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밖에서 삶
- 작성일 2025-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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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밖에서 삶
김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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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내가 살고 있는 읍내에 있는 지역특산물 홍보관에 대해 한 지역신문의 기사를 접했다. 2022년 12월 준공된 이 홍보관을 두고 “24억 원짜리” “공중화장실로 전락”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이 기사의 제목은 다소 자극적일지언정, 내가 보고 겪은 그 건물에 대한 감상과 크게 다른 점이 없었다. 이 홍보관은 완공이 된 이후에도 2년이 넘도록 개관을 하지 못했다. 보도 자료에 따르면 홍보관 전망대가 바로 맞은편 아파트의 사생활을 침해할 뿐 아니라 건물의 붉은색이 반사되어 민원이 끊이지 않는 상황이라고 했다. 2025년 1월 초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에도 홍보관 건물은 여전히 주민들에게 별다른 효용이 없는 채로 방치되어 있는 상황이다. 저출산의 현실에서도 이 읍에는 꽤 많은 영유아들이 보인다. 주거 지구치고는 아파트 가격대가 인근 광역시의 학군이 발달해 있는 도심에 비하면 낮게 형성된 편이라 신혼부부 인구와 미취학 아동을 자녀로 둔 부모들이 많이 사는 곳이다. 그러나 근처에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의 도서관이 없다. 시(市)의 경계를 넘어 인근 광역시의 구립 도서관으로 가거나, 대중교통이 아닌 자가용으로 이십 분 정도는 가야 시립 도서관에 갈 수 있다. 몇 년간 무용지물이었던 저 홍보관이 지역특산물을 홍보하는 데 쓰이기보다는 도서관으로 쓰였을 때 이 지역에 더 많은 미래를, 어린이들의 삶에 조금 더 나은 뭔가를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런 생각은 언제나 나이브한 생각이 된다. 행정이 있고 적법한 절차가 있고 최초의 목적이 있어서 준공되었을 저 건물을, 한 개인의 마음으로 바꿀 수 있을까. 최근 일련의 정치 현실을 직·간접적으로 겪으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시민이 시민으로서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만으로 현실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순진한 것임을 보여주는 현실.
이해 바깥의 것들이 버젓이 존재하는 현실.
단적이고 지엽적인 사례 하나를 가져오긴 했으나, 지방의 현실이 고답적인 구조나 형식의 쇄신을 도모하는 것-변화나 혁신을 꿈꾸는 것보다 떠나는 것이 더 편리한 세계임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인구가 줄어드는 소규모의 도시는 청년들의 정착을 위해 지원 사업을 펼친다. 재미있는 것은 일부 지원 사업의 대상이 애초부터 해당 지역에 거주해 왔던 청년들이 아니라, 다른 지역으로부터 유입되는 청년들인 경우가 있다는 사실이다. 지자체는 예술가 레지던스나 청년 창업 자금의 지원 등으로 손실되는 청년 인구를 외부로부터 충당하고 보완하려고 한다. 사람이 아니라 인적 자원을 획득하고자 한다. 그러나 인적 자원으로서만 유의미한 사람들이 과연 소속감을 느끼며 지방에 계속 머물지는 미지수다.
“저런 놈팡이 같은 놈들이 나랏돈을 다 빼먹는다니까.”
“멀끔하게들 생겼는데 어딜 봐서 놈팡이고.” “예술가라잖아. 맨날 놀고먹으면서 예술가랍시고 나랏돈 타 먹는 거다. 먼저 먹는 놈이 임자라느니 눈먼 돈이라느니 어쩌니 해 가면서”
-「마음에 없는 소리」 부분 (김지연, 『마음에 없는 소리』, (문학동네, 2022).)
지방의 공무원인 “승호”가 프로젝트 때문에 서울에서 왔다는 예술가 무리들을 보면서 하는 말에는, ‘잠시 머물고 떠날’ 예술가를 바라보는 현지인의 부정적인 인식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잠깐 프로젝트 때문에” 내려온 그들은 “삼 년 전에 폐교된 곳”에서 전시회를 열 예정이다. 그들에게 지방의 효용은 거주가 아니라 예술가로서의 작업 및 결과물이지만 “승호”는 그 일련의 예술 작업을 위한 지원을 “눈먼 돈”을 “타 먹는” 것으로 치부하고 사회악으로 여긴다. 지방에서 젊은 세대라고 할 수 있는 “승호”의 적대적 태도는 한 개인의 것이라기보다는 지역 사회 일반의 인식을 표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같은 맥락에서 산후조리원이 없다거나 큰 병원이 없어서 인근의 큰 도시로 가야 한다거나 제대로 된 문화생활을 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있지 않다거나 하는 지방 소도시의 문제를 해소할 의지는 지역의 청년 지원 사업에서 잘 보기 힘들다. 지방 행정은 눈에 보이는 하나만 안다. 지방에서의 삶이 청년 세대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여러 각도로 들여다보게 만드는 것은 스스로가 경계에 있다는 인식이다. 보고 들은 것과 살면서 경험한 것 사이에 발생하는 괴리를 통해서, 한 번도 태어난 곳을 떠난 적이 없는 지방의 청년들 또한 얼마든지 경계인이 될 수 있다. 지금은 여기에, 그리고 저기에 ‘나’를 놓아 볼 수 있는 경험의 확장이 가능한 시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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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 소설이 데뷔 초기부터 현재까지 이룩한 성취 중 특기할 만한 점이라면 좌표상의 ‘나’를 놓아두는 과정에서 스스로가 윤리적임을 설득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소설 가운데서도 특히 세태소설의 범주에 들어가는 작품들은 윤리와 규범이 일인칭을 억압하는 기제로서 작동하는 현실을 다룰 때 일반적으로 ‘나’를 ‘현실’ 진단의 한 청진기로 삼아 ‘현실’을 부정적인 것, 혹은 교정해야 할 대상으로 바꾸는 경향이 있다. 그 과정에서 대개 ‘나’는 온전해지고 단단해진다. 김지연 소설은 그러나 ‘나’를 그렇게 온전하고 단단한 내면을 지닌 이로서, 성장의 주체로서 삼는 데에 무심하다. 말이 될 수 없는 감정이 있을 때, “말로는 설명할 수가 없”는 감정이 있을 때 논리적으로 무의미하다 할지라도 “악! 아악! 악”, “아무 뜻 없는 비명을 질”러 버린다. (김지연, 「공원에서」, 『마음에 없는 소리』 p.272) “이게 정상적인 사고방식인가? 타인을 해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정상적인 걸까”, “성추행”을 저지르는 한 생면부지의 남자로부터 촉발된,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있는 폭력 충동에 대한 자기검열까지, 김지연 소설은 헤아릴 수 있는 가장 깊은 내면까지 다 드러내고자 하는 힘으로 위선과 위악을 포함해 모든 ‘위(僞)’를 무화시키고자 한다. 그건 무력해지는 순간을 극복하고 보다 나은 현실로 도모하고자 하는 의지 이전에 ‘말’이 될 수 없는 감정의 존재를 확인하는 작업이다. 그 감정이 우리 현실을 (탈)구조화하는 동력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닐까, 독자와 함께 의심한다. 김지연 소설 속 특정한 성별과 세대의 표본 집단이면서도 일인칭인 이들이 등장하는 주요 무대가 의외로 서울이 아닌 경우가 더러 있다. 물론 항상 주요 무대는 아니며, 「포기」에서 “민재”가 갔다는 “고동”이나 「먼바다 쪽으로」에 등장하는 “남해의 작은 마을에 촌집”의 경우처럼 소극적인 도피처의 형태로 드러나기도 한다. 하지만 “김지연 소설에서 인물들의 중요한 정체성 중 하나는 지방 소도시에 근거를 둔 삼십 대 여성이라는 점”(강지희, 「두 번의 농담과 경이로운 미래」, 『마음에 없는 소리』 p.292)은 이미 첫 소설집의 해설에서도 다루어진 바 있다. 이 해설에서 “하지만 이들에게 고향은 어떤 소속감이나 연결감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라는 진단은 고향에서 느끼는 차별적 시선이나 결혼을 경제적 문제의 해소를 위한 선택지 정도로 생각하는 분위기, 그리고 손쉽게 성희롱에 노출되어도 피해자 쪽에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바라보는 풍토 등을 물적 토대로 확인이 가능하다. 어쩌면 이 ‘고향’에 대해 연결감이나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가 인물 간의 대화나, 여백의 지점에서 드러나는 점을 더 주목하게 된다. 지방이 철저한 객지가 아니라 고향임에도 그곳을 이방(異邦)으로 느끼는 점은 한때 소설 속 인물의 근간을 이루는 곳이었음에도, 현재의 문제의식을 첨예하게 만들어 주는 장소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소설 속 인물들은 여기 “지방 소도시”에 머물러야 하는 현실적인 이유를 갖고 있다. ‘고향’과 여러 지점에서 불화하면서도 자영업을 하거나 일자리를 구하거나 하는 등의 선택을 위해, 김지연 소설은 ‘지방’의 현실 안에 ‘나’를 놓아둔다. “소속감”, “연결감”의 부재를 이유로 고향을 떠날 수 없는 이들이 끊임없이 그 감각을 재확인하면서 발생하는 여러 층위의 마찰을 기록한다. 단지 배경으로만 등장하지는 않는 ‘지방’의 현실에 대해 김지연 소설은 역시 현실의 ‘관성’과 ‘나’의 저항-인식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며, 시선을 가다듬는다.
고향에는 명절 때만 왔는데, 막상 내려와서도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어딜 갈 생각은 못했다. 차례를 지내고 아이들에게 용돈을 좀 쥐여준 뒤 도망치듯 서울로 올라왔다. 힘들고 지칠 때 고향을 찾아가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는 식의 말을 나는 한 번도 믿은 적이 없었다.
-「굴 드라이브」 부분 (김지연, 『마음에 없는 소리』 (문학동네, 2022), p.52.)
“서울 삽니까?”
“네, 서울에 살아요.” “저도 서울 가고 싶어요.” “안 가 봤어요?”
“네, 한국 올 때도 김해로 왔어요.”
(중략)
“서울에는 언제 갑니까?”
“내일 저녁요.”
“나도 데려가세요.” “네?”
나는 깜짝 놀라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 말이 완전히 진심인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굴 드라이브」, (김지연, 『마음에 없는 소리』, p.54~55.)
“다 서울 가서 살려고 하지 누가 이런 데 와서 살아요. 차라리 펜션이나 짓지. 저도 졸업하면 바로 서울로 가려고요.”
-『태초의 냄새』, (김지연, 현대문학, 2023) p.77.
김지연의 몇몇 소설에서 인물들의 서울에 대한 지향은 서울이 지닌 매력적인 외연이나 환상에 의거하기보다는, 소설 속의 인물과 “고향”(정확히는 ‘지방’) 간 복합적인 관계성을 표출하는 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굴 드라이브」에서 서울에 대한 지향은 필리핀 여성인 ‘미셸’에게도 동일하게 내면화되어 있다. 이곳이 아닌 그곳에서의 삶은 다를 것이라는 믿음이 단순히 환상으로만 작동하지 않는 건 서울이 지닌 다양성이 이미 특정한 한 도시의 규모를 초과해 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거기서 쉽게 부정할 수 없는 위계가 발생한다. 지방을 서울의 하위 개념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서울을 단순히 선망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데 그치지 않고, 삶의 기본 전제이자 지역의 희망 없음에 대한 대안으로서 지역에 거주하는 한 개인-미성년자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간주된다. 자신이 사는 곳을 “이런 데”로 취급하는 시선은 사회적 시선의 내면화 혹은 자기 객관화 과정의 결괏값이라기보다는 본인의 경험적 현실 내부에서 자연스럽게 생성된 깨달음이다. 문제는 “이런 데”를 벗어나 “서울”에서의 삶을 살게 되었을 때 “서울” 또한 “이런 데”의 요건을 갖추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는가, 하는 질문 앞에 답은 궁색해진다는 점이다. 그 경우는 “이런 데”나 “서울”의 문제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또 다른 곳으로 삶의 거처를 옮기고자 하는 의지는 물리적 거주 공간이 삶의 만족도에 지배적인 수준으로 기여한다는 인식이 전제조건이 되어 버린 현시대를 반영한다. 개인에게는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가기, 라는 첫 선택지가 있다. 이 선택지를 끝내 거부하는 이들은 자신이 처한 지방-환경을 바꿀 수 없다는 절망, 능동적 선택이 불가능한 현실 진단, 부정적 현실에 대한 회피로서 서울을 지향한다. 서울에서의 삶을 ‘지방’이 거느리고 있는 온갖 개인적인 억압의 기제들로부터 자유롭고 안온한 곳으로 설정한다.
서울에서 온 무슨 예술가라는 사람이 한나절 동네 사진을 찍으러 다니는 길에 동행을 해 주면 된다고 했다. 다만 그 예술가가 지방 청년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삶과 일에 대한 이야기를 수집하고 있어서 간단한 인터뷰에 응해야 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상욱은 ‘예술’ 같은 단어가 너무 낯간지러워서 거절하려 했는데 아르바이트비로 십만 원이나 준다는 말에 덥석 물고 말았다. 그런 게 예술인가? 상욱은 굶어 죽는 게 예술인 줄 알았다.
-「경기 지역 밖에서 사망」 p.45. (김지연, 『조금 망한 사랑』 (문학동네, 2024).)
김지연의 두 번째 소설집 『조금 망한 사랑』의 수록작 「경기 지역 밖에서 사망」은, 첫 소설집인 『마음에 없는 소리』의 표제작인 「마음에 없는 소리」와 동일한 인물과 배경으로 연결되어 있어 느슨한 연작이라고도 볼 수 있다. “상욱”은 “승호”의 여사친인 “선미”의 동생이다. “선미”의 부탁으로, “상욱”은 예술가인 “미주”를 소개받는다. 그는 「마음에 없는 소리 」에서 잠깐 등장하는, “승호”가 횟집에서의 “놈팡이”라는 단어로 뭉뚱그렸던 “예술가” 중 한 사람이다. “상욱”은 “승호”보다 근거리에서 “예술가”와 접촉하면서 그리하여 조금 더 선명한 “지방 청년”의 인식을 드러낸다. “예술가”가 아니라 “무슨 예술가라는 사람”이라는 단어에서는 ‘예술’이라는 단어에서 모호한 정체성을 감각하고, “너무 낯간지”럽다고 표현한 데서는 일상성으로부터 거리가 먼 대상을 조우할 때 발생하는 불편한 감각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굶어 죽는 게 예술”이라는 표현은 “예술”이 자본주의 현실과 부조화한다는, 이제는 영속에 가깝게 느껴지는 일반의 시선을 필터 없이 수용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 단락을 통해 상욱이 대상화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저 “예술가”는 그러나 반대로 “지방 청년”의 “삶과 일에 대한 이야기를 수집”하러 왔다. “지방 청년”이라고 하는 카테고리는 서울 내지는 수도권에서의 삶을 보편으로 상정할 때 가능해지는 대상화를 기반으로 형성된다. 다수가 아니기에, 보편의 감각을 공유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알 수 없는 존재들은 언제나 ‘미지(未知)’로서 취급된다. 보편과의 사이에서 경계로 인식될 수 있는 지점을 많이 가지고 있을수록 현실에서는 소수자-서벌턴(subaltern)의 위상을 갖게 된다. 그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은 자연스럽게 대상화의 과정을 선행하게 만든다.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공동선의 필드 밖에서 “지방 청년들”은 무얼 하고 지내는 걸까? “예술가” “미주”는 그 경계를 모색하고 바깥의 것들(로 치부되는)과 두려움 없이 마주하고자 하는 사람이다. 거기도 사람 사는 세계가 맞나? 같은 의문을 전제하지 않는다. 다만 어떤 사람이 살고 있나? 하는 의문을 떠올려 보면 서울 사람과는 분명 다를 것이라는 전제는 함의하고 있다. 사람은 살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사고를 탑재하고 있는지 함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인지 서울의 사람들과는 미묘하게 어긋난 타임라인에 갇혀 있는 건 아닌지. 단적인 예로 “예술”=‘굶어 죽는 일’로 취급하는 이 관점이 “상욱” 개인의 것이라기보다는 꽤 오래전부터 일반화되고 고착화된 공식으로서 “상욱” 같은 이가 의문을 품어 본 적 없었으리라는 가정은 다음과 같은 대화를 통해 어렴풋이 유추할 수 있다.
“실은 놀러 다니는 거 별로 안 좋아하시죠?”
“여기서 이십 년 넘게 살았는데 이제 좀 지겹죠. 시내에 작은 영화관이 있어서 퇴근하고 종종 갔었는데 거기도 얼마 전에 망했어요. 갈 때마다 영 사람이 없긴 했거든요. 근데 또 멀티플렉스는 자주 갈 맘이 안 생기더라고요. 저는 혼자 영화 보는 거 좋아하는데 거기는 다 짝지어서 오니까. 시간 나면 그냥 유튜브 보고 웹툰 보고 게임하고 그러죠.”
나는 그런 인간인가? 호불호를 따지는 일 없이 그냥 살아지는 대로 살아왔던 사람이라 자신이 정말 그것들을 좋아하는 건지, 선택지가 그뿐이라 그걸 고를 수밖에 없었던 건지 뒤늦게 헷갈렸다.
-「경기 지역 밖에서 사망」 (김지연, 『조금 망한 사랑』 (문학동네, 2024), p.49.)
명확한 대답 이면에서 드러나는 자기-의문은 다종(多種)의 현실이 충돌하고 합일하고 다시 분열하는 과정을 통해 발생한다. 수없이 많아 보이던 삶의 가능성은 그러나 “선택지가 그뿐이라 그걸 고를 수밖에 없”는 현실에 의거해 사라져 있다.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를 의문하지 않아도 되는 삶, 손쉽게 유추할 수 있는 삶은 관성을 강화시킨다.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 “상욱”의 고유성을 삭제한 것은 “미주”가 아니다. “상욱”은 “살아지는 대로 살아왔던 사람”이기에 표본 집단의 일원이 되기에 적합한 사람이다. 문제는 “상욱”만이 아니라 “지방 청년들”이라고 하는 카테고리로 묶을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이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상욱”과 구분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상욱”은 미주와의 사이에 어떤 시차(時差)가 발생하고 있음을 감지한다. 한 개인으로서 존재하는 삶과 한 개인으로서의 자신이 희미한, 전근대적인 삶. 둘 사이 뚜렷한 위계의 형태로 표면화되는 순간, “상욱”은 그 위계를 부정하는 한 방식으로서 가장 먼저 자신의 “남성성”을 돌아본다.
이 여자는 내가 안 무서운가. 체구도 작고 힘도 없어 보여서 그런가. 상욱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존재라는 것, 어쩌면 남성성이라는 걸 전혀 어필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을지 헷갈렸다. 학창 시절 반에서 남자답다고 일컬어지는 애들은 모두 위협적이었다. 그야말로 수컷 같았던 애들. 짐승 같았던 애들. 그런 애들을 선망하지는 않았다. 한심하다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교실의 룰을 만드는 건 그 애들이었고 상욱도 그 룰에 따라 움직여야만 했다. 룰을 만드는 사람들은 조금씩 다 그런 폭력적인 데가 있는 것 같았다. 룰 자체가 폭력적인 것이기도 했다.
-「경기 지역 밖에서 사망」 (김지연, 『조금 망한 사랑』 (문학동네 2024), p.64.)
“남성성”에 대한 가치 판단은 “상욱”이 “한심하다고 생각할 때”조차도 “상욱”의 삶을 구속하는 “룰”로 작동해 왔다. 문제는 그 “룰”이 만들어진 시점인 “학창 시절” 그리고 “남자답다”라는 말이 자연스러웠던 “학창 시절”로부터 크게 변화 없이 멈춰 있다는 사실이다. 시차의 발생이 선명해지는 순간이다. 일상성을 낯선 것으로 대하게 만드는 예술과, 남성성이 위계로서 작동해야만 정상적으로 기능한다고 생각하는 태도를 무력하게 만드는 여성. “상욱”이 느끼는 시차는 소설이 전개될수록 점점 뚜렷해진다. 자신이 “경기 지역 밖”에 있다는 걸 자각하게 만든다. 작가의 다른 작품인 「공원에서」에서 “남성성”이 이해 바깥에 있다는 것을 표상하는 것은, 여성인 ‘나’를 확증 편향으로 몰고 가는 상대의 앞에서 비명을 지르는 장면이다. 유부남 “기영”과 불륜 관계에 있으면서 “기영”이 그 관계에서 자신은 무관한 것처럼 굴어도 “기영”을 좋아하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나’. 그러나 좋아한다는 마음이 모든 윤리를 초과해 버리는 것을 어쩔 수 없기에 설명할 수 없는 여성인 ‘나’. 「경기 지역 밖에서 사망」은 그러므로 같은 맥락의 소설이다. 여성의 입장에서 바깥의 것이었던 ‘남성’의 내면을 전유한 ‘나’의 목소리로 이해 바깥에 있는 자신을 말하는 자기 역설의 구조 역시 동일하다. ‘남성’이어서, ‘여성’이어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이해 바깥의 세계가 가능한 현실이 있음을 보여 주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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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은 자꾸 사업을 구상하고, 체제에 대항하며 사회를 위한다고 여겨지는, 그런 일들을 도모했다. 그러면서 해나의 입학식과 졸업식, 심지어는 생일도 나이도 까먹었다. 집안일은 죄 까먹어도 대단한 일을 꾸미는 걸 보면 기억력의 문제는 아니었다. 대부분의 집안 대소사는 엄마가 챙겼다.
-「팜」 (예소연, 『사랑과 결함』 (문학동네, 2024), p.200.)
예소연 소설 「팜」은 “해나”가 “대진”이 살고 있는 곳으로 내려가 땅을 알아보는 이야기이다. 둘은 부녀지간이며 “해나”는 네이밍 공모전에 당선되어 받은 상금 “천구백십이만 원”으로 땅을 사기 위해 아버지인 “대진”에게 자문을 구하러 온 것이다. “대진”은 여전히 “해나”의 삶에 관심이 없으며 대의와 명분을 기치로 내걸며 살지만 ‘기후 위기’를 걱정하면서 ‘해나’의 비혼주의를 이해하지 못한다거나, 제사 준비를 돕지도 않으면서 조상의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원칙에 사로잡혀 있는 등의 자기모순에 갇힌 인물이다. 대의를 위한 삶 혹은 진보의 실천이라 여겨지는 것들이 실은 자의식 과잉의 연장선이라고 보일 만한 대목들이 많은 이 소설 내에서 인상적인 지점은 “대진”이 아니라, “해나”의 삶이다. “해나”는 아버지의 도움 없이 자기 삶을 끌고 오는 과정에서 무기력이 만성이 된 현실을 살고 있다. “돈 나올 구멍” 중 하나였던 “네이밍 공모전”에서 해나가 제출한 단어는 “수지 이꼴로지아”이다. “용인 수지 2지구에 건설될 패시브 하우스 주거단지 이름”이자 상금 “천구백십이만 원”의 대가이기도 하다.
그래서 해나가 왜 환경을 위해 그런 걸 하느냐고 물었다. 대진이 기후 위기에 대비해야 한다고 했다. 해나가 왜 기후 위기에 대비해야 하느냐고 물어보았다. 대진이 후손들을 위해 대비해야 한다고 했다.
“그럼 나는.”
“어?”
“날 위해서는 뭐 하는데.”
“이게 널 위한 거야.”
해나는 가만히 그 말을 듣고 있다가 말했다.
“공모전 된 거. 그거 상금 말고도 뭐 하나 더 줘.”
“뭔데?”
“수지 2지구 주택 분양권.”
“야, 엄청난데?”
“근데 분양받을 돈이 없잖아.”
“그거 당근마켓에 못 파냐?”
“그러니까, 날 위한 건 아무것도 없다고.”
꽤 오랜 침묵이 흘렀다. 대진은 할 일이 없으면 이곳에 정착하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사실 해나도 아예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알아본 바로 농촌 정착 지원금을 받은 청년 중 정작 제대로 정착한 이들은 극히 드물다고 했다. 몸 쓰는 일에 익숙지 않고, 그러다 보니 무리하게 장비에 자본을 투자했다가 몇 년 안 되어 투자금을 회수하지 못한 채 도시로 돌아온다는 것이었다. 해나는 대진에게 시큰둥하게 말했다.
“나 아빠 보려고 온 거야. 어디 어떻게 사나. 근데 진짜 잘 사네.”
-「팜」 (예소연, 『사랑과 결함』 (문학동네, 2024), p.209~210.)
명명에는 자본이 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상적이고 특별한 몇몇 이름은 많은 부분 허위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이름을 앞세우고 있는 실재는, 명명한 자의 몫이 될 수 없다는 점이 우리를 무력하게 한다. 주체가 원하는 이름을 지어 준다는 것은 그들이 가진 욕망을 이해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현실에 대한 이해가 곧 현실을 보다 나은 방향으로 바꾸는 실천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욕망에 걸맞는 이름을 부여해 준 대가는 세금까지 정확히 계산해서 뗀 자본으로 환산되지만 그 계산은 과연 정확한가. 「팜」에서 “대진”의 계산은 스스로가 내세우고 있는 명분인 ‘기후 위기’가 아니라 ‘당근마켓’ 쪽에 더 가깝고, 효용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던 “대진”의 삶이 실은 효용을 창출해 낼 수 없는 자의 자기 연민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만든다. “해나”가 벌어들인 돈으로 살 수 있는 땅이 “대진”이 정해 준 땅의 30%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이 기성세대가 남겨 놓은 파이다. 한 개인의 힘으로는 바꿀 수 없고 나아질 수 없을 것 같은 현실을 구성한 자는 저 “대진”이다. 자기 일이 아니라는 것처럼- 언제든 대의를 위해 가족과도 타인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인 “대진”의 신념이 자의식의 영역 밖에서는 전혀 힘을 쓰지 못한다는 사실이 결국 한 가족의 삶을 억압하는 기제로서 작동해 온 것이다. 아버지인 “대진”은 살 수 있지만, 자식인 “해나”로 대표되는 청년 세대는 정착해서 살기 힘든 “농촌”. “할 일이 없으면 이곳에 정착하라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구시대적인 공간으로서 인정이 넘치고 현시대의 속도에 무지할 거라는 선입견을 깨는 세계. “무인 매표기 앞에 한가득 짐을 내려놓은 할머니”가 “민첩한 속도로 행선지를 클릭하고 IC카드를 정확한 방향으로 투입하여 결제”해서 오히려 “도와드려야 한다는 생각”을 “무안”하게 만드는 세계. 누가 누구를 돕는다는 걸까. 가만히 들여다보면 “날 위한 건 아무것도 없”는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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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의 현실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소설들을 ‘찾아’ 읽으면서 일종의 유의추출법을 통해 다루고자 하는 테마와 소설을 연결한 것이 아닌가 하는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상태였다. 그만큼 희소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지방’의 현실을 다루기 시작한 몇몇 소설들, 더 나아가서는 ‘인물’이 삶을 살아가는 공간을 피상적인 시각적 이미지로만 남겨 놓지 않는 몇몇 소설들이 지닌 문제의식은 앞으로도 오랜 시간 유효할 전망이다. 변화와 개선의 의지가 부족해 점점 무너져 가는 지방의 현실을 직간접적으로 체험하고 있는 독자들에게는 특히나 더 그럴 것이다. 예소연 소설에서 “대진”의 “농촌”이 “스마트 팜”을 통해 후손을 위한 친환경 농법을 하고자 하는 공간으로서-그러나 청년 세대를 망하게 만든, 무력하게 만든 주범으로서 현실성이 떨어지는 명분만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은 세대 간 분열이 무엇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왜 농촌에 청년 세대가 정착할 수 없는 것인지를 사유하게 만든다. 비교적 선명한 형태로 드러나는 김지연 소설 속 “지방 소도시” 이미지는 공간 배경이나 분위기의 묘사가 아니라 그곳에 정착해 살기로 한 사람의 내면에 의해, 평생을 그곳에서 살아온 사람의 내면에 의해 구성된다는 점에서 미덥게 읽힌다. 수많은 일인칭이 보편의 영역이라 치부되는 수도권의 삶 바깥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 과정에서 ○○ 지역 밖의 삶을 가로지르는 순간을 목도한다. 물리적 거주 공간이자, 투쟁하고 부딪히는 삶의 현장이자, 남성과는 다른 여성의 투쟁-반대로 여성과는 다른 남성의 세계 등 이해 가능한 영역 밖에서의 사망에 대한 기록으로서 김지연과 예소연 소설이 지닌 미덕에 힘입어 더 이상 읽히지 않는 어떤 세계 읽기를 위한 노력이 지속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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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국가의 가장자리에서 ―검열과 복종, 혹은 비평의 장소 최진석 1. 표류하는 현재, 폭력의 가시 2025년 1월 19일 현재, 한국 사회는 격랑 위를 떠다니고 있다. ‘선진국’이자 ‘문화국가’라는 호명을 받아들인 지 수년 만에 벌어진 이변이 아닐 수 없다. 계엄과 탄핵, 그에 대한 헌법적 판단 절차가 한창 진행 중인 지금은 그 누구도 미래를 예단하기 힘든 불확정의 시간만이 흐르는 중이다. ‘현재’라는 좌표가 어디로 흘러가고 어디에 놓일지 짐작조차 어려운 상황에서 문학과 문화, 비평에 관한 이야기는 짐짓 사치스럽게 느껴질지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무엇이든, 지금-여기에서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이 파도의 끝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지 예측할 수 없어도, 최소한 우리가 무엇을 원하고 원하지 않는지는 스스로에게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연후에야 도착에 대한 기대나 불만, 감동이나 좌절, 혹은 두렵지만 새로운 출발도 가능할 테니까. 지금의 사태와 문학장(場)을 연관 지어 말한다면, 아무래도 2023년 6월 14일 서울국제도서전 개막식에서 벌어진 일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한국문학과 출판 시장의 현황을 널리 알리는 국제적 행사의 홍보대사로 소설가 오정희가 위촉된 것에 대해 한국작가회의와 문화연대, 민변 문화예술스포츠위원회와 블랙리스트이후(준) 등이 항의 성명을 발표했고, 개막일 행사장에서는 송경동 시인 등이 반대 의사를 밝히다가 강제로 끌려 나갔던 사건이 그것이다.1) 알다시피 오정희 소설가는 박근혜 정부 시절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깊이 연루된 문인이었고, 그에 대한 분명한 사죄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다시금 한국문학과 출판을 대표하는 행사의 얼굴을 맡은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2) 블랙리스트, 즉 문화예술에 대한 검열의 불길한 기운이 다시 한국문학을 뒤덮으리라는 불안과 공포가 그 밑바닥에 깔려 있었다. 돌아보면 최근 2년 사이에 문화예술 창작에 가해진 검열은 수없이 많다. 2022년 5월 13일 광주광역시의 ‘호명(呼名) 5‧18거리미술전’에서 보조금 지원사업의 취지를 빌미로 후원이 취소된 것이라든지, 같은 해 9월 26일 부마민주항쟁 기념재단이 기획한 행사에서 가수 이랑의 노래가 배제된 것, 그로부터 며칠 후인 10월 4일 한국만화진흥원이 주최한 ‘전국 학생 만화공모전’에서 〈윤석열차〉의 의도를 문제 삼아 엄중 경고가 내려진 것 등이 그 출발점이다. 2023년에는 후쿠시마 오염수를 비판하는 각종 문화예술 행사가 취소되거나 지원 배제당했고, 2024년에는 도서관에 비치된 성평등·성교육·페미니즘 도서 2,528권 폐기되었으며, 영화진흥위원회의 차세대 미래 관객 육성 사업에서는 정치적 이념 문제가 조건으로 내걸리기도 했다. 당장 기억나는 것만 떠올려도, 최근의 시점까지 검열이 작동했음을 확인하기에 모자라지 않다. 하지만 곧장
- 문장지기
- 2025-02-01
계속해서 아픔에 대해 말하는 어떤 일상적인 방식 김지윤 1. 치유라는 폭력 “모두가 당신에게 친절하게 대할 거야 당신이 아프면··· 만일 당신이 낫는 데 너무 오래 걸리는 병에 걸린 것만 아니라면.” 다니엘라 올셰프스카의 시 「thirteenz」의 한 구절이다. 타인의 병에 대해 사람들이 가장 쉽게 던지는 말은 “빠른 쾌유를 빕니다”이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병은 가능한 한 빨리 치유되어야 하는 것, 극복의 대상으로 여겨진다. 병은 이상 징후이며, 극복해야 한다는 생각은 정상성과 수치심의 구조를 형성한다. 하지만 나을 수 없거나, 낫는 데 매우 오래 걸리는 경우라면 어떨까? 아픈 것이, 불완전한 것이 그냥 삶의 일부라면? 『눈부시게 불완전한』에서 장애 및 트랜스 활동가인 일라이 클레어는 ‘치유’라는 말에 숨어 있는 정상성에 대한 강박에 도전한다. 세상은 복잡하고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이분법으로 설명할 수 없으며 ‘눈부신 불완전함’도 충분히 가능하다. 불완전한 상태나 질병과 함께해야 하는 것이 누군가의 삶이라면 ‘치유’에 대한 기대를 들이미는 것은 그 자체로 폭력이 될 수 있다. 난치병이나 낫지 않는 병은 ‘치유’를 전제하는 기존의 ‘정상성’ 서사를 거부하며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고통과 한계 앞에서, 완전성과 진보를 추구하는 사회적 이상에 의문을 제기한다. “극복이라뇨, 받아들인 거죠.” 최은미 소설 『마주』에서 비활동성 결핵 판정을 받고 코로나 상황에 결핵 치료를 받는 주인공이 하는 말이다. 극복이 아니라 수용이라는 사실은 중요하다. 질병이 낫지 않고 계속된다는 사실은 삶을 선형적 발전 과정이 아니라 고통과 불완전성을 동반하는 상태로 바라보게 하며 삶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요청한다. 최근 ‘치유’ 서사에 대한 비판적 관점들이 대두되고 있는데, 문제를 해결하고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가는 과정으로 질병을 인식하기보다는 상처와 고통 자체를 존중하는 접근법이 강조되고 있다. 고통을 단순히 제거해야 할 것으로 보지 않고, 존재를 깊이 사유하게 하는 계기로 인식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질병은 생존뿐 아니라 공감과 공존의 문제와 연결되며 인간에 대해 성찰하게 하고 사회적 구조와 문화적 편견을 비추어볼 수 있는 거울이다. 병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라 여겨지지만, 사실 타인과의 관계, 사회적 구조, 그리고 존재 자체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던지게 하므로 사실 사회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질병에 대한 성찰은 새로운 윤리적 책임과 공감의 계기를 제공하며 질병에 부과되곤 하는 낙인과 배제의 문제를 재고하게 한다. 김은정의 『치유라는 이름의 폭력』(후마니타스, 2022)은 한국의 역사, 정책, 제도, 문화 텍스트 등이 장애와
- 문장지기
- 2025-02-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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