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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컬처와 한국이라는 스토리텔링 1

  • 작성일 2025-11-01

류수연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5년 11월부터 2026년 1월까지 <k-컬처와 한국이라는 스토리텔링>으로 3회 연재됩니다.


   k-컬처와 한국이라는 스토리텔링 1

   -K-pop, 변화하는 스토리텔링


류수연


   2020년대 한국 문학계를 뒤흔든 가장 큰 사건을 꼽는다면,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그 첫 번째에 놓일 것이다. 그것은 근대문학 이후 세계문학 안에서 자기 정체성을 확보하고자 했던 오랜 콤플렉스에 종지부를 찍은 동시에 한국문학의 미래에 대한 새로운 과제를 부여한 전환점이기도 했다. 그런데 문학이라는 외연을 스토리텔링으로 좀 더 넓힌다면 한 사건이 더해질 수 있을 것 같다. 바로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방영되어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던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등장이 그것이다. 

   여기에는 당연하게도 ‘왜’라는 의문이 따라붙을 것이다. 노벨문학상과 OTT 오리지널 영화 사이에는 별다른 연관성이 없어 보이니 말이다. 작가 한강에 대해 논하는 것은 아주 일반적인 문학의 일이며, 그의 노벨상 수상은 지극히 문학 그 자체의 사건이라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다르다. 애초에 그것은 문학 텍스트가 아닌 영상이지 않은가? 원작이 있는 작품도 아니니 미디어믹스로 접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문학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다루는 것에 고개를 갸웃할 사람이 많다는 것쯤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대단히 의도적으로, 그리고 어느 정도는 필연적으로 이 두 개의 키워드를 선택했다. 그것은 현재의 한국문학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 그 자체를 환기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과 OTT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현 단계 한국문학과 한국적 이야기가 전 세계인에게 어떻게 수용되고 소비되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가장 강력한 지표이다. 그 사이에는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대문자 ‘K’로 지칭되는 K-컬처가 놓인다. 이 연재에서 나는 ‘K’를 화두로 한국문화, 그리고 한국문화를 그려낸 스토리텔링의 3가지 국면을 탐색하고자 한다.



   1. 바깥, 또 다른 중심


   스토리텔링으로서 한국문화를 말하는 첫 번째 장에서 가장 먼저 선택한 키워드는 한강이 아닌 K-pop이다. 이 연재의 최종적인 종착지가 결국 문학이라는 점에서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선택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현 단계에서 한국을 둘러싼 모든 스토리텔링의 중심에 있는 것이 다름 아닌 K-pop이라는 점을 떠올려 본다면, 오히려 어쩔 수 없는 선택에 가깝다. 오늘의 세계인이 실감하고 상상하는 한국문화의 첫 장면은 매력적인 아이돌이 등장하는 K-pop 퍼포먼스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K-pop의 성공은 여전히 놀라운 사건이다. 세계 문화의 가장 변방에 있는 한국이 이토록 많은 세계적 스타를 배출했다는 것은 놀라움을 넘어 때로는 기적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거기엔 수많은 ‘왜’와 ‘어떻게’가 따라붙는다. 그러나 이 글의 관심은 K-pop의 성공 법칙을 추적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성공 전후로 형성된 K-pop의 독특한 스토리텔링 지형도를 고민하는 일이다. 

   주지하다시피 아이돌 산업의 기원은 한국이 아닌 일본이다. 1980년대부터 본격화된 일본의 아이돌 산업은 친근함과 대중적인 팬서비스를 기반으로 스타를 탄생시켰다. 한국의 아이돌 산업은 이를 벤치마킹하면서 성립되었다. 그 때문에 아이돌이 등장한 초기엔 일본 대중문화의 아류라는 비판도 상당했다. 하지만 오늘날 K-pop을 J-pop과 연관하여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초창기 K-pop은 중독성 있는 음악과 뛰어난 가창력, ‘칼군무’로 불리는 완벽한 퍼포먼스를 통해 차별화 전략을 추구했지만, 최근 K-pop에서 중요한 차별화 요소로 부각한 것은 다름 아닌 스토리텔링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방탄소년단(BTS)이다. ‘방탄소년단은 10~20대를 표적으로 그들의 삶과 사랑에 맞닿아 있는 이야기를 음악에 담아냈다. 또한 그러한 지향이 모든 앨범을 관통하면서 하나의 세계관을 구성하는 스토리텔링을 구사하였다(정지은, 「케이팝을 위한 스토리텔링 전략에 관한 연구」, 『문화산업연구』19-3, 한국문화산업학회, 2019, 63쪽 참조).’ 더 나아가 자신들의 일상을 팬들과 공유하는 리얼리티쇼를 통해 그들 스스로 먼 곳에 존재하는 스타가 아니라 팬들의 일상적 삶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친밀한 존재가 되고자 했다. 그 결과 현재 방탄소년단은 전 세계적으로 거대한 팬덤을 형성한 슈퍼스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K-pop을 둘러싼 스토리텔링은 굳이 의식적으로 만들지 않아도 넘쳐났다. 그것은 한국 아이돌 육성 시스템의 모순적인 현실로부터 촉발된 서글픈 서사이기도 했다. 바로 연습생이라는 시스템 때문이다. 한국에서 연습생은 흔히 아이돌 연습생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연예기획사에 소속되어 전문적인 트레이닝을 받으며 데뷔를 준비하는 사람을 뜻한다. 문제는 연습생이라고 해서 데뷔가 보장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데뷔 직전까지도 정확한 날짜나 구성조차 명확하지 않다. 어떤 이는 수년의 연습생 생활 끝에 데뷔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우연히 캐스팅되어 하루아침에 데뷔의 꿈을 이루기도 한다. 10대 초반부터 연습생 생활을 시작해서 20대에 이르기까지 데뷔하지 못한 채 소속사를 나오는 일도 허다하다. 그뿐이랴. 데뷔가 그대로 잠정적 은퇴가 되는 경우도 많다. 

   결국 수많은 아이돌 연습생은 기약 없는 데뷔를 위해 연습하며 시간을 갈아 넣는다. 그런데 이러한 고통스러운 나날은 그대로 하나의 스토리텔링이 된다. 공개오디션 프로그램은 이러한 스토리텔링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스타를 만든다. 그렇다고 해도 결국 데뷔의 꿈을 이루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가장 힘겨운 바닥의 시간을 보내고 마침내 성공이라는 성과를 쟁취한 스타의 성장 과정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오랜 연습생 생활을 거친 가수들의 완벽한 무대, 성공의 모든 성과를 팬에게 돌리는 겸손한 태도까지. 화려한 스타의 인간적인 모습이 팬심을 자극한다.

   스토리텔링은 데뷔 이후에도 지속된다. 무엇보다 K-pop 가수들의 스토리텔링은 기본적으로 팬들과의 소통에 기반하고 있다는 특징을 갖는다. 방탄소년단의 성공 이후 많은 아이돌이 자체 제작 리얼리티 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으며, 팬과 아티스트가 1:1로 소통할 수 있는 구독형 메시지 서비스 ‘버블’은 스타를 더 가깝게 느끼게 만든다. 이처럼 K-pop 스토리텔링의 기본 구조는 아티스트 개인으로부터 시작되어 팬들의 공감을 통해 세계관을 확장해 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K-pop을 둘러싸고 나타난 의미심장한, 그리고 다소간은 이질적이라 말할 수 있는 두 개의 스토리텔링이 등장했다. 바로 버추얼 아이돌 플레이브와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그들이다. 그들은 케이팝 스토리텔링이 구축한 정교한 세계관을 고스란히 답습하는 동시에 기존의 K-pop과는 완전히 다른 가치를 구현하는 자신들만의 스토리텔링을 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무엇보다 K-pop이라는 정체성이 한국문화를 표방하는 대문자 K의 시대를 벗어나 모든 사람이 자기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향유하고 호흡하는 문화로서 거듭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는 한국이라는 틀을 벗어난 K-컬처의 전환을 알리는 현상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2. 스토리텔링으로 완성된 취향 – 버추얼 아이돌 플레이브(PLAVE)


   오늘날 K-pop은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가장 강력한 문화적 아이콘으로 급부상하였다. 1990년대부터 본격화된 아이돌 산업은 빼어난 외모와 매력을 갖춘 10대 후반의 청소년들을 연습생으로 모아 집중적으로 노래와 춤을 연습시키고, 강렬한 후크(반복적인 후렴구)로 무장된 노래로 데뷔시켜 10대부터 20대까지 젊은 세대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 전략을 취했다. 이 점에서 본다면 아이돌 산업은 그야말로 가장 젊고 아름다운 인간의 신체를 무기로 그 상품성을 극대화하면서 성장했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2023년, 이 모든 공식을 깨는 존재가 나타났다. 바로 플레이브(PLAVE)라는 아이돌 그룹이다. 플레이브는 2023년 데뷔해서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는 스타 그룹이다. 국내에서는 총 3개의 미니 앨범과 1개의 싱글 앨범, 4개의 디지털 앨범을 발매했다. 음악 방송에서도 5차례나 1위를 기록하였다. 많은 아이돌 그룹이 데뷔 앨범 이후 후속 앨범을 내지 못한 채 사라진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그들의 커리어가 상당히 성공적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2025년에는 일본에 진출해서 싱글 앨범을 냈고, 빌보트 차트에도 여러 차례 이름을 올린 바 있으니 명실상부한 글로벌 아이돌 그룹이라 할 수 있다. 



자료1. 버추얼 보이그룹 플레이브(출처: VLAST)



  문제는 이들이 버추얼 아이돌 그룹이라는 사실이다. 예준, 노아, 밤비, 은호, 하민 5인(?)으로 구성된 플레이브의 멤버 전원은 인간이 아니다. 심지어 인간과 비슷한 형태의 로봇이나 한때 유행했던 AI 인간도 아니다. 그들은 누가 보아도 2D, 무대 위에 선다는 점을 고려하면 3D 만화로 구현된 인간형 일러스트이다. 사실 겉모습만 보자면 1998년에 등장했던 사이버 가수 아담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현재의 미적 기준이 적용된 플레이브의 멤버들이 훨씬 세련된 매력을 가지고 있지만, 아담 역시 당대의 기준으로는 꽤 미남형이었다. 그럼에도 반짝인기를 얻고 사라진 아담과 달리 플레이브는 확실한 존재감으로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그들이 연속적으로 앨범을 내고 콘서트까지 열면서 안정적인 팬덤을 형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많은 이들이 25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한 디지털 기술을 일등 공신으로 추켜세울 것이다. 1990년대 후반 사이버 가수 아담이 기술력의 한계로 후속 활동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가히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플레이브는 기본적으로 그림, 엄밀히 말하면 애니메이션 캐릭터에 가까운 외형을 지녔다. 아무리 흐릿한 눈으로 바라보아도 인간으로 착각할 수 없는 외형이다. 그럼에도 플레이브의 팬뿐만 아니라 이 산업에 관여된 모든 사람은 그들을 ‘인간처럼’ 인식하고 대한다. 인간이 아님에도 인간보다 더 큰 매력을 가진 인간을 닮은 존재, 플레이브를 ‘보이그룹 플레이브’로 완성하는 힘은 무엇일까?

   가상과 현실의 경계에 서 있는 이 버추얼 아이돌에게 실재감을 주는 것은 바로 세계관이라 불리는 그들만의 이야기이다. ‘창작된 캐릭터들이 존재하는 카엘룸이라는 가상 세계에 있던 플레이브 멤버들은 지구의 개발자에 의해 아스테룸이라는 중간계로 오게 되었고, 그곳의 균열을 통해 그들의 세계관 안에서 테라라 불리는 지구의 팬들과 소통하며 아이돌 가수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다(“플레이브”, 나무위키, 2025년 10월 9일 검색. namu.wiki 참조).’ 그런데 이 세계관이 상당히 흥미롭다. 이 세계관 속에서는 이들을 인간으로 가정해 인격을 부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 모두 창작된 캐릭터임을 그대로 인정한 위에서 오직 실재하기 때문에 부여되는 어떤 권위로서의 인격을 부여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인간이어서가 아니라 인간이 아님에도 인간처럼 사고하고 행위할 수 있는 존재라서 인간과 같은 ‘대우’를 받게 되는 것이 설정값이다.

   이 점에서 본다면 버추얼 보이그룹 플레이브를 완성한 것은 기술이 아닌 세계관, 즉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좀 더 면밀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끊임없이 생성되는 이야기, 그러므로 훨씬 동적인 의미를 가진 스토리텔링을 통해 완성되었다. 세계관이라 불리는 이 허구의 이야기를 수용할 수 있다면, 그들의 팬이 될 수 있는 준비는 끝난다. 실재하는 인간이 아니라도, 아니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과 관련된 스토리텔링은 오히려 더 무궁무진하다. 언제 어디서나 존재할 수 있으며, 시간의 저주와 상관없이 그 매력을 영원히 지속할 수 있다. 완벽한 아이돌의 탄생이 아닌가?

   물론 플레이브 이전에도 K-pop 안에 가상의 아이돌은 존재했다. 대표적인 예는 에스파(aespa)이다. 현실 세계와 가상 세계의 경계를 초월한다는 광야 세계관을 내세운 에스파는 가상 아바타와 함께 데뷔한다는 스토리텔링을 구사했다. 그러나 현실 세계 에스파의 인간 멤버 가 가진 매력이 과도했던 탓일까? 에스파는 날로 커리어 하이를 기록하고 있지만, 그들의 아바타는 SM의 광야 세계관 종료와 함께 존재감조차 유명무실해졌다. 이뿐만이 아니다. 기술적 측면에서 본다면 플레이브보다 뛰어난 비인간 가수들도 존재했다. AI 기술의 발달과 함께 인간으로 착각할 만큼 인간적인, 그러나 인간을 압도할 만큼 매력적인 비주얼을 가진 AI 아이돌이 등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 반짝 이슈가 되었을 뿐, 지속적인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그러므로 플레이브의 지속성에 더 관심이 갈 수밖에 없다. 

   플레이브의 성공을 견인한 것은 단지 기술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을 둘러싼 스토리텔링에 그 힘이 있다고 판단된다. 지구도 아닌 가상 세계 속에서 탄생한 그들은 인간조차 아닌 창작된 캐릭터라는 정체를 숨기지 않는다. 이것은 다른 AI 아이돌이 인간인 ‘척’하는 것과는 구별되는 지점이다. 그들은 수많은 다수자인 인간 앞에 지극히 소수자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긍정함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 낸다. 놀라운 전환이 아닌가? 어쩌면 플레이브가 성공할 수 있었던 스토리텔링의 비결은 어쩔 수 없는 약점을 드러내 오히려 그것을 매력으로 만들었다는 지점일지도 모른다. 플레이브의 소속사가 그것을 의도한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플레이브는 그 자체로 이미 우리 세계의 소수자를 위한 화두를 던졌다.

   물론 여전히 아쉬움은 남는다. 그것은 버추얼 아이돌 플레이브의 스토리텔링이 현재는 거의 정체된 상태라는 점이다. 이는 플레이브의 활동이 줄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플레이브는 모든 신인 그룹이 꿈꾸는 글로벌 시상식 무대를 장식하고 수상할 만큼 그 입지가 단단해졌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 고유의 스토리텔링은 점차 가려지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이 아님을 인정하고 그것을 통해 독특한 ‘인간다움’의 위치를 점유했던 플레이브가 점차 자신들의 스토리텔링을 잃고 유사 인간의 위치로 다가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 세계관 속 테라보다 현실의 지구에 정착(?)하는 것이 소속사의 입장에서는 더 쉬운 선택지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팬은 어떨까? 애초에 2D-3D로 구현된 스타를 사랑하기로 결심한 그들 하나하나의 ‘입덕’ 장면에는 플레이브가 구축해 둔 스토리텔링에 대한 매료도 있지 않았을까? 지나치게 콘센트에 충실하다고 여겨질지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팬덤이란 그런 콘셉트에 매료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버추얼 아이돌 플레이브의 사례는 기술과 스토리텔링이 결합했을 때 어떤 시너지를 만들어 낼 수 있는지를 잘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오늘날의 사회에서 이야기, 혹은 스토리텔링이라 불리는 문학적인 외연이 마주한 위기와 가능성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 이야기는, 그리고 오늘의 용어로서 스토리텔링은 한때는 완벽히 문학만의 일이었다. 문학은 이야기에서 탄생했고,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이야기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극과 방송, 영화가 그 자리를 빼앗은 순간에도 여전히 문학은 가장 많은 이야기를 생산하는 장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문학만이 아니라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여타의 서사 장르와도 직간접적인 연관성조차 없는 다양한 스토리텔링이 디지털 세계를 누비고 있다. 이는 이야기라는 욕망이, 그 주체와 객체가 완전히 변화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위기일까? 가능성일까? 



   3. 소문자 k의 가능성 - <케이팝 데몬 헌터스>


   넷플릭스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전 세계인의 취향으로 거듭난 K-pop의 현재를 보여 주는 한편, K-pop과 한국문화가 세계화를 꿈꾸는 동안 간과했던 ‘한국적인 것’을 환기하는 놀라운 콘텐츠였다. 무엇보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플레이브의 스토리텔링을 잇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더 놀라운 것은 이러한 흥행이 이 애니메이션을 제작한 사람들의 의도가 아니라 순전히 팬들의 열정적인 ‘덕질’을 통해 자연스럽게 확산되고 있다는 지점이다.



자료2. 넷플릭스 오리지널 <케이팝 데몬 헌터스> 포스터(출처: 넷플릭스)



   K-pop 인기 걸그룹 헌트릭스의 이중생활(?)을 담아낸 영화의 내용은 간결하다. 3인조 걸 그룹 멤버인 루미, 미라, 조이는 스케줄이 없는 날이면 정체를 숨기고 나가 악귀를 때려잡는 데몬 헌터로 활약하고 있다. 그러던 중 노래로 사람들의 영혼을 타락시키는 5인조 보이그룹 사자보이즈의 본질을 알아채고 그들로부터 사람들의 영혼을 구하고자 한다. 주인공 루미와 사자보이즈의 리더 진우의 로맨스는 덤이다. 여기에 출생의 비밀과 고귀한 사명감, 그리고 비극적인 사랑이 조미료처럼 더해진다. 지극히 상투적인 영웅서사의 골격을 가진 스토리다.

   이러한 서사의 공백을 채우고 개연성을 불어넣는 것은 따로 있다. 바로 우리의 눈과 귀에 익숙한 K-pop의 화려한 퍼포먼스와 강렬한 음악이다. 한번 들으면 잊히지 않는 강렬한 후크(Hook)와 아티스트의 가창력으로 곡의 하이라이트를 이루는 싸비(Sabi), 작은 동선까지도 놓치지 않는 완벽한 군무까지. 그것은 온통 K-pop이라는 한 전형을 완벽하게 재현하고 있다. 영상으로 구현된 헌트릭스의 콘서트 장면은 K-pop 스타들의 실제 콘서트를 그대로 옮긴 듯 화려한 볼거리로 가득하다. 그것은 다른 부연이 필요 없을 정도로 K-pop 그 자체이다. K-pop이야말로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임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정도다. K-pop의, K-pop을 위한, K-pop에 의한 이 콘텐츠가 사실 대문자 K로 상징되는 한국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빼면 말이다.

   잘 알고 있듯이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한국영화가 아니다. 한국에서 태어나 캐나다에서 성장한 매기 강 감독이 연출했고 K-pop 아티스트와 함께 영화를 만들었지만, 이것은 명백히 미국 영화다. 제작사도 배급사도 미국 기업이고, 영화의 언어도 영어다. 그런데 동시에 이 영화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은 한국적이다. 주인공들 모두 한국인이고 서사의 배경도 한국이며, 기본적인 세계관도 한국의 고전에서 차용했다. 

   사실 한국적 전통의 차용은 K-pop 스토리텔링에서 낯선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많은 K-pop 아티스트들이 적극적으로 수행했던 K-pop의 대표적인 퍼포먼스 가운데 하나이다. 방탄소년단의 〈IDOL〉을 필두로 많은 K-pop 아티스트가 한국적 콘셉트를 부여한 노래와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빅스의 〈도원경〉, 스트레이 키즈의 〈소리꾼〉, 원어스의 〈월하미인〉, 아이브의 〈해야〉 등이 대표적이다. 그럼에도 아쉬웠던 것은 선도적인 몇몇 그룹을 제외하면 한국적인 것을 표방하는 이러한 시도들 가운데 많은 경우가 전통과 고전을 지나치게 소재적 차원에서만 접근했다는 점이었다. 무엇보다 과도한 퓨전 스타일링으로 무국적의 동양풍으로 남발되면서 눈살이 찌푸려지는 경우도 잦았다. 현대적 음악과 고전의 가치로 컨버전스를 시도했던 서태지와 아이들의 〈하여가〉나 〈발해를 꿈꾸며〉보다 퇴보된 형태라는 점에서 여러 문제점이 노출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한국이 만들지 않았기에 대문자 K로 수식되지 않는 이 영화는, 한국이 만든 그 어떤 콘텐츠보다 더 한국적인 것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럼에도 K-pop 퍼포먼스와 그 스토리텔링을 즐겨 온 사람들은 거부감없이 자연스럽게 영화에 매료된다. 사자보이즈가 한국의 저승사자로 표현된 것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스토리텔링의 맥락마다 한국의 전통적 요소들이 매우 중요한 복선으로 배치되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것이 남자주인공 진우의 환수인 호랑이 더피(Derpy)와 까치 서씨(Sussie)이다. 조선 후기 민화 까치호랑이(작호도)에서 따온 두 캐릭터는 그 자체로 하나의 복선이 된다. 본래 민화 속에서 호랑이는 액운을 막고 악귀를 물리치며, 까치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이러한 호랑이와 까치가 진우의 환수라는 것은 그가 완전한 악인이 아님을 시사한다. 이는 그와 여자주인공 루미의 로맨스를 안심하고 볼 수 있는 장치가 된다.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악의로 뭉친 사자보이즈의 리더인 그가 결국엔 선으로 돌아설 것임이 이미 예견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또 있다. 이 영화를 즐기는 방식 또한 K-pop을 즐기는 팬덤 문화의 공식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싱어롱(Sing-Along)이다. 한국어로 표현하면 ‘떼창’이다. 한국의 관객들은 공연이나 축제 현장에서 수동적으로 무대를 감상하지 않는다. 과거 한국에 온 해외 아티스트들이 가장 놀랐던 부분이 바로 이 떼창이었다. 최근에는 이 떼창 문화가 K-pop 팬덤을 위한 중요한 즐길 거리로 바뀌었는데, 그것이 바로 싱어롱 상영이다. 콘서트에 참가하지 못한 팬들을 위해서 극장에서 콘서트 실황을 상영하면, 현장의 팬들은 마치 콘서트에 직접 참가한 것처럼 극장 안에서 노래하며 춤추며 퍼포먼스를 즐길 수 있다. 그리고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지금, OTT 화면이 아닌 극장에서 다양한 싱어롱 상영을 이어 가며 인기를 지속하고 있다. 결국 이 영화는 K-pop을 즐기는 문화 자체가 이미 하나의 현상을 넘어 일상이 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처럼 한국이 만들지 않았지만 가장 한국적인 콘텐츠의 탄생이라는 이 아이러니는 K-pop이 가진 문학적 위력을 보여 주는 한편, K-pop을 둘러싼 스토리텔링이 만들어 낸 하나의 가능성까지 예감하게 한다. 그것은 이제 K-pop이 대문자 K의 수식을 떼고도 충분히 세계 어디에서나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큼 세계화되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K-pop 아티스트가 주인공인 한국 배경의 ‘미국 영화’가 아무렇지도 않게 등장했고, 엄청난 흥행까지 이루었다. 그것도 무려 어반 판타지(현대 또는 근미래의 도시를 배경으로 한 판타지)에서 말이다. 이는 결국 대문자 K를 하나의 브랜드로 만들어 낸 한국의 K-pop이 한국과 K라는 수식을 떼고도 전 세계인 누구나 충분히 즐길 수 있는 보편적인 문화적 취향으로 전환되었음을 의미한다. 나는 이것을 소문자 k의 문화적 저력을 확인하는 순간이라고 말하고 싶다. 

   소문자 k의 세계는 무엇인가? K-pop은 한국문화를 대표하며 글로벌 한류(K-wave)로 지칭되는 대문자 K의 세계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하지만 이러한 대문자 K에 실어 낸 한국 콘텐츠 안에는 뚜렷한 욕망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식민지와 전쟁, 분단을 거치면서 바닥까지 내려앉은 민족적 자존감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동력, 무력이 아닌 문화로서 세계를 제패함으로써 더 이상 무력한 나라로 남겨지지 않겠다는 의지가 바로 그것이다. 

   소문자 k는 K-컬처로 지칭되는 한류가 오랜 시간 암묵적으로 꿈꾸었던 문화적 제국주의에 대적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적 우월성으로 타문화를 잠식해 가는 것이 아니라 그 문화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각자의 개성을 유지하며 다양한 선택지로 존재하면서 일상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실천될 수 있는 문화. 그러므로 “바깥에 대한 상상과 실천을 잊지 않는 것 ,” “미국을 대표로 하는 주류적인 문화에 함몰되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그것을 비껴 나가는 상상을 멈추지 않고, 그것을 문화적으로 실천하고자 했던 힘”(졸고, 「글로벌, K-컬처와 김기태의 소설이 말하는 것들」, 《문장웹진》, 2024년 9월)으로서의 한국문화. 나는 그것이야말로 소문자 k의 본질이라고 지칭하고 싶다. 그리고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통해, K-pop의 스토리텔링이 만들어낸 아주 특별한 소문자 k-컬처의 순간을 만끽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세계 음악시장을 이끌던 미국과 일본의 음악을 벤치마킹하면서도 거기에 함몰되지 않고 독자적인 세계관 아래 새로운 음악과 퍼포먼스를 만들어낸 바로 그 K-pop의 스토리텔링이다.



   4. 이야기라는 욕망


   이야기의 역사는 문자 이전, 구비 전승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아직 인간에게 문자라는 기호가 허락되지 않았던 시절, 기억은 그대로 생존의 문제로까지 연결되었다. 경험을 바탕으로 축적된 모든 정보는 오직 말과 기억을 통해서만 전달되고 계승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시대 사람들에게 기억은 생사의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었다. 기억의 단절은 어쩌면 죽음을, 더 나아가 종족의 멸망까지 초래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공포였을지도 모른다. 기억해야만 생존할 수 있었고, 더 오래도록 생존하기 위해서는 더 잘 기억해야만 했다. 

   생존을 위한 지식과 금기는 신화가 되었고, 때로는 전설이 되었으며, 입에서 입을 거치는 사이에 거기에 드리워져 있던 권위와 공포가 희석되면서 민담이 되기도 하였다. 하나의 이야기가 사라지지 않고 세대를 넘고 세기를 관통하며 오랜 시간 전승될 수 있었던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그것이 무엇보다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구비 전승 시대의 유일한 매체였던 인간의 몸’(이대영, 『스토리텔링의 역사』, 커뮤니케이션북스, 2018, 21쪽)에 새겨진 가장 오랜 욕망이자 가장 오래도록 기억을 보존해서 생존을 잇게 만든 그 힘은 어느덧 하나의 본능이 되었다.

   오늘날 K-pop 스토리텔링에서 보이는 독특한 특성은 어쩌면 이러한 과거의 욕망이 부활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신체가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인 목소리를 통해 사람들의 뇌리를 파고드는 메시지. K-pop이 한국문화 가운데 가장 선도적으로 세계인의 일상을 파고들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K-pop이 만든 이 드라마틱한 성공에 취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보다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된다. 바로 K-pop의 빛나는 도약을 만들어 낸 그 힘. 그것은 모든 감각적인 것들이 집결되는 디지털 시대에도 여전히, 이야기를 둘러싼 욕망은 유효하다는 사실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시선은 다시금 이야기, 바로 이 순간 생성되고 향유되고 있는 한국이라는 스토리텔링을 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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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솔직한 마음

*아래의 글은 이라는 제목으로 기획된 강연의 강연록을 개고한 글입니다. 은 말과활 아카데미 북클럽 [산책:자]의 일환으로 2025년 10월 16일부터 11월 6일까지 총 4주간 진행되었습니다. 내 솔직한 마음 현재 인생에서 수많은 적수를 만났지만, 아내여. 그대 같은 적은 생전 처음이다. -바이런의 격언, ···이라고 알려진 격언 1. “My soul is dark!” 솔직한 사람들은 이기적 오늘 제가 다뤄 볼 시인은 김수영이고요, 그리고 주해할 시는 「풀」입니다. 너무 유명한 시인이고 너무 유명한 시죠. 그렇지만 결국에는 고백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 같아요. ‘고백’. 사전을 찾아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는 것이나 감추어 둔 것을 사실대로 숨김없이 말함”. 잘 알려져 있다시피 김수영은 고백의 달인이었습니다. 숨기는 게 좀 나을 법한 일상적인 치부까지도 굉장히 적나라한 발화로 시에다 풀어내곤 했었죠. 그런데 시만 그런 게 아니라 생활에서도 말이나 행동에 거침이 없었나 봐요. 예를 들어 「성(性)」 같은 시에는 외도를 비롯한 시인의 성생활이 가감 없이 노출되고 있는데, 실제로도 당시의 출판사 접대 자리에 참석하고 돌아온 이른 아침이면 아내인 김현경 여사에게 전날 밤 다른 여성과 동침한 이야기를 천연덕스럽게 늘어놓곤 했었더래요. 눈까지 반짝여가면서 말이죠. 그러면 김현경 여사는 또 그 얘기에 장단 맞춰가면서 재미나게 들어주었다고 하고요. 서로가 어떤 심정으로 그런 대화를 주고받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모습이 유쾌해 보인다기보다는 약간 닳고 닳은 부부간의 기싸움 같기도 한데, 하여간에 이런 고백은 생전에 두 사람의 복잡한 관계를 감안하고서라도 상대방 배려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진솔함이죠. 그러니까 김수영은 너무 솔직해서 탈이었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 왜 살다 보면 자기 기분이나 생각이 얼굴에 바로바로 드러나는 사람들 있잖아요? 좋으면 좋다든지, 싫으면 싫다든지, 도대체가 갈무리가 안 되는 사람들. 김수영이 딱 그런 타입이었던 것 같아요. 저는 좀 완전 반대인데, 면전에서는 눈치 보느라 쩔쩔매다가 집에 가서 끙끙 앓는 타입이거든요. 그래서 자기감정에 솔직한 사람들 보면 한편으론 부럽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화도 좀 나기도 하고요. 얼마 전에는 제가 자주 가는 카페가 있는데 사장님이 저 보자마자 한숨을 푹 쉬는 거예요. ‘하아···.’ 뭐지? 손님 나밖에 없는데. 혹시 방금 나 들으라고 그런 건가? 제가 독서대 들고 다녀서, 갈 때마다 허름하게 이거저거 펼쳐 놓고 죽치고 앉아 있거든요. 이런 일 있으면 항상 역지사지해 봅니다. 아니 짜증이 날 수는 있는데···, 아무리 그래도 나 같으면 좀 안 들리게 할 것 같은데···. 아니, 자기 심기가 불편

  • 관리자
  • 2025-11-01
세계문학에 관한 단상

세계문학에 관한 단상 허병식 세계문학이란 무엇인가. 2000년대 중반 이후 한국문학에 새로이 등장한 주요한 담론 가운데 하나로 ‘세계문학’에 관한 논의가 있다. 세계문학이란 세계화 혹은 지구화 이후 도래한 지구화시대 문학의 새로운 존재방식에 대한 논의 속에서 등장한 담론이지만, 그 시작은 이른바 괴테-맑스의 논의가 그 기원이라고 일컬어지듯 근대의 전지구적 도래와 시점을 같이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괴테가 에커만과의 대화에서 말한 “민족문학이란 이제 별다른 의미가 없다. 세계문학의 시대가 도래했다”라고 선언한 것과, “어느 한 국가의 정신적 창조물은 공동의 재산이 된다. 민족의 일면성과 편협성은 더 이상 불가능하고 많은 민족문학과 지방문학으로부터 세계문학이 탄생하고 있다.”는 마르크스의 주장이 세계문학 담론의 기원이라는 인식이 그것이다. 그러나 괴테와 마르크스의 선언이 곧바로 세계문학을 근대 세계의 중심으로 자리잡도록 만든 것은 물론 아니다. 민족이 제국주의와 식민의 결과라면, 그 제국주의와 식민지 경험이 정련한 것이 각국의 민족문학이었고, 식민지였던 나라들이 저마다 독립국가로 이행하면서 한편으로는 새로운 민족문학을 요청하는 과정에서 민족문학이 지니고 있는 ‘영향의 불안’에 대한 응답으로 등장한 것이 비교문학이었다. 민족의 정체성을 새로이 만들어가면서도 한편으로 타자의 문화를 의식하게 된 순간 등장한 것이 비교문학이었던 것이다. 이후 포스트식민주의가 제국주의의 경험이 식민종주국과 식민피지배국에 미친 영향관계를 분석하면서 비교문학이 지니고 있던 문화적 지배의 승인이라는 문제를 비판적으로 제기하고 시작했다. 비교문학과 포스트식민주의가 제국/식민지의 경험 이후에도 이어지는 문화적 지배와 혼종성의 문제와 씨름하였다면, 포스트식민주의로는 더 이상 대응하기 어려운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지배가 전개되면서 그에 대한 문화적 응전으로 재귀한 것이 세계문학일 것이다. 괴테 이후의 세계문학의 전개를 이렇게 거칠게 요약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세계문학이란 지구화 시대의 새로운 비교문학이자 포스트식민을 경유하여 새롭게 등장한 ‘제국’에 대항하는 문학운동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21세기 이후 ‘세계문학론’에 또다시 활력을 불어넣은 것은 카사노바와 모레티의 논의이다. 그들의 세계문학론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소개와 비판이 제기되었다. 모레티와 카사노바의 세계문학론이 강조하는 세계란, 일차적으로 “하나이면서도 불균등한” 세계체제, 혹은 서로 진입하기 위해 각축하고 경쟁하는 세계문학 공간으로서 주로 사회경제적 시각에서 이해된다. 즉 이들의 세계 개념은 문학을 조건 짓는 사회경제적 환경 내지 배경에 가깝다.1) 김용규는 카사노바와 모레티의 논의와 그들에 비판적인 논자들의 세계문학론을 소개하면서 “오늘날 자본주의의 불균등 발전과정을 보면, 세계문학의 중심부에서는 중심부의

  • 관리자
  • 2025-11-01
비평의 자리 2

비평의 자리 2 최가은 1. 너는 변호인이자 시해자로서, 죽은 작가의 약점과 결점을, 네 작업에 알맞은 누추한 진실을 건져낼 수 있는 교묘한 질문들 속으로 그녀를 유인할 것이다. 너는 그 질문들 속에 죽은 작가와 함께 살았던 사반세기 동안의 시간을 반성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은밀한 함정들을 설치하여, 그녀가 자신의 얼굴이라는 투명한 거울을 대면하도록 부추길 것이다. 죽은 작가의 아내는 네 속임수와 거짓말에 치가 떨릴 것이고, 그날 너를 집으로 들여놓은 것을 자책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너는 진실의 조각을 발설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죽은 작가의 아내는 네게 진실의 일부를 공유한 것을 후회할 것이다. 너는 미열 같은 흥분 속에서 응답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초인종 소리가 멎었다. 너는 다시 초인종을 눌렀다. 여전히 저택 안에서는 아무런 응답이 들리지 않았다. 대문은 완강하게 잠겨 있었다.1) 소설은 ‘죽은 작가’라는 기호 아래 결집하고 흩어지는 ‘너’의 운동으로 가득 차 있다. ‘너’는 누구인가. ‘너’는 무언가를 좇는 자. 불가해한 형태로 유폐된 어떤 진실을, 진실의 환영을, 혹은 환영을 덮치는 기억을 추격하는 자이다. 누추한 진실을 누비기 위한 거짓, 투명한 거짓을 뭉개기 위한 진실 사이를 정신없이 횡단하는 ‘너’는 그 무언가의 “변호인이자 시해자로서”, “진실의 조각을 발설해야 할 의무”를 지녔다고 주장한다. 다시, ‘너’는 누구인가. ‘죽은 작가’에 관한 단편소설을 쓰기 위해 그의 흔적을 찾는 중이라는 ‘너’는 그의 문학적 “유산”을 “냉혹하게 적출”하는 “문학적 해체”, 혹은 일종의 자기기만에 불과한 “문학의 우상을 살해하는 퍼포먼스”2)를 준비하는 자이다. “숭배”와 “모독” 사이의 간극과, 그 간극을 오가는 자의 공포를 요란하게 발설하며 초조한 기대로 가득 차 있는 자이기도 하다. ‘너’는 은밀하게 설치한 네 함정에 의해 ‘죽은 작가’와 ‘죽은 작가의 아내’가 “자신의 얼굴이라는 투명한 거울을 대면하도록 부추길” 수 있다고 믿는다. ‘죽은 작가’보다 언제나 한 발 앞선 ‘앎’과 ‘진리’를 확보한 것이 ‘너’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너’는 그들로부터 진실에 관한 특권적 “의무”를 지닌 그들의 미래, 다시 말해 우리의 현재이다. 곧 맞이하게 될 무력하고 무지한 과거의 몰락 앞에서 흥분한 현재는 초인종을 누른다. 한 번, 그리고 또

  • 관리자
  • 2025-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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