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움의 경제 2(3)
- 작성일 2025-06-01
- 댓글수 1
새로움의 경제 2(3)
- 문학적 사용에 관한 비체계적 단상1)
강동호
1.
예술과 상품의 새로움을 구별할 수 있는 원리를 탐색하는 데 있어 ‘유용성’이라는 가치에 주목하는 것은 여전히 유의미한 출발점으로 보일 수 있다. 유용성의 관점에서 예술과 상품이 식별될 수 있다면, 양자의 새로움이 발휘하는 효과 또한 서로 다른 원리로 해명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상품 경제에서 새로움은 도구성과 결부된 차별적 정보 가치로 통용된다. 새로운 상품은 대개 기능적 유용성(사용가치)의 측면에서 과거의 상품과 구별되며, 뚜렷한 비교 우위의 원리에 따라 그 가치가 측정되기 마련이다. 이때 새로운 상품에 부여되는 더 높은 가격이라는 차이적 가치(교환가치)는, 한층 개선된 사용가치의 우월성을 통해 정당화될 수 있다. 반면 예술 작품의 경우는 이와 다르다. 예술의 새로움 역시 과거와의 차이를 전제로 한 비교적 가치라는 점에서는 유사하지만, 그 가치를 정당화하는 비교 우위의 척도(사용가치의 명시적 우월성)가 설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새로운 예술 작품은 과거의 것보다 한층 매력적으로 인식될 수 있고, 동시대의 감각에 보다 적합하다고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가 과거 작품에 대한 일방적 우위를 뜻하지는 않는다. 이른바 유용성처럼 명확히 우열을 판별하는 기준이 부재한다는 사실은 예술에서의 새로움을 더욱 복잡한 가치로 만드는 주요 원인일 것이다.
2
예술의 자율적 가치를 정당화하고자 했던 전통적 이론들은 대체로 유용성의 결여 또는 그로부터의 자유를 예술의 핵심 본질 중 하나로 파악해 왔다. 유용하지 않다는 점, 즉 그 어떤 실용적 목적이나 기능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사실이야말로 예술이 예술로서 존재할 수 있는 강력한 근거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때 유용성의 부재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공통 척도의 결여를 통해 부각되는 교환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거부이다. 주지하듯, 이러한 사유의 계보에서 가장 중요한 이론적 전환점을 제공한 인물은 칸트이다. 『판단력 비판』에서 그가 제시한 ‘목적 없는 합목적성’(purposeless purpose)이나 ‘무관심성’(disinterestedness)과 같은 개념은, 예술을 시장적 가치 평가와 경제적 교환의 논리로부터 구분하는 철학적 근거에 해당한다. 칸트에 따르면, 예술가는 그 어떤 외적인 목적에 의해 지배되지 않은 상태에서 작품을 생산해야 하며, 감상자는 이해득실과 무관한 순수한 향유를 통해 작품의 아름다움을 경험해야만 한다. 이처럼 예술의 자율성은 어떤 보상이나 대가에도 편향되지 않는 행위의 독립성과 무관심성에 깊이 맞닿아 있다. 이를테면 수공업적 기예는 임금이라는 대가를 전제하는 강제적 노동이지만, 예술은 그 어떤 보상도 요구하지 않기에 전적으로 자유로운 행위로 간주된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가는 이익과 목적에 따라 움직이는 경제적 주체(호모 이코노미쿠스)와 동일시할 수 없으며, 무용성은 이와 같은 비환원성, 교환 불가능성을 뒷받침하는 이론적 근거로 기능하게 되는 것이다.
3.
유용성을 매개로 한 경제적 교환에 대한 거부는, 자연스럽게 ‘사용’(use) 개념에 대한 불신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예술이 ‘사용’이라는 개념과 어울리지 않는 분야로 간주되어 온 것도, 그 기저에 깔린 유용성과 교환에 대한 불신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 이를테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음악이나 문학, 그리고 미술 작품을 ‘사용한다’고 표현하지 않는다. 물론 특수한 상황에서는 그러한 표현이 가능할 수도 있다. 예컨대 분위기를 조성하거나 전환하는 데 음악이 활용되거나, 문학 작품이 교육적 목적을 위한 분석 대상이 되는 경우가 그러하다. 그러나 여기서 사용은 특정한 목적과 동기를 위해 작품이 도구적으로 이용되었음을 나타낼 뿐, 작품에 대한 독립적 감상과 향유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술에서 사용이라는 표현이 갖는 이질성은 단지 언어적 문화 관습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사용이라는 개념 자체가 오랫동안 도구적 합리성과 기능적 효율성, 즉 수단과 목적의 관계 구조 속에서 이해되어 왔기 때문이다. 어떤 대상에 대한 사용의 정당성이 대체로 성공과 실패의 구도 속에서 설명될 수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가령 어떤 사물이 ‘잘 사용되었다’고 평가될 때, 그것은 대개 그 사물이 주어진 목적을 효과적으로 수행했으며, 그로 인해 기대했던 결과가 창출되었음을 함축한다.
4.
흥미로운 사실은, 사용이 대체로 소유의 구조와 결합된 배타적 행위로도 기능한다는 점이다. 사용이 대상을 다루는 행위만으로 간주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사용에 대한 권리와 정당성의 문제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어떤 대상을 ‘사용’한다는 행위는, 그것의 소유 주체를 전제하며, 그러한 사용 권리는 소유라는 법적·제도적 승인 체계를 통해 정당화된다. 이와 관련해 헤겔은 『법철학』에서 사용–소유 사이의 법적 관계를 인간 정신의 실현이라는 실천적 차원과 연결 짓는다. “인격은 어떤 물건 속에라도 자신의 의지를 투입하여 이로써 그 물건을 내 것으로 삼을 권리를 실질적인 목적으로 한다. 왜냐하면 물건은 그 자체 내에 목적이라고는 갖고 있지 않고 내 의지를 그의 본분이며 혼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모든 물건에 대한 인간의 절대적인 취득권이다.”2) 이처럼 소유는 점유나 처분 권한을 넘어, 인간이 사물에 자신의 의지를 행사함으로써 자유를 실현하는 행위로도 파악될 수 있다. 헤겔은 주체와 대상 사이에 형성되는 배타적 관계로서의 소유를 세 가지 하위 양태(점유, 사용, 양도)로 구분하며, 사용을 점유 이후에 등장하는 실천으로 규정한다. 이른바 사용은 소유자의 욕구에 따라 대상을 변화시키는 과정이자, 외부 사물을 주체의 의지에 종속된 수단으로 전환하는 행위이다.
5.
한편 사용과 소유의 밀접한 관계는, 사용이 사물의 고유한 존재 방식을 부정한다는 점에서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다. 사용은 단지 어떤 대상을 쓰는 일이 아니라, 그 대상이 더 이상 쓰일 수 없을 때까지 소모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사용은 대상에 대한 변화와 파괴를 수반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대상을 소멸로 이끄는 행위를 가리킨다. 헤겔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용이란 물건을 변형하고 해체하고 소비함으로써 내 욕구를 실현하는 것인데, 이런 가운데 물건의 몰아적(沒我的)인 본성이 드러나는 동시에 물건은 그의 본분을 다하게 된다.”3) 이처럼 사용은 대상의 존재 방식을 지우고, 그것을 자유의 실현이라는 주체의 의지와 목적에 종속시키는 행위에 가깝다. 결과적으로 사용은 대상에 대한 파괴를 통해 주체를 형성하고, 그 흔적 속에 자기 동일성을 각인하는 목적 지향적 실천으로 규정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처럼 헤겔이 제시한 사용 개념은, 예술과 사용 사이의 긴장과 모순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사유할 수 있는 유의미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이른바 사용에 내재한 목적 지향성과 파괴적 속성은 예술의 존재 조건 자체를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필연적 요인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예술은 단지 사용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사용 자체가 금기시되는 무엇, 보존되고, 감상되며, 향유되어야 할 ‘사용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되어야만 한다. 칸트가 예술을 노동이나 도구적 행위와 같은 목적 지향적 실천으로부터 구별하고, 자유로운 ‘유희’(Spiel)라는 개념을 통해 예술의 자율성을 사유하고자 한 것도 이 때문이다.
6.
물론 이처럼 교환과 사용에 대한 동시적 거부를 전제하는 고전적 접근은, 공리주의적 합리성과 비용-편익 분석에 기반한 최적화 이론이 지배하는 오늘날의 자본주의적 경제 질서 속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비판적 규범으로 기능할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쓸모없음의 쓸모”, “무용성의 유용성”이라는 익숙한 명제들 또한, 실용성과 도구적 기능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문화적 대상의 자율적 가치를 전면화하려는 시도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예술의 자율성이라는 이상이 과연 보상과 대가라는 경제적 원리를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별개의 문제일 수 있다. 데리다는 『판단력 비판』을 해체적으로 독해하면서, 예술의 ‘교환 불가능성’과 ‘사용 불가능성’이라는 이념이 또 다른 경제적 기제를 은폐하고 있음을 이코노미메시스(économimesis)라는 개념을 통해 비판적으로 드러낸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환될 수 없는(non-exchangeable) 순수한 생산성(pure productivity)은 일종의 순수한 거래(immaculate commerce)를 가능하게 한다. 이는 단순한 경제적 거래가 아니라, 반성적 교환(reflective exchange)의 형태를 띠며, 자유로운 주체들 간의 보편적 소통성(universal communicability)을 열어 놓는다. 이러한 소통 가능성은 미술(Fine Arts)의 유희가 펼쳐질 수 있는 공간을 창출한다. 이것은 일종의 순수 경제(pure economy)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경제적 논리는 단순한 시장의 교환가치에서 벗어나, 인간의 본질(le propre), 즉 인간을 정의하는 본질적인 속성이 반영된 형태로 작동한다. 즉, 인간의 본질은 순수한 자유와 순수한 생산성 속에서 드러나며, 이러한 자유로운 생산성이 경제적 교환을 초월하면서도 특정한 방식으로 반영되는 구조를 형성한다.”4)
7.
이처럼 데리다는 칸트 미학의 핵심 개념들―무관심성, 자유 예술(freie Kunst), 그리고 미적 판단의 보편성과 자율성―을 해체하며, 이러한 개념들이 실제로는 특정한 경제적 교환 구조 안에서 작동하는 이데올로기적 질서임을 드러낸다. 그 어떤 경제적 보상이나 대가에도 무관심한 것으로 간주된 칸트의 예술 개념과 달리, 데리다에게서 무관심성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그것은 오히려 숨겨진 경제적 교환 구조, 즉 무관심성에 대한 관심이라는 원리를 통해 더 큰 가치를 지향하는 경제적 교환 가능성을 이면에서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관심적 쾌락에 대한 성찰은 도덕적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매우 특이한 동기이자 구조이다. 즉 ‘무관심’에 대해 가지는 관심, ‘무관심성’(관심 없음)으로부터 도덕적 수익(moral revenue)을 얻는 구조다. 인간은 자연의 아름다움—그 자체로는 어떤 목적도, 이익도 지니지 않은 생산물—에서 도덕적으로 ‘더 가치 있는 것’을 추출해 낸다. 이 무관심성의 무(無, le sans)로부터 윤리적 잉여가치(surplus value)가 도출되는 셈이다.”5) 이처럼 데리다는 칸트가 이상화한 무관심성 개념이, 실은 더 큰 윤리적 잉여가치와의 교환을 가능하게 하는 보상 구조의 일부로 작동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는 예술의 자율성 담론이 단순히 유용성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형식의 교환 전략으로 기능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결국 교환과 사용의 불가능성이 강조될수록, 그 대상은 오히려 더 높은 관심과 규범적 가치 회로 속으로 포섭될 역설적 가능성을 품게 되는 것이다.6)
8.
데리다가 ‘순수한 거래’(immaculate commerce)라 명명했던 바깥의 경제, 즉 실용성과 대가를 전제하지 않는 자율성의 체계는, 오늘날의 첨단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오히려 정교한 배제와 포섭의 메커니즘으로 전유되고 있는 듯하다. 현대 자본주의는 이 ‘순수 경제’의 논리를 적극적으로 차용하고 반복하며, 유용하지 않은 것조차 유용한 것으로 전환해 내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용하고, 순수하며, 무관심한 것으로 간주되던 대상들이 오히려 가장 높은 교환가치를 지니게 되는 역설적 구조—이른바 미학적 자본주의 또는 자본주의의 미학화—는 예술의 자율성이 더 이상 진정한 정치적 저항의 장소가 아님을 가시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이것은 데리다가 폭로한 ‘무용한 것에 대한 관심’이라는 칸트적 교환경제의 기제가,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그 구조적 아이러니를 거의 숨기지 않은 채, 도착적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9.
이를테면 이러한 구조는 최근의 관심 경제(attention economy)가 작동하는 방식과도 밀접하게 맞물려 있다. 주지하듯 오늘날의 ‘관심’은 단순히 감정이나 주의를 가리키는 심리적 개념이 아니라, 그 자체로 가치를 산출하는 자원이며, 디지털 플랫폼과 알고리즘 기반의 정보 유통 체계 안에서는 일종의 가상화폐처럼 기능한다. 더 많은 주목과 조회수가 더 높은 수익으로 직결되는 현실 속에서, 관심은 이제 직접적인 경제적 부가 가치와 교환될 수 있는 강력한 현대적 자원이다.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관심이 모든 것을 포섭하는 구조 속에서 이제 관심과 비관심 사이의 구분조차 무의미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때 무관심의 자리에 머물던 대상들, 다시 말해 자본과 교환될 수 없다고 여겨졌던 것들마저도, 이제는 관심 경제의 체제 속으로 재편되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무관심한 것들에 대한 관심이라는 패러독스는, 오늘날 상품이 존재하고 가치화되는 방식의 구조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실마리를 제공한다. 오늘날 상품은 더 이상 사용 가치만을 통해 자신의 정당성을 증명하지 않으며, 오히려 사용될 수 없고 유용성을 거부할수록 희소성과 우월한 상징적 가치를 획득한다. 유용성이 아니라 무용성이 가치를 구성하는 이 전도된 구조 안에서, 실질적으로 사용되고 소비되는 상품보다, 전시되고 기호화되며 궁극적으로 예술적 오브제로 소유되고 관조되는 상품이 더 큰 경제적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10.
이처럼 현대적 의미에서의 관심은 단순한 감정이나 반응이 아니라, 가치를 선별하고 차별화하며 유통을 가능케 하는 경제적 원리로도 기능한다. 흥미로운 것은 관심을 매개로 발생하는 모종의 전도적 논리이다. 다시 말해, 경제적 가치가 있기 때문에 관심을 받는 것이 아니라, 관심을 받기 때문에 경제적 가치가 산출되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관심 경제가 원활히 작동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관심이 다른 관심으로 끊임없이 대체되는 관심의 재생산 구조가 필수적으로 요청된다는 점이다. 이때 ‘새로움’은 관심이 순환하고 증식되는 구조 속에서 끊임없이 포획되고 재전유되는 중심적 대상이자, 관심 경제의 재생산을 추동하는 욕망의 기호이다. 같은 맥락에서, 오늘날 상품의 새로움은 단지 ‘새로운 것’에 대한 주목이나 호기심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새로움’이라는 기호 가치 자체에 대한 관심과 중첩되며, 이 경향이 심화될수록 어떤 대상이 실제로 새롭기 때문에 주목받는 것인지, 아니면 관심의 과잉이 새로움이라는 기호를 구성하는 것인지조차 식별하기 어려워진다. 결국 ‘상품의 예술화’ 혹은 ‘미학화’라는 현상은, 예술의 자율성이라는 고전적 이상이 도착적으로 전유되는 방식이자, ‘새로움’이라는 기호를 매개로 관심 자본을 유도하고 이를 유통 가치로 전환하는 새로운 흐름과 밀접하게 연동되어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전환의 중심에, 가장 무관심한 것을 향한 가장 과도한 관심이라는 역설을 통해 작동하는, 오늘날 자본주의의 새로움의 경제가 자리하고 있다.
11.
이처럼 모든 것이 관심의 대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고, 그 관심이 시장에서의 부가가치로 환산되는 구조 속에서는, ‘무용성’, ‘무관심성’, ‘사용 불가능성’에 기반한 예술의 자율성 담론 역시 점점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오늘날 요구되는 것은, 예술을 단지 관조의 대상으로 보호하려는 시선을 넘어서, 그것을 보다 능동적인 실천의 장으로 전환할 수 있는 새로운 관계 형식을 탐색하는 일이다. 이 글은 이러한 문제들을 탐색하기 위한 하나의 예비적 시도이며, 향후 이어질 작업들을 위한 몇 가지 가설과 탐구 과제를 덧붙이며 마무리하고자 한다.
12.
(1) 예술적 사용 가능성에 대한 새로운 이론적 토대: 미적 관조와 경제적 관심이 더 이상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오늘날의 현실 속에서, 예술의 정치는 자본의 관심에 환원되지 않는 고유한 사용 가능성을 전면화하는 데에서 비로소 시작될 수 있다. 이처럼 예술의 자율성이 경제적 관심에 포섭되는 구조를 벗어나기 위한 사유의 실마리로서, 아감벤의 ‘사용’ 개념은 중요한 이론적 전환점을 제시한다. 아감벤은 사용을 수단과 목적의 연쇄 속에 위치시켜 온 전통적 경제 이론, 곧 도구적 합리성과 목적론적 사고에 기반한 사용 개념을 해체하고, 이런 기능을 초과하는 잉여적 실천으로 다시 사유한다. 특히 대상을 파괴함으로써 주체의 자유를 성취한다는 헤겔적 사용 개념을 넘어, 아감벤은 비소유적·비파괴적 사용의 가능성을 통해 주체의 또 다른 자유의 계기를 발견한다. “사용은 그 어떤 주체에도 속하지 않으며, 존재(being)와 소유(having) 모두를 넘어선다. 즉 사용은 존재와 소유 사이의 모호한 얽힘—아리스토텔레스 존재론의 핵심 구조—를 해체한다.”7) 특히 아감벤의 ‘자기-자신의 사용’은, 주체가 자기 자신과 맺는 감각적 접촉 속에서 정체성이 일시적으로 정지되고, 그 정지의 틈새에서 잉여적 잠재성이 출현하는 관계의 구조를 지시한다. 사용은 대상을 특정한 목적에 종속시키지 않으면서, 그것과 맺는 관계 자체를 전면적으로 재구성하려는 실천으로 거듭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전환을 통해, 주체 역시 자기 동일성의 구조로부터 유예되며 변화 가능성의 장 속에 머물게 된다.
13.
(2) 문학의 소유 불가능성과 사용으로서의 해석: 사용에 관한 새로운 이론적 접근은 문학의 가치가 어떻게 생산되는지를 탐구하는 데 유의미한 통찰을 제공한다. 특히 문학은 그 매체적 성격(소유 불가능성)으로 인해, 사용이라는 층위가 가장 전면화될 수 있는 예술 장르 가운데 하나로 간주될 수 있다. 문학은 단순히 관조의 대상이 아니라, 독자의 능동적 사용을 통해 의미가 생성되는 예술이며, 바로 이 점에서 ‘실천적 사용’의 의의가 적극적으로 전면화될 수 있는 분야이다. 이러한 문학적 사용의 의미를 가장 뚜렷하게 드러내는 행위가 다름 아닌 ‘해석’이다. 여기서 해석은 텍스트에 내재한 의미를 추출하거나 작가의 의도를 복원하는 과정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문학이라는 미적 가상과의 대면을 통해, 독자가 텍스트와 더불어 자기 자신과의 의미론적 거래를 구성해 나가는 실천의 장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문학적 해석은 이미 주어진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독자가 텍스트에 대한 상상을 통해 그 의미장을 능동적으로 형성해 가는 주체적 개입이다. 해석이라는 사용의 시간 속에서, 독자는 텍스트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단순히 의미를 파악하는 데 그치지 않고, 텍스트의 실재를 구성하며 세계를 감각하고 인식하는 실천을 수행하게 된다. 이때 해석은 독자와 텍스트 사이의 언어적 교환을 수반하지만, 그것은 등가성과 대체 가능성을 전제로 한 고전적 교환 구조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14.
(3) 문학적 새로움의 경제: 문학을 사용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시도는, 문학적 새로움이 발생하는 고유한 관계 형식을 드러내며, 그것이 작동하는 경제적 원리를 다시 탐구하는 이론적 계기를 제공한다. 문학의 새로움은 오랫동안 창작의 층위, 곧 저자의 창의성과 독창성에 의해 설명되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새로운 작품의 출현, 새로운 형식의 실험, 새로운 언어의 발명 등에 대한 강조는 대개 창조적 주체로서의 작가를 중심에 둔 생산자 모델에 기반한 것이다. 그러나 문학은 생산된 결과물로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독자의 독서와 해석이라는 시간적 실천 속에서 실재성을 획득하기도 한다. 이때 문학의 새로움은 단순한 창작의 산물이 아니라, 사용과 수용의 장에서 다시 구성되는 관계적 사건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문학의 새로움은 문학에 대한 새로운 사용과 사실상 분리될 수 없다. 이와 같은 사용으로서의 문학적 실천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효용성과 교환가치에 근거한 고전적 경제 논리를 넘어, 고유한 차이와 반복 불가능성이 산출하는 다양한 잉여들을 정당화할 수 있는 또 다른 가치 체계를 전제해야 한다. 왜냐하면 문학을 통해 산출되는 차이로서의 새로움은, 자본주의적 교환가치로 환산되는 맑스적 잉여가치와도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문학적 잉여가치는 교환가치와 사용가치라는 고전적 이분법으로 밝혀지지 않으며, 이로 인해 시장의 관심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비효율적 낭비, 혹은 목적 없는 소모의 형식으로 출현한다. 그러나 이러한 잉여적 가치는, 문학의 경제 안에서 주체가 기존의 인식과 감각의 질서를 벗어나 새로운 세계와 관계 맺도록 이끄는 실천의 조건이자, 문학적 경험을 성립시키는 핵심 요소에 다름 아니다. 문학의 경제는 바로 이와 같은 잉여적 가치로서의 새로움을 존중하며, 보호하고, 활성화하려는 시스템 전반을 가리키며, 문학적 사용 경험을 통해 전개되는 주체의 변화와 재구성에 특별한 이념적 가치를 부여하려는 정치적 제도를 지시한다.
1) 애초에 이 글은 ‘새로움의 경제’라는 주제로 이어진 일련의 연재 글의 마지막으로 기획되었다. 이를 위해 문학적 사용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바탕으로, 문학적 새로움이 발생하는 경제적 원리를 본격적으로 탐색하고자 했으나, 그 목표에 온전히 도달하지는 못했다. 따라서 이 글은 완결된 체계보다는, 지금까지의 이론적 고민들을 불완전하게나마 단상 형식으로 제시하는 데 의의를 두고자 한다. 보다 체계적인 글의 완성은 차후의 과제로 남겨 둔다.
2) G. W. F. 헤겔, 『법철학』, 임석진 옮김, 한길사, 2008, 135쪽.
3) 위의 책, 155~156쪽.
4) Jacques Derrida, “Economimesis”, Diacritics, vol. 11, no. 2, 1981, p. 9.
5) ibid., p. 15.
6) 한편 데리다는 이 구조가 예술을 중심으로 한 가치의 위계를 함께 형성한다고 말한다. 자율 예술이 자신의 자율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노동, 기능성, 대중적 소비, 실질적 사용 가능성과 같은 요소들이 체계적으로 배제되거나 하위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유 예술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언제나 용병 예술이나 실용적 창작물과 구별되며, 이 구별은 단순한 심미적 기준을 넘어 경제적, 제도적, 상징 자본의 분류 체계를 구성한다. 다시 말해, 예술의 교환 불가능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타자의 사용이 반드시 위계화되어야 하며, 이 위계는 예술의 고유성이라는 이름으로 은폐된다. 데리다가 말하는 ‘이코노미메시스’는 바로 이와 같은 역설을 드러낸다. 즉, 교환 불가능성이라는 형식은 오히려 더 정교한 교환 가능성을 은폐하는 전략이며, 자율성은 외부로부터의 독립이 아니라, 타자의 배제를 통해 작동하는 폐쇄적 유통 구조의 또 다른 이름이다.
7) Giorgio Agamben, The Use of Bodies, trans. Adam Kotsko, Stanford University Press, 2016, pp. 60~62.
추천 콘텐츠
전쟁에 반대하며 ―고통과 쟁론 입론 박동억 1. 고통으로 향하기 코소보가 세르비아로부터 분리 독립을 선언하고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된 것은 1998년 초의 일이었다. 이 무렵 시인 허수경(許秀卿; 1964~2018)은 독일에 머물고 있었다. 뮌스터 대학에서 근동 고고학을 전공하며 석사논문을 준비하던 차였다. 그해 말 NATO가 전쟁에 개입했고 공군을 동원하여 세르비아에 폭격을 개시했다. 허수경은 매스컴 보도를 보며 전쟁의 참혹함에 경악했고 두 나라의 고통받는 민간인을 위해 무엇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을 끔찍하게 여겼다. 그의 석사논문 주제는 기원전 6,800년에 세워진 중동의 작은 도시 초가 미쉬(Choghā Mīsh)였다. 그는 반만년 전의 멸망한 유적지를 오가며 “도대체, 이런 아카데미의 고상한 놀이가 지금의 전쟁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라는 물음에 잠겼다.1) 다행인 것은 그가 시인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는 2001년 발표한 세 번째 시집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에서 전쟁의 참상을 고발할 수 있었다. 군인들은 팔다리를 잃었고, 아이와 여자들은 고향을 잃었다. 그러나 이 사실은 언어로 열거할 때 단조로운 사실이 되어 버렸다. 더욱 많은 사람들이 전쟁을 실감할 수 있도록 허수경은 시적인 상상력을 활용했다. 그의 시집에는 전쟁의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스스로 목을 자르는 극적인 사건이나 난민이 된 여자들이 짐승 우리로 피난했다가 짐승과 교접하는 일화가 나타난다. 이 그로테스크한 상상은 언어화할 수 없는 전쟁의 잔인성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독일에 거주하는 한국인에게 코소보 전쟁은 그저 먼 나라의 사건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시인에게는 아니었다. 허수경은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장갑차에 아이들의 썩어 가는 시체를 싣고 가는 군인의 나날에도 춤을 춘다 그러니까 내 영혼은 내 것이고 아이의 것이고”라고 썼다. 이러한 애도가 무색하게 2003년에는 이라크 전쟁이 발발했고 이에 시인은 2005년 네 번째 시집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의 서문에서 아예 자신의 시를 ‘전쟁을 직접 겪지 않은 한 인간이 쓰는 반(反)전쟁에 대한 노래’라고 선언했다. 이처럼 시인에게 시 쓰기는 그의 영혼이 저 먼 타인의 고통에 접경하기 위한 투쟁이었다. 어떻게 그는 먼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영혼 곁으로 이끌어 올 수 있었을까. 어떤 의미로 그것은 그가 자임한 윤리의식이 역사적 복잡성이나 정치적 알력을 멀리한 채 성립된 간명한 문제의식에 기초했기 때문이다. 누가 가해자인가. 허수경은 전쟁의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전쟁을 일으킨 자, 폭력을 수행하는 자를 고발했다. 누가 피해자인가. 그는 여성과 아이들이 겪는 고통을 묘사하는 데 주력했다. 따라서 그의 사상은 전쟁을 절대적으로 반대하는 평화주의나 남성중심주의에 기초한 문명을 비판하는 에코페미니즘으로 일컬어졌다. 나, 태어났어 추워, 라고 말하면 정말 추워서 이 세상을 떠도는 모든 먼지들을
- 관리자
- 2025-07-01
경계가 지워지는 사이 -비/인간과 타자 김웅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 -김수영, 「달나라의 장난」1) 1 비인간이 가진 속도가 빨라질수록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감응하기 위해 우리가 경유하는 코뮨적 신체는 그러나 공통된 목소리를 요청하진 않는다. 인간 존재에 내재되어 있는 ‘선(善)’이라는 보편성은 오늘날 신자유주의 체제의 총체적 시간 속에서 하나로 모아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선(線)’을 만들고 있음을 주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같은 관점에서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의 의미를 재삼 곱씹게 된다. 2000년대 시적 주체는 한국 사회―넓게는 인간 사회가 구축해 놓은 알고리즘을 본격적으로 거부하는 타자의 자리에 자신을 노정 시킴으로써 “자기 존재의 근원을 확인하거나 보장받을 수 없음을 인지하고 실감하는 존재”2)로 변모하였다. 이를 통해 사회체의 최소 단위인 ‘가족’이라는 중심점에서부터 시작된 시적 사유는 단순히 생리적으로 결속된 하나의 사회체에 불과할 뿐 윤리적으로 보호받을 수 없는 관계를 방증한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아이-화자는 시적 주체를 “‘부모-자식’이라는 수직적 차원에서 불화하는 관계”로써 “윤리적 모험”3)을 나서는 존재로 거듭나게 한다. 이 아이-화자는 2010년대를 거치면서 ‘시민적 트라우마’를 흡습한 시적 주체로 전성되었다. 어떤 방식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애도의 총량은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실존의 차원에서 마주치게 되는 ‘무능력’”의 테제가 되고 그 무능력이 곧 “‘내면적 성찰’과 동전의 앞·뒷면 같은 관계를”4) 희망하는 고무적인 발화자로 시인을 이끄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것은 다름 아닌 ‘인간’이 복무해야 하는 ‘세계’와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또 하나의 책무이자 윤리로 자리 잡는다. 이 같은 관점은 시민적 트라우마를 통감하는 주체로서 몸이 갖는 일종의 생활론적 윤리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5) 그런데 2020년대의 시적 주체에게 윤리적 책무감은 역설적으로 더 일반적이고 보편화된 ‘고독감’을 불러왔다. 시민적 영웅이 되지 못한 인간, 소박한 일상조차 꿈꾸지 못하는 인간, 죽지 못해 살아 내는 몸의 형상은 시민적 트라우마 앞에서 내색할 수 없는 존재로 내세워졌다. 이것은 “개인주의의 안온한 고립을 거부”하거나 “낮이라는 다스려진 영역을 다루는 임무 가운데 의연한 관계를 유지하는”6) 숭고한 고독과는 거리가 먼 고독감이다. 그것은 자칫하면 개인주의
- 관리자
- 2025-07-01
점과 획의 시간 ― 한강, 『빛과 실』1)로 『바람이 분다, 가라』2) 다시 읽기 이지연 1. 코스모스의 정원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별의 자녀들이다. ―칼 세이건, 『코스모스』 ‘우주(宇宙)’라는 이름은 ‘예로부터 오늘, 위아래와 사방’을 가리키는 단어로 기원전 4세기경 처음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간과 공간의 의미를 모두 포함한 이 말은 천지만물(天地萬物)과 삼라만상(森羅萬象)을 아우르는 세상의 총체를 뜻하는 것이었다.3) ‘우주’로 번역되는 영어 단어에는 스페이스(Space), 유니버스(Universe), 코스모스(Cosmos) 세 가지가 있는데 각각 목적과 용도에 따라 다르게 쓰인다. 그중 ‘코스모스’는 혼돈, 무질서를 뜻하는 ‘카오스(χάος)’의 반의어로서 고대 그리스어로부터 유래됐다. 1980년 칼 세이건은 천문학과 우주에 대한 지식을 대중에게 쉽게 전달하겠다는 목적으로 TV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거기에 ‘코스모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방영되자마자 전 세계 인구의 3%가 시청했다는 이 프로그램은 동명의 책으로도 출간되면서 현재까지 1,000만 부 이상의 판매량을 기록한 칼 세이건의 역작으로 평가받는다. 『코스모스』가 처음 한국에서 번역된 것은 원본 출간 이듬해인 1981년이었다. 당시 번역자인 서광운은 ‘Cosmos’를 ‘우주’라고 번역했고, 이후 2004년 홍승수의 번역본에서는 원어 그대로 ‘코스모스’라는 단어를 썼다.4) 그가 번역한 『코스모스』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코스모스(COSMOS)는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며 미래에도 있을 그 모든 것이다.”5) 과거, 현재, 미래의 시제를 한 번에 오가는 ‘모든 것’의 이치가 우주에 담겨 있다. 그리고 이 우주는 ‘스페이스’도 ‘유니버스’도 아닌, ‘질서’를 뜻하는 이름 ‘코스모스’로 불린다. 600쪽에 달하는 책 전체를 관통하는 세이건의 메시지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인간은, 나아가 모든 생명체는 그 탄생부터 소멸까지 모두 코스모스로부터 비롯되었다. 우리는 코스모스의 일부로서 코스모스의 자손이자 미래이다. 올해 4월, 문학과지성사는 한강의 산문집 『빛과 실』을 출간했다. 책의 제목은 작년 그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뒤 진행한 기념 강연의 제목을 땄고, 표지에는 그의 작은 정원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들의 흑백 사진이 실려 있다. 온통 까만 배경에서 유독 흰 사각형의 무늬가 눈에 띈다. 책에 수록된 산문 「북향 정원」에서 한강은 볕이 들지 않는 정원에서 나무들이 잘 자랄 수 있도록 거울을 이용해 햇빛을 모아 주어야 한다고 썼다. 거울에 반사된 빛의 형상인 듯한 그것은 &lsqu
- 관리자
- 2025-06-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댓글1건
머시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