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로 촉발되는 신정론(神正論)
- 작성일 2026-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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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로 촉발되는 신정론(神正論)
윤인로
신이 하는 일, 하려는 일, 그 일·의지의 정당성·정의를 상대로 문제를 제기함. 곧, 신이 집행하고 관철시키려는 힘과 뜻의 부정의·부당함·악함을 의로워야 할 신에 근거하여 항소함. 이와 반대로 그런 항소·항고를 불가항력적으로 취하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신의 의로움·정당함·선함을 불가피하게 인정함. 부당하고 불의한 신에 대한 항고와 뒤이어지는 그것의 취하·철회, 신의 정의에 대한 변호·변론·변신(辯神). 줄여 말해 신정론(神正論·Theodizee, 신+정의theós+díke의 합성어), ‘신≡정의’라는 상보적 합동체로 구성되는 신의 일·뜻·앎·말·법·힘의 복합체론. 이 복합성의 구축 상황으로서, 그런 상황의 재구축을 위하여, (연작)소설집 『사랑이 한 일』의 문장들을 다시 배치해 보면 어떻게 될까. 그러니까 『사랑이 한 일』(이승우, 문학동네, 2020), 다시 달리 촉발되는 「욥기」.
§1. 롯의 환대를 받은 두 방랑자가 실은 소돔을 멸하도록 신에 의해 파송된 천사들임을 밝히자, 그 임박한 절멸 앞에서 롯과 그의 삼촌은 서로 다르게 반응한다. “삼촌이 항의하고 호소했던 것과는 달리 (그의 삼촌은 의인과 악인을 동일하게 취급해서 같이 죽게 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고 이의를 제기하고, 그 성안에 의인이 있으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 결국 의인이 열 명만 있으면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신의 답을 받아낸다) 롯은 항의도 하지 않고 호소도 하지 않”는바, 불의의 도시 소돔에 “의인은 없기 때문”이다. 일체의 모든 삶·관계에 고지되고 발효되는 정지·절단으로서의 신의 절멸·폭력. 신을 대신해 두 천사가 행하는 의인과 악인의 무차별·무분별, 그렇기에 신의 공정(公正/工程)에 제기되는 항의와 호소, 이에 대한 신의 조건부 응답. 항의자 삼촌과는 반대로 롯은 신의 일·폭력을 변론하는데, 신의 그 공정을 증거하고 보증하는 정초력으로서 그렇게 한다. 아래 두 대목 중 하나는 그런 롯을 표시하며, 다른 하나는 집-주인 아브라함으로부터 부당하게 추방당한 하갈의 ‘울부짖음’을 표현하고 있다. 아래, 인용에 의한 배치, 그 배치 속에서 발생되는 모종의 의미를 살펴보게 된다.
[a] 사람을 울부짖게 하는 것이 악이다. 울부짖음은 고발이고 증언이다. 울부짖음이 신의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유죄 판결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확실한, 어쩌면 유일한 증거이다. 신은 ‘규탄하는 울부짖음’만을 유죄 증거로 인정하고 판결한다는 것이 천사가 롯에게 한 말의 내용이다. 롯은 이 성을 위해 울부짖지 못한다.
[b] 이 세상을 만들고 세상을 이끌어 가는 유일하신 분, 당신은 모르는가? 보지 않는 것이 없는 분, 땅의 신음을 가장 크게 듣는다고 말하신 분이 당신 아닌가? 세상 모든 사람이 모른다 해도 당신은 모를 수 없다. 모를 수 없는 분이 어떻게 모르는 체하는가?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가? 그녀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소돔에서의 울부짖음, 악에 받친 그 비-언어는 신의 심판에 결정적인 증거로 채택된다. 그렇게 ‘울부짖게 하는 것이 악’이며, 그 울부짖음을 들은 신은 그 악을 심판한다. a에서, 악은 유죄를 선고받고 일소될 것이었다. 천사들을 파송한 신은 악의 심판 속에서 자신의 정의와 정당성을, 대리·집행되는 영광과 섭리를 변론 받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b에서, 불의를 저지르고 있는 부당한 힘은 무엇인가, 하갈을 울부짖게 하는 그 힘의 악함은 어디에 뿌리박고 있는가. 신이다. 말하자면 a의 신과 b의 신, a의 심판하는 신에 의해 유죄를 선고받아야 할 b의 신. 심판하는 신과 심판받는 신의 동일성·동시성·등질성. 하갈의 울부짖음은 하갈을 울부짖게 했던 b의 신=악을 a의 신 앞에, a의 신·정의·심판의 법정에 고발한다. 신이 신의 법정 앞으로 소환된다. 신의 최종심, 그 최후의 심급이 유일한 하나의 신 안에서 상급심과 하급심으로 쪼개지고 충돌함으로써 미결 상태로 정지된다. 그럴 때 신의 정의·정당성은 정초 박탈된 채로 유예된다. 신 안의 두 신성, 두 심급, 신 안의 내전. 하갈과 아브라함의 분쟁 속에서 그런 내전의 구도가 연장된다: “당신이 섬기는 신이 그런 분이라면, 인륜도 사랑도 짓뭉개는 그런 분이라면 어떻게 경배를 받을까? 그런 분을 위해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리는 당신을 누가 존중할까? 그는 괴로운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 말하지 마시오. 행여 당신과 아들이 그분의 눈 밖에 날까 두렵소. 최선을 뛰어넘는 최선, 인륜과 사랑을 뛰어넘는 법과 약속이 있다는 걸 알지 않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1-1. 신의 약속, 신의 말/법으로 된 그 약속을 고개 저어 부정하는 하갈, “이것은 옳지 않”다고, “당신은 옳지 않”다고 말하는 하갈의 “항의의 말”을, 그 울부짖음을 신이 듣는다. 신이 듣고 말한다. “네가 외로움과 고통 속에서 부르짖는 신음 소리를 내가 들었다. 땅의 신음소리는 하늘에서는 가장 큰 소리. 못 들을 수 없다.” 하갈은 “언어가 되지 못한, 될 수 없는 신음 소리를 가장 크게 들은 분”을 향해, 혼돈 속에서도 부복하고 항의를 거둔다. 부당한 집을 떠나온, 울부짖는 하갈에게 신이 더 말한다. “네가 떠나온 집으로 돌아가라. 그분이 한 말은 그녀가 듣고 싶은 말이 아니었다. […] 그녀의 항의는 하늘로 올라가지 못했다.” 부당한 주종관계로의 어떤 복고, 그 관계의 어떤 회복을 뜻하는 신의 말, 그 비참한 결과 앞에 하갈은 다시 울부짖고, 다시 항고한다. “신은 왜 이러시는가.” 하갈의 탄원이 반복된다. “그 집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는 내내 침묵했던 분, 땅의 신음 소리가 하늘에서는 가장 큰 소리라고 했던 말을 떠올리며, 외롭고 슬픕니다, 내 부르짖음을 들어주십시오, 하고 하소연할 때도 묵묵부답이었던 분, 빈 들에서 비참하게 죽어 가는데도 모습을 보이지 않고 목소리도 들려주지 않는 분, 그분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죽어 가는 아들을 앞에 둔 하갈의 울부짖음을 신이 다시 들었고, “신이 그들을 보살폈다.” 신의 이 보살핌, 보살피는 신, 생을 돌보는 신의 의로움 앞에서 항고는 불가항력적으로, 불가피하게 취하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바, 하갈의 반복된 항고와 그것의 취하는 이후 아들 이스마엘의 말 속에서 다음과 같이 끝막음 된다: “어머니는 최선을 넘어서는 최선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인정하게는 되었다고 했어[이삭의 큰아들 ‘에서’ 또한 그러했다: “[그는] 신의 뜻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는 신의 뜻을 헤아리려는 시도를 멈추고 아버지처럼 온전히 복종하는 사람이 되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약속의 세계를 바라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 했어.” 신의 정의와 불의, 정당함과 부당함에 관한 결정은 인간 하갈에게 달려 있는 게 아니었다. 신의 불의·부당성에 관한 결정의 유예, 그 미결 속에서 신의 정의·정당성은 가까스로 간신히 결정되고 있다.
1-2. 주인에 의해, 주인집으로부터 추방당한 하갈과 이스마엘을 신이 보살폈다. 신이 스스로를 다시 드러내 보였고, 울부짖는 자의 울부짖음을 듣고 말하였으며[로고스], 그 말은 동시에 그 사람을 보살피는 법[노모스], 후생[네메인]의 약속이 되었다. 그렇게 신의 정의가, 정의의 신이 변론된다. 그렇다고 신의 정의에 대한 이의와 문제 제기가 완전히 말소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와 이의는 신의 섭리를 대상으로 다시 제기된다. 아버지-신과 아버지-아브라함, 두 아버지 사이에서 경험한 잔인한 사랑 곁에서 “사색하는 사람”이 되었던 이삭은 말한다: “최선을 넘어서는 최선, 법과 도리를 뛰어넘는 신의 섭리는 인간으로서는 물리칠 수 없는 것이고 물리쳐서도 안 되는 것이지만, 최선을 넘어설 수 없는 최선, 신의 섭리를 뛰어넘을 수 없는 법과 도리의 세계에 사는,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이 그것을 넘어서고 뛰어넘으려고 할 때 인간은 어떻게 되는가. 인간성의 파괴 없이 그 넘어섬과 뛰어넘음이 가능한가”; “아마도 아버지처럼 넘어서고 뛰어넘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을 형과 형의 어머니인 하갈은 어땠을까? 그들 안의 인간은 어떻게 되었을까? 파괴되고 훼손되지 않고 살 수 있었을까. 최선을 넘어서는 최선, 법과 도리를 뛰어넘는 신의 섭리를 향해 고개를 끄덕일 때마다 자기의 묶인 몸을 겨누던 칼날의 날카로운 빛과 함께 질문들이 쉴 새 없이 떠올랐다.” 최선 너머에서 최선을 정지시키는 신의 다른 최선, 율·법 너머에서 율·법을 효력 정지시키는 다른 율·법으로서의 신의 섭리 앞에서 이삭은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고개 젓는바, 쉼 없이 고개 드는 것은 신의 그 섭리를 향한 이의제기의 질문들이었다. 신의 섭리, 곧 은총의 폭력에 의한 삶·관계의 부당한 파괴와 파탄. 이삭은 묻는다. “[신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이삭은 거듭 묻는다. 그럼으로써 하갈처럼 항고한다. “[신이]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사랑이 어떻게 그렇게 잔인할 수 있단 말인가. 신을 빼앗는 자로, 아버지를 버리는 자로 단정하고 비난하는 동안, 아들을 바치라는 지시는 가장 비인간적이고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요구였다.” 신의 그 불합리와 부조리, 인간·관계의 멸절 상황 속에서, 그 상황 속에서도 사색하는 자 이삭은 다음과 같이 묻고는 질문의 형식으로 답함으로써 신의 섭리를 부정하면서도 동시에 인정한다. “[신은] 왜 그랬을까요?”; “사랑 때문이 아니라면 신이 왜 그랬겠어요?”; “나는 바쳐질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이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찬 사랑의 명령 앞에서 이를 악물었다. 나는 수없이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그렇지만 또,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 악물고 고개 저을 때 이삭은 신의 악한 섭리를 기소한다. 그렇지만 악문 이를 풀고 고개를 끄덕일 때 이삭의 사색은 변신론을 정초한다. 신을 향한 그 변론의 성분을 눈여겨보게 될 때 핵심이 되는 생각은 다음과 같이 표현되고 있다: “공평하게 사랑한다는 사람의 말은 누구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과 동의어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까 왜 나를 사랑하지 않나요? 하고 항의하거나 왜 나를 누구처럼, 누구만큼, 누구보다 사랑하지 않나요? 하고 따지지 말아야 한다. 사랑을 요구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혈육이나 법이나 제도나 관습이 의무나 역할을 강제할 수는 있지만 사랑을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자발적인 것만이 사랑이다. 자발성은 매끈하거나 일률적이지 않고 울퉁불퉁하다. 매끈하고 일률적인 것은 비자발적인 것, 부과된 것, 만들어진 것, 강요된 것이다.”
1-3. 덧붙여 작가의 말을 인용해 놓는다. “이 소설집은 외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에 대한 「창세기」의 일화를 이해하려는 마음에서 태어났다. 그 장면을 읽을 때마다 마음이 오그라들거나 찡그려졌다. 바칠 것을 요구하는 신도, 그 요구에 순종하는 아버지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바칠 것을 요구하는 신이나 그 요구에 순종하는 아버지 대신 그 요구에 의해 제물로 바쳐지는 아들의 심정 속으로 들어가 이 이해할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이해하고 믿으려고 했다. 그러니까 내 번역의 방법은 인간의 마음으로, 즉 소설을 통해 신의 마음, 즉 믿음의 문제에 접근하는 것이었다. ‘사랑’이 내게 발견된 열쇠였고, 그래서 나는 이 부담스러운 패러프레이즈 작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나는 내 소설들이 위대한 원작을 조심스럽게 가리키는 수줍은 손가락이기를 바란다.” 이 작가의 말이 소설 속에서 달리 표시될 때, 그것은 신에게 아이를 ‘바치는 일’, 그 내어줌/증여의 형질에 대한 사유로 드러난다: “사랑하지 않는 무엇이나 누구를 바치는 것은 힘들지 않지만, 그래서 요구되지 않지만, 사랑하는 무엇이나 누구를 바치는 것은 힘들다. 그래서 요구된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모든 것은 힘든 것이다. 아니다. 사랑하지 않는 무엇이나 누구를 ‘바치는’ 것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 사랑하지 않는 것을 누군가에게 주는 행위는 바치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치는 모습을 취하고 있더라도 그것은 바치는 것이 아니다. 버리는 것이라고 늘 쉽지만은 않지만 바치는 것은 정말로 어렵다. 자기를 주는 상징적 표현이 바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를 주는 상징적 표현으로 자기가 사랑하는, 자기에게 속해 있으나 자기보다 소중한, 소중하게 여기는 무엇이나 누구를 주는 것이 바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에게 속해 있는 것 가운데 자기보다 소중하지 않은,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무엇이나 누구를 주는 것은 자기를 주는 행위일 수 없다. 자기에게 속해 있으면서 자기보다 소중한,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그가 사랑하는 무엇이나 누구이다. 사랑하는 무엇이나 누구만이, 오직 사랑만이 바쳐질 수 있다. 바치기가 어려운 것은 그 때문이다. 사랑하지 않을 때는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일이 사랑하면 어렵게도 할 수 없게 된다.” 아브라함에게 외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명령한 신, 그 명령의 시험을 통과할지 어떨지를 주시하는 신. 그러하되 신의 그 시험은 단선적인 게 아니었다. “시험하는 자가 시험당하는 자보다 덜 고통스럽다고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여기서 정말로 시험당하는 자는 누구일까. 바치라고 요구하는 방법으로 기꺼이 바치기를 하고 있는 이 신은 시험을 함으로써 시험당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신의 시험 통과 여부는 철저하게 인간인 아버지의 시험 통과 여부에 달려 있다. 신은 인간인 아버지에게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전능한 신은 사랑 때문에 완벽한 무능력자가 된다. 절대 자유를 가진 신은 사랑 때문에 절대적으로 부자유한 자가 된다.” 신의 그 시험은 단선적인 것이 아니라, 사랑을 위해 신 자신마저도 시험당하게 만드는 것, 사랑을 위한 신의 내기와도 같은 것이다. 그 내기는 신 자신의 힘과 자유를 내건 것이며, 이는 신 자신을 자기 원인적 유일성에서 말미암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타자에게 전적으로 내맡기는 자기 위기적 의존성의 무릅씀이다. 신 자신의 능력과 자유, 자유로운 전능·전권에 의해서는 결코 결정되거나 집행될 수 없는 상황의 창출, 스스로를 오직 타자의 결정에 전적으로 내맡겨지게 만드는 신. “신은 가까스로 안도했다. 인간만큼 축소된 신은 우리들이 시험을 통과했기 때문에, 시험을 통과함으로써 그를 시험에서 통과시켜 주었기 때문에 안도했다. 그 자리에 시험하는 이는 없었다. 사랑은 시험하는 것이 아니고 시험을 뛰어넘는 것도 아니고 시험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자기 축소·자기 감소하는 과정 속에서 신이 타자와 맺는 그런 관계, 이를 가리키는 이름이 ‘윤리’일 것이다. 그렇게 윤리는 신적인 힘의 다른 발현인바, 타자에게 절대적으로 내맡겨지는 신이 ‘인간만큼 축소되는’ 과정으로써, 신에 의한 자기 소송의 공정으로서, 자유자재한 전능의 신으로부터 분리·탈구되는 신에 의해, 비-신(非-神)에 의해, 탈-신(脫-神)에 의해 발현한다. 비-신 또는 탈-신은 신의 윤리로, 윤리의 신으로 신의 정의·정당성과 불의·부당성에 관하여 결정하는 힘이다.
§2. 물음의 물꼬를 약간 틀어 다시 시작하자. 신의 일이 신의 부정의로, 부당한 신의 뜻으로 항의와 탄원의 대상이 될 때, 그 근원에 있던 것은 무엇인가. 보이지 않는 신,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 신, 숨은 신이다. 곧, 신이 “스스로를 숨기신다는 것.” 반대로 신의 정의와 정당성에 대한 인정 속에서 그런 항의를 멈추고 항소를 취하하게 되는 근원에는 신 자신의 드러냄·발현·개시가 있다. 곧, “신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보이기로 결심”한다는 것. 그렇게 신의 그 결정, 은폐·엄폐와 개시·계시에 대한 신 자신의 독자적 결정이, 달리 말해 “드러내고 감추는 것을 그분이 스스로, 어떤 작용이나 누군가의 개입 없이 결정한다는 것”이 『사랑이 한 일』에서 구축되는 신정론·변신론의 근저이다. 신의 정의와 불의에 대한 판정, 정당성과 부당성 간의 변증은 신의 그런 자기결정에 의해서만, 오직 개시/은폐에 관한 신의 절대적 결정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지, 롯의 삼촌이나 하갈, 아브라함, 이삭의 소관은 아니다. 이 모든 것을 깨닫게 된 이는 야곱이고, 그로써 신의 정의가 변호되며, 그런 신과 정의의 상보적 합동체 속에서 신이 변론된다.
누군가 그의 머릿속에 집어넣어 준 것처럼 그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깨달아졌다. 그러자 두려움이 엄습했다. 야곱은 두려움 가운데서 떨리는 목소리로 깨달은 것을 털어놓았다. “이곳이 바로 여호와의 집이고 하늘의 문이 아닌가!” 그곳은 여호와의 집이고 하늘의 문이다. 야곱에게 그러하다. 그것은 그분이 그곳에서 야곱에게 보이셨기 때문이다.
숨은 신의 자기 개시, 그 결정이 행해지고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거기는 신의 집이고 신국의 문이다. 보이심-섬김, 개시-순종의 상태 안에서 신의 집은 두루 편재한다. 이 소설집의 마지막 페이지가 그렇게 마감되는 곳에서, 달리 말해 의로운 신의 일반화되는 정당성 위에서, 변신론의 관철 속에서 불의한 신을 향한 항소의 의지들은 말소·무마된다: “누구도 그분에게 나타나라고, 모습을 보이라고 요구할 수 없다.” 그러하되, 신의 그 ‘집’ 안에서도, 숨은 신의 그 개시상태 속에서도, 보이는 신에 의해 발화되고 정립되는 그 로고스/노모스 위에서도 울부짖게 하는 악을 심판하는 신과 울부짖게 하는 악=신 간의 적대는 끝내 끝나지 않으며 재개·재구축된다. 그 적대, 곧 신 안의 내전이 종식되는 것처럼 보이는 모종의 평화 상태·합치 상태 속에서도 그런 내전 상태는 항시 잔존하며 거듭 개시된다. 신 안에서의 그 내전은 야곱의 변신론적 깨달음이 신에 의해 ‘머릿속에 집어넣어진’ 것이며, 신이 “그의 손에 쥐여 준 것”이라는 데에서, 신에 의해 불어넣어진 “숨결” “인격” “생명”이라는 데에서 재점화된다. 개시와 은폐에 관한 숨은 신의 자유 재량적 결정과 인도를 따르게 된 사람들은 인격화된 신의 숨결로 숨 쉬고 그 신의 생명으로 산다. 신의 그 결정하는 숨결[souffle]을 대신 숨 쉬어 주고[숨 쉬어-바치고], 신의 그 생명을 대신 살아 준다[살아-바친다]. ‘최선을 넘어서는 최선 또는 법과 도리를 뛰어넘는 신의 섭리’란 신의 인격·생명·숨결의 주입·파지·불어넣어짐을 통한 삶·관계의 특정한 인도·관리 상태에 다름 아니다. 드러내면서도 감추고 감추면서도 드러내는 개시와 은폐의 조절 상태 속에서 불어넣어지고 있는 숨은 신의 말·목소리[parole souffle], 말하자면 신의 섭정(攝政/regency). 이는 신을 향한 변론에 대한 불가항력적인 인정이 시작되는 타협선·휴전선을 그으면서도, “저는 다른 사람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의 세계에 의해, 그 세계의 앎·뜻·일·말의 벡터에 의해 그런 변신론의 인정이 중단되는 적대의 최전선/마지노선을 긋는 것이기도 하다.
2-1. 야곱의 아버지 이삭은 야곱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에 의해 희생 번제의 제물이 되었던 때의 깨달음을 두고 말한다. “아버지가 하지 않은 그 말을 나는 들었고, 그 뜻을 이해했다. 나는 누구의 말을 들었을까? 내 안에 말을 넣어 준 이는 누구였을까?” 빠롤 수플레, 연극 무대의 보이지 않은 뒤편에서 무대 위의 배우에게로 비밀리에 불어넣어지는 프롬프터=신의 말 또는 법. 숨은 신=최종적 프롬프터의 섭정 장치로서 불어넣어지는 그 말이란 광야에 홀로 선 야곱에게 최적화된 말·법으로서, “그에게 꼭 필요한 대답이 약속의 형태로 찾아온 것”이었고, 신의 그 약속은 야곱에게로 이어진 ‘혈통’에 뿌리박은 것이었다. 야곱에게 불어넣어진 숨은 신의 결정하는 인격·생명·숨결이란, “자기가 아버지의 아들이고 할아버지의 손자라는 것”에, “자기가 여호와의 약속의 혈통이라는 것”에, “할아버지가 받고 아버지가 이어받은 그 약속이 자기에게 이어져 있다는 것”에 뿌리박은 것이다. 숨어 불어넣는 신의 계약의 말·법은 불어넣어짐을 받는 자의 혈통 안에서, 가계의 혈통이라는 정당성/정통성의 근저에서 발효된다. 그 가계-혈통을 관통하는 수직성, 일직선적 직계의 밀폐성. 그 가계-집이란 야곱이 깨닫게 된 저 ‘신의 집’이라는 것이, 즉 변신론의 화해·합치상태라는 것이 “분리가 없으므로 위기도 없”는 삶·관계로 언제 어디서든 전락될 수 있는 장소일 수 있음을 표시한다: “밀폐된 집에 들어간 사람이 살필 수 있는 것은 집주인이 보여 주려고 한 것, 꾸며 낸 것, 위장한, 연출한 것밖에 없다. 살피는 자가 보려 하고 보아야 하는 것은 꾸미지 않은 것, 감추지 않은 것, 연출하지 않은 것인데, 그것은 집주인이 보여 주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집주인이 보여 주지 않으려고 감춘 것을 들춰내서 살필 수 있는 방문자는 없다.” 개시와 은폐에 관한 신의 조절·변증적 결정 속에서 발현하는 ‘신의 집’이란 모종의 ‘밀폐된 집’, 프롬프터=신의 불어넣어진 말로 구축된 자기 위장·은폐의 무대장치로서, 드러냄과 숨김의 재량적 조합으로 발현하는 신의 자기 극작술로써, 법의 드라마트르기로써 연출·개시된다. 저 신국의 사다리를 보았던, 신의 목소리로 그렇게 불어넣어졌던, 그럼으로써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신의 집이자 신국의 문이라고 깨닫게 됐던 야곱의 그 광야 또한 그런 빠롤 수플레의 은총, 그 영광의 무대-계약술 안에서는 밀폐된 집으로 언제든 폐절될 수 있다. 야곱의 할아버지 아브라함, 그는 신과 맺은 약속의 혈통·적통을 따라 아들 이스마엘을 “쫓아낸 아버지”였으며, 그 직계-아버지들의 “집에서 추방당한” 하갈은 그 아버지들·주인들(집주인과 그 “주인의 신”)의 불의에 울부짖다가 숨은 신의 개시된 목소리를 듣고서는 신의 정의를 인정하게 됐었다. 그때 하갈은 그 신을 “살피시는 분”이라고 불렀다. 질문은 이렇게 된다. 살피시는 신의 집이 저 밀폐된 집이자 “주인의 집”이고 신이 그 집의 주인이라면 어쩔 것인가, 신의 그 집이 밀폐된 집이 아닌 이유, 신이 그 집의 주인이 아닌 이유가 있음에도 왜 다음과 같은 물음에 그 신은 답하지 않는가: “최선을 넘어서는 최선, 그것에 의해 넘어선(파괴된) 인간의 최선, 신의 섭리에 의해 뛰어넘은(훼손된) 인간의 법과 도리는 어떻게 회복하는가.” 살피시는 신의 집을 ‘살피는 자’, 살피시는 신=집주인이 감춘 것을 들춰내어 살피는 자, 드러냄과 감춤 간의 조절과 합성으로 재생산되는 신의 집으로부터 분리되는 자, 신의 그 비밀화된 섭리/섭정[arcana imperii]의 집으로부터 탈구되고 성별(聖別)되는 자. 집주인=신의 그 살핌·보살핌, 후생과 목양의 그 집, 사랑의 그 집으로부터 분리되어 이방인/이질인(異質人)이 된, 그렇게 “광야의 사람”이 된 특정 시간 속에서 이삭은 말한다. “그 사랑이라는 것이 ‘속해 있는 것’을 향한 지배의 방법이라는 사실이 어렴풋이 깨달아지자 견딜 수 없었다. 집은 사랑이 없는 곳이어서가 아니라 사랑이 굴레인 곳이어서 돌아갈 수 없는 곳, 달아나야 하는 곳이 되었다. 그는 집을 튼튼하게 하는 효율적인 재료의 역할을 하는 사랑을 털어 내기 위해 떠돌이가 되었다.” 이 떠돌이, 그 유동성이 신의 집으로부터 ‘분리되어 사색하는 일’, 그 집으로부터의 분리를 사고하는 일, 줄여 말해 ‘비판’을 가능케 하는 힘이며, 그때 그 이방인은 신국의 저 문이라는 것이 열림과 닫힘의 임의 재량적인 결정 상태로 구동되는 장치임을, 언제든 들어갈 수 있도록 열려 있으되 지금 당장은 들어갈 수 없게 되어 있는 그 문 앞에 삶·관계를 항구적으로 계류시키고 정박시키는 ‘법의 문’임을 알게 된다.
§3. 그러하되 광야에서 깨닫게 된 야곱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든 이 독후감과는 달리 출발할 수 있음을 표시한다. 숨은 신의 말로 불어넣어진 야곱은 ‘공포와 전율’ 속에서 말한다: “내 안에 들어온 말들이 성좌를 이루었다.” 자신 안에서 구성되는 말씀의 성좌 안에서 야곱은 감지한다: “내 안에 더 깊은 길이 펼쳐져 있다.” 이 독후감은 그런 성좌의 별 하나, 한 점의 별을 건드리고 지나가는 접선이었다. 그러므로, 그런 한에서, “별들이 모여 이루어진 조형물”인 이 소설집 『사랑이 한 일』은 독자 제현(諸賢)으로 하여금 야곱이 말하는 성좌의 다른 별 하나에서 시작해 그 성좌 자체를 다시 그려 보도록 하는 모종의 숨결을 불어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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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양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6년 3월부터 2026년 5월까지 으로 3회 연재됩니다. 부패하는 기억의 공간 ㅡ 『자작나무 숲』과 쓰레기의 정치학 (1) 박서양 0. 연재에 앞서 본고는 김인숙의 장편소설 『자작나무 숲』을 중심으로 쓰레기라는 물질이 공적인 처리 제도와 가정이라는 사적 공간, 그리고 기억과 서사의 경계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단계적으로 고찰하는 3부작 비평이 될 예정이다. 1부에서는 단편소설 「빈집」을 살피며 쓰레기가 공적 처리 시스템에 편입되기 이전 가정이라는 공간에서 수행되는 분류 노동과 그 젠더화된 정동을 분석할 것이다. 2부에서는 쓰레기를 배제함으로써 질서를 회복하려는 배제의 원리가, 서사에서 개연성을 통해 사건을 정합적으로 배열하려는 충동과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를 살핀다. 3부에서는 지워진 여성들의 언어와 역사, 그리고 쓰레기 사이의 관계를 고찰하며, 재개발과 쓰레기집이라는 한국 사회의 현실 속에서 여성 고딕적 상상력이 어떻게 변주되는지를 논할 예정이다.1) 1. 쓰레기집의 사회적 상상력 곡교동 산1번지의 쓰레기집은 소설 『자작나무 숲』의 공간적 배경이자 독자를 압도하는 오브제다. 개발과 투기의 욕망으로 들끓는 재개발 예정 구역 한복판에 우뚝 선 이곳은 그 강렬한 존재감으로 독자를 끌어당긴다. 우리는 흔히 ‘집’이라는 단어에서 안식과 보호, 정돈과 재생산의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쓰레기와 오물로 뒤덮인 이 공간은 그와는 거리가 멀다. 쓰레기와 쓰레기 아닌 것, 집과 집 아닌 것의 구분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이 이질적인 장소에서, 자본의 생리에 따라 버려져야 할 물건들은 한데 뒤엉켜 완강한 물질적 현존을 드러낼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물질의 축적은 단순한 불결함이나 미관의 문제로 환원되지 않는다. 일상적 분류와 질서의 법칙이 멈춘 어느 공간에서 소설은 사물의 퇴적과 부패를 집요하게 드러내며, 집의 장소성을 ‘언캐니(uncanny)’하고 낯선 심연으로 변주시킨다. 집은 물리적으로 내부를 보호하고 외부를 차단하는 경계로 구성되며, 무엇을 수용하고 배출할 것인지를 판단하는 분류 체계 위에 성립한다. 소비주의 사회에서 상품은 끊임없이 순환되어야 하므로 ‘쓸모’를 다한 물질은 즉각 폐기되어 사라져야 한다. 이러한 논리는 집이 수행하는 선별의 원리와 닮아 있다. 이때 집은 어떤 사물이 여전히 인간의 일상에 머물 자격이 있는지를 판가름하는, 선택과 배제의 논리가 구체적으로 작동하는 장소로 존재한다. 산1번지에 위치한 그곳이 문제적인 이유는 이러한 소비주의 시스템과 분류 기제가 지속적으로 실패하고 무력화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사물의 분류 체계도, 공간의 경계 논리도 더 이상 안정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대신 오랜 시간 퇴적되고 방치된 사물들만이 거대한 물질 덩어리로 합쳐져 뒤엉킨 채 굳어간다. 이처럼 쓰레기 더미가 인간의 거주 공간을 잠식하는 장면 속에서 독자는 익숙한
- 관리자
- 2026-03-01
방의 병리학 ㅡ 유선혜와 차현준의 시를 중심으로 송현지 1. 자기만의 방, 자기만의 몸 1929년,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여성이 글을 쓰는 데 필요한 조건으로 연간 500파운드의 수입과 자기만의 방을 내세운다. 이 요구는 여성에게 쉽게 주어지지 않았던 사회적 조건을 폭로함으로써 당시에도 강한 호소력을 가졌지만, 그 구체성과 상징성으로 인해 약 한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자주 인용되곤 한다. 특히 ‘자기만의 방’이라는 표현은 독립을 위한 물질적 요건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며 여성 창작자만이 아닌, 청년 등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위치에 있는 이들의 문제를 다루는 데까지 확장되어 활용되어 왔다. 청년 세대를 대상으로 한 금융 자기 계발서의 제목이나 그들의 주거 형태를 분석하는 사회학적 키워드로 변주되는 것이 그 예다. 그러나 울프가 제시한 이 조건은 단순히 경제적 여유를 갖추거나 물리적 공간을 확보하는 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은 짚어 둘 필요가 있다. 당시 여성의 몸이 가사 노동과 돌봄을 위해 수시로 침범되며 공동의 재화처럼 사용되었음을 떠올려 본다면, 정기적 수입의 필요성은 생존을 이유로 타인에게 자신의 몸을 양도하지 않을 권리를 의미하며, 독립된 방에 대한 요청은 몸이 침범당하지 않을 최소한의 물리적 공간을 요구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 울프가 요구했던 저 경제적·물리적 조건이란 타인에게 뺏긴 자신의 몸을 되찾아야 한다는 선언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러한 점에 기대어 오늘날 청년 세대의 거주 불안 문제를 경제적 관점에서만이 아닌, 신체의 주권 문제와 함께 살펴보면 어떨까. 고시원에 거주하는 청년들을 인터뷰하며 정민우가 그들의 불안정한 거주 자체가 아닌, 잦은 이동으로 인해 소유물을 버리는 일에 익숙해진 그들이 삶을 ‘요약’한 채 살게 되었음을 포착한 것처럼 말이다.1) 이처럼 방의 문제가 주체가 삶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어떤 방식으로 운용하게 되는지를 규정하는 조건으로 작용하며 현재는 물론 미래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고 한다면, 최근 젊은 시인들의 시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방을 살펴보는 작업은 소재주의적인 탐색만은 아닐 것이다. 이 글은 임대된 방에 머무르는 유선혜 시의 화자와 내면의 방을 관리하는 차현준 시의 화자를 중심으로 청년 세대가 처한 사회적 조건을 살펴보고, 그러한 조건 아래에서 그들이 어떻게 ‘자기만의 방’을 상상하고 변형하며 자신의 미래를 모색하고 있는지를 분석함으로써 동시대 청년들의 인식 구조를 가늠해 보려 한다.2) 2. 임대된 몸과 구멍의 존재론: 유선혜의 경우 유선혜의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에서 청년 인물들은 주로 좁고(「흑백 방의 메리」), 어두운(「Nirvana」) 방에 머문다. “조립형 서랍장이 쓰러져가”는 방에서 “싸구려 보드카와 오렌지주스를 종이컵에 섞”(「잡종의 별자리」)어 마시고, 여러 개의 방이 있는
- 관리자
- 2026-03-01
반복되는 세계에서 살아남기 ㅡ 김엄지론1) 안세진 1. 색소폰 연주와 살아남은 소설들 내가 살고 있는 집 앞 하천 굴다리에는 매일 저녁 색소폰을 부는 할아버지가 있다. 처음에는 아저씨였는데 지금은 할아버지가 되었다.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한 항상 있었다. 어제도 있었다. 당신은 테이프 반주에 맞추어 끈적한 유행가를 연주하는 중절모 쓴 노신사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겠지만, 지금 내가 말하는 풍경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는 벽을 보고 색소폰을 분다. 반주도 없고 관객도 없다. 중절모는 쓰고 있다. 한 이십 년쯤 들었으면 익숙해질 만도 한데 나는 아직도 그가 대체 매일 무엇을 연주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불협화음 같은 프레이즈가 툭툭 던져지고 호흡을 고르는 듯 어색한 침묵이 길게 흐른다. 몇 개의 음으로만 이루어진 단순한 멜로디가 수십 번 반복되기도 한다. 아무리 들어 보아도 그것은 노래 같은 것이 아니다. 그는 그렇게 오래 연주하지도 않는다. 한 시간쯤 지나면 색소폰을 케이스에 넣고 어딘가로 털레털레 사라진다. 그는 그렇게 자신이 정한 규칙에 따라 매일 무엇인가를 연주하고 있다. 어떤 수련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이유 모를 형벌을 받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하여튼 무엇인가 반복되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그는 장인(匠人)일까, 아니면 광인(狂人)일까. 언제부터인가 김엄지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나는 색소폰 소리를 듣는다. 무엇인가가 소설 속에서 그저 미친 듯이 반복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김엄지의 연주가 시작된 순간은 언제였을까? 정확히 십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볼 수 있겠다. 그때 데뷔 육 년 차의 소설가 김엄지는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문학과지성사, 2015)와 『주말, 출근, 산책: 어두움과 비』(민음사, 2015)라는 두 편의 책을 거의 동시에 문단에 상재했다. 전자는 그의 등단작 「돼지우리」부터 시작해 비교적 ‘단편소설’의 통상적인 형식을 갖추고 있는 초기 작품들이 모여 있는 소설집이었고, 후자는 그가 최근 발표했던 각종 소설의 파편들이 이리저리 조합되어 만들어진 그야말로 괴이쩍은 장편소설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출간되었지만 김엄지의 소설은 명백히 전자에서 후자의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무개념 상태로 널브러져 있”2)는 오피스 맨들의 기이한 무기력은 이미 그의 초기 소설이 잠시 펼쳐 보였던 ‘씹’, ‘뻑’, ‘좆’의 치기 어린 발랄함을 모조리 잠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야흐로 - 이후 김엄지의 소설을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규정하게 될 - “삶의 무게, 아니 ‘무게 없음’을 형상화한 듯한 하나의 형식”3)이 발명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김엄지의 문체(style)는 사실상 그때 이후로 거의 변하지 않았다. 성의 없이 툭툭 끊어지는 문장, 몇 페이지를 채 이어 가지 못하고
- 관리자
- 2026-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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