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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 반대하며

  • 작성일 2025-07-01

   전쟁에 반대하며

    ―고통과 쟁론 입론


박동억


    1. 고통으로 향하기


   코소보가 세르비아로부터 분리 독립을 선언하고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된 것은 1998년 초의 일이었다. 이 무렵 시인 허수경(許秀卿; 1964~2018)은 독일에 머물고 있었다. 뮌스터 대학에서 근동 고고학을 전공하며 석사논문을 준비하던 차였다. 그해 말 NATO가 전쟁에 개입했고 공군을 동원하여 세르비아에 폭격을 개시했다. 허수경은 매스컴 보도를 보며 전쟁의 참혹함에 경악했고 두 나라의 고통받는 민간인을 위해 무엇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을 끔찍하게 여겼다. 그의 석사논문 주제는 기원전 6,800년에 세워진 중동의 작은 도시 초가 미쉬(Choghā Mīsh)였다. 그는 반만년 전의 멸망한 유적지를 오가며 “도대체, 이런 아카데미의 고상한 놀이가 지금의 전쟁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라는 물음에 잠겼다.1)

   다행인 것은 그가 시인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는 2001년 발표한 세 번째 시집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에서 전쟁의 참상을 고발할 수 있었다. 군인들은 팔다리를 잃었고, 아이와 여자들은 고향을 잃었다. 그러나 이 사실은 언어로 열거할 때 단조로운 사실이 되어 버렸다. 더욱 많은 사람들이 전쟁을 실감할 수 있도록 허수경은 시적인 상상력을 활용했다. 그의 시집에는 전쟁의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스스로 목을 자르는 극적인 사건이나 난민이 된 여자들이 짐승 우리로 피난했다가 짐승과 교접하는 일화가 나타난다. 이 그로테스크한 상상은 언어화할 수 없는 전쟁의 잔인성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독일에 거주하는 한국인에게 코소보 전쟁은 그저 먼 나라의 사건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시인에게는 아니었다. 허수경은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장갑차에 아이들의 썩어 가는 시체를 싣고 가는 군인의 나날에도 춤을 춘다 그러니까 내 영혼은 내 것이고 아이의 것이고”라고 썼다. 이러한 애도가 무색하게 2003년에는 이라크 전쟁이 발발했고 이에 시인은 2005년 네 번째 시집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의 서문에서 아예 자신의 시를 ‘전쟁을 직접 겪지 않은 한 인간이 쓰는 반(反)전쟁에 대한 노래’라고 선언했다. 이처럼 시인에게 시 쓰기는 그의 영혼이 저 먼 타인의 고통에 접경하기 위한 투쟁이었다.

   어떻게 그는 먼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영혼 곁으로 이끌어 올 수 있었을까. 어떤 의미로 그것은 그가 자임한 윤리의식이 역사적 복잡성이나 정치적 알력을 멀리한 채 성립된 간명한 문제의식에 기초했기 때문이다. 누가 가해자인가. 허수경은 전쟁의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전쟁을 일으킨 자, 폭력을 수행하는 자를 고발했다. 누가 피해자인가. 그는 여성과 아이들이 겪는 고통을 묘사하는 데 주력했다. 따라서 그의 사상은 전쟁을 절대적으로 반대하는 평화주의나 남성중심주의에 기초한 문명을 비판하는 에코페미니즘으로 일컬어졌다.


   나, 태어났어

   추워, 라고 말하면 정말 추워서 이 세상을 떠도는 모든 먼지들을 모아 옷을 만들고 입고 싶었지

   태어났을 뿐이었어, 누군가 나를 자라게 했어


   아직 꽃술을 열어 보지 못한 꽃들이 성교를 하느라 바쁜 들판에 누워

   아직 단 한 번도 새끼를 낳아보지 않은 새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며

   나비에게도 잠자리에게도 덜 익은 빛을 보여 줘, 라고 공기에게 말했던 적도 있었어

   나와 자연은 사실혼 관계

   법정에서든 서로에 대해 아무 권리가 없다는 걸 늦게사 알았지

   나에게 말을 거는 저 암소가 일찍이 나에게 수유를 한 어머니라는 걸

   당신이 알았으면 좋겠어


   매일 어디론가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는

   하늘에 있는 공들에게도 내 수유의 어머니,

   그 고깃덩어리가 걸린 정육점을 단 한 번이라도 보여 주었으면 했어

   공들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알까? 인간을 수유하는 암소들을 생산하는

   더러운 거리 구석에 있는 도살장을 알까,

   저것 봐, 아이가 불어 대는 풍선 어떤 포유류의 방광이 하늘로 가서

   먼 들판을 은은하게 비추어 대는 하늘의 공이 되네


   시간을 잘라 만든 혁대를 목에 감고 죽은 테러리스트가 살던 감방 안에서 자라던 작은 백합의 뿌리는 세계를 버티는 나무처럼 테러의 주검을 견뎌 내고 있었어

   아주 어린 중세가 대륙 저편에서 현대처럼 활개를 치고 있네, 그 말을 듣기 위해 춤을 추러 가는 아이들에게

   나, 태어났어, 라고 말해 봐, 말해 봐

   아이들이 당나귀처럼 웃으며 내 얼굴에다 총을 들이댈 거야


   피가 솟구치는 숨겨진 샘이 있다거나

   죽을 수 없는 인간들이 매일매일 전쟁을 한다거나

   그리고 당신이 날 사랑한다거나

   그리고 그리고 그 말을 내가 믿는다거나 하는

   엄숙하게 웃기는 나날 동안


   난, 태어났어

   아퍼, 라고 말하면 너무나 아파서 이 세상의 밤을 떠도는 모든 안개를 엮어 붕대를 만들고 싶었지

   안개 붕대를 감고 누워 컴컴하게 웃고 있었으면 했어


-허수경, 「거짓말의 기록」 전문(『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2011)


   고통의 가해자와 피해자를 분별하는 의식 속에서 차츰 허수경은 시야를 넓힌다. 그는 말년으로 갈수록 고통을 생산하는 생명의 순환과정 자체에 대해 눈 돌렸던 것처럼 보인다. 생존을 위해 누군가는 고통을 가하고 누군가는 고통을 받는 이 세계의 법칙을 ‘고통의 연쇄’라고 부른다면, 허수경은 고통의 연쇄에서 가장 참혹한 자리에 동식물이 놓일 수밖에 없다는 바를 떠올렸다. 다섯 번째 시집을 간행할 무렵 허수경의 의식을 사로잡은 것은 전쟁에 의해 파괴된 자연 혹은 문명의 부산물에 의해 고통받는 동식물이었다. 위 작품은 허수경이 지니고 있었던 고통의 연쇄에 대한 의식과 그 복잡성을 보여 준다. 

   먼저 “추워”라는 원초적 발화가 암시하듯 여기서 태어나고 자라는 ‘삶’은 곧 추위를 견디는 일, 즉 고통 자체로 여겨진다. 시인은 체념한 듯한 어조로 “태어났을 뿐”인 삶의 막막함을 표현한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 체념을 자아내는 원인은 타인 혹은 타자와 고통을 주고받으면서도 그것에 대해 이야기조차 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사람과 ‘자연’은 고통을 나눌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은 동식물을 대화 상대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과 자연은 “사실혼 관계”처럼 언제나 공생하지만 “법정에서든 서로에 대해 아무 권리가 없”다. 그 누구도 암소를 사람에게 ‘말을 걸 수 있는’ 존재라고 여기지 않고, ‘수유를 한 어머니’처럼 사람을 부양하는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암소는 “더러운 거리 구석에 있는 도살장”으로 끌려갈 것이다.

   한편 사람과의 대화 또한 고통의 해결책은 되지 않는다. 사람은 언제든지 상대가 잔인해질 수 있다는 의심과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 허수경에게 인간 사회는 폭력의 답습을 끊어 내지 못한 암흑시대나 다름없고, 그래서 전쟁과 테러는 멈추지 않으며 대화의 시도를 하는 순간 “아이들이 당나귀처럼 웃으며 내 얼굴에다 총을 들이”대는 폭력으로 되돌아올 것이라고 예감한다. 그렇기에 이 작품의 제목은 ‘거짓말의 기록’이다. 시인은 현실에 체념하면서도 “이 세상의 밤을 떠도는 모든 안개를 엮어 붕대를 만들고 싶었”다는 바람을 밝히는 것으로 작품을 끝맺었다. 그는 위로될 수 없는 고통이 ‘안개’처럼 세상을 떠돌고 있다면, 그 고통을 ‘안개 붕대’로 만들어 피부로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랐다.


   바위가 꾸는 꿈을 우리는 해독하지 못한다. 바위의 언어를 우리는 해독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바위와 우리와의 관계는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것이 바위와 우리가 맺는 관계이다. 바위는 우리와 관계를 맺지 못한다. 우리만 바위와 우리가 관계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2)


   그런데 허수경은 자신의 희망이 이뤄질 것이라고 믿었던 적이 없었다. 2011년 8월 그는 앙카라의 한 유적지에서 두 달 동안 발굴 작업에 전념하고 있었다. 오래된 건물들이 파묻힌 지층을 묵묵히 살피는 동안 그는 자기 내면의 슬픔 또한 깊이 응시했다. 윗글에서 시인이 언급하는 ‘바위’는 두 가지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먼저 그것은 유적지의 ‘바위’이고, 따라서 역사적 유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바위와의 대화란 고대인에 대한 현대인의 해석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허수경이 “바위는 우리와 관계를 맺지 못한다. 우리만 바위와 우리가 관계가 있다고 믿는 것”이라고 말했을 때 역사적 해석의 자의성을 말하고 있는 셈이다. 

   이와 달리 ‘바위’는 자연물을 대표하는 상징일 수도 있겠다. 물론 무생물인 바위는 말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사람은 인간 중심적으로 바위를 해석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허수경은 사람이 자연에 대해 마음대로 의미를 부여하고 자연과 관계를 맺는다고 믿는 인간 중심적인 상상을 비판한다. 어쩌면 이 두 가지를 모두 의식한 일기일 수도 있겠다. 눈여겨볼 핵심은 유물로서의 바위이든 자연물로서의 바위이든 허수경이 바위를 ‘말 건넬 수 있는’ 존재로 여긴다는 사실이다. 여기 암시된 것은 대화에 대한 존재론적인 딜레마라고 할 수 있다. 산 자는 죽은 자에 대한 사실을 마음대로 증언하고, 말하는 자는 말할 수 없는 존재를 마음대로 평가한다. 이는 타자의 고통을 증언하려는 순간 그 자체가 하나의 위선이나 망상이 될 수도 있다는 의구심을 암시한다. 허수경은 오래된 유적지에서 이 모순을 떠올렸고 그의 일기에 남겼다.



   2. 쟁론: 증언할 수 없는 타자와 대화하기


   저 먼 타자의 고통을 보듬는 한 인간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아름답게 느껴지는가. 아니면 그것은 우리의 죄의식을 덜어 주고 적당한 고뇌를 부여한 채 다시금 일상으로 되돌아가게 하는가. 허수경의 시를 상기하며, 나는 오늘날 지속하는 전쟁을 떠올린다. 하지만 내 가슴속 한편에는 참담한 고뇌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의 마음에 내 마음을 기댄다. 이란과 시리아와 터키의 유적지를 오가면서 역사의 의미를 추궁했고 자신의 무력함을 곱씹어 보았을 한 사람을 떠올리고, 끝내는 그가 인류에게 체념해야 했던 필연성에 대해서 생각한다. 시 쓰기가 마음을 잇는 사건이라면 나는 다만 이 모든 문장이 허수경의 시를 향한 받아쓰기라고 말하고 싶다.

   보다 실천적으로 허수경의 시를 바꾸어 읽자. 어떻게 저 먼 타자의 고통을 어떻게 우리의 ‘영혼’과 ‘피부’로 이끌어 올 수 있는가. 허수경은 공감을 제약하는 익숙한 관념을 잊음으로써 타인의 고통에 감응할 수 있었다. 그는 민족이라는 경계를 잊고, 국민이라는 한계를 잊었으며, 자신이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음으로써 다른 나라의 전쟁과 다른 생물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닌데, 왜냐하면 그는 한 번도 자신이 공감했다고 말하지 않았고 대신 자신이 저 죽어 가는 사람과 동식물과 관계한 적이 없으며 단지 그들과 자신이 관계한다고 믿을 뿐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물음 속에서 ‘고통으로 향하기’라는 사건은 고뇌가 된다. 허수경은 그의 시 쓰기가 미디어를 통해 목격한 고통이거나 고통에 대한 일방적 말하기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했다. 이러한 한계 인식에도 불구하고 그는 타인의 고통을 대신 증언하고자 한다. 즉 고통으로 향하기란 타인·타자의 고통을 증언하려는 의지를 뜻하는 동시에 그 증언의 빈곤함을 깨닫게 되는 순간을 뜻한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고통은 자명한 것이지만 타인의 고통은 모호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고통이든 타인의 고통이든 언어로 표현하려고 할 때 그의 존재 안에서 자명했던 고통의 의미는 다른 사람에게도 일어나는 평범한 사건이 되고 만다.

   더 나아가 고통으로 향하려는 의지보다 고통에 대한 증언이 앞설 때, 공감은 폭력이 된다. 리오타르(Jean-François Lyotard, 1924~1998)는 함부로 타인의 고통을 재현하거나 재단하는 행위를 경계했던 철학자였다. 그는 『쟁론(différend)』에서 ‘쟁론’이라는 용어를 제안하며, 이 단어를 동등한 언어 능력을 지니지 않은 두 타자의 대화, 즉 한쪽은 말할 권리를 지니지만 다른 한쪽은 말할 권리가 주어지지 않은 상태의 대화로 정의했다. 그는 쟁론의 예시로 로베르 포리송과 같은 홀로코스트 부정론자가 자기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아우슈비츠 가스실의 생존자를 법정 증인으로 세우려고 했던 상황을 거론한다.3)

   허수경은 자신의 시 쓰기가 쟁론임을 알았다. 그는 스스로 증언할 수 없는 타자, 즉 죽은 이나 동식물을 대신 증언한다는 실천을 의무로 받아들이는 동시에 죄악으로 느꼈다. 타인을 위한다는 의지도, 타인의 고통을 재현한다는 실천도, 적어도 이러한 시가 그들에게 도움이 되리라는 희망도 진실인지 불분명했다. 그 모든 것은 ‘거짓말의 기록’이거나 기약 없는 희망에 지나지 않았다. 고통으로 향하기는 타자가 부재한 자리를 향해 손을 뻗는 행위다. 허수경은 그러한 행위를 “관계가 있다고 믿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기에 믿음, 믿음. 나는 이 믿음이라는 단어를 몇 번이고 곱씹으며, 그것을 사람의 최선이라고 다시 적어 본다.

   우리는 어떻게 타자와 대화할 수 있는가. 리오타르는 이러한 과제를 “문제는 너의 체제하에서 ‘2인칭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법 아래에서 타자에게 쓰는 것일 터이다.”4)라고 표현했다. 요컨대 시 쓰기는 ‘너’를 향한 말 건넴일 수도 있고, ‘너의 입장’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일 수도 있다. 리오타르는 이 두 가지 형식을 구분하면서 진정한 의미의 증언은 ‘타자의 법’ 아래에서 가능한 실천임을 역설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나’에게 자명한 법과 올바른 신념을 벗어나 내게는 빈곤해 보이고 납득할 수 없는 ‘타자의 법’ 아래에서 세상을 이해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오직 자신의 옳음을 타자에게 강요할 때 대화는 쟁론이 되고, 고문이 되며, 전쟁이 된다.


   고문에서 죄수는 목소리를 빼앗기고 몸만 남고, 심문하는 고문자는 고통에서 면제됨으로써 탈체화되며 언어적 구축물을 지닌다. 고문에서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이 같은 일은 이전(移轉) 현상이다. 전쟁에서 이러한 이전 현상은 사상자 전체와 국가적 구축물 전체 사이에서 거대한 규모로 일어난다. 고문과 전쟁은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고문과 마찬가지로 전쟁은 고통의 속성을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면서 고통 자체는 부인한다.5)


   일레인 스캐리(Elaine Scarry, 1946~)가 고문과 전쟁은 닮은 것이라고 이야기할 때, 그의 사유 기저에는 고문과 전쟁이 본질적으로 ‘쟁론을 만들어내는’ 메커니즘이라는 분석이 뒤따르고 있다. 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고문하는가. 왜 한 국가는 다른 국가를 침략하는가. 스캐리에 따르면 인간의 잔혹성은 타자에게서 ‘목소리를 빼앗고 몸만 남기기’ 위해서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고문과 전쟁은 타인이 믿고 있는 신념의 체계와 그가 살아가는 자명한 세계를 파괴하고, 그 파괴된 자리에 ‘나의 세계’를 강요하는 행위라고 스캐리는 답한다. 근본적으로 전쟁은 고문을 닮았는데, 이는 전쟁의 목적이 고통받는 자의 언어를 빈곤하게 만들고 그의 증언 수단으로 오직 울음과 비명만을 남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쟁론이란 타자에게서 그의 목소리로 세계를 창조하는 능력을 빼앗는 과정이다. 쟁론은 근본적으로 증언 능력을 갖추지 않은 타자를 ‘대화’라는 무대에 올려서 그의 세계를 부인하는 하나의 전쟁이다. 타자의 옳고 그름, 무엇보다도 그의 삶을 ‘나’의 의지로 재단하는 폭력의 형식이 쟁론이다. 쟁론의 기만성 혹은 음험함은 그것이 대화의 형식이나 공정함의 외장으로 등장한다는 데 있다. 고문과 전쟁뿐만 아니라 정치적 회담, 법정 재판, 추모 행사 등 모든 모임이 쟁론의 무대가 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허수경이 고민했던 것은 반(反)전쟁시의 쟁론적 성격이었다. 시인은 동의 없이 작품이라는 무대 위에 타인을 호명하고 타인의 고통을 대신 증언한다.

   그리하여 허수경은 시 쓰기가 쟁론임을 드러내는 것, 결코 시 쓰기를 통해서는 타자의 고통이 드러날 수 없다는 역설에 대해서 명시했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시가 ‘거짓’임을 명시했다. 당신에 대해 기록하는 데 실패했다고 말할 때 당신을 향한 시는 무엇이 되는 것일까. 시의 무력함을 전경화할 때 비로소 그의 시는 고문과 전쟁과는 정반대의 지향, 즉 ‘고통으로 향하기’에 가까워지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아마도 허수경의 시에 배음처럼 맴도는 몸짓은 ‘듣는’ 것일지도 모른다. 당신의 고통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이러한 단언은 오히려 당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위한 출발점이 될 수는 없을까.



   3. 고통의 현상학


깊은 측면은 쉽게 달아난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이 글은 앞으로 논의하고자 하는 두 가지 주제, 즉 ‘고통’과 ‘쟁론’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입론이라고 할 수 있다. 목표는 어떻게 우리가 고통을 나눌 수 있느냐는 물음에 명료한 해답을 구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이 글은 해결하기 어려운 고뇌와 몇 번이고 직면하게 될 것이다. 또한 느슨하게 ‘윤리적’이라거나 ‘미학적’이라고 평가되었던 문학적 형상화 방식에 문제를 제기할 것이다. 그러나 끝내 이 글은 문학에 대한 믿음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그것은 결국 우리가 찾아 헤매야 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인간의 감수력을 최대화하기 위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덧붙여 허수경을 통해 문제 제기하고자 했던 바는 다음과 같다. 문학 또한 쟁론이다. 먼 나라의 전쟁이나 역사적 과거의 참혹이나 동식물의 고통을 대신 증언하는 모든 문학적 실천은 쟁론이다. 따라서 시인이 지닌 윤리적 의도에도 불구하고, 그가 윤리를 행하는 방식에는 필연적으로 쟁론의 억압성이 동반된다. 전쟁, 고문을 비롯하여 명백히 ‘쟁론을 생산하는’ 활동들은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법정 재판이나 문학 작품처럼 공정한 대화의 형식을 취하면서 ‘쟁론을 은폐하는’ 활동에 대해서는 우리는 숙고하지 않고 지나친다.

   쟁론을 극복하고 진정한 의미의 ‘대화’로 나아가는 사건은 아주 드문 것이다. 나는 진정 자연을 노래하는 자연 서정시도, 진정 전쟁을 반대하는 전쟁시도 아주 드물게 탄생한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경우 문학 또한 쟁론의 무대이자 이 세상의 만성적인 고통을 회피하는 제도에 불과하다. 남을 연민하고 우리는 평온해진다. 적당히 저 타자의 고통에 연루됨으로써 우리 내면의 죄의식과 타협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연과 전쟁을 다루는 문학 상당수 또한 교묘하고 음험하다. 나는 이렇게 단언해 보려 한다. 이 세계에 대하여 결백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으며 결백한 문학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어떻게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을까. 내가 몇 번이고 던지게 될 이 물음에 해답을 구하기 위해 최초로 분석되어야 할 것은 바로 고통이라는 연구 대상이다. 사실 쟁론이 발생하는 이유는 고통이 지닌 사적 언어로서의 성격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유명한 정언처럼 ‘고통은 사적 언어’인데, 이 정언은 고통의 경험은 ‘나’에게는 자명하지만 타인에게는 병변이나 신음과 같은 외적 지표(index)를 통해서만 유추될 수 있다는 사실을 뜻한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은 사적 언어를 “다른 사람은 아무도 이해 못 하지만 나는 ‘이해하는 듯 보이는’ 소리들”6)로 규정한다. 그는 우리가 ‘고통의 표명’만을 언어화할 뿐 ‘고통’ 자체는 대화에서 다룰 수 없다고 선언한다.

   타인은 나의 감각을 오직 나의 행동을 통해서만 배운다.7) 이로부터 연역할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은 ‘타인의 응시’에 의해 ‘나’의 내부가 비로소 의미로 가득 찬 ‘내면’일 수 있다는 점이다. 모든 존재는 그만의 내부·외부의 체계를 지닌다. 그러나 그러한 내부·외부의 체계를 문화적으로 의미 있는 것, 더 나아가 윤리적으로 충만하게 만드는 것은 ‘나’의 내부에 관심을 둔 타인의 응시 때문이다. 응시는 그 존재를 심려하며 존재를 바라본다는 것이다. 예컨대 사람은 화산의 폭발이나 절벽에서 추락하는 바위를 공감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리를 다친 토끼나 굶주린 어린아이를 보면 그들이 고통을 겪고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내면은 단순히 우리가 경험 불가능하고 관측 불가능한 타자성을 뜻하지 않는다. 내면이란 우리에게 소통의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타자의 타자성이다.

   내면이란 홀로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8) 타자의 응시, 이것이 바위에는 내부만이 존재하지만 사람에게는 내면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그리고 동식물에 대해 어떤 사람은 내면이 존재한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내면은 과학적으로 관찰한 사실의 집합으로 논증될 수 없다. 눈앞의 상대방에게 내면이 존재한다고 믿는 한에서만 내면은 존재한다. 따라서 사람은 바위와 같은 사물에 대해서는 그냥 바라볼 뿐이지만 타인과 타자에 대해서는 응시한다. 그리고 그의 내면에 고통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신한다. 이러한 사색 속에서 비트겐슈타인은 고통에 대한 이해는 ‘심리적인 과정’이 아니라고 단언한다.9) 오히려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은 고통이 존재한다고 합의하는 토론이나 고통에 대한 표상을 만들어 내는 창조 행위에 가깝다.

   조금 더 과감하게 표현한다면, 고통은 해석되어야만 존재한다는 선언도 가능하겠다. 고통의 해석 없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나의 고통뿐이기 때문이다. 영국의 현상학자 해비 카렐(Havi Carel, 1971~)에 따르면, 현대사회에서 고통을 해석하는 주된 방식에는 적어도 세 가지가 존재한다. 첫째는 의사가 환자를 진달할 때처럼 고통을 병리적 증상으로 간주하는 ‘자연주의적 접근’이고, 둘째는 순국선열의 희생이나 성형수술처럼 고통을 수반하는 행위의 문화적 가치를 분석하는 ‘규범주의적 접근’이며, 마지막으로 고통에 대한 주관적 경험에 기초한 ‘현상학적 접근’이다.10)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제시한 것은 고통에 대한 현상학적인 해석의 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고통은 고통의 표현을 요구한다. 우리는 타인이 고통을 갖고 있는 듯이 행동할 때만 고통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11) 반대로 문학은 마치 고통이 애초부터 존재했다는 듯이, 즉 고통이 당신 ‘안에’ 존재하고 그것을 언어로 ‘끄집어낸다는’ 듯이 고통을 다룸으로써 고통에 대한 우리의 감수력을 확신할 수 있게 해 준다. 문학은 고통을 다루는 아주 특수한 양식인데, 그 이유는 문학 장르가 사적 언어로서의 성격을 보존한 채 고통을 분유하고자 하는 실천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어떻게 고통을 핍진하게 재현할 수 있느냐는 반문은 신중하게 제기되어 왔다. 

   한편으로 문학이 지닌 쟁론적 성격은 쉽게 잊혔다. 하지만 지금은 신중하게 반문해야 할 때이다. 저 먼 곳에서 일어나는 전쟁에 대해서, 그리고 분노와 혐오와 편협이 들끓는 우리의 현실에 무엇이 필요한지 물어야 한다. 이 시대에 문학은 진정한 대화의 수단일 수 있을까. 이제는 이 질문에 답해 보아야 할 순간이다.



1) 허수경, 『길모퉁이의 중국식당』, 문학동네, 2003, 142쪽.

2) 이 글은 2011년 9월 12일에 기록된 일기이다. 허수경은 고고학자로서 8월 6일 튀르키예 수도 앙카라에 도착하여 8월 10일부터 9월 26일 독일로 돌아오기 전까지 체류했다. 인용문은 허수경, 『가기 전에 쓰는 글들』, 난다, 2019, 78쪽.

3) 로베르 포리송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던 프랑스의 불문과 교수이다. 그리고 로베르 포리송은 가스실의 생존자가 없다는 사실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유대인 절멸 수용소의 가스실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리오타르는 로베르 포리송의 논변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어떤 장소가 가스실이라는 점을 확인하기 위해 나는 이 가스실의 희생자만을 증인으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나의 상대방에 따르면 죽은 희생자들만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 가스실은 그가 주장하는 것과 같은 게 아닐 것이다. 따라서 가스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진태원 역, 『쟁론』, 경성대학교출판부, 2015, 20쪽.

4)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위의 책, 207쪽.

5) 일레인 스캐리, 메이 역, 『고통받는 몸』, 오월의봄, 2018, 230쪽. 강조는 원문을 따름.

6)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이영철 역, 『철학적 탐구』, 책세상, 2006, 173쪽.

7)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위의 책, 165쪽.

8) 차후에 보충할 테지만, 이러한 규정은 이중의 함의를 지닌다. 주디스 버틀러가 강조했듯, 사람은 자신이 애도하는 것으로부터 ‘나’를 이룬다. 동시에 사람은 타인의 응시에 의해서 비로소 그의 내면을 내면으로 인정받는다. 이러한 두 가지 의미로 내면은 오롯이 자기 소유일 수 없다.

9)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위의 책, 118쪽.

10) 해비 카렐, 박유진 역, 『아픔이란 무엇인가』, 파이카, 2013, 28~33쪽 참조.

11)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위의 책, 2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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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하는 기억의 공간

박서양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6년 3월부터 2026년 5월까지 으로 3회 연재됩니다. 부패하는 기억의 공간 ㅡ 『자작나무 숲』과 쓰레기의 정치학 (1) 박서양 0. 연재에 앞서 본고는 김인숙의 장편소설 『자작나무 숲』을 중심으로 쓰레기라는 물질이 공적인 처리 제도와 가정이라는 사적 공간, 그리고 기억과 서사의 경계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단계적으로 고찰하는 3부작 비평이 될 예정이다. 1부에서는 단편소설 「빈집」을 살피며 쓰레기가 공적 처리 시스템에 편입되기 이전 가정이라는 공간에서 수행되는 분류 노동과 그 젠더화된 정동을 분석할 것이다. 2부에서는 쓰레기를 배제함으로써 질서를 회복하려는 배제의 원리가, 서사에서 개연성을 통해 사건을 정합적으로 배열하려는 충동과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를 살핀다. 3부에서는 지워진 여성들의 언어와 역사, 그리고 쓰레기 사이의 관계를 고찰하며, 재개발과 쓰레기집이라는 한국 사회의 현실 속에서 여성 고딕적 상상력이 어떻게 변주되는지를 논할 예정이다.1) 1. 쓰레기집의 사회적 상상력 곡교동 산1번지의 쓰레기집은 소설 『자작나무 숲』의 공간적 배경이자 독자를 압도하는 오브제다. 개발과 투기의 욕망으로 들끓는 재개발 예정 구역 한복판에 우뚝 선 이곳은 그 강렬한 존재감으로 독자를 끌어당긴다. 우리는 흔히 ‘집’이라는 단어에서 안식과 보호, 정돈과 재생산의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쓰레기와 오물로 뒤덮인 이 공간은 그와는 거리가 멀다. 쓰레기와 쓰레기 아닌 것, 집과 집 아닌 것의 구분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이 이질적인 장소에서, 자본의 생리에 따라 버려져야 할 물건들은 한데 뒤엉켜 완강한 물질적 현존을 드러낼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물질의 축적은 단순한 불결함이나 미관의 문제로 환원되지 않는다. 일상적 분류와 질서의 법칙이 멈춘 어느 공간에서 소설은 사물의 퇴적과 부패를 집요하게 드러내며, 집의 장소성을 ‘언캐니(uncanny)’하고 낯선 심연으로 변주시킨다. 집은 물리적으로 내부를 보호하고 외부를 차단하는 경계로 구성되며, 무엇을 수용하고 배출할 것인지를 판단하는 분류 체계 위에 성립한다. 소비주의 사회에서 상품은 끊임없이 순환되어야 하므로 ‘쓸모’를 다한 물질은 즉각 폐기되어 사라져야 한다. 이러한 논리는 집이 수행하는 선별의 원리와 닮아 있다. 이때 집은 어떤 사물이 여전히 인간의 일상에 머물 자격이 있는지를 판가름하는, 선택과 배제의 논리가 구체적으로 작동하는 장소로 존재한다. 산1번지에 위치한 그곳이 문제적인 이유는 이러한 소비주의 시스템과 분류 기제가 지속적으로 실패하고 무력화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사물의 분류 체계도, 공간의 경계 논리도 더 이상 안정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대신 오랜 시간 퇴적되고 방치된 사물들만이 거대한 물질 덩어리로 합쳐져 뒤엉킨 채 굳어간다. 이처럼 쓰레기 더미가 인간의 거주 공간을 잠식하는 장면 속에서 독자는 익숙한

  • 관리자
  • 2026-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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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의 병리학 ㅡ 유선혜와 차현준의 시를 중심으로 송현지 1. 자기만의 방, 자기만의 몸 1929년,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여성이 글을 쓰는 데 필요한 조건으로 연간 500파운드의 수입과 자기만의 방을 내세운다. 이 요구는 여성에게 쉽게 주어지지 않았던 사회적 조건을 폭로함으로써 당시에도 강한 호소력을 가졌지만, 그 구체성과 상징성으로 인해 약 한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자주 인용되곤 한다. 특히 ‘자기만의 방’이라는 표현은 독립을 위한 물질적 요건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며 여성 창작자만이 아닌, 청년 등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위치에 있는 이들의 문제를 다루는 데까지 확장되어 활용되어 왔다. 청년 세대를 대상으로 한 금융 자기 계발서의 제목이나 그들의 주거 형태를 분석하는 사회학적 키워드로 변주되는 것이 그 예다. 그러나 울프가 제시한 이 조건은 단순히 경제적 여유를 갖추거나 물리적 공간을 확보하는 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은 짚어 둘 필요가 있다. 당시 여성의 몸이 가사 노동과 돌봄을 위해 수시로 침범되며 공동의 재화처럼 사용되었음을 떠올려 본다면, 정기적 수입의 필요성은 생존을 이유로 타인에게 자신의 몸을 양도하지 않을 권리를 의미하며, 독립된 방에 대한 요청은 몸이 침범당하지 않을 최소한의 물리적 공간을 요구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 울프가 요구했던 저 경제적·물리적 조건이란 타인에게 뺏긴 자신의 몸을 되찾아야 한다는 선언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러한 점에 기대어 오늘날 청년 세대의 거주 불안 문제를 경제적 관점에서만이 아닌, 신체의 주권 문제와 함께 살펴보면 어떨까. 고시원에 거주하는 청년들을 인터뷰하며 정민우가 그들의 불안정한 거주 자체가 아닌, 잦은 이동으로 인해 소유물을 버리는 일에 익숙해진 그들이 삶을 ‘요약’한 채 살게 되었음을 포착한 것처럼 말이다.1) 이처럼 방의 문제가 주체가 삶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어떤 방식으로 운용하게 되는지를 규정하는 조건으로 작용하며 현재는 물론 미래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고 한다면, 최근 젊은 시인들의 시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방을 살펴보는 작업은 소재주의적인 탐색만은 아닐 것이다. 이 글은 임대된 방에 머무르는 유선혜 시의 화자와 내면의 방을 관리하는 차현준 시의 화자를 중심으로 청년 세대가 처한 사회적 조건을 살펴보고, 그러한 조건 아래에서 그들이 어떻게 ‘자기만의 방’을 상상하고 변형하며 자신의 미래를 모색하고 있는지를 분석함으로써 동시대 청년들의 인식 구조를 가늠해 보려 한다.2) 2. 임대된 몸과 구멍의 존재론: 유선혜의 경우 유선혜의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에서 청년 인물들은 주로 좁고(「흑백 방의 메리」), 어두운(「Nirvana」) 방에 머문다. “조립형 서랍장이 쓰러져가”는 방에서 “싸구려 보드카와 오렌지주스를 종이컵에 섞”(「잡종의 별자리」)어 마시고, 여러 개의 방이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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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되는 세계에서 살아남기

반복되는 세계에서 살아남기 ㅡ 김엄지론1) 안세진 1. 색소폰 연주와 살아남은 소설들 내가 살고 있는 집 앞 하천 굴다리에는 매일 저녁 색소폰을 부는 할아버지가 있다. 처음에는 아저씨였는데 지금은 할아버지가 되었다.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한 항상 있었다. 어제도 있었다. 당신은 테이프 반주에 맞추어 끈적한 유행가를 연주하는 중절모 쓴 노신사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겠지만, 지금 내가 말하는 풍경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는 벽을 보고 색소폰을 분다. 반주도 없고 관객도 없다. 중절모는 쓰고 있다. 한 이십 년쯤 들었으면 익숙해질 만도 한데 나는 아직도 그가 대체 매일 무엇을 연주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불협화음 같은 프레이즈가 툭툭 던져지고 호흡을 고르는 듯 어색한 침묵이 길게 흐른다. 몇 개의 음으로만 이루어진 단순한 멜로디가 수십 번 반복되기도 한다. 아무리 들어 보아도 그것은 노래 같은 것이 아니다. 그는 그렇게 오래 연주하지도 않는다. 한 시간쯤 지나면 색소폰을 케이스에 넣고 어딘가로 털레털레 사라진다. 그는 그렇게 자신이 정한 규칙에 따라 매일 무엇인가를 연주하고 있다. 어떤 수련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이유 모를 형벌을 받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하여튼 무엇인가 반복되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그는 장인(匠人)일까, 아니면 광인(狂人)일까. 언제부터인가 김엄지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나는 색소폰 소리를 듣는다. 무엇인가가 소설 속에서 그저 미친 듯이 반복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김엄지의 연주가 시작된 순간은 언제였을까? 정확히 십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볼 수 있겠다. 그때 데뷔 육 년 차의 소설가 김엄지는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문학과지성사, 2015)와 『주말, 출근, 산책: 어두움과 비』(민음사, 2015)라는 두 편의 책을 거의 동시에 문단에 상재했다. 전자는 그의 등단작 「돼지우리」부터 시작해 비교적 ‘단편소설’의 통상적인 형식을 갖추고 있는 초기 작품들이 모여 있는 소설집이었고, 후자는 그가 최근 발표했던 각종 소설의 파편들이 이리저리 조합되어 만들어진 그야말로 괴이쩍은 장편소설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출간되었지만 김엄지의 소설은 명백히 전자에서 후자의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무개념 상태로 널브러져 있”2)는 오피스 맨들의 기이한 무기력은 이미 그의 초기 소설이 잠시 펼쳐 보였던 ‘씹’, ‘뻑’, ‘좆’의 치기 어린 발랄함을 모조리 잠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야흐로 - 이후 김엄지의 소설을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규정하게 될 - “삶의 무게, 아니 ‘무게 없음’을 형상화한 듯한 하나의 형식”3)이 발명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김엄지의 문체(style)는 사실상 그때 이후로 거의 변하지 않았다. 성의 없이 툭툭 끊어지는 문장, 몇 페이지를 채 이어 가지 못하고

  • 관리자
  • 2026-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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