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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과 획의 시간

  • 작성일 2025-06-01

   점과 획의 시간

   ― 한강, 『빛과 실』1)로 『바람이 분다, 가라』2) 다시 읽기


이지연


   1. 코스모스의 정원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별의 자녀들이다. 

―칼 세이건, 『코스모스』


   ‘우주(宇宙)’라는 이름은 ‘예로부터 오늘, 위아래와 사방’을 가리키는 단어로 기원전 4세기경 처음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간과 공간의 의미를 모두 포함한 이 말은 천지만물(天地萬物)과 삼라만상(森羅萬象)을 아우르는 세상의 총체를 뜻하는 것이었다.3) ‘우주’로 번역되는 영어 단어에는 스페이스(Space), 유니버스(Universe), 코스모스(Cosmos) 세 가지가 있는데 각각 목적과 용도에 따라 다르게 쓰인다. 그중 ‘코스모스’는 혼돈, 무질서를 뜻하는 ‘카오스(χάος)’의 반의어로서 고대 그리스어로부터 유래됐다. 1980년 칼 세이건은 천문학과 우주에 대한 지식을 대중에게 쉽게 전달하겠다는 목적으로 TV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거기에 ‘코스모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방영되자마자 전 세계 인구의 3%가 시청했다는 이 프로그램은 동명의 책으로도 출간되면서 현재까지 1,000만 부 이상의 판매량을 기록한 칼 세이건의 역작으로 평가받는다. 

   『코스모스』가 처음 한국에서 번역된 것은 원본 출간 이듬해인 1981년이었다. 당시 번역자인 서광운은 ‘Cosmos’를 ‘우주’라고 번역했고, 이후 2004년 홍승수의 번역본에서는 원어 그대로 ‘코스모스’라는 단어를 썼다.4) 그가 번역한 『코스모스』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코스모스(COSMOS)는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며 미래에도 있을 그 모든 것이다.”5) 과거, 현재, 미래의 시제를 한 번에 오가는 ‘모든 것’의 이치가 우주에 담겨 있다. 그리고 이 우주는 ‘스페이스’도 ‘유니버스’도 아닌, ‘질서’를 뜻하는 이름 ‘코스모스’로 불린다. 600쪽에 달하는 책 전체를 관통하는 세이건의 메시지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인간은, 나아가 모든 생명체는 그 탄생부터 소멸까지 모두 코스모스로부터 비롯되었다. 우리는 코스모스의 일부로서 코스모스의 자손이자 미래이다.

   올해 4월, 문학과지성사는 한강의 산문집 『빛과 실』을 출간했다. 책의 제목은 작년 그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뒤 진행한 기념 강연의 제목을 땄고, 표지에는 그의 작은 정원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들의 흑백 사진이 실려 있다. 온통 까만 배경에서 유독 흰 사각형의 무늬가 눈에 띈다. 책에 수록된 산문 「북향 정원」에서 한강은 볕이 들지 않는 정원에서 나무들이 잘 자랄 수 있도록 거울을 이용해 햇빛을 모아 주어야 한다고 썼다. 거울에 반사된 빛의 형상인 듯한 그것은 ‘빛과 실’이라는 강연의 주제와 알맞게도 고요하며, 때로는 위태로워 보인다. 눈부시게 쏟아지는 가시광선의 풍만함보다, 서늘한 담벼락 한가운데 홀로 제 영역을 지키고 있는 외로움과 꼿꼿함이 느껴져서일까. 여느 나무에게 햇빛이 으레 그러하듯 생명의 은유인 그것은 한강의 소설에서도 늘, 좁고 얕지만 끈기 있게 비추는, 거울을 들러서야 북향의 정원에 찾아오는 그런 존재였기 때문일까. 『소년이 온다』(2014)의 작은 촛불처럼. 혹은, 『작별하지 않는다』(2021)의 작은 새가 퍼덕였던 날갯짓처럼. 


   사랑이란 어디 있을까? 

   팔딱팔딱 뛰는 나의 가슴 속에 있지.


   사랑이란 무얼까?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 주는 금실이지. (『빛과 실』, 10쪽) 


   삶의 가장 어두운 부분에 끈질기게 천착하면서도 결국은 너울거리는 생명의 빛 쪽으로 몸을 기울이곤 하는 그의 소설에서, ‘사랑’은 해소되지 않는 질문이자 글쓰기를 더 먼 곳으로 밀고 가는 미완의 답이었다. 『작별하지 않는다』가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6) 빌었던 그는 자신의 문학 세계가 여덟 살 무렵 스스로 묻고 답했던 ‘사랑’의 정체로부터 열린 것이었음을 담담히 시인한다. 북향의 정원에서 작은 거울로 붙들었던 생명의 온기가 ‘빛’과 관련된 것이라면, 여덟 살의 그가 생각한 사랑의 의미는 ‘실’에 관한 사유다. 이 실은 다시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 주는” 금(金)실, 빛을 내는 실이 됨으로써 ‘우리’를 미약하게 이어 놓는 생명의 흔적을 가리킨다. 

   스웨덴 스톡홀름 시청사에서 전한 노벨상 수상 소감에서도 한강은 여덟 살의 자신이 지금 그의 소설 쓰기에 자양분을 주었노라고 말했다. 미상불 내리는 비를 맞으며 그가 경험한 “경이의 순간”7)은, 내가 아닌 모든 이들이 제각기 ‘나’라는 것―내가 느끼는 이 습기와 아픔을 다른 사람들도 겪고 있다는 것―곧 ‘우리’는 무한한 1인칭들의 총체라는 깨달음과 연결되며 그의 문학이 태동하는 기본 전제이자 출발점으로 작용한다. 빛을 내는 ‘금실’이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하므로 그것이 ‘사랑’의 은유라면, 죽음의 끈질긴 유혹에도 결국 ‘살아 있음’을 긍정하고 생명의 힘을 언어에 실어 널리 퍼뜨리는 것이 한강 문학이 닿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적지라면, 따라서 그가 상정하는 제각기 1인칭인 ‘우리’가 사랑을 통해 비로소 인간으로 남을 수 있는 것이라면. 다시금, 


   인간은 무엇인가? 

   우리가 그렇게, 인간이라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책을 읽을 때쯤, 나는 『코스모스』를 떠올리고 있었다. 물리학의 세계에서 우리는 모두 원자로 구성되어 있고 원자의 차원에서 동등하다. 하지만 정말 그렇다면, 어째서 질문은 매번 되돌아가야만 하는가.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가 피워 낸 촛불로 광막한 세계의 어둠을 밝혀내는 것이 ‘죽은 자’와 ‘산 자’를 잇는 사랑의 실천이며 동시에 “얼마나 사랑해야 우리는 끝내 인간으로 남는 것인가?”8)라는 질문에 대한 최선의 응답이라는 것을 이해하면서도, 소설이 저만치 앞으로 나아갈 때 나 자신은 답 없는 답보(踏步) 상태에 남겨졌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공교롭게도 그가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의 일이었다. 길고 두꺼운 겨울을 견뎌야 했던 거리의 사람들, 촛불 대신 건전지의 불빛을 지폈던 이들···. 그리고 그들을 외면하거나 몰아내거나 왜곡하려 덤비는 자들의 폭력을 목격하면서. 혹은 그보다 훨씬 더 전부터, 모든 곳에서 싸움을 계속해 온 이들의 견딤과 고투를 향해, 문학이 어떤 방식으로든 답하는 것이 영원히 불가능할지를 생각했다. 

   가느다란 ‘금실’보다도 두꺼운 폭력의 족쇄가 더 가까이에서 느껴질 때, 이토록 폭력적인 세계를 인간은 어떻게 살아 내야 하는가. 희미한 촛불의 광도(光度)로는 발밑을 비출 수 없을 만큼 이 어둠이 막막하게만 느껴진다면. 『채식주의자』(2007)에서 한강은 폭력의 세계를 벗어나고자 인간이기를 거부한 한 여자의 이야기를 썼다. 이후 그는 ‘인간’에 대해 이어지는 질문들을 다음의 위치로 옮긴다. “결국 우리는 이 세계에서, 결국 인간으로서 살아가야 하지 않”9)는가? 물론이다. 죽음의 문제에 끝없이 천착하면서도 그의 소설은 결코 염세나 허무 쪽으로 기운 적이 없었으므로. 그렇다면 살아남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아름답지만 연약한 금실 따위로, 우리가 이어지는 것이, 사랑이, 가능한가. 이 질문을 붙든 채 한강의 소설들을 되짚어 보다 한 권의 책에 가닿게 되었다. 타오르는 별의 형상을 한 먹그림 위로 쨍한 노란 색의 글씨. 바람이 분다, 가라.

   오랜 친구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밝혀내려는 여자의 사투(死鬪)를 소설의 제목은 이상하리만치 담담하게 표현한다. 바람이 분다. 가라. 두 문장 사이에 생략된 말이 ‘그러니까’인지 ‘그럼에도’인지 혹은 ‘조심해서’라는 당부의 말인지, 소설을 처음 읽던 당시에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 막막한 기분이 나를 소설이 끌어당기는 온갖 자료들의 세계로 이끌었다. 양자물리학에서, 팽창하는 우주와 빅뱅 이론과 눈 덮인 미시령. 마크 로스코의 그림과 안견의 〈몽유도원도〉. 말러의 교향곡. 그리고, 화가 한은선의 먹그림. 그러나 한겨울의 미시령도, 로스코와 안견, 한은선이 그린 ‘진짜’ 작품도 좀처럼 직접 볼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남은 것은 녹음된 말러의 교향곡을 들으며 『코스모스』를 다시 읽는 일뿐이었다. 미국의 천문학자가 익숙한 현대어로 풀어 놓은 우주의 질서가, 소설 속 ‘나’의 치열한 추적(追跡)을 덩달아 설명해 주기를 바라면서.

   따라서 이 글은, 이 소설이 ‘어떻게 삶을 껴안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보존하며 그 안에 머물러 그 질문을 견디게끔”10) 하는 동시에, 삶 자체와 벌이는 치열한 싸움의 장면을 그에 대한 대답으로 내놓고 있다는 가설로부터 출발하려 한다. 솟아오르는 불길을 뚫고 배로 바닥을 밀며 삶의 영역으로 자신의 몸을 이끌고 가는 여자의 형상으로부터. 소설의 결말이자 시작이 되었다는 “숨과 싸우고 있는 어떤 사람”11)의 모습, 인공호흡기 속에서 자신의 생명(숨)과 싸워야만 비로소 숨(생명)을 되찾을 수 있는 존재의 모순으로부터. 그리고 그 자체로 성립 불가능한 이 ‘껴안음’과 ‘싸움’의 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소설의 현장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그것은 행여 ‘금실’이 끊어질까 노심초사하는 1인칭들의 총합이 아니라, 하나의 점(點)으로 그려지는 우주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이 한꺼번에 들끓으며 폭발을 준비하는 점이다. 수십 개의 거울이 무작위로 놓인 코스모스의 정원이다. 그 속에서 ‘인간’은 처절하게 싸우고, 필사적으로 추락한다. 과연 그는 도약할 수 있을까. 



   2. 먹과 피의 세계


   소설은 여전히, 고통스럽다. 세차게 부는 바람 속을 고독하고 우아하게 걷는 인간의 모습은 여기에 없다. 피 흘리고, 괴로워하고, 몸부림치고, 이를 악물며 일어서려는 인물의 악전고투로 가득하다. 발간 당시의 평처럼 “온통 싸움의 기록이자, 싸움 그 자체인 소설”12)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주인공 ‘나’(정희)는 무엇인가를 지키기 위해 그 무엇인가와 맞서 싸운다. ‘인주’의 죽음이 자살이 아니라고 주장하기 위해, 그를 하나의 신화로 만들어 영원한 상품으로 소유하려는 ‘강석원’을 저지하기 위해, 강석원의 거짓된 말들로부터 인주의 아들인 ‘민서’를 지키기 위해. 그러니까 결국 자신이 알고 있는 인주와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을 지켜내기 위해. ‘나’는 싸운다. 그러나 인주를 지키려 발버둥 치면 칠수록 또 다른 인주와 싸워야만 한다는 사실이 나를 혼란스럽게 한다. 내가 기억하는 인주와 강석원이 가진 기록들 속에 놓인 인주가 너무나 다른 존재인 탓이다. 마치 달의 뒷면처럼, 생전의 인주에 대한 증언을 수집하고 행적을 추적할수록 나의 무지(無知)만이 폭로된다. 

   두 세계가 부딪친다. 내가 기억하는 인주는 죽음보다는 삶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죽음이 두 사람에게 동일하게 주어진다면 “먼저 죽었어야 할 사람은 나다.”(27쪽) 그러나 인주는 죽었다. 강석원은 인주의 생애를 매끄러운 언어로 재단해 화석으로 만들려 한다. 폭설로 뒤덮인 미시령 고개에 찾아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여자. 불행한 생에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를 예술로 승화시킨 비운의 화가. 그러니 인주가 자살하지 않았음을 증명하려는 ‘나’의 사투는, 죽음에 매몰된 그녀를 삶의 영역으로 끌어내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전체적으로 추리소설의 그것을 따르는 소설의 전체적인 구성에서 각 부분의 초점 인물과 목소리, 장면의 순서들은 시시때때로 바뀌며 무작위로 뒤섞인다. 그러나 기억의 새로운 파편이 등장하고 또 다른 증언이 겹겹이 쌓일수록 분명해지는 것은 진실의 윤곽이 아니라 양립 불가능한 두 세계의 대립이다. 삶과 죽음의 영역에 겹쳐 놓이는 먹과 피의 세계가 그것이다. 

   『바람이 분다, 가라』의 초기 구상이 ‘먹과 피’에 대한 이야기였다고 작가는 말한 바 있다.13) ‘먹’을 대표하는 인물은 인주의 ‘삼촌(이동주)’이다. 삼촌은 한번 피가 흐르면 멎지 않는 병을 앓고 있는데, 그 때문에 매사에 지나치게 조심하며 마치 무게가 없는 사람처럼 살아간다. 인주의 초대로 두 사람이 사는 집을 방문한 열여섯의 ‘나’는 삼촌이 몰두하고 있던 먹그림 작업에 매료된다. 다른 어떤 외부 활동도 하지 않은 채 삼촌은 종일 한지 위를 퍼져 나가는 먹물의 흐름을, 폭발하는 별의 모습을 띤 먹그림을 들여다보며 하루를 보낸다. 그는 ‘있음’보다는 ‘없음’이 더 어울리는 존재였다. 정지된 사람. 정적에 휩싸인 사람. 반면 내가 기억하는 그때의 인주는 생생하고, 달리기가 빠르고, 커다랗게 웃고 말하는 아이의 얼굴을 하고 있다. 훗날 인주가 그린 그림 역시 생의 초월보다는 격렬하게 타오르는 불길에 더 가까웠다. 하지만 삼촌은, 


   인주의 그림과 비교한다면, 삼촌의 먹그림은 계단 없이 천장에 그려진 그림 같았다. 육체 없이 태어난 그림, 혹은 육체의 과정이 완전히 제거된 뒤 정신만 남은 그림이라고 할까. 별들은 하얗게 타올랐지만, 그 불꽃에는 어떤 고통도 배어 있지 않았다. 그의 그림들은 고통 너머에 있거나, 그것이 무화되는 곳에 있거나, 엄청난 밀도로 응축돼 보이지 않게 되는 곳에 있었다. (104쪽)


   피 흘리고 울부짖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삶이라고 할 때, 그가 있는 먹의 세계는 오히려 죽음과 더 가깝다. 피의 세계가 가득 찬 물질의 세계라면 먹의 세계는 우주가 태어나기 전 태초의 0, 대폭발을 미처 겪지 않은 텅 빈 어둠이다. 내가 알고 있는 인주가 삼촌과 달랐듯 먹과 피는 존재의 양 끝에 있다. 종이 위를 흐르는 것은 먹이고, 혈관을 따라 도는 것은 피이다. 종이 위에 번져 가는 그것이 먹물인 동시에 핏물일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심장을 뛰게 하고 몸을 덥히는 피가 먹일 수 없다. 문제는 이 두 세계가 겹쳐진다는 것이다. 삼촌의 삶이 죽음을 늘 머리맡에 둔 채 지속되는 것처럼. 살아 있음을 의미하는 혈관 속의 피가 바깥으로 흘러나오는 순간 그에게는 죽음을 가리키게 되는 것처럼. 한지의 모세관을 타고 흐르는 먹물이 “가끔은 그의 몸에서 피가 흘러나와 종이의 핏줄들을 타고 흐르는”(94쪽) 것 같다고 그가 고백했을 때, 먹이면서 동시에 피이기도 한 삼촌의 그림 앞에서, 나는 깨닫는다. 태초의 0이 무한으로 팽창하는 우주의 자손이 나라면, “이토록 고통스럽게 두근거리는”(71쪽) 심장과 더운 피조차도 결국에는 0이라는 것을. 

   0과 무한. 먹과 피. 소멸과 탄생. 죽음과 삶의 세계. 이들은 중첩되어 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상자를 열기 전에는 죽어 있는 상태와 살아 있는 상태를 한꺼번에 가지고 있듯이. 삶의 영역에 인주가 있고 죽음은 자신과 더 가깝다고 믿었던 ‘나’의 세계관은 수정되어야 한다. 삶과 죽음은 언제나 겹쳐져 있기에, 내가 본 인주의 모습이 삶의 단면이었다면 그 뒷면에는 죽음이 도사리고 있었을 테니 말이다. ‘나’는 이제, 인주가 스스로 죽음의 충동에 강력하게 이끌려 삼촌의 먹그림을 따라 그리고 별안간 눈 덮인 미시령을 찾아갔다는 강석원의 주장을 온전히 불신할 수 없게 된다. 인주는 정말로 자살했을지도 모른다. 그저 내가 인주의 시공간에 먹과 피가 함께 흐르고 있었음을 몰랐던 것일지도 모른다. ‘나’의 목소리는 옅어지고, 어조는 흔들리고, 점차 확신을 잃어 간다. “먼저 고백해야만 한다. 나는 나를 믿지 않는다고. (···) 내 기억을, 고통을 믿지 않는다고.”(63쪽) 연약하고 취약해진다. 인주의 ‘평전’을 써 내려간 강석원의 강력하고 명징한 언어와 맞서 싸울 수 없다. 남은 것은 인주에게 꺼내 놓은 적 없는 ‘나’ 자신에 대한 고백뿐이다. 


   짐작할 수 있겠니. 


   나약함이 죄의 시작일 수 있다는 걸, 간절함이 알 속의 죄를 깨어나게도 한다는 걸. 문밖이 낭떠러지인 줄 알면서 필사적으로 문을 두드리는 어리석음을. 모든 일들의 시작이 자신이었음을, 그러니 자신을 제거하는 것만이 단 하나의 논리적인 길임을 확신하는 순간을. 무의미로 무의미를, 어리석음으로 어리석음을 밀봉하려는 마지막 결단을. 


   너를 낳은 여자.

   영산홍 앞에 서서 웃고 있던 여자. 

   아침마다 커다란 유리병에 소주를 채우던 여자. 

   장롱 속의 여자. 

   엄지손가락을 빨며 햇빛을 피한 여자. 


   삼십 년 전 그 여자가 걸어 들어간 곳,

   이 년 전 새벽 내가 다녀온 곳은 그런 곳이었어. (340쪽)


   생전 인주와 가깝게 지냈던 목공예가 ‘김영신’에게서 ‘나’는 인주가 자신의 어머니(이동선)에 대해 했다는 말을 전해 듣게 된다. 알코올 중독 환자였던 인주의 어머니는 평생을 장롱 속에 자신을 가뒀고, 고인 물이 썩어 가듯 천천히 죽어갔다. 삼촌이 쓰던 방에서 내가 가끔 느꼈던 ‘이상한 냄새’가 인주의 목소리로 서술된 “무언가가 조용히, 끈질기게 부패해 가던 냄새”(97쪽)와 같은 것이었고, 그것은 다시 인주가 ‘나’에게 말하지 않았던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소설은 파편처럼 삽입된 여러 인물들의 증언을 통해 드러낸다. 그중 ‘류인섭’은 인주가 미시령으로 향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만났던 사람이자 그 이유를 알기 위해 내가 마지막으로 찾아간 증인이기도 하다. 인주는 그를 만난 후 홀로 미시령으로 떠났다. 그가 기억하는 이동선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서. ‘나’에게 쓴 편지에서 류인섭은 확신에 차 말한다. “그녀들은 똑같은 눈을 가졌습니다.” 이동선이 스스로 죽음을 향해 걸어갔듯, 그녀의 딸인 인주 역시 죽기 위해 미시령에 갔던 거라고. “그녀들은 살아남지 못했습니다.”(312쪽)

   죽음의 유혹은 끈질기다. 인주의 아버지, 이동선의 약혼자였던 남자의 죽음은 여자를 흠모했던 또 다른 남자의 질투 때문이었다. 이동선은 죄책감과 충격으로 스스로의 삶을 망가뜨렸고, 편지의 내용에 따르면 자신이 품어 온 ‘진실’을 폭로한 류인섭 역시 죽음을 택했다. 그러나 자살을 기도했던 ‘나’의 내면과 겹쳐질 수 있는 것은 “그 여자”뿐이다. 이들은 “자신을 제거”하려 했다는 점에서 서로 같다. 무기를 들고 싸우는 대신 자기 자신을 해치는 여자들. 나약함과 어리석음. 더 정확히는, (남성적) 폭력의 세계로부터 탈출구를 찾지 못해 나약함과 어리석음으로밖에 기록될 수 없었던 여자들. 죽음(죽임)에 실패한 ‘나’의 옆을 지켰던 것은 인주였다. 인주는 ‘나’에게 민서를 맡긴 채 일을 하고 돌아와 손수 따뜻한 밥을 짓곤 했다. 민서라는 어린 생명과 인주의 꼿꼿한 다정함은, 죽음 근처에 놓여 있던 ‘나’에게는 그야말로 삶의 강인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주가 죽고 난 지금 ‘나’는 그것을, 자신의 기억을 확신할 수 없다. 인주의 작업실에서, 삼촌이 남긴 공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인주가 손수 적어 놓은 메모를 읽었기 때문이다. 


   왜 가끔 이렇게 오지 않았어? 아무 말 없이라도 나타나 주지 않았어? 그랬다면 좀 더 견디기 쉬웠을 텐데. 환멸을. 증오를. 고통을. 믿을 수 없을 만큼 망가진, 그 여자만큼이나 부서진 정희의 얼굴을. (373쪽)



   3. 찰나의 번짐


   고통은 연결되어 있다. 먹과 피의 세계가 중첩되듯이, 삶과 죽음이 같은 혈관을 타고 흐르듯이, ‘그 여자’의 고통과 ‘나’의 고통이 인주에게는 또 다른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음을 나는 깨닫는다. 인주는 그러한 고통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을까. ‘나’가 실패한 죽음, 또는 죽임을 기어이 해 냈던 것일까. 자신의 그림을 버리고 삼촌의 먹그림을 그렸던 것은, 고통을 견디기 위함이었을까. 그러다 결국 포기했을까. 체념했을까. 거듭되는 혼란 속에서, 달의 앞면만을 더듬어 나아갈 수 있는 ‘나’에게 인주의 죽음에 얽힌 진실은 아득하게 멀기만 하다. 소설은 ‘나’가 인근 병원을 수소문해 강석원이 그날 미시령으로 향하는 인주를 몰래 따라갔으며 인주가 죽어 가던 현장에 함께 있었음을 알아내고야 마는 장면에 이르기까지, 독자들에게조차 어떠한 실마리도 주지 않는다. 자살을 기도했던 나. 자신을 제거하는 길로 걸어 들어간 그 여자. 설산의 고개와 삼촌의 먹그림. 다성(多聲)의 기억과 증언의 파편들이 시간의 순서도 논리적 배열도 무시한 채 한꺼번에 나타났다 사라진다. 휘몰아친다.

   얼마간 의도적인 연출일 이 글쓰기 방식을 통해 소설이 드러내는 것은 ‘시간’에 대한 독특한 사유다. “세상은 환(幻)이고, 산다는 것은 꿈꾸는 것”이라는 보르헤스의 말을 연상시키는 이러한 사유는 기실 한강 소설에서 그리 낯선 것은 아니다. 죽은 자들이 산 자들을 구하러 출몰하고, 이미 지나간 과거가 지금-여기의 현재를 돕는 순간의 경험은 작가 스스로 여러 번 언급한바 소설 쓰기 자체의 동력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바람이 분다, 가라』가 보여 주는 “존재의 시간성”14)은 과거를 호출함으로써 현재의 진실을 규명하는 데서 더 나아가 과거, 현재, 미래라는 개념의 경계를 지워 버린다는 점에서 특유하다. 다시 말하자면, 소설에서 시간이 서술되는 방식은, 존재에 대한 서술 그 자체이다. 존재가 바로 시간인 것이다. 모든 시간은 그 안에, 순서대로가 아니라 한꺼번에 존재한다. 먹이면서 피이고 죽음이면서 삶인 달의 앞면과 뒷면처럼.

   양자물리학의 관점에서 시간은 일관성 있게, 연속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아인슈타인에 따르면 공간 속의 모든 지점들은 각자의 ‘고유 시간’을 갖는다. 서로에게 상대적인 수없이 많은 시공간들은 휘어지고 중첩되면서 미결정 상태에 놓여 있다. 하이젠베르크는 이 미결정 상태를 양자 세계의 ‘불확정성’으로 이론화했다. 파동이면서 입자이기도 한 전자는 그 위치와 운동량을 결코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다. 측정하는 순간 전자는 또 다른 물리적 실체와 상호작용하게 되고, 그에 따라 상태가 변화하기 때문이다. 시간 역시 마찬가지로 어떤 물체와 상호작용하지 않는 이상 결정화되지 않은 입자에 불과하다. 태초 이전, 그러니까 우주가 생겨나기 전에, 구체화되지 않은 혼돈의 상태로부터 시간은 대폭발과 함께 나타났다. 그것과 상호작용할 물질이 창조됨으로써 특정한 ‘값’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고전적인 우주가 태어나기 전까지 우주의 에너지는 0이지만, 시공간은 양자역학적 혼돈 상태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며 생성과 소멸을 거듭한다. 그러던 어느 확률적 순간, 에너지의 벽을 뚫은 시공간이 팽창하기 시작한다. 그 순간부터 고전적인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적용된다. 오랜 혼돈이 갈라지고 천지가 창조되는 짧은 시간, 우주는 급팽창하고 물질이 생성된다. 놀랍도록 신화에 가깝게. 플랑크의 시간이라고 불리는 10-43초, 그 찰나의 찰나에. (44쪽)


   플랑크의 시간, 즉 시간의 양자 효과가 나타나는 최소 간격을 말하는 그 짧은 순간에, 우주가 생겨나고 물질이 태어나고 생명이 창조된다. 이 ‘찰나’가 만들어 내는 경이로운 광경을 ‘감각’하기 위해 소설은 회화의 세계를 끌어들인다. 삼촌의 먹그림, 마크 로스코의 색채와 안견의 〈몽유도원도〉에서 ‘나’가 매혹당한 것은 그러한 찰나의 강렬함이다. 그리고 그것은 작가 한강의 매혹이기도 하다. 이 지점에서 소설 내부의 서술자 ‘나’는 텍스트 바깥의 작가 자신과 뒤섞이며 중첩된다. 이 그림들과 관계하는 것은 소설 속의 ‘나’뿐 아니라 작가이며, 동시에 그를 따라 소설의 세계에 인접한 독자들이다. 종이의 모세관을 타고 번져 가는 먹이 삼촌의 피가 되듯이, 안견의 그림이 꿈에서 깨기 직전의 순간을 포착함으로써 꿈과 현실을 연결하듯이. 캔버스 위를 가르는 로스코의 색채들이 혼돈을 찢고 나온 세계의 탄생처럼 느껴지듯이. 

   한강은 소설을 쓸 때 자신의 신체적 감각을 문장에 “전류처럼”15 ) 불어넣고, 그것이 읽는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것을 확인할 때 감동하게 된다고 썼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바람이 분다, 가라』에서 돋보이는 것은 단순히 쓰는 이의 감각이 읽는 이에게 전달된다는 사실보다 그것이 ‘시간’에 대한 사유를 통과해 텍스트 너머로 가닿는 방식이다. 예컨대 로스코의 죽음과 ‘나’의 탄생을 나란히 놓는 우주론적 상상력이 그러하다. 로스코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1970년 2월은 같은 해 11월에 탄생한 ‘나’의 첫 세포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시점과 같다. (주인공 이정희의 생일은 작가 한강의 생일이기도 하다.) 로스코의 죽은 몸이 땅속에 묻혀 미처 썩지 않았을 무렵, 지구의 반대편에서 나는 생겨나고 있었던 것이다. 서로 전혀 무관한 존재들의 소멸과 생성이 맞물린다. 사건들은 기묘하게도 동시적이다. 양자의 차원에서, 그들은 얽혀 있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불확정성과 확률의 세계를 가로질러 출현한다. 

   그렇다면 영원히 알 수 없게 되는 것이 아닌가. 먹이기도 하고 피이기도 한 세계에서, 인주가 삼촌이 그렸던 그림을 그리고 홀로 눈 덮인 미시령에 달려가 찾으려고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겠다’는 독백이 반복될수록 인주를 지키려는 ‘나’의 싸움은 강석원의 광기 어린 확신, 모든 의심을 차단하는 확정성의 세계와 맞서기에는 너무나 연약하고 불리하지 않은가. 하지만 소설은 바로 그 연약함을 통해, 탄생부터 죽음까지 장구한 논리로 인주의 생애를 서사화한 일직선의 언어를 ‘찰나’의 상상력으로 돌파한다. 시간이 무한히 느려지는 ‘번짐’의 순간, “인간의 경험 전부”(47쪽)를 모델로 한 로스코의 색채와 내가 “경험한 모든 것”(55쪽)이 담긴 먹그림의 한 획이 그어지는 순간을 통해서. 기존의 시간이 모두 파괴되고 예측할 수 없는 곳으로부터 섬광처럼 모습을 드러내는 양자역학의 시간을 불러내기 위해서. 모든 것의 처음으로. 시작으로. 대폭발의 순간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주는 처음이 없고 팽창하지도 않는 고요한 무한이라고 모두가 믿었다. 끝없이, 어마어마한 속력으로 생성되는 0 따위는 상상할 수 없었다. 모든 물질이 처음에는 하나였고, 그전에는 하나마저 없었다는 생각은 종교와 신화에서만 허락되었다. 하지만 날마다 밤은 왔고, 하늘은 어김없이 검어졌다. 그것을 설명해 내기 위해 모든 생각을 바꿔야 했다. 모든 사실이 다시 씌어져야 했다. (189쪽)



   4. 모든 것의 끝으로부터


   한 물리학자는 시간이 일관적이고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관계들의 느슨한 망”16)에 불과하다고 썼다. 요동치고 휘어지는 시공간의 장(field)은 특정한 무언가와 상호작용하지 않으면 그저 미결정의 상태로 남는다. 따라서 세계는 사물이 아닌 사건들이 구성하는 네트워크다. 끊임없는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 관계의 총체다. 이때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불가침의 영역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로스코가 그려낸 색채의 예술과 삼촌의 붓에서 한지로 흘러 들어간 먹물의 획은 보편적이고 명징한 것으로 여겨져 온 시간의 경계들을 번지게 만든다. 그것들은 그야말로 인간이 겪은 모든 것, 모든 경험, 모든 감각과 기억들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로스코의 언급은 이와 관련해 어떤 깨달음을 주는 측면이 있다. “그래서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것은 특정 매개를 통해 추상성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리얼리티의 무한성을 반영한다.”17)

   로스코에 따르면 ‘리얼리티의 무한성’은 아름다움의 원천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아름다움이 고통을 수반하며, 때로 정의 속에는 악(惡)이 들어 있음을 부정하지 않았다. 먹의 세계는, 동시에 피의 세계인 것이다. ‘나’의 기억 중 일부였을 인주의 목소리는 로스코와 말과 유사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너덜너덜 찢어진 이 삶 가운데서”(151쪽) 성스러움을 느낀다고. 성스러움이란 이 세계에 없는 것, 푹 파인 구멍의 형태로만 나타나는 어떤 흔적이며, 우리는 그 가장자리를 겨우 더듬으며 나아갈 뿐인지도 모르겠다고. 강석원이 쓴 ‘서인주 평전’에 맞서기 위해 내가 쓰겠다고 마음먹은 글도, 문장도, 언어도, 그곳만 겨우 맴돌고 있지 않은가. 내가 기억하는 인주의 강인함, 인주의 단단함, 기어코 밝고 환한 부분을 찾아 나아갔을 그의 꿋꿋함은 단지 가장자리에 불과했던 것이 아닌가. 

   스스로를 의심하는 ‘나’의 말은, 더듬고 비명 지르며 조각조각 부서질 수밖에 없다. 고통으로 신음하며 수많은 이들의 목소리들을 한꺼번에 불러올 수밖에 없다. 자신이 진실의 가장자리에 놓여 있음을 아는 자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소설은 그 대척점에 강석원의 유려하고 당당한 말, 장황한 편지로 완성되는 류인섭의 문장들을 배치한다. 강석원은 말을 더듬다가도 인주의 이야기를 꺼낼 때면 냉정하고 침착한 태도를 보인다. 자신이 원하는 인주의 모습을 글로 빚어 내는 것이 그의 목적이기에, 인주와 가까웠던 ‘나’를 향해 적의(敵意)를 숨기지 않는 것이다. 류인섭 역시 자신이 기억하는 이동선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 절대불변의 사실인 양 써 내려간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그의 단호한 문장은 무엇이든 직면하지 않으려는 비겁함, 평생을 도망쳐 온 자의 비굴함의 소산이다. “모든 죽은 사람의 관 뚜껑을 닫고, 거칠게 못질을 하고, 영원히 버리십시오. 그 얼굴을. 눈동자들을. 끈덕진 자책과 결의 따위를.”(314쪽)

   소유하려는 자와 회피하려는 자. 두 남성 모두 자신이 인주 모녀를 사랑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인주와 동선의 삶-시간은 폭력의 논리와 비굴함의 언어로 재구성된다. 그들의 반대편에 선 ‘나’, 인주의 밝은 얼굴과 사진 속 어렸던 동선의 모습을 기억하는 나는 분노에 떨며 외칠 뿐이다. “닥쳐. 도취하지 마. 앞지르지 마. 그녀들은 당신이 원한 것만큼 약하지 않았어.”(317쪽) 인주를 둘러싼 진실과 거짓, 혹은 두 가지 진실 속에서 방황하던 ‘나’는 인주가 미시령에서 사고를 당했을 때 인근 병원에 강석원 역시 입원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폭설이 내렸던 그날 밤, 인주를 따라갔던 강석원은 사고 이후 그녀를 내버려두고 미시령을 빠져나와 홀로 살아남았던 것이다. 이동선의 죽어감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또 방조하면서 그녀를 죽음으로 떠밀었던 류인섭이 그랬듯이.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인주는 자살하지 않았다. 그토록 사랑하는 아이를 버려둔 채 자신을 섣불리 제거하려 들지 않았다. 

   그때 어디선가,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고 있다.


   간밤보다 강하고 습해진 바람이다. 거리를 걷는 모든 사람들의 체취가 섞이며 흩어진다. 마른 것과 축축한 것,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 부서지는 것과 영원한 것이 힘차게 뒤섞이며 날아간다. (366쪽)


   바람은, 어린 시절 육상선수였던 인주의 옛 기억을 불러온다. 미처 넘지 못한 장대가 허벅지를 관통했을 때, 분수처럼 피가 튀었을 때, 다리 근육이 심하게 손상되어 다시는 운동을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삼촌이 죽은 뒤 ‘나’가 미술을 그만두었던 것처럼, 더는 육상을 못 하게 된 인주가 선택한 길은 은둔이었다. 학교를 그만두고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집안에 틀어박힌 인주는 ‘나’의 설득에도 바깥으로 나오려 하지 않았다. 생전의 그의 어머니가 그랬듯이. 하지만 인주를 일상생활로, 삶의 영역으로 다시 끌어낸 것은 그림이었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인주는 삶의 힘을 회복했다. 일을 하고, 밥을 먹고, 결혼을 해서 민서를 낳았다. 그 무렵 자살 기도에 실패한 ‘나’의 곁을 지켰던 것은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난 듯 보이는 삶의 임계점에서 기어코 다시 시작점을 찾아 되돌아온 이의 힘이었으리라. 

   장대 사고가 일어났던 날과 꼭 같은 바람이 불던 어느 여름밤, 인주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꺼냈던 말을 ‘나’는 기억한다. “언제고 내 다리를··· 단박에 목숨까지 꿰뚫을 수 있는 삶을 지금 살아 내고 있다는 게, 무섭도록 분명하게 느껴져.”(369쪽) 그러니까 삶이 때로는 그 자신을 멈추게 하고 끝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인주는 알고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삶을 살아 낼 수 있는 힘이, 그에게는 있었다. 너덜너덜하게 찢어진 삶에서 성스러움을 발견해 내고야 마는 강함이, 바람이 불면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바를 넘고 싶다는 마음으로 장대를 짚고 뛰어오르는 무모함이. 간절함이. 따라서 그 사고 이후 두 번째로 생의 암전과 불행이 들이닥쳤을 때  , 모든 것이 또 한 번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도, 인주는 ‘시작’을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폭발하는 죽음으로부터 다시 시작하는 별처럼.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며 수억 번 플랑크의 시간을 통과하는 우주의 법칙처럼.


   정희야. 

   ···민서 못 만나고 지낸 몇 달 동안, 다 끝났다고 생각했어. 

   남김없이 파괴됐다고, 완전하게 죽었다고 느낀 순간도 있었어.

   그때 내가 정말로 죽었던 거라면,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아니, 죽기 전의 어딘가로 돌아갈 수는 없어. 되돌아가는 길 따위는 없어. 난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으니까.

   다시 시작하는 게 가능하다면··· 정말 가능하다면 말이야. 뭔가를 되살리는 게 아니라, 복원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부서야 하는 것 같아. 

   아니, 그건 달라.

   끝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 부서야 하는 거야. 

   누군가가 지금 내 안에서, 꿈틀거리며 말해. 지금까지 내가 그렸던 그림들··· 살아 내려고, 어떻게든 존재해 내려고 필사적으로 그렸던 모든 것들이, 다 가짜라고. 


   아니, 아무것도 안 무서워.

   아무것도 후회 안 해.

   지금부터 시작이야. (323~324쪽)


   그리하여, ‘시작’을 위해 인주는 다시 뛰어든다. 장대나 매트도 없이 맨몸으로, 너덜너덜한 삶의 한가운데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뒤섞인 ‘번짐’의 세계로. 시간이 멈춘 듯한 찰나의 시간, 죽음과의 임계점에서 예측할 수 없이 나타나는 생의 한 부분, “마른 것과 축축한 것,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 부서지는 것과 영원한 것”이 중첩되고 뒤섞여서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면서, 간다. 삼촌이 그렸던 먹그림을 그리고 ‘나’가 쓴 희곡의 대사로 제 그림의 제목을 붙이면서. 죽음의 가까이에 놓였던 연약한 존재들의 ‘모든 것’이 담긴 한 획을 제 손으로 그으면서. 이해하기 위해 애쓰면서. 눈 덮인 미시령을 향해, 갔던 것이다. 오랫동안 부패하며 곪아버린 생의 환부를 다시 찢고 피 흘리기 위해, 자신이 어머니의 몸 안에 작은 점으로 맺혔던 탄생의 순간에, 그와 먼 확률로 얽힌 누군가가 차가운 땅에 묻혔는지를 알기 위해. 확인하기 위해. 

   그리고 깨달았던 것이다. 마침내. 


   그러니까, 생명이 우리한테 있었던 게 예외적인 일, 드문 기적이었던 거지.

   그 기적에 나는 때로 칼집을 낸 거지. 그때마다 피가 고였지. 흘러내렸지.

   하지만 알 것 같아.

   내가 어리석어서가 아니었다는 걸.

   피할 수 없는 길이었다는 걸.

   ···지금 내가, 그 얼음 덮인 산을 피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386쪽)



   5. 빛과 실


   엄지손가락을 빨며 장롱 속에서 조용히 썩어 가던 여자. 남자를 죽이려 품었던 칼로 자기 자신을 찌른 여자. 한번 피를 흘리면 돌이킬 수 없이 죽음으로 다가가는 동생. 그의 병을 물려받은 아이. 허벅지를 꿰뚫은 장대의 감각.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 금방이라도 방향을 틀어 목숨을 짓누를 수 있는 삶. 고통은 연결된다. 번진다. 얽힌다. 강석원의 화려하고 매끄러운 말들 속에서, 인주와 인주의 죽음은 이야기의 정해진 결말을 위해 가로놓인다. 직선의 세계, 확실성의 세계, 중심과 구심력의 세계다. 중심을 향해 끌려오지 않는 것들, ‘나’의 존재와 인주가 그린 삼촌의 먹그림들은 없어져야 한다. 강석원은 몸싸움 끝에 나의 몸을 온전히 부수고 그림들에 불을 붙인다. 그리고 인주의 선택을 비웃듯 중얼거린다. “초월하지 말았어야지. 끝까지 껴안았어야지. 싸웠어야지.”(378쪽) 

   ‘나’는 몰랐다. 내가 몸부림치며 신음했던 어리석음과 나약함을 인주 역시 모르지 않았다는 것을. 때때로 비명 지르며 견뎠다는 것을. 강석원은 모른다. 인주가 고통을 초월하기 위해 삼촌의 그림을 대신 그린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모세관으로 번지는 핏물을 응시하기 위해, 고통의 한가운데로 자신을 밀어붙이기 위해, 바람에 맞서 장대를 짚고 뛰어오르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눈부시게 도약하기 위해 끔찍하게 추락하기를 꺼리지 않았다는 것을. 그는 영원히 모른다. 그러나 이제 ‘나’는 안다. 인주의 삶과 인주의 죽음에 대한 다시-쓰기는 명징하고 논리적인 시간의 순서를 따를 수 없다. 인과관계를 따라 덧그릴 수 없다. 모든 것의 끝으로부터 모든 것이 파괴되고 모든 것이 시작되는 10-43초의 순간. 태초의 점(點)으로부터 물질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다. 고통과 비명으로 연결된 색채와 음악, 불확정성의 세계, 가장자리와 원심력의 세계다. 붉은 먹과 검은 피가, 무한히 팽창하는 0이, 이미 지나간 미래와 다가올 과거가, 끝과 시작이 조각나며 뒤섞인다. 


   어떤 임계에서, 산 자가 마치 혼처럼 되어서, 극심한 고통의 마지막 가장자리에서, 몸을 빠져나와 마침내 너머의 것을 보게 되는 순간. (『빛과 실』, 50쪽)


   정말로 사랑은 가능한가. 가슴과 가슴이, 심장과 심장이 연결되는 것은 가능한가. 이 절박하고 끈질긴 질문에 대하여 소설이 응답하는 방식은 그러한 ‘순간’ 모든 것이 파괴된 자리에서 다시금 숨을 끌어올려 내뱉는 ‘나’의 마지막 장면을 통해서이다. 강석원이 가한 물리적 폭력과 윤리적 폭력의 언어에 맞서,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한 여자가 기어간다. 타오르는 불길을 뚫고 벌레처럼 몸을 뒤튼 채 배로 바닥을 밀면서 나아간다. 기어코 맑은 공기가 흘러드는 바깥으로 얼굴을 내밀었을 때, 삶의 임계에 내몰린 가장 연약한 숨이 인공호흡기의 그것과 맞부딪칠 때, ‘쒜엑쒜엑’ 소리를 내며 고통스럽게 충돌할 때, “너덜너덜 찢어진 이 삶”(151쪽)을 끌어안으려 인주가 마지막까지 싸웠을 숨 한 자락을 그 역시 느낀다.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에서 느껴지는 성스러움의 가장자리를. 가장 끔찍하고 여린 곳으로부터 섬광처럼 솟아나는 ‘너머의 것’을. 그것은 내가 인주의 사랑을, 삶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어루만지고 끌어안으며 바람을 뚫고 걸어왔던 ‘너’의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민서에게, 삼촌에게, 어머니에게… 그리고 ‘나’에게 그랬듯이.

   그리하여 소설은 묻는다. 기미투성이의 뺨, 부드러운 입술, 검은 광석처럼 어둠 속에서 빛나는 눈을 가진 ‘너’의 목소리로. 계속 살아갈 수 있느냐고. 사랑할 수 있겠느냐고.

  

  ···봄이 왔어. (385쪽)

  

   다른 여자가 대답한다. 조금 전 ‘너’를 잃은 여자다. 무서운 고통 속에서, 눈부신 봄의 거리를 걸어 올라가고 있다. 열여덟 살의 여자는 삼촌의 방에서 붓을 쥔 채 한 획을 긋는다. 먹의 물길이 종이의 모세관을 타고 번져가는 속도는 나무가 자라는 속도와 같다. 여자는 그것으로 지구의 자전 주기를 실감한다. 지구가 한 바퀴 돌 때마다 같은 원소로 이루어진 너와 나의 몸이, 한 점에 불과하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그 여자와 같은 날에 태어난 여자, 볕이 잘 들지 않는 북향의 정원에서 나무를 기르는 그 여자는 햇빛의 방향을 따라 거울의 위치를 바꾸어 놓으며 지구의 자전과 공전 속도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했다. 나무는 거울이 모아 주는 빛 쪽으로 가지를 틀며 자란다. 여덟 살인 그 여자가 처마 밑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린다. 서투른 손으로 시를 쓴다. 사랑이란 어디 있을까? 팔딱팔딱 뛰는 나의 가슴 속에 있지. 점(點)과 획의 시간에서, 빛과 실이 태어난다. 사랑이란 무얼까?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 주는 금실이지. 


   바람이 분다. 책을 덮고 나는 일어선다. 



1) 한강, 『빛과 실』, 문학과지성사, 2025.

2) 한강, 『바람이 분다, 가라』, 문학과지성사, 2010. 이후 본문의 인용 시 괄호 속 쪽수로 표기한다.

3)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우주’는 “무한한 시간과 만물을 포함하고 있는 끝없는 공간의 총체”로 정의된다. 물리·천문·철학 용어와 구별되는 일반적인 단어로서 시공간의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4) 『코스모스』의 번역 초판본은 일월서각에서 발행한 조학래 번역의 『미지의 세계 코스모스: 우주의 신비』(1981)이다. 저자의 이름이 ‘카알 사강’으로 기재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같은 해 서광운이 번역한 완역본 『코스모스』(학원사, 1981)에서는 ‘칼 세이건’으로 표기되었다.

5) 칼 세이건, 『코스모스』, 홍승수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4, 22쪽.

6)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문학동네, 2021, 329쪽.

7) “쏟아지는 빗발을 보며, 팔과 종아리를 적시는 습기를 느끼며 기다리던 찰나 갑자기 깨달았습니다. 나와 어깨를 맞대고 선 사람들과 건너편의 저 모든 사람들이 ‘나’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저 비를 보듯 저 사람들 하나하나가 비를 보고 있다. 내가 얼굴에 느끼는 습기를 저들도 감각하고 있다. 그건 수많은 일인칭들을 경험한 경이의 순간이었습니다. (···) 가장 어두운 밤에 우리의 본성에 대해 질문하는, 이 행성에 깃들인 사람들과 생명체들의 일인칭을 끈질기게 상상하는, 끝끝내 우리를 연결하는 언어를 다루는 문학에는 필연적으로 체온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렇게 필연적으로, 문학을 읽고 쓰는 일은 생명을 파괴하는 행위들의 반대편에 서 있습니다.” 한강(2025), 앞의 책, 34쪽.

8) 위의 책, 25쪽.

9) 김연수·한강, 「사랑이 아닌 다른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한강과의 대화」, 『창작과비평』 42(3), 창작과비평사, 2014, 318쪽.

10) 권희철, 「해설: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우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흰』, 문학동네, 2016, 157쪽.

11) 정용준·한강, 「빛이 머물다 간 자리」, 『악스트(Axt)』 40호, 은행나무, 2022, 71쪽.

12) 이선우, 「진실은 어떻게 드러나는가-한강 장편소설 『바람이 분다, 가라』」, 문장웹진 11월호, 2010.10.30. https://munjang.or.kr/board.es?mid=a20105000000&bid=0005&list_no=2845&act=view, 2025.5.18.

13) 황정은, 「[인터뷰] 바람이 분다, 바람이 몰아친다··· 그래도 그저 가라」, 독서신문, 2010.3.11., https://www.readers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9285 2025.5.18.

14) 한강(2025), 앞의 책, 50쪽.

15) 한강(2025), 앞의 책, 29쪽.

16) 카를로 로벨리,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이중원 옮김, 쌤앤파커스, 2019, 98쪽.

17) 마크 로스코, 『예술가의 창조적 진실』, 김주영 옮김, 위즈덤하우스, 2024, 1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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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익고도 불친절한 미래에 대한 단상 임지훈 세상의 속도를 점점 감당할 수가 없다. 모든 것이 너무나도 빠르게 변해 간다. 변화하는 속도에 편승하지 못하는 자는 자신이 이방인이 된 기분을 느낀다. 스팅의 노래 〈Englishman in New York〉의 화자는 자신을 “legal alien”, 합법적인 이방인이라고 말한다. ‘신사다움’이 철 지난 농담이 되어 버린 세계에서 여전히 “Manners maketh man”이라 말하고, “Be yourself, no matter what they say”, ‘당신답게, 누가 뭐라고 하든’이라 말하는 사람. 그 노래 속에서, 이 합법적인 이방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Modesty, propriety Can lead to notoriety You could end up as the only one Gentleness, sobriety are rare in this society at night a candle’s brighter than the sun - Sting, 〈Englishman in New York〉 겸손과 예의범절이 악평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온화함과 침착함은 흔치 않은 감정이 된 세계.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이고, 우리는 그 속에서 스스로를 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살아가고 있다. 어쩌면 이미 스스로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직 자기 자신을 잃지 않았다’는 건 단지 착각에 불과하고. 그렇다면 어쩌면 그 또한 자신의 착각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미치광이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이건 아마 이중의 의미로 ‘그렇다’고 할 수 있을 텐데, 그가 정말 착각에 빠진 채로 살아가고 있는 거라는 의미에서도 그렇겠지만 모두가 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세상 속에서 그렇지 않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 또한 미친 것이기는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너무나 빠르게 변화하는 세계에서, 겸손과 예의범절이 더 큰 이익을 위한 술책이 되고 온화함과 침착함은 철 지난 농담이 되어 버린 세상에서 그것들의 가치를 알고 있는 사람은 이제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으니까. 그런 세상 속에서 ‘매너가 사람을 만들고요, 당신은 당신답게 살아야 해요’라고 말하는 사람은 분명 광인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종종 이방인으로 느낀다는 점에서 그와 같지만 사실은 전혀 다르다. 그와 달리 우리는 ‘나다운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를뿐더러, 현실 속에서 무엇이 사라지고 있는지조차 헤아리지 못한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와 그는 전적으로 다른 존재처럼 보이는데, 기술적 환경의 변화에 휩쓸려 떠밀리듯 살아가는 우리와 달리, 그는 마치 좌표계의 원점에 선 것처럼 세계를 바라보며, 그 변화의 속도를 측정하고, 그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야 할 길

  • 관리자
  • 2025-12-01
K-컬처의 그림자, 혐중이라는 문화정치

K-컬처의 그림자, 혐중이라는 문화정치 : 2020년대 한국 사회의 문화적 자부심은 어떻게 배타적 혐오가 되었나 허희 1. 정동적 역설의 면면 2020년대 한국 사회는 기묘한 정동적 역설 가운데 작동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K-팝‧K-드라마‧K-웹툰‧K-게임 산업까지 확장된, 이른바 K-컬처 복합체가 가시적 성취를 축적하면서 한국의 상징체계를 재편 중이다. 이것은 국가 정체성을 구성하는 정동적 보상이 작동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문화적 자부심은 경제 양극화를 포괄하는 저성장 국면‧불안정 노동‧청년 세대의 좌절과 같은 내부 불안을 상쇄하는 역할로 작용하였다. 그러한 면에서 K-컬처는 문화 산업만으로 간주하기 어렵다. 국가 정동을 생산‧관리하는 체제로서, 문화적 자부심은 일종의 집단 감정 자본으로 사회적 정당성을 획득하였다.1) 동시에 한국 사회는 ‘혐중(Sinophobia)’으로 대표되는 조직화된 집단 감정의 분출을 목도하고 있다. 이 글은 그것을 병렬적으로 공존하는 동시대 현상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자부심이 혐오로 전이되는 정동 형성의 정치적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그러니까 혐중은 자부심의 어두운 파생물, 정동의 이동과 변조가 빚어낸 적대의 결과라는 논점이다. 여기에서 비판과 혐오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비판은 특정 행위나 정책, 제도적 불투명성이나 권력 작동 방식과 같은 대상을 향한다. 이는 사실 검증과 토론 가능성을 전제한다. 예컨대 중국 정부의 신장 위구르 지역 내 강제 수용 의혹, 홍콩 보안법의 인권 침해 문제, 동북공정의 역사 왜곡 등은 어떨까. 이상의 논란은 분석과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있고, 국제사회가 공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사안이다. 반면 혐오는 문제를 특정한 정치·사회 행위에서 찾지 않는다. 증오의 대상을 일반화하고 전체화함으로써 제거의 정동을 발생시킨다. 이때 중국(인)은 특정 행위의 주체로서가 아니라, 문명적으로 열등하고 비도덕적이며 반인권적인 타자로 폄하된다. 이 같은 혐오의 메커니즘은 정동의 순환—감정이 사회적으로 이동하며 타자를 구성하는 과정과 유사하게 작동한다. 더불어 그들을 향한 정서가 실체적 검증 없이 사실처럼 굳어지는 탈지성적 담론 구조를 형성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2020년대 한국 사회 내 반중—혐중 세력은 합리적 비판과 비합리적 망상의 경계가 붕괴된 상태에서 광적으로 결집하고 있다. 이에 대한 제재가 대증 요법에 그치지 않으려면 면밀한 분석이 요청된다. 오늘날 혐중은 SNS·커뮤니티·유튜브 생태계의 유통망에서 집단 감정의 양극화를 선동한다. 김치·한복 공정 논란처럼 국가 정체성을 둘러싼 문화 투쟁은 팩트에 근거한 학술 논쟁이나 국제문화 비교 연구의 영역이 아니라, 무분별한 감정 투쟁의 장으로 격화되었다. K-팝 아이돌에게 요구되는 이른바 사상 검증(중국 시장을 겨냥한 발언을 했는가, 홍콩·대만 문제에 침묵했는가)의 사례는 집단 감시된 순응주의가 디지털 민

  • 관리자
  • 2025-12-01
k-컬처와 한국이라는 스토리텔링 2

류수연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5년 11월부터 2026년 1월까지 으로 3회 연재됩니다. k-컬처와 한국이라는 스토리텔링 2 -웹소설이라는 가능성 류수연 1. 지금은 웹소설의 시대 번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외국어 능력일까, 모국어 능력일까? 물론 어느 하나도 포기할 수 없는 요소지만 부득이 한 쪽을 골라야 한다면? 수년 전이라면 당연하게도 ‘외국어’라는 답변이 압도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생성형 AI를 활용한 초벌 번역이 보편화된 오늘의 관점에서라면, 그 답은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다. 실제로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아주 결정적인 장면을 이미 경험한 바 있다. 바로 2022 한국문학 번역신인상에서 말이다. 웹툰 부문 수상자로 선정된 40대 일본인의 한국어 실력이 초급 수준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논란이 시작되었다. 당선자는 AI를 활용해서 초벌 번역을 진행했고, 그 뒤 자신이 일본어 표현을 가다듬었다는 것이었다. 당락을 결정한 것은 만화적 표현과 리듬에 익숙한 당선자의 표현력이었겠지만 번역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언어능력 없이 AI로 번역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한 논란이 거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 뒤로 채 2년도 되지 않아 생성형 AI가 전 세계적으로 보급되었으니, 어쩌면 그 혼란은 이러한 기술 변화에 대한 예고였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웹 서사의 달라진 위상을 공공연하게 보여 주는 사건이기도 했다. AI 번역만큼이나 문학번역의 부문에 웹툰이 있다는 점도 큰 이슈가 되었기 때문이다. 웹 콘텐츠에 부여되었던 수많은 평가절하를 떠올린다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웹-이라는 접두어를 붙인 여러 콘텐츠가 등장한 지 불과 20여 년, 그 확장된 영향력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오늘날 웹을 기반으로 한 콘텐츠 시장은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선발 주자인 웹툰과 후발 주자인 웹소설 모두 대중문화의 절대적 강자로 부각되었다. 거기엔 이들 콘텐츠 자체의 매력도 있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이들 콘텐츠가 다양한 미디어믹스 과정에서 원천IP로 활용되고 있다는 점 역시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웹 기반 서사가 트랜스미디어의 확실한 강자로 부각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특히 웹소설의 경우에는 선발 주자인 웹툰의 원천IP로도 활용되고 있으니, 웹 콘텐츠 전체의 근간을 이루는 기초가 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지난 회차에 살펴보았던 케이팝 스토리텔링 역시 이러한 웹 콘텐츠에 많은 부분을 의존하고 있는바, 오늘날 한국 대중문화를 이끄는 콘텐츠로서 웹 기반 서사를 살펴보는 것은 한국이라는 스토리텔링의 한 정점으로 다가가는 방법이 될 것이다. 그런데 여전히 그 중심에는 또다시 이야기가 있다. 이 글에서는 가장 매력적인 이야기들이 각축을 벌이는 웹 플랫폼이라는 가상공간, 그리고 그곳을 종횡무진하고 있는 웹소설의 의미를 추적해 보고자 한다. 2. 취향의 타파스? 일반 문학과 함께 웹소설을 비평적 연구 대상으로 삼

  • 관리자
  • 2025-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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