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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비과학 사이의 SF들

  • 작성일 2024-08-01
  • 조회수 732

   과학과 비과학 사이의 SF들

   - 흄의 당구공과 천선란의 식물에 대하여


임지연


   사고실험


   SF의 매력 중 하나는 사고실험이다. SF에서 사용되는 외삽(外揷)은 과거와 현재의 익숙한 사실에 특정 가설을 투여하여 새로운 미래를 예측하는 방법이다. 외삽을 통해 SF는 새로운 사고를 펼쳐내며 새롭고 낯선 세계를 예측하거나 대안적 세계를 재현한다. 인간의 합리성 속에 끼어든 비합리성 혹은 이성의 끝에 존재하는 비이성은 어떻게 가능한가, 혹은 왜 불가능한가와 같은 문제를 SF는 다룬다. 

   나의 문제의식은 SF가 과학을 넘어서 비과학이 될 경우, 그것을 왜 좋은 SF라고 하지 않는가이다. 그리고 인간인 우리가 비인간 존재들을 어떻게 사유할 수 있을까의 문제다. 비인간 타자가 인간 바깥에 존재할 수 있는가? 그런 존재와 인간은 어떻게 조우하고 서로 인정할 것인가? SF는 사고실험을 통해 그것을 어떻게 가능하게 하는가? SF가 극단적인 사고실험을 함으로써 인간의 인식 능력 밖의 사물을 사유할 때, 과학 혹은 비과학은 어떤 효과를 가져올까? 나는 스페이스 오페라를 덜 과학적이고 더 대중적이어서 SF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기 어렵다는 생각을 계속 가지고 있었다. 덜 과학적이라는 말은 과학을 합리적 법칙으로 제한할 때 가능한 말이지만 말이다. SF의 하위 장르로 하드 SF, 소프트 SF와 같은 구분법을 받아들일 때의 효용성 위에서 가능한 말일 것이다. 아이작 아시모프와 같은 하드코어 SF 작가나 철학적인 SF 작가 테드 창 정도의 이름을 거론할 때, 충실하고 세련된 SF 독자의 덕성을 갖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덜 과학적이거나 덜 철학적인 SF가 새로운 SF의 가능성을 열어 줄지 모른다는 생각을 최근 하게 되었다. 과학이 인간 이성의 최고치를 가리키는 지표라면, 하드 SF는 오히려 휴머니즘에 충실한 이야기가 아닐까? 외계인, 로봇, 사건의 지평선 등 지구 밖 이야기가 지적 즐거움을 주는 이유는 인간을 넘어서는 비인간 존재들과의 낯선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학은 인간의 이성으로 설명 가능한 지적 능력에 기대어 있다. 그렇다면 고도의 과학지식으로 무장한 SF는 얼마나 인간으로부터 멀어져 낯선 비인간을 상상하게 하는 걸까? 그것은 우리가 과학의 숭고한 낯설음에 대해 과도하게 신뢰했기 때문은 아닐까? 과학적이라는 수사는 너무 많은 관대함을 허용하는 건 아닐까?

   어린 시절 열광했던 TV 시리즈 <마징가 Z>, <은하철도 999>나 한낙원의 『금성탐험대』는 과학시대가 요구하는 과학소녀의 덕성을 부여했다. 그것들은 대체로 어린이 공상과학소설의 범주에 드는 장르물이었다. 그저 소녀였던 나는 과학시대의 임무를 떠맡아야 할 사명을 위해 태어난 것처럼 보이기 위해 과학소녀처럼 그것들을 보고 읽었다. 그러나 그것도 곧 시들해졌는데, 중고등학생이 되자 그것이 공상과학이지 과학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더 세련된 문학소녀로 돌변했다. 문학소녀는 ‘공상’과학소설을 좋아하지 않는 법. 공상과학소설은 상상력보다 급이 떨어지는, 덜 과학적인, 말도 안 되는, 덜 지적인, 덜 구성적인, 덜 문학적인 것으로 유통되던 때였다. 

   지금은 덜 과학적인 SF가 더 SF적이어서 사고실험의 가능성을 열어 둘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비인간들은 어떻게 (존재론적·미학적·정치적으로) 존재하는가라는 최근 나의 관심사는 퀑텡 메이야수의 사변적 실재론에 입각한 ‘과학 밖 소설’의 사유방식으로 이어졌다. 비인간 존재는 인간 및 다른 존재들과 배치되고 연결되지만, 동시에 인간의 인식 능력 너머에 존재하는 그들만의 독특하고 자율적인 타자적 요소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의 문제는 미학적이면서 정치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그의 상관주의 비판은 이분법적이고 형이상학적 요소가 짙다는 의심을 버릴 수는 없다는 한계 안에서 가능한 논리라는 점을 부기한다. 

   메이야수는 『형이상학과 과학 밖 소설』에서 실재를 사유하기 위해서는 인과적 필연성에 기초한 과학소설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과학 밖 소설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사변실재론을 통해 인간 환원주의, 즉 상관주의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모색한다. 메이야수의 상관주의는 인간이 사유와의 관계 속에서만 세계를 인식하는 한계를 말한다. 그러므로 상관주의란 인간중심주의적 사고 메커니즘인 것이다. 그는 철학이 상관주의로부터 벗어나 세계와 사물을 투명한 감옥에서 해방시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SF는 과거와 현재의 관습에서 벗어나 새로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상관주의로부터 벗어나기 적절한 장르적 장점이 있다.  




   흄의 당구공


   메이야수는 흄의 당구공에서부터 사고실험을 시작한다. 흄은 필연성에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 상상의 당구시합을 가져왔다.  



   예컨대 내가 어떤 당구공이 어떤 다른 당구공을 향해 직선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본다고 해보자. 이 두 번째 공의 운동이 그들의 접촉, 혹은 충격에 의해 나에게 우연적으로 암시된다 하더라도, 나는 수백 가지의 서로 다른 사건이 또한 이 원인으로부터 따라 나올 수 있으리라는 것을 생각할 수 없을 것인가?1)

    


   흄은 하나의 당구공이 다른 당구공으로부터 되돌아가거나 임의의 방향으로 튀어 오를 확신을 왜 갖지 못하는가를 묻는다. 메이야수는 흄의 당구공을 해석하는 두 방향, 즉 포퍼의 해석과 칸트의 해석을 따라간다. 

   포퍼는 흄의 당구공을 과학적으로 접근한다. 예측 불가하게 움직이는 흄의 이상한 당구공에 대해 포퍼는 현재의 과학이 설명하지 못할 뿐, 미래에 그것은 과학적으로 설명 가능할 것으로 파악한다. 미래에 자기장이 도입된 금속 당구공을 만든다면, 이상한 당구공은 현실에서 타당한 것이 된다. 포퍼는 이성(과학)의 이름으로 그것을 설명한다. 메이야수는 포퍼가 흄을 오했다고 보았다. 그는 그것을 존재론적으로 다루지 않았으며, 예측 가능한 실험과학에 의존한다고 비판한다. 메이야수에 따르면 이것이 과학소설의 특징이다. 불확실한 사건을 과학의 합리성과 예측가능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반한 것이 과학소설이다. 

   메이야수는 흄의 당구공 문제를 필연성이 아니라 우연성으로 접근하면서 ‘과학소설’이 아니라 ‘과학 밖 소설’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과학 밖 소설은 “실험과학이 권리상 불가능한 세계이지 사실상 알려지지 않은 세계가 아니”다.2) 메이야수는 흄의 당구공이 과학 밖 소설의 상상을 가능하게 한다고 보았다. 그것은 왜 중요한가? 인간의 사유를 상관주의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흄의 당구공은 “집계 가능한 모든 법칙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 단지 예측되지 않기만 한 것이 아니라 권리상 예측 불가능하고 모델화할 수 없는 궤적”3)을 상상한다. 그것을 메이야수는 과학 밖 소설로 부르고, 과학소설과 관련되지만 과학소설 밖에 있는 다른 장르로 승격되기를 기대한다. 

   메이야수는 아이작 아시모프의 「반중력 당구공」을 참조하면서 이 소설이 왜 과학 밖 소설이 아닌지를 제시한다. 이 소설은 흄의 당구공을 포퍼적으로 해석한 작품이라는 것이다. 이 작품에는 천재 이론물리학자 제임스 프리스와 응용물리학자 에드워드 블룸이 등장한다. 이 둘은 서로의 장점을 암묵적으로 질투하는 친구 사이다. 블룸은 공개적인 당구 시합에 프리스를 초대한다. 노벨상을 가져다준 프리스의 전자기장 이론을 블룸이 반중력장에 적용시킬 수 있다고 호언한 것이다. 프리스는 이론상 참인 그 이론은 실제로 실행 불가능하다고 확언했는데, 블룸이 당구 실험을 통해 그것을 공개적으로 무력화하고자 하였다. 프리스는 블룸의 제안대로 시합에 참여한다. 그는 당구대로 “천천히” 다가가 “천천히” 공을 친다. 그때 예기치 않게 블룸이 죽는 사고가 발생한다. 프리스가 친 당구공이 복잡한 궤선을 그리며 튀어 오르다 광선을 통과한 후 블룸의 심장을 관통한 것이다. 이것은 모든 실험과학을 무화시키는, 우연한, 예기치 않은, 사고처럼 보인다. 서술자인 기자가 타살을 의심하는 것으로 이 소설은 끝난다. 만약 프리스가 자신의 명성을 지키기 위해 계산된 당구공을 친 것이라면? 블룸에게 치명적 공격을 가하기 위해 필요한 당구공의 궤적을 치밀하게 계산한 것이라면? 그가 천천히 다가가 천천히 공을 칠 때 머릿속으로 모든 것을 계산해 놓은 것이라면? 4)

   메이야수는 기자의 이러한 의문이 이 탁월한 소설을 과학소설의 안전지대로 되돌린다고 판단한다. 예측 불가능성을 합리성으로 전환한 과학적 추론은 상관주의의 회로에서 벗어날 수 없다.




   과학 밖 소설의 불/가능성과 단순화의 오류


   반면 흄의 당구공에 대한 칸트의 해석은 과학 밖 소설을 완전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가능한 것으로 평가한다. 흄이 우리에게 묻는 것은 당구공이 물리법칙의 순수한 불안정성에 따라 이상하게 움직일 가능성을 왜 우리는 배제하는가에 있다. 인과적 물리법칙을 넘어서는 순수한 우연성, 절대적 우연성을 우리는 사유할 수 있는가? 포퍼와 달리 칸트의 답변은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지각할 수 없을 것”5)이다. 대상에 대한 모든 의식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칸트에게 과학 없는 의식은 이성작용의 붕괴로서 그 어떤 것도 지각하거나 인식할 수 없다. 칸트는 흄의 당구공을 사유하는 데까지 이르지만, 그것을 지각할 방법은 없다고 말한 부분에 대해 메이야수는 칸트의 물자체를 재사유할 것을 강조하였다. 메이야수는 칸트의 물자체를 ‘약한 상관주의’로 이해한다. 세계의 ‘외부’를 인정은 하지만, 접근 불가능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메이야수의 주장대로 ‘세계의 외부가 있는가’의 문제는 논쟁적이다. 외부는 데카르트적 이분법을 재가동할 수 있는 사유방식이며, 라투르나 해러웨이와 같이 ‘관계’를 중시하는 철학자들은 세계의 바깥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과학은 절대 법칙이 아니라, 인간과 비인간이 함께 만들어낸 하이브리드들이다. 사변실재론자인 메이야수와 이들의 과학 개념은 전제부터가 다르다. 물론 나도 외부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지만, 그러한 사유가 갖는 긍정적 효과에 대해서 인정하고, 그 가능성을 SF에게서 찾으려는 모험을 시작한 것이다. 객체지향존재론자들은 바깥으로서의 사물, 관계로부터 물러난 자율적 사물을 사변적으로 구성할 수 있다고 믿지만, 관계를 인간과의 관계에만 한정할 수는 없지 않은가? 블랙홀은 인간의 언어와 사유 너머에 존재할 수 있지만, 블랙홀이라는 객체는 수많은 물질적 교환과 관계로 이루어진 초객체라고 할 때, 사물과 사물의 관계까지 확장한다면 칸트적 의미의 물자체란 형이상학적이기 쉽다. 그럼에도 상관주의 비판은 인간중심적 사유를 교란하기 위한 방법이라는 장점을 무시할 수 없다. 

   메이야수는 상관주의 비판을 위해 선조성(ancestrality)이나 원화석(archifossile) 같은 개념을 창안하여 인간이 존재하지 않았던 (수학적) 시간에 대해 물질적으로 사유한다.6) 사변실재론자인 그에게 원화석은 물질성 대신 사고의 산물이 되기 쉽다. 그것은 인간의 언어와 사고 이전에 존재하지만, 언어와 사고에 의해 정립되는 개념적 사물이기 때문이다. 즉 상관주의 외부이지만, 상관주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7)

   메이야수는 흄의 당구공에 대해 칸트적 접근법을 재사유함으로써 과학 밖 소설의 가능성을 전개한다. 그는 과학소설의 세계는 필연성의 법칙이, 과학 밖 소설은 우연성의 법칙이 지배한다고 구분한다. 메이야수는 아시모프의 작품이 사건의 우연성을 설명 가능한 것으로 접근했기 때문에 SF라고 평가하였다. 반면 절대적 우연성, 순수한 카오스의 세계를 그린 과학 밖 소설은 어떻게 가능할까? 메이야수는 그 유형을 세 가지로 제시했다.8) 메이야수는 유형 2에 주목하였다. 이 유형은 예측 불가능성과 변형에 대해 알고는 있지만, 그 원인을 규명할 수 없는, 순수한 원인 결여의 세계를 뜻하기 때문에 과학 밖 세계를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세계를 SF는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까? 예측 불가능성의 원인을 과학적 합리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세계는 어떤 세계인가? 

   메이야수는 그러한 세계에 토대를 둔 소설을 과학소설과 구분하면서 과학 밖 소설로 명명하고자 한다. 메이야수는 르네 바르자벨의 『대재난』을 진정한 과학 밖 소설로 제시한다. 이 소설은 갑자기 전기가 사라진 대재난의 세계를 그린다. 메이야수는 바르자벨의 탁월함을 이 현상의 본질에 대해 설명할 수 없으며, 설명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에 두고 있다. 전기가 사라진 세계에 대해 두 과학자의 답변을 제시하는데, 포르탕 교수는 유명한 과학자였으나 사건 이후 무기력을 호소한다. 그는 “전기가 사라졌다면,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도 의심해 볼 만한 일”이며 “반-과학적인, 반-이성적인 악몽”이며 “우리의 모든 이론, 모든 법이 뒤집어져 버렸다”는 입장을 밝힌다. 다른 입장은 포크 박사인데, 대재앙 속에서도 인간적 양식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는 인간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전기도 사라지지 않았다고 믿는다. 그는 자연의 변덕과 신의 경고 같은 것일 수 있음을 예지하면서 농촌 공동체를 수립한다. 이 이야기는 “천재지변의 이유에 대한 진상을 결코 밝히지 않”음으로써 순수한 자연의 변덕일 가능성, 나아가 신의 징벌일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과학적 합리성이 궤멸된 비과학의 세계를 “지혜롭게도” 창안한 것이다.9) 물론 자연의 순수한 변덕이나 신의 가능성을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요소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소설에서 과학을 배제하고 농촌 공동체를 건설하는 과학자의 젠더의식도 살펴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메이야수는 전기가 사라진 이유를 합리적으로 설명하지 않음으로써 상관주의로부터 멀어질 가능성을 이 소설에서 발견한다. 

   메이야수의 과학 밖 소설 개념은 과학소설에 이중 구속되어 있다. 과학소설과 분명하게 분리하여 다른 장르로 구성하고 싶어 하면서도 과학소설 개념에 기대기 때문이다. 그의 과학 개념 역시 재고할 필요가 있다. 그에게 과학은 너무 간단하고 분명하다. 그는 과학을 물리 세계의 현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순수한 법칙으로 인식하였다. 그러나 과학은 순수하지 않으며, 불확실성을 제거한 명확한 원칙이 아니다. 과학은 불명확하고 오류를 배제할 수 없으며, 인간과 비인간 자연 및 사물들의 네트워크에 의해 만들어진 하이브리드이다. 라투르가 주장한 것처럼 근대인은 인간과 과학, 문화와 자연을 내외적으로 분할하면서 하이브리드들을 억압하는 방식으로 증식시켰다. 과학은 과학자와 병균과 실험실의 기구들과 사회적 합의와 기금 등으로 만들어진 네트워크라고 한다면 여기에 어떤 명확한 원리가 있겠는가. 메이야수는 상관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과학과 과학소설을 단순화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과학소설 역시 단순화하고 있다. 과학이 불확실성에 기초한 것이라면 과학소설 역시 그러한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특히 사변적 SF는 메이야수의 과학 밖 소설의 효과를 증폭시킨다는 점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의 주장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는 것은 인간중심주의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사물을 인간성의 투사로 인식하는 오래되고 질긴 관습에 어떻게 균열을 낼 것인가라는 분명한 문제의식 때문이다. 또한 그의 과학 밖 소설 개념은 스페이스 오페라나 판타지 과학소설을 클리셰가 아니라 비상관주의적 요소로 해석할 기회를 제공한다. 비과학은 합리성에 기댄 과학소설의 한계를 넘어서는 노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천선란의 말하고 기억하고 증언하는 식물들10)


   천선란의 SF 『나인』은 식물이 주요 행위자로 등장한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인간과 다른 식물 타자의 특성을 인간을 투사하거나 의인화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인간의 감각 밖에 존재하는 그들의 지성을 어떻게 포착하는가 하는 것이다. 동물인 우리는 식물의 감각과 생물학적 생존 과정을 이해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이 따른다. 그들은 인간 밖에 존재하는 것 같으면서도 공생적 생태계 안에서 얽혀 있다.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알 수 있으며, 그들은 인간을 어떻게 인지할까? 천선란의 『나인』은 인간과 식물의 타자성과 연결성을 매혹적으로 포착한다. 메이야수의 과학 밖 소설처럼 인과관계가 붕괴된 세계를 그리지는 않지만, 식물의 행위능력은 현대의 생물학을 넘어선다.  

   이 소설은 17세 소녀 나인이 사실은 땅속 식물에서 태어났으며, 오래전 리겔리라는 행성에서 지구로 이주한 누브인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일어나는 여러 에피소드와 외삽이 개입된 소설이다. 『나인』은 식물-외계인이라는 복잡한 정체성을 깨달아 가는 소녀의 성장 드라마이자, 퍼스트 컨텍트 서사이며, 식물과 외계인 그리고 인간이 공생하는 생태 SF의 성격을 띤다. 



   아기는 꼭 땅에서 막 뽑은 커다란 고구마나 무 같았다. 지모가 풍년을 맞은 농부의 표정을 짓고 있어서 더 그래 보였다. 지모는 그 고구마가 나인이라고 말했다. (중략) 나인은 그 식물이 아까 지모가 보여주었던 흰색 꽃을 피운 식물임을 알아차렸다.11)



   나인은 식물로 태어난 인간이다. 나인의 기묘한 탄생기와 변신의 이유는 그가 리겔리 행성에서 이주한 외계인의 후손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이 소설은 실험과학이 권리상 불가능한 세계나 물리법칙이 붕괴된 과학 밖 세계의 이야기가 아니다. 천선란은 일상 세계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익숙한 존재들이 사실은 얼마나 낯설고 이질적인 존재인지를 드러내기를 즐겨하는 작가이다. 이 소설에서 나인은 지극히 평범한 십대 소녀이지만, 외계인이자 식물적 존재다. 천선란은 일상과 평범한 세계 안에 존재하는 인간 밖 존재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우리의 세계가 과학적 세계와 비과학적 세계, 물리적 법칙과 비과학적 법칙, 필연과 우연이 얽힌 세계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메이야수의 이분법적 사유가 천선란의 소설에서는 혼재되었다고 볼 수 있다.

  


   수만 개의 기억이 한데 뒤섞여 형태가 온전한 것이 없었다. 사람인지, 바위인지, 동물인지 혹은 다른 형태의 괴물인지 모를 형태들이 뒤섞여 있었다. 입자들은 소리가 들릴 때마다 소리의 파동을 따라 흩어졌다 뭉치기를 반복했다. (중략) 식물이 바라보는 세상은 이렇게 해질녘 해변의 모래사장처럼 빛났고 강에 뜬 윤슬처럼 잔잔하게 흘러갔다.12)



   나인은 살인사건을 목격한 나무와 연결되어 그들의 기억을 공유한다. 식물은 자신이 본 것을 기억하고 증언한다. 이 소설에는 인간의 혼이 들어간 인간-식물 ‘금옥 나무’도 등장한다. 그는 식물의 감각 체계를 가지고 식물적 삶을 살아가지만, 그가 경험했던 인간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식물은 기억할까? 식물은 인간이 뇌를 이용해 기억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기억할 것이다. 소설에서 식물은 기억을 “홀로그램처럼 불완전하게 형체를 만들어”13) 나인에게 보여줌으로써 살인사건의 범인을 밝혀낸다. 식물학자에 따르면 식물은 기억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춘화현상이다. 어떤 식물은 오랜 저온 기간에 노출되고 나서야 꽃을 피우는데, 추위는 식물이 봄에 꽃을 피워야 한다는 신호로 기억된다. 현대 식물학은 식물의 변덕스러운 환경에 대한 반응을 통해 식물이 ‘배우고 기억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14) 식물은 인지기능과 신체기능이 분리되어 있지 않고 하나의 세포 안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식물의 지적15) 능력은 뇌 없이 온몸에 분산되어 있다. 『나인』에서 식물들은 특정 인물과 사건을 기억하고, 감정을 느끼며, 증언한다. 

   천선란이 식물을 행위자로 포착하는 방식은 과학을 넘어서 있다. 백스터 효과에 따르면 식물은 범인을 기억하고, 자신을 해칠 마음을 누군가 갖기만 해도 두려움을 느낀다고 한다. 백스터 효과는 1966년 거짓말 탐지기 검류원이었던 클레브 백스터가 식물의 잎에 전극을 연결하는 실험을 한 일련의 결과를 말하는 것이다. 그는 잎을 불태워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검류계의 바늘이 움직인다는 것을 발견한다. 백스터는 식물이 기억할 수 있는지를 증명하기 위해 범인 찾기 실험을 하였다. 식물 한 그루를 죽인 후, 남은 식물이 범인을 찾아낼 수 있는지를 탐지한 것이다. 목격자 식물은 범인이 접근하자 격렬하게 바늘을 움직여 범인을 찾아냈다.16) 그러나 백스터의 발견은 과학이 되지 못했다. 과학실험은 일관된 값을 가져야 하는데, 백스터의 검류계는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백스터 효과는 유사과학이거나 심령과학처럼 인식되곤 한다.  유사과학은 비과학이라는 점에서 사건의 원인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런데 천선란은 식물의 기억 행위를 백스터 효과에 기대어 비과학적으로 묘사한다. 천선란의 식물적 상상력은 설명 가능한 현대과학을 넘어 인과론적 합리성의 세계를 의문에 붙이는 효과를 불러온다. 물론 이것은 메이야수의 과학 밖 세계에 해당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천선란의 SF는 메이야수가 과학과 과학 밖을 분리한 이분법을 넘어 과학과 비과학이 얽힌 일상의 세계에 주목한다. 그런 점에서 천선란의 SF는 과학소설인가 과학 밖 소설인가라는 질문이 의미를 잃는, 탁월한 경지를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식물에 대한 천선란의 묘사는 법칙적이고 인과적인 사유에 균열을 내면서 식물의 자율성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인간-식물의 생태적 연대를 모색한다. 과학과 유사과학, 인간과 비인간은 이질적 존재이지만 관계를 떠나지 않는다. 이러한 사유방식은 상관주의를 넘어서지는 못하지만, 상관주의 비판이 힘을 잃게 되는 생태적 얽힘과 공생적 실재성을 포괄한다. 

   지금까지 과학적 합리성 대신 비과학적 우연이 서사에 개입되는 SF가 왜 좋은 SF가 아닌가에 대한 질문을 메이야수의 과학 밖 소설 개념을 읽으며 탐색했다. 흄의 당구공을 칸트적으로 재해석할 필요에 주목한 그의 과학소설론은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기 위한 전략적 사고이다. 그럼에도 과학적 세계와 과학 밖 세계는 분리되어 있지 않다. 사물의 자율성과 관계성은 분리될 수 없다. 그 둘은 천선란의 식물들처럼 인간의식 밖에 있으면서도 인간과 흙과 사건과 결합되는 관계적 존재이다. SF는 과학과 비과학 사이에서 SF‘들’이 될 것이다.  


1) 퀑텡 메이야수, 엄태연 역, 『형이상학과 과학 밖 소설』, 이학사, 2017, p.16.

2) 위의 책, p.11.

3) 위의 책, p.31.

4) 위의 책, p.38.

5) 위의 책, p.44.

6) 퀑텡 메이야수, 정지은 역, 『유한성 이후』, 도서출판b, 2010, pp.11~42.

7) 오현숙, 「퀑텡 메이야수의 “과학 밖 소설” 비판: 필립 K. 딕의 『유빅』을 중심으로」, 『현대영미소설』 30-3, 2023, p.117.

8) 유형 1은 불규칙적이지만 미미하게 불규칙적이어서 과학과 의식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세계들, 유형 2는 불규칙성이 과학을 폐지하기에는 충분하지만 의식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은 세계들, 유형 3은 순수한 카오스의 세계로서 과학의 가능조건뿐 아니라 의식의 가능 조건도 사라지는 붕괴된 세계들이다. 퀑텡 메이야수, 앞의 책, pp.56~70.

9) 위의 책, pp.81~92.

10) 이 부분은 필자의 다른 글의 일부를 가져온 것임을 밝힌다. 임지연, 「천선란의 SF에 나타난 ‘객관적 현상학’과 생태적 사유」, 『비평문학』 88, 한국비평문학회, 2023, pp.120~125.

11) 천선란, 『나인』, 창비, 2021, p.39.

12) 위의 책, p.279.

13) 위의 책, p.279.

14) 베론다 L. 몽고메리, 정서진 역, 『식물의 방식』, 이상북스, 2022, pp.21~24.

15) 스테파노 만쿠소·알렉산드라 비올라, 양병찬 역, 『매혹하는 식물의 뇌』, 행성B이오스, 2016, p.206.

16) 피터 톰킨스, 황금용·황정민 역, 『식물의 정신세계』, 정신세계사, 1992, pp.5~2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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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속 부동산과 젠더 정치학 전지니(한경국립대 교수) * 이 글에는 종결되지 않은 웹툰과 올해 공연된 연극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투기와 여성 이 글은 한국의 부동산 현실, 그중에서도 전세 사기로 집약되는 부동산 범죄를 다룬 웹툰과 연극을 겹쳐 보려 한다. 이를 통해 동시대 대중문화 텍스트 안에서 자산 증식에 대한 소시민적 욕망이 어떻게 젠더화되어 형상화되는지를 살피고, 여성을 범죄의 가해자 혹은 피해자로 배치하는 작품 속 시도가 갖는 양면성에 대해 조망한다. 논의할 작품은 표제에 부동산을 내세워 비슷한 시기 독자, 그리고 관객과 만난 (유기 글/그림, 2024.1.13.~연재 중), (김수정 작/연출, 2023.10.14.~22.(초연), 2024.6.1.~9(재연)) 등 두 편이다. 부동산과 여성을 관련지어 논의하는 경우는 본격적인 강남 개발 이후인 1970년대 중반부터 시작됐다. 부동산 가격 상승과 서민의 박탈감, 중산층 진입의 욕망 등의 문제는 박완서의 강남 아파트를 산 교수 부인의 이야기인 「낙토의 아이들」(1978)에서부터 시작해 재개발을 둘러싼 부녀회의 욕망을 다룬 웹툰 (스토리 매미/작화 희세, 2019.05.05.~2020.09.27.)까지 꾸준히 반복되었다. 염두에 둘 점은 (유하 작/연출, 2015), (연상호 작/연출, 2018)의 경우처럼 대중문화 속에서 개발·재개발의 역학관계를 다룰 때는 남성 인물이 이야기의 중심에 놓이지만, 개발의 수혜를 입고자 하는 소시민의 욕망을 다룰 때 그 중심에는 여성이 자리한다는 점이다. 관련하여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불안한 경제상황 속에서 반복되었던 투기는 여성의 것으로 전유되는 일이 빈번했다. 전쟁 이후 사회 혼란의 주범으로 간주되었던 ‘사설계’를 주도하는 부인들이나 1970년대 후반부터 매체에 오르내린 부동산 투기의 주범 ‘복부인’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은 근현대사 속 뿌리 깊은 여성 혐오와 직결되어 있다. 정치·사회적 불안으로 발생한 투기 심리를 여성의 전유물로 간주하며 문제의 핵심을 피해 가고 비판의 대상을 국가와 체제가 아닌 여성으로 지목한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여성이 투기에 몰두하는 이유를 심리학적, 사회학적으로 분석한 기사도 있었다. 한 언론은 “복부인의 욕구 단계는 생리 욕구와 안전 욕구의 원시적인 단계에서 못 벗어나고 있다.”며 여성이 상대적으로 안전 욕구가 강하고 사회 진출이 부진한 것을 복부인이 생기는 이유로 분석하기도 했다.1) 이 와중에 투기를 여성의 것으로 지정하는 데 대한 자성의 목소리도 있었다. 1984년 한 신문 독자는 신문 기고를 통해 ‘복부인’은 여성 천시 단어로 공공매체에서 이 같은 유행어를 쓰면 안 된다고 역설한다. 그는 “이는 여성 학대의 사회적 악습에서 오는 콤플렉스를 여성의 사회 유린이라는 감정으로 희석시키려는 ‘투사’ 심리요, 또한 일종의

  • 관리자
  • 2024-10-01
휴먼들의 소화불량, 비인간-사물의 매혹

휴먼들의 소화불량, 비인간-사물의 매혹 황녹록 밖에선 바퀴벌레의 신음소리 아버지가 숨겨 둔 약을 먹은 것입니다 어머니 내 책상 위에 아버지가 피운 모기향 좀 치우세요 시집 위에 몸 약한 날벌레들 다 떨어지잖아 동생 문 열고 들어옵니다 나는 문밖으로 재빨리 나가려고······ 동생이 소리 질렀습니다 여기 또 있어 진은영, 중1) 오래된 사물, 거슬리는 존재감 이제 우리는 반려인, 반려동물, 반려식물, 반려미생물, 반려사물 등 반려종의 경계를 구분 짓지 않기로 한다. 반려종이란 서로의 밥을 나누고 몸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는 관계를 뜻하는 말로 어떤 물질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를 의미한다. 반려들은 나눔의 상호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 못지않게 서로를 위태롭게 하고, 서로 먹다가 소화불량이 되기도 하고, 때로 죽고 죽이는 유해성의 성분도 가지고 있다.2) 그리하여 누군가의, 무엇인가의 반려가 된다는 것은 결코 무구할 수 없는 관계 속으로 이끌려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과 비인간 반려들의 낯선 이물감으로 시작되는 관계맺음은 애초에 구역감과 체기(滯氣)를 동반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관계맺음은 일상 속에서 예기치 못한 만남으로 강제될 테고, 그로부터 서로를 향한 진지한 응시의 요구가 시작된다. 그 응시는 세계에 대한 새로운 물음과 응답의 이야기로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새로운 관계맺음에 대하여 ‘영원한 동반자’라는 환상을 기대하거나, 우정 어린 돌봄으로 윤리적 책임을 지우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다른 존재들의 있음을 감각하고 그 감각에 감응하는 관계로서 반려를 말하려는 것이다. 김초엽의 소설 『지구 끝 온실』3)은 SF적 상상력을 통해 인간 지수와 사이보그 레이첼, 레이첼과 희귀식물 모스바나, 그리고 모스바나와 이희수의 혼종적 관계맺음에 대한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종의 경계를 넘어선 존재들의 반려-되기는 멸망해 가는 지구 끝에서 찾아내는 희망의 메시지로 충분히 가능해 보인다. 나아가 구원의 식물(푸른빛)이자 악마(생태계의 위협적인)의 식물인 ‘세발갈고리덩굴’의 이중적 존재감은 반려들의 관계로부터 인류의 재건과 구원의 (불)가능성에 대한 적극적인 타진으로 읽어 볼 수도 있다. 꽤 오래전 카프카는 그의 단편에서 규정할 수 없는 것들, 식별 불가능한 반려들의 존재감을 감지한 바 있다. 카프카의 작은 존재들은 경직된 습관의 세계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다양한 실험과 그 과정에서 예기치 않게 발생된 감염의 산물이다. 카프카의 비인간-사물들은 서로를 반려종으로 여기기에는 아직 미심쩍고 불안한 상태로 존재한다. 오드라데크(Odradek)4)는 낡은 실타래 조각처럼 묘사할 수 없는 형태를 띠고,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듯한 웃음소리를 낸다.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 분명하지만, 가장(家長)은 자신이 죽은 후에도 오드라데크가 계속 살아 있는 것이 근심스럽다고 고백한다. 또 있다. 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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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01
한일 문화의 초국적 접점과 ‘마주침’의 서사학

한일 문화의 초국적 접점과 ‘마주침’의 서사학 : 동시대 한국 소설 속 ‘일본’이라는 물음 정창훈 올해 상반기 일본 방송가는 ‘한일 로맨스’로 뜨거웠다. 한국인 배우 채종협(작중 윤태오 역)과 일본인 배우 니카이도 후미(모토미야 유리 역)가 공동 주연을 맡은 드라마 가 그것이다.1) 이 드라마는 채종협을 단숨에 한류 톱스타로 만들며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것은 물론이고, 국내에서도 여러 OTT 플랫폼이나 케이블 TV채널을 통해 방영되며 화제가 되고 있다. 나 역시 이 드라마를 매회 빠짐없이 챙겨보았는데, 기대 이상으로 흥미진진한 이야기였다고 생각한다. 이 두 인물의 연인 관계에 시련이나 위기를 가져오는 여러 갈등의 요인들이 있었으나, 그 가운데서 국가적, 역사적 문제와 연관되는 요인을 끝내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 오히려 신선했다. 국적(내셔널리티)과 언어, 생활관습의 차이는 둘 사이의 장벽이 되기는커녕 상대에 대한 관심을 극적으로 심화시키는 계기가 된다. 가족이나 주변인들도 이 둘이 한국인,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둘 사이를 반대하진 않는다. 이것은 종래의 한일 서사물에서 양국 인물의 연애사를 그려 온 방식과는 차별화되는 것인데, 이를 통해 ‘이례적인’ 해피엔딩의 결말이 주어진다. ‘한일 로맨스’ 자체가 이례적인 것은 아니지만, 다른 아시아 이웃들의 경우와 비교했을 때, 한일 양국 인물의 만남을 그린 서사적 재현이 여러 차례 반복되어 온 점, 나아가 오늘날 그 재현의 양상이 현저히 다양화되고 있다는 점은 주목을 요하는 현상이다.2) 물론 나쁘게 말하자면 이 드라마는 한국과 일본 사이의 정치적, 역사적 이슈를 정교하게 회피함으로써 구축된 가상의 이야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이는 한국과 일본이라는 이웃이 서로를 감각하는 방식에 새로운 무언가가 ‘첨가’되고 있음을 예시하는 것이 아닐까. 돌이켜보면 지난 몇 년 동안 한국 소설은 이러한 변화에 한 발 앞서 민감하게 대응해 온 것으로 보인다. 여러 가지 껄끄러운 문제를 공유한 ‘오랜 이웃’과의 ‘새로운 관계’를 상상하는 시도가 동시대 소설 속에서 계승되어 온 점, 이 글은 거기에 새삼스레 주목하려 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의 움직임이 가져온 의미를 통시적 관점에서 살펴보기 위해, 잠시 과거로 돌아가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현해탄 서사’ 이후, 한일을 넘나드는 월경의 서사 근대 이래 한일 관계에서 ‘현해탄’은 상징적 의미를 지녀 왔다. 특히 식민지-제국 체제의 해체 이후 그것은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의 바닷길(대한해협)’이라는 외시적 의미만이 아니라 역사적, 정치적 문제 등으로 인한 한국과 일본의 ‘가깝고도 먼 관계’(심리적 거리감, 국가적 입장의 차이 등)를 가리키

  • 관리자
  •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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