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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아주 조금 망했을 뿐이므로

  • 작성일 2025-04-01
  • 조회수 712

   사실은 아주 조금 망했을 뿐이므로 

   -김지연의 『조금 망한 사랑』이 번역한 ‘반려(종)-되기’에 대해


                                                                               김영삼


   1


   한국문학의 숲을 지배했던 우세종으로서의 퀴어 서사는 면역 정치의 배제성(팬데믹)과 죽음 정치(차이 나는 존재에 대한 절멸을 기획했던 정치 기술)의 강박을 거쳐 새로운 관계성의 지점으로 나아가고 있는 듯하다. 젠더 권력의 신화에 맞서 퀴어적 친연성에 주목했던 김지연의 서사가 동성 연대(또는 소수자 연대)의 친밀성이 모종의 불안으로 인해 균열되는 순간으로 그 시선을 확장하고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따라서 『마음에 없는 소리』와 『조금 망한 사랑』1)의 변별 지점은 김지연의 서사가 퀴어적인지 아닌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작품에서 인물들이 겪는 불안의 원인이 다르다는 데 있다. 관습화된 젠더 권력의 얼굴 없는 폭력이 전자의 불안이라면, 소수자끼리의 관계성 파괴 또는 연약한 주체들 간의 관계 위기가 후자의 불안이다. 김지연의 소설집 『조금 망한 사랑』은 이러한 불안의 감정이 연약한 주체들이 새로운 관계성의 레시피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어떠한 오류와 마주하게 했는지에 대한 보고이자, “우리는-(모두)-여기에-함께-있지만-하나가-아니고-똑같지도 않”2)은 연약한 주체들 간의 차이 그 자체에 대한 보고서이기도 하다. 이들이 겪은 사랑과 이별에 대한 김지연의 이야기들은 지워지거나 누락된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를 경유하여 공동체에 공동 거주하고 있는 모든 우리의 관계성에 대한 질문으로 나아간다. 이때 김지연 소설의 미덕은 혐오와 차별에 얽힌 ‘차이 없는 반복’을 답습하지 않으면서 돈, 불안, 사소한 균열, 약자다움의 감성 등과 같은 현실적 문제를 직면했다는 데에 있다. 



   2


   확장된 의미에서 김지연의 소설이 퀴어적인 것은 그(녀)들의 이야기가 ‘연약한 주체’(주변화, 성차화, 인종화되면서 상징적 자격이 박탈되는 ‘소문자 인간’)들이 경험하는 장면들을 서사화하기 때문이다. ‘대문자 인간’이 생산한 관습과 경계선들을 들춰내고 폭파하면서 그것의 패권을 의문으로 대상으로 만들고 그러한 세계의 문법이 모종의 사건들과 연루되어 있다는 혐의를 문제 삼을 때, 김지연의 소설은 퀴어적이고 때로 그것을 넘어 우리 사회 공동체 전체에 대한 사유가 된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조금 망한 사랑』에 수록된 이야기들은 동성-이성에 얽힌 관계성을 더 이상 전경화하지 않으면서, 세계와 직접 부딪고 있는 소문자 인간들의 삶의 지속성에 주목함으로써 전진하고 있는 듯하다. 끝끝내 ‘우리’를 떠나지 않는 반려종은 ‘불안’이라는 것, 그 불안으로부터 파생된 서툴기 이를 데 없는 사랑과 이별이 ‘빚’으로 남는다는 것, 그리고 이 과정을 겪은 연약한 주체들이 그 빚의 청산 유무와 관계없이 ‘평범함’의 장소로부터 이탈되고 있다는 것을 ‘망한 삶’의 풍경으로 보여 주면서 말이다. 그러니까 망했다는 것은 더 이상 평범하지 않다는 말과 등치되고, 평범하지 않다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 ‘대문자 인간’으로 규정된 경계의 바깥으로 배치된다는 뜻이 된다. 



   3


   먼저 김지연의 소설이 사유하는 평범하다는 것의 의미를 추적해 볼 필요가 있겠다. 「좋아하는 마음 없이」에서 평범함은 ‘약자다움’을 커버링(covering)한 학습의 결과로 보고된다. 언뜻 화자 ‘안지’는 낙인의 근거로 지목되는 소문자 인간의 속성(행동과 언어)을 교정함으로써 세계의 문법을 내면화하는 데 성공한 인물처럼 보인다. “전형적인 사람” 또는 “평균적인 사람”(138쪽)이 되고 싶었다던 그녀는 “그저 무난한 사이”였던 남자와 “남들이 연애할 때 하는 일들”을 무난하게 수행했다. “서로 좋아 죽는 것만 빼면”(이상 139쪽), 그녀의 커버링 작업은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작 그녀의 마음은 연약하기 이를 데 없어 보인다. 자신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헷갈려 하거나 표현하지 않는다. “따뜻하고 달고 쓰”기도 한 맛이면서 “뒷맛은 조금 떫”(167쪽)기도 한 차의 맛을 좋아한다는 진술은, 그녀가 좋아하는 마음과 좋아하지 않는 마음을 결정할 승인 주체가 되어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한다. 그래서 “누가 나쁜 짓을 해도 금방 용서”(154쪽)를 해 버리기도 하고, 심지어 상간녀에게 남편과 아이를 빼앗겨도 화를 내지 않는다. 찻물이 뜨거울까 봐 상간녀에게 물을 끼얹지도 못하는 이 불필요한 배려가 시니컬하고 쿨한 태도인지 연약한 마음인지 알기 어렵다.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 하는 것에 가까워 보이는 이런 행동 양식은 평범한 삶에 도달하기 위해서라면 그러한 것쯤은 참고 견뎌야 한다고 생각하는 약자다움의 생존 논리에 준한다. 그렇다면 그녀의 은폐술은 성공한 셈인가? 

   문제는 소설이 이 은폐술의 균열 지점을 집요하게 주목한다는 점이다. 자기감정을 자기 검열하며 억제하는 자신에 비해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잘 알고 솔직한 사람”이어서 “뻔뻔할 수 있는 사람”(158쪽)으로 그려진 상간녀에 대한 화자 ‘안지’의 모호한 태도(좋아할 수는 없지만 싫지도 않은)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선택한 관계들이 모두 사소한 것들(주로 돈과 관련된)에 의해 파국으로 마무리되는 경험으로 말미암아 차라리 ‘좋아하는 마음 없이’ 무언가를 선택(당)하는 것이 더 안전하지 않을까 라는 ‘안지’의 태도가 사실은 연약한 주체들의 생존 기술이라는 것을, 자신의 평범한 삶이 어떤 불안 요인에도 노출되지 않은 채 평온하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해괴한 디저트 대회’가 실상 ‘안지’의 희화화된 불안이라는 것을, 이 소설은 끈질기게 문제 삼는다. 그러니 극장의 편한 의자에 앉아 스릴러를 관람하면서 자신의 안전함을 확인받는 관객처럼, 너무나 평온하여 해괴한 맛의 디저트라는 안전한 균열을 소비하고 “지갑 속에 전남편의 가족사진을 넣고 다니는 이유”를 해괴한 에피소드 대회의 소재로 소비하면서 자신의 불안을 해소하는 ‘안지’의 은폐술이 과연 성공한 것인지, ‘안지’의 삶이 과연 평범함에 이르렀는지 의문이다.        



   4


   커버링에 실패한 인물이라면 「경기 지역 밖에서 사망」의 ‘상욱’도 뒤지지 않는다. 미리 말하자면, 이 소설에서의 평범함은 이탈한 인물의 복귀로 보고된다. ‘상욱’은 “누구보다도 법 안쪽에 있고 싶어 하는 사람”(56쪽)으로 진술된다. 그는 이 세계의 법칙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제대로 된 튜토리얼이 주어지지 않은 세계”), 이 세계의 세계관을 터득했다(“시행착오를 거치며 게임 매뉴얼을 숙지하듯이 알아낸”, 이상 44쪽)고 믿는다. 또한 그는 패싱(passing)(“상대방에게 얕보이면··· 호구 되는 거 순식간”)되지 않기 위해 자신이 해당 집단의 속성(“멍청하게. 순진하게. 꼴사납게”, 이상 45쪽)과 연루되어 있지 않다는 자기 인식을 강화하고, 법의 권리를 통해 “싼값의 육체노동”(42쪽)에 부려지는 “하청업체 현장직 노동자”(44쪽)라는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커버링한다. 

   소설은 ‘대문자 법’이 주휴수당, 근로계약서, 초과근무 수당, 산재보험금 등의 최소한의 권리로 쉽게 등치되는 장면을 보여 주면서 인물에 대한 비판적 거리를 확보한다. ‘상욱’이 믿어 의심치 않는 그 법이 실상 게임의 규칙을 만드는 사람들의 권리에 비해 최소한 죽지 않을 정도의 소소한 권리에 불과하다는 사실과 ‘상욱’이 대문자 인간의 알량한 협상안을 최고의 아이템이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기만술에 포획된 인물이라는 것을 이 비판적 거리를 통해 소설은 사유하게 한다. 그가 이를 모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룰을 만드는 사람들은 조금씩 다 그런 폭력적인 데가 있는 것 같았다. 룰 자체가 폭력적인 것이기도 했다.”, 64쪽), 그가 결코 “이 세계의 세계관”(44쪽)에서 벗어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도 함께.

   그 근거는 반장과 ‘미주’라는 여성 인물을 통해 간접적으로 보충된다. 먼저 반장, 자신의 운동신경이 좋아서 큰 사고를 피할 수 있었다고 믿으며 그것을 다행이라고 여기는 반장, 작업 수칙을 지키지 않는 현장(법의 불능과 무능)에서 프레스기에 오른손이 껴 버린 사고를 당한 ‘상욱’이 산재 처리를 하겠다고 하자 “세상 참 좋아졌다”(61쪽)라고 말하는 반장은 사고의 원인을 피해자의 무능력과 부주의 또는 영악함으로 호도하는 대문자 인간들의 논리를 대변한다. 이런 점에서 반장은 ‘상욱’과 다르지만 가해자의 논리를 답습하고 강화한다는 점에서 반장은 ‘상욱’의 미래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미주’, 베틀그라운드에서 1등을 하는 것보다 기절했을 때 팀원이 살려 주는 게 더 좋다는 ‘미주’, 타인을 죽이지 않아도 평화롭고 평범할 수 있는 세계(‘에란겔’)를 보기 위해 ‘상욱’과 동행한 ‘미주’, ‘상욱’에게 “여자들이 누구 때문에 제일 많이 죽는지 알아요?”(65쪽)라고 질문하며 젠더적 관습의 폭력성이 ‘상욱’과 같은 지방 청년에게 다른 이름으로 가해질 수도 있음을 말해 준 ‘미주’는 ‘상욱’이 믿는 이 세계의 문법이 얼마나 평범하지 않은지를 보여 주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평범함이 ‘경기 지역 바깥’이자 이름도 낯선 지방의 어느 구석(영춘호)에서라야 겨우 도달할 수 있는 세계이고, “여자가 겁도 없이”(63쪽) 낯선 남성의 잠재적 폭력과 예상을 벗어난 모종의 위험을 감수해야만 겨우 경험할 수 있는 장소라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소설에서 노인의 등장은 이러한 지점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더욱이 이러한 역설이 ‘상욱’의 생각에 의해 진술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가 자신이 이해하는 세계에서 탈출하지 못할 가능성이 더 커 보이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따라서 그가 ‘미주’에게 느끼는 이중의 감정(자신이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존재라는 억울함과 자신이 남성성을 어필할 수 없는 존재로 여겨지는 의아함)은 피해자들이 느끼는 불안에 대한 공감의 결과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일들은 분명 법의 테두리 바깥에 있는 것”(56쪽) 때문이라는 공감의 결여, 법이 작동되지 않는 현장에서 자기가 원상 복구되지 않는 사고를 당했음에도 연약한 주체들이 놓인 불안의 자리를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상상력의 결여에 가깝다. 경쟁과 능력주의가 지배하는 이 세계의 평범함에서 자신이 소외될지도 모르는 불안감이 ‘상욱’을 지배하는 감정의 풍경이다. 그는 이 전쟁터 바깥으로 벗어날 생각이 없다. 조금 길지만, 경기 지역 바깥에 착륙한 후 소외의 불안을 느낀 그가 “똥줄타게 달려가는”(71쪽) 장면을 증거로 남겨 둔다. 


   상욱은 외따로 떨어진 곳에서 홀로 죽지 않기 위해 총소리가 나는 쪽으로 달려간다. 거기서 타인을, 그러니까 적을 발견할 것이고, 숨을 참으며 총을 겨눌 것이고, 운이 좋다면 그의 머리를 맞히는 데 성공할 것이다. ···더 운이 좋다면 상욱은 다른 모두를 죽이고 홀로 살아남을 수도 있다. 홀로 살아남는 것. 최후의 일인이 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짜 승리다. 이 게임 안에서 다른 방식의 승리는 없다. 그래서 상욱은 어떤 식으로든 자기 홀로 살아남는 때가 오기를 바란다. 그런 때가 오면 상욱은 총을 모두 내려놓고 적들의 시체 상자 앞에서 춤을 추며 승리의 기분을 만끽할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타인이 쏜 총에 맞고 먼저 쓰러져 버리는 일이, 죽어 버리는 일이, 패배해 버리는 일이 훨씬 더 많다. 때로는 경기 지역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밖에서 죽어 버린다. 그게 상욱을 초조하게 한다. 주식을 살 때 가장 설득력이 있었던 말도 그것이었다. 지금 들어가야 된다니까. 남들은 다 들어가 있어. 들어가야 한다. 들어가야 한다. 상욱은 살아서 들어가고 싶다는 마음으로 전력 질주한다.(「경기 지역 바깥에서 사망」, pp.71~72.)



   5

  

   「포기」에서 보고된 평범함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내가 상상한 평범한 삶이라는 게 웬만한 건 다 충족된 삶이었다는 것도 나중에 깨달았다. 집이 있고, 차가 있고, 일 년에 한두 번 해외여행을 가고, 함께 여행 갈 애인이나 친구나 가족이 있는, 그런 게 평범한 삶이 아닌가 생각했었다. ···그건 아주 어렵게 얻을 수 있는 특별한 삶이었다. 민재가 말한 평범한 삶이란 불운과 함께하는 삶이었다. 살면서 한두 개의 불운이란 없을 수가 없으니까 그것이야말로 평범한 삶이었다.” (「포기」, 25쪽) 


   이 작품의 화자 ‘나’(미선)에 의하자면 ‘웬만한 것’들이 말만큼 웬만하지 않아서 ‘평범한 삶’은 ‘특별한 삶’의 도달하기 어려운 충분조건이 된다. 도달하기 어려운 장소임에도 그것이 평범함으로 명명되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불운을 경계하며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그것이 일상이라는 점에서 불안이라는 특별한 감정은 너무나 도달하기 쉬운 ‘평범한 삶’의 필요조건이 된다.      

   앞서 언급한 작품들에서 ‘망한 삶’은 인물들이 상정한 ‘평범함’의 장소에서 이탈되는 것이었지만, 불안이라는 감정에 주목하면 「포기」가 보고하는 ‘평범한 삶’은 예상치 못한 사건을 예상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에 가깝다. 가령, 집주인이 전셋값을 갑자기 올린다거나, 다니던 회사가 갑자기 망한다거나(「경기 지역 바깥에서 사망」의 ‘선미’), 믿었던 친구나 애인이 돈을 갚지 않은 채 잠적했다거나(「포기」, 「반려빚」), 돈 때문에 이별을 선고한다거나(「긴 끝」), 이와 유사하게 사소하지만 누군가에게는 ‘필사적’일 수밖에 없는 일 따위들이 없는 상태 말이다. 사소하고 소소하기 때문에 더욱 더 불안에 가까운 것들. 그렇다면 망하지 않는 평범한 삶이란 불안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것이거나 ‘필사적’이지 않아도 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대수롭지 않은 듯 살아가고 싶었지 필사적으로 살아남고 싶지 않았다. 매일 매일 죽기를 각오하며 살고 싶지 않았다.”(「경기 지역 바깥에서 사망」, 61쪽)라고 말한 ‘상욱’의 진술은 그래서 더 아프다.  

   불안의 반대말을 안도라고 할 수 있다면, 평범함은 「긴 끝」에서 ‘문애’가 ‘찬희’의 몸을 안고 무방비 상태인 자신의 가장 연약한 부분까지도 안심하고 노출할 수 있는 ‘믿음’(“맘 놓고 귀를 맡길 수 있는 이 신뢰감”, 124쪽)이기도 하다. 상대가 나의 깊숙한 곳을 공격하지도 않고 위생의 정도를 평가하지도 않을 거라는 안도감의 상태. 또는 일상을 애써 꾸미거나 과시함으로써 자신의 평온함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잘 사는 걸 보여 주고 싶은가 보지. 잘 살고 있는 걸 누가 봐 줬으면 하나 보지.”, 121쪽/“하지만 그런 건 금방 다 피로해졌고 주말 낮에도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타임라인이나 피드를 끝없이 새로 고침 하는 게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122쪽)이기도 할 것이다. 타인에게 보여지고 평가받음으로써 평범함을 승인받지 않아도 되는 상태. 안온함, 안도감, 안정감, 안전함 등 편안함의 의미를 공유하는 모든 명사형에 깃든 감정들. 

   ‘문애’의 진술을 직접 듣는 것이 더 좋겠다. 


   “설레는 게 좋은가. 긴장되고 불안하기만 한데. 속을 알 수 없어서, 확신이 안 들어서 서글프기만 한데. 문애는 익숙함이 좋았다. 권태를 좋아했다. 나른함, 무기력함, 나태함이 문애를 안도하게 만들었다. 거의 매일이 뚜렷한 희로애락이 없는 희미한 감정의 연속이었고 어쩌면 그건 감정적으로 빈곤한 상태인지도 몰랐지만 문애는 아무런 이벤트가 없다는 것이, 매일을 겹쳐보면 다른 점이라곤 거의 없는 반복되는 일상이 만족스러웠다. 지루함 속에서 무한정으로 행복했다. 그건 문애가 어렵게 이룩한 것, 마침내 구한 것, 쟁취한 것이었다.” (「긴 끝」, 118~119쪽) 


   곧이곧대로 읽으면 될 일이건만, 왠지 ‘문애’의 쟁취가 불안한 이유는 뭘까. 그래서 문득 드는 생각들. 이 세계의 문법에서라면 이것이 연약한 주체들의 감정으로 라벨링될 패배적 도피의 증거로 채택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녀가 좋아하는 속성들이 어쩌면 불안을 증명하는 필사적인 “안간힘”(121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귀를 맡긴 ‘찬희’의 무릎이 이 세계에서의 관계성이 허락한 가장 최소치이자 최대치의 장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들 말이다. 짠해 보일 수도 있는 이들의 풍경을 누추하지 않게 청승맞지 않은 방식으로 보여 주는 것을 김지연 소설의 유쾌함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불안과 피로를 감춤으로써 자신이 연약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어떤 삶들의 보호색을 그대로 소설화한 것이라면, 그것은 미덕이 아니라 불안에 대한 가장 유쾌하고 따뜻한 방식의 리얼리티 전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함께. 



   6


   김지연 소설의 가혹함은 안도감을 가만두지 않고 기어이 그 불안들을 노출시키는 데 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끝끝내 우리의 곁을 떠나지 않는 반려(종)은 불안이어서, 「포기」의 ‘민재’는 믿었던 사람들의 돈을 갚지 않은 채 잠적해 버렸고, 「반려빚」의 ‘서일’은 애인 ‘정현’의 이름으로 빌린 전세 자금 대출금 팔천만 원의 채무를 떠넘겼고, 「긴 끝」의 ‘찬희’도 그놈의 돈 때문에 이별을 선언했다. 예상하지 못했고 예상하지 않아도 될 사소한 불안들이 현실화되면서 소설의 인물들은 ‘믿음’, ‘신뢰’, ‘안도’가 자리한 무조건적 상호 호혜성의 장소에서 ‘채권-채무’, ‘공증 서류’, ‘각서’ 등이 자리한 법률적 장소와 상태로 접어들게 된다. 법은 관계의 친밀성을 채권-채무의 차가운 온도로 응결시킨다. 

   서글픈 것은 저들이 믿음을 배신한 채 사라졌다는 사실이 아니라, 돈과 결합된 권리-의무 관계로만 누군가의 안부를 확인하는 것3)이 최대치의 관계성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지구 반대편의 어떤 철학자께서는 ‘인간과 동물과 사이보그에 관한 전복적 사유’를 하면서 ‘반려종 선언’4)을 하고 ‘실뜨기 연대’라는 이름으로 혈통으로 묶인 자식이나 가족이 아니라 인간종을 넘어서는 친척 관계를 만들자고 하면서 ‘사이보그 선언’5)까지 하는 판국에, “서로 보듬어 주고 보살펴 줄 그런 존재”(「반려빚」, 77쪽)라는 의미의 반려(종)의 한국적 현실태가 ‘고작’ 돈(빚)이라는 사실이 일견 서글프기도 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 빚(돈)이야말로 진정한 반려라는 김지연의 선언이 어떤 이중의 상태를 나타내는 면도 있기 때문이다. 가령 「반려빚」에서 ‘정현’이 ‘서일’과 사귀는 동안 느꼈던 부채감은 조금 성격이 달랐는데, 그것은 상대의 마음을 살피지 못했을 때의 미안함과 그걸 만회하기 위한 노력과 자신이 부족함 때문인 것만 같은 “빚진 마음”(83쪽)과 같은 것들이었다. 이는 「포기」에서 ‘나’가 이불이 뒤집어지지 않았는지를 확인하면서 안도하던 마음과도 다르지 않다. 법률이나 공증 서류에는 도저히 기록될 수 없는 이런 ‘빚진 마음’을 가해자들은 잘도 이용하지만, “합리적인 셈법으로는 도무지 취합되지 않는 자료들”(90쪽)이 가득한 이 마음에는 분명 이중적 속성이 내포되어 있다. 

   「반려빚」에서 ‘서일’이 남긴 빚을 모두 갚은 후에 ‘정현’이 느낀 “마침내 0이 된 기분”(105쪽)을 주목해 보자. 이 0이라는 숫자는 마침내 경제적 빚을 청산함으로써 복원된 평범함의 장소이면서, 돈과 매개된 차가운 빚과 상대를 마음을 살피는 따뜻한 빚이 모두 청산된 마음의 온도(0°)이기도 하다. 차갑게 응결될 수도 있고 따뜻한 방향으로 흐를 수도 있는 미결정 상태로서의 온도. 또 서로가 연약한 주체인 인물들의 관계를 차가운 법률의 자리로 이동시킬 수도 있고, 반대로 서로의 안부를 지속적으로 확인하면서 무조건적 증여 상태를 지속하는 상호 호혜성의 자리로 이동시킬 수도 있는 상태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권희철이 소설집의 해설에서 언급한 바 있는 “지연의 리듬”(해설, 314쪽)에 대한 보충 지점이기도 하다. 



   7


   먼저 차갑게 응결되는 방향으로 이동해 보자. 대체로 법률적 문서로 결합된 채무 관계는 일방의 일방적 파기로 인해 다른 일방의 포기를 종용하기도 한다. ‘이혼’이라는 법률적 승인을 원하는 ‘문애’의 진술이 대표적이다.       

       

   “문애가 이혼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것도 그즈음이었다. 찬희와 카톡을 주고받다가 서로에게 익숙한 농담에 자기도 모르게 낄낄거린 문애는 이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이혼을 했다면 그런 사이로 지내는 게 별로 거리끼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관계가 끝났다는 것, 정리되었다는 것은 명백했으므로, 하지만 이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다. 헤어졌는데도 계속 관계를 이어 가는 것이 이상했다. ···하지만 결혼을 하지 않았고 할 수도 없었으므로 이혼도 할 수 없었다. 열심히 축구장을 뛰고 골을 넣었는데, 관중석에서 수백의 사람이 환호하고 있는데, 아무런 골세리머니도 하지 않고 다시 경기를 뛰어야 하는 선수가 된 기분이었다. ···문애는 끝을 내고 싶었다. 그래야 다른 시작도 할 수 있었다.” (「긴 끝」, 131쪽) 


   ‘문애’와 ‘찬희’로 상징되는 친밀성은 승인 과정이 없는 관계(동성애나 동성혼 등 법률적 승인 대상이 아닌 퀴어라는 이름의 모든 관계), 그래서 애매한 상태로 사랑과 이별의 궤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관계, 끝난 적이 없으므로 시작도 불가능한 관계라는 속성이 중첩되어 있다. 법률로 얽힌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청산도 불가능하다. 이는 빚이 반려가 되는 이유이기도 해서, 「포기」의 ‘호두’가 ‘민재’에게 ‘각서’를 요구하기 전까지는 둘 사이의 채무 관계가 청산(포기)되기 불가능한 것과도 다르지 않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호두’의 진술이 가능하다. “두 달 세 달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자 또 배신당한 기분이었지만 이번엔 그냥 포기해 버렸다. 그건 정말 원하지 않던 포기였다. 하지만 해야만 했다.”(37쪽) 

   이는 친밀성과 얽힌 관계만이 아니라 김지연 소설이 등장시키는 다수의 인물들이 놓인 비정규 계약직과 같은 임시 승인 상태와도 공명한다. 정규직과 같은 완전한 승인이 아닌 이들의 삶은 불안정하고 불안하다. 「경기 지역 밖에서 사망」이 은유적으로 보여 주는 게임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게임 속 캐릭터는 쉽게 죽을 수 있지만 완전한 생존에 이르기는 어렵다. 이번 단계의 승리는 완전한 생존의 보장이 아니라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갈 수 있는 자격에 불과해서, 한 사람만이 최후의 승자가 되는 세계에서 완생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6) 김지연의 소설은 불안정하고 불완전한 존재들의 불안한 사랑과 이별을 완결되지 않는 구조로 서사화함으로써 그들의 관계성이 파국으로 완료되지 않게 지연시키고 있다. 

   물론 이러한 관계도 결국은 끝나기도 한다. 다만 그것이 안도감이 지배하는 평범함의 자리가 아니라 불안이 지배하는 망함의 자리로 다시 이동하는 것이라는 점이 다르겠지만 말이다. 인용문에서 ‘문애’의 다짐은 이혼이 불가능하므로 지연된다. 그래서 궁상맞게 ‘찬희’가 반려종 ‘환타’를 산책시키는 공원을 염탐한다. 지연된 이별은 ‘환타’ 대신 ‘작고 흰 강아지’가 ‘찬희’의 무릎에 안겨 있는 장면과 ‘찬희’가 다른 여자와 입을 맞추는 것을 보고 나서야 가까스로 완료된다. 대체로 종이짝에 날인된 서명 따위 없는 미공증 관계는 그렇게 간단한 대체 또는 교환(작고 흰 강아지, 어떤 여자, 새로운 비정규직 노동자 등의 등가물)으로 완료되는 법이기도 하니까. 따라서 “늦게서야 무엇이 끝났고 무엇이 끝나지 않았는가를 생각했다”는 소설의 마지막 진술에는 지연되었던 이별이 끝났다는 의미와 잠시 모습을 감추었던 불안이 다시 소환되었다는 진실이 은유되어 있다. ‘문애’는 불안이 상존하는 평범함의 자리로 다시 돌아왔다. 



   8


   김지연의 이야기들은 예정된 이별을 지연시키면서 불완전한 방식으로나마 상대의 안부를 확인한다. 채무 관계에 묶이지 않았던 「포기」의 ‘나’와 ‘민재’의 관계처럼, ‘나’가 고동이라는 곳을 몰래 방문하는 것처럼, 「반려빚」의 ‘정현’이 끝내 차용증을 쓰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미결정 상태의 온도가 따뜻한 방향으로 이동하는 이야기를 하려는 참이다. 이별이 남긴 빚이 정말로 반려가 되는 이야기. 그래서 묻는 질문, 과연 ‘민재’는 안녕할까? 

   ‘민재’는 정상적 셈법의 세계에서 지워졌다. 비록 그가 자신을 믿었던 사람들의 신뢰를 배신하면서 ‘경기 지역 바깥으로’ 사라졌지만, 그러한 일들이 김지연 소설의 인물 누구에게라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떨까? 소설의 서사에서 그가 잠적해야만 했던 모종의 이유, 소설이 밝히지 않음으로써 미궁으로 남겨진 그의 안부, 김지연의 의도적 생략으로 의심되는 ‘민재’ 서사의 누락이 ‘애도 가능성의 차이’7)를 연상하게 한다면 이것은 과잉 해석이 될까? 

   이를테면 「경기 지역 바깥에서 사망」의 ‘상욱’의 상황을 보아도 그럴까? ‘미주’가 던진 질문(“여자들이 누구 때문에 제일 많이 죽는지 알아요?”)은 ‘상욱’에게 세계의 구조가 갑자기 의문시되는 경험을 하게 하면서, 자신의 어리석음을 노출시키고 기존의 감각으로 동화될 수 없는 장소로 그를 이동시킨다. 그녀의 질문은 젠더 폭력에 의해 죽어 가는 여성들처럼 누락 가능 명단에 놓인 자신 또한 지워질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 변환되고, 애도의 대상이 되지 못한 채 감쪽같이 사라져 버려도 아무에게도 기억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으로 확장된다. 그러니까 이런 ‘상욱’의 이야기가 ‘민재’ 서사의 대리 보충이라면, 「포기」의 ‘민재’와 「반려빚」의 ‘서일’은 여전히 ‘나쁜 놈/년’들이기만 할까? 

   버틀러는 비극은 언제나 개인적이고 단수적인 문제지만, 그와 동시에 “세계의 구성 자체”(버틀러;44)와 연루되어 있다는 감각을 요청한다. 이 요청을 받아들인다면 김지연 소설의 인물들이 놓인 자리가 단수적이고 특수한 경험들이 아니라, 사회적 구조로부터 괴리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구조가 실제로 어떻게 연약한 주체들에게 경험되면서 재생산되는지를 보여 준다고 읽는 것이 무리는 아닐 것이다. 

   내가 올바르게 행동할 때 상대도 다르지 않게 행동할 것이라는 기대, 서로의 행동이 복제될 것이라는 믿음, 이 무조건적 호혜성의 전제가 균열되는 순간을 김지연의 소설은 이별이라고 부른다. 돈을 들고 튈 때가 아니라. 또 우리를 둘러싼 “세계는 완전히 바뀌어 버렸지만”, 그럼에도 “미쳐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도 태연하게, 무탈하게 잘 살아갈 수 있으리라”(「긴 끝」, 117쪽)는 순진하지만 따뜻한 온도가 차갑게 무너질 때를 김지연 소설은 이별이라고 부른다. 채무 관계가 끝날 때가 아니라. 비록 『조금 망한 사랑』 속 인물들이 돌연한 이별 앞에서 느끼는 배신감에는 연약한 주체들 간의 관계만은 안전할 것이라는 순진한 믿음에 대한 징벌의 성격이 있지만, ‘그만 정신 차려. 언제까지 안전할 줄 알았어.’라며 불안의 엄습을 예고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이별이 오기 전까지 서로의 안부를 묻는 일(이어야 한다는 것)을 김지연 소설은 사랑이라고 부른다. 비록 평범하지 않아도. 

   이런 의미에서 나는 평범함의 자리에서 이탈된 채 망한 삶이더라도, ‘민재’의 안부를 묻게 된다. 소설의 서사에서는 삭제되었지만 애도 가능성의 차이에 연루된 연약한 주체들이 언제라도 ‘우리’일 수 있으므로. 그래서 「포기」의 ‘나’와 ‘호두’도 자꾸 ‘민재’의 안부를 확인하는 것은 아닌지, ‘때리면 아프겠지’라는 호두의 술주정이 사실은 자신도 맞으면 아프다는 말은 아닌지, 그런 방식의 서툰 공감일지라도 언젠가 우리에게도 그런 안부조차 간절할지도 모르므로, 어쩌면 아주 ‘조금 망했을 뿐인 사랑’이므로. 



   9


   인류세와 자본세의 위기를 넘어서기 위한 해러웨이의 진지하고 당위적인 ‘반려종 선언’을 김지연은 한국적 현실로 재번역하면서 평범하지만은 않은 관계성 안에서 사유하는 듯하다. 한국에서 태어난 죄로 인해 살아 있는 동안 빚을 갚기 위해 열심히 살아야 할 수밖에 없음에도, 여전히 요구되는 것은 연약한 주체들 간의 친밀성일 것이다. 관계의 불안정성에 놓인 연약한 주체들이 경제적 매개(특히 돈의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이, 약자로 라벨링 되기를 피하기 위해 스스로를 커버링함에도 불구하고 결국 망한 삶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힘들다는 사실이, 이 세계에 다시 접속하기 위해 요청되는 능력이 결국 친밀성이라는 사실을 덮지는 못할 것이다. 망가진 행성의 공동 거주자들이 더 망가지지 않도록, 비록 조금 망했을지라도 여전히 돌봄과 연대의 수행이 요구된다는 것을 김지연의 소설에서 읽는 것은 그래서 당연한 일일 것이다. 「유자차를 마시고 나는 쓰네」에는 김지연이 보고한 새로운 반려에 대한 상상 한 구절이 있다. “유자는 설탕에 포개어져 다디달게 절여질 것이고 겨우내 썩지 않을 것이다.”(287쪽) ‘절여지다’ 대신 쓰인 ‘포개어지다’는 따뜻하고 안온한 느낌을 준다. 그렇게 포개어지는 평범한 삶들이 오래도록 썩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든다.



1) 김지연, 『조금 망한 사랑』, 문학동네, 2024.

2) 로지 브라이도티, 『포스트휴먼 지식』, 김재희·송은주 옮김, 아카넷, 2022, 87쪽.

3) 가령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굳이 안부를 새삼스레 묻지 않아도 되는 관계에서 채무 관계를 거쳐 생존을 확인해야 하는 관계로의 이행을 말해 준다. “돈이 제일인 세상에서 그거만큼 확실한 안부 인사가 어딨어.”(36쪽) “민재의 완납을 영원히 나중으로 미뤄 버리면 안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37쪽. 이상 「포기」) / “빚이야말로 정현이 잘 돌보고 보살펴 임종에 이르는 순간까지 지켜봐야 할 그 무엇이었다. 빚 역시 앞으로 수년간은 정현의 옆자리를 떠나지 않을 것이고, 정현이 죽었나 살았나 그 누구보다도 두 눈 부릅뜨고 계속 지켜볼 것이다. 빚이야말로 정현의 반려였다.”(「반려빚」, 79쪽)

4) 도나 J. 해러웨이, 『해러웨이 선언문』, 황희선 옮김, 책세상, 2019.

5) 도나 J. 해러웨이, 『트러블과 함께하기 - 자식이 아니라 친척을 만들자』, 최유미 옮김, 마농지, 2021. 김지연의 소설에서 대체로 가족들은 도움이 되지 않거나(「긴 끝」에서 ‘찬희’의 가족들), 좋아하는 마음이 없거나(「좋아하는 마음 없이」에서 ‘안지’의 상황에 냉담했던 부모), 무례하다(「포기」에서 ‘호두’의 엄마가 남긴 보험금을 마음대로 이용하고 일부만 돌려준 외삼촌인 ‘나’의 아빠)는 점에서 해러웨이의 선언은 타당하기도 하다. 이는 ‘안지’가 친자식을 포기할 때도 적용될 수 있겠다. “핏줄이 뭐 대단하다고. 안지는 자신과 핏줄로 엮인 사람들을 생각했다. 이제는 거의 연락도 하지 않는, 아마 죽을 때에야 연락이 닿을 사람들을, 좋아하는 마음 없이 함께 살아야만 했던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 사람들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내렸던 선택들을 생각했다.”(163쪽)

6) 한국 사회의 청년들이 놓인 상황을 게임에 비유한 적확한 설명으로는 김홍중의 글이 대표적인 것 같다. 김홍중, 「서바이벌, 생존주의, 그리고 청년시대」, 『사회학적 파상력』, 문학동네, 2016.

7) “나는 애도 가능성이 어떻게 불공평하게 할당되어 있는지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사회적 불평등을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해 왔다. 불공평한 할당은 사회적 불평등의 주요 요소인데, 일반적으로 사회 이론가들은 이를 중요하게 고려해 오지 않았다. 공공연하게든 아니면 암묵적으로든 어떤 집단이나 인구를 애도 불가능한 것으로서 지정하는 것은 그들이 폭력의 대상이 되거나 혹은 그 죽음에 따르는 대가도 없이 죽게 내버려둘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차별적인 애도 가능성에 의해 확립되는 사회적 불평등은 제도적 폭력의 한 형태로 드러날 수 있다.”(주디스 버틀러, 『지금은 대체 어떤 세계인가』, 김응산 옮김, 창비, 2023, 1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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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5-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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