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실패가 사과 한 알을 생성하는 순간
- 작성일 2025-09-01
- 댓글수 0
빛의 실패가 사과 한 알을 생성하는 순간
-심지아, 『로라와 로라』(민음사, 2018)
이채원
1. 유폐된 모든 것을 향해 글쎄, 라고 답하며
기존의 언어 체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목소리를 발화하는 일은 시가 늘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시작(侍作)에 있어 고정화된 관념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기존의 언어가 초래한 대상의 고정된 내부를 새롭게 모색하려는 시도는 역설적으로 기존에 상징화된 기호와의 연결 선상 위에서 재구성될 따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언어가 아직 도달하지 못한 실재를 포착하려는 일, 현존하는 이미지에 언어를 부여하고 그로부터 새로운 선언을 끌어내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렇기 때문일까. 여기, 여러 가치가 충돌하는 이 세계에서 끊임없이 무언가에 실패하고 있는 시인이 있다. 모든 풍경 앞에서 “글쎄”(「부엌의 부흥」)라고 답하며, “나는 나의 이야기를 믿지 않”(「여름 자르기」)는다고 말하는 이, 바로 심지아다. 시인은 뭔가를 선명하게 확정이나 확신하는 대신 이탤릭체의 목소리나 상반되는 개념을 배치하고, 동일한 단어를 일관되지 않은 감각으로 무한히 번복하는 행위를 끊임없이 발화하며 언어의 간극을 부러 형성하는 듯싶다. “한 땀 한 땀 꿰매진”(「풍경의 예절」) “단단한 문장”(「우리들의 테이블」)에 의도적으로 틈을 벌리는 듯한 시인의 방식은 현실에서 달성할 수 없는 언어의 자리를 확보하기 위한 의미화의 지연으로 연결되며, “언어가 잊은 것들”(「소유자」)에 대해 사유하는 시선의 토대로서 작동한다. 시의 가능성이 새롭고 낯선 목소리로 우리를 둘러싼 견고한 지반을 허무는 것이라면, 심지아는 언어의 틈새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할 수밖에 없는 오류와 관성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이다. 가령 본고에 수록된 시에서 로라, 글쎄, 서랍, 사과와 같은 기표의 연쇄를 통해 “당신은 몇 개의 허용을 가졌습니까”(「소유자」)하고 성찰하듯 던지는 질문이 그러하다. 바로 이러한 점에 주목하여 심지아의 첫 시집 『로라와 로라』을 읽어 보기로 하자.
로라와 로라, 한 사람처럼
두 사람처럼, 다섯 사람처럼, 로라와 로라
(‧‧‧)
가장 나이며 가장 나의 것이 아닌 것처럼
가장 너이며 가장 너의 것이 아닌 것처럼
(‧‧‧)
얼굴이 비대칭으로 자라나는
로라와 로라
―「로라와 로라」1) 부분
표제작 「로라와 로라」를 보면, 로라는 “한 사람처럼, 두 사람처럼, 다섯 사람처럼” 분열하며 증식한다. 로라는 단일한 존재가 아닌 동명이인이 되기도 하고, 혹은 이름은 다르지만 외양이 유사한 “쌍둥이”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나아가 화자는 인간의 범주에서 벗어나 “코끼리”나 “시체”, “외계인”으로 그려지기도 하고, “낮”과 “밤”, “지워진 묘비명”과 같은 비가시적인 세계의 상관물로 중첩되기도 한다. 연결어미 ‘-처럼’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문장들에 주목해 본다면 ‘로라’의 존재를 점층적으로 누적시킬 뿐만 아니라 하나의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전이하는 움직임으로 이행시키는 듯하다. 여러 이미지를 거쳐 종래 “가장 나이며 가장 나의 것이 아닌 것”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을 미루어 본다면 고정된 정체성을 탈피하고, 지금껏 주목하지 않았거나 못했던 이름의 자리를 ‘로라’의 존재로서 마련해 주려는 것이란 추측도 가능하다. 더구나 ‘로라’를 경유하며 중첩되는 문장에 드러난 대상들은 ‘정지한 밤’-‘사라진 낮’, ‘사색을 중단한 사제’-‘사색에 놓인 시체’와 같이 역설적으로 연결될 여지를 품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역설적 관계를 세밀히 추적하는 것보다 더 중요해 보이는 것은, 심지아가 ‘로라’라는 존재의 독립적 형태를 부정함으로써 “비대칭”으로 자라나는 얼굴을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비대칭’이란, 기하학적인 평면이나 직선을 기준으로 형성되는, 일방향적 질서에 의도적으로 따르지 않는 상태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 비대칭은 균형을 요구하는 구조적 규범에 대한 저항이며, 이는 곧 어떤 고정된 체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변화의 힘으로 작용한다. 심지아는 이처럼 궁극적으로 대칭을 강제하는 기하학적 사고의 틀에 균열을 내는 움직임에 주목한다.
글쎄
라고 말하는 일은 채소를 닮았다
도마 위에 채소를 눕히고 작은 조각으로 썰며 나는
사랑을 느낀다
글쎄
라고 말하며 달걀이 된다
문고리를 만들며 꿈꾸기 좋은 곳
끈적임은 고전적이고
새로워 아무도 요청하지 않았는데
꿈과 파괴 사이 반쯤 빚어진 형상으로
(‧‧‧)
시간은 도마가 된다
글쎄라고 말하게 되는 곳
기하학적인 감정 속에서
기하학적인 가능성 속에서
글쎄라고 말했다
―「부엌의 부흥」2) 부분
앞선 시에 이어, 「부엌의 부흥」에서는 “기하학적인 가능성”이라는 개념이 보다 직접적으로 제시된다. 우선 제목을 보자. ‘부엌의 부흥’이라는 말은 부엌이라는 공간이 단순한 요리의 장소를 넘어, 어떤 새로운 사유나 감정의 공간으로 확장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바로 이 부엌이 부흥하기 위해선 해당 공간의 목적인 ‘요리’를 발전시키는 데에 있다. 시에서 화자는 “시간은 도마”라고 말한다. 즉, ‘부흥’이란 부엌의 목적인 ‘요리’를 매개로 하여금 시간과 감각, 행위가 결합된 창조의 운동인 셈이다. 그런데 이때 요리의 주재료인 ‘채소’는 “글쎄라고 말하는 일”과 닮아 있다고 한다. “글쎄”가 어딘가 확신하지 못하는 불확실성과 머뭇거림의 언어라는 점을 염두에 두었을 때, ‘시간’ 위에 ‘글쎄’라는 주재료를 눕히고, 그것을 잘게 써는 행위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해 질문을 던져 볼 수 있겠다. 언뜻 보면 “글쎄라고 말하는 일”은 불확실성에 대한 파괴 행위로 읽히기도 하는데, 주목해야 할 점은 끝 문장에 도달하기까지 “글쎄”라는 단어는 소멸되지 않고 되레 지속적으로 출현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글쎄”를 투영하는 “채소”는 그것이 가진 고유한 형태만으로도, 잘게 썰린 조각마저 여전히 채소 자체로 기능하게 한다는 점을 생각해 보자. 채소는 작은 파편으로 쪼개져도 본질이 희미해지기보다는, 오히려 더 많은 단위로 증식하는 것에 가깝다. 그렇기에 “글쎄”는 설령 썰리더라도 여전히 “글쎄”로 자리한다. 즉, ‘글쎄’를 써는 일은 ‘글쎄’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앞서 ‘로라’를 점층적으로 증식해 나갔던 방식과 같이 불확실성을 무수한 조각들로 증식시키는 것에 가까운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시간 역시 미래로만 흐르는 단일한 방향성을 가진 대상으로 고정하지 않고, 그 위에 ‘글쎄’를 올림(“도마 위에 채소를 눕히고”)으로써, 시간이라는 평면에 불규칙한 균열을 내는 행위가 된다. 이는 곧, 단순화된 표층의 질서로 환원되지 않는, 기하학적 감정과 가능성의 발현이라 할 수 있다. 이때의 ‘나’는 ‘요리’라는 일상적이면서도 반복 가능한 행위를 통해 규칙과 파열이 공존하는 감각의 체적을 갖추게 된다. 그리하여 ‘나’는 단정하게 정돈된 존재가 아니라, 그 틈에서 ‘비대칭’적으로 끝없이 진화하는 실체로 자리한다.
그런데 심지아의 다른 시들을 살펴보면, “기하학적인 가능성”이 언제나 무한히 열려 있는 것만은 아닌 듯하다. 화자가 바라보는 세계는 “집단적인 범람을 건축”(「거미줄의 텍스트」)하며 고정된 질서에 동화된 듯한 풍경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화자에게 있어 “수평으로 누워 바라보는 세계”(「모든 침대는 일인용이다」)는 자신의 자리를 납작하게 만들어 표면에 접합시키는, 그렇게 조건적인 존재로 환원된 ‘나’가 사라질 수밖에 없는 풍경이 된다.
창백한 밤이야 목조 프레임이 흔들렸다 기억하지 못할 이야기를 사랑하느라 잠드는 사람들 여러 번 깜빡이는 형광등처럼 우리의 내부는 밤새 어둡게 번쩍인다 환한 정전이거나 검은 불빛이거나
수평으로 누워 바라보는 세계는 어쩐지 내가 사라진 곳에서 펼쳐진 풍경 같아 서늘하고 담담한 간격으로 우리는 낯설어지고 우리는 아늑해진다 점점 커지는 시계 소리 그것을 심장이라 믿으며
새벽 무렵 눈을 뜨면 잠긴 건물들 사소하고 쓸쓸해 지평선은 사라지면서 나타나고 우리는 걷는다 마땅한 인사를 건네지만 우리가 말아 쥐고 있는 것은 목화솜 이불, 기억나지 않는 이야기는 유일하게 싫증 나지 않아
―「모든 침대는 일인용이다」3)
화자는 외부력에 의해 “자꾸만 혼자를 데려가 버리려는”(「거미줄의 텍스트」) 상실의 공간에서, 점차 개인이 소멸되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는 듯하다. 위 시편에서 드러나듯, “수평으로 누워 바라보는” 세계는 곧 “내가 사라진 곳에서 펼쳐진 풍경”처럼 감각된다. 그런데 어떤 것도 바깥으로 튀어나오지 않는, 기이하리만큼 매끈한 단면의 세계에서 화자는 세계의 기본값을 전복하거나 파괴하려는 과격한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는다. 도리어 이 세계와 내가 “서늘하고 담담한 간격”으로 불가피하게 벌어질 수밖에 없다면, 화자는 세상에 “마땅한 인사를 건네”고, 무감한 꿈의 세계로 합류하는 편을 택한 듯하다. 결과적으로만 본다면 화자는 분명 별다른 저항 의식을 드러내지 않는 듯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무위(無爲)의 태도를 단순히 현실에 무력하게 순응하는 태도라고 해석하기엔 섣부르다. 오히려 그것은 세계를 정면으로 거스르기보다 그 자체로 비껴가려는 의도적인 전략에 가까워 보인다. 이는 “벽을 따라가면 길을 잃게” 된다는 사실을 알기에, “길이 끊어진 곳에서 무성”(「여름 자르기」)하게 자라나는 담쟁이처럼, 틈새를 비집으며 기하학적인 가능성으로 존재를 확장하려는 자의 내적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실외의 상실을 소멸”(「거미줄의 텍스트」)하고 싶던 이들은 잠든 이후 “밤새 어둡게 번쩍”이며, 외부의 힘에 의해 지워졌던 개인의 자리를 조용히 드러낸다. 이는 곧, 내부로 침잠한 존재가 불가항력적인 현실을 내면의 발화로 전환하며, 자신만의 존재 방식을 성립시키는 몸짓이라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심지아의 화자들은 불가피한 현실을 전복하는 것이 아닌, 일종의 상상으로 변주될 수 있는 비현실-즉 꿈의 차원으로 향하며, 그로부터 존재태의 잠재되어 있던 가능성을 길어 올리는 방식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2. 눈꺼풀이 오래도록 닫혀 있는 시간4)
이러한 분석을 이어받아, 『로라와 로라』를 아우르고 있는 핵심은 꿈의 촉발이라는 점에 주목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화자에게 있어 ‘꿈’이라는 공간은 과연 어떤 형식을 취하는가. 이와 관련하여, 수록된 시편 몇 편을 조금 더 살펴보자.
오래전 밤은 나를 열어 흐트러진 것들의 긴 해변을 넣어 두었다
(···)
내가 깨어나는 세계는 서랍의 형식을 하고 있다 내가 잠드는 세계는 서랍의 형식을 하고 있다 서랍 속에 담긴 채로 거나 서랍 밖으로 떨어진 채로 건축의 모호함을 듣게 되는 것이다
나는 어디가 없는 사람 모양 집으로 가다가 집을 잃어버리고 나는
집으로 가고 싶다는 기억이거나 습관인지도
나는 집을 버리고 싶은 사랑이거나 방향인지도
서랍을 갖지 않아도 서랍을 열 수 있어서 유령처럼 배가 고프다 거듭해서 서랍에 연루되는 서랍을 닫으며 서랍에서 쫓겨나거나 서랍을 잃어버리며
아무래도 서랍은 연못처럼
아무래도 서랍의 밖은 연못처럼
들여다보게 되는 곳
물고기들의 무정과 다정이 좋아서 연못을 들여다본다 너의 무정과 다정이 좋아서 나는 연못을 들여다본다
서랍을 열거하며 서랍을 망각하며 아무래도 서랍은 죽음을 경험하는 일에 가까워지는 곳 아무래도 서랍은 죽음을 보호하는 일에 가까워지는 곳
―「빈칸의 경험」5) 부분
「빈칸의 경험」의 도입부에서 화자는 ‘내’가 밤을 연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밤이 ‘나’를 열었다고 말한다. 이를 다르게 말하면 밤은 단순한 시간적 배경이 아닌 화자의 내면을 관통하는 힘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므로 이러한 현상은 마치 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비로소 깨어날 수밖에 없는 화자의 숙명과도 같다. 빛의 실패로 어둠을 호출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이때 ‘나’는 생동한다기보다 되레 “어디가 없는 사람 모양”으로 “서랍의 형식”을 띈 세계를 여전히 헤매는 모습을 통해 불안정한 감각을 표출한다. 시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서랍’을 살펴보자면, 그것은 고정된 실체라기보다 열림과 닫힘을 거듭 반복하고, 끝내 그 자체마저 상실하다가도 다시금 열거하는 불완전한 형식으로 제시된다. 앞선 맥락과 같이 이 역시도 유동적인 경계 위에서 발생하는 무수한 가능성의 생성 차원으로 읽히며, 무엇보다도 ‘나’가 ‘열림’과 ‘잃어버림’의 운명을 반복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감각하고 있는 것이란 추측을 가능하게 만든다. 이에 더해, “나는 집을 버리고 싶은 사랑이거나 방향인지도”라는 구절을 「거주」라는 작품과 연결해 읽어 본다면, 요컨대 서랍은 끝없는 가능성을 빚어낼 수 있는 공간임을 포착할 수 있다. 「거주」에서 “집은 지속적인 도난 상태에 놓여 있다”고 한다. 집은 통념적으로 볼 때, 특별한 목적의식 없이도 나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장소이자 이미 정해진 가정 내 질서에 따라 기능하는 공간이다. 이 안에서는 ‘나’는 내 자리를 이행하기 위한 행위나 어떠한 목적을 상정할 필요가 없이 머무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집은 ‘안주의 공간’이며, 나의 주체성을 새롭게 사유할 필요 없는 기정된 존재태를 보장하는 곳이 된다. 그러나 「빈칸의 경험」 속 화자는 “나는 집을 버리고 싶은 사랑이거나 방향”이라고 말한다. 이는 바로 이 고정된 규준, 즉 자신의 자리를 이미 정의해 둔 틀에서 벗어나 ‘나’를 새롭게 ‘이행’하려는 감각의 재현을 위한 의지로 이해할 수 있겠다.
이러한 탈주의 윤리는 단지 반항이나 부정의 제스처로만 머물지 않는다. “물고기들의 무정과 다정이 좋아서”라는 진술은, 감정의 명확한 구획이나 도식─가령 유약함은 약함, 무정은 냉혹함으로 환원하는 식의 이분법 대신 “자석의 두 극이 빚어내는 무늬들”(「터널」)처럼 그것들이 함께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한 긍정을 드러낸다. 화자가 다정만이 아니라 무정까지도 끌어안을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무정함과 다정함은 양립 불가능한 감정이 아니라 ‘나’의 내면에서 동시에 작동하는 징후임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자각은 이미 화자 자신 또한 단일함에 귀속될 수 없는 존재임을 경험하고 있기에, 그는 복합적 정동의 존재 양식을 수용하려는 태도에 이르게 되는 것일 테다.
한편으로 꿈속으로 빠져드는 일은 “오직 뛰어내리기 위해 오르는” 계단(「이상한 활주로」)처럼, 어디로 추락할지 알 수 없는 위태로운 상태처럼 보이기도 한다. “글쎄요 하루는 너무 길어요. 학교에 가야 하나요”(「딱딱함과 부드러움」)라 말하는 화자에게서는 현실의 삶에 대한 무력함, 나아가 그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거부 의지가 느껴진다. 그러한 태도는 작품 전반에서 꿈에 중독된 듯한 화자의 모습과 함께 문득 드러나곤 하는데, 가령 「상자」라는 작품에서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해당 시편을 보면 “양 한 마리만 그려 줘” 하고 누군가 끊임없이 절박한 목소리를 건네온다. 불면으로 인해 ‘양을 세는 일’을 시작하는 모습을 떠올리면 잠이 필요한 목소리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웃자란 풀숲에 무얼 감추러 오겠니 / 정오의 여우야”라고 하며 “빛이 어지러움에 섞이고 있다”는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밤은 아닌 듯 보인다. ‘깨어 있어야 할 시간’에조차 화자는 잠으로 이탈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 ‘잠’은 단순한 생리적 반응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관심이 소진된 상태, 혹은 의지가 더 이상 능동적으로 기능하지 못하는 상태로 해석된다. ‘깨어 있음’이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무언가를 지향하고 있는 상태라고 한다면, ‘잠’은 관심이 무관심으로 전이되는 일종의 탈주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꿈은 단순히 비능동적인 수면 상태와는 달리, 때로는 ‘또 다른 종류의 깨어 있음’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러한 꿈의 발생은 어디까지나 잠을 전제로 하며, 잠이 든다는 것은 곧 우리의 의지가 더 이상 능동적으로 작동할 수 없는 상태로 진입함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꿈은 의지 작용에 의한 도피의 징후로 읽힌다. 그로 인해 꿈속에서 발현되는 장면들은 현실을 직면하지 않으려는, 무의식적 전략에서 비롯되는 듯하다. 그렇기에 꿈은 화자에게 “유일하게 싫증 나지 않”(「모든 침대는 일인용이다」)는 이야기, 즉 끊임없이 반복 가능하며 탈출의 가능성을 갈망할 수 있는 내면의 피난처로 기능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외부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곡예가 열어 놓은 극지”(「폭포」)처럼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균형 위에 놓인 환상의 세계에 불과하다.
지구에 태어나 얻게 된 건 현기증이에요 수달 씨 둥근 이마로 포물선을 그으며 종종 졸도합니다 아름답게 쓰러지기 위해 물가에 살아요 물고기의 머리를 뜯으며 어린 무용수의 발끝처럼 포즈를 고심합니다 머리 뜯긴 물고기들은 지느러미를 파닥여요 열렬한 격렬함입니다 날마다 나는 더욱 날카롭게 안을 수 있어요 깨지 않는 악몽을 물고 물고기들 내게로 와요 큭큭 웃는 우리는 병신(病身)입니다 나는 어두운 곳에 쉽게 매료됩니다
―「수달 씨, 램프를 끄며」 부분6)
결국 화자에게 꿈은 단순한 피난처로만 머물지 않고, “악몽”으로 치환되는 괴리를 낳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현실에 대한 화자의 근원적인 불안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지구에 태어나 얻게 된 건 현기증”이라는 고백에서 드러나듯, 화자에게 현실은 눈을 뜨고도 아무것도 제대로 볼 수 없는 혼미한 공간임을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화자의 인식은 「좀비」에도 드러나 있는 사항이다. “세계”를 “폐허의 동의어”라 말하는 화자는, 동시에 “반복되는 악몽”을 “나의 아름다운 세계”라고 역설적으로 명명한다. 앞서 언급한 시들과의 맥락을 이어 이 시를 읽어 보면, 그에게 꿈은 폐허로 가득한 현실을 대체하기 위해 구성한 또 하나의 내면세계이며, 동시에 악몽일지라도 결국 가혹한 현실보다 “아름다운 세계”일 수 있다는 역설을 드러내는 듯하다. 이처럼 현실을 거부하고(“종종 졸도”) 자신을 꿈으로 기투(企投)하는 행위가 ‘나’를 되살리는 일일지라도 꿈의 세계에 몰입한 화자는 결코 안정되어 보이진 않는다. 화자의 꿈에는 이미 죽음에 이른 생명체들이 “열렬한 격렬함”으로 저항하듯 살아가는 모습(“머리 뜯긴 물고기들은 지느러미를 파닥여요”)이 나온다. 이는 언뜻 현실의 잔혹함과 비극성을 반영한 군상으로도 보이는데, 이는 모두 “병신(病身)”이라는 말로 지시되는, 파열된 존재 상태에 이른 것들이다. 이때 ‘병신’은 단순한 육체의 손상이 아니라, 자아가 분열되고 감각이 무너진 결과로써의 병리적 상태를 뜻하며, 이는 곧, 꿈이 현실의 모방이나 대체로 기능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지각하는 자아는 현실 속의 자아와 완전히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3. ‘나’를 ‘너’라고 부를 때 확장되는 범주
화자에게 삶은 “현기증”이거나 “졸도”할 것만 같은 상태로, 정상적으로 살아가는 데 번번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시간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그는 “침실에는 호흡에의 의지가 부족”(「드라큘라」)하게 된 상태, 현실에 대한 의지를 움켜쥘 수도 없어 “머리채를 베어 목을 매달고 싶”(「보석 세공사의 스탠드」)다는 죽음 충동에 사로잡힌다. 관련하여 「좀비」에서는 이런 죽음에 대한 욕망이 보다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반복되는 악몽은 나의 아름다운 세계처럼 여물어 가
세계가 폐허의 동의어일 때 우리는 눈물 없이 깨어났지
(···)
파이같이 나의 시체는 결이 많고 가볍게 바스러진다
바람에게 나는 통과할 것이 많이지지
공기에 밑줄을 긋고 보이지 않는 낱말이 되었어
토기처럼 딱딱하게 굳은 마음
토기처럼 딱딱하게 굳은 마음
호흡처럼, 죽음은 반복적이고 중요한 것이 되지
나의 기도문은 나의 죽음
제발
끝장나고 싶은데
―「좀비」7) 부분
화자는 매일 밤 죽음을 기도하며 “제발 / 끝장나고 싶은데”라고 읊조린다. 그러나 이때 “호흡처럼, 죽음은 반복적이고 중요한 것”이라는 진술에서 드러나듯, 이 죽음 충동은 단순한 소멸의 욕망이 아닌 목적을 가진 듯하다. “나의 시체는 결이 많고”, “바람에게 나는 통과할 것이 많이지지”라는 인식은, 주어진 생의 파괴 이후 도래하는 새로운 감각과 존재 방식에 대한 예감을 품고 있는 듯싶다. 오히려 죽음이 존재의 투명함을 가능하게 하는 매개가 되는 셈이다. 하여 이 시인에게 죽음이란, 단순한 종결 행위가 아니라 빛의 실패, 현실의 실패, 주체의 실패를 고의로 경유하면서 존재를 확장하고자 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지금까지 논의된 맥락은, 앞서 인용한 「로라와 로라」에서 분열하고 증식하는 ‘로라’의 형상(“한 사람처럼, 두 사람처럼, 다섯 사람처럼”)과 도 연결 지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말해, 심지아의 화자들은 삶과 죽음, 연결과 끊어짐의 경계 속에서 단일한 자아를 해체하고, 복수의 존재태로 흩어지는 과정을 통해 오히려 더 넓은 존재의 형태를 발굴하고자 하는 것이다.
당신은 몇 개의 허용을 가졌습니까 당신은 발아래를 바라봅니까 내장의 안쪽을 봅니까 양옆의 문장을 바라봅니까
나는 나를 너라고 부르던 순간부터 같은 테이블에 앉아 둘의, 셋의, 넷의···, 아무래도 좋을 낙서를 합니다 일인칭과 이인칭과 비인칭을 초과하여 테이블의 확장을···
악몽 속에서 세계는 간결합니다 말줄임표처럼 고요하고 말줄임표처럼 풍부합니다 악몽 속에서 세계는 가지처럼 조용한 식탁을 차리고 목 아래부터 자화상을 시작합니다
(···)
끝은 무정형의 장르입니까 하지만 너무 비좁지 않습니까 끝이라는 단어는
산 물고기처럼 죽은 물고기처럼 문장은 문장을 마주 보지 않습니다 언어로만 존재하는 것들을 오래 생각했습니다 언어가 잊은 것들을요···
―「소유자」8) 부분
「소유자」는 화자가 직면한 존재론적 불안을 언어적 사유의 확장이라는 방식을 통해 미학적으로 형상화한다. 이 시는 ‘당신’이라는 타자에게 말을 건네는 형식으로부터 출발하고 있지만, 이는 특정 대상을 전제하지 않는다. 이에 따라 실체 없는 ‘당신’은 특정 개인이 아닌 불특정 다수를 향한 호출의 형식으로 기능하며, 언어적 장치로서의 이인칭을 구현하는 상징적 기표로 화하게 된다. 그런데 위 시편에서 더 주목해야 할 지점은, ‘나’의 정체성 또한 고정되지 않은 채 지속적으로 유동한다는 데 있다. 화자는 ‘나’가 “너”가 될 수 있고, 나아가 “일인칭과 이인칭과 비인칭을 초과”하는 존재일 수 있음을 자각한다. 요컨대, “나”라는 존재 역시 “언어로만 존재하는 것들”에 불과하기에 자아를 고정된 언어적 명명의 한계에서 이탈시키려는 방법의 일환으로써 그 경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시도-“언어가 잊은 것들”을 사유하는 것일지 모른다. 이러한 맥락에서 시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당신은 몇 개의 허용을 가졌습니까”라는 질문을 다시 보자. 이 질문은 타자를 향한 물음인 동시에, 궁극적으로 ‘나’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메타적 질문이라 이해될 수 있다. 특히, “양옆의 문장을 바라봅니까”라는 표현이 시사하듯, 자아가 언어의 담화 구조 속에서 얼마나 끊임없이 해석되고 규정되는 존재인지 암시하며, 이는 곧 우리가 언어에 의해 얼마나 제한된 존재인지 역설적으로 묻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한데, 시인이 질문과 함께 병치한 문장들을 살펴보면, “발아래” 혹은 “내장의 안쪽”과 같은 비가시적이고 내재적인 차원 또한 분명 존재함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시인이 감각의 근원을 언표 이전의 심층적 층위 차원에서 탐문하려는 시적 윤리를 함의하고 있다.
그런데 이 시를 읽다 보면 뒤죽박죽 한 세계가(「정물화 도둑」) 어떻게 “악몽 속에서”는 간결해질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이는 앞선 맥락을 생각해 본다면,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발생하는 이 상반된 감각은 단순히 인식의 변화가 아니라, 언어가 세계를 인식하고 재현하는 방식에 대한 사유의 심화로 이해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부르디외는 언어 활동에 대해 진공 상태에서 동등하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과 차별성이 존재하는 사회적 관계와 규칙의 복합적 맥락 안에서 수행된다고 밝힌 바 있다. 이 과정에서 언어는 이미 구조화된 지배의 질서를 반영하며, 발화자는 그 구조 속에 포섭된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위계적으로 분리된 사회 공간 내에서 이루어지는 가변적인 언어 생산으로 세계는 허물기 어려운, “뒤죽박죽” 복잡하게 얽힌 질서이자 관습으로 구성9)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세계를 마주한 화자는 “마디마디 빈 마디를 갖고 싶다”거나, “어느 접속사로도 연결되지 않는 빈 마디가 되”(「방문객」)고 싶다는 욕망을 토로한다. 이는 단지 연결의 단절을 말하는 것이 아닌 언어 구조가 강제하는 의미의 연쇄로부터 탈주하고자 하는 존재론적 열망을 드러내는 것일 테다. 이때 시인은 세계로부터의 이탈을 ‘비인칭’이라는 범주로 사유하며, 함부로 단언 되거나 지시되지 않는 존재의 자리로 이동한다. 그렇게 해서 도달한 것이 바로 간결하지만 공허하지 않은, ‘말줄임표’와 같은 비결정적 언어의 상태이다. 그리고 바로 그 침묵의 마디 안에서야말로 ‘나’라는 존재의 세계, “자화상”이 비로소 그려지기 시작한다.
4. 정물화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사과성(appleyness)’
봉제선은 말끔할 때조차 기괴하다
이브의 매끄러운 옆구리에서 사과가 쏟아진다.
떨어지는 순간, 사과는
사과를 뱉어 내는 사과처럼
뱀이 된다.
뒤죽박죽이야 세계는.
붓으로 뱀을 그리는 어린 세잔의 이목구비는 아직 가지런하다.
캔버스 위에 붙였다 떼었다 한다.
한 개 혹은 여러 개의 사과로 질문인 얼굴을 완성할 수 있어?
사과 꼭지를 도려내는 칼끝처럼 날카로운 모서리들
(···)
사과의 반쪽은 사과가 도달한 옆얼굴인가.
부족한 손등은 시간의 완전한 테두리인가.
절반의 사과는 보다 짙은 냄새
한 개는 부족하고 반쪽은 충분해.
못된 쌍둥이처럼
(···)
탁자 위에는 파이기 쉬운 사과 한 알
알겠다는 듯
모르겠는 얼굴로
아이가 남겨 둔 것
―「정물화 도둑」10) 부분
한편, 시집 전반에는 꿈과 더불어 ‘사과’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특히, 「정물화 도둑」은 사과가 처음 등장하는 시인데, 이 작품에는 총 세 개의 사과가 시간의 추이에 따라 차례대로 등장한다. 먼저 첫 번째 사과는 하와의 사과(“이브”)다. 선악과를 먹은 하와가 잉태의 고통과 출산의 몸을 통해 죄의 무게를 짊어진 존재로 표상된다는 점을 떠올려 본다면, 이 신화 속 사과는 성별 이분법의 기원을 은연중에 상기시킨다고 할 수 있다. 이어 등장하는 두 번째 사과는 뉴턴의 사과(“떨어지는 순간, 사과는”)로, 이 사과가 함의하는 만유인력의 법칙은 모든 존재가 중력의 지배 아래 놓인다는 보편성을 주장하며, 세계를 일정한 질서 안에 종속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렇게 법칙화된 세계 속에서 시인은 “중력보다 더 큰 힘이 필요하다”(「오필리아」)고 말한다. 이는 세계를 지배하는 물리적 법칙이나 중력의 질서를 넘어서고자 하는 탈구조적 의식의 요청으로 읽을 수 있겠다. 이러한 요청은 마침내 세 번째 사과, 즉 ‘세잔의 사과’의 등장을 통해 구체화된다.
이 시의 중심이 되는 장면은 “어린 세잔”이 훗날 그리게 될 사과(정물화)를 두고 “캔버스 위에 붙였다 떼었다” 하며 고심하는 대목이다. 이 장면을 지나 바로 다음과 같은 질문이 이어진다. “한 개 혹은 여러 개의 사과로 질문인 얼굴을 완성할 수 있어?” 시에서 돌출되는 이 질문은 마치 현실 속 작가의 목소리가 직접 반영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 자체만으로도 일종의 의미를 갖는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겠지만, 발화 주체조차 명확하지 않은 이 질문이 담고 있는 논의를 좀 더 진전시키기 위해서는 세잔 회화가 지닌 역설을 짚어 볼 필요가 있다. 세잔은 평면성이 아닌 깊이에서, 그리고 명백한 형태적 양상보다는 가시계에 잘 드러나지 않는 색채와 거기에 깃든 공기와 여백의 의미를 음미11)하고자 했다. 이와 관련해 로렌스(D.H. Lawrence)는 세잔 회화에 대해 “사과성(appleyness)”이라는 개념을 논고한 바 있다. 그는 “한 대상의 ‘사과성’이란 직감적 감지나 본능적인 깨달음에 의해 인지될 수 있는 어떤 것12)”이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사과성을 감지한다는 것은 대상을 관습적인 예의나 명명에서 분리해 그 내부까지 관통하는 근본적인 신체성에 맞닿는 경험을 뜻한다.13) 이러한 점에서 언어로는 완전히 포착할 수 없는 실체를 향해 다가가려는 심지아의 움직임은, 세잔이 회화를 통해 추구했던 ‘사과성’과 분명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40년의 악착같은 투쟁 끝에, 그는 마침내 어떤 사과 하나를 알 수 있었고 한두 개의 꽃병을 완전히 알 수 있었다. 이것이 그가 성공적으로 한 모든 것이었다. (···) 때때로 세잔이 판에 박힌 것으로부터 완전히 빠져나가 실제적인 대상에 대해 전적으로 직관적인 해석을 한 곳은 바로 정물화 속에서이다.”(『세잔의 사과-현대사상가들의 세잔 읽기』, 286쪽)
앞서 살펴본 세잔의 인식론적 고투를 토대로 다시 ‘질문인 얼굴’을 완성하는 일(“한 개 혹은 여러 개의 사과로 질문인 얼굴을 완성할 수 있어?”)로 돌아가 보자. 언뜻 보면 ‘질문인 얼굴’이라는 표현은 다소 낯설게 느껴지지만, 끝에 등장하는 “모르겠는 얼굴”을 지시하는 형상이라 말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다만, 그 얼굴은 어떤 존재의 표명일 수도 있으나, 동시에 지시 대상이 없는 한 고정된 의미나 실체를 갖지 않는, 비인칭의 형상이기에 여전히 어딘가 모호함을 남기는 듯하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얼굴의 속성은 곧 사과라는 기표와 연결된다는 점이다. “사과의 반쪽은 사과가 도달한 옆얼굴”이라는 표현처럼 얼굴은 사과의 전면이 아닌 반쪽을 통해 드러난다. 그렇다면 여기서 얼굴은 왜 하필 완전한 형체가 아니라 반쪽이 도달하는 것이라 말하는지에 대한 자연스러운 의문이 생긴다. 이는 “절반의 사과는 보다 짙은 냄새 / 한 개는 부족하고 반쪽은 충분”하다는 언술을 통해 물리적 수량이나 형태, 외형의 반복이 인식의 불확실성을 소거하는 조건이 아니라는 말로도 파악할 수 있을 듯싶다. 사과가 하나의 완전한 형상으로 제시될 때, 그것은 오히려 감각을 차단하거나 덮어 버릴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일종의 엄폐된 사과가 아니라 형체 너머에 비가시적인 감각-예컨대 향기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사과의 반쪽처럼 대상에 대한 본질적 감각을 포착할 수 있는 상태가 더 중요하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이 맥락에서 시인이 얼굴에 ‘가위질’을 하거나(「등의 쓸모」), 얼굴을 ‘중단’하는(「복화술사」) 서술 전략을 취하는 것은 표정을 지우기 위해서가 아닌 얼굴의 근육, 즉 보다 내밀하고 원초적인 감각의 징후를 읽기 위함이다. 이는 「우리들의 테이블」에서처럼 표면 너머를 읽으려는 시선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전략은 세잔이 회화를 통해 끊임없이 시도했던 방식과도 닿아 있다. 세잔은 존재와 외면적·표면적인 형태로 보이는 것 사이의 관계를 파괴(탈형태)하여 실재에 근접하도록 하는 회화 방식을 취한다. 그 과정에서 그는 보이지 않는 것을 가시화하며, 대상의 근본 속성을 느낄 수 있는 효과를 도출하기 얻었다.14) 한 알의 사과를 온 생애를 걸쳐 그리며 실재에 도달하고자 했던 세잔처럼, 심지아는 문장을 느리게 회전시키고 이야기를 거듭 지연시키며(「세잔, 아무 데서나 잠을 잔다」), 언어의 경계를 시험하는 듯하다. 그러한 지연은 감각의 시간을 연장시키는 행위이며, ‘언어가 포착하지 못한 본질’을 포착해 “입술이 되어 주려”(「남겨진 체조」)는 시인만의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시인은 기왕 실패를 거듭하더라도, 그 반복 속에서 가능성을 생성해 내는 일이야말로 “슬픔을 길들이는 자세”(「범람」)임을 말한다. 불완전하고 불협적인 세계의 일부로서, “잡음에게도 고른 음량”(「케이크 자르기」)을 부여하고자, 성급하게 세계를 단정하거나 폐기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그렇기에 심지아의 시를 읽다 보면 이러한 섬세한 시적 실천이 그 안에 여전히 잠재할 존재들의 숨결을 지우지 않으면서도 감각과 의미를 끈질기게 길어 올리는 일임을 깨닫게 된다. 어떤 앎에도 함부로 도달하지 않겠다는 이 유예의 윤리 속에서, 불가능해 보였던 자율성의 가능성을 마침내 모색하게 되므로. 따라서 심지아가 수행하는 ‘가능성의 이행’은 자기를 분열해 타자의 영역으로 도주하거나, 다시금 비인칭의 맥락 안에 스스로를 기입함으로써, 혹은 부재하는 누군가를 담화 안으로 호출함으로써 자신에게 부과된 억압의 형식을 비껴가려는 시적 시도로 감지될 수 있다. 이러한 이행으로서의 시도가 바로 심지아의 ‘사과’의 시학이며, 그의 시편들이 은밀히 지향하는 미학의 은거지일 것이다.
1) 심지아,『로라와 로라』, 민음사, 2018, 16~17쪽.
2) 심지아, 앞의 책, 50~51쪽.
3) 심지아, 앞의 책, 35쪽.
4) 심지아, 앞의 책, 23쪽.
5) 심지아, 앞의 책, 92~93쪽.
6) 심지아, 앞의 책, 55쪽.
7) 심지아, 앞의 책, 80쪽.
8) 심지아, 앞의 책, 78쪽.
9) 이상길, 「피에르 부르디외의 언어관에 대한 비판적 검토—과학과 상징폭력 논의를 중심으로」, 『문화와 사회』 제14권 제1호, 2013, 103~107쪽 참조.
10) 심지아, 앞의 책, 44~45쪽.
11) 전영백, 『세잔의 사과-현대사상가들의 세잔 읽기』, 한길사, 2008, 15쪽.
12) 마틴 제이,『눈의 폄하: 20세기 프랑스 철학의 시각과 반시각』, 전영백 외 6인 역, 서광사, 2019, 221~222쪽.
13) 전영백, 『세잔의 사과-현대사상가들의 세잔 읽기』, 한길사, 2008, 280쪽 참조.
14) 전영백, 『세잔의 사과-현대사상가들의 세잔 읽기』, 한길사, 2008, 256~259쪽 재인용.
추천 콘텐츠
문장웹진 비평
‘나’와 ‘너’가 사라진 불편한 기이함‘나’와 ‘너’가 사라진 불편한 기이함 ― 이유리론의 방향을 모색하다 최선재 1. 두 개의 기이함 처음 이유리 작가의 소설을 읽은 건 등단작인 「빨간 열매」(『브로콜리 펀치』, 문학과지성사)가 대학 전공 수업에서 발췌되었던 때다. 아버지의 화장한 뼛가루를 화분의 흙과 섞자 아버지가 나무의 몸으로 부활하고, 이웃 남자의 어머니-나무와 아버지가 결합하여 “빨갛고 작은 열매”(29쪽)를 낳는 이야기는 당시엔 어디서부터 접근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수수께끼로 느껴졌다. 하지만 내가 정말 당황스럽고 기이하게 여겼던 것은, 나무가 된 아버지를 대하는 ‘나’의 태도였다. “물.”이라고 아버지가 말을 걸자 ‘나’는 “깜짝 놀라 잠시 멍해졌다가 뭐야 이러면 살아 있을 때랑 똑같잖아, 하고 투덜거리”(15쪽)기만 할 뿐이니 말이다.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일어날 수 없는 일은 아니라는 듯한 천연덕스러움은 이유리 소설을 다른 작가의 소설과 구분 짓는 특징이다. 소설집 『브로콜리 펀치』의 해설에서 소유정 평론가는 “환상과 현실의 경계가 허무맹랑하게 느껴질 정도로 이유리의 소설에서 환상은 현실에 아주 밀착되어 있다”1)고 설명한다. 이것은 이유리 소설의 독특한 리얼리즘이기도 하며, 현실과 매우 흡사한 세계에 환상이 삽입되어 독자를 낯선 감각에 빠뜨린다. 나는 이러한 특징을 ‘환상’과 ‘기이함’ 중 어느 것으로 부를지 고민했다.2) 비현실적 사건과 대상에 집중한다면 환상이라 불러야 하겠지만, 나는 환상을 현실적 사고방식으로 대하는 인물들의 태도까지 아울러 기이함이라 부르고자 한다. 앞서 말했듯 내가 「빨간 열매」를 읽고 당황했던 것은 잠깐 놀라고 마는 ‘나’ 때문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내가 주목하려는 기이함은 앞서 말한 기이함과 다시 구분 지어야 한다. 이유리 소설의 기이함은 독자에게 불편하고 해소될 수 없는 문제로 남지 않는다. 기이함은 인물들이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게 해주는 촉매제이기 때문이다. 이유리의 소설이 따뜻함과 발랄함을 전하는 주된 이유이며, 독자 역시 기쁨과 편안함, 소설적 상상력이 빚어낸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하지만 몇몇 작품은 독자가 명료하고 만족스러운 감상을 얻기 힘들어 보인다. 잘 유지되고 발전하는 줄 알았던 인물 관계가 갑작스레 재검토되고 파멸의 예감까지 남길 때, 독자는 이유리 소설에서 예상하지 못한 불편한 기이함을 느낀다. 전자가 소설 구조로서의 기이함이라면 후자는 독자의 감상으로서의 기이함이다. 그리고 두 기이함은 작품에서 반비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이유리 소설의 균열이자 징후라 할 수 있다. 2. ‘나’와 ‘너’를 바라보는 따뜻한 기이함 사실 이유리 소설을 아우를 수 있는 특징은 또 있으니, 거의 모든 작품이 일인칭 주인공 시
- 최선재
- 2026-06-01
문장웹진 비평
고독의 정치경제학고독의 정치경제학 - 정영수와 임솔아의 단편에 대하여 서희원 1. 메피스토펠레스는 많은 것을 말했다. 2025년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스즈키 유이의 장편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에 등장하는 괴테 연구자 히로바 도이치는 홍차 티백 꼬리표에 달린 하나의 문장을 읽고, 그것이 평생 괴테를 연구한 자신도 모르는 괴테의 문장이라는 것에 충격을 받는다. 티백 문장의 진위와 출처를 찾던 도이치에게 젊은 연구자 스즈키는 이렇게 말한다. “전 괴테가 모든 것을 말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 인간이 모든 것을 말하기란 불가능하니까요. 그래도 괴테는 정말로 모든 것을 말하려고 했구나, 그런 생각은 듭니다.”1) 스즈키에게 이러한 감탄을 이끌어낸 작품은 괴테의 『파우스트』이다. 흥미롭게도 『파우스트』에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말이 담기진 않았지만 인생을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오래 간직해도 좋을 의미 있는 말들이 가득하다. 특히 고령화 사회에 진입한 한국인이라면 『파우스트』의 서사를 역노화와 건강, 죽음의 자기 결정권에 대한 일종의 알레고리로 읽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파우스트』에서 삶의 열망을 잃은 학자 파우스트의 정확한 나이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그의 학식과 절망, 즉 내면을 가득 채운 지적 충만, 육체와 재산의 결핍을 통해 계산하면 대략 오십 대 이후로 추정이 된다. 파우스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저 놀기만 하기에는 너무나 늙었고,/아무런 소망도 없이 살기에는 너무나 젊도다.”2) 이후 파우스트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영혼을 담보로 계약을 하게 되고, 자신의 의지와 열망을 현실에서 실행하는 삶을 살아간다. 메피스토펠레스가 파우스트를 제일 먼저 데리고 간 곳은 마녀의 부엌으로 그곳에서 파우스트의 육신을 열정으로 타오를 수 있는 젊음의 상태로 만들기 위해서이다. 가마솥에서 끓고 있는 정체불명의 역겨운 액체와 신뢰하지 못할 마술이 탐탁지 않았던 파우스트는 젊음을 되찾기 위한 좀 더 좋은 방법을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요구하고, 메피스토펠레스는 자신이 다른 책에서 읽은 자연요법을 소개한다. 좋아요! 그건 돈도 안 들고, 의사나 마술도 필요 없는 요법이지요. 당장 저 바깥 들판으로 나가셔서, 괭이로 갈고 땅을 파는 일을 시작하시고, 당신의 몸과 마음을 극히 제한된 생활권 안으로 국한하고, 가공되지 않은 음식으로 몸을 보양하고, 가축과 더불어 가축으로 살면서, 추수할 밭에다 몸소 거름 주는 일을 약탈이라고 언짢게 여기지 마시오. 이것이 믿을 수 있는 최선의 요법이니, 팔십 고령에도 당신을 젊게 유지해 줄 것이요! (1권 115쪽) 메피스토펠레스가 알려주는 자연요법은 대체의학이나 스트레스를 만병의 근원으로 삼고 있는 정신신체의학(심신의학)을 신봉하는 사람이라면 솔깃할 그런 내용이다. 사실 『파우스트』의 서사는 두 가지 지식의 충돌이 생성하는 긴장감을 통해 전개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하나는 “철학”, “법학”, “의학”
- 서희원
- 2026-06-01
문장웹진 비평
포이에시스, 오토포이에시스, 심포이에시스(1)이은지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6년 6월부터 2026년 8월까지 로 3회 연재됩니다. 포이에시스, 오토포이에시스, 심포이에시스 (1) 이은지 1. 프락시스로서의 포이에시스 대중에게 다소 신화적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기는 하지만, 작가의 은둔과 고립은 창작을 위해 불가피한 존재 방식으로 여겨지곤 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출간된 『호밀밭의 파수꾼』의 성공으로 일약 스타가 되었지만 세간의 관심으로부터 절연하고 뉴햄프셔의 시골에서 평생 은둔하다가 사망한 J. D. 샐린저는 은둔 기간 동안 단 한 편의 작품도 공개하지 않았다. 불교의 선(禪) 사상에 심취했던 그는 전쟁에 참전했을 때부터 “글쓰기와 명상이 동일하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고, “고립된 상황과 집중력을 요구”하는 “명상으로서의 글쓰기”를 위해 대중과 유명세를 철저히 멀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필립 로스 또한 “매해 반 이상을 뉴욕에서 백 마일 떨어진, 숲이 우거진 농촌 지역”2)에서 보내며 철저히 고독 속에서 작업했다. 그에게 “문학적 소명에 따른 고립―단지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 방에 혼자 앉아 있는다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의미를 포함하는 고립―은 밖에 나가 야단법석 속에서 감각을 축적하거나 다국적 기업을 다니는 것만큼이나 인생과 큰 관련이 있”3)는 것이었다. 일본의 대표적인 은둔 작가 마루야마 겐지 또한 23세의 나이에 화려하게 등단한 직후 도시와 문단을 등지고 시골에서 칩거하며 집필에만 전념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고독을 이길 힘이 없다면 문학을 목표로 할 자격이 없다”며 “세상에 대해, 혹은 모든 집단과 조직에 대해 홀로 버틸 대로 버티며 거기에서 튕겨 나오는 스파크를 글로 환원해야 한다”4)고 일갈한다. 가히 고독 예찬이라고 할 만한 그의 ‘창작론’을 들여다보면 몸과 마음의 균형에 집중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몸 전체를 예민한 레이더로 만들기 위하여 의식적으로 몸을 단련하는 나날을 거듭하다 보면”5) 어느 순간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원고지 앞에 앉게 된다는 진술이나, 작품을 완성하고 나면 “소설에서 확실하게 멀어지기 위한 방법으로 몸을 격렬하게 움직인다”6)는 증언은,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자아를 안팎으로 일치시키는 데서 문장을 산출해내는 창작의 원리로 읽힌다. 극단적인 은둔과 고립을 자처하지 않더라도 창작을 위해 일정량의 시간과 에너지를 집중해서 투여하는 모습은 여러 작가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하루 몇 시간, 하루 몇 장의 꾸준한 집필은 자기 안으로의 철저한 고립을 전제하며 이는 사회적 동물인 인간으로서의 실존을 스스로 변형하는 ‘자기 수행’과 같은 모습을 띨 수밖에 없어 보인다. 단순히 글을 ‘잘’ 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lsq
- 이은지
- 2026-06-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