 저것을 보기 싫어서였을까? 가렵지도 않은데 손톱을 세워 팔을 긁어댔다. 눈을 감아버렸다. 사팔뜨기 눈과는 아랑곳없이 골리앗은 버티고 섰을 것이다. 수그린 적 없는 어깨, 당당한 직선으로. 밀집한 아파트와 민들레와 길고양이와 그것을 닮은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다.
오래전, 버스 의자에 앉은 어린 나와 옆에 서서 키를 낮추며 창밖 구조물을 가리키던 아빠의 목소리가 있었다.
“신재야, 저게 뭔지 알아?”
“주황색 거인? 나는 저 거인이 보이면 이제 집에 다 왔구나 하고 생각해.”
“골리앗에는 바퀴가 달려 있단다. 바위보다 무거운 철판을 싣고 움직이지. 크레인이 철판을 들어 올려서 더 크고 무거운 곳에 가져다 붙인단다. 네 말대로 거인이야.”
그 시절 아빠에게도 골리앗 크레인이 대단해 보였나 보다. 나중에 아빠가 이어서 이야기를 들려준 것 같다. 처음엔 철판 조각을 들어다 어디에 갖다 붙이는지, 뭐가 될지 모른 채 일을 했다고 한다. 나는 그 말에 이제야 고개를 끄덕인다. 나도 주어진 것 외에는 알지 못했으니까. 자신이 하는 일의 방향을 알고, 외부의 시선으로 전체를 보는 건 노동자의 생리가 아니었다. 나는 화재보험을 청구하는 고객에게 필요한 서류를 전달하는 것, 너머의 생각과 판단을 하지 않았다.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고객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죄송합니다, 고객님.’이었다.
아빠는 용접봉을 들고 불꽃을 튀기며 철판을 이어 붙였다. 여러 달이 지나서야 그것들이 합체된 몸을 볼 수 있었다고 했다. 철판이 합체된 대형 구조물은 도크에 바닷물이 들어왔을 때 떠올랐다. 도크 문이 열리자 배는 먼 바다로 나갔다. 그 순간을 이야기하던 아빠는 흥분으로 목소리 톤이 올라갔다. 더 시간이 지난 후에 나는 그날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난데없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고 보기에 좋았다는 성경 구절을 생각했다. 좀 야릇했다. 조선소 노동자가 그들이 만든 대형 선박이 바다로 가는 걸 봤을 때 생긴 감정이 어떤 것일지. 건설 노동자가 하늘로 솟은 아파트를 보면서, 작가가 자신이 채워 넣은 글자 박힌 책을 볼 때 마음에서 솟아나는 흥분과 같은 것일까, 생각했다. 전화로 고객을 응대하고, 물건을 팔아 이윤을 남기는 일을 해온 나는 해석이 어려운 감정이었다.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 채 위험 속에 내던져진 이들에게 현실을 가리는 연막 같은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골리앗을 보던 아빠에게서 뿜어져 나오던 경외심, 그마저 나중엔 누군가 조작하고 부풀려 놓은 건 아닌지, 이후에 나는 모든 게 의심스러웠다.
1500톤급 대형 골리앗 크레인에 대한 기사가 있었다. H중공업은 스웨덴 말뫼 지역에 있던 크레인을 1달러에 구매해 U시로 운반해 왔다. 스웨덴 방송은 세계 제일이었던 해운회사의 파산으로 크레인이 옮겨질 때 장송곡을 틀었고 말뫼가 울고 있다고 보도했다. 기사 제목이 ‘말뫼의 눈물’이었다. 파산한 회사의 노동자들을 떠올렸다. 그들도 자신이 부렸던 크레인에 대한 애환으로 눈물겨웠을까? 제 몸의 일부를 잘라 보내듯 안타까웠을까? 기자의 시선 너머가 궁금했다.
다비드 이야기를 아빠에게 들려줬다면 어땠을까? 놋 투구를 쓰고 놋 비늘 갑옷을 입고 청동 경갑을 찬 9피트 9인치의 골리앗을 소년 다비드가 짱돌을 던져 넘어뜨리고 목을 벤 이야기를. 다비드를 나는 만화책을 통해 처음 알았고, 좀 더 자라서 다큐멘터리로 다비드 조각상을 보았다. 다비드는 거인 골리앗이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왼쪽 어깨에 돌팔매 끈을 메고 오른손은 허벅지 옆에서 짱돌을 쥐고 있다. 주먹의 뼈가 도드라졌다. 목까지 힘줄이 팽팽하게 일어섰다. 골리앗은 보이지 않는다. 다비드의 눈 속에서 골리앗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다비드의 오른쪽 눈동자는 정면을, 왼쪽 눈동자는 바깥을 향하고 있다. 그 눈은 당당함이 아니고 두려움도 아니고 그것들이 뒤섞인 불안정한 긴장을 담고 있었다.
기업의 이름을 받쳐 든 골리앗은 여전히, 아무렇지 않게 서 있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쳐다 볼 수가 없다. 대학 2학년 여름, 골리앗 크레인이 타워 크레인과 충돌하면서 타워 크레인의 일부가 무너지는 사고가 있었다. 그 사고로 노동자 두 명이 사망하고 다섯 명이 부상을 당했다. 사망한 노동자 가운데 한 명이 아빠였다. 그 자리에서 숨이 끊어졌다. 나는 아빠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조선소 사내 하청 회사는 합의금을 제시했고 크레인 작업 관계자들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사고 소식을 듣고 U시에 왔을 때 고모가 나서서 장례 준비를 서둘렀다. 거대한 선박이 만들어지는데 깔려 죽고 끼어져 죽고 떨어져 죽는 건 그전에도 있었던 일, 이후에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 했다. 어떤 이들의 죽음은 하등으로 취급되었다. 쇳덩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에 귀를 막았다. 눈을 뜰 수도 감을 수도 없었다. 파쇄의 잔상이 나를 짓이겼다.
꺼져 있던 전화기를 꽂았을 때 소리가 울렸고 사고 피해자 모임이 있다고 했다. 김서우라고 이름을 말했다. 민들레 책방에서 보자고 했다.
아파트가 보이는 정류장에서 내렸다. 한낮의 햇볕 속에 쇠 냄새가 났고 먼 바다 냄새가 따라왔다. 입구에서 지하로 열여덟 계단을 내려가면 네 개의 벽면을 가득 채운 책과 벨벳 천을 입힌 소파가 있었다. 책꽂이에는 오래된 만화가 있었지만 다른 책들이 더 많았다. ‘토지’, ‘1984’ 같은 소설과 ‘근로기준법’, ‘전태일 평전’ 같은 책들. 민들레 책방이 있던 곳에는 스타 피시방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다. 나는 그날 만화책이 있는 책꽂이 앞에 서 있었다.
“밥 같이 먹을래요?”
찢어진 청바지에 캡모자를 쓰고 작업복 점퍼를 입은 어깨가 벌어진 사람이 서 있었다. 그는 김이 나는 카레를 끼얹은 밥 두 그릇과 배추김치를 쟁반에 담아서 내왔다.
“피해자 가족 분들과 두 번 모임을 가졌거든요. 선생님하고는 연락이 안 돼서.”
인사를 나누고 밥을 먹었다. 서우 언니와 나는 다음날부터 사고를 알리는 싸움을 해나갔다. 여섯 달가량 그곳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공장 정문에서 유인물을 나눠주었고 출퇴근 시간에는 마이크를 잡았다. 크레인 사고로 죽은 노동자의 딸이라고 말했다. 사고 진상을 조사하고 하청, 본청 회사 대표가 죽음 앞에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 나는 뭐라도 해야 했고,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렇지 않았다. 듣지 않았고 바뀔 생각이 없었다. 석 달의 싸움 끝에 사망자 가족에게 산업재해 보상금이 지급됐다. 일하러 간 아빠가 왜 죽어야 했는지, 조선소 내 사고는 끊이지 않는데 회사는 보상금 이외의 답이 없었다. 그런데 그만하면 됐지 않느냐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돈을 받으려고 한 게 아니었는데 돈이 들어오자 싸움이 힘을 잃었다. 사람들은 일상을 회복해 갔다. 힘을 모아 다음을 준비하자 했지만, 내일을 계획할 범상한 날이 내게는 오지 않았다. 엄마가 집을 나간 날보다 이후에 엄마의 부재를 느꼈던 어린 시절처럼. 나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잠들지 못한 날, 언니는 스쿠터에 나를 태우고 거리로 나갔다. 회색 아파트 칸칸에 노란 불빛이 들어오기 전, 길가의 은행나무가 귓바퀴를 닫은 시각. 그 밤과 새벽 사이엔 세상의 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네 다리로 우뚝 서서 동네를 내려다보는 골리앗 크레인이 보이지 않았다. 민들레와 길고양이, 하청 노동자가 고단하지 않은 곳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공장 너머엔 넓고 푸른 수평의 바다가 넘실거렸다.
나는 U시를 떠났고 뒤에는 돌아보지 않았다. 어떤 걸 보지 않으려고 내 눈동자는 자꾸 바깥으로 간 건지도 모르겠다.
왼쪽 길엔 식당과 술집이 이어지고 오른쪽엔 한국 프랜지 공장 정문이 있다. 정문에서 50미터 쯤 떨어진 담벼락에 ‘하청 노동자 갑질 중단, 노동탄압 분쇄’라고 적힌 현수막이 드리워져 있었다. 지난 시간이 우스울 정도로 달라진 게 없었다. 피식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횡단보도를 건너자 끈으로 묶어 놓은 포장마차가 나왔다. 예전 그 자리에는 호떡을 파는 아줌마가 있었다. 오후 두 시가 되면 포장을 열어젖혔다. 수건을 쓴 아줌마가 처음엔 서서 호떡을 굽다가 나중엔 일인용 의자에 앉아서 호떡을 구웠다. 무릎 수술을 하고 난 뒤에는 긴 의자를 만들어 앉아서 다리를 폈다가 내리며 자세를 바꿔 가며 반죽을 만졌다. 아줌마가 일을 마치면 외제차를 운전해서 간다는 둥, 아들이 의사라는 둥, 장사가 잘 되니 여러 가지 소문이 따라다니기도 했다. 아줌마는 호떡을 팔아서 무슨 재벌이 되겠냐며, 다만 두 아이 대학까진 보냈다고 했다. 포장마차는 이제 다른 사연을 품고 낡아 가는 중이었다.
아파트 상가 쪽으로 올라가는데 ML은행 로고가 반들반들한 빛을 내며 내려다보았다. 책방을 인수하려고 은행에 대출 신청을 했을 때 거절당할까 봐 초조했다. 그런데 걱정한 데 비해 통장에 돈이 쉽게 들어왔다. 은행 직원이 친절하게 상담해 줘서 눈물이 날 정도였다. 화재보험 고객센터 월급이 고정적으로 들어올 때여서 신용에 문제가 되지는 않았었다. 그 뒤로 매달 15일 원금과 이자를 꼬박꼬박 갖다 바치고 있다. 건물 청소 일해서 번 돈이 고스란히 빠져나간다. 대출금과 월세를 갚으려고 한 달을 사는 건가 싶은 회의가 들었었다. 먹고 쓰는 생활비를 신용카드로 돌려대다가 다 무너지겠다 싶어 연말에 서우 언니에게 전화를 했다. 내가 어려운 처지라는 걸 모르는가 싶어 서운하기도 했다. 전화기에 대고 책방을 접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왜 책방을 하고 싶은데?”
못하겠다고 하는데, 서우 언니는 책방을 하려는 마음에 대해 물었다. 알다시피 돈 되는 일이 아닌데 운영이 만만치 않을 거라는 말을 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생각에 없던 말이 튀어나왔다.
“그때, 아빠 보상금 받은 돈 일부를 민들레에 두고 갔잖아. 기억나?”
전화기로 전해 오는 침묵이 길었다. 손바닥을 전화기에 갖다 대고 숨을 쉬었다. 언니의 숨소리와 내 숨이 오가고 난 뒤 목소리가 들렸다.
“그때 나도 힘들었는데 고마웠지. 그동안 잊고 있었네.”
그 뒤로 무슨 말을 더 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언니와 연락이 끊어진 게 그 이후였던 것 같다.
민들레 책방 건물 주인이 전세금을 턱없이 올렸었다. 나는 보상금의 일부를 내놓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서우 언니와 노동조합 사람들 덕분에 산재 보상금을 받을 수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의 공간인 민들레 책방을 위해 보탬이 될 수 있어서 위안이 됐고, 덕분에 U시에서 돌아설 때 걸음이 조금은 가벼웠다. 그런데 20년이 지나, 내가 그 돈 타령을 한 거다. 지금은 어렵지만 형편이 되면 갚을게, 기억 속에서 언니는 선명히 말하고 있었다. 형편이 나아진 적이 없고 세상이 달라진 게 없으니 돈이 생겨날 일이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날 그걸 기억해서 말하는 내가 지질하게 느껴졌다. 그 돈이 어떤 돈인데 말하자면 아빠 목숨을 가져가고 받은 보상금인데. 좋은 곳에 쓰여야 하는데, 거룩하게 마무리 지어져야 하는데. 마치 내가 급할 때 빌려줬으니 내놓으라는 은행 대부업자가 된 것 같았다. 나는 잊고 있었다던 언니에게, 갚겠다는 말도 그냥 한 말이어서 기억도 못 하는 그녀에게 난데없이 돈 타령을 했다. 내가 정말 지질해서였을까, 나를 지질하게 느끼도록 만든 언니의 태도는 문제가 없었던 걸까. 우리를 지질하게 만들고 누군가 웃고 있는 건 아닐까. 혼자서 물어대고 쩔쩔 끓어올랐다. 우리는 사소한 거룩함도 가질 수 없는 건가, 하찮아지고 외로웠다.
책방을 처분하고 새로 살아갈 길을 찾든지, 그렇지 않으면 운영할 방책을 찾아야 했다. 책방을 접으면 어디로 튀어야할지 방향이 없고 가진 것도 없는 제로 상태가 된다. 아르바이트를 하나 더 할 수도 있겠지만 마땅한 일이 없었다. 서우 언니가 남목으로 오라고 했을 때, 나는 결국 좀 더 지질해지기로 마음을 먹었다. 혹시 돈을 내밀면 기꺼이 받고, 뻔뻔스럽게 이야기를 꺼내 얼마만큼이라도 기대어 보리라 마음먹었다. 애초에 남목으로 오라는 걸 피하지 않았을 때부터 나는 불순한 기대로 차올랐다.
과일과 간단한 장을 봐서 슈퍼마켓에서 나왔다. 길을 건너는데 뒤에서 뭔가가 달려들었다. 나는 다리를 붙잡고 주저앉았다. 자전거가 종아리를 치고 나자빠졌다. 초등 저학년쯤 돼 보이는 아이가 자전거와 함께 넘어져 있었다. 나는 장바구니를 그러쥐었다.
“괜찮니?”
아이는 제 팔뚝을 쓰다듬으며 나를 보았다. 나도 종아리를 만지며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렸다.
“이 녀석아, 브레이크를 잡아야지.”
달려와서 아이를 일으켜 세우는 사람은 아이의 아빠인 것 같았다. 아이의 윗옷 소매를 걷어서 팔뚝을 살펴보고 다친 데가 없는지 몸을 꼼꼼히 살폈다.
“브레이크 잡았거든. 나는 괜찮은데 아줌마가.”
남자는 그제야 나를 보고 안 다쳤느냐고 물었다. 나는 바지를 털며 일어섰다.
“혹시 신재, 이신재 아니야?”
그의 얼굴을 보고 있는데 불쑥 손을 내밀며 박철민이라고 자기 이름을 말했다. 그제야 떠올랐다. 헤어스타일이 변해서 몰라봤다고 했다. 그가 내민 손으로 내 어깨를 두드렸다.
“신재 씨가 U시를 떠난 날부터 머리카락이 허옇게 세더라구.”
그는 짧은 백발 머리를 매만지며 털털한 웃음을 지었다.
“우리 첫째야. 내가 늦장가를 들었거든. 신재 씨를 기다리다 늙어버린 건 아니고.”
넉살 좋은 걸 보니 예전의 박철민이 맞았다. 아이랑 자전거 타는 모습이 좋아 보인다고 말했다.
“집사람이 일요일 오전에는 아이와 보내라고 윽박질러서. 여전히 조합 일 하느라 바쁘거든.”
그는 묻지 않은 근황까지 늘어놓았다. 박철민은 그때 골리앗 사고 내용을 프랜지 노조 소식지에 빠지지 않고 실었다. 가족 대책위 유인물 제작에도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그는 싸움이 길어지는 걸 꺼렸던 것 같다. 정규직 노조에서 할 만큼 했으니 적당한 선에서 싸움을 접자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박철민은 그편이었다. 나중에 그는 얻을 만큼 얻어냈다며 나서서 유가족들을 설득했다. 사고에 대한 진상 조사와 대책 마련은 보상금 액수를 조율하는 선에서 수그러들고 말았다.
“어떻게 지내는데?”
관심인지 걱정인지 악의 없는 말투였지만, 나는 할 말이 별로 없었다. 그럭저럭 잘 지낸다 하고는 문자에 찍힌 111동이 어디쯤인지 물었다.
“저기 112동 보이지? 지나서 꺾어지면 보일 거야. 서우 씨 보러 왔구나. 얼른 치료 시작해야 하는데.”
그가 알아듣지 못할 말을 했다. 무슨 뜻이냐 물으니 몰랐느냐고 되물었다.
“서우 씨 유방암 4기라던데.”
며칠 전에도 구급차에 실려 응급실로 갔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그의 인사와 길안내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장바구니를 들고 뛰어가는데 종아리가 욱신거렸다. 111동은 112동 앞에 있을 것 같았지만 정작 그곳에 없었다. 아파트 한 바퀴를 돌아 나와서 기역자로 꺾인 데로 찾아갔다.
서우 언니는 예전의 벌어진 어깨가 다 소모된 것 같았다. 생각보다도 더 쇠잔한 모습이었다. 녹이 낀 듯 얼굴이 어두웠다.
“와줘서 고마워.”
언니는 나를 보자마자 다가와 두 팔을 벌려 껴안았다. 부딪치고 닳은 마음이 더운물에 들어간 듯 녹아내렸다. 방어를 위해 날을 세우고 있던 발톱에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입에서 나온 말은 마음보다 딱딱했다. 왜 아프다는 말을 안 했는지 물었다.
“의사 말이 짧으면 석 달, 길면 삼십 년이래. 병원에 입원하기로 했으니 걱정 마. 받아들여야지.”
서우 언니는 천진하게 웃었다. 어떻게 걱정이 안 될 수가 있냐고 나는 서운한 마음을 드러냈다. 언니가 의자를 빼주며 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일단 앉으라고 했다. 그녀는 식탁 위에 놓인 유리병 뚜껑을 열고 말린 꽃잎을 꺼냈다. 손끝에 조금만 힘을 주면 조각으로 부서져 내릴 것 같았다. 그것을 다기 주전자에 넣었다.
“기관지와 염증에 좋대. 목련 꽃잎이야. 산 아래 나무에서 얻어 말렸어. 갈 때 좀 가져가.”
끓인 물을 다기 주전자에 부었다. 주전자 주둥이가 떨고 있었다. 내가 주전자를 붙들자 언니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손을 떼고 그녀가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 주전자 말이야. 장터에서 이가 깨졌다고 버리려는 걸 달라고 했어.”
다기 주전자의 실금을 따라 찻잎 빛이 배어 있었다. 찻물을 잔에 따랐다. 맑은 김이 언니와 나 사이에 오갔다. 향이 올라왔다. 남편이 목련 묘목을 사와서 아파트 화단에 심었다고 말했다. 가벼운 말들이 오고 갔다. 그녀는 조금씩 쉬었다가 큰 숨을 내쉬고 말을 이어 갔다.
“너는, 괜찮은 거지?”
늦봄의 햇살이 베란다에 앉아 귀를 기울였다. 날씨나 계절 같은 안부만 전할 수 있다면, 봄볕 이야기에 마음을 다할 수 있다면.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바다가 보이는 책방이랬니? 가보려고 했는데, 그것도 못 했어. 바다가 가까운가 보다.”
“그 동네에, 바다가 없어.”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서, 바다가 보이는 책방이라고 이름 지었구나.”
서우 언니는 어쩐지 알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람들 보는 대로 맞추려고 안 해도 돼.”
눈꺼풀이 떨렸다.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두리번거렸다. 언니는 내가 모르는 마음까지 헤아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세상이 내밀지 않은 것을 찾으려 했잖아, 우리는.”
언니 눈에 물기가 어렸다. 내 눈은 바깥을 향했다. 이미 져버린 목련꽃을 그려 보았다. 함께 본 바다, 너른 수평을 떠올렸다. 우리에게 오지 않은 것, 없어서 눈에 선한 것들이 떠올랐다.
“민들레 책방에 있었을 때 슬펐지만 그리웠어. 책을 읽는 동안은 그곳으로 갈 수 있었어. 읽는 동안은 잠깐씩 꿈을 꿀 수 있었어.”
언니는 내가 책방을 하려는 마음을 알 것 같다고 했다.
“이번에 간 중학교에서 계약을 깨고 담임을 못 맡기겠다는 거야. 1년 휴직 낸 선생이 사정이 좋아져서 3개월 있다가 복직할 거라고. 교육청 앞에서 23일간 피켓을 들고 서 있었어. 거칠고 모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하더니 교장이 나중에 사과를 하더라. 형식적이었지만.”
일인시위를 한다. ‘기간제 교사 차별 금지, 계약 이행’ 피켓을 들고 그녀가 서 있다. 공무원들과 교사들의 무심한 시선이 날아와 꽂힌다. 시간이 지날수록 무심함은 모멸의 눈빛이 되고, 벌거벗은 몸에 수백 개의 빗금으로 내리친다.
‘폭력에 면역이 되는 사람은 없어. 온 신경이 감내하고 버틸 뿐이지.’
언젠가 언니의 SNS에서 본 글귀가 떠올랐다.
“남편은 그들이 사람을 잘못 건드렸다고 해. 내 주먹을 봐.”
서우 언니가 실없이 웃었다. 둥글게 모아 쥔 그녀의 손에 내 손을 얹었다. 그렇게 버티니까 아픈 거지, 힘줄이 돋아 오른 손을 어루만졌다. 언니는 거룩함으로 남아 있기를 바랐다.
나는 장바구니에서 토마토를 꺼내 씻고 양배추를 삶았다. 형부가 생선을 구웠고 우리는 같이 음식을 했다.
“치료 받고 네 책방에 갈게. 그리고.”
언니는 더 할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말하지 않았다.
“신재야.”
나지막한 목소리로 또 나를 불렀다. 입원하면 문병 가겠다고 했다. 최근에 읽은 소설과 책방에 오는 여사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창밖에 어둠이 내려올 때 언니네 집에서 나왔다. PC방의 불빛은 현란해졌고 ML은행 로고는 어둠 속에서 형체가 흐려졌다. 전화기에서 진동과 함께 알림 문자가 떴다. 알바앱에서 온 거다. 걸음을 멈추고 내용을 확인했다. ‘주간신문 배달, 낮 두 시간 가능’, 업체 번호를 저장했다. 책방에 가서 여사님 물을 떠주고 책꽂이에 앉은 먼지를 떨고 책장을 펼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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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 2023-12-01
낫과 밤 김경욱 글이 써지지 않는 밤에는 낫을 들고 나갔다. 새로 이사한 아파트 베란다 창고에 낫이 있었다. 지구 반대편부터 끌고 온 캐리어를 집어넣다 발견했다. 열네 시간 훌쩍 넘는 비행으로 내 몸뚱이마저 낯설었지만, 물음표 모양으로 희번덕거리는 그것은 낫이라 불리는 물건이 분명했다. “하진 씨, 이게 뭐예요?” 아내에게 큰 소리로 물었다. 반말하지 않기. 서로의 이름 부르기. 그게 유일한 결혼 조건이었다. 부부간에 요요, 해서 애가 들어서지 않는다는 소리까지 들어가며 지켜 온 혼인 서약이었달까. “보면서 물어요?” 하진 씨는 베란다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다 안다는 투로 말했다. “웬 거냐고요.” 내가 고쳐 물었다. “전에 살던 사람들이 빠뜨렸나 봐요. 일부러 연락하기 애매해서 그냥 뒀어요. 가져갈 거면 가지러 오겠죠.” 낫을 맨 안쪽으로 밀어 넣고 창고 문을 닫았다. 주말농장에서 썼는지 산소 벌초에 썼는지 몰라도 낫의 주인이 찾으러 올 것 같지는 않았다. * 하진 씨가 고르고 계약한 아파트였다. 이사도 하진 씨 혼자 했다. 재건축 얘기가 도는 단지였다. 이미 확정 단계라 했던가. 상관없었다. 내게 있어 집이란 밤을 새워 글 쓰는 곳을 뜻하니까. 나 자신을 코너로 몰아넣을 두 개의 벽만 있으면 되니까. 이곳은 세상의 구석, 나의 북극점, 나의 두벌식 자판, 나의 저장하기. 부동산 계약서에도 대법원 등기소에도 올리지 못할 나만의 주소. 번지수가 어떻게 되든 노트북을 펴는 자리가 바로 나의 집이다. 맞다. 나는 작가다. 지금껏 쓴 책이라야 장편소설 한 권뿐이지만. “집주인이 갑자기 들어와 살겠다네요.” 하진 씨가 이사할 집을 급히 구해야 한다고 전화했을 때 나는 열두 시간 시차 너머에서 노트북 화면만 노려보던 참이었다. 미국 북동부의 한 주립대학에서 운영하는 국제창작프로그램 지원 자격은 오직 책 한 권. 나를 위한 레지던시 같았다. 어느 날 화재 경보에 놀라 잠옷 바람으로 레지던시 숙소를 뛰쳐나가면서도 나는 노트북부터 집어 들었다. 몸만 빠져나온 외국 작가들이 엄지를 치켜들며 말했다. “너, 작가 맞구나.” 그런 영어는 못 알아들을 수 없다. 일간지 기자 출신 작가라면. 작가 두 글자 앞에 군더더기처럼 붙곤 하는 수식어가 못내 거슬리던 사람이라면. 중학생 때부터 기자가 되고 싶었다. 낙엽이 흩날리는 샹젤리제 거리에서 버버리 코트 깃을 세운 특파원이 주머니에 한 손을 꽂은 채 보도하는 모습에 마음을 빼앗겼다. 대학도 불문과에 갔다. 방송국에 서너 번 떨어지고 신문사로 방향을 틀었다. 틀어진 건 연애도 마찬가지였다. 부부 소리를 들으며 붙어 다니던 여자친구와도 졸업하자마자 헤어졌다. 사귀는 동안에도 왜 사귀게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기억나는 건 제대하자마자 참석한 신입생 환영회에서 여자친구가 마실 막걸리
- 관리자
- 2023-12-01
보리수나무 아래 윤대녕 1 며칠 전 종편방송을 시청하다 나는 우연히 그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대략 십 년 만이었다. 〈그때 그 사람,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나〉라는 다소 긴 제목의 프로그램이었다. 그는 봄에서 여름까지 지방 곳곳을 옮겨 다니며 양봉을 하고 있었다. 봄여름을 그렇게 보낸 뒤 가을에는 고향인 강화도로 돌아가 아버지의 농사를 도우며 지낸다고 했다. 과거 연희동 술집에서 만났을 때 그는 마흔을 갓 넘긴 나이였으니 지금은 오십대 초반일 거였다. 촬영 당시 그는 충청도 공주의 어느 산자락의 움막에서 지내며 밤꿀을 채취하고 있었다. 수염이 덥수룩했으나 표정은 평온해 보였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며 시냇물 속에 이끼를 머금은 채 고요히 잠겨 있는 돌을 떠올렸다. 더불어 강화도를 생각하고 있었다. 강화도 고려궁지 아래 있는 한옥 성당을. 한옥 성당 마당에 서 있는 보리수를. 2 당시 나는 서대문구 연희동의 오래된 주택 이층에 세 들어 살며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무렵 그와 만나게 되었다. 영화감독인 매형의 소개로 술자리에서 합석한 적이 있었다. 매형은 옆 동네인 연남동에 독립 프로덕션 사무실을 가지고 있었는데, 연희동 단독주택에 방을 구해 준 것도 바로 그였다. 그러다 보니 가끔 만나 저녁을 먹거나 술을 마시게 되었고 어떤 날은 낯선 사람들이 중간에 합석하는 경우가 있었다. 매형의 지인들로 대개 영화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연희동 음식점 거리에서 연남동으로 넘어가려면 굴다리를 통과해야 하는데, 굴다리로 진입하기 직전 오른쪽 골목 안에 야식포차집이 숨어 있었다. 매형과 나는 거기서 만나곤 했다. 그날은 왜 매형과 만났던 것일까? 늘 그렇듯 특별한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다만 기억하는 건 초저녁부터 비가 내리고 있었다는 정도였다. 3 매형과 누나가 따로 지낸 지 십사 년이 되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완전히 헤어지지도 않고 그렇다고 서로 만나는 일도 없이 각자의 삶을 꾸려가고 있었다. 집을 나간 것은 누나였다. 종로에 있는 보습학원에서 영어 강사로 일하던 누나는 어느 날 짐을 꾸려 홀연히 강화도로 들어갔다. 이후 두 사람은 수수께끼 같은 관계를 지금껏 유지해 오고 있었다. 홍어찜을 앞에 두고 막걸리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터에 밤 열 시쯤 매형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어, 병주냐? 너 그동안 어디 있었길래 통 연락이 없었어? 그래, 조만간 한번 보자. 뭐, 지금? 매형이 잠시 통화를 멈추고 후배가 만나자는데 합석을 해도 되겠냐고 내게 물어 왔다. 전에도 이런 적이 있기에 나는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날 출근을 해야 했기에 나는 적당히 일어날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로부터 약 삼십 분 뒤에 나타난 사내는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었는데, 인사를 나누다 보니 언젠가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본 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 사극에 출연했던 것 같은데 근래에는 방송에서 본 기억이 없었다. 나중에 매형한테 들은 바로는 대학을 졸업하고 한동
- 관리자
- 2023-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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