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컬처와 한국이라는 스토리텔링 3] 오늘의 한국문학과 문학 시장에 대하여
- 작성일 2026-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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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수연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5년 11월부터 2026년 1월까지 <k-컬처와 한국이라는 스토리텔링>으로 3회 연재됩니다. |
K-컬처와 한국이라는 스토리텔링 3
-오늘의 한국문학과 문학 시장에 대하여
류수연
1. 노벨문학상의 낙수효과?
2020년대 미디어믹스의 원천IP로 주목받는 것은 웹소설이나 웹툰 같은 웹 콘텐츠이다. 다양한 디지털 기기가 일상화되면서 그러한 매체 안에서 즐길 수 있는 더 많은 콘텐츠가 요구되었고, 웹상의 스토리텔링은 매우 유용한 자원으로 활용되었다. 그 결과 현재 웹 스토리텔링은 그 자체로 콘텐츠인 동시에 또 다른 콘텐츠의 원천IP로 활용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활자로 된 스토리텔링이 영상미디어로 2차 가공되는 일은 비단 최근에 나타난 현상만은 아니다. OSMU나 미디어믹스라는 용어가 등장하기 이전에도, 사실 이러한 방식의 콘텐츠 확장은 일상적으로 있었다. 무엇보다 문학, 그중에서도 소설은 가장 오랫동안 원천IP로 각광받았던 이야기 그 자체였다. 하나의 소설이 극이 되고, 또 다른 소설의 영감이 되고 패러디 되는 것은 너무나 익숙한 과정이다. 트랜스미디어 환경이 이러한 상호텍스트성을 더욱 가속화하고 확대하였을 뿐이다. 돌이켜 보면 이야기의 구전이라는 것도 결국 인간의 신체라는 미디어를 활용한 확장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그 과정에서 발생된 2차 가공은 오늘날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의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로 인해 편집과 각색이 더 시시각각 이루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본다면 스토리텔링의 확장은 애초에 이야기의 고유 속성이라 할 만큼 아주 익숙한 방식에 가깝다. 문자에서 이미지와 극으로, 다시 영상과 미디어를 넘나드는 스토리텔링의 확장은, 그 무엇보다 문학이 가장 잘 해 왔던 일이니 말이다. 문학의 영상화는 영화산업의 초창기부터 시작되었지만, 오늘날의 미디어믹스에 더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것은 1960년대 문예영화일 것이다. 영화산업이 부흥하면서, 당시 많은 문학작품이 영화의 원천 텍스트로 자리매김했다. 1970년대부터는 TV 단막극을 통해 많은 문학 텍스트가 영상화되었고, 이러한 시도는 2020년대 현재까지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김금희 원작의 <너무 한낮의 연애>(2018), 장류진 원작의 <일의 기쁨과 슬픔>(2020)과 <달까지 가자>(2025) 등의 드라마가 대표적이다.
그럼에도 트랜스미디어 환경 속에서 예측되는 문학의 미래는 암울한 전망으로 가득하다. 1990년대부터 본격화된 문학의 위기론은 40년 가까이 논의되는 동안 이제는 잊을 만하면 꺼내는 해묵은 불편함이 되었지만, 웹 콘텐츠의 등장 이후에는 위기론 자체도 언급되지 않을 만큼 공공연한 사실이 되어 버렸다. 이처럼 미디어 환경이 ‘읽기’의 위기를 기정사실화했다면, 생성형 AI의 등장 이후에는 ‘쓰기’의 위기까지 대두되는 실정이다. 생성형 AI가 문해력까지 대체하는 마당이니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돌이켜 보면 근현대문학사의 여러 굴절마다 제기되었던 문학의 위기론은, 어쩌면 그래도 배부른 시절의 이야기였는지도 모르겠다. 생성형 AI 이후 마주한 ‘쓰기’의 위기는 ‘읽기’의 위기를 능가하며, 문학을 넘어 스토리텔링 전체의 위기가 예감에서 징후로 퍼져 나가고 있는 형국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문학은 정말 이대로 종말의 때를 맞이하고 있는 것일까?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2025년 전후로 한국문학은 뜻밖의 호황을 맞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일차적으로는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그의 작품 판매량이 수직 상승한 결과였다. 한때 『소년이 온다』는 판매량이 무려 910배가 상승했다고 보도되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젊은 층을 중심으로 사회적 현상으로까지 부각된 성해나 작가의 『혼모노』 열풍은 우리 문단에 때아닌 훈풍을 야기했다. 이래저래 한국문학에 대한 관심도가 높았던 것만큼은 확실했던 것 같다. 이것은 과연 노벨문학상의 낙수효과일 뿐인가? 이 모순된 두 가지 징후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2. 콤플렉스를 넘어선 힘
노벨문학상은 오랫동안 한국 문학계의 간절한 희망이자 하나의 콤플렉스로 작동했다. 주지하다시피 한국 근대문학은 매우 복잡한 양상 위에서 형성되었다. 자생적 토양이 채 무르익기도 전에 들이닥친 일본 제국주의의 군홧발 밑에서 힘겹게 성장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 근대문학은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포섭에 때로 저항하고, 때로 길항하며 오늘에 이르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모순이 시작된다. 모든 문학은 그 나라의 문화적 토양 위에서 산출된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하지만 그만큼 당연하게도 모든 문학은 그 문화 안으로 유입되는 타문화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문화란 기본적으로 상호적일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한국문학사에서 가장 치열한 논쟁 가운데 하나는 바로 내재적 발전론과 이식문학론의 대립이다. 그것은 한국 근대문학 성립 위에 오버랩 되어 있는 식민 지배의 그늘 때문이다. 근대문학의 기틀을 잡아가는 모든 순간마다, 그 지적인 발전과 사유에 개입되는 식민성에 저항했고 또 여전히 저항해야만 하는 한국문학의 안타까운 특수성이라 할 것이다.
이 점에서 본다면 노벨문학상에 대한 염원 역시 오늘의 한국 대중문화가 지향하는 대문자 K의 세계에 맞닿아 있다. 우리 문학이 일구어 낸 모든 성취를 외부로부터 인정받기를 바라는 갈망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국권은 물론 문화까지 말살당해야 했던 오랜 식민지 경험 속에서도 끝까지 우리 문화를 지켜 내고자 했던 그 끈기와 오기의 결합이야말로 그 갈망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언젠가는 벗어나야 할 어제의 잔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하나의 변곡점이 된다. 비단 한국문학뿐만이 아니다. 한국문화 전반에 걸친 전환을 야기했다. 그것은 무엇보다 문화적 자신감 그 자체일 것이다. 서구 중심주의와 제국주의의 산물로서 노벨문학상이 갖는 양가성을 외면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 수상이 식민성에 대한 경계로 어쩔 수 없이 경직되었던 문화적 위축성을 떨쳐내는 데 일정하게 기여했음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맨부커상에서 이어 한국문학의 오랜 콤플렉스였던 노벨문학상까지 거머쥐면서, 한강은 적어도 한국문학 장 안에서는 그 이름 하나로 브랜드가 되었다. 당장에 한강이라는 키워드를 포털에서 검색해 보라. 한강 작가의 이름이 첫 번째로 뜬다. 수도 서울을 가로지르는 자연유산인 한강을 넘어섰으니, 가히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한강 작가가 성취한 ‘K’의 의미는 대중문화의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 그를 둘러싼 여러 상찬에도 불구하고 한강이라는 작가는 오랜 시간 한국문학의 지형도 안에서 하나의 딜레마를 이루었다. 맨부커상의 수상으로 그에 대한 대중적인 인지도는 올라갔지만, 그 반작용도 있었다. 「채식주의자」의 수상을 두고 번역의 중요성이 더 주목되면서, 작가 한강과 그의 작품은 오히려 소외되는 기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미 평단의 주목을 받으며 여러 차례 문학상을 수상했던 작가였음에도 말이다.
여성, 좌파, 페미니스트. 그의 작품에 뒤따르는 수사들이 지나치게 부각되거나 희석되었다. 대중적인 관심이 백래시를 야기하기도 했다. 편향은 늘 그렇듯 작가와 작품의 본질을 소외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일까? 2024년 노벨문학상 발표 직전까지도 한강 작가의 수상을 점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사실 한강은 대중적인 작가라기보다는 자기 세계에 깊이 천착하는 작가였다. 그의 작품은 한국문학의 주류였던 리얼리즘의 흐름 안에 있으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평단의 호평을 받았지만 문단의 거장이라는 아우라를 부여받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만의 독특한 문체를 통해 일정한 팬덤을 형성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 온 작가였다고 평가하는 것이 더 옳을 것 같다. 그의 작품은 지독하리만치 ‘한강’다움의 서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수상은 화려한 상찬 속에서 거머쥔 것이라기보다 지독한 고립과 내적인 천착 위에서 끊임없이 개진된 작가 정신의 발견에 가깝다.
그렇다면 한강의 소설이 갖는 가장 중요한 특징은 무엇일까? 그것은 피아(彼我)를 구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아(我)’를 지워 내다시피 해서 ‘피(彼)’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 그것이 한강 소설이 가진 가장 중요한 특징이자, 그의 소설이 보여 준 새로움이다. 그것은 그간의 한국문학이 피아의 대립 속에서 ‘아(我)’의 정체성을 찾는 데 고군분투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길이다. 놀랍게도 이러한 특징은 한국현대사의 비극을 다룬 두 편의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서술자인 ‘나’는 끊임없이 현실에 개입되는 환상을 통해 죽은 영혼을 마주하거나(「소년이 온다」), 자신도 모르게 내딛던 한 걸음으로 과거의 시간과 조우한 뒤 온갖 죄책감으로 뒤엉킨 친구의 생령을 마주한다(『작별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의 현재 안에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계속 끼어든다. 과거의 시간과 사건이 현실에 끼어들어 새롭게 마주하기 위해서는 시간의 연속성에 균열을 만들어야 하고, 작가는 ‘아(我)’를 지워 냄으로써 비로써 배제되고 잊혔던 ‘피(彼)’의 현신이 가능할 수 있음을 전제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다음이다. 이런 방식으로 과거와 현재가 마주하게 만듦으로써 그가 얻어 내고자 한 것은, 다름 아닌 대화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 사이의 대화가 처음부터 원활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런데 결코 맞닿을 수 없을 듯했던 그들의 소통은 예기치 못하게, 한순간에 이루어진다. 그것은 서술자인 ‘나’가 귓가에 맴도는 목소리에 집중하는 바로 그 순간이다. 그 찰나에 ‘피(彼)’의 현신이 이루어진다. 화자가 청자가 되는 그 역전 위에서 한강의 소설은 비로소 제 이야기를 시작한다. 죽은 자의 스토리텔링이 현재화되는 것이다.
이처럼 한강의 소설은 지극히 사적인 개인의 목소리에 집중하고 있으며, 조근조근 말하듯이 풀어내는 이야기로 독자에게 지독하리만치 느리고 차분한 호흡을 요구한다. 무엇 하나 실마리를 쉽게 내어 주는 법이 없이 엉킨 실타래를 풀어내듯 진행되는 이야기는 어찌 보면 굉장히 불친절하다. 놀라운 것은 서술자의 날카롭고 예민한 신경줄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그 이야기에 집중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툭 던져진 비밀 속에 숨 막히는 전율을 느끼게 된다. 그곳에서 우리는 죽어서도 멈출 수 없었던 그들의 이야기를, 어제를, 역사를 마주한다.
누군가에게 외치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저 혼자 넋두리하듯 풀어내는 이야기, 언젠가 누군가 들어주기를 바라지만 듣기를 강요하지 않았던 이야기. 아니 누군가 들어줄 것이라 기대하지 못했던 이야기. 그것은 바로 서발턴의 목소리이다. 한강이 만들어 내는 스토리텔링은 거기에 맞닿아 있다. 그러므로 한강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을 하나 꼽으라면, ‘듣기’라고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는 한강 작가가 발굴하고, 만들어 이끌어 낸 우리 소설의 또 다른 가능성이다.
무엇보다 한 개인의 내면을 깊이 이해하고자 하는 그 과정을 통해 끌려 나오는 역사적 전경들은, 역사적 문제가 한 개인의 삶에 드리웠던 지독한 흔적들을 다시금 환기하는 동시에 그것을 치유할 수 있는 진정한 교감을 실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정치와 민족이라는 거대 담론의 바깥에서도 역사를 오롯이 사유하고 이해하며 결국 그 상처들을 치유할 수 있는 힘이 모두의 삶에 존재함을 역설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세계 수많은 곳에서 발생했던 전쟁과 파괴, 그로 인한 아픔에 그대로 맞닿게 된다. 그 지점에서 한강은 아무렇지도 않게 한국문학이 이미 세계화되었음을 선언한 것이다. 그것은 보편성이라는 말로 쉽게 치부될 수 없는 인간과 인간을 연결하는 공감과 연대의 감각이다.
작가 한강을 수사했던 세 개의 화두-여성, 좌파, 페미니즘-의 가치 역시 이 자리에서 비로소 제 의미를 찾는다. 한국문학 안에서 단 한 번도 주류로 인정되지 못했던, 언제나 주변적이거나 특이한 하나의 지류로써만 평가되었던 그 목소리. 그로부터 오히려 한국문학의 대표성이 시작된다는 또 다른 역전이야말로 노벨문학상 수상에 더해진 진정한 의미라 할 것이다.
3. 셀럽의 선택, 다양성의 시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확실히 한국문학계에는 훈풍이 밀려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일본소설에 밀려 부진했던 한국소설이 연일 기염을 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한국문학이 한국이라는 스토리텔링으로서 마땅한 제 자리를 되찾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일종의 착시에 가깝다. 세계적인 문학상의 수상이라는 외부적인 요인이 일시적인 붐을 야기할 수 있지만, 근본적인 체질 개선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현상이 아닌 문학의 지속을 위한 자양분이 되기 위해서는 한강을 사유하면서도 한강을 넘어 다른 작가와 작품까지로 사유를 확장하는 시도들이 필요하다. 한강만이 아닌, 한강으로부터 새로운 논의가 필요한 시점인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문학의 위기라는 말부터 제대로 곱씹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아니 질문을 조금 돌려보자. 문학의 위기라는 말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원인부터 다시 보자. 문학의 위기란 어디서 기인하는가?
문학의 위기를 초래하는 요인은 너무나 복합적이다. 하지만 그 원인과 해결에 있어서 가장 먼저 손꼽히는 것은 바로 독자였다. 문학작품을 읽는 독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거기엔 우리가 간과했던 진실이 있다. 독자의 감소를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다름 아닌 서점에서의 판매량이기 때문이다.
독자의 감소와 판매량의 감소는 같은 문제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다른 문제이다. 책을 사지 않고 도서관에서 빌려 보는 사람도 많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라면 판매량은 감소하지만 독자는 감소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문학책 판매량이 줄어든다는 것은 독서나 독자의 문제라기보다는 시장의 문제라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문학의 위기란 곧 문학 시장의 위기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실제 도서관에서 문학 관련 책을 읽는 독자도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이지만, 독자의 감소와 판매의 감소를 그대로 등치하여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다. 자칫 인과관계에 혼동을 일으켜 잘못된 대책을 유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오랫동안 이 문제를 독서의 문제로 에둘러 표현한 바 있다. 어쩌면 이러한 태도야말로 문학의 위기를 장기화한 요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다시 짚어 보자. 오늘날 우리가 겪는 문학의 위기는 결국 직접적으로는 문학 시장의 문제, 더 나아가 종이책이라는 매체가 사람들의 선택을 받지 못하는 출판 시장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이 점에서 본다면 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갖는 일차적인 원인은 점점 협소해지는 시장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지금껏 우리는 문학의 위기를 오해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문학의 위기를 초래한 가장 큰 문제는 작품과 독자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좋은 작품이 나와도 사람들이 읽지 않기 때문에 나오는 말이다. 아니 읽더라도 더 이상 책을 사지 않기 때문에 나오는 말이다. 책이 팔리지 않으면 작가가 더 이상 글쓰기를 직업으로 삼을 수 없다. 그것은 결국 문학과 문학인의 생존을 위협한다.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직업을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시장의 위기는 작가의 위기를 만들고, 예비작가를 사라지게 만들고, 결국 작품을 쓸 수 있는 환경 자체를 무너뜨린다. 오늘날 웹소설의 부흥을 이루어 낸 것은 유료화를 통한 산업기반의 확충이었음을 기억해 보라. 결국 위기의 본질은 시장에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최근 달라진 문학 시장의 분위기를 짚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2024년 한국문학의 키워드가 한강과 그의 노벨문학상 수상이었다면, 2025년의 키워드는 단연 성해나의 『혼모노』였다. 미디어에서 연일 이슈가 되었던 만큼, 도서의 판매량이나 대중적인 인기는 한강 작가에 버금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강과 성해나. 그들은 모두 뛰어난 작가이지만, 그 이름이 대중에게 각인되는 과정은 달랐다.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이라는 어찌 보면 지극히 익숙한 문학상 수상과 그에 따른 상찬으로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면, 성해나 작가에 대한 열광을 일으킨 것은 셀러브리티의 선택이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성해나와 그의 작품 『혼모노』에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것은 1인 출판사 ‘무제’의 대표이자 배우인 박정민이니 말이다.
성해나 작가는 2024·2025 젊은 작가상을 수상할 만큼 평단의 주목을 받은 작가이지만, 사실 그의 이름이나 작품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띠지에 달린 추천사 덕분이었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넷플릭스 왜 보냐. 성해나 책 보면 되는데.” 배우 박정민이 쓴 이 도발적인 추천사는 이 책을 이야기하는 가장 큰 화두가 되었다.
사실 방송이나 셀러브리티에 의해 언급된 책이 주목받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TV 프로그램이나 영화 등의 매체를 통해 특정 도서가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은 꽤 흔한 일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라는 코너였다. 2000년대 초반 MBC의 간판 예능프로그램이었던 <느낌표>의 한 코너였던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는 전 국민을 독서광으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진행되었던 일종의 캠페인이었다. 여기서 소개된 책들은 한순간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현재까지도 스테디셀러로 널리 익히는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이 프로그램이 낳은 최고의 아웃풋이다. 2019년 박준 시인의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역시 방송의 덕을 톡톡히 보았던 작품이다. MBC의 <같이펀딩>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오디오 북 펀딩이 되면서 일약 베스트셀러가 되었기 때문이다. 가장 최근에는 걸그룹 아이브의 장원영이 방송에서 애독한다고 말했던 『초역 부처의 말』의 판매량이 급등하는 일도 있었다.
책을 요약하고 소개하는 콘텐츠가 보편화되면서 셀러브리티를 활용한 SNS가 홍보의 창으로 이용되는 것은 이미 일상적인 방식의 하나가 되었다. 어쩌면 셀러브리티의 개입은 필연적이다. 아니 고마운 일이다. 때때로 그 순수성이 의심된다고 해도 그 자체로 위축된 출판 시장에 단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문학은 하나의 상품이 된다.
문학이 상품이라는 말에 거부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문학은 예술인 동시에 확실히 상품이다. 새로운 책이 출판되면 출판사들이 홍보자료를 돌리고 광고를 하고, 조금 더 여유가 있으면 서평단을 모집한다. 책을 팔기 위해서다. 책이 상품이 아니라면 무엇을 위해 이렇게 노력하겠는가? 예술이자 상품이고 순수한 동시에 상업적이어야 한다.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이 문학도 이러한 딜레마 안에 놓여 있다. 그러니 셀러브리티의 선택은 반가울망정 거부해야 할 것은 아니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이야기하고 나서 문학계에 등장한 셀러브리티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는 것이 조금 의아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두 사건은 분명히 연결되어 있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아니었다면 박정민 배우의 리뷰 활동이 주는 영향력이 이토록 큰 열광을 이끌어 내기 힘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강의 작품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박완서의 소설과 박준의 시를 베스트셀러로 만든 것은 방송과 셀러브리티의 힘이었지만, 그것을 스테디셀러로 만들어 오랫동안 사랑받게 만든 것은 결국 작품의 힘이었다.
그러므로 셀러브리티의 선택은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다른 데 있다. 그 선택을 수용하면서도 그것이 한편으로 기울지 않게 만들어야 할 비평이 제 역할을 하고 있느냐의 문제이다. 오히려 문학을 알리는 방식은 좀 더 다양해져야 한다. 문학 전문가가 쓰는 비평과 서평과 같은 전통적인 방식은 그대로 유지하는 한편, 독자가 작품에 대해 알아 가는 장이 오직 그것만이어서는 안 된다. 시장의 방식에도 눈을 떠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비평의 자리는 더욱 견고해져야 한다. 그래야만 시장의 편협함을 극복할 수 있다. 시장이 애써 찾아 주지 않는 숨겨진 좋은 작품을 발굴하고 그 의미를 찾아내는 일, 그것은 오직 비평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4. 문학 시장과 비평의 새로운 역할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갖는 의미 가운데 하나는, 한국문학이 오랜 콤플렉스에서 벗어났음을 확실하게 자각시켰다는 것이다. 외부로부터의 인정욕구에 시달리지 않고도 우리 문학에 충분한 자신감을 가져도 된다는 것을 스스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동시에 문학 역시도 시장에서 매력적인 상품이 될 수 있다는, 어떤 책을 읽느냐가 그 사람을 빛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최고의 수사가 될 수 있다는 그 가능성 역시 열렸다. 이 두 현상은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좋은 작품이 곧 좋은 상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문학 시장을 일구어 온 기존의 방식에 비해 셀러브리티를 활용한 화려한 홍보는 어쩐지 껄끄럽다고 생각될지도 모른다. 이 작은 시장에 더 균열이 나서 한쪽으로 더 기울어질지 모른다는 위기감도 있다. 당연하게도 모든 것에는 양면이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좋은 작품과 시장이 만날 때 최상의 시너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동안 문학을 사유할 때 작가-작품-독자의 관계에만 집중했다. 이것만이 지극히 문학의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 문학에 대한 사유에 하나가 더 추가되어야 한다. 바로 문학 시장이다. 아무리 좋은 상품을 만들어도 시장에서 팔리지 않으면 결국 사장된다. 그러므로 시장을 사유하는 일은 곧 문학을 살리는 일이다. 그러니 더 이상 문학 시장의 문제를 방관해서는 안 된다. 비평의 영역이 더 넓어져야 하는 것이다.
문학의 위기라는 말로 쉽게 도망가지 말자. 문학의 위기를 만든 것이 무엇인지 그 진실로부터 시선을 외면하지 말자. 거기에 시장이 있다면 그 시장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그 시장 안에서 어떻게 더 다양하고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 것인가? 이제야말로 작가와 창작의 문제를 경제적 관점에서 더 고민해야 한다. 그래야만 생성형 AI 시대에도 여전히 인간이 읽고 쓸 수 있다. 그것이 한국문화 안에서 한국이라는 스토리텔링을 강화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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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수연 문학평론가의 연재 비평 <k-컬처와 한국이라는 스토리텔링> - 1편. K-pop, 변화하는 스토리텔링 - 2편. 웹소설이라는 가능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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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無名)의 상품, 번역의 연쇄 : 네트워크 시대의 시와 저자성 이성주 1. 저자성의 균열 생성형 인공지능의 등장 이후, 시 비평의 장에서 가장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개념 가운데 하나는 저자성(authorship)일 것이다. 이와 관련해, 시 쓰기에 인공지능을 포함한 다중 행위자의 개입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며 저자성의 해체를 주장하는 관점이 있는가 하면 여전히 인간만이 쓸 수 있는 시의 고유성을 강조하는 입장 역시 강하게 존재한다. 두 입장 사이에는 유보적이거나 비판적인 태도들이 넓은 스펙트럼을 이루며 공존하고 있고, 그에 따라 저자-시-독자의 관계나 독창성(고유성)을 둘러싼 논의는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다. 물론 이 글에서 관련 논의를 모두 정리하거나 판별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저자성 비판이 오늘날 어떤 형식과 논리로 전개되고 있는지를 가늠하기 위해, 최근의 평문 가운데 하나인 박상수의 「영원한 베타 테스트로서의 여름」(『문학동네』, 2025 가을호)을 출발점으로 삼고자 한다. 이 비평은 2010년대 이후 한국 시에 만연해진 ‘납작함’의 감각을 핵심 문제로 진단하며, 저자성 해체 담론이 간과하기 쉬운 지점을 예리하게 짚어 낸다는 점에서 중요한 참조가 된다. 박상수가 말하는 ‘납작함’이란 최근 시에 나타나는 시적 주체의 무력함, 대상에 대한 비관여성(非關與性), 타자와의 상호작용 약화, 그리고 ‘메타적 인식의 과정’만이 부각되는 경향 등을 아울러 지칭하는 것이다. 특히 박상수는 최다영의 비평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시의 생산 주체를 비인간 행위자와 기술 장치까지 포함하는 연합적 모델로 긍정하는 최다영의 논리가 결과적으로는 주체의 저항과 행위 가능성 혹은 내면의 복잡한 역학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지적한다. 본 글의 맥락에 맞춰 간단하게 말하자면, ‘저자성 해체’를 동시대의 불가피한 조건으로 승인할 때 타자성이나 윤리적 긴장이 소거된 ‘납작함’ 역시 쉽게 수용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최다영의 입장에 서면 다른 이야기가 가능하겠지만, 우선 박상수의 글이 지닌 문제의식에 많든 적든 공감하지 않기란 어렵지 않을까. 확실히 최근 시에서 ‘타자와의 접촉면’이 얕아지고 있음은 박상수만 느끼는 것은 아닐 것 같다. 그리고 이는 어쩌면 인터넷상에서 실수나 실언 하나로 누군가에 대한 평가를 쉽게 뒤집고 때로 그것을 근거 삼아 혐오를 정당화하는 오늘날의 문화적 현상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여기서 제기하고 싶은 문제는, 박상수가 ‘무엇’을 주장하는가에 있다기보다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에 있다. 그의 글은 맥락이 다른 다양한 이론과 담론을 빠르게 호출하고 병치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가령 한병철과 마크 피셔가 별다른 매개 없이 나란히 놓이고, 현대 신학 담론의 어휘들은 그것이 형성된 맥락이 충분히 고려되지 않은 채 문학 비
- 관리자
- 2026-01-01
등 돌린 김은자의 이미지와 무등산 김서라 1. 등 돌린 김은자의 사진 이미지는 그것을 표현하는 사물이나 사건 자체보다는 사물이나 사건들이 어떻게 보이는지, 어떻게 표출되고 있는지에 더 가깝다. 하지만 그 두 가지는 쉽게 분리되기 어렵기 때문에 동일시되기가 쉽다. 이 문제에 맞닥뜨린 근대 철학자들은 판단을 유보하기도 하고 인간의 지각 방식 자체를 문제시하기도 했다. 그들의 이론과는 별개로, 우리는 일상적인 경험의 방식으로 이미지가 그 사물, 사건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간 때문이다. 이미지는 그 사물이나 사건과 마주한 시간을 보존한다. 어렸을 때 그렇게 커 보였던 뒷산이 야트막한 산에 불과 깨닫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이미지의 역사는 사실이나 이념이 아니라 ‘낙차’나 ‘문턱’처럼 감각되곤 한다. 적어도 발터 벤야민은 낙차나 문턱의 감각으로 이미지 속의 역사를 파악한 바 있다. 지금도 그 방법은 유효하다. 어떤 사진이 주어진다면 그 사진을 찍은 사람의 의도나 피사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정보나 분석보다, 그 사진이 어떻게 보이는지 그리고 사람들은 그 사진에 어떤 이름을 붙이는지가 더 중요할 수 있다. 그것이 ‘그때’나 ‘지금’을 사진보다 더 또렷하게 이미지화하기 때문이다. 1964년 4월 17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사진 한 장이 있다. 흰 천을 쓰고 한복을 입은 듯한 여성의 뒷모습이 타원형 프레임 속에 있다. 마치 옛 초상 사진의 프레임 속에 수수한 차림의 여성의 모습이 담겼지만, 이 여성의 뒷모습만 가지고는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전혀 알 수 없다. 사진 아래에는 작은 활자로 “무명옷을 입은 「어머니」 김 여사는 사진 찍기 마다고 흰 수건 쓴 머리를 돌려댔다.”고 쓰여져 있다. 이 사진이 함께 실린 기사는 그를 ‘어머니’로 소개하면서 등 돌린 뒷모습을 포착한다. 기사의 제목으로는 ‘숨은 나이팅게일’, 부제로는 ‘삼밭실의 무등원, 죽음을 이긴 새마을의 어머니’라고 달았다. 이 사진과 관련한 기사 내용은 이 무등원과 ‘김 여사’를 다음처럼 소개한다. “광주 무등산 중턱 삼밭실 일대에는 사회에서 버림받은 2백30명에 달하는 폐결핵환자, 앉은뱅이, 간질병환자, 정신병자 등 불구자들이 이곳저곳에 흩어진 38동의 집에서 원시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이 마을의 영도자는 연약한 한 사람의 중년부인, 의지할 곳 없는 환자들에게는 어머니이자 누나요, 구세주이기도 하다. ···(중략)··· 「가톨릭」 재단의 손으로 운영되는 제중병원은 가난한 결핵환자를 무료로 치료해왔으나 나을 수 없는 환자를 언제까지나 입원시킬 수는 없어 이들에게는 부득이 퇴원명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병 때문에 패가망신이 된 환자들에게는 유리걸식밖에 할 길이 없었다. 이금
- 관리자
- 2026-01-01
낯익고도 불친절한 미래에 대한 단상 임지훈 세상의 속도를 점점 감당할 수가 없다. 모든 것이 너무나도 빠르게 변해 간다. 변화하는 속도에 편승하지 못하는 자는 자신이 이방인이 된 기분을 느낀다. 스팅의 노래 〈Englishman in New York〉의 화자는 자신을 “legal alien”, 합법적인 이방인이라고 말한다. ‘신사다움’이 철 지난 농담이 되어 버린 세계에서 여전히 “Manners maketh man”이라 말하고, “Be yourself, no matter what they say”, ‘당신답게, 누가 뭐라고 하든’이라 말하는 사람. 그 노래 속에서, 이 합법적인 이방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Modesty, propriety Can lead to notoriety You could end up as the only one Gentleness, sobriety are rare in this society at night a candle’s brighter than the sun - Sting, 〈Englishman in New York〉 겸손과 예의범절이 악평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온화함과 침착함은 흔치 않은 감정이 된 세계.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이고, 우리는 그 속에서 스스로를 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살아가고 있다. 어쩌면 이미 스스로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직 자기 자신을 잃지 않았다’는 건 단지 착각에 불과하고. 그렇다면 어쩌면 그 또한 자신의 착각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미치광이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이건 아마 이중의 의미로 ‘그렇다’고 할 수 있을 텐데, 그가 정말 착각에 빠진 채로 살아가고 있는 거라는 의미에서도 그렇겠지만 모두가 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세상 속에서 그렇지 않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 또한 미친 것이기는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너무나 빠르게 변화하는 세계에서, 겸손과 예의범절이 더 큰 이익을 위한 술책이 되고 온화함과 침착함은 철 지난 농담이 되어 버린 세상에서 그것들의 가치를 알고 있는 사람은 이제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으니까. 그런 세상 속에서 ‘매너가 사람을 만들고요, 당신은 당신답게 살아야 해요’라고 말하는 사람은 분명 광인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종종 이방인으로 느낀다는 점에서 그와 같지만 사실은 전혀 다르다. 그와 달리 우리는 ‘나다운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를뿐더러, 현실 속에서 무엇이 사라지고 있는지조차 헤아리지 못한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와 그는 전적으로 다른 존재처럼 보이는데, 기술적 환경의 변화에 휩쓸려 떠밀리듯 살아가는 우리와 달리, 그는 마치 좌표계의 원점에 선 것처럼 세계를 바라보며, 그 변화의 속도를 측정하고, 그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야 할 길
- 관리자
- 2025-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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