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한일 문화의 초국적 접점과 ‘마주침’의 서사학

  • 작성일 2024-10-01
  • 조회수 835

   한일 문화의 초국적 접점과 ‘마주침’의 서사학

   : 동시대 한국 소설 속 ‘일본’이라는 물음


정창훈


   올해 상반기 일본 방송가는 ‘한일 로맨스’로 뜨거웠다. 한국인 배우 채종협(작중 윤태오 역)과 일본인 배우 니카이도 후미(모토미야 유리 역)가 공동 주연을 맡은 드라마 <Eye Love You>가 그것이다.1) 이 드라마는 채종협을 단숨에 한류 톱스타로 만들며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것은 물론이고, 국내에서도 여러 OTT 플랫폼이나 케이블 TV채널을 통해 방영되며 화제가 되고 있다. 

   나 역시 이 드라마를 매회 빠짐없이 챙겨보았는데, 기대 이상으로 흥미진진한 이야기였다고 생각한다. 이 두 인물의 연인 관계에 시련이나 위기를 가져오는 여러 갈등의 요인들이 있었으나, 그 가운데서 국가적, 역사적 문제와 연관되는 요인을 끝내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 오히려 신선했다. 국적(내셔널리티)과 언어, 생활관습의 차이는 둘 사이의 장벽이 되기는커녕 상대에 대한 관심을 극적으로 심화시키는 계기가 된다. 가족이나 주변인들도 이 둘이 한국인,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둘 사이를 반대하진 않는다. 이것은 종래의 한일 서사물에서 양국 인물의 연애사를 그려 온 방식과는 차별화되는 것인데, 이를 통해 ‘이례적인’ 해피엔딩의 결말이 주어진다. 

   ‘한일 로맨스’ 자체가 이례적인 것은 아니지만, 다른 아시아 이웃들의 경우와 비교했을 때, 한일 양국 인물의 만남을 그린 서사적 재현이 여러 차례 반복되어 온 점, 나아가 오늘날 그 재현의 양상이 현저히 다양화되고 있다는 점은 주목을 요하는 현상이다.2) 물론 나쁘게 말하자면 이 드라마는 한국과 일본 사이의 정치적, 역사적 이슈를 정교하게 회피함으로써 구축된 가상의 이야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이는 한국과 일본이라는 이웃이 서로를 감각하는 방식에 새로운 무언가가 ‘첨가’되고 있음을 예시하는 것이 아닐까. 

   돌이켜보면 지난 몇 년 동안 한국 소설은 이러한 변화에 한 발 앞서 민감하게 대응해 온 것으로 보인다. 여러 가지 껄끄러운 문제를 공유한 ‘오랜 이웃’과의 ‘새로운 관계’를 상상하는 시도가 동시대 소설 속에서 계승되어 온 점, 이 글은 거기에 새삼스레 주목하려 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의 움직임이 가져온 의미를 통시적 관점에서 살펴보기 위해, 잠시 과거로 돌아가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현해탄 서사’ 이후, 한일을 넘나드는 월경의 서사


   근대 이래 한일 관계에서 ‘현해탄’은 상징적 의미를 지녀 왔다. 특히 식민지-제국 체제의 해체 이후 그것은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의 바닷길(대한해협)’이라는 외시적 의미만이 아니라 역사적, 정치적 문제 등으로 인한 한국과 일본의 ‘가깝고도 먼 관계’(심리적 거리감, 국가적 입장의 차이 등)를 가리키는 말로 폭넓게 쓰여 왔다. 그렇기에 중요하게 여겨진 것이 ‘가교(架橋)’의 역할이다. 여기서 가교란 대체로 양국 모두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지닌 인사나 그들을 주축으로 이뤄지는 문화 교류 등을 뜻하는데, 이를 매개로 하여 경색된 양국 관계를 해소하거나 재편하려는 시도들이 이어져 왔다.

   그런데 오늘날 ‘현해탄’이라는 말은 갈수록 사어화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이 말이 점차 쓰이지 않게 된 것은 일상적 차원에서 양국을 구별 짓는 ‘경계’ 감각이 과거에 비해 현저히 옅어졌음을 방증한다. 글로벌 미디어의 발달, 해외여행 및 관광의 대중화로 초연결 시대를 맞이한 현재, ‘머나먼 경계의 여울’(일본어 ‘玄界灘’의 말뜻)이라는 말의 의미가 퇴색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대적 흐름의 결과, ‘가교’의 역할도 무색해졌다. 누구든 쉬이 경계를 넘나드는 시대이기에 양국을 잇는 매개 또한 누군가에 의해 독점이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는 곧 특정 문화 이벤트를 통해 양국 관계의 국면을 전환하거나, 일정한 권위 및 대표성을 지닌 인사들이 나서서 갈등을 조율하는 식의 오랜 방법이 효력을 상실해 가고 있음을 뜻한다.

   한국의 소설 텍스트는 이러한 변화를 실감할 수 있는 비근한 예가 된다. 해방 이후 한국 소설에서 ‘일본(인)’과 마주하는 한국인 인물들은 지식인이나 작가, 정부요원, 유학생 등 대부분 특수한 존재들에 한정되었다. 선택받은 소수의 인물들이 ‘가교’의 역할을 도맡아 온 것이다. 민족이나 국가를 대리표상 하는 남성 주체들이 등장함으로써 소설적 사건으로 재현된 ‘일본’과의 대면은 ‘국가 대 국가’, ‘국민 대 국민’이라는 양립 구도를 부각시켰으며, 이에 따라 그들의 행위에는 공적이면서도 상징적 의미가 부여되곤 했다. 해당 인물들에게 ‘일본’이라는 타자와의 대면은 무엇보다도 과거 식민종주국이자 현재의 국가적 라이벌을 상대하는 일이었기에, 이들은 민족 주체(국가의 대변자)로서의 자기를 끊임없이 재인식하는 한편으로 ‘현해탄’의 ‘가교’라는 역사적 사명을 수행했던 것이다. 3)

   그에 비해 최근 한국 소설에서 ‘일본’과의 마주침은 누구나 경험하는 일상다반사처럼 그려진다. 즉, 동시대 소설 속 인물들에게 물리적, 심리적 경계로서의 ‘현해탄’이란 대단한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해당 인물들은 초연결의 시대, 혹은 글로벌화된 세계를 살아가는 사적 개인으로서 이미 일상문화에서 ‘일본(인)’과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흔해빠진 표현이지만, 양자가 공유하고 있는 것은 ‘문화’라는 접점이다. 동시대 한국과 일본은 초국적 자본의 문화를 접점으로 하여, 서로 이동하고 마주하고 욕망하고 갈등하고 있으며, 이로부터 쌍방의 관계를 사유하는 방식 자체가 재편되고 있다. 실제로 2024년 현재 한일 양국 사이의 이동과 접촉은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데, 그 월경적 이동과 접촉의 대개는 종래의 ‘현해탄’ 서사가 천착해 온 정치적, 역사적 문제를 괄호에 넣은 채 이뤄지고 있다. 정치적, 역사적 관계와는 다른 방식의 관계가 초국적 문화의 교차 속에서 상상되고 있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요컨대 한국과 일본을 묶는 새로운 접점의 출현이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내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그 문화란 도대체 무엇이며, 여기에는 어떤 가능성과 한계가 있는 것일까. 



   도시 문화의 관(광)객들


   한국과 일본에서 활동하는 소설가들이 도쿄라는 장소를 주제로 쓴 단편을 묶은 소설집 『소설 도쿄』 (2019)에 수록된 김학찬의 「프러포즈」에는 도쿄를 찾은 한국인 작가 ‘나’가 등장한다. ‘나’는 도쿄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를 찾아 인터뷰를 성사시키라는 출판사 측의 무리한 요청에 반쯤 떠밀리듯 비행기에 몸을 실은 것이었고, 무작정 그를 만나기 위해 도시 곳곳을 떠돈다. 소설의 내용은 그 비일상적 공간을 누비는 ‘나’의 체험으로 채워진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소설의 내용보다 작가의 후기가 더 흥미롭게 읽혔다. 소설의 주인공 ‘나’의 연장에서 쓰인 것처럼 보이는 아래의 후기는 작가가 품고 있는 ‘도쿄’라는 장소의 낭만적 이미지를 집약적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도쿄도 좋지만, 동경이 어쩐지 더 좋다. 동경 여행을 위한 특급 레시피가 있다. 동경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담배 한 보루와 위스키 두 병을 산다. 이틀을 지내건, 일주일을 지내건 똑같다. 아침에는 담배를 피우며 위스키를 마시고, 점심때는 담배를 피우며 커피를 마신다. 밤이 되면 지역 양조 맥주를 취급하는 탭하우스를 찾아 담배를 피우며 모든 파이프의 맥주를 하나씩 다 마신다. 맥주를 마시며 지긋지긋하게 읽은 백석을 떠올린다. 백석은 동경 아오야마 학원에서 공부했다. 지금도 읽고 있는 하루키도 떠올린다. 하루키는 아오야마 근처에서 오래 살았다. 내가 지나간 길을 백석도 걸었고 하루키도 밟았다. 이렇게 다음날도, 전날에 했던 끽연과 음주를 반복한다. 마지막 날, 돌아오는 비행기를 탄다.4)



   작가가 제시한 ‘동경 여행을 위한 특급 레시피’는 사실 단순하다. ‘끽연과 음주’를 즐기고 문학가들의 자취를 되새기며 상념에 젖는 일을 반복하는 것. 이러한 의식을 통해 수많은 이국의 수도 가운데 하나인 ‘도쿄’가 자신만의 특별한 장소인 ‘동경’으로 재창조된다. 

   단, 이때 주목을 요하는 것은 작가가 그리고 있는 ‘동경’이란 한국인이 역사적, 정치적 타자로서 상정하고 있는 ‘일본(일본국, 일본인)’과는 별개의 대상이라는 점이다. 즉, 이 ‘동경 여행을 위한 특급 레시피’에는 ‘일본’이라는 타자에 대한 관심이 의도적이든 아니든 간에 배제되어 있다. 위스키와 맥주, 그리고 하루키와 백석, 아오야마라는 기호가 예시하듯이, ‘동경’은 일본이나 한일관계에 대한 역사적, 정치적 관심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사적인 취향의 장소로서 전유된다. 

   『소설 도쿄』에 수록된 단편들 가운데 김학찬의 소설이 가장 눈에 띄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다른 작품들 대개는 재일 2·3세 작가 및 일본에 재류하는 작가들의 소설이기에 도쿄를 리얼리스틱한 실존의 공간으로 그리고 있으나, 김학찬의 경우는 도쿄를 철저히 비일상적 관광지로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소설만이 유독 ‘가벼워’ 보인다.  

   박민정의 「세실, 주희」(2018년도 젊은작가상 대상 수상작)에도 그처럼 ‘가벼운’ 인물이 등장한다. 잘 알려져 있듯 이 소설은 명동의 화장품 판매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만난 한국인 ‘주희’와 일본인 ‘세실’의 이야기다. 주희가 세실의 한국어 과외 선생을 맡아 주었고, 이를 계기로 둘은 서로의 관심사를 공유하고 지내며 금세 친밀한 사이가 된다. 다만 주희의 입장에서 볼 때, K-POP 아이돌의 팬이라는 이유만으로 한국 유학을 결심하고 온 세실, 그 “좋아하는 연예인 하나 때문에 타국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살아가는 삶”이란 쉬이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었다.5) 게다가 아시아-태평양 전쟁기에 ‘히메유리 학도대’로 활동하다가 죽음을 맞이한 할머니를 자랑스럽게 말하는 세실의 모습에 주희는 경악하고 만다. 나쁘게 말하자면 “세실은 한류 문화를 향유하는 소비자-주체로서의 자신과 한국을 식민 지배했던 제국주의 역사의 후예로서의 자신 사이에 놓인 간극을 끝내 모르는 인물”인 셈이다. 6)

   이렇듯 타자에 대한 무지를 내포한 관객적 시선, 내지는 관광객의 시선은 보통 비판의 대상이 된다. 관(광)객으로서의 주체는 특정 장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역사와 실존을 무시함으로써, 거기에서 스스로 기대하는 것만을 발견하고 원치 않는 것은 외면하기 때문에, 무지한 행위자로서 비난을 받기 쉽다. 

   그러나 이러한 ‘가벼운’ 태도야말로 ‘일본’이 아닌 ‘도쿄’를, ‘한국’이 아닌 ‘서울’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네이션 문화가 정치적, 역사적 차이를 통해 배타적 경계를 구축한다면, 글로벌 도시 문화의 정체성이란 상호 복제와 참조를 통해 그 경계를 넘나든다. 즉, 초연결의 세계 속 도시 문화는 이제껏 낯설고 이질적인 타자라고 생각했던 것에서 대단히 친숙하거나 자기와 닮아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7)

   「프러포즈」의 ‘나’와 「세실, 주희」의 ‘주희’를 ‘도쿄’와 ‘서울’로 이끈 것은 ‘일본’과 ‘한국’의 네이션 문화나 국가적 정체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도시적 상품 문화의 표피들이며, 그 상호모방적인 문화가 낳은 흔해빠진 취향과 연관될 뿐이다. 그렇기에 그것을 쫓아 움직이는 인물은 경박해 보일지도 모른다. 다만 여기서 주목을 요하는 점은, 그러한 가벼움이나 경박함이 한일관계라는 ‘국가 대 국가’ 혹은 ‘국민 대 국민’이라는 관계를 넘어선 사적 개인들의 경험을 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세실과 주희의 만남이 바로 그러하다. 세실은 “제국주의 역사의 후예로서의 자신”에 대해 무자각적이기에, “좋아하는 연예인 하나 때문에” 한국에 와서 살아가는, 일견 터무니없지만 자기 욕망에 충실한 삶의 방식을 선택할 수 있었다. 만일 그녀가 “제국주의 후예로서의 자신”에 대해 반성적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면, 두 인물의 허물없는 만남과 친교는 어려웠을 것이며, 만약 가능하더라도 그 만남은 긍정적 의미에서든 부정적 의미에서든, ‘국민 대 국민’이라는 틀 안에서만 맴돌았을 터이다. 반대로 도시적 감수성이란 그것을 넘어서는 ‘무지한 친화력’이다. 내셔널한 사고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서 모종의 유사성들을 예리하게 포착해 내는 것, 여기서부터 한일관계를 둘러싼 서사는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제약 없는 세계 속 ‘주변적’ 존재들의 교차


   2014년 젊은작가상 수상작인 최은영의 「쇼코의 미소」(2013)는 그런 맥락에서 가장 주목을 요하는 텍스트다. 이 소설은 고등학교 시절 자매학교 교류를 통해 만난 ‘소유’와 ‘쇼코’라는 한국인・일본인 여성이 서로에게 연민을 느끼고 때로는 위안을 얻으며 성장하는 이야기다. 각각 한국과 일본의 지방 소도시 출신으로 아버지가 부재한 가정에서 할아버지 손에 자라난 두 인물은 어린 시절부터 상경과 사회적 성공을 꿈꾸며 고군분투했으나, 결국 그것을 이루지 못한다. 각자 삶의 역경을 관통하는 동안 이 둘에게 상대방은 “아는 사람도 그렇다고 모르는 사람도 아니었고, 친구라고 하기에는 낯선 사람”에 불과했으나,8) 끊일 듯 말 듯 이어져 온 그 인연 속에서 점차 둘은 닮은꼴인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게 되며 위로와 격려를 주고받는다.

   이 소설은 한일 두 인물의 만남에 특별한 역사적, 정치적 상징성을 부여하지 않고 있다. 이들의 만남은 아무런 목적의식 없이 그야말로 ‘우연히’ 이뤄진다. 그렇기에 소유와 쇼코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공감의 서사는 두 인물이 공유하는 주변적 정체성이 상호 인정을 통해 긍정되는 과정일 따름이며, ‘국민 대 국민’ 사이의 화해라는 거대 서사적 맥락은 탈각되어 있다. 이때 주변적 정체성이란 ‘조연적’, 혹은 ‘관객적’ 정체성으로 환언할 수 있는 것으로, 역사라는 거대서사, 혹은 주류사회 속 주인공인 능동적 행위자가 아니라 그 주인공들이 활약하는 무대 옆이나 밖에서 조연 및 관객처럼 살아가는 세속적 범인들의 정체성에 맞닿아 있다. 

   그렇기에 소유와 쇼코 두 인물은 한일관계상에서 능동적으로 ‘가교’ 역할을 수행한 과거의 인물들과 뚜렷하게 구별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만남이 내셔널한 경계를 초월한 상호 이해와 긍정으로 이어진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각각의 내셔널한 역사 속에 갇혀 서로 마주할 일이 없던 조연적, 관객적 개인들이 제약 없는 세계 속에서 대면하게 될 때, 이들은 특별한 의도 없이도 예기치 못한 유대 의식을 공유하게 된다.

   한정현 소설 『줄리아나 도쿄』(2019년 제43회 오늘의작가상 수상작)의 경우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이 소설에는 데이트 폭행으로 인해 ‘모국어 손실(외국어증후군)’이라는 증상을 겪고 있는 인물 ‘한주’가 등장한다. 잃어버린 모국어를 대신하여 그녀가 쓸 수 있는 말은 대학원을 다니며 익힌 일본어뿐이다. 이렇듯 그녀는 자신에게 겨우 남겨진 이국의 언어(일본어)에 의지하여 자기회복을 위한 여정을 시작한다. 그렇게 무작정 일본으로 향한 한주는 ‘꼬치구이 노인’, ‘유키노’, ‘김추’ 등의 인물과 만나며 점차 상처를 치유해 간다. 그들의 도움으로 그녀는 자신만의 ‘줄리아나 도쿄’, 즉 소외되고 상처받은 이들이 “자기 자신으로 오롯이 설 수 있는 단상”에 도달한다.9)

   이때 ‘인터넷 검색’이라는 행위가 인물들의 만남을 매개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한주는 자신의 병명을 인터넷에서 검색하며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이 세상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에 위안을 얻는다. 나아가 포털 사이트에 ‘줄리아나 도쿄’라는 단어를 검색한 뒤 그 결과값을 연달아 추적하는 동안에 한주는 ‘유키노’, ‘정추’, 그리고 ‘김추’ 등의 인물과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이처럼 소설에서는 인물들 간의 만남이 일정한 장소를 매개로 하여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확장적 ‘검색어(키워드)’의 공유를 통해 우연히 이뤄지는데, 이로써 제각기 흩어져 있으나 유사성을 지닌 인물들이 국경을 초월하여 하나의 연대를 이루게 되는 셈이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서사적 재현의 방식이 일본 문학에서도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일례로 일본의 유명 문학잡지인 『분게이(文藝)』의 2019년 가을 <한국・페미니즘・일본(フェミニズム・日本)> 특집호는 동시대 한국 문학을 집중 조명하였는데, 이것이 이례적인 인기를 얻으며 재판을 거듭한 바 있다. 이후 『완전판 한국・페미니즘・일본』(河出書房新社, 2019)이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으며, 한국과 일본의 소설을 교차로 수록해서 양국 문학의 동시대성을 강조한 소설집 『소설판 한국・페미니즘・일본』(河出書房新社, 2020)까지 출간되었다. 거기에 수록된 마쓰다 아오코(松田青子)의 단편 「쿠와하라 씨의 붉은색(桑原さんの赤色)」을 살펴보면, 남성 중심주의적 사회에 대한 저항적 표현으로서 ‘붉은색’ 아이섀도가 쓰이고 있는데, 이는 한국 영화 <친절한 금자씨>의 주인공의 모습에서 영감을 얻고 있다. 물론 이것은 영화의 전체 내용과 무관한 것으로, 수용자의 자의에 따른 탈맥락적, 우연적 차용에 가깝다. 그러나 타자에게서 “스스로 기대하는 것만을 발견하고, 원치 않는 것은 외면하는” 이 ‘경솔한(가벼운)’ 태도가 역으로 한국과 일본을 잇는 새로운 방식의 공감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 일련의 소설들 속 주인공이 주변적 정체성을 지닌 여성 인물이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의도된 것이든 아니든 간에, 그것은 식민지 경험 이래로 남성 엘리트들의 동성사회적(homosocial) 서사로서 전유되어 온 ‘현해탄 서사’, 혹은 한일관계의 역사에 대한 비판적 상상력을 내포한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망설임


   그러나 역시 어려운 문제가 남아 있다. 글로벌화된 세계 속 초국적 문화를 접점으로 하여 한국과 일본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이웃임을 실감하고 있다. 단, 그렇다고 해서 내셔널한 사고의 장벽을 단번에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한 박민정의 「세실, 주희」는 이를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세실과 주희는 관심사와 취미를 공유하며 친밀한 관계를 맺지만, 이 둘의 대화는 서로를 향한 기대나 선이해가 어긋날 때마다 쉬이 넘어설 수 없는 내셔널한 사고의 장벽을 실감한다. 특히 ‘히메유리 학도대’로서 죽음을 맞이한 할머니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세실의 모습에 주희는 “문득 소름이 끼치는”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친밀하고 익숙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대상에게서 전혀 낯선 얼굴을 보는 경험으로, 이른바 “일본의 ‘언캐니한’ 귀환”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테다.10) 그러나 여기에는 보다 복잡한 사정 또한 내포되어 있다. 주희가 세실을 통해 보고 있는 것은 단순히 ‘일본’이라는 타자가 아니라, 세실과 구별할 수 없을 만큼 닮아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11) 따라서 세실이라는 인물을 그저 몰지각한 일본인의 전형으로 읽어서는 곤란하다. 오히려 그녀는 내셔널한 사고(히메유리 학도대)와 트랜스내셔널한 욕망(한류 아이돌) 사이에 위치해 있는 현대인의 모순 그 자체를 체현한 인물로, 어쩌면 주희 또한 이 점에 있어서는 크게 다를 바 없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트랜스내셔널한 문화의 무제약성이 한일 젊은 세대를 상징하는 인물들을 연결한다면, 내셔널한 사고의 폐쇄성, 그 잔여처럼 맴도는 ‘현해탄’의 기억은 그들 사이를 다시 가로막는다. 이 지점에서 돌이켜보자면, 『줄리아나 도쿄』의 ‘키워드’로 맺어진 연대나「쿠와하라 씨의 붉은색」의 ‘붉은색 아이섀도’를 매개한 저항은 한계에 부딪힌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현전하는 필터 버블화된 정보의 창이 ‘타자 없는 세계’의 환상을 만들어내듯이,12) 그 연대와 저항의 상상력은 여전히 불협하고 있는 역사와 정치의 문제를 비가시화함으로써만 간신히 유지될 수 있는 무엇이기 때문이다.13) 따라서 「세실, 주희」의 아래와 같은 결말은 곱씹어 볼 만한 물음을 남긴다.



   “괜찮아요, 세실 상. 이건 평화로운 집회예요. 전쟁 피해자들을 위한 집회예요.” 

   세실은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아, 그래요? 나도 중학교 때부터 반전 집회에 참여했어요, 일본에서 우리 할머니도 전화에 돌아가셨으니까요.”

   주희는 기분이 이상해져 세실을 돌아봤다. 세실은 멀리 있는 것을 보려는 듯 발돋움을 했다. 주변을 둘러보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주희는 세실을 속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세실, 당신의 할머니와 여기서 말하는 피해자 할머니들은 조금 달라요······ 세실의 할머니는 야스쿠니 신사에 있다면서요······.14)



   세실은 ‘히메유리 학도대’로서 ‘야스쿠니 신사’에 묻힌 할머니를 자랑스럽게 말했지만, 그것이 국가주의에 의해 강요된 희생으로 만들어진 결과임을 모르고 있다. 주희는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선뜻 어떤 행동을 취할 수 없다. ‘위안부’ 피해자와 ‘히메유리 학도대’가 ‘전쟁 피해자’라는 같은 단어로 묶이고, 그럼으로써 ‘반전’, ‘평화’ 등에 담긴 상반된 의미가 부각될 때, 주희는 거대한 모순과 마주하게 된다.

   그런데 이 모순은 그저 한계가 아니라 새로운 공감과 유대를 위한 물음의 출발점으로서 재고될 필요가 있다. 둘의 친밀한 관계 속에 엄습하는 이 ‘섬뜩함’이란 세실과 주희 각자가 지니고 있던 서로에 대한 피상적 정보의 무력함을 환기한다. 무제약적인 ‘개인들’로서 수많은 취향과 취미, 관심사를 ‘공유’하고 있던 관계 내에서 ‘도저히 공유할 수 없는 것’을 발견하게 될 때, 비로소 이 친밀한 관계와 대화를 이어 가기 위한 새로운 ‘키워드’의 발명이 필요하다는 자각에 이르는 것이다.15)

   나는 이것을 소설적 사건으로서의 ‘마주침’이라고 명명하고 싶다. 친밀한 존재 안에서 놀랍도록 낯선 얼굴을 보는 마주침의 경험, 그것은 꽤나 골치 아픈 물음을 남긴다. 제아무리 친한 사이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반전’, ‘평화’, ‘화해’ 등, 동일한 단어로 다른 말을 하는 ‘우리’는 정말 서로 공감할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는 것인가. 

   이러한 물음들 앞에서 소설 속 인물들은 망설이고 있다. 그러나 이 망설임이야말로 하나의 윤리적 태도임을 간과해선 안 된다. 과거 한국 소설 속에서 ‘현해탄’의 ‘가교’라는 역사적 사명을 수행한 인물들, 민족이나 국가를 대리표상 하던 그 소수의 선택된 남성 주체들은 너무도 손쉽게 ‘반전’, ‘평화’, ‘화해’, ‘극복’ 따위의 키워드를 공유하며 한일관계의 ‘대승적 결말’을 이끌어내곤 했다. 그렇지만 타자와 ‘도저히 공유할 수 없는 것’을 쉬이 ‘공유’해 버리는 것은 일종의 회피에 불과하며 타자와 진정으로 마주하는 방식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초국적 문화를 접점으로 교류하고 소통하는 것이 부질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앞서 말했듯 한국과 일본은 이미 일상문화에서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다. 한국발, 혹은 일본발 대중문화에 관한 관심이나 취미, 취향 등이 특히 그러하다. 이러한 사실은 과소평가되기 쉽지만, 오늘날 한국과 일본이 여러 정치적, 역사적 갈등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 흥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 일상에서 서로를 ‘매력적인 타자’로서 감각하고 있다는 점은 놀라운 가치를 지닌다. 왜냐하면 역사적, 정치적 관심을 괄호에 넣고 이뤄지는 이동과 접촉의 체험 없이는 사건으로서의 ‘마주침’ 자체가 불가하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에서는 그저 단순한 흥미나 무책임한 외면으로 끝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언가를 격의 없이 함께 나누고 있어야만, 서로에게 나누기 어려운 것도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 절절한 마주침의 순간에 정지된 상태로, ‘포스트-현해탄’ 서사의 여러 가능성들이 제각기 점멸하고 있는 것이다.


1) 제작: TBS방송사, 방영기간: 2024.1.23.~3.26(총10부작).

2) 참고로 2024년 올해 하반기에는 <사랑 후에 오는 것들>(쿠팡플레이 시리즈, 이세영・사카구치 겐타로 주연), 내년 상반기에는 <로맨틱 어나니머스>(한효주・오구리 슌 주연)로 이어지는 ‘한일 로맨스물’이 연달아 공개될 예정이다.

3) 정창훈, 『한일관계의 ‘65년 체제’와 한국문학: 한일국교정상화를 둘러싼 국가적 서사의 구성과 균열』, 소명출판, 2021, 231-235쪽.

4) 김학찬, 「작가의 말」, 김학찬 외, 『소설 도쿄』, 아르띠잔, 2019, 264쪽.

5) 박민정, 「세실, 주희」, 『바비의 분위기』, 문학과지성사, 2020, 48쪽.

6) 이은지, 「해설: 무지한 반역의 크로노토프(chronotope)」, 『2018년 제9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18, 45쪽.

7) 이에 관한 보다 상세한 논의는 후쿠시마 료타 · 청육만, 윤재민 · 정창훈 역, 『변경의 사상―일본과 홍콩에서 생각하다』(현실문화, 2024)의 ‘제12회: 내셔널리즘에서 도시적 아시아주의로’ 내용 참고.

8) 최은영, 『쇼코의 미소』, 문학동네, 2019, 27쪽.

9) 양순주, 「횡단하는 자들의 흔적: 한정현, 『줄리아나 도쿄』(스위밍꿀, 2019)」, 『오늘의문예비평』117, 오늘의문예비평, 2020, 232쪽.

10) 신샛별, 「일본의 ‘언캐니한’ 귀환, 그리고 그 속의 여성들」, 문학광장, 2019.09.05. (URL: https://webzine.munjang.or.kr/archives/144790)

11) 신샛별도 위의 글에서 두 인물의 경험적 유사성에 주목하여 ‘여성으로서의’ 연대 가능성에 관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12) 한병철, 전대호 역, 『정보의 지배: 디지털화와 민주주의의 위기』, 김영사, 2023, 47-59쪽.

13) 다만 한정현의 『쥴리아나 도쿄』 이후의 소설들, 예컨대 「괴수 아키코」, 「쿄코와 코지」, 「대만호텔」 등은 오키나와 문제를 중심으로 한일 양국의 근현대사에서 주변화·비가시화된 존재들의 서사를 상상적으로 연관 지으며 독자적인 문제의식을 발전시켜 가고 있다는 점에서 각별한 주목을 요한다. 그러나 이에 관한 상세한 논의는 별도의 지면을 요구하기에 아쉽지만 이 글에서는 언급하는 것에 만족하기로 한다.

14) 박민정, 앞의 책, 73쪽.

15) 이 부분은 아즈마 히로키의 ‘오배(誤配)’에 관한 논의를 참고하여 쓰였다. 아즈마에게 “예기치 않은 소통이 일어날 가능성을 많이 함축한 상태”를 뜻하는 그것은 예측의 범위를 초과한 우연한 사건의 개입을 통해 시스템 외부의 타자와 연결되는 것을 의미한다. 아즈마 히로키, 안천 역, 『관광객의 철학』, 리시올, 2020, 164쪽.

추천 콘텐츠

동그라미와 동그라미, ∞

동그라미와 동그라미, ∞ - 김멜라의 「이응 이응」1)을 읽으며 ‘사랑’을 생각하기 송연정 동그란 이응 “성욕은 만지고 닿고 싶은 마음과 어떻게 다를까.”2) 어떻게 다른지는 모르겠다만, ‘사랑 없는 섹스’라는 말을 생각해 볼 때, 어떻게든 다르긴 다를 것만 같다. 사랑하는 이에 대한 무수한 열망 중 하나가 성적인 끌림으로 발현될 수는 있지만. 성적으로 결합했다고 해서 상대방을 사랑한다고 말하기엔 다소 난감하다는 쪽이 우리에게는 훨씬 익숙하게 느껴지니 말이다. 이러한 태도에서라면 성욕과 사랑 중 우위를 점한 쪽은 아마도 사랑이다. 사실 성욕은 사랑이 아닌 그 어떤 감정과 붙어도 대부분 진다. 적어도 성욕이 순전히 육체적인 충족만을 위해 발동된다는 전제하에서는 말이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이끌려 마침내 두 영혼이 공명하는 일은 낭만적이며 아름답고 심지어 숭고하지만, 몸과 몸의 결합은 충동적일뿐더러 한때이고 가끔 추잡하기까지 한 것 같다. 몸을 열등한 것으로 깎아내리며 그와 관련한 일체의 욕망을 부정하고 터부시하는 일은 우리의 오랜 습관이기도 하다.3) 그러나, 만지고 닿고 싶은 마음은? 상대를 만지고 싶고 또한 상대의 손길이 나에게로 향했으면 하는 애욕은, 어쩐지 성적인 뉘앙스를 함의하고 있는 듯하면서도 정서적인 이끌림을 수반하는 것도 같기에 더욱 미묘하고 어렵게 느껴진다. 김멜라의 「이응 이응」은 ‘이응’이라는 둥근 캡슐을 통해 성욕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며, 나아가 앞선 질문에 대한 나름의 대답을 마련해 본다. 「이응 이응」의 세계관에서 이응은 공원이나 목욕탕, 미술관이나 도서관, 학교와 주민센터와 병원에서도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상용화된 기계이다. 사람들은 거대한 물방울처럼 생긴 캡슐 형태의 이응으로 들어가 “손오공의 머리띠처럼 생긴 은색 띠를 머리에 두르기만 하면 됐다.”(32쪽) 남성과 여성 혹은 그 너머의 스펙트럼 속 정체성의 명도를 조절하고, 성적 끌림 대상과 정서적 끌림 대상, 끌림의 크기, 받고 싶은 곳과 하고 싶은 곳··· 이외에도 몇 단계의 설정을 완료하고 나면 이응이 작동한다. “근육의 수축과 경련 그리고 이완. 오감을 채워 주는 이미지에 둘러싸여 양극과 음극의 전기 자극에 따라 맥박수와 혈압이 상승하고 나중에는 모든 긴장이 풀리며 상쾌해진다. 무의식 상태로 들어서게 하는 델타파부터 휴식과 이완을 주는 알파파까지. 이응은 단계별로 뇌파의 변화를 유도해 우리의 몸과 의식을 열린 상태로 만들어” 주는(30쪽), 그야말로 청결하고도 건강하며 합법적인 성욕 해소 기계인 것이다. 이응의 현자는 바야흐로 새로운 로맨틱의 시대가 열렸다고 말했다. 번식과 성욕, 사유재산이 만들어 낸 오랜 통치술의 사슬을 끊어 내고, 진실로 사랑의 의미를 깨우친 이들이 평등하고 자유로운 관계를 맺는 반려의 르네상스가 도래했다고 말했다.

  • 관리자
  • 2025-05-01
새로움의 경제 2(2)

새로움의 경제 2(2) 강동호 1. 새로움의 역설 광인은 입을 다물고 청중들을 다시 바라보았다. 청중들도 입을 다물고, 의아한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았다. 마침내 그는 등물을 땅바닥에 내던졌다. 등불은 산산조각이 나고 불은 꺼져버렸다. 그가 말했다. “나는 너무 일찍 세상에 나왔다. 나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이 엄청난 사건은 아직도 진행 중이며 방황 중이다. 이 사건은 아직 사람들의 귀에 들어가지 못했다. 천둥과 번개는 시간이 필요하다. 별빛은 시간이 필요하다. 행위는 그것이 행해진 후에도 보고 듣게 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 니체, 『즐거운 학문』1) ‘새롭다’라는 말은 대개 ‘다르다’ 혹은 ‘최근에 생산되었다’라는 의미가 결합된 단어로 통용되곤 한다. 새로움이라는 개념이 일상에서 빈번하게 사용되는 까닭은 그것이 대상의 특징적 차이를 지시하고, 그 특별한 가치를 강조하는 데 있어 가장 직관적인 기호에 해당해서일 것이다. 시장(market)은 이러한 ‘기호 가치’로서 새로움이 이견 없이 유통되는 대표적인 시공간 가운데 하나이다. 가령 어떤 자동차를 일컬어 ‘새로운 자동차’라고 규정한다면 우리는 해당 자동차가 여타의 자동차들과 다르며, 상대적으로 최근에 출시된 신상 모델이라는 사실을 즉각적으로 인지할 수 있다. 이때 새로운 자동차가 사람들로부터 더 큰 매력과 구매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자연스럽고 합리적이다. 새로움은 해당 제품의 기능적 우월성을, 그리고 그로부터 얻게 될 한층 차별화된 만족과 유용성을 표현한다. 여기서 새로움이라는 기호에 함축되어 있는 ‘차이’(difference)의 기제는 새로움이 일종의 비교적 가치라는 점을, 나아가 차이의 비교 우위를 정당화하는 원리가 발전·진보·개선 등의 시간적 내러티브와 밀접하게 연동되어 있음을 말해 준다. “우리 시대에는 차이가 최우선의 높은 가치를 지닌다”2)는 바우만의 진단처럼, 새로움의 가치화 현상이 기반하고 있는 것은 이른바 차이의 경제(economy of difference)이다. 차이적 가치 혹은 가치로서의 차이야말로 교환·거래를 활성화하는 매혹의 원천이자, 시장의 혁신적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경제적 원리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차이의 경제는 예술 작품의 미학적 의의를 규명하는 과정에도 유사하게 적용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주지하듯 예술은 작품들 사이의 차이를 판별하고, 원본성·독창성·창의성 등의 이름으로 작품의 새로움을 조명하려는 제도적 장처럼 인식된다. 하지만 예술 작품의 새로움이 차이의 논리를 통해 온전히 설명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통적으로 적지 않은 이견이 제기되어 왔다. 이를테면 키르케고르(Kierkegaard)는 새로움과 차

  • 관리자
  • 2025-05-01
네버랜드 탈출기

네버랜드 탈출기 ― 김희준론1) 최다영 1. 신(新) 아카이브 프로젝트 선행 평론에서 적확하게 포착하고 있듯 “근원이나 태생에 대한 감각”이나2) “원형 회귀본능”을3) 말하지 않고서는 김희준의 시에 접근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들은 현상의 내밀한 원인을 해명하거나 김희준의 시적 작업이 내포한 고발과 대항 의식을 읽어 내기엔 여전히 충분하지 않은 키워드이기도 하다. 수록작이기도 한 ‘사기(史記)꾼’이라는 제목은 충실한 아키비스트(archivist)이자 교란하는 트릭스터(trickster)라는 상반된 함의를 모두 내포한다. 혹은 아키비스트의 본령이 트릭스터일 수밖에 없음을 일깨우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기(史記)꾼’으로서 김희준은 고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신화와 성서, 동화 등 무수히 집적된 공동체적 기억의 편린을 환상적으로 중첩하고 그로테스크하게 변형시킨다. 그리고 이렇게 비틀고 왜곡하는 지점에서 김희준만의 원형적 이미지가 접속 면의 틈을 찢고 출현한다. 그의 시의 근간을 형성하는 태(胎)가 익숙한 공통의 근원 서사에서 발생했을지언정 반복적으로 그려지는 성교와 번식, 근친과 식인의 모티프는 공포스러운 재생 감각으로 연결되며 그만의 개인적 이미지로 일관되게 수렴하는 것이다. 바르부르크의 언급대로 이미지가 생물학적 필연성의 산물이라면, 김희준이 강박적으로 봉합하고자 한 거대 명제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인류는 종교, 예술, 문학 등 다양한 방법을 경유하여 원초적 두려움으로부터 자신과 공동체를 보호하며 종의 계승을 보존해 왔다. 출생과 소멸에 대한 두려움은 어느 인간도 피해 갈 수 없기에 해결할 수 없는 보편타당한 종의 운명 앞에서 이를 추상화하고 거리를 둠으로써, 또 사회적 집단 기억을 대를 이어 계승함으로써 두려움을 봉합하고 파토스를 안정시켜 온 것이다. 마찬가지로 김희준은 그 자신의 개인적 이미지를 개발하고 반복적으로 중첩시킴으로써 이미지의 기원에 대한 대답을 동시대에 가장 분명하게 제시하며 등장했다. 김희준에게 있어 기원을 더듬는 일은 그 계보를 추적하는 것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화적 세계관을 축조하고 공고히 하는 데 있다. 그리고 이때 감지되는 건 신화와 동화의 알레고리 이면에 자리한 가부장적 폭력에 대한 고발과 저항 의식이며 더 나아가 발생과 소멸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 두려움이라 할 수 있다. ⓒ엄윤채 (@90r1p) 2. 재생하는 네버랜드 김희준의 시 속에서는 무언가가 끊임없이 쏟아져 내린다. 그것은 주로 ‘소나기’이지만 때로는 “불”이기도 하고(「인류도감」) “아이”이거나 “유성”(「백색소음」), “사내”(「페스티벌」), “밀도 높은 당신” 혹은 “저녁”(「오후를 펼치는 태양의 책갈피」, 「테트리스 적응기」), &ld

  • 관리자
  • 2025-05-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