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울어진 자리, 돌봄과 공생의 겹
- 작성일 2024-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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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어진 자리, 돌봄과 공생의 겹
― 안보윤, 「수미」
정우주
1.
오늘날 한국문학장에서 돌봄이 뜨거운 화두라는 사실을 말하는 일은 이제 익숙히 합의된 현상이 되었다. 다양한 양상으로 돌봄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서사들에서부터 아예 돌봄을 키워드로 내세운 비평 특집들까지, 지금 돌봄의 외연은 빠르게 팽창하는 중이다. 이렇듯 돌봄 담론이 확장되는 흐름에는 특히 팬데믹을 지나오며 돌봄 공백의 문제가 수면화 되었고, 누구든 서로 의존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취약성을 절실히 체감하게 된 배경이 존재한다. 당연하게도 돌봄은 기본적으로 주체와 타자, 제공자와 수혜자라는 복수의 행위자 사이에 일어나는 행위라는 점에서, 모두가 취약하므로 상호의존해야 한다는 공동체의 관계적 가치와 자연스럽게 접속한다.
그런데 근래의 논의에서는 오히려 돌봄을 보편적인 사회 윤리로 치환할 수 없는 무언가로 지칭하려는 움직임들이 포착되고 있다. 돌봄에서 연대나 윤리만을 찾기보다 그 속의 지난함과 불쾌함을 들춰내는 데 주목하는 작업1)이나, 상호적 돌봄을 이타성이나 선함이 아닌 미성숙한 두 존재가 “서로 폐를 끼치고 받는 위험한 관계”로 정의한 목소리2) 등은 모두 사회 구성원들에게 매끄럽게 적용되는 도덕적 가치로써 돌봄의 불가능성에 방점을 둔 시도들이다. 다만 이처럼 돌봄의 관계가 지닌 온정적이고 친밀한 성격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갈등과 착취의 요소에 천착하는 일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돌봄이 바로 그 ‘관계’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에 기반한다. 다시 말해 돌봄은 철저히 사회구조적으로 배치된 역학관계에 토대를 두고 수행된다.
팬데믹 시기 이전부터 돌봄 노동이 가정 내 여성에게 전가되고 사적으로 평가절하되는 젠더 편향의 측면을 지적받으며 비판적 담론이 형성되어 왔음을 상기해 본다면, 현시점에 ‘돌봄 제공자가 돌봄 수혜자보다 권력의 우위를 점한다’는 비대칭적 관계의 구조를 역설하는 것은 그간 축적되어 온 페미니즘적 돌봄 논의에 역행하는 입장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때 돌봄의 위태롭고 끈적끈적한 지점을 부각시켰던 앞선 비평들이 돌봄의 가치가 공동체적 연대의 이름으로 단순히 포섭되어서는 안 된다는 공통된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즉 “돌봄이 총체적 위기를 해결할 만병통치약처럼 쓰이진 않을지"3) 우려하는 관점들이 빠르게 제출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 속에서, 돌봄을 둘러싼 권력관계의 비대칭성을 구태여 강조하는 행위 역시 돌봄 개념의 다층적인 결을 구분하지 않은 채 끝없이 확대되는 양태를 경계하려는 의식적 흐름과 맞닿는다.
무엇보다 돌봄은 사회학과 밀접히 결합한 실천의 영역이므로 구체성과 현장성이 중시되지만, 한편으로 지속되는 팽창이 상징하듯 돌봄에 내재된 의존과 책임이 교차하는 원리는 인접 의제와의 유의미한 연결 가능성을 가진다.4) 그렇다면 이제 돌봄을 확장하되, ‘어떻게’ 확장시킬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는 문제가 중요해진다. 이때 이 글이 시도하고 있는 접촉, 그러니까 돌봄으로 맺어진 관계의 기울어진 격차를 비인간과의 적대적 공생을 경유해 사유하려는 방식은 서로 다른 두 영역을 혼종적으로 뒤섞는 데 그 지향점이 있지 않다. 일상적 위기의 감각 속 부풀 듯 가동되는 ‘우리’에 대한 상상력 앞에서, 각각의 논점을 실효성의 차원으로 뾰족하게 벼리고자 하는 데 외려 목적을 둔다. 그리하여 이 글은 인류세라는 렌즈를 통해 돌봄의 제공자와 수혜자 간 불균형한 역학관계를 새삼스레 직시함으로써, 공동체적 사회 윤리가 가진 헐거운 보편성을 보다 예각화하는 방식으로 돌봄 논의를 확대해 보려는 모순적 의도에서 쓰였다.
2.
우에노 지즈코에 따르면 돌봄은 분명 복수의 행위자가 관여하는 상호행위이지만, 그 관계란 “결코 호혜적이지도 않고 대등한 교환도 아니”다.5) 이는 실제 돌봄 상황의 경우 돌봄을 하는 쪽과 받는 쪽의 양자적 상호성이 성립되는 장면이 오히려 예외이므로, 정해진 원칙이 아닌 개별 타자의 주관적 반응에 민감한 응답성을 지향하는 입장과도 상통한다.6) 위와 같은 사유들은 일면 돌보는 이의 일방적 배려와 희생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나, 거꾸로 말하면 타자에게 돌봄을 제공할 수 있을 만큼의 더 큰 힘을 소유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 가능하다. 특히 일단 돌봄의 필요가 발생한 이상 돌봄 수혜자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는 반면 돌봄 제공자는 스스로 그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7)을 떠올려 볼 때, 관계의 비대칭성은 더욱 압도적으로 다가온다.
안보윤의 「수미」8)에서 화자인 ‘나’는 늙고 병든 개들을 ‘케어’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그런데 ‘나’가 근무하는 노견돌봄센터는 다소 복합적인 지형에 놓여 있다. 반려견의 돌봄과 치료를 병행하는 요양원이자 호스피스인 이곳은 총 열 자리로 정원을 제한한 채, 마치 컨베이어 벨트처럼 앞선 개가 죽어야지만 그 공석에 다른 대기견이 입소할 수 있는 구조로 운영된다. 즉 “수의사가 직접 운영하는 노견케어시스템”(186쪽)이라는 번듯한 광고 문구를 내걸고 있지만, 그 실상에는 서로의 목숨을 움켜쥐는 죽음의 문제까지도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보다 사건을 한층 심각하게 만드는 것은 돌봄센터 원장의 비윤리적 행동이다. 구 원장의 센터에서 돈이 제때 입금되지 않거나 할부를 요청하는 등 보호자가 경제적으로 케어비를 감당하기 힘든 내색을 보이면 해당 반려견은 어김없이 안락사의 대상이 되고, 반대로 자주 면회를 오며 충분한 자본력을 증명해 보이는 보호자의 반려견은 “아주 오래 살”(198쪽) 대상으로 운명지어진다.
“그런데 개가 너무 오래 살아서 돈이 부족해지면, 곤란한 마음도 들지 않겠어요? 점점 늘어나는 케어비를 언제까지인지도 모를 긴 시간 동안 지불해야 한다면요. 그만하면 너도 나도 할 만큼 했다, 이제 그만 건너가렴,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말하게 되지 않겠느냐고요.”
(중략)
“진저리를 치게 될 때까지 놔두는 것보다 이게 훨씬 인간적인 방법일지도 몰라요.”(191-192쪽)
통장 잔고가 바닥난 미래에 고통스럽고 너저분한 죽음을 맞이하기보다, 애도할 여력이 남아 있을 때 편안하고 안전하게 보내 주는 것이 훨씬 “인간적인” 선택일 수 있다는 소설 속 발화는 의미심장하다. 이는 다시 말해 돌봄으로 맺어진 상호관계에서 ‘제공자(인간)’가 ‘수혜자(개)’의 손을 놓아버리면 언제든 깨어질 수 있다는, 철저히 불균등한 권력의 차이가 여실히 드러나는 순간인 것이다.
다만 이렇듯 자본과 생명이 직결되는 공간으로서의 돌봄센터는 바로 그러한 유상성으로 인해, 돌봄의 제공자와 수혜자 간 비대칭성이 일정 부분 완화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9) 최대한 “상황이 절박한 사람”(229쪽)만을 골라 직원으로 고용했다는 구 원장의 말처럼, ‘나’는 단기 일자리를 전전해 오다 최근에는 전세 사기 피해까지 당한 처지에 있다. 집세가 올라갈까 봐 주변에 기피시설이나 혐오시설이 들어오기를 바라는 ‘나’는 그저 생존하기 위해 센터의 터무니없는 근무시간을 버텨야 할 뿐이다. 더군다나 “비위는 좋으신가요? 체력은요? 마음은 건강합니까?”(184쪽)라는 채용 면접에서의 질문이 암시하듯, 병든 개들의 고름을 세척하고 배설을 유도하며 토한 것들을 닦아내는 일들은 강한 체력을 필요로 하며, 보호자들이 실시간으로 감시할 수 있는 CCTV가 녹화되는 환경에서 “기껏해야 개 똥오줌이나 치우고 있는 주제에”(201쪽) 우리 개를 더 신경 써주지 않는다는 날선 마음들을 견뎌야 한다. 결국 신체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모두 소진되어 가면서도 돈을 벌어 빚을 갚아야 하기에 끈질기게 일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마주할 때, “그럼 오팔이 돌본다고 다 같이 굶어 죽어”(202쪽)야 하냐는 물음을 그저 이기적인 돌봄 제공자(인간)의 수혜자(개)를 향한 지배적 영향력 행사로만 치부할 수 없는 딜레마가 발생한다.
이로써 돌봄을 가로지르는 비대칭적 권력구조는 복합적인 의미를 가진다. 즉 앞서 말한 받는 쪽과 달리 주는 쪽은 돌봄의 관계에서 언제나 벗어날 수 있다는 특성은 이내 자본의 사슬과 엮여 들어감에 따라, 수혜자의 필요 충족은 대체될 수 없지만 서비스 제공자는 언제든 제3자로 대체 가능하다10)는 노동의 조건으로 반전되는 것이다. 그러나 「수미」에 유독 빈번하게 등장하는 “인간적인(다운)”이라는 단어가 가리키듯, 소설이 보다 오래 눈길을 두는 곳은 비대칭성이 흐릿해지거나 전도되는 와중에도 여전히 부정할 수 없는 불균등한 힘의 격차, 그중에서도 어떤 생명의 목숨까지도 다름 아닌 ‘인간적인’ 선택으로 인해 좌우될 수 있다는 선명한 간극의 한가운데이다.
3.
최근의 인류세 담론은 이전과는 조금 다른 형태로 되돌아오고 있는 듯하다. 전 지구적 재난으로 인해 세계의 끝에 다다랐다는 위기의식은 그간의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반성적 사고를 촉구했으며, 이에 따라 비인간 객체의 능동적 행위자성을 강조하고 인간 주체의 위력은 축소시키는 방식으로 이분법적 경계를 없애고자 하는 시도들을 낳았다. 그런데 이처럼 인간과 비인간의 동등성을 내세우며 인간을 겸손한 지위로 끌어내리려는 기존의 움직임은 지금 전면적인 비판을 마주하고 있다. 인간을 다른 비인간 존재자들과 똑같은 “여느 독특한 실재들 중 하나”로 위치시키는 것이 과연 윤리적으로 책임 있는 태도인지11)를묻는 질문과, 비인간 물질들 사이로 물러남으로써 공생을 실천하고자 하는 선택이 “어딘지 너무 후련한 청산처럼 느껴”진다12)는 목소리가 그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위의 지적들이 도리어 인간이 인류세를 초래할 만큼 막강한 행위능력을 가진 핵심 행위자임을 인정해야 한다13)는 주장, 다시 말해 인간은 결코 지울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발자국을 지구에 남겨버렸다는 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14)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이다.
이렇듯 인간이 얼마나 압도적인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가를 다시금 새롭게 사유하고자 할 때, 「수미」는 인간 종의 힘이 위협적으로 행사되는 순간을 그려냄으로써 사회구조적 책임의 영역을 예리하게 건드린다. 소설 속 ‘나’는 구 원장이 케어비 문제뿐만 아니라 건강이 급격히 나빠져 예후가 좋지 않은 개들의 죽음 또한 앞당겨 안락사시킨다는 것을 알기에, 평소 유독 정을 주었던 태풍이의 아랫배에서 멍울이 잡혀짐에도 불구하고 원장에게 콜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태풍이가 안락사될 위험을 막기 위해 한 ‘나’의 선택은 이후 병을 손쓸 수 없이 진행시켜 끝내 태풍이를 고통스럽게 죽도록 만든다. 이는 태풍이를 지키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행위였음이 분명하나, 소설은 자책하는 ‘나’를 위로하고 보듬기보다 어쨌거나 “보호자에게 강제로 방아쇠를 당기게 한 건 다름 아닌 나”(248쪽)라는 서늘한 결과를 들이민다. 센터의 또 다른 직원인 소란이 아끼던 개가 안락사의 대상이 되는 장면에서 역시 슬픔의 감정을 전면화하기보다 과연 그 개가 다른 개였어도 울었을지를 되물음으로써, 선택지를 점유하고 있는 유일한 종으로서 인간의 절대적 개입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돌봄이 온정주의만으로는 다 설명될 수 없으며 철저히 사회적으로 구조지어져 있다는 사실은 소설의 나머지 반쪽을 이루는 전수미의 이야기와 접합되며 더욱 뚜렷해진다. ‘나’의 언니 전수미는 온갖 폭력적인 행패를 부리며 집안에서 군림하는 인물로, 그가 무심히 저지른 짓에 가족들 모두가 거주의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며 집을 떠나야 할 만큼 힘의 세기는 치우쳐 있다. 심지어는 ‘나’의 경우 전수미가 벌인 일로 인해 불특정 다수에게 구타를 당하는 등 직·간접적인 생존의 위협에 무방비로 노출된다. 다만 이처럼 타인에 대한 지배력을 과시하는 전수미의 그림자가 드리울 때마다, ‘나’가 “허기진 개” 혹은 “꼬리 잘린 개”(239쪽)의 이미지에 비유된다는 특징은 주목할 만하다. 즉 한없이 “전능해진”(178쪽) 전수미와 예민하게 움츠러든 짐승의 감각을 체화한 ‘나’ 사이의 “어딘가 기우뚱한 모양새”(208쪽)는, 돌보던 개(태풍이)의 목숨을 자기도 모르게 앗아가 버릴 수 있는 인간(‘나’)의 영향력과 포개어지는 것이다. 더욱이 데칼코마니처럼 각자가 저지른 사건의 현장을 오래도록 주시하는 CCTV 속 모습들에 이어, 거울 앞에서 ‘나’ 스스로를 전수미의 모습과 겹쳐 보는 장면에 다다른다면 그 상은 한층 선명하게 맺힌다.
결국 돌봄을 주고받는 과정에서의 비대칭성은 손쉽게 권력관계로 뒤바뀔 수 있고, 반대로 선행하는 권력의 위계 또한 돌봄관계에 작용할 수 있다15)는 특성은 이렇듯 인간과 비인간의 사이를 경유해 날카로워진다. 비인간 타자가 돌봄의 대상으로 출현함으로써, 모호하게 뭉뚱그려지곤 했던 돌봄에서의 억압과 착취의 문제가 도드라지게 새겨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돌봄의 상호성을 내세운 논의의 무책임한 팽창은 곧 인간의 특권을 무화시킴으로써 비인간과 화해하자는 평평한 주장과 접속하며, 매끈하게 덮여 있던 윤리적 허점을 들춰낸다.
4.
돌봄이 기대고 있는 전제, 즉 인간 누구나 돌봄이 필요하다는 보편적 취약성 개념에 호소하는 것만으로는 무의미한 이상을 반복하게 될 뿐16)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일은 중요하다. 자칫 강제나 차별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비대칭적 관계가 함축하듯, 돌봄의 기초인 상호의존성 역시 언제나 긍정적이고 온화한 가치일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복수의 행위자로 이루어진 상호행위로써 돌봄의 관계, 나아가서 인간과 비인간이 돌봄을 주고받을 새로운 공생의 관계란 낙관적이기보다 차라리 파괴적인 “공포와 전율의 경험으로 상상될 수 있”17)는 무엇이다.
「수미」의 말미에서 ‘나’는 구 원장의 반윤리적 행태에 대해 내부 고발을 하기로 결심한다. 이는 한편으로 ‘나’ 자신을 고발하는 선택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스스로에게 피해를 입히는 일이지만, ‘나’는 “구 원장과 다르다는 걸”(256쪽) 증명해 내고자 이를 기꺼이 감수한다. 태풍이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건은 예상치 못한 “어쩔 수 없는 일”(237쪽)이었다며 여느 존재들 사이로 슬쩍 물러나려 했던 ‘나’가 더 이상 그 비밀을 간직하지 않기로 작정하는 마음은, 의도와 상관없이 자신의 돌봄이 타자에게 폭력으로 기능할 수 있을 만큼 불균형한 권력의 배치를 직시하려는 의지에 다름 아니다.18) 그렇기에 구 원장과 똑같은 인간이고 싶지 않다는 ‘나’의 욕망은 비인간 대상의 고통스러운 죽음을 만들어내는 막강한 영향력을 더는 “모른 척”(256쪽)하지 않고, 돌봄을 수행하는 주체로서 ‘인간적인’ 책임을 다하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전수미는 재판 내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만 말한다. 자신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고, 누가 그런 상황을 짐작이나 했겠느냐고 묻는다. 전수미의 변호사도 얼굴을 한껏 찌그린 채 호소한다. 죽겠다고 작정한 사람을 누가, 무슨 수로 말릴 수 있겠습니까? 그건 인간이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중략)
전수미가 죽인, 정확하게는 죽도록 내버려두었거나 죽음에 이르도록 협조한 노인은 모두 두 명이다.(231-232쪽, 인용자 강조)
소설은 이야기의 후반부에 ‘나’로 인한 태풍이의 죽음 한쪽으로 전수미가 자신이 일하는 요양원에서 노인 두 명을 살해한 혐의를 받게 된 사건을 펼쳐 놓는다. 전수미와 그의 변호사는 재판 내내 “그건 인간이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는 흐릿한 말로 대응하지만, 이는 곧바로 “죽도록 내버려두었거나 죽음에 이르도록 협조”한 것 또한 “죽인” 것과 다르지 않다는 정확한 언어로 되받아쳐진다. 물론 전수미의 경우 정황상 고의적 선택에 가까우나 ‘나’는 주지하듯 의도를 정반대로 비껴간 경우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둘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소설이 반복해서 ‘나’와 전수미를 겹쳐 보이는 이유에는, 파괴적인 결과는 의지와 무관하게 초래될 수 있음을 강조하고자 하는 또 다른 의지가 내재되어 있다. 즉 “무지와 회피”(238쪽)에 따른 방조 역시도 그저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라 짐작할 수조차 없을 만큼의 영향력을 지니고 있음을 알았을 때, 비로소 “전수미가 되지 않기 위”(252쪽)한 결심은 가능해지는 것이다.
소설 전반에서 묘사되는 전수미의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얼굴”(173쪽)과 “아주 약간의 부기도 존재하지 않는 매끈한 눈”(174쪽) 아래에는 그가 조성해 놓은 가학적 질서가 자리한다. 결말에 이르러 마침내 구 원장의 돌봄센터가 폐업을 하고, 각자 남은 물건들을 가져가라는 연락을 받은 ‘나’는 마지막으로 센터를 다시 찾는다. 이때 이미 비어버린 건물 앞에서 무언가를 “그냥 좀, 보고 싶었”(255쪽)다고 중얼거리는 ‘나’의 목소리는 불쾌한 끈적거림을 정면으로 가로지른 뒤의 자국을 그 시선의 끝에 위치시킨다. 울퉁불퉁한 갈등의 요소들을 깨끗하게 덮고 있었던 껍데기를 들어올린 후 보이는 것은 복수의 행위자 사이의 좁혀질 수 없는 비대칭적 거리를 ‘제대로’ 알자는 요청일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의 앎이 인간 주체가 지닌 특권적 지위의 우월성을 다시금 조명하는 작업과 분리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돌봄은 표준화된 규칙에 입각해 작동될 수 없으며, 개별 특성과 맥락에 따른 타인의 필요에 적절히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된다. 이러한 특성은 인간과 비인간의 동등한 행위자성을 앞세워 이분법을 해체한 공생을 실천하자는 도덕적 당위에 균열을 내고, 대등성이나 균질성은 극히 일부에만 존재할 뿐 대부분의 관계는 각각의 불평등한 역학에 점령되어 있다는 사실19)을 말하는 데 유의미한 시각이 된다. 특히 다각도로 당면해 오는 위기와 재난의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음’의 태도를 넘어 인간 주체는 끝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의 문제를 제기한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유효한 논의이다. 다만 돌봄을 둘러싼 압도적 비대칭성의 위계를 직시하도록 하는 충격 요법이 즉각 스스로의 폭력성을 인정하고 박탈당한 대상에게 응답의 책임을 다하려는 이행을 담보해 주는 것은 아니기에, 그 연결고리를 부단히 모색하는 일은 중요한 과제로 남는다. 결코 공평한 분배의 정의나 이타적인 사랑에만 기대를 걸 수 없는 무엇의 자리를 명명하기 위한 더 많은 서사들이 필요하다.
1) 민선혜, 「돌봄의 낭만화를 벗어던지는 문학」, 『창작과비평』 2023년 봄호.
2) 전청림, 「돌봄의 극사적 에로스 – 사적 돌봄과 공적 돌봄의 경계에서」, 웹진 《비유》 2022년 12월호.
3) 강도희, 「돌봄에 대해 우리가 대화하지 않은 것들」,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3년 겨울호, 71쪽.
4) 관련된 논의로 좌담 〈한국문학의 현재와 비평의 역할〉(『문학인』 2024년 여름호) 78-79쪽 참조.
5) 우에노 지즈코, 『돌봄의 사회학』, 조승미·이혜진·공영주 옮김, 오월의봄, 2024, 100-101쪽.
6) 조안 C. 트론토, 『돌봄 민주주의』, 김희강·나상원 옮김, 아포리아, 2014, 71-73쪽; 이노우에 타이치, 『동물 윤리의 최전선 – 비판적 동물 연구 입문』, 정혜원 옮김, 두번째테제, 2024, 374-375쪽.
7) 우에노 지즈코, 앞의 책, 118쪽.
8) 안보윤, 「수미」, 『현대문학』 2024년 1월호, 164-259쪽. 이하의 작품 인용은 괄호 안 쪽수만 표기하여 밝힌다.
9) 우에노 지즈코, 앞의 책, 101-102쪽.
10) 위의 책, 231-237쪽.
11) 진태원, 「인류세와 민주주의」, 『문학동네』 2024년 봄호, 165쪽.
12) 황정아, 「이토록 문제적인 ‘인간’ - 켄 리우의 포스트휴먼 소설」, 『창작과비평』 2024년 봄호, 337쪽.
13) 진태원, 앞의 글, 166쪽.
14) 황정아, 앞의 글, 338쪽.
15) 우에노 지즈코, 앞의 책, 25쪽.
16) 백영경, 「돌봄이 정치적 기획이 되려면」, 『창작과비평』 2024년 여름호, 307쪽.
17) 김항, 「인간 말고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까? - 요즘 ‘비판’에 대한 소박한 단상」, 『문학들』 2024년 여름호, 43쪽.
18) 자신의 돌봄이 다른 존재를 살린다는 생각은 대개 착각일 뿐만 아니라 그 대상을 향한 착취나 학대, 죽음까지도 정당화할 수 있다는 아이러니에 대한 적확한 지적으로는 김보경의 글 「돌봄의 아이러니 – 안보윤, 「수미」」(『현대문학』 2024년 2월호)가 있다. 해당 글은 이러한 돌봄의 윤리적 딜레마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권력(power)을 가지고 돌봄을 수행하는 주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본고는 앞선 통찰을 계승하는 한편으로, 돌봄에서의 불공평한 권력관계를 인류세 논의와 적극적으로 겹쳐 독해함으로써 문제의식을 보다 확장하고자 하였다.
19) 이노우에 타이치, 앞의 책, 3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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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속 부동산과 젠더 정치학 전지니(한경국립대 교수) * 이 글에는 종결되지 않은 웹툰과 올해 공연된 연극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투기와 여성 이 글은 한국의 부동산 현실, 그중에서도 전세 사기로 집약되는 부동산 범죄를 다룬 웹툰과 연극을 겹쳐 보려 한다. 이를 통해 동시대 대중문화 텍스트 안에서 자산 증식에 대한 소시민적 욕망이 어떻게 젠더화되어 형상화되는지를 살피고, 여성을 범죄의 가해자 혹은 피해자로 배치하는 작품 속 시도가 갖는 양면성에 대해 조망한다. 논의할 작품은 표제에 부동산을 내세워 비슷한 시기 독자, 그리고 관객과 만난 (유기 글/그림, 2024.1.13.~연재 중), (김수정 작/연출, 2023.10.14.~22.(초연), 2024.6.1.~9(재연)) 등 두 편이다. 부동산과 여성을 관련지어 논의하는 경우는 본격적인 강남 개발 이후인 1970년대 중반부터 시작됐다. 부동산 가격 상승과 서민의 박탈감, 중산층 진입의 욕망 등의 문제는 박완서의 강남 아파트를 산 교수 부인의 이야기인 「낙토의 아이들」(1978)에서부터 시작해 재개발을 둘러싼 부녀회의 욕망을 다룬 웹툰 (스토리 매미/작화 희세, 2019.05.05.~2020.09.27.)까지 꾸준히 반복되었다. 염두에 둘 점은 (유하 작/연출, 2015), (연상호 작/연출, 2018)의 경우처럼 대중문화 속에서 개발·재개발의 역학관계를 다룰 때는 남성 인물이 이야기의 중심에 놓이지만, 개발의 수혜를 입고자 하는 소시민의 욕망을 다룰 때 그 중심에는 여성이 자리한다는 점이다. 관련하여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불안한 경제상황 속에서 반복되었던 투기는 여성의 것으로 전유되는 일이 빈번했다. 전쟁 이후 사회 혼란의 주범으로 간주되었던 ‘사설계’를 주도하는 부인들이나 1970년대 후반부터 매체에 오르내린 부동산 투기의 주범 ‘복부인’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은 근현대사 속 뿌리 깊은 여성 혐오와 직결되어 있다. 정치·사회적 불안으로 발생한 투기 심리를 여성의 전유물로 간주하며 문제의 핵심을 피해 가고 비판의 대상을 국가와 체제가 아닌 여성으로 지목한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여성이 투기에 몰두하는 이유를 심리학적, 사회학적으로 분석한 기사도 있었다. 한 언론은 “복부인의 욕구 단계는 생리 욕구와 안전 욕구의 원시적인 단계에서 못 벗어나고 있다.”며 여성이 상대적으로 안전 욕구가 강하고 사회 진출이 부진한 것을 복부인이 생기는 이유로 분석하기도 했다.1) 이 와중에 투기를 여성의 것으로 지정하는 데 대한 자성의 목소리도 있었다. 1984년 한 신문 독자는 신문 기고를 통해 ‘복부인’은 여성 천시 단어로 공공매체에서 이 같은 유행어를 쓰면 안 된다고 역설한다. 그는 “이는 여성 학대의 사회적 악습에서 오는 콤플렉스를 여성의 사회 유린이라는 감정으로 희석시키려는 ‘투사’ 심리요, 또한 일종의
- 관리자
- 2024-10-01
휴먼들의 소화불량, 비인간-사물의 매혹 황녹록 밖에선 바퀴벌레의 신음소리 아버지가 숨겨 둔 약을 먹은 것입니다 어머니 내 책상 위에 아버지가 피운 모기향 좀 치우세요 시집 위에 몸 약한 날벌레들 다 떨어지잖아 동생 문 열고 들어옵니다 나는 문밖으로 재빨리 나가려고······ 동생이 소리 질렀습니다 여기 또 있어 진은영, 중1) 오래된 사물, 거슬리는 존재감 이제 우리는 반려인, 반려동물, 반려식물, 반려미생물, 반려사물 등 반려종의 경계를 구분 짓지 않기로 한다. 반려종이란 서로의 밥을 나누고 몸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는 관계를 뜻하는 말로 어떤 물질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를 의미한다. 반려들은 나눔의 상호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 못지않게 서로를 위태롭게 하고, 서로 먹다가 소화불량이 되기도 하고, 때로 죽고 죽이는 유해성의 성분도 가지고 있다.2) 그리하여 누군가의, 무엇인가의 반려가 된다는 것은 결코 무구할 수 없는 관계 속으로 이끌려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과 비인간 반려들의 낯선 이물감으로 시작되는 관계맺음은 애초에 구역감과 체기(滯氣)를 동반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관계맺음은 일상 속에서 예기치 못한 만남으로 강제될 테고, 그로부터 서로를 향한 진지한 응시의 요구가 시작된다. 그 응시는 세계에 대한 새로운 물음과 응답의 이야기로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새로운 관계맺음에 대하여 ‘영원한 동반자’라는 환상을 기대하거나, 우정 어린 돌봄으로 윤리적 책임을 지우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다른 존재들의 있음을 감각하고 그 감각에 감응하는 관계로서 반려를 말하려는 것이다. 김초엽의 소설 『지구 끝 온실』3)은 SF적 상상력을 통해 인간 지수와 사이보그 레이첼, 레이첼과 희귀식물 모스바나, 그리고 모스바나와 이희수의 혼종적 관계맺음에 대한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종의 경계를 넘어선 존재들의 반려-되기는 멸망해 가는 지구 끝에서 찾아내는 희망의 메시지로 충분히 가능해 보인다. 나아가 구원의 식물(푸른빛)이자 악마(생태계의 위협적인)의 식물인 ‘세발갈고리덩굴’의 이중적 존재감은 반려들의 관계로부터 인류의 재건과 구원의 (불)가능성에 대한 적극적인 타진으로 읽어 볼 수도 있다. 꽤 오래전 카프카는 그의 단편에서 규정할 수 없는 것들, 식별 불가능한 반려들의 존재감을 감지한 바 있다. 카프카의 작은 존재들은 경직된 습관의 세계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다양한 실험과 그 과정에서 예기치 않게 발생된 감염의 산물이다. 카프카의 비인간-사물들은 서로를 반려종으로 여기기에는 아직 미심쩍고 불안한 상태로 존재한다. 오드라데크(Odradek)4)는 낡은 실타래 조각처럼 묘사할 수 없는 형태를 띠고,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듯한 웃음소리를 낸다.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 분명하지만, 가장(家長)은 자신이 죽은 후에도 오드라데크가 계속 살아 있는 것이 근심스럽다고 고백한다. 또 있다. 반은
- 관리자
- 2024-10-01
한일 문화의 초국적 접점과 ‘마주침’의 서사학 : 동시대 한국 소설 속 ‘일본’이라는 물음 정창훈 올해 상반기 일본 방송가는 ‘한일 로맨스’로 뜨거웠다. 한국인 배우 채종협(작중 윤태오 역)과 일본인 배우 니카이도 후미(모토미야 유리 역)가 공동 주연을 맡은 드라마 가 그것이다.1) 이 드라마는 채종협을 단숨에 한류 톱스타로 만들며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것은 물론이고, 국내에서도 여러 OTT 플랫폼이나 케이블 TV채널을 통해 방영되며 화제가 되고 있다. 나 역시 이 드라마를 매회 빠짐없이 챙겨보았는데, 기대 이상으로 흥미진진한 이야기였다고 생각한다. 이 두 인물의 연인 관계에 시련이나 위기를 가져오는 여러 갈등의 요인들이 있었으나, 그 가운데서 국가적, 역사적 문제와 연관되는 요인을 끝내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 오히려 신선했다. 국적(내셔널리티)과 언어, 생활관습의 차이는 둘 사이의 장벽이 되기는커녕 상대에 대한 관심을 극적으로 심화시키는 계기가 된다. 가족이나 주변인들도 이 둘이 한국인,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둘 사이를 반대하진 않는다. 이것은 종래의 한일 서사물에서 양국 인물의 연애사를 그려 온 방식과는 차별화되는 것인데, 이를 통해 ‘이례적인’ 해피엔딩의 결말이 주어진다. ‘한일 로맨스’ 자체가 이례적인 것은 아니지만, 다른 아시아 이웃들의 경우와 비교했을 때, 한일 양국 인물의 만남을 그린 서사적 재현이 여러 차례 반복되어 온 점, 나아가 오늘날 그 재현의 양상이 현저히 다양화되고 있다는 점은 주목을 요하는 현상이다.2) 물론 나쁘게 말하자면 이 드라마는 한국과 일본 사이의 정치적, 역사적 이슈를 정교하게 회피함으로써 구축된 가상의 이야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이는 한국과 일본이라는 이웃이 서로를 감각하는 방식에 새로운 무언가가 ‘첨가’되고 있음을 예시하는 것이 아닐까. 돌이켜보면 지난 몇 년 동안 한국 소설은 이러한 변화에 한 발 앞서 민감하게 대응해 온 것으로 보인다. 여러 가지 껄끄러운 문제를 공유한 ‘오랜 이웃’과의 ‘새로운 관계’를 상상하는 시도가 동시대 소설 속에서 계승되어 온 점, 이 글은 거기에 새삼스레 주목하려 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의 움직임이 가져온 의미를 통시적 관점에서 살펴보기 위해, 잠시 과거로 돌아가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현해탄 서사’ 이후, 한일을 넘나드는 월경의 서사 근대 이래 한일 관계에서 ‘현해탄’은 상징적 의미를 지녀 왔다. 특히 식민지-제국 체제의 해체 이후 그것은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의 바닷길(대한해협)’이라는 외시적 의미만이 아니라 역사적, 정치적 문제 등으로 인한 한국과 일본의 ‘가깝고도 먼 관계’(심리적 거리감, 국가적 입장의 차이 등)를 가리키
- 관리자
- 2024-10-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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