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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이 파기된 자리에 남은 것

  • 작성일 2025-08-01

   영혼이 파기된 자리에 남은 것

   -김초엽과 우다영의 SF를 읽는 한 방법


정의정


   1. 소프트 SF, ‘하드’하게 읽기


   일론 머스크의 우주 탐사 기업 ‘SpaceX’는 화성을 식민지화하겠다는 일념으로 대형 우주선 ‘스타십’을 여러 차례 하늘로 쏘아 올렸다. 올해 1월에는 스타십의 일곱 번째 시험비행이 어김없이 실패했는데, 그때 공중에서 분해된 우주선의 잔해물들이 마치 유성우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습이 영상에 담겨 각종 SNS로 퍼져나갔다. 일론 머스크는 자신의 X(구 트위터)에 그 영상을 업로드하며 “성공 여부는 불확실하지만, 재미는 보장된다!(Success is uncertain, but entertainment is guaranteed!)”라고 썼다. 이에 대한 주류적인 반응은 긍정에 가깝다. 혹자는 무료로 불꽃놀이를 봤다며 좋아했고, 혹자는 실패에 담긴 아름다움의 역설을 발견하는 식이었다.1) 지난 5월 9차 시험비행에 실패한 우주선의 잔해가 멕시코 땅에서 발견된 사태를 비롯하여 일론 머스크가 전 지구적으로 끼치는 해악을 고려하면, 이와 같은 반응들은 감상적이기만 하다. 물론 지금도 어딘가에서 꾸준한 환경 운동가들은 그의 우주 탐사 계획에 비판을 제기하는 중일 터이다. 과학기술을 둘러싸고 생성되는 담론들의 충돌은 때로 우습게 보이기까지 하지만, 어쩌면 이는 라투르적인 의미에서 번역이 만들어 낸 혼합체, 정화된 개념을 넘나들고 교차하는 난맥상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2)

   경계를 가로지르는 혼합체 중 하나는 과학소설, SF다. SF는 더 이상 문학(literature fiction)과 구별되는 장르픽션(jenre fiction)으로만 국한되지 않고, 매니아보다 더 넓은 독자층에게 읽히며 한국문학 장의 한 경향이 되었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문학비평가인 스티븐 샤비로는 『탈인지』에서 과학소설이 인간과 비인간, 그리고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의 경계까지 탐색할 수 있도록 하며, 인간의 지각 너머에 있는 감수성의 형태들에 간접적으로나마 접근할 수 있게 해줌을 강조한다. SF야말로 인간중심주의적 철학을 넘어서는 미학이라는 것이다.3) 그러나 한국에서 발표된 SF가 과연 과학적 근거에 기반한 설득력과 일관성을 충분히 갖추고 있는지에 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SF의 장르 문법을 충실히 계승하지 않은 텍스트의 경우, 근미래에 실현 가능성이 있는 과학적 사실과 기술에 기반하기보다 인문학적 가치와 사유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엄밀한 과학소설인 ‘하드 SF’라고 볼 수 없는 (멸칭의 뉘앙스가 있는) ‘소프트 SF’로 치부되곤 한다. 하지만 다시 샤비로를 참조해서 말하자면, 과학소설의 의의는 직접 체험할 수 없는 개체-존재자의 경험을 유추해 보고 인간종의 우월성과 자기동일성에 대한 환상적 관점을 뒤바꾸는 데에 있다. 정말로 그러하다면 최근 한국의 단편 SF들을 알레고리로만 취급하는 것은 그다지 유의미하지 않다. 외계 생명체가 나오든, 초감각적 식물이 등장하든, 타자를 대하는 인간의 윤리에 관해서만 말하는 것은 SpaceX의 ‘아름다운 실패’를 보는 감상적인 태도와 멀지 않기 때문이다. 동시대 SF를 ‘하드 SF’ 보듯이 적극적으로 읽는 행위가 필요하다. 이 글은 그 실천이며, 영혼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영혼을 파기해 버리는 두 편의 소설, 김초엽의 「스펙트럼」과 우다영의 「태초의 선함에 따르면」을 분석하여 SF를 읽는 하나의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2. 외계 존재자 ‘루이’ 사유하기


   김초엽의 단편 「스펙트럼」4)은 외계 접촉 서사다. 주인공 ‘희진’은 ‘스카이랩’의 촉망받는 생물학 연구원으로 외계 생명체 탐사를 위해 지구를 떠났으나, 탐사선의 초소형 광자 추진체의 결함으로 인해 우주에서 조난을 당하고 만다. 조난 열흘째에 불시착한 곳은 운이 좋게도 인간도 무리 없이 호흡할 수 있는, 지구와 비슷한 생화학적 조건을 가지고 있는 외계 행성이다. 이 행성에서 희진은 다양한 외계 생명체들을 조우한다. “지구에서 자라는 평범한 나무”, “지구의 파충류를 닮은 동물들”(64쪽), 그리고 역한 맛이 났지만 치명적이지는 않은 열매 등은 “미생물-외계 생명 씨앗 가설”(77쪽)을 입증하듯 지구의 것들과 비슷하다. 그중에서도 희진이 가장 관심을 갖는 것은 “도구의 사용, 상징 언어의 존재, 사회적 상호작용”(66쪽)으로 특징되는 ‘지성체’다. 

   이 지성적 외계 생명체는 대부분 세 개 이상의 팔과 두 개의 다리가 있어 이족 보행을 하며, 인간보다 키가 훨씬 크지만 “인간의 먼 친척 같은 신체”(66쪽)를 가지고 있다. 또, 회색의 축축하고 단단한 피부를 가졌으며 악력은 인간보다 세다. 이들은 동물 가죽으로 보이는 옷과 동물의 뿔로 만든 장신구를 걸치고 있고, 칼을 비롯한 무기를 사용하거나 특수한 염료를 사용해 잎종이에 무언가를 그린다. 또, 동굴에서 무리 지어 살며, 채집과 수렵을 통해 양분을 얻고, 심지어는 농사를 지으며, 가족을 이루는 문화도 있다. 이러한 모습은 인간과 꽤 유사하다. 여기까지 보면 복도훈이 간명하게 정리한 바대로 “영국의 생물학자 프랜시스 크릭(Francis Crick)의 정향 범종설을 적당히 외삽하고 지구 행성인의 속성으로 환원되는 외계 존재를 고귀한 야만인으로 재현한 평범한 SF”5)로 읽힌다. 그러나 작중 인물 희진 또한 이들의 모습이 식상하다고 생각한다. 소설이 이러한 외계인의 모습이 뻔하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이렇게 묘사해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희진이 내비치는 ‘지성’과 ‘지성체’에 대한 믿음6)과 관련이 있다. 희진은 내심 무리인 정도의 지성체라면 자신과 소통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품는다. 무리인들에게 처음 ‘말’을 걸 때도, 그는 자신이 “말을 하는 존재라는 것을, 살려 두고 관찰할 가치가 있는 존재임”(67쪽)을 그들에게 알리고자 한다. 희진에게 지성체란 ‘살려 둘 가치’가 있는 존재다. 지성과 이성, 즉 인지와 관련된 능력은 오랫동안 인간이 지구에서 특권적 지위를 누려왔던 근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리인들은 인간과 전혀 다른 감각 방식을 갖고 있어 지성 발휘 여부와 관계없이 희진은 그들과 소통할 수 없다. 무리인들의 음성이 인간의 가청주파수를 넘나들어 희진은 그들의 말을 제대로 들을 수조차 없고 시각 체계 또한 달라 그들의 색채 언어를 알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인간과 닮은 ‘식상한’ 외계인의 존재 양태는 사실 인간과 완전히 다르다. 그리고 소설은 여기에 방점을 찍는다. 샤비로가 적절히 지적했듯, 우리는 토머스 네이글의 유명한 질문 “박쥐가 된다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만큼이나 인간으로서 “빨간색을 경험하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라는 물음에 답하기 어렵다.7) 같은 인간종 안에서도 개체마다 감각질과 실제 현상적 경험은 큰 차이가 있으며, 자기의 경험 또한 매끄럽고 정확하게 언어화할 수 없는데 하물며 외계 존재의 감각 경험을 쉽게 알아낼 수 있을 리가 없다. 이때 인지/지성은 상대적인 감각에 기반하고 파생되는 불완전한 개념에 불과하다. 

   희진은 무리인들에게 공격당할 뻔했을 때 자신을 구해 동굴로 데려가 준 ‘루이’와 시간을 보내면서 서서히 무리인들의 감각 방식이 자신의 것과 극명히 다름을 알아차린다. 또 자신의 귀로 루이의 음성언어를 들을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음파로부터 반복되는 패턴을 읽고 언어를 분석하는 “소수 언어 분석 프로그램”(74쪽) 같은 기계-신체의 필요성과 부재를 실감한다. 뿐만 아니라 녹음기, 카메라 등의 기록 도구, 즉 뇌의 연장으로서의 기계-신체의 부재를 통해 인간이 여태껏 얼마나 육체 외부의 기계-신체에 의존해 왔는지를 암시한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 인간의 몸은 그 자체로 완결된 것이 아니다. 코로나19 이후, 몸이 경계 없이 열려 있다는 사실은 모두가 경험적으로 알게 된 바다.8) 작중에서도 이러한 사례로, 희진이 외계 행성의 병원체 탓인지 지구로 돌아온 뒤 잦은 잔병치레를 한다거나, 루이가 희진의 몸에 딸려 온 지구의 온갖 물질 때문인지 점점 수명이 짧아진다.

   루이의 수명이 줄어드는 걸 희진은 어떻게 확인했을까. 외계 생명체 루이의 존재 양태는 이 소설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이들의 수명은 3~5년 정도로 인간에 비하면 매우 짧다. 이보다 독특한 점은 한 개체가 죽음에 이른 다음에도 죽지 않는다고 믿는 것이다. “영혼이 이전 개체에서 다음 개체로 이어진다고”(79쪽) 생각하며, 이 믿음 안에서 무리인들의 자아는 끊기지 않고 몸을 바꾸어 가며 계속 전달되고 연결된다. 한 개체가 죽으면 어린 개체가 와서 자의식을 넘겨받는다. 희진은 네 번째 루이가 동굴에 왔을 때, 이들이 동굴 안의 이전 루이들이 그려 놓은 그림을 통해 루이로서의 자의식과 모든 감각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아챈다. 루이가 종일 그렸던 그림이 사실 색채 언어 기록물이었던 것이다. 쉽게 상상조차 어려운 이 존재 방식은 얼핏 과학적 근거가 없어 보인다. ‘영혼’이라는 말이 서구 형이상학 전통의 이원론을 전제하는 듯해서 더욱 그렇다. 

   그러나 잘 들여다보면 소설은 초자연적 현상으로서 ‘영혼’의 이어짐을 가정하지 않는다. 희진은 루이의 개체가 바뀔 때, “연속적이지 않은 두 자아 사이의 어긋남을 목격”한다. 그들은 명백히 “분절된 개체”(90쪽)다. 그러므로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들이 그들만의 감각력으로 독특한 자아상을 구축한다는 사실이다. 루이의 자아는 다른 개체를 향해 열려 있으며, 다른 개체와의 경계가 불분명하고, 다른 개체로부터 구성된다. 개체성은 물론, 죽음의 개념도 인간과 다르다. 루이의 자아상은 오히려 고유한 영혼을 전제하는 데카르트적 이상을 벗어난다. 소설은 루이의 존재 양태를 통해 인간중심적인 자아 개념과 다른 자아상을 구축하는 것이다. 비록 텍스트 내부에 이에 관한 설명이 소략하긴 하나, 우리가 ‘루이처럼’ 감각하지 못하는 이상, 자아의 이어짐이 과학적이지 않다고 판단할 근거는 사실상 없다. 포자로 번식하는 곰팡이나 뿌리로 연결되는 식물의 감각력과 자아상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러니 인간 존재자의 주체적 경험과 정신적 기능을 설명해 왔던 인지/지성의 권위와 과학의 배타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3. 무(無)아 혹은 중첩된 ‘사회적 자아’9)


   우다영의 단편 SF 「태초의 선함에 따르면」10)(이하 「태초」)에서 주인공은 외계 생명체의 존재 양태로 볼 법한 ‘영혼의 이어짐’ 상태를 직접 체험한다. 소설에서 사람들은 어느 날 갑자기 하나둘씩 “영혼을 각성”(67쪽)하기 시작한다. 이 영혼의 각성자들은 입을 모아 “무수한 생의 무수한 ‘나’들을”(69쪽) 전부 알게 되었다고 증언한다. 비유하자면, ‘전생’이 한 번에 떠오르는 경험인 것이다. 이들에게 “모든 생들은 공평하게 펼쳐진 개별의 삶으로 존재”(72쪽)한다. 이때 여러 생의 정보가 축적되면서 “거의 모든 것을 알고 이해하는” “고지능의 인간”(76쪽)이 된다고 주인공은 추론한다. 이들이 정말로 고지능적 존재자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확실한 건 이들이 “수많은 생의 수많은 인과 속에서” “타인에 대한 정보를 너무 많이 알게 된 나머지” “나-너의 경계가 사실상 무너진”(79-80쪽)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스펙트럼」이 루이의 자아가 연결·지속되는 것을 통해 단일한 자아 개념과 자기동일성을 흔들었다면, 「태초」는 자아가 너무 많이 중첩되어서 오히려 무(無)아 상태가 되는 인간을 통해 그것을 수행한다. 아무도 아닌 자아, 현상학적 무아가 된 사람들은 “무감정하고 비인간적인 태도”(71쪽)를 지닌 것처럼 보인다. 

   이때 ‘비인간적’이라는 말은 해명이 필요하다. 이는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태도를 지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이라고 믿어 왔던 범주 바깥을 가리키면서, 동시에 ‘인간적인’ 감정, 다시 말해 이기적 본성을 전제하는 사사로운 감정을 초월하거나 초과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각성자들은 자아 동일성의 상태를 벗어난 무아에 가깝지만 실제로 감정을 못 느끼게 된 것이 아니라 “이미 이해된 감정들이 소거되었을 뿐”(75쪽) 여전히 어떠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 각성자들은 능숙하게 “자신의 감정을 결정하고 스트레스를 컨트롤”(76쪽)하는 “해탈한 수도승”(77쪽)처럼 보인다. 심지어 이들은 세계를 위협할 위력을 가진 존재로 예상되던 것과 다르게, 공통적으로 ‘옳음’, 즉 윤리에 대해 말한다. “당신의 기억과 능력을 인류를 위해 사용할 용의가 있”냐는 주인공의 물음에도 각성자들은 하나같이 어딘가 공허한 눈빛으로 “그건 옳지 않”(74쪽)다고 답한다. 이들은 자아와 타자의 구분이 사라지자 고감도로 타인의 감정에 이입하게 된 것이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소설은 마치 (「스펙트럼」도 곧잘 그렇게 읽혀왔듯이) 타자를 대하는 (인본주의적인) 윤리를 말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는 아무래도 소극적인 독해다. 이들이 윤리적인 존재로 거듭나는 이유가 다름 아닌 감정임에 다시 주목해 보자. 각성자들은 감정에 관해서 말할 때면 줄곧 머뭇거린다. 이들은 특정 영혼에 대한 수많은 감정이 중첩되어 있어서, 어느 특정한 감정을 설명하기에는 안타깝고 난처한 감정이 앞선다고 말한다. 이때 소설은 ‘영혼’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지만, 「스펙트럼」과 마찬가지로 영혼과 육체의 이원론을 전제하는 것은 아니다. 각성자들의 증언이 그 근거다. 이들은 전생의 기억이 머릿속에 단순히 저장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감각이 선행하고 뇌가 그것을 영사해서 보여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영혼의 각성은 형이상학적이거나 인지·지능적인 영역이 아닌, 신체 감각의 영역에서 일어난다. 소설에서 말하는 ‘영혼’은 오히려 유비, 암시를 통해서 접근 가능한 ‘감수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사람의 정신과 존재 양태를 연구하는 주인공과 그의 언니는 (본인들이 각성하기 전까지) 각성자들의 영혼을 분석하고자 고군분투한다. 이들의 주된 관심사는 “사람을 작동시키는 메커니즘에 육체와 뇌에서 일어나는 물리적이고 화학적인 작용 이외에 다른 무언가가 더 작용하는지, 사람을 그 사람으로 만드는 요소에 유전적 요인과 후천적 인과를 제외한 영적인 힘이 과연 존재하는지”(74쪽)다. 첫 번째 질문은 물리주의적 입장과 골상학적 관점을 전제하되, 이것으로 환원 불가능한 현상학적 경험이 있는지 혹은 개념화가 불가능한 잔여의 감각질이 있는지를 묻는 것이며, 이를 바탕으로 보았을 때 두 번째 질문에서 언급한 ‘영적인 힘’이란 과학으로 완벽히 해소되지 않고 정신에 남아있는 감각으로 유추할 수 있다. 우선 두 인물은 공통적으로 물리주의적 관점, 즉 영혼(정신)이 어떤 법칙이나 정보의 총합이라고 보는 관점으로 논의를 시작하며, 점차 환원주의적 관점에서 미끄러진 잉여의 감각을 탐구한다. 

   주인공과 언니의 추론에 의하면, 체화된 정보와 기억에 의해 생이 창발한다. 그렇다면 기억과 감정은 왜 여러 겹으로 몸에 중첩되는가. 유일한 근거로 묘사되는 것은, 최초의 각성자가 먹은 것으로 추정되는 식물 ‘아즈깔’이다. 이 식물은 “유전적 전승이나 호르몬 교류 없이도”(66쪽) 떨어져 있는 식물 개체끼리 정보를 공유한다. 이는 아즈깔만의 특별한 감각력이기도 하지만, 아즈깔을 연구하는 삼림학자 ‘곤’에 의하면, 식물이라는 게 원래 아즈깔적인 특성을 갖고 있는 듯하다. 나무들은 땅속뿌리 균근으로 탄소를 교환하거나 물을 서로 주고받으며, 각종 정보와 에너지를 교환한다. “식물을 단일하게 존재하는 생명체로 인식하는 것은 씨앗만 보고 그 나무를 안다고 믿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며 그들을 유기적인 공동체로, 거대한 하나의 숲으로 보아야 한다고 곤은 주장했다.”(96쪽) 곤은 식물과 미생물 행위자 사이의 네트워킹을 보고 있으며, 이때 행위자 하나하나는 네트워크된 자아로 발견된다. 네트워크된 자아 혹은 사회적 자아는 아즈깔이자 각성자들이다. 이들은 ‘거대한 하나의 숲으로서의 나무’인 것이다. 이들의 사회적 지각은 다른 사람의 생각을 명시적으로 추론하거나 생각해 보는 것과 다르다. 사회적 지각은 타자의 의도를 의식·인지·지각하기도 전에 자연스럽고도 직접적으로 무언가를 알아차리는 원초적 감각이다. 

   주인공과 언니는 이와 같은 각성자들의 자아상을 분석하며, 미래의 어떤 생각이 과거의 누군가의 직관적인 통찰로 돌출할 수 있음을 알아낸다. 따라서 각성자들은 살아보지 않은 미래의 생까지 이미 체험한 생처럼 알 수 있다. 지구의 물리적인 시간으로는 절대로 성립 불가능하지만, 66억 번의 생을 살았다는 어느 각성자의 주장은 거짓이 아니다. 영혼은 ‘시공간을 포함하는 개념’이자, “고정된 시점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가 흐르고 움직일 때만 나타나는 순간적인 에너지”(112쪽)다. 외부 영향에 반응하는 정동적인 것이다.11) 이렇듯 각성한 인간 존재자들의 영혼, 즉 감수성은 인지를 넘어선다. 소설은 66억 명의 무아 혹은 중첩된 사회적 자아를 통해 고정불변하게 여겨온 인간의 자아 개념을 해체한다. 



   4. 밀가루 반죽 치대기: 차이와 반복


   비슷한 패턴을 가지면서도 조금씩 차이를 보이는 각성자들과의 면담은 소설 내내 반복된다. 이는 소설의 서술자이자 주인공 ‘나’, 그리고 그의 언니가 각성자를 연구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서사 흐름이다. 이 과정에서 ‘나’는 각성자들의 케이스들로부터 귀납적으로 결론을 도출하고자 하는 반면, 언니는 연역적으로 가설을 검증하고자 한다. 주인공과 언니는 서로 다른 방법론을 가지고 각성자에 대한 치열한 토론을 이어간다. 이러한 인물들의 공동 연구는 소설의 형식과도 닮아 있다. 소설은 각성자들의 사례를 하나하나 수집하고 나열하면서(귀납법) 그때그때 법칙과 가설을 세워 검증하다가(연역법) 결말에 이르러서는 가설과 추론을 뒤로 하고, ‘나’의 경험과 체험만 남긴다. 인물들의 연구 방식 혹은 소설의 서술 방식은 찰스 샌더스 퍼스의 가추법(abduction)과 비슷하다. 가추법이란 법칙(가설)과 결과로부터 사례를 추론하는 방법이며, 때문에 확실한 결론이 도출된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이는 연역법과 귀납법 양쪽의 대비를 이루면서 양쪽을 보완하는 방법론으로 자기 교정 메커니즘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서술 형식은 철학적 명제를 등장인물과 서사로 체화하고 이를 통해 존재의 경계를 탐구하는 과학소설에 적합하다.12) 일종의 도약으로서의 가추법은 합리적이기보다 정서적이고 상황적인데, 「태초」의 서사 구조와 결말은 이를 훌륭하게 소화해서 보여 준다. 

   특히 주인공이 각성을 체험하는 소설의 결말은 강렬하다. ‘나’는 아즈깔과 각성자에 대해 알 만큼 알아냈음에도 불구하고, 각성 이후의 ‘느낌’은 ‘아는 것’과 사뭇 다름을 깨닫는다. 나름대로 분석해 왔던 인지적 사실은, ‘나’의 경험과 느낌에 못 미치는 것이었다. 주인공이 품었던 의구심과 궁금증도 각성 이후 자연히 해소된다. 주인공이 곤과의 대화에서 드러낸 의문을 보자. 


   “ ‧‧‧ 언젠가 우리가 마침내 하나가 되어버리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그렇게 된다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나지 않을까? 사랑도 증오도 없고 차이도 선택도 없는 상태에서 모든 것이 멈추는 거야.”

   “그건 너무 끔찍한데.”

   나는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영혼의 끝이 정말 그러하리라고 생각했다. 나와 너를 구분할 수 없게 된 영혼은 아무런 관계도 맺지 못하고 생에는 아무런 인과도 생기지 않는다. 영혼의 기억으로 만들어지는 세상이 멈추고 모든 것이 고요 속으로 사라진다. 

   “ ‧‧‧ 우리가 가진 기억과 특별함과 아름다움이 다 사라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텅 빈 우주가 되는 거야.”

 (99-100쪽, 강조는 인용자)


   각성 이전의 ‘나’는 모두가 각성하여 자아와 타자의 구분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면 마침내 우리는 하나가 되어 말끔히 소멸할 것이라고 예견한다. 영혼 패턴의 무한한 반복 끝에는 아무것도 없지 않을까, 의구심을 품는 것이다. 하지만 각성 이후의 주인공은 예상과 다른 무언가를 느낀다. ‘나’는 냉소에 빠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뿌듯함과 안타까움, “과학자로서 혁명”과 즐거움을 체감한다. 그는 원호를 보고 웃으며, “커튼을 열어 오늘의 세상을 원호에게 보여 준다.”(119쪽) 이는 주인공이 지금 이 순간에만 흐르는 무언가를 감각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장면이다. (물론, 아직 모두 각성한 세상은 오지 않았다지만) ‘나’는 무아 상태에 도달했음에도 형용할 수 없는 감각과 감정, 그리고 그것들의 순간적 차이를 느끼고 있다. 이는 그저 아름답기만 한 결말이 아니다.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서 첫 번째 영혼이 분리될 테니까. 아주 작은 차이로 틀어진 나와 너가 생기면 다시 세상이 시작될 테니까. 다시 시간이 흐르고 세계가 존재하고 나는 너를 궁금해하고‧‧‧ 그렇게 아무런 의미 없이 반복하기 위한 반복을 시작할 테니까. 아마도 태초에 영혼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113쪽)


   주인공은 각성하기 전날 밤, 새로운 가설을 세운다. 얼핏 낭만적인 말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과학적 논리가 뒷받침하는 주장이다. 샤비로는 테드 창의 소설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를 분석하면서 인간, AI, 디지언트 등의 감각적 존재자들이 왜 완벽하게 똑같이 복사되거나 복제될 수 없는지를 논증한다. 설령 뇌의 뉴런을 완벽히 코드화해서 인간 존재자의 정확한 복사본을 만든다고 해도, 두 개체 사이의 동일성은 바로 그 순간에만 유지되며, 그 둘은 곧장 다른 경험을 통과한 다른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13) 감각력을 가진 존재가 완전히 똑같아질 수 없는 이유다. 소설은 인간을 객체화하고 평평하게 만드는 것이 결코 차이 없음의 전형 상태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논증한다. 

   이는 차이와 반복이 빚어낸 효과이기도 하다. 이때 ‘나’에게 ‘차이와 반복’에 관한 힌트를 준 건 그의 소꿉친구, 룸메이트이자 주인공을 한결같이 짝사랑해 왔던 ‘원호’다. ‘나’는 각성자들을 그룹으로 인터뷰한 뒤에 “인연이 닿아 있는 특정한 그룹의 영혼들과 반복해서 관계를 맺게 된다는 것”(92쪽)을 발견한다. ‘나’는 한 사람의 중첩된 영혼(자아)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가 맺고 있던 관계, 즉 연결망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차리면서, “인연을 반복하기 위해 생이 존재하는 것”(93쪽)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면 이런 반복을 왜 계속 반복할까? 주인공의 의문에 원호는 뜻밖의 해답을 준다.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건 오직 그게 계속 반복된다는 사실”이기 때문에, “반복하는 것 자체에 의미”(95쪽)가 있고 중요한 것이라고. 원호는 작중에서 ‘각성’하지 않았지만, 특이하게도 그는 종종 각성자처럼 보인다. 언제나 ‘나’보다 빨리 ‘나’에 대해 알아내어 ‘나’의 습관, 표정, 기분, 마음이 도래하기도 전에 이미 알고 있었고, ‘나’를 대하는 태도와 감정은 한결같이 차분했다. 또 그는 일요일이면 규칙처럼 빵 굽기를 반복했다. “반복해서 반죽을 치대”는 원호의 몸은 “단조로운 리듬으로”(112쪽) 흔들렸다. 원호는 “요리사니까 반복해서 요리를 할 뿐”(95쪽)이다. 하지만 그의 반복에는 차이가 있다. 김치볶음밥과 된장찌개를 해 먹는 패턴을 반복하면서도 어느 날은 달걀프라이나 잎채소나 짠맛을 추가한 김치볶음밥과 된장찌개를 만든다. 

   주인공은 각성 후 자신과 원호의 영혼(자아) 사이의 패턴을 알게 된다. 그것은 “둘은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다”(116쪽)는 것이다. 하지만 딱 한 번 예외가 있었고, 그 생에서 원호와 ‘나’는 둘 다 여자다. 그 생을 자각한 ‘나’는 다시 한번 이번 생에서 원호와 자신이 사랑하게 되는 예외가 반복될 것을 직감한다. 이때 영혼(자아)의 규칙성과 이성애 규범성은 탈영토화된다. 들뢰즈에 의하면, 끊임없이 변이하는 리좀적인 것에 동일성, 영토성, 본질이란 없다. 접속과 재배치를 통해 차이를 생성하는 끝없는 반복이 있을 뿐이다.14) “나는 롤빵을 한입 베어 물며” 말한다. “이렇게 밀을 가루로 만들어서 다시 뭉칠 뿐인데” “어째서 이렇게 맛있을까?” “그래도 똑같은 밀가루잖아. 같은 것을 나누고 다시 섞을 생각을 누가 처음 했을까?” 이 물음에 원호는 웃으며 답한다. “네가 안 볼 때 몰래 넣은 것들”(111-112쪽)이 있다고. 그것은 아주 사소한 차이, 미적인 것이다. 


   5. ‘알 수 없음’을 향한 SF


   SF는 미학을 남긴다. 우다영의 소설은 차이와 반복을 통해 감각적 경험을 발생시켰다. 김초엽의 「스펙트럼」은 어떠할까. 소설이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외계 존재자를 조우한 주인공 희진이 40년 만에 지구로 돌아와서 자신의 경험을 증언했으며, 그로부터 시간이 또 흐른 시점에서 서술자 ‘나’, 즉 희진의 손녀가 할머니의 이야기를 전한다. 독자들은 희진이 이미 지구로 무사히 귀환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이야기를 ‘전해’ 듣기 때문에 이야기의 신빙성을 검증하는 위치에 놓인다. 더군다나 희진은 지구로 귀환했을 때 이미 노인이 되어 있었고 우주 조난 경험으로 인해 인지능력이 저하되어 있었다. 외계 행성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를 의도적으로 함구하는 바람에 허언증 환자로 몰리기까지 한다. 이렇게 희진의 경험담은 소설 안과 밖의 사람들에게 믿거나 말거나 식의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하지만 1에서 논의했듯이 소설이 루이의 존재 양태를 통해 인지/지성이 아닌 감각/감수성 그 자체에 더 주목하고자 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서술 형식은 동화적이지만은 않다. 소설은 오히려 개념화의 가능성을 능가하는 사변적 외삽으로서 과학적 가설을 체화·서사화한다. 희진은 지구로 돌아올 때 루이의 그림 종이를 한 뭉치 가져온다. 이후 희진은 루이의 기록, 색채 언어를 읽어 내기 위해 유리를 모은다. 마침내 희진은 스펙트럼을 활용해 루이의 색채 언어에서 패턴과 의미를 조금씩 읽어 낸다. 이때 희진은 잠깐이나마 루이가 된다. 이는 루이의 존재 방식을 생각하면 비유적 표현이 아니다. 희진의 ‘인지’ 능력은 저하되었을지언정, 그의 체험과 경험에는 미처 다 기록하지 못하는 생생함이 있다. 그 생생함은 희진이 직접 외계 행성과 루이를 겪었을 때 발생한 것이다. 이 감각은 시간 속에서 지속되어 여전히 희진에게 남아 있지만 그 누구도 희진이 감각한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희진도 마찬가지로 타자로서의 루이를 완벽히 이해한 것이 아니다. 소설 또한 타자를 대하는 인간의 윤리를 말하는 것에 목표가 있지 않다. 소설은 정량화·개념화할 수 없는 감각 그 자체를 더듬거린다. 그래서 「스펙트럼」은 ‘과학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과학소설스럽다. 

   희진이 조난 후 구조된 건 40년 만이고, 행성에서는 10년을 지냈다. “시공간 여행의 시차를 고려하더라도 할머니는 20년 이상을 다시 혼자가 되어 떠돌았다는 이야기”라고 서술자는 설명한다. 서술자는 희진이 그 오랜 시간의 공백 동안 “누구도 그 행성의 위치를 추적할 수 없을 장소에 도달”(93쪽)했으며, 그 후에야 구조 신호를 보낸 것이라 추측한다. 정말로 그러하다면, 희진의 희생은 이 소설의 형식처럼 이념적 과학을 초월한다. 그리고 이는 과학의 언어로 식민 지배를 정당화해 왔던 제국주의의 맥락에서 읽힌다. 희진은 행성의 좌표가 발각되면 지구의 과학자들이 우주 탐사를 명목으로 외계 무리인-루이를 어떤 방식으로든 ‘식민화’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외계 행성의 무리인들이 원시-지구인의 습성과 문화를 비슷하게 가진 것으로 재현되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이들은 동굴에 살고, 채집과 수렵을 하고, 동물의 부산물로 만든 의복을 착용하고, 마치 원시 벽화나 상형문자 같은 형태로 기록을 한다. 심지어 이들은 지구인의 원시적 조상들이 믿어 왔던 윤회 사상과 흡사한 세계관 속에서 자아의 연속성을 믿고 감각한다. 그리고 소설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어떻게 이것을 과학적이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고. 만물은 서로 맺어져 있다. 루이도 서로 맺어져 있으며, 각성자들도 서로 맺어져 있고, 우리-평평한 존재자들은 모두 서로 맺어져 있다. 모든 것은 접속과 재배치 속에서 영원히 반복되며 차이를 창발한다. 그때 탈중심화된 차이, ‘알 수 없음’의 감각은 미학의 영역이다. 동시대의 SF는 ‘알 수 없음’을 향해 접근하는 중이다. 



1) 잔해물 추락 모습을 담은 유튜브 숏츠 영상은 ‘누군가 그랬다. 내 실패도 저렇게 아름다웠으면 좋겠다고‧‧‧’라는 텍스트와 함께 업로드되어 조회수 1,219만 회를 기록했다. 추천순으로 댓글을 살피면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하는 것의 가치를 강조하거나, 자신의 실패에서 깨달은 교훈을 나누는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youtube.com/shorts/cDXw4m_muMU?feature=shared

2) 라투르는 ‘근대성’을 번역과 정화라는 두 가지 실천으로 설명한다. 번역(혹은 매개, translation) 작업은 새로운 유형의 존재들의 혼합, 인간 행위자와 비-인간 행위자의 결합체, 즉 자연과 문화의 하이브리드를 만들어내고, 정화(purification) 작업은 연결망으로 존재하는 하이브리드를 분할해 사회와 자연을 따로 추출한다. 이때 하이브리드란 인간과 자연, 주체와 대상 범주 사이에 존재하며, 어느 쪽으로도 간단하게 환원되지 않은 중간적 존재 혹은 기술의 산물 혹은 사물 행위자를 지칭한다. 브뤼노 라투르,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홍철기 옮김, 갈무리, 2009, 40~45쪽, 375쪽, 389쪽 참조.

3) 스티븐 샤비로, 『탈인지』, 안호성 옮김, 갈무리, 2022.

4) 김초엽, 「스펙트럼」,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허블, 2019, 57~96쪽. 이하 인용 시 본문에 쪽수 표기.

5) 복도훈은 「스펙트럼」이 묘사하는 외계 존재가 고귀한 야만인의 전형적 표상이며, 인간과 유사한 무리인들의 특성을 통해 ‘미생물-외계 생명 씨앗 가설’, 즉 프랜시스 크릭의 정향 범종설을 외삽한 서사임을 알 수 있다고 설명하는 동시에, 「스펙트럼」의 새로움은 루이들이 ‘색채 언어’로 그림을 그리는 행위에 있음을 강조한다. 이 글은 색채 언어뿐만 아니라 루이의 존재 양태의 의미까지 분석하고자 한다. 복도훈, 「SF와 새로운 리얼리티를 찾아서: 김초엽과 박문영의 소설을 중심으로」, 『창작과비평』 186, 창비, 2019, 53~71쪽.

6) “어쩌면 광대한 우주에서 고독한 스스로의 위치를 인식하고, 타자와의 조우를 갈망하는 그 자체가 고도의 자기 인지 능력을 요구하기 때문일까. 무리인들은 아직 그 정도의 철학과 자아 개념을 발명하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점점 회의감이 생겼다. 희진은 문자 언어의 흔적을 찾기 위해 협곡을 몰래 살펴보았지만, 문자로 보이는 것은 찾지 못했다.” (73~4쪽)

7) 스티븐 샤비로, 『탈인지』, 안호성 옮김, 갈무리, 2022, 42쪽.

8) 김홍중, 「코로나19와 사회이론: 바이러스, 사회적 거리두기, 비말을 중심으로」, 『한국사회학』 제54권 3호, 한국사회학회, 2020, 177~182쪽.

9) 이때 사회적 자아(social self)는 아닐 세스의 『내가 된다는 것』의 3부 8장 「자기 예측」에 정의된 바를 근거로 한다. 사회적 자아란 나를 지각하는 타인을 내가 어떻게 지각할 것인지와 관련이 있으며, 사회적 네트워크 안에 내재한 존재로부터 나의 일부를 인식하고 총체적 실체를 연속적으로 경험한다. 이를 토대로 과거의 기억을 미래의 계획과 연관시킬 수 있다. 아닐 세스, 『내가 된다는 것』, 장혜인 옮김, 흐름출판, 2022.

10) 우다영, 「태초의 선함에 따르면」, 『그러나 누군가는 더 검은 밤을 원한다』, 문학과지성사, 2023, 63-119. 이후 인용 시 쪽수 표기.

11) 스티븐 샤비로, 안호성 옮김, 『탈인지』, 갈무리, 2022, 6~27쪽.

12) 위의 책, 19쪽.

13) 위의 책, 100~143쪽.

14) ‘탈영토화’는 들뢰즈의 용어다.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조금씩 변화하는 패턴과 관계를 통해 구조의 중심성을 벗어나는 리좀적 사유를 펼친다. 리좀은 근본이 따로 없으며, 수평적으로 줄기를 뻗어 자유롭고 유동적으로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잠재성의 차원을 말한다. 니체의 영원회귀사상이 영원한 시간 안에서 우주와 인생이 똑같이 되풀이됨을 말한다면, 들뢰즈는 이때 영원히 반복되는 것이 ‘차이’라고 본다. 따라서 소설은 니체적 의미에서 영혼의 윤회나 환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소설의 세계관은 차이가 반복되는 사건의 잠재태다. 질 들뢰즈, 김상환 옮김, 『차이와 반복』, 민음사, 200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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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솔직한 마음

*아래의 글은 이라는 제목으로 기획된 강연의 강연록을 개고한 글입니다. 은 말과활 아카데미 북클럽 [산책:자]의 일환으로 2025년 10월 16일부터 11월 6일까지 총 4주간 진행되었습니다. 내 솔직한 마음 현재 인생에서 수많은 적수를 만났지만, 아내여. 그대 같은 적은 생전 처음이다. -바이런의 격언, ···이라고 알려진 격언 1. “My soul is dark!” 솔직한 사람들은 이기적 오늘 제가 다뤄 볼 시인은 김수영이고요, 그리고 주해할 시는 「풀」입니다. 너무 유명한 시인이고 너무 유명한 시죠. 그렇지만 결국에는 고백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 같아요. ‘고백’. 사전을 찾아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는 것이나 감추어 둔 것을 사실대로 숨김없이 말함”. 잘 알려져 있다시피 김수영은 고백의 달인이었습니다. 숨기는 게 좀 나을 법한 일상적인 치부까지도 굉장히 적나라한 발화로 시에다 풀어내곤 했었죠. 그런데 시만 그런 게 아니라 생활에서도 말이나 행동에 거침이 없었나 봐요. 예를 들어 「성(性)」 같은 시에는 외도를 비롯한 시인의 성생활이 가감 없이 노출되고 있는데, 실제로도 당시의 출판사 접대 자리에 참석하고 돌아온 이른 아침이면 아내인 김현경 여사에게 전날 밤 다른 여성과 동침한 이야기를 천연덕스럽게 늘어놓곤 했었더래요. 눈까지 반짝여가면서 말이죠. 그러면 김현경 여사는 또 그 얘기에 장단 맞춰가면서 재미나게 들어주었다고 하고요. 서로가 어떤 심정으로 그런 대화를 주고받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모습이 유쾌해 보인다기보다는 약간 닳고 닳은 부부간의 기싸움 같기도 한데, 하여간에 이런 고백은 생전에 두 사람의 복잡한 관계를 감안하고서라도 상대방 배려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진솔함이죠. 그러니까 김수영은 너무 솔직해서 탈이었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 왜 살다 보면 자기 기분이나 생각이 얼굴에 바로바로 드러나는 사람들 있잖아요? 좋으면 좋다든지, 싫으면 싫다든지, 도대체가 갈무리가 안 되는 사람들. 김수영이 딱 그런 타입이었던 것 같아요. 저는 좀 완전 반대인데, 면전에서는 눈치 보느라 쩔쩔매다가 집에 가서 끙끙 앓는 타입이거든요. 그래서 자기감정에 솔직한 사람들 보면 한편으론 부럽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화도 좀 나기도 하고요. 얼마 전에는 제가 자주 가는 카페가 있는데 사장님이 저 보자마자 한숨을 푹 쉬는 거예요. ‘하아···.’ 뭐지? 손님 나밖에 없는데. 혹시 방금 나 들으라고 그런 건가? 제가 독서대 들고 다녀서, 갈 때마다 허름하게 이거저거 펼쳐 놓고 죽치고 앉아 있거든요. 이런 일 있으면 항상 역지사지해 봅니다. 아니 짜증이 날 수는 있는데···, 아무리 그래도 나 같으면 좀 안 들리게 할 것 같은데···. 아니, 자기 심기가 불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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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1-01
k-컬처와 한국이라는 스토리텔링 1

류수연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5년 11월부터 2026년 1월까지 으로 3회 연재됩니다. k-컬처와 한국이라는 스토리텔링 1 -K-pop, 변화하는 스토리텔링 류수연 2020년대 한국 문학계를 뒤흔든 가장 큰 사건을 꼽는다면,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그 첫 번째에 놓일 것이다. 그것은 근대문학 이후 세계문학 안에서 자기 정체성을 확보하고자 했던 오랜 콤플렉스에 종지부를 찍은 동시에 한국문학의 미래에 대한 새로운 과제를 부여한 전환점이기도 했다. 그런데 문학이라는 외연을 스토리텔링으로 좀 더 넓힌다면 한 사건이 더해질 수 있을 것 같다. 바로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방영되어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던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등장이 그것이다. 여기에는 당연하게도 ‘왜’라는 의문이 따라붙을 것이다. 노벨문학상과 OTT 오리지널 영화 사이에는 별다른 연관성이 없어 보이니 말이다. 작가 한강에 대해 논하는 것은 아주 일반적인 문학의 일이며, 그의 노벨상 수상은 지극히 문학 그 자체의 사건이라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다르다. 애초에 그것은 문학 텍스트가 아닌 영상이지 않은가? 원작이 있는 작품도 아니니 미디어믹스로 접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문학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다루는 것에 고개를 갸웃할 사람이 많다는 것쯤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대단히 의도적으로, 그리고 어느 정도는 필연적으로 이 두 개의 키워드를 선택했다. 그것은 현재의 한국문학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 그 자체를 환기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과 OTT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현 단계 한국문학과 한국적 이야기가 전 세계인에게 어떻게 수용되고 소비되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가장 강력한 지표이다. 그 사이에는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대문자 ‘K’로 지칭되는 K-컬처가 놓인다. 이 연재에서 나는 ‘K’를 화두로 한국문화, 그리고 한국문화를 그려낸 스토리텔링의 3가지 국면을 탐색하고자 한다. 1. 바깥, 또 다른 중심 스토리텔링으로서 한국문화를 말하는 첫 번째 장에서 가장 먼저 선택한 키워드는 한강이 아닌 K-pop이다. 이 연재의 최종적인 종착지가 결국 문학이라는 점에서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선택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현 단계에서 한국을 둘러싼 모든 스토리텔링의 중심에 있는 것이 다름 아닌 K-pop이라는 점을 떠올려 본다면, 오히려 어쩔 수 없는 선택에 가깝다. 오늘의 세계인이 실감하고 상상하는 한국문화의 첫 장면은 매력적인 아이돌이 등장하는 K-pop 퍼포먼스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K-pop의 성공은 여전히 놀라운 사건이다. 세계 문화의 가장 변방에 있는 한국이 이토록 많은 세계적 스타를 배출했다는 것은 놀라움을 넘어 때로는 기적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거기엔 수많은 ‘왜&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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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1-01
세계문학에 관한 단상

세계문학에 관한 단상 허병식 세계문학이란 무엇인가. 2000년대 중반 이후 한국문학에 새로이 등장한 주요한 담론 가운데 하나로 ‘세계문학’에 관한 논의가 있다. 세계문학이란 세계화 혹은 지구화 이후 도래한 지구화시대 문학의 새로운 존재방식에 대한 논의 속에서 등장한 담론이지만, 그 시작은 이른바 괴테-맑스의 논의가 그 기원이라고 일컬어지듯 근대의 전지구적 도래와 시점을 같이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괴테가 에커만과의 대화에서 말한 “민족문학이란 이제 별다른 의미가 없다. 세계문학의 시대가 도래했다”라고 선언한 것과, “어느 한 국가의 정신적 창조물은 공동의 재산이 된다. 민족의 일면성과 편협성은 더 이상 불가능하고 많은 민족문학과 지방문학으로부터 세계문학이 탄생하고 있다.”는 마르크스의 주장이 세계문학 담론의 기원이라는 인식이 그것이다. 그러나 괴테와 마르크스의 선언이 곧바로 세계문학을 근대 세계의 중심으로 자리잡도록 만든 것은 물론 아니다. 민족이 제국주의와 식민의 결과라면, 그 제국주의와 식민지 경험이 정련한 것이 각국의 민족문학이었고, 식민지였던 나라들이 저마다 독립국가로 이행하면서 한편으로는 새로운 민족문학을 요청하는 과정에서 민족문학이 지니고 있는 ‘영향의 불안’에 대한 응답으로 등장한 것이 비교문학이었다. 민족의 정체성을 새로이 만들어가면서도 한편으로 타자의 문화를 의식하게 된 순간 등장한 것이 비교문학이었던 것이다. 이후 포스트식민주의가 제국주의의 경험이 식민종주국과 식민피지배국에 미친 영향관계를 분석하면서 비교문학이 지니고 있던 문화적 지배의 승인이라는 문제를 비판적으로 제기하고 시작했다. 비교문학과 포스트식민주의가 제국/식민지의 경험 이후에도 이어지는 문화적 지배와 혼종성의 문제와 씨름하였다면, 포스트식민주의로는 더 이상 대응하기 어려운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지배가 전개되면서 그에 대한 문화적 응전으로 재귀한 것이 세계문학일 것이다. 괴테 이후의 세계문학의 전개를 이렇게 거칠게 요약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세계문학이란 지구화 시대의 새로운 비교문학이자 포스트식민을 경유하여 새롭게 등장한 ‘제국’에 대항하는 문학운동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21세기 이후 ‘세계문학론’에 또다시 활력을 불어넣은 것은 카사노바와 모레티의 논의이다. 그들의 세계문학론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소개와 비판이 제기되었다. 모레티와 카사노바의 세계문학론이 강조하는 세계란, 일차적으로 “하나이면서도 불균등한” 세계체제, 혹은 서로 진입하기 위해 각축하고 경쟁하는 세계문학 공간으로서 주로 사회경제적 시각에서 이해된다. 즉 이들의 세계 개념은 문학을 조건 짓는 사회경제적 환경 내지 배경에 가깝다.1) 김용규는 카사노바와 모레티의 논의와 그들에 비판적인 논자들의 세계문학론을 소개하면서 “오늘날 자본주의의 불균등 발전과정을 보면, 세계문학의 중심부에서는 중심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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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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