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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되는 세계에서 살아남기

  • 작성일 2026-03-01

   반복되는 세계에서 살아남기

   ㅡ 김엄지론1)


안세진


   1. 색소폰 연주와 살아남은 소설들


   내가 살고 있는 집 앞 하천 굴다리에는 매일 저녁 색소폰을 부는 할아버지가 있다. 처음에는 아저씨였는데 지금은 할아버지가 되었다.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한 항상 있었다. 어제도 있었다. 

   당신은 테이프 반주에 맞추어 끈적한 유행가를 연주하는 중절모 쓴 노신사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겠지만, 지금 내가 말하는 풍경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는 벽을 보고 색소폰을 분다. 반주도 없고 관객도 없다. 중절모는 쓰고 있다. 한 이십 년쯤 들었으면 익숙해질 만도 한데 나는 아직도 그가 대체 매일 무엇을 연주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불협화음 같은 프레이즈가 툭툭 던져지고 호흡을 고르는 듯 어색한 침묵이 길게 흐른다. 몇 개의 음으로만 이루어진 단순한 멜로디가 수십 번 반복되기도 한다. 아무리 들어 보아도 그것은 노래 같은 것이 아니다. 그는 그렇게 오래 연주하지도 않는다. 한 시간쯤 지나면 색소폰을 케이스에 넣고 어딘가로 털레털레 사라진다. 그는 그렇게 자신이 정한 규칙에 따라 매일 무엇인가를 연주하고 있다. 어떤 수련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이유 모를 형벌을 받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하여튼 무엇인가 반복되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그는 장인(匠人)일까, 아니면 광인(狂人)일까. 

   언제부터인가 김엄지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나는 색소폰 소리를 듣는다. 무엇인가가 소설 속에서 그저 미친 듯이 반복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김엄지의 연주가 시작된 순간은 언제였을까? 정확히 십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볼 수 있겠다. 그때 데뷔 육 년 차의 소설가 김엄지는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문학과지성사, 2015)와 『주말, 출근, 산책: 어두움과 비』(민음사, 2015)라는 두 편의 책을 거의 동시에 문단에 상재했다. 전자는 그의 등단작 「돼지우리」부터 시작해 비교적 ‘단편소설’의 통상적인 형식을 갖추고 있는 초기 작품들이 모여 있는 소설집이었고, 후자는 그가 최근 발표했던 각종 소설의 파편들이 이리저리 조합되어 만들어진 그야말로 괴이쩍은 장편소설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출간되었지만 김엄지의 소설은 명백히 전자에서 후자의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무개념 상태로 널브러져 있”2)는 오피스 맨들의 기이한 무기력은 이미 그의 초기 소설이 잠시 펼쳐 보였던 ‘씹’, ‘뻑’, ‘좆’의 치기 어린 발랄함을 모조리 잠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야흐로 - 이후 김엄지의 소설을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규정하게 될 - “삶의 무게, 아니 ‘무게 없음’을 형상화한 듯한 하나의 형식”3)이 발명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김엄지의 문체(style)는 사실상 그때 이후로 거의 변하지 않았다. 성의 없이 툭툭 끊어지는 문장, 몇 페이지를 채 이어 가지 못하고 전환되어 버리는 장면, E,a,b,c,d··· 희미한 이니셜로 떠도는 인간들까지. 십 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소설의 배경은 오피스에서 겨울 바다와 호수, 그리고 ‘할도(割島)’로 순차적으로 이동했지만, 어쩌다 이곳까지 흘러왔는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낯선 공간을 이리저리 방황하는 소설 속 인물들은 그 건조한 사무실의 풍경으로부터 그리 멀리 걸어온 것 같지 않다. 단편으로 발표된 소설들이 이리저리 분해되고 조립되어 한 편의 장편소설로 묶이는 방식도 여전했다. 김엄지는 (최소한 제목의 차원에서) 몇 차례 연작 소설을 발표하며 단편들이 서로 연결되는 세계관을 도모한 것으로 보였으나, 정작 그의 단편들이 하나의 이야기로 묶여 온 패턴은 매우 우연적이고 또 임의적이었다.4) 몇 년 전에 발표된 단편이 장편소설의 한 챕터로 통째로 삽입되기도 하고, ‘다리 잘린 비둘기’, ‘새들이 충돌하는 횡단보도’, ‘발이 없는 벌레’ 같은 이미지가 외따로 추출되어 소설 곳곳에서 증식하기도 한다. 주제 의식은 물론 등장인물조차 잘 구별되지 않는 단편들은 적당히 자기 복제되고 있었으며, 그로부터 이른바 ‘소설적 발전’ 같은 키워드를 뽑아내는 것은 난망했다.5) 그저 무엇인가가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김엄지는 십 년 동안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인가. 내 생각에, 그는 하나의 세계를 만들고 있었다. 되짚어 보면 그의 장편소설은 모두 어떠한 ‘공간’을 중심으로 묶여 있었다. 『주말, 출근, 산책: 어두움과 비』는 오피스 건물이었고, 『겨울장면』은 호수였으며, 『폭죽무덤』은 바닷가였고, 『할도』는 작은 섬이었다. 그렇게 본다면 김엄지의 소설이 그간 이렇다 할 기준 없이 적당히 조합되고 있었다는 편견은 섣부른 오해였을지도 모른다. 김엄지는 다만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 자신이 써 내린 소설들을 모두 해체하고 재조립해 그것을 세계를 구성하는 각각의 섹터로 완성하여 하나씩 쏘아 올렸을 뿐이다. 그것은 그야말로 광인의 강박을 연상케 하는 아주 길고 지루한 장인의 작업이었다. 김엄지를 사랑해 온 눈 밝은 독자들에게조차 쉽게 이해받을 수 없는 기나긴 프레이즈였다. 그렇게 바야흐로 우리에게 하나의 세계가 도래했다. 우리는 이제 주어진 공간들을 종합하여 마음속으로 작은 지도를 그려 볼 수도 있겠다. 상상해 보자. 중심에는 거대한 오피스 건물이 솟아 있고, 그 외곽으로 호수, 바다, 그리고 작은 섬이 배치되어 있는 어떤 세계의 모습을. 시간은 멈춰 있는 듯 보이고, 마른하늘에는 이따금 번개가 친다. 그리고 이름조차 부여되지 않은 벌레 같은 인간들이 그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그곳이 김엄지가 만들어 낸 세계이다. 

   새롭게 발표된 소설집 『위리』에서 우리는 정말 오랜만에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는 김엄지의 단편을 만날 수 있다. 물론 그것은 매우 아슬아슬하게 자신의 형태를 갖추고 있을 따름이다. 이곳에는 2016년에 쓰인 작품(「예지5」, 「비 오는 거리」)과 2025년에 쓰인 작품(「입생로랑 낭떠러지」, 「위리」)이 함께 놓여 있으며, 소설의 분량 역시 엽편(「변신」)에서 중편(「비 오는 거리」)까지 제각각이다. 그러나 나는 이 아홉 편의 소설을 중요하게 새기고 싶다. 왜냐하면 이들은 그야말로 십 년에 걸쳐 이어져 온 색소폰 연주 속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단편들이기 때문이다. 지난 십 년 동안 김엄지가 발표한 거의 모든 단편들은 산산히 부서졌다. 그들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분해되어 어떤 상징적 공간 속으로 함몰되거나, 특정한 건축물을 세우기 위한 재료로 활용되었다. 그 모든 파괴와 창조의 혼란 속에서 오직 이 아홉 편의 소설만이 생존하여 두 번째 소설집에 실린 것이다. 어쩌면 이 소설들은 도래한 김엄지의 세계를 안내하는 최초의 가이드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소설집을 펼치는 순간 잠복해 있던 아홉 편의 소설이 지하에서 기어 나와 세계를 걸어 다니기 시작한다. 나는 마치 포스트-아포칼립스 게임의 캐릭터를 따라가듯 그들의 행적을 관망해 본다. 과연 이들은 이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 온 모험이 이제서야 시작된 것이다.



   2. 소진된 미래, 탕진된 언어


   세계로 기어 나온 이 인물들의 모습을 우선 천천히 뜯어보자. 그들은 일단 무척이나 지쳐 있는 것 같다. 지하 생활이 너무 길었던 탓일까? 그렇게만 치부하기에는 이들의 무기력이 너무 뿌리 깊어 보인다. 소설에서 이렇다 할 이유가 표명되는 것은 아니다. 그야말로 ‘무엇이든’ 그들을 지치게 하기에 충분한 까닭이다. “카페의 소음과 빛, 커피 안의 얼음을 씹는 일, 걷거나 멈추는 일, 유튜브 영상을 보는 것, 끼니를 챙기지 않았을 때 찾아오는 허기, 잠들면 꿈을 꿔야 하는 것, 잠드는 것, 잠들기 전까지의 모든 일과”(「여름」, 23)에 이르기까지 일상의 모든 절차가 그들의 신경을 끔찍하게 혹사시킨다. 이 만성적인 무기력은 도저히 치유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들은 이미 “세상 어떤 이유에도 관심이 사라진 지 오래”(7)이고, 모든 것과 거리를 둔 채 방에 처박혀 그저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는 중얼거림을 습관처럼 반복할 뿐이다. 

   이들은 완전히 망가져 있다. “너무 무감각해.”(「여름2」, 41) 감정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아무리 버튼을 눌러도 기대하는 반응은 돌아오지 않고, 응당 느껴져야 마땅할 감정은 둔탁한 체에 걸러져 해상도가 낮은 즉물적인 쾌/불쾌로 열화된다. “고통이 뭔지 너는 몰라요.”(「여름3」, 59) 부정적인 감정조차 충분히 느껴지지 않는다. 외부적 자극에 대한 수용체 자체가 너무나도 둔감해져 있기에 이들의 행동은 사실상 반응(反應)에 미달하는 반사(反射)의 차원에 머물고 있다. “너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아.”(「여름2」, 51) 그렇기에 이들은 입 밖으로 이야기를 거의 꺼내지 않는다. 제대로 된 반응조차 내놓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타인과의 소통 같은 것이 이루어질 리가 만무하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까닭이다. “넌 그냥 그런 사람인 거지.”(「여름3」, 59) 정서적이고 인지적인 공감 같은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며, 의례적인 대답만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 이곳저곳 취소선이 그어져 있는 쓰다 만 메시지는 모두가 사라진 이후에야 뒤늦게 발송된다. 이를테면 이런 식으로: 잘 지내? 미안해. 네 물건들. 마요네즈. 목걸이. 나 요즘 귀가. 여름이네. (「여름2」, 56~57) 

   그들은 차라리 소진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질 들뢰즈는 말년의 저서 중 하나인 『소진된 인간』에서 사무엘 베케트의 후기 텔레비전 단편극을 ‘소진(l’épuisé)’이라는 개념으로 읽어 낸다. 그에게 있어서 소진의 개념은 단순한 ‘피로(le fatigué)’와 구분되는데, 우리가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피로’가 원하는 것을 실현하지 못하는 무력의 상태를 가리킨다면, 그와 달리 ‘소진’은 무엇보다 ‘가능한 것(le possible)’의 지평 자체가 통째로 소실되어 버린 상태를 지칭한다.6) 이와 같은 소진의 개념은 김엄지의 인물들에게도 정확하게 적용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들을 사로잡고 있는 절망과 우울은 무엇보다도 꿈꾸어 볼 수 있는 ‘미래’가 모조리 소진되었다는 자각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미래를 도모할 힘이 없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도모할 만한 미래 자체가 없다. 이미 모든 것이 “다 결정되어 있기에 ‘예지’가 만연하여 하찮은 것”7)이 되어 버린 세계에서 대체 무엇을 더 기대할 수 있을까? 그곳에는 “보았던 것을 보고 들었던 말을 듣고 해 왔던 말을 하는”(「여름3」, 61) 오래된 미래가 낡은 만국기처럼 걸려 있을 뿐이다. 이렇다 할 무언가로 변신하지도 못한 채 “길바닥에 누워 터질 것 같은 얼굴로 버둥거”(「변신」, 104)리고만 있는 이들에게 남아 있는 것은 상투적인 미래에 목매달려 죽어 가는 정해진 수순뿐이다.

   비록 김엄지의 소설은 그것이 현실과 연결될 수 있는 거의 어떤 통로도 남겨 놓고 있지 않지만, 그의 소설 속 짙게 드리운 소진의 감각은 지금-여기 우리가 처해 있는 시대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계층 이동이 불가능하다는 사회 구조적인 측면의 막막함이나, 끊임없는 자기-계발의 굴레가 야기하는 주체적 차원의 번아웃을 넘어, 흡사 가이아적인 수준에서 육박해 오는 ‘미래-없음(no future)’에 대한 암울한 전망과 그 결과로 피부에 새겨지는 만성적인 피로와 기후 우울증(climate depression)은 이제 하나의 시대정신이 아닌가. 비록 이와 같은 소진의 감각을 즉각적으로 특정한 세대적 감수성과 연결 짓는 것은 - 그것을 ‘3포세대’의 망탈리테와 연결 짓거나 “미래 없는 프레카리아트의 내면”8)으로 읽어 내었던 기존의 시도처럼 - 소설을 특정한 사회정치적 맥락에 고정시킴으로써 김엄지의 소설이 담지하고 있는 미학적 고유성을 상당 부분 삭감하는 독해가 되겠지만, 그것이 지금의 시대가 앓고 있는 병리성과 날카롭게 공명하고 있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더 나아가 이와 같은 소진의 프레임은 김엄지의 소설-쓰기 자체를 설명함에 있어서도 매우 효과적으로 느껴진다. 들뢰즈에 의하면 베케트의 작품에서 소진의 구체적인 양상은 무엇보다 가능한 선택지에 대한 수학적 ‘탕진’의 형식으로 드러나는데, 이를테면 주머니 속의 열여섯 개의 조약돌을 네 개의 바지 주머니에 돌아가며 배치하거나(『몰로이』) 다섯 개의 작은 과자들을 백이십 개의 개별적인 조합으로 분류하는 강박적 행위(『머피』)에 대한 작중 인물의 몰두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9) 그러나 언어의 탕진이라는 측면에서 김엄지를 능가할 사람은 거의 없지 않을까? 페이지를 한 장만 들추어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듯이 김엄지의 문장은 짧고 간결하다. 미문(美文)에의 욕망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고, 한 문장이 두 줄 이상 이어지는 경우도 드물다. 빈번하게 일어나는 행갈이로 인해 소설은 마치 짧은 명제들의 연쇄로 이루어진 지문(地文)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김엄지의 문체를 장식을 걷어 내고 핵심만을 남겨 ‘서술의 효율성’을 추구하기 위한 미니멀리즘의 전략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오독에 가까울 것이다. 몇 개의 예시만 들어 보자. 


    Y는 끼니때마다 마요네즈를 냉장고에서 꺼내 여기저기에 뿌려 먹었다. 

    Y는 스크램블드에그, 떡갈비, 샐러드, 삶은 감자 위에 마요네즈를 뿌려 먹었다.

    Y는 맨밥에 마요네즈와 간장, 참기름을 넣어 비벼 먹기도 했다. (「여름2」, 30)


    도롯가의 기사식당으로 들어가 백반 1인분을 주문했다. 

    식당 천장에 매달린 음 소거 텔레비전에서 이미지가 빠르게 전환됐다. 

    테이블에 오른 것은 밥과 오이냉국, 깻잎, 조기구이, 감자조림, 두부구이, 양파와 된장, 노각무침, 소시지였다. (「여름3」, 64)


   인용한 두 장면에서 작가는 자신에게 주어진 지면을 말 그대로 낭비하고 있다. 온갖 음식에 마요네즈를 뿌려 먹는 Y의 기괴한 식습관은 그래도 캐릭터의 성격을 상상하는 데 약간이나마 도움을 주므로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나’가 우연히 들른 기사 식당의 백반 반찬 따위는, 정말 소설과 아무런 연관도 없을뿐더러, 그렇게까지 궁금해할 만한 것도 아닌 것이다(아주 조금만 궁금하다). 나는 애초에 짧은 단문의 연쇄로 구성된 작가의 문체 자체가 현실적인 차원의 ‘소진’으로 인해 발생한 지극히 우발적인 리듬이 아닌가 하는 혐의를 두고 있다. 김엄지는 어느 글에서 마치 비밀을 털어놓듯 자신이 “쉬고 싶을 때 행갈이를 한다”10)는 사실을 밝힌 바 있다. 이와 같은 작가의 자기 서술을 신뢰한다면, 우리는 김엄지의 소설에서 줄 바꿈이 일어나는 순간을 작가가 글을 쓰다 힘이 들어 엔터키를 치고 책상 위에 엎드리는 어떤 ‘포기’의 순간으로 새겨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이 호사스러운 탕진은 무엇이란 말인가? 애초에 힘에 부쳐서 한 번에 쓸 수 있는 단어도 몇 개 되지 않는 마당에, 작가는 그것을 아무런 의미도 없는 백반 상차림의 세부를 빠짐없이 나열하는데 모두 낭비하고 있다.11)

   이것이 바로 김엄지가 만들어 낸 힘없는 세계의 풍경이다. 미래는 소진되었다. 꿈꾸어 볼 만한 미래는 모두 사라졌고 만성적인 피로와 우울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다. 망가진 인물들은 주변의 자극에 충분히 반응하지 못하며 자신을 떠나가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언어는 탕진되었다. 지친 작가는 책상에 엎드려 성의 없이 엔터키를 누르고 있다. 미래의 지평 자체가 사라졌기에 저축은 아무 의미도 없는 짓이다. 남아 있는 조금의 언어조차 쓸데없는 현실의 세부를 분류하고 나열하는 데 모조리 낭비된다. 어쩌면 이렇게 “사는 데 아무런 쓸모도 없어 보이는 짓”12)에 강박적으로 매달림으로써 그들은 무엇인가를 간신히 견디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세계의 공허를 정면으로 대면하기를 회피하는 궁여지책에 불과하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뭐라 할 필요는 없겠다. 어쨌든 “명확하게 구분하고 분류할 수 있다는 것은 상쾌한 일”(「여름」, 24)이니까.



   3. 비 오는 거리로, 충동의 배출구를 향해


   그러나 무언가가 스멀스멀 기어 온다. 작가와 인물은 소설 속에 지쳐 쓰러져 있는데, 그 위로 자꾸 무엇인가 기어올라, 이들을 가렵게 만들고 뒤척이게 하고 있다. 이미 그곳에서는 몇 개의 징조가 발견되고 있다. 무엇인가 나올 것 같다. 침을 삼킬 때마다 귓속에서 웅웅대는 소리가 들려온다(「여름2」). 가사 도우미로 일하고 있는 집의 잠긴 방 안에서는 쿵쿵대는 소리가 들려온다(「가사」). 무엇인가 떨어질 것 같다. 횡단보도를 건널 때마다 하늘에서 죽은 새가 떨어진다(「비오는 거리」). 마른하늘에는 시도 때도 없이 번개가 번쩍인다(「여름3」). 무엇인가 깨질 것 같다. 창밖에서는 유리그릇이 깨지는 소리가 들려온다(「비오는 거리」). 밤에는 약간의 필압만으로도 산산이 깨어지는 유리 종이의 꿈을 꾼다(「입생로랑 낭떠러지」). 당장이라도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다. 아니, 이미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대체 이것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소진된 인간들의 평정(平靜)을 완전히 휘저어 버리는, 언제 어디에서 기어 나온 것인지도 알 수 없는, 온갖 수단을 동원해도 결코 방역할 수 없는, 이 괴물 같은 벌레들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을 충동(drive)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충동의 가장 무서운 점은 그것이 불가해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욕망(desire)과 충동을 구별 짓는 가장 중요한 차이점이기도 하다. 욕망에는 언제나 이유가 있다. 무엇인가가 선제적으로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가 지금-여기에서 그것을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에 욕망은 발생한다. 욕망은 또한 목적을 갖고 움직인다. 비록 그것의 최종적인 만족은 미끄러지는 기표들의 연쇄 속에서 끊임없이 지연될지라도, 최소한 욕망의 세계 속에는 환유적 원리로 이어지는 논리적 사슬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러나 충동에는 합당한 이유가 없다. 우리는 다만 언제나-이미(toujours-déjà) 존재하고 있었던 그것을 뒤늦게 발견하게 될 뿐이다.13) 충동은 무엇을 목적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어디로 이동하거나 무엇과 연결되지 않고 끊임없이 실재의 구멍을 맴돌며 현재를 향유(jouissance)한다.14) 그렇기 때문에 소진과 충동은 아주 잘 어울리는 짝패이다. 그것을 방어해 온 욕망의 기획이 모두 소진된 순간, 충동은 가장 선명하게, 그리고 날것의 형태로, 우리 앞에 출현한다.15) 그것은 마치 모든 것이 폭격당한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를 기어다니는 작은 벌레와도 같다. 누구도 그 마주침의 순간을 예측하거나 회피할 수 없다. 

   「예지5」는 그야말로 화자가 끊임없이 자신의 충동을 부인하고 변명하는 내용으로 점철되어 있다. 소설에서 A는 당황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가 얼마 전에 “처음 보는 여자를 만”(107)졌기 때문이다. 그는 술집 화장실에서 마주친 여자의 어깨를 만졌다. 아니, “짧은 순간이었지만 A는 거의 주물렀다.”(108) A는 그 이후로 끊임없이 그 순간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A는 도대체 자기가 왜 그 여자를 만졌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 여자 어깨를 만진 것은 내 의지가 아니었다. 나 역시 불쾌하다.” 하지만 동시에 A는 “누구도 나를 그 여자 쪽으로 밀지 않았다”(121)는 사실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다. 그것이 자신 내부에 언제나-이미 존재하는 외밀한(extimité) 충동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진실을 좀처럼 인정할 수 없기에 A는 자꾸 변명한다. “만진 게 아니에요. 잡은 거예요. 어지러웠어요. 어지러웠을 뿐이에요.”(125) 그러나 부인하면 부인할수록 충동은 거세질 뿐이다. 소설 속 날씨는 점점 음산해진다. 비와 바람이 불어온다. 하늘에서 번개가 번쩍인다. 짙은 안개비에 휩싸인 거리에서 A는 팔 벌려 뛰기를 하는 여자아이들에게 소리친다. “들어가. 어두워. 위험해.”(127) 그것은 마치 내부에서 꿈틀대는 자신의 충동을 향한 다급한 경고처럼 들린다. 

   「위리」에서 비바람은 더욱 거세지고 있다. Y는 카페에 앉아 ‘위리’라는 섬으로 떠날 6박 7일의 여름휴가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 섬의 모습은 마치 김엄지의 전작에서 ‘충동섬’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할도(割島)의 모습과도 닮아 있다. Y가 그곳에서 꿈꾸는 것은 그야말로 “완전한 휴가”이며, 그것은 소설 속에서 “완전한 비일상”(218)이라는 구절로 패러프레이즈 된다. 일상으로부터 완전히 절연되어 외딴섬으로 떠나고 싶다는 충동이 깨끗하게 정돈된 카페의 실내로 스며든다. 서서히 차오르는 충동의 냄새를 감각하며 “Y는 문득 이 카페에 너무 오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219) 어쩌면 그는 이미 이용 시간을 초과한 지 오래인지도 모른다. 그 순간 창문 밖에서는 비와 우박이 내리기 시작한다. 빛과 굉음이 내려치자 “파열음과 함께 홀 안의 모든 조명이 꺼진다.”(220) 사람들은 홀린 듯이 창문으로 다가가 손바닥을 대고 유리창 너머의 세계를 바라보지만, 새카만 창으로부터 비쳐 보이는 것은 충동에 허덕이는 그들 자신의 모습뿐이다. 바닥으로 내리꽂히는 우박의 세기는 점점 거세지고 유리창에 새겨진 실금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간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페의 유리창은 산산조각 난다. 프레임만 남아있는 창문의 깨어진 구멍으로 비와 우박이, 그리고 “무언가 부딪히고 휘날리는 소리가”(227) 쉴 새 없이 들이닥친다. 


    비 오는 거리는 주기적으로 정전되었다.

    비 오는 거리에서 바닥 분수는 불규칙하게 가동되었다.

    어두움 속에서 비와 우박이 솟구쳤다. 

    (···)

    비 오는 거리에서 사람들은 고함쳤다.

    걸으면서, 멈춰 서서, 허공에, 길바닥에, 우산과 가로등, 수화기에 대고, 한 무리의 일행이 서로 한 대씩 뺨을 때리면서 고함쳤다. 

    고함치면서 길 끝에서 길 끝으로 달렸다.

    미칠 수 있다는 희망으로 사람들은 주말이면 비 오는 거리로 향했다. (「비 오는 거리」, 129~130)


   다행히도 김엄지의 세계에는 넘쳐흐르는 충동을 위한 합법적인 배출구가 마련되어 있다. 지도 위를 천천히 손끝으로 더듬어 보자. 도시를 흐르는 강을 가로질러 길게 펼쳐진 도로와 육교가 끝나는 소실점. 바로 그곳에 비 오는 거리가 있다. 비 오는 거리는 어떤 공간인가. 그곳은 밤마다 가로등이 정전되고 비명이 터져 나오는 곳이다. 바닥 분수는 불규칙하게 가동되고 비와 우박이 예고 없이 솟구친다. 짙은 안개가 드리워 있기에 CCTV는 작동하지 않는다. “미칠 수 있다는 희망으로 사람들은 주말이면 비 오는 거리로 향”한다. 그곳에서 서로에게 고함치고, 물어뜯고, 뺨을 때린다. 평소라면 절대 할 수 없었던 고백을 털어놓고 또 그것을 온전히 용납한다. 그곳은 오직 충동의 비(非)논리만이 작동하는 치외지대(治外地帶)에 다름 아니다. 통념에 따라 ‘악’을 재단해 온 세간의 윤리 따위는 작동하지 않는다. “각자 개인의 윤리를 구축해야 합니다. 비 오는 거리에서 비롯되는 악의 문제, 그 대비책은 개인이 강구해야 합니다.”(131) 나보다 커진 충동이 나를 대신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비 오는 거리를 다녀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아닌 것 같았어요. (···) 내가 나보다 커진 느낌이었어요.”(130) 이것은 분명한 고양(高揚)의 경험이며, 또 – 하이데거를 전유하자면 - 말의 역설적인 의미에서의 내맡김(Gelassenheit)이다. 

   「비 오는 거리」의 A 역시 종종 비 오는 거리에 간다. 그는 아까 술집에서 여자를 만졌던 A와 동일한 인물 같기도 하고, 또 그와는 완전히 다른 누군가처럼 보이기도 한다. A는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을 비 오는 거리로 가게 만드는 “결핍된 것이 무엇인지”(173) 알 수 없다. 주의력이 부족한 것도, 비타민 D가 부족한 것도 아니다. 차에 치인 적이 있거나 기관지염을 앓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렇다 할 욕망이 모조리 소진되어있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사실 그의 평소 생활은 그리 문제될 소지가 없다. 그는 그저 천 피스 짜리 퍼즐을 맞추고 흐트러뜨리는 행동을 반복하거나 길거리에서 주워 온 손가방에 새겨진 원숭이 무늬의 패턴과 규칙 따위에 골몰할 뿐이다. 우리는 앞서 그와 같은 강박적 분류와 나열이 주체에게 제공하는 어떤 만족감에 대해서 이야기한 바 있다. 그것은 무의미하지만 한편으로는 꽤나 평안하고 자족적인 일상이다. 그러나 때때로 A의 눈에서는 “아무 기분 없이 눈물이 [흘]”(132)러내린다. 대체 왜? 그러나 이것은 잘못 던져진 질문일 따름이다. 반복건대 충동은 욕망과 달리 결핍의 해설 따위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16) 우리는 다만 눈물을 흘리고 있는 스스로를 뒤늦게 발견하게 될 뿐이다. 한 번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 짓물러진 눈두덩이를 부여잡고 그는 오늘도 비 오는 거리로 간다. 

   그렇다면 A는 비 오는 거리로 가서 무엇을 하는가? 그는 삽으로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들어가 눕는다. 축축한 흙과 풀에 뒤덮여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눈을 감고 잠든다. 비 오는 거리에서 A는 이처럼 자신의 죽음을 반복하여 연출한다. 다분히 상징적으로 표출되는 이러한 소설 속 A의 죽음충동은 그렇게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가 육교에서 우연히 만난 여자의 손아귀에 자신의 목을 내맡겼을 때부터 이미 암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왜 그 여자를 밀치지도 않고 그대로 드러누워 목 졸리고 있었던가? / 나는 목이 졸리기 위해 다리를 올라갔던가? / 그 여자 악력은 참을 만한 것이었고, 목이 졸릴 때 즐거웠던가?”(149) 생각해 보면 소설에서 그는 언제나 중얼거렸다. “종말기관, 종말기관, 종말기관.”(154) 좀처럼 작동하지 않는 자신의 기관(器官)을 부여잡고 그는 세계의 종말(終末)을 앞당겨 되뇌고 있었던 것이다. 거리를 가득 메운 충동 속에서 A는 이렇게 스스로의 죽음을, 그리고 세계의 죽음을 상상한다. 구덩이에 파묻혀 있는 그의 얼굴 위로 비와 우박이 내린다. 이유 없이 흐르던 눈물은 빗방울에 씻겨 내린다. A는 그렇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지 않기”(168)로 결심한다.



   4. 게임 오버, 그리고 핑크빛의 발전기


   그리고 게임 오버. 이것이 김엄지의 세계에서 우리가 마주한 엔딩처럼 보인다. 미래는 소진되었고 언어는 탕진되었다. 인물들은 방 안에 시체처럼 누워있고 이따금 설명할 수 없는 충동에 뒤척인다. 넘쳐흐르는 충동을 부여잡은 채 그들이 향하는 곳은 비 오는 거리이다. 그곳에서 무수한 A들은 구덩이에 누워 자신의 죽음과 세계의 종말을 기다린다. 다른 선택지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짐짓 신의 권능을 흉내 내어 이 모든 삶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보지만, 소진에서 충동으로, 그리고 죽음으로 이어지는 정해진 수순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동일하게 반복될 뿐이다. 그것은 김엄지의 세계를 작동시키는 가장 근본적인 원리이다.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모두에게 동등하게 부과되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다. 

   지금 구덩이에 누워 있는 A 역시 예전에는 이와 같은 사이클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다. 소설의 중반부터 A는 ‘22세기 호흡’이라는 이상한 이름의 모임에 참여하기 시작한다. “진정한 호흡”(151)에 대한 연구소를 표방하는 그 단체의 정체가 무엇인지 주어진 정보만으로는 쉽게 추측할 수 없지만, 벽에 빽빽이 채워져 있는 “사회 종속 독립 영향 경향 수렴 해석 차치 누락 소외”(146)라는 문구를 보아하니 해당 모임은 어느 정도의 정치적 지향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총 22주의 수련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는 ‘22세기 호흡’의 워크숍은 소진된 자들을 위한 일종의 정치적 의식화(意識化) 프로그램, 혹은 무분별한 충동을 통제하여 변혁의 에너지로 활용하기 위한 집단 카운슬링처럼 보인다. “호흡은 생존의 이유가 아닙니다.”(146) “갱신되는 삶. 방향성이 있습니까?”(147) 사방에서 들려오는 아지-프로 슬로건에 맞추어 참여자들은 서로의 충동을 고백한다. A 역시 수련장에 모인 사람들 앞에서 공식적으로 발언한다. “저는 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많은 것을 고쳐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 비 오는 거리로 나가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고, 나가지 않고 있습니다.”(166) 그렇게 그는 자해하던 버릇을 고치고, 퍼즐을 맞추고 부수는 무의미한 행동을 그만두고, 이유 없이 흐르던 눈물을 억누르려 한다. 

   하지만 그것은 한낱 미봉책에 불과할 뿐이다. 정치적 지향점으로 결코 온전히 회수되지 않는 A의 충동은 잔여로 남아 다음과 같이 길게 이어진다. “(···) 그러나 여전히 혼란 속이고 머리가 터질 것 같습니다.”(167) 그렇게 결국 그는 다시 비 오는 거리를 찾는다. 구덩이를 파고 그 속에 들어가 눕는다. 무덤을 파는 도구가 새로 구매한 알루미늄 삽으로 바뀐 것을 제외하면 사실 처음의 패턴으로부터 거의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뉴스에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비 오는 거리에 “고감도 CCTV”(169)가 설치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들려오고 있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소식이다. 왜냐하면 그곳이 누군가에 의해 감시되는 한 비 오는 거리가 더 이상 비명과 폭력이 들끓던 이전의 비 오는 거리로서 존재할 수 없음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충동의 유일한 배출구였던 비 오는 거리마저 사라진다면 김엄지의 세계는 이제 어떻게 변하게 될까. 통제되지 않는 충동이 무분별하게 발산되는 도시는 더욱더 어두운 디스토피아로 변하고, 소진-충동-죽음으로 이어지는 부정적 연쇄는 그 안에서 가속화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예사의 색소폰 연주는 다시 시작된 것일까. 정말 우리에게 다른 세계선은 없는 것일까. 

   그에 대한 대답으로 나는 그가 가장 최근 발표한 소설 중 하나인 「입생로랑 낭떠러지」를 마지막으로 중요하게 읽고 싶다. 주인공 E의 모습은 김엄지의 다른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모든 것을 체념한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일상을 영위함에 있어서 어떠한 이상도, 방식도, 포즈도 내세우지 않는다. 마치 매장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아무런 상품도 아닌 그저 입생로랑 로고 자체인 금속”(187)이 그러하듯, 그의 삶은 어떠한 깊이도 갖추지 못한 채 판매 불가능한 상태로 놓여 있을 뿐이다. 오늘은 여자 친구의 생일이지만, 그녀의 마음을 헤아려 원하는 선물을 준비할 능력이 그에게는 없다. “더 할 말도, 할 생각도 없”(193)기에 둘 사이에서 오고 가는 것은 무의미하고 의례적인 상투어(formula)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 식당에 앉아 있는 그가 귀 기울여 듣고 있는 것은 여자 친구의 말이 아니다. “나 멈춰 봤어. (···) 심장이. (···) 설명 안 되는 거야. 그 안락함.”(196~197) 그는 언제나처럼 사방에서 들려오는 죽음충동의 속삭임을 듣고 있다.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 호흡을 멈추는 자신의 모습을 숨죽인 채 상상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 들려오는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믿음에 대한 몇 개의 말들이다. “축복이라는 건 그저 그런 상황에서 주시는 게 아니야. 핑크빛, 막 그런, 좋고, 그런 게 아니라. 코너로 몰아. 사람을 몰고 몰아서. 상황 중에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것, 보증된 건 천국이라는 자리뿐이라는 걸 깨닫게 해 주는 거. 여기서의 생활이 너무 괴로우니까. 갈등이, 사람을 끝까지 몰아가는 일들이 너무 많으니까 (···)”(182) 김엄지가 그간 고수해 온 단속적인 문체를 고려한다면, 소설의 초반부터 이례적일 정도로 길게 서술되고 있는 이 믿음의 문장들은 화자가 그것에 대해 상당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E는 기껏해야 “4퍼센트”(201)정도 남아 있는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사용해 온 힘으로 그것을 듣고 있다. 사람이 막다른 한계로 몰렸을 때, 이제 정말 마지막이라고 느껴질 때, “정확한 때에. 정확한 방법”(183)으로 강림하는 성령에 대해. 흔히들 상상하는 것처럼 핑크빛으로만 펼쳐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딱 하루치만큼이라도 우리를 더 살게 만드는 매일매일의 축복에 대해. E는 자기파괴의 충동에 허덕이는 와중에도 주변에서 들려오는 믿음의 말들을 소설 속에 이처럼 길게 새기고 있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동기계”처럼 길을 걷던 E는 보도블록이 파헤쳐진 공사장 한복판에서 방전되어 무너진다. 모서리에 머리를 찧어 정신을 잃어 가는 와중에 그에게 강림하는 것은 놀랍게도 바로 핑크빛의 성령이다. “눈이 부신 형광의 분홍이 E의 눈꺼풀 안쪽에 가득하다. 빛은 점점 더 비대해져 E의 머리통을 가득 채우고 안구 밖으로 쏟아질 것 같다.”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부르셨나요?”(204) 그 목소리는 E에게 묻는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205) 그 순간, 마치 기적처럼 E의 머리맡에 놓인 공사장의 발전기가 가동되기 시작한다. 지금 E의 안면은 덜덜덜 떨리고 있다. 정확한 순간에 발명된 믿음에 말미암아 무엇인가가 마침내 발전(發電/發展)되고 있다. 나는 이 장면을 판돈 삼아 김엄지의 소설이 마침내 어떠한 돌파구를 모색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그리고 끊임없는 소진-충동-죽음의 연쇄에서 빠져나갈 유일한 방편은 다른 무엇도 아닌 ‘믿음’의 문제를 경유하여 실험되고 있다. 과연 이 연약한 기적은 E를 구원할 수 있을까. “지금 많이 간절하세요?”(205) 그것은 당장이라도 깨어질 듯한 아주 희미한 가능성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낭떠러지에서 우리가 매달릴 곳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믿음이 생길까?”(「여름」, 8) 어쩌면··· 어쩌면···



1) 이 글에서는 김엄지의 소설집 『위리』(문학동네, 2025)를 중심으로 다룬다. 해당 소설집에 수록된 작품을 인용할 경우 작품명과 면수만 표시한다.

2) 강지희, 「일상의 미학화와 미니멀리즘」, 『문학동네』 2015년 여름호, 340면.

3) 백지은, [해설] 「세속의 시간과 무의미 꾸러미」,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 문학과지성사, 2015, 257면.

4) 그 일례로, 2015년에서 2019년까지 ‘예지’ 연작으로 집필된 여덟 편의 소설은 하나의 소설집 혹은 장편으로 묶이지 않고 분해/변형되어 각각 『주말, 출근, 산책: 어두움과 비』, 『겨울장면』, 『폭죽무덤』, 『할도』로 흩뿌려졌다. 그중 하나(「예지5」)는 심지어 발표로부터 팔 년의 시간이 지나 소설집 『위리』에 수록되어 있다.

5) 김엄지에 대한 비평적 호명이 2015~2016년 이후 거의 사라진 것도 우연은 아니다. 애당초 개별 작품 단위로 평가받는 계간평-문학상 시스템 내부에서 이런 스타일의 소설이 제대로 호명될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기껏해야 “이 소설에 대한 정당한 평가는 소설집이 나온 이후에야 이루어질 수 있을 것 같다”(한설, [계간평] 「소복한 밤과 우정의 동상이몽」, 『문학동네』 2018년 봄호, 578면.)는 반응 정도가 최선인 것이다.

6) 질 들뢰즈, 『소진된 인간』, 이정하 역, 문학과지성사, 2013, 23~24면.

7) 이소연, [소설 격월평] 「읽다, 미체험의 행성에서」, 『현대문학』 2015년 7월호, 312면. 이소연은 베케트를 언급하며 김엄지의 소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만일 이들의 세계를 창조하고 지배하는 조물주가 있다면, 이들은 가장 잔혹하고 무서운 형벌에 처해져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것은 ‘미래 없는 삶’이라는 이름의 저주다.”(이소연, 「’마이너스’ 시대의 이야기 - 김엄지 소설의 한 읽기」, 『21세기 문학』 2016년 가을호, 262면.)

8) 신샛별, 「프레카리아트 시대의 소설 쓰기 - 김혜진, 박민정, 김엄지 소설에 주목하여」, 『현대문학』 2016년 10월호, 243면.

9) “소진된 인간, 그는 다 써버린 인간, 고갈된 인간, 기진맥진한 인간, 탕진한 인간이다.”(질 들뢰즈, 앞의 책, 46면.) 들뢰즈는 베케트의 작품에 나타나는 이와 같은 소진의 양상을 모든 것을 선택함으로써 사실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행위로 설명한다. 이는 각각의 선택지들 사이에 놓여 있는 차이와 거리를 그 자체로 보존하는 ‘포괄적 이접(disjonction incluse)’의 잠재적/창조적 양식으로 긍정되기에 이르는데, 나는 김엄지의 소설을 기어다니는 애벌레-주체들의 모습을 이렇게까지 낭만적으로 읽어 내고 싶지는 않다. (이정하, [해제] 「들뢰즈/베케트의 ‘마지막 인간’: 소진된 인간, 이미지를 만들다」, 같은 책, 104~105면.)

10) 김엄지, [에세이] 「몇 하루」, 『겨울장면』, 작가정신, 2021, 153면. 이와 같은 자기 서술은 이후에도 반복된다: “쓰는 도중에 힘에 부치면 행갈이를 한다. 효과에 대해서는 무책임한 편이다.”(김엄지, 「작가 인터뷰」, 『목격』, 미메시스, 2018, 70면.)

11) 박혜진은 일찍이 ‘현미경의 역설’이라는 표현을 통해 이와 같은 김엄지의 문체적 특성을 짚어 낸 바 있다. “지나치게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체가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현미경의 역설이다. 그것은 또한 김엄지가 인물을 숨기기 위해 사용하는 특유의 방법이기도 하다. (···) 그들은 지나칠 정도로 자세하게 다뤄지고 또는 미세한 부분만 다뤄지고, 그런 탓에 독자들은 오히려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박혜진, 「없는 얼굴로 돌아보라 - 김엄지 소설에 나타난 장막의 글쓰기」, 『조선일보』 2015년 신춘문예 당선작.) 그러나 김엄지의 소설에서 반복하여 목격되는 이와 같은 디테일의 과적(過積)은 ‘묘사’의 수준에 이르기보다는 대부분의 경우 건조한 사건이나 사실의 강박적 ‘나열’에 그치며 종료되는 것처럼 보인다.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언제나 활자의 탕진 그 자체였다고 말해 볼 수도 있겠다.

12) 김형중, 「개와 돼지와 비둘기의 세계에서: 김엄지론」, 『문학과 사회』 2015년 여름호, 364면.

13) “욕망의 주체는 구성적 결여에 근거하고 있다. 반면에 충동의 주체는 구성적 잉여에 근거하고 있다. 즉 본래부터 ‘불가능’하며 여기 우리의 지금 현실 속에 있지 말아야 하는 어떤 사물 - 물론 궁극적으로 주체 그 자신인 사물 - 의 과잉적 현존에 근거하고 있다.”(슬라보예 지젝, 『까다로운 주체』, 이성민 역, 도서출판b, 2005, 498면. 강조는 원문.)

14) “지향적[의도적] 태도로서 특성화될 수 있는 욕망과는 대조적으로 충동은 그 속에 주체가 붙잡혀 있는 어떤 것이며, 그 반복적 운동 속에서 존속하는 일종의 무두적(無頭的) 힘이다.”(같은 책, 484면.)

15) “충동과 관련하여 욕망은 역설적으로 방어의 역할을 한다. 욕망은, 법에 종속됨으로써, 무법의 충동과 그것에 연계된 끔찍한 향유를 진정시키니까 말이다.”(레나타 살레츨, 『사랑과 증오의 도착들』, 이성민 역, 도서출판b, 2003, 85면.)

16) “욕망은 언제나 결핍에 의해 설립되며, 따라서 법과 같은 편에 있다. (···) [그러나] 충동은 금지의 문제에 대해서 무심하다. 그것은 금지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이를 위반할 꿈도 꾸지 않는다. 충동은 자신의 길을 따르고 거기에서 항상 만족을 얻는다.”(Jacques-Alain Miller, “Commentary on Lacan’s Text”, Reading Seminars I and II: Lacan’s Return to Freud,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96, p.423. 번역은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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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03-01
가려진 (아픈) 몸들, 지속되는 광장-들

가려진 (아픈) 몸들, 지속되는 광장-들 -최진영, 이서수, 최은미의 소설을 중심으로1) 민선혜 1. 광장이라는 ‘사건’, 서로에게 감응-연결된다는 ‘환상’ 슬라보예 지젝은 ‘사건’을 안정화된 도식을 뒤엎을 수 있는 새로운 무언가가 출현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사건은 기존의 틀 자체를 파괴하고, 새로운 세계를 열어젖히는 순간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광장은 ‘사건’이었을까. 우리는 정말 같은 ‘사건’을 통과한 것일까. 이번 광장의 특징적인 면은 내란 사태를 경험하며 민주주의의 훼손을 온몸으로 막고자 한 시민들의 정치적 열망이 모인 곳인 동시에, 내란을 통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 한국 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바꾸기 위한 다양한 목소리들이 모이는 장소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광장은 하나의 사건이라기보다, 사건들의 격전지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우리가 통과한 광장이 새로운 ‘빛’과 ‘연대’를 보여 주었다는 사실은 결코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 광장을 빛과 연대의 광장으로만 의미화하는 것 역시 어딘가 석연치 않다. 새로운 민주주의를 개진시키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을 표하는 삼보일배의 순간에도 여성의 몸은 너무 손쉽게 남성적 언사로부터 훼손되고, 이때 여성의 몸은 또 다른 광장이 되어 버리고 만다. 민주주의를 수호하고자 하는 광장 안에 존재하는 억압, 대상화, 전시와 혐오의 광장. 광장 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광장. 광장의 빛남을 이야기하는 동안 표백되고 괴리되어 미끄러지는 외따로 놓인 또 다른 작은 광장들. 이것을 ‘가려진 몸들’이라고 불러 볼 수 있지 않을까. 다시 말해, 어떤 몸들이 경험하는 광장은 다른 이들이 경험한 광장과 완전히 동일할 수 없다. 탄핵 구호를 외치는 동안, 뉴스 속보를 확인하는 동안 고통에 응답하는 정치를 원했다. 마땅한 고통에 마땅한 응답을 내놓는 민주주의를 기대했다. 2030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들이 광장에서 보여 준 활약과 그들이 들고 있던 깃발들의 이채로움에 대한 찬사 대신, 광장 속에서 부글거리고 있던 ‘우리’ 사이의 작은 차이들과 어긋남에 세심히 주목해 주는 정치를 원했다. 광장이 파한 이후에도 이들이 오롯이 설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는 민주주의를 기대했다. 그런데 그 자리는 마련되고 있는 것일까. 그 많던 ‘우리’는 다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광장에 나타났던 ’몸‘과 다시 사라져 버리고 있는 ‘몸’.2) 지금 우리는 이 나타남과 사라짐을 경유하여 광장을 소급적으로 재사유할 필요가 있다. 광장에 부재했던 몸들을 끊임없이 호출하는 목소리와 보란 듯이 현전했음에도 다시금 사라져 버린 몸들에 대해서는 구태여 말하지 않는 목소리, 광장을 사이에 두고 발생하는 이 미끄러짐은 민주주의가 얼마간 성차화된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었

  • 관리자
  • 2026-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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