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들의 문학
- 작성일 2025-08-01
- 댓글수 0
가짜들의 문학
조대한
이상의 실제 이름은 김해경이고 이상은 그가 만든 가명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 이름의 탄생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과 추측들이 존재하는데, 전기적으로 설득력 있는 주장은 크게 두 가지 정도이다. 하나는 동생 김옥희의 증언이다. 경성고공에서 건축을 전공했던 해경은 졸업 후 공사 현장에서 종종 일을 하곤 했다. 당시 일본인 인부들 중 해경을 김 씨가 아닌 이 씨로 착각했던 이들이 있었고, 그들이 ‘김 상(金さん)’을 ‘이 상(李さん)’이라고 오인하여 부른 까닭에 해당 이름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1) 다른 하나는 친우 구본웅이 선물한 상자와 관련된 설이다. 김해경이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 구본웅이 그에게 오얏나무로 만든 화구 상자를 선물로 주었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해경이 자신의 이름에 ‘이(李)’와 ‘상(箱)’자를 넣었다는 것이다. 실제 고등학교 졸업 앨범에서 발견되는 이상이라는 이름과 반평생 지속된 구본웅과의 교류 등을 생각한다면 이 또한 충분히 수긍이 가는 설명이다. 어느 쪽이 진실이든 이후 이상은 김해경을 대신하는 이름이 되어 한국문학사 내에 영원히 박제되었다.
한데 김해경에게 이상 외에도 다양한 여분의 이름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비교적 덜 알려져 있다. 그는 이상을 포함하여 비구(比久), 보산(甫山), 하융(河戎), (H)R 등의 가명을 자신의 글에 사용한 것으로 짐작된다. ‘비구’라는 이름으로 발표된 작품은 소설 「지도의 암실」이다. 이 작품이 이상의 창작물일 것으로 추측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작품 속에서 ‘리상’이라는 이름이 여러 차례 반복된다는 것, 이상이 비구라는 호를 썼다는 친우 구본웅의 증언이 존재한다는 것, 「지도의 암실」에서 나온 표현이 이상의 다른 작품 속에서 유사한 정황을 두고 되풀이된다는 것이다.2) 비구는 이상의 다른 필명임이 거의 확실해 보인다.
‘보산’의 이름으로 발표된 작품은 소설 「휴업과 사정」이다. 이 소설이 이상의 작품으로 추측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휴업과 사정」 이전에 발표된 이상의 소설 두 편은 모두 잡지 『조선』을 통해 공개되었는데, 「휴업과 사정」 역시 앞서 게재된 「지도의 암실」과 1개월의 시차를 두고 『조선』에 발표되었다. 「휴업과 사정」은 한 달 먼저 발표된 「지도의 암실」과 비슷한 문체를 사용하고 있고, 띄어쓰기와 한자 사용 방식도 이상의 작품들과 유사하다. 「휴업과 사정」이 발표될 당시 사용된 삽화가 이상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 여겨지는 또 다른 잡지에서 똑같이 발견된다는 점3)도, 이 소설이 이상의 작품임을 뒷받침하는 근거라 할 수 있다. 거의 모든 전집에서 「휴업과 사정」을 이상의 작품에 포함시키고 있고 여러 정황적 근거를 고려해볼 때 보산을 이상의 필명으로 간주하는 것은 합리적이라 생각한다.
‘하융’이라는 이름은 이상이 박태원의 작품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삽화를 그릴 때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이름이다. 대부분의 이상 평전과 전집에서 하융을 이상으로 간주하나, 이 가명을 사용했다는 이상 본인의 언급은 아직까지 명확히 알려진 바 없다. 삽화 외에 해당 이름이 사용된 사례 역시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함께 구인회에 소속되었던 박태원과 이상의 친분 관계, 박태원의 작품 「애욕」에 등장하는 ‘하웅’이라는 인물이 이상을 가리킨다는 박태원의 증언4), 삽화를 자주 그렸던 이상의 경력, 이상 본인 작품에 그린 삽화와 박태원 작품에 그린 삽화의 유사한 소재 및 구도 등을 고려했을 때 하융은 이상이 작품 삽화를 그릴 때 의도적으로 활용한 이름으로 추측된다.
‘R’이라는 이름은 이상이 『조선과 건축』의 권두언을 쓸 때 사용한 필명으로 언급되곤 한다. 이 권두언들은 1976년 6월 『문학사상』에 이상의 작품으로 소개되었다. 해당 머리글이 이상의 작품으로 추정되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상이 자신의 영어 이름을 ‘Ri Sang’으로 사용하므로 그 영어 이니셜이 ‘R’과 일치한다는 점, 권두언이 발표된 시기와 이상이 해당 잡지의 편집에 관여한 시기가 거의 맞아떨어진다는 점, 건축과 예술 양쪽에 높은 식견을 보인다는 점, 일부 메타포들이 이상의 일문 시에서 발견된다는 점 등이다. 다만 권두언의 일부 가명은 ‘H.R.’로 되어있는데, 이것이 H와 R의 공동 집필을 의미하는지 혹은 전혀 다른 인물을 뜻하는지 확실하지 않다. R이라는 이름은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과 공동으로 권두언에 글을 올리고 있기도 하다.5) 따라서 R의 필명은 이상과 관련된 이름일 가능성이 높으나, R의 이름과 해당 권두언의 모든 글들이 이상의 것이라고 확정 짓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이상이 사용한 여타의 필명들과 실증적 근거들을 간략하게나마 이처럼 정리할 수 있겠으나 실상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이유에 관한 설명일 것이다. 인간 김해경은 왜 이토록 많은 허구의 이름들을 만들어 냈던 것일까, 이 수많은 가면들의 혼재는 그의 문학에서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인가? 그와 관련하여 흥미롭게 짚어 볼 부분은 특정 시기에 따라 구분되는 필명의 양상이다. 이는 장르마다 조금씩 차이를 보이는데, 시의 경우 「건축무한육면각체」를 발표한 뒤부터 혹은 『가톨릭청년』에 세 편의 한글 시를 발표한 ‘1933년’ 7월 이후부터 일관되게 이상이라는 필명이 사용되고 있다. 소설의 경우 유달리 여러 이름이 뒤섞여 있긴 하나6), 김기림에게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겠다는 다짐을 전한 다음부터는 「황소와 도깨비」 한 편을 제외하고 모두 이상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황소와 도깨비」가 동화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특정한 시기 이후 발표한 모든 소설들에 이상이라는 통일된 필명을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수필의 경우 첫 발표 시기가 시와 소설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은 편이었기에 예외적인 산문 외에는 거의 대부분 이상이라는 필명이 새겨져 있다. 그가 어떤 목적과 의도 아래 여러 이름들을 사용했다는 가정이 가능하다면, 혼재되었던 필명들이 특정한 시기 이후 일원화되어 가는 과정을 통해 그 나름의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필명은 ‘비구’이다. 앞서 살펴보았듯 비구라는 필명이 사용된 작품은 「지도의 암실」 단 한 편뿐이다. 다만 이 작품은 이상의 문학에서 조금 특별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난해하기로 유명한 이 작품은 소설이라기에는 서사가 거의 드러나지 않고, 맥락을 알 수 없는 문장들과 추상적인 아포리즘으로 점철되어 있는 작품이다. 또한 「지도의 암실」에는 “앵무”, “정오의사이렌”, “원숭이는 그를흉내내이고”7) 등의 표현이 등장하는데, 이러한 표현은 「오감도」의 “앵무”, 「날개」의 “정오 싸이렌”8), 「건축무한육면각체」의 “원후를흉내내이고있는마드무아젤”9), 「종생기」의 “원숭이가 사람 흉내를 내이네”10) 등으로 이상의 문학 속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된다. 해당 소설 속에서는 ‘리상’이라는 이름이 유독 자주 되풀이되기도 한다. 오감도 등의 시가 「지도의 암실」이 보여 준 성과를 기초로 하여 성립되었다고 주장하는 논의나11), 「지도의 암실」과 「오감도」 제목의 공통점에 착안하여 두 작품이 모두 근대의 풍경을 그려낸 ‘지도’였다는 논의들은 해당 소설의 중요성을 높게 평가하는 여러 사례들 중 일부이다.12) 이렇게 보면 비구라는 가명으로 발표된 「지도의 암실」은 차후에 전개될 이상 문학의 예비된 원천으로 작동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비구’라는 이름의 의미는 명확하지 않다. 출가한 승려를 뜻하는 비구(比丘)의 언어유희일 수 있으나, 한자가 다르고 별다른 정황적 유사성이 없어 보인다. 한 연구자는 비구라는 단어가 하버드 대학 천문대의 과학자 피커링(Pickering)의 음차라고 주장한 바 있다.13) 사실 여부를 떠나 그의 주장은 비구라는 이름의 해석적 의미를 확장하는 일에 흥미로운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실제 「지도의 암실」에서는 “천문학”, “그는별에갓가운산우에서”, “별들이구경을온다고하자 오리온의좌석은 조기라고하자”, “별들에게나구경식힐 요술이거나”14) 등의 표현이 더러 등장하기도 한다. 물론 이 소설에는 구체적인 서사의 정황이 주어지지 않아 해당 표현들의 직접적인 의미를 유추하기 쉽지 않다. 여기에 이상의 작품 중 「1933, 6, 1」이라는 시편을 덧대어 관련 논의를 더 확장시켜 볼 수 있다. 짧은 작품이므로 전문을 인용한다.
천칭우에서 삼십년동안이나 살아온사람 (엇던과학자) 삽심만개나넘는 별을 다헤여놋코만 사람 (역시) 인간칠십 아니이십사년동안이나 ᄲᅥᆫ々히사라온 사람(나)
나는 그날 나의자서전에 자필의부고를 삽입하엿다 이후나의육신은 그런고향에는잇지안앗다 나는 자신나의시가 차압당하는ᄭᅩᆯ을 목도하기는 참아 어려웟기ᄯᅢ문에.
―「1933, 6, 1」 전문15)
이 작품은 이상이 최초로 발표한 세 편의 한글 시 중 하나이다. 「꽃나무」, 「이런 시」와 함께 『가톨릭청년』에 수록되었다. 위 작품은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범박하게 나눠 본다면 첫 번째 부분은 ‘반성’, 두 번째 부분은 어떤 ‘다짐’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우선 나의 반성은 누군가와의 대비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 사람은 “천칭”의 별자리 위에서 30년 동안 살면서, “삽십만개나넘는 별을 다헤여놋코만” “과학자”이다. 앞서 언급한 ‘비구=피커링’의 가설을 이곳에 적용해 볼 수 있겠다. 피커링은 1918년에 22만 개의 별을 관측한 과학자이다. 이후 그 개수는 27만 개에 근접했다. 그의 연구 결과에 힘입어 1931년에는 ‘허블의 법칙’이라는 저명한 과학적 이론이 발표되기도 했다. 건축학을 전공했고 이과적인 지식이 풍부했으며 상당한 다독가였던 이상의 전기적 사실을 고려할 때, 그는 당대에 유명했던 이 과학자를 인지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상은 치열했던 과학자의 삶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십사년동안이나” 뻔뻔히 살아온 자신의 삶을 비교하면서 자책과 반성의 시간을 보낸다. 1910년에 태어난 이상은 이 시가 발표된 1933년 당시 정확히 스물네 살이었다.
다음 부분에서 그는 “자서전에” 자신의 “부고를” 알린다. 그것은 이전까지의 나에 대한 자살 선언에 가까울 것이다. 죽음의 선언을 한 까닭은 자신의 “시가 차압당하는ᄭᅩᆯ을” 차마 쳐다보고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이상이 생각하기에 이전까지 스스로의 문학은 차압되듯 어딘가로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있었고 앵무새처럼 누군가의 흉내만 낼 뿐 자유로운 본인만의 목소리를 발화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이 순간부터는 새로운 시를 쓰겠다고 이상은 세상에 출사표를 던진다. 그 전환과 결심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이 가능할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1933년은 이상이 조선총독부 건설국을 사임하고, 각혈이 심해 배천온천으로 요양을 가서 금홍을 만나고, 다방 제비를 경영하고, 구인회와 교류를 맺기 시작한 해이다. 아마도 1933년은 그에게 새로운 문학적 국면을 맞이한 시기였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전기적 일화를 통한 추정은 다소 불확실한 면이 있다. 보다 확실한 것은 그가 위 시편을 통해 이전의 문학과 이후의 문학을 구분 짓겠다는 자의식을 표출했다는 점이고, 그 의식적 전환의 매개로 표출된 대상이 ‘어떤 과학자’였다는 점이다. 그 과학자가 ‘비구=피커링’이라는 해석적 가정을 유지한다면, ‘비구’는 이상 이후의 문학과 이전의 문학을 연결시키고 사라진 매개자라고 말해 볼 수 있겠다.16) 일 년 뒤 이상은 천체의 별을 올려다보는 대신 하늘에서 도시를 굽어보는 까마귀의 시선으로 식민지 근대의 한 풍경을 그려 내었다.
어빙 고프먼은 『자아 연출의 사회학』에서 공연자와 관객 양쪽의 시선과 의도적인 연출로 탄생하는 ‘나’의 이미지를 이야기한 적이 있다.17) 이를 잠시 빌리자면 이상의 여러 필명들은 각자 부여받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의도적인 가상의 자아 이미지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시, 소설, 수필 등 여러 장르에 문학적 재능을 보였던 이상은 작품을 창작할 때마다 그에 어울리는 이름을 고심하였던 것 같다. 그러다 특정한 시기가 지난 뒤 모종의 결심과 함께 ‘이상’이라는 가명을 자신의 문학을 대변하는 브랜드로 삼게 되었다. 이후 그는 이상의 문학적 경향과는 사뭇 다른 글을 써야 하는 순간이 오면 필명 대신 오히려 본명을 내걸었다.18) 최소한 그가 염두에 둔 문학 내에서 이상이라는 분신은 인간 김해경의 실존을 넘어선 존재로 화한 셈이다. 다채롭게 축적된 여러 논의들에서 이미 분석한 것처럼 이상이라는 가상의 이름과 형식은 그가 남긴 텍스트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19) 동시에 그 거짓된 가면은 제국의 교육을 받고 일본어로 근대를 ‘흉내내이고있는’ 자신의 모습에 깊은 절망과 기교를 품었던, 어렵사리 현해탄을 건너 동경했던 일본에 다다랐으나 그곳 또한 이식된 ‘모조 근대’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끝내 죽음에 이르렀던 이상의 비극적인 삶과 문학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이런 시도 있다.
옻칠된 소반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머리통
그것이 그의 전체였다
누가 나에게 육체를 줄래?
립글로스 바른 입술을 위아래로 천천히 움직이면서 그가 육성으로 말해도 대답을 고민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그저 그가 질문을 했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면서 신세계의 출현을 더욱 즐거워할 뿐이었다
대도심의 공원 숲, 쏟아지는 셔터음 속에서
화창했던 휴일이 저마다의 데이터에 저장되고 있었다
나는 그를 여러 차례 마주했다 다른 사례와 기술력이 쏟아져 그의 인기가 시들해진 뒤에도 내 인생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으므로 산책하거나 조깅하는 이들을 바라보는 척하면서 그의 얼굴을 그리거나 채색했고 그가 말하기를 기다렸다 한 시간에 네 번씩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넘지 마시오”
팻말을 뽑아 흙을 털고서
그의 머리칼 속 낙엽들과
새들의 배설물로 얼룩진 이마와 입술을 닦아 내기도 했다
그를 두 손으로 들어 나의 백팩에 넣고
전선과 공유기를 챙기고
공원 숲을 빠져나온 뒤부터
내가 조금 바뀐 것도 같았다
어떤 날엔 내 머리를 목에서 떼어 내 책상 앞에 내려놓아도 또렷하게 앞을 볼 수 있었다 나는 머리를 옆으로 눕힌 뒤 외이도를 들여다보면서 천일염만 한 귓밥들을 핀셋으로 집어 냈다
그는 여전히 한 시간에 네 번씩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누가 나에게 육체를 줄래? 그를 나의 베개 위에 올려 두고 그 옆에서 잠들거나 그를 뒤집어쓰고 거리로 나갈 때마다 나와 그의 과거는 연결되었다
―이새해, 「특별인사」 부분20)
한 시인이 꿈꿨던 근대의 기획과 꿈은 너절한 현실을 지나 오래된 옛이야기의 농담이 되어 버렸다. 황혼기에 이른 문명의 기술은 이제 인간의 지능과 정서를 닮은 미지의 존재들을 인공적으로 탄생시키는 경지에까지 이른 듯하다. 신의 흉내를 낸 섬뜩한 그 결과물들을 ‘나’는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 주변 사람들 또한 “신세계의 출현”과도 같은 ‘그’의 특별한 등장과 인사를 구경하며 환호를 보낸다. 재미있는 것은 그들의 감탄과 즐거움이 모두 핸드폰의 “쏟아지는 셔터음”과 함께 “저마다의 데이터에 저장”된다는 점이다. 낯선 존재와 처음으로 대면하게 된 희귀하고 열띤 순간에도 사람들은 자신이 느낀 생생한 감각보다 영구히 저장될 이미지의 사본을 더 중히 여기는 듯하다. “옻칠된 소반 위에 덩그러니” “머리통”만 남은 그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인간의 눈동자와 이기의 렌즈들을 쳐다보며 무심한 질문을 던진다. “누가 나에게 육체를 줄래?”
새로움에 대한 열의와 자본의 욕망이 기이하게 결합된 시대의 지반 위에서 사람들의 관심은 얼마 지나지 않아 빠르게 밀려오는 “다른 사례와 기술력”으로 옮겨 간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이 떠나간 뒤에도 주위를 맴돌며 그의 얼굴을 그리거나, 일정한 시간을 두고 반복되는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러다 결국 나는 금기의 선을 넘듯 경고 문구가 적힌 팻말을 넘어 그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먼지와 배설물로 얼룩진 얼굴을 조심스레 닦아 주고 그가 담긴 머리통과 전선을 백팩에 넣은 채 조용히 공원을 빠져나온다. 그의 머리통을 훔쳐 달아난 그날 이후부터 나는 “내가 조금 바뀐 것도 같”은 느낌을 받는다. 나는 타인의 시선으로 세계를 조감할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의 “외이도를 들여다보면서 천일염만 한 귓밥들을 핀셋으로 집어” 내는가 하면, “머리를 목에서 떼어 내 책상 앞에 내려놓아도 또렷하게 앞을 볼 수 있었다”. 마치 가면을 바꾸어 끼듯 나는 그와 얼굴을 교체할 수 있게 되었고, 그때마다 “나와 그의 과거는 연결되었다”는 기분을 느낀다.
타인의 얼굴과 과거의 기억들이 겹쳐지는 이러한 시적 장면은 시인의 작품 안에서 그리 낯선 풍경은 아니다.21) 시인의 시집에는 “직업이, 체격과 얼굴이, 그 붙임성 없는 태도가 싫다며” ‘나’에 대해 “함부로 말하던” “사람들의 얼굴”이 “영원히 떠오르”(「후원요청서」)기도 하고, “밤새 달려 가던 버스 안에서, 휴양지의 파라솔 아래에서, 흙탕물이 무릎까지 차오르던 횡단보도에서, 그의 동생의 화장터에서” “오래도록 지켜보던 얼굴”(「프레이밍」)들이 전부 하나의 얼굴로 포개어지기도 한다. “어제는 지하철역 입구에서 내 얼굴을 닮은 인간들이 떼로 달려 나오더니” “경찰과 군인들”(「특별인사」) 무리와 맞닥뜨리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지난날의 울분, 슬픔, 죄책감 등 수많은 감정들이 뒤엉켜 있는 이러한 시적 순간들 속에서 한 개인의 구체성은 불특정 다수의 얼굴들과 뒤섞이며 점차 흐릿해져 간다. 나 역시 명료한 1인칭의 자의식이 소거된 3인칭의 혼종적 주체들로 거듭나는 듯하다.
「어떻게든 우리는 심판 받겠지요」라는 시편에서 ‘나’는 사람을 죽인 살인자가 되는 꿈을 꾼다. “어젯밤 꿈”에서 나는 “건장한 40대 남자를 녹슨 드럼통에 넣고 불을 질렀다”. 무슨 이유로 그가 살해당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고 손에는 피와 기름 냄새 같은 것이 남아 있지도 않지만, 떨리는 팔다리와 막연하게 엄습하는 죄의식은 또 다른 존재가 되어 경험한 그 생생한 순간의 현존을 나에게 전해 온다. 무의식처럼 남아 있는 이 같은 죄악감은 나의 신앙적 경험과도 깊이 관련되어 있다. 어린 시절 달란트를 받기 위해 외웠던 규율과 “간음하지 말라”는 대타자의 명령은 “나 너의 신체 망각 감정 속에서” 영원히 살아 숨 쉰다. 아버지의 품 안에 있던 어린 시절로부터 제법 멀리 달아나 어엿한 어른이 되었다 생각했지만 “신앙이 무너진 자리에도” 그 오래된 “죄책감은 철근처럼 남아 있다”.
역시나 신의 그늘에서 막 벗어나기 시작했던 근대 여명기의 주체들은 자신만만한 홀로서기를 선언하면서도 여전한 불안과 의문을 마음 한구석에 지니고 있었다. 과연 인간은 신이 될 수 있을까, 신에게 버림받은 채 세계에 피투된 우리들은 그의 자리를 완전히 대체할 수 있을까. 칼 야스퍼스는 유한성과 미완결성을 지닌 인간은 결코 신으로서 완성되지 못한다고 단정 지어 말한다.22) 신은 그러한 인간의 부정태로서 존재하는 관념이기에 인간의 ‘신-되기’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은 인간 너머를 향한 상상과 안정된 삶의 목적을 우리에게 선물한 존재이기도 하지만, 이토록 불가해한 세계의 섭리와 유한자로서 가닿을 수 없는 절망을 대변하는 이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위 작품의 시적 주체가 보여 주는 방황과 결기 또한 그곳에서 시작된다. 한갓된 인간의 기도에 세계는 불가피한 침묵으로 응답할 것이고, “휘장 뒤에 숨어 계신 아버지는 거기 영원히 숨어 있을 것”이기에 ‘나’는 “녹아내린 종교심”을 끌고 불경한 “지옥으로 간다”(「어떻게든 우리는 심판 받겠지요」). 고요한 예배당의 문턱을 넘어 고통과 정념으로 얼룩진 사람들의 얼굴과 자신의 몸을 섞는다. 이제 저물어 가는 근대의 어스름에 선 주체들은 타자로 여겨졌던 이들의 표정과 몸짓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한 명의 인간으로서 오롯이 대우받지 못했던 특정한 계급, 인종, 정체성을 지닌 존재들뿐만 아니라 동물, 기계 등 비인간의 모양을 띠고 있는 이들까지 자신의 울타리 안쪽으로 포섭해 그 혼종의 영역을 넓혀 나간다. 아무리 애를 써도 신의 흉내를 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그의 모조품으로 빚어진 인간적 원죄의 틀을 떨쳐 낼 수 없는 것이라면, 이제 우리는 본연의 나를 넘어 온전히 다른 그 무엇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논의를 조금 더 진전시키기 위해 한 편의 이야기를 덧붙여 보자. 근래의 한국 소설 중 ‘진짜’와 ‘가짜’에 대한 서사를 가장 선명하게, 그리고 흥미롭게 꺼내 완성한 작품은 바로 성해나의 「혼모노」23)일 것이다. 이 작품은 30년 동안 박수무당으로 살아온 주인공 ‘문수’가 응답하지 않는 신을 두고 벌이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평소 문수는 자신이 모시는 신령들 중 가장 강하고 신통한 ‘장수 할멈’을 위해 열과 성을 다해 그녀의 비위를 맞춰 왔다. 정성스레 신당을 청소하는 것은 물론이고, 올리는 물건들은 모두 상등품을 사용하며, 새벽부터 꽃시장에 나가 할멈이 좋아하는 꽃을 가져다 놓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할멈은 회답하지 않는다.”(203쪽) 흉괘와 좌절이 거듭되고 있는 문수의 신당 앞으로 새로 내림굿을 받은 ‘신애기’ 한 명이 자리를 잡는다. 신내림 받은 어린 딸아이를 걱정하는 부모의 아득한 한탄과 너무나도 앳된 신애기의 모습에 인간적인 안쓰러움을 느껴 몇 마디 다정한 충고를 건네려는 그때, 살기 어린 눈으로 문수를 바라보던 신애기는 조소하듯 중얼댄다. “신빨이 다했다더니 진짠가 보네. 할멈이 나한테 온 줄도 모르고.” “하기야 존나 흉내만 내는 놈이 뭘 알겠냐만.”(205쪽)
신의 목소리를 빌린 무당으로서 반평생을 살아온 문수는 할멈이 떠나고 난 뒤 전에 없던 무기력함을 맛본다. 뛰놀 듯 춤추던 칼날을 마주하면 이제 피가 흐를 것이 두려워 심장이 뛰고, 오래도록 자신을 질투해 온 동료에겐 은근한 멸시와 비웃음을 받는다. 설상가상으로 문수는 단골인 황보 의원의 선거를 앞두고 굿판을 벌여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모형 작두와 가짜 칼을 준비하고 유튜브를 보며 접신 연습까지 해 보지만, 그의 무능이 바깥으로 알려진 탓인지 긴 세월을 함께했던 황보 의원마저 문수 대신 신애기에게 굿의 방울을 맡긴다. 이 모든 상황의 직간접적인 원인이 된 신애기가 할멈의 말투로 자신을 조롱하자 더 이상 울분을 참지 못한 문수는 고이 모셔 왔던 할멈의 제단을 부수며 난동을 피운다. “텅,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나뒹”(219쪽)구는 할멈 상의 모습이 마치 껍데기만 남은 자신의 모습과 겹쳐 보이는 것만 같아 문수는 차오르는 웃음을 멈출 수가 없다.
기세가 누그러지지 않는 이는 오직 나뿐이다. 피범벅에 몰골도 흉하겠으나 시야가 환하고 입가엔 미소까지 드리워진다. 신령 근처라도 가닿은 것처럼 몸이 가뿐하고 신명이 난다. 장단이 빨라질수록 나는 고조된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삼십 년 박수 인생에 이런 순간이 있었던가. 누구를 위해 살을 풀고, 명을 비는 것은 이제 중요치 않다. 명예도, 젊음도, 시기도, 반목도, 진짜와 가짜까지도.
가벼워진다. 모든 것에서 놓여나듯. 이제야 진짜 가짜가 된 듯.
장삼이 붉게 젖어 든다. 무령을 흔든다. 잘랑거리는 무령 소리가 사방으로 퍼진다. 가볍고도 묵직하게.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작두에서 내려오지 않던 신애기가 아연실색하며 나가떨어진다. 그 애는 바닥에 주저앉아 휘둥그레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황보와 그의 가족들도 기도를 멈추고 나를 올려본다. 할멈도 이 장관을 다 지켜보고 있겠지.
어떤가. 이제 당신도 알겠는가.
하기야 존나 흉내만 내는 놈이 무얼 알겠냐만은. 큭큭, 큭큭큭큭. (223쪽)
일 년에 며칠 없는 복된 날, 문수는 자신이 점찍어 준 명당 터에서 굿을 하고 있는 황보 의원의 집을 찾아간다. 초대받지 않은 이의 방문에 모두가 떨떠름해 있을 무렵 문수와 신애기는 태연한 얼굴로 서로의 굿판을 벌인다. 새파랗게 날이 선 작두 위에서도 피멍울조차 비치지 않는 신애기와 달리, 문수의 몸은 칼날이 스칠 때마다 살갗이 갈라져 전신이 피범벅이 된다. 악사들의 북 소리, 피리 소리, 장구 소리가 휘몰아치듯 이어지고 할멈이 접신한 신애기조차 지치고 놀라 나가떨어질 때쯤, 문수는 “몸을 억지로 떨며 신접 흉내를 내는 것”(222쪽)이 아니라 진짜 “신령 근처라도 가닿은 것처럼” 신들린 광란의 춤을 춘다.
이 소설은 작품의 제목인 ‘혼모노’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신-무당-인간’을 매개로 하여 진짜와 가짜에 관한 주제 의식을 직접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바나나 우유’와 ‘바나나맛 우유’, ‘생화’와 ‘지화’, ‘진짜 칼’과 ‘모형 칼’ 등의 상징적 소재는 ‘신내림을 받은 자’와 ‘신을 잃은 자’의 인물 구도와 발을 맞추어 선명한 대립을 이룬다. “작두 타타타 그분이 오셔 자꾸 / 하하하 하품 나는 짝퉁 / 가가가 가짜들은 싹둑 / Cut cut cut 싹둑”(딥플로우, 「작두」)과 같은 유사한 풍경의 노랫말이나, 강신무를 앞에 두고 “꼭 진짜 같다” 또는 “이런 거 다 짜고 치는 거라니까”(208쪽)라고 말하며 진위 여부에 대해 숙덕이는 낯익은 공방처럼, 몰이해의 상황에 직면하였을 때 우리들 대부분의 관심과 질문은 진실 혹은 거짓 사이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모든 것에서 놓여나듯” 어느 때보다 가볍게 신무를 추는 문수의 마지막 장면은 이 질문의 초점을 다른 판으로 옮겨 놓는다. 그것은 거짓된 나를 벗어던지고 진정한 나를 찾아 나선다거나 진짜와 가짜 중 어느 하나의 우월을 주장하는 일이라기보다는 그 양쪽 모두가 실은 텅 비어 있다는 것을, 우리들의 유일한 본모습이 “진짜 가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황홀하게 보여 준다.
그런 점에서 존재론적 자각과 변화를 겪는 주인공의 직업이 신의 대리인인 ‘무당’으로 설정된 것은 여러모로 흥미로운 지점이었던 것 같다. 사물의 작용이나 행동의 주인을 의미하는 일반적인 의미와는 사뭇 다르게 ‘주체(subject)’는 본디 ‘아래(sub)’로 ‘내던져진(ject)’ 자, 거대한 섭리나 힘에 복종하는 자라는 상반된 뜻을 함께 지닌다. 주체를 대체하는 표현으로 빈번하게 쓰이는 ‘agent’ 또한 주인의 힘을 대리 수행하는 주체의 속성을 잘 보여 준다.24) 이 같은 주체의 이중적 속성에 깊이 천착하는 이론 중 하나는 아마도 정신분석학일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자크 라캉은 주체의 기호 ‘S’를 빗금 그어진 상태로 표현하는데, 그에 따르면 언어와 규칙을 배우고 상징 세계의 내부로 편입되는 주체들은 마치 강제로 신의 내림을 받은 무당들처럼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대타자의 목소리와 문법을 따르게 된다. 여기서의 핵심은 그러한 대타자 역시 완전하지 못한 결여된 존재라는 점이다. 주체는 대타자의 언어를 경유해서 말을 하지만 또 그의 균열을 직시하고 환상을 가로지를 수도 있다.25) 그렇기에 이 소설은 명령을 내려 줄 신의 상실과 무한한 자유의 책임이 두려워 자발적 복종의 삶을 재탈환하려다 실패한 어떤 무당의 이야기임과 동시에 대타자의 허위를 직시한 뒤 “누구에게도 의탁하지 않고 도움을 구하지도 않고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222쪽) 첫걸음을 뗀 한 인간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존나 흉내만 내는 놈”에 대한 섬찟한 비웃음과 “이제 당신도 알겠는가”라고 묻는 문수의 마지막 독백은 신을 받드는 예외적 존재가 아닌 인간 일반을 향한 실존의 질문들로 뒤바뀌어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가상에 대한 또 다른 사유의 기회를 제공해주는 텍스트들 중 마지막으로 살펴볼 작품은 권혜영의 「여분의 해마」26)이다. 주인공인 ‘나’는 ‘해마’라는 아이돌에게 푹 빠져 있다. 단순히 노래와 춤을 좋아하는 수준을 넘어 출시된 해마의 모든 포토카드를 모아 “포카 드래곤볼”(81쪽)을 만들 정도로 남다른 애정을 보인다. 쉬이 양도가 나오지 않던 희귀한 포카를 손에 넣고 ‘덕질 메이트’와 기쁨을 나누고 있던 어느 날 저녁, 나는 해마의 빛나는 컬렉션에서 미세한 흠집과 빗금을 발견한다. 깜짝 놀란 내가 “눈물을 삼키며 알코올 스왑으로 포토카드 표면을 살살 문지른”(81쪽) 찰나 카드 위로 “손가락 하나가 뾱, 하고 솟아오”(81쪽)르더니 이내 곧 “포토카드를 손에 들고 벙찐 얼굴을 한 해마”(82쪽)가 내 침대 위로 나타난다. 눈앞에 선 해마를 보며 나는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린다. 이건 “최애와의 만남 이벤트 같은 건가” 아니면 “이 포카가 AR 포카였던가”(82쪽), 그런데 “지금 사랑한다고 말하면 더 어색해지겠지?”(83쪽)
내 앞에 나타난 이는 어눌한 말투와 목소리, 목덜미를 쓰다듬는 사소한 버릇까지 진짜 해마가 맞았다. 헤어와 메이크업과 코디로 미루어 보건대 “자라섬 이슬라이브 때의 해마”(84쪽)가 분명했다. “싱그러운 청량함을 인간화”(85쪽)했던 그 당시의 해마는 내가 가장 사랑했던 시절의 해마이기도 했다. 얼떨떨한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나는 해마와 택시를 타고 그의 회사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데뷔 쇼케이스하던 완전 애기 때”(91쪽)의 해마까지 맞닥뜨리게 된다. 이처럼 해당 작품 속에는 ‘덕후’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꿔 보았을 순간들이 현실 바깥으로 튀어나와 있다. 이곳은 리스트를 모아 닳도록 음미하던 최애의 빛나는 장면들이 전부 코앞에서 펼쳐지는 곳이자 “2019년 가요대축제 해마”, “2018년 주간 아이돌 해마”, “190827 아육대 해마”, “200105 음중 퇴근길 해마”, “190818 LA 케이콘 해마”(109쪽) 등 수많은 시간 선의 해마가 실존하는 환상의 세계이다.
나는 내 발밑에 차이고도 남는 무수한 포카들 중 한 장을 주워 들고 가만히 내려다본다. 사진 속 해마는 환하게 웃고 있다. 종이에 대고 묻는다. 내가 너를 알까?
나는 해마가 어떤 정치 세력을 지지하는지 모른다. 가족들의 얼굴과 직업을 모른다. 살면서 몇 번의 부침을 겪었는지, 그 지나간 상처들이 가슴에 얼마만큼 사무쳤는가를 모른다. 주량을 모른다. 아파 보일 때는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를 모른다. 하루가 멀다 하고 사랑을 고백하고, 보고 싶다고 말하고, 얼굴과 실력과 성격을 예찬하면서도, 그런 것들을 모르는 채로 지낸다. 딱히 알고 싶지도 않았다. 때로는 해마가 이 모든 정보값들을 속속들이 말해 주지 않는 타입이라 고마워한 적도 있다.
나는 너를 좋아할까? 해마는 말이 없다. 단지 윗송곳니만이 보일 뿐이다. 해마가 진짜 즐거울 때만 드러나는 윗송곳니가. (114~115쪽)
‘나’는 갈 곳을 잃은 스무 살의 해마와 어색한 동거를 시작한다. 사랑하는 이와 같은 공간에서 함께 살아가는 일은 언뜻 설레고 행복한 일일 것 같지만 정작 현실은 그러하지 못하다. 실제로 만난 해마는 팬에게 담배를 요청할 정도로 무신경하고, 바닥에 깔린 이불 대신 집주인의 침대를 빼앗을 만큼 얼굴이 두껍다. 나만을 위한 신청곡을 불러 줄 때도 해마는 음역대가 다른 멤버들의 파트를 부르다 삑사리를 내고, 벽을 두드리는 이웃집의 항의와 굳어 가는 나의 표정 앞에서도 자기애의 라이브를 한없이 이어 간다. “내가 알던 해마는 눈물이 없고 눈치가 빠른 아이인데, 얘는 눈물이 많고 눈치가 없다.”(107쪽) 나는 해마의 “눈썹이랑 티존”, “귀에 난 점”, “선명”한 “손톱 조반월”과 “분홍빛 혓바닥”의 “건강 상태”(100쪽)에 대해 알고 있다. 그의 “베스킨라빈스 원픽”과 “존경하는 가수”, “인생 영화”, “진짜 즐거워서 웃을 때”와 “예의상 웃을 때”의 차이까지 두루 꿰고 있다. “이즈음엔 이런 말을 하겠구나, 예상하면 정말 그와 비슷한 말”(97쪽)을 할 정도로 그에 대해 빠삭하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해마가 내가 알던 해마인지 이제는 확신이 서지 않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더더욱 모르겠다.”(97쪽) 이처럼 현실의 해마와 가까이 살아가며 내가 느끼는 감정은 친숙함이라기보다는 도리어 커져만 가는 낯선 이질감이다. 내가 정말 그를 알고 있긴 한 것인지, 내가 사랑했던 것은 진짜가 아닌 가짜 해마는 아니었는지 나는 고심하기 시작한다.
알랭 바디우는 『사랑 예찬』이라는 저서에서 사랑이 지녀야 하는 성질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27) 그는 프랑스 내 대표적인 데이트 웹 사이트인 ‘미틱(Meetic)’의 사례를 든다. ‘사랑에 빠지지 않고 사랑할 수 있다’는 미틱의 슬로건을 비판하면서, 그는 사랑의 실체적 위험을 회피하며 사랑을 획득하려는 이러한 징후들이 ‘전사자 제로’를 외치는 미군의 전쟁 방식과 닮았다고 주장한다. 폭격과 공습에 의한 현실의 사상자가 분명히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눈앞에 그 참혹한 실체가 보이지 않으므로 전사자가 없는 것이라 여기는 전쟁의 방식과, 타인과 접촉하는 순간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위험과 불편함을 애써 도려내거나 무시하려는 최근 사랑의 경향이 서로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에게 사랑은 위험한 것이고 성애적인 것이며 하나의 존재가 둘이 되어 새로운 화학 작용을 일으키는 커다란 ‘사건’과도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현실의 해마보다 포토카드의 해마를, 곁에 있는 해마보다 핸드폰 액정의 “유리 위로” “나타난 해마를” “보고 만지는 편”이 “더 익숙”(89쪽)하고 기꺼운 ‘나’의 사랑은 거짓된 혹은 미달태의 사랑에 불과한 것인가?
이와 유사한 논의가 버추얼 휴먼이나 인플루언서, 버추얼 아이돌 내지는 스트리머 활동 등을 대하는 이들에게서도 종종 발견된다. 가상의 인격체 또는 캐릭터의 활동에 비판적 입장을 취하는 이들의 논리는 다양하지만 그 핵심의 근저에는 만들어진 가면 아래 현실의 결핍 혹은 부재를 감추고 있는 거짓된 존재들에 대한 거부감이 자리 잡고 있다. 금기시된 ‘전생’을 언급하거나 현실의 ‘빨간 약’을 가져와 숨겨진 실체를 드러내려는 시도 또한 적지 않다. 잘 알려져 있듯 빨간 약은 영화 〈매트릭스〉 내에서 진실을 일깨우는 각성의 매개체이다. ‘파란 약’을 선택하면 가상 세계 안에서 안온한 무지의 삶을 살아갈 수 있고, ‘빨간 약’을 택하면 고통스러운 현실의 실체를 목도하게 된다. 이 논리 속엔 ‘진실’과 ‘허상’이라는 낯익은 이분법이 내재해 있다. 동굴에 묶인 허상의 그림자와 그 너머에 있을 진실한 빛의 이분법적 대비는 플라톤 이래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유서 깊은 알레고리이다. 이 알레고리의 교훈은 단순하다. 허상의 거짓된 옷을 벗기고 매트릭스 세계의 속임수로부터 벗어나 참된 빛을 바라보라는 것. 물론 허상의 “가면을 벗기고, 현상학적 발생을 통해 그것이 어떻게 서서히 ‘물상화’되고 퇴적되었는지를 보여 주기는 너무나 쉬울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유령 같은 또는 가상적인 실체를 상정하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임과 동질적인 데 있다.”28) 즉 거짓의 가면을 벗기고 허상을 물신 숭배하던 이들의 진면목을 고발하는 일은 무척 쉬운 일일 것이나, 그보다 어렵고 중요한 문제는 허위의 가림막을 내던진 우리들에게 남은 실체가 그 벗겨진 가면뿐이라는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던 꾸며 낸 이름들과 타인의 얼굴들, ‘니시모노’가 트랜스에 빠져 벌였던 광란의 굿판은 안쪽의 진짜 얼굴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 가면 뒤에 가려진 다른 진실을 드러내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것은 가면의 겉모습과 그 속의 민낯이 똑같은 얼굴이라는 사실, 그 거짓된 가면이 텅 빈 우리를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실체이자 형식 그 자체라는 사실이다.
위 소설의 주인공인 ‘나’가 ‘해마’를 사랑하게 되었던 이유를 다시금 떠올려 보자. “콩나물 시루마냥” 이리저리 휩쓸리며 살아가던 나에게 숨도 잘 쉬어지지 않는 끔찍한 시간들을 견디게 해 준 것도, “조금 더 살아 볼 용기”(104쪽)를 준 것도 모두 해마의 목소리였다. 회사에 도착한 나는 언제든 부속품처럼 교체될 수 있는 ‘체스 말’로 변신 당한다. 동료의 뒷담화를 듣거나 종일 팀장의 눈치를 봐야 하는 날이면 모든 의욕과 인류애가 사르르 녹아 없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해마의 새로운 떡밥이나 “공식 굿즈 판매처 링크”가 올라올 때면 나는 “체스 말의 맡은 바 역할을 성실히 수행”(104쪽)해 열심히 돈을 벌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독특하게도 내가 행하는 종류의 사랑은 독점적으로 소유되지 않고 아무리 파먹어도 소모되지 않는다. 나는 “배달 떡볶이”와 금손들이 만든 “입덕 포인트 영상, 무대 직캠”(105쪽) 등을 무한 반복하며 그 사랑을 더욱 키워 나간다.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사랑은 스스로의 위험을 무릅쓴 우연하고 예외적인 사건이겠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 사랑은 내가 바라는 때에 원하는 방식으로 만들어 소비하고 싶은 1인분만큼의 마음이기도 하다. 접촉도 오염도 없는 안전한 거리에서 언제든 자의적인 진입과 이탈이 가능한 연모의 마음. 비록 뚜렷한 온도와 촉감을 지니진 않았지만 나의 삶을 이전과 이후로 가르는 분명한 변화를 일으킨다는 점에서, 그것은 현실의 연애를 흉내 낸 가짜 사랑이 아니라 변이한 주체들이 발명한 새로운 사랑의 형태는 아닐까.
1) 김홍중은 이 과정에서 나타난 이상이라는 필명이 조선과 일본의 언어적 상징계 양쪽 모두에 포착되지 않으려는 오디세우스적 책략의 일종이라고 분석한다. 자세한 논의는 「한국모더니티의 기원적 풍경」, 『사회와 이론』 7, 한국이론사회학회, 2005, 207~208쪽 참조.
2) 예컨대 「지도의 암실」에 적힌 “앵무”, “CETTE DAME EST―ELLE LA FEMME DE MONSIEUR LICHAN?”, “OUI”(이상, 김주현 엮음, 『증보 정본 이상문학전집 2_소설』, 소명출판, 2009, 156쪽) 등의 구절은 연작시 「오감도」의 “鸚鵡”, “『이小姐는紳士李箱의夫人이냐』”, “『그러타』”(『증보 정본 이상문학전집 1_시』, 90~91쪽) 등으로 언어와 형식만 달리할 뿐 거의 동일한 내용으로 변주된다. 이후 김주현의 같은 책을 인용할 때는 각기 『전집 1』과 『전집 2』로, 『증보 정본 이상문학전집 3_수필·기타』는 『전집 3』으로 축약해 표기하도록 한다.
3) 박현수는 「휴업과 사정」에서 사용된 ‘별을 든 왕자’라는 표지 삽화가 잡지 『조선』과 동화 『목마』의 표지 도안으로 사용되었음을 밝힌다. 『조선』에서 해당 삽화를 사용한 작품은 「만담 천리구」라는 글이다. 이 글은 이전에는 다른 도안을 사용하다가, 이상의 소설 「十二月十二日」이 7회분 동안 연재된 1930년 9월부터 ‘별을 든 왕자’로 표지 도안을 바꾼다. 『목마』는 이상의 친우 김소운이 많은 공을 들인 세계 동화 특집 기획으로 실제 이상이 그 번역을 맡기도 했다. ‘별을 든 왕자’ 삽화는 세 번 등장했는데 우연하게도 모두 이상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책이나 잡지에서 발견된다. 더욱 자세한 논의는 박현수,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수사학-이상문학연구』, 소명출판, 2003, 318~319쪽 참조.
4) 「이상의 비련」, 『여성』, 1939.5.
5) 『전집 3』, 288쪽.
6) 이 같은 편차는 이상 본인이 지녔던 장르적 친연성의 차등과도 연결 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는 「오감도」 연작시의 대중적 실패와 지탄 이후 김기림에게 소설을 쓰겠다는 선언의 편지를 연이어 보낸다. 이상은 “소설을 쓰겠오.”(「사신」, 『전집 3』, 253쪽), “참 내가 요새 소설을 썼오. 우습소?”(같은 책, 255쪽), “사실 나는 요새 그따위 시밖에 써지지 않는구려. 차라리 그래서 철저히 소설을 쓸 결심이오”(같은 책, 264쪽)라고 말하며 반복적으로 소설 창작에 대한 결심을 밝힌다. 지금은 물론이거니와 당시에도 소설을 쓴다는 것은 우스워 보인다거나 부끄럽게 생각되는 종류의 일은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이상은 무언가 자조 섞인 목소리로 소설을 쓰겠다고 말하는 듯 보이고, 그 결심을 적을 때도 큰 결단을 내리는 것 같은 뉘앙스의 목소리로 말을 한다. 그는 시라는 장르가 자신의 문학적 의도와 기획을 가장 잘 담아 낼 수 있는 장르라고 생각했고, 그렇기에 시에서 소설로의 이행은 이상에게 현실과의 불가피한 타협으로 여겨졌을 수도 있다. 따라서 1930년에 최초의 소설 「12월 12일」을 발표한 뒤 「지도의 암실」과 「휴업과 사정」에서는 이상이라는 이름 대신 ‘비구’와 ‘보산’이라는 필명을 사용한 까닭은 그의 장르적 호오와 부끄러움이 반영된 것이라고 해석해 볼 여지도 있다. 실제 김기림은 『이상선집』의 서문에서 이상이 소설을 쓰게 된 경유와 그가 시에 대해 지니고 있던 생각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어찌 보면 그가 시 대신에 소설을 쓴 것은 속된 독자층, 아니 너무나 상식적인 문단 그것과의 타협인지도 몰랐다. 사실 그의 시를 이단과 같이 돌리던 사람들조차 그의 소설에는 매우 흥미를 느낀 듯했다. 「봉별기」는 한 소품이려니와, 그 핏자국이 오히려 눈에 선한 「지주회시」의 고심역작에 반해서 「날개」의 가벼운 애상이 더 사람들의 입맛에 닿았던 듯하다. 이상은 그리하여 「날개」의 일편으로 문단을 웅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군중의 박수갈채 속에서도 실상은 호주머니 저 밑에 감추어 둔 그의 시고를 더 소중하게 주물러 보곤 한 것이다.”(「이상의 모습과 예술」, 『이상선집』, 백양당, 1949, 6~7쪽.)
7) 『전집 2』, 156~157쪽.
8) 『전집 2』, 290쪽.
9) 『전집 1』, 71쪽.
10) 『전집 2』, 366쪽.
11) 사에구사 도시카쓰, 「이상의 모더니즘-그 성립과 한계」, 『이상문학전집』 5, 문학사상사, 2001, 279쪽.
12) 신범순, 『이상의 무한정원 삼차각나비』, 현암사, 2007, 371~373쪽.
13) 김학은, 『이상의 시 괴델의 수』, 보고사, 2014, 67~68쪽. 그는 같은 맥락에서 ‘보산’이라는 이름이 천체 망원경으로 유명한 파슨스(Parsons)의 음차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14) 『전집 2』, 155쪽.
15) 독해의 편의를 위해 한글로 변환하여 표기하였으나 나머지는 원문의 형식을 그대로 따라 인용하였다. 『전집 1』, 82쪽.
16) 이는 프레드릭 제임슨이 사용한 개념이다. 그는 중세 봉건제를 근대 자본제로 전환하는 데 일조한 프로테스탄티즘에 주목한다. 그에 따르면, 성실한 노동을 통한 재산의 축적이 종교적 구원의 길임을 주장한 프로테스탄티즘은 별개의 것으로 분리되어 있던 종교와 자본을 매개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Fredric Jameson, The Vanishing Mediator; or, Max Weber as Storyteller, The Ideologies of Theory, London and New York: Verso, 2008, pp.329~331.
17) 어빙 고프먼, 진수미 옮김, 『자아 연출의 사회학』, 현암사, 2016.
18) 김해경(金海卿)의 이름으로 발표된 「배의 역사」, 「목장」, 「황소와 도깨비」, 김해경(金海慶)의 이름으로 발표된 「현대미술의 요람」 등이다. 앞선 세 작품은 모두 일반적인 이상의 문학 작품과는 달리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텍스트이다. 「배의 역사」는 『신아동』이라는 잡지에 일문으로 발표되었고, 「목장」은 『가톨릭소년』에 동시로 게재되었다. 「황소와 도깨비」 역시 동화임을 명시한 채 연재되었다. 「현대미술의 요람」 또한 이상이 발표했던 작품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미술평론이다.
19) 이상의 거짓된 행위와 흉내에 집중하고 있는 김윤식의 「가장행위와 그 방법: 이상의 산문」(『수필문학』 14, 1973.5), 김주현의 「이상 소설과 분신의 주체」(『한국학보』 제25권 2호, 일지사, 1999), 송민호의 「이상의 「선에 관한 각서」에 나타난 시공간 차원과 분신의 주제」(『이상리뷰』 5, 이상문학회, 2006), 조연정의 「이상 문학에서 ‘분신’ 테마의 의미와 그 양상」(『이상 문학 연구의 새로운 지평』, 역락, 2006), 안지영의 「이상 문학에 나타난 분신 모티프와 메타적 글쓰기」(『한국현대문학연구』 36, 한국현대문학회, 2012), 김혜진의 「이상 문학의 가장성 연구」(한양대 박사학위논문, 2017) 등의 선구적 연구들을 참조할 수 있을 것이다.
20) 이새해, 『나도 기다리고 있어』, 아침달, 2025. 이후 인용되는 작품은 제목만 표기.
21) 시집의 해설을 쓴 홍성희 평론가는 기억과 약속의 관점에서 ‘얼굴’을 읽어 낸다. 시인의 독특한 미감과 타인의 얼굴을 얽어 해석한 글로는 조대한, 「아름다움의 도굴자들」, 『문학과사회』 2025년 여름호 참조.
22) 칼 야스퍼스, 『철학적 신앙』,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1979, 131쪽.
23) 성해나, 「혼모노」, 『자음과모음』 2023년 가을호. 이 작품은 동명의 제목을 표제로 한 단행본 『혼모노』(창비, 2025)에도 수록되었다. 여기서는 앞의 것을 인용하여 쪽수만 표기한다.
24) 서영채, 「인문학개념정원 〈18회〉: 주체subject」, 『작가들』, 2023년 여름호.
25) 김석, 『에크리』, 살림, 2007, 202쪽.
26) 권혜영, 「여분의 해마」, 『사랑 파먹기』, 민음사, 2023. 이후 인용 시 쪽수만 표기.
27) 알랭 바디우, 조재룡 옮김, 『사랑 예찬』, 길, 2010, 15~20쪽.
28) 슬라보예 지젝, 조형준 옮김, 『라캉 카페』, 새물결, 2013, 1701쪽.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