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고통은 증언되어야 하는가
- 작성일 2025-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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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고통은 증언되어야 하는가
―고통과 쟁론 입론 2
박동억
1. 고통의 서열
몸에 남은 물의 기억을 다 태우는 당신과
당신 물의 기억이 다 지는 것을 들여다보는
나는 어쩔 것인가
허수경, 시 「불을 들여다보다」 중에서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아니 나 자신이 나의 고통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기록하게 만드는 동력이 될 수 있을까. 하지만 나는 타인의 고통 앞에서 손쉽게 체념한다. 우선 자기 몫의 삶을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지쳐 있기 때문이고, 그다음으로 타인의 고통을 함부로 기록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신중함 때문이다. 단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은 삶은 공감의 여력을 기르기에 충분치 않고, 타인의 고통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크거나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멀게 느껴진다. 더욱이 내게 뚜렷한 것은 오직 자신의 고통뿐이어서 그것을 벗어나 생각하는 일은 매우 어렵게 느껴진다.
일단 공감할 여력을 갖춘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말기암 환자에게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이웃들을 심려하지 않았다고 비판하지 않는다. 또한 하루 끼니를 챙기기 어려운 처지에 놓인 자에게 동물의 고통을 숙고해달라고 요청하기는 어렵다. 이를테면 자신의 생존을 보장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타자의 고통을 배려할 여유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기본적으로 고통에는 서열이 있다. 누구에게든 나의 고통은 가장 긴급한 것이고, 나와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의 고통은 중요한 것이며, 그 밖의 사람들이 겪는 고통은 공감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러한 서열이 정의롭지 않다고 생각될 때도, 우리의 공감 능력은 ‘나’를 기준으로만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해비 카렐이 『아픔이란 무엇인가』에서 강조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눈앞의 고통받는 자를 연민하지만 그의 고통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한다는 사실이다. 그녀가 림프관평활근증(Lymphangioleiomyomatosis, LAM)이라는 희귀병 판정을 받은 것은 서른다섯 살의 일이었다.1) 그녀는 진단받은 지 3개월 만에 폐 기능의 10년 치를 상실했다. 순식간에 삶이 변화했다. 한 층 계단을 오르는 것조차 각오가 필요했고, 휴대용 산소호흡기를 꺼낼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는 것을 견뎌야 했으며, 잠들 때마다 언제든지 숨이 멎을 수 있다는 공포에 전화기를 머리맡에 두게 되었다.
누구도 그녀의 고통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병원에 가면 의사는 그녀의 ‘사례’를 진단할 뿐 그녀의 ‘고통’에 관해 묻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이 느끼는 아픔에 대한 설명을 시작하면, 사람들은 마치 ‘도대체 누가 의사야’하고 묻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친구들은 그녀의 연락을 불편해했다. 평소처럼 대화를 나누다가도 그녀의 비참한 하루하루를 설명하려고 하면 아예 연락을 끊어 버리기도 했다. 해비 카렐에게 더욱더 고통스러운 것은 그녀를 연민하는 시선이었다. 자신을 가엽게 쳐다보는 눈빛만으로도 그녀가 죽어 가고 있는 사람이고 끔찍한 곤경에 처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렇게 적는다. “공감. 인간의 감정 중 가장 부족한 것을 하나 꼽으라면 나는 바로 공감을 선택할 것이다. 그리고 아픔만큼 이것이 명백히 드러나는 상황은 없다.”2)
아주 드물게 진심으로 와닿은 위로가 있었다. 그녀와 같은 병을 앓는 환자의 목소리였다. 그들은 그녀에게 우는소리를 하지 말라고 꾸짖었고 주어진 삶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법을 깨우치게 해 주었다. 그러나 이것은 공감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깨닫게 하는 사례이기도 하다. 무엇이 사람에게 공감을 가능케 할까. 해비 카렐에게 와닿은 것은 그들이 전한 말의 내용이 아니라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의 목소리’였다. 이처럼 고통받는 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 이상이 필요하다. 고통받는 자에게 말 건네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위치에 서야만 하는 것이다.
2. 현대 의학과 ‘고통을 줄이기’
다음과 같은 사실이 우리를 주저하게 만든다. 진정으로 타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와 같은 처지에 놓일 때만 가능하다. 타인을 ‘나’와는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면, 사람들이 같은 입장에서 고통을 나눈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일뿐더러 모든 사람의 아픔과 괴로움을 공유하도록 만든다는 것도 바람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이것이 내가 ‘고통을 나누다’라는 표현이 아닌 ‘고통으로 향하다’라는 술어를 사용하는 이유이다. 우리는 고통에 대한 공감은 항상 불완전한 방식으로만 실현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다시금 타인의 고통을 부분적으로나마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과정을 곧 ‘고통으로 향하기’라고 정의해야 할 것이다.
하이델베르크 대학병원의 정형외과 의사 마르쿠스 쉴텐볼프(Marcus Schiltenwolf, 1959~ )는 의사가 환자의 고통을 이해하는 과정에 대해 “치료 과정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기본적인 기만”3)이라고 표현한다. ‘기본적인 기만’이라는 표현에는 환자의 고통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면서도 그것을 완전히 가능케 하는 방식은 없다는 양가적 인식이 깃들어 있다. 이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타인의 고통을 다루는 차선책뿐이다. 그중 현대사회에서 가장 많은 이들이 찾는 방편은 의료 제도다. 의료 제도의 목표는 환자가 건강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돕고 사회 전반의 고통을 줄이는 것이다. 물론 모든 종류의 고통을 극복하는 것이 의학의 목표는 아니다. 통증은 우리의 몸에 이상이 생겼음을 알리는 신호 체계이기 때문에 그것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 또한 바람직하지는 않다. 정확히 말해 의학의 목표는 우리의 건강을 해치는 만성적인 고통을 극복하는 데 있다.
그런데 앞서 살펴보았듯 해비 카렐은 그녀가 병원에 방문하고 치료받는 과정 자체가 정신적 고통을 만들어 낸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녀는 치료 과정에서 의사와 간호사의 냉담함에 부딪칠 때마다 괴로움을 느꼈다. 병과 고통을 체험하고 있는 것은 환자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의사는 그녀의 말과 행동을 ‘병’을 치료하기 위한 단서로만 다루었다. 의사에게 마치 치료 과정의 주어가 환자 대신 병인 듯 말이다. 어째서 의사는 냉담하게 행동하는 것일까. 병원의 의사이든 의약품을 생산하는 기업이든 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고통의 사회적 총량을 줄이는 것이다. 호스피스 치료와 같은 예외적 경우가 아니라면 그들은 공감을 의무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공감이 효과적으로 고통을 줄이는 방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감하는 행위 또한 고통을 동반한다. 타인의 고통이나 참혹한 사건은 그것을 듣는 것만으로도 괴롭다. 더욱이 진정한 공감에 이르는 것은 극도의 자기희생을 요구한다. 공감은 ‘고통을 나누는’ 것이지 ‘공감을 줄이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의사가 냉철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은 진료의 객관성뿐만 아니라 사회적 고통의 총량을 줄이는 데도 중요한 의의가 있다.
중요한 것은 고통 줄이기가 의학 분야만의 메커니즘은 아니라는 점이다. 현대사회가 곧 의학적이다. 사회학자 노르베르트 엘리아스(Norbert Elias, 1897~1990)가 『죽어가는 자의 고독』에서 지적했듯 현대사회 전반은 괴로운 경험을 비일상적인 영역으로 배제함으로써 우리의 고통을 줄이는 방향으로 제도화되어 있다. 이를테면 현대의 장례 제도는 죽음의 고뇌를 우리 곁에서 추방한다. 1923년에 발표된 현진건의 소설 「할머니의 죽음」에서 할머니의 임종은 그녀가 머물던 집안에서 치러지고, 작품에는 할머니의 몸과 마음이 무너져 가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생활하던 집에서 가족의 임종을 지켜보고 장례를 치르는 경우는 사라졌다. 대신 세상을 떠나는 친족의 신음을 듣고 그들의 육체를 만지는 경험을 의료 시스템과 장례 절차에게 대리한다. 이러한 과정을 엘리아스는 ‘죽음의 전적인 배제’라고 표현하는 데, 이러한 배제는 고통을 상기하도록 하는 불쾌한 경험 전반을 일상으로부터 추방하려는 욕망에서 비롯한다.
그 결과 현대인은 고독해졌다. 현대인은 홀로 죽는다. 타인의 죽음이 타인의 것이듯, 그의 고통은 오롯이 그의 몫이다. 이것은 역설적 효과를 가져왔다. ‘나’의 고통이 공감받지 못한다는 사실은 괴롭지만, ‘나의 고통’ 때문에 타인이 괴로울 이유는 사라졌다. 단지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사회적 고통의 총량 또한 한 사람 분량만큼 줄어든다. 이것이 현대사회가 효과적으로 ‘고통을 줄이는’ 방식이다. 여기에는 부작용도 뒤따랐다. 우리는 타인이 겪는 참혹한 곤경을 외면하고 싶다. 누군가 자신이 겪은 참혹한 사건을 공개적으로 알리고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광장으로 나와 함께 시위할 때, 누군가는 그들의 목소리에 적개심을 품거나 피로감을 느낀다. 어떤 이는 피해자 앞에서 춤을 추거나 그들에게 언어적 모멸을 가하기까지 한다. 그러한 반감의 기저에는 고통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현대사회에 대한 순응적 태도가 깃들어 있다.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 고통에 대한 냉담함이야말로 고통을 줄이는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라는 믿음이 자리하고 있다.
의사는 아이를 돌보듯 환자에게 말한다. 되도록 건강한 식습관을 유지하고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야 한다고 말이다. 노르베르트 엘리아스가 강조하는 핵심은 이러한 태도가 현대사회 제도 전반에서 고통을 배제하는 태도로 반복된다는 것이다. 사회는 점점 더 고통을 보이지 않게, 느끼지 않게, 사유하지 않게 만든다. 고통을 떠올리게 하는 경험은 모두 ‘불편한’ 것이다. 투신자살이 일어난 현장, 임종 직전 환자의 병상, 만성적인 질병에 시달리는 부랑자의 육체는 아무나 접근하지 못하도록 관리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의료 서비스는 기본적으로는 국민의 건강을 보호하는 일련의 사회 체계인 동시에 고통에 대한 상상을 제한하는 사회 제도로도 이해되어야 한다.
의학적 체계 안에서는 타인의 참혹이 비위생적인 요소나 정신병리를 유발하는 원인처럼 다뤄진다. 이렇게 고통을 의식에서 추방함으로써 그들의 머릿속에는 ‘건강한 삶’에 대한 계획으로 채워질 수 있다. 건강한 삶이란 어떤 예외적인 사고나 질병을 경험하지 않고 삶이 끊임없이 이어질 수 있다는 가정에 기초한 것, 즉 불멸성의 환상이다. 그것은 한 인간이 ‘삶’의 범위를 오직 자신의 건강한 정신과 육체로 한정할 때 성립하는 이미지이다. 그렇기에 건강한 삶의 이미지는 자기 고통 바깥에 있는 세계를 상상하지 않으려는 냉담함을 내포하고 있다.
3. 고통의 타자성
이로써 우리는 고통을 하나의 고뇌라고 선언할 수 있다. 고통을 나눈다는 것, 고통으로 향한다는 것, 고통을 증언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고뇌이다. 왜냐하면 고통은 근본적으로 타자에 의한 자기의식의 재규정이기 때문이다. 고통이 찾아오는 순간은 ‘건강한 나’라고 하는 확고부동한 환상이 뒤흔들리는 순간이기도 하다. 상처를 입거나 가족을 떠나보내거나 평생 모아 온 재산을 송두리째 빼앗길 때, 그렇게 내가 무력하게 쓰러져야만 할 때 고통은 발생한다. 육체적 통증이든 정신적 괴로움이든 고통은 타자의 타자성이 자아를 압도하는 경험이다. 고통은 그동안의 삶이 올바른 것인지 자아를 추궁하면서 ‘나’를 재인식하게 이끈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건이다. 바로 이것이 고통을 기록해야만 하는 이유이다.
뒤집어 말하자. ‘나’의 고통 심부에 타자가 있다. 주디스 버틀러는 여러 저서에서 상실의 경험과 그에 뒤따르는 애도야말로 인간 정체성의 중핵을 이루는 사건임을 강조했다. 예컨대 남성이 된다는 것은 여성처럼 행동하는 것이 금지된다는 것이고, 여성이 된다는 것은 남성처럼 행동할 수 없는 억압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유형의 ‘되기’에는 일정한 상실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버틀러는 『위태로운 삶』에서 애도를 적극적으로 수행하면서 정신적 방황과 혼란을 치열하게 살아 내는 ‘윤리적’ 주체를 묘사한다. 어떤 이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상실을 받아들이며 그 괴로움 속에서 타인을 발견한다. “내가 너로 인해 혼동을 겪는다면 너는 이미 나의 일부이고 나는 너 없이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4) 사람은 무엇인가를 잃었다는 고통스러운 사실 속에서 ‘나’를 발견한다.
독일의 철학자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Hans-Georg Gadamer, 1900~2002)는 말년 동안 고통에 대한 중요한 사색들을 남겼다. 그는 고통을 부정하는 현대 의학을 비판하였고, 고통을 겪는 상황을 ‘실존의 깨임’이 일어나는 계기로 긍정했다. 그가 강조한 것은 고통을 성숙의 계기로 삼는 인간의 주체성이었다. 그는 만성적인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의학 기술에 의존하지 않고 “견딜 만한 삶을 스스로 이끌 수 있도록 하는 것”5)이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태도라고 생각했다. 예컨대 프로이트는 구강암으로 서른네 번의 수술을 견뎌 내야 했지만 죽음에 다다른 상황에서도 안정제 투여를 거부하며 “나는 명료하게 생각할 수 없는 상태보다는 차라리 고통 속에서 생각하는 것을 더 원한다”라고 말했다.6) 한계에 다다른 고통 앞에서 쓰러지지 않는 정신을 발견할 때 우리는 감동한다. 이렇듯 가다머는 사람이 정신적 고고함을 유지하기를 바랐다.
그런데 가다머의 논의에는 고통의 양면성이 세심히 다루어지지 않는다. 한쪽에 고통을 겪는 자가 있고, 반대쪽에 고통의 원인이 되는 사건이 있다. 가다머는 이 두 가지 축에서 고통을 겪는 자에 초점을 두며 그가 고통을 이겨 내는 과정을 숭고한 이야기라고 상찬한다. 하지만 가다머는 세상에 극복 불가능한 사건이 존재한다는 진실을 중대하게 언급하지 않는다. 치명적인 질병이 재발했다는 진단 앞에서, 예상치 못한 전쟁의 발발 앞에서, 과거에 자신을 유린했던 이가 뻔뻔하게 살아 있다는 사실 앞에서 가다머가 주장했던 위대한 정신을 지속한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무엇보다도 가다머의 논의는 타인과 고통을 나누거나 고통으로 향해야 할 타당성을 반문하게 만든다. 가다머의 고통론은 의학을 비판하는 데서 시작되지만 그것은 끝내 의료 제도처럼 홀로 고통을 견뎌 내야 한다는 귀결로 이어지는 듯하다.
사회학자 엄기호는 고통의 실존적 측면과 사회학적 측면을 두부 자르듯 구분하여 생각할 때 마치 내 의지만으로 고통을 이겨 낼 수 있다는 착각이 배태된다고 설명한다. 혹은 사회문제를 해결하면 고통이 해결될 수 있다고 믿을 수도 있겠다.7) 어느 쪽이든 이러한 사고방식은 잘못된 것인데, 그것은 고통은 기본적으로 자아와 타자 사이의 상호 접촉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바로 세우고 고통을 이겨 내는 이야기는 고통에 대한 반쪽짜리 이해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고통을 극복한 비범한 사람들의 사례를 너무나도 많이 떠올릴 수 있다. 예컨대 나병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왕국을 지혜롭게 다스렸던 보두앵 당주(Baudouin d’Anjou, 1161~1185)부터 갓 태어나 두 다리를 절단했지만 올림픽 대회에 출전했던 오스카 피스토리우스(Oscar Pistorius, 1986 ~ )까지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예외적 사례에 집중하는 것은 고통의 사회적 원인을 해결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또한 그들의 성공적인 삶은 고통의 가장 어두운 그림자를 은폐한다.
고통의 가장 깊은 측면은 쉽게 달아난다. 우리의 세계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측면은 침묵에 잠겨 있다. 고통 속에서 절망하고 죽어 간 자들의 목소리는 증언되지 않는다. 또한 당신을 부양하고 떠나간 낯선 이들의 흔적 또한 잊힌다. 자아에 초점을 맞출 때 우리는 자아에 내포된 타자성을 잊는다. 역경을 이겨낸 자는 그를 지탱하는 사람들에 힘입어 그의 고통을 이겨 낼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한 사람 혹은 한 생명의 삶은 타자에게 고통을 줌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요컨대 한 인간의 성공은 다른 인간의 좌절을 딛고 이뤄지는 것이며, 그의 생명은 다른 생명을 먹어 치움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사람의 우주에서 천국과 지옥은 떼어 놓을 수 없는 한 쌍이다. 예컨대 인간의 윤택한 삶은 지구 생명체의 지옥이다. 그러한 사실을 외면하고 매 순간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습관을 우리는 건강함이라고 부른다.
4. 피할 수 없는 쟁론
다소 목적론적으로 정의해 보자. 문학이란 고통의 심부를 기록하기 위해 성립된 제도이다. 「공무도하가」부터 「오이디푸스 왕」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명백한 것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문학은 인간의 절망과 밑바닥을 드러내는 데 가장 탁월한 장르였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것은 인간성의 실패와 붕괴를 내밀하게 다루는 분야로서 문학이 유일하다는 주장은 아니다. 의학은 고통을 줄이는 사회적 제도를 구축하고, 철학은 고통을 극복하는 존재론적 자세를 바로잡는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고통, 재현할 수 없는 고통, 인간성이 무너진 인간의 삶이 어떻게 지속되는가를 이야기로 풀어낼 수 있는 장치로서 문학의 힘은 매우 특별하다.
좀 더 정확히 말해 내게는 고통의 재현 불가능성이야말로 문학이 필요한 이유로 느껴진다. 고통에는 서열이 존재한다. 타인의 고통을 순수하게 이해하는 것 또한 불가능에 가깝다. 그리하여 우리가 고통이라는 주제를 정확히 다루기 위해서는 언제나 중립적 뉘앙스보다 편파적이거나 정치적인 뉘앙스를 동반해야만 한다. 이 점에서 문학은 중요한데, 그것은 작가의 글쓰기는 종래의 커뮤니케이션이 실패라는 한계를 인식한 이후에 고유한 표현을 찾아 헤매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고통을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그것은 결코 그 사람이 느끼는 고통과는 전혀 다른 상투적인 것이 되어 버린다. 이로써 고통의 고유한 형상을 되찾는 것, 고통의 현상학이야말로 문학의 존재 이유다.
아버지의 폭탄이 터진 뒤라고 한다
구워지고 있었다
전자레인지에서처럼
지방이 튀어 오르고
불똥이 튀고
살갗이 타들어 갔다
한쪽에선 뼈대에 살갗을 걸레처럼 걸고
불 속에 서 있었다
토마토처럼 으깨지고도 있었다
거대한 돌에 눌려서
두부가 되어 가는 것도 있었다
배가 뻥뻥 터지며
구린내를 풍기는 것도 있었다
온 들판 전체가
누가 먹으러 오는지 알지도 못한 채
전신에 눈물을 칠하고
튀겨지고 있었다
어머니가 눈물을 삼키며 식사를 준비하고 계셨다
김혜순, 「엄마의 식사 준비」 전문, 『어느 별의 지옥』(청하, 1988)
중요한 것은 고통은 언제나 한 쌍이라는 것, 즉 고통을 느끼는 자와 고통을 가하는 자(상황)라는 양면성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김혜순 시인은 여성 차별로 인한 사회적 고통을 재현하는 작품을 1980년대라는 이른 시기부터 창작했다는 사실 때문에 주목을 요한다. 이때 그는 고통의 양면성이 지닌 아이러니를 드러내는 작품들을 발표해 왔다. 그의 세 번째 시집 『어느 별의 지옥』에 수록된 「엄마의 식사 준비」는 아버지가 폭탄처럼 가정폭력을 자행한 이후에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식사를 준비한다는 정황을 그려 내고 있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 하나의 신체가 ‘구워지고’ ‘불타고’ ‘으깨지며’ ‘튀겨지는’ 상상력은 곧 어머니가 느끼는 가정폭력의 강도를 감각화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작품에서 주어가 모호하게 처리되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엄마의 식사 준비」는 정반대의 맥락에서 해석되곤 했다. 요리의 모티프는 오히려 어머니가 아버지의 신체를 자르고 굽고 튀기는 행위를 상상하는 모습일 수도 있다. 고통받는 신체의 주어를 아버지로 본다면 이 작품은 ‘먹는 남성’과 ‘먹히는 여성’이라는 관계를 역전시키는 작품인 셈이다. 즉 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이 작품에서 신체의 훼손은 가정에서 억눌린 어머니의 울분과 그녀의 상상된 폭력을 드러낸다.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하는 것은 시집에서 “살찐 남자”들을 먹어 치우는 “비쩍 마른 여자”(「먹이의 역사」)라거나 “반 고흐의 머리 뚜껑”을 냄비로 삼아서 국수를 삶는 “태양 부인”(「먹고 있는 반 고흐를 먹고 있는 태양부인」)과 같은 남성 살해 모티프가 반복된다는 사실이다.
곱씹어 보아야 할 사실은 다음과 같다. 두 가지가 한꺼번에 옳은 해석일 수는 없다. 하나의 해석이 타당하려면 반대의 해석은 뒤로 물러나야 한다. 예컨대 이 작품에서 초점화하는 것이 여성의 고통이라면 요리되는 신체는 여성의 것이어야 한다. 반대로 이 작품의 중핵이 여성의 분노라면 요리되는 신체는 남성의 것이어야 한다. 고통이 양면성을 지닌다는 것은 이처럼 고통의 구조가 복잡성을 지니며, 그것이 단 하나의 시선으로는 온전히 해석될 수 없다는 사실을 뜻한다. 명백해 보이는 고통조차 최소한 두 가지 입장에서, 아이러니한 시선을 통해 성찰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김혜순의 시에 재현된 것은 단지 고통받는 여성의 형상과 여성이 차별받는 현실만은 아니다. 그의 시집에는 고통받는 입장에서 벗어나 고통을 주는 입장에 서고자 하는 복수심 또한 깊이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김혜순의 시는 ‘문학이 고통을 기록하고 증언한다’라는 전제를 복합적으로 곱씹어 볼 수 있게 한다. 문학은 증언의 장르다. 이러한 정의는 문학이 기본적으로 타인의 고통을 떠올리게 만들고, 고통받는 자의 목소리를 듣도록 요구하는 장르임을 뜻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문학은 고통을 ‘확대하는’ 듯하다. 적어도 세 가지 맥락에서 그렇다. 문학은 첫째로 커뮤니케이션의 측면에서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공감하도록 유도한다. 둘째로 시학의 측면에서 비유를 통해 고통을 과장하여 표현한다. 셋째로 현재 고통받았다는 사실에 기초하여 미래에는 반대로 고통을 가할 수 있다는 정당함을 예시한다. 고통의 양적 확산, 고통의 질적 변화, 그리고 고통의 심판이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문학은 고통 혹은 고통의 이미지를 사회에 확산한다.
이 세 가지 측면으로 인해 문학이야말로 고통을 재현하는 데 탁월한 장르일 수 있다. 문학은 고통을 시공간적으로 확산한다. 고통의 양적 확산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고통의 원인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물론 그것은 사람들의 갈등과 피로도를 확대하기도 하지만 그것 또한 사람들의 입장 차를 확인하는 데 중요하다. 고통의 질적 변화는 가다머가 상찬했던 ‘실존의 깨임’, 즉 성숙을 가능케 하는 기본 조건이기도 하다. 다만 이것은 편의적으로 자신의 고통을 과장하거나 자신의 고통을 합리화하는 수사로 변질될 수도 있다. 고통의 심판은 정의로움의 기준을 촉구하며 사람들을 결집하는 데 효과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복수를 부른다. 문학이 고통을 재현할 때 동반되는 이 세 가지 성격은 많이 논의되어 왔다. 그런데 내가 암시하고 싶은 것은 여기 드러나지 않은 네 번째 특징이다.
무덤은 여기
가슴에 매달린 두 개의 봉분
이 아래 몇 세기 전의 사람들이 아직 묻혀
숨 들이켜고 있는 곳
바다에 달 뜨고 달 지듯
두 개의 무덤 아래
죽은 자들이 모여
망망대해를 펼치고 오므리는
달을 올리고 끌어당기는 .
여자의 깊은 몸 구중궁궐
또 한세상
몇 세기 전의 어둠이 아직도
피 흘리며 갇혀 있다가
초승달 떠오를 때
기지개 켜는 곳
뱀과 뱀이 입 맞추고
초록 풀 나무 덩굴이 수천 번
되살아나고 뒈지는 곳
어느 별의 지옥은 여기
김혜순, 「어느 별의 지옥」 전문, 『어느 별의 지옥』
문학 또한 고통을 은폐한다. 문학 또한 타자의 고통을 착취한다. 바로 이것이 문학이 야기하는 쟁론적 상황이다. 미리 강조하고 싶은 것은 아주 신중하고 선량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의 언어조차 쟁론을 피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단 하나의 삶을 살아 내고 있으며 ‘나의 고통’ 혹은 ‘우리의 고통’을 가장 내밀한 것으로 여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김혜순 시인에게 가장 깊은 고통은 자신이 여성이라는 사실이었다.
1980년대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무덤’을 살아 내는 일이나 다름없다고 그는 표현한다. 아니 “이 아래 몇 세기 전의 사람들이 아직 묻혀 / 숨 들이켜고 있는 곳”에서 누대에 걸쳐 여성은 자신의 욕망과 의지를 억압한 채 살아가야 했다. 이 작품에서 무덤으로 비유된 여성의 신체는 이미 매장당한 자나 다름없이 ‘여성’을 살아 내도록 만드는 사회적 억압을 고발한다. 이어서 비유는 ‘뱀’과 ‘초록 풀 나무 덩굴’에 대한 비유로 옮아간다. 특히 시인이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질긴 줄기의 이미지다. 줄기의 이미를 통해 떠올리게 하는 것은 고통 속에서 연명하는 여성의 삶이다. “수천 번 / 살아나고 뒈지는 곳”이라는 표현을 통해 시인은 “어느 별의 지옥”에서 여성의 고통이 까마득한 시간 동안 지속했음을 강조한다. 이러한 이미지에는 고통을 감응케 하는 호소력이 있으며 역사적 차별을 하나의 이미지로 응집한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그런데 내가 이 작품을 숙고하게 되는 것은 시집의 제목이 된 이 마지막 표현 때문이다. 시인은 여성의 삶을 ‘어느 별의 지옥’, 즉 지구에 현전하는 지옥이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그것은 여성의 고통만을 초점화할 때만 타당하게 들린다. 여기서 자연물은 여성의 오랜 고통을 빗대기 위한 하나의 이미지로 종속된다. 다시 말해 자연물은 고통을 느끼는 주체로서 호명되지는 않는다. 오직 여성만이 고통의 주체이고 지구와 지구상의 동식물은 고통을 주거나 여성적 고통을 표현하는 배경이 된다. 김혜순은 사람이 인간 중심적이라는 의미와 유사한 맥락에서 여성주의적이다. 어느 한 존재의 고통을 드러내기 위해 다른 존재의 고통은 뒤로 물러나야 한다는 것, 바로 이러한 자기 초점화로부터 쟁론은 시작된다.
(다음 호에 계속)
1) 전 세계에서 약 25만 명의 여성이 림프관평활근증을 앓고 있다고 한다. 림프관평활근증은 폐 주변의 기관과 혈관에 비정상적인 세포가 자라나며 호흡 능력을 급속도로 감퇴시키는 치명적인 질병이다. 주로 가임기 여성에게 발생하며 8~10년 내 사망에 이른다고 알려져 있다. 유전적 돌연변이로 인해 발생하는 것으로 추측되기에 치료가 어려운 질병이기도 하다. 폐 이식이 유일한 치료법으로 제시되고 있다.
2) 해비 카렐, 박유진 역, 『아픔이란 무엇인가』, 파이카, 2013, 81쪽.
3)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 공병혜 역, 『고통: 의학적, 철학적, 치유적 관점에서 본 고통』, 철학과현실사, 2005, 15쪽.
4) 주디스 버틀러, 윤조원 역, 『위태로운 삶』, 필로소픽, 2018, 85쪽.
5)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 위의 책, 41쪽.
6)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 위의 책, 62쪽.
7) 엄기호,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나무연필, 2018, 76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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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 2025-11-01
류수연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5년 11월부터 2026년 1월까지 으로 3회 연재됩니다. k-컬처와 한국이라는 스토리텔링 1 -K-pop, 변화하는 스토리텔링 류수연 2020년대 한국 문학계를 뒤흔든 가장 큰 사건을 꼽는다면,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그 첫 번째에 놓일 것이다. 그것은 근대문학 이후 세계문학 안에서 자기 정체성을 확보하고자 했던 오랜 콤플렉스에 종지부를 찍은 동시에 한국문학의 미래에 대한 새로운 과제를 부여한 전환점이기도 했다. 그런데 문학이라는 외연을 스토리텔링으로 좀 더 넓힌다면 한 사건이 더해질 수 있을 것 같다. 바로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방영되어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던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등장이 그것이다. 여기에는 당연하게도 ‘왜’라는 의문이 따라붙을 것이다. 노벨문학상과 OTT 오리지널 영화 사이에는 별다른 연관성이 없어 보이니 말이다. 작가 한강에 대해 논하는 것은 아주 일반적인 문학의 일이며, 그의 노벨상 수상은 지극히 문학 그 자체의 사건이라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다르다. 애초에 그것은 문학 텍스트가 아닌 영상이지 않은가? 원작이 있는 작품도 아니니 미디어믹스로 접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문학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다루는 것에 고개를 갸웃할 사람이 많다는 것쯤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대단히 의도적으로, 그리고 어느 정도는 필연적으로 이 두 개의 키워드를 선택했다. 그것은 현재의 한국문학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 그 자체를 환기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과 OTT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현 단계 한국문학과 한국적 이야기가 전 세계인에게 어떻게 수용되고 소비되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가장 강력한 지표이다. 그 사이에는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대문자 ‘K’로 지칭되는 K-컬처가 놓인다. 이 연재에서 나는 ‘K’를 화두로 한국문화, 그리고 한국문화를 그려낸 스토리텔링의 3가지 국면을 탐색하고자 한다. 1. 바깥, 또 다른 중심 스토리텔링으로서 한국문화를 말하는 첫 번째 장에서 가장 먼저 선택한 키워드는 한강이 아닌 K-pop이다. 이 연재의 최종적인 종착지가 결국 문학이라는 점에서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선택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현 단계에서 한국을 둘러싼 모든 스토리텔링의 중심에 있는 것이 다름 아닌 K-pop이라는 점을 떠올려 본다면, 오히려 어쩔 수 없는 선택에 가깝다. 오늘의 세계인이 실감하고 상상하는 한국문화의 첫 장면은 매력적인 아이돌이 등장하는 K-pop 퍼포먼스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K-pop의 성공은 여전히 놀라운 사건이다. 세계 문화의 가장 변방에 있는 한국이 이토록 많은 세계적 스타를 배출했다는 것은 놀라움을 넘어 때로는 기적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거기엔 수많은 ‘왜&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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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에 관한 단상 허병식 세계문학이란 무엇인가. 2000년대 중반 이후 한국문학에 새로이 등장한 주요한 담론 가운데 하나로 ‘세계문학’에 관한 논의가 있다. 세계문학이란 세계화 혹은 지구화 이후 도래한 지구화시대 문학의 새로운 존재방식에 대한 논의 속에서 등장한 담론이지만, 그 시작은 이른바 괴테-맑스의 논의가 그 기원이라고 일컬어지듯 근대의 전지구적 도래와 시점을 같이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괴테가 에커만과의 대화에서 말한 “민족문학이란 이제 별다른 의미가 없다. 세계문학의 시대가 도래했다”라고 선언한 것과, “어느 한 국가의 정신적 창조물은 공동의 재산이 된다. 민족의 일면성과 편협성은 더 이상 불가능하고 많은 민족문학과 지방문학으로부터 세계문학이 탄생하고 있다.”는 마르크스의 주장이 세계문학 담론의 기원이라는 인식이 그것이다. 그러나 괴테와 마르크스의 선언이 곧바로 세계문학을 근대 세계의 중심으로 자리잡도록 만든 것은 물론 아니다. 민족이 제국주의와 식민의 결과라면, 그 제국주의와 식민지 경험이 정련한 것이 각국의 민족문학이었고, 식민지였던 나라들이 저마다 독립국가로 이행하면서 한편으로는 새로운 민족문학을 요청하는 과정에서 민족문학이 지니고 있는 ‘영향의 불안’에 대한 응답으로 등장한 것이 비교문학이었다. 민족의 정체성을 새로이 만들어가면서도 한편으로 타자의 문화를 의식하게 된 순간 등장한 것이 비교문학이었던 것이다. 이후 포스트식민주의가 제국주의의 경험이 식민종주국과 식민피지배국에 미친 영향관계를 분석하면서 비교문학이 지니고 있던 문화적 지배의 승인이라는 문제를 비판적으로 제기하고 시작했다. 비교문학과 포스트식민주의가 제국/식민지의 경험 이후에도 이어지는 문화적 지배와 혼종성의 문제와 씨름하였다면, 포스트식민주의로는 더 이상 대응하기 어려운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지배가 전개되면서 그에 대한 문화적 응전으로 재귀한 것이 세계문학일 것이다. 괴테 이후의 세계문학의 전개를 이렇게 거칠게 요약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세계문학이란 지구화 시대의 새로운 비교문학이자 포스트식민을 경유하여 새롭게 등장한 ‘제국’에 대항하는 문학운동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21세기 이후 ‘세계문학론’에 또다시 활력을 불어넣은 것은 카사노바와 모레티의 논의이다. 그들의 세계문학론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소개와 비판이 제기되었다. 모레티와 카사노바의 세계문학론이 강조하는 세계란, 일차적으로 “하나이면서도 불균등한” 세계체제, 혹은 서로 진입하기 위해 각축하고 경쟁하는 세계문학 공간으로서 주로 사회경제적 시각에서 이해된다. 즉 이들의 세계 개념은 문학을 조건 짓는 사회경제적 환경 내지 배경에 가깝다.1) 김용규는 카사노바와 모레티의 논의와 그들에 비판적인 논자들의 세계문학론을 소개하면서 “오늘날 자본주의의 불균등 발전과정을 보면, 세계문학의 중심부에서는 중심부의
- 관리자
- 2025-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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