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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려진 (아픈) 몸들, 지속되는 광장-들

  • 작성일 2026-02-01

   가려진 (아픈) 몸들, 지속되는 광장-들

   -최진영, 이서수, 최은미의 소설을 중심으로1)


민선혜


   1. 광장이라는 ‘사건’, 서로에게 감응-연결된다는 ‘환상’


   슬라보예 지젝은 ‘사건’을 안정화된 도식을 뒤엎을 수 있는 새로운 무언가가 출현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사건은 기존의 틀 자체를 파괴하고, 새로운 세계를 열어젖히는 순간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광장은 ‘사건’이었을까. 우리는 정말 같은 ‘사건’을 통과한 것일까. 이번 광장의 특징적인 면은 내란 사태를 경험하며 민주주의의 훼손을 온몸으로 막고자 한 시민들의 정치적 열망이 모인 곳인 동시에, 내란을 통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 한국 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바꾸기 위한 다양한 목소리들이 모이는 장소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광장은 하나의 사건이라기보다, 사건들의 격전지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우리가 통과한 광장이 새로운 ‘빛’과 ‘연대’를 보여 주었다는 사실은 결코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 광장을 빛과 연대의 광장으로만 의미화하는 것 역시 어딘가 석연치 않다. 새로운 민주주의를 개진시키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을 표하는 삼보일배의 순간에도 여성의 몸은 너무 손쉽게 남성적 언사로부터 훼손되고, 이때 여성의 몸은 또 다른 광장이 되어 버리고 만다. 민주주의를 수호하고자 하는 광장 안에 존재하는 억압, 대상화, 전시와 혐오의 광장. 광장 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광장. 광장의 빛남을 이야기하는 동안 표백되고 괴리되어 미끄러지는 외따로 놓인 또 다른 작은 광장들. 이것을 ‘가려진 몸들’이라고 불러 볼 수 있지 않을까. 다시 말해, 어떤 몸들이 경험하는 광장은 다른 이들이 경험한 광장과 완전히 동일할 수 없다. 

   탄핵 구호를 외치는 동안, 뉴스 속보를 확인하는 동안 고통에 응답하는 정치를 원했다. 마땅한 고통에 마땅한 응답을 내놓는 민주주의를 기대했다. 2030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들이 광장에서 보여 준 활약과 그들이 들고 있던 깃발들의 이채로움에 대한 찬사 대신, 광장 속에서 부글거리고 있던 ‘우리’ 사이의 작은 차이들과 어긋남에 세심히 주목해 주는 정치를 원했다. 광장이 파한 이후에도 이들이 오롯이 설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는 민주주의를 기대했다. 그런데 그 자리는 마련되고 있는 것일까. 그 많던 ‘우리’는 다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광장에 나타났던 ’몸‘과 다시 사라져 버리고 있는 ‘몸’.2) 

   지금 우리는 이 나타남과 사라짐을 경유하여 광장을 소급적으로 재사유할 필요가 있다. 광장에 부재했던 몸들을 끊임없이 호출하는 목소리와 보란 듯이 현전했음에도 다시금 사라져 버린 몸들에 대해서는 구태여 말하지 않는 목소리, 광장을 사이에 두고 발생하는 이 미끄러짐은 민주주의가 얼마간 성차화된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3) 특히 광장에 부재했던 2030 남성들을 호명하고, 2030 남성의 극우화 혹은 보수화에 대해 진단/해명하는 과정 속에서 민주주의의 의제와 주체의 순서가 뒤바뀌어 버리는 위험이 발생해 버리기도 한다. 왜냐하면 2030 남성의 정치적 부재와 심화되어 가는 젠더 갈등의 중간 지대를 상상하는 과정 속에서 민주주의는 ‘누가’ 다음 정치를 구성할 것인가의 문제로 변질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주의에 있어서 ‘누가’의 문제보다 마땅히 선결되어야 하는 것은 다음 민주주의의 의제가 ‘무엇이’ 될 것인가에 있다. 어떤 사회로 전환할 것인가의 문제가, 누가 전환할 것인가의 문제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학이 포착하는 전환의 징후가 여성의 ‘몸’을 경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해 봄 직하다. 최근 발표된 최진영, 이서수, 최은미의 작품들에서는 광장의 안과 밖에서 이미-항상 우리 곁에 있었던 몸들과 이들이 마주하는 ‘미끄러짐’의 순간에 주목한다. 광장에서 우리가 서로에게 연결되고 감응되었던 감각을 뒤로한 채 이제는 광장이 파한 후의 미끄러짐을 마주할 시간이다. 문학은 이 미끄러짐까지 끌어안으며 ‘사건’을 기록하고, 동시에 ‘사건’을 발생시킬 것이다. 



   2. 광장 아래, 꿈틀거리고 있는 몸들: 최진영 「돌아오는 밤」(2025)4)


   최진영의 「돌아오는 밤」은 ‘광장’이라는 장소를 직접적으로 지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비상계엄이 발생한 순간의 전후를 조명함으로써 ‘광장’ 이전부터 이미 우리의 현실 이면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던 것들을 소설적으로 형상화한다. 최진영의 소설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감각할 수 있는 것들은 바로 이런 장면들이다. “평화롭게 하자고 거듭 소리를 지르는 그에게 소리 지르지 말라고 외치다가 뒤쪽을 향한 말로 들릴까 싶어 입을 다물었다. 왜 그런 말투로 평화를 요구할까. 수많은 시민을 담은 이 자리가 왜 저 정도 입장과 말을 담지 못할까.”5) 광장은 이처럼 ‘평화’라는 단어마저도 쉽게 미끄러지는 장소일 수밖에 없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각자가 생각하는 ‘평화로움’의 모습과 여기에 포함되는 주체들이 상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광장이라는 공간은 연대와 평화의 공간인 동시에 갈등과 괴리 역시 존재하는 양가적인 공간일 수밖에 없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소설을 읽으면 광장 이면에 꿈틀거리고 있는 ‘양가성’을 정직하게 마주하고 있는 몸을 포착할 수 있다. 

   소설은 친구 ‘향기’의 죽음 직후, 슬픔을 갈무리할 새도 없이 사장의 개인적인 부탁을 받아 영국 에든버러에서 열리는 장례식 참석하는 화자의 모습을 조망한다. 화자 ‘은빛’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죽기 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모르는 이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chatGPT에게 적절한 위로의 말을 묻는다. 인공지능이 알려 준 말을 “짧고 진심 어린 톤”(345쪽)으로 전달하는 동안 “울컥 솟구치는 감정 때문에 조금 울먹”(346쪽) 이게 된 이유는 화자가 친구를 잃은 슬픔을 “회사 사람들과 나누고 싶지 안”(347쪽)았기 때문이다. 화자의 몸과 마음에 오롯이 고여 있는 이 상실의 슬픔은 바로 그 고립성 때문에 모르는 이의 장례식에서 고인의 가족들에게 진심을 다해 애도의 마음을 전할 수 있게 한다. 완전히 동일한 상실은 아닐 테지만, 그럼에도 자신만의 상실을 기반 삼아 타인의 슬픔에 공명하게 되는 이 장면 속에서 타자의 언어로 알지 못하는 이의 죽음을 애도하는 이 기묘한 미끄러짐은 ‘우리’ 사이의 괴리를 인정하고 인식함에도 불구하고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하게 만든다. 

   이런 가능성은 장례식이 끝난 후 ‘은빛’이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보다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화자는 시간과 공간이 뒤엉킨 것만 같은 경유지인 헬싱키 반타공항에서 인공지능과 ‘향기’의 죽음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서로 다른 모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듬성하고 짧은 대화를 나눈다. 이야기를 할수록 무겁고 뜨거운 진심을 확인하며 서로 간의 거리를 좁히는 대화 대신, 이야기를 할수록 빈틈을 확인하게 되는 언어들 사이에서 화자는 동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 사이의 거리감을 인정하는 짧은 문장” 사이에서 “인정하며 곁에 나란히 서는 진심 어린 마음”(349쪽)으로 조용히 질문하고 답을 구할 뿐이다. 

   결코 자신의 것만은 아닌 말들을 전하는 과정에도 그 마음은 자신의 것이 될 수 있다는 경험은 서로의 거리감 안에서 안전함을 느끼기에 가능한 일이 된다. 그러나 이 거리와 안전함이라는 것은 “아무리 화나거나 다급해도 절차를 지켜야” 하며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그런 법과 규칙”(351쪽)이 존재할 때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거리-안전의 감각은 자신의 친구 ‘향기’를 떠올리며 ‘갇힌’ 몸이 사실은 매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되는데, 갇힌 몸으로 자유로워지는 영혼과 ‘거리감’을 통해 마침내 타인과 연결될 수 있다는 상상은 역설적이지만 아름답다. 그런데 정말 그러할까. 이것을 역설과 아름다움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무언가 많은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소설에는 12·3 계엄과 관련된 뉴스의 파편들이 총 세 번 삽입된다. 그중에서 두 번의 뉴스는 소설의 시간상 아직 12월 3일 밤이 도래하지 않는 순간에 우선적으로 끼어든다. 다소 성급해 보이는 소설과 뉴스의 교차는 내란 사태를 빠르게 기입하고자 하는 갈급함과 다급함으로 읽히기도 한다. 소설에 직접 인용된 인공지능과의 대화와 달리 친구의 죽음과 꽉 맞물리지 못하는 뉴스의 파편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것은 상실과 애도를 위해 모인 광장과 헌법을 수호하기 위해 모인 광장이 서로 미끄러진 채 공존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 주는 것인 동시에 12월 3일 밤이 도래하기 전부터 일상의 이면에 이러한 위험 혹은 위협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읽어 볼 수 있다. 

   누구라도 예외 없이 적용되어 타인과 안전한 거리를 확보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던 법과 규칙은 소설의 말미에 이르면 더 이상 안전을 보장하지도, 누구에게나 적용되지도 않는 것으로 변모하고 만다. ‘비상계엄’ ‘전쟁’ ‘친위 쿠데타’ ‘국회’ 등의 단어가 소설에 등장하면서 서사는 급격하게 전회를 맞이하고 서술의 속도 역시 매우 긴박해지는데, 이 과정 속에서 소설은 계엄이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준 사건임에 분명하지만 계엄으로 인한 공포와 두려움이 모두에게 동일한 것으로 경험되지 못했음을 보여 준다. “이제부터 길에서 아무 사람이나 죽일 거야. 총을 쏴서 죽이고 때려죽일 거야. 잡아다가 고문하고 거짓 자백을 받아 죄를 뒤집어씌울 테니까 절대, 절대로 집 밖으로 나가면 안 돼.”(357쪽)라는 할머니의 당부는 계엄을 겪어 본 이가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당부일 테지만, 은빛은 할머니의 말대로 집 안에 숨어 있을 수 없다. 아직 집에 도착하지 못한 상황에서, 대중교통이 모두 끊기고, 핸드폰 배터리마저 없을 때 은빛은 밖으로 나가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들이 나를 제대로 볼 수 있도록 가로등 밑에서”(359쪽)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다. 

   방금 전까지도 타인과의 거리감을 통해 안전을 확보하고 확인하던 화자가 이것들을 포기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그가 거리감을 포기하고 타인과 마주하기를 결심할 수 있었던 이유는 거리를 두고서도 서로가 연결될 수 있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온전한 마주침의 순간에 화자의 기대는 완전히 배반당한다. 마주침의 순간에 얻게 되는 것은 더 가까운, 더 친밀한, 더 안전한 도움이 아니라 훼손이기 때문이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연이어 메시지가 올라왔다. 

대한민국 헌법 제2장 10조야. 

법이 그래. 

법이 그렇다고. 

헌법이 보장한다고.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6) (강조: 인용자)


아, 우리가 한 말에 겁을 먹었을 수도 있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말뿐이고.

그래, 우리가 이런저런 일을 벌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알려 줬을 뿐이지. 

아무튼 계획에 불과하잖아? 

(···)

잡아도 금방 풀려날 거야. 

법이 그래. 

법이 그렇다고.7) (강조: 인용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세 명의 청년들은 도움 대신 화자에게 가차 없이 폭력을 가한다. 도망치려 하는 ‘은빛’의 앞으로 계속 찾아와 벌어지는 훼손의 과정에서 ‘계엄’은 할머니가 과거에 겪었던 것, 그리고 현재 은빛이 경험하고 있는 것과는 또 다른 것으로 미끄러지고 만다. 이 두려움의 순간이 누군가에게는 “예수 천국!”(362쪽)을 외치는 “진정한 혁명의 밤”(363쪽)이자 “길에서 사람 하나 사라져도 아무도 신경을 안 쓰”(363쪽)는 기회의 순간이 되기 때문이다. 

   소설은 도움을 요청하기 위한 ‘마주침’의 순간에 발생하는 폭력과 훼손을 통해 광장에 모인 여성들의 몸이 어떠한 공포를 마주하고 있는지, 어떠한 훼손을 무릅쓰고 타인과 연결되기를 견디고 있는지, 그리고 이것들을 선택하기 위해 어떠한 위험을 감수하고 있는지에 대해 어물거리지 않고 명확히 이야기한다.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 주는 법의 언어가 폭력과 훼손을 정당화하고 교묘하게 숨기는 언어로 전유되고 마는 허약함 속에서, 타인이 건넨 꽃이 언제든 뱀이 될 수 있는 곳에서 그럼에도 “다시 시작”(367쪽)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 바로 ‘광장’이라는 것을 소설은 짚어 낸다. 때문에 광장의 빛은 역동적인 대폭풍의 시기에 발생하는 예측하기 어려운 ‘오로라’와 닮아 있다. 무엇을 만나게 될지, 어디에서 발생할지 알 수 없는 이 빛이 발하는 곳은 각각의 훼손된 몸들이 서로의 훼손됨을 알아보는 공간이자 서로를 향해 미끄러지는 몸들을 마주하게 되는 도무지 예상할 수 없는 공간이다. 



   3. 허물어지는 경계, 뒤엉키고 확장되는 몸: 이서수 「몸과 무경계 지대」(2024)8)


   광장에 필요한 것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적용되는 ‘법과 규칙’도 아니고, 서로를 안전하게 만드는 적절한 ‘거리’도 아니다. 서로가 서로를 마주하는 순간, 그래서 미끄러지는 바로 그 순간에 서로의 다름을 확인하는 데서 그치거나 혹은 동일한 부분들을 나란히 포개어 보는 일도 아니다. 잘 맞물리지 않음에도, 그래서 모호하게 느껴짐에도 불구하고 얽히고 뒤엉키는 일을 시도하는 몸들을 응시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훼손을 각오한 몸들이 기어이 서로에게 서로를 열어 낼 수 있는 몸들이 지대를 형성하는 일이다. 이 때문에 광장은 ‘피아식별’ 대신 “판단을 보류하고 모호함을 견디는”9) 곳이 되어야 한다. 

   이서수의 「몸과 무경계 지대」는 화자 ‘쥐눈이콩’이 연인 ‘단밤’과 함께 섹스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 나서는 과정과 유년 시절을 보낸 이태원에서 만난 첫사랑‘들’을 나란히 교차시킨다. 이때 섹스할 수 있는 장소란 매우 모호한 동시에 명확한데, 우선 경계가 없어야 하고 몸이 활짝 열릴 수 있는 장소여야 한다. 가장 안전할 것이라고 예상되는 집이 가장 불가능한 공간이고, 안과 밖과 경계가 명확한 자동차 역시 몸이 열리지 않는 곳이 된다. 아무런 용도도 경계도 없는 ‘공터’와 같은 곳이 가장 적절할 텐데 이런 곳을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렇게 구체적인 예를 들어가면서 설명함에도 불구하고 ‘단밤’이 말하는 경계의 의미를 명확하게 파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경계가 모호한 공간을 계속해서 찾아 나선다.

   이 연인들이 서로의 몸을 탐색하기 위해 찾아 헤매는 곳이 ‘무경계’ 지대라는 점, 그리고 이 과정에서 화자가 고백하는 첫사랑들을 만난 공간인 ‘이태원’을 떠올린다는 점은 주목을 요한다.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에서 이태원은 어떤 장소일까. 이태원은 다양한 젠더, 인종, 계급이 모이는 무경계 지대의 다름이 아니다. 그런데 이 무경계라는 것을 마냥 긍정할 수만은 없는데 왜냐하면 이태원에서 살았다는 것은 그 장소의 무경계성 때문에 타인들에게 쉽게 말할 수 없는 일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태원은 서울의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한국인이 가면 안 되는 위험한 곳”(194쪽)인 동시에, 그 어느 곳보다 다양한 인종과 몸이 뒤엉켜 사는 곳, “편견 대신 침묵으로 일관했던”(225쪽) 곳, “오랑캐의 아이를 잉태한 여자들이 많이 살았던 곳”(194쪽), 세계의 안쪽에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해 경계로 밀려난 이들이 머무는 곳. 그러니까 이태원이라는 곳은 서로 다른 몸들이 미끄러지고 엉키고 불화하며 분열하는 ‘광장’과도 같은 곳으로 읽어 볼 수 있다. 

   화자가 경계 없는 장소를 찾아다니는 동안 유년 시절을 보낸 이태원을 떠올리는 이유는 그곳이 “한국인, 여자 아니면 남자, 아이들과 전업주부인 어머니들과 노동자인 아버지들”(196쪽)이라는 경계가 명확한 몸들이 사는 곳으로 설명될 수 있는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경계가 없는 다양성 속”(195쪽)에서 그의 첫사랑들은 트랜스젠더인 ‘귀족 언니’이거나, 붕괴된 나라에서 온 이름 없는 아이이거나, 미군 아빠와 기지촌에서 술집을 운영하던 한국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주나’였고, 동시에 뇌성마비 장애인 ‘경서 언니’로까지 무한히 확장된다. 

   첫사랑의 몸들이 확장되어 가는 과정에서 화자는 이런 것들을 배우게 된다.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아이의 옆자리에 앉아 언어가 전혀 통하지 않는 이의 “침묵과 가만한 몸짓에”(204쪽) 마음을 쓰는 법, 그가 필통 안에 비밀스럽게 붙여 놓은 공주님 스티커를 발견하고, 공주님 종이 인형을 교과서 사이에 끼워서 조용히 건네는 법을 배운다. 귀족 언니를 사랑하는 동안은 ‘귀족’이라는 계급을 지시하는 단어를 나름의 방식으로, 나만의 (혹은 우리만의) 언어로 전유하는 법을 배운다. ‘주나’와의 관계에서는 타인과 친밀해지는 일에 친밀함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운다. 이처럼 이태원이라는 공간에서 서로에게 응답하는 일은 분명한 언어를 경유하지 않고서도 가능한 일이 되며, 응답의 형태 역시 상대에 따라 각기 다른 것이 된다.


언어라는 것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으로 했습니다. 지금 제가 하는 말처럼 경직된 의미를 품고 있는 제한된 언어가 있는 반면에 표정과 눈빛, 제스처와 주로 모음 어, 오, 아, 우로 전달되는 확장된 언어가 있다는 것을요. 저는 전자만 구사할 수 있을 뿐 후자에 속하는 언어 능력을 젬병이었지요. (···)

그래서 저는 언니가 자신의 몸을 불편하게 여기리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엔 약간 불편해 보였지만 나중엔 그것이 언니의 몸의 존재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10)  


   터져 나오는 모음이 불완전한 언어가 아니라, 그에게 가장 필요하고 정확한 언어일 수 있다는 것, 그의 몸이 불편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그가 존재하는 방식일 수 있다는 것을 체득하게 되는 이태원이라는 공간은 당연하게도 몸들의 얽힘과 뒤엉킴이 언제나 아름다운 방식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알려준다. 뒤엉킴의 결과가 소문과 질투, 그리고 거짓, 모종의 사라짐으로도 그리고 “분리했으되 너희는 모두 평등하다.”(214쪽)는 가장 폭력적인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몸들의 확장과 얽힘을 막지는 못한다. 

   위와 같은 사실들을 알게 된 몸은 이태원이라는 공간을 벗어나게 되자 “본래의 기질이 빠른 속도로 희미해지”(196쪽)면서 줄어들게 된다. 인간의 몸이 자신의 사는 장소에 감응하며 확장되거나 축소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화자는 ‘단밤’의 몸이 확장될 수 있는 곳, 그래서 불편한 게 많으면서 그럼에도 함께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 나서기로 결심한다. 


내가 껍데기뿐이라도 괜찮아?

네가 왜 껍데기야? 

알맹이가 없어서. 

알맹이는 어디로 갔는데?

알맹이는 확장되기 위해 바깥을 돌아다니는 중이야. 

단밤은 고개를 기울이다가 이윽고 말했습니다. 

나도 같이 돌아다니면 되겠네.11)


   경계 없이 계속 확장되고자 하는 화자의 여정은 결국 자신의 알맹이와 껍데기를 분리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껍데기만 옆에 있더라도, 알맹이가 함께 바깥을 돌아다닌다면 우리는 여전히 같이 있으면서, ‘나’이면서 ‘나’를 벗어날 수 있게 될 것이다. 함께 있지만, 혹은 함께 있지 않더라도 몸들은 계속해서 얽히면서 자격이나 조건을 지워 나가며 확장될 것이다. 이서수의 소설은 이처럼 ‘누가’ 아니라 ‘무엇’을 향해 확장되어야 하는지, 이 확장을 가능하게 만드는 장소는 어떤 모양으로 우리 곁에 있을 수 있는지 떠올리게 만든다. 그러니까 무한히 경계를 허물어 가는 장소에서 당신이 갖춘 자격이나 조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몸 안에 갇히지 않는 것, 그리하여 닫히지 않는 것이다. 이 확장의 방법을 ‘사랑’이라 불러도 좋고 ‘윤리’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광장은 파했고, 몸들은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우리는 여전히 이 얽힘에 대해 골몰해야 한다. 어떤 주체가 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몸으로 확장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할 때다. 그러므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185쪽)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썰매를 탄 것처럼 신나게 미끄러져”(185쪽)야 하는 순간은 바로 지금이다. 광장이 파한 지금이야말로 신나게 미끄러져야 하는 순간인 것이다.



   4. 몸으로서의 광장, 이후의 문학 : 최은미 「김춘영」(2025)12)


   우리는 광장에 존재하는 미끄러짐을 확인하고, 이 미끄러짐까지 끌어안으면서 몸들과 연결되어 확장되기를 원한다. 그렇다면 우리 앞에 도래한 이행의 순간에 문학의 역할은 무엇일까. 문학은 광장의 목격자이거나 ‘사건’의 증언자 역할을 넘어 어떻게 새로운 ‘사건’을 발생시킬 수 있을까. 최근 발표된 최은미의 소설 「김춘영」은 이후의 문학이 나아갈 곳을 제시한다. 

   소설은 ‘지역과 여성의 기억’ 아카이브 연구팀에 속한 화자 ‘나’ 김춘영의 생애사 기록을 위해 마지막 면담을 하는 날의 정경을 담는다. 김춘영은 아카이브 연구팀에게 “귀한 분”(238쪽)으로 불리는데, 그가 생애사 기록 작업에 필요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만은 아니다. 김춘영은 “기본적으로 말을 잘하는 사람”(240쪽)이지만 이때 말을 잘한다는 것은 언제나 자신의 생각과 감정의 맥락 안에서 재배치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귀한 자원’은 언제나 어떤 수위로 말해야 하는지의 세심한 타진 끝에 화자에게 도착한다.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은 일 년 동안 대화를 나누면서 서로에게 깊숙하게 접속하는 순간마저도 이들의 대화가 “분명한 목적과 테마의 틀 속에서 진행되는 대화”(238쪽)라는 사실을 넘어서지 못하게 된다. 

   이들의 대화가 서로가 가진 자원을 필요로 하는 상대에게 적절한 형태로 건네주는 것 이상의 지점에 도달하지 못하게 된 이유는 ‘구술자-면담자’라는 형식과 역할이 이들의 대화를 얼마간 가로막기 때문이다. 타인의 삶의 특별한 지점이 있을 것이라 미리 전제하고 이루어지는 대화는 조카가 사다 준 ‘이케아’ 등마저도 “어르신이 직접 풀 먹여 바른”(239쪽) 심상치 않은 것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이것은 증언과 기록이라는 일련의 작업 안에 타인의 삶을 어떻게 의미화할 것인가와 관련된 타인의 욕망이 개입될 수밖에 없음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에 더하여 타인의 삶을 의미화하여 ‘기록될 만한’ 것이라는 분류 체계 안에 고정시켜 놓고자 하는 또 다른 폭력을 폭로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물론 소설 안에서 ‘나’가 위와 같이 직접적인 방식으로 김춘영이라는 인물의 삶을 의미화하고자 하는 불찰을 저지르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화자도 이 혐의로부터 마냥 자유롭지는 못하다. 왜냐하면 ‘나’ 역시도 김춘영을 “내가 완성할 텍스트의 주인공”(241쪽)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김춘영의 삶은 분석하고 기록된 이후 다시 해체되어야 하는 텍스트 그 자체인 동시에, 화자의 손으로 완성될 텍스트의 주인공 자리에 위치하게 된다. 

   마지막 면담이 진행되는 날, 화운령에는 큰 눈이 내리게 되고 예상치 못하게 ‘나’는 김춘영의 집에서 하루를 묵게 된다. 화자는 김춘영과 함께 밥을 먹으면서, 낮이 아닌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녹음기를 켜지 않은 대화를 나누면서 면담 내내 묻고 싶었지만 결국 묻지 못했던 질문들, 아카이브 연구팀 모두가 김춘영에게 묻기를 원하는 질문들, 하지만 김춘영이 누구에게도 꺼내 놓지 않으려 하는 사십오 년 전의 그 ‘사건’에 대해서 비로소 물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기대한다. 

   그러나 ‘나’의 기대는 김춘영의 집에 방문하게 되는 사람들 때문에 실현되지 못한다. 김춘영과의 ‘라포’를 쌓기 위해 세심하게 거리를 조정했던 화자보다 순식간에 친밀함을 나누는 ‘중년 부부’의 등장은 그동안 알던 김춘영과는 다른 모습을 포착할 수 있게 한다. 면담이 진행되는 내내 김춘영을 ‘선생님’이라고 불렀던 화자는 타인과 함께 있을 때 이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김춘영이 불편해한다는 사실을 눈치채게 된다. 대민 지원을 나왔다가 길을 잃은 군인들을 집 안으로 안내하는 김춘영이 “군인들과 전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로 하고 있다는”(251쪽) 것 또한 기민하게 알아차린다. 예상치 못한 눈과 방문객들로 인하여 김춘영의 집은 마치 광장과 같은 곳으로 변화한다. 오직 김춘영과 ‘나’가 존재하는 “내 현장”(245쪽)에서 김춘영을 불편하고 두렵게 만드는 이들과 함께하는, 그리고 이런 김춘영의 모습을 보면서 화자 자신 또한 부지불식간에 무언가를 내보이게 되는 장소로 변화하고만 것이다. 그리고 화자는 광장으로 변해버린 집에서 변화한 김춘영의 모습을 명확히 목격한다. 이에 더하여 그가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빨려 들어갔는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를 짐작하게 되는 것을 넘어서, 어쩌면 김춘영이 자신의 삶을 꺼내 놓는 면담 내내 괜찮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소급적으로 깨닫게 된다. 


“피아식별을 못 하면 군인은 끝인 겁니다.” 

(···)

김춘영이 내 팔을 잡은 건 그때였을 것이다. 통창에 비친 김춘영의 모습을 보게 된 것도 그때였을 것이다. 사람들은 남자가 던진 피아식별의 그물에 순간적으로 갇힌 채 통창에 반사된 서로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나는 김춘영을 급하게 부축해 가장 가까운 방으로 들어갔다. (···) 언제부터였을까. 김춘영이 괜찮지 않다는 걸 내가 안 건 언제부터였을까. 군인들이 나타나면서부터였을까. 여행객 부부가 나타나면서부터였을까. 지난 면담부터였을까. 지지난 면담부터였을까.13)


   소설은 ‘구술자-면담자’라는 인물 구도를 문학의 역할에 유비시킨다. ‘나’의 위치는 생애사 기록 작업이라는 형식 안에서 여러 번 변화하게 되는데. 우선 그는 김춘영의 삶을 듣는 ‘청자’이며, 그다음에 이것을 기록하고 자의 위치로 변화한다. 또한 기록한 김춘영의 삶을 재구성하여 텍스트를 다시 조직하는 ‘화자’의 위치로 다시 변화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김춘영의 삶을 기록하고, 재구성한다는 데 있지 않다. 문학과 유비되는 지점은 그가 사실은 계속 괜찮지 않았다는 것을, 그의 몸이 어쩌면 내내 ‘사건’의 한복판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는 지점에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이 언어가 아닌 침묵의 형식으로 발한다는 점 역시 주목을 요한다. 이는 단순히 김춘영의 과거가 말해질 수 없는 상흔이라는 것을 넘어선다. 이 침묵은 마땅히 물어야 하는 질문 앞에서 그것을 묻지 않기를 선택하는 것, 모든 것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기록할 수 없는 지점을 가늠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말하지 않음으로써 포착되는 장면들에 침묵으로 마주 선다는 점에서 앞으로의 문학이 나아갈 지점을 제시해 준다고 볼 수 있다. 침묵을 견딘다는 것은 어렵고 힘든 일이다. 특히 누군가의 훼손 앞에서 그것을 묻거나, 규정하거나, 기록하거나, 그래서 모종의 해결을 제시하고자 하는 태도 대신에 가만히 곁에 앉아 훼손된 몸에 자신의 손을 얹으면 그의 고통이, 그래서 두렵고 불안하게 만드는 것들이 사라질 때까지 함께 침묵을 지키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선택한다. 묻고 싶은 질문들을 삼키면서, 과거를 되짚지 않으면서 그가 견디고 있는 것들 앞에 함께 침묵하기를 선택하는 장면은 문학이 무엇을, 누구를 향할 것인지 혹은 어느 자리에 머물러야 하는 것인지를 말해 주는 것이 된다. 


김춘영생애사1.hwp

김춘영생애사2.hwp

그 안에는 화운령에 정착하기 전의 김춘영도 있었고 화운령에 오고 난 후의 김춘영도 있었다. 봉화 눌산리에서 누군가의 둘째딸로 살던 김춘영이 있었고 못 배웠지만 말의 조리가 있던 김춘영이 있었다. 후레아치마를 입고 읍내로 놀러나가던 날의 김춘영도 있었다. 깡통테이블의 녹을 긁어내며 가게 문을 열던 김춘영이 있었고 연못에서 도룡뇽이 보이면 여느 화운령 사람들처럼 기도를 하던 김춘영이 있었다. 그 안엔 운탄고도 어디에도 재현되어 있지 않은 김춘영의 장소가 있었다.14)


   누군가 부지불식간에 내보이게 되는 누설의 순간에 “그냥 그대로 앉아”(256쪽) 있기를 선택한 이후, 화자가 작성하게 될 김춘영의 생애사는 앞서 작성한 ‘김춘영생애사1.hwp’ ‘김춘영생애사2.hwp’와는 다른 글이 될 것이다. 화운령에서 보낸 김춘영의 삶을 초과하여, 그 어디에도 재현되지 않은 혹은 재현될 수 없는 김춘영의 장소들을 고려하며 쓰일 텍스트 속에서 김춘영은 ‘나’의 텍스트 속 주인공 이상의 위치에 놓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화자가 김춘영의 생애사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최종 ‘화자’에서 다시금 ‘청자’의 자리를 고려하게 되는 것으로도 포착된다. ‘나’가 완성할 텍스트 너머에 있는 ‘최종 청자’를 가늠하며 쓰이는 글은 쓰는 사람의 윤리를 초과하여 듣는 사람의 윤리까지 가늠해 보는 문학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5. 몸 안의 광장-들


   추운 겨울 도로를 가득 메운 사람들을 보며 이 몸들은 이미 그 자체로 광장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몸 안에 누적된 말과 시간들은 서로를 겨누기도 하고, 맞잡기도 할 것이다. 그 말과 시간들은 자신의 것과 타인의 것이 섞여 있을 것이다.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무언가를 바꾸기 위해 광장에 모인 이들의 작은 광장들이 궁금했다. 그리고 조용해진 여름날의 경복궁 앞을 걸으며 그 많던 몸들은 다 어디로 갔을지 생각했다. 자신의 광장에서 홀로 외치고 있을 그 말들을 생각했다.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외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니다. 

   도대체 광장은 어떠한 장소이기에, 이토록 문학과 맞닿아 있는 것일까. 그건 아마도 언어의 범람 속에서 싸우는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타협하거나 양보하는 곳이 아니라 끝까지 외치고 끝까지 관철시키고 끝까지 절망하는 곳이기 때문에 문학과 닮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광장에서 주목해야 하는 장면은 이어지고 연결되어 하나가 되는 순간이 아니라, 흩어지고 찢어지며 미끄러지는 순간이 되어야 한다. 문학은 상처와 파열, 미끄러짐을 기꺼이 감수하는 바로 그 순간을 살펴야 한다. 어떠한 의미에서 광장-들은 아직 파하지 않았고, 각각의 작은 광장-들이 서로를 향해 미끄러지는 일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이것은 보지 않고, 그래서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결코 사라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1) 창비 젊은비평가모임 공개 심포지엄(2025.09.26) ‘2025년체제, 문학이 향하는 곳’에서 발표한 「가려진 (아픈) 몸들, 개진되는 또 다른 민주주의」를 개고한 원고이다.

2) 김소라의 지적처럼 광장에서 2030 여성들의 등장이 도드라지긴 했으나, 여성들은 언제나 광장에 있어 왔다는 사실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김소라, 「연대로 확장된 광장과 민주주의」, 『계간 창작과비평 2025 봄호』, 제1호 통권 207호, 2025, 33쪽.) 여성을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재발견’하고자 하는 시각은 한편으로 여성을 계속해서 ‘비가시화’하는 시선과 맞닿아 있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광장에서 여성의 신체가 그 자체로 또 다른 ‘광장’이 되어 버리는 이중적 위험 속에서도, 여성들이 있는 장소가 적절한 ‘광장’으로 호명되지 못하였음과도 연결하여 살필 지점이다.

3) 조국혁신당의 성 비위 파문. 최강욱의 2차 가해 발언을 비롯하여 반복되는 정치권의 성폭력과 윤석열과 이준석으로 대별되는 젠더 갈등을 조장하는 여성 혐오 발언들은 궤를 나란히 한다. 우리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남성적 권력의 구조를 공고화하는 방식으로 작동 및 유지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장면들이기 때문이다.

4) 최진영, 「돌아오는 밤」, 『계간 문학동네 2025년 여름호』, 제2호 통권 123호, 문학동네, 2025.

5) 황정은, 『작은 일기』, 창비, 2025, 12쪽.

6) 최진영, 앞의 글, 356쪽.

7) 최진영, 앞의 글, 365쪽.

8) 이서수, 「몸과 무경계 지대들」, 『몸과 고백들』, 현대문학, 2024.

9) 이서수, 앞의 글, 254쪽.

10) 이서수, 앞의 글, 211쪽.

11) 이서수, 앞의 글, 230~1쪽.

12) 최은미, 「김춘영」, 『계간 창작과비평 2025 여름호』, 제2호 통권 208호, 2025.

13) 최은미, 앞의 글, 254쪽.

14) 최은미, 앞의 글, 2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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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노랑배박새
    감동했어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2026-02-01 21:28:26
    노랑배박새
    감동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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