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그 개와 혁명

  • 작성일 2024-01-01

   그 개와 혁명


예소연


   태수 씨는 죽기 전까지 통 잠을 못 잤다. 수면제를 먹고 진정제를 먹어도 한두 시간 토막잠만 잤다. 늘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서둘러 일어났다. 그러면 나는 부리나케 간이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뒤 태수 씨의 손을 잡고 말했다. 나 여기 있어, 태수 씨. 태수 씨는 잠깐 잠들었다 일어나면 꼭 여기가 어디냐고 물어 봤다. 꿈속에서 황천길이라도 본 사람처럼 그랬다. 그즈음 스마트 워치에 기록된 내 하루 수면 시간은 길어 봤자 세 시간이었다. 태수 씨는 병실 침대에 누워 있는 게 너무 힘들다고 했다. 가슴이 터질 것같이 답답하다고. 그러면 나는 태수 씨를 휠체어에 태워 병원 복도를 빙글빙글 돌았다. 병원은 꼭 두 손바닥을 반듯이 펼쳐 놓은 것처럼 정확한 대칭 구조였다. 양 복도 끝 쪽에 샤워실과 화장실이 있고 그 중심에는 각각 디귿 자 형태의 데스크가 있어 간호사들이 상주했다. 태수 씨와 나는 데칼코마니 같은 그 병원 복도를 밤새도록 돌았다. 종종 가래 뱉는 소리도 들리고 흐느끼는 소리도 들렸다. 병원에서는 사람들이 마음 놓고 울었다. 몇 바퀴를 돌고 나서야 태수 씨는 꾸벅꾸벅 졸았다. 그동안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던가.

   고모는 나보고 나서지 말라고 했다. 희준에게 모든 걸 맡기라고. 나는 그런 고모의 눈을 똑바로 보고 말했다. 괜찮아요. 더한 것도 견뎠는걸요. 엄마까지 나를 말렸지만, 나는 이것만큼은 절대로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내가 직접 완장을 차고 장례식장을 지켜야 했다. 그게 태수 씨와 한 약속이었으니까. 태수 씨는 기억도 하지 못할 약속. 사경을 헤매며 해낸 약속. 태수 씨가 건강할 때, 나는 늘 돌아오는 제사 때마다 태수 씨와 싸우는 게 일상이었다. 태수 씨는 할아버지가 기함을 한다며 반바지도 못 입게 했다. 제사상을 차리는 것도 늘 엄마 몫이었다. 나는 불필요한 인습이라고, 하다못해 태수 씨에게 당신 아버지 제사면 직접 과일이라도 놓으라고 소리를 쳤지만, 태수 씨는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마치 우리에게는 각자의 역할이 있고 당신은 그걸 응당 받아들일 뿐이라는 듯이. 하지만 태수 씨는 분명 조금 다른 사람이 아니었나. 나는 분명 당연한 걸 당연하지 않게 생각하는 태수 씨의 모습을 좋아했던 것인데.

   나는 장례식이 시작되기 직전부터 소리를 질러가며 싸웠다. 장례식 직원 몇몇이 와서 말렸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할머니에게 삿대질을 하고, 사촌동생인 희준의 어깨를 밀며 쫓아냈다. 그러는 사이, 해서는 안 될 말들 혹은 아주 오래전에 이미 해야만 했던 말들이 오갔다. 특히 할머니에게. 그렇게 술을 될 때까지 드시고 여기까지 와서는 더 할 말이 있으세요? 있냐고. 네가 그러고도 태수 씨 엄마야? 엄마냐고. 그래, 나 엄마 딸이다. 그럼? 태수 씨 딸은 아니냐? 내가 닮기는 누굴 닮아. 우리 집에 그럼, 유자 말고는 계집밖에 더 있어?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 와중에 첫 조문객이 왔다. 엄마가 가까이 다가가 인사를 하며 이름을 불렀다. 성식이 형.

   태수 씨와 엄마는 모 대학 사학과 85학번이었는데, 만날 동기들 이야기를 할 때마다 민주85라고 불렀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성식이 형, 민재 형, 의식이 형과 같은 형 이야기를 많이 했고 그들이 다 민주85라고 했다. 어느 형은 이제 곧 출소를 한다더라, 어느 형은 태국에서 재혼을 한다더라, 이런 이야기를 곧잘 하곤 했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어쩐지 태수 씨가 허풍을 떤다고 생각했는데 언젠가 정말로 청송교도소로부터 온 엽서를 받은 적이 있었다. 나는 태수 씨에게 그걸 건네면서 태수 씨가 그 엽서를 펼쳐 보기까지 긴장되는 마음으로 지켜봤다. 마침내 태수 씨가 펼쳐 본 엽서에는 이해할 수 없는 말들만 적혀 있었다. 간간이 수령님, 동지, 북조선 같은 단어들이 섞여 있었다. 태수 씨는 편지를 대충 훑어보다 탁자 위에 던져 놓았고 나는 그 편지를 몰래 내 방으로 가져왔다.

   나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엽서에 적힌 내용을 한 자 한 자 비밀 일기장에 옮겨 적었다. 누가 뭐래도 우리는 투쟁을 해야 한다. 자본의 배를 불리는 식으로는 사회가 올바르게 굴러가지 않는다. 나는 태수 씨가 어떤 비밀 조직의 회동에 연루되었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무척 멋있게 느껴졌다. 어린 나이에도 태수 씨의 일을 어떤 식으로든 지지해 줄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노동이라든지 투쟁이라든지 하는 것들이 무척 멋들어지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나는 그 엽서를 다 옮겨 적은 뒤 맨 밑에 보낸 이의 이름도 꾹꾹 눌러 적었다. 성식이 형.


*


   그때부터였다. 태수 씨에게 성식이 형에 대한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른 것은. 태수 씨는 보통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다만 장거리 운전을 할 때만큼은 졸음을 쫓기 위해서인지 집중해서 성식이 형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성식이 형 이야기를 하다 보면 태수 씨와 엄마에 대한 이야기도 간혹 들을 수 있었는데, 화염병을 던지고 경찰과 대치하며 삐라를 뿌리던 그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지는 것 같았다. 정말이지, 태수 씨와 엄마는 그때 당시 무서울 게 없었다고 했다. 우리는 투쟁하며 공부했어. 도서관만 다니던 뜨내기들하고는 급이 달랐지. 태수 씨는 일말의 후회도 없다는 듯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성식이 형 이야기만 하면 한숨을 푹푹 쉬고 목소리가 갈라졌다. 나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성식이 형이 NL이었고 태수 씨가 PD였는데 우리는 어떤 일을 계기로 가까워졌지만, 북조선의 지령을 받고 러시아로 떠난 성식이 형을 말릴 수가 없었다. 그렇게 러시아 인터폴에게 붙잡힌 성식이 형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오랜 기간 동안 복역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나는 태수 씨에게서 틈만 나면 노동의 가치가 어떠니, 시장 경제가 어떠니, 이런 소리를 듣고 자랐다. 나는 그 중심에는 성식이 형이 있다고 생각했고, 머리가 더 크고 나서는 태수 씨가 아주 위험한 일에 휘말릴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식이 형의 엽서는 일 년에 한 번은 꼭 왔고 우리가 이사를 간 후에도 어떻게 알았는지 어김없이 배달되었다. 태수 씨는 답장도 하지 않고 그 편지를 대충 아무데나 놓았는데, 나는 그 편지를 차곡차곡 모아 놓았다. 그런 성식이 형을 이제야 마주하게 된 것이었다. 나는 태수 씨의 영정 사진 아래 국화꽃을 놓는 성식이 형을 가만 바라보았다. 성식이 형의 행색은 아주 볼품없었다. 팔꿈치를 덧댄 감색 재킷 한 벌을 입었는데 나름 애써 구색을 맞춘 것 같았다. 한쪽 무릎이 아픈지 주저앉듯 절을 하는 성식이 형의 가지런한 발을 보면서, 나는 태수 씨가 병원에서 했던 말을 다시금 떠올렸다. 내 옆에는 엄마와 동생들이 어설픈 모습으로 쪼르르 서 있었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처음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맞이해 본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성식이 형이 눈물을 훔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나와 맞절을 했다.

   “네가 수민이구나.”

   “네.”

   “이런 애들을 어떻게 두고······.”

   “성식이 형.”

   “응?”

   나는 바지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냈다. 그리고 성식이 형 이름 아래 있는 문장을 읽었다. 최대한 연습한 대로.

   “울지 마쇼. 태수 씨의 지령이요.”

   “태수 씨?”

   성식이 형의 눈이 동그래졌다. 길게 수염을 기른 턱이 파르르 떨리는 것 같더니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성식이 형에게 다가가 귓가에 속삭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300만 원은 꼭 우리 수민이한테 갚아 주쇼. 당신 러시아 간다고 했을 때 내가 부쳤던 돈. 나는 최대한 태수 씨의 목소리를 따라 했고 그럴싸한 목소리가 나와 뿌듯했다.


*


   태수 씨의 이름은 원래 형주였다. 58년 평생 형주라는 이름을 썼는데 여자 이름 같다고 놀림도 많이 받고 오해도 많이 받았다고 했다. 태수라는 이름은 태수 씨가 암 진단을 받은 후 고모가 작명소에서 지어 온 이름이었다. 태수라는 이름이 오래 살 이름이라고 했다. 우리는 그 후로 태수 씨를 태수 씨라고 부르게 되었다. 사람이 믿는 대로 살아진다고, 피그말리온 효과라고 아니? 고모가 단체 카톡 방에서 그렇게 말했고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모두가 태수 씨를 태수 씨라고 불렀다. 모두가 간절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태수 씨의 병 앞에서 평소라면 콧방귀나 꼈을 일들을 많이 했다. 친구들에게 화살기도를 부탁했고 지도교수님에게까지 전화해 태수 씨가 통 밥을 먹지 않는다며, 변을 보지 않는다며 엉엉 울었다. 고모가 잔뜩 사다 놓은 활성 비타민 주스, 아연, 면역관리 영양제, 유산균, 정체 모를 미숫가루들을 죄다 물에 타서 한 모금씩 천천히 먹였다. 구역질을 해도 먹였다. 

   엄마는 이런 게 무슨 소용이냐고, 죄 다단계 아니냐고 심지어 아연은 너무 많이 먹으면 위에 무리가 간다며 고모에게 몇 마디 했고, 엄마와 고모는 그 일로 머리채를 잡고 싸웠다. 다 살리자고 하는 일인데. 다 살리자고 하는 일인데도 엄마와 고모는 척을 졌다. 태수 씨를 지독하게 사랑해서 서로를 끔찍하게 미워하기 시작했다. 태수 씨가 뭐라고. 도대체 태수 씨가 뭐라고 우리는 그토록 태수 씨를 사랑한단 말인가?

   내가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나와 태수 씨의 정치적 견해는 극도로 갈렸다. 언젠가 태수 씨는 내게 정말 궁금하다는 듯 이렇게 물었다.

   “결혼은 같이 하는 건데, 남자가 무조건 집을 해 와야 한다는 게 정말 요즘 여자들의 생각이니?”

   언젠가 태수 씨가 보는 유튜브 쇼츠를 함께 본 적이 있는데 유독 그런 내용들이 많이 나왔다. 메갈이 어쩌고 한국 여자들이 어쩌고······ 나는 태수 씨에게 이런 것들을 정말 믿느냐고 물었고 태수 씨는 실제로 여자들이 그렇지 않으냐며 농담 아닌 농담을 했다. 나는 태수 씨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속에서 천불이 일었다. 왜냐하면 태수 씨는 자식이라곤 나를 포함해 딸만 둘이었기 때문이었다. 자꾸 요즘 여자들 이야기를 하면서도 내가 요즘 여자들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태수 씨는 가까이 있는 나를 두고도 저 멀리 있는 요즘 여자들을 보는 식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유연한 노동 문제에 대해 비판하면서도 불가산 노동인 가사 노동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사회는 조리 있게 굴러가야 하지만, 가족이라는 제도 안의 조리는 다른 문제였던 것이다.

   하지만 태수 씨 또한 견뎌야 했던 것들이 너무도 많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두 딸을 길러내기 위해 어울리지도 않는 양복을 입고 꾸역꾸역 출퇴근을 반복했다. 그러다 보니 스트레스가 쌓이고 술을 먹고 게임을 했다. 그렇게 배가 부르고 불러 복수가 찬 줄도 몰랐다. 병은 소리도 없이 발 빠르게 태수 씨의 몸을 잠식했고 나는 잠식해 가는 그 병이 어떤 병인지도 모르고 옆에서 태수 씨가 하는 휴대폰 게임이나 구경하고 불뚝 나온 배를 퉁퉁 치며 놀려댔다. 그러면서도 태수 씨는 자꾸 책임질 것들을 만들어 나갔다. 특히 유자에게는 더 각별해서 나와 동생은 정신 차려 보니 막내가 생겼다며 툴툴거리곤 했다.

   다 알면서도 참고 사는 거야. 그런데 너네는 왜 그러니? 태수 씨는 내게 이렇게 물어 온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태수 씨의 삶은 치열하면 치열했지 참고 견디는 방식으로 이어져 온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나는 태수 씨를 사랑했다. 인셀은 사랑하지 못해도 그런 태수 씨 정도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한 사람의 역사를 알면 그 사람을 쉬이 미워하지 못하게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성식이 형은 조용히 육개장에 소주 한 병을 천천히 비웠다. 나는 성식이 형 앞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아직 이른 새벽이라 조문객이 별로 오지 않아 가능한 일이었다. 성식이 형은 내게 가타부타 더 이상 말도 붙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내내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난 듯 내게 말을 걸었다.

   “형주가······.”

   “태수 씨요.”

   “그래, 태수 씨가······ 나랑 팔당에 간 적이 있어.”

   팔당에 가서 그러더라, 네 엄마가 널 임신했다고. 그래서 우리는 그만해야 될 것 같다고. 성식이 형이 그렇게 말했다. 무엇을요? 내가 묻자 성식이 형은 조용히 대답했다. 혁명. 그래서 내가 러시아를 혼자 간 거야. 지령을 받고. 태수 씨도 지령을 받았어요? 아니지. 걔는 듣자마자 말렸지. 걔는 뼛속까지 PD였어. 아무래도 수령님을 모시는 건 자기 길이 아닌 것 같다고 말이야. 자기는 식구들 먹여 살려야겠대. 그래서 내가 펄쩍 뛴 거야. 그러니까 미안하다면서 준 게······.

   “300만 원이라고요?”

   “그래.”

   “그래도 줄 건 줘야죠.”

   “그래야겠지?”

   성식이 형은 소주 한 병도 모자라 또 한 병을 비운 뒤 장례식장을 빠져나갔다. 나는 성식이 형을 따라갔다. 뒤따라오는 나를 의식했는지 걸음이 빨라졌다. 그러다 갑자기 뒤를 돌아보더니, 알겠다, 담배나 한 대 피우자, 하고 담배를 피웠다. 나도 한 대 빌려 같이 피웠다. 그리고 성식이 형은 그 자리에서 내게 250만 원을 이체해 주었다. 50만 원은 담배 값이라고 했다. 그냥 평범한 마일드 세븐인데. 내가 말했다. 하지만 성식이 형은 모른 척했고 나는 나름대로 성식이 형의 역사를 알아서인지 그냥저냥 넘어가게 되었다.

   “대신 부탁이 있어요.”

   부탁? 성식이 형이 되물으며 불안한 모습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우리 집 개를 장례식장에 데려와 주세요. 그러자 성식이 형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러더니 아직까지도 미행을 당해, 그렇게 말하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멀어지는 성식이 형을 바라보면서 태수 씨도 겁이 났구나, 생각했다. 태수 씨는 나에게 그 당시 멋지게 화염병을 던지고 공장에 위장 취업을 하고 삐라를 뿌린 이야기밖에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나는 인유두종 바이러스를 가지고 있다. 자궁경부암에 걸릴 확률이 꽤나 높은 고위험군 바이러스로 의사는 내게 분기별 검진을 권했다. 처음 바이러스가 있다는 걸 알고 자궁경부암 검사를 했을 때, 결과가 나오기까지 3일의 시간이 걸렸다. 나는 그 시간 동안 자궁을 드러내는 것과 진단비 2,000만 원을 받아내는 것을 동시에 상상했다. 월급은 형편없었고 대출 이자는 천정부지로 치솟을 때였다. 결국 나는 가까운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 아무래도 (암에) 걸리더라도, 진단비를 받는 쪽인 것 같아. 그러자 친구가 기함을 했고 그 후로 다시는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지 않았다. 나는 태수 씨와 데칼코마니 같은 병원 복도를 빙빙 돌 때마다 그 생각을 하곤 했다. 그때부터 내가 하는 모든 말들이 나를 찌르기 시작했다. 결국 암에 걸린 것은 태수 씨였다. 병은 내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고통스러웠고 삶은 지독히도 내 뜻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아니, 내 삶을 단 한 번이라도 손에 쥔 적이 있던가. 삶은 언제나 나를 쥐고 흔들 뿐이었다.

   태수 씨는 MRI 찍는 것을 포기했다. 커다란 통 속에 들어가는 것이 꼭 숨통을 조이는 것만 같다고 했다. 아티반을 주입했는데도 통 속에서 고함을 지르고 몸부림을 쳐서 간호사 세 명이 들러붙어 진정시켜야 했다. 나는 그때 대기실에서 전자책을 읽으며 태수 씨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두 시간이 지나도 태수 씨가 나오지 않았다. 검사실에 드나드는 사람들의 얼굴은 빨갛고 까무잡잡했다. 나는 하얀 천 아래의 맨발들만 봐도 그들이 태수 씨가 아님을 알았다. 결국 데스크 간호사에게 태수 씨의 행방을 물은 끝에 검사를 시작한 지 15분도 안 되어 병실로 복귀했음을 알았다. 전화 한 통 하지 않는 태수 씨에게 머리끝까지 화가 난 채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그즈음 태수 씨는 휴대폰을 보지 않았다. 전화가 와도 받지 않고 좋아하는 유튜브도 보지 않았다. 병실에 도착하자 태수 씨가 엎드려 울고 있었다. 나는 태수 씨의 등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태수 씨, 나 인유두종 바이러스가 있대.”

   “그게 뭔데.”

   “자궁경부암을 일으키는 바이러스야.”

   “수민아. 그거 성관계 때문 아니니?”

   “응, 맞아.”

   “누구 때문이니?”

   “태수 씨, 그건 몰라.”

   태수 씨는 코를 훌쩍이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휴대폰을 들어 무언가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나는 태수 씨가 뭐라도 하는 게 좋아서 말을 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자기 걱정 안 하고 남 걱정하는 게 차라리 나으니까. 그렇게 또 병원 복도를 빙빙 돌면서 태수 씨는 자궁경부암에 대한 생각을 했고 자꾸 나에게 의미 없는 질문을 했다. 원래 그런 병에 많이들 걸리니? 몰라, 운 나쁜 섹스하면 걸릴 거야. 나는 그런 태수 씨의 질문에 대충 대답하며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오래도록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우리가 잘못한 건 없다는 결과에 도달했다. 그냥 적당히 돈 없고 적당히 뭘 모르고 살아온 것일 뿐인데.


*


   건강했을 적, 태수 씨는 페이스북을 곧잘 했는데 남다른 글 솜씨로 페친들이 꽤 많았다. 페친들은 태수 씨에게 감자며 옥수수 따위를 보내 주었고 세탁소를 한다는 어떤 페친은 손님들이 찾으러 오지 않는 옷을 여러 벌 챙겨 보내 주기도 했다. 태수 씨는 페친이 준 겨울 점퍼를 입고 가족 앞에서 으스대었다. 나도 들어 본 적 있는 비싼 브랜드였다. 태수 씨는 세탁소 페친과 술도 먹고 노래방도 다녔다. 태수 씨는 운동을 잘하지 않았다. 출퇴근길이 오래 걸리니 그게 바로 운동이라고 우리에게 떵떵거렸다. 노는 거라곤 술 먹고 고성방가를 하고 담배를 피우고 노래방에 가는 것. 그게 다였다.

   반면 엄마는 대학 때부터 테니스 동아리에 들 정도로 테니스에 진심인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테니스 엘보가 오자 테니스를 그만두었다고 했다. 그 후로 엄마는 좀처럼 운동을 하지 않았고 모든 것에 흥미를 점차 잃어 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를 낳은 이후로 그렇게 되었다고 했다. 그렇다고 너를 미워하거나 그런 건 아니야. 엄마는 그렇게 말했지만, 내가 초등학생 시절 사소한 걸로 트집을 잡고 툭하면 혼을 냈는데, 나는 그게 일종의 괴롭힘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어쨌든 엄마는 테니스를 그만둔 이후로 조금씩 술을 배우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태수 씨와 함께 술을 마시러 다녔다. 그렇게 세탁소 페친과도 친해졌다. 그러다가 갑작스럽게 그 페친과 연을 끊게 된 사건이 있었는데, 엄마가 주사를 부린 탓이었다. 갑자기 매운탕을 먹다가 숟가락으로 페친의 빈 정수리를 탕탕 때렸다고 했다. 처음에는 페친도 장난으로 받아들였는데, 점점 강도가 세져 페친의 정수리가 붉게 달아올랐다. 태수 씨는 엄마의 숟가락을 빼앗으려 애를 썼지만 엄마는 술만 마시면 힘도 세졌기에 마지막으로 한 방, 테니스공을 치듯이 시원하게 페친의 정수리를 때렸다. 그 술자리는 엉망진창이 되었다.

   고맙게도 태수 씨의 페친들이 더러 장례식장에 와주었다. 엄마가 숟가락으로 정수리를 때린 페친도 물론 있었다. 나는 그 페친이 절을 하고 국화꽃을 놓을 때 얼른 수첩을 확인한 뒤 마주서서 인사하는 틈을 노려 귓속말을 했다. 그 옷들 말이야, 다 짝퉁이더만. 그러자 페친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러고는 식사도 하지 않고 서둘러 장례식장을 나가버렸다. 엄마는 영문을 몰랐고 나는 속으로 많이 웃었다.

   태수 씨는 네 엄마가 골 때리는 주사가 생겼다며 꼴도 보기 싫다고 화를 냈지만, 사실 엄마의 사정은 달랐다. 그 페친이 꼬라지를 부렸다는 것이다. 당신 남편이 속이 없다느니, 누가 내다버린 옷을 줘도 허허실실 한다느니, 좀 챙기라느니, 그런 소리를 했다며. 엄마는 어렸을 때 집이 꽤나 잘살았는데, 어느 정도냐 하면 애들이 도시락 반찬으로 계란프라이에 김치를 싸올 때 혼자 흑빵 사이에 치즈와 햄을 끼운 샌드위치를 싸다닐 정도였다. 그런 엄마가 가난하지만 낙관적인 태수 씨를 만나 있는 속 없는 속 다 버리고 살아왔다. 그러니 페친의 은근한 조롱을 모를 리 없었다. 우리 가족은 그렇게 속없이 살아왔어도, 기쁠 때 기뻐할 줄 알고 화낼 때 화낼 줄도 알고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태수 씨가 아픈 뒤로도 조금씩 기뻐했다. 물론 많이 슬펐지만, 슬픈 와중에도 틈틈이 기뻐했다. 우리는 태수 씨가 아프고 나서 태수 씨의 먹는 것과 싸는 것에 모두 집중하고 좋아했다. 나는 태수 씨가 미음을 한 숟가락 뜨거나 통잠을 자면 온 가족에게 전화를 걸었고 대변을 보면 그것을 사진으로 찍어 기록해 두었다. 내 생전 남의 대변을 사진으로 찍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그런데 병원 생활이라는 게 그랬다. 개인의 모든 식생에 집중하게 되었고 작은 변화 하나에도 심장이 내려앉거나 자그마한 희망을 품게 되었다.

   오후가 되자 장례식장은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나의 가까운 친구들 먼 친구들까지 알음알음 찾아왔는데 태수 씨의 친구가 가장 많았다. 나는 몽롱한 정신으로 조문객을 맞이했고 수첩을 펼친 뒤 SNS나 사진 등을 통해 알아 둔 얼굴을 매치시켜 태수 씨의 말을 전해 줬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울었고 어떤 사람은 웃었다. 또 어떤 사람은 더러 화를 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영문을 모른 채 내가 들고 있는 수첩을 뺏으려 들었지만, 나는 결코 내어 주지 않았다.

   몇몇 노인은 완장을 찬 내게 태수 씨가 아들이 없어 안타깝다는 소리를 했다. 그러면 나는 그렇게 안타까울 일은 아니에요, 라고 맞받아쳤다. 그러면 엄마가 하지 말라고, 그러지 말라고 손을 내저었다. 나는 애도하러 와서 굳이 그런 말까지 하는 사람들이 더욱 이해되지 않았다. 사촌동생이 남자라는 이유로 상주 노릇을 해야 한다는 것도 터무니없는 말이었다. 누구보다 태수 씨를 잘 알고 사랑했던 맏딸이 여기 있는데. 하지만 사랑을 증명할 길은 달리 없었다. 누구의 사랑이 더 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한 트럭의 미움 속에서 미미한 사랑을 발견하고도 그것이 전부라고 말하는데. 더군다나 나는 태수 씨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태수 씨가 아프고 난 다음에야 깨달았다. 휴대폰 알람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와 있었다. 집 비번은? 성식이 형이었다.


*


   생전 태수 씨는 친구가 워낙 많아 장례식장은 빈틈없이 꽉 채워져 있었다. 하지만 나를 통해 온 조문객은 몇 명 없었다. 친한 친구 몇 명만 종일 빈소를 지켜주었다. 소중한 이들에게나 잘하면 된다고 나름대로 담담히 받아들이려고 했지만, 서운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누구에게 서운해 한다는 말인가. 나는 대학 때부터 가까운 친구도 몇 명 없었고 회사도 퇴직금 받을 시기만 다가오면 그만두기 일쑤였다. 바로 직전까지 다니던 회사도 태수 씨를 간병하기 위해 그만뒀지만 겨우겨우 일 년을 채운 뒤 나가는 꼴이 좋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회사는 작은 중고 거래 플랫폼 회사였는데 칸막이도 없는 널따란 공간에 사무실용 책상만 다닥다닥 30개가 늘어서 있는 곳이었다. 휴게실도 없는 곳에서 나를 포함한 직원들은 점심때마다 온갖 음식 냄새를 풍기며 도시락을 먹고 나머지 시간에는 일을 했다. 나는 운영팀에 소속되어 주로 올라온 매물을 검수하고 고객 관리 업무를 했다. 시간이 나면 몰래몰래 데스크톱으로 전자책 뷰어를 다운받아 전자책을 읽었다.

   일은 간단한 만큼 연봉도 매우 작았다. 나는 매일 여섯 시만 되면 자리에서 일어나 퇴근을 했지만, 개발팀은 그러지 못했다. 개발팀은 20대 중후반의 직원들이 대다수였고 막 IT 업계로 발을 들인 사람들이 많았다. 이곳을 발판 삼아 더 나은 곳으로 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 개발팀의 어떤 직원 중 하나가 이 회사의 운영팀이 고삼녀들의 마지막 종착지라며 우스갯소리를 했다고 들었다. 그들이 말하는 고삼녀란 고학력자 삼십대 여성의 줄임말이었다. 운영팀끼리 점심 회식을 하는 자리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왔는데 나는 그 말이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넌지시 말을 보탰다. 그러자 분위기가 싸해졌다. 그러니까, 어딜 가도 나는 그런 식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각양각색으로 태수 씨의 죽음을 애도했다. 통곡을 하는 사람도 있었고 훌쩍이는 사람도 있었고 삼삼오오 모여 술을 마시며 즐거워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슬퍼하는 쪽보다는 즐거워하는 쪽이 편했는데, 우는 것에 너무 질려버렸기 때문이었다. 우리 가족은 태수 씨 없을 때 정말 많이도 울었지만, 태수 씨 앞에서는 함부로 울지 않았다. 그건 태수 씨도 마찬가지였다. 태수 씨는 항암 치료를 시작하면서 요양병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대학병원 병실은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태수 씨는 우리 형편에 1인실이 어렵다는 걸 알아서 2인실을 써야 했지만 병원 원장을 구워삶아 2인실 값에 1인실을 얻어내고야 말았다. 태수 씨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도 태수 씨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언젠가 내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태수 씨는 요양병원 꼭대기 층에 있는, 정원이라고 불리는 정원 아닌 곳을 좋아했다. 그곳에는 비싼 안마 의자도 있었고 족욕을 하는 공간도 따로 있었다. 태수 씨를 휠체어에 태워 그곳으로 데려가면 태수 씨는 담요를 두른 채 휠체어에 앉아 꾸벅꾸벅 졸았다. 그러면 나는 거기서 족욕도 하고 안마 의자에 누워 낮잠을 자기도 했다. 태수 씨는 그게 좋다고 했다. 내가 그러는 거, 족욕도 하고 낮잠도 자는 거. 사실 족욕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하게 미지근한 물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나는 미지근한 물에 오래도록 발을 담근 채 태수 씨에게 말을 걸었다. 나도 태수 씨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태수 씨는 내 말을 듣자마자 그러냐, 했다. 그러더니 내가 어떤 사람인데, 되물었다.

   “모든 일에 훼방을 놓고야 마는 사람.”

   그렇게 말하자 태수 씨가 웃었다. 웃다가 허리가 아픈지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그때 태수 씨에게 고삼녀의 뜻을 알려주며 내가 그런 말을 들었다고 했다. 그러자 태수 씨는 잠자코 이야기를 듣더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물었다. 네가 벌써 서른이니? 응, 태수 씨. 나 서른이야. 많이도 먹었다. 그러게. 근데 말이야. 나이라는 게 사람을 주저하게도 만들지만 뭘 하게도 만들어. 그 사람들이 뭘 모르고 하는 말이야. 아빠는 어이고, 내 나이가 사십이네, 하면서 조금 어른스러워졌고 어이고, 내 나이가 오십이네, 하면서 조금 의젓해졌어.

   “그런데 그거 알아? 나는 태수 씨가 운 걸 딱 한 번 본 적 있어.”

   “언제?”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제 때. 그때 태수 씨가 국화꽃을 놓으면서 하염없이 울었어. 나 꽤 어렸을 땐데. 그래서 되게 무서웠어.”

   그러자 태수 씨가 희미하게 웃었다. 정말 열렬히 사랑했던 사람이었거든. 태수 씨는 그렇게 말하더니 잠자코 있다가 내게 거울을 보여 달라고 했다. 나는 가지고 있는 거울이 없어 휴대폰 전면 카메라를 켜서 태수 씨에게 보여주었다. 그러자 태수 씨가 머리를 이리저리 비춰 보더니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눈물을 흘렸다.

   “아빠, 왜 그래.”

   “무서워서 그래.”

   “뭐가?”

   “있잖아, 수민아. 그냥 죽고 싶은 마음과 절대 죽고 싶지 않은 마음이 매일매일 속을 아프게 해. 그런데 더 무서운 게 뭔지 알아? 그런 내 마음을 어떻게 알고 온갖 것들이 나를 다 살리는 방식으로 죽인다는 거야. 나는 너희들이 걱정돼.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돈이 더 많이 들어서.”

   나와 태수 씨는 그때 처음으로 함께 울었다. 하도 오래 발을 담가서 발가락이 팅팅 불어 있었다. 나는 울먹거리며 태수 씨에게 물었다. 태수 씨는 왜 족욕을 안 하는 거야? 그러자 태수 씨도 훌쩍이며 대답했다. 아빠는 무좀이 있잖아.


*


   그 후로 태수 씨와 나는 더 많은 대화를 나눴다. 알고 보니 태수 씨는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휴대폰을 보지 않는 것도, 내게 나가서 전화를 받으라고 하는 것도 겁에 질려 있어서 그런 것이었다. 자기 빼고 돌아가는 세상이 미치도록 무섭다고 했다. 나는 태수 씨 앞에서 휴대폰을 꺼내는 대신 만화책을 잔뜩 빌려 와 태수 씨와 함께 읽었다. 태수 씨 젊었을 적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이미 몇 번이나 들었지만 못 들은 척했다. 어김없이 성식이 형이 또 나왔다.

   “성식이 형이 네 엄마를 좋아했어.”

   “엄마 인기 많았네.”

   “엄마도 NL이었거든.”

   “아빠는 PD였다며.”

   “응.”

   “그런데 어떻게 연애를 했어? 둘은 사이가 안 좋았다며.”

   “머리핀 공장에서 만나서.”

   나는 태수 씨가 머리핀 공장에서 일을 하는 모습이 좀처럼 상상되지 않았다. 똑딱 핀에 조그마한 큐빅이나 리본을 붙이고 있을 태수 씨. 나는 아직도 NL이 무엇이고 PD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것이 태수 씨와 엄마를 살아 있게 했다는 것은 알고 있다. 세상의 중심을 논하는 방식이었다는 것도 알고 있다. 나는 그것들이 부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똑딱 핀을 만들며 그들은 무슨 도모를 그렇게 열심히 했을까. 나는 여태까지 도모해 온 일들을 떠올리려고 노력하다가 포기하고야 말았다. 그렇게 거창한 일은 생전 해본 적이 없었다.

   새벽 세 시쯤 되자 조문객이 현저히 줄었다. 엄마와 동생은 작은 방에 들어가 잠시 쪽잠을 청하고 나는 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옅은 꿈에서 태수 씨가 나에게 좀 일어나라, 잠충아,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자꾸 내게 했던 말을 또 했다. 태수 씨는 꿈에서도 했던 말을 또 하는구나, 잠결에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런데 누가 내 어깨에 지그시 손을 얹었다. 눈을 떠보니 이전 회사의 차장님이 와 있었다. 나는 놀라 서둘러 몸을 일으켜 인사를 했다. 그러자 차장님이 내 두 손을 잡고 헤벌쭉 웃어 보였다. 차장님은 늘 그렇게 웃었다.

   차장님과 나는 종종 함께 외근을 나갔다. 외근이라지만 하는 일은 볼품없었다. 사장님의 아이들이 하원하는 시간에 맞춰 픽업한 뒤, 사모님이 오기 전까지 놀이터에서 놀아 주는 일이었다. 두 아이는 곧 제주도에 있는 국제학교에 입학할 예정이라고 했다. 사장님은 내게 친절한 말투로 일렀다. 그러니까, 조금만. 수민 씨 인상이 제일 좋아서 그래. 그러나 나는 면허가 없어서 이 회사에 10년 동안 근무하고 있는 차장님이 함께 가게 되었다.

   나와 차장님은 아이들 그네를 밀어 주면서, 미끄럼틀을 태우면서 많은 이야기를 했다. 요즘은 놀이터에 모래가 없네요, 그런 이야기도 하고, 제가 사실 주식으로 1,000만 원을 잃었는데요, 그런 이야기도 했다. 아니 주로 이야기를 하는 쪽은 나였다. 이상하게 차장님의 헤벌쭉한 표정을 보고 있으면 그런 말이 잘도 나왔다. 차장님은 자주 말을 더듬었고 틈만 나면 헤벌쭉 웃었지만 말을 듣다 보면 명민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나는 그런 차장님이 정말 어른 같다고 생각했고 많이 의지했던 것 같다. 차장님은 자리에 앉더니 내게 잠시 앉으라고 손짓했다. 나는 고요한 주변을 둘러보다가 차장님 앞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러자 차장님이 육개장에 밥도 말아 주고 숟가락에 수육도 올려 주었다. 그러면서 내게 말했다.

   “수민 씨 없어서 요즘 회사 다니는 게 아주 고역이야.”

   “그전에도 잘만 다니셨잖아요.”

   “그래도 있다가 없는 거랑 같나?”

   차장님이 육개장을 한 입 크게 먹었다. 그리고 맥주도 한 병 까서 마셨다.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수민 씨가 문자 보냈잖아.”

   나는 할 말이 없어서 식탁을 덮은 여러 장의 전지들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차장님이 말했다. 나는 수민 씨가 조금 다른 사람인 거 대번에 알아봤어. 환경 운동이니 페미 운동이니 그런 배지들 가방에 주렁주렁 달고 다니잖아. 차장님이 진지하게 페미 운동이라고 말하는 걸 듣고 괜히 웃음이 터졌다. 그게 차장님이랑 무슨 상관이 있어요? 내가 묻자 그냥 그런 것들이 보기가 좋았다고 했다. 차장님도 어렸을 때 운동 같은 걸 한 적이 있는데, 그때가 기억이 났다고. 나는 도대체 무슨 운동을 했느냐고 물어 보고 싶었는데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 대신 괜스레 눈물이 났다.

   “차장님도 요즘 여자들이 그렇게 싫으세요?”

   “요즘 여자들? 우리 회사 요즘 여자들은 다 괜찮아.”

   차장님은 10년 동안 같은 회사에 있어서 그런지 모든 사람들을 다 회사 사람들과 비교했는데, 어쨌든 괜찮은 사람들이라는 말로 끝을 맺었다. 나는 차장님이 그래서 좋았다. 요즘 애들, 옛날 애들 가리지 않고 맞춰 가는 그 유도리가 진짜 멋으로 느껴졌다. 그러니까, 나 같은 요즘 애들은 똑딱 핀을 만들면서 무언가를 도모할 거리는 없었지만, 그래도 뜻이라는 게 있었다.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뜻, 의지, 그런 것들. 그런 것이 비록 미적지근할 뿐이지만, 중요한 건 분명히 그런 게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수첩을 꺼내지 않고 차장님에게 말했다. 차장님, 평생 차장님으로 남아 주시면 안 돼요? 그러자 차장님이 헤벌쭉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그럴 것 같지?


*


   사실 태수 씨 장례식 프로젝트의 핵심 인물은 동생 수진이었다. 나와 수진은 일주일을 절반씩 갈라 태수 씨의 간병을 도맡았다. 엄마는 직장을 그만두면 안 되었기에 그렇게 했다. 수진은 처음에는 나보다도 많이 울었지만, 나중에는 누구보다도 먼저 태수 씨의 병에 적응을 하고 이런저런 규칙을 만들기 시작했다. 클리어 파일을 사서 A4 용지를 끼워 넣고, 그날그날 태수 씨가 먹은 것들을 기록해 놓았다. 그리고 그것들을 카톡으로 우리에게 공유하기 시작했다. 변이 나오지 않는다고 하면 유산균을 먹이고, 누룽지를 잘 먹는다 싶으면 바로 쿠팡에서 누룽지 한 박스를 배송시켰다.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그랬다. 나와 엄마는 수진의 지시대로 태수 씨를 간병했고 잠을 못 자면 머리를 쓰다듬어 주라고 해서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러자 태수 씨는 정말 잠에 들었다.

   태수 씨가 옛날에 그런 적이 있었다. 아빠는 죽으면, 장례식은 재미있게 하고 싶어. 그래서 처음에 수진은 나에게 그렇게 제안했다. 태수 씨의 영상을 만들자. 그러나 나는 마른 모습의 태수 씨를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건 태수 씨도 원하지 않을 거라고, 그건 우리 입장일 뿐이라고 딱 잘라 말했다. 그러자 수진이 태수 씨에게 직접 물어 본 것이다. 나는 처음 수진의 말을 듣고 화를 냈지만, 막상 태수 씨를 직접 보니 묘한 활력에 들떠 있었다.

   나와 수진은 교대하기 전 한 시간 정도 시간을 내어 태수 씨의 이야기를 들었다. 돈을 갚지 않고 러시아로 떠나버린 성식이 형에 대해서, 자신이 수배 당했을 때 재워 준 민재 형에 대해서, 내 돌 잔치 때 두 돈이나 되는 금반지를 해준 의식이 형에 대해서. 나와 수진은 그것을 음성 메모로 기록하고 수기로 적으면서 그들에게 해줄 한 마디, 한 마디를 함께 고민했다. 그러다가 상주 이야기가 나왔고 태수 씨는 내가 상주를 할 수 없는 제도가 몹시 못마땅하다고 했다.

   “내가 하면 되지, 상주.”

   “그게 그렇게 되나?”

   “요즘 여자들은 다 해.”

   내가 태수 씨를 째려보듯 말하자 태수 씨가 와하하 웃으며 내게 속이 좁다고 했다. 나는 혹여 태수 씨가 이렇게 말한 것이 남들에게 농담처럼 들릴까 걱정되었다. 그래서 태수 씨가 고통에 몸부림칠 때도 녹음기를 켜두고 태수 씨의 손을 잡고 몇 번이나 물었다. 태수 씨, 내가 상주지? 응. 내가 상주야? 응. 누가? 수민이가, 우리 수민이가······.

   우리는 그렇게 태수 씨의 죽음에 관해 우스갯소리를 하고 이것저것 계획하며 삶을 영위해 나갔다. 그것은 죽음을 도모하며 삶을 버티는 행위였다. 태수 씨는 자신이 죽는 것을 무엇보다 두려워했지만, 자신의 죽음을 계획하는 일에는 두려움이 없었다. 두 가지는 태수 씨에게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렇게 태수 씨가 나와 수진에게 자신의 장례식에 관한 계획 하나를 털어놓게 된 것이었다. 사실은 말이야, 아빠도 좀 이상한 건 아는데, 유자가 내 장례식에 와줬으면 좋겠다.


*


   장례식 마지막 날이 됐다. 발인을 하기 두 시간 전이었다. 조문객 몇몇이 여전히 장례식장을 방문했고 나는 거의 먹지도 자지도 못해 정신이 혼미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때 성식이 형에게 문자가 왔다. 도착. 나는 수진에게 그 문자를 보여주었다. 유자는 15킬로그램이 넘는 진돗개였다. 태수 씨는 퇴직을 한 후에는 귀촌을 하겠다며 철저히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옛날부터 개를 키우는 것이 꿈이었다며 유기견 입양 사이트를 직접 뒤져 유자를 입양해 왔다. 태수 씨는 평소에는 기웃거리지도 않던 부엌에서 고구마를 삶고 고기를 구워 유자에게 주었다. 유자는 갈수록 포동포동해졌고 나와 수진은 제발 그러지 말라고 태수 씨를 타박했다.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사람 먹이는 걸 먹이면 똥 냄새가 더 심하다고. 엄마는 유자를 조금 못마땅해 했다.

   어쨌든 유자는 태수 씨를 졸졸 쫓아다녔다. 태수 씨가 올 때면 어떻게 아는지 엘리베이터 소리만 들려도 꼬리를 흔들고 낑낑거렸다. 태수 씨는 유자의 두 앞발을 들어 함께 춤을 추기도 했다. 노래도 없이 추는 그 춤은 신기하게도 경쾌하게 느껴졌다. 그런데도 나는 유자를 태수 씨의 장례식장에 데려오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태수 씨에게 꼭 그래야 하냐고 묻자 태수 씨는 꼭 그래야 한다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내게 말했다.

   “나는 꼭 훼방 놓고야 마는 사람이잖아.”

   성식이 형은 평소 태수 씨가 타고 다니던 휠체어에 유자를 태워왔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면 유자가 들어간 케이지를 휠체어에 태워왔다. 담요를 덮은 채로. 장례식장에 개를 데려오면 안 된다는 말은 없었지만, 성식이 형은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한 것 같았다. 수진은 성식이 형이 휠체어를 끌고 오자 한달음에 달려 나갔다. 엄마는 성식이 형이 또 장례식장에 오는 것이 이상했는지 나가 보려고 했다. 나는 엄마의 어깨를 잡으며 나와 수진 그리고 성식이 형이 함께 도모한 것이 있다고 했다. 그러자 엄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수진이 담요를 걷고 케이지를 열었을 때, 소리를 질렀다.

   장례식장은 말 그대로 난장판이 되었다. 유자는 장례식장 곳곳의 냄새를 맡고 음식을 먹느라 바빴고 벽에다가는 오줌을 누었다. 직원들이 유자를 잡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녔지만 쉬이 잡히지 않았다. 유자는 내가 있는 곳으로 한달음에 달려와 꼬리를 흔들었고 나는 유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엄마가 울며 소리를 질렀다.

   “니들 진짜 미쳤니?”

   나는 수첩을 들어 엄마에게 해야 할 말을 찾았다. 그리고 해오던 것과 같이 최대한 태수 씨의 말투를 흉내 내며 말했다.

   “공 여사, 자중하시오. 우리의 적은 제도잖아.”

   그러자 엄마, 공 여사가 허탈한 표정으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유자는 태수 씨의 바람대로 길길이 날뛰었다. 화환과 국화꽃을 물어뜯고 이곳저곳 냄새를 맡고 사람들을 향해 짖어댔다. 나와 수진은 서로 은근한 눈짓을 주고받았다. 장례식장 직원들은 성식이 형을 끌고 나갔다. 성식이 형은 끌려 나가면서도 유자의 만행을 끝까지 지켜보려고 했다. 나는 비록 눈물이 차올랐지만, 활짝 웃고 있는 태수 씨의 영정 사진을 보면서 같이 웃어 보였다. 수진도 그랬다. 그것이 태수 씨의 마지막 지령이었기에.


추천 콘텐츠

사과

사과 박솔뫼 어느 날 아침 애리는 자신이 오랜 시간 흔들리는 창을 보며 시간을 보내왔음을 알았다. 일을 하러 가는 길이었고 이곳에 이사와 이 열차를 탄 것은 1년 7개월째였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학교에 들어가기 전 아이일 때 모든 것이 멈춰 서 있고 시간이 영원한 것처럼 느껴지던 때부터 탈 것에 올라타 멀어지는 집과 나무들을 보아 왔다고 느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텐데 왜 그제야 그것이 새삼스럽게 느껴진 것일까. 어딘가로 향하는 감각과 함께 창 너머 공터와 집들과 골목들을 실제로 걷는 일은 왜인지 일어나지 않을 일처럼 느껴지고 언제까지나 좌석에 앉아 멀어지는 사람과 집들과 빨래와 커튼을 보고 있을 것 같다. 애리는 사원 숙소를 제공하는 회사에서 오랫동안 일을 하다 그만두고 나와 집을 구해 살다 사회복지와 개호 관련 자격증을 따고 이후에는 자격증과 상관없는 일을 몇 년을 하였다. 그러다 역시나 숙소를 제공하는 지금의 회사에 다니게 되었다. 회사는 큰 항구가 있는 대도시와 인접한 소도시에 있었고 숙소는 회사 직원만이 아니라 해당 지역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한 곳이었기 때문에 회사와는 아주 가깝지는 않았다. 그 때문에 예전 회사는 숙소에서 회사까지 걸어갈 수 있었지만 지금 회사에 가기 위해서는 숙소에서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역으로 가서 다시 20분가량 열차를 타야 했다. 숙소 앞에서 버스를 타는 방법도 있었고 버스를 타는 것이 여러모로 더 편했지만 버스는 늘 같은 회사 사람들로 붐볐고 앉아 가기가 힘들어서 애리는 보통 열차를 탔다. 오랜 시간 흔들리는 창을 보며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자 곧이어 오랜 시간 기숙사에서 공동 부엌에서 공용 생활공간에서 얼굴만 익숙한 사람들과 살아왔다는 사실이 마치 연결된 문제처럼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둘은 전혀 상관없는 일인데. 마음을 먹자면 살 곳을 구해서 혼자 사는 것이 가능했던 것도 같지만 애리는 왜인지 그럴 마음을 쉽게 먹지 못했다는 생각을 한다. 이렇게 나이가 들어서 공동 숙소에서 사는 것이 부끄럽거나 괴롭지는 않고 돈을 아낄 수 있고 여러모로 편리한 점도 많았지만 혼자 살 집을 찾아 오래 쓸 가구를 사는 일에 겁을 먹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냉정하게 바라본다. 창은 여전히 흔들리고 창밖으로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터가 보인다. 공터 구석에서는 무언가 야채 같은 것을 심는 것도 같지만 대부분은 아무것도 없는 공터. 도시 어느 한구석의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터는 드물다는 생각을 한다. 가끔은 누군가의 넓은 방과 책장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가도 애리는 동시에 이것저것 모든 것을 한 번에 버리고 어딘가로 금세 떠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고 그것이 실제로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지금 생활은 지금 생활대로 좋다고 여기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누군가의 텅 빈 방 (떠올려 보면 아주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는)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 그것을 원하는 마음은 원하는 마음으로 눈에 보이는 곳에 확실하게 붙여 두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텅 빈 방의 모습이

  • 관리자
  • 2025-07-01
알고 싶습니다

알고 싶습니다 최재영 가끔 인생이 내게 애벌레가 파먹는 중인 사과를 베어 물도록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토요일 저녁 아홉 시 뉴스에선 오늘도 전 세계 기아들이 굶고 있고 남미 쿠데타 정부의 진압 몽둥이에 시민들이 맞고 있으며 전장의 포탄은 군인과 민간인들을 죽인다. 그러나 우리 집 안방엔 세 살 연상 아내와 세 살짜리 딸이 곤히 잠들어 있다. 비록 내일이면 공룡 박사 딸은 파키케팔로사우루스 흉내 내며 내 턱에 박치기를 날릴 것이고 아내는 원시인 사냥꾼처럼 괴성을 지르며 딸을 쫓을 것이지만··· 서른여섯 살의 나는 대한민국 성남시의 아파트에, 지금 여기에, 우리 세 가족과 잘 있고, 그것참, 다행이다. 내가 베어 문 사과 반쪽에 벌레가 없어서. 뉴스에 어느 북한군이 등장한 건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전장이었다. 한 북한군이 부상 때문에 낙오했는지 홀로 하늘을 보며 누워 있었다. 러시아 것인지 우크라이나 것인지 모를 드론이 공중에서 그를 촬영하고 있었다. 곧 드론은 부드럽게 수직 하강하며 그에게 다가갔고 그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쓰으윽- 줌인 됐다. 뉴스 진행자와 패널들이 호들갑 떨었다. “너무나 리얼합니다!” 무슨 아는 사람이라도 본 것처럼 오바하네. 나는 그들의 반응에 코웃음 치며 손에 든 캔맥주를 쓰으윽- 들이키려다, 멈칫했다. 아는 사람 같았다. 낯이 익었다. * 약 15년 전 여름, 나는 백령도에 주둔한 해병대 6여단 영창에 15일간 구금되어 있었다. 죄명은 후임 폭행이었다. 막 상병이 됐을 때 생긴 일이었다. 영창의 개인 감방에 들어서자 정말이지 감옥처럼 생겨서(정말 감옥이긴 했지만) 울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철커덩 자물쇠가 닫히는 소리와 함께 스물한 살에 인생이 망해 버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감방 철창 너머론 건물의 입구와 헌병 하나가 근무하며 감시하는 공간이 보였다. 그 공간을 기준으로 네 개의 감방들이 반원을 그리며 각각 1호 창, 2호 창, 3호 창, 5호 창이라는 이름으로 있었다(4호 창은 없었다, 해병대에선 숫자 4를 쓰지 않으니까). 나는 3호 창에 수감됐다. 감방 안에 앉아 있으면 보이는 건 꾹 닫힌 건물 문, 그리고 중앙의 그 헌병밖에 없었다. 양옆의 다른 감방들은 시야에 아예 들어오지 않았다. 1호 창과 5호 창에도 수감자가 한 명씩 있다는 것만 알 뿐이었다. 단 2호 창만은 비어 있다고 했는데 폭행 사건이 일상적이라 항상 미어터지던 백령도 해병대의 영창에선 이례적인 일이었다. 나중에 듣기론 당시 북쪽 상황이 심상치 않아 각 부대들의 징계 절차가 보류됐기 때문이라고 했다. 감방 안은 어두컴컴하고 축축했다. 폭은 누워서 다리를 뻗지 못할 정도였다. 물론 화장실은 따로 없었다. 안쪽으로 세 걸음 가면 구석에 수도꼭지를 비롯해 쪼그려 앉아 일을 보는 일명 고무신 변기가 있었다. 무릎 정도 높이의 아담한 담만이 가림막을 해 주었다. 큰 것이든 작은

  • 관리자
  • 2025-07-01
프레살레

프레살레 반수연 홍은 미로처럼 이어진 길을 솜씨 좋게 빠져나갔다. 홍을 놓칠세라 일행들은 빠른 걸음으로 따라붙었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공항은 번잡했다. 챙이 넓은 홍의 검은색 모자는 인파 사이에서 사라졌다가 나타나곤 했다. 모자가 사라질 때마다 짧은 불안이 스쳤다. 우리 중 누구도 파리에 처음 오는 이는 없었다. 정아는 작년 패션 위크에도 왔다고 했다. 하지만 출구로 빠져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홍을 만난 순간, 홍이 웰컴 투 패리스, 라며 환하게 웃던 순간, 제가 잘 모시겠습니다, 라며 농담과 카리스마가 뒤섞인 환영 인사를 건네는 순간, 홍은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깃발이 되었다. 몇 개의 건물과 긴 복도를 통과해 홍이 예약해 둔 렌터카 사무실에 도착했다. 미리 맡겨 두었다는 홍의 짐이 사무실 모퉁이에 쌓여 있었다. 각지고 거대한 두 개의 캐리어, 명품 마크가 선명한 가죽 배낭과 보스턴백, 두 개의 쇼핑백도 포개져 있었다. 캐리어 계의 에르메스라는 바로 그 리모와 아닌가요? 색깔 너무 이쁘다. 이삿짐을 떠올리게 하는 홍의 짐에 약간의 충격을 받은 나와는 달리 정아는 레몬색 캐리어에 먼저 관심을 보였다. 자기야, 그건 좀 그렇지 않아요? 에르메스야 버킨 말고는 뭐가 있나. 홍과 정아의 대화를 들으며 나는 며칠 전 정아가 단톡방에 올린 메시지를 떠올렸다. 유럽 항공은 수하물 분실이 잦으니 위탁 수하물 없이 기내용 캐리어와 작은 손가방으로 짐을 제한해요! 정아는 해당 항공사의 기내 반입 수하물 규정을 캡처해서 올리며 당부했다. 같은 옷을 이틀 연달아 입거나, 옷과 콘셉트가 맞지 않는 신발이나 가방을 견디지 못하는 예민한 패션 감각의 소유자인 정아가 분실이 두려워 그런 제안을 한다는 건 조금 의외였다. 그런데 이제 보니 정아는 홍의 짐이 어마어마하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정아가 홍을 위해 우리 짐을 단속했다는 사실보다 진실의 내막을 뒤틀었다는 것이 묘하게 신경을 긁었다. 독일제 7인용 SUV 차량의 마지막 3열을 접어 트렁크의 공간을 넓혔다. 홍의 캐리어를 먼저 싣고 그사이에 네 개의 기내용 캐리어를 테트리스 하듯 넣었다 뺐다 씨름하느라 손가락이 욱신거렸다. 어찌어찌 짐을 욱여넣고 나니 트렁크는 룸미러로 후방이 보이지 않을 만큼 꽉 찼다. 배낭이나 손가방은 발아래에 두거나 안고 타면 될 거라고 홍이 운전석으로 올라타며 말했다. 나는 노트북과 파우치와 책이 담긴 배낭을 가슴에 안고 뒷좌석에 올라 안전띠를 당겨 맸다. 짐과 사람이 뒤엉켜 숨 쉴 공간마저 충분치 않게 느껴졌다. 답답함이 불안으로 바뀌며 숨이 가빠 왔다. 다른 일행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프로작을 한 알 꺼내 입에 물고 창을 조금 열었다. 약기운이 신경을 눌러 주기를 기다리며 눈을 감았다. 파리는 오전 열한 시, 한국은 오후 여섯 시였다. 지금쯤이면 윤수는 일어났을 것이다. 냉장고 제일 위 칸에 김치찌개 있어. 냉동실에 육개장도 얼려 두었어.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어. 공항으로 출발하기 전 나는 신발을 신다 말고 식탁에 앉아 짧

  • 관리자
  • 2025-07-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1건

  • 최고에요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결국 유자가 (그 개) 장례식장을 발칵 뒤집어 (혁명) 놨네요. 부조리한 가족 내 제도를 헝클어 뜨리고 싶었다고 생각해 봤습니다. 딸을 위해서요. 사회 문제에는 한껏 목소리를 높이지만, 제사 문화 같은 가족 제도 안의 부당함에는 침묵하고 그저 참고 살라 말했던 게 미안했구나 싶었습니다. 그는 "모든 일에 훼방을 놓고야 마는 사람"이니까요. ㅎㅎ 생각해 보니 장례문화만큼 남성 위주로 돌아가는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상주는 무조건 남자, 관 운구도 남자가, 영정 사진 드는 것도 남자가 하는 거라죠? 물론 요즘은 조금씩 바뀌는 추세라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소원합니다. 그나저나 결말에 이르기까지 결국 아빠라는 호칭은 한 번도 안 나오네요? ^^; 저는 태수 씨가 기꺼이 장례식 훼방꾼이 됨으로 딸과 좀 더 가까워진 거라 생각했고 그래서 '태수 씨'가 아닌 적어도 한 번은 아빠라고 부를 거라 내심 기대하며 읽었드랬습니다. 홍길동도 아니고 왜 호부 호형을 안 한답니까? ㅠ 근데 소설에 보면 '태수 씨'라는 호칭은 암 진단 후 고모가 지어 온 이름이고 그때부터 태수 씨를 태수 씨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나오는데요, 그럼 암 진단받기 전에는 딸은 아빠를 뭐라 불렀을까요? 설마 '형주 씨' 뭐 이런 건 아니었겠죠? ㄷㄷ 더 궁금한 것들이 많지만, 좀 사소한 것들인지라 ... 다음에 기회 되면 여쭙겠습니다. 재밌는 이야기 공유 감사합니다.

    • 2024-01-10 22:22:03
    최고에요
    0 / 1500
    • 0 /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