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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에서 젠더를 끄집어낼 때 : 2024년 무대에 오른 셰익스피어 연극과 ‘칼 든 여자들’

  • 작성일 2024-11-01

   셰익스피어에서 젠더를 끄집어낼 때

   : 2024년 무대에 오른 셰익스피어 연극과 ‘칼 든 여자들’1)


전지니

(한경국립대학교 교수, University of California, Irvine Visiting Scholar)


‘여성혐오적’ 셰익스피어의 텍스트를 소환하는 것

  

    몇 차례 언론에서 보도될 만큼 올해 눈에 띌 만큼 빈번하게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무대화됐다. 이 같은 흐름은 주기적으로 반복되는데,2) 국내에서는 셰익스피어의 희극보다는 비극이 선호되는 편이다. 이에 대해 관계자들은 사회 불안과 관련한 대중의 심리, 한동안 현장성이 강한 작품이 선호되면서 부차화되었던 ‘이야기성’의 복원, 중장년층 관객의 유입 등을 꼽았다.3) 복잡한 내면을 가진 캐릭터를 중심으로 한 셰익스피어의 소위 ‘성격 비극’은 주로 매체에서 활동하는 스타들의 연극 출연을 독려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배우 황정민이 셰익스피어의 사극 <리처드 3세>와 <맥베스>에 연이어 출연했고, 조승우가 오랜만에 연극 무대로 돌아오는 <햄릿>이 공연될 예정이다. 브로드웨이에서는 2025년 봄 오랜만에 연극 무대로 돌아오는 덴젤 워싱턴과 제이크 질렌할의 <오셀로>가 관객과 만난다.  

   이 글은 2024년 셰익스피어를 재해석한 연극, 그중에서도 ‘젠더’ 문제를 전경화한 국내외 작품 3편에 대해 논의한다. 물론 셰익스피어 연극의 ‘여성혐오’가 논의된 것이 비단 최근의 일은 아니다. 희비극을 가리지 않고 16세기 후반~17세기 초반의 보수적 분위기와 조응한 가부장적 정서나 주제 의식에 대해서는 국내에서도 2000년대를 전후하여 몇 편의 논문에서 지적한 바 있다.4) <맥베스>의 구성을 해체하여 그의 아내인 ‘레이디 맥베스’ 중심으로 재구성한 한태숙 연출의 심리극 <레이디 맥베스>(1998년 초연) 역시 일정 부분 원작에 대한 비판의식과 맞닿아 있다. 

   물론 오늘날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공연할 때 원작을 그대로 가져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셰익스피어 연극은 저작권이 진작에 소멸된 만큼 창작진의 초점과 문제의식에 따라 자유로운 각색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편성이 있는 문제를 다루며, 극장을 잘 찾지 않은 관객이 진입하기에 용이한 데다 얼마든지 재해석이 가능한 셰익스피어의 연극, 그중에서도 국내 관객이 선호하는 극적 파토스를 조성하기에 적절한 비극이 빈번히 공연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처럼 보인다.

   이 지면에서 다루고자 하는 작품은 국립극장 제작 <맥베스>(김미란 각색·연출_국립극장 달오름극장, 2024.6.13.~16.), 국립극단 제작 <햄릿>(정진새 각색·부새롬 연출_명동예술극장, 2024. 7.5.~29.), 그리고 어바인 대학(UC Irvine) 뉴스완 셰익스피어 센터(New Swan Shakespeare Center_이하 뉴스완 센터)5) 제작 Measure for Measure(adapted and directed by Beth Lopes_New Swan Theater, 2024.7.9.~8.31, 국내 번역 출간본 제목 『자에는 자로』) 등 세 편이다. 세 작품은 극의 주요 초점(장애와 배리어프리, 젠더와 권력, 사회 문제와 정의)이 조금씩 다르지만, 모두 적극적인 각색과 ‘젠더 프리’ 혹은 ‘젠더 밴딩’(선천적 성에 구애받지 않고 극 중 인물의 성별을 전환하며 배우의 성별을 바꾸는 것)을 통해 동시대적 문제의식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겹치기도 한다. 

   이외에도 세 작품은 인물의 성별 혹은 결말을 바꾸는 과정에서 ‘칼 든 여성 인물’을 등장시킨다. 극의 배경이 정육점으로 바뀐 <맥베스>에서 인물들은 돼지를 해부하다 사람까지 난도질하게 된다. <햄릿>에서는 햄릿이 공주로 설정되며 결말부 레어티즈와의 검투 장면에서 검을 휘두른다. 뿐만 아니라 해군 출신의 햄릿은 시종일관 칼을 든 자의 형상으로 등장한다. Measure for Measure는 세 남성의 압박에 괴로워하던 여성 인물이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남성을 칼로 찌르며 마무리된다. 

   <맥베스>는 무대를 동시대 한국의 정육점으로 바꾸고 다섯 명의 여성 농인 배우와 한 명의 남성 농인 배우가 원작의 주요 배역을 맡아 수어를 제1언어로 두고 공연을 진행한다. 이에 더해 무대 위에 자막을 배치하고 네 명의 소리꾼이 창(唱)으로 해설을 진행하면서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를 전경화한다. 또한 원작 속 햄릿과 호레이쇼 등의 성별을 여성으로 바꾼 <햄릿>은 온라인극장에서 관객과 만났던 초연 및 이번 재연에서도 적극적 각색과 젠더 프리 캐스팅이라는 측면에서 화제가 되었으며, 극 중 상황을 작금의 현실정치와 연결 짓는다. 뉴스완 센터의 Measure for Measure 역시 주요 배역은 아니지만 원작 속 신뢰받는 치안 판사인 에스캘러스 역할의 배우를 여성으로 캐스팅했으며, 원작의 결말 또한 완전히 바꿔버리는 선택을 한다.   


  

젠더 구도의 재설정과 약자의 욕망


   초점은 다르지만 세 작품은 공통적으로 원작의 성별을 전환하면서 여성의 욕망과 심리에 초점을 맞춘다. <맥베스>에서 원작 속 맥베스, 레이디 맥베스, 덩컨왕, 뱅코, 맥더프에 비유되는 다섯 명의 인물 막, 리, 킹, B, M은 모두 여성으로 설정되어 있는 동시에 여성 배우가 연기한다(원작 속 마녀에 대응하는 무당만 남성 농인 배우가 담당해 드래그 퀸 (drag queen)의 형상으로 무대에 선다). 이에 따라 맥베스와 레이디 맥베스를 비유하는 막과 리는 부부가 아니라 자매로 설정된다. 또한 국립극단의 <햄릿>은 배우 이봉련이 연기하는 햄릿 ‘공주’를 내세워 왕위에서 밀려버린 공주의 복잡한 심리를 전경화한다. 이외에도 호레이쇼를 비롯해 대신 오즈릭 등을 여성 배우가 연기하며, 정치 싸움의 희생양이 되는 오필리어는 남성으로 설정하고 남성 배우가 담당해 선천적 성별을 드러내며 연기한다. Measure for Measure에서 공작이 자리를 비운 (것처럼 연기하고 자신은 수도원의 수사로 변장한) 상황에서 대리 역할을 맡게 된 안젤로를 보조하는 에스캘러스는 흑인 여성 배우가 맡아 인종과 젠더를 함께 문제 삼는다. 이와 함께 극은 공국의 치안을 관리하며 사회의 정의를 관장하는 공작 대신 세 남성(통치권자 빈센티오, 공작 대리관 안젤로, 오빠 클로디오)의 부당한 요구에 직면하는 수녀 이사벨라의 내면에 초점을 맞춘다. 

   이 중 김미란 작·연출의 <맥베스>와 정진새 각색, 부새롬 연출의 <햄릿>은 셰익스피어 원작 속 주인공의 성별을 바꿔 ‘착하지 않은’ 여성들의 욕망을 전경화한다. <맥베스>의 경우 스코틀랜드 왕궁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의 배경을 한국 정육점으로 바꾸고 흰색이 주조가 된 스타일리시한 클럽처럼 꾸며 둔다. 이에 더해 붉은 조명과 감각적으로 타이포그래피화된 자막 및 콜라주를 활용한 이미지로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한 무대에 클러버들처럼 옷을 입은 농인 배우들이 무대에 선다. 또한 무대 양옆에는 하얀 옷을 입고 선글라스를 착용한 네 명의 소리꾼이 자리하여 극 중 상황을 노래로 해설한다. 이처럼 극은 ‘수어로 만든 콘텐츠’에서 으레 상상할 수 있는 고정관념을 모두 비껴가고, 맥베스의 서사 역시 해체하고 재구성하여 우연한 계기로 비롯된 살인과 정육점을 차지하겠다는 일상적인 욕망을 보여준다. 각색과 연출을 맡은 김미란은 <맥베스>를 선택한 계기 중 하나로 “배우들이 착하지 않으면 좋겠다. 잔혹할수록, 이기적일수록 좋다.”고 언급한 바 있다.6) 이처럼 무대 위의 농인 배우들은 잔혹한 살인 과정과 상스러운 욕설을 한국 수어로 구현하며, 수어를 인지할 수 없는 비장애인 관객은 소리꾼의 창과 현란하면서도 과시적인 자막을 통해 원초적인 욕망의 전시장을 목도한다. 

   <맥베스>에서 정육점에서 일하는 자매인 막과 리는 코오더의 살인을 청탁받고 이를 수행한 후 살인에 익숙해지며, 우연한 사고 이후 우발적으로 킹과 B를 연이어 살해하게 된다. 자매 중 리는 살인에 대한 죄책감을 견디지 못해 죽음에 이르고, 언니마저 떠나보낸 막은 정육점의 일원 중 혼자 남은 M까지 제거하고자 하나, 킹이 준 총을 받은 M과 대결하던 중 숨지게 된다. 이후 남아 있는 M도 그 총으로 자결하면서 킹이 정육점을 물려주고자 했던 그의 ‘딸’만이 살아남게 된다.

   언급한 것처럼 연극은 젠더보다는 장애, 그중에서도 한국 수어, 음성언어, 문자언어 등 다양한 언어가 공존하는 무장애 극장을 구현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에 따라 대본 역시 한글 대본, 수어 대본, 그리고 자막화되는 음성 대본 등 세 가지 버전으로 쓰였다. 그럼에도 착하지 않은 여성들의 권력욕과 모계 중심으로 구축된 가계는 원작에서 (아들이 없는 맥베스를 제외하고) 아버지와 아들 중심으로 구성되었던 관계도를 재구축한다. 또한 격렬한 욕설을 수어로 구사하며 원초적인 욕망을 드러내는 배우들은 누아르 영화의 인물처럼 등장해 고전 <맥베스>를 뒤흔드는 것을 넘어 장애인, 그중에서도 여성 장애인이 등장하는 콘텐츠에 대한 고정관념을 가로지른다.       

   정진새 각색, 부새롬 연출의 <햄릿>의 경우 햄릿을 공주로 설정한 것 외에 그의 절친한 친구인 호레이쇼, 마셀러스를 비롯해 대신 오즈릭을 모두 여성 배우가 연기하였다. 반면 햄릿의 연인이자 실연 후 자살을 택하는 오필리어의 성별은 남성으로 전환했다. 이 과정에서 원작에서 문제시됐던 여성혐오적 대사들을 다시 쓰고, 재상 폴로니어스가 내뱉는 ‘딸년’을 ‘아들놈’으로 대체했다. 구체적으로 햄릿이 독백 중 내뱉는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는 “약한 자의 자리는 항상 악한 자한테 빼앗기지. 악한 자여, 그대의 실체는 무엇인가? 약한 자여,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1막 2장)로, 오필리어에게 매음굴로 가라며 빈정거리는 햄릿의 대사 “수녀원으로 가시오.”는 “수녀원으로 가시오. 그렇게 멍청한 소리를 하려거든 수녀원으로 가시오. 어디든 가버리라고.”(3막 2장)7)로 변형했다. 

   2024년 <햄릿>의 목표는 원작 속 젠더 구도의 재구성과 동시대 현실에 대한 비판 등 두 가지로 압축될 수 있다. 특히 2021년 팬데믹 시국에서 온라인극장을 통해 관객과 만났던 초연과 비교할 때, 전반적인 무대 활용 및 배치 외에 원작의 상황과 작금의 현실을 병치하려는 시도가 눈에 띈다. 극은 남성 중심의 가계도 속에서 튀어나온 여성 햄릿의 심리적 방황에 초점을 맞추는 동시에 딸과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남편의 동생과 결혼을 택한 거투르드의 현실적 면모를 부각하며 여성 인물에 대한 재해석의 지점을 마련한다. 동시에 원작 속 순결과 희생의 징표였던 오필리어의 특징을 남성 오필리어에게 덮어씌우면서 셰익스피어의 극에서 문제가 됐던 여성혐오적 지점을 희석한다. 이와 함께 극 중 썩은 덴마크의 상황을 “더러운 시대”라 지칭하며 극 중 권력을 재생산하는 법 질서의 문제성을 관객이 맞닥뜨리고 있는 현재와 병치하고자 한다.  

   햄릿 공주의 공식적 아버지인 선왕은 영토 확장을 목표로 반복되는 전쟁을 일삼았던 인물이며, 전쟁 중 자리를 비운 아버지를 대신해 햄릿을 교육시킨 클로디어스는 ‘조사위원회’로 대변되는 법 질서를 등에 업고 왕위를 차지하면서 공식적인 왕위 계승자 햄릿을 배제한다. 레어티즈와 오필리어의 아버지인 폴로니어스는 원작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부정한 권력 창출에 기여하며 자기 입지를 다진다. 이처럼 아버지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폭력을 묵인하고 또 재생산하는 와중에, 햄릿 공주는 아버지들의 권위와 위선을 문제 삼으며 자신의 신념과 정당성을 역설한다. 염두에 둘 점은 햄릿 역시 권력을 갈망하고, 경우에 따라 타인을 궁지로 몰 수 있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절대 선이 아닌 ‘악한 공주’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곧 2024년 국립극단의 <햄릿>은 원작의 성별을 뒤집어 젠더와 권력이 결합되는 양상을 문제 삼고, 나아가 원작의 보편적 메시지를 동시대 현실 안에서 예각화하는 방법을 모색한다.    

   Measure for Measure는 국내에서도 몇 번 공연된 적이 있다. 2017년 국립극단에서 <준 대로 받은 대로>(오경택 연출)라는 제목으로 공연하였으며, 그 외에도 <법에는 법으로>, <법대로 합시다> 등 성경 속 구절을 발췌한 쉽게 다가오지 않는 제목을 의역하여 공연되었다. 이 중 국립극단 공연에서는 기울어진 회전 무대를 구축한 다음 높낮이가 달라지면서 뒤바뀌는 인물의 위치와 함께 권력의 폭압성이라는 문제를 구현했다.8) 뉴스완 센터의 경우 여름방학 중 대학 내 약 130석 규모의 이동형 극장을 구축하고, 관객이 셰익스피어 시대의 극장을 닮은 원형 무대를 둘러싸고 앉아 가까운 자리에서 극 중 사건을 지켜보도록 한다. 관객의 출입구는 배우들의 출입구가 되며, 배우들은 객석 틈을 헤집고 다니며 관객이 법 집행 과정의 관찰자로서 자리하도록 이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도 세 남성은 각자의 자리에서 이사벨라에게 억압을 가한다. 자리를 비운 빈센티오 공작을 대리하는 안젤로는 연인을 혼전 임신하게 한 클로디오에게는 사형을 구형할 정도로 엄격한 법 집행자임을 과시하나 스스로는 클로디오의 목숨을 빌미로 이사벨라에게 정조를 요구한다. 나름대로 억울한 입장에 놓인 클로디오는 안젤로의 요구를 받은 이사벨라에게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정조를 내놓으라 애걸하고, 이사벨라는 그런 오빠에게 “신앙심 없는 겁쟁이”, “부정직하고 비열한 인간”9)이라 일갈한다. 또한 빈센티오 공작은 모든 진실이 밝혀진 후, 공국의 질서를 바로잡겠다며 안젤로는 그가 이사벨라라고 착각하고 동침을 했던 전 약혼녀 마리아나와, 클로디오는 임신한 연인 줄리엣과 결혼할 것을 명한다. 그리고 이사벨라에게는 자신과 결혼해 달라고 말한다. 

   원작이 안젤로의 강압적 통치로 인해 경직된 사회 질서를 재구축하는 공작의 긴 발화로 마무리된다면, 뉴스완 센터의 Measure for Measure에서는 이사벨라가 애초 안젤로에게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잡았던 칼로 공작을 찌르며 마무리된다. 무엇보다 제작진은 원작을 각색하는 과정에서 세 남성의 부도덕성과 자만심을 강하게 비판한다. 극 중 클로디오의 약혼녀인 줄리엣은 10대 소녀처럼 분장을 하고 등장하기에 그와 동침하고 임신에 이르게 한 클로디오의 부도덕성이 강조된다. 안젤로와 공작을 연기한 배우들은 외관상 여성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들과 나이 차를 확연히 드러나 보이도록 하면서 권력과 폭력이라는 문제를 가시화한다. 이에 더해 공연 후반부가 시작되면 지참금 때문에 안젤로에게 버림받은 마리아나와 오빠인 클로디오를 비롯해 권력의 대리인인 안젤로에게 부당한 요구를 받는 이사벨라가 함께 처지를 한탄하는 노래가 이어진다. 의지할 만한 좋은 남성이 없는 세계 속에서 여성 인물들은 서로의 처지를 공유한다. 

   셰익스피어의 원작이 ‘신’적인 위치에서 권력을 과시하는 공작과 지참금 때문에 결혼을 지연하거나 파기하는 두 남성(클로디오, 안젤로)의 자기중심적인 면모를 짚고 넘어간다면, 지금의 공연은 이사벨라의 입장에 중심을 두고 남성만이 대리 혹은 제어할 수 있는 권력의 폭력성을 고발한다. 이에 더해 공작이 부재한 자리에서 백인 남성 안젤로를 보좌해야 하는 흑인 여성 에스캘러스의 위치를 설정함으로써 인종, 세대, 젠더라는 문제를 관통하여 동시대 관객과의 접점을 모색한다.  



담론의 확장과 초점의 희석 사이


   어떤 측면에서 세 편의 연극은 출발점은 다를지언정 2016~2017년 한국과 미국에서 시작된 ‘미투 운동’의 자장 안에 있다. 원작 속 캐릭터의 성별을 바꿔서 무대 위에 구현하거나 여성의 시선에서 권력의 문제를 가시화하며 미투의 가능성과 페미니즘에 대한 반동으로서 백래시(Backlash)를 함께 목도한 지금의 관객에게 젠더화된 권력의 병폐와 약자의 목소리를 함께 성찰하도록 한다. 극 중 막, 햄릿 공주, 이사벨라는 노골적으로 힘과 권력을 갈망하거나 스스로에게 주어진 역할을 거부하면서 자신이 속한 국가와 사회의 폭력성을 들춰낸다.

   세 연극이 비단 젠더 문제만을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창작진들은 젠더 문제를 전경화하는 동시에 연극이 동시대적으로 더 많은 함의를 갖기를 원한다. 실례로 <맥베스>는 착하지 않은 여자들보다는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를 문제 삼고, 장애/장애인에게 덮어씌워진 이미지를 배반하는 데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햄릿>의 경우 햄릿 공주와 거투르드의 욕망을 강조하며 원작의 문제성을 인지하는 동시에 권력을 창출하는 법 체계-법 기술자의 교활함을 부각하며 현실 비판에 무게를 둔다. Measure for Measure는 코미디에 토대를 두고 있는 만큼 ‘문화적 다양성’을 보여주는 동시대 군상들을 형상화하며 현 미국 사회의 단면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처럼 창작진의 관심은 셰익스피어 원작에서 젠더를 끄집어내어 동시대적 접점을 확보하는 동시에 또 다른 화두와 연계되어 있다. 

   이 같은 지점은 분명 의미 있는 것이지만 동시에 젠더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나 의미 있는 해석을 후경화할 수도 있다. 우선 <맥베스>에서는 농인 배우가 등장하는 공연, 수어 콘텐츠에 대한 고정관념을 뒤집는 과정에서 여성 인물들의 움직임과 욕망은 잔혹하고 이기적인 것을 넘어 이해될 수 없는 무언가로 인지될 수 있다. 배리어프리 환경을 구축하고 넘쳐나는 강렬한 이미지가 이어지는 가운데 여성들의 일상적 욕망이 분출되는 순간이 퍼포먼스처럼 각인될 소지를 갖는 것이다. <햄릿>의 경우 햄릿 공주의 복잡한 심리와 현실 정치 비판이 완성된 무대 안에서는 매끄럽게 공존하기보다 별개로 존재하는 것으로 보이며, 권력을 가진 세 남성(선왕, 클로디어스, 폴로니어스)과 햄릿의 관계를 설정하는 과정에서 선왕과의 관계성을 부각할 때 젠더 구도를 뒤튼 각색의 시도가 좀 더 선명해질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Measure for Measure는 시종일관 극을 끌어가는 세태 풍자적 코미디의 정서가 지금의 격렬한 결말과 잘 이어지지 않는다. 또한 에스캘러스를 흑인 여성으로 배치한 것 외에 그 인종적, 젠더적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지 않으며, 후반부의 흥미로운 각색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극의 톤 조절이 필요해 보인다. 

   정리하면 셰익스피어에서 젠더를 끄집어낸 후 창작진의 다른 관심사와 연결 짓는 작업은, 원작의 확장성을 감안해 동시대적 접점을 모색하는 동시에 젠더라는 명확한 문제의식을 희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세 작품이 보여준 연극적 성취 외에도, 각자 다루고 있는 화두 간의 배치와 공명이라는 지점은 추후 창작과 비평 양 측면에서 고민해 보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2024년 셰익스피어 연극이 연이어 무대에 오르면서 관심의 대상이 되었으나, 이는 주기적으로 진행되며 논의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때 이야기해야 할 것은 위대한 원전의 현대적 소구력보다는 지금의 어떤 화두와 고전이 조응하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어떤 연극적 성과를 보여주고 있느냐일 것이다. 이 점에서 극 중 칼을 든 여성들의 형상이 갖는 의미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곧 이야기적 측면에서 원전을 해체하고 있는 세 연극은 각자의 방식으로 젠더라는 화두를 논의하는 동시에 이후에도 반복될 논쟁거리를 재생산한다는 점에서 세계를 비추고 재구성한다.



상단부터 <맥베스>(자료 제공_국립극장), <햄릿>(자료 제공_국립극단), Measure for Measure (credit_Jesús López Vargas)


1) 원고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맥베스>의 김미란 연출·이재금 책임프로듀서, <햄릿>을 각색한 정진새 작·연출가 그리고 New Swan Shakespeare Festival의 Artistic Director Eli Simon과 Director of Outreach Jesús López Vargas의 도움을 받았다. 도움을 주신 창작진들께 감사드린다.

2) 지난해 셰익스피어 붐을 짚은 기사가 있었고(최여정, 「비극이나 희극이나, 그것이 인생이로다」, 『한경』, 2023.9.14., https://www.hankyung.com/article/2023091402081), 2016년 셰익스피어 타계 400년 및 시국과 관련해 셰익스피어 연극 공연에 대한 기사가 이어졌다(박찬은, 「타계 400년 후에도 도발적인 셰익스피어···21세기에도 통하는 16세기 이야기꾼」, 『매일경제』, 2016.3.3. https://www.mk.co.kr/news/culture/7247057; 박동미, 「‘셰익스피어’로 시작, ‘최순실’로 끝났다」, 『문화일보』, 2016.12.27., https://www.munhwa.com/news/view.html?no=2016122701032312056001).

3) 이지윤, 「‘햄릿’ ‘맥베스’···불안한 현실 속 셰익스피어의 재발견」, 『동아일보』, 2024.9.14. https://www.donga.com/news/Society/article/all/20240913/130045258/2

4) 황지연의 경우 학위 논문을 통해 <햄릿(Hamlet)>, <트로일러스와 크레시다(Troilus and Cressida)>, <끝이 좋으면 다 좋다(All's Well That Ends Well)>, 그리고 <자에는 자로(Measure for Measure)>를 논한 바 있다.(황지연, 「셰익스피어의 문제극과 여성혐오」, 고려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03.)

5) 뉴스완 센터에서는 2012년부터 코로나19 팬데믹 시기를 제외하고 매년 여름 대학 내 야외 이동식 극장을 설치하고 셰익스피어의 공연 두 편씩을 약 두 달간 상연하는 뉴스완 셰익스피어 페스티벌을 개최한다. 이 극장은 ‘글로브 극장(Globe Theater)’을 축소한 형태를 띠고 있으며, 올해에는 <십이야>와 <자에는 자로> 등 두 편을 공연했다. 해당 센터는 페스티벌 개최 외에 희곡 읽기, 심포지엄, 온라인 강좌 등을 개최하며 셰익스피어 연극의 제작, 연구 등을 함께 진행하고 있다. 뉴스완 센터에 대해서는 다음 웹사이트를 참고하라. https://www.humanities.uci.edu/shakespeare/about-us

6) 이는 연출자가 <맥베스>를 선택한 세 가지 이유, 곧 극 중 ‘막’을 맡은 박지영 배우와의 협업, 농인 배우가 출연하는 한국 수어 공연, 수어로 만든 콘텐츠에 대한 고정관념의 타파 다음으로 언급되는 것이다.(김미란, 「한국 수어가 제1언어가 아닌 연출이 한국 수어로 연극을 만들 때 선택하는 것들 <맥베스>, 『공연과이론』 2024년 가을호, 145쪽.)

7) 원작에서 해당 대사는 3막 1장에 등장한다.

8) 해당 작품에 대해서는 황희경, 「국립극단 올해 마지막 연극은 셰익스피어 '준 대로 받은 대로'」, 『연합뉴스』, 2017.11.30.,https://www.yna.co.kr/view/AKR20171129195300005?input=1195m 참조.

9) 윌리엄 셰익스피어, 김종환 역, 『자에는 자로』, 지만지드라마, 2019, 1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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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예술’, 전통, 세계화

‘K-예술’, 전통, 세계화 - 88 서울올림픽을 전후한 공연계 문화교류 담론에 대한 단상 전지니 (한경국립대학교 교수, University of California, Irvine Visiting Scholar) 1. 88 서울올림픽과 문화 세계화 최근 국립극장 전속 단체인 국립창극단(예술감독 겸 단장 유은선)이 제작한 가 영국 바비컨센터에서 관객과 관계자의 호평 속에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무리했다는 기사가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을 한국적으로 각색한 해당 작품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주영국한국문화원이 주관한 제11회 ‘K-뮤직 페스티벌’의 일환으로 공연되었다.1) 주지하다시피 K-POP 및 K-드라마의 전세계적인 흥행은 K-콘텐츠의 세계화라는 화두와 관련하여 지속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또한 맨부커상에 이은 작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번역의 난관을 가로질러 국내 소설이 다른 언어권의 독자와 어떻게 호흡할 수 있을지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했다. 그렇다면 창극 의 성공과 관련하여 공연예술의 해외 진출이라는 화두는 이 시점에서 어떻게 논의될 수 있을까. 이 글은 K-공연예술의 세계화 가능성에 대해 논하는 대신, 그 본격적인 논의가 진행된 1988년 서울올림픽 전후의 공연계 상황에 대해 논한다. 구체적인 실현 가능성이라는 문제와는 별개로 1950년대, 곧 전후 이미 세계 진출의 방향성을 논의하던 영화계와는 달리2), 공연계에서 세계 시장과 평단을 바라보게 된 시점은 1980년대 중후반이었다. 관련하여 1989년 한 언론에는 “한국문화 세계에 심자”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린다. 이 기사는 한국문화의 세계화 전략에 대해 논하며 전통예술의 해외 나들이가 활발해지고 있고, 특히 올림픽을 전후하여 헝가리, 동독 등 공산권 공연이 활발해지고 있음을 언급한다.3) 그렇다면 당시 ‘우리’ 공연의 세계화는 어떠한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었는가. 좀 더 구체적으로 당시 문화공보부(이하 문공부) 산하 단체인 국립극장이 목표하고자 했던 한국 공연예술의 해외 진출 및 세계화의 방향은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이 글은 냉전체제의 종식과 동구권 문호 개방이라는 당대의 화두와 관련해 공연예술의 세계화라는 목표가 어떤 방식으로 구현되었는지에 대해 살피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국립극장이 발행하는 정기간행물(당대 제호 《국립극장 소식》) 및 언론 기사를 통해 전통을 내세운 관 주도 문화교류의 명암에 대해 고찰할 것이다. 2. 이데올로기를 넘어서는 ‘지구촌 문화 축제’ 언급한 것처럼 정부 차원에서 국내 공연의 해외 진출을 본격적으로 권장한 것은 1980년대 이후다. 당시 LA올림픽(1984)와 서울아시안게임(1986)을 거쳐 서울올림픽에 이르기까지 국립극장은 물론 지자체와 민간 극단이 국제 협력과 문화교류 사업의 일환으로 전통 공연의 해외 진출을 모색했다. 1980년대 중후반 공연계의 화두는 ‘문화올림픽’과 &lsquo

  • 2024-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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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속 부동산과 젠더 정치학

대중문화 속 부동산과 젠더 정치학 전지니(한경국립대 교수) * 이 글에는 종결되지 않은 웹툰과 올해 공연된 연극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투기와 여성 이 글은 한국의 부동산 현실, 그중에서도 전세 사기로 집약되는 부동산 범죄를 다룬 웹툰과 연극을 겹쳐 보려 한다. 이를 통해 동시대 대중문화 텍스트 안에서 자산 증식에 대한 소시민적 욕망이 어떻게 젠더화되어 형상화되는지를 살피고, 여성을 범죄의 가해자 혹은 피해자로 배치하는 작품 속 시도가 갖는 양면성에 대해 조망한다. 논의할 작품은 표제에 부동산을 내세워 비슷한 시기 독자, 그리고 관객과 만난 (유기 글/그림, 2024.1.13.~연재 중), (김수정 작/연출, 2023.10.14.~22.(초연), 2024.6.1.~9(재연)) 등 두 편이다. 부동산과 여성을 관련지어 논의하는 경우는 본격적인 강남 개발 이후인 1970년대 중반부터 시작됐다. 부동산 가격 상승과 서민의 박탈감, 중산층 진입의 욕망 등의 문제는 박완서의 강남 아파트를 산 교수 부인의 이야기인 「낙토의 아이들」(1978)에서부터 시작해 재개발을 둘러싼 부녀회의 욕망을 다룬 웹툰 (스토리 매미/작화 희세, 2019.05.05.~2020.09.27.)까지 꾸준히 반복되었다. 염두에 둘 점은 (유하 작/연출, 2015), (연상호 작/연출, 2018)의 경우처럼 대중문화 속에서 개발·재개발의 역학관계를 다룰 때는 남성 인물이 이야기의 중심에 놓이지만, 개발의 수혜를 입고자 하는 소시민의 욕망을 다룰 때 그 중심에는 여성이 자리한다는 점이다. 관련하여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불안한 경제상황 속에서 반복되었던 투기는 여성의 것으로 전유되는 일이 빈번했다. 전쟁 이후 사회 혼란의 주범으로 간주되었던 ‘사설계’를 주도하는 부인들이나 1970년대 후반부터 매체에 오르내린 부동산 투기의 주범 ‘복부인’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은 근현대사 속 뿌리 깊은 여성 혐오와 직결되어 있다. 정치·사회적 불안으로 발생한 투기 심리를 여성의 전유물로 간주하며 문제의 핵심을 피해 가고 비판의 대상을 국가와 체제가 아닌 여성으로 지목한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여성이 투기에 몰두하는 이유를 심리학적, 사회학적으로 분석한 기사도 있었다. 한 언론은 “복부인의 욕구 단계는 생리 욕구와 안전 욕구의 원시적인 단계에서 못 벗어나고 있다.”며 여성이 상대적으로 안전 욕구가 강하고 사회 진출이 부진한 것을 복부인이 생기는 이유로 분석하기도 했다.1) 이 와중에 투기를 여성의 것으로 지정하는 데 대한 자성의 목소리도 있었다. 1984년 한 신문 독자는 신문 기고를 통해 ‘복부인’은 여성 천시 단어로 공공매체에서 이 같은 유행어를 쓰면 안 된다고 역설한다. 그는 “이는 여성 학대의 사회적 악습에서 오는 콤플렉스를 여성의 사회 유린이라는 감정으로 희석시키려는 ‘투사’ 심리요, 또한 일종의

  •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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