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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는 사람

  • 작성일 2024-11-01

   기억하는 사람

   ―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최의진


1. 기억


   당신이 나의 일상에서 멀고, 당신의 고통을 내가 곁에서 함께 겪을 만큼 가깝지 않다면, 당신이 기억난다는 말은 이런 것이다. 당신을 떠올리게 하는 계절이 지나면 어느덧 제삼자가 된 것처럼 나도 모르는 사이 먼발치에서 살아왔다는 것. 잊으려 애쓴 적 없고, 오히려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으나, 그럼에도 그 기억 곁에 항상 머물러 살지는 않았다는 것. 물론 이는 분명 망각과 구별되며, 머릿속 어딘가에 당신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기억함’과 닮았으므로 우리는 때로 외부 요인에 의해 촉발되는 ‘기억남’이나 ‘떠올림’을 다른 누군가 없이도 당신을 계속해서 내 안에 간직하는 ‘기억함’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4·3, 5·18, 4·16··· 혹은 제주, 광주, 팽목항···처럼 뭉툭한 날짜와 지명으로 적히는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살아 있는 당신을 마주하게 되면 내가 ‘기억함’이라 믿어 왔던 모든 순간은 다시 의심에 넘겨진다. 어디선가 당신의 이름을 마주치거나, 때가 되면 당신이 기억났지만, 그 이상으로 지속되지 않았던 기억의 공백들은 당신을 계속해서 기억하려는 의지가 내게 없었음을 짚고, ‘기억남’과 ‘기억함’의 사뭇 다른 무게를 증명한다. 매해 봄이 오면 세월호가 기억나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 싸우고 있는 사람들을 떠올리는 것을 넌지시 ‘기억함’으로 여겨 왔으나, 10년을 상실에 꿰뚫린 채 진실을 밝히기 위해 살아온 사람, 그리고 그들의 가장 가까운 곳에 서기 위해 삶을 바쳐왔던 사람과 실제로 마주 앉자, 나는 당신들을 기억한다고 차마 말할 수 없었던 것처럼.

   익숙하게 기억한다 말하던 자리가 낯설고 무거워지는 것이 ‘나’1)와 당신의 끝이 되지 않도록, 문학은 ‘기억남’에서 ‘기억함’에 이르는 길을 놓는다.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는 작별하지 않는 ‘기억함’을 단지 당위와 윤리로 여기는 대신, 끊임없이 질문하며, ‘기억남’이 몰고 오는 고통과 ‘기억함’이 품은 의지가 심장에 불을 켜는 삶 사이를 횡단한다. ‘기억남’은 어떻게 해야 ‘기억함’이 되는지, ‘나’가 ‘기억함’의 무게를 견딜 수 있을지, ‘나’에게 정말 이 길만이 유일한지. 



2. 밀물과 썰물


   소설의 1부를 이루는 축은 “그 도시의 학살”2)에 대한 책을 집필한 후, 그리고 친구, 인선의 부탁을 받아 오로지 새 한 마리를 살리기 위해 제주의 중산간으로 향하는 길에서 경하가 겪는 고통이다. 고통을 겪고 묘사하는 일인칭 주체가 경하이기에 표면에는 타인의 고통보다 ‘지금-여기’에서 겪는 그녀의 고통이 드러나지만, 결국 이 고통은 ‘과거-그곳’의 사건으로 고립된 타인의 고통을 ‘지금-여기’의 고통으로 통역하는 경유지이자 현재와 맞물리게 하는 통로로 자리한다.

   작가인 경하는 학살에 대한 책을 낸 후에도 학살당한 사람들의 고통과 작별하지 못한 채 악몽과 불안에 시달린다. 그녀가 집필하고 있는 시간과 재현의 대상이 된 시간의 간극이 수십 년임에도 그렇다. 자신이 재현하려던 죽음을 함께 앓는 것처럼 경하는 작업실로 가는 도보 15분의 짧은 길에서도 “일차선 도로 건너편 건물들의 옥상에서 저격수가 사람들을 조준하고 있을 것 같”아 불안해한다. “수면의 질” 또한 “차츰 더 나빠지고 호흡이 짧아”진다. “악몽과 생시가 불분명하게 뒤섞”(19면)인 채 무너져 가는 삶을 견딜 수 없어, 그녀는 유서를 쓰며 살아서는 작별할 수 없는 고통과 작별을 시도한다.

   이 고통의 표면에 드러나는 것은 계속해서 타인의 고통을 떠올리며 무너져 가는 경하지만, 표면이 비추는 것은 학살이라는 단어에 다 담길 수 없으며, 그 일부를 써보려는 시도만으로 삶을 무너뜨리는 타인의 고통이다. 현재를 무너뜨리는 위력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타인의 고통은 그것을 ‘나’와 분리된 ‘과거-그곳’의 일로 여기며 거리를 둘 수 없을 만큼 ‘지금-여기’와 가까워진다. 좁아진 거리는 타인의 고통을 끊임없이 생각하도록, 그리하여 그것을 “손쉽게 여읠 수”(23면) 없도록 만든다. 이처럼 ‘나’가 타인의 고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은 ‘나’의 고통이 자기 연민으로 닫히지 않도록 열어, ‘기억함’의 방향으로 돌려세운다.

   타인의 고통을 여의지 못한 채 꾸기 시작한 경하의 꿈은 유서를 쓰는 현실보다도 앞서 ‘기억함’을 향해 뻗어간다. 꿈에는 사람의 형상을 닮은 통나무 수천 그루가 서 있는 벌판이 등장한다. “수천 명의 남녀들과 야윈 아이들이 어깨를 웅크린 채 눈을 맞고”(9면) 있는 것 같은 검은 나무들 뒤에는 봉분이 엎드려 있다. 그러나 그 벌판의 끝은 바다이기에 뼈들은 밀물을 피할 수 없고, 썰물과 함께 쓸려 나간다. 경하는 꿈속에서 그녀를 짓누르는 전율을 견뎌내며, 물이 더 차오르기 전에 뼈를 옮겨야만 한다는 다급함에 들끓는다. 뼈를 옮길 수단 하나 없음에도 그녀는 아직 묻혀 있는 마른 뼈들, 여전히 남아 있는 타인의 고통과 죽음으로부터 떠나는 방향을 택하는 대신 오히려 “파도가 휩쓸어가버린 저 아래의 뼈들을 등지고”, “아직 무사”(26면)한 뼈들을 향한다. 현실에서는 간절히 그들의 고통과 분리되고 싶어 작업실을 마련하고, 죽어서라도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유서를 써 왔음에도 그렇다.

   한편, 경하가 인선의 새를 살리기 위해 제주에 도착했을 때, 여의지 못하던 타인의 고통과 꿈속 벌판에서 그녀를 겨누던 위압적인 전율은 폭설이 되어 현실로 도래한다. 내리는 눈은 경하가 걸어온 모든 길을 덮어 그녀가 돌아갈 길을 끊고, 인선의 집으로 가는 길만을 유일하게 만든다. 마중 나와 줄 인선도, 인선의 집까지 데려다줄 다른 수단도 없이 도보로 걸어가야 하는 마지막 구간에서 경하는 비탈에서 굴러 건천으로 떨어진다. 손목에 걸린 시계조차 볼 수 없는 어둠 속에 남은 것은 “통증보다 끔찍”(127면)하고, 턱이 아프도록 떨려 소매를 물고 버텨야만 하는 추위뿐이다.

   추위가 고통마저 집어삼킨 채 경하를 무감하게 만드는 만큼, 고통을 초과한 죽음은 그녀에게 서늘하게 스민다. 폭설이 만드는 추위와 어둠이 경하의 얇은 피부로 침투하는 만큼 ‘나’와 타인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벽은 한없이 얇아진다. ‘나’가 ‘나’를 유지하기조차 어려워지는 그 순간, 수십 년 전 제주 중산간에서 벌어졌던 고통과 죽음은 시간이라는 물리적 경계를 넘어 현실의 눈송이로, 생생한 감각으로 경하에게 떨어지고, 나의 고통은 여읠 수 없는 타인의 고통과 맞물린다.(“칠십 년 전 이 학교 운동장에서 수백 명의 아이들과 여자들과 노인들의 얼굴이 눈에 덮여 알아볼 수 없게 되었을 때 (···) 그 물방울들과 부스러지는 결정들과 피 어린 살얼음들이 같은 것이 아니었다는 법이, 지금 내 몸에 떨어지는 눈이 그것들이 아니란 법이 없다.”(136면))

   타인의 고통이 외부에서 ‘나’를 둘러싼 채 끊임없이 그들을 생각하게 만드는 것을 넘어, 자아의 외벽을 무너뜨리고 ‘나’의 안으로 밀려 들어왔기에, ‘나’는 외부의 무언가가 타인의 고통을 기억하라 떠밀지 않더라도 스스로 그들을 떠올릴 수 있게 된다. 이는 타인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한다거나, 그들과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불가능한 상상 대신 이제 ‘나’가 타인을 기억할 수 있다는 하나의 가능성만을 남긴다. 그럼에도, ‘기억함’에 이르기 위해서는 한 걸음이 더 필요하다. 밀려들어온 타인은 둑을 쌓지 않는 이상 언제든 다시 썰물처럼 빠져나갈 수 있으므로.



3. 둑


   타인의 고통이 ‘과거-그곳’에 있는 먼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여기’에서 ‘나’를 둘러싸고, 마침내 ‘나’를 밀고 들어올지라도, 그것을 계속해서 기억하며 여의지 않는 삶, “단지 그것밖엔 길이 없”(27면)다 고백하는 일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밀려들어온 타인의 고통이 ‘나’의 기억 속에 머물게 하기 위해서는 의지적 선택이 필요하다. 타인의 고통을 기억하기 위해 나아가는 길 위에는 그로부터 돌아설 수 있고, 돌아서고 싶은 순간 또한 무수하기에, 같은 방향을 끝까지 견지하기 위해서는 몇 번이고 고통과 함께 도래하는 분기점에서 의지적으로 타인의 고통을 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선의 부탁을 받은 경하가 새를 살리러 가는 모든 여정에도 그녀의 의지와 선택이 개입되어 있다. 언뜻 보기에는 거대한 눈구름과 폭설이 돌아갈 길을 끊었기에 경하가 앞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도 같지만, 그 길만이 유일한 것은 아니었다. 인선의 부탁을 “거절할 방법이 없었다”(67면)고 말하지만, 경하에게는 새를 꼭 구해야만 할 책임은 없었다. 인선이 경하의 꿈속 벌판에 나오는 나무들을 실제로 재현하는 공동 프로젝트를 홀로 진행하다 사고가 났다 하더라도 그렇다. 경하는 분명 그만두자고 말했으나, 인선이 홀로 나무를 준비했고, 결정적으로 인선은 경하의 어떤 자책에 기대어 새를 부탁하지 않았다. 경하는 여기에서 인선의 무리한 부탁을 거절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경하는 비행기를 타고 제주로 날아갔다. 어떤 택시도 곧 길이 끊길 것 같은 중산간으로 들어가 주지 않았을 때, 직원에게 물어 가며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일주 버스를 타고 가서 P읍에 내려 오래도록 지선 버스를 기다렸다. 더는 갈 수 없다고 말하려 인선에게 전화를 걸기도 했으나, 제대로 연락이 되지 않자 결국 뒤늦게 들어온 지선버스에 올라타 먹구름과 눈안개가 그득한 중산간으로 향했다. 인선의 집과 가장 가까운 세천리 정거장에 내려서는 제대로 된 랜턴 하나 없이 눈밭을 걸어 인선의 집으로, 살아 있을지도 모르는 새에게로 걸었다.

   경하가 사람을 찾아 길을 묻고, 버스에 오르고, 갈아타기 위해 P읍에 내리고, 결국 지선 버스에 올라타고, 세천리에 내리고, 인선의 집으로 걸어 올라가는 모든 순간은 타인의 고통에서 돌아설 수 있는 분기점이었다. P읍에서 내리지 않고 계속 버스를 탄 채 공항으로 돌아갔다면, 오지 않는 지선 버스를 기다리는 대신 다시 일주 버스를 잡아타고 서귀포로 가서 인선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했다면, 세천리로 들어가는 마지막 지선 버스에서 내리지 않고 P읍으로 돌아갔다면, 경하는 인선의 집 대신 제주 시내로, 혹은 서귀포로 돌아갈 수 있었다. 폭설이 내리고 있었으므로 인선이 부탁한 시간 안에 도착하지 못한 것은 얼마든지 어쩔 수 없는 일로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분기점에서 경하는 새를 택했다. 어떻게든 새를 구하겠다는 결연함은 없었고 오히려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았으면서도, 결국 모든 분기점마다 “오늘 안에 물을 줘야 살릴 수 있”(130면)는 새에게로 걸었다. “이 눈보라를 뚫고 오늘밤 그녀의 집으로 갈 만큼 그 새를 사랑하지 않는다”(88면) 말하였으나, 그 새 때문에, 죽을 만큼 스미던 추위와 무시무시한 폭설을 견디고 마침내 인선의 집에 이르렀다.



   새장 앞으로 돌아와 선다.


   방금까지 따듯한 피가 돌았던 듯 생생한 적막에 싸인 조그만 몸을 들여다보는 동안, 그 끊어진 생명이 내 가슴을 부리로 찔러 열고 들어오려 한다고 느낀다. 심장 안쪽까지 파고들어와, 그게 고동치는 한 그곳에서 살아가려 한다.(150~151면)



   비행기를 타고, 버스에 오르고, 눈길에 늦어지는 버스를 기다리고, 갈아타고, 눈밭을 걷는 일. 이것은 너무나 크고 위대하여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은 아니다. 다만 각각의 순간마다 경하에게 분명한 의지와 선택을 요구하는 일이었고, 그녀는 때마다 작은 희생을 지불했다. 켜켜이 쌓인 이 의지는 경하가 인선의 새, 아마에게 닿을 길을 놓는다. 경하가 물리적으로 인선의 집에 도착해 죽은 아마를 묻게 할 뿐 아니라, 그녀의 “심장 안쪽까지” 아마를 들일 길을 낸다. 새가 경하에게로 파고들 수 있다는 말은 곧 경하가 새를 사랑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녀가 죽은 아마가 “나의 새가 아니”고, “사랑한 적도 없다”(152면)고 말할지라도 그렇다. 죽은 아마 앞에서 “시고 끈적이는 눈물이 솟”(같은 면)을 만큼 경하는 새를 사랑하고 있다. 사랑은 결국 타인을 ‘나’의 중심에 두고자 부단히도 애쓰는 일이기에, 갈라지고 또 갈라지는 분기점마다 아마를 택하려 노력하고 의지를 쏟았던 경하의 모든 길은 그녀가 아마를 사랑하게 되기까지의 여정과 다르지 않다.



   심장이 다시 뛸 거지. 그렇지, 이 물을 마실 거지.(170면)



   이 사랑은 타인의 고통과 작별하고자 하던 시도를 작별하고 싶지 않다는 간절함으로 바꾸고, 타인의 고통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지 않도록 둑을 쌓는다. “심장 안쪽까지 파고들어”온 타인이 ‘나’의 심장이 “고동치는 한 그곳에서 살아가”(151면)기를 간절히 원하게 되는 그때, ‘기억남’은 의지와 사랑을 힘입어 비로소 ‘기억함’에 이른다.



4. 연쇄


   ‘기억남’이 ‘기억함’에 닿으면, 소설은 작별을 명령하던 죽음과 시공간의 경계가 함께 무너지는 환상과 현실의 경계면으로 접어든다. 소설의 2부에서는 멈추는 법 없이 흐르는 시간이, 섬과 육지를 가르는 바다의 힘이 무력해진다. 생사의 경계가 지워지며 아마가 살아 돌아오고, 몇 해 전 죽은 새, 아미가 그림자로 날아든다. 시공간의 경계가 흔들리며 병원에 있어야 할 인선이 멀쩡한 오른손으로 제주 집에 나타난다. 제주 4·3의 모든 폭력과 죽음, 그리고 고통과의 작별을 명령하던 압력 또한 잠시 멎는다. 타인의 고통과 죽음이 ‘나’ 또한 죽이리라는 두려움이 잠잠해지고, 오래 지났으니 그만 잊어도 좋다는 핑계가 불가능해진다. 그 경계면 속에서 잠잠히 타인의 흔적을 읽고, 들여다보고, 듣는 고요함으로 실현되는 ‘기억함’은 작별에 저항하며, 기억하는 과정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통증 속에서도 끝까지 타인을 간직할 길을 찾는다.

   쌓인 시간과 먼 거리가 밀어붙이던 작별이 유예된 그때, “들보가 무너지고 재가 솟구치던 자리”(244면)에서 비로소 들리는 소리가 있다. “말 사이의 침묵이 길”고 “내러티브가 끊어져 있”(34면)어 이해하기 어려웠던 고통과 죽음들이 그것이다. 그 고통을 심장께에 심은 경하는 한없이 잠잠해지는 방식으로 그들을 기억한다. 인선의 어머니 정심이 4·3 당시 죄 없이 끌려가 이감되는 중 실종된 오빠를 찾기 위해 평생에 걸쳐 죽음을 추적하고 들여다본 기록을 읽고, 인선의 증언을 통해 그 기록의 행간을 듣는다. 일련의 과정은 누구도 해치거나 부수지 않을 세심하고 미약한 움직임으로 이루어진다. 그녀들은 촛불 하나를 의지하여 고개를 숙인 채 절멸되지 않았던 자들의 증언을 읽고, 삭아버린 신문 조각들이 부서지지 않도록 애쓴다.

   이 조심스러움 속에서 “소녀인 채로 늙은”(82면) 듯한 정심의 형상은 평생을 걸쳐 죽음을 들여다보며 싸워 온 정심의 평생과 연결되어 입체를 이룬다. 그녀가 평생 악몽을 쫓기 위해 요 아래 깔아 두었던 실톱은 악몽을 두려워하는 나약함이 아니라, 군사정부 삼십사 년의 암흑 속에서도 어떤 모습으로든 돌아와야 할 가족을 기다리며 견뎌낸 간절한 사랑의 증거로 자리한다. 경하의 여정 내내 누군가의 증언으로, 다큐멘터리의 일부로, 섬뜩한 폭력에 대한 묘사로 조각난 채 그녀 외부의 사건으로 삽입되던 제주 4·3의 고통은, 이제 정심의 인생이라는 내러티브를 가지고 하나의 삶을 이루며, 새가 파고들었던 그 자리에 깃든다.

   타인을 ‘나’의 심장에 깃들이며 기억하는 일은 분명 고통스럽기에, 계속해서 기억하며 정심의 삶을 짚어 나가던 경하는 인선이 유해 발굴에 대한 자료집을 내밀 즈음에는 더는 뼈들을 보고 싶지 않다고, 페이지를 넘기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분기점마다 새를 택해 온 경하의 의지와 죽은 새가 심장에 머무르기를 바랐던 사랑은 “떨리는 손”(285면)의 모습으로 뻗어 나가 표지를 열며, 정심이 고통 속에서도 끈질기게 견뎌 온 세월과 학살당한 채 뼈들로만 남은 이들이 그녀의 중심에 머물도록 붙든다.

   새에 대한 사랑이 정심과 수많은 뼈에 대한 사랑으로, 죽은 새를 기억함이 오랜 침묵 속에 있던 죽음을 기억함으로 이어지는 연쇄는 힘주어 작별을 밀어내며, “뭔가 안쪽에서 어른거리는 것”이 보일 때까지 “얼굴을 붙이고 끈질기게 들여다”(320면)보게 만든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321면)가 “이상한 이야기라고 생각되지 않”(322면)을 때까지 듣고 또 듣게 한다. 이 연쇄 속에서 ‘나’는 비로소 당신 앞에서 차마 말할 수 없었던 한 문장을 고백할 입술을 갖게 된다.



5. 숨


   나는 당신을 기억한다. 이 한 문장에 진실해지기 위해 ‘나’는 타인의 고통 곁에 앉았으며, 타인이 ‘나’의 안으로 밀려들어오도록 두었다. 그 고통 전부를 이해하거나 모든 삶을 내어줄 수 있다는 불가능을 꿈꾸는 대신, 타인의 고통으로부터 돌이킬 수 있는 분기점마다 오히려 그들을 향해 몸을 기울이며 작은 의지들을 켜켜이 쌓았다. 그렇게 타인을 ‘나’의 중심에 두려 애쓰는 동안 ‘나’는 그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타인은 ‘나’를 열고 들어왔고, ‘나’는 그리하여 그들을 ‘나’의 바깥이 아니라 심장에 심는 ‘기억함’에 이르렀다. 타인에 대해 말하거나 판단하는 대신 오로지 고요하게 타인의 고통을 듣고, 읽고, 들여다보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지금껏 듣지 못하던 타인의 고통과 죽음 한 조각을 붙들게 되었다. 그들을 붙든 손과 깃들인 심장에 통증이 일어도, 이미 타인을 사랑해 온 마음은 손에 힘을 빼고 등을 돌리는 대신 계속해서 타인을 기억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이 문장 또한 진실이다. ‘기억남’에서 ‘기억함’으로 가는 “그 페이지들을 건너가라고 누구도 강요할 수 없다”.(285면) 기억해야 한다는 말에 “복종할 의무가 나에게 없다”.(같은 면) 그렇기에 사랑과 기억함의 연쇄 사이로 낫지 않을 통증이 또다시 치밀고, 타인의 고통에 온전히 다가설 수 없다는 절망이 ‘나’의 발목을 잡고, ‘나’의 심장에 깃들였음에도 타인이 때로 멀어 보이는 순간, 충분히 질문할 수 있다. 기억하기 위해 살아가는 이 길만이 정말 유일한가. 소설은 당위와 윤리의 엄격한 얼굴 대신 사랑으로 대답한다. 4·3 당시 학살당한 사람들의 얼굴 위로 내리던 눈송이가 순환하여 경하의 뺨에 닿듯, 이 세계는 ‘나’로만 이루어지지 않고 무수한 타인과 연결되어 있다고.3) 그러니 엮이고 기대어 살아야만 하는 세계에서 기억하고 사랑함으로 맞닿지 않은 채 타인을 버려둔다면, 그것은 결국 스스로 ‘나’를 버리고 고립시킨 채 죽어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경하가 그러했듯, 타인을 사랑하고 기억할 때만 ‘나’의 삶이 가능해진다고.

   경하는 죽어서라도 타인의 고통과 작별하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쉽게 유서의 수신인을 채우지 못했기에 살아남았다. 자신의 유서가 수신인에게 만들 수 있는 충격, 그 충격으로 인해 “쉽게 부서지고 끊어져 버릴 가능성을 품고 있는”(15면) 타인을 자신의 고통보다도 먼저 기억하는 염려로 말미암아, 죽음은 “미세한 각도의 오차로” 그녀를 “비껴갔다”.(같은 면) 새를 살리기 위한 여정 속에서 경하의 심장에 사랑으로 깃들인 타인의 고통은 아마의 가칠가칠한 발이 되어 그녀의 “심장과 눈동자에 동시에 불”(184면)을 댕겨 추위를 몰아내고, 시공간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돌아온 인선이 되어 조릿대 잎으로 차를 끓여 주며 경하의 몸을 덥혔다. 살아 있도록, 계속해서 살아가도록.

   삶을 가능하게 하는 이 사랑은 오로지 타인을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나’에게로 흘러 들어오기에, ‘기억함’을 향한 여정은 계속되어야 한다. 타인을 여의고 안온하게 죽어가라고, 삶과 작별하라고 밀어붙이는 명령에 속지 않는 방법은 이것뿐이다. 이제 “초가 얼마나 타들어갔을지 더 이상 생각하지 않”(307면)고 타인의 고통을 심을 벌판을 향해, 작별하지 않기 위해 어둠을 가르고 나아간다. 당신을 기억한다. 작별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간다.*


1) 이후 언급되는 ‘나’는 기억남에서 기억함으로 이행하는 주체를 의미한다.

2)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문학동네, 2021, 12-13면. 이후 본문의 내용을 인용할 경우 면수만 표기한다.

3) “타자의 삶, 즉 나 자신의 것이 아닌 삶은 또한 우리의 삶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이 가진 어떤 감각이든 이와 같은 사회성으로부터 오며, 사회적 세계 안에서 구성되는, 그리고 사회적 세계에 의해 구성되는 타자의 세계에 처음부터 이미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이는 우리 각자가 얼마나 개별적 존재인지에 상관없이 서로에게, 그리고 인간 형태를 넘어서는 삶의 과정들에 엮여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주디스 버틀러, 김응산·양효실 역,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 집회의 수행성 이론을 위한 노트』, 창비, 2020, 159-16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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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여성 + -향’이라는 함정

‘남성/여성 + -향’이라는 함정 이융희 ‘남성/여성 + –향’ 분류의 형식과 한계 올해 초 X(구 트위터)에서 한 가지 해프닝이 있었다. 한 연구자가 ‘남성향’ 웹소설을 보는 여성 독자를 찾겠다며 연구 설문을 돌렸는데 다수의 유저가 연구자의 대상 텍스트가 ‘남성향’ 웹소설이 아니라 ‘여성향’ 웹소설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현재는 해당 글이 삭제되었으나, 해당 연구자가 발표한 논문을 통해 어떤 웹소설이 ‘남성향 작품’으로 프레이밍 되었는가 확인해 볼 수 있다.1) 해당 논문에서는 예시 작품으로 , , , , , , , , , , , , 등을 제안한다. 리디, 네이버, 카카오페이지 등 대형 플랫폼과 달리 ‘문피아’는 각 소설에 대한 로우데이터를 제공하는데 상술된 소설의 남녀 통계를 살펴보면 은 남성 20.8%, 여성 79.2%,2) 3)는 여성 50.5%, 남성 49.5%, 은 여성 61.9% 남성 38.1%4) 은 여성 41.8%, 남성 58.2%5) 는 여성 51.9%, 남성 48.1%6) 등임을 고려한다면, 해당 작품을 ‘남성향’이라고 규정한 연구자의 이야기가 시장에서 거부된 까닭을 짐작게 한다. 일련의 사태는 시장에서 범용적으로 사용된 용어가 학계에 저항 없이 사용될 때 또는 시장의 용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 학계에서 다른 의미로 전유해 해석했을 때 발생하는 단절을 강하게 시사한다. ‘남성/여성 + –향’이라는 이분법이 업계에서 넘어와 학계에서도 자주 사용되는 만큼 지금 여기의 웹소설을 제대로 분석하고 비평하기 위해선 ‘남성/여성 + -향’이란 이분법이 과연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구조에 대해서 고민하고 입법시켜야 한다. 지금까지 ‘남성향’과 ‘여성향’의 분류는 두 가지 축을 바탕으로 논의되었다. 한 축은 시장에서 널리 통용되는 서사의 내용과 형식 기준의 분류법이고 또 하나는 소비자들의 젠더적 욕망과 정치적 수행 행위로 보는 연구자들의 해석이다. 전자의 경우 좁게는 서사 내부에 존재하는 작은 기호부터, 넓게는 서사를 직조하는 각 시퀀스의 구조와 연출, 전개를 통해 인물이 획득하는 보상의 성향, 전체 작품의 주제 등에 따라 해당 서사의 종합적인 결과물을 남성적 구조와 여성적 구조로 나눈다. 이러한 분류는 통상 작법서를 통해 시장으로 재생산된다. 시장에서 요구되는 ‘좋은 웹소설’을 교육하기 위한 작법서에서는 웹소설 작가들과 독자, 그리고 유통망이 추구하는 ‘남성향/여성향’의 대상 텍스트를 판타지, 로맨스, 로맨스 판타지, 무협 등 하위 장르에 선행하는 상위 범주로 간주한다. 이 안에서 로맨스(판타지)라는 ‘여성향’ 장르와 판타지·무협(줄여서 &lsquo

  • 이융희
  • 2026-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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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하는 나

비평하는 나 윤옥재 인간은 항상 자기가 사랑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데 실패한다. - 롤랑 바르트 1. 최근 ‘비평하는 나’를 둘러싼 것들 # 1) 파편의 리스트 혹은 반(反)구조적 잡록 나는 이 글에 대해 반(反)구조적이라는 비평이 들어올 것을 상상한다.1) 이 문장은 나의 것이 아니라 롤랑 바르트의 것이다. 롤랑 바르트가 자신의 저서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에 대한 메타적 인식을 표현한 이 문장은 바로 그 책을 구성하는 200여 편의 짧은 텍스트들 중 하나인 ‘잡록과 작품’의 첫 문장이기도 하다. 바르트는 이 무수한 파편적 단상들의 모음을 “백과사전” 혹은 “이질적이고 잡다한 오브제들의 리스트”로 명명한다. 파편적 글쓰기의 구조적 취약성을 ‘반구조적’이라는 자평을 통해 스스로 드러내는 그의 자조적 태도는 매혹적이다. 그가 일컬은 미친 ‘잡록(polygraphie)’2)에 착안해 이 글 역시 파편적인 방식으로 써 보려 한다. # 2) 에세이, 아마추어리즘, 자기이론 ‘비평적 에세이’ 혹은 ‘에세이적 비평’이라는 화두가 머릿속에 자리 잡게 된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확실치 않다. ‘비평적 글쓰기’라는 구체적 방향성을 갖게 된 시점부터 나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에세이’라는 형식과 ‘아마추어리즘’이라는 개념이 비평과 맺는 관계에 관한 생각들이다. ‘비평의 에세이화’에 대한 비판이 이미 2010년대 초반부터 이루어졌다는 것을 인식한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다. 한 명의 문학 독자였던 나는 언젠가부터 비평 텍스트에 나타나기 시작한 ‘나’라는 일인칭 표현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비평은 쓰는 자의 주관과 감정을 최대한 배제해야 하는 장르라는 선입견이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불가피하게 자신을 지칭해야 하는 경우 사용되던 ‘필자’라는 말에 나는 불편함을 느끼곤 했다. 왜 ‘나’라고 하면 안 되는 거지? 사정이 이렇다 보니, 비평을 쓰는 ‘나’를 드러내는 문장을 발견할 때면 놀라운 동시에 반갑기까지 했다. 오늘날 비평 텍스트에서 쓰는 주체 ‘나’를 발견하는 것은 전혀 낯선 일이 아니다. 심지어 ‘나’의 비평적 자의식과 정동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것도 새로운 일이 아니다. 에세이와 아마추어리즘 사이에서 비평적 글쓰기의 자리를 탐색하던 내게 최근 강력한 키워드가 새롭게 추가되었다. 최근 문학 연구와 문화 비평에서 주목받고 있는 ‘자기이론(autotheory)’이 그것이다. 이로써 ‘비평하는 나’를 둘러싼 삼각형의 세 꼭짓점에 각각 ‘에세이’, ‘아

  • 윤옥재
  • 2026-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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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하는 기억의 공간 2] 『자작나무 숲』과 쓰레기의 정치학

박서양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6년 3월부터 2026년 5월까지 으로 3회 연재됩니다. 부패하는 기억의 공간 ㅡ 김인숙의 『자작나무 숲』과 쓰레기의 정치학 (2) 박서양 1. 앞서 1부에서 살펴보았듯 『자작나무 숲』을 단편에서 장편으로 개작하는 과정을 거쳐 쓰레기 집이 지니는 의미는 보다 새로운 차원으로 확장된다. 기존의 사회적 담론이 쓰레기 집을 단순히 개인의 병리적 현상이나 위생 문제로써 다뤄왔다면, 장편소설에서 작품의 주된 배경이 되는 쓰레기 집은 한 가문의 은폐된 기억이 귀환하는 실체적 장소로 탈바꿈한다. 그렇기에 이곳은 단순히 한 노인의 저장강박이 빚어낸 결과물이 아니다. 쓰레기가 켜켜이 쌓이고 느리게 부패하는 이 공간은 공적 시스템의 신속한 망각에 맞서 기억의 소멸을 유예하는 지연의 장소다. 그런 점에서 소설의 과거 배경이 1989년이라는 사실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1995년 쓰레기 종량제가 시행되며 규격 봉투 안에 모든 폐기물이 동질화되고 익명화되기 이전, 쓰레기는 그것을 배출한 자의 삶의 궤적과 정보가 선명하게 남겨진 물질이다. 즉, 1989년이라는 시간은 쓰레기가 아직 완전히 규격화되지 않은 채, 특정한 누군가의 것이었다는 실명(實名)의 흔적을 지닌 채 공동체 내부에 머물던 시기다. 또한, 좁은 다리 하나를 통해서만 외부와 연결되는 곡교의 폐쇄적인 마을 구조 역시 이러한 쓰레기의 관계적 속성을 한층 강화시킨다. 쓰레기차가 드나들기 어려워 쓰레기를 각자 태우거나 묻는 비공식적 처리에 의존해야 했을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 변두리 마을에서 쓰레기의 출처는 서로에게 투명하게 노출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누가 무엇을 버렸는지 훤히 알 수 있는 동네에서 타인의 쓰레기를 거두어들인다는 것은 단순한 수집이나 저장 행위가 아니라 누군가가 서둘러 지우고자 했던 기억들을 자신의 공간으로 편입시키는 행위가 된다. 더욱이 할머니가 쓰레기를 쌓아 올리는 산1번지의 집이 본래 일제강점기 고리대금업으로 부를 축적했던 시아버지 모칠성의 거처였다는 점도 자못 의미심장하다. 할머니의 수집이 시작되기 훨씬 이전부터 그곳은 이미 채무자들에게서 거두어들인 장물들이 켜켜이 쌓이던 공간이었다. 저당 잡힌 물건들은 누구에게서 어떤 연유로 빼앗아 왔는지 그 유래가 명확하다는 점에서, 그 어떤 폐기물보다도 비극적이고 선명한 서사를 품고 있다. 요컨대 이 집은 단순히 버려진 사물들의 무덤이 아니라, 타인의 삶의 서사가 강제로 유입되고 축적되어 온 역사적 장소인 셈이다. 이러한 공간적 내력은 언뜻 산1번지의 쓰레기 집을 마을의 배제된 기억과 비밀이 축적되는 일종의 아카이브처럼 비치게 만든다. “할머니한테는 저 집이 뭐랄까…… 박물관 같은 거지요.”(124쪽) 하지만 할머니의 수집 행위를 ‘기억의 보존’으로 쉽게 낭만화할 수는 없다. 집 안으로 모여든 쓰레기들은 한데 뒤엉켜 부패하며 본래의 형태와 개별성을 잃고, 그것이 매개하던 고유한 서사 역시

  • 박서양
  • 2026-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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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판다곰젤리
    공감합니다

    자극적인 압축된 영상이 유행하는 시대에 타인의 삶이 무엇인지에,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졌고 우리에게 다가오는지에 대한 깊이 있는 고찰이 담긴 글 잘 보았습니다.인상적이거나 자극적인 것은 기억하려는 노력 없이도 기억나고 떠올리려고 하지만, 타인의 고통이나 슬픔 등은 자신과 육화되어야만 기억할 수 있는 또 다른 고통과 슬픔이고 외면하고픈 자기 과거의 일면과 마주해야 하는 자기 인정이므로 망각을 하고자 합니다.시대가 달라도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공감할 수 있는 건 시공간을 초월한 나와 타자 간의 공통된 고통과 슬픔이 있기 때문이죠. 단순한 상황 배열로 기억이 나게끔 하는 것과 그것이 자기 구미대로 맞춰지는 것과는 달리 오로지 굳건한 의지로 선택의 기로에 서서 나와 타인의 같음을 인정하고 함께 나아가는 건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고 그것은 기억함으로부터 시작되는 거 같습니다. 고로 작금의 시대에 가장 필요한 건 기억함의 용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추위가 주는 시련과 자기 고통(자기 인정)을 극복하고 새의 고통(타자 인정)을 외면하지 않으려는 경하와 같은 인물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겁니다.

    • 2024-11-10 16:10:05
    판다곰젤리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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