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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움의 경제 2(2)

  • 작성일 2025-05-01

   새로움의 경제 2(2)

                                                                           강동호



   1. 새로움의 역설

   광인은 입을 다물고 청중들을 다시 바라보았다. 청중들도 입을 다물고, 의아한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았다. 마침내 그는 등물을 땅바닥에 내던졌다. 등불은 산산조각이 나고 불은 꺼져버렸다. 그가 말했다. “나는 너무 일찍 세상에 나왔다. 나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이 엄청난 사건은 아직도 진행 중이며 방황 중이다. 이 사건은 아직 사람들의 귀에 들어가지 못했다. 천둥과 번개는 시간이 필요하다. 별빛은 시간이 필요하다. 행위는 그것이 행해진 후에도 보고 듣게 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 니체, 『즐거운 학문』1) 


   ‘새롭다’라는 말은 대개 ‘다르다’ 혹은 ‘최근에 생산되었다’라는 의미가 결합된 단어로 통용되곤 한다. 새로움이라는 개념이 일상에서 빈번하게 사용되는 까닭은 그것이 대상의 특징적 차이를 지시하고, 그 특별한 가치를 강조하는 데 있어 가장 직관적인 기호에 해당해서일 것이다. 시장(market)은 이러한 ‘기호 가치’로서 새로움이 이견 없이 유통되는 대표적인 시공간 가운데 하나이다. 가령 어떤 자동차를 일컬어 ‘새로운 자동차’라고 규정한다면 우리는 해당 자동차가 여타의 자동차들과 다르며, 상대적으로 최근에 출시된 신상 모델이라는 사실을 즉각적으로 인지할 수 있다. 이때 새로운 자동차가 사람들로부터 더 큰 매력과 구매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자연스럽고 합리적이다. 새로움은 해당 제품의 기능적 우월성을, 그리고 그로부터 얻게 될 한층 차별화된 만족과 유용성을 표현한다. 여기서 새로움이라는 기호에 함축되어 있는 ‘차이’(difference)의 기제는 새로움이 일종의 비교적 가치라는 점을, 나아가 차이의 비교 우위를 정당화하는 원리가 발전·진보·개선 등의 시간적 내러티브와 밀접하게 연동되어 있음을 말해 준다. “우리 시대에는 차이가 최우선의 높은 가치를 지닌다”2)는 바우만의 진단처럼, 새로움의 가치화 현상이 기반하고 있는 것은 이른바 차이의 경제(economy of difference)이다. 차이적 가치 혹은 가치로서의 차이야말로 교환·거래를 활성화하는 매혹의 원천이자, 시장의 혁신적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경제적 원리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차이의 경제는 예술 작품의 미학적 의의를 규명하는 과정에도 유사하게 적용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주지하듯 예술은 작품들 사이의 차이를 판별하고, 원본성·독창성·창의성 등의 이름으로 작품의 새로움을 조명하려는 제도적 장처럼 인식된다. 하지만 예술 작품의 새로움이 차이의 논리를 통해 온전히 설명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통적으로 적지 않은 이견이 제기되어 왔다. 이를테면 키르케고르(Kierkegaard)는 새로움과 차이가 결코 동일하지 않으며, 때로는 대립적일 수도 있다고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이다. 그에 따르면 새로움에 내포되어 있는 근원적 역설(paradox)은, 새로움과 차이를 분명하게 구별해 주는 핵심 원리로 여겨질 수 있다. 그가 제기하는 문제의식의 핵심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대상의 특정한 차이는 우리가 그것을 차이로 인식할 수 있을 때만 차이로서 성립한다. 즉, 어떤 요소를 차이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은 이미 그 차이를 분간하고 인지할 수 있는 능력과 역량을 우리가 갖추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무언가가 유의미한 차이로 인정받고 환영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기존의 식별적 인식 체계 안에 안정적으로 자리 잡아야만 한다. 반면 새로움은 과거와의 완벽한 단절, 즉 기성 질서의 파괴와 해체를 의미해야만 한다. 그런 맥락에서 차이는 결코 근본적인 새로움과 동일시될 수 없다. 진정으로 새로운 것이 출현한다면,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그 존재를 인지조차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움은 비교의 원리에 기초한 인식·인지·평가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의 존재론적 단절과 도약을 통해 실천될 수 있으며, 동일한 이유로 신에 대한 종교적 믿음에 비견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새로움은 극히 드물고 예외적인 현상일 수밖에 없으며, ‘새로운 자동차’와 같은 범주 자체는 애초부터 성립될 수 없다. 새로움은 단순한 차이를 넘어선 차이, 기존의 구조적 코드나 평가 체계로부터 단절된 급진적이고도 혁명적 사건에 이르러야 하기 때문이다.3)  

   이러한 시각은 새로움에 대한 다소 극단적 원리주의(fundamentalism)를 대변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새로움의 역설은 예술사의 패러다임을 뒤흔들었던 수많은 혁신적 작품들이 어째서 뒤늦게 가치를 인정받을 수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해 주는 측면이 있다. 혁명적 새로움은 그 급진성으로 인해 동시대로부터 배척되고 소외될 수밖에 없으며, 종종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지금은 기념비적 걸작으로 추앙받는 적지 않은 작품들이 정작 당대인들로부터 철저하게 무시되고 저평가되었다는 사실은 단순히 우연이 아니다. 새로움의 급진성은 다름·차이·개성 등의 어휘로 묘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가치론적 위계질서 바깥에 존재하는, 전적으로 이질적이고 타자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 스스로가 수많은 오해와 비난, 그리고 조소에 시달렸던 니체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스스로의 예외성을 선언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내가 어찌 오늘날 세상에서 이미 환영받고 이해되고 있는 저술가들과 나 자신을 혼동할 수 있겠는가 - 실로 내일 이후에 오는 날만이 나의 시대다. 어떤 사람들은 사후(死後)에 태어나는 것이다.”4) 차이의 경제로는 산출될 수 없는 사후의 시간, 현재와 구별되는 이질적인 미래를 향한 요구는 혁신적 새로움이 직면해야 하는 불가피한 저주를 반영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동시대로부터의 인정과 승인, 그리고 그에 따른 상업적 성공은 예술적 새로움의 진위를 의심케 하는 역설적이면서도 불길한 징후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존 케이지(John Cage)의 다음과 같은 위트 넘치는 자기 지시적 진술이 함의하는 아이러니도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내 작품이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진다면, 다시 나는 내 작품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지점으로 나아가야만 합니다.”5)



   2. 진정한 새로움에 대한 요구


    동시대 문화적 현실 속에서 새로움을 재조명하려는 논의들이 이러한 새로움과 차이의 근본적 구별에 주목하고, ‘진정한’(authentic) 새로움의 가능성을 이론적으로 재정립하려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새로움의 진정성에 호소하는 관점들에 따르면, 최근 무분별하게 남용되고 있는 새로움은 예술 작품에 내포된 상품적 성격, 즉 단순한 차이를 과장하려는 기만적 기호에 불과하다. 이를테면, 리오타르(Lyotard)는 오늘날 유통되고 있는 거짓된 새로움을 비판하고, 진정한 새로움의 출현을 통해 ‘차이의 경제’를 중단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술 시장은 (모든 시장이 그러하듯) ‘새로운 것’(the new)의 주권에 복속되어 있으며, 이것은 예술가들에게 일정한 유혹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유혹은 타락을 넘어선 문제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혁신과 사건(Ereignis) 사이의 혼란, 즉 현대 자본주의가 시간에 대해 강제하는 리듬 안에서 작동하는 혼동 속에서 발생한다. (중략) 그렇다면 이렇게 질문해 보자. 새로움은 과연 하나의 사건인가? 모든 새로움과 마찬가지로, 작품이 지닌 부조리함이 소비자들을 낙담시키지 않아야 한다. 예술적 성공의 비밀은, 상업적 성공과 마찬가지로 놀라움과 익숙함 사이, 정보와 코드 사이의 균형 속에 있다. 예술에서의 혁신은 이미 입증된 형식을 다시 가져오되, 그것을 어긋나게 배치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를테면 상호 양립 불가능해 보이는 형식들을 병치하거나, 혼합하거나, 인용하거나, 장식하거나, 패러디함으로써 키치적인 것이나 바로크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예술가는 대중의 취향을 충족시키려 하며, 수많은 대상들의 다양성에 의해 무뎌진 혼성적 감수성을 자극하려 한다. 이때 예술가는 자신이 이러한 방식으로 동시대의 정신(spirit)을 표현한다고 착각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시장(market)의 정신을 반영할 뿐이다. 숭고는 더 이상 예술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술에 대한 투자 속에 존재한다.6)


   리오타르에 따르면, 오늘날의 예술 시장에서 구가되고 있는 새로움의 승리는 혁신과 진정한 의미의 사건(Ereignis) 사이의 혼란을 부추기는 타락의 징후에 가깝다. 상업적 성공이 뒤따르는 예술적 성공은 표면적으로는 새로움을 산출하는 혁신의 소산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소비자들의 기대를 적정 수준에서 배반하는(다시 말해 온전히 저버리지 않는) 절묘한 균형 감각의 결과에 다름 아니다. 놀라움과 익숙함 사이에서 형성된 이러한 균형 상태, 즉 (경제적 용어를 사용하자면) 미학적 이퀼리브리엄(equilibrium)으로서의 새로움은 ‘예술에서의 혁신’ 역시 수요와 공급의 법칙으로 구성된 경제적 게임의 일부라는 사실을 공공연하게 드러낸다. 경제적 교환의 대상에 포착될 수 있는 차이는 겉으로는 아무리 파격적이고 혁신적으로 보여도, 결국 현대 자본주의의 정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흔히 ‘새로움을 위한 새로움’으로도 묘사되는 차이들의 무한한 자기 재생산의 논리가, ‘더 많은 이윤을 위한 이윤의 재투자’라는 자본주의적 시간성의 논리와 형식적으로 공명하는 까닭도 이와 긴밀한 관련이 있다.

   리오타르는 차이를 매개로 발생하는 경제적 교환의 무한한 시간성(새로움을 위한 새로움)을 중단시킬 수 있는 숭고한 사건의 도래, 즉 그 무엇과도 교환 불가능한 새로움의 출현을 요청한다. “일어남(Ereignis), 사건이라는 것은, 혁신이 동반하는 그 미묘한 전율(petit frisson), 또는 수익화 가능한 감정적 강도(pathos)와는 전혀 무관하다. (중략) 혁신은 ‘전진’한다. 반대로, 숭고가 촉발하는 ‘그 일이 일어나는가?’라는 질문은 정지시킨다. 자본의 의지는 이러한 질문의 발생에 의해 패배할 것이다. 아방가르드의 과제는, 시간에 관한 정신의 선험적 전제를 해체하는 것이다. 숭고의 감각은 이 해체를 지시하는 이름이다.”7) 가치로서의 차이는 미래의 차이에 의해 무한히 교환·대체되는 과정을 통해 자본주의의 시간성을 반복·실천하게 될 뿐이다. 그렇다면 관건은 무의미하고 동질적인 자본주의적 시간을 정지시킬 수 있는 절대적인 타자의 출현, 그 어떤 경제적 교환의 원리로 환원될 수 없고 재현될 수 없는 예외적 사태의 교환 불가능성 속에서 진정한 새로움을 다시 옹립하는 일이다. 유사한 맥락에서 데리다 역시 동일성으로 수렴되지 않는 절대적 타자성이야말로 새로움을 발명하기 위한 ‘진정한’ 조건이라고 역설한다. “발명은 가능하다고 보이지 않는 것의 발명으로 예고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단지 동일자의 경제 내에서 가능한 것들의 프로그램을 부각시킬 뿐이다.”8)

   관련하여 우리가 주목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사실 중 하나는 진정한 새로움 또는 새로움의 순수성을 부각하는 위와 같은 논의들이 많은 경우 교환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정 대상이 금전적 가치(돈)로 환산될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한 거부감, 나아가 교환을 낳는 동기와 목적을 향한 의심은 교환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의 진원지이다. 이와 같은 반감은 예술가와 예술 작품에 관해 더욱 첨예해지기 마련이다. 예컨대 우리는 사업가가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 새로운 상품을 개발하는 행위를 굳이 비난하지 않는다. 반면 어떤 명망 있는 창작자가 더 많은 부와 명성을 얻기 위해 새로운 작품을 창작했다는 사실이 공공연하게 밝혀질 경우, 그 권위와 신뢰성에 있어 상대적으로 더 많은 흠집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왜 그럴까. 대가에 대한 동기와 목적이 명확한 행위는 타인의 기대와 욕망, 그리고 인정 욕구에 호소하기 마련이며, 자율성과 순수성에 있어 어느 정도의 훼손이 가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무조건적인 교환은 발생할 수 없으며, 교환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주체와 타자의 욕망 사이에서의 중재와 합의라는 계약 절차가 수반되어야 한다. 행위에 대한 대가와 보상을 토대로 작동하는 교환 경제가 주체의 자유와 순수성을 침해할 것이라는 주장은, 앞서 언급한 니체가 기독교에 내포된 구원의 경제(믿음과 구원 사이의 상호 대가 관계)와 자신이 창설하는 새로운 경제를 구별하는 대목에서도 고스란히 확인될 수 있다. “새로운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새로운 귀. 가장 멀리까지 볼 수 있는 새로운 눈. 지금까지 침묵하고 있던 진리를 향하는 새로운 양심. 그리고 위대한 양식의 경제를 지향하는 의지. 즉 자신의 힘과 자신의 열정을 모아서 간직하려는 의지··· 자신에 대한 경외, 자신에 대한 사랑. 그리고 자신에 대한 절대적 자유.”9) 진정한 새로움에 대한 추구 속에서 니체가 창설하려는 위대한 경제는 그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절대적 자유의 경제, 그 어떤 타자의 의지와도 교섭하지 않을 수 있는 교환 바깥의 경제, 자기 충족적 폐쇄 경제에 다름 아니다.



   3. 새로움의 경제적 교환


   이처럼 진정한 새로움과 거짓된 새로움이 구별될 수 있다는 전제 속에서 시도되는 비판적 시각들은 오늘날 새로움이 처한 교착 상태를 조명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특히 최근 들어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가는 새로움에 대한 냉소가 새로움이라는 기호를 매개로 심화되는 예술과 상품 사이의 식별 불가능성과 관련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비판들이 갖는 설득력을 도외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예술의 상품화와 상품의 예술화라는 동시적 국면 속에서 완성되어 가는 양자 사이의 긴밀한 공조 현상을 해체하기 위해, 새로움을 더욱 급진화하려는 실천적 노력 역시 필요해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진정한 새로움, 또는 새로움의 급진화라는 프레임이 쉽게 해소되기 어려운 난제와 딜레마를 초래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새로움의 진정성을 전면화하는 논의들은 진짜와 가짜라는 이분법적 대립 구도에 의존하며, 그에 따라 새로움을 희귀하고 소수적인 것, 웬만해서는 사람들에게 인지되거나 환영받기 어려운 현상으로 고착시킬 우려가 있다. 진정한 새로움에 대한 강조가 낳을 수 있는 엘리트주의적 신비주의는 교환 가능한 모든 가치를 향한 전방위적 의심과 불신을 초래하며, 불가피하게 시장과 대중을 새로움을 혐오하거나 착취하는 존재로 악마화 하려는 경향이 있다. 진정성에 대한 강조는 새로움에 대한 평가 기준을 엄밀하게 하는 데는 효과적이나, 새로움이 일으킬 수 있는 긍정적 효과를 평가절하하고, 급기야 새로움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담론적 소통의 가능성을 극도로 축소시킬 소지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진정한 새로움을 교환 경제 바깥에서 모색하는 시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이론적 편익이 그다지 크지 않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를테면 리오타르가 추구하는 새로운 숭고가 야기하는 중단의 정치가 매력적이라는 점을 부인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것을 문화의 층위에서 생산되는 새로움 전체를 설명하는 보편적 원리와 기준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새로움은 불가능하다’라는 식의 패배주의적 결론에 반복적으로 도달하게 될지도 모른다. 가령 리오타르가 진정한 새로움의 사례로 언급한 뉴먼의 숭고 연작들이 결과적으로 거두게 된 상업적 성공과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대중적 인기를 떠올려 보자. 진정한 새로움의 관점을 고집스럽게 고수한다면, 뉴먼의 상품화는 그의 작품이 진정성 있는 새로움을 충족시키지 못해서 발생한 우발적 사태이거나, 아니면 ‘새로움의 역설’까지 장악한 시장의 압도적인 힘을 과시하는 현상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 어떤 경우든, 새로움이 극히 희소하고 좀처럼 증명되기 어려운 사건으로 정의되는 것을 피하기가 어려워진다. 

   한편 새로움이라는 기호를 실천적으로 좀 더 유용한 방법적 어휘로 탐구하기 위해서는 그 의미론적 스펙트럼을 넓힐 필요가 있다. 물론 스스로의 새로움을 기만적으로 호소하는 무수히 많은 예술과 상품들 가운데 가치 있는 새로움을 식별하기 위한 세부적인 노력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러한 실천적 분석과 평가의 작업이 반드시 진짜와 가짜의 이분법에 의존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진정한 새로움과 같은 범주를 따로 상정하지 않는다면, 새로움을 다시 경제적 교환의 메커니즘으로 탐구할 가능성이 열릴 수 있다. 요컨대 상품의 새로움뿐만 아니라, 예술 작품의 새로움 역시 경제적 현상, 즉 특정한 방식의 교환을 통해 산출될 수 있는 가치로 묘사되어야 한다. 이러한 시각에 의거한다면, 뉴먼의 사례처럼 교환 불가능한 것이 교환되는 사태는 자본에 의한 타락이나 왜곡 현상이 아니라, 그 자체가 자연스러운 문화적 논리이자 경제적 현상으로 포괄·분석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보리스 그로이스가 주창한 문화 경제의 논리는 진정한 새로움에 대한 오래된 편견을 해체하고, 새로움을 좀 더 역동적인 경제적 현상으로 고찰하는 데 유용한 참조점을 제공해 주는 것 같다.


   문화적 가치화와 경제적, 재정적, 상업적 성공 사이의 관계를, 발뒤꿈치에서 나오는 창조적 힘에 붙어 시장에 대한 대항물로 만들어지는 모든 것 – 근원적으로 다른 것, 대안적 공간, 모든 위계와 불평등을 극복하는 유토피아 –을 흡수하고 유용화하고 상품으로 변화시키는 악마 같은 시장의 활동성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예술적 창조와 시장 사이의 이러한 변동적 관계 모델은 예나 지금이나, 창조적인 것이란 저편에 존재하는 어떤 원천으로부터 파악할 수 없는 방식으로 길어져 나와 결국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방식대로 흡수되고 유용화되고 상업화될 뿐이라고 전제한다. 하지만 혁신이 이미 존재하는 것 곧 가치화된 문화적 기억 혹은 세속적 공간에서 특정한 가치를 지니는 것에서 작동하며, (혁신이) 이 가치들의 관계 내 변화를 다시 말해 가치의 전도를 지향하는 것이라면, 혁신은 근원적으로 이미 경제적 작동의 일종임을 의미한다. 예술 작품이나 책의 광범위한 상업적 교환에서 자연을 거스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와 같은 혁신의 성격을 드러내는 데 우리가 가치화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가치화는 이상적 가치만이 아니라 상업적 가치도 함께 지시한다.10) 


   보리스 그로이스에 따르면, 문화적 가치와 시장의 가치 사이에서 형성되는 특수한 유사성은 시장의 우월한 힘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가치들의 관계 내 변화’로 일컬어질 수 있는 사태는 정치, 문화, 예술, 시장 등 어디에서나 나타나는 보편적 현상이다. 새로움은 이러한 변화에 대한 인간의 욕구를 반영하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동할 수밖에 없는 가치들의 역동성을 규명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방법적 기호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째서 경제적 현상일까. 특정한 대상·특징·사건에 가치를 부여하는 행위(가치화)는 필연적으로 가치의 위계를 설정하고, 그에 근거한 비교·거래를 촉발하기 때문이다. 새로움을 매개로 예술과 시장이 자주 중첩되는 이유는, 두 영역 모두 대상에 대한 가치화가 가장 역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제적 교환의 시공간이기 때문이다. 혁신을 매개로 전개되는 ‘가치의 변화’는 예술과 시장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면서 동시에 두 영역을 작동하게 하는 핵심 원리이기도 하다. 

   이때 관건은 혁신적 교환이라는 원리를 통해 예술과 시장 사이에서 형성되는 관계 자체를 부정적 현상으로 환원하지 않는 것, 가치 변화를 촉진하는 교환의 원리 속에서 양자의 공통점과 차이를 동시에 탐구하는 일이다.11) 이러한 시각은 새로움에 내포되어 있는 진정성의 신화를 (긍정적인 의미에서) 세속화(secularization)하는 데, 나아가 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라는 역사적 국면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미학적 새로움에 부과되었던 이념적 하중을 덜어 내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새로움의 경제를 통해 우리가 우선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러므로 예술과 상품 사이의 본질적·실체적 차이가 아니라, 가치 변동이라는 원리의 항상성과 일관성이다. 

   경제적 현상으로서 문화적 새로움이 각광받는 과정은 시장에서 새로운 상품이 높은 가격을 형성하는 과정과 유사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교환을 중심으로 새로움을 탐구한다는 것이 곧 새로움의 자본화를 용인한다는 뜻으로 오해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새로움이 이윤 추구의 수단으로서 시장에서 남용되는 양상을 비판하는 일과, 담론의 경제에서 예술 작품의 새로움이 인지되는 과정을 교환의 원리로 재정립하려는 시도는 여전히 별개의 작업일 수 있다. 문화적 새로움의 가치가 반드시 상업적 가치를 보증하지 않는 것처럼, 상업적 가치 역시 문화적 가치를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시장에서의 가치는 문화적 가치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은 아니지만, 결코 제거될 수 없는 교환적 요소와 원리를 통해 구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계속)



1) 프리드리히 니체, 『즐거운 학문』, 안성찬·홍사현 옮김, 책세상, 2005, 201쪽.

2) Zygmunt Bauman, “The Making and Unmaking of Strangers”, Debating Cultural Hybridity - Multi-Cultural Identities and the Politics of Anti-Racism, Zed Books, 1997, p. 55.

3) 키르케고르의 새로움에 대한 논의는 다음을 참고함. Boris Groys, “On the New”, Art Power, The MIT Press, 2008, pp. 28~35.

4) 프리드리히 니체, 『안티크리스트』,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3, 9쪽.

5) John Cage, “After antiquity - John Cage in conversation with Peter Gena”, A John Cage Reader, C. F. Peters Corporation, 1982, p. 181.

6) Jean-François Lyotard, “The Sublime and the Avant-Garde”, The Inhuman: Reflections on Time, trans. Geoffrey Bennington·Rachel Bowlby, Polity Pres, 1991, p. 106.

7) ibid., pp. 106~107.

8) 이어서 자크 데리다는 타자적인 것을 산출할 수 있는 진정한 발명의 독특한 경제적 원리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경제는 분명 그렇게 보이는 어떤 의식적 재현과 계산에 그치지 않는다. 그리고 천재성이라 불리는 충격 없는 발명이 없다면, 즉 모든 것의 시작인 재치의 번뜩임 없는 발명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자기희생은 더 이상 저축의 법칙과 차연의 제한 경제에 호응할 필요가 없다. 여전히 가능한 계산으로서의 계산 불가능한 것을 넘어, 계산 자체의 질서를 넘어, 불확실하게 다가오는 전적으로 다른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발명이며, 이는 더 이상 진리의 발명이 아니고 어떤 유한한 존재를 위해서만 도래할 수 있는 것이다. 유한의 기회 자체. 그것은 그렇게 닥쳐온 것 이후에서야 발명하게 되고 나타나게 된다.” 자크 데리다, 「「프시케: 타자의 발명」 중에서」, 『문학의 행위』, 정승훈·진주영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3, 451쪽.

9) 프리드리히 니체, 앞의 책, 11~12쪽.

10) 보리스 그로이스, 『새로움에 대하여』, 김남시 옮김, 현실문화, 2017, 180~181쪽.

11) 새로움을 매개로 예술과 상품 사이에서 형성되는 모종의 중첩·교차 관계는 아도르노의 미학 이론에서도 의외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양자를 가로지르는 경제적 원리의 유사성을 강조하고 새로움이라는 기호에 내포된 화폐적 성격을 부각하면서도, 상품의 교환가치와 일치하지 않는 현대 예술의 암호적 성격을 규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새로움(Nouveauté)은 역사적 발전의 미학적 결과이며, 소비재의 상표를 예술이 차용함으로써 형성된 것이다. 이는 자본의 착취 필요성에 순응하면서도, 끊임없이 반복되는 상품들의 목록으로부터 예술 작품이 스스로를 구별하기 위한 수단이다. 자본은 확장하지 않는다면, 즉 (경제학의 용어를 작용하자면) 새로운 것을 공급하지 않는다면, 결국 쇠퇴하게 된다. 새로움이란 감소되지 않는 풍요로움을 약속하는 확장 재생산의 미학적 도장(seal)이다. (중략) 현대적인 것은 그러한 개념 속에 존재하는 추상의 흔적을 통해 이에 대한 경의를 표한다. 독점 자본주의에서는 주로 사용가치가 아니라 교환가치가 소비되는 것처럼, 현대 예술 작품에서는 그것의 추상성 (즉, 그것이 무엇이며 어떤 목적을 가지는지에 대한 성가신 불확정성)이야말로 작품의 본질을 암호화하는 요소가 된다.” Theodor Adorno, Aestheic Theory, trans. Robert Hullot-Kentor, Continuum, 2002, p.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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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 반대하며 ―고통과 쟁론 입론 박동억 1. 고통으로 향하기 코소보가 세르비아로부터 분리 독립을 선언하고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된 것은 1998년 초의 일이었다. 이 무렵 시인 허수경(許秀卿; 1964~2018)은 독일에 머물고 있었다. 뮌스터 대학에서 근동 고고학을 전공하며 석사논문을 준비하던 차였다. 그해 말 NATO가 전쟁에 개입했고 공군을 동원하여 세르비아에 폭격을 개시했다. 허수경은 매스컴 보도를 보며 전쟁의 참혹함에 경악했고 두 나라의 고통받는 민간인을 위해 무엇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을 끔찍하게 여겼다. 그의 석사논문 주제는 기원전 6,800년에 세워진 중동의 작은 도시 초가 미쉬(Choghā Mīsh)였다. 그는 반만년 전의 멸망한 유적지를 오가며 “도대체, 이런 아카데미의 고상한 놀이가 지금의 전쟁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라는 물음에 잠겼다.1) 다행인 것은 그가 시인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는 2001년 발표한 세 번째 시집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에서 전쟁의 참상을 고발할 수 있었다. 군인들은 팔다리를 잃었고, 아이와 여자들은 고향을 잃었다. 그러나 이 사실은 언어로 열거할 때 단조로운 사실이 되어 버렸다. 더욱 많은 사람들이 전쟁을 실감할 수 있도록 허수경은 시적인 상상력을 활용했다. 그의 시집에는 전쟁의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스스로 목을 자르는 극적인 사건이나 난민이 된 여자들이 짐승 우리로 피난했다가 짐승과 교접하는 일화가 나타난다. 이 그로테스크한 상상은 언어화할 수 없는 전쟁의 잔인성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독일에 거주하는 한국인에게 코소보 전쟁은 그저 먼 나라의 사건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시인에게는 아니었다. 허수경은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장갑차에 아이들의 썩어 가는 시체를 싣고 가는 군인의 나날에도 춤을 춘다 그러니까 내 영혼은 내 것이고 아이의 것이고”라고 썼다. 이러한 애도가 무색하게 2003년에는 이라크 전쟁이 발발했고 이에 시인은 2005년 네 번째 시집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의 서문에서 아예 자신의 시를 ‘전쟁을 직접 겪지 않은 한 인간이 쓰는 반(反)전쟁에 대한 노래’라고 선언했다. 이처럼 시인에게 시 쓰기는 그의 영혼이 저 먼 타인의 고통에 접경하기 위한 투쟁이었다. 어떻게 그는 먼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영혼 곁으로 이끌어 올 수 있었을까. 어떤 의미로 그것은 그가 자임한 윤리의식이 역사적 복잡성이나 정치적 알력을 멀리한 채 성립된 간명한 문제의식에 기초했기 때문이다. 누가 가해자인가. 허수경은 전쟁의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전쟁을 일으킨 자, 폭력을 수행하는 자를 고발했다. 누가 피해자인가. 그는 여성과 아이들이 겪는 고통을 묘사하는 데 주력했다. 따라서 그의 사상은 전쟁을 절대적으로 반대하는 평화주의나 남성중심주의에 기초한 문명을 비판하는 에코페미니즘으로 일컬어졌다. 나, 태어났어 추워, 라고 말하면 정말 추워서 이 세상을 떠도는 모든 먼지들을

  • 관리자
  • 2025-07-01
경계가 지워지는 사이

경계가 지워지는 사이 -비/인간과 타자 김웅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 -김수영, 「달나라의 장난」1) 1 비인간이 가진 속도가 빨라질수록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감응하기 위해 우리가 경유하는 코뮨적 신체는 그러나 공통된 목소리를 요청하진 않는다. 인간 존재에 내재되어 있는 ‘선(善)’이라는 보편성은 오늘날 신자유주의 체제의 총체적 시간 속에서 하나로 모아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선(線)’을 만들고 있음을 주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같은 관점에서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의 의미를 재삼 곱씹게 된다. 2000년대 시적 주체는 한국 사회―넓게는 인간 사회가 구축해 놓은 알고리즘을 본격적으로 거부하는 타자의 자리에 자신을 노정 시킴으로써 “자기 존재의 근원을 확인하거나 보장받을 수 없음을 인지하고 실감하는 존재”2)로 변모하였다. 이를 통해 사회체의 최소 단위인 ‘가족’이라는 중심점에서부터 시작된 시적 사유는 단순히 생리적으로 결속된 하나의 사회체에 불과할 뿐 윤리적으로 보호받을 수 없는 관계를 방증한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아이-화자는 시적 주체를 “‘부모-자식’이라는 수직적 차원에서 불화하는 관계”로써 “윤리적 모험”3)을 나서는 존재로 거듭나게 한다. 이 아이-화자는 2010년대를 거치면서 ‘시민적 트라우마’를 흡습한 시적 주체로 전성되었다. 어떤 방식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애도의 총량은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실존의 차원에서 마주치게 되는 ‘무능력’”의 테제가 되고 그 무능력이 곧 “‘내면적 성찰’과 동전의 앞·뒷면 같은 관계를”4) 희망하는 고무적인 발화자로 시인을 이끄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것은 다름 아닌 ‘인간’이 복무해야 하는 ‘세계’와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또 하나의 책무이자 윤리로 자리 잡는다. 이 같은 관점은 시민적 트라우마를 통감하는 주체로서 몸이 갖는 일종의 생활론적 윤리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5) 그런데 2020년대의 시적 주체에게 윤리적 책무감은 역설적으로 더 일반적이고 보편화된 ‘고독감’을 불러왔다. 시민적 영웅이 되지 못한 인간, 소박한 일상조차 꿈꾸지 못하는 인간, 죽지 못해 살아 내는 몸의 형상은 시민적 트라우마 앞에서 내색할 수 없는 존재로 내세워졌다. 이것은 “개인주의의 안온한 고립을 거부”하거나 “낮이라는 다스려진 영역을 다루는 임무 가운데 의연한 관계를 유지하는”6) 숭고한 고독과는 거리가 먼 고독감이다. 그것은 자칫하면 개인주의

  • 관리자
  • 2025-07-01
새로움의 경제 2(3)

새로움의 경제 2(3) - 문학적 사용에 관한 비체계적 단상1) 강동호 1. 예술과 상품의 새로움을 구별할 수 있는 원리를 탐색하는 데 있어 ‘유용성’이라는 가치에 주목하는 것은 여전히 유의미한 출발점으로 보일 수 있다. 유용성의 관점에서 예술과 상품이 식별될 수 있다면, 양자의 새로움이 발휘하는 효과 또한 서로 다른 원리로 해명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상품 경제에서 새로움은 도구성과 결부된 차별적 정보 가치로 통용된다. 새로운 상품은 대개 기능적 유용성(사용가치)의 측면에서 과거의 상품과 구별되며, 뚜렷한 비교 우위의 원리에 따라 그 가치가 측정되기 마련이다. 이때 새로운 상품에 부여되는 더 높은 가격이라는 차이적 가치(교환가치)는, 한층 개선된 사용가치의 우월성을 통해 정당화될 수 있다. 반면 예술 작품의 경우는 이와 다르다. 예술의 새로움 역시 과거와의 차이를 전제로 한 비교적 가치라는 점에서는 유사하지만, 그 가치를 정당화하는 비교 우위의 척도(사용가치의 명시적 우월성)가 설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새로운 예술 작품은 과거의 것보다 한층 매력적으로 인식될 수 있고, 동시대의 감각에 보다 적합하다고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가 과거 작품에 대한 일방적 우위를 뜻하지는 않는다. 이른바 유용성처럼 명확히 우열을 판별하는 기준이 부재한다는 사실은 예술에서의 새로움을 더욱 복잡한 가치로 만드는 주요 원인일 것이다. 2 예술의 자율적 가치를 정당화하고자 했던 전통적 이론들은 대체로 유용성의 결여 또는 그로부터의 자유를 예술의 핵심 본질 중 하나로 파악해 왔다. 유용하지 않다는 점, 즉 그 어떤 실용적 목적이나 기능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사실이야말로 예술이 예술로서 존재할 수 있는 강력한 근거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때 유용성의 부재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공통 척도의 결여를 통해 부각되는 교환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거부이다. 주지하듯, 이러한 사유의 계보에서 가장 중요한 이론적 전환점을 제공한 인물은 칸트이다. 『판단력 비판』에서 그가 제시한 ‘목적 없는 합목적성’(purposeless purpose)이나 ‘무관심성’(disinterestedness)과 같은 개념은, 예술을 시장적 가치 평가와 경제적 교환의 논리로부터 구분하는 철학적 근거에 해당한다. 칸트에 따르면, 예술가는 그 어떤 외적인 목적에 의해 지배되지 않은 상태에서 작품을 생산해야 하며, 감상자는 이해득실과 무관한 순수한 향유를 통해 작품의 아름다움을 경험해야만 한다. 이처럼 예술의 자율성은 어떤 보상이나 대가에도 편향되지 않는 행위의 독립성과 무관심성에 깊이 맞닿아 있다. 이를테면 수공업적 기예는 임금이라는 대가를 전제하는 강제적 노동이지만, 예술은 그 어떤 보상도 요구하지 않기에 전적으로 자유로운 행위로 간주된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가는 이익과 목적에 따라 움직이는 경제적 주체(호모 이코노미쿠스)와 동일시할 수 없으며, 무용성은 이와 같은 비환원성,

  • 관리자
  • 2025-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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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판다곰젤리
    최고에요

    이건 비평을 넘어선 논문 수준입니다... 감탄만 나오네요.

    • 2025-05-03 16:42:42
    판다곰젤리
    최고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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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 /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