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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K-컬처와 김기태의 소설이 말하는 것들

  • 작성일 2024-09-01
  • 조회수 378

   글로벌, K-컬처와 김기태의 소설이 말하는 것들


류수연


   1. 대문자 K의 시대


   2000년대 이후 한국 대중문화의 핵심은 ‘한류, K-wave’라는 말로 귀결된다. 1990년대 후반 일본과 대만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고 알려진 한류라는 용어는, 벌써 그 연원이 30년이 다 되어 간다. 그 결과 오늘의 우리는 한국에서 생성된 모든 콘텐츠가 그 자체로 세계화되는 시대, 말 그대로 대문자 K가 지향을 넘어 실재가 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싸이와 방탄소년단(BTS), 영화 <기생충>, 그리고 OTT 플랫폼 드라마 <오징어게임>까지. 이것은 2010년대 이후 한류를 대표하는 콘텐츠들이다. 그 인기의 정도를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겠지만, 그것들이 한국 대중문화에 어떤 결정적인 순간들을 만들어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이러한 K-컬처의 확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바로 뉴미디어였다. 주지하다시피 K-콘텐츠는 코로나19 이후 시작된 디지털 플랫폼 산업의 확장이라는 거대한 지각변동으로부터 든든한 지지를 받았다. 싸이와 방탄소년단, 그리고 <오징어게임>의 성과는 SNS와 OTT라는 뉴미디어 산업의 영향 속에서 얻어진 것이다. 그 때문일까? 때때로 K-컬처의 성공은 매우 드라마틱한 이벤트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진실이 아니다. 이러한 K-컬처가 전 세계의 주류적 대중문화의 하나로 인정되기까지 거의 30년에 가까운 시간이 소요되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한 문화가 다른 문화 속에 완전히 스며들기 위해서는 최소한 한 세대라는 시간이 필요함을 시사하는 것이며, 이러한 성과를 얻어내기까지 수많은 도전과 열정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2024년 오늘의 우리는, 바야흐로 대문자 K를 붙인 많은 것들이 하나의 유행처럼 전 세계를 관통하는 시대를 목도하고 있다. 

   하지만 이 글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이토록 화려한 성공기가 아니다. 오히려 이 글은 대문자 K라는 문화가 만들어낸 뜻밖에 ‘낯섬’에 보다 주목하고자 한다. 무엇보다 한류의 유행을 단순히 한국 문화의 승리로 치부하는 것에는 커다란 모순이 존재한다. 대문자 K의 출처는 분명 Korea이지만, 그것이 글로벌 대중에게 향유되는 순간 더 이상 한국만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대문자 K 문화의 글로벌 유행은 대중문화의 소비방식이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무엇보다 그것은 오랫동안 대중문화의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미국, 그리고 그러한 미국 문화에 내포된 서구 근대성이라는 보편성의 시대가 이미 저물고 있음을 시사한다(조영한, 「한류와 팝 글로벌리즘」, 『황해문화』 115, 2022 여름, 27쪽). 

   그런데 바로 이 때문에 대문자 K의 시대는 때때로 위태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자신과 꼭 닮은, 그러나 자신과는 이질적인 도플갱어를 마주한 것처럼 말이다. 대문자 K로 지칭되는 모든 문화는 역설적으로 그 출발점인 Korea, 그리고 한국인에게 가장 낯선 풍경이기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대문자 K의 가치를 발견하는 순간은 언제나 한국이 아닌 그 바깥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반작용도 존재한다. 실제로 한국 콘텐츠 산업이 글로벌 스탠더드에 지나치게 경사되면서 무국적의 K-콘텐츠들이 범람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우리 바깥에서 만들어진 거대한 유행이 오히려 우리 내부를 소용돌이의 중심처럼 고립되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오늘날 우리가 대문자 K를 통해 글로벌 대중문화를 리드할 수 있는 또 다른 “다중적 근대성이라는 새로운 글로벌리티에 대한 상상”(조영한, 같은 글, 32쪽)을 실감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우리 문화의 많은 것을 변화시켰고, 소설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김기태의 소설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문학동네, 2024)은 바로 그 상상과 실감을 가장 충실하게 반영하면서 또 다른 대안들을 모색하는, 발견과 선택의 순간들에 놓여 있다. 



   2. 대문자 K가 획득한 문화적 주체성


   김기태의 「로나, 우리의 별」은 스타 탄생기를 둘러싼 익숙한 설화인 동시에 그 전복이다. 이 소설은 “우리는 가능하다.”라는 한 문장에서 시작된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누구이며, 또 무엇이 가능하다는 것일까? 

   소설 속에서 로나는 <모두의 스타>라는 한국 최초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데뷔한 가수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 소설의 주인공은 아니다. 이 소설이 주목하는 서사가 로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불특정 다수로 지목되는 ‘우리’이다. 여기서 ‘우리’는 로나의 수많은 팬들이다. 이 소설은 그녀의 팬덤이 어떻게 시작되고, 또 그것이 어떻게 하나의 네트워킹으로 연결되어 가는지 그 과정에 주목한다. 

   로나의 목소리에 반해 팬이 된 외다리비둘기, 로나에게 매료되어 월급을 모아 기타를 산 아로미, 로나의 예능 <영월에서 영원으로>로 인해 소비를 줄인 목련러너, 로나의 기부금 덕분에 복구된 도서관에서 더 많은 책을 읽게 된 배부른소크라테스, 로나의 기부가 허울뿐인 사회사업자인 남편 데릭에게 이용될 때조차 그녀를 지지했던 잉맨, 언제나 로나를 광고의 페르소나로 생각하고 기획했던 사축A, 길에서 할머니와 함께 폐지를 줍다가 로나의 기타를 기부 받고 그것을 중고마켓에 내놓았던 소년 빵또아와 그것을 알아보고 릴레이 기부를 이끌었던 붕어싸이코. 그들은 로나의 팬이면서 또 다른 로나였고, 로나를 로나로 있게 해준 실질적인 동력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진정한 ‘우리’로 탄생되는 순간은 따로 있다. 로나가 자신의 신념을 실현하기 위해 정치인이 되고자 할 때이다. 로나의 새로운 도전은 그녀의 팬에게도 하나의 도전이 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질문한다. “우리가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답은 이미 작품의 첫 문장에 제시되어 있다. “우리는 가능하다”라고. 그 가능성은 오직 그들이 ‘우리’로 네트워킹 되었다는 그 사실에서 출발한다. 

   이로써 이들은 단순히 스타를 발굴하고 선택해서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의 스타가 자신의 소신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도록 지지하는 사람들로 거듭난다. 그들의 ‘우리’는 로나와 함께 시작되었고, 로나와 함께 성장했으며, 결국 로나를 포함한 하나의 거대한 공동체를 이룬 것이다. 로나가 그들이고 그들이 로나라고 생각하는 순간, 로나의 꿈은 그들의 꿈이 된다. 그것이 그들이 로나와 함께 ‘우리’가 될 수 있었던 이유이다.

   무엇이 이러한 동반을 가능하게 만들었을까? 그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시스템의 변화에서 찾아야 한다. 오디션 프로가 그것이다. 대국민 오디션이라는 가치의 등장은 대중 스스로 자신의 스타를 선택하고 육성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만들었고, 그것을 통해 팬덤은 변화한다. 그로 인해 그들은 스스로 자신의 스타를 발굴하고 선택한 사람들이자, 스타의 신념에 대한 최후의 지지자이며, 결국 스타와 함께하는 동반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소설에서 보여주는 이러한 시각적 전환에는 우리 근대 문화의 변천사가 맞닿아 있다. 서구 문화를 동경하고 모방하면서 시작된 우리의 근대는 결국 디지털 미디어에 빠르게 적응함으로써 서구와는 다른 선택 지점을 만들었다. 로나에게 오디션이 있었다면 우리에겐 SNS와 OTT라는 대중적인 발견과 선택의 장이 주어졌던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대문자 K로 대표되는 K-컬처의 가능성을 만들어낸 결정적인 힘이었다. 

   결국 「로나, 우리의 별」의 저변에는 우리 문화의 가능성에 대한 보다 일반적인 공감대가 자리하고 있다. 그것은 일종의 문화적 자신감이라고도 볼 수 있다. 우리 근대화의 모든 과정은 일방적인 모방이 아니었음을, 그것은 서구적 근대성에서 우리가 발굴하고 선택하여 일구어낸 우리만의 독창성이었음을. 이는 결국 우리의 근대가 ‘우리’화에 성공한 또 다른 가치임을 긍정하는 태도, 문화 주체로서의 자각과도 연결된다. 



   3. 글로벌 확장의 그늘, 잠재된 불안


   하지만 김기태의 이러한 발견은 매우 조심스럽다. 오히려 그는 이 놀라운 글로벌리즘에 잠재된 불안을 놓치지 않는다. 「세상 모든 바다」가 그려내는 풍경은 바로 그것이다. 이 작품의 제목은 그대로 한 아이돌 그룹의 이름이기도 하다. 소설에서 ‘세상 모든 바다’, 세모바는 BTS와 블랙핑크 이후 가장 성공적인 케이팝 그룹으로 제시된다. 환경, 젠더, 평화와 같은 사회적 메시지를 노래하면서 데뷔와 함께 글로벌적 인기를 모은 이 걸그룹은 ‘『빌보드 매거진』으로부터 걸그룹의 한계를 넘어 케이팝을 다시 발명했으며, 역설적이지만 K라는 접두어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만들었다는 평가’(「세상 모든 바다」, 10쪽)를 받는다. 

   「세상 모든 바다」의 주인공 하쿠는 재일교포 3세이자 유학생이며, 세모바의 팬이다. 그는 세모바의 첫 콘서트 예매에 실패했지만, 잠실로 향한다. 이러한 배회가 가능할 수 있는 이유는 소위 ‘겉돌’이라고 불리는 티켓 없이도 콘서트를 즐길 수 있는 케이팝 팬덤의 독특한 문화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공연장 앞에서 직접 만든 아이돌 굿즈를 나누거나 판매하는 일종의 장이 서기 때문에 콘서트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그 분위기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날의 ‘겉돌’은 하쿠에게 지독한 죄책감의 기원이 된다.

   모든 것은 그저 우연이었을지도 모른다. 세모바를 사칭한 반전 퍼포먼스가 야기한 소동에 한 고등학생이 휘말려 사망한 사건에 대해 그 누구도 하쿠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 하지만 하쿠는 알고 있다. 그날 그에게 공연장 밖에서 게릴라 라이브를 할지도 모른다는 트위터 소식을 전한 것이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것은 하쿠를 해진으로 이끈다. 그곳은 죽은 고등학생 백영록의 고향이었다. 동시에 세모바의 노래로부터 영감을 받은 팬들이 소셜미디어에서 탈원전 캠페인을 벌이면서 언급한 장소이기도 했다. 그래서 해진으로의 여행은 죄책감을 덜기 위한 속죄의 여정인 동시에 일종의 성지순례이기도 했다. 하쿠에게 세모바는 새로운 세상을 열어 준 가능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들은 아름다웠고, 유능했고, 심지어 옳았다.”(「세상 모든 바다」, 23쪽)라고 평가했다. 재일교포 3세로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던 그 자신이 갖지 못한 비전과 가치를 가진 존재로서 세모바는 말 그대로 ‘아이돌(우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하쿠는 해진에서 낯선 현실을 목도한다. 세모바를 축으로 연결된 ‘우리’들의 뜨거운 캠페인을 이끌었던 그곳, 하지만 실제의 해진은 SNS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작고 쇄락한 군청, 그 앞에서 원전을 세워 달라는 1인 시위자. 그 어떤 풍경도 SNS 속 ‘우리’의 해진과는 달랐다. 그곳에서는 세모바도, 그들의 노래도 그저 무력할 뿐이었다. 그곳은 세모바 팬덤의 바깥, ‘우리’로 네트워킹 되지 않는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 모든 바다」에서 하쿠의 결말은 「로나, 우리의 별」과는 정확히 반대 지점에 놓인다. 해진을 다녀온 뒤, 하쿠는 더 이상 세모바의 팬이라고 말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는 스스로 그를 가장 행복하게 만들었던 ‘우리’에서 빠져나온다. 그 ‘우리’ 바깥에 존재하는 ‘우리’로서의 무력감과 불안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대문자 K가 한국 사회에 야기한 또 다른 불안의 징후를 발견할 수 있다. 한국의 대중문화가 대문자 K가 되어 전 세계적인 열광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것이 우리 사회로부터 멀어지고 낯설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문자 K의 출발은 한국일지 몰라도 그것이 지향하는 목표는 이미 한국 바깥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익숙하지만 낯선 얼굴이 되어버린 대문자 K. 때때로 그것은 불안의 징후이자 일종의 애증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실제로 K-컬처를 향한 우려는 그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다. 특히 케이팝에 대한 애증이 가장 깊고 크다. 그래서일까? “K-컬처의 특징 중 하나가 그 원천 공간인 한국 내에서 인정 수준이 낮다는 점이 포함”(김예란, 「K라는 끔찍한 동형성」, 『황해문화』 115, 2022 여름, 77쪽)되어 있다는 주장은 우리에게 낯설지만은 않다. 케이팝에 대한 열광과 소비를 10대를 중심으로 한 특이하고 일시적인 취향으로 여기는 풍조는, 서구사회뿐만 아니라 한국사회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K-컬처의 미래는 잿빛으로 인식되는 것일까? 김기태의 소설에서 우리는 뜻밖의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이 소설집의 표제작인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과 또 다른 작품 「전조등」이 바로 그것이다. 



   4. 지극히 평범한, 그래서 찬란한 역설


   결석하지 않고 학교도 잘 다녔다. 법을 어긴 적도 없었다. 하루에 삼분의 일에서 이분의 일을 인터에서 성실히 보냈고 공과금도 기한 내에 냈다. 그럼 큰 걱정 없이 살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133-134쪽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의 주인공, 고아인 진주와 이주노동자이자 불법체류자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니콜라이. 그들은 한국 사회의 소수자이며 약자이다. K-컬처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우리 사회의 그림자이다. 하지만 이 작품이 보여주는 것은 어떤 비애나 절망이 아니다. 오히려 작가는 그들이 처한 현실 그 자체를 객관적인 시선으로 담담하게 응시한다.

   작가는 무엇보다 여러 장학제도나 지원과 같은 사회적 안전망이 우리 사회의 무관심을 대체할 수 없음에 주목한다. 진주의 처지를 파악하고 장학재단에 연결해 준 은인 같은 고1 담임은 졸업 때 찾아온 그녀를 기억하지 못했고, 취업률 최고라는 특성화고에서 니콜라이는 전공과 상관없는 현장 실습을 나갔다. 시스템이 불합리해지는 이유는 애정과 관심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불합리는 그들이 성인이 된 이후에도 계속된다. 국가장학금 홈페이지와 외국인근로자의 고용에 대한 법률이 가진 불친절함, 비정규직으로 전전해야 하는 노동현실. 이 모든 것들이 가감 없이 현실 그대로의 모습으로 담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친구였다가 연인이 되고, 자연스러운 이별을 겪고 마지막엔 집을 셰어하는 동반자가 되는 두 사람을 통해 새로운 방식의 연대를 꿈꾼다. 그것은 평행을 이루어 서로의 존재에 침입하지 않으면서도 서로의 삶에 동반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 오직 우연과 필연이 만들어낸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이다. 

   이 지점에서 이 소설의 처음을 되짚어 보자. “두 사람의 역사는 길다.”(「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111쪽)라는 말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이 세상의 모든 우연은 반드시 필연에 겹쳐진다는 것을 환기한다. 수많은 우연을 통해 대칭되는 두 사람의 삶을 짚어내는 것이다. 그들 가운데 누군가는 짐작 가능한 유명인이기도 하고, 때로는 그 어떤 ‘누구’로 특정되지 않는 평범한 개인이기도 하다. 그들 서로는 서로를 알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대칭된 삶을 살아간다. 두 사람의 네트워킹에는 ‘친분’조차 필수적이지 않다. 그들이 자각하든 자각하지 못하든, 이 지구의 어디에선가는 두 사람의 보이지 않는 네트워킹을 통한 국제화가 실현되고 있고, 그것이 이 지구의 거대한 질서를 유지하는 보이지 않는 힘임이 강조된다. 

   이제 다시 돌아와 진주와 니콜라이의 우연과 필연이 마주친 곳을 되짚어 보자. 한국의 작은 학교, 그리고 이어서 어느 소도시의 주민센터까지. 그곳에서 진주와 니콜라이의 진짜 네트워킹이 시작된다. 대칭이 아닌 공존으로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이 실천되는 순간, 바로 이 자리가 김기태가 찾은 우리 안의 진짜 ‘세계화’는 아닐까?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사람들이 마주한, 그렇게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이어서 오히려 ‘진짜’로 느껴지는 순간들. 그 가치는 또 다른 작품 「전조등」에서도 드러난다. 주인공은 착실한 모범생으로 부모가 제시하는 안정의 가치 바깥으로 단 한 번도 나가 본 적이 없다. 성실하게 공부해서 대학에 진학했고, 대기업에 들어가 빠른 승진을 했다. 불행하지 않았지만 행복하지도 않은 삶 속에서, 그는 분명 자기 삶에 결여된 ‘무엇’이 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아직 그것을 예민하게 감각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결여는 오직 채워짐으로써만 비로소 그 부재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상기하는, 모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것은 대단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것들로 순식간에 메워진다. 연인을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아이의 탄생과 육아라는 새로운 기쁨의 순간. 그는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 속에서 오직 그만이 알아챌 수 있는 ‘열세 번째 조건’이 충족되는 순간들이 있음을 자각한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그에게 주어졌던 성공의 법칙을 아무렇지도 않게 벗어나게 된다. “아내의 경력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그는 남직원은 육아휴직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내 불문율을 깼다.”(「전조등」, 106쪽) 

   진주와 니콜라이의 네트워킹도(「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한 평범한 남자가 한 가정을 이루는 모든 과정도(「전조등」) 모두 대문자 K에 속하지 않은 세계이다. 거기엔 거대한 팬덤이나 거창한 캠페인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때로는 비난과 무시가 뒤따르기도 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곳은 지극히 소박하고 일상적이며, 아무렇지도 않은 공감과 배려와 이해로써만 구현될 수 있는 세계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작가 김기태는 바로 그러한 평범한 삶이야말로 가장 큰 파격의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음에 주목한다.

   힘든 삶에서 겨우 주워 담을 수 있는 온전한 내 것으로서의 “미미하지만 확실한 행복”(「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143쪽)을 위해 사람들은 더 큰 파격에 손을 내밀기도 한다. 연인도 아니고 결혼하지도 않은 남녀가 오래도록 동경했던 안정이라는 가치를 위해 집을 세어하거나(「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단 한 번도 성공의 루틴을 벗어나지 않았던 한 남자가 육아휴직을 결정하기도 한다(「전조등」). 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는 파격이야말로 한국 사회를 변화시키고 있는 진짜 동력인 것이다. 거기엔 대문자 K가 담아내지 않았던 한국 사회의 진짜 얼굴, 그 찬란한 순간이 담담하게 담겨져 있다.



   5. 소문자 k를 꿈꾸며


   근대 이후 우리 사회는 강대국을 꿈꾸었다. 식민지와 분단이라는 비극적 역사를 극복하는 유일한 힘은 부국강병의 실현뿐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제로 우리 사회를 이끈 동력이었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 전후의 상흔을 이겨낸 산업화, 그리고 어쩌면 민주화 운동까지도. 각각의 결은 다르지만 더 나은 세상으로, 더 선진화된 문명으로 우리 자신을 일깨운 동력 가운데 강한 나라에 대한 동경이 있었음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오늘 전 세계적인 유행이 된 K-컬처는 우리에게 문화적 대국주의라는 새로운 꿈을 환기하기에 충분한 것처럼 보인다. 서구 근대를 동경하고 모방하던 작은 나라가 만들어낸 반격. K-컬처의 부흥은 그 자체가 자본주의 사회의 또 다른 성공신화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우리는 대문자 K가 주는 환상에 빠져 있을 수 없다. 오랫동안 한류의 성공은 한국 문화의 성공으로 인식되었지만, 한류의 확산은 그만큼 빠르게 ‘한국적’인 것들을 희석시키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무엇보다 K-컬처는 생산자들만의 것이 아니다. 프로슈머의 가치 위에 구현되는 뉴미디어 시대에 소비자는 곧 생산자이며, 미디어는 또 다른 메시지이다. SNS와 OTT 플랫폼을 타고 전 세계로 퍼지는 K-컬처는 한국적인 동시에 비한국적인 것들일 수밖에 없다. 더구나 한류가 글로벌 대중문화로서 도약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 유튜브와 넷플릭스야말로 가장 미국적인 매체(이기웅, 「포스트 지구화와 한류 어셈블리지」, 『황해문화』 115, 2022 여름, 112쪽)가 아닌가?

   근대 이후 우리 모두는 “자본주의 세계체제로부터의 탈각이 거의 완벽하게 불가능한 시대”(최원식, 「세계체제의 바깥은 없다」, 『창작과비평 100, 1998 여름, 21쪽)를 살아가고 있다. 미디어의 발달은 일종의 착시효과를 야기할 뿐이다. 여전히 이 세계체제의 중심에는 미국 중심의 서구적 대국주의가 놓여 있다. 대문자 K로 지칭되는 오늘날 K-컬처 역시 그 흐름 바깥에 놓여 있지 않음을 기억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이 대문자 K의 시대를 부정하는 것으로 왜곡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대문자 K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진짜 동력이었던 소문자 k의 가치를 잊지 말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문자 k는 무엇으로 규정될 수 있는가? 그것은 바깥에 대한 상상과 실천을 잊지 않는 것이다. 미국을 대표로 하는 주류적인 문화에 함몰되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그것을 비껴 나가는 상상을 멈추지 않고, 그것을 문화적으로 실천하고자 했던 힘. 바로 우리의 일상을 꾸려왔던 가치. 그것이야말로 오늘의 대문자 K를 만든 소문자 k의 힘이었다. 

   “글로벌과 로컬은 스케일상의 범주에 머무르지 않고 비대칭적 위계를 함축하지만 그 둘은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글로벌은 모든 로컬 위에서 개념으로서만 존재한다.”(이기웅, 같은 글, 108쪽) 대문자 K가 우리 문화가 만들어낸 가능성이자 또 다른 글로벌이었다면, 그것을 존재하게 만든 소문자 k가 그려낸 로컬로서의 가치도 여전히 지켜져야 한다. 우리 스스로 이러한 소문자 k가 주는 가치를 잃어버린다면, 오늘의 대문자 K가 만들어낸 가치들 역시 찰나의 유행과 환상으로 사그라지고 말 것이다. 지금, 김기태 소설에서 찾을 수 있는 또 다른 발견이 바로 여기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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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 위에서 이소 1. 그날 내가 이태원에 갔었으면 어떤 일을 겪었을까. 나는 신촌에 있었어. 이태원이 아니라. 그건 정말이지, 놀랍도록 가혹한 일이야. [······] 기억나? 프놈펜 숙소에서 배가 침몰하는 광경을 생중계로 봐야 했던 그날. 나 자꾸 그날이 생각나. 이런 일들이 되풀이되는 건 정말이지, 말이 안 되잖아.1) 참사는 세계 곳곳에서 끊임없이 반복될 거야. 이렇게 잊히기만 한다면 말이야. 석이가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많이 변했다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2) 세월호가 침몰할 때, 석이와 동이와 혜란은 대학교 해외 봉사 프로그램을 위해 떠난 프놈펜의 한 학교에 있었다. 세 사람은 무언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발생했음을 직감했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내가 속했던 세계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사건으로 말미암아 통째로 부정당하는 기분이 들었”고, 그 “대상 없는 배신감과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치심”3)을 무어라 설명해야 할지 말을 고르기 어려웠다. 그때의 석이에게 세월호 사건을 “이런 일들”로 묶거나 “세계 곳곳”의 참사와 비교하는 일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속수무책으로 뉴스와 인터뷰 영상을 찾아보는 것 외에 아무 일도 할 수 없던 그때, 석이는 모든 비교를 거부했다. 그들이 일하는 학교의 학생이 한국의 상황을 안타까워하며 2010년 꺼삑섬 축제에서 일어난 압사 사건에 관해 말하자, 석이는 “그거랑 이거는 다르지”라고 선을 그었고, 세 사람 모두 “우리조차 쉽사리 말할 수 없는 사건을 캄보디아 사람이” 뭘 안다고 “그런 죽음”4) 따위와 비교하는지 불쾌감을 숨기지 못했다. 그러나 이태원 참사 이후, 석이는 완전히 달라진다. 석이에게 세월호와 이태원과 꺼삑섬은 신속하게 연결된다. 그러니까 10년이 흐르는 사이, 세월호는 테이블 위로 올라온 것이다. 아무리 충실한 토양학자라 해도 영원히 숲에 머무를 순 없다. 토양학자는 숲의 흙 일부를 추출하고 분류하여 테이블 위에 올려 둔다. 사건 역시 마찬가지다. 차마 말할 수 없을 만큼 참혹했던 사건도 시간이 흐르면 얼마만큼의 변형과 생략을 감수하고서라도 유사도에 따라 다른 사건과 함께 배치되고 비교된다. 이 과정이 모두에게 일어난다고, 특히 모든 유가족에게 일어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러나 다수의 사람에게는, 적어도 어떤 유가족에게는 반드시 일어난다. 그렇게 사건은 다른 사건의 중요한 참고문헌이 되어 주기도 한다. 2005년, 백 명이 넘는 승객들이 사망한 후쿠치야마선 탈선 사고로 아내와 여동생을 잃은 아사노 야사카즈가 ‘사고의 사회화’를 위한 “유가족의 사회적 책임”5)을 주장하며 정부와 JR서일본을 상대로 10년간 투쟁한 기록에는 대구지하

  • 관리자
  • 2024-09-01
봉인 해제된 소녀, 노벨로부터의 이륙

봉인 해제된 소녀, 노벨로부터의 이륙 :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시 소설’1) 리라이팅을 통해 생각하는 근대 소설(novel)의 변화 김미정 소용돌이의 한복판에서는 그것의 실체를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 소용돌이가 멈추고 낙진이 잦아들 즈음, 변형된 지형지물과 그 윤곽이 눈에 들어온다. 켜켜이 쌓여 가는 시간의 무늬는 다시 새로운 지층을 이루고, 그것은 또 다른 소용돌이를 만날 때까지만 안전하다. 그럼에도 그 소용돌이의 한복판에서, 훗날 교정되어야 할지 모를 오류에마저 몸을 내맡겨 보는 일이 어쩌면 비평의 일이다. 1. novel 혹은 근대인의 인식 체계 이 글은 지금 소설(novel)이라는 장르를 둘러싼 어떤 소용돌이의 체감에서 시작한다. 이야기의 역사는 곧 인류의 역사라고 하지만, 이야기의 양식이 모두 동일할 리는 없다. 그 양식을 무어라 부르건 거기에는 늘 각 시대의 인식·정서 체계가 구조화되어 있다. 지금 우리 시대의 지배적 이야기 양식은 말할 것도 없이 ‘소설’이다. 그런데 이때의 소설은, 한 세기 이전에는 ‘literature’나 ‘novel’과 같은 말로 막 들어오기 시작한 서구의 낯선 문학 양식이었고, 한자문화권에서는 그것을 두고 설왕설래하며2) 각고의 번역의 노력을 통해 제도화한 것이다. 2000년대 이래 한국 문학 연구가 주목한 것도 이러한 제도로서의 문학에 대한 것이었음도 잠시 덧붙여 둔다. 그렇다면 근대적 이야기 장르로서의 소설에 담긴 인식·정서의 체계란 무엇일까. 그것을 밝히는 것 자체가 이 글의 목적은 아니고 간단히 적을 수도 없다. 이 글에서는 ‘인식 체계로서의 소설’만 생각해 본다. 이때 주목하는 것은 우선 소설 속 서술자, 곧 앎(인식)을 독점해 온 주체의 자리다.3) 달리 말해, 텍스트 안에 구조화된 재현 주체/대상의 역학이 이 글의 관심이기도 하다. 서술 시점이나 그에 따른 리얼리즘적 묘사란 근대 소설의 핵심이다. 이것은 예컨대 근대 회화의 소실점, 원근법의 발명에 상응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시점과 묘사를 가능케 하는 것이 주체/객체(=서술자/서술대상·객관세계)의 도식이었다. 소설에 구조화된 근대적 인식 체계란 바로 이런 원리에 근거한다. 서술자의 문제란 소설의 세부 요소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이 세계의 대표·재현·표상 원리에 상응하는 장치였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이미 소설을 소설로 성립시켜 온 그 인식 체계가 무엇이었고, 그것이 어떻게 유동하고 있는지는 폭넓게 질문되어 왔다고 생각한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래 독자-작가 모두 질문한 것은 예컨대 ‘누가 말하고 있는가’, ‘어떤 자리로부터 무엇이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가’의 문제이기도 했다. 2010년대 중반 즈음부터의 독자-작가는 리얼리즘적 시선 너머에 은폐된 화자의 존재를 질문했다. 객관을 표방하던

  • 관리자
  • 2024-09-01
기울어진 자리, 돌봄과 공생의 겹

기울어진 자리, 돌봄과 공생의 겹 ― 안보윤, 「수미」 정우주 1. 오늘날 한국문학장에서 돌봄이 뜨거운 화두라는 사실을 말하는 일은 이제 익숙히 합의된 현상이 되었다. 다양한 양상으로 돌봄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서사들에서부터 아예 돌봄을 키워드로 내세운 비평 특집들까지, 지금 돌봄의 외연은 빠르게 팽창하는 중이다. 이렇듯 돌봄 담론이 확장되는 흐름에는 특히 팬데믹을 지나오며 돌봄 공백의 문제가 수면화 되었고, 누구든 서로 의존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취약성을 절실히 체감하게 된 배경이 존재한다. 당연하게도 돌봄은 기본적으로 주체와 타자, 제공자와 수혜자라는 복수의 행위자 사이에 일어나는 행위라는 점에서, 모두가 취약하므로 상호의존해야 한다는 공동체의 관계적 가치와 자연스럽게 접속한다. 그런데 근래의 논의에서는 오히려 돌봄을 보편적인 사회 윤리로 치환할 수 없는 무언가로 지칭하려는 움직임들이 포착되고 있다. 돌봄에서 연대나 윤리만을 찾기보다 그 속의 지난함과 불쾌함을 들춰내는 데 주목하는 작업1)이나, 상호적 돌봄을 이타성이나 선함이 아닌 미성숙한 두 존재가 “서로 폐를 끼치고 받는 위험한 관계”로 정의한 목소리2) 등은 모두 사회 구성원들에게 매끄럽게 적용되는 도덕적 가치로써 돌봄의 불가능성에 방점을 둔 시도들이다. 다만 이처럼 돌봄의 관계가 지닌 온정적이고 친밀한 성격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갈등과 착취의 요소에 천착하는 일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돌봄이 바로 그 ‘관계’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에 기반한다. 다시 말해 돌봄은 철저히 사회구조적으로 배치된 역학관계에 토대를 두고 수행된다. 팬데믹 시기 이전부터 돌봄 노동이 가정 내 여성에게 전가되고 사적으로 평가절하되는 젠더 편향의 측면을 지적받으며 비판적 담론이 형성되어 왔음을 상기해 본다면, 현시점에 ‘돌봄 제공자가 돌봄 수혜자보다 권력의 우위를 점한다’는 비대칭적 관계의 구조를 역설하는 것은 그간 축적되어 온 페미니즘적 돌봄 논의에 역행하는 입장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때 돌봄의 위태롭고 끈적끈적한 지점을 부각시켰던 앞선 비평들이 돌봄의 가치가 공동체적 연대의 이름으로 단순히 포섭되어서는 안 된다는 공통된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즉 “돌봄이 총체적 위기를 해결할 만병통치약처럼 쓰이진 않을지"3) 우려하는 관점들이 빠르게 제출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 속에서, 돌봄을 둘러싼 권력관계의 비대칭성을 구태여 강조하는 행위 역시 돌봄 개념의 다층적인 결을 구분하지 않은 채 끝없이 확대되는 양태를 경계하려는 의식적 흐름과 맞닿는다. 무엇보다 돌봄은 사회학과 밀접히 결합한 실천의 영역이므로 구체성과 현장성이 중시되지만, 한편으로 지속되는 팽창이 상징하듯 돌봄에 내재된 의존과 책임이 교차하는 원리는 인접 의제와의 유의미한 연결 가능성을 가진다.4) 그렇다면 이제 돌봄을 확장하되, ‘어떻게’ 확장시킬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

  • 관리자
  • 2024-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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