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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하는 기억의 공간 1] 『자작나무 숲』과 쓰레기의 정치학

  • 작성일 2026-03-01

박서양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6년 3월부터 2026년 5월까지 <부패하는 기억의 공간>으로 3회 연재됩니다.



부패하는 기억의 공간

ㅡ 『자작나무 숲』과 쓰레기의 정치학 (1)

   

박서양

   

   0. 연재에 앞서

   

   본고는 김인숙의 장편소설 『자작나무 숲』을 중심으로 쓰레기라는 물질이 공적인 처리 제도와 가정이라는 사적 공간, 그리고 기억과 서사의 경계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단계적으로 고찰하는 3부작 비평이 될 예정이다. 1부에서는 단편소설 「빈집」을 살피며 쓰레기가 공적 처리 시스템에 편입되기 이전 가정이라는 공간에서 수행되는 분류 노동과 그 젠더화된 정동을 분석할 것이다. 2부에서는 쓰레기를 배제함으로써 질서를 회복하려는 배제의 원리가, 서사에서 개연성을 통해 사건을 정합적으로 배열하려는 충동과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를 살핀다. 3부에서는 지워진 여성들의 언어와 역사, 그리고 쓰레기 사이의 관계를 고찰하며, 재개발과 쓰레기집이라는 한국 사회의 현실 속에서 여성 고딕적 상상력이 어떻게 변주되는지를 논할 예정이다.1)

   

   1. 쓰레기집의 사회적 상상력

   

   곡교동 산1번지의 쓰레기집은 소설 『자작나무 숲』의 공간적 배경이자 독자를 압도하는 오브제다. 개발과 투기의 욕망으로 들끓는 재개발 예정 구역 한복판에 우뚝 선 이곳은 그 강렬한 존재감으로 독자를 끌어당긴다. 우리는 흔히 ‘집’이라는 단어에서 안식과 보호, 정돈과 재생산의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쓰레기와 오물로 뒤덮인 이 공간은 그와는 거리가 멀다. 쓰레기와 쓰레기 아닌 것, 집과 집 아닌 것의 구분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이 이질적인 장소에서, 자본의 생리에 따라 버려져야 할 물건들은 한데 뒤엉켜 완강한 물질적 현존을 드러낼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물질의 축적은 단순한 불결함이나 미관의 문제로 환원되지 않는다. 일상적 분류와 질서의 법칙이 멈춘 어느 공간에서 소설은 사물의 퇴적과 부패를 집요하게 드러내며, 집의 장소성을 ‘언캐니(uncanny)’하고 낯선 심연으로 변주시킨다.

   

   집은 물리적으로 내부를 보호하고 외부를 차단하는 경계로 구성되며, 무엇을 수용하고 배출할 것인지를 판단하는 분류 체계 위에 성립한다. 소비주의 사회에서 상품은 끊임없이 순환되어야 하므로 ‘쓸모’를 다한 물질은 즉각 폐기되어 사라져야 한다. 이러한 논리는 집이 수행하는 선별의 원리와 닮아 있다. 이때 집은 어떤 사물이 여전히 인간의 일상에 머물 자격이 있는지를 판가름하는, 선택과 배제의 논리가 구체적으로 작동하는 장소로 존재한다. 

   

   산1번지에 위치한 그곳이 문제적인 이유는 이러한 소비주의 시스템과 분류 기제가 지속적으로 실패하고 무력화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사물의 분류 체계도, 공간의 경계 논리도 더 이상 안정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대신 오랜 시간 퇴적되고 방치된 사물들만이 거대한 물질 덩어리로 합쳐져 뒤엉킨 채 굳어간다. 이처럼 쓰레기 더미가 인간의 거주 공간을 잠식하는 장면 속에서 독자는 익숙한 세계가 미세하게 어긋나는 생경함을 경험한다.

   

   한편 최근 한국 사회에서 ‘쓰레기집’은 사회적 고립과 병리의 징후를 드러내는 담론적 대상으로 등장하고 있다. 집안 곳곳에 쓰레기가 쌓인 모습은 단순한 청결의 문제를 넘어 개인적 삶의 실패와 결함이 극적으로 가시화되는 장면으로 제시되며, 이는 미디어 수용자에 의해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사회적 기제를 재생산하는 방식으로 소비된다. 쓰레기집 거주자는 저장 강박, 우울, 번아웃과 같은 병리의 언어를 통해 치료와 교정의 대상으로 호명되거나, 민폐와 무책임이라는 도덕의 언어를 통해 비난과 배제의 대상으로 규정된다. 특히 후자의 언어는 이들을 이웃에게 악취로 인한 피해를 끼치고 건물 전체의 자산 가치를 훼손하는 책임 주체로 지목함으로써, 문제를 자본주의 질서에 대한 침해로 전도한다는 점에서 비판의 소지가 있다.

   

   이처럼 병리와 도덕이라는 상이한 논리를 취하는 듯 보이는 두 시선은, 쓰레기집 현상을 사회적 문법 안에서 설명 가능한 문제로 환원한다는 점에서 서로 맞닿아 있다. 그러나 담론이 이처럼 매끄럽게 구성될수록 그 공간이 지닌 복합적 측면과 고유한 질서는 지워지고 비가시화된다. 본고에서 『자작나무 숲』의 쓰레기집을 읽는 일은 이러한 매끄러운 해석의 틀에 저항하며, 단일한 서사로 환원될 수 없는 공간의 다층적 맥락을 복원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이 글은 『자작나무 숲』의 문제적 장소에 이르기 위해 먼저 2장에서 김인숙의 단편 「빈집」을 경유한다. 이 소설은 반려견의 사체 처리 문제를 둘러싼 중년 부부의 대립을 통해 ‘버린다’라는 행위에 얽힌 젠더화된 정동(affect)을 선명하게 포착한다. 이어지는 3장에서는 『자작나무 숲』이 동명의 단편을 개작한 작품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그 과정에서 이루어진 변화가 쓰레기집을 둘러싼 다른 담론을 어떻게 가능하게 하는지 고찰한다.

   

   2. 폐기물에 대한 죄의식과 심리적 부채감

   

   메리 더글러스는 『순수와 위험』에서 ‘더러움(dirt)’을 사물의 고정된 속성이 아니라, 사회적 질서가 허용하는 범주를 벗어난 일종의 ‘상태’로 정의한다. 그에 따르면 더러움은 사물에 내재된 본질이 아니라 특정 분류 체계의 산물이다. 즉, 어떤 것이 ‘제자리’를 이탈했을 때 발생하는 효과이자, 그것이 놓인 맥락과 배치에 따라 결정되는 가변적인 지위로 이해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쓰레기란 사물 고유의 속성이 아니라, 분류 체계가 규정한 경계 밖으로 밀려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2)

   

   한편 한국 사회에서 폐기물 처리는 공적이고 제도적인 틀 안에서 고도로 체계화된 매뉴얼에 따라 수행된다. 이러한 시스템은 사물이 종량제 봉투에 담겨 배출되는 순간, 그것의 존재론적 지위가 개인의 소유물에서 공적 관리 대상으로 전환되도록 만든다. 행정적 체계에 편입된 ‘쓰레기’는 그 고유한 이력과 기억을 상실한 채 규격화된 처리 공정 속으로 수렴된다. 이로써 사물은 대중의 시야와 의식 바깥으로 매끄럽게 망각되는 것이다. 이렇듯 구조화된 망각이 작동하기 위해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 첫 단계로 가정 내에서 이루어지는 쓰레기 분류가 있다. 그것은 자원과 폐기물 사이의 경계를, 그리고 집의 안과 밖이라는 경계를 끊임없이 재설정하는 작업이다. 문제는 이러한 분류의 결정권과 노동이 누구에게 전가되느냐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주로 일상적 돌봄과 가사 노동의 영역으로 치부되는 이러한 일은 자연스럽게 여성의 몫으로 여겨지곤 한다. 특히 무엇을 폐기할지 판단하는 행위는 여성의 ‘세심함’이나 ‘살림 수완’과 같은 개인적 덕목으로 환원되기도 한다. 이 같이 분류 노동이 사소한 살림의 영역으로 축소되면서, 쓰레기 분류는 일상의 질서를 지탱하는 필수 노동임에도 그 수행 과정과 주체가 철저히 비가시화된다. 단편소설 「빈집」은 이 사적 생활과 공적 시스템의 접점에서 발생하는 ‘폐기물 처리의 정동적 비용’이 누구에게 전가되는가, 라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이사 업체에서 일하는 남편은 어느 날 고객의 이삿짐 틈바구니 사이에 버려진 개 한 마리를 일언반구도 없이 집에 데려온다. 남편의 독단적인 결정 앞에서 아내는 “자신이 치워야 할 개똥이며 개털 따위”(51쪽)를 먼저 떠올려야 했다. 반면 개를 키우겠다는 남편의 결정은 한 생명을 책임지겠다는 결심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것은 오히려 자신을 ‘개를 아끼고 사랑하는 남자’로 연출하고자 했던 자아도취적 욕망에 가까웠다. 그는 산책 도중 개에게 쏟아지는 사람들의 관심에 반색하며, 누군가 개의 품종을 물어올 때를 대비해 “진도에서 왔으니 진돗개입니다”라는 농담 섞인 대답을 미리 준비해 두기도 한다.

   

   즉, 남편이 개를 사랑하는 행위는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현관문 앞에서 종료되는 일시적이고 과시적인 연극에 불과했다. 그 대신 집안 곳곳에 남겨진 개의 배설물과 털을 치우는 고된 노동은 오롯이 아내의 몫으로 남겨진다. 아내에게 개를 거두는 일은 남편과 같은 여유로운 취미가 될 수 없었다. 차라리 그것은 개의 배설물과 비릿한 체취, 흩날리는 털과 같이 ‘불결한’ 비체(abject)들을 일일이 손으로 닦아내고 감각해야 하는 실존적 사건에 가까웠다.

   

   남편이 죽은 개를 쓰레기봉투 속에 밀어넣기 시작했다. 개는 한 번에 들어가지 않았다. 봉투 바깥으로 삐져나온 다리를 남편이 봉투 속으로 쑤셔박았다. 그러는 동안 남편의 몸은 피범벅이 되었고, 현관 바닥에도 피가 뚝뚝 떨어졌다.

   “뭐하는 거야? 당신 미쳤어!”

   그녀가 다시 악을 썼다. 남편은 그녀를 바라보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다리 한쪽이 쓰레기봉투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그녀는 우두둑, 뼈가 부러지는 소리를 들었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다. 남편이 쓰레기봉투를 들고 현관문을 나서는 걸 바라보며 그녀는 더럭 겁이 났다. 무슨 까닭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신발도 신지 않은 채, 이미 엘리베이터를 타버린 남편을 쫓아 미친듯이 계단을 뛰어내려가, 마침내 쓰레기통 앞에 서 있는 남편을 찾아냈다. 맨발인 그녀가 피투성이가 된 늙은 남자의 근육질 가슴을 두 주먹으로 때려가며 악을 썼다. 

   “내가 뭘 어쨌다고! 내가 죽였어? 내가 죽였느냐고!”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장 꺼내서 묻어줘! 묻어주란 말이야!” (「빈집」, 54~55쪽)

   

   남편이 사람들에게 “의기양양하게 농담을 하고 있는 동안”(54쪽), 목줄이 풀린 개는 예기치 못한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자신을 다정한 남자로 연출해주던 ‘전시용 소품’은 순식간에 피투성이 사체라는 적나라한 물질로 변모하고, 남편은 그 비릿한 실재를 안은 채 집으로 돌아온다. 이 참혹한 광경 앞에서 독자는 한 가지 질문을 떠올리게 된다. 왜 남편은 굳이 죽은 개를 집까지 데려왔는가. 어딘가에 곧바로 묻어줄 수도 있었을 것이고, 편의점에서 종량제 봉투를 사는 선택지도 있었을 텐데, 그는 왜 집안으로 다시 들어와야만 했을까. 

   

   남편의 이러한 행동은 쓰레기가 공적 체계로 배출되기 전, 반드시 가정 내에서 분류와 봉인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무의식적 판단을 보여 준다. 동물 사체가 공적 시스템에 편입되려면 가정 내에서 종량제 봉투에 담기는 선행 절차를 반드시 거쳐야 하기에, 남편은 이 '봉인'을 위해 집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에게 방금까지 곁을 걷던 생명체는 죽음과 동시에 신속히 처리되어야 할 폐기물로 그 존재론적 지위가 전도된다.

   

   그렇기에 반려견의 사체 처리를 두고 남편과 아내가 실랑이를 벌이는 장소가 현관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현관은 집의 내부와 외부를 연결하는 통로이자 경계다. 즉, 그곳은 쓰레기를 사적 영역에서 공적 처리 시스템으로 보내는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거쳐 가야 하는 지점이다. 이 경계에서 발생하는 두 사람의 대립은 단순히 개를 어떻게 애도할 것인가를 둘러싼 감정 싸움이 아니다. 이는 무엇을 쓰레기로 분류할 것인가, 그리고 그 쓰레기가 최종적으로 도착해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둘러싼 충돌이다.

   

   집안의 쓰레기를 일상적으로 담당해 온 사람은 아내였다. 그렇기에 그녀는 재활용할 수 있는 자원과 폐기해야 할 오물을 구분 짓는 세밀한 기준과 절차들에 익숙했을 것이다. 또한 집안에 무엇을 남기고 밀어내야 할지 판별하는 가치 판단 역시, 몸에 각인된 감각을 통해 능숙히 수행해 왔을 것이다. 하지만 개의 사체를 마주하자 그녀는 (아마 법적 처벌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한때 가족이었던 존재를 ‘쓰레기’라는 범주 안에 포함시키기를 거부한다. 따라서 아내의 이 같은 거부는 단지 분류 감각의 일시적 고장이나 마비가 아니다. 평생 쓰레기를 판별해 온 그녀의 숙련된 감각에, 아직 온기가 남은 개의 사체는 결코 ‘쓰레기’라는 범주에 편입될 수 없는 이질적인 실재였기 때문이다.

   

   인용문에서 “내가 죽였어? 내가 죽였느냐고!”라는 외침이 아내의 입에서 터져 나온다는 사실은 사뭇 아이러니하다.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간 것도, 대화를 나누느라 주의를 소홀히 한 것도 전부 남편인데, 왜 아내는 마치 자신에게 죽음의 귀책이 있는 것처럼 날 선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이는 사고 자체에 대한 직접적인 가해 의식이라 기보다, 평소 물건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폐기’의 실무를 도맡아온 자로서 오랫동안 축적해 온 부채감이 터져 나온 과잉 반응에 가깝다. 아내에게 물건을 버리는 행위는 그것에 새겨진 고유한 시간과 관계들을 함께 파묻어버리는 일이었기에, 사물의 죽음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주체가 바로 자신이라는 자각은 필연적으로 죄의식을 유발해 왔다. 결국 집안의 물건들을 반복적으로 분류하고 버려오며 그에 얽힌 기억들을 소거해야 했던 ‘버림 노동’의 해묵은 감정들이 개의 죽음을 계기로 폭발한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해 보면, 가정의 사적 영역 속에서 이루어지는 쓰레기 배출은 공적인 망각이 안정적으로 작동하기 위해 선행되어야 하는 첫 번째 관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소설 「빈집」은 쓰레기가 공적 처리의 영역으로 이동하기 전, 집안에서는 이미 그것이 누군가의 그림자 노동을 거쳐 분류되고 ‘살해’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한 부부의 갈등을 통해 극적으로 제시한다. 요컨대 사물을 쓰레기로 분류하는 질서는 행정적 처리 단계 이전의 사적 공간에서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3. 제도적 망각과 분류의 정지: 산1번지의 시간

   

   임태훈은 저서 『쓰레기 기억상실증』(역사공간, 2025)을 통해 우리가 쓰레기를 생산하고 버리는 일상적인 행위 안에 체계적으로 숨겨진 망각의 구조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오늘날 쓰레기 처리는 “소비 대중이 외부화한 기억이 사물과 함께 폐기되는 과정”(37쪽)을 거쳐 작동한다. 이는 배출과 수거, 운반의 과정을 통해 사물에 응축된 기억과 서사를 최종적으로 매립지와 소각장이라는 비가시성의 영역으로 밀어내는 체계다. 우리는 폐기물을 담은 반투명한 봉투를 문밖에 내놓고 손을 한 번 터는 행위만으로, 물질이 간직한 소비의 기억과 쓰레기 처리의 책임을 일상 밖으로 가볍게 밀어낼 수 있다. 사물은 한때 누군가의 삶과 긴밀히 연루되었던 맥락을 잃고 오직 무게와 부피로만 환산되는 익명의 쓰레기로 전락한다. 이렇듯 시스템의 작동을 통해 사물에 깃든 기억과 서사가 구조적으로 망각되는 현상을 저자는 ‘쓰레기 기억상실증’이라 명명한다.

   

   하지만 주지하듯 쓰레기는 이와 같이 매끄러운 공적 체계 속에 저절로 안착하는 것이 아니다. 쓰레기는 규격화된 종량제 봉투에 담겨 ‘적절하게’ 배출될 때, 비로소 매립지나 재활용 센터라는 공식적인 자리를 할당받으며 망각될 권리를 승인받는다. 반면 적절한 폐기 절차를 거치지 못한 물질들은 일상의 바깥과 제도의 내부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부패하고 뒤섞인다. 이렇게 퇴적된 사물들은 어쩌면 기억 저편으로 사라질 정당한 수순을 밟지 못한 채, 망각될 기회조차 유예당하고 마는 존재들이다. 『자작나무 숲』의 산1번지 쓰레기집은 바로 이 같은 망각의 인프라가 작동하지 않는 사각지대이자 사물의 ‘잊혀질 권리’가 박탈된 공간으로 그려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 집, 산1번지에 이르면 쓰레기와 쓰레기 아닌 것의 차이가 무의미해졌다. 별별 날것과 벌레들이 달려들었고, 옷에는 냄새가 들러붙었다. 쥐가 도망도 가지 않고 빨빨빨빨 다가온 적도 있었다.”(『자작나무 숲』, 11쪽)

   

   쓰레기는 흔히 특정한 장소 혹은 주체와 맞닿아 있다는 고정관념을 수반한다. ‘쓰레기 같은 인생’이라는 속된 은유가 쓰레기를 하층 계급의 실존과 결부시킨다면, 저개발 지역에 집중된 처리 시설은 폐기물을 공간적 변두리와 연결한다. 가정 내 폐기물 분류 노동이 특정 젠더의 몫으로 전가되는 구조 또한 쓰레기와 여성의 인접성을 강화하는 기제다. 그러나 이 모든 인접성은 자연 발생적인 현상이 아니라 사회적 필요에 의해 구성된 배치라고 할 수 있다. 무엇을 쓰레기의 곁에 머물게 할지 결정하는 권한이 곧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1번지의 집은 쓰레기와 소외된 공간 사이의 경계를 교묘히 비틀어 상식적 담론에 균열을 낸다. 쓰레기집이 위치한 곡교동은 오랫동안 개발제한구역에 묶여 소외된 변두리 지역이었으나, 현재는 재개발 예정지로 거론되며 투기의 욕망과 발전에 대한 기대가 들끓는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다. 그러나 그곳에는 세속적 자본의 시간만이 흐르는 것은 아니다. 산1번지의 저택에는 한때 큰돈을 만지며 위세를 떨쳤던 한 가문의 기세가 서서히 소멸하는 쇠락의 시간이 함께 흐른다.

   

   한편 저택 내부에는 산더미처럼 쌓여 변질되어 가는 물건들의 육중한 무게가 매끄럽게 나아가야 할 개발의 속도를 지연시킨다. 이처럼 물질이 퇴적되고 변형되는 시간은 개발주의가 밀어붙이는 직선적 속도, 그리고 한 가문의 몰락이라는 역사적 시간과 교차한다. 마치 물질이 겹겹이 포개지듯 서로 다른 시간의 층위 또한 한 공간에 포개지며, 각기 다른 리듬이 얽히고 충돌하는 장이 형성된다.

   

   “빨간 줄로 죽죽 그은 후 쓰레기가 되어버렸던 문장. 그건 살인마인 아빠에 대한 문장이 아니라 그토록 생생하다고 호평받았던 할머니의 쓰레기에 관한 문장들이었다. 그 문장을 지금은 외우지 못해 대화로만 기억한다.

   아무것도 버릴 수가 없어요.

   왜죠?

   모든 것에 다 기억이 있어서요.

   어떤 기억입니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단편 「자작나무 숲」, 282~283쪽, 강조는 인용자)

   

   “모유리와 만나면서 정보하는 저장강박증에 대한 이런저런 책들을 읽었다. (…) 책의 저자는 증상자들을 인터뷰하며 반복해서 물었다.

   왜죠? 왜 못 버리는 거죠?

   증상자들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버릴 수가 없어서요…

   왜 버릴 수가 없어요?

   기억해야 해서요.

   무슨 기억인가요?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장편 『자작나무 숲』, 124~125쪽, 강조는 인용자)

   

   한편, 이 소설이 동명의 단편을 개작해 장편으로 확장되었다는 사실은 작품을 입체적으로 조명할 수 있는 흥미로운 지점을 제공한다. 단편에서는 쓰레기가 깨끗이 치워진 뒤 “텅텅 빈 집”을 “거대한 상실감과 비통함으로 바라”보는(267쪽) 할머니의 모습과, ‘모든 것에 다 기억이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버릴 수 없다’고 말하는 발화가 함께 제시된다. 이러한 설정은 할머니의 수집을 노년의 저장 강박이라는 병리적 틀 안에서 해석하도록 유도할 여지를 남긴다.

   

   그러나 장편에서 쓰레기집은 단순한 심리적 병증의 결과를 넘어, 은폐된 시신이라는 실재적 진실을 지연시키는 망각의 퇴적지로 재구성된다. 2부에서는 겹겹의 쓰레기 아래 매몰된 과거가 어떻게 다른 감각으로 변모해 주체의 일상을 잠식하고 서사 전면으로 귀환하는지 면밀히 살펴보고자 한다.



1) 비평 3부작의 서두를 여는 이번 글에서는 김인숙의 장편 『자작나무 숲』(앙스트, 2025), 단편 「자작나무 숲」(『자음과모음』 2022년 겨울호), 단편 「빈집」(『물속의 입』, 문학동네, 2024)을 분석 대상으로 삼는다. 이후 인용에는 제목과 면수만을 표기한다.

2) 메리 더글러스, 유제분·이훈상 역, 『순수와 위험』, 현대미학사, 1997, 68-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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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비평

〈공정과 인정, 그리고 감정〉―이미상 소설을 중심으로

[현장 비평] 《문장웹진》은 다양한 시선을 통해 폭넓은 담론을 펼칠 수 있는 ‘비평의 장’을 마련하고자 2020년 진행되었던 〈본격! 비평〉 코너를 정비하여, 2021년 4월호부터 〈현장 비평〉을 선보인다.2021년 〈현장 비평〉은 신진 문학평론가 9명이 각자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자유롭게 주제를 정해 매월 1편씩 발표된다. 〈공정과 인정, 그리고 감정〉― 이미상 소설을 중심으로 박서양 1. 능력주의와 감정의 종속 2021년 현재 한국 사회에서 ‘공정’과 ‘능력주의’ 담론은 한정된 자원의 바람직한 분배를 둘러싼 논쟁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를 점하고 있다. 조국 전 법무부장관의 자녀 입시 비리 의혹과 더불어 인천국제공항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둘러싼 논란, 공공의대의 설립 반대 사태 등 공정성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은 여전히 그 합의점을 찾기 어려워 보인다. 입시, 취업, 인사 평가, 임금 및 근로조건의 결정 등 생애 주기에서 일어나는 모든 과정이 공정이라는 잣대로 판단되며, 불평등의 심화로 인해 분배의 몫 자체가 줄어든 상황에서 공정성에 대한 높은 민감도는 때로 절차와 형식의 공정만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흐르거나, 차이를 둘러싼 적대심이나 박탈감 등의 태도로 표출된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청년 세대는 공정의 가치를 드높이며 능력주의를 철저히 체화하면서도 대안적 사회질서를 상상하지 못하는 수동적인 집단으로 재현된다. 잘 알려져 있듯 능력주의(Meritocracy)는 영국의 철학자 마이클 영이 이론화한 것으로, 개인의 능력에 따라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배분하는 보상 시스템을 의미한다. 이는 사회의 분배 질서가 어떠한 개인의 ‘특정’한 자질을 ‘특별’한 능력으로 규정하는 방식을 통해 구조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사회가 특정한 자질에 인정을 부여하는 기준에 따라 어떤 능력은 보다 가치 있는 것으로, 어떤 능력은 상대적으로 무가치한 것으로 취급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능력을 규정하는 잣대는 선험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이 언제나 사회적 필요에 의해 구성되고 선택되는 것임을 뜻한다. 그런데 지금 능력주의를 둘러싼 많은 이야기에서 이와 같은 능력의 발생적 기원은 크게 언급되지 않는 듯하다. 그리고 공정한 경쟁의 질서만을 따지는 맹목적 사고는 사회적으로 이미 존재하는 지위와 서열의 순서가 능력에 따른 가치의 절대 지표라는 믿음을 재생산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사회의 보상 기준 자체가 능력 그 자체를 판단하고 가늠하는 기준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능력은 누가, 어떠한 기준으로 규정되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져보는 일은 지금의 상황에서 유의미하지 않을까. 이미상1)의 소설 속 인물들 이러한 능력의 규정성 자체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이와 같은 맥락 속에 내재된 모종의 불평등한 구조를 가시화시키고 있다. 1) 본고에서 다룰 이미상의 작품은 다음과 같다. 「하긴」(『2019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1

  • 박서양
  • 2021-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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