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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재생, 재생 없는 공간

  • 작성일 2025-01-01
  • 조회수 385

   시간의 재생, 재생 없는 공간

     - 『사랑의 꿈』과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을 함께 읽기1)


이성민


   1.


   프레드릭 제임슨은 포스트 모더니티를 역사 속에서의 위치 상실로, 그러니까 “역사적으로 사유하는 방법을 망각해 버린 시대”2)의 지배적 징후로 언급한 바 있다. 이것은 달리 말해 어떤 근본적인 단절이 우리 시대와 그 이전 사이에 놓여 있으며, 따라서 이전과 같은 역사적 방식으로는 우리가 어떤 시공간 속에 위치하는지 파악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제임슨의 어법을 따르자면 포스트모던 감각은 크게 세 가지 형식으로 표출되는데, 이를테면 깊이의 상실과 역사성의 쇠퇴 및 그로부터 비롯되는 시간예술의 통일성 와해가 이에 해당된다. 더 나아가 그는 이 시간성의 와해 이후의 예술, 즉 공간성이 점점 더 지배적인 문화 논리가 되는 예술 형식을 포스트모던 건축으로부터 읽어 내고 있다.3) 포스트모던의 하이퍼스페이스는 우리로 하여금 공간 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느낌을, 완전히 균질해져 버린 탈역사의 공간 내부를 영속적으로 떠도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한다. 우리는 이제 방향감각과 목적(telos)을 상실한 채 무한한 패스티시만이 잔존하는 세계를 살아가는 것 같다.

   상술한 시대감각을 하나의 전제로서 미리 염두에 둘 때, 자연스럽게 새로운 질문이 우리 앞에 출현한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4) 물론 각 개인은 위도와 경도로 이루어진 하나의 좌표 위를 점유하고 있다. 시간적으로는 월가 점령 이후의 ‘신냉전’ 시대 어딘가를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질문하는 위치는 그러한 3인칭 좌표의 개념이 아니다. 우주에서 내려다보는 하나의 점에 대한 것이 아니다. 질문은 이렇게 바뀌어도 좋을 것이다. 실존의 1인칭 관점에서 올바르게 보았을 때, 나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스스로의 삶이 속해 있는 1인칭 좌표를 사후적으로 재구성하려 할 때, 그런 시도는 곧바로 난관에 봉착하며 미궁으로 좌초되고 만다. 나를 살게 하는 것들과 내 행위 역량을 감소시키는 것들의 연쇄는 너무나 촘촘하게 얽혀 있는데, 바다 건너편에서 발생한 가뭄이 선물시장의 원두 가격 상승으로, 그리고 더 나아가 거미줄처럼 얽힌 시장-신의 불가해한 변화로 이어지는 세계에서 연기(緣起)는 축자적인 진실이기 때문이다. 내 위치, 내가 나아가는 하나의 화살표, 나를 형성하는 기억과 기대의 교차점은 지구 전체와의 공동 실존 위에 놓여 있다.

   그런데 지구를 실존의 토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가능할까? 우리가 지구 위에서 어디에 서 있는지를 감히 사유한다는 것은 가능할까? 이미 말했듯 올바르게 본다는 것의 문제는 전혀 단순하지 않다. 나 자신의 실존, 나의 시공간이 속하지 않는 담론의 역사, 실존과 담론 바깥에 있는 실재적인 것의 작용을 함께 사유할 때 우리는 올바른 방향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실존-담론-실재의 이음새를 엮는 것은 우리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처럼 느껴지고, 나를 살게 하는 무한한 연쇄의 무게 앞에서 사유는 한없이 무기력해진다. 오늘날 위치를 묻는 것은 정언적이라기보다는 역설적인 희망의 노력이 되어 있다. 우리가 길을 잃어버렸음을 완전히 인정하고 패배하는 것보다는, 무엇이든 붙잡을 수 있는 표지를 붙잡는 쪽이 낫다는 희망. 오래전 인도의 교사들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바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인간이 무위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글에서는 물론 소설이란 매개체를 통해 위치를 질문할 것인데, 다소간 이항 대립적이고 도식적인 구분을 도입하는 것을 용서해 주길 바란다. 크게 두 차원으로 나눠서 생각해 볼 때, 우리는 포스트모던의 단속성을 인정하거나 인정하지 않을 수 있다. 일단 포스트모던이 근대-단속적이라고 가정하게 되면, 모더니즘의 유산으로부터 우리의 좌표를 파악하려는 시도는 단순한 허위가 될 것이다. 반대로 근대-연속적인 시도, 즉 포스트모던의 문화적 지배력을 거부하거나 우회하려는 시도 역시 가능하다. 시도자는 물론 모더니즘의 이상이 포스트 모더니티 속에서 시대착오로 전락하지 않을 방법론을 고민해야만 할 것이다.

   나는 손보미의 작품집 『사랑의 꿈』을 전형적인 근대-연속성의 시도로, 다시 말해 모더니즘의 미학적 유산을 포스트 모더니티 속에서 간직하려는 시도로 읽어 낼 것이다. 그의 작품집에서는 여전히 모더니즘의 여러 계기들이, 희극적 아이러니의 거리로부터 시간의 반복과 재생에 이르는 다양한 계기들이 나타나고 있다. 반대로 김기태의 작품집인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은 시간성의 구원이 파괴된 이후를 다룬다. 내가 주로 해명하고자 하는 부분은 김기태가 포스트모던의 하이퍼스페이스를 소설 속에서 구현하는 작가라는 것, 그러므로 그의 작품은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시간적이라기보다는 공간적이라는 것이다. 이는 그가 구사하는 작법의 독특한 가벼움으로부터 비롯되는 속성인데, 작법상의 가벼움이 형성하는 미학적 효과와 감각에 대해서는 아래에 다시 쓰고자 한다.



   2.


   『사랑의 꿈』. 리스트의 유명한 야상곡(<사랑의 꿈>; Liebesträume)에서 표제작을 따온 이 작품집은 우선 독자를 당황시킨다. 작품집에 포함된 단편들은 노골적일 정도로 고딕 로맨스의 문법을 따라가는데, 어쩌면 십대 소녀를 주인공으로 삼는 일종의 성장소설이기에 그럴지도 모른다. 작가가 주로 활용하는 고딕 문법은 비밀과 금기, 가족관계의 갑작스러운 변동, ‘미친 여자’의 존재(「밤이 지나가면」), 유년의 몸에 비하면 지나치게 큰 ‘저택’(「해변의 피크닉」), ‘정혼자’가 있던 남편(「사랑의 꿈」)이나 속물 세계를 향한 경멸-욕망 등으로, 독자들은 동시대의 대한민국보다는 헨리 제임스의 유령 저택이나 하다못해 프루스트의 사교계를 떠올리게 될 것 같다(물론 『다섯째 아이』와 같은 보다 동시대적인 영미 소설을 떠올릴 수도 있다). 인터넷 리뷰란에 달린 어떤 감상에서는 내용이 “실제 같지가 않다”거나 “글 속 모든 인물들이 소설 속 사람 같다”는 반응이 등장하는데, 아무래도 이는 소설이 형성하는 미묘한 고전적 분위기가 동시대 독자에게는 낯섦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일 것이다. 확실히 단편들의 기법은 통상적인 관점에서 전혀 ‘리얼’하지 않으며, 어떤 의미로는 모더니즘 시대의 속물 세계를 그대로 재현해 내고 있다.

   여기서 속물 세계의 재현이란 단순히 고딕 로맨스의 문법만을 재활용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보다 훨씬 더 심층적인 차원에서 단편들의 진행은 근대적인 기법을 따르고 있다. 예컨대 이미 언급해 둔 희극적 아이러니의 거리가 주요하게 쓰이는데, 주인공들은 그가 박탈당해 있는 속물 세계를 강렬하게 경멸하면서도 동시에 욕망하며, 그렇기 때문에 세계에 대한 그들의 비웃음은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간다. 「해변의 피크닉」에서 주인공이 자신의 할머니에게 사랑을 느끼는 장면, 그러니까 가식과 위선의 세계를 꿋꿋하게 살아 내는 권력 게임의 주체에게 이끌리는 장면은 어떤가? 그는 속물 세계의 부질없음을 시험하려 하지만 결국에는 그것을 욕망하고, 그 욕망으로부터 배제된 자기 자신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며, ‘계몽된’ 주체들이 이성적인 전쟁을 벌이는 공간에 일원으로 포함되고 싶어 한다. 그리고 권력-지식이 금지하는 낯선 것들 -외설적인 단어들- 과 접촉한 뒤, 그에 대한 반복 강박처럼 자신의 공책 위에 단어를 수집해 나간다. 금기에 대한 이런 집착은 단편에 따라 “중학생 오빠들”과 노는 아이를 향한 욕망으로(「불장난」), 혹은 이미 ‘어른’의 세계에 속한 존재에 대한 애정으로 변주되고 있다. 주인공들은 순수하거나 무결한 존재라기보다는 계몽된 세계의 규칙을 예민하게 감지하는 아이로, 그리고 지식을 획득함으로써 권력의 주체가 되고 싶어 하는 아이로 그려진다.

   그런데 손보미의 소설 속에서는 계몽된 주체 역시 자기 지양의 대상으로 물러난다. 서술자는 이따금 “모든 힘을 다해 진실되게 쓰려고 노력 중”(「해변의 피크닉」, pp. 204~205)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자기 서술의 진실성을 문제 삼는 행위 그 자체가 바로 서술자를 믿을 수 없는 화자로 만든다. 진실과 탈진실 사이에서는 진자 운동이 발생하며, 작품의 분위기 역시 상승과 하강의 곡선을 반복한다. 「사랑의 꿈」에서 안락한 교사들의 속물 세계로부터 거친 외부 세계로 이동하는 것, 그리고 곧바로 매장이라는 상징적 사건에 -단념과 애도, 죽음과 재생이 공존하는 사건에- 맞닥뜨리는 것이 대표적이다. 본 지면에서 세부 사항을 다 언급할 수 없을 만큼 단편들은 첨예한 구성적 운동을 구현하는데, 금기와 위반 사이, 진실과 거짓 사이, 권력에 대한 열망과 냉소 사이에는 빠르고도 격렬한 전환이 존재한다. 「첫사랑」에서 ‘어른’인 과외 선생에게 느낀 사랑이 불타올랐다가, 그에 대한 사랑을 하나의 낭만적 거짓으로 받아들인 뒤에도, 여전히 거짓에 몰두하며 잔존하는 열망을 붙잡으려 애쓰는 부분처럼 말이다. 이런 계기들 간의 상호 연관과 적대, 어떤 의미로는 시시콜콜하고 거의 불필요해 보이기까지 하는 적대는 그러나 소설의 전체적인 깊이를 형성한다. 이토록 지독하게 순간들을 의심하고 불태우는 한에서만, 그 순간들은 어둠으로부터 별자리를 이룰 것이다.

   별자리, 『사랑의 꿈』이 근대적인 작품집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모두 그것 때문이다. “현실의 시간, 죽음과 망각에 의한 죽음을 만들어 내는 저 무시무시한 신 몰렉”5)으로부터 시간을 구해 내는 것. 반복 속에서 재생을 찾는 것. 단편들의 끝에 가서 무심하게 지나쳐간 순간이 -“자질구레한 일”(「밤이 지나면」, p. 60)이 -재호명될 때, 그때 시간은 재생에 의해서 비로소 온전한 의미를 드러낸다. 부분이 전체 속에서 되살아남에 따라 전체 역시 부분으로부터 부활한다. 과거를 현재화하거나 현재로부터 과거를 돌아보는 대신, 오로지 일회적이고 메시아적인 순간과의 관계 속에 부분의 의미가 나타난다. 이렇게 나타나는 한순간의 의미, 어떤 의미로는 영원의 잔상이라 불러야만 할 순간의 의미는 당연하게도 긍정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인간의 한계 아래서 어떻게 우리가 한순간의 고유하고도 온전한 의미를, 그러니까 순간으로부터 펼쳐지는 과거와 미래의 모든 것을 구제할 수 있단 말인가? 지상 세계의 어휘에는 천국을 묘사할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영원의 잔상은 직접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구성을 통해 표현될 수 있을 따름이다. 「사랑의 꿈」에서 서술자가 끝내 우연에 대한 의심을 저버리진 못하듯이- 우리의 말은 간접적으로만 우연을 제거할 수 있다.

   여기까지의 논의를 향해 누군가는 의문을 표할지도 모르겠다. 과연 시간과 재생이라는 한정된 테마하에 손보미를 읽는 것이 온당한지. 하지만 애초에 전제한 도식은 일단 끝까지 밀고 나가보자. 그렇다면 그의 단편들은 전적으로 시간적이며 공간적이진 않다는 뜻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답하고 싶다. 『사랑의 꿈』은 시간예술이면서 동시에 공간적인 예술이기도 한데, 그것은 시간의 반복을 통한 재생이 예술의 공간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구성에 의해서 건축되는 이 공간은 사실적인 소재들로부터 비롯하되 소재 세계로부터의 자율성을 획득한다. 예술이 소재를 넘어선다는 것 혹은 소재에게서 단절된다는 것은, 예술의 원형적인(circular) 형상, 다시 말해 계기들 간의 긴장이 형성하는 시작도 끝도 없는 공간을 지시한다. 이 공간은 조감상의 좌표를 지정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운동의 과정 속에 나를 위치시킨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때 모더니즘 소설은 바로 예술의 시간과 공간을, 내게서 비롯하지만 나의 바깥에 위치하는 시공간을 답으로 제시한다.

   그럼 첫 번째 장에서 제시했던 동시대 소설가의 의무를 잠깐 다시 묻겠다. 첫 장에서는 결국 이러한 시간성의 예술이 동시대적 설득력을 획득해야만 한다고 이야기했다. 즉 예술의 시공간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소재 세계의 바깥이라면, 도대체 아름다운 것의 구원이란 단순한 현실도피 이외에 무엇인가, 하는 의문에 답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사랑의 꿈』은 그에 대해서 바로 신체성이라는 대답을, 1인칭의 관점과 신체-내-존재라는 대답을 제시한다. 작품집의 첫 단편인 「밤이 지나면」에서 신체성이란 문제는 아주 명확한 비유로 다루어지는데, 낮과 밤 - 그리고 이곳과 저곳이란 비유가 그것이다. “지구 반대편의 사람들은 지금 환한 햇빛 아래에서 점심도 먹고 공원에서 산책도 하고 있어. 곧이어 내 머릿속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죽거리는 목소리로. 근데 그게 무슨 소용이니. 너는 거기가 아니라 여기에 있는데.”(「밤이 지나면」, pp. 51~52) 나는 물론 나 자신의 신체적 현존을 넘어서서 상상할 수 있다. 밤의 어둠 속에 있는 나와 달리 정오의 세계에 속해 있는 사람들의 삶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내 신체라는 한계 내에 존재하며, 다른 어디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 “앞으로 상상도 하지 못한 그런 삶을 살게 될”(「밤이 지나면」, p. 56)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능성으로만 간직되어 있는 것이다.

   작품집 『사랑의 꿈』에서는 요컨대, 신체성과 신체성을 넘어서는 것 사이에서의 긴장 역시 주요한 계기로 작동한다. 예술의 시공간이 바깥으로 향하는 움직임을 만들어낼 때, 그와 동시에 나의 신체성이 중심의 점으로 운동을 응축시킨다. 나는 내 신체 안에, 바로 지금 여기에, 그러나 동시에 예술의 시공간 속에 있다. 이렇게 구해지는 답변은 결코 ‘나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온전한 답이 아니다. 오히려 내 신체의 한계를 인정하는 길, 그럼으로써 내 실존의 좌표 앞에 놓인 것과 뒤에 놓인 것들을 헤아리는 길이라고 보아야만 한다. 불가능함을 인정하는 한에서도 기억과 기대의 교차점을 꾹 붙들고자 노력하는 것. “진정한 초능력”(「사랑의 꿈」, p. 185)을 얻기 위해, 내 과거와 미래의 온전한 의미를 획득하기 위해 애쓰지만, 동시에 우연을 폐지하지 않으며 바깥의 가능성을 꾸준히 인식하는 것. 이것이 근대-연속성의 유산으로부터 우리가 이끌어 낼 수 있는 동시대적 답변이다.



   3.


   하지만, 으로 새로운 장을 여는 것을 용서해 주길 바란다. 2장에서 나는 근대-연속적 미학이 가능하다는 가정하에 손보미의 작품들을 해석했다. 하지만 김기태의 텍스트를 읽는 일에 있어서는 전혀 다른 관점이 도입되어야만 할 것 같다. 이 관점은 요컨대 우리 동시대가 “공간의 범주에 의해 지배”6)되고 있다는 가정, 그러므로 시간성의 재생이나 계기들의 상호 연관을 통한 자율성이 불가능해지고 말았다는 가정이다. 혹은 조금 다른 어법을 따라 말하자면 역사가 어떤 형식으로든 완성되고 말았다는 것, 그러므로 모더니스트들에게 고유했던 것으로서의 깊이는 상실되었으며 ‘향수 양식’의 거짓 역사성만이 잔존하는 중이라는 것을 뜻한다. 이 경험적 조건 속에서 모더니즘 시대의 미학적 범주들은 시험대에 오른다. 특히 ‘천체에 의한 영원’, 별자리, 예술의 자율성과 같은 개념들은 그 자체로 의심스러운 것이 되어 있다. 차이와 반복이 형성하는 예술의 공간을 한 번에 지각한다는 것, 단자들을 이미 예정된 조화 속에서 파악한다는 것은 우리 시대의 감상자들에게 가능한가? 이에 대해 부정적인 답을 내놓아야만 한다면, 그렇다면 순간은 파편화되고 고립된 채 창문 없는 단자들로 전락할 것이다. 우리 시간은 애초부터 파괴에 내맡겨져 있으며, 현재는 오로지 죽음으로 향하는 고립된 시간 속의 한 점이 된다.

   이상의 가정을 선험적인 조건으로 받아들인 채 텍스트를 읽어나가 보자. 1장에서 나는 이미 김기태가 구사하는 작법의 특수성이 특유의 공간 감각을 형성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 지점에서는 그럼 그 작법상의 원리를 조금 더 상세히 분석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게 좋겠다. 우리가 김기태의 단편들을 하나하나 독해해 나가길 시도할 때, 가장 먼저 받게 되는 인상 중 하나는 작품의 길이와 양식 사이에 커다란 불일치가 놓여 있다는 것이다. 그가 서술하고자 하는 체험은 기술적인(deive) 모더니스트들에게서 드물지 않게 나타났던 것, 그러니까 삶의 시간적인 파노라마를 소설 속에 구현해 내는 것에 해당한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바로 이 기술적인 모더니즘 소설, 속물 세계에 대한 희극적 아이러니를 동반하는 시간-파노라마의 대표격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이러한 파노라마는 장편소설을 통해서만 온전히 구현될 수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고, 삶의 자질구레한 각론이 단편화될 때 별자리의 반짝거림은 잿더미에 파묻히고 말았다. 본질적인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을 불태워 버리려 하면 아이러니하게도 본질 그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다. 여기서 김기태의 소설은 본질을, 그러니까 본질적인 것과 자질구레한 것 사이에 놓여 있는 긴장 그 자체를 노골적으로 제거하고자 한다. 밀도감이라고 표현해도 좋고 디테일이라 표현해도 좋을 텐데, 그의 작법은 삶의 매 순간 사이에 놓여 있는 고유성을 뚜렷한 의도하에 뭉개 둔다. 삶의 순간들은 고립화된 단자들로 묘사되며, 어떤 전체 속에서 빛난다기보다는 똑같은 밀도와 균질한 감각의 공간 속을 표류한다.

   이 작법이 가장 명백하게 표현되는 것은 단편 「전조등」에서다. 「전조등」은 단편치고도 짧은 분량 속에 놀랍게도 한 속물 계급 남성의 삶을 그대로 압축해 놓는다. 탄생으로부터 취업과 연애, 그리고 결혼과 출산에 이르는 전 과정을 말이다. 단편 속으로 쪼개어지고 분절된 삶의 파노라마는 정동의 폭발 없는 극도의 건조함을, 오로지 유용성이라는 하나의 척도로 환원되는 부르주아의 세계 감각을 형성한다. 여기에는 희극적 아이러니의 거리도, 내면성의 뚜렷한 표현이나 절규도, 순간을 파멸 속에서 구원해 내고자 하는 회억도 없다. 균질적인 밀도감에서 우리는 숨 막힘만을 느낄 수 있는데, 그러나 이 숨 막힘은 고딕 소설 작가들에게서와 같은 무거운 숨 막힘이 아니다. 소설의 깊이 없음과 균질성은 우리를 짓누르기보다는 반대로 모든 무거운 것들을 날려 버리는 데서 기인한다. 실존, 본질, 세계성, 그 밖의 기타 근대적인 개념들은 소설 속에서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한 점의 물질성-신체성이 나를 압도하는 순간들, “단순하고 명료”(「전조등」, p. 107)한 지금 이 순간의 행위들뿐이다. 피상적이고, 파편화되어 있고, 본질 위에서 사유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럼에도 더없이 생생한 지금 여기에서의 순간들.

   모더니즘의 미학적 이상이 파괴된 이후, 우리가 그 잔해로부터 건져 낼 수 있는 것은 결국 위치 없는 현존이다. (제임슨의 공간 이론을 따라 말하자면) “웰스 파고 센터의 거대하고 독립적으로 서 있는 벽”7)이 갑자기 우리 앞에 나타날 때, 그것은 깊이감도 없고 방향성도 없으며 위아래를 논의하는 것조차 무의미한 단지 하나의 벽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가 선 자리에서 사방을 둘러보더라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거리 위에는 우리의 진실된 위치를 파악하게 해 주는 기물이 전혀 없으며, 있는 것이라곤 오로지 표면만을 미끄러질 뿐인 숫자들, 그러니까 주식시장의 차트니 무위험 이자율이니 하는 여러 가지 지표들뿐이다. 물론 그런 지표들은 제각기 의미를 지니며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그것이 도대체 개인 각자의 위치에 대해서는 무엇을 말해 준단 말인가? 숫자들은 오로지 표면과 표면을 미끄러지며, 따라서 세계에 잔존하는 것은 세이렌의 노래를 ‘안전하게’ 즐기려는 오디세우스의 비겁함, 유토피아의 희구 없는 계산과 실증주의의 쇠 우리뿐이다. 우리는 너무 많은 수에 대해 알고 있으며 이미 계몽되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길을 잃어버렸다.

   동시대적인 상실의 감각, 길을 잃어버린 감각은 저마다의 단편에서 서로 다르게 표현되고 있다. 「세상 모든 바다」에서는 ESG를 콘셉트로 내세운 아이돌 그룹이 등장하는데, 콘서트와 굿즈에 낭비되는 막대한 자원 역시 어렴풋하게 암시된다는 것이 흥미롭다. 그룹 ‘세상 모든 바다’를 통해 주인공은 공동 실존의 감각을 어느 정도 느끼는 데 성공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상업주의의 토양 아래 파묻혀 있으며 결과적으론 허위가 될 뿐이다. 혁명, 총체성, 지금과는 다를 가능성에 대한 희망 역시 모더니즘 시대의 메시아적 순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표현된다. 그것은 단순한 인터넷 밈으로 소비되거나(「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혹은 저항의 담론 그 자체를 문화 자본으로 전락시킨 채 소모한다(「보편 교양」). 이 숨 막히는 세계 속에서 지표가 되어 주는 기준은 오로지 하나뿐인 것 같다. 대상이 나를 살게 하는 데 더 적합한가 혹은 적합하지 않은가. 김기태의 소설들은 스피노자적인 지옥의 상을 묘사하는데, 그러나 그 지옥은 앞서 언급했듯 전혀 무겁지 않고 오히려 아주 산뜻한 방식으로 숨을 막는다. 내가 매 순간 더 낫게 살아야만 한다는 강박은 얼마나 숨 가쁘면서도 즐거운가?

   「팍스 아토미카」야말로 이 지옥의 강박을 가장 시의적절하게 묘사하는 작품일 것이다. '핵에 의한 평화'라는 문구로부터 제목을 따온 이 단편은, 기표들이 무한하게 미끄러지는 반면 목적은 소실되고만 폐허를 다룬다. 소설은 강박증을 앓는 듯한 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우는데, 그는 자신이 앓는 질환에 어울리듯 사소한 행위 하나와 온갖 문구들을 강박적으로 되풀이한다. 거의 무작위해 보이고 고정된 테마를 찾아볼 수 없는 인용들, 위키피디아 페이지와 웹사이트의 하이퍼 링크성, 그리고 실제로 떠났는지조차 불분명한 여행지의 이름들을. 어떤 의미로 이것은 전형적인 반복 강박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그는 자신의 강박을 발생시키는 원인을 사후적으로 재구성해 내는 데 실패한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원인에 접근하는 듯하면서도 결국에는 손쉬운 신경 환원주의로 되돌아갈 뿐이다. 핵에 의한 평화가 지배하는 세계, 그러니까 세계의 불멸성이 영영 사라져 버렸으며 그에 따라 탄생성(natality)에 대한 희망도 사라진 세계에서는(우리는 자살과 비출산이라는 이중의 반-재생산과 마주하고 있다), 어떤 방법론도 지금-여기를 넘어서는 자기동일적인 체험에는 접근해 내지 못한다.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김기태의 소설에는 아무런 희망이 나타나지 않아야만 할 것 같다. 그런데 무언가 특별한 순간이, 표면만을 부유하는 것이 아닌 어떤 섬광이 「팍스 아토미카」의 마지막에는 출현한다. 바로 “내가 만든 나만의 주문”(p. 289)을 찾기로 하는 것, 그 끝에 “나는 활주로 위에 있다”(p. 299)는 주문을 발견하는 것. 곁을 지나가는 어떤 일본인 행인이 한국어로 “과연 그렇네요”(같은 쪽)라는 답을 주는 것. 이 장면이 현실인지 혹은 환상이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방향 없는 공간과는 무언가 다른 것이 마지막에 출현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의 단편 마지막에서 종종 아주 진지하면서도 담담한 에피파니를, 프레드릭 제임슨이라면 아마도 “인식적 지도 그리기(cognitive mapping)”8)라고 평가할 만한 그런 현현을 마주할 수 있다. 요컨대 순간성만이 지배하는 세계에서도 계속 행위하기로 하는 것, 자신의 행위가 무력할 것임을 알면서도 계속 공간을 감각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태도랄지 아니면 제스처랄지 그의 단편들은 마지막 순간의 몸짓을 요란하지 않게 보여 준다. 「로나, 우리의 별」에서 그것은 “세상이 안 변했다”(p. 199)고 할지라도 “우리는 가능하다”(p. 205)고 하는 믿음을 지속하는 방식으로, 또 무엇보다도 「보편 교양」에서는 『자본론』을 직접 읽으려는 노력으로 표현된다. “『자본론』의 서문으로부터 다시 시작”(p. 177)하길 다짐하는 장면에서부터 세 명의 학생이 “떠들고 서로 때리고 쫓기도 하며”(p. 178) 사라지는 모습에 이르는 시퀀스를 볼 때, 어떤 잔잔한 감동이 솟아올라 우릴 감싸안으면서 모든 것이 파탄 나진 않았다는 위안을 준다.

   앞서 다룬 손보미의 소설이 시간의 재생으로부터 예술의 공간을 이끌어 내고 있다면, 반대로 김기태의 것에서는 재생 없는 공간의 마지막 지점으로부터 다른 질감의 시간이 출현한다. 그것은 마치 불가능성으로부터 희미한 빛을 파지하려는 시도, 모든 것이 파탄 나고 말았기에 가장 단순한 곳에서 시작해야만 한다는 선언처럼 느껴진다. 만약에 우리가 시간성의 재생을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한다고 하면, 오로지 김기태가 의도하고 있는 방식의 섬광만이, 공간의 완전한 폐허 속에서 불현듯 출현하는 에피파니만이 우리에게 최소의 시간을 알려줄 것이다. 이 섬광으로부터 우리는 실존과 실재 사이의 간극을 메꿀 방법을, 내 경험적 위치와 현대의 거대 구조 사이에서 지도를 그릴 방법을 고안해 내야만 한다.



   4.


   본고의 논의에서 나는 한 가지 질문에 답하는 두 가지 길을 제시했다. 질문은 ‘나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고전적인 실존주의의 물음이었으며, 첫째 답변은 근대-연속성의 시도로써 모더니즘의 유산을 현재 속에 재전유하는 것이었다. 이 시도에서는 특히 신체성과 영원으로의 이탈 사이에서 벌어지는 긴장이 동시대성을 확보하기 위한 기법이 됐다. 반대로 두 번째 답변은 일단 근대적인 미학의 이상이 불가능해졌음을 인정한 뒤, 그 파탄 속에서 희미한 빛을 다시 찾아내려는 시도에 해당한다. 각각의 범례라 할 수 있는 작품집으로는 『사랑의 꿈』과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을 선택했는데, 물론 나는 이번의 논의가 충분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면의 한계상 각각의 작품집을 성실하게 읽는 일에 한계가 있었으며, 근대-연속과 근대-단속이라는 이분법적 도식의 필요성을 온당히 해명하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나는 이것이 동시대를 감각하는 주요한 두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불사조가 불씨 속에서 되살아나듯 우리의 시간 또한 되살아날 수 있다고 믿는 것. 혹은 예술의 완전한 죽음 이후 그럼에도 우리에게 비치는 빛을 파지하는 것.

   조금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우리 모두는 지금 미로 속에 있다. 20세기의 위대한 역사가 우리에게 약속한 이야기, 거악을 상대로 한 투쟁이나 진정한 선의 성취 따위는 이제 불분명한 목표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동시에 한나 아렌트가 절대악(radical evil)9)이라고 일컬었던 것, 즉 인간적인 악덕으로부터 비롯되지 않기에 새로우며 급진적인 악은 여전히 작동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모든 가치를 파묻어 버리는 영혼 없음의 쇠 우리로부터 비롯하는 악 말이다. 언젠가 로베르트 무질이 그의 소설 속에 언급한 바대로, 현대의 테크노크라트는 선의를 갖고 행동하지만 그들의 선의가 역설적인 악을 만든다. 더 많은 사람을 더 잘 살게 하기 위해 숫자들을 조작할 때, 그 과정에서 잊히고 파괴되는 것은 숫자 아래에 있는 삶이다. 그런데 숫자 아래에 있는 삶이 정말로 숫자보다 중요하기는 한 걸까?

   숫자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하기는 쉽다. 그러나 수치의 표면 아래 무엇이 있는가에 대해 답해야만 할 때, 우리는 곧바로 대안 없는 해체라는 진부한 비난에 직면하고 만다. 그리고 그들 테크노크라트들의 수사가 반드시 거짓된 변론만은 아닐 것이다. 확실히 우리에게는 실존의 ‘올바른’ 위치를 구할 수단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다. 실존과 실재 사이의 거대한 공허를 이을 수 있는 매듭은 끝내 구성 불가능하며, 현대인을 살게 하는 것은 실재의 관점이 제공하는 인구통계에 대한 관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학은 최종 해답을 제시하기보다는 방향 설정을 시작하기 위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 우리가 모더니즘의 이상을 계속해서 유지하려 하든 혹은 그 파탄을 인정하든,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한에서 무언가를 계속 행위할 순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문학은 여전히, 단지 레토릭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나아가는 방향을 알려 줄 수 있는 삶의 스승이다.


1) 손보미, 『사랑의 꿈』, 문학동네, 2023 및 김기태,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문학동네, 2024 참조. 이하 작품명과 페이지만 내주로 표기한다.

2) 프레드릭 제임슨,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자본주의 문화 논리』, 임경규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2, p. 9.

3) 프레드릭 제임슨, 위의 책, pp. 44~113.

4) “나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문제 설정과 ‘올바르게’ 보는 법에 관한 담론은 브뤼노 라투르로부터 빌려 왔다. 브뤼노 라투르, 『나는 어디에 있는가?』, 김예령 옮김, 이음, 2021 참조.

5) 모리스 블랑쇼. 『도래할 책』, 심세광 옮김, 그린비, 2011, p. 29.

6) 프레드릭 제임슨, 앞의 책, p. 62.

7) 프레드릭 제임슨, 앞의 책, p. 56.

8) 프레드릭 제임슨, 앞의 책, p. 123.

9) 한나 아렌트, 「제1판에 대한 서론」, 『전체주의의 기원1』, 이진우·박미애 옮김, 한길사, 2020(전자책: 리디북스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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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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