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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서열과 증언의 권리

  • 작성일 2025-09-01

   고통의 서열과 증언의 권리

   ―고통과 쟁론 입론 마무리


박동억


   1. 인간의 범주

   

   지금까지 살펴본 것은 고통으로 향하려는 실천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고통은 섬이다. 고통을 겪는 이는 말할 여력을 가지기 어렵고, 듣는 자는 판이한 삶의 입장에서 고통을 오독하며, 사회제도는 고통을 줄이는 데 초점을 맞춘다. 결국 모든 존재는 자기 몫의 고통을 홀로 짊어지며, 한 존재가 끝까지 살아 낸 고통은 그의 오롯한 비밀로 남는다. 하나의 고통은 하나의 침묵 속에서 죽는다. 사실 그것은 놀라운 일은 아니다. 고통은 아주 두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겪었던 고통을 내가 겪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은 부끄럽지만 다행이다.

   오히려 놀라운 것은 사람에게 고통을 이해하고자 하는 욕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아주 예외적인 사건이 우리에게 그러한 욕망을 간절한 것으로 만든다. 어떤 참혹한 사건과 그러한 참혹을 겪고 있는 사람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그 자체로 사건이다. 그것은 고통의 우주에서 우리가 이해하는 것이 그저 한 줌에 지나지 않음을 죄악으로 느끼게 한다. 수많은 애도 행위와 추모 행사, 그리고 기도는 그저 당신의 고통을 잘 이해했다는 착각을 만들어 낸 뒤 당신을 떠나보내는 일을 합리화하는 과정이 아닌지 반문하게 한다.

   그리하여 시인은 쓴다. 문학은 당신이 ‘아직 여기 있다’라고 말하기 위한 형식, 이 작품의 언어가 당신이 겪는 고통 자체이기를 꿈꾸는 하나의 몽상이다. 물론 타인의 고통을 재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또한 설령 그들의 고통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할 때조차 그들의 고통을 미화하고 그로부터 교훈을 얻는 데 그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누군가의 환부를 드러내고 그의 고통을 향하기 위한 단초로서 문학은 하나의 탐구이다.

   그런데 주디스 버틀러가 『불확실한 삶』(2004)에서 강조했던 것은,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해야 한다는 윤리적 소명을 간직한 상태에서도, 어떤 이들에게는 눈길조차 두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예컨대 전쟁터의 적군이나 제3세계의 국민이 그렇다. 버틀러는 미국의 저널에서 이스라엘 병사와 국민을 위한 추모란은 존재하지만, 팔레스타인 국민을 위한 추모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비판한다. 

   어떠한 선량함은 더 윤리적인 지평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우리의 마음을 제약한다. 여기서 그가 제안하는 용어는 ‘애도의 서열’1)이다. 애도의 서열이란 이웃은 소중히 애도하고 타인의 죽음에는 반응하지 않는 차별의 원칙이 우리에게 내면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그것은 누군가의 고통으로 향하려는 우리의 의지 자체는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러한 의지의 방향에 대해서는 냉철하게 반성해야 한다는 사실을 뜻한다.

   허수경은 그러한 애도의 서열이야말로 그가 극복해야 하는 과제임을 자각한 시인이었다. 그는 독일에 체류 중인 한국인 학생이었고, 한국인의 시선으로든 독일인의 시선으로든 유고슬라비아, 이라크, 팔레스타인 등은 낯선 이국이었다. 허수경은 2000년대를 전후로 그러한 나라에서 벌어진 전쟁의 참상에 대해 쓰기 시작했다. 파괴된 대지 위에서 간신히 삶을 이어 나가는 여성, 아이, 동식물을 위해 증언하고자 했다.


   만일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 모든 것을 몰랐을까 나의 출생지는 우연한 감염이었네 사랑이나 폭력을 그렇게 불러볼 수도 있다면


   폭력에서 혹은 사랑에서 어디에서 내가 태어났는지 모르지만 지금 보고 있는 이 세계는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나에게는 없는 것일까


   태어나지 못한 태아라고 고독이 없는 것은 아냐 사랑의 태아 폭력의 태아 태어나지 못한 태아들은 어쩌면 고독의 무시무시함을 안고 태어나지 못한 별에서 긴 산책을 하는지도 몰라


   태어난 시간 59분에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0시 사이, 미쳐버릴 것 같은 망설임으로 가득 찬 60초 속에는 태어나기 직전의 태아와 사라지기 직전의 태아가 서성거리네


   태어나게 해, 태어나게 하지 마, 폭력이든 사랑이든 이건 조바심과 실망의 모래사막에 건설된 오아시스인데 나의 망설임은 당신을 향한 사랑인지 아니면 나를 향한 폭력인지


   우연한 감염 끝에 존재가 발생하다가 갑자기 뚝 끊겨 버리는 적막의 1초


   어디론가 가 버린 태아들은 태어나지 않은 오후 5시에 흘러나올 검은 비 같은 뉴스를 들으며 구약을 읽을 거야 그 귀에 흘러나올 빗물 같은 레게음악을 들으며 바빌론 점성가들에게 문자를 보낼 거야


   모든 우울한 점성의 별들을 태아 상태로 머물게 해요, 얼굴 없는 타락들로 가득 찬 계절이 오고 있어요, 라고


「우연한 감염」 전문,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문학과지성사, 2016)


   그리고 그가 말년에 간행한 시집에서 하나의 화두를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시인은 세상에 태어나지 못한 태아를 애도의 대상으로 삼는다. 2000년대 이후 그의 시가 전쟁 비판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여기서 ‘태어나지 못한 태아’라는 모티프는 전쟁으로 인해 죽어 간 여성들의 태아를 떠올리게 한다. 여기서 태아의 죽음은 산모의 죽음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고, 한 아이가 태어날 가능성의 소실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허수경 시인의 의식이 이 세상에 존재한 적이 없는 ‘타인의 고통’까지도 애도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모래사막과 오아시스의 비유는 시인이 시리아와 같은 내전지를 떠올렸을 가능성을 추측하게 한다. 이렇듯 이국의 전쟁까지 심려하는 마음을 견지한 채 허수경 시인은 삶은 ‘우연한 감염’이고 세상은 얼굴 없는 타락들로 가득하다고 쓴다. 이 독특한 표현이 다음과 같은 반문들을 떠올리게 한다. 진정으로 우리의 삶은 통제할 수 없는 우연일까, 우리가 바꿀 수 있는 세계인가. 사람의 진정한 기원은 사랑일까, 폭력일까. 허수경 시인의 시는 우리의 의지를 기로에 세운다.

   주디스 버틀러의 논의와 허수경의 시는 근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닫게 한다. 우리는 인류를 이룬 적이 없다. 휴머니즘이란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특정한 국민, 특정한 젠더, 특정한 계급으로서 ‘나’와 비슷한 사람만을 애도해 왔을 뿐이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의 생명은 존엄하다는 전제는 기만적으로 작동해 왔으며, 언제나 고통을 향하려는 의지에는 우열이 존재했다. 예컨대 팔레스타인에서 미사일 폭격에 의해 희생된 아이보다 미국에서 백혈병에 걸려서 죽어 가는 아이가 더욱 소중하게 다뤄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굶주린 한국인 소녀만큼 우크라이나에서 죽어 가는 소년병을 심려할 이유는 무엇인가. 

   이때 이러한 지적은 애도의 생물학적 범주, 예컨대 모르는 사람보다 가족과 친구가 더욱 소중하다는 자연스러운 의미를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제안하는 것은 한 번도 반성되지 않은 마음속의 ‘자연스러운’ 원칙을 성찰해 보는 일이다. 우리의 마음은 항상 ‘옳은’ 방향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국가주의나 민족주의나 자본주의와 같은 이념은 스스로 인지하기도 전에 ‘옳은’ 일을 수행하게 한다. 그런데 버틀러와 허수경이 지적하듯 그러한 올바른 윤리가 저 먼 곳에 놓인 타인이나 약자의 죽음은 전혀 인식조차 하지 않도록 만든다. 어쩌면 우리가 옳다고 믿어 온 신념이 우리가 인류이기를 방해한다. 반성되어야 하는 것은 윤리 그 자체인 셈이다.



   2. 스미는 몸

   

   주디스 버틀러와 허수경이 애도의 서열이라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을 무렵, 김혜순 시인은 2002년 시론집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을 간행했다. 이 시론집은 여성주의 운동의 맥락에서 ‘여성시’라고 불려 온 장르의 특질을 논의하고자 기획된 저서였다. 시인이 스스로 개정판 서문에 지적했듯 애초에 ‘여성시’라는 명명 자체가 여성들이 쓴 시를 뭉뚱그려 지칭하는 차별적인 표현이라는 점에서 그 용어를 그대로 차용한 김혜순의 ‘여성 시론’은 도발적인 것이었다. 무엇보다 한국 사회의 여성주의 운동이 태동하기 시작한 것이 1980년대 말이라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이 무렵 남성의 시선으로 정립된 여성시 장르를 여성의 시선으로 전유하는 활동은 중요한 시의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 글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김혜순의 시론에 ‘고통으로 향하기’라는 과제와 일치하는 지향이 깃들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지향은 바로 ‘여성의 몸’ 혹은 ‘여성적 발화’에 대한 재인식을 통해 드러난다. 일단 김혜순에 따르면 여성의 언어와 남성의 언어는 다르다. 그 이유는 여성은 가부장제의 억압에 저항할 때 비로소 ‘여성적인’ 발화를 시작할 수 있으며 따라서 “여성의 언어는 이제까지 밖에 주어졌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반동으로부터 터져나”오기 때문이다.2) 여기에는 섬세한 분별이 필요하다. 실상 모든 시 쓰기는 사회적 정체성에 대한 반동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성의 경우 남성 스스로 자임한 과제나 목표에 미달됨으로써 느끼는 좌절이 크다면, 여성의 경우 타율(남성)에 의해 부과된 정체성의 고통이 크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 타인으로 인한 고통은 통제 불가능하기 때문에 더욱 괴로운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김혜순 시인이 꿈꾸는 이상적 여성상이 가부장제를 벗어나 오롯이 ‘나’를 이룩하는 여성이 아니라는 데 있다. 오히려 김혜순에게 가장 이상적인 여성의 형상은 의존하는 수동적 상태를 더욱 극단화하여 ‘물’처럼 타인에게 스며드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부연이 필요하다. 당연히 최초에는 가부장제에 대한 거부가 시작되어야 한다. 여성은 역사적으로 자기 육체에 대해 말하는 것이 금기시되었고, 좋은 아내와 어머니가 되도록 강요받았다. 물론 김혜순 또한 그러한 가부장제를 부정하려 한다. 그런데 시인은 가정의 울타리를 벗어난다고 해서 여성이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발견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여성 시인이 자신에게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려 하면 할수록 그녀는 파멸한다”라고 생각한다. 단지 주어진 사회적 역할을 거부하는 행위만으로 정체성을 만들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때 김혜순은 그러한 ‘파멸’ 자체를 긍정한다. 여성적 자아는 이 사회에서 아무런 역할도 수행하지 않기에 도리어 “목적 없는 여행을 무한히 감행할 수 있는 자리”가 된다는 것이다.3)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동안 여성은 도리어 그 무엇으로도 변하는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 이어서 그는 여성을 흐르는 물에 빗댄다. 물의 이미지가 함의하듯 김혜순의 논의에는 수동성에 대한 긍정이 깃들어 있다. 물은 중력에 순응한다. 아래로 흐르고, 스미며, 편재한다. 동시에 물은 타자를 상처 입히지 않고 타자에게 생명을 불어넣는다. 그러나 이를 비판적으로 바라본다면, 김혜순의 ‘여성-물’ 이미지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강요해 왔던 ‘자애로운 어머니’의 이미지와 크게 달라 보이지는 않는다. 또한 가족을 벗어난 삶이 자유로운 삶이 아니듯, 정체성을 거부할 때 무한한 자유를 획득한다는 논의도 이상론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김혜순의 시론은 윤리적 애도의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었다. 예컨대 “물은 타자와 목숨으로 접촉하지만 타자를 소유하지 않는다.”4)라는 정언은 ‘여성’을 타자와 조심스럽게 관계하는 윤리적 주체로 상상하게끔 해 준다. 무엇보다 김혜순은 억압의 논리를 뒤집어 본다. 그에 따르면 남성의 억압 때문에 마음대로 몸을 사용하지 못했던 여성의 경험은 도리어 독선적으로 자신의 몸을 감각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기른다. 비로소 ‘여성적 몸’의 의존성은 자기중심적인 남성적 몸보다 타자에게 쉽게 공감할 수 있다. 홀로 설 수 없는 의존적 존재는 모든 ‘몸’이 서로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진실을 안다. 그 때문에 여성은 타인의 고통 대한 섬세한 감수성을 지닌다. 김혜순은 여성이 고통받는 외국인이나 동물을 향해서도 자기 몸의 감수력을 확장할 수 있다고 결론 내린다.


   훔치지도 않았는데 죽어야 한다

   죽이지도 않았는데 죽어야 한다

   재판도 없이

   매질도 없이

   구덩이로 파묻혀 들어가야 한다


   검은 포클레인이 들이닥치고

   죽여! 죽여! 할 새도 없이

   알전구에 똥칠한 벽에 피 튀길 새도 없이

   배속에서 나오자마자 가죽이 벗겨져 알록달록 싸구려 구두가 될 새도 없이

   새파란 얼굴에 검은 안경을 쓴 취조관이 불어! 불어! 할 새도 없이

   이 고문에 버틸 수 없을 거라는 절박한 공포의 줄넘기를 할 새도 없이

   옆방에서 들려오는 친구의 뺨에 내리치는 손바닥을 깨무는 듯

   내 입 안의 살을 물어뜯을 새도 없이

   손발을 묶고 고개를 젖혀 물을 먹일 새도 없이

   엄마 용서하세요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할 새도 없이

   포승줄도 수갑도 없이


   나는 밤마다 우리나라 고문의 역사를 읽다가

   아침이면 창문을 열고 저 산 아래 지붕들에 대고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이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나에겐 노래로 씻고 가야 할 돼지가 있다

   노래여 오늘 이 하루 12시간만 이 몸에 붙어 있어다오


   시퍼런 장정처럼 튼튼한 돼지 떼가 구덩이 속으로 던져진다

   무덤 속에서 운다

   네 발도 아니고 두 발로 서서 운다

   머리에 흙을 쓰고 운다

   내가 못 견디는 건 아픈 게 아니에요!

   부끄러운 거예요!

   무덤 속에서 복부에 육수 찬다 가스도 찬다

   무덤 속에서 배가 터진다

   무덤 속에서 추한 찌개처럼 끓는다

   핏물이 무덤 밖으로 흐른다

   비 오는 밤 비린 돼지 도깨비불이 번쩍번쩍한다

   터진 창자가 무덤을 뚫고 봉분 위로 솟구친다

   부활이다! 창자는 살아 있다! 뱀처럼 살아 있다!


   피어라 돼지!

   날아라 돼지!


김혜순, 「돼지라서 괜찮아―피어라 돼지」 부분, 『피어라 돼지』(문학과지성사, 2016)


   2010년대 초 김혜순은 바로 그러한 여성적 몸으로 구제역으로 인해 떼죽음을 당하는 돼지의 고통을 감각했다. 2010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경기도 지역에서 구제역이 창궐했을 때, 김혜순 시인은 국립현대미술관 레지던스 건물에 살고 있던 딸을 방문하기 위해서 그 근방을 지나고 있었다. 돼지 축사에 뿌리는 소독약이 도로까지 밀려와 그의 차가 폭설을 뒤집어쓴 것처럼 하얗게 변하곤 했다. 시인은 집으로 돌아와서 유튜브를 통해 돼지가 생매장되는 모습을 보았다. 그것은 그에게 외상후스트레스가 남을 만한 충격을 주었다. 김혜순 시인의 머릿속에서 산 채로 구덩이 밖으로 기어 나오려는 돼지들이 계속해서 떠올랐고, 충격을 벗어나기 위해 사찰에 머물기도 했다. 시인은 그때의 끔찍한 기억을 토대로 2012년 「돼지라서 괜찮아」 연작을 발표한다.5)

   인용한 작품은 연작의 일부에 지나지 않지만, 김혜순 시인의 지향을 잘 드러낸다. 여기 암시되는 것은 쟁론적 상황이다. 돼지는 스스로 증언할 수 없다. 사람의 말에 의해 돼지의 가치는 재단된다. 돼지가 오염되었다는 인간의 판단은 “재판도 없이 / 매질도 없이” 돼지의 살육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사람 간의 관계였다면 이루어졌을 ‘고문’조차 부재한다는 사실을 말한다. 시인은 “검은 포클레인”에 의해 돼지가 파묻히는 상황과 “검은 안경을 쓴 취조관”이 ‘친구’와 ‘나’를 고문하는 상상력을 뒤섞으면서, 사람이 고문당하는 상황에 빗대어 돼지의 죽음을 연상해 보도록 유도한다. 이러한 매개가 필요한 이유는 인간이 고통받는 상황에 대한 연상 없이 돼지가 겪는 고통을 상상하는 일이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사실 평범한 사람에게 돼지는 고기다. 고기를 땅에 묻는 행위는 재산을 처분하는 것이지 동물을 살해하는 행위가 아니다.

   이 작품으로부터 이끌어 낼 수 있는 사회적 함의는 명백하다. 2000년 파주시 파평면에서 구제역이 발생한 이래, 한국 정부는 가축 전염병이 발생할 때마다 살아 있는 동물들을 쓰레기처럼 매몰해 왔다. 가축은 생명이 아니라 상품이며, 그들의 신체는 살균 처리가 불가능하다면 “구덩이로 파묻혀 들어가야 한다”. 오직 인간만이 치료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고, ‘재판’이나 ‘처벌’을 받을 권리가 있다. 하물며 돼지는 ‘고문받을’ 수조차 없다. 증언할 수 없는 서벌턴으로서 돼지는 죽어 간다. 두렵다고 말할 수도 없고, 함께 매몰된 가족과 친구의 고통을 연민할 수도 없고, 사람에게 애원할 수도 없다. 따라서 인간이 인간에게 폭력을 가하는 역사가 인간성의 밑바닥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인간성의 심연에는 눈앞에서 살육이 자행되고 있음에도 그것을 폭력으로 인식하지 않는 동물 홀로코스트의 냉담함이 놓인다.

   그 냉담함을 극복하는 시적 매개는 ‘몸’이다. 위 작품에서 김혜순 시인은 시구를 써 내릴수록 마치 자신의 육체와 돼지의 육체가 뒤섞이는 경험을 하고 있는 것처럼 말한다. “시퍼런 장정처럼 튼튼한 돼지 떼가 구덩이 속으로 던져진다 / 무덤 속에서 운다 / 네 발도 아니고 두 발로 서서 운다”라고 말할 때, 네발짐승인 돼지와 두발짐승인 인간의 몸은 똑같이 ‘울음을 흘리며’ 동일시된다. 또한 “내가 못 견디는 건 아픈 게 아니에요! / 부끄러운 거예요!”라는 목소리에도 아픔을 느끼는 돼지의 입장과 부끄러움을 느끼는 시인의 입장이 뒤섞여 있다. 

   그리고 이 독특한 글쓰기의 형식은 의도된 것이었다. 시인은 시론집 『여자짐승아시아하기』(문학과지성사, 2019)에서 이러한 글쓰기에 대해서 ‘짐승하기’라고 명명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짐승하기란 “나의 신체와 짐승의 신체가 자발적으로 혼종의 비체를 만들어 가는 것”, 쉽게 말해 동물과 인간이 뒤섞인 신체를 상상해 보는 일이다. 그리고 시인은 “이것이 언어적 담론과 권력에 의해 구성된 인간이라는 범주를 넘어 보는 것이 아닐까.”라고 반문했다.6) 이렇듯 김혜순 시인은 극적으로 감수력을 확장한 여성의 신체는 인간 종의 한계 또한 뛰어넘을 수 있다고 믿었다. 여기서 여성의 ‘몸’은 동물의 고통을 그의 피부로 재현하는 경지에 도달한다. “내 입 안의 살을 물어뜯”듯 혹은 뱃속에 육수와 가스가 차듯, 돼지의 고통조차 ‘그의 내부’로 삼켜 낼 수 있는 신체를 시인은 상상하고 있다.



   3. 고통을 말할 권리


   전쟁과 살육, 이 두 가지 주제에 대한 고뇌는 인류 역사를 초월하는 오래되고 깊은 주제일 것이지만, 그러한 문제를 다시금 우리의 의식 속에 상기시키고, 또한 그러한 비극을 극복하고자 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을 제시한 2000년대의 위대한 두 시인은 허수경과 김혜순이었다. 전쟁을 반대해야 한다. 더 많은 타자의 고통을 보살펴야 한다. 이 간명하고 원초적인 윤리와 상충하는 것은 악이 아니라 또 다른 선이다. 2000년대 무렵 허수경과 김혜순이 고뇌로 삼았던 것은 민족적 윤리에 기대어 인간을 살해하고, 위생학적 기준에 기대어 동물을 몰살하는 행위가 정당화되는 현실이었다. 두 시인은 똑같이 ‘고통으로 향하기’라는 과제를 자임하고 타인의 고통을 심려하는 자애로운 인간상을 그려 냈다. 근본적으로 허수경과 김혜순의 시는 인간의 조건을 재구성하는 실천이었다.

   숙고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논의의 시의성이다. 세월호참사 이후 우리에게 던져진 화두는 ‘고통의 당사자성’, 즉 고통을 겪은 당사자의 허락 없이 그의 고통을 증언하는 것이 올바르냐는 물음이라고 할 수 있다. 세월호참사를 재현한 사진 작품이 타인의 참극을 일방적으로 감상하게 만드는 포르노로 비판받기도 했다. 이후 작가들은 타인의 고통을 재현하는 데 조심스러워졌고, 이이 따라서 자신의 고통에 초점을 맞추는 자전적 작품이 등장했다. 그런데 여기서도 문제는 반복되었다. 사람은 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나’의 고통을 드러낼 때조차 가까운 친구와 동료들이 작품에 등장해야 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이 작가의 고통을 재현하는 도구가 되길 원하지 않았다.

   한편으로 이것은 언어 행위에 본질적으로 내포된 차별성, 즉 쟁론적 성격7)이 우리 시대에 첨예하게 논의되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부모와 자식, 직장 상사와 부하 직원의 대화가 그러하듯, 문학조차 쟁론의 무대일 수 있다. 왜냐하면 문학은 작가가 타자에 대해 일방적으로 말하는 것, 작가는 말하고 독자는 듣는 불평등한 무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 전환에는 적어도 두 가지 이상의 사회적 변화가 배경으로 놓인다. 첫째는 소통 모델의 표준이 변했다. 우리는 즉각적으로 말하고-답하는 메신저의 속도에 익숙해져 있다. 이 때문에 전파의 공동체에서는 책으로 말하고 책으로 응답하는 속도의 대화를 상상하기 어렵다. 둘째로 인간 공동체는 조각났고 정체성의 분할선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서로 다른 세대, 젠더, 국가에 속한 이들의 대화를 일종의 쟁의 과정으로 보는 관점이 자연스러워졌다.

   우리가 허수경과 김혜순의 시를 되새겨 보아야 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쟁론을 극복하고자 했던 시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함부로 타자의 고통을 대신 증언하지 않고자 했다. 시인들이 소망한 것은 자기 고통을 말하거나 말하지 않을 권리가 주어지지 않은 이들에게 ‘말의 권리’를 부여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끝내 시인들이 입안하고자 했던 것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형태의 대화이다. 국경과 종의 경계를 넘어선 고통의 분유야말로 그들이 바랐던 것이다. 그들의 시는 우리의 귀가 이국의 사람과 우리 곁의 가축을 향해 열리기를 요구한다.

   이들의 시는 어떻게 문학이 현실과 동떨어진 ‘자율적’ 장르로 재탄생하는지를 보여 준다. 문학은 단순히 허구이기 때문에 자율성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문학은 현실에 실현되지 않은 공동체, 현실적 윤리를 넘어서 고뇌하는 인간형을 제시할 때 비로소 우리에게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 될 수 있다. 대화 자체에 대한 하나의 부정 의식, 불가능한 대화의 형식을 입안할 때 비로소 문학은 자율적인 것이 된다. 따라서 문학의 자율성이 문학 일반을 보호하는 울타리일 수는 없다. 진정 고뇌가 되는 몇몇 작품에 의해 문학적인 공동체는 상상될 수 있다.

   이희우 평론가는 현실의 윤리와 대별되는 재현의 윤리가 존재한다면, 그러한 재현의 윤리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동시대적으로 유의미하게 만드는 다른 용어를 고민해 보아야 한다고 제안한 바 있다.8) 그리고 시인들에 기대어 내 머릿속을 맴도는 것은 ‘고통으로 향하기’라는 용어이다. 우리는 뉴스에서 보도되는 참극을 문제시한다. 또한 의사를 찾아가 우리의 증상을 고백하는 데 익숙하다. 장례식장에서 떠나간 이를 애도한다. 이렇게 이미 우리의 감수력을 확약하는 제도와는 별개로, 저 오래된 책장에는 더 많은 고통을 고뇌로 삼을 수 없느냐는 반문으로 다가오는 몇 권의 시집이 놓여 있다.

   마지막으로 고민할 것은 허수경의 시와 김혜순의 시가 지닌 차이점이다. 두 시인은 사뭇 다른 방식으로 타자의 고통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허수경에게 고통으로 향하기는 자기 감수력을 제약하는 국가, 민족, 젠더와 같은 범주를 넘어서는 일이었다. 이국의 ‘태어나지 않은 태아’라는 이미지는 바로 감수력의 시공간을 넘어서는 극단을 가리킨다. 허수경에게 이해란 경험할 수 없는 그 지점뿐만 아니라 심지어 현실화된 적 없는 그 시점까지 나아가려는 의지를 내포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의 고뇌는 지극한 만큼 언제나 불가능성과 맞닥트린다.

   한편 김혜순은 자기 육체의 감수력, 특히 여성적 감수력의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고통받는 자의 입장에서 여성과 동물이 공감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인간 몸의 경험과 돼지 몸의 경험이 뒤섞이는 작품을 창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떤 의미로 그것은 여성적 자아의 미학화이기도 하다. 실상 여성의 삶조차 가축 살해로 부양되는 문명 질서에 속한다는 사회적 맥락을 은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의 시는 여성인 ‘나’의 위치에서 자신의 감수력을 최대화하는 실천을 하나의 인간상으로 구체화한다.

   종합되어야 할 것은 허수경의 사회학적 통찰과 김혜순의 자아의식이다. 습관화된 윤리를 벗어나는 것이든 자기 윤리를 실천하는 것이든, 근본적으로는 ‘고통으로 향하기’라는 과제로 통합될 수 있다. 실천의 시야는 넓고 행동은 내밀해야 한다. 최후까지 묻자. 왜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이해해야 하는가. 그것에 답하는 일은 어쩌면 타인의 내면과 관계해야 할 이유를 묻는 일처럼 느껴진다. 왜 우리는 타인이라는 섬에 닿아야 하는 것인가. 내면의 쓸모란 무엇인가. 나는 아직 이 질문에 대한 마땅한 해답을 스스로 찾지 못했다. 다만 시인들에 기대어 말한다. 저곳에 고통에 대해 말하거나 말하지 않을 권리를 빼앗긴 자가 있다. 그곳에 닿아야 한다고 믿는 마음이 있다.



1) 주디스 버틀러, 양효실 역, 『불확실한 삶』, 경성대학교 출판부, 2008, 62쪽 참조.

2) 김혜순,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개정판), 문학동네, 2022, 7쪽.

3) 김혜순, 위의 책, 2022, 119쪽.

4) 김혜순, 위의 책, 2022, 121쪽.

5) 김혜순·황인찬, 『김혜순의 말』, 마음산책, 2023, 17쪽 참조.

5) 김혜순, 『여자짐승아시아하기』, 문학과지성사, 2019, 21쪽.

5) 엄밀히 말해 여기서 쟁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여기서는 ‘불화’(랑시에르)나 불평등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연재 글의 문맥을 유지하고 이 글에서 제기해 왔던 문제를 동시대적으로 사유하기 위해서 쟁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5) 이희우, 「불화하는 ‘나의 이야기’—재현의 윤리 이후를 상상한다」, 『문학과사회』 2024년 겨울호, 73~75쪽 참조.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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