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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는 사람

  • 작성일 2024-11-01
  • 조회수 531

   기억하는 사람

   ―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최의진


1. 기억


   당신이 나의 일상에서 멀고, 당신의 고통을 내가 곁에서 함께 겪을 만큼 가깝지 않다면, 당신이 기억난다는 말은 이런 것이다. 당신을 떠올리게 하는 계절이 지나면 어느덧 제삼자가 된 것처럼 나도 모르는 사이 먼발치에서 살아왔다는 것. 잊으려 애쓴 적 없고, 오히려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으나, 그럼에도 그 기억 곁에 항상 머물러 살지는 않았다는 것. 물론 이는 분명 망각과 구별되며, 머릿속 어딘가에 당신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기억함’과 닮았으므로 우리는 때로 외부 요인에 의해 촉발되는 ‘기억남’이나 ‘떠올림’을 다른 누군가 없이도 당신을 계속해서 내 안에 간직하는 ‘기억함’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4·3, 5·18, 4·16··· 혹은 제주, 광주, 팽목항···처럼 뭉툭한 날짜와 지명으로 적히는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살아 있는 당신을 마주하게 되면 내가 ‘기억함’이라 믿어 왔던 모든 순간은 다시 의심에 넘겨진다. 어디선가 당신의 이름을 마주치거나, 때가 되면 당신이 기억났지만, 그 이상으로 지속되지 않았던 기억의 공백들은 당신을 계속해서 기억하려는 의지가 내게 없었음을 짚고, ‘기억남’과 ‘기억함’의 사뭇 다른 무게를 증명한다. 매해 봄이 오면 세월호가 기억나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 싸우고 있는 사람들을 떠올리는 것을 넌지시 ‘기억함’으로 여겨 왔으나, 10년을 상실에 꿰뚫린 채 진실을 밝히기 위해 살아온 사람, 그리고 그들의 가장 가까운 곳에 서기 위해 삶을 바쳐왔던 사람과 실제로 마주 앉자, 나는 당신들을 기억한다고 차마 말할 수 없었던 것처럼.

   익숙하게 기억한다 말하던 자리가 낯설고 무거워지는 것이 ‘나’1)와 당신의 끝이 되지 않도록, 문학은 ‘기억남’에서 ‘기억함’에 이르는 길을 놓는다.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는 작별하지 않는 ‘기억함’을 단지 당위와 윤리로 여기는 대신, 끊임없이 질문하며, ‘기억남’이 몰고 오는 고통과 ‘기억함’이 품은 의지가 심장에 불을 켜는 삶 사이를 횡단한다. ‘기억남’은 어떻게 해야 ‘기억함’이 되는지, ‘나’가 ‘기억함’의 무게를 견딜 수 있을지, ‘나’에게 정말 이 길만이 유일한지. 



2. 밀물과 썰물


   소설의 1부를 이루는 축은 “그 도시의 학살”2)에 대한 책을 집필한 후, 그리고 친구, 인선의 부탁을 받아 오로지 새 한 마리를 살리기 위해 제주의 중산간으로 향하는 길에서 경하가 겪는 고통이다. 고통을 겪고 묘사하는 일인칭 주체가 경하이기에 표면에는 타인의 고통보다 ‘지금-여기’에서 겪는 그녀의 고통이 드러나지만, 결국 이 고통은 ‘과거-그곳’의 사건으로 고립된 타인의 고통을 ‘지금-여기’의 고통으로 통역하는 경유지이자 현재와 맞물리게 하는 통로로 자리한다.

   작가인 경하는 학살에 대한 책을 낸 후에도 학살당한 사람들의 고통과 작별하지 못한 채 악몽과 불안에 시달린다. 그녀가 집필하고 있는 시간과 재현의 대상이 된 시간의 간극이 수십 년임에도 그렇다. 자신이 재현하려던 죽음을 함께 앓는 것처럼 경하는 작업실로 가는 도보 15분의 짧은 길에서도 “일차선 도로 건너편 건물들의 옥상에서 저격수가 사람들을 조준하고 있을 것 같”아 불안해한다. “수면의 질” 또한 “차츰 더 나빠지고 호흡이 짧아”진다. “악몽과 생시가 불분명하게 뒤섞”(19면)인 채 무너져 가는 삶을 견딜 수 없어, 그녀는 유서를 쓰며 살아서는 작별할 수 없는 고통과 작별을 시도한다.

   이 고통의 표면에 드러나는 것은 계속해서 타인의 고통을 떠올리며 무너져 가는 경하지만, 표면이 비추는 것은 학살이라는 단어에 다 담길 수 없으며, 그 일부를 써보려는 시도만으로 삶을 무너뜨리는 타인의 고통이다. 현재를 무너뜨리는 위력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타인의 고통은 그것을 ‘나’와 분리된 ‘과거-그곳’의 일로 여기며 거리를 둘 수 없을 만큼 ‘지금-여기’와 가까워진다. 좁아진 거리는 타인의 고통을 끊임없이 생각하도록, 그리하여 그것을 “손쉽게 여읠 수”(23면) 없도록 만든다. 이처럼 ‘나’가 타인의 고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은 ‘나’의 고통이 자기 연민으로 닫히지 않도록 열어, ‘기억함’의 방향으로 돌려세운다.

   타인의 고통을 여의지 못한 채 꾸기 시작한 경하의 꿈은 유서를 쓰는 현실보다도 앞서 ‘기억함’을 향해 뻗어간다. 꿈에는 사람의 형상을 닮은 통나무 수천 그루가 서 있는 벌판이 등장한다. “수천 명의 남녀들과 야윈 아이들이 어깨를 웅크린 채 눈을 맞고”(9면) 있는 것 같은 검은 나무들 뒤에는 봉분이 엎드려 있다. 그러나 그 벌판의 끝은 바다이기에 뼈들은 밀물을 피할 수 없고, 썰물과 함께 쓸려 나간다. 경하는 꿈속에서 그녀를 짓누르는 전율을 견뎌내며, 물이 더 차오르기 전에 뼈를 옮겨야만 한다는 다급함에 들끓는다. 뼈를 옮길 수단 하나 없음에도 그녀는 아직 묻혀 있는 마른 뼈들, 여전히 남아 있는 타인의 고통과 죽음으로부터 떠나는 방향을 택하는 대신 오히려 “파도가 휩쓸어가버린 저 아래의 뼈들을 등지고”, “아직 무사”(26면)한 뼈들을 향한다. 현실에서는 간절히 그들의 고통과 분리되고 싶어 작업실을 마련하고, 죽어서라도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유서를 써 왔음에도 그렇다.

   한편, 경하가 인선의 새를 살리기 위해 제주에 도착했을 때, 여의지 못하던 타인의 고통과 꿈속 벌판에서 그녀를 겨누던 위압적인 전율은 폭설이 되어 현실로 도래한다. 내리는 눈은 경하가 걸어온 모든 길을 덮어 그녀가 돌아갈 길을 끊고, 인선의 집으로 가는 길만을 유일하게 만든다. 마중 나와 줄 인선도, 인선의 집까지 데려다줄 다른 수단도 없이 도보로 걸어가야 하는 마지막 구간에서 경하는 비탈에서 굴러 건천으로 떨어진다. 손목에 걸린 시계조차 볼 수 없는 어둠 속에 남은 것은 “통증보다 끔찍”(127면)하고, 턱이 아프도록 떨려 소매를 물고 버텨야만 하는 추위뿐이다.

   추위가 고통마저 집어삼킨 채 경하를 무감하게 만드는 만큼, 고통을 초과한 죽음은 그녀에게 서늘하게 스민다. 폭설이 만드는 추위와 어둠이 경하의 얇은 피부로 침투하는 만큼 ‘나’와 타인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벽은 한없이 얇아진다. ‘나’가 ‘나’를 유지하기조차 어려워지는 그 순간, 수십 년 전 제주 중산간에서 벌어졌던 고통과 죽음은 시간이라는 물리적 경계를 넘어 현실의 눈송이로, 생생한 감각으로 경하에게 떨어지고, 나의 고통은 여읠 수 없는 타인의 고통과 맞물린다.(“칠십 년 전 이 학교 운동장에서 수백 명의 아이들과 여자들과 노인들의 얼굴이 눈에 덮여 알아볼 수 없게 되었을 때 (···) 그 물방울들과 부스러지는 결정들과 피 어린 살얼음들이 같은 것이 아니었다는 법이, 지금 내 몸에 떨어지는 눈이 그것들이 아니란 법이 없다.”(136면))

   타인의 고통이 외부에서 ‘나’를 둘러싼 채 끊임없이 그들을 생각하게 만드는 것을 넘어, 자아의 외벽을 무너뜨리고 ‘나’의 안으로 밀려 들어왔기에, ‘나’는 외부의 무언가가 타인의 고통을 기억하라 떠밀지 않더라도 스스로 그들을 떠올릴 수 있게 된다. 이는 타인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한다거나, 그들과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불가능한 상상 대신 이제 ‘나’가 타인을 기억할 수 있다는 하나의 가능성만을 남긴다. 그럼에도, ‘기억함’에 이르기 위해서는 한 걸음이 더 필요하다. 밀려들어온 타인은 둑을 쌓지 않는 이상 언제든 다시 썰물처럼 빠져나갈 수 있으므로.



3. 둑


   타인의 고통이 ‘과거-그곳’에 있는 먼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여기’에서 ‘나’를 둘러싸고, 마침내 ‘나’를 밀고 들어올지라도, 그것을 계속해서 기억하며 여의지 않는 삶, “단지 그것밖엔 길이 없”(27면)다 고백하는 일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밀려들어온 타인의 고통이 ‘나’의 기억 속에 머물게 하기 위해서는 의지적 선택이 필요하다. 타인의 고통을 기억하기 위해 나아가는 길 위에는 그로부터 돌아설 수 있고, 돌아서고 싶은 순간 또한 무수하기에, 같은 방향을 끝까지 견지하기 위해서는 몇 번이고 고통과 함께 도래하는 분기점에서 의지적으로 타인의 고통을 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선의 부탁을 받은 경하가 새를 살리러 가는 모든 여정에도 그녀의 의지와 선택이 개입되어 있다. 언뜻 보기에는 거대한 눈구름과 폭설이 돌아갈 길을 끊었기에 경하가 앞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도 같지만, 그 길만이 유일한 것은 아니었다. 인선의 부탁을 “거절할 방법이 없었다”(67면)고 말하지만, 경하에게는 새를 꼭 구해야만 할 책임은 없었다. 인선이 경하의 꿈속 벌판에 나오는 나무들을 실제로 재현하는 공동 프로젝트를 홀로 진행하다 사고가 났다 하더라도 그렇다. 경하는 분명 그만두자고 말했으나, 인선이 홀로 나무를 준비했고, 결정적으로 인선은 경하의 어떤 자책에 기대어 새를 부탁하지 않았다. 경하는 여기에서 인선의 무리한 부탁을 거절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경하는 비행기를 타고 제주로 날아갔다. 어떤 택시도 곧 길이 끊길 것 같은 중산간으로 들어가 주지 않았을 때, 직원에게 물어 가며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일주 버스를 타고 가서 P읍에 내려 오래도록 지선 버스를 기다렸다. 더는 갈 수 없다고 말하려 인선에게 전화를 걸기도 했으나, 제대로 연락이 되지 않자 결국 뒤늦게 들어온 지선버스에 올라타 먹구름과 눈안개가 그득한 중산간으로 향했다. 인선의 집과 가장 가까운 세천리 정거장에 내려서는 제대로 된 랜턴 하나 없이 눈밭을 걸어 인선의 집으로, 살아 있을지도 모르는 새에게로 걸었다.

   경하가 사람을 찾아 길을 묻고, 버스에 오르고, 갈아타기 위해 P읍에 내리고, 결국 지선 버스에 올라타고, 세천리에 내리고, 인선의 집으로 걸어 올라가는 모든 순간은 타인의 고통에서 돌아설 수 있는 분기점이었다. P읍에서 내리지 않고 계속 버스를 탄 채 공항으로 돌아갔다면, 오지 않는 지선 버스를 기다리는 대신 다시 일주 버스를 잡아타고 서귀포로 가서 인선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했다면, 세천리로 들어가는 마지막 지선 버스에서 내리지 않고 P읍으로 돌아갔다면, 경하는 인선의 집 대신 제주 시내로, 혹은 서귀포로 돌아갈 수 있었다. 폭설이 내리고 있었으므로 인선이 부탁한 시간 안에 도착하지 못한 것은 얼마든지 어쩔 수 없는 일로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분기점에서 경하는 새를 택했다. 어떻게든 새를 구하겠다는 결연함은 없었고 오히려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았으면서도, 결국 모든 분기점마다 “오늘 안에 물을 줘야 살릴 수 있”(130면)는 새에게로 걸었다. “이 눈보라를 뚫고 오늘밤 그녀의 집으로 갈 만큼 그 새를 사랑하지 않는다”(88면) 말하였으나, 그 새 때문에, 죽을 만큼 스미던 추위와 무시무시한 폭설을 견디고 마침내 인선의 집에 이르렀다.



   새장 앞으로 돌아와 선다.


   방금까지 따듯한 피가 돌았던 듯 생생한 적막에 싸인 조그만 몸을 들여다보는 동안, 그 끊어진 생명이 내 가슴을 부리로 찔러 열고 들어오려 한다고 느낀다. 심장 안쪽까지 파고들어와, 그게 고동치는 한 그곳에서 살아가려 한다.(150~151면)



   비행기를 타고, 버스에 오르고, 눈길에 늦어지는 버스를 기다리고, 갈아타고, 눈밭을 걷는 일. 이것은 너무나 크고 위대하여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은 아니다. 다만 각각의 순간마다 경하에게 분명한 의지와 선택을 요구하는 일이었고, 그녀는 때마다 작은 희생을 지불했다. 켜켜이 쌓인 이 의지는 경하가 인선의 새, 아마에게 닿을 길을 놓는다. 경하가 물리적으로 인선의 집에 도착해 죽은 아마를 묻게 할 뿐 아니라, 그녀의 “심장 안쪽까지” 아마를 들일 길을 낸다. 새가 경하에게로 파고들 수 있다는 말은 곧 경하가 새를 사랑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녀가 죽은 아마가 “나의 새가 아니”고, “사랑한 적도 없다”(152면)고 말할지라도 그렇다. 죽은 아마 앞에서 “시고 끈적이는 눈물이 솟”(같은 면)을 만큼 경하는 새를 사랑하고 있다. 사랑은 결국 타인을 ‘나’의 중심에 두고자 부단히도 애쓰는 일이기에, 갈라지고 또 갈라지는 분기점마다 아마를 택하려 노력하고 의지를 쏟았던 경하의 모든 길은 그녀가 아마를 사랑하게 되기까지의 여정과 다르지 않다.



   심장이 다시 뛸 거지. 그렇지, 이 물을 마실 거지.(170면)



   이 사랑은 타인의 고통과 작별하고자 하던 시도를 작별하고 싶지 않다는 간절함으로 바꾸고, 타인의 고통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지 않도록 둑을 쌓는다. “심장 안쪽까지 파고들어”온 타인이 ‘나’의 심장이 “고동치는 한 그곳에서 살아가”(151면)기를 간절히 원하게 되는 그때, ‘기억남’은 의지와 사랑을 힘입어 비로소 ‘기억함’에 이른다.



4. 연쇄


   ‘기억남’이 ‘기억함’에 닿으면, 소설은 작별을 명령하던 죽음과 시공간의 경계가 함께 무너지는 환상과 현실의 경계면으로 접어든다. 소설의 2부에서는 멈추는 법 없이 흐르는 시간이, 섬과 육지를 가르는 바다의 힘이 무력해진다. 생사의 경계가 지워지며 아마가 살아 돌아오고, 몇 해 전 죽은 새, 아미가 그림자로 날아든다. 시공간의 경계가 흔들리며 병원에 있어야 할 인선이 멀쩡한 오른손으로 제주 집에 나타난다. 제주 4·3의 모든 폭력과 죽음, 그리고 고통과의 작별을 명령하던 압력 또한 잠시 멎는다. 타인의 고통과 죽음이 ‘나’ 또한 죽이리라는 두려움이 잠잠해지고, 오래 지났으니 그만 잊어도 좋다는 핑계가 불가능해진다. 그 경계면 속에서 잠잠히 타인의 흔적을 읽고, 들여다보고, 듣는 고요함으로 실현되는 ‘기억함’은 작별에 저항하며, 기억하는 과정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통증 속에서도 끝까지 타인을 간직할 길을 찾는다.

   쌓인 시간과 먼 거리가 밀어붙이던 작별이 유예된 그때, “들보가 무너지고 재가 솟구치던 자리”(244면)에서 비로소 들리는 소리가 있다. “말 사이의 침묵이 길”고 “내러티브가 끊어져 있”(34면)어 이해하기 어려웠던 고통과 죽음들이 그것이다. 그 고통을 심장께에 심은 경하는 한없이 잠잠해지는 방식으로 그들을 기억한다. 인선의 어머니 정심이 4·3 당시 죄 없이 끌려가 이감되는 중 실종된 오빠를 찾기 위해 평생에 걸쳐 죽음을 추적하고 들여다본 기록을 읽고, 인선의 증언을 통해 그 기록의 행간을 듣는다. 일련의 과정은 누구도 해치거나 부수지 않을 세심하고 미약한 움직임으로 이루어진다. 그녀들은 촛불 하나를 의지하여 고개를 숙인 채 절멸되지 않았던 자들의 증언을 읽고, 삭아버린 신문 조각들이 부서지지 않도록 애쓴다.

   이 조심스러움 속에서 “소녀인 채로 늙은”(82면) 듯한 정심의 형상은 평생을 걸쳐 죽음을 들여다보며 싸워 온 정심의 평생과 연결되어 입체를 이룬다. 그녀가 평생 악몽을 쫓기 위해 요 아래 깔아 두었던 실톱은 악몽을 두려워하는 나약함이 아니라, 군사정부 삼십사 년의 암흑 속에서도 어떤 모습으로든 돌아와야 할 가족을 기다리며 견뎌낸 간절한 사랑의 증거로 자리한다. 경하의 여정 내내 누군가의 증언으로, 다큐멘터리의 일부로, 섬뜩한 폭력에 대한 묘사로 조각난 채 그녀 외부의 사건으로 삽입되던 제주 4·3의 고통은, 이제 정심의 인생이라는 내러티브를 가지고 하나의 삶을 이루며, 새가 파고들었던 그 자리에 깃든다.

   타인을 ‘나’의 심장에 깃들이며 기억하는 일은 분명 고통스럽기에, 계속해서 기억하며 정심의 삶을 짚어 나가던 경하는 인선이 유해 발굴에 대한 자료집을 내밀 즈음에는 더는 뼈들을 보고 싶지 않다고, 페이지를 넘기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분기점마다 새를 택해 온 경하의 의지와 죽은 새가 심장에 머무르기를 바랐던 사랑은 “떨리는 손”(285면)의 모습으로 뻗어 나가 표지를 열며, 정심이 고통 속에서도 끈질기게 견뎌 온 세월과 학살당한 채 뼈들로만 남은 이들이 그녀의 중심에 머물도록 붙든다.

   새에 대한 사랑이 정심과 수많은 뼈에 대한 사랑으로, 죽은 새를 기억함이 오랜 침묵 속에 있던 죽음을 기억함으로 이어지는 연쇄는 힘주어 작별을 밀어내며, “뭔가 안쪽에서 어른거리는 것”이 보일 때까지 “얼굴을 붙이고 끈질기게 들여다”(320면)보게 만든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321면)가 “이상한 이야기라고 생각되지 않”(322면)을 때까지 듣고 또 듣게 한다. 이 연쇄 속에서 ‘나’는 비로소 당신 앞에서 차마 말할 수 없었던 한 문장을 고백할 입술을 갖게 된다.



5. 숨


   나는 당신을 기억한다. 이 한 문장에 진실해지기 위해 ‘나’는 타인의 고통 곁에 앉았으며, 타인이 ‘나’의 안으로 밀려들어오도록 두었다. 그 고통 전부를 이해하거나 모든 삶을 내어줄 수 있다는 불가능을 꿈꾸는 대신, 타인의 고통으로부터 돌이킬 수 있는 분기점마다 오히려 그들을 향해 몸을 기울이며 작은 의지들을 켜켜이 쌓았다. 그렇게 타인을 ‘나’의 중심에 두려 애쓰는 동안 ‘나’는 그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타인은 ‘나’를 열고 들어왔고, ‘나’는 그리하여 그들을 ‘나’의 바깥이 아니라 심장에 심는 ‘기억함’에 이르렀다. 타인에 대해 말하거나 판단하는 대신 오로지 고요하게 타인의 고통을 듣고, 읽고, 들여다보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지금껏 듣지 못하던 타인의 고통과 죽음 한 조각을 붙들게 되었다. 그들을 붙든 손과 깃들인 심장에 통증이 일어도, 이미 타인을 사랑해 온 마음은 손에 힘을 빼고 등을 돌리는 대신 계속해서 타인을 기억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이 문장 또한 진실이다. ‘기억남’에서 ‘기억함’으로 가는 “그 페이지들을 건너가라고 누구도 강요할 수 없다”.(285면) 기억해야 한다는 말에 “복종할 의무가 나에게 없다”.(같은 면) 그렇기에 사랑과 기억함의 연쇄 사이로 낫지 않을 통증이 또다시 치밀고, 타인의 고통에 온전히 다가설 수 없다는 절망이 ‘나’의 발목을 잡고, ‘나’의 심장에 깃들였음에도 타인이 때로 멀어 보이는 순간, 충분히 질문할 수 있다. 기억하기 위해 살아가는 이 길만이 정말 유일한가. 소설은 당위와 윤리의 엄격한 얼굴 대신 사랑으로 대답한다. 4·3 당시 학살당한 사람들의 얼굴 위로 내리던 눈송이가 순환하여 경하의 뺨에 닿듯, 이 세계는 ‘나’로만 이루어지지 않고 무수한 타인과 연결되어 있다고.3) 그러니 엮이고 기대어 살아야만 하는 세계에서 기억하고 사랑함으로 맞닿지 않은 채 타인을 버려둔다면, 그것은 결국 스스로 ‘나’를 버리고 고립시킨 채 죽어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경하가 그러했듯, 타인을 사랑하고 기억할 때만 ‘나’의 삶이 가능해진다고.

   경하는 죽어서라도 타인의 고통과 작별하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쉽게 유서의 수신인을 채우지 못했기에 살아남았다. 자신의 유서가 수신인에게 만들 수 있는 충격, 그 충격으로 인해 “쉽게 부서지고 끊어져 버릴 가능성을 품고 있는”(15면) 타인을 자신의 고통보다도 먼저 기억하는 염려로 말미암아, 죽음은 “미세한 각도의 오차로” 그녀를 “비껴갔다”.(같은 면) 새를 살리기 위한 여정 속에서 경하의 심장에 사랑으로 깃들인 타인의 고통은 아마의 가칠가칠한 발이 되어 그녀의 “심장과 눈동자에 동시에 불”(184면)을 댕겨 추위를 몰아내고, 시공간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돌아온 인선이 되어 조릿대 잎으로 차를 끓여 주며 경하의 몸을 덥혔다. 살아 있도록, 계속해서 살아가도록.

   삶을 가능하게 하는 이 사랑은 오로지 타인을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나’에게로 흘러 들어오기에, ‘기억함’을 향한 여정은 계속되어야 한다. 타인을 여의고 안온하게 죽어가라고, 삶과 작별하라고 밀어붙이는 명령에 속지 않는 방법은 이것뿐이다. 이제 “초가 얼마나 타들어갔을지 더 이상 생각하지 않”(307면)고 타인의 고통을 심을 벌판을 향해, 작별하지 않기 위해 어둠을 가르고 나아간다. 당신을 기억한다. 작별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간다.*


1) 이후 언급되는 ‘나’는 기억남에서 기억함으로 이행하는 주체를 의미한다.

2)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문학동네, 2021, 12-13면. 이후 본문의 내용을 인용할 경우 면수만 표기한다.

3) “타자의 삶, 즉 나 자신의 것이 아닌 삶은 또한 우리의 삶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이 가진 어떤 감각이든 이와 같은 사회성으로부터 오며, 사회적 세계 안에서 구성되는, 그리고 사회적 세계에 의해 구성되는 타자의 세계에 처음부터 이미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이는 우리 각자가 얼마나 개별적 존재인지에 상관없이 서로에게, 그리고 인간 형태를 넘어서는 삶의 과정들에 엮여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주디스 버틀러, 김응산·양효실 역,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 집회의 수행성 이론을 위한 노트』, 창비, 2020, 159-16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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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등시민과 세계시민 사이 ― 소수자 시민권의 기획과 해외 이민의 상상력 오혜진 ‘탈조선’이라는 모험과 자기 계발의 윤리 2015년을 기점으로 확산된 ‘헬조선’ 담론은 계급 세습이 고착화된 한국사회를 풍자하는 ‘수저론’과 결합하며 당대 가장 대중적인 정치 담론으로 회자됐다. 잘 알려졌듯 이 담론은 한국사회를 더는 진보의 기획이 불가능할 정도로 도태된 미개한 공간으로 정의하며, 젊은 세대를 새로운 역사적 주체로 호명하려는 기성세대의 욕망 또한 단호히 거절한다. 헬조선 담론과 함께 부상한 ‘죽창론’ 역시 ‘리셋’에의 강렬한 열망을 내세웠지만, 이는 사회변혁에 대한 의지라기보다는 ‘죽으면 끝’이라는 자기 파괴의 제스처에 가깝다고 해석된다.1) 장강명의 『한국이 싫어서』(2015)2)는 청년 세대의 분노와 좌절, 자조의 정동이 주조한 헬조선 담론을 발 빠르게 포착해 선동적인 대중 서사로 가공한 사례다. 전작들에서 ‘자살’(『표백』, 2011)과 ‘덕질’(『열광금지, 에바로드』, 2014)을 통해 “저항하는 잉여”3)로서의 청년 형상을 부조한 바 있는 작가는 『한국이 싫어서』에서 ‘해외 이민’이라는 새로운 과제를 제출한다. 다만 그가 모종의 “도발”4)을 의도한 것과 달리, 독자들에게 이미 ‘탈조선’의 상상력은 불온하다기보다는 또 다른 차원의 ‘노오력’을 요하는 규범적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소설은 ‘해외 이민’이라는 선택지를 필연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한 두 가지 정황을 제시한다. 하나는 ‘평범한 여성’은 한국사회에서 시민권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이등시민”으로 분류된다는 점이다. “명문대를 나온 것도 아니고, 집도 지지리 가난하고, 그렇다고 내가 김태희처럼 생긴 것도 아니고, 나 이대로 한국에서 계속 살면 나중엔 지하철 돌아다니면서 폐지 주워야 돼.”(『싫어서』, 44쪽)라는 진단이 ‘홍대 나온 20대 후반 여성’ ‘계나’의 자기인식이다. 즉 계나는 학벌과 외모, 가족의 경제적 지원을 한국사회에서 여성이 시민으로 살아가기 위한 필수조건으로 파악한다. 또한 그는 어릴 적 자신의 할머니가 새벽에 폐지를 줍기 위해 무단 횡단을 하다가 뺑소니 사고로 사망했다고 회고함으로써 ‘폐지 줍는 할머니’의 형상을 돌이킬 수 없는 실패이자 비참한 미래로 의미화한다.5) 다른 하나는 소수자들이 연대해 사회구조를 변혁하고 지배체제에 저항하는 일이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판단이다. “도망치지 않고 맞서 싸워서 이기는 게 멋있다는 건 나도 아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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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2-01
실패의 의지

실패의 의지 - 최근 퀴어 가족 서사에 관하여 박민아 1. 내부의 외부 - ‘그런 것은 없다’ 행동심리학자인 프란스 드 발은 원숭이 실험을 통해 원숭이들이 불평등을 혐오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 실험을 통해 드 발은 현대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불평등보다 ‘평등’이라는 전통이 인간종보다도 더 오래된 개념임을 증명하고자 한다. 실험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우리에 갇힌 두 마리의 원숭이에게 일정한 행동의 수행을 요구한 후 그에 대한 보상으로 왼쪽 원숭이에게는 오이를 주고 오른쪽 원숭이에게는 포도를 준다. 같은 행위의 결과로 오이만을 지속적으로 전달받은 왼쪽 원숭이는 오이를 거부하거나 급기야 오이를 집어던지며 분노한다. 우리는 이 실험을 통해 ‘평등’이 인간종에게만 있는 특수한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1) 그런데 그보다 이 실험에서 재미있는 지점은 불평등한 보상 체계에 분노하는 왼쪽 원숭이가 아니라 오른쪽 원숭이의 반응에 있다. 실험이 진행되는 동안 오른쪽 원숭이는 불공정한 보상 체계를 의심하지 않으며 자신에게만 주어지는 혜택에 대해서도 의문을 갖지 않는다. 이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사실은 만약 평등에 대한 전통이 인간종보다도 더 오래된 개념이라면, ‘불평등’에 대한 전통 역시 그에 못지않게 오래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불평등 구조에서 수혜의 당사자는 평등에 별 관심이 없을 수도 있는 것이다. 오른쪽 원숭이에게 이 게임의 불공정성은 보이지 않는 것일까, 보이지만 외면하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너무나 ‘당연’한 무엇일까. 만약 이후에 두 원숭이가 경쟁을 통해 포도를 획득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어떻게 될까. 그리고 그 경쟁에서 패했을 때 오른쪽 원숭이는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까.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김보영의 SF소설 「얼마나 닮았는가」2)에서는 ‘성차별이 없다고 가정되는 세계’에 대한 일종의 ‘사고실험’을 보여 준다. SF에서 ‘사고실험’은 “만약?”을 질문하고, “우리가 불가피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현실” 또는 사회적 규범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3) 소설의 주요 배경이 되는 유로파용 보급선은 성차별에 대한 정보값이 입력되지 않은 ‘일종의 폐쇄 생태계’라고 할 수 있다. 소설 내 문제 상황은 크게 세 가지 층위에서 작동한다. 먼저 토성의 위성 타이탄에서 온 구조 신호에 응답할 것인가, 외면할 것인가를 두고 벌어지는 신념의 충돌이 갈등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면, (여성) 의체에 인격을 탑재한 위기관리 AI 컴퓨터 훈의 (인간/비인간의 경계를 위협하는) 타자로서의 지위에서 발생하는 취약성과 그에게 가해지는 남성 선원들의 폭력이 두 번째 층위에 있다. 그리고 이 사태를 진압해야 할 훈의 눈에 보이지 않는, 모종의 이유에 의한 선내 폭동에의 감지

  • 관리자
  • 2024-12-01
‘K-예술’, 전통, 세계화

‘K-예술’, 전통, 세계화 - 88 서울올림픽을 전후한 공연계 문화교류 담론에 대한 단상 전지니 (한경국립대학교 교수, University of California, Irvine Visiting Scholar) 1. 88 서울올림픽과 문화 세계화 최근 국립극장 전속 단체인 국립창극단(예술감독 겸 단장 유은선)이 제작한 가 영국 바비컨센터에서 관객과 관계자의 호평 속에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무리했다는 기사가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을 한국적으로 각색한 해당 작품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주영국한국문화원이 주관한 제11회 ‘K-뮤직 페스티벌’의 일환으로 공연되었다.1) 주지하다시피 K-POP 및 K-드라마의 전세계적인 흥행은 K-콘텐츠의 세계화라는 화두와 관련하여 지속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또한 맨부커상에 이은 작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번역의 난관을 가로질러 국내 소설이 다른 언어권의 독자와 어떻게 호흡할 수 있을지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했다. 그렇다면 창극 의 성공과 관련하여 공연예술의 해외 진출이라는 화두는 이 시점에서 어떻게 논의될 수 있을까. 이 글은 K-공연예술의 세계화 가능성에 대해 논하는 대신, 그 본격적인 논의가 진행된 1988년 서울올림픽 전후의 공연계 상황에 대해 논한다. 구체적인 실현 가능성이라는 문제와는 별개로 1950년대, 곧 전후 이미 세계 진출의 방향성을 논의하던 영화계와는 달리2), 공연계에서 세계 시장과 평단을 바라보게 된 시점은 1980년대 중후반이었다. 관련하여 1989년 한 언론에는 “한국문화 세계에 심자”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린다. 이 기사는 한국문화의 세계화 전략에 대해 논하며 전통예술의 해외 나들이가 활발해지고 있고, 특히 올림픽을 전후하여 헝가리, 동독 등 공산권 공연이 활발해지고 있음을 언급한다.3) 그렇다면 당시 ‘우리’ 공연의 세계화는 어떠한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었는가. 좀 더 구체적으로 당시 문화공보부(이하 문공부) 산하 단체인 국립극장이 목표하고자 했던 한국 공연예술의 해외 진출 및 세계화의 방향은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이 글은 냉전체제의 종식과 동구권 문호 개방이라는 당대의 화두와 관련해 공연예술의 세계화라는 목표가 어떤 방식으로 구현되었는지에 대해 살피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국립극장이 발행하는 정기간행물(당대 제호 《국립극장 소식》) 및 언론 기사를 통해 전통을 내세운 관 주도 문화교류의 명암에 대해 고찰할 것이다. 2. 이데올로기를 넘어서는 ‘지구촌 문화 축제’ 언급한 것처럼 정부 차원에서 국내 공연의 해외 진출을 본격적으로 권장한 것은 1980년대 이후다. 당시 LA올림픽(1984)와 서울아시안게임(1986)을 거쳐 서울올림픽에 이르기까지 국립극장은 물론 지자체와 민간 극단이 국제 협력과 문화교류 사업의 일환으로 전통 공연의 해외 진출을 모색했다. 1980년대 중후반 공연계의 화두는 ‘문화올림픽’과 &lsquo

  • 관리자
  • 2024-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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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판다곰젤리
    공감합니다

    자극적인 압축된 영상이 유행하는 시대에 타인의 삶이 무엇인지에,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졌고 우리에게 다가오는지에 대한 깊이 있는 고찰이 담긴 글 잘 보았습니다.인상적이거나 자극적인 것은 기억하려는 노력 없이도 기억나고 떠올리려고 하지만, 타인의 고통이나 슬픔 등은 자신과 육화되어야만 기억할 수 있는 또 다른 고통과 슬픔이고 외면하고픈 자기 과거의 일면과 마주해야 하는 자기 인정이므로 망각을 하고자 합니다.시대가 달라도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공감할 수 있는 건 시공간을 초월한 나와 타자 간의 공통된 고통과 슬픔이 있기 때문이죠. 단순한 상황 배열로 기억이 나게끔 하는 것과 그것이 자기 구미대로 맞춰지는 것과는 달리 오로지 굳건한 의지로 선택의 기로에 서서 나와 타인의 같음을 인정하고 함께 나아가는 건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고 그것은 기억함으로부터 시작되는 거 같습니다. 고로 작금의 시대에 가장 필요한 건 기억함의 용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추위가 주는 시련과 자기 고통(자기 인정)을 극복하고 새의 고통(타자 인정)을 외면하지 않으려는 경하와 같은 인물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겁니다.

    • 2024-11-10 16:10:05
    판다곰젤리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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