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등시민과 세계시민 사이
- 작성일 2024-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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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등시민과 세계시민 사이
― 소수자 시민권의 기획과 해외 이민의 상상력
오혜진
‘탈조선’이라는 모험과 자기 계발의 윤리
2015년을 기점으로 확산된 ‘헬조선’ 담론은 계급 세습이 고착화된 한국사회를 풍자하는 ‘수저론’과 결합하며 당대 가장 대중적인 정치 담론으로 회자됐다. 잘 알려졌듯 이 담론은 한국사회를 더는 진보의 기획이 불가능할 정도로 도태된 미개한 공간으로 정의하며, 젊은 세대를 새로운 역사적 주체로 호명하려는 기성세대의 욕망 또한 단호히 거절한다. 헬조선 담론과 함께 부상한 ‘죽창론’ 역시 ‘리셋’에의 강렬한 열망을 내세웠지만, 이는 사회변혁에 대한 의지라기보다는 ‘죽으면 끝’이라는 자기 파괴의 제스처에 가깝다고 해석된다.1)
장강명의 『한국이 싫어서』(2015)2)는 청년 세대의 분노와 좌절, 자조의 정동이 주조한 헬조선 담론을 발 빠르게 포착해 선동적인 대중 서사로 가공한 사례다. 전작들에서 ‘자살’(『표백』, 2011)과 ‘덕질’(『열광금지, 에바로드』, 2014)을 통해 “저항하는 잉여”3)로서의 청년 형상을 부조한 바 있는 작가는 『한국이 싫어서』에서 ‘해외 이민’이라는 새로운 과제를 제출한다. 다만 그가 모종의 “도발”4)을 의도한 것과 달리, 독자들에게 이미 ‘탈조선’의 상상력은 불온하다기보다는 또 다른 차원의 ‘노오력’을 요하는 규범적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소설은 ‘해외 이민’이라는 선택지를 필연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한 두 가지 정황을 제시한다. 하나는 ‘평범한 여성’은 한국사회에서 시민권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이등시민”으로 분류된다는 점이다. “명문대를 나온 것도 아니고, 집도 지지리 가난하고, 그렇다고 내가 김태희처럼 생긴 것도 아니고, 나 이대로 한국에서 계속 살면 나중엔 지하철 돌아다니면서 폐지 주워야 돼.”(『싫어서』, 44쪽)라는 진단이 ‘홍대 나온 20대 후반 여성’ ‘계나’의 자기인식이다. 즉 계나는 학벌과 외모, 가족의 경제적 지원을 한국사회에서 여성이 시민으로 살아가기 위한 필수조건으로 파악한다. 또한 그는 어릴 적 자신의 할머니가 새벽에 폐지를 줍기 위해 무단 횡단을 하다가 뺑소니 사고로 사망했다고 회고함으로써 ‘폐지 줍는 할머니’의 형상을 돌이킬 수 없는 실패이자 비참한 미래로 의미화한다.5)
다른 하나는 소수자들이 연대해 사회구조를 변혁하고 지배체제에 저항하는 일이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판단이다. “도망치지 않고 맞서 싸워서 이기는 게 멋있다는 건 나도 아는데······ 그래서, 뭐 어떻게 해? 다른 동료 톰슨가젤들이랑 연대해서 사자랑 맞짱이라도 떠?”(『싫어서』, 12쪽)라는 서술에서 보듯, 소설은 해외 이민이라는 선택이 “도망”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점을 안다. 하지만 한국사회에 남아서 싸우라는 주문은 ‘꼰대’들이나 할 법한 비현실적이고 무책임한 조언으로 일축된다.
그리하여 소설은 계나의 해외 이민을 “신분이 오를 가능성이 있는 방향으로 한 일”(『싫어서』, 123쪽)이라며 강력하게 지지하는 한편, 불투명한 미래를 감내하며 한국에서 사는 일에 대해서는 냉소한다. 계나는 자신이 한국을 떠나기 전이나 후나 늘 같은 내용의 수다를 반복하는 친구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솔직히 상황을 바꾸고자 하는 의지 자체가 없는 거지. (중략―인용자) 시드니에서 매일 크고 작은 모험을 겪고 있어서 그런가, 옛날 친구들이 좀 얄팍해 보이더라.”(『싫어서』, 120쪽) 이 같은 서술에는 한국에서 지배 규범과 협상하며 사는 존재를 실패자로 간주하고, 이들이 경험하는 불안을 부당한 사회구조의 산물이 아니라 개인의 의지 박약의 결과로 여기는 인식이 내포돼 있다. 『한국이 싫어서』가 사회 비판서라기보다는 해외 이민에 필요한 정보와 매뉴얼을 세세하게 일러 주는 실용 지침서로 읽히는 이유다.
눈여겨볼 것은, 소설이 무한경쟁과 끝없는 자기 계발을 강요하는 한국사회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돌파구로서 해외 이민을 제시하고 있음에도, 외국에서 시민권을 획득하는 과정 역시 엄청난 자기 계발을 요하는 지난한 과업으로 묘사된다는 점이다. 유학 비용을 모으고, 영어를 익히고, 시민권 심사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는 일을 비롯해, 계나가 호주에서 더 나은 일자리와 주거 환경을 얻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모험’이라고 할 만하다. 소수자의 합리적 선택이자 당위적 실천으로서 제안된 해외 이민은 결국 해외 노동시장에 채용되기 위한 또 다른 차원의 자기 계발을 독려하는 규범적 서사로 수렴된다.
‘이등시민’으로 분류되는 소수자가 ‘해외 시민권 취득’이라는 대안을 적극적으로 고려하게 된 것은 전 지구적 이주의 확산으로 촉발된 초국적 정치 공동체의 대두와 관련된다. 여성에게 저임금·저숙련의 일자리만을 할당하는 한국사회의 남성중심적 노동환경과 이성애 규범적 사회제도는 여성 시민과 퀴어 시민에게 부여된 시민권이 ‘글로벌 스탠더드’에 미치지 못한다는 판단을 하게 만든다.6) 그리하여 이들에게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하고 차별금지법 및 혼인평등법이 제정된 서구 국가로의 이민은 “신분이 오를 가능성이 있는”, 즉 소수자의 시민-되기를 위한 유력한 전략으로 간주된다.
초국적 시민권의 획득이 소수자 주체화를 위한 방략으로 의미화되는 이런 정황은 초국가 시대의 도래에 따른 시민권 모델의 변화와 함께 이해돼야 한다. 특정 영토에 거주하는 시민의 문화적 동질성을 전제하는 근대적 시민권과 달리, 탈근대적 시민권은 ‘시민’을 “다양한 경제적·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경쟁하는 동시에 정치 공동체에 대해 책임을 지는 주체”7)로 인식한다. 특히 신자유주의 시대에 새롭게 정초된 ‘유연한 시민권flexible citizenship’ 모델은 ‘시민권’을 출생과 함께 자동적으로 부여되는 고정불변의 조건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 획득 가능한 것으로 간주한다. 기존의 발전주의적 시민권 모델이 국가 발전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시민권의 외연과 내포를 설계·통제했다면,8) 신자유주의 시대의 유연한 시민권은 국적과 상관없이 유능한 엘리트들에게 자국의 시민권을 일시적·부분적으로 부여함으로써 이들을 해당 사회의 규범적 주체로서 포섭·훈육한다.9) 이를 바탕으로 소수자는 자기 계발이라는 신자유주의적 윤리를 실천함으로써 스스로를 경쟁력 있는 코즈모폴리턴으로 정체화하며 소위 ‘인권 선진국’의 탈영토화된 시민권을 누리고자 한다.10) 이런 정황을 바탕으로, 이 글은 2020년대에 발표된 서수진의 소설들을 중심으로 한국문학(장)에서 제출되는 해외 이민의 상상력이 소수자 정치와 길항하는 양상을 검토할 것이다.
서수진은 『코리안 티처』(2020), 『올리앤더』(2022), 『유진과 데이브』(2022), 『골드러시』(2024) 등 단편과 장편을 망라하며 소수자가 감행하는 해외 이민의 문제적 국면들을 지속적으로 서사화한다. 그는 외국에서 그 나라 언어를 새롭게 학습하고, 연애 및 결혼을 하고, 노동과 여가의 시간을 보내고, 영주권을 따내는 등 소수자가 초국적 시민권을 획득하기 위해 수행하는 구체적인 과제들을 세밀하게 묘사한다. 이를 통해 서수진은 초국가적 시민권의 물적 토대 및 그와 관련된 여성/퀴어 주체의 복합적인 정동을 충실하게 재현한다.
계서화된 글로벌 공동체와 시간적 타자
소수자의 인권 및 시민권을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보편적’ 기준에 의거해 논할 때, 시민권의 서사는 종종 선형적이고 발전론적인 시간관을 차용한다. 소수자 시민권 관련 법 제도가 잘 정비된 나라는 ‘인권 선진국’으로, 그렇지 않은 나라는 ‘인권 후진국’으로 배치되는 식이다. 특정 국가를 시간적 타자로 설정함으로써 형성되는 이 계서화된 글로벌 공동체 질서에 따르면 인권 선진국은 인권 후진국에게 국제적 인권 규범을 계도해야 할 문명사적 사명을 띤 주체가 된다.
이와 관련해 “고학력 비정규직 여성들의 일하는 이야기”11)임을 표나게 내세운 서수진의 첫 장편 『코리안 티처』12)는 주목할 만하다. 이 소설이 동시대 여성 독자에게 소구력을 발휘한 것은 1990년대 이후 부쩍 높아진 여성의 높은 고등교육률이 ‘페미니즘 리부트’의 주요 동력이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13) 소설은 대학이 운영하는 한국어학당에서 외국인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여성 강사들을 초점화자로 설정한다. 5개의 챕터로 구성된 이 소설은 H대학 어학당 강사인 ‘선이’, ‘미주’, ‘가은’, ‘한희’, 그리고 다시 선이의 관점에서 순차적으로 진행된다.
“이제는 베트남입니다.”(『티처』, 12쪽)라는 문장을 통해 드러나듯, 대학이 운영하는 한국어학당은 교육기관이라기보다 해외 고객을 유치하는 데 혈안이 된 ‘시장’에 가깝다.14) 베트남, 중국, 벨라루스 등 해외 각지에서 온 학생들은 교육 목적 외에도 어학 비자를 취득해 한국에서 취업하기 위해 어학당에 등록한다.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 급속도로 기업화한 대학들에게 어학당은 초국적 시민권 획득을 통해 신분 상승을 도모하려는 개발도상국 시민들을 상대로 벌이는 고수익의 장사다. 대학 당국은 강사들이 그 나라 말로 한국어를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닌데도 학생들의 출신 국가에 따라 반을 편성해 어학당 학생들을 종족화한다. 강의실과 수업교재는 급조되고, 속성으로 고용된 강사들은 학생 수가 줄면 언제든 해고된다. 소설은 이처럼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는 어학당 시스템에 경악하면서도 바로 그 시스템에서 탈락되지 않기 위한 여성 강사들의 고군분투를 다룬다.
프엉은 오후 5시부터 새벽 4시까지 일을 한다고 했다. 일주일 중 일요일 하루만 쉬었다. 한 달에 264시간, 월급이 90만 원이라면 시급이 3400원꼴이었다. (중략—인용자)
“휴대폰을 주세요. 선생님이 전화해요.”
선이는 프엉의 휴대폰으로 그녀의 사장에게 전화를 했다. 프엉에게 욕설을 퍼붓던 사람. 사장이 한번에 전화를 받지 않아 계속했고, 나중에는 메시지를 남겼다.
“사장님이 전화를 안 받아요. 전화 오면 그때 이야기해요. 지금 한국어를 배워요. 한국어를 배워서 싸워야 해요.”
선이는 그 순간 새로 시작한 자신의 일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월급을 떼먹는 악덕 사장에게 따질 수 있도록 한국어를 익혀야 한다. 비인간적인 욕설을 할 때 알아챌 수 있도록, 불법적인 시급을 줄 때 항의할 수 있도록, 아니, 처음부터 그런 곳에서 일하지 않을 수 있도록. (『티처』, 44~45쪽)
소설은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이 단지 언어의 전수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다각도로 조명한다. 위 인용문은 공장에서 월급을 떼먹혀 수업 시간에 울고 있는 수강생 ‘프엉’과 강사 선이의 대화다. 선이는 어학연수 비자로 들어온 외국인에게 주 20시간 아르바이트가 허용되는 것은 입국으로부터 6개월이 지난 시점부터라는 것, 그러므로 한국에 들어온 지 네 달밖에 안 된 프엉이 일을 하는 건 불법이라는 점을 안다. 이에 대해 학교는 수업 중에 아르바이트를 언급하지 말라는 지침을 내리는 것으로 해당 현실을 외면하고 있는 상황이다.15) 이전에 공장 사장으로부터 폭언을 들은 프엉에게 ‘그런 말은 무시하라’고 조언했던 선이는 이번에 프엉이 공장에서 임금을 떼먹히자 프엉을 대신해 공장 사장에게 전화해 임금 체불의 부당함을 따져 묻는다. 선이는 프엉에게, 사장님이 돈을 안 주면 선생님에게 다시 말하라고 당부하며 “선생님이 싸울 거예요.”(『티처』, 47쪽)라고 약속한다.
이 에피소드를 통해 선이는 베트남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자신의 일이 곧 베트남 학생들이 부당한 상황에 항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의미화한다. 하지만 이 같은 선이의 인식은 프엉이 “그런 곳”에서 일하게 된 것, 즉 불법 취업을 하게 된 것과 불법 취업을 한 곳에서 월급을 떼먹힌 일 모두를 프엉에게 한국어 능력이 결여된 탓이라고 파악한다. 선이의 논리에는 ‘미등록체류자’라는 불안정한 신분을 양산함으로써 저임금으로 노동력을 사용하고자 하는 신자유주의적 기업 논리와 국가 정책의 문제가 누락돼 있다.16) 결국 위 대화에서 선이는 ‘약자를 위해 악덕 업주와 싸우는’ 용감한 영웅의 위치를 점하는 반면, 단지 한국어 구사자가 아닐 뿐인 프엉은 노동자 정체성을 결여한 채 노동착취 현실에서 구제돼야 할 ‘약자’로 배치된다.
그뿐 아니라, 이 소설에서 고학력 비정규직 여성 강사들이 처한 열악한 노동환경을 묘사하기 위해 동원되는 많은 에피소드들은 외국인 학생들에 대한 노골적인 인종화를 경유한다. 예컨대 베트남 출신 학생 ‘꽌’은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 선이의 모습을 촬영한 사진을 선이의 동의 없이 자신의 SNS에 게시했다. 해당 사진에는 “코리안핫걸”, “아시안걸” 따위의 해시태그가 달려 있었고, 그 해시태그를 누르면 신체를 노출한 아시아 여성들의 사진이 검색됐다. 이를 알고 불쾌해진 선이는 이 사실을 동료 강사들과 공유하며 꽌을 경찰에 신고해야 할지 고민한다. 결국 선이는 일이 커져 자신이 학교로부터 불이익을 받을 것이 두려운 나머지 경찰에 신고하지 않는다. 학교는 강사들의 사진을 SNS에 올린 학생들을 제적 처리했고, 이 사건의 여파로 많은 베트남 학생들이 잠적한다.
“사진을 찍으면 안 돼요. 다른 사람의 동의 없이 사진을 찍으면 안 돼요. 인터넷에 그 사진을 올리는 건 더더욱 안 돼요. 그건 모두 불법이에요.”
선이는 프로젝터에 구글 베트남어 번역기를 띄워놓고 빠르게 타이핑을 하며 말했다. 학생들이 소란스러워졌다. 학생들의 길고 많은 말을 간추려서 프엉이 “베트남에서 괜찮아요.”라고 말했다. 선이는 통역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게 구글의 번역이든, 프엉의 요약이든 간에 무언가 결정적인 것이 빠진 것이다.
“아니요, 안 괜찮아요. 베트남에서 안 괜찮아요. 한국에서 안 괜찮아요. 베트남 사람, 한국 사람 똑같아요. 안 돼요.” (『티처』, 64쪽)
선이는 프엉에게 아시안걸 태그를 단 게시물들을 보여 주고 싶었다. 스스로를 ‘아시안걸’이라고 이름 붙이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프엉이 그것에 동요하지 않을까 봐 겁이 났다. ‘그래서요?’라는 식의 표정을 지을까 봐 무서웠다.
“한국 사랑해요. 한국어. 공부. 이렇게 태그하세요.” (『티처』, 65쪽)
꽌의 아내이자 또 다른 수강생인 프엉은 어학당에서 제적된 꽌이 어학 비자를 얻지 못해 일을 하지 못한다며 훌쩍인다. 이때 선이는 프엉의 SNS에서 프엉이 자신과 자신의 아기 사진을 업로드하고 그 밑에 ‘아시안걸’이라고 태그한 것을 발견한다. 선이는 프엉에게 꽌이 한 행동, 즉 다른 사람의 동의 없이 그가 찍힌 사진을 SNS에 업로드하는 것은 범죄라고 알려주고, 스스로를 ‘아시안 걸’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훈계한다. 이에 프엉은 “베트남에서 괜찮아요.”라고 응수한다.
이 에피소드를 통해 강조되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고학력 비정규직 여성인 한국어 강사가 종족화의 원리에 의해 설계된 직장에서 손쉽게 성애화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신자유주의적 노동시장의 착취 구조로 인해 고학력 비정규직 여성이 자신이 소유한 사법적 권리를 행사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즉 소설은 어학당의 여성 강사들이 외국인 남학생들에게 성희롱을 당하고, 대학 당국이 편성한 노동환경에 의해 사회권이 착취되는 이중의 피해자성을 띤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때 주목할 것은, 선이가 자신의 박탈된 권리를 학교 당국에 대한 항의와 협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베트남 여성 프엉과의 관계를 통해 보상받고자 한다는 점이다. 위 인용에서 보듯, 선이와 프엉의 대화에서 베트남은 사생활의 권리나 초상권,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 등 근대의 규범적 지식이 통용되지 않는 전근대적 공간으로 재현된다. 소설은 오리엔탈리즘적 젠더화를 자발적으로 수행하는 프엉의 무지를 독자 앞에 상연함으로써 프엉을 비롯한 베트남 출신 학생들에게 결여된 것이 단지 한국어 능력만이 아님을 강조한다. 즉 선이는 프엉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강사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여성 인권과 관련된 국제 규범이 통용되지 않는 전근대적이고 반문명적인 세계에 근대적 인권 규범을 전달해야 하는 문화적 사명을 띤 식민주의적 주체가 되는 것이다. 이로써 프엉은 서구 남성과 베트남 남성뿐 아니라, 베트남 여성에 대한 문화적 우위를 주장하는 한국 여성과의 관계에서도 인종화·젠더화된다. 이때 프엉에게 근대 지식과 규범을 전수하려는 선이의 시도는 프엉의 해방에 기여하기보다는 고학력 한국인 여성의 “주권을 가진 주체로서의 아이덴티티 구축”17)에 복무하며, 이는 제3세계 여성을 통해 자기동일성을 확보하는 제1세계 백인 여성 중심의 “서양 페미니즘”에서 구사되는 논리와 상통한다.
『코리안 티처』에서 재현된 한국과 베트남의 위계는 서수진의 또 다른 장편 『유진과 데이브』18)에서도 반복된다. 다만 전자에서와 달리, 후자에서 한국은 ‘선진국’ 호주로부터 다양한 일상의 매너와 근대국가적 소양을 학습해야 하는 이국적이고 열등한 타자의 위치에 놓인다.
『유진과 데이브』는 2013년부터 2016년까지의 시간을 배경으로 한국 여성 ‘유진’과 호주남성 ‘데이브’의 연애 과정을 묘사한다. 2013년, 한국에서 미술을 전공한 31세 여성 유진은 호주로 이주한 후 카페 서빙으로 생계를 도모하며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고 있다. 반면 시드니의 부촌에 거주하는 데이브는 건축 중개사이지만 그 일이 자신의 적성에 맞는지 확신하지 못한다. 소설은 둘이 서로의 가족을 만나는 에피소드를 통해 한국과 호주 사이에 형성된 문화적 차이와 위계를 날카롭게 드러낸다.
유진이 데이브의 가족이 거주하는 대저택에 갔을 때, 영국 혈통을 지닌 관대하고 유머러스한 데이브의 가족들은 ‘호주에서 이민자가 아닌 사람이 있을까’라는 주제로 대화한다. 이때 데이브의 엄마는 호주에 왔으니 호주의 역사를 알아보라며 “우리가 원주민을 어떻게 학살했는지 나와 있”(『유진』, 32쪽)다는 책 한 권을 유진에게 빌려준다. 유진은 파란 눈을 가진 중년의 백인 여성이 자신의 선조들이 자행한 학살의 역사를 아시아 여성에게 지도하는 이 장면에서 묘한 위화감을 느낀다.
이 에피소드는 이후 데이브가 한국을 방문해 유진의 가족을 만나는 장면과 대쌍을 이룬다. 유진의 가족과 함께 방문한 인천 월미도에서 ‘전쟁 영웅’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발견한 데이브는 자신의 할아버지도 양차 세계대전 참전 군인이었음을 피력하며 유진의 가족과 한국전쟁에 대해 대화하고자 한다. 반면, 유진은 자신의 가족은 그런 이야기에 관심 없다며 데이브를 저지한다. 죽은 사람을 기억하기 위해서라도 한국전쟁에 관해 대화해야 한다는 데이브의 당위적인 발언은 유진으로 하여금 어딘지 마음이 뒤틀리게 한다. 유진은 이 장면을 “바다가 보이는 통창과 고급 가구들”(『유진』, 122쪽)이 즐비한 데이브 가족의 대저택에서 전쟁과 학살과 원주민과 난민에 대해 이야기하며 느꼈던 알 수 없는 불쾌감과 연결 짓는다.
이 에피소드들은 정복 및 개척의 역사를 통해 이민을 경험한 제국의 후손들과, 제국주의적 폭력과 피식민의 역사를 상처와 피해의 경험으로 간직한 후기 식민적 주체의 간극을 서늘하게 지시한다. 제국의 후손은 ‘원주민 학살’이라는 가해의 경험조차 지식의 대상으로 배치함으로써 제국의 지식 아카이브를 확장·갱신하고 도덕적 알리바이를 획득한다. 이처럼 가해의 역사를 단번에 자기 지식으로 번역해 수용하는 것이 제국의 에토스라면, 고통과 트라우마의 역사를 쉬이 대상화하지 못하는 것은 후기 식민지적 주체의 역사적 불안 및 신경증과 관련된다. 소설은 식민주의적 폭력의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피해의 경험을 지식화·현재화할 것을 요구하고 계몽하는 장면을 묘사함으로써, 가해/피해 역사와의 교착을 통해 기묘한 방식으로 공고해지는 한국 여성 유진과 영국계 호주 남성 데이브의 위계를 드러낸다.
소설 후반부에서 유진과 데이브는 태즈메이니아 섬에 있는, 데이브의 여동생이 소유한 저택에 거주하게 된다. 원주민이 거주하던 그 섬의 아름다운 자연 풍광은 매 순간 유진을 감탄하게 하지만, 유색인이라고는 오직 자신뿐인 그곳에서 유진은 좀처럼 일자리를 얻지 못한다. 결국 유진이 카페 화장실 청소부 일을 구했을 때, 데이브는 유진의 취업을 축하하는 파티를 열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유진은 시티 뷰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도심의 고급스런 사무실에서 일하는 데이브에게 화장실 청소 일을 구했다고 축하받는다는 사실로부터 또렷한 모욕감을 느낀다. 호주에서는 직업의 귀천이 없고 어떤 일을 하든 생계를 잇기에 충분한 임금을 받는다는 것이 유진이 ‘선진국’ 호주로부터 느꼈던 매력이지만, 그 일이 인종적 타자로 규정되는 자신에게 주어진 아주 적은 선택지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자 유진은 호주에서의 삶이 자신이 진정 원했던 것인지 혼란스러워한다. 결국 유진은 데이브의 엄마가 자신에게 빌려줬던, 원주민 학살의 역사가 담긴 책을 태즈메이니아 저택에 두고 나오며, 다시는 “아무것도 빼앗기지 않을 거라고 다짐”(『유진』, 180쪽)한다.
초국적 시민권 획득을 위한 젠더화된 수행
근대 시민권 이론이 정초된 이래, ‘시민권의 젠더’는 페미니스트 연구자들에게 언제나 첨예한 주제였다. 캐럴 페이트먼은 근대 시민권 체제가 성적 계약에 의해 성립했음을 갈파했고,19) 린 헌트는 프랑스혁명으로부터 도출된 공화제의 철학이 여성 배제를 통한 남성 연대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음을 규명했다.20) 요컨대 페미니스트 연구자들은 시민권이 전제하는 ‘보편적·추상적 인격’이 기실 ‘이성애자 남성’으로 젠더화돼 있음을 논파하며, 가부장제를 공고하게 유지하는 데 복무해 온 시민권 이론에 비판적으로 개입해 왔다. 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 백인 여성에게 부여된 정치적 권리로서의 시민권이 ‘모성으로서의 여성’ 개념에 기인한 것이었음에 주목한 이들은 여성 해방이 단지 시민권의 확대만으로 달성될 수 없다고 설득하며, 성적 차이를 넘어 다양성을 포괄하기 위한 대안적 시민권의 창출을 주장21)한다. 그런가 하면, 시민권이 기본적으로 “군사력 증진을 목표로 하던 국가의 이익을 맞추기 위해 제안된 권리”이기에 시민권 획득은 국가로의 포섭이자 다른 성원들에 대한 배제라는 점 또한 지적된다. 또한, 시민권이 국민 국가의 틀 안에서 작동하는 한 시민권의 획득은 “다른 공동체로의 연계 가능성”을 단절시키는 장치로 기능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22) 역시 페미니스트 연구자들이 시민권의 정치를 경계하는 이유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여성 및 성소수자들이 초국적 시민권의 획득을 도모하는 것은 한국 시민권 체제에 배태된 남성 중심적이고 이성애 규범적인 사회계약에 대한 거부이기도 하다. 그런데 아이로니컬한 것은, 영주권이나 시민권을 획득하기 위한 과정 자체가 여성과 퀴어 시민에게 거듭 젠더화된 수행을 요한다는 점이다. 한국에 유입된 결혼이주여성들의 사례를 중심으로 초국적 시대 ‘이주의 여성화’ 현상을 연구한 황정미에 따르면, 다수의 여성들은 가족 관련 지위, 즉 경제활동이나 정치적 망명 등 독자적인 권리의 주체로서가 아니라 다른 권리 보유자와 연결된 ‘의존자’로서 이주를 실천한다.23) 상당 부분 부계 혈통주의를 따르는 한국의 시민권 체제는 결혼과 이혼, 자녀 양육, 가족 결합 등과 관련한 문제에서 여전히 성별·인종·가족 규범에 대한 가부장적 문화 규범을 차용한다.
서수진의 첫 소설집 『골드러시』에 수록된 몇몇 단편들은 여성이 초국적 시민권 획득을 위해 수행하는 젠더화된 실천의 양상을 핍진하게 드러낸다. 예컨대 「입국심사」(2019)는 미국 디트로이트 공항의 입국 심사대에서 정상 가족의 서사가 차용 혹은 기각되는 양상을 블랙코미디적 필치로 묘사한다. 한국 여성 ‘유미’는 입국 심사대에서 자신이 미국인 남자 친구 ‘에디’를 만나러 왔다는 것을 숨긴 채 미국 방문 목적을 ‘관광’이라고 밝힌다. 그러나 유미를 수상쩍게 여긴 직원은 유미의 휴대폰을 압수해 유미가 SNS를 통해 에디와 나눈 대화들을 꼼꼼하게 살핀다. 직원은 유미의 위장 결혼이나 불법체류 가능성을 경계하며 유미와 에디의 관계를 캐묻는다.
유미는 에디를 이태원 펍에서 처음 만났다. 백인 남성 미군과 데이트하는 한국 여성에 대한 유구한 사회적 편견에 저항하기 위해 유미는 “일종의 투쟁처럼”(「입국심사」, 15쪽) 일부러 에디의 손을 잡고 대로변을 걸었다. 그럴 때마다 유미는 자신의 이런 행동이 ‘양공주’라는 역사적 낙인을 과잉의식한 탓이 아닐지 번민했다. 하지만 입국 심사대 앞에 선 유미는 이제 에디가 미군이라는 사실을 오히려 강조한다. 에디의 신분이 확실하다는 점을 말하고 자신이 이미 ‘용산 미군 부대’라는, “미국 땅”(「입국심사」, 17쪽)에 입장한 적이 있다고 밝힘으로써 자신이 미국에 위협이 되는 인물이 아님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입국 심사대 직원이 원한 것은 미국에 체류하는 3개월 동안 에디와 결혼하지 않겠다는 유미의 약속이었다. 유미와 에디가 자신들은 ‘진지한’ 관계가 아니라는 점을 거듭 밝히고 나서야 직원은 유미에게 “웰컴 투 아메리카”(「입국심사」, 23쪽)라는 인사를 건넸다.
에디와의 관계가 ‘진실되고’ ‘진지한’ 관계가 아니어야만 유미의 입국이 허가된다는 점은 미국의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에 개재한 인종 정치를 상기시킨다. 유미는 제3세계 유색인 여성의 신체와 섹슈얼리티를 ‘일탈적인 것’, ‘비정상적인 것’으로 규정함으로써 유지되는 미국의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에 순응하기 위해, ‘양공주’라는, 자신이 한국에서 저항했던 바로 그 성애화된 표상을 자발적으로 차용한다.
한편, 표제작 「골드러시」(2021)는 ‘진우’와 ‘서인’, 두 남녀가 호주에서 영주권을 획득하기 위해 통과하는 지난한 시간을 묘사한다. 퍼스의 셰어하우스에서 처음 만난 이들은 연애 초기부터 비자 문제를 논의했다. 서인은 워킹홀리데이 비자가 끝나면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진우는 자신이 일하는 식당 사장에게서 457비자 지원을 약속받은 상태였다. 이를 위해 진우는 최저 시급의 70%만 받으며 휴일 없이 일했다. 457비자를 신청한 후에는 심사를 대비해 최저 시급을 훨씬 웃도는 법정 금액을 급여로 지급해야 했기에, 진우는 급여의 절반을 사장에게 현금으로 돌려주기까지 했다. 457비자로 2년을 일하면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고, 영주권을 받으면 급여는 세 배 인상될 것이며, 법정 유급휴가 4주에 공공 의료와 공교육이 무료라는 점은 진우로 하여금 이 모든 편법과 불합리를 감내하게 했다.
다만, 457비자를 신청하기 위해서는 영어 점수가 필요한데, 주 72시간씩 일하는 진우는 영어를 공부할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진우의 시급이 서인의 시급보다 높고, 서인의 영어 실력이 진우의 영어 실력보다 더 낫다는 이유로 진우와 서인은 전략적으로 역할을 분담한다. 진우는 일을 하고 서인은 영어 공부를 하는 것으로. 그리하여 457비자는 서인의 이름으로 승인됐고 진우는 ‘파트너비자’를 발급받는다.
하지만 457비자는 불행의 씨앗이기도 했다. 진우가 정신없이 일하는 동안 서인은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그런데도 둘은 헤어지지 못한다. 457비자는 서인의 이름으로 돼 있고 진우는 서인의 파트너 자격으로 거주를 허락받았기 때문이다. 진우의 이름으로 비자를 다시 신청하려면 영겁의 세월이 소모될 것이기에, 진우는 서인에게 제발 한국으로 돌아가지 말아 달라고 사정한다. 그렇게 7년의 시간이 흐른다. 서인은 영주권을 획득한 뒤에도 진우를 떠나지 않았다. 대신 진우의 이름으로 장기 주택자금 대출을 받아 외곽의 단독주택을 계약했다. 소설은 영주권에 저당 잡힌 상태로 현재에 이른 둘의 관계를 한때 ‘황금’에 혈안이 된 사람들에게 주목받았으나 지금은 폐광이 된 1800년대의 금광과 오버랩한다. 결혼 7주년 기념으로 금광 투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서인과 진우가 탄 승용차는 캥거루를 들이받은 채 붉은 노을 속으로 불길하게 빨려 들어간다.
비자나 영주권을 획득하기 위해 이성애 커플이 운명 공동체로 묶여 일사불란하게 역할을 수행하는 서사는 해외 이민 상담 관련 사이트에서 흔하게 발견된다. 앞서 살핀 황정미의 연구에서는 한국인 남성과의 가족구성을 목적으로 실행되는 ‘결혼 이주’라는 특성상 이민을 감행한 여성이 ‘의존자’의 성격을 띠게 된다고 분석했지만, 한국에서 타국으로의 이민을 기획하는 이성애 커플의 대부분은 남성이 경제적 부양을 맡고 여성이 언어능력을 요하는 비자를 신청하는 식으로 성 역할을 분담해 수행한다.
무엇보다, 적지 않은 액수의 통장 잔고와 지속적인 파트너십 관계의 증명을 요하는 호주의 영주권 체제는 결국 근면 성실한 노동자를 배양하고 모노가미 형태의 ‘장기적이고 영속적이며 기록 가능한’ 친밀한 관계에 특권을 부여하는 통치 장치다. 소수자는 이성애 중심적인 가족 규범을 강제하는 한국의 시민권 체제로부터 이탈하기 위해 초국적 시민권을 모색하지만, 결국 그 과정에서도 비규범적·비순응적인 성적 주체와 친밀한 관계들은 가부장적 자본주의 국가가 주조한 정상성의 각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남은 문제들
지금까지 살펴본 서수진의 해외 이민 서사들은 남성중심적·이성애규범적인 한국사회에서 강등된 사회적 지위로부터 이탈하고자 하는 소수자의 ‘시민-되기’ 전략을 재현한다. 이 소설들이 드러내는 것은 교육과 노동, 거주와 이민 등 초국적 시민권 획득을 도모하기 위한 대부분의 실천들이 해당 사회의 지배적 젠더 규범 및 성역할 각본과의 협상을 요한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 소설들은 자기 계발을 통해 유연한 시민권 획득을 꾀하는 개인 또한 자신이 속해온 사회의 성적·인종적 규범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점도 명백하게 드러낸다. 그의 소설에서 해외 이민이 ‘이등시민’이라는 지위에서 벗어나기 위한 탈출구가 아니라, ‘이등시민’이라는 지위를 만들어내는 지배 원리에 대한 치밀한 탐구로 읽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리하여 주목되는 것은 해외 이민을 통해 소수자 시민권의 획득을 도모하는 기획을 의심하거나 이에 대해 유보적인 입장을 표하는 사례들이다. 최근 해외 이민의 상상력을 제기하는 몇몇 서사들은 소수자의 해외 이민을 미완의 과업으로 남겨두거나 파국으로 귀결시킨다. 예컨대 서장원의 「이륙」(2020)24)은 미국 올랜도를 여행하다가 “엄마, 난 여기 남고 싶어요.”(「이륙」, 92쪽)라고 들뜬 목소리로 결심을 전한 게이 아들이 그곳의 게이 클럽에서 벌어진 게이 혐오 총격 사건으로 인해 싸늘한 유골이 되어 귀국하는 장면을 의미심장하게 배치했다.
게다가 ‘국경 봉쇄’라는 초유의 사태를 촉발시킨 팬데믹은 해외 이주를 통해 “여기보다 친절한 세계”(서장원, 「프랑스 영화처럼」(2020), 다산책방, 2021, 80쪽)의 시민으로 편입되려는 꿈이 얼마나 취약한 것인지를 직시하게 만들었다. 서장원의 「프랑스 영화처럼」에서 마치 발에 아주 작은 가시가 박힌 것처럼 한국사회에서 미세한 차별과 고통을 지속적으로 겪던 FTM 게이 커플은 프랑스로의 이주를 결심한다. 그러나 팬데믹의 도래와 함께 해외 이주 기획은 좌절됐고, 집에 틀어박힌 둘은 프랑스에서 일어나는 각종 혐오 사건들에 관한 보도를 하릴없이 지켜본다. 그런가 하면, 장희원의 「give me a hand」(2020)25)는 뉴욕에서 “낙관과 희망”(「hand」, 131쪽)의 시간을 보내던 아들이 자해를 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체포된 채 인종차별을 경험하는 시간을 소묘한다. 아들을 면회하기 위해 미국에 입국한 ‘그녀’는 팬데믹을 계기로 동양인에게 노골적인 혐오의 시선을 던지는 행인들의 모습과 조지 플로이드 추모 시위가 벌어지는 거리의 풍경을 교차시키며 아들이 “이곳에 마음을 둘 수 있었을까. 애초에 그런 세계가 있긴 한 걸까.”(「hand」, 132쪽)라고 회의한다.
하지만 팬데믹의 경험이 제공한 예외적인 성찰과는 별도로, 초국적 시민권의 획득을 통해 젠더 평등 및 성적 시민권을 온전히 향유할 수 있으리라는 소수자의 꿈은 여전히 강력하다. 여행·유학·이민 등의 경험을 통해 소수자 시민권 관련 글로벌 스탠더드를 학습하고 이를 한국의 정치사회적 현안에 적용하는 레토릭은 소수자 정치의 현장에서 자주 구사된다. 차별금지법이나 동성결혼법의 제정을 당위로 설정한 채 이 법들이 제정되지 않은 한국의 현실을 ‘인권 선진국’에 비해 ‘지체된 미래’로 규정하는 논법이 만연한 것 또한 이와 관련된다.26) 동성결혼법 논의 등에서 나타나는 ‘보편적’ 인권 규범과 한국의 소수자 시민권 담론의 길항 관계에 대해서는 별고를 기한다.
1) 이우창, 「헬조선 담론의 기원―발전론적 서사와 역사의 주체 연구, 1987-2016」, 《사회와철학》 32, 사회와철학연구회, 2016.
2) 장강명, 『한국이 싫어서』, 민음사, 2015. 이하 본문 인용 시 괄호 안에 ‘『싫어서』’라는 약칭과 함께 쪽수만 표기한다.
3) 권영미, 「‘국정원 댓글, 일베, 20대 잉여’ 소재로 문학상 휩쓴 소설가 장강명」, 《뉴스1》, 2015. 7. 23.
4) 엄지혜, 「장강명 “독서는 자기 것, 휘둘리지 말았으면 합니다”」, 《채널예스》, 2015. 8. 24.
5) 노년 독신여성의 형상이 노년혐오와 빈곤혐오를 체화한 신자유주의적 페미니즘의 주된 화소로 부상한 배경에 대해서는 권명아의 『무한히 정치적인 외로움—한국사회의 정동을 묻다』(갈무리, 2012) 35~78쪽 참조.
6) 2021~2022년 기준, 한국은 OECE 가입국 중 성별 임금 격차가 가장 큰 국가 1위로 꼽힌다. 이수진, 「“성별임금격차, 구조적 성불평등 명백한 예시··· ESG 연계 공시해야”」, 《여성신문》, 2023. 11. 25.
7) 최현, 「탈근대적 시민권 제도와 초국민적 정치공동체의 모색」, 《경제와사회》 79, 비판사회학회, 2008, 49쪽.
8) Chang Kyung-Sup, “Developmental Citizenship in Perspective: the South Korean Case and Beyond”, in Chang Kyung-Sup and Bryan S. Turner eds., Contested Citizenship in East Asia: Developmental Politics, National Unity, and Globalization, New York: Routledge, 2012, pp. 182~202. 한우리의 「퀴어는 항상 급진적인가―퀴어리버럴리즘과 한국 퀴어시민의 위치성」(《말과활》 12, 일곱번째숲, 2016) 85쪽에서 재인용.
9) Ong. A., “Mutations in Citizenship”, Theory, Culture & Society 23, Sage, 2006, pp. 499~531. 한우리의 위의 글에서 재인용.
10) 한우리, 위의 글, 85~86쪽.
11) 『코리안 티처』의 뒤표지에 적힌 광고문구.
12) 서수진, 『코리안 티처』, 한겨레출판, 2020. 이하 본문 인용 시 괄호 안에 ‘『티처』’라는 약칭과 함께 쪽수만 표기한다.
13) ‘페미니즘 리부트’를 ‘배운 여자’들의 정치적 각성으로부터 촉발된 사건으로 분석한 연구로는 류진희, 「“촛불소녀”에서 “메갈리안”까지, 2000년대 여성혐오와 인종화를 둘러싸고」, 《사이》 19, 국제한국문학문화학회, 2015.
14) 외국인 학생들의 인권을 유린하며 이윤을 추구하는 신자유주의적 대학체제하 한국어학당의 운영에 대해서는 이준희, 「행선지 속인 채 공항으로··· 유학생들 ‘납치’ 출국시킨 한신대」, 《한겨레》, 2023. 12. 14; 김민제, 「한신대는 왜 유학생 강제출국을 밀어붙였을까」, 《한겨레》, 2023. 12. 22.
15) 이는 실제로 한국어학당 등록을 통해 어학연수 비자를 취득한 학생들의 불법 취업 및 대규모 잠적 사태를 상기시키는 설정이기도 하다. 이정하, 「인천대 베트남 어학 연수생 164명 잠적」, 《한겨레》, 2019. 12. 11; 주영민, 「“1년간 712명”··· ‘불법체류 외국인 양성소’ 된 인천대」, 《노컷뉴스》, 2020. 10. 22.
16)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양산하는 국가와 자본의 논리에 관해서는 김현미, 『우리는 모두 집을 떠난다—한국에서 이주자로 살아가기』, 돌베개, 2014.
17) 오카 마리, 이재봉·사이키 가쓰히로 옮김, 『그녀의 진정한 이름은 무엇인가』(2000), 현암사, 2016, 17쪽.
18) 서수진, 『유진과 데이브』, 현대문학, 2022. 이하 본문 인용 시 괄호 안에 ‘『유진』’이라는 약칭과 함께 쪽수만 표기한다.
19) 캐롤 페이트먼, 유영근·이충훈 옮김, 『남과 여, 은폐된 성적 계약』(1988), 이후, 2001.
20) 린 헌트, 조한욱 옮김, 『프랑스 혁명의 가족 로망스』(1992), 새물결, 1999.
21) 샹탈 무페, 이보경 옮김, 『정치적인 것의 귀환』(1993), 후마니타스, 2007; 아이리스 매리언 영, 김도균·조국 옮김, 『차이의 정치와 정의』(1990), 모티브북, 2017.
22) 문현아, 「시민/시민권」, 《여/성이론》 5, 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01.
23) 황정미, 「초국적 이주와 여성의 시민권에 관한 새로운 쟁점들」, 《한국여성학》 27-4, 한국여성학회, 2011.
24) 서장원, 「이륙」, 『스마트소설』 1, 문학나무, 2020. 이하 본문 인용시 괄호 안에 쪽수만 표기한다.
25) 장희원, 「Give me a hand」(2020), 『우리의 환대』, 문학과지성사, 2022. 이하 본문 인용시 괄호 안에 ‘「hand」’라는 약칭과 함께 쪽수만 표기한다.
26) 2010년대 이후 한국 퀴어문학(장)에서 제출된 동성결혼의 상상력에 관해서는 오혜진, 「포스트페미니즘 시대 한국 여성문학·퀴어문학 연구―2010년대 이후 시민권 담론과 소수자정치」(성균관대 박사논문, 202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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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 2025-01-01
시간의 재생, 재생 없는 공간 - 『사랑의 꿈』과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을 함께 읽기1) 이성민 1. 프레드릭 제임슨은 포스트 모더니티를 역사 속에서의 위치 상실로, 그러니까 “역사적으로 사유하는 방법을 망각해 버린 시대”2)의 지배적 징후로 언급한 바 있다. 이것은 달리 말해 어떤 근본적인 단절이 우리 시대와 그 이전 사이에 놓여 있으며, 따라서 이전과 같은 역사적 방식으로는 우리가 어떤 시공간 속에 위치하는지 파악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제임슨의 어법을 따르자면 포스트모던 감각은 크게 세 가지 형식으로 표출되는데, 이를테면 깊이의 상실과 역사성의 쇠퇴 및 그로부터 비롯되는 시간예술의 통일성 와해가 이에 해당된다. 더 나아가 그는 이 시간성의 와해 이후의 예술, 즉 공간성이 점점 더 지배적인 문화 논리가 되는 예술 형식을 포스트모던 건축으로부터 읽어 내고 있다.3) 포스트모던의 하이퍼스페이스는 우리로 하여금 공간 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느낌을, 완전히 균질해져 버린 탈역사의 공간 내부를 영속적으로 떠도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한다. 우리는 이제 방향감각과 목적(telos)을 상실한 채 무한한 패스티시만이 잔존하는 세계를 살아가는 것 같다. 상술한 시대감각을 하나의 전제로서 미리 염두에 둘 때, 자연스럽게 새로운 질문이 우리 앞에 출현한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4) 물론 각 개인은 위도와 경도로 이루어진 하나의 좌표 위를 점유하고 있다. 시간적으로는 월가 점령 이후의 ‘신냉전’ 시대 어딘가를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질문하는 위치는 그러한 3인칭 좌표의 개념이 아니다. 우주에서 내려다보는 하나의 점에 대한 것이 아니다. 질문은 이렇게 바뀌어도 좋을 것이다. 실존의 1인칭 관점에서 올바르게 보았을 때, 나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스스로의 삶이 속해 있는 1인칭 좌표를 사후적으로 재구성하려 할 때, 그런 시도는 곧바로 난관에 봉착하며 미궁으로 좌초되고 만다. 나를 살게 하는 것들과 내 행위 역량을 감소시키는 것들의 연쇄는 너무나 촘촘하게 얽혀 있는데, 바다 건너편에서 발생한 가뭄이 선물시장의 원두 가격 상승으로, 그리고 더 나아가 거미줄처럼 얽힌 시장-신의 불가해한 변화로 이어지는 세계에서 연기(緣起)는 축자적인 진실이기 때문이다. 내 위치, 내가 나아가는 하나의 화살표, 나를 형성하는 기억과 기대의 교차점은 지구 전체와의 공동 실존 위에 놓여 있다. 그런데 지구를 실존의 토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가능할까? 우리가 지구 위에서 어디에 서 있는지를 감히 사유한다는 것은 가능할까? 이미 말했듯 올바르게 본다는 것의 문제는 전혀 단순하지 않다. 나 자신의 실존, 나의 시공간이 속하지 않는 담론의 역사, 실존과 담론 바깥에 있는 실재적인 것의 작용을 함께 사유할 때 우리는 올바른 방향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실존-담론-실재의 이음새를 엮는 것은 우리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처럼 느껴지고, 나를 살게 하는 무한한 연쇄의 무게 앞에서 사유는 한없이 무기력해
- 관리자
- 2025-01-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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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차이 인정마저 계서화되는 세태에 대한 날카로운 비평이 담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