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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이에시스, 오토포이에시스, 심포이에시스

  • 작성일 2026-06-01

이은지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6년 6월부터 2026년 8월까지 <포이에시스, 오토포이에시스, 심포이에시스>로 3회 연재됩니다.


  포이에시스, 오토포이에시스, 심포이에시스 (1)



이은지


1. 프락시스로서의 포이에시스


  대중에게 다소 신화적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기는 하지만, 작가의 은둔과 고립은 창작을 위해 불가피한 존재 방식으로 여겨지곤 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출간된 『호밀밭의 파수꾼』의 성공으로 일약 스타가 되었지만 세간의 관심으로부터 절연하고 뉴햄프셔의 시골에서 평생 은둔하다가 사망한 J. D. 샐린저는 은둔 기간 동안 단 한 편의 작품도 공개하지 않았다. 불교의 선(禪) 사상에 심취했던 그는 전쟁에 참전했을 때부터 “글쓰기와 명상이 동일하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고, “고립된 상황과 집중력을 요구”하는 “명상으로서의 글쓰기”를 위해 대중과 유명세를 철저히 멀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필립 로스 또한 “매해 반 이상을 뉴욕에서 백 마일 떨어진, 숲이 우거진 농촌 지역”2)에서 보내며 철저히 고독 속에서 작업했다. 그에게 “문학적 소명에 따른 고립―단지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 방에 혼자 앉아 있는다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의미를 포함하는 고립―은 밖에 나가 야단법석 속에서 감각을 축적하거나 다국적 기업을 다니는 것만큼이나 인생과 큰 관련이 있”3)는 것이었다.

  일본의 대표적인 은둔 작가 마루야마 겐지 또한 23세의 나이에 화려하게 등단한 직후 도시와 문단을 등지고 시골에서 칩거하며 집필에만 전념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고독을 이길 힘이 없다면 문학을 목표로 할 자격이 없다”며 “세상에 대해, 혹은 모든 집단과 조직에 대해 홀로 버틸 대로 버티며 거기에서 튕겨 나오는 스파크를 글로 환원해야 한다”4)고 일갈한다. 가히 고독 예찬이라고 할 만한 그의 ‘창작론’을 들여다보면 몸과 마음의 균형에 집중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몸 전체를 예민한 레이더로 만들기 위하여 의식적으로 몸을 단련하는 나날을 거듭하다 보면”5) 어느 순간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원고지 앞에 앉게 된다는 진술이나, 작품을 완성하고 나면 “소설에서 확실하게 멀어지기 위한 방법으로 몸을 격렬하게 움직인다”6)는 증언은,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자아를 안팎으로 일치시키는 데서 문장을 산출해내는 창작의 원리로 읽힌다.

  극단적인 은둔과 고립을 자처하지 않더라도 창작을 위해 일정량의 시간과 에너지를 집중해서 투여하는 모습은 여러 작가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하루 몇 시간, 하루 몇 장의 꾸준한 집필은 자기 안으로의 철저한 고립을 전제하며 이는 사회적 동물인 인간으로서의 실존을 스스로 변형하는 ‘자기 수행’과 같은 모습을 띨 수밖에 없어 보인다. 단순히 글을 ‘잘’ 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잘’ 다스리는 데서 유래하는 창작의 원리는 포이에시스(poiesis)의 오랜 섭리와 같은 것으로 여겨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6권에서 포이에시스, 즉 제작 행위와 프락시스(praxis), 즉 실천 행위의 관계를 규명한 바 있다. 두 개념은 그 행위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에 따라 구별되는바, 포이에시스는 제작의 결과물이 그 목적으로서 제작 “그 자체와[는] 다른 목적을 갖”는데 반해 프락시스는 “훌륭하게 행동하는 것”7)으로서 실천의 결과물보다는 실천을 잘 행하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다.

  이처럼 포이에시스와 프락시스는 무엇에 가치의 중점을 두느냐에 따라서는 서로 구별되지만, 두 개념이 관계하는 대상의 속성에 있어서는 동류를 이룬다. 이 책의 3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들이 숙고하는 대상과 그렇지 않은 대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주의 질서라든가 사각형의 대각선이 대각선의 변으로 약분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영원불변하는 사실들에 대해서는 누구도 숙고하지 않는다. (…) [반면] 우리는 우리의 힘이 미치는 것, 다시 말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숙고한다.”8) 인용문에서 전자는 퓌시스(physis)로서 그 생성과 작동의 원리가 불변하는 자연을 가리키며, 이처럼 ‘다르게 있을 수 없는 것’에 대해 우리는 숙고하기보다 규칙을 발견하고 정립하는 일을 한다. 반면 후자는 포이에시스, 즉 인간의 의도와 목적에 따라 생성과 변형을 거듭하는 대상이자 ‘다르게 있을 수 있는 것’으로서 “모종의 방법으로 일어나지만 결과를 예상할 수 없고, 정해지지 않은 요소를 내포”9)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전자를 다루는 앎을 ‘이론지(知)’로, 후자를 다루는 앎을 ‘실천지(知)’로 구분한다. 행위의 목적에 따라 구분되었던 제작과 실천이 이때는 모두 실천지로 분류된다. “실천지가 관계하는 대상은 다르게 있을 수 있는 것”이며 “제작지가 관계하는 대상 역시 다르게 있을 수 있는 것”이므로 “제작지와 실천지는 동일한 유개념에 종속하는 종개념들”10)로 보는 것이다. 제작과 실천은 행위의 목적은 다를지라도 다루는 대상이 가변적이라는 점에서 불변의 대상을 다루는 이론지가 아닌 실천지에 속한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제작과 실천의 경계 또한 흐릿해진다. 제작 행위의 목적이 제작의 결과물에 있을지라도 이 목적에 이르기 위해서는 제작을 ‘잘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류와 달리 제작은 어느 정도 실천을 이미 내포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는 제작과 실천을 견인하는 각 수단의 성질을 통해서도 명확하게 드러난다. 잘 알려져 있듯이 제작을 견인하는 것은 기술(techne)로서, “모든 기술은 생성에 관련되며, 기술의 관심사는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그 제1원리가 제작자에게 있고 제작물에 있지 않은 무엇인가가 어떻게 하면 존재하게 될는지 연구하는 것”11)이다. 즉 기술은 필연적인 자연이 아닌 가변적인 대상과 관계하며, 제작자인 인간이 기술을 어떻게 투여하느냐에 따라 대상의 존재 유무뿐 아니라 대상이 ‘어떻게’ 존재할지 여부 또한 달라진다. 그런가 하면 실천을 견인하는 것은 실천적 지혜(phronesis)로서, “특정 관점에서 자기에게 좋고 유익한 것이 아니라, 훌륭한 삶 일반에 도움이 되는 것에 대해 올바르게 숙고”12)하는 것이자 “인간의 좋음과 관련하여 행동할 수 있는 이성적이고 참된 마음가짐”13)을 가리킨다.

  실천적 지혜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가 내린 정의는 기술을 “참된 이성이 수반되는 제작할 수 있는 마음가짐”으로 정의한 것과 아주 다르지는 않은 것 같다. 실천적 지혜와 기술 모두 이성과 참됨을 수반해야 한다는 점에서, 나아가 다른 무엇도 아닌 ‘마음가짐’으로 정의된다는 점에서 그 둘이 견인하는 행위, 즉 제작과 실천의 구분이 모호한 만큼이나 둘의 구분 또한 모호하게 느껴진다. 우리는 기술에 요구되는 마음가짐을 충족했을 때 실천적 지혜에 요구되는 마음가짐 또한 수월하게 달성할 수 있음을, 혹은 반대로 실천적 지혜에 요구되는 마음가짐을 단련하다 보면 기술에 요구되는 마음가짐 또한 더불어 갖추게 될 수도 있음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예술, 특히 문학의 제작에 있어서 작지 않은 확률로 입증되어 온 사실이기도 하다. 문학의 제작이란 수사나 작법 등과 같은 기술을 바탕으로 어느 정도의 수준에 닿을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을 추구하는 것은 그러한 기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작품을 제작하는 기술의 연마만큼이나 제작자의 삶을 다스리는 것 또한 높은 확률로 요구된다는 것을, 앞서 언급한 작가들이 자신의 삶을 대하는 자세로부터 확인한 바 있다.



2. 프락시스이자 퓌시스로서의 포이에시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아리스토텔레스가 학문의 체계를 정립하는 과정에서 포이에시스와 프락시스, 테크네와 프로네시스를 분류한 것은 다소 임의적이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작’한 체계 또한 퓌시스, 즉 다르게 있을 수 없는 불변하는 자연에 속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자연학이 아닌 인문학, 즉 오늘날 분과학문적 의미에서의 ‘철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까닭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이성의 사용에 따른 지식의 분류 및 전문화가 지배하는 근대적 사고의 단초를 제공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그런 의미에서 “고대의 정점이 아니라 고대의 예외”14)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고대 철학 전반에서 제작과 실천은 분리되어 있지 않았으며, 이는 푸코가 자신의 후기 연구에서 ‘주체화’의 중요한 단초로 삼은 것이기도 하다.

  1982년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의 강의에서 푸코는 근대 이래로 ‘자기 인식’과 ‘자기 배려’라는 두 축이 분리되면서 자기 배려 없는 자기 인식만을 통한 진리의 탐구가 서구 철학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된 과정을 설명한다. 자기 인식이란 ‘너 자신을 알라’는 델포이의 격언과 같이 그저 자기 자신에게 현행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을 파악하는 행위에 불과하다. 자기 인식에는 자신과 자신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 어떻게 관계를 맺어 왔는지에 대한 통찰도, 이를 바탕으로 그것을 어떻게 변화시킬지에 대한 고려도 부재하며, 이는 숙련공의 전문화된 제작 기술에 상응한다. 그런가 하면 자기 배려란 자신의 내면으로 시선을 돌리고 몰두한 끝에 자신을 조건 짓는 관계들을 파악하고, 그 관계들이 불변하는 자연과 같은 상태에 있지 않도록 자신을 변형하는 ‘실천’에까지 도달하는 행위이다. 즉 자기 배려는 “우리 자신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15)려는 노력으로서 실천적 지혜에 상응한다.

  자기 배려는 자신에게 되돌아가기라는 실천적 목적하에 자기라는 제작자가 자기라는 제작물에 몰두하는, ‘자기 제작’의 기술을 연마하는 것이기도 하다. 진리에 이르는 길은 자기 외부의 앎에 통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작품을 제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를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어내는 삶”, 즉 “‘자기 제작’으로 향하는 삶”16)을 추구하는 데 있으며 이때 “연습·훈련·실천과 같은 askêsis(자기 수련)가 핵심적인 요소”17)로 작용한다. 신체를 단련하거나 글을 쓰는 것과 같은 자기 수련의 반복은 일면 기술의 정교화에 불과해 보이지만 종국적으로는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모든 것’과의 관계를 통해 형성되어 온 주체를 자신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재편하고, 이 변화된 주체가 자기 바깥의 모든 것을 역으로 변화시키는 실천에까지 도달하게 한다. 이때의 주체는 사회를 작동시키는 체제에 종속되어 있기에 “[사회적] 진리 체제와의 모든 관계는 동시에 나와의 관계”이며, “내가 진리 체제를 의심한다면, 나는 존재와 나 자신의 존재론적인 위상을 배치하는 체제를 의심하는 것”18)이다. 자기 배려 하에서의 자기 인식이란 주체에 대해 의심하고 사유하는 것이 곧 주체가 종속된 체제까지 의심하고 사유하는 것과 같게 되며, 따라서 자기 인식을 통한 자기 배려는 주체의 변화와 더불어 주체가 종속된 체제에 대한 변화로 이어질 수 있다.

  이처럼 푸코가 제작과 실천, 기술과 실천적 지혜의 아리스토텔레스적 분리를 재통합하는 과정에서 복원한 고대 철학에서의 자기 제작의 원리는 제작의 목적과 수단을 통합할 뿐 아니라 제작자와 제작물 또한 통합한다. 자기 제작에서는 제작의 목적인 결과물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제작 행위 또한 결과 못지않게 중요할 뿐만 아니라, 결과의 ‘좋음’을 결정짓는 하나의 요소로 작동한다. 행위와 결과의 통합으로서의 제작에 몰두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제작자는 자기 자신의 제작 또한 실천하게 되며, 이러한 자기 제작, 즉 자기 변형은 다시금 종전의 나(제작물)를 제작해왔던 세계(제작자)의 작동 방식에까지 소급하여 영향을 미치게 된다. 제작 행위는 결과적으로 실천 행위와 무관하지 않게 되며, 제작에 이르기 위한 기술의 연마는 실천을 견인하는 실천적 지혜의 연마와 다르지 않게 된다.

  푸코의 후기 작업이 포이에시스와 프락시스의 분류를 허무는 것이었다면, 하이데거의 후기 철학은 포이에시스와 퓌시스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1949년에 발표한 강연 「기술에 대한 물음」에서19) 하이데거는 플라톤의 『향연』에 기록된 구절에 천착하여 포이에시스를 설명한다. 『향연』에서 언급하는 포이에시스란 “어떤 것을 그 자리에 없던 상태에서 그 자리에 있음으로 넘어가게 만드는 것을 야기시키는 모든 것”으로서 “밖으로 끌어내어 앞에 내어놓음”20)을 의미한다. 이러한 정의에 따르면 포이에시스는 “수공업적인 제작”이나 “예술적·시적 표현과 묘사”에 한정되지 않으며, “스스로 안에서부터 솟아오”르는 퓌시스 또한 아우른다. “그뿐 아니라 퓌시스는 가장 높은 의미의 포이에시스다.”21) 그보다 앞선 1946년 릴케 사후 20주년 기념 강연에서도 하이데거는 퓌시스가 “우리가 생명(Leben)이라고 번역하는 조에(ζωή)와도 같은 것”이며 “[고대 그리스에서] 생각되던 생명의 본질은 생물학적으로 표상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퓌시스로서, 즉 피어오르는 것으로서 표상되었다”22)고 설명한다.

  꽃이 자기 안에 내재한 생장의 에너지에 힘입어 스스로 만발하듯이, 퓌시스는 존재가 자신의 참된 모습을 스스로 드러내는 가장 순수한 방식이다. 그러한 퓌시스와 다르지 않은 포이에시스 또한 제작을 위해 주어진 재료 본연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이끌어낼 때 가장 뛰어난 결과를 낳는다. 포이에시스는 존재의 심연에 은폐되어 있는, 존재가 달성할 수 있는 최고의 이상을 ‘탈은폐’함으로써 진리가 현상하는 것을 돕는다. 즉 포이에시스는 퓌시스의 조력자이자 매개이다. 이처럼 포이에시스와 퓌시스가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 까닭은 앞서 언급했듯이 포이에시스를 견인하는 기술이 제작의 원리로서 언제나 충분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이 제작 기법을 습득하여 발휘하는 것만으로 반드시 좋은 결과물이 나오지는 않으며 “인간의 노력이나 조작 능력을 통해서는 채워질 수 없는 어떤 잉여 부분이 존재”하는 바, “이 중심적 잉여분을 채우기 위해, 사람들은 인간 아닌 신 또는 자연에게 도움을 청했던 것이다.”23)

  한편 하이데거는 기술에 대한 우리의 통상적인 이해와 기술의 실제 ‘본질’은 다르다고 말한다. 특정한 목적에 부합하는 수단을 사용하는 행동으로 기술을 가리키는 것은 “도구적·인간학적 규정”24)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에 덧붙여 하이데거는 테크네가 “플라톤 시대에 이르기까지 에피스테메[인식]라는 말과 같이 사용되어 왔다”고 지적한다. 어떤 것에 통달해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인식’은 “해명하며 열어젖히는 힘”25)을 지니고 있으며, 탈은폐의 한 방식이다. 또 다른 언급은 고대 그리스에서는 테크네가 “진리를 빛나는 것의 광채 안으로 끄집어내어 앞에 내어놓는 것”26)을 의미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그 어원에 근거했을 때 테크네, 즉 기술의 본질 또한 존재의 참된 모습을 밖으로 끌어내어 진리를 탈은폐하는 데 있다. 도구적 수단에 머무르지 않는 기술에 대한 하이데거의 규정은 푸코가 자기 배려와 자기 인식을 통합하는 중요한 요소로 언급한 자기 수련을 떠오르게 한다.

  그러나 기술이 존재의 본질과 관계하는 방법론적 지혜이기를 그치고 결과물의 효율적인 생산에 몰두하는 활동으로 전락하면서, 이 변질된 기술이 견인하는 포이에시스 또한 프락시스이거나 퓌시스이기를 그치게 된다. 기술에 의한 생산물로서의 ‘대상’으로 변질된 존재는 인간 앞에 한낱 객체로 세워지고(vor-stellen, 표상) 존재의 생래적 본질과 무관하게 오직 인간을 향해서만 세워진다(her-stellen, 제작)27). 현대 사회의 기술은 존재를 오직 인간 앞에만 놓여 있고 인간만을 향하도록 하는 ‘닦달(Ge-stell, 몰아세움)’의 거대한 체계로 작동하며 이에 귀속된 존재를 부품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 체계 속에서 인간 또한 존재를 부품으로 몰아세우려는 의지를 관철하는 데만 몰두함으로써, 대상과 관계 맺으며 진리를 탈은폐하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의 본질과도 조우하기에 이르는 실천으로서의 제작에 닿을 가능성을 상실하게 된다.



3. 테크네가 주도하는 포이에시스


  하이데거가 기술 문명을 비판하는 두 강연문이 발표된 시기가 2차 세계대전 직후라는 사실은 중요하다. 우리의 일상에 자리 잡은 수많은 기술이 전쟁 시기에 개발되었듯이 전쟁은 기술 개발을 가속시키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전쟁 중의 기술 개발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즉 생존하기 위한 인간의 실존적 필요와 닿아 있으며 평상시의 인간을 충족하는 것 이상의 기술을 빠르고 집중적으로 만들어내도록 한다. 하이데거의 수사를 빌리면 이러한 기술 발전이란 대상 본연의 진리가 드러나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의 요구에 맞는 결과물을 대상으로부터 끄집어내도록 ‘도발적’으로 재촉하는 것이다.

  한편 하이데거가 강조하는 제작 행위란 우리가 통상적으로 이해하는 기술 발전 이전 시대와 맞닿아 있기는 하다. 재료 본연의 모습을 탈은폐하는 것에 가장 부합하는 제작 행위가 고대 헬레니즘 시대의 조각 예술이듯이 말이다. 이는 그가 인간의 ‘손’이야말로 진리를 추구하는 매개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손Hand을 통해 “행동한다handeln.” (…) 손을 통해 기도와 살인을, 인사와 감사를, 맹세와 손짓을 할 수 있으며, 손의 “작업”인 “수작업”과 도구도 생겨난다.”28) 이처럼 인간의 모든 행동의 매개인 손, 인간의 사유 및 인식의 원천인 문자를 ‘쓰는’ 행위를 주도하는 손의 역할이 타자기의 등장으로 위축되면서 인간 존재의 본질 또한 급변했다고 그는 주장한다. 타자기는 “쓰기와 문자의 본질을 감춘다. 그것은 인간에게서 손의 본질적 지위를 빼앗는다. 인간은 이 빼앗김을 적절히 경험하지도 못하고, 따라서 인간 본질에 대한 존재의 관계가 전환되었다는 것을 인식하지도 못한다.”29)

  이 강연에서 하이데거는 손을 예찬하면서 “인간이 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손에 인간의 본질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며, 이는 “손의 본질적 영역인 언어가 인간 본질의 토대이기 때문”30)이라고 역설한다. 인간이 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표현에서 손도, 언어도 일개 도구가 아니라는 확고함이 엿보인다. 그러나 인용한 문장은 손과 언어만이 인간 본질의 유일한 매개가 아니게 된 오늘날의 우리에게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그는 자신의 철학이 갖는 시대적 연관을, 인간이라는 존재의 역사적 가변성을 그다지 고려하지 않는 것 같다. 위의 문장은 문자도 예술도 손을 통해서만 구사하던, 기계 문명 이전의 인간에 대해서는 유효하다. 반면 위의 문장은 문자는 발명되지 않았으나 말을 하고 공동체를 형성하였던, 문자 문명 이전의 인간에 대해서는 유효하지 않다. 손으로부터 확장된 각종 기술을 통해 사유와 예술을 이어가는 오늘날의 인간에 대해서도 유효하지 않다.

  이와 같은 오류를 위의 문장에 반영했을 때 그로부터 우리가 구제해낼 수 있는 메시지는, 어떤 도구이든 인간의 존재에 유효한 변형을 가하는 것이라면 인간 본질의 중요한 일부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도구는 언제나 인간 존재의 격변을 동반함으로써 인간의 본질을 형성해왔다. 손을 도구적으로 쓰기 전후의 인간, 언어라는 도구를 매개로 사고하기 전후의 인간이 전혀 다른 종과 같이 여겨지는 이유 또한 그 때문일 것이다. 기술 격변에 직면하며 하이데거가 그 이전의 인간을 옹호하였다면, 키틀러는 격변하는 기술이 언제나 인간의 본질을 재규정한다는 기술결정론을 옹호하였다. 키틀러는 자신의 책에서 하이데거의 위의 강연 상당 부분을 비판적으로 인용하면서 ‘타자기의 철학자’로 잘 알려진 니체의 다음과 같은 말을 곧장 덧붙인다. “우리의 필기도구가 우리의 사유와 더불어 작업한다.”31) 시력이 극도로 나빠지면서 육필로 글을 쓰는 것이 불가능했던 니체에게 타자기는 단순한 도구를 넘어 “나와 동등한 물건”이었으며 “순수하고 맹목적인 자동사적 쓰기 행위”32)를 가능하게 했다고 그는 설명한다.

  키틀러는 니체를 “최초로 기계화된 철학자”로 지칭하며, 니체에 이르러 글쓰기란 “손글씨를 통해 자신의 목소리, 영혼, 개성을 세계를 향해 내보내는 인간의 자연적 확장”이기를 그치게 되었음을, 나아가 인간이란 “글을 쓰는 자에서 글이 쓰여지는 표면” 즉 “비인간적 매체기술자”33)가 되었음을 주장한다. 여기서 니체를 기계화된 철학자로 변모시킨 타자기라는 기계가 단순히 글을 쓰는 행위의 모사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손글씨가 “문자 매체의 물질적 차원에서 (…) 유일하게 남아 있는 비표준화 영역”이었다면 타자기는 “문자 매체와 관련된 마지막 기술적 과정과 영역까지 표준화”34)했기 때문이다. 일관된 크기와 서체로 기입되는 문자와 그 주변을 이루는 균일하게 규격화된 여백은 인간 영혼의 표현과 같은 것으로 여겨지던 손글씨의 분방함을 대체하였다.

  타자기의 발명 이전에 인쇄술의 발명 또한 책을 균질하게 생산하면서 “거리 두기와 비관여성” 즉 “반응 없이 행동하는 힘”을 인간에게 부여하였다.35) 인쇄술의 규격에 맞춰 제작된 책을 읽고 타자기를 쓰는 누구든지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작성하는 동시에 인쇄술과 타자기에 의해 표준화된 기술 또한 구현한다는 점에서, 기술을 사용하는 인간은 더 이상 제작의 유일한 주체가 아니게 된다. 인간을 “글이 쓰여지는 표면”으로 강등하는 키틀러의 과격한 주장을 따라 인간을 주체의 자리에서 실각시키기보다는, 인간이 기술과 더불어 제작의 공동 주체를 이루게 되었다고 보는 편이 좀 더 온당하게 여겨진다. 인간은 과소하든 과대하든 언제나 기술을 사용하는 한에서 인간으로 존재해왔으니 말이다. 인간이 기술과 무관하게 ‘전적으로’ 인간이기만 한 적은 없었다.

  여기서 제작을 견인하는 기술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를 다시 들여다보자. 그는 기술이란 “참된 이성이 수반되는 제작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정의는 어디까지나 제작자를 전통적인 의미의 인간으로 한정했을 때 유효한 것으로 보인다. 기술 혹은 도구를 자기 본질의 중요한 한 요소로 삼으며 변화해온 인간으로 제작자에 대한 정의를 확장했을 때, 좋은 제작의 전제로 놓였던 ‘참된 이성’은 단순히 진리를 추구하는 인간의 사유에 의해서뿐 아니라 기계에 의해 표준화되고 규격화된 기술 환경에 의해서도 충족되는 방향으로 그 의미가 변화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변화한 이성을 바탕으로 무언가를 제작하려는 ‘마음가짐’ 또한 제작 대상의 본질을 자연스럽게 이끌어내려는 인간의 태도일 뿐 아니라, 규격화된 기술 환경을 바탕으로 일정한 결과물을 산출하는 기계의 작동 방식이기도 할 것이다. 기술 문명 이전의 인간에게 제작이란 좋은 ‘삶’의 실천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자 그러한 실천을 행할 수 있는 실천적 지혜 또한 동반하는 것이었다면, 기술 문명 이후의 인간은 좋은 제작을 위해 지혜를 발휘하여 실천을 행할 필요를 기계화된 기술의 일관되고 자동화된 작동 방식으로 상당 부분 대체하게 된다.



1) 케니스 슬라웬스키, 『샐린저 평전』, 김현우 옮김, 민음사, 274~275쪽.

2) 필립 로스, 『왜 쓰는가?』, 정영목 옮김, 문학동네, 2023, 196쪽.

3) 같은 책, 231쪽.

4) 마루야마 겐지, 『소설가의 각오』, 김난주 옮김, 문학동네, 207쪽.

5) 같은 책, 56쪽.

6) 53쪽.

7)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천병희 옮김, 숲, 2013, 228쪽.

8) 같은 책, 101쪽.

9) 같은 책, 102쪽.

10) 전재원, 「아리스토텔레스와 실천행위」, 『대한철학회』, 철학연구, 2010, 373~374쪽.

11) 아리스토텔레스, 위의 책, 226쪽.

12) 같은 책, 227쪽.

13) 같은 책, 229쪽.

14) 푸코, 『주체의 해석학』, 심세광 옮김, 동문선, 2001, 61쪽.

15) 같은 책, 238쪽.

16) 안은희, 「에토스 제작적 앎과 자기 제작의 문제」, 『인문학연구』, 131호, 18쪽.

17) 푸코, 위의 책, 244쪽.

18) 주디스 버틀러, 『윤리적 폭력 비판』, 양효실 옮김, 인간사랑, 2013, 43쪽.

19) 1949년의 이 강연은 1954년에 출간된 『Vorträge und Aufsätze(강연과 논문)』에 수록되었고, 1955년에 브레멘에서 다시 발표되었다.

20) 마르틴 하이데거, 「기술에 대한 물음」, 『강연과 논문』, 이기상, 신상희, 박찬국 옮김, 이학사, 2008, 16쪽.

21) 같은 책, 17쪽.

22) 마르틴 하이데거, 「무엇을 위한 시인인가?」, 『숲길』, 신상희 옮김, 나남, 2020, 376쪽.

23) 김동규, 『하이데거의 사이-예술론 : 예술과 철학 사이』, 그린비, 2009, 204쪽.

24) 마르틴 하이데거, 「기술에 대한 물음」, 11쪽.

25) 같은 책, 19쪽.

26) 같은 책, 46쪽.

27) 하이데거, 「무엇을 위한 시인인가?」, 388쪽 참조.

28) 마르틴 하이데거, 「손과 타자기에 대하여, 1942~43」, 키틀러, 『축음기, 영화, 타자기』, 김남시·유현주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9, 357쪽.

29) 같은 책, 359쪽.

30) 같은 책, 357쪽.

31) 같은 책, 360쪽.

32) 같은 책, 367~368쪽.

33) 같은 책, 374쪽.

34) 최소영, 『키틀러의 기계』, 북콤마, 2025, 184쪽.

35) 허버트 마셜 매클루언, 『미디어의 이해』, 김성기·이한우 옮김, 민음사, 2002, 2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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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너’가 사라진 불편한 기이함

‘나’와 ‘너’가 사라진 불편한 기이함 ― 이유리론의 방향을 모색하다 최선재 1. 두 개의 기이함 처음 이유리 작가의 소설을 읽은 건 등단작인 「빨간 열매」(『브로콜리 펀치』, 문학과지성사)가 대학 전공 수업에서 발췌되었던 때다. 아버지의 화장한 뼛가루를 화분의 흙과 섞자 아버지가 나무의 몸으로 부활하고, 이웃 남자의 어머니-나무와 아버지가 결합하여 “빨갛고 작은 열매”(29쪽)를 낳는 이야기는 당시엔 어디서부터 접근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수수께끼로 느껴졌다. 하지만 내가 정말 당황스럽고 기이하게 여겼던 것은, 나무가 된 아버지를 대하는 ‘나’의 태도였다. “물.”이라고 아버지가 말을 걸자 ‘나’는 “깜짝 놀라 잠시 멍해졌다가 뭐야 이러면 살아 있을 때랑 똑같잖아, 하고 투덜거리”(15쪽)기만 할 뿐이니 말이다.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일어날 수 없는 일은 아니라는 듯한 천연덕스러움은 이유리 소설을 다른 작가의 소설과 구분 짓는 특징이다. 소설집 『브로콜리 펀치』의 해설에서 소유정 평론가는 “환상과 현실의 경계가 허무맹랑하게 느껴질 정도로 이유리의 소설에서 환상은 현실에 아주 밀착되어 있다”1)고 설명한다. 이것은 이유리 소설의 독특한 리얼리즘이기도 하며, 현실과 매우 흡사한 세계에 환상이 삽입되어 독자를 낯선 감각에 빠뜨린다. 나는 이러한 특징을 ‘환상’과 ‘기이함’ 중 어느 것으로 부를지 고민했다.2) 비현실적 사건과 대상에 집중한다면 환상이라 불러야 하겠지만, 나는 환상을 현실적 사고방식으로 대하는 인물들의 태도까지 아울러 기이함이라 부르고자 한다. 앞서 말했듯 내가 「빨간 열매」를 읽고 당황했던 것은 잠깐 놀라고 마는 ‘나’ 때문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내가 주목하려는 기이함은 앞서 말한 기이함과 다시 구분 지어야 한다. 이유리 소설의 기이함은 독자에게 불편하고 해소될 수 없는 문제로 남지 않는다. 기이함은 인물들이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게 해주는 촉매제이기 때문이다. 이유리의 소설이 따뜻함과 발랄함을 전하는 주된 이유이며, 독자 역시 기쁨과 편안함, 소설적 상상력이 빚어낸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하지만 몇몇 작품은 독자가 명료하고 만족스러운 감상을 얻기 힘들어 보인다. 잘 유지되고 발전하는 줄 알았던 인물 관계가 갑작스레 재검토되고 파멸의 예감까지 남길 때, 독자는 이유리 소설에서 예상하지 못한 불편한 기이함을 느낀다. 전자가 소설 구조로서의 기이함이라면 후자는 독자의 감상으로서의 기이함이다. 그리고 두 기이함은 작품에서 반비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이유리 소설의 균열이자 징후라 할 수 있다. 2. ‘나’와 ‘너’를 바라보는 따뜻한 기이함 사실 이유리 소설을 아우를 수 있는 특징은 또 있으니, 거의 모든 작품이 일인칭 주인공 시

  • 최선재
  • 2026-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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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정치경제학 - 정영수와 임솔아의 단편에 대하여 서희원 1. 메피스토펠레스는 많은 것을 말했다. 2025년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스즈키 유이의 장편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에 등장하는 괴테 연구자 히로바 도이치는 홍차 티백 꼬리표에 달린 하나의 문장을 읽고, 그것이 평생 괴테를 연구한 자신도 모르는 괴테의 문장이라는 것에 충격을 받는다. 티백 문장의 진위와 출처를 찾던 도이치에게 젊은 연구자 스즈키는 이렇게 말한다. “전 괴테가 모든 것을 말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 인간이 모든 것을 말하기란 불가능하니까요. 그래도 괴테는 정말로 모든 것을 말하려고 했구나, 그런 생각은 듭니다.”1) 스즈키에게 이러한 감탄을 이끌어낸 작품은 괴테의 『파우스트』이다. 흥미롭게도 『파우스트』에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말이 담기진 않았지만 인생을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오래 간직해도 좋을 의미 있는 말들이 가득하다. 특히 고령화 사회에 진입한 한국인이라면 『파우스트』의 서사를 역노화와 건강, 죽음의 자기 결정권에 대한 일종의 알레고리로 읽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파우스트』에서 삶의 열망을 잃은 학자 파우스트의 정확한 나이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그의 학식과 절망, 즉 내면을 가득 채운 지적 충만, 육체와 재산의 결핍을 통해 계산하면 대략 오십 대 이후로 추정이 된다. 파우스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저 놀기만 하기에는 너무나 늙었고,/아무런 소망도 없이 살기에는 너무나 젊도다.”2) 이후 파우스트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영혼을 담보로 계약을 하게 되고, 자신의 의지와 열망을 현실에서 실행하는 삶을 살아간다. 메피스토펠레스가 파우스트를 제일 먼저 데리고 간 곳은 마녀의 부엌으로 그곳에서 파우스트의 육신을 열정으로 타오를 수 있는 젊음의 상태로 만들기 위해서이다. 가마솥에서 끓고 있는 정체불명의 역겨운 액체와 신뢰하지 못할 마술이 탐탁지 않았던 파우스트는 젊음을 되찾기 위한 좀 더 좋은 방법을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요구하고, 메피스토펠레스는 자신이 다른 책에서 읽은 자연요법을 소개한다. 좋아요! 그건 돈도 안 들고, 의사나 마술도 필요 없는 요법이지요. 당장 저 바깥 들판으로 나가셔서, 괭이로 갈고 땅을 파는 일을 시작하시고, 당신의 몸과 마음을 극히 제한된 생활권 안으로 국한하고, 가공되지 않은 음식으로 몸을 보양하고, 가축과 더불어 가축으로 살면서, 추수할 밭에다 몸소 거름 주는 일을 약탈이라고 언짢게 여기지 마시오. 이것이 믿을 수 있는 최선의 요법이니, 팔십 고령에도 당신을 젊게 유지해 줄 것이요! (1권 115쪽) 메피스토펠레스가 알려주는 자연요법은 대체의학이나 스트레스를 만병의 근원으로 삼고 있는 정신신체의학(심신의학)을 신봉하는 사람이라면 솔깃할 그런 내용이다. 사실 『파우스트』의 서사는 두 가지 지식의 충돌이 생성하는 긴장감을 통해 전개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하나는 “철학”, “법학”, “의학”

  • 서희원
  • 2026-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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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을, 너에게

거짓을, 너에게 - 당신이 김애란의 소설을 읽으며 궁금증을 느꼈겠지만 차마 에서 답을 찾지는 못했던 문제들에 대하여 전철희 1. 환상의 끝에서 사랑을 노래하는 소녀 김애란의 첫 소설집 『달려라 아비』는 2005년에 출간됐다. 이 책을 처음 볼 당시 나는 애니메이션 (이하 으로 약칭)이 떠올랐다. 그때의 문단에서는 “근대문학의 종언”과 “미래파”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었다. 문학인들이 고담준론을 나누는데 초신성의 소설에서 애니메이션을 연상한 내가 부끄러웠다. 이제 20년이 지났고 김애란은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그동안 나는 등단을 했고 평론가의 책무가 비약과 과장이라는 하스미 시게히코의 말에 공감할 수 있을 정도의 연식을 쌓았다. 다소 늦은 감은 있지만 20년 전의 생각을 글로 정리하고 이를 기반으로 김애란의 작품들을 복기해 보려 한다. 거두절미하자면 『달려라, 아비』의 주제는 하얀 거짓말(white lie)이다. 이 책의 표제작 「달려라, 아비」는 편모가정에서 자란 딸의 이야기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오래전 가출했다. “나쁘면서 불쌍하기까지 한 사람”1)이었던 아버지는 가족부양의 책무를 벗어던지겠다는 무책임성 내지는 다른 여자를 만나려는 욕망 때문에 집을 나간 것으로 보인다. 딸은 그런 정황을 알면서도 아버지가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전 세계를 누비면서 달리기를 할 것이라고 상상한다. 소설의 뒷부분에서 아버지의 허접했던 인생이 폭로되지만 그럼에도 딸은 자신의 상상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녀의 맹목적 ‘믿음’은 자기방어 기제의 산물이다. 자식의 입장에서 아버지의 무능함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신의 몸에 패배자의 피가 흐름을 긍정한다는 뜻이고, 아버지가 금의환향해서 명예나 재산을 상속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또한 아버지가 이기적인 무뢰한이었다면 버려진 가족들로서는 그에 대한 원한과 분노를 가질 수밖에 없다. 불신과 미움은 본인을 병들게 하는 감정이다. 아버지가 그럭저럭 괜찮은 사람이었다는 거짓된 믿음은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라이너스의 담요로 유용하다. 당시 주목받은 작품 중 하나였던 「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는 소녀와 아버지의 대화 장면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소녀는 아버지에게 “나는 어떻게 태어났어요?”라고 묻는다. 농담에 가까운 거짓말로 일관하던 아버지가 진실을 말하려던 찰나 소녀는 잠이 들고 자신의 탄생에 대한 상상을 시작한다. 소녀가 아버지의 답을 회피한 이유는 쉽게 짐작 가능하다. “나는 어떻게 태어났어요?”라는 존재론적 질문에 대한 답은 밋밋하고 초라하다. 남녀가 성관계를 할 때 정자가 난자에 착상과 수정을 해서 아기가 생겼다는 생물학적인 설명은 낭만적이지 않다. “부모님이 사랑해서 자식이 태어났단다”라는 말은 손발이 오글거리고 “너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갖고 태어났단다&rdquo

  • 전철희
  • 2026-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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