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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버랜드 탈출기

  • 작성일 2025-05-01
  • 조회수 367

   네버랜드 탈출기

   ― 김희준론1)


최다영


   1. 신(新) 아카이브 프로젝트


   선행 평론에서 적확하게 포착하고 있듯 “근원이나 태생에 대한 감각”이나2) “원형 회귀본능”을3) 말하지 않고서는 김희준의 시에 접근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들은 현상의 내밀한 원인을 해명하거나 김희준의 시적 작업이 내포한 고발과 대항 의식을 읽어 내기엔 여전히 충분하지 않은 키워드이기도 하다.

   수록작이기도 한 ‘사기(史記)꾼’이라는 제목은 충실한 아키비스트(archivist)이자 교란하는 트릭스터(trickster)라는 상반된 함의를 모두 내포한다. 혹은 아키비스트의 본령이 트릭스터일 수밖에 없음을 일깨우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기(史記)꾼’으로서 김희준은 고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신화와 성서, 동화 등 무수히 집적된 공동체적 기억의 편린을 환상적으로 중첩하고 그로테스크하게 변형시킨다. 그리고 이렇게 비틀고 왜곡하는 지점에서 김희준만의 원형적 이미지가 접속 면의 틈을 찢고 출현한다. 그의 시의 근간을 형성하는 태(胎)가 익숙한 공통의 근원 서사에서 발생했을지언정 반복적으로 그려지는 성교와 번식, 근친과 식인의 모티프는 공포스러운 재생 감각으로 연결되며 그만의 개인적 이미지로 일관되게 수렴하는 것이다.

   바르부르크의 언급대로 이미지가 생물학적 필연성의 산물이라면, 김희준이 강박적으로 봉합하고자 한 거대 명제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인류는 종교, 예술, 문학 등 다양한 방법을 경유하여 원초적 두려움으로부터 자신과 공동체를 보호하며 종의 계승을 보존해 왔다. 출생과 소멸에 대한 두려움은 어느 인간도 피해 갈 수 없기에 해결할 수 없는 보편타당한 종의 운명 앞에서 이를 추상화하고 거리를 둠으로써, 또 사회적 집단 기억을 대를 이어 계승함으로써 두려움을 봉합하고 파토스를 안정시켜 온 것이다.

   마찬가지로 김희준은 그 자신의 개인적 이미지를 개발하고 반복적으로 중첩시킴으로써 이미지의 기원에 대한 대답을 동시대에 가장 분명하게 제시하며 등장했다. 김희준에게 있어 기원을 더듬는 일은 그 계보를 추적하는 것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화적 세계관을 축조하고 공고히 하는 데 있다. 그리고 이때 감지되는 건 신화와 동화의 알레고리 이면에 자리한 가부장적 폭력에 대한 고발과 저항 의식이며 더 나아가 발생과 소멸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 두려움이라 할 수 있다.



ⓒ엄윤채 (@90r1p)



   2. 재생하는 네버랜드 


   김희준의 시 속에서는 무언가가 끊임없이 쏟아져 내린다. 그것은 주로 ‘소나기’이지만 때로는 “불”이기도 하고(「인류도감」) “아이”이거나 “유성”(「백색소음」), “사내”(「페스티벌」), “밀도 높은 당신” 혹은 “저녁”(「오후를 펼치는 태양의 책갈피」, 「테트리스 적응기」), “게르만족의 숲과 캐럴”(「오리온자리―성운의 수태고지, 트리에 걸린 첫눈과 슬픔에 빠진 거인」), “꿈”이나 “환생”(「뱀주인자리―재생되는 낮과 밤, 아스클레피오스의 백사」) 등으로 다양하다. 맹렬히 쏟아져 내리는 것들에 몸이 파이는 일도 부지기수다.

   그런데 이 ‘소나기’ 계열의 이미지들은 시집 전체에서 빈번히 포착되는 생명의 무한한 발생 및 재생과 긴밀히 연관되는 것으로 보인다. “쏟아지는 유성우는 잠든 아이의 꿈속이거나 깊은 잠 그 자체”(「뱀주인자리」)로서 ‘알’이라는 원형을 한 ‘환생’이자 ‘꿈’과 등치되는데, 동시에 “행성의 다채로운 심장”이기도 하므로(「쌍둥이자리―배태하는 백조의 아이들; 북하北河의 껍질」) 무작위로 떨어져 내리는 것들은 아직 태어나기 이전 생명의 가능성을 잉태한 개체들이라 할 수 있다. 즉, 끊임없이 무언가가 태어나고 번성하는 이 세계에서 하강하는 소나기―국지성 폭우는 무수한 빗방울을 발생시킨다는 점에서 번식과 재생의 거대한 발생 기제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폭발적인 욕동을 가진 것으로 제시되는 출생의 감각에서 촉발된 ‘집단 성교’는 자연물이나 다른 종과의 교접으로도 이어진다.(「8구역」, 「궁수자리―오만한 현자와 거룩한 반인반수의 땅」)

   그런데 이들이 이렇게 끝도 없이 쏟아져 내리는 건 다름 아닌 ‘중력’ 때문이다. 수직적 하강의 이미지가 빈번할수록 그 아래에서 마구 끌어당기며 폭식하는 힘, 불가항력적인 ‘중력’은 더욱 강하게 제 존재를 드리우는 것이다. 지상에서 수태가 일어나도록 추동하는 폭압으로서 ‘중력’은 김희준의 시 세계에서 ‘새아버지’로 표상되는 모든 폭력과 억압의 이미지로 이어지고, 이 아버지의 폭력의 희생양이 되는 건 언제나 아이들이다. 김희준 시에서 아버지는 폭력적인 새아버지와 무능하고 한심한 아버지의 두 유형으로 나누어지는데, 실은 하나의 ‘아버지’가 양가적인 속성을 가지고 둘로 나누어진 것이며 각각 환상에서의 아버지와 현실에서의 아버지를 의미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중 ‘새아버지’ 계열에 속하는 “새아버지”나 “친구 아버지”는 “열 살” 아이를 “무릎”에 앉혀 놓고 성추행을 하거나 어린 남매의 “아랫도리를 벗겨 놓”는 강압적인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피터팬”은 이러한 새아버지의 계열을 대표하면서 폭력으로 점철된 네버랜드의 불온한 작동 방식을 폭로한다.

  

 아이와 더 어린 아이 작은 아이끼리 모여 사는 집에서 죽은 제 새끼를 삶아 먹고 아오지형을 선고받은 피터팬이 산대 어젯밤에도 휘파람이 불었던 저 집에선 성장은 독이래 늙은 아이를 솎아내는 피터팬 사춘기를 막 지난 아이에게 알몸으로 다니라고 했대 요정의 수명이 짧은 이유이기도 하다던데 압록강에서 발견된 요정 무리는 속이 모두 없었대 비워진 내장 대신 꽃송이가 피어 있더래 다가올 크리스마스에 각지로 떠날 신장이 아이스박스에 담겨 있었대 일련의 번호와 바코드가 몸에 새겨지면 누군가의 선물이 될 거래 (…) 혹여나 소용돌이를 타고 새 터에 자리를 잡아도 피터팬은 네버랜드로 가자 총을 내밀었대 크지 못하는 아이와 더 어린 아이와 작은 아이가 있는 그 겨울로 가자고 캐러멜과 젤리와 들꽃이 들어찬 저 집으로 돌아가자고


―「너의 네버랜드」 부분



ⓒ아니 (@nai_de_su)



   네버랜드는 “아이와 더 어린 아이 작은 아이”들이 모여 사는 아이들만의 낙원이다. 그런데 네버랜드가 아이들만의 거주지가 될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정말로 아이들이 늙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늙은 아이를 솎아내는 피터팬”이 있기 때문이다. “사춘기를 막 지난 아이에게 알몸으로 다니”라는 요구는 여전히 ‘아이다운’ 몸을 유지하고 있음을 증명해 보이라는 역설적인 요구이자 아직 “더 어린아이”들에게 “성장은 독”임을 일깨우는 무거운 경고로 읽힌다.

   피터 팬은 ‘아이다운’ 발육 상태를 벗어난 이들을 검열하고 솎아냄으로써 영원한 아이들의 세계라는 네버랜드의 명맥을 유지해 나간다. “늙은 아이”를 “삶아 먹”거나 배를 가르고 장기를 팔아넘기는 건 “더 어린 아이”들로 구성된 세계의 환상을 유지하는 네버랜드만의 작동 방식인 것이다. 이렇듯 인위적으로 네버랜드의 발육을 조장하는 잔혹한 진실이 이면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아이들은 “발육이 멈”추고 “크지 못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실은 발육이 덜 되고 아직 크지 않은 아이들만이 네버랜드에 생존해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피터 팬의 폭력적인 모습은 “제 이론과 맞지 않으면 발을 잘”라 버리는 “비평가”(「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와도 겹쳐진다. 특정 발육 상태를 벗어나는 아이를 가차 없이 솎아내는 피터 팬과 같이 “프로크루스테스” 또한 특정한 침대 크기에 맞춰 사람의 신체를 잘라 내거나 늘여 버리는 괴물인 것이다. 그로 인해 “도시”는 기형적인 신체를 가진 동물과 사람으로 가득하다.

  피터 팬의 폭력은 네버랜드를 이탈하는 아이들에게까지 집요하게 따라붙는다. 이때 “네버랜드로 가자”며 손이 아니라 “총”을 내미는 “피터팬”은 더 이상 꿈과 해방을 약속하지 않고 오히려 폭력의 세계로 아이들을 납치해 간다. ‘가자’는 것이 아니라 “돌아가자”고 말하는 것에서 원래 있던 곳이 네버랜드이며 아이들은 그곳으로부터 가출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가출팸”에게 “신고식으로 두들겨 맞”으면서도 “거리를 헤”매는 ‘마틸다’는 길거리보다 더한 폭력이 난무하는 집으로 귀환하기를 거부하지만 거리가 가하는 위협은 생존 그 자체와 직결되기에 “어서 짐 싸”라는 말에 결국 다시 네버랜드로의 “비행의 지름길” 위에 올라타고 만다.(「방황하는 마틸다」) “공공 화장실”에서 태어나 버림받은 아이 역시 “집을 잃은 아이”로서 거리를 헤매지 않기 위해서는 폭력이 난무하는 곳이라도 가지 않을 수 없다.(「조커의 난타적 성향」) 따라서 이 네버랜드는 탈출이 절대(never) 불가능한 곳이다. 네버랜드는 가정 내 폭력의 알레고리로 기능하면서 결코 ‘나의’ 네버랜드가 되지 못하고 ‘너의’ 네버랜드에 머문다.



   3. 사투르누스의 나르시시즘


   그런데 이런 새아버지의 폭력은 식인 행위와 연결된다는 점에서 단순한 폭력으로 치부될 것이 아니라 보다 심층적인 내면 의식의 탐구가 필요해 보인다. 피터 팬뿐만 아니라 김희준의 시에는 마치 사투르누스처럼 제가 낳은 “아이를 먹어 치”우는 부모의 이미지가 빈번히 등장한다. “아버지는 아버지를 삼”키고 “키우던 햄스터”는 “제 새끼를 삼”키며(「습하다」) “거대한 중력을 가진 행성”은 “약한 별을 빨아먹고 있”는 것이다.(「소행성09A87E」)


 전등이 꺼지기 전에 아무튼 돌아가거나 먼저 두 블록 꺾어 왼쪽으로 나오면 골목 보이지 그 수족관에 알을 낳는 거야 그리고 우리는 아침으로 알탕을 먹는다 입안에서 알이 터질 때마다 응앙응앙 소리가 들리는 건 비밀로 하자


―「생경한 얼굴」 부분


   그렇다면 아이들을 도대체 왜 잡아먹는 것인가? 단지 버리거나 죽이고 마는 것이 아니라―심지어 제가 낳은 알을 “알탕”으로 끓이면서까지―삼키고 먹는 이유는 무엇인가?

   시집 전체에서 감지되는 불온한 근친의 기운부터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근친의 흔적”이 드리우는 가운데 “엄마와 나는 서로를 핥으며 멜라닌을 채”우고(「알비노 인간」), 버려진 형제는 “정글짐 너머”에서 “녹슨 맛”의 “혀”를 “나눈”다.(「백색소음」) 소년은 “누나야”에게 “운명을 섞으면 근친이 되는 것인지” 물으며 “우리의 근원이 그날 밤”이었음을 확인한다.(「소년기의 끝」) “남편”은 “딸애의 방문 앞에서 히득거”리고(「측별 가능한 마르살라 씨의 불면증」) 딸은 자신이 “아버지의 어린 후처라는 생각을 벗어나지 못”해 근심하고 불안해한다.(「시집」)

   나와 가장 가까운 유전자와 교접하는 근친은 근본적으로 나르시시즘적이다. 흔히 멜랑콜리의 나르시시즘적 동일시는 구순기까지 퇴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구순기에서 생명 유지를 위한 음식 섭취와 성적 쾌감은 구강이라는 한 기관에서 동시에 충족된다. 멜라니 클라인에 따르면 후기 구강기의 식인 충동은 사디즘적 환상과 죽음 충동이 환기하는 불안으로 인해 내부의 제거하고 싶은 부분을 외적 대상에게 투사하고 그를 다시 내사하는 투사적 동일화의 결과라 할 수 있다.4)

   하지만 여기에는 또한 어머니와의 원초적 합일을 희구하는 양가적인 심리가 내포되어 있는 듯하다. 먹는 행위를 통해 아이는 욕망 대상을 온전히 독차지하고 어머니와 분리되기 이전의 온전한 합일, 충만한 근원으로의 회귀를 지향하는 것이다. “토르소의 빈 젖”이나 “늙은 여자의 빈 젖”을(「드므개 마을」) 빠는 행위 역시 유아기적 고착을 표상한다는 점에서 이자 관계로의 회귀 추구와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맥락에서 누드모델의 “배꼽을 그리”다 “그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며, “다시 들어가게 해” 달라고 “엄마”에게 애원하는 화자는 어머니와 분리되기 이전의 세계를 강하게 동경하고 그리워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상실의 피그말리온」) 그런데 이 회귀에의 욕동은 “어머니 몸에 들어가거나 공격하려는 욕망”으로서 “어머니를 내부로부터 통제하기 위해”5) 아예 어머니의 몸을 “찢어” 버리는 다소 폭력적인 모습으로 발현된다. 가령 캔버스에 비스듬히 배꼽을 그려 넣는 모습은 “두꺼운 피부를 절개”하는 행위와 동일시되며 어머니의 배를 가르고 그 안에 자신을 도로 집어넣는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배를 가르는 행위가 재생을 멈추고자 하는 욕동인 동시에 그 근원 자체를 없애 버리겠다는 강렬한 죽음의 지향이 되는 것이다.



ⓒ아니 (@nai_de_su)  



   하지만 그러한 회귀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기에 김희준의 화자들은 그저 ‘완전한 나’와의 나르시시즘적 욕망에 천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물론 자신과의 성교 또한 태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때문에 나르시시즘을 최선의 극단으로 밀고 간 자리에는 자기 자신과의 간접적인 성교인 근친 행위가 있게 된다.

   “혀를 나누”고 “서로를 핥”는 구강 행위로 대표되는 근친은 자신은 물론 자신이 낳은 아이를 삼키고 먹는 행위로까지 확장된다. 씹고 삼키고 소화시키는 행위는 구강 행위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으며, ‘내’가 낳은 것은 ‘나’와 가장 가까운 외양과 유전자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또 다른 나’라 일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김희준 시에서는 끊임없이 본인이 낳은 것을 본인이 먹는 양상이 발견되는데, 이는 ‘나’를 폭식하여 너무나 ‘나’ 자체로 충만해지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욕망은 김희준 시의 모든 주체들에게 전이된다. 먹고 먹는 행위 속에서 화자와 타인은 뒤섞이며 구분 불가능해져 어느 틈에 “나는 당신”이며 “당신은 나”가 된다.(「에덴의 호접몽」) “어쩌면 이전부터 나는 내 아내일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나’는 “내가 나를 삼킬 때” 아내가 “환생”하는 것을 보는데, 그렇게 다시 태어난 ‘아내-나’는 다시 ‘나’의 입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렇듯 아이를 폭식함으로써 배를 불리는 사투르누스적 욕망의 근저에는 단순히 자신의 생장을 막고자 하는 걸 넘어 어머니가 자신을 도로 삼키고 근원적인 본향으로 되돌려주기를 바라는 갈망이 있다. 아무리 어머니를 찢어도 욕망을 절대 충족할 수가 없으니 나르시시즘적 성애와 근친의 구강 행위를 거쳐 결국엔 제 자식―자기 자신―을 먹어 치우고야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작위로 태어나는 아이들은 곧 그 자신이기도 하다.(“영생의 땅에서 빈 알을 낳아 나를 꺼내리라.(「뱀주인자리」)”) “끊임없이 내가 태어”나는 일이 멈추지 않거나(「탁아소의 쌍생하는 낮잠」) 알에서 “정교하게 부화”하여 “태어”나는 것이 다름 아닌 ‘나’라는 진술은 재생을 멈추지 않는 이 세계의 질서에 대한 분명한 두려움을 내포하고 있다.(「뱀주인자리」)



   4. 무한 회귀하는 요르문간드


   한편 근친의 본질이 자신과의 성애라 할 때, 꿈은 이러한 자신과의 교접이 실현되는 환상의 장소로 기능한다.


 이따금 뱀이 꿈에 나옵니다

 실뱀이고요 의인화할 만한 형체가 없습니다

 꼬리를 물 수 있을 정도로 긴 뱀이 선명합니다

 거대한 허물은 배경으로 남습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어머니를 낳고

 나는 상자를 낳습니다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마디로 교미하는 지렁이는 쾌락일 뿐

 번식하지 못합니다

 깨고 나면 사라질 잠깐의 기억과 동의어입니다

 자신을 집어삼키면서 정자를 뿜거나

 동시에 한 달에 한 번 뜨거운 태양을 분출할 수 있습니다

 뱀은 나를 헤집습니다

 척추의 능선이 관능적으로 다가옵니다

 질척한 체액을 뿌릴 때 이따금 꿈을 꿨다 생각합니다

 속옷에 손을 넣고

 오래전 잘라버린 내 정체성을 더듬습니다

 광활한 흉터 몇 개와 바늘자국이 실뱀처럼 꿈틀거립니다

 잠의 잔상에서 심한 풍랑을 일으킨 것이 뱀인지 나인지

 벗어놓은 허물이 사람 가죽인지

 초점이 흐릿한 꿈의 끝에서 나는 꼬리를 입에 문 뱀처럼

 나를 연결합니다

 내 속을 찢자 우글대는 뱀 수십 마리가 튀어나옵니다

 뱀을 가르면 독에 젖은 내가 있습니다


― 「요르문간드의 띠」 전문


   “오래전 잘라버린 정체성”은 거세의 흔적을 암시하며 남성이나 여성으로 정의될 수 없는 성, 혹은 양성을 모두 가진 자웅동체나 분화 이전 결합된 부모인 이마고의 특질을 강조한다. 제 꼬리를 제가 물고서 둥근 똬리를 틀고 있는 요르문간드는 자기 몸의 다른 마디들을 접붙여 “교미”하는 지렁이처럼 자신과 성교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때문에 ‘나’를 “헤집”는 “뱀”은 곧 ‘나’ 자신이기도 한 것이다. “질척한 체액을 뿌”리는 교미 행위 뒤에 “뱀 수십 마리”가 자식으로 태어나고 그 뱀을 가르면 다시 “독에 젖은” ‘나’가 나타나는 모습은 자신과의 성애를 통해 다시 무수한 ‘나’들을 낳는 양상을 대표한다. 그리고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나’는 다시 이 ‘자식-자신’들을 삼키고 “꼬리를 입에 문 뱀처럼” 무한한 자기 회귀를 이어 나갈 것이다.

   이렇듯 ‘나’로부터 출발한 근친-출산-(삼킴)의 원형적 메커니즘은 도돌이표처럼 김희준의 시에서 반복적으로 이어진다. “거대한 허물”을 벗은 뒤 똑같은 모양의 뱀이 그 안에 웅크리고 있는 것처럼 중층적으로 쌓인 여러 겹의 모티프와 알레고리는 그의 시 세계를 수직적으로 관통하며 이 자기 회귀의 운동이 언제까지나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그리고 이런 아버지를 조롱하기라도 하듯 아이들은 끊임없이, 나무 위에서든 빗줄기 속에서든 어디에서나 태어나고 자란다. 아버지는 아이들의 발육을 막거나 이 무차별적인 출생을 막을 수도 없으며 더 나아가 모든 일의 근본 원인이 되는 자신의 출생 이전으로도 결코 돌아갈 수 없다. 

   한편 허물을 벗는 뱀의 이미지가 김희준의 시에서 빈번히 등장한다는 점은 주목을 요한다. 가령 「측별 가능한 마르살라 씨의 불면증」에서는 허물을 벗듯 “하품을 벗”자 “입이 찢어지고 머리가 젖기를 반복”하며 ‘나’가 반복적으로 태어난다. “생명의 탄생인지 하품을 하는 동안 죽어가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아서” 화자는 “울어야 하나 망설”이며 자신이 취해야 할 포즈를 고민한다. 이처럼 뱀이 허물을 벗는 이미지가 무한한 재생을 가리키는 것뿐만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도(「뱀주인자리」) 제시되는 것을 통해 시인이 출생과 소멸을 결국 같은 것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즉 김희준 시에서 허물을 벗는 뱀의 이미지는 발생과 죽음의 동일시를 가장 극명하게 표상한다.

   앞서 모체의 배를 가르는 이미지가 암시하고 있었듯 김희준의 시에서 탄생과 죽음은 등치되는 것으로 포착된다. 절개된 복부는 그 자체 생명의 탄생과 근원지의 파괴라는 양가적 의미로 해석될 수 있으며 “가른 배에서 죽은 아이가 나왔다”거나 “우는 아이와 웃는 아이가 동시에 태어난다”(「조커의 난타적 성향」)는 서술은 이를 더욱 분명히 증거한다. 「드므개 마을」에서도 ‘어린 어머니’와 ‘더 어린 여동생’의 헛구역질은 임신과 출생을 암시하는 듯 보이지만 다들 굶주려 있는 데다 “죽은 새끼 짐승”이 함께 있는 모습은 죽음 역시 탄생과 한 공간에 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김희준 시가 세계 내 무한 증식을 저지하고자 하는 더욱 근원적인 차원에서의 원인이 감지된다. 동시에 길항하는 것처럼 보였던 발생 거부의 충동과 탄생 이전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욕망이 결국은 소멸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같은 지점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자들의 무한한 발생을 두려워하고 필사적으로 이를 막으려 하는 의식의 밑바닥에는 죽음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가 도사리고 있다.



   5. 중력을 이기는 방식 ― 물구나무서기


   이 거대한 중력 작용과도 같은 ‘새아버지’의 폭력과 유한자의 숙명에 대한 시적 주체들의 대응 양상은 먼저는 그러한 힘에 맞서는 것으로 나타난다. 위에서 아래로 짓누르는 힘에 역행하기라도 하듯 위로 뛰어오르거나 어딘가로 달리는 양상이 빈번히 나타나는데, 이러한 운동은 모두 ‘근육’을 바짝 수축시켜 단번에 폭발적인 힘을 분출한다는 특징을 공유한다. 시집 전체에서 근육과 혈관 등의 시어가 빈번히 발견되며 무생물과 관념 등도 몸을 가진 존재로 그려지곤 하는 것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근육이나 혈관, 감각할 수 있는 질감을 입고서 운동성이 부여된 것처럼 묘사된다. “물의 혈관”(「인디고 비행」)과 같이 만지거나 밟거나 안아 보는 식의 접촉이 가능하므로 주체들이 “역동적”으로 감각할 수 있는 것인 동시에 그들 스스로가 몸을 움직이거나 “성교”하는 운동성의 한 주체가 되기도 한다. 가령 “뭉텅이로 잘라도 돋아나는”(「열대야」) 근육의 모습은 재생성 근육 자체가 내포한 집요하고도 그로테스크한 생명력을 암시한다.

  한편, 팽팽히 근육을 당기는 긴장의 상태를 지속시키면서도 장시간의 지구력을 요한다는 점에서 ‘물구나무서기’는 이러한 중력 거부 운동의 극단에 위치한다.


 비의 근육을 잡느라 하루를 다 썼네 손아귀를 쥘수록 속도가 빨라졌네 빗방울에 공백이 있다면 그것은 위태로운 숨일 것이네 속도의 폭력 앞에 나는 무자비했네 얻어맞은 이마가 간지러웠네 간헐적인 평화였다는 셈이지 중력을 이기는 방식은 다양하네 그럴 땐 물구나무를 서거나 뉴턴을 유턴으로 잘못 읽어보기로 하네 사과나무가 내 위에서 머리를 털고 과육이 몸을 으깨는 상상을 하네 하필 딱따구리가 땅을 두드리네 딸을 잃은 날 추령터널 입구에 수천의 새가 나아와 내핵을 팠던 때가 있었네 새의 부리는 붉었네 바닥에 입을 넣어 울음을 보냈네 새가 물고 가버린 날이 빗소리로 저미는 시간이네 찰나의 반대는 이단(異端)일세 아삭, 절대적인 소리가 나는 방향에서 딸의 좌표가 연결되는 중이네 물구나무를 서서 세상을 들어 올리는 내가 있네 빗줄기를 잡느라 손은 손톱자국으로 환했네 물집이 터졌으나 손금에는 물도 집도 없었네 단지 여름이 실존했네


― 「악수」 전문


   거꾸로 선 화자에게 세상은 하늘이 아래를 향하고 땅이 머리 위에 드리운 모양을 하고 있다. 때문에 몸을 지탱하기 위해 땅을 받치고 선 두 팔은 “세상을 들어 올리는” 적극적인 실천이 된다. 이는 땅에서 한 뼘쯤 떨어져 여태 아래로 향하고 있던 것들을 위로 들어 올린다는 점에서 중력의 수직적 작용에 전면으로 맞서는 행위이기도 하다. 시의 제목이기도 한 ‘악수’는 “비의 근육”을 움켜쥐느라 안으로 주먹을 말아 쥔 모양을 연상하게 하면서 “손아귀를 쥐”는 것과 마찬가지로 근육들이 긴장하고 수축해 있는 상태를 대표한다.

   그런데 이러한 ‘중력 대응 운동’이라는 큰 모티프 아래 ‘아버지와의 동일시와 대결’이라는 더 심층적이고 내밀한 모티프가 자리하고 있음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김희준 시에서 ‘아버지’는 “실직”하여 방 한구석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거나(「습하다」) “멍”들어 “까맣게 누워 있”는(「홀로그램 바나나」) 무력하고 한심한 존재로 그려진다. “토막난 성기”(「사기(史記)꾼」) 역시 거세된 팔루스 세계에서 어떠한 대항을 하거나 누구 하나 지키지도 못하는 아버지의 무능함을 암시하는 듯하다. 김희준 시의 화자들은 이런 무능하고 무력한 아버지를 “개같”다고 칭하며 “빨간딱지를 아버지 이마에 붙”이고(「소행성09A87E의 행방」) “엉덩이 드러낸 아버지를 철썩 때리”기도(「습하다」) 하는 등 아버지에 대한 강한 적의와 불만을 드러낸다. 그러나 화자들은 아버지를 조소하고 혐오하는 동시에 그의 행위를 모방함으로써 아버지의 행적을 계승한다는 역설적인 특징 또한 보여 준다.

   가령 「8구역」에는 “파쿠르”를 하는 아버지가 등장한다. 앞서 꿈이 어떠한 실현을 가능케 하는 장(場)으로 기능함을 살펴본바, “고소공포증 때문에 의자를 발로 차지” 못해 자살도 못하는 아버지는 “꿈”에서만은 자유롭게 “건물과 건물 사이를 달”리는 것이 가능하다. 추락의 위험을 감수하고서 강한 추동력을 끌어모아 이 건물에서 저 건물로 뛰어넘는 파쿠르는 상승의 운동인 동시에 중력에 맞서는 운동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아버지의 운동은 어느 순간 “구름 사이로” 뛰는 화자의 운동으로 바뀌어 있다. 근육을 바짝 수축시켜 순간 폭발적인 힘을 발휘하느라 화자는 “팽팽한 혈관이 터질 지경”이다. 여기에는 무능하고 유약한 아버지를 대신하여 그의 의무를 이어받고자 하는 책임 의식이 내재하고 있다. 끝내 ‘나’는 “아버지를 밀어버리”고 “저수지”를 향해 “도약”하는데, 이곳은 “죽을 땐 아무도 없는 저수지에나 가버리”라며 아버지를 조롱할 때 언급했던 장소이므로 저수지를 향한 이 도약의 끝에서 감지되는 건 명백한 죽음의 기운이다. 아버지에게 내뱉었던 말의 수행을 자신이 대신 이행하여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아버지에 대한 화자의 대결 의식과 동일시가 동시에 발견된다.

   아버지를 증오하는데 왜 아버지를 직접 죽이지 않고 동일시 과정을 거친 후 아버지와 동일화된 자신을 죽이는 것인가? 역설적으로 이러한 동일시는 죽이고 싶을 만큼 아버지를 너무나 증오하는 마음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환상 속에서는 폭력적이며 현실에서는 무능하기 짝이 없는 아버지는 그 존재만으로 참을 수 없는 애증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김희준의 화자는 무의식적으로라도 누군가를 해친다는 게 어려운 것인지 “아버지와 어머니 둘 중 하나는 죽어야”(「시집」) 폭력이 멈추게 되는 극한의 상황에서 차라리 자신을 죽이기를 택한 것이다. 따라서 김희준은 시 속에서 아버지의 욕망을 계승하고 그와 동일화된 ‘아버지-나’를 죽인다. 그에게 있어 타인을 해치는 건 불가하지만 자기를 죽이는 건 오히려 쉬운 일이었던 것이다. 궁극적으로 김희준의 화자는 가까운 혈육을 흡수하고 아버지를 흡수한 뒤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이 세계의 무한 증식을 끝장내고자 한다.

   그렇기에 근육 운동 계열의 중력 대항 방식은 필연적으로 죽음을 전제한 자기희생의 도약이 된다. 앞서 본 「악수」에서도 “딸을 잃은 날”이라거나 “딸의 좌표가 연결되는 중” 등 자녀의 죽음에 대한 암시가 산재해 있다. 어쩌면 “다이달로스의 아이들” 역시 추락할 것을 알고서 일부러 하늘로 치솟은 것인지도 모른다. 주지하다시피 그리스‧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다이달로스는 미노스 왕의 미궁 라비린토스를 만든 아테네 최고의 장인이다. 그의 아들 이카로스는 태양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말라는 아버지의 금기를 어기고 태양 가까이 비상하여 날개의 밀랍이 녹아 바다에 추락해 죽었다. “그날 손을 놓친 건 지구로부터 몸을 버리러 온 밤이었기 때문”이라는(「환상통을 앓는 행성과 자발적으로 태어나는 다이달로스의 아이들」) 말에서도 암시되듯 “다이달로스의 아이들”의 죽음에는 “천진”한 고의성이 있다. 아이들은 자기가 죽을 걸 알면서도 ‘아버지’의 명을 어기고 능동적인 수직의 운동을 실천한 것이다.

   이렇듯 중력 대항의 한 방식인 수직적 운동의 계열에서는 근육 운동-아버지와의 동일시-자녀의 죽음이 차례로 감지된다. 마찬가지로 「꿈꾸는 모비딕」에서 ‘섬’이라는 이름의 거대 해양 생물체와 대결하는 이 역시 원래 아버지였으나 어느 순간 아들로 바뀌어 있다. ‘아버지’가 동일시의 대상이었다가 결국 화자에 의해 대체되는 존재로 그려지는 것이다. 여기서 “파도를 단숨에 찢어 오대양의 내장으로 들어가는” 아버지의 모습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모태의 배를 가르고 원형 지점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망과 맞닿아 있다. 또한 “녀석의 목을 잡고” 간 길의 끝에서 “만난” 아버지는 이미 죽은 것으로 암시되는데, 이는 곧 아버지와 하나가 된 화자 자신의 마지막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죽음이 곧 ‘나’의 죽음이 됨으로써 ‘아버지와 ‘나’의 동시 죽음이 달성되는 셈이다. 때문에 이 시의 마지막 문장이자 전체 시집의 끝 문장은 필연적으로 “발인”의 “시작”을 알리며 마무리된다.



ⓒ엄윤채 (@90r1p)



   6. 중력을 이기는 방식 ― ‘뉴턴’을 ‘유턴’으로


   다시 중력을 이기는 방식으로 돌아가 보자. 김희준의 시에는 중력으로 표상되는 외부의 폭압에 대한 또 하나의 대응 방식이 감지된다. 앞서 “물구나무를 서”는 것이 수직적 하강의 힘에 반대 방향으로 맞서는 방식이었다면 “뉴턴을 유턴으로 잘못 읽어보”는 건 그러한 수직적 긴장 관계를 부드럽게 꺾이게 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만유인력을 연상케 하는 ‘뉴턴’이 수직의 운동성을 대표한다면 ‘유턴’은 방향 자체를 비틀어 극도의 긴장이 축적된 역학 관계를 아예 무화해 버리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이 ‘유턴’은 둥글게 몸을 말아 무언가를 끌어안는 행위로 형상화된다. 끌어안는 것은 최소 둘 이상이 서로에게 의존해 무게를 나누는 모양새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혼자 맞서는 대응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함께’하는 대응이 된다.


 우울은 지구로부터 나를 당기는 일 엎드리고 싶은 날엔 천장을 오래 보았다 우주를 안느라 저려오는 팔 그 팔을 베고 잠든 어지러운 누나 (‧‧‧) // 겨울에도 반팔만 입는 누나 알약 봉지에서 잠을 자는 누나 굳은 기억을 삼키는 누나 우울을 굴리는 누나 // 둥글게 몸을 만다 팔을 뻗어 제 등을 쓰다듬는 누나 버틴다는 건 한쪽에서 놓아버린다는 말 (‧‧‧) // 누나를 굴린다


― 「로라반정 0.5mg」 부분


   ‘누나’는 강한 중력으로 자신을 “당기는” 지구에 맞서 자신을 당기느라 “우울”을 겪고 있다. “천장”을 향해 팔을 뻗어 “우주를 안”는 행위는 중력의 방향을 거스른다는 점에서 언뜻 수직적 대응으로 읽히지만, 이 안는 행위는 대상을 ‘누나’ 자신으로 점차 축소하며 방향을 이동한다는 점에서 ‘유턴’의 대응 방식에 해당한다. 둥글게 몸을 말아 “제 등을 쓰다듬는” 행위는 곧 스스로를 끌어안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우울을 굴리는” 누나의 행동이나 “누나를 굴”리는 화자의 행위 역시 둥글어지는 모양을 자연스럽게 연상하게 하여 끌어안는 행위의 한 비유로 기능한다.

   김희준 시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등뼈(척추) 역시 이러한 끌어안는 행위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몸과 장기를 둥글게 감싸안고 있는 척추는 그 자체로 무언가를 끌어안는 모양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앞서 근육이나 혈관 등이 바짝 수축한 긴장감과 운동성을 의미했다면 등뼈는 그보다 이완되고 안정적인 상태를 내포하는 것인데, 구체적으로 등뼈는 서로의 등을 쓸어 주기 위해 존재하는 듯하다. “부드러운 척추”를 가진 “강을 낀 마을”이나 “행성의 등뼈가 떠 있”는 “밤하늘”은 더없이 다정하며 이곳에서 다양한 주체들은 “서로의 등을 쓰다듬는다”.(「아무나씨에게 인사」, 「종의 기원」) 마찬가지로 ‘꼽추’들이 “서로를 쓰다듬”는 것은 뼈를 안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 시에서 “튀어나온 문장의 뼈” 자체가 돌출된 척추의 표상으로서 꼽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안아 주기’의 방식은 단순히 방향성에서만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게로 시선의 이동이 일어난다는 점에서 ‘물구나무’ 계열의 운동과는 완전히 다른 중력 극복 방식이기도 하다. 정확하게는, 굳이 극복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앞에 있는 상대를 마주 보고 껴안음으로써 온몸으로 그 중력을 함께 받아들인다면 충분하다는 듯 보인다.

   더 나아가서는 이 세상 전체를 끌어안으려는 거대한 포용력까지도 발견할 수 있다. 방대한 세상을 최대한으로 끌어안으려는 노력에서 화자는 ‘엎드리기’를 택한다. 직립 자세를 벗어나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리는 행위는 바타유의 언급처럼 위계나 분절을 무화하는 일인 동시에 무정형적인 물질과 무기물의 상태로 돌아가는 동물의 자세이기도 하다.


 어머니 엎드려보세요 세상은 내가 껴안을 수 없는 것으로 가득합니다 황금나무가 꿀을 품고 천장까지 자랄 것입니다 가지를 타는 흰 뱀은 환생을 꾀하고 거북이는 백사장 가득 알을 낳겠지요 중력에 눌린 명치가 무겁습니다 엎드린 잠은 딸꾹질과 통증을 유발합니다 (‧‧‧) 허울 없는 50번의 생일에서 어머니가 껴안은 것은 무엇입니까 지천명에 다다를 동안 품은 혁명 하나 없다고 우울하십니까 그럴 땐 손을 벌려 바닥에 엎드리세요 손아귀에 힘을 주고 백사장을 안아보세요 수천의 새끼가 알에서 부화하는 중일 겁니다 온몸에 털이 가득 나 있던 어머니의 첫울음이 그 몸짓과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 「태몽집」 부분


   화자가 ‘어머니’와 함께 껴안고자 하는 것은 “껴안을 수 없는 것으로 가득”한 드넓은 세상 자체이기 때문에 “손을 벌려” 땅바닥에 “엎드려보”라는 권유는 “안아보”라는 제안과 동의어가 된다. 온몸을 활짝 펴서 땅에 엎드리는 것은 이 세상을 끌어안아 보려는 적극적인 시도이자 땅과 포개어 누워 완전한 호흡을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때 중력의 작용 방향과 이들의 운동 방향은 일치한다. 때문에 “중력에 눌린 명치가 무겁”고 “딸꾹질과 통증”이 뒤따르지만 마냥 수동적으로 중력에 짓눌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껴안”는다고 말하는 인식의 전환을 통해 화자는 누워 있는 대지를 지금 자신과 안고 있는 것으로 일으켜 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50년의 세월을 거슬러 “첫울음”을 터뜨리던 어머니의 탄생과 “수천의 새끼가 알에서 부화하는” 지금 이 세상의 경이가 놀라운 방식으로 연결된다. 지천명에 이른 어머니는 그간 “품은 혁명 하나 없”어 “우울”을 앓고 있으며 세상은 여전히 폭력으로 난무하고 이로부터 보호해 줄 어른이란 없어 화자는 어린 몸으로 자신과 주변을 지켜야만 하는 처지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끌어안을 만한 신비와 경이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세상을 들어 올리는” 일에서 “유턴”하여 세상을 껴안기로 결정했을 때, 화자는 끊임없이 태어나는 생명의 순환을 통해 어머니의 삶과 그 삶을 물려받은 자신의 삶이 생을 이어 계승됨을 비로소 긍정한다. 그토록 그리워하며 돌아가기를 바랐던 근원적 세계에 대한 강박을 비로소 세상에 돌려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자 관계로의 회귀를 지향하는 ‘아버지’의 무의식은 제 어머니를 찢고 다시 모태로 돌아가고자 하는 파괴적인 나르시시즘에 기반해 있었다. 모태를 훼손해 버리는 것은 곧 출생과 발육, 죽음의 순환을 거부하고 인위적인 폭력을 가함으로써 유년의 시간을 멈춰 세우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반면 이 시의 화자는 아버지와 같은 욕망과 멜랑콜리를 공유하면서도 자연의 흐름과 상실에 저항하지 않고 그저 어머니와 함께 눕기를 택한다. 자신의 완전성에 복무해야만 하는 장치나 수단으로 어머니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한 개별 주체로서 바로 옆에 누운 어머니를 긍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끌어안기의 운동은 결코 폭력을 제거하거나 처벌하지는 못하겠지만 오히려 그 안에서 누군가의 삶을 완전하게 회복시키는 대응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엄윤채 (@90r1p)



   7. 우주 미아 정거장에서 발신된 편지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김희준의 시 속에는 ‘소나기’를 중심으로 무언가가 떨어져 내리는 이미지와 아이들이 태어나는 이미지가 빈번히 등장하는데 이는 아버지 세계의 폭력과 더불어 연대기적인 인간의 숙명을 상징하는 ‘중력’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제 자식을 잡아먹는 것으로 모자라 급기야 자신도 먹어 치우는 것으로 형상화되는 아버지의 폭력은 극단적인 근친 행위의 표출로 이해할 수 있으며 그 기저에는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고 어머니와의 이자 관계를 회복하려는 나르시시즘적 퇴행이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무의식은 ‘아버지’로부터 연유하였지만 이를 계승한 화자 자신에게 이미 내면화된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폭력에 대응하는 방식도 아버지와 동일시하여 타나토스에 이르는 경우와 아버지의 욕망에서 거리를 두는 계열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자의 경우 힘을 응축했다 터뜨리는 것으로 중력에 수직적으로 맞서는 ‘근육’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아버지와의 동일시와 대결 의식이 함께 나타나는 점이 특기할 만한데 이는 결국 아버지 살해 충동의 전이된 발현으로 이해된다. 다음으로 나타나는 ‘끌어안기’의 계열은 엎드린 모양으로 누움으로써 세상을 온전히 포용하는 형상을 취한다. 중력이 가하는 고통을 고스란히 받고 있기 때문에 언뜻 중력에 굴복한 듯 보이지만 실은 인식의 전환을 통해 그간 중력에 짓눌려 있던 것들을 끌어안고 다시 일으켜 세우는 적극적 실천 행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타자 회복으로의 시선 전환은 어쩌면 김희준 시인이 지닌 태생적인 성품과도 맞닿아 있는지 모른다. 김은상이 김희준을 가리켜 “고통의 역치가 지극히 낮아 타인의 모든 고통에 반응하는 사랑을 보여” 준다고6) 말한 것과 같이, 그는 세상의 모든 아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타인의 상처를 마치 자신의 것처럼 통감하며 받아들이는 시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결코 거창한 소명 의식의 발로나 그리스도의 대속처럼 희생양을 자처하는 방식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는 그저 옆자리를 지키며 등을 쓸어 주고 함께 눈물 흘리는 것만으로 완전한 사랑을 알았고 진심으로 이를 행할 줄 알았던 것이다.

   비가 아주 많이 쏟아져 내렸다던 7월 24일, 김희준은 “올리브 동산에서 만나”자는 말만 남긴 채 저쪽 세계의 ‘행성’으로 건너가 버렸다. 우리는 ‘손금’에 난 ‘손톱자국’을 통해 ‘단지 김희준이 여기 실존했음’을 기억할 뿐이다. “발인이 시작되는 목요일”을 알리며 끝맺음하던 시집의 맨 마지막 문장은 결국 시인 자신의 생애를 가리키게 되었다. 한 뼘짜리 시집 안에 아직 살아 보지 못한 시인의 삶이 예언처럼 펼쳐져 있다.



1) 2017년 등단하여 2020년 7월 영면한 김희준 시인은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문학동네, 2020)이라는 한 권의 유고 시집을 남겼다. 이후 미발표분 원고 한 편을 더해 시인의 기일인 7월 24일 자로 『행성표류기』가 출간되었다.(난다, 2021) 대개 이 책을 소설에 근접한 산문으로 읽는 듯하나 시 세계의 연장선에서 같은 방법론으로 쓰인 장편서사시에 더 가까워 보이며 시인 본인도 ‘환상 서사 시집’이라 명명한 바 있다. 이에 이 글은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을 주로 인용하되 『행성표류기』 또한 부분적으로 인용하기로 한다.

2) 홍성희, 「첫눈에게」, 『문학과사회』, 2020년 겨울호, 315쪽.

3) 최규리, 「정상성에 대항하는 불온한 존재들의 환상통: 새로운 행성을 찾아 떠난 ‘다차원적 아이’ 김희준」, 『시와세계』 2021년 여름호, 277쪽.

4) 줄리아 크리스테바, 박선영 역, 「정신병, 모친살해, 그리고 창조성: 멜라니 클라인」, 아난케, 2006 참조.

5) 위의 책, 129쪽.

6) 김은상, 「알비노 인간의 별」, 『계간 시작』, 2020년 겨울호, 1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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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5-01
파사칼리아의 거울

파사칼리아의 거울 ―배수아 소설과 음악들 인아영 최초의 소리 배수아의 신작 단편 「눈먼 탐정」(『문학동네』 2024년 겨울호)에는 무언가를 찾는 사람이 나온다.1) 스스로 탐정이라고 불리기를 원했으므로 아마 무언가를 추적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는 무엇을 추적하려는 것일까. 살인 현장을 가까스로 빠져나간 살인자? 희미하게 남아 있는 핏자국과 발자국?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끔찍한 비극? 그런데 그는 “뭔가를 발견하기를 원하지 않는다”(232쪽). 그에게는 살인 사건을 파헤치려는 목적이 없다. 대신 그는 뭔가를 보기를 원한다. 아니, 그러나 그는 ‘눈먼’ 탐정이 아닌가. 앞을 보지 못하는 그는 뭔가를 보기 위해서 눈이라는 시각 기관이 아니라 다른 도구를 이용해야 할 것이다. 하나는 ‘영혼의 막대기’로, 그의 삼촌이 오래전에 쓰던 물건인데 “수맥의 파장이나 지하 단층의 미세한 진동, 특정 물질의 방사선 에너지”(226쪽)를 감지해서 살인자가 달아난 방향을 추적한다. 다른 하나는 ‘귀’로, 이 청각 기관을 통해 그는 사람과 사물의 사소한 움직임, 동물과 식물의 은밀한 상호작용, 이를테면 돌의 속삭임 같은 것을 감지한다. 눈먼 탐정은 ‘나’에게 말한다. “그 속삭임을 들어 봐”(239쪽). 배수아의 근작들은 소리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의미를 가진 어휘들로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지만 동시에 의미로부터 멀어져 은은하게 울리는 음향들로 가득하다. 말이라기보다는 소리. 언어라기보다는 음악. 그러니 우리는 이 소설들을 읽기보다는 들어야 한다. 미지근한 여름 강물 위로 울려 퍼지는 날카로운 매미 울음, 오래된 동굴의 광물에 축적되어 있는 음향, 짙은 숲속을 달려가는 기차 신호음, 끝나지 않는 나선형 계단을 내려가는 누군가의 발소리. 확실히 해독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들리는 이 소리들은 때로는 웅성거림이나 속삭임, 파장이나 소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배수아의 소설들에서 서로 부딪치고 뒤섞이거나, 부풀어 올랐다가 잦아들거나, 되풀이되고 메아리치면서 무언가 아름다운 것를 만들어 내고 있다. 서사를 구성하고 있지만 그것을 보태는 장식이나 에두르는 묘사가 아니라 그 자체로 다른 차원의 서사를 만들어 내는 섬세한 구조물. 「눈먼 탐정」에는 이 아름다운 구조물의 기원이라고 할 만한 하나의 소리가 울려 퍼진다. 우체국 앞 우체통에 잠시 멈춘 여인은 우리가 한눈을 파는 사이 한 통의 편지를 재빨리 우체통에 던져 넣었다. 그날 이후 귀에는 최초의 소리가 산다. 묵직한 편지가 어두운 우체통 깊숙이 툭 하고 떨어지던 소리. (230쪽) (강조는 인용자) 지금도 기억나는, 우체통 깊숙이 편지가 툭 하고 떨어진 후에도 오래오래 울리던, 어둠을 닮은 최초의 소리. (234쪽) (강조는 인용자) ‘나’는 자신을 키워 준 젊은 여인이 바닷가 소나무숲에서 우체통에 은밀하게 넣은 편

  • 관리자
  • 2025-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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