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들
- 작성일 2025-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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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들
서은영
1. 악녀 선언
‘두고 봐, 내가 가만있지 않을 거야’라는 말은 분명 상대를 향한 경고성 발언임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힘이 실리지 않는다. 그 말에 겁을 먹기보다는 ‘두고 보면 네가 어쩔 건데’라는 류의 무시로 응수되는 경우도 흔하다. ‘두고 보자는 사람치고 무서운 사람 없다’는 속담이 괜히 나온 말은 아닐 게다. 가만있지 않을 사람이었다면 그런 발언이 필요한 상황 자체가 만들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고, 그런 일이 벌어졌다 한들 조용히 응수하면 될 일이다. 곧 이 발언은 자신의 분함과 억울함을 행사할 방법을 좀처럼 찾을 길 없는 인간의 약함을 드러내는 말이자, 그런 약체의 다짐이다. 그러나 복수는 하고 싶지만 복수의 길은 요원하고, 현실의 나는 힘이 없다. 대신, 고구마를 먹고 목구멍이 꽉 막힌 현실의 나와는 달리 통쾌한 복수혈전을 실현하는 그녀들이 있다. 바로 로맨스 판타지 속 악녀들이다.
악녀들은 버릇처럼 되뇐다. ‘이번 생엔 기필코 살아남겠다’고. ‘두고 봐, 내가 가만있지 않을 거야’의 악녀판 버전이다. 달라진 나를 보여 주겠다는 결기이자 나의 독기를 끌어올리는 주문으로 들린다. 2010년대 이후 여성들은 웹콘텐츠 소비에서 굳이 악녀들을 소환했다. 일종의 ‘악녀-되기’의 선언이다. 될 게 없어 악녀가 되느냐고 하겠지만, 그렇다. 악녀가 되지 않으면 사회적 죽음, 혹은 실존적 죽음이 도사리는 비정한 세계를 경험했기에 당하고만 살지 않겠다는 다짐이자 선언이기도 하다. 이 시기의 악녀 선언은 로맨스 판타지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다. 일상툰인 〈퀴퀴한 일기〉에서는 “니가 애매한 나쁜 년이라 마음이 무거운 것이야. 더 나쁜 년이 되도록 하여라”고 조언하고, 〈쌍년의 미학〉에서는 말 그대로 ‘쌍년-되기’를 충고한다. 일련의 악녀 선언이 페미니즘이 재발화된 2015년 이후 본격화했다는 점은 여성들이 이 사회 안에서 자신의 역할과 위치를 재정립했다는 증거일 수 있다. 그 목소리들이 로맨스 판타지라는 장르에서 현현된 것이 바로 악녀이자 #악녀물이다.
악남(惡男)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악녀 선언은 흥미롭다. 〈악녀는 마리오네트〉의 레제프나 〈하루만 네가 되고 싶어〉의 아버지, 〈재혼황후〉의 하인리를 우리는 악남이라 부르지 않는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해 공동체의 질서를 해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폭군이자 패륜아 같은 이들은 악인들이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악남이라 호명하지 않는다. 그들을 명명할 언어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역대급 영지설계사〉의 김수호가 빙의한 인물 ‘로이드 프론테라’도 악남이 아니라 ‘개망나니’일 뿐이다. 악남은 없다. 악녀만 있을 뿐이다.
악녀란 일찍이 남성들을 위협하는 여성을 부정적인 이미지로 표상한 것임을 안다. 악녀의 대척점에 겨우 개망나니가 존재하는 세계에서 악녀란 이분법적 가치체계가 지배하는 문화의 산물임을 안다. 또한 악녀란 체제를 위협하는 열등화된 타자라는 위계화된 언어의 부정적 가치임을 안다. 그럼에도 여성들은 악녀를 택했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로맨스 판타지에서 급격히 증가한 악녀들의 등장은 분명 여성 대중들의 선택이었다. 여성들은 악녀-되기를 선언함으로써 위계화된 언어 위에 세워진 가부장적 질서의 공고함을 내파시키려는 시도였다. 초기 로맨스 판타지에서 늘 성녀가 여주인공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 성녀의 자리를 치우고 악녀가 선택됐다는 점을 볼 때 그러하다.
악녀 선언은 남성들이 악녀로 타자화했던 것에 대한 도전이자 기존의 여성상을 반복 수행하는 주인공을 전복하는 위반의 표징으로써 남성의 언어로 규범화된 여성상을 전복시키는 시도다. 남성이 원하는 여성상을 탈여성화하고 여성이 원하는 여성상을 바로 세우는 방식이자 향유다. 여성들은 가부장의 기반 위에 세워진 악녀를 재전유함으로써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상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 주었다. 사회의 요구에 부응하는 여성이 아니라 그에 배반하는, 그럼에도 공공의 선을 위해 노력하는 여성임을 표명하는 것, 그것이 오늘날 로맨스 판타지의 여주인공으로 선택된 악녀들이다.
2. 개과천선하는 악녀들
하지만 악녀가 변화될 모습을 위해 더 나은 악녀가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악녀의 성격화에서 어떤 클리셰가 탈각되느냐는 결국 여성 읽기의 향방을 지목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통 로맨스 읽기의 관행이 잔존하고, 악녀가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는 점도 인정해야 한다. 악녀-되기를 선언했지만, 모두가 다 같은 악녀는 아니기 때문이다.
로맨스 판타지 속 악녀는 개과천선(改過遷善)한다. 개과천선을 지난날의 과오를 고쳐 선(善)을 실천한다는 의미로 쓴다면, 로맨스 판타지 속 악녀들은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공공의 선을 실현하는 데 힘쓴다. 악행을 일삼던 지난 시절에 대한 과오는 반성과 후회로 자신의 내면을 다듬는 일로 우선한다. 그리고 과오를 만회하고 참회하기 위해 자신이 가진 능력을 공동체의 이익을 실현하는 데 사용한다. 일종의 봉사와 헌신, 자애의 표상이다.
이런 악녀들은 #악녀물이 등장했던 2010년부터 오늘날까지 꾸준히 소비되고 있다. 일종의 #악녀물의 원형이라 하겠다. 소위 #악녀물의 기원에 대해서는 정확히 밝혀진 바는 없다. 다만 2010년을 전후로 조아라와 같은 웹소설 플랫폼에 등장한 #악녀빙의물과, 일본 나로우계(なろう系)1)에서 유행하던 ‘#악역영애물’과의 영향 관계가 통설로 굳어졌을 뿐이다. #악녀빙의물은 차원 이동을 통해 현생의 주인공이 정통적인 악녀 클리셰나 엑스트라로 빙의한다는 설정으로, 세계관 내에서 죽어 마땅한 악녀에 빙의했기에 주인공은 자연스레 ‘생존’의 문제와 결부된다. 나로우계의 #악역영애물은 악녀로 빙의나 환생한 여주인공, 혹은 악녀로 오해받은 주인공이 온갖 시련을 겪다가 파멸당할 위기-소위 ‘파멸플래그’ 혹은 ‘사망플래그’-를 극복하고 행복한 결말을 맺는다는 이야기다. 오늘날 수많은 #악녀물이 #빙의물의 관습을 따르고 여주인공의 생존을 위한 분투기를 다루게 된 원형이 바로 여기에 있다.
#악녀물은 이런 서사적 관습을 기반으로 2010년을 전후로 등장하기 시작해 2017년에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물론 #악녀빙의물과 #악역영애물의 기원은 별개다. 비슷한 시기에 가까운 두 국가에서 ‘악녀’가 주인공으로 등장했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오랫동안 소비되었지만, 현재는 독자적인 발전을 거쳐 다른 양태들로 변주하고 있다. 그럼에도 하나의 화소이자 캐릭터가 벌써 10년을 넘게 인기를 끌고 있는 셈이다. 결국 악녀-되기는 하나의 원형 서사로 기능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악녀들이 원형을 변주한 형태로 드러난다고 한들 아무리 흐린 눈을 하려 해도 굳건히 소비되고 있는 시장의 한 축을 무시하기란 어렵다.
〈외과의사 엘리제〉의 엘리제처럼 과거의 악행을 반성하고 몇 번의 회귀와 환생을 거쳐 성녀로 거듭나는 작품들은 바로 초기적 형태의 #악녀물이지만 여전히 잘 팔린다. ‘악녀에서 성녀로의 변신 모티프’나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유구한 역사를 반복하며 끈질긴 유전자로 작품 속에 접착해 있다. 관성적으로 반복 수행되는 이들 모티프가 직관적 소비가 우세한 웹콘텐츠 시장에서 잘 팔리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외과의사 엘리제〉가 차용한 것으로 의심받는 나이팅게일의 생애사는 젠더의 근대성을 잘 구축한 이야기로도 유명하다. 사이토 미나토는 “정의의 미소녀이자 마법 소녀를 거쳐 야전병원의 어머니이자 병사들의 마돈나”인 나이팅게일이 ‘백의의 천사’로 둔갑되는 과정에 대해 기술한 바 있다. 그는 교육용으로 쓰이는 위인전뿐만 아니라 아동에서부터 어른까지 전 연령에서 향유되는 애니메이션에 이르기까지 나이팅게일의 소설적인 생애사가 반복적으로 소비되며 여성상을 획일화한다고 주장한다.2)
이들 악녀들이 과거의 악행을 반성하고 선한 영향력을 실천하면서 공공선을 지향하는 세계라는 점에서 긍정적 해석을 시도해 볼 수도 있다. 그동안 전통적으로 여성들이 수행해 왔던 돌봄의 가치를 높이 평가함으로써 자긍심을 심어 준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역시 찜찜하다. 그것으로 된 것인가. 돌봄이 여성의 일인가? 성녀들은 왜 한결같이 모두를 돌보는 데 애쓰지 않으면 안 되는가. 여성들은 모처럼 악녀-되기를 선언해 놓고 표피만 악녀로 둘러친 악녀들을 여전히 소비하는 것에 아무런 주저함이 없어도 괜찮은 것인가. 공동체를 유지하고 더 나은 공공선을 추구하거나 올바름을 실천하는 이야기들이 악녀-되기의 표피를 입고 기존의 체제-혹은 서사-를 교묘하게 숨겨 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 결국 원형 서사가 문화적 지지에 힘입어 인기 있는 콘텐츠에서 소비되고 이를 대중들이 관성적으로 독해할 때,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로맨스의 다시쓰기는 요원해진다. 그녀가 아무리 걸크러시하고 능력탑주의 악녀일지라도 말이다.
한편 악녀들은 예쁘다. 종종 ‘제국의 꽃’으로 비유되는 이 악녀들은 예쁜 얼굴 하나를 믿고 악행을 저지르다 악녀라는 오명을 쓰고 죽음에 이른다. 그녀들은 전생에서 얼굴은 예뻤지만 우매한 행동으로 죽음을 자초했다. 그런데 단두대에 이르기 직전, 악녀들은 각성한다. 자신의 우매함을 이용한 진짜 악녀가 따로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녀들은 각성한 후 진짜 악녀를 향해 복수를 다짐한다.
‘그래! 이 모든 것은 신의 계시임이 틀림없어. 어리석은 지난날을 참회하고 바보처럼 속아 넘어간 불쌍한 계집을 구원하기 위한 신의 계시!’
그녀를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던 악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만들기 위해! 그리고 모든 기억을 그대로 간직하게 하여 복수 또한 가능하도록!
-산소비, 〈악녀는 모래시계를 되돌린다〉 2화.
〈악녀는 모래시계를 되돌린다〉의 아리아는 자신의 죽음에 “성녀의 가면을 뒤집어쓴 악녀 중의 악녀” 미엘르가 있음을 깨닫고 복수를 다짐한다. 그리고 아리아는 진짜 악녀가 되겠다고 선언한다. 이때 그녀는 자신을 “바보처럼 속아 넘어간 불쌍한 계집”으로, 미엘르를 가련한 그녀에게 덫을 놓은 진짜 악녀로 지목한다. 즉 〈악녀는 모래시계를 되돌린다〉는 주인공의 악녀-되기에 타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그 대척점에 다른 여성을 악녀로 세운다. 이렇듯 가짜 악녀와 진짜 악녀의 구도는 그동안 여성들이 싸워 왔던 ‘여적여’를 재구성한다. 여적여는 여성은 자신보다 우월한 여성에 대해 질투, 시기, 열등감을 갖는 감정적 존재라는 여성 혐오를 생산하지만, 이처럼 오늘날의 #악녀물에서 여전히 생명력을 유지하며 건재하다. 게다가 작품은 아리아가 남성 사회에서 미천한 신분을 극복하고 자신의 우월한 능력으로 사회적 성공을 거두는 여성 영웅의 서사를 전경화하면서 여적여의 구도와 퇴행적 수준의 악녀 미엘르의 존재를 아무런 위화감 없이 독해하게끔 한다.
〈악녀는 모래시계를 되돌린다〉는 2017년부터 웹소설 연재를 시작해 웹툰화까지 마무리된 작품으로 1억 뷰를 앞둔 슈퍼IP다. 비단 이 작품만이 아니다. 〈재혼황후〉의 정부 라스타가 그러하고, 〈접근불가 레이디〉의 의붓여동생 가브리엘도 그렇다. 우리는 그 악녀들을 통해 여주인공의 선함과 능력을 부각시키고 왜 여주가 남주와 사랑의 결실을 맺을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인과성을 부여하는 관성적인 읽기를 행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문해야 한다.
3. 돌봄 루프에 빠진 악녀들
악녀들 중에는 가족들로부터 학대와 냉대, 무관심, 방치 속에 불행한 전생을 보내고 회귀한 이후 좀처럼 주변인들-특히 남주-에게 곁을 내주지 못하는 상처녀들이 있다. 물론 로맨스 판타지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남자 주인공인 냉혈남, 무심남, 상처남들의 설정도 이와 유사하다. 이는 로맨스라는 장르의 속성상 #후회물의 관습에서 이어져 오며, 소비자들의 기호 가운데 #찌통에 대한 선호와 관련이 있다. #찌통이란 ‘가슴이 찢어지는 통증’이라는 뜻으로 작품 속 인물이나 상황에 공감해 찌릿찌릿하고 아린 통증을 느낄 정도의 감상 경험을 의미하는 인터넷 용어다. 이 #찌통은 여주의 진정성을 알아보지 못한 주변인들이 후회하면 할수록 통증의 강도가 세지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속칭 ‘구르는 남주’가 등장하는 작품이나 #후회물, #가족후회물, #피폐물들은 #찌통을 강화시켜 작품에 몰입하게 만드는 장치가 된다. 곧 악녀들이 가족들의 학대 대상으로 놓인 것은 로맨스 판타지 장르 감상 경험 안에서는 특별한 것은 아니다.
다만 가해자인 가족과 피해자인 상처남/녀 사이의 관계성은 그 차이가 확연하다. 예를 들어 남주는 아버지와의 권력투쟁이 주된 반면, 여주는 훨씬 다양한 양상을 띤다. 남주는 권력투쟁 끝에 폭군인 아버지로부터 정당하게 권력을 승계받는 자로서의 권위와 위엄을 거머쥐는 동시에 여주와의 사랑에도 성공한다. 반면 여주는 아버지의 권력욕이나 가문을 지키기 위한 정치적 도구로서 결혼 제물의 희생양이 되거나 감금, 신체적 폭력 등에 노출된 피해자로 그려진다.
또한 로맨스 판타지에는 가해자가 남자 형제인 경우도 흔하다. 〈접근불가 레이디〉의 힐리스는 무려 일곱 번이나 회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친오빠 리카르도는 끝까지 자신의 편이 아니었다. 그녀가 일곱 번 회귀했다는 것은 지난 여섯 번의 회귀 동안 가족에 대한 결핍과 인정 욕구가 반복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악녀는 마리오네트〉의 레제프는 누나 카예나의 미모를 이용해 황제로 등극하는 도구로 사용하고, 끝내 카예나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카예나는 레제프가 자신을 가족으로 여긴 적 없었다는 사실을 각성한 후, 살아남기 위해 악녀가 되기로 결심한다. 반면 남주에게 남자 형제가 위협적인 경우는 권력 다툼 외에는 흔치 않다.
주목하고 싶은 것은 여주와 어머니와의 관계성이다. 가해자가 어머니인 경우 남주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계모와의 갈등에서 빚어지는 학대, 독살, 암살, 계략에 휘말리지만 친모와의 갈등은 흔치 않다. 반면 여주는 계모는 물론이거니와 친모와의 관계에서도 학대 상황이 벌어지는데, 언어 폭력, 냉대, 무시와 같은 정서적 폭력에 시달린다.
아르티제아는 밀라이라에게 늘 했던 위로를 습관적으로 입에 담았다.
“로렌스 오라버니에게는 친구가 많잖아요. 하셔야 할 일도 많고‧‧‧ 그러니까 어쩔 수 없지요.”
“그래, 알아. 네 오빠는 멋진 남자니까 찾는 사람도 많겠지.”
밀라이라가 한탄했다. (···) 어쨌거나 이럴 때에도 대답은 결정되어 있었다. 밀라이라가 듣고 싶어 하는 것은 듣기 좋은 위로였기 때문이다. (···) 더 어렸을 때에는 밀라이라의 말이 진짜 고민인 줄 알고 함께 진심으로 염려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매번 웬 재수 없는 소리를 하는 거냐, 저주를 하는 거냐며 매를 맞았다. 이제 아르티제아는 이런 일에 상처받지도 않았고, 밀라이라가 정말로 자신을 향해서 말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녀의 말에 밀라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네 오빠는 그저 그런 남자들과 다르지. 그래도 걱정이 되네. 결국 남자는 제 계집을 만나면 어미는 잊게 마련이니. (···) 넌 그러지 않을 거지?”
“그럼요, 어머니. 저는 언제까지나 어머니 옆에 있을 거예요.”
아르티제아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밀라이라가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야지. 넌 내 딸이니까.”
-한민트, 〈악녀는 두 번 산다〉 6화.
아르티제아의 엄마 밀라이라는 로산 후작의 부인이지만, 공공연한 황제의 정부다. 밀라이라는 황제와의 사이에서 황태자 로렌스를 낳았고, 아들을 향한 집착과 애착이 심하다. 그녀는 아들 로렌스를 황제로 만드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이를 위해 딸을 기꺼이 희생양으로 삼는다. 밀라이라는 히스테릭한 성격과 불안정한 가정, 사회적 위치 때문에 발생하는 스트레스를 딸에게 쏟아 낸다. 반면 아르티제아는 밀라이라가 자신을 향해 “너무 못생겨서 꼴도 보기 싫다”든지 뚱뚱하다는 악담을 퍼부어도 엄마의 감정을 우선시하며 자신을 억누른다. 그녀는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이 됐지만 결핍과 인정 욕구로 인해 자신을 극단으로 내몰아 악녀가 되었다. 엄마는 아르티제아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아르티제아는 엄마를 동정하며 죄책감에 빠진다.
〈악녀는 두 번 산다〉에서 모녀 관계는 불균형하다. 밀라이라는 로렌스에게는 바랄 수 없는 정서적, 감정적 의지를 아르티제아에게는 강요한다. 동시에 이것은 어머니를 돌보는 딸의 역할과 의무를 강요하면서 정서적 폭력과 가스라이팅으로 전개된다. 아르티제아는 일종의 ‘착한딸 콤플렉스’의 전형이다. 그 후 회귀했을 때 엄마와의 관계와 감정을 끊어 내는 데는 성공하지만, 한동안 자책감과 자기혐오가 뒤섞여 끝내 자신을 돌보는 일에는 소홀한 악녀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설정에 대한 댓글 반응이다. 독자들은 ‘가스라이팅’을 언급하며 악녀의 상황을 자신에게 이입해 ‘K-딸’의 부담감과 엄마와의 관계성을 호소한다.
이처럼 여성향 로맨스에는 여주가 가족으로부터 소외당하고 배제, 차별받는 클리셰를 흔히 목격할 수 있다. 로맨스나 남성향 서사의 남주와는 그 양상이 다르다. 일례로 〈나혼자만 레벨업〉의 성진우나 〈역대급 영지설계사〉의 로이드는 가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 그로 인한 부담감이 각성의 계기였지만, 〈악녀는 두 번 산다〉, 〈접근불가 레이디〉, 〈악녀는 마리오네트〉 등 로맨스 판타지의 악녀들은 가족의 폭력에 희생된 딸이 그 정서적 관계를 끊어 내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오늘날에도 아들과 딸의 역할, 곧 남성성과 여성성의 성별화된 역할 수행이 가족의 돌봄 형태로 서사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 ‘K-아들’과 ‘K-딸’에게 부여된 의무와 부담감은 가장 트랜디하다는 웹소설과 웹툰의 주인공에게도 투영돼 반복 재현되고 있다.
다시, 로맨스 판타지로 돌아와 학대에 노출된 악녀들을 보자. 여주들은 남주에 비해 가족 내 종속된 존재로 괴로워한다. 신체적, 정서적 폭력 상태로 노출된 여주들은 회귀·빙의·환생 후에도 돌봄을 반복 수행하는 위치에 놓인다. 〈악녀는 마리오네트〉의 카예나는 생존을 위한다지만 가학성을 보이는 레제프의 심기를 달래고 그가 황제가 되는 데 힘을 쏟는다. 아버지인 황제의 심기와 지병에 신경 쓰는 것도 카예나의 몫이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맹수조련사’, ‘나의 안온’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그녀의 능력을 인정받지만, 남동생 레제프, 이복남동생, 남주 라파엘로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을 돌봄으로써 오히려 감정 노동에 시달린다. 〈악녀는 두 번 산다〉의 아르티제아는 악행을 저질러 제국을 폭군 동생에게 맡김으로써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한 자신의 과오를 반성해 이번 생에서는 성군인 북부대공을 황제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현재 정치적 입지가 적은 북부대공이 세력을 넓혀 갈 수 있도록 자신의 지혜와 전술, 인맥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이처럼 돌봄을 제대로 실행하지 못한 부모의 대척점에 외면받고 상처받은 악녀가 위치한다. 그녀들은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겠다고 결심하고 가족 내 자기 위치를 재정립하고자 노력한다. 그런데 이 악녀들은 다른 이들-주로 남주와 남주의 가족-을 돌보거나 감정 노동을 지속한다. 이렇듯 로맨스 판타지를 읽다 보면 순환적 돌봄 구조에서 뛰어난 전략, 전술을 펼치는 악녀들의 역할 수행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근본적인 회의가 들 때가 있다. 〈악녀는 두 번 산다〉의 아르티제아는 제국의 안위를 실현하기 위함인가, 북부대공을 위함인가. 전자라면 그렇게 뛰어난 그녀가 왕위를 계승받을 수는 없는가. 그녀의 피곤하고 지친 삶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이것이 대체 누구를 위한 일인지 의문이 드는 순간이 생기기도 한다. 그것이 제국이라는 세계관의 한계라면 왜 여성들은 그 세계관을 여전히 고수하는가. 물론 그 변화들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악녀는 마리오네트〉의 카예나는 끝내 로맨스에도 성공하고 성군으로도 입지를 굳힌다. <악녀를 죽여줘>의 에리스는 도무지 정들지 않는 이 세계를 탈출해 현실 세계로 돌아가려는 고군분투기를 보여 준다.
이 글은 어떤 작품이 더 나은지에 대해 평가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꾸역꾸역 제국이라는 세계관이 존재하고, 악녀를 황후로 설정하는 창작이 반복, 소비되는 환경에서 오늘의 악녀는 어떤 과정을 거쳐 로맨스를 성취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고 있는지, 자문할 필요성을 제기해 보았다. 또한 여성들의 로맨스 읽기에 얽혀 있는 다층적인 욕망이 짐짓 악녀라는 표피를 입고 당당녀, 걸크러시녀, 능력녀로 가장한 것은 없는지, 그런 가장들이 여성 서사의 나아갈 지점들을 방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도 반문해 보고 싶었다. 로맨스 판타지 시장에서 악녀-되기는 분명 여성들의 로맨스 읽기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안겨 주었다. 그럼에도 오늘날 여성의 로맨스 읽기는 악녀를 둘러싸고 복잡하게 얽혀 있는 시장이라는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보다 정밀하고 다양한 읽기들이 시도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싶다.
1) 나로우계란, 일본 웹소설 플랫폼인 ‘小説家になろう(소설가가 되자)’를 줄여 인터넷상에서 ‘なろう(되자)’로 부른 것에서 유래되었다. 2004년부터 운영된 대표적인 소설 투고사이트로 #이고갱(이 세계에서 고교생이 갱판 치는 이야기), #역하렘, #전생물 등이 초창기부터 인기를 끌며 라이트노벨, 아니메와 같은 일본문화에 친숙한 한국 독자들에게도 회자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조아라, 문피아가 개설되었지만 초기에는 나로우계와 직접적인 영향 관계가 드러나지 않았다가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유사한 클리셰들이 목격되었다.
2) 사이토 미나토 지음, 권서경 옮김, 『요술봉과 분홍 제복』, 문학동네,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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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의 딜레마 ― 이론과 문학, 삶의 거리 최진석 1. 이론에 대한 저항 문학비평에 대해 공부할 때, 나 스스로도 매번 고민하고 학생들과도 자주 토론하게 되는 주제 중 하나는 이론의 효용에 관한 물음이다. 이를테면 형식주의나 구조주의, 신비평, 맑스주의, 포스트구조주의, 페미니즘, 해체주의,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콜로니얼리즘 등등, 문학비평 개론서나 문학 이론 입문서를 펼쳐 보자마자 쏟아지는 수많은 이론의 홍수에 당황해 보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을 듯싶다. 더구나 읽기도 어려운 외국 이론가들의 이름이나 전문용어, 특수한 개념 등은 몇 글자 읽기도 전에 사람을 질리게 만들어 얼른 이 ‘수렁’으로부터 벗어나고 싶게 만든다. 설마 이 많고도 복잡한 이론을 다 섭렵해야 문학 작품을 제대로 읽을 수 있다는 뜻일까? 다른 한편, 저 무겁고도 쓰기 어려운 이론이라는 칼에 매혹되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 쉽게 이해할 수는 없으나 어쩐지 멋져 보이는 용어나 개념은 작품의 본질을 꿰뚫는 듯싶고, 단순한 감상을 그럴듯해 보이는 해석으로 바꾸어 주기도 하니까. 실제로 어느 정도 길이 들고 나면, 마치 샐러드 먹을 때와 고기를 썰 때 사용하는 칼이 다르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어떤 작품에는 이런 이론이 맞고 어떤 작품에는 저런 이론이 적절하다는 판단도 제법 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문학비평에서 이론의 효용과 용법을 조금씩 알게 되면, 이론이라는 도구가 손에 맞는 독서의 무기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정말 비평에서 이론이 필요한가에 대해서는 근본적인 의문이 있다. 문학 독서의 오랜 금언은 역시나 작품 자체에 대한 꼼꼼한 읽기에 있고, 작품 자체로부터 우러나오는 감동이나 통찰에 있다고 우리는 믿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 충실한 보조가 되어야 할 이론이 어쩌면 독서 자체를 집어삼키거나, 난해한 곡예에 올려놓는 역효과를 내지는 않을까? 그래서 어딘가에서는 이론을 멀리하고 작품에 충실하라는 충고도 곧잘 듣지만, 그것이 문학 독서와 비평, 연구에 다가서려는 우리를 만족시키는 것은 아니다. 도대체 이론이라는 무기를 어디까지 신뢰하고 어떻게 해야 잘 쓸 수 있을까? 아니, 문학비평과 연구에서 이론을 사용해야 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이론은 꼭 필요할까? 아마도 비평과 연구라는 작업을 손에서 놓지 않는 한, 이 같은 의문은 종내 풀릴 것 같지 않지만, 그럼에도 이 시점에서 한 번쯤 다시 돌아보는 것은 여러모로 필요한 일이 아닐까 싶다. 이 글은 비평과 이론의 딜레마에 대한 자기 정리이자 설득의 한 방편이기도 하다. 2. 형식주의와 리얼리즘의 역설 언어학자 로만 야콥슨(1896~1982)은 청년 시절인 1910년경 ‘모스크바 언어학회’라는 모임을 조직하고, 시와 언어의 관계에 대해 젊은 시인들과 열띤 토론을 벌였다. 같은 시기에 페테르부르크에서도 ‘시어연구회(OPOYAZ)’가 결성되었으며, 두 학술 모임은 후일 ‘러시아 형식주의’라는 학파로
- 관리자
- 2025-03-01
고통을 견디는 연습: 팔레스타인에 대해 말하기 안지영 1. 그날 광화문에서 커피를 사러 가는 길에 너는 거의 혼잣말처럼 말했다. “대사관이 여기 있었네” 이스라엘을 규탄하는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하는 사람을 보고 너는 그것이 팔레스타인 대사관이라는 걸 알았다. 그때 옆에서 너의 말을 들은 친구는 말했다. “아 여기, 그 우크라이나 대사관이야. 그, 전쟁 난 곳 있잖아.” 너는 “아” 하고 잠시 멈칫하다 말 잇기를 그만두었다. 사실을 정정하는 너의 말이 친구를 비난하는 투로 들릴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쌓여 왔던 너의 분노를 잘못된 대상을 향해 터뜨릴까 봐 겁이 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너에게 상처가 되었다. 그래도 말하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팔레스타인에 대해 한 사람에게라도 더 알렸어야 하는 게 아닐까. 가까운 지인에게조차 팔레스타인에 대해 말하지 못한다면 이 이야기를 누구와 나눌 수 있을까. 그 참혹한 비극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연습이 필요했다.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 비극의 무게를 함부로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팔레스타인 문제는 우크라이나와 같으면서도 다른 것이다.1)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전쟁이라기보다는 집단 학살에 더 가까운 것이니까. 그것도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 일어난 느린 죽음(slow death).2) 트위터에 팔레스타인 관련 소식을 팔로잉하며 너는 거의 매일 폭격받는, 울면서 호소하는, 폭탄에 맞아 피 흘리는, 기아로 온몸에 거죽밖에 남지 않은 아이들을 보고 있었다. 신생아에 가까운 죽은 아이를 안고 오열하는 아버지. 하얀 천에 쌓인 시신들. 학교, 병원, 재활센터를 공격하며 제네바 협정을 위반하고도 제지를 받지 않는다는 사실 앞에서의 절망.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라며 경악하다가 어느 때는 담담하게 스크롤을 올리다 어느 순간에 울음이 터져서 창을 닫고. 그러다 다시 켜서 그걸 다시 보고 기도했지만 결국 깊은 무력감에 빠졌었다. 어쩌면 팔레스타인에 대해 일상에서 말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바닥, 절대 악 그런 게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는 것의 막막함 때문에. 그 말을 입 밖에 꺼내고 난 이후 다시 일상을 영위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이 너의 입을 닫게 만든 것이다. 아니, 너는 그저 인간으로서 죄책감을 애써 외면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상을 영위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너는 그것들을 찾아보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자학하듯이 그것들을 보며 끊임없이 이 고통이 언제 끝날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건 팔레스타인 문제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2. 계엄이 선포된 이후, 새벽까지 잠 못 이루는 날들이 반복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은 밤중에 자다가 깨어나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강연 영상을 보았다. 헤드폰을 끼고 바닥에 누워 네, 다섯 번을 반복해서 작가의 목소리를 듣고 또 들었다. 죽은 자들과
- 관리자
- 2025-03-01
시대와 응답* ― 한강과 90년대 문학의 (비)정치적 감수성에 관하여 최진석 1. 감수 능력과 문학 2024년 12월 10일, 스웨덴 스톡홀롬의 콘서트홀에서 노벨문학상 시상식이 열렸다. 그 주인공은 한국의 소설가 한강. 스웨덴 한림원은 그의 여러 작품 중 『소년이 온다』를 대표적으로 거론하며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선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 평가했다. 1980년 광주에서 벌어진 학살과 고통의 참화를 세계 시민들의 보편적 공감으로 끌어올린 문학적 성취에 관해서는 앞으로 끊임없이 탐구되어야 할 것이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받기 직전에 벌어진 사건, 즉 광주의 역사로부터 44년이 지난 현재 시점에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 계엄이 재연되었다는 점에 있다. 여전히 진행 중인 이 사태의 정치·사회적 후폭풍에 대해서는 일단 말을 아끼자. 지금은 한강의 문학적 성취가, 더 정확히 말해 ‘노벨상 수상’보다는 작품 세계를 통해 표현해 낸 ‘문학적 울림’으로서의 성취가 어떤 토대에서 나온 것인지, 작가 개인의 재능을 넘어서 어떤 시대사적 배경으로부터 발아한 것인지 묻는 것이 더욱 유익할 성싶다. 만일 그것이 작가의 개인적 재능에 전적으로 기인했다면 우리는 그에 더 보탤 말이 없다. 하지만 이로부터 한강으로 상징되는 한국문학의 ‘높이’나 ‘폭’을 운위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이 뿌리를 내린 문화적 감수성의 토양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감수성이란 묻기 어려운 주제이다. 그것을 가시화하는 여러 지표를 선택하고 분류하는 어려움은 차치하더라도, 도대체 감수성을 정의하고 실체로서 규정짓는 것 자체가 힘들기 때문이다. 객관성과 실증성이 신뢰의 유일한 담보물이 되는 우리 시대에 주관성과 모호성으로 둘러싸인 이 감각의 구성물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어쩌면 감수성이란 실물을 통한 증명의 문제라기보다 그에 다가서는 자가 감수(感受)하여 공명함으로써 받아들여야 할 경험은 아닐까? 1970년대에 태어나 1990년대를 기점으로 글쓰기를 실천해 온 한강과 그의 시대는 이 같은 공감적 경험의 지평선에서 우리를 부르고 있다. 70년대생 작가들은 90년대에 접어들며 본격적으로 문학장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예컨대, 1970년생 한강의 경우 93년에 시로, 94년에 소설로 등단했다. 그럼, 90년대는 어떤 시대였는가? 알다시피, 그 시기는 ‘1987년 민주화’가 이루어진 직후이며, 민족‧민중문학으로 대변되던 이전의 흐름과 ‘다른’ 의미에서의 새로운 문학이 모습을 드러내던 시점이었다. 다시 말해, ‘운동으로서의 문학’이라는 명시적인 사회‧정치적 의제가 문학장에서 빠져나가고 보다 자유롭고 유쾌한 감성으로 충전된 ‘문화의 시대’가 그때의 시대적 분위기를 대변하는 말이었다.1) ‘서태지와 아이들’, ‘무라카
- 관리자
- 2025-01-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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