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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어진 자리, 돌봄과 공생의 겹

  • 작성일 2024-08-01

   기울어진 자리, 돌봄과 공생의 겹

   ― 안보윤, 「수미」


정우주


   1.

   오늘날 한국문학장에서 돌봄이 뜨거운 화두라는 사실을 말하는 일은 이제 익숙히 합의된 현상이 되었다. 다양한 양상으로 돌봄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서사들에서부터 아예 돌봄을 키워드로 내세운 비평 특집들까지, 지금 돌봄의 외연은 빠르게 팽창하는 중이다. 이렇듯 돌봄 담론이 확장되는 흐름에는 특히 팬데믹을 지나오며 돌봄 공백의 문제가 수면화 되었고, 누구든 서로 의존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취약성을 절실히 체감하게 된 배경이 존재한다. 당연하게도 돌봄은 기본적으로 주체와 타자, 제공자와 수혜자라는 복수의 행위자 사이에 일어나는 행위라는 점에서, 모두가 취약하므로 상호의존해야 한다는 공동체의 관계적 가치와 자연스럽게 접속한다. 

   그런데 근래의 논의에서는 오히려 돌봄을 보편적인 사회 윤리로 치환할 수 없는 무언가로 지칭하려는 움직임들이 포착되고 있다. 돌봄에서 연대나 윤리만을 찾기보다 그 속의 지난함과 불쾌함을 들춰내는 데 주목하는 작업1)이나, 상호적 돌봄을 이타성이나 선함이 아닌 미성숙한 두 존재가 “서로 폐를 끼치고 받는 위험한 관계”로 정의한 목소리2) 등은 모두 사회 구성원들에게 매끄럽게 적용되는 도덕적 가치로써 돌봄의 불가능성에 방점을 둔 시도들이다. 다만 이처럼 돌봄의 관계가 지닌 온정적이고 친밀한 성격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갈등과 착취의 요소에 천착하는 일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돌봄이 바로 그 ‘관계’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에 기반한다. 다시 말해 돌봄은 철저히 사회구조적으로 배치된 역학관계에 토대를 두고 수행된다. 

   팬데믹 시기 이전부터 돌봄 노동이 가정 내 여성에게 전가되고 사적으로 평가절하되는 젠더 편향의 측면을 지적받으며 비판적 담론이 형성되어 왔음을 상기해 본다면, 현시점에 ‘돌봄 제공자가 돌봄 수혜자보다 권력의 우위를 점한다’는 비대칭적 관계의 구조를 역설하는 것은 그간 축적되어 온 페미니즘적 돌봄 논의에 역행하는 입장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때 돌봄의 위태롭고 끈적끈적한 지점을 부각시켰던 앞선 비평들이 돌봄의 가치가 공동체적 연대의 이름으로 단순히 포섭되어서는 안 된다는 공통된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즉 “돌봄이 총체적 위기를 해결할 만병통치약처럼 쓰이진 않을지"3) 우려하는 관점들이 빠르게 제출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 속에서, 돌봄을 둘러싼 권력관계의 비대칭성을 구태여 강조하는 행위 역시 돌봄 개념의 다층적인 결을 구분하지 않은 채 끝없이 확대되는 양태를 경계하려는 의식적 흐름과 맞닿는다. 

   무엇보다 돌봄은 사회학과 밀접히 결합한 실천의 영역이므로 구체성과 현장성이 중시되지만, 한편으로 지속되는 팽창이 상징하듯 돌봄에 내재된 의존과 책임이 교차하는 원리는 인접 의제와의 유의미한 연결 가능성을 가진다.4) 그렇다면 이제 돌봄을 확장하되, ‘어떻게’ 확장시킬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는 문제가 중요해진다. 이때 이 글이 시도하고 있는 접촉, 그러니까 돌봄으로 맺어진 관계의 기울어진 격차를 비인간과의 적대적 공생을 경유해 사유하려는 방식은 서로 다른 두 영역을 혼종적으로 뒤섞는 데 그 지향점이 있지 않다. 일상적 위기의 감각 속 부풀 듯 가동되는 ‘우리’에 대한 상상력 앞에서, 각각의 논점을 실효성의 차원으로 뾰족하게 벼리고자 하는 데 외려 목적을 둔다. 그리하여 이 글은 인류세라는 렌즈를 통해 돌봄의 제공자와 수혜자 간 불균형한 역학관계를 새삼스레 직시함으로써, 공동체적 사회 윤리가 가진 헐거운 보편성을 보다 예각화하는 방식으로 돌봄 논의를 확대해 보려는 모순적 의도에서 쓰였다. 


   2.

   우에노 지즈코에 따르면 돌봄은 분명 복수의 행위자가 관여하는 상호행위이지만, 그 관계란 “결코 호혜적이지도 않고 대등한 교환도 아니”다.5) 이는 실제 돌봄 상황의 경우 돌봄을 하는 쪽과 받는 쪽의 양자적 상호성이 성립되는 장면이 오히려 예외이므로, 정해진 원칙이 아닌 개별 타자의 주관적 반응에 민감한 응답성을 지향하는 입장과도 상통한다.6) 위와 같은 사유들은 일면 돌보는 이의 일방적 배려와 희생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나, 거꾸로 말하면 타자에게 돌봄을 제공할 수 있을 만큼의 더 큰 힘을 소유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 가능하다. 특히 일단 돌봄의 필요가 발생한 이상 돌봄 수혜자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는 반면 돌봄 제공자는 스스로 그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7)을 떠올려 볼 때, 관계의 비대칭성은 더욱 압도적으로 다가온다. 

   안보윤의 「수미」8)에서 화자인 ‘나’는 늙고 병든 개들을 ‘케어’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그런데 ‘나’가 근무하는 노견돌봄센터는 다소 복합적인 지형에 놓여 있다. 반려견의 돌봄과 치료를 병행하는 요양원이자 호스피스인 이곳은 총 열 자리로 정원을 제한한 채, 마치 컨베이어 벨트처럼 앞선 개가 죽어야지만 그 공석에 다른 대기견이 입소할 수 있는 구조로 운영된다. 즉 “수의사가 직접 운영하는 노견케어시스템”(186쪽)이라는 번듯한 광고 문구를 내걸고 있지만, 그 실상에는 서로의 목숨을 움켜쥐는 죽음의 문제까지도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보다 사건을 한층 심각하게 만드는 것은 돌봄센터 원장의 비윤리적 행동이다. 구 원장의 센터에서 돈이 제때 입금되지 않거나 할부를 요청하는 등 보호자가 경제적으로 케어비를 감당하기 힘든 내색을 보이면 해당 반려견은 어김없이 안락사의 대상이 되고, 반대로 자주 면회를 오며 충분한 자본력을 증명해 보이는 보호자의 반려견은 “아주 오래 살”(198쪽) 대상으로 운명지어진다. 



   “그런데 개가 너무 오래 살아서 돈이 부족해지면, 곤란한 마음도 들지 않겠어요? 점점 늘어나는 케어비를 언제까지인지도 모를 긴 시간 동안 지불해야 한다면요. 그만하면 너도 나도 할 만큼 했다, 이제 그만 건너가렴,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말하게 되지 않겠느냐고요.” 

   (중략)

   “진저리를 치게 될 때까지 놔두는 것보다 이게 훨씬 인간적인 방법일지도 몰라요.”(191-192쪽)



   통장 잔고가 바닥난 미래에 고통스럽고 너저분한 죽음을 맞이하기보다, 애도할 여력이 남아 있을 때 편안하고 안전하게 보내 주는 것이 훨씬 “인간적인” 선택일 수 있다는 소설 속 발화는 의미심장하다. 이는 다시 말해 돌봄으로 맺어진 상호관계에서 ‘제공자(인간)’가 ‘수혜자(개)’의 손을 놓아버리면 언제든 깨어질 수 있다는, 철저히 불균등한 권력의 차이가 여실히 드러나는 순간인 것이다. 

   다만 이렇듯 자본과 생명이 직결되는 공간으로서의 돌봄센터는 바로 그러한 유상성으로 인해, 돌봄의 제공자와 수혜자 간 비대칭성이 일정 부분 완화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9) 최대한 “상황이 절박한 사람”(229쪽)만을 골라 직원으로 고용했다는 구 원장의 말처럼, ‘나’는 단기 일자리를 전전해 오다 최근에는 전세 사기 피해까지 당한 처지에 있다. 집세가 올라갈까 봐 주변에 기피시설이나 혐오시설이 들어오기를 바라는 ‘나’는 그저 생존하기 위해 센터의 터무니없는 근무시간을 버텨야 할 뿐이다. 더군다나 “비위는 좋으신가요? 체력은요? 마음은 건강합니까?”(184쪽)라는 채용 면접에서의 질문이 암시하듯, 병든 개들의 고름을 세척하고 배설을 유도하며 토한 것들을 닦아내는 일들은 강한 체력을 필요로 하며, 보호자들이 실시간으로 감시할 수 있는 CCTV가 녹화되는 환경에서 “기껏해야 개 똥오줌이나 치우고 있는 주제에”(201쪽) 우리 개를 더 신경 써주지 않는다는 날선 마음들을 견뎌야 한다. 결국 신체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모두 소진되어 가면서도 돈을 벌어 빚을 갚아야 하기에 끈질기게 일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마주할 때, “그럼 오팔이 돌본다고 다 같이 굶어 죽어”(202쪽)야 하냐는 물음을 그저 이기적인 돌봄 제공자(인간)의 수혜자(개)를 향한 지배적 영향력 행사로만 치부할 수 없는 딜레마가 발생한다. 

   이로써 돌봄을 가로지르는 비대칭적 권력구조는 복합적인 의미를 가진다. 즉 앞서 말한 받는 쪽과 달리 주는 쪽은 돌봄의 관계에서 언제나 벗어날 수 있다는 특성은 이내 자본의 사슬과 엮여 들어감에 따라, 수혜자의 필요 충족은 대체될 수 없지만 서비스 제공자는 언제든 제3자로 대체 가능하다10)는 노동의 조건으로 반전되는 것이다. 그러나 「수미」에 유독 빈번하게 등장하는 “인간적인(다운)”이라는 단어가 가리키듯, 소설이 보다 오래 눈길을 두는 곳은 비대칭성이 흐릿해지거나 전도되는 와중에도 여전히 부정할 수 없는 불균등한 힘의 격차, 그중에서도 어떤 생명의 목숨까지도 다름 아닌 ‘인간적인’ 선택으로 인해 좌우될 수 있다는 선명한 간극의 한가운데이다. 


   3.

   최근의 인류세 담론은 이전과는 조금 다른 형태로 되돌아오고 있는 듯하다. 전 지구적 재난으로 인해 세계의 끝에 다다랐다는 위기의식은 그간의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반성적 사고를 촉구했으며, 이에 따라 비인간 객체의 능동적 행위자성을 강조하고 인간 주체의 위력은 축소시키는 방식으로 이분법적 경계를 없애고자 하는 시도들을 낳았다. 그런데 이처럼 인간과 비인간의 동등성을 내세우며 인간을 겸손한 지위로 끌어내리려는 기존의 움직임은 지금 전면적인 비판을 마주하고 있다. 인간을 다른 비인간 존재자들과 똑같은 “여느 독특한 실재들 중 하나”로 위치시키는 것이 과연 윤리적으로 책임 있는 태도인지11)를묻는 질문과, 비인간 물질들 사이로 물러남으로써 공생을 실천하고자 하는 선택이 “어딘지 너무 후련한 청산처럼 느껴”진다12)는 목소리가 그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위의 지적들이 도리어 인간이 인류세를 초래할 만큼 막강한 행위능력을 가진 핵심 행위자임을 인정해야 한다13)는 주장, 다시 말해 인간은 결코 지울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발자국을 지구에 남겨버렸다는 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14)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이다.

   이렇듯 인간이 얼마나 압도적인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가를 다시금 새롭게 사유하고자 할 때, 「수미」는 인간 종의 힘이 위협적으로 행사되는 순간을 그려냄으로써 사회구조적 책임의 영역을 예리하게 건드린다. 소설 속 ‘나’는 구 원장이 케어비 문제뿐만 아니라 건강이 급격히 나빠져 예후가 좋지 않은 개들의 죽음 또한 앞당겨 안락사시킨다는 것을 알기에, 평소 유독 정을 주었던 태풍이의 아랫배에서 멍울이 잡혀짐에도 불구하고 원장에게 콜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태풍이가 안락사될 위험을 막기 위해 한 ‘나’의 선택은 이후 병을 손쓸 수 없이 진행시켜 끝내 태풍이를 고통스럽게 죽도록 만든다. 이는 태풍이를 지키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행위였음이 분명하나, 소설은 자책하는 ‘나’를 위로하고 보듬기보다 어쨌거나 “보호자에게 강제로 방아쇠를 당기게 한 건 다름 아닌 나”(248쪽)라는 서늘한 결과를 들이민다. 센터의 또 다른 직원인 소란이 아끼던 개가 안락사의 대상이 되는 장면에서 역시 슬픔의 감정을 전면화하기보다 과연 그 개가 다른 개였어도 울었을지를 되물음으로써, 선택지를 점유하고 있는 유일한 종으로서 인간의 절대적 개입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돌봄이 온정주의만으로는 다 설명될 수 없으며 철저히 사회적으로 구조지어져 있다는 사실은 소설의 나머지 반쪽을 이루는 전수미의 이야기와 접합되며 더욱 뚜렷해진다. ‘나’의 언니 전수미는 온갖 폭력적인 행패를 부리며 집안에서 군림하는 인물로, 그가 무심히 저지른 짓에 가족들 모두가 거주의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며 집을 떠나야 할 만큼 힘의 세기는 치우쳐 있다. 심지어는 ‘나’의 경우 전수미가 벌인 일로 인해 불특정 다수에게 구타를 당하는 등 직·간접적인 생존의 위협에 무방비로 노출된다. 다만 이처럼 타인에 대한 지배력을 과시하는 전수미의 그림자가 드리울 때마다, ‘나’가 “허기진 개” 혹은 “꼬리 잘린 개”(239쪽)의 이미지에 비유된다는 특징은 주목할 만하다. 즉 한없이 “전능해진”(178쪽) 전수미와 예민하게 움츠러든 짐승의 감각을 체화한 ‘나’ 사이의 “어딘가 기우뚱한 모양새”(208쪽)는, 돌보던 개(태풍이)의 목숨을 자기도 모르게 앗아가 버릴 수 있는 인간(‘나’)의 영향력과 포개어지는 것이다. 더욱이 데칼코마니처럼 각자가 저지른 사건의 현장을 오래도록 주시하는 CCTV 속 모습들에 이어, 거울 앞에서 ‘나’ 스스로를 전수미의 모습과 겹쳐 보는 장면에 다다른다면 그 상은 한층 선명하게 맺힌다.

   결국 돌봄을 주고받는 과정에서의 비대칭성은 손쉽게 권력관계로 뒤바뀔 수 있고, 반대로 선행하는 권력의 위계 또한 돌봄관계에 작용할 수 있다15)는 특성은 이렇듯 인간과 비인간의 사이를 경유해 날카로워진다. 비인간 타자가 돌봄의 대상으로 출현함으로써, 모호하게 뭉뚱그려지곤 했던 돌봄에서의 억압과 착취의 문제가 도드라지게 새겨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돌봄의 상호성을 내세운 논의의 무책임한 팽창은 곧 인간의 특권을 무화시킴으로써 비인간과 화해하자는 평평한 주장과 접속하며, 매끈하게 덮여 있던 윤리적 허점을 들춰낸다. 


   4. 

   돌봄이 기대고 있는 전제, 즉 인간 누구나 돌봄이 필요하다는 보편적 취약성 개념에 호소하는 것만으로는 무의미한 이상을 반복하게 될 뿐16)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일은 중요하다. 자칫 강제나 차별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비대칭적 관계가 함축하듯, 돌봄의 기초인 상호의존성 역시 언제나 긍정적이고 온화한 가치일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복수의 행위자로 이루어진 상호행위로써 돌봄의 관계, 나아가서 인간과 비인간이 돌봄을 주고받을 새로운 공생의 관계란 낙관적이기보다 차라리 파괴적인 “공포와 전율의 경험으로 상상될 수 있”17)는 무엇이다. 

   「수미」의 말미에서 ‘나’는 구 원장의 반윤리적 행태에 대해 내부 고발을 하기로 결심한다. 이는 한편으로 ‘나’ 자신을 고발하는 선택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스스로에게 피해를 입히는 일이지만, ‘나’는 “구 원장과 다르다는 걸”(256쪽) 증명해 내고자 이를 기꺼이 감수한다. 태풍이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건은 예상치 못한 “어쩔 수 없는 일”(237쪽)이었다며 여느 존재들 사이로 슬쩍 물러나려 했던 ‘나’가 더 이상 그 비밀을 간직하지 않기로 작정하는 마음은, 의도와 상관없이 자신의 돌봄이 타자에게 폭력으로 기능할 수 있을 만큼 불균형한 권력의 배치를 직시하려는 의지에 다름 아니다.18) 그렇기에 구 원장과 똑같은 인간이고 싶지 않다는 ‘나’의 욕망은 비인간 대상의 고통스러운 죽음을 만들어내는 막강한 영향력을 더는 “모른 척”(256쪽)하지 않고, 돌봄을 수행하는 주체로서 ‘인간적인’ 책임을 다하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전수미는 재판 내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만 말한다. 자신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고, 누가 그런 상황을 짐작이나 했겠느냐고 묻는다. 전수미의 변호사도 얼굴을 한껏 찌그린 채 호소한다. 죽겠다고 작정한 사람을 누가, 무슨 수로 말릴 수 있겠습니까? 그건 인간이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중략)

   전수미가 죽인, 정확하게는 죽도록 내버려두었거나 죽음에 이르도록 협조한 노인은 모두 두 명이다.(231-232쪽, 인용자 강조)



   소설은 이야기의 후반부에 ‘나’로 인한 태풍이의 죽음 한쪽으로 전수미가 자신이 일하는 요양원에서 노인 두 명을 살해한 혐의를 받게 된 사건을 펼쳐 놓는다. 전수미와 그의 변호사는 재판 내내 “그건 인간이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는 흐릿한 말로 대응하지만, 이는 곧바로 “죽도록 내버려두었거나 죽음에 이르도록 협조”한 것 또한 “죽인” 것과 다르지 않다는 정확한 언어로 되받아쳐진다. 물론 전수미의 경우 정황상 고의적 선택에 가까우나 ‘나’는 주지하듯 의도를 정반대로 비껴간 경우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둘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소설이 반복해서 ‘나’와 전수미를 겹쳐 보이는 이유에는, 파괴적인 결과는 의지와 무관하게 초래될 수 있음을 강조하고자 하는 또 다른 의지가 내재되어 있다. 즉 “무지와 회피”(238쪽)에 따른 방조 역시도 그저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라 짐작할 수조차 없을 만큼의 영향력을 지니고 있음을 알았을 때, 비로소 “전수미가 되지 않기 위”(252쪽)한 결심은 가능해지는 것이다. 

   소설 전반에서 묘사되는 전수미의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얼굴”(173쪽)과 “아주 약간의 부기도 존재하지 않는 매끈한 눈”(174쪽) 아래에는 그가 조성해 놓은 가학적 질서가 자리한다. 결말에 이르러 마침내 구 원장의 돌봄센터가 폐업을 하고, 각자 남은 물건들을 가져가라는 연락을 받은 ‘나’는 마지막으로 센터를 다시 찾는다. 이때 이미 비어버린 건물 앞에서 무언가를 “그냥 좀, 보고 싶었”(255쪽)다고 중얼거리는 ‘나’의 목소리는 불쾌한 끈적거림을 정면으로 가로지른 뒤의 자국을 그 시선의 끝에 위치시킨다. 울퉁불퉁한 갈등의 요소들을 깨끗하게 덮고 있었던 껍데기를 들어올린 후 보이는 것은 복수의 행위자 사이의 좁혀질 수 없는 비대칭적 거리를 ‘제대로’ 알자는 요청일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의 앎이 인간 주체가 지닌 특권적 지위의 우월성을 다시금 조명하는 작업과 분리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돌봄은 표준화된 규칙에 입각해 작동될 수 없으며, 개별 특성과 맥락에 따른 타인의 필요에 적절히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된다. 이러한 특성은 인간과 비인간의 동등한 행위자성을 앞세워 이분법을 해체한 공생을 실천하자는 도덕적 당위에 균열을 내고, 대등성이나 균질성은 극히 일부에만 존재할 뿐 대부분의 관계는 각각의 불평등한 역학에 점령되어 있다는 사실19)을 말하는 데 유의미한 시각이 된다. 특히 다각도로 당면해 오는 위기와 재난의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음’의 태도를 넘어 인간 주체는 끝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의 문제를 제기한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유효한 논의이다. 다만 돌봄을 둘러싼 압도적 비대칭성의 위계를 직시하도록 하는 충격 요법이 즉각 스스로의 폭력성을 인정하고 박탈당한 대상에게 응답의 책임을 다하려는 이행을 담보해 주는 것은 아니기에, 그 연결고리를 부단히 모색하는 일은 중요한 과제로 남는다. 결코 공평한 분배의 정의나 이타적인 사랑에만 기대를 걸 수 없는 무엇의 자리를 명명하기 위한 더 많은 서사들이 필요하다.



1) 민선혜, 「돌봄의 낭만화를 벗어던지는 문학」, 『창작과비평』 2023년 봄호.

2) 전청림, 「돌봄의 극사적 에로스 – 사적 돌봄과 공적 돌봄의 경계에서」, 웹진 《비유》 2022년 12월호.

3) 강도희, 「돌봄에 대해 우리가 대화하지 않은 것들」,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3년 겨울호, 71쪽.

4) 관련된 논의로 좌담 〈한국문학의 현재와 비평의 역할〉(『문학인』 2024년 여름호) 78-79쪽 참조.

5) 우에노 지즈코, 『돌봄의 사회학』, 조승미·이혜진·공영주 옮김, 오월의봄, 2024, 100-101쪽.

6) 조안 C. 트론토, 『돌봄 민주주의』, 김희강·나상원 옮김, 아포리아, 2014, 71-73쪽; 이노우에 타이치, 『동물 윤리의 최전선 – 비판적 동물 연구 입문』, 정혜원 옮김, 두번째테제, 2024, 374-375쪽.

7) 우에노 지즈코, 앞의 책, 118쪽.

8) 안보윤, 「수미」, 『현대문학』 2024년 1월호, 164-259쪽. 이하의 작품 인용은 괄호 안 쪽수만 표기하여 밝힌다.

9) 우에노 지즈코, 앞의 책, 101-102쪽.

10) 위의 책, 231-237쪽.

11) 진태원, 「인류세와 민주주의」, 『문학동네』 2024년 봄호, 165쪽.

12) 황정아, 「이토록 문제적인 ‘인간’ - 켄 리우의 포스트휴먼 소설」, 『창작과비평』 2024년 봄호, 337쪽.

13) 진태원, 앞의 글, 166쪽.

14) 황정아, 앞의 글, 338쪽.

15) 우에노 지즈코, 앞의 책, 25쪽.

16) 백영경, 「돌봄이 정치적 기획이 되려면」, 『창작과비평』 2024년 여름호, 307쪽.

17) 김항, 「인간 말고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까? - 요즘 ‘비판’에 대한 소박한 단상」, 『문학들』 2024년 여름호, 43쪽.

18) 자신의 돌봄이 다른 존재를 살린다는 생각은 대개 착각일 뿐만 아니라 그 대상을 향한 착취나 학대, 죽음까지도 정당화할 수 있다는 아이러니에 대한 적확한 지적으로는 김보경의 글 「돌봄의 아이러니 – 안보윤, 「수미」」(『현대문학』 2024년 2월호)가 있다. 해당 글은 이러한 돌봄의 윤리적 딜레마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권력(power)을 가지고 돌봄을 수행하는 주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본고는 앞선 통찰을 계승하는 한편으로, 돌봄에서의 불공평한 권력관계를 인류세 논의와 적극적으로 겹쳐 독해함으로써 문제의식을 보다 확장하고자 하였다.

19) 이노우에 타이치, 앞의 책, 3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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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을, 너에게

거짓을, 너에게 - 당신이 김애란의 소설을 읽으며 궁금증을 느꼈겠지만 차마 에서 답을 찾지는 못했던 문제들에 대하여 전철희 1. 환상의 끝에서 사랑을 노래하는 소녀 김애란의 첫 소설집 『달려라 아비』는 2005년에 출간됐다. 이 책을 처음 볼 당시 나는 애니메이션 (이하 으로 약칭)이 떠올랐다. 그때의 문단에서는 “근대문학의 종언”과 “미래파”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었다. 문학인들이 고담준론을 나누는데 초신성의 소설에서 애니메이션을 연상한 내가 부끄러웠다. 이제 20년이 지났고 김애란은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그동안 나는 등단을 했고 평론가의 책무가 비약과 과장이라는 하스미 시게히코의 말에 공감할 수 있을 정도의 연식을 쌓았다. 다소 늦은 감은 있지만 20년 전의 생각을 글로 정리하고 이를 기반으로 김애란의 작품들을 복기해 보려 한다. 거두절미하자면 『달려라, 아비』의 주제는 하얀 거짓말(white lie)이다. 이 책의 표제작 「달려라, 아비」는 편모가정에서 자란 딸의 이야기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오래전 가출했다. “나쁘면서 불쌍하기까지 한 사람”1)이었던 아버지는 가족부양의 책무를 벗어던지겠다는 무책임성 내지는 다른 여자를 만나려는 욕망 때문에 집을 나간 것으로 보인다. 딸은 그런 정황을 알면서도 아버지가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전 세계를 누비면서 달리기를 할 것이라고 상상한다. 소설의 뒷부분에서 아버지의 허접했던 인생이 폭로되지만 그럼에도 딸은 자신의 상상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녀의 맹목적 ‘믿음’은 자기방어 기제의 산물이다. 자식의 입장에서 아버지의 무능함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신의 몸에 패배자의 피가 흐름을 긍정한다는 뜻이고, 아버지가 금의환향해서 명예나 재산을 상속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또한 아버지가 이기적인 무뢰한이었다면 버려진 가족들로서는 그에 대한 원한과 분노를 가질 수밖에 없다. 불신과 미움은 본인을 병들게 하는 감정이다. 아버지가 그럭저럭 괜찮은 사람이었다는 거짓된 믿음은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라이너스의 담요로 유용하다. 당시 주목받은 작품 중 하나였던 「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는 소녀와 아버지의 대화 장면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소녀는 아버지에게 “나는 어떻게 태어났어요?”라고 묻는다. 농담에 가까운 거짓말로 일관하던 아버지가 진실을 말하려던 찰나 소녀는 잠이 들고 자신의 탄생에 대한 상상을 시작한다. 소녀가 아버지의 답을 회피한 이유는 쉽게 짐작 가능하다. “나는 어떻게 태어났어요?”라는 존재론적 질문에 대한 답은 밋밋하고 초라하다. 남녀가 성관계를 할 때 정자가 난자에 착상과 수정을 해서 아기가 생겼다는 생물학적인 설명은 낭만적이지 않다. “부모님이 사랑해서 자식이 태어났단다”라는 말은 손발이 오글거리고 “너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갖고 태어났단다&rdquo

  • 전철희
  • 2026-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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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에서 두 번째 폭력

끝에서 두 번째 폭력 - 최은미의 「김춘영」과 현호정의 「달빛」 이미진 1. 오르페우스는 뱀에 물려 죽은 아내를 도로 데려오기 위해 타르타로스로 내려갔다. 그의 슬픈 음악을 들은 하데스는 잔인한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오르페우스에게 에우리디케를 이승으로 데려가는 것을 허락했다. 하데스는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에우리디케가 햇빛에 안착할 때까지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된다는 조건이었다. 에우리디케는 오르페우스의 리라 소리를 따라 캄캄한 통로를 올라갔고, 오르페우스는 자기가 햇빛에 안착한 그 순간 비로소 그녀가 아직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하고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녀를 영원히 잃었다.1) 팔레스타인 문제를 꾸준히 다루어 온 일본의 비평가 오카 마리는 『기억/서사』에서 탈 자아타르 포위와 학살 사건을 다룬 리아나 바드르의 소설 『거울의 눈(1991)』이라는 작품을 소개한다. 베이루트 교외에 있는 탈 자아타르 난민 캠프는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쫓겨온 사람들이 30년간 난민 생활을 하고 있던 곳으로, 1975년부터 1976년에 걸쳐 레바논의 기독교도 우파 민병대에 의해 몇 개월간 지속적으로 파괴되었다. 『거울의 눈』은 이 학살 사건에서 살아남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작가가 7년에 걸쳐 인터뷰한 증언들을 토대로 집필된 소설이다. 오카 마리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소설 중반부 돌연 등장했다 사라지는 ‘나’라는 인물이다. 그가 캠프 밖에서 안으로 잠입했다는 설정은 그간 비인칭의 시점을 따라 캠프 안의 상황에 몰입했던 독자에게 갑작스러운 거리감을 느끼게 만든다. 이 거리감은 캠프 안의 전사 중 한 사람인 하산이 캠프 밖의 전사들을 비판하는 다음과 같은 말로 대변된다. “뜨거운 물 속에 손을 넣고 있는 사람은 찬물에 손을 넣고 있는 사람과 똑같이 느낄 수 없다.”2) 오카 마리는 하산의 말보다는 캠프 밖의 사람이면서 동시에 안의 사람이기도 한 ‘나’라는 인물이 놓인 이중적인 위치에 더욱 관심을 갖는다. 『거울의 눈』의 작가가 왜 ‘나’라는 인물을 통해 독자에게 혼란을 초래하는지를 말이다. 『기억/서사』에는 또 다른 소설 발자크의 「아듀」도 등장한다. 이 소설은 귀부인이었으나 전쟁 중 처참한 일을 겪어 기억을 잃어버린 스테파니와 그녀를 사랑한 필립의 이야기다. 재회 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스테파니를 보고 절망한 필립은 당시의 상황을 재현해 그녀에게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아주고자 한다. 하지만 힘겹게 기억을 되찾은 스테파니는 그 자리에서 죽고 만다.3) 2. 나는 쫓겨날 것이다.4) ‘사건’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사건’을 온전히 말할 수 없으므로5) 다른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 지그프리드 크라카우어는 『끝에서 두 번째 세계』의 이라는 챕터에서 에우리디케를 잃어버린 오르페우스를 역사가로 호명함으로써, 그에게 ‘상실 이후’의 임무를 부여한다. 오르페우스와 마찬가지로 역사가는

  • 이미진
  • 2026-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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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하는 기억의 공간 3] 『자작나무 숲』과 쓰레기의 정치학

박서양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6년 3월부터 2026년 5월까지 으로 3회 연재됩니다. 부패하는 기억의 공간 ㅡ 『자작나무 숲』과 쓰레기의 정치학(3) 박서양 1부에서는 「빈집」을 중심으로 쓰레기가 공적 처리 시스템에 들어가기 이전, 사적 공간에서 수행되는 ‘버림 노동’과 그 경계의 문제를 살피고, 『자작나무 숲』에서 할머니가 거주하는 쓰레기 집을 통해 쓰레기의 인접성과 배치의 정치성을 검토했다. 2부에서는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손녀의 글쓰기를 중심으로 개연성이 무엇을 서사로 승인하고 무엇을 배제하는지를 살피며, 그 과정에서 탈락한 이야기들이 어떻게 쓰레기와 인접하게 되는지를 분석했다. 이제 연작의 마지막이 될 3부에서는 이러한 배제와 잔여를 가능하게 해 온 서사의 구조를 검토하며, 수직적 깊이에 기반한 개연성의 조직이 어떻게 흔들리고 수평적 배열로 전환되는지를 살피고자 한다. 1. 개연성과 중심: 서사의 수직적 구조 주지하듯 개연성은 사건들이 인과적 필연성에 따라 조직되며 서사적 설득력을 획득하는 원리다. 그러나 이 인과는 서사를 하나의 구심점에 수렴시키기 위해, 핵심을 향해 응집되지 못하는 요소들을 배제하고 제거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인과관계에 맞지 않는 사건은 이야기에서 제거되고, 반복되는 일상의 노동, 신체의 미세한 감각, 명확한 동기로 설명되지 않는 충동들은 쓸모없다고 판단되어 버려진다. 다시 말해 개연성은 서사 내부에서 질서에 어긋나는 요소들을 걸러내는 원리로 기능한다. 이때 서사의 개연성을 따르지 않는 것들은 언어화되지 못한 채 잔여로 남아 서사 바깥의 영역을 형성하고, 이는 매끄러운 서사 구조에 균열을 내는 잠재적 가능성으로 실재한다. 하지만 이때 무엇을 개연적인 서사로 인정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기준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개연성의 원리는 때로 현실의 권력관계와 결합하여 특정한 인과를 필연적인 것으로 구성하고, 그 과정에서 불균등한 배치를 정당화하거나 재생산한다. 물질적 층위에서도 유사한 방식의 배제가 일어난다. 더 이상 사용되거나 교환될 수 없다고 판단되는 것들은 의미와 가치를 상실한 쓰레기로 간주된다. 요컨대 서사의 구조에서 탈락한 경험과 물질의 층위에서 배제된 쓰레기는 세계를 하나의 중심으로 정리하려는 질서가 필연적으로 남기는 잔여다. 『자작나무 숲』에서 개연성의 질서에서 벗어난 서사적 잔여와, 가치의 질서에서 배제된 사물(쓰레기)이 나란히 놓이며 공명하는 것은 이들이 동일한 배제의 구조에 놓여 있음을 드러낸다. 모든 인물이 명확하고 일관된 동기를 가져야 하고, 뿌려진 복선은 회수되어야 하며, 결말은 갈등의 원인을 해명해야 한다는 소설 작법은 목적론적이고 합리적인 주체를 전제한다. 이러한 전제는 무엇이 이야기로 인정될 수 있는지를 가르는 기준으로 작동한다. 쓰레기 집을 만들고 사체를 은닉하는 할머니의 행위나, 합리적 이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열정 속에서 부유하는 여성들의 궤적은 이 기준 앞에서 개연성이 결여된 것으로 처리되며, 괴담이나 소문으로만

  • 박서양
  • 2026-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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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판다곰젤리
    최고에요

    이거 예전에 읽었는데 스타크래프트(빨무) 한다고 깜빡하고 평을 못 남겼네요. 우연히 2024년 신춘 관련 기사보고 생각나 이제야 글 남깁니다. 기억이 안 나 다시 읽어봐야 겠네요.

    • 2024-11-25 12:26:47
    판다곰젤리
    최고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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