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의 의지
- 작성일 2024-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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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의 의지
- 최근 퀴어 가족 서사에 관하여
박민아
1. 내부의 외부 - ‘그런 것은 없다’
행동심리학자인 프란스 드 발은 원숭이 실험을 통해 원숭이들이 불평등을 혐오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 실험을 통해 드 발은 현대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불평등보다 ‘평등’이라는 전통이 인간종보다도 더 오래된 개념임을 증명하고자 한다. 실험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우리에 갇힌 두 마리의 원숭이에게 일정한 행동의 수행을 요구한 후 그에 대한 보상으로 왼쪽 원숭이에게는 오이를 주고 오른쪽 원숭이에게는 포도를 준다. 같은 행위의 결과로 오이만을 지속적으로 전달받은 왼쪽 원숭이는 오이를 거부하거나 급기야 오이를 집어던지며 분노한다. 우리는 이 실험을 통해 ‘평등’이 인간종에게만 있는 특수한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1) 그런데 그보다 이 실험에서 재미있는 지점은 불평등한 보상 체계에 분노하는 왼쪽 원숭이가 아니라 오른쪽 원숭이의 반응에 있다. 실험이 진행되는 동안 오른쪽 원숭이는 불공정한 보상 체계를 의심하지 않으며 자신에게만 주어지는 혜택에 대해서도 의문을 갖지 않는다. 이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사실은 만약 평등에 대한 전통이 인간종보다도 더 오래된 개념이라면, ‘불평등’에 대한 전통 역시 그에 못지않게 오래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불평등 구조에서 수혜의 당사자는 평등에 별 관심이 없을 수도 있는 것이다. 오른쪽 원숭이에게 이 게임의 불공정성은 보이지 않는 것일까, 보이지만 외면하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너무나 ‘당연’한 무엇일까. 만약 이후에 두 원숭이가 경쟁을 통해 포도를 획득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어떻게 될까. 그리고 그 경쟁에서 패했을 때 오른쪽 원숭이는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까.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김보영의 SF소설 「얼마나 닮았는가」2)에서는 ‘성차별이 없다고 가정되는 세계’에 대한 일종의 ‘사고실험’을 보여 준다. SF에서 ‘사고실험’은 “만약?”을 질문하고, “우리가 불가피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현실” 또는 사회적 규범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3) 소설의 주요 배경이 되는 유로파용 보급선은 성차별에 대한 정보값이 입력되지 않은 ‘일종의 폐쇄 생태계’라고 할 수 있다. 소설 내 문제 상황은 크게 세 가지 층위에서 작동한다. 먼저 토성의 위성 타이탄에서 온 구조 신호에 응답할 것인가, 외면할 것인가를 두고 벌어지는 신념의 충돌이 갈등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면, (여성) 의체에 인격을 탑재한 위기관리 AI 컴퓨터 훈의 (인간/비인간의 경계를 위협하는) 타자로서의 지위에서 발생하는 취약성과 그에게 가해지는 남성 선원들의 폭력이 두 번째 층위에 있다. 그리고 이 사태를 진압해야 할 훈의 눈에 보이지 않는, 모종의 이유에 의한 선내 폭동에의 감지 신호가 세 번째에 해당한다. 훈과 선장 이진서는 ‘보급 성공’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지향하지만, 이 목표는 아직 훈이 보지 못한 모종의 그 이유로 인해 선장과 다른 진영을 구축한 다수의 선원들의 반대에 부딪힌다. 훈은 선장의 권위가 무너진 상황에 대한 대처 방안으로 자신이 더 ‘거대한 타자’가 되는 방식을 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훈이 보지 못한 그것은 여전히 문제가 되는데, 이때 ‘그것’은 성차별에 대한 정보값의 누락이며, 이 때문에 관련 데이터가 없는 훈은 젠더 갈등을 인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성차별이 없는 세계에서 여성 선장에 대한 남성 선원의 경계와 불만은 선장의 무능력으로 간주 되고, 선장이 경험하는 남성 선원의 불복종과 위협에 대한 반응은 개인적 성격의 과도한 예민함이나 감상적 태도로 폄하된다. 결국 내부의 적을 자처하여 쿠데타를 막고 보급에 성공하려던 훈의 계획은 실패에 가까워진다. 그러나 인간/비인간의 경계라는 모호한 위치에서 훈은 문제 해결을 위한 창의력을 발휘하고, 보급 성공의 가능성을 높이는 데 일조한다. 이들의 일시적이고 우연적인 연대가 취약성의 지점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은 주목을 요한다. 불평등이 만연한 시스템에서는 이러한 취약성이 노출되는 지점을 보호나 돌봄의 자리가 아니라 혐오와 배제, 차별의 항으로 인식하고 취약 계층을 ‘우리’가 아닌 ‘그들’로 타자화한다. 타자에게 갖는 망상은 남성의 대타항에 여성을, 이성애의 대타항에 동성애를, 인간의 대타항에 AI를 두고 이들을 영원한 미지의 타자로 규정한다. 타이탄의 구조 신호에 응답하기 위해 형성된 이 일시적 연합체는 상호 돌봄의 순간 발생했으며 ‘난잡’4)하고도 퀴어한 형태를 띤다. 돌봄은 누군가를 보살핀다는 의미에서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의미를 가지지만, 또한 돌봄은 복지와 생존에 기여하는 사회적 활동이기도 하다.5) 「얼마나 닮았는가」에서 본 것처럼 돌봄에는 개개인의 자질이 요구되기도 하지만 시공간적 차원과 경계를 넘어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상호의존적이다.
우리가 불평등이 없는 또 다른 생태계를 상상할 수 있을까. 신자유주의 시대가 요구하는 기업가형 개인 주체의 모델은 불평등의 구조를 보지 못하게 하고, 불평등의 원리에서 생성되는 취약함이나 돌봄의 공백은 자연화되거나 급기야 ‘없는 것’으로 치부된다. 우리는 이제 이 체제의 외부를 상상할 수 없고, 불평등은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다. 하지만 이 불공정한 세계 속에서 누군가에게 불평등과 취약함은 생존의 문제와 직결된다. 이때 생존의 시나리오 역시 자본주의와 가족주의를 중심으로 작동되고, 자본주의는 가족주의를 핵심 동력으로 삼아 이 제도가 양산하는 젠더, 장애,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암묵적으로 승인한다. 우리가 가족을 다시 정치화해야 할 필요성이 여기에 있으며, 이때 ‘가족’을 저항의 언어로 사유한다는 점에서 ‘퀴어가족정치’가 중요해진다.6)
2. 불행을 선취하는 퀴어, 이 난잡한 돌봄
뉴노멀의 시대. 취약성에 노출된 개개인은 더 이상 공적 돌봄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고 스스로를 돌봄 주체로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때 돌봄 주체는 자기 경영 주체의 노선과 합세하며 ‘자기 돌봄’, ‘자기 경영’이라는 신자유주의 체제가 요구하는 주체에 합류하게 된다. 이는 사회 구조적 모순에서 발생하는 취약한 지점을 방기하는 한편, 위기를 개인의 능력으로 만회할 수 있다는 환상을 주입시킨다. 근래 모계 여성 서사에서 나타나는 사회적 맥락을 지우는 낭만화된 돌봄 역시 문제적인데, 가령 동성 사회적 유대나 지극히 개인적 호혜에서 비롯된 상호 돌봄이 여성 인물에게 가해진 수난을 타개하는 적극적 해결책으로 제시될 때, 평론가 황종연의 지적에서처럼 이들은 “해방된 여성의 원조”로 기능할 뿐, “문화적 타자로서” 여성의 지위를 누락시키는 지점이 발생한다.7) 더 케어 컬렉티브가 제안한 ‘난잡한 돌봄’의 형식은 친족 단위에서 형성되어 온 돌봄의 위계와 불평등의 문제를 지적하고, 이때 ‘난잡한(promiscuous)’의 의미를 더 많은 돌봄에의 실천과 ‘차별하지 않는’ 것에서 찾고자 한다.8)
최근 영화로도 제작된 김혜진의 『딸에 대하여』9)에서 돌봄 수행자에 해당하는 서술자 ‘나’의 돌봄 방식은 이 ‘난잡한’ 형태를 띤다. ‘돌봄’이 사회적 현안이 된 이래로 우리는 자본과 결탁한 돌봄이 작동하는 방식을 익히 알고 있다. 노인 요양 병원에서 요양보호사로 근무하고 있는 ‘나’는 이 자본화된 ‘돌봄’의 실상과 폐해를 매일 목도하는 인물이다. ‘나’는 가족이 없는 무연고자인 치매 환자 젠에게 가해지는 불합리한 처사들을 목격하며 이를 나와 (퀴어인) 나의 딸의 문제로 치환한다. 한때 덕망 높은 사회활동가였던 젠에 대한 후원이 끊기고 언론의 관심이 사라지자 병원 측에서는 젠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점차 줄이고, 아예 타 병원으로의 강제 이송 계획을 세운다. ‘나’는 인간의 존엄이 철저히 와해되는 이 현장을 ‘나’와 ‘나의 딸’이 목도할 미래로 인식한다. 젠에게 가족이 있어도 그랬겠냐는 ‘나’의 일침은 일면 정상 가족의 범주와 점점 요원해져 가는 자신과 딸의 처지에 관한 자각과 함께, 다가올 미래의 위험에 대한 반응이라고도 할 수 있다. 돌봄이 철저히 가족에게만 전가되는 구조는 이처럼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 가족성에 대한 집착을 낳는다. 경제, 사회, 생산과 관련한 모든 활동에서 물러나 자력으로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없는 노년의 삶은 제도적으로 보호와 돌봄이 필요한 대상임에 틀림없다. 특히 젊은 날의 대부분을 타인을 위한 삶에 헌신했던 젠에 대한 사회적 방치에 대해, ‘나’는 이것을 한 인간에 대한 존중과 존엄의 문제로 인식하는 한편, 이것이 미래의 ‘나’와 내 딸의 문제로 전이되었을 때 벌어질 끔찍한 상황에 대한 가정은 ‘나’로 하여금 정상 가족 범주의 밖에 있는 딸과 딸의 동성 파트너를 더더욱 인정할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이처럼 퀴어인 딸을 가진 부모는 가족 제도의 안전망 밖에 위치하게 될 딸의 미래를 종종 불행한 것으로 상상한다.
제가 그린을 불행하게 만든다고 생각하세요? 제가 걔를 망친다고 생각하세요?
그럼. 당연히 그렇지. 네가 내 딸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지. 너 때문에. 내 딸도 나도 너무 불행하지.(123)
퀴어 딸을 가진 부모의 걱정에 대해 사라 아메드는 다음과 같은 해석을 내놓은 바 있다. ‘퀴어 딸을 가진 부모는 딸이 퀴어가 되면 불행해질 것이라는 생각에 불행하다. 또한 딸은 부모의 불행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는 이유로 불행해지며, 부모는 다시 딸의 불행을 보며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고 확신하게 되므로 다시 불행해진다.’ 이처럼 퀴어의 삶이 “불행하다는 판단은 퀴어 관계의 사회적 가능성을 인정하는 데 실패하면서, 즉 퀴어 사랑을 인정하는 데 실패하면서, 불행”을 유통시키고 순환하게 한다.10)
상황은 가족이 없고, 후원도 끊긴 젠이 “종일 수면제나 먹이면서 죽음을 기다리는 데 남은 생을 죄다 소진시키는 곳”(128)인 치매 전문 요양 병원으로 옮겨지자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나’가 혈연관계로 묶여 있지 않은 젠을 집으로 불러들이면서 뜻밖의 ‘퀴어한’ 가족 형태-요양보호사인 ‘나’(엄마), 그녀가 돌보던 치매 환자(젠), ‘나’의 딸(그린), 딸의 애인(레인)-를 이루게 되고, 남편과 아내, 자식으로 구성된 가족만을 가족의 형태로 인정하고자 하던 ‘나’의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는 서서히 해체되기 시작한다. “나와 딸애. 내가 데려온 젠과 딸애가 데려온 그 애가 머무르는 집 안에 선선한 바람이 새어든다.”(181) 이 변화에는 “손발이 묶인 채 어디로 보내질지도 모르고 누워 있는” 젠이 ‘나’로 여겨지는 한편, “기댈 데도 의지할 데도 없는 게”(129) 그녀의 탓이 아니라는 문제의식이 함께 자리한다. 젠을 보살피는 과정에서 ‘나’는 그동안 딸의 파트너로 인정할 수 없었던 레인의 도움을 용인(?)한다. 결국 “누군가를 보살피는 것의 수고로움. 내가 아닌 누군가를 돌보는 것의 지난함. 실은 나는 아름답고 고결해 보이는 이런 일의 끔찍함과 가혹함을 딸애와 그 애에게 알려 주”(183~4)는 것을 통해, “책임과 믿음을 나눌 수 있는”(184) 관계가 이를 가능하게 함을 역설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난잡한 돌봄’에서의 ‘난잡함’은 가볍거나 진정성 없음이 아니라 이 돌봄 형식이 내재한 다양성과 실험성, 확장성을 강조하고자 하는 의미에서 사용되었다. 오히려 난잡한 돌봄의 반대 항에 자본주의적 돌봄이 있는 것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11) 한시적이긴 하지만 이 퀴어한 가족 내에서 발생한 돌봄의 형식은 실험적, 확장적 실천이라는 측면에서 이 ‘난잡함’의 형식을 따른다. ‘나’는 결국 돌봄 수행자로서 돌봄의 공과 사의 경계를 스스로 위반하는 인물인 동시에, 정상 가족성의 내부에서 정상 가족과 퀴어 가족의 경계를 의심하고 교란하는 인물인 셈이다. 소설의 결말은 공적 돌봄의 폐해를 부각하는 한편, 타인에 대한 돌봄이 결국 자기 돌봄의 일환이 될 수 있음을 지적하고, 다가올 돌봄 공백의 문제에 대한 대안이 공적 돌봄-사적 돌봄 차원의 책임 주체를 부각시키는 것이 아니라 ‘돌봄’의 의미와 가치가 무엇인지를 질문해야 하는 것임을, 그리고 존재의 취약성이 차별과 배제의 자리가 아니라 돌봄이 생성될 수 있는 가능성의 자리임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3. ‘퀴어한’ 시간
확실히 퀴어 커플에게도 ‘돌봄’은 문제가 된다. 사회적 승인을 담보하지 않은 퀴어 커플은 퀴어 관계 내 돌봄을 위태롭게 만든다. 로런 벌랜트에 의하면 우리는 흔히 “적절함이라는 전통과 관습을 지탱해 주는 제도와 서사 안에서 생성되는 욕망만을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하도록 교육받는다. 나아가 그들은 욕망이 너무 여러 개의 대상에 부착되거나 ‘나쁘다’고 여겨지는 대상에 부착될 때의 결과에 대한 두려움을 학습한다.”12) 이러한 이유로 퀴어는 돌봄을 욕망하지 않는 경우가 발생하고 이것은 역시나 문제적이다. 이 돌봄에 대한 입장 차이는 어떤 퀴어 커플에게 있어서는 이별의 결정적 사유가 되기도 한다. 김지연의 「우리가 해변에서 주운 쓸모없는 것들」13)에서 서로의 늙어감과 병을 공유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어떤 퀴어 커플은 상대에게 늙고 병듦이라는 취약함을 노출하는 것에서부터 불안을 느끼고 이를 혼자 감내해야 할 몫이라고 여긴다.(“병보다도 더 두려웠던, 그때 느낀 불안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야말로 나 혼자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33)) 퀴어 커플의 시간에 ‘함께 늙어감’이라는 항목은 없는 것이다. 퀴어 사랑이 실패하는 서사는 그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구조와 조건을 탐색하게 한다. ‘나’에 비해 어리고 젊은 진영은 ‘내’가 늙어감과 죽음에 경도되는 것에 일조한다. 퀴어의 시간은 결혼, 재생산 등과 관련한 제도화된 시간성의 외부에 있다. 그러나 퀴어의 생애 경로는 규범적 시간성에 부분적으로 예속되어 있다. 여기서 규범적 시간성이란 “재생산을 특권화하는, 비생식적 삶과 순간들을 저평가하는, 성적 생애 경로”14)를 따르는, 제도화된 생애 경로라 할 수 있다. 퀴어의 시간성은 이러한 강제적 미래주의를 선호하는 사회에 대한 위협이자, 질서정연한 시간의 흐름을 이탈하는 비틀어진 시간성을 보여 준다. 이러한 관점에서라면 장애나 노화의 시간 역시 주류 시간의 바깥에서 흐르고, 젊음을 통과한 퀴어한 ‘나’의 몸은 이제 통제와 예측이 불가한 늙어가는 몸의 단계로 진입했으며, 규범적 시간성이 인간 삶의 중요한 순간과 가치들을 규율하는 것처럼 미래를 낙관할 수 없는 퀴어의 시간성에도 역시 강제적으로 개입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에 관한 실패의 서사는 대체로 “사랑에 관한 이런 이론적 이야기들-사랑과 관련한 규범적 권고들(인용자)-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의 증명이 아니라 오직 개인적 실패의 증거로 여겨”15)지게 한다. 하지만 우리가 조금 더 적극적으로 독해한다면, 퀴어 사랑이 실패한 지점은 규범화된 사랑의 불가능성에 대한 증명이자 가능한 퀴어 사랑에 대한 질문이 생성되는 자리라고도 할 수 있다. 잭 핼버스탬을 경유하자면 이때의 실패란 규범적인 것에 대한 실패, 즉 “통달에 대한 거부로, 자본주의 내에서 성공과 이윤이 직관적으로 결탁하는 데 대한 비판으로, 패배에 대한 반헤게모니적 담론”16)으로 읽을 수 있다. 위에서 본 것처럼 퀴어 사랑의 실패 서사는 규범적 시간성과 퀴어 생애 주기의 불일치, 이로 인해 발생하는 공백을 주시하게 한다. 지배적 시간관과 퀴어 생애 주기가 결코 조응할 수 없는 장면에서 퀴어 사랑의 불가능성이 노출되는 것이다.
4. ‘실패는 실패를 환영한다’
가족을 구성할 권리는 물론 중요한 의제임에 틀림이 없지만, 그 전에 선행되어야 할 질문은 가족을 이룬다는 것에 대한 의미이다. 「민법」에 명시된, 이성애와 혈연을 중심으로 한 ‘가족’의 개념은 최근 가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와 맞물려 확장된 개념으로 사유되고 있다. 가족에 대한 ‘새로운 사회적 합의’에 의하면 이때 ‘가족’의 개념은 “생활 돌봄을 함께하며 서로 일상의 책임을 나”누는, “생애 한 시기의 생활공동체”라는 인식으로 전환 중이다.17)
조우리의 『오늘의 세리머니』18)는 정부 가족관계등록 전산시스템의 허점을 이용해 101쌍의 레즈비언 커플에게 혼인관계증명서를 발급해 주는 과정을 다룬다. 그런데 소설의 초점이 동성혼 법제화의 실현에 맞추어져 있다는 점에서 보자면, 이는 법적으로 승인받은 ‘퀴어 가족’이라는 또 다른 규범성을 암묵적으로 재생산할 여지가 있으며, ‘가족 제도’가 내재한 근본적인 불평등을 비가시화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특히 소설 내 인물들이 이루고자 하는 가족의 형태가 규범화된 ‘가족’의 무엇을 승인하고 무엇을 거절하고자 하는지 불분명하다는 점에서 그러한데, 퀴어 가족의 목표를 단지 관습화된 가족 모델을 흉내 내고 그 규범성 내부로 편입되고자 하는 데에 둔다면, 이때 가족 제도가 배제하는 존재들을 가시화하고 규범화된 가족 모델의 이상을 질문하고자 하는 ‘퀴어 가족’이 지닌 정치성은 희석되고 만다. 물론 퀴어 가족이 새로운 형태의 가족에 대한 비전이나 대안을 반드시 제시할 필요는 없다. 이런 점에서 사라 아메드는 퀴어 가족이 “이성 결합, 출산, 생물학적 결속에 기초한 단일하고 이상적인 가족 이미지”를 해체한다는 점에 주목한 바 있다. 때문에 ‘퀴어 가족’은 가족의 ‘이상’을 확장하거나 확대하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이상화된 가족 이데올로기에 접속한 가족 형식의 실패를 드러내는 지점으로서 중요해진다.19)
김지연의 「반려빚」20)은 퀴어 커플이 가족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질문하고, 이것이 ‘반려’와 ‘빚’이라는 두 층위에서의 결합과 교환, 그리고 혼재되는 지점에서 형성되는 것임을 보여준다. 먼저 ‘반려’에 담긴 중의적 의미를 눈여겨 보아야 하는데, ‘반려’의 사전적 의미에는 ‘생각이나 행동을 함께 하는 짝이나 동무’라는 의미도 있지만, ‘서류 따위를 제출한 사람에게 도로 돌려준다’라는 청산과 거절의 의미도 있다. 정현의 빚 1억 6천 중 절반에 해당하는 8천은 “서로에게 영순위가 될 수 있는 존재. 그야말로 인생의 동반자”(205) 관계로 생각한 서일 때문에 생긴 빚이다. 정현은 서일이 떠난 후 남겨진 ‘반려자의 빚’을 ‘반려’ 삼으며 “잘 돌보고 보살펴 임종에 이르는 순간까지 지켜봐야 할 그 무엇”(206)으로 인식한다. 이 빚은 전세 사기 피해자인 서일의 것이지만, “자신이 줄 수 있는 최대치를 서일에게 주고 싶”은 정현은 “부채마저도 줄 수 있는 것이라고 착각”한다.(209) 그런데 이 관계에서 부채감을 ‘더’ 느끼는 쪽은 서일이 아닌 정현이다. “늘 자신이 훨씬 더 부족한 것만 같아서 서일의 기분이 어떤지를 자주 살”피고, “자신이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을 때도, 서일이 영 다른 일로 기분이 저조할 때에도 정현은 서일에게 미안”(210)함을 느끼곤 한다. “자신이 부족해서 서일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것만 같”(210)은 정현은 결국 “무리”해서 대출을 받게 되고, 서일과 헤어진 후에도 이 8천은 반려빚의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두 인물이 서로를 남은 생의 ‘반려’로 인식하는 정도가 다르기 때문인데, 즉 정현은 서일을 “함께” 빚을 갚아나가고 미래를 도모할 관계로 여기는 데 반해, 필요나 상황에 따라 이성애 가족 제도와 동성 연인 사이를 왕래할 수 있는 서일은 오히려 “반려자와 빚을 비교”(214)하는 것을 ‘반려’에 대한 ‘모욕’으로 치부하고 반려와 빚의 관계를 철저히 분리하고자 한다. 하지만 정현에게는 이것이야말로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부정이자 모욕으로 여겨진다. 정현의 과도한 심리적 부채감이나 상대적으로 산뜻해 보이는 서일의 입장은 퀴어 커플이 서로를 반려자로 인식하는 태도의, 혹은 가족의 형태를 이루고 사는 것에 대한 무게감의 정도 차이를 반영한다.
다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그 사람에게 아낌없이 다 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아무런 값을 따지지 않고 셈하지 않고. 상대 또한 그런 사람이었으면 했다. 그런 어리석은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이제는 정현이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셈하고 값을 따져보고 있었다. 서일 덕분이었다.(228)
정현은 “서일 덕분”에 ‘반려 관계’에 대한 환상을 ‘반려’할 수 있게 되었다. 두 사람의 이별 후에도 한동안 해결되지 않았던 채무 관계가 청산된 후, 정현의 꿈에 ‘반려빚’의 형상을 한 미련인지 뭔지 알 수 없는 것이 나타나자 정현은 그것을 소금을 팍팍 뿌려가며 반려한다. 하지만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 “마침내 0이 된 기분”(229)이 마냥 홀가분해 보이지만은 않는다. 정현에게 남은 8천이라는 ‘반려빚’과의 반려 관계는 아직 청산되지 않았으며 “전세 대출금은 저금리의 이자만 내고 있으니 별로 부담이 되지 않는다고 여겨졌고 대출 잔액을 헤아릴 때 아예 포함시키지 않기도”(205) 하는 등 오히려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반면 한때 삶의 영순위가 될 수도 있었던 존재인 반려자와의 반려 관계는 깨끗하게 청산되었고 마침내 ”반려빚의 가장 아름다운 형태“인 ”점점 작아지다가 완전히 사라지고 마는“(208) 형태인 0이 되었다.
퀴어 사랑의 실패 서사는 사랑의 불가능성을 탈낭만화된 방식으로 증명한다. 지금 퀴어의 사랑이 불가능하다면, 퀴어의 사랑이 실패하는 지점, 이 실패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정상 가족의 시간성은 이성애 중심주의와 재생산의 논리를 따른다. 퀴어 가족은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가 요구하고 강요하는 시간성에 완벽하게 부합하지 않는다. 정상 가족의 시간성에서 빗겨 난 퀴어 가족의 시간성은 이 미끌어짐을 통해서 규율 내부의 외부를 드러내거나, 규율 밖에서 생성 가능한 가족의 형태를 질문한다. 가족 이데올로기를 욕망하고 순응하고 거부하고 결별하는 퀴어 가족 모델은 신자유주의 시대가 요구하는 바람직한 모델인 핵가족의 이상을 흠모하고 열망하는 동시에 배반하고 교란한다. 결국 퀴어 가족은 대안으로서의 가족이 아닌 이상의 실패를 드러내는 조건으로서의 가족인 셈이다.
잭 핼버스탬은 ‘실패의 아카이브’를 통해 실패를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삼는 퀴어 예술의 형식에서 저항성과 미학성을 발견하고자 했다.21) 핼버스탬이 제안하는 ‘생성적 실패 모델’은 강제된 규범성으로부터의 해방에서 오는 의외의 즐거움을 선사하기도 한다. 그에 따르면, “모든 루저는 앞선 루저들의 계승자다. 실패는 다른 실패를 환영한다.”22) 지금 우리에게 성공의 서사가 아니라 실패의 서사가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1) 파울 페르하에허, 『우리는 어떻게 괴물이 되어가는가』, 장혜경 옮김, 반비, 2015, 123~124쪽,
2) 김보영, 「얼마나 닮았는가」, 『얼마나 닮았는가』, 아작, 2020. 소설에서 인용한 부분은 괄호 안에 쪽수만 표기한다.
3) 셰릴 빈트, 『에스에프 에스프리』, 전행선 옮김, 아르테, 2019, 197~198쪽.
4) 1980년대와 1990년대 미국의 에이즈 유행의 원인을 게이들의 성적 난잡함에서 찾으려 하자, 더글러스 크럼프는 그 답변으로 “이 난잡한 돌봄의 윤리”를 내놓는다. ‘난잡한 돌봄의 윤리’란 “인간, 비인간을 막론하고 모든 생명체 간에 이루어지는 모든 형태의 돌봄이 필요와 지속가능성에 따라 공평하게 그 가치를 인정받고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모토로 한다. 더 케어 컬렉티브, 『돌봄선언』, 정소영 옮김, 니케북스, 2021, 79~80쪽.
5) 위의 책, 17쪽.
6) ‘퀴어가족정치’는 가족정치의 성별 이분법을 심문하고, 유대와 돌봄의 관계망을 확대하는 것에, 차별에 근거한 위계적 관계의 도식을 해체하는 것에 관심을 둔다. 퀴어가족정치에서는 법적 권리의 획득만으로는 가족제도의 근본적인 불평들을 해소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한다. 김순남, 『가족을 구성할 권리』, 오월의봄, 2022, 24쪽.
7) 황종연, 「모계 여성 서사와 그 불만-정세랑의 『시선으로부터』와 최은영의 『밝은 밤』에 관하여」, 문학동네 2023 여름호, 445쪽.
8) 더 케어 컬렉티브, 앞의 책, 79~82쪽.
9) 김혜진, 『딸에 대하여』, 민음사, 2017. 소설에서 인용한 부분은 괄호 안에 쪽수만 표기한다.
10) 사라 아메드, 『행복의 약속』, 성정혜·이경란 옮김, 후마니타스, 2021, 171쪽.
11) 더 케어 컬렉티브, 앞의 책, 81~82쪽.
12) 로런 벌랜트, 「욕망」, 『젠더스터디』, 윤조원 옮김, 후마니타스, 2024, 123쪽.
13) 김지연, 「우리가 해변에서 주운 쓸모없는 것들」, 『마음에 없는 소리』, 문학동네, 2022. 소설에서 인용한 부분은 괄호 안에 쪽수만 표기한다.
14) 제인 갤럽, 『퀴어 시간성에 관하여』, 김미연 옮김, 현실문화, 2023, 22쪽.
15) 로런 벌랜트, 「사랑」, 『젠더스터디』, 윤조원 옮김, 후마니타스, 2024, 370쪽.
16) 잭 핼버스탬, 『실패의 기술과 퀴어 예술』, 허원 옮김, 현실문화, 2024, 36쪽.
17) 김순남, 앞의 책, 51~55 참조.
18) 조우리, 『오늘의 세리머니』, 위즈덤하우스, 2023.
19) 사라 아메드, 『감정의 문화정치』, 시우 옮김, 오월의봄, 2023, 330쪽.
20) 김지연, 「반려빚」, 『2024 제15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24, 소설에서 인용한 부분은 괄호 안에 쪽수만 표기한다.
21) 잭 핼버스탬, 앞의 책, 201쪽.
22) 위의 책, 2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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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와 응답* ― 한강과 90년대 문학의 (비)정치적 감수성에 관하여 최진석 1. 감수 능력과 문학 2024년 12월 10일, 스웨덴 스톡홀롬의 콘서트홀에서 노벨문학상 시상식이 열렸다. 그 주인공은 한국의 소설가 한강. 스웨덴 한림원은 그의 여러 작품 중 『소년이 온다』를 대표적으로 거론하며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선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 평가했다. 1980년 광주에서 벌어진 학살과 고통의 참화를 세계 시민들의 보편적 공감으로 끌어올린 문학적 성취에 관해서는 앞으로 끊임없이 탐구되어야 할 것이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받기 직전에 벌어진 사건, 즉 광주의 역사로부터 44년이 지난 현재 시점에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 계엄이 재연되었다는 점에 있다. 여전히 진행 중인 이 사태의 정치·사회적 후폭풍에 대해서는 일단 말을 아끼자. 지금은 한강의 문학적 성취가, 더 정확히 말해 ‘노벨상 수상’보다는 작품 세계를 통해 표현해 낸 ‘문학적 울림’으로서의 성취가 어떤 토대에서 나온 것인지, 작가 개인의 재능을 넘어서 어떤 시대사적 배경으로부터 발아한 것인지 묻는 것이 더욱 유익할 성싶다. 만일 그것이 작가의 개인적 재능에 전적으로 기인했다면 우리는 그에 더 보탤 말이 없다. 하지만 이로부터 한강으로 상징되는 한국문학의 ‘높이’나 ‘폭’을 운위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이 뿌리를 내린 문화적 감수성의 토양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감수성이란 묻기 어려운 주제이다. 그것을 가시화하는 여러 지표를 선택하고 분류하는 어려움은 차치하더라도, 도대체 감수성을 정의하고 실체로서 규정짓는 것 자체가 힘들기 때문이다. 객관성과 실증성이 신뢰의 유일한 담보물이 되는 우리 시대에 주관성과 모호성으로 둘러싸인 이 감각의 구성물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어쩌면 감수성이란 실물을 통한 증명의 문제라기보다 그에 다가서는 자가 감수(感受)하여 공명함으로써 받아들여야 할 경험은 아닐까? 1970년대에 태어나 1990년대를 기점으로 글쓰기를 실천해 온 한강과 그의 시대는 이 같은 공감적 경험의 지평선에서 우리를 부르고 있다. 70년대생 작가들은 90년대에 접어들며 본격적으로 문학장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예컨대, 1970년생 한강의 경우 93년에 시로, 94년에 소설로 등단했다. 그럼, 90년대는 어떤 시대였는가? 알다시피, 그 시기는 ‘1987년 민주화’가 이루어진 직후이며, 민족‧민중문학으로 대변되던 이전의 흐름과 ‘다른’ 의미에서의 새로운 문학이 모습을 드러내던 시점이었다. 다시 말해, ‘운동으로서의 문학’이라는 명시적인 사회‧정치적 의제가 문학장에서 빠져나가고 보다 자유롭고 유쾌한 감성으로 충전된 ‘문화의 시대’가 그때의 시대적 분위기를 대변하는 말이었다.1) ‘서태지와 아이들’, ‘무라카
- 관리자
- 2025-01-01
비정상 사회, 역사가 쓴 시대의 시놉시스 김설원 「팔월극장」 김유림 1. 불가능한 연출 정상과 비정상 사회를 구분하긴 사실상 어렵다. 기준을 찾는다면 역사일 것이다. 역사란 과거이며, 과거는 현재 시점으로 소환될 때 의미가 있다.1) 역사에 내재한 의미는 비정상과 정상을 가늠하는 잣대가 되기 때문에 검증이 필요하다. 헤겔은 역사적 사건의 배후에 집적된 현상을 추론하고 검증해 나가는 과정을 거쳐 ‘절대정신’에 이르기를 주문한다.2) 절대정신은 역사 변증법을 거쳐 ‘앎에 이르는 자기 인식’이다. 자기 인식은 ‘자유의지’와 동일한 의미로 억압을 벗어날 때 실현된다.3) 문학을 포함한 예술, 철학 등 인문학이 역사를 검증하려는 노력도 자유의지, 주체적인 인간의 실존을 강화하려는 시도일 것이다. 김현 평론가는 ‘문학이 억압하지 않지만, 억압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4)라고, 적시한 바 있다. 이는 문학이 결코 유희적이거나 감상적 산물이 아닌 억압당하는 인간의 실존을 복기하는 장르임을 알린다. 김설원5) 작가의 단편소설 「팔월극장」6)은 2024년 현진건 문학상 본상 수상작으로 인간을 억압하는 비정상 시대를 밀도 있게 다루면서도 미학적인 감응이 풍부한 작품이다. 특히 인간의 고통스러운 삶에 4‧19 역사를 덧입혀 주목된다. 「팔월극장」은 영화감독의 꿈을 키우는 화자 영진을 중심으로 연기자를 꿈꾸는 윤희, 주어진 삶에 순응하는 영진의 엄마와 여동생이 등장한다. 영진은 엄마, 여동생과 함께 지방 도시에서 살아왔다. 대학을 졸업하고 홍보 인쇄물 제작업체에 취업하지만 ‘생존 활동’에 불과한 일에 회의를 느끼고 직장을 그만둔다. 직장을 그만둔 영진의 행위는 매우 중요하다.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실존 여부가 물음으로 확증된다고 밝힌다.7) 영진은 육체 보존 목적뿐인 삶에 왜? 라는 물음을 던진 것이다. 푸코는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구현하는 행위를 심지어 ‘예술 행위’로 규정했다.8) 영진은 육체만으로 사는 삶을 거부하고 자기 세계를 찾아 고향을 떠난다. 학원에서 연출 전공 강좌를 수강하고 운 좋게 영화제작사에 들어간다. 영화(제작, 연출)에 매진하지만, “성질이 더욱 고약해진 ‘가난’과 마주쳐야 했다.” “자부심이랄지 성취감은 온데간데없어지고 한숨과 카드 빚만 늘어 가는 생활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25쪽) 영진은 물질이 지배하는 비정상 시대에 억압당했다. 생활고에 엄마의 죽음이 포개지면서 영화감독의 꿈은 와해 될 상황에 직면한다. 엄마가 숨을 거둔 시간에 나는 클럽 디디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여동생이 문자메시지로 임종 소식을 알렸다. 새벽 한 시가 막 넘어선 때였다. 휴대전화에 찍힌 부고를 보는 순간 목덜미가 싸늘해졌다. 나는 아르바이트생을 불러 맥주에서 지린내가 난다고 공연히 신경질을 부렸다. 부주의로 내 어깨를 슬쩍 건드리고
- 관리자
- 2025-01-01
시간의 재생, 재생 없는 공간 - 『사랑의 꿈』과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을 함께 읽기1) 이성민 1. 프레드릭 제임슨은 포스트 모더니티를 역사 속에서의 위치 상실로, 그러니까 “역사적으로 사유하는 방법을 망각해 버린 시대”2)의 지배적 징후로 언급한 바 있다. 이것은 달리 말해 어떤 근본적인 단절이 우리 시대와 그 이전 사이에 놓여 있으며, 따라서 이전과 같은 역사적 방식으로는 우리가 어떤 시공간 속에 위치하는지 파악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제임슨의 어법을 따르자면 포스트모던 감각은 크게 세 가지 형식으로 표출되는데, 이를테면 깊이의 상실과 역사성의 쇠퇴 및 그로부터 비롯되는 시간예술의 통일성 와해가 이에 해당된다. 더 나아가 그는 이 시간성의 와해 이후의 예술, 즉 공간성이 점점 더 지배적인 문화 논리가 되는 예술 형식을 포스트모던 건축으로부터 읽어 내고 있다.3) 포스트모던의 하이퍼스페이스는 우리로 하여금 공간 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느낌을, 완전히 균질해져 버린 탈역사의 공간 내부를 영속적으로 떠도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한다. 우리는 이제 방향감각과 목적(telos)을 상실한 채 무한한 패스티시만이 잔존하는 세계를 살아가는 것 같다. 상술한 시대감각을 하나의 전제로서 미리 염두에 둘 때, 자연스럽게 새로운 질문이 우리 앞에 출현한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4) 물론 각 개인은 위도와 경도로 이루어진 하나의 좌표 위를 점유하고 있다. 시간적으로는 월가 점령 이후의 ‘신냉전’ 시대 어딘가를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질문하는 위치는 그러한 3인칭 좌표의 개념이 아니다. 우주에서 내려다보는 하나의 점에 대한 것이 아니다. 질문은 이렇게 바뀌어도 좋을 것이다. 실존의 1인칭 관점에서 올바르게 보았을 때, 나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스스로의 삶이 속해 있는 1인칭 좌표를 사후적으로 재구성하려 할 때, 그런 시도는 곧바로 난관에 봉착하며 미궁으로 좌초되고 만다. 나를 살게 하는 것들과 내 행위 역량을 감소시키는 것들의 연쇄는 너무나 촘촘하게 얽혀 있는데, 바다 건너편에서 발생한 가뭄이 선물시장의 원두 가격 상승으로, 그리고 더 나아가 거미줄처럼 얽힌 시장-신의 불가해한 변화로 이어지는 세계에서 연기(緣起)는 축자적인 진실이기 때문이다. 내 위치, 내가 나아가는 하나의 화살표, 나를 형성하는 기억과 기대의 교차점은 지구 전체와의 공동 실존 위에 놓여 있다. 그런데 지구를 실존의 토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가능할까? 우리가 지구 위에서 어디에 서 있는지를 감히 사유한다는 것은 가능할까? 이미 말했듯 올바르게 본다는 것의 문제는 전혀 단순하지 않다. 나 자신의 실존, 나의 시공간이 속하지 않는 담론의 역사, 실존과 담론 바깥에 있는 실재적인 것의 작용을 함께 사유할 때 우리는 올바른 방향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실존-담론-실재의 이음새를 엮는 것은 우리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처럼 느껴지고, 나를 살게 하는 무한한 연쇄의 무게 앞에서 사유는 한없이 무기력해
- 관리자
- 2025-01-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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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건
이데올로기의 외밀함을 드러내는 방식은 저항을 통한 승리도 있지만(하나 승리는 또 다른 이데올로기를 부른다)실패함으로써 실패를 자인할 수밖에 없는, 정상과 비정상의 교란적이고 무모순적인 내적 아카이브의 뜬금없는 도발적 향연이 초국가적 자본주의 세계의 양상과 잘 맞물리면서 보다 더 확실하게 나타난다.
차별금지법 제정의 시급함을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 퀴어 가족의 법적 승인 제도가 결국 적법한 삶과 적법하지 않은 삶을 나누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웠는데, 이 글을 읽고 이러한 사유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