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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하는 나

  • 작성일 2026-04-01

   비평하는 나


윤옥재


인간은 항상 자기가 사랑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데 실패한다.

- 롤랑 바르트 


   1. 최근 ‘비평하는 나’를 둘러싼 것들 


   # 1) 파편의 리스트 혹은 반(反)구조적 잡록 

   나는 이 글에 대해 반(反)구조적이라는 비평이 들어올 것을 상상한다.1) 이 문장은 나의 것이 아니라 롤랑 바르트의 것이다. 롤랑 바르트가 자신의 저서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에 대한 메타적 인식을 표현한 이 문장은 바로 그 책을 구성하는 200여 편의 짧은 텍스트들 중 하나인 ‘잡록과 작품’의 첫 문장이기도 하다. 바르트는 이 무수한 파편적 단상들의 모음을 “백과사전” 혹은 “이질적이고 잡다한 오브제들의 리스트”로 명명한다. 파편적 글쓰기의 구조적 취약성을 ‘반구조적’이라는 자평을 통해 스스로 드러내는 그의 자조적 태도는 매혹적이다. 그가 일컬은 미친 ‘잡록(polygraphie)’2)에 착안해 이 글 역시 파편적인 방식으로 써 보려 한다.


   # 2) 에세이, 아마추어리즘, 자기이론 

   ‘비평적 에세이’ 혹은 ‘에세이적 비평’이라는 화두가 머릿속에 자리 잡게 된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확실치 않다. ‘비평적 글쓰기’라는 구체적 방향성을 갖게 된 시점부터 나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에세이’라는 형식과 ‘아마추어리즘’이라는 개념이 비평과 맺는 관계에 관한 생각들이다. ‘비평의 에세이화’에 대한 비판이 이미 2010년대 초반부터 이루어졌다는 것을 인식한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다. 한 명의 문학 독자였던 나는 언젠가부터 비평 텍스트에 나타나기 시작한 ‘나’라는 일인칭 표현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비평은 쓰는 자의 주관과 감정을 최대한 배제해야 하는 장르라는 선입견이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불가피하게 자신을 지칭해야 하는 경우 사용되던 ‘필자’라는 말에 나는 불편함을 느끼곤 했다. 왜 ‘나’라고 하면 안 되는 거지? 사정이 이렇다 보니, 비평을 쓰는 ‘나’를 드러내는 문장을 발견할 때면 놀라운 동시에 반갑기까지 했다. 오늘날 비평 텍스트에서 쓰는 주체 ‘나’를 발견하는 것은 전혀 낯선 일이 아니다. 심지어 ‘나’의 비평적 자의식과 정동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것도 새로운 일이 아니다. 에세이와 아마추어리즘 사이에서 비평적 글쓰기의 자리를 탐색하던 내게 최근 강력한 키워드가 새롭게 추가되었다. 최근 문학 연구와 문화 비평에서 주목받고 있는 ‘자기이론(autotheory)’이 그것이다. 이로써 ‘비평하는 나’를 둘러싼 삼각형의 세 꼭짓점에 각각 ‘에세이’, ‘아마추어리즘’, ‘자기이론’이 적히게 된다. 


   # 3) 자기이론 

   또 하나의 삼각형을 그린다. 각 꼭짓점에 문학, 예술, 비평이라는 단어가 놓인다. 지금까지는 각각의 자리 혹은 서로 다른 두 항이 맺는 관계를 해명하기 위한 ‘글쓰기’라는 매개항이 삼각형 안쪽에 적히곤 했다. 최근 국내에 번역 출간된 로런 포니에의 『자기이론』을 접한 후 나는 삼각형 안에 “자기이론적 충동”이라는 말을 새롭게 적어 넣는다. “자기이론적 충동은 예술, 문학, 비평이 만나는 확장된 동시대적 실천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다”3)라는 말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자기이론적 충동(autotheoretical impulse)은 자기(auto/self)의 주관적이고 “신체화된(embodied) 경험”을 철학이나 이론과 결합시키려는 충동이다. ‘자기이론’은 “자서전과 이론적 성찰을 결합하고, 억압과 저항의 역사들 안에 자기 자신을 편입시키길 고집하는 자서전 저자들의 태도”(41쪽)와 연관된다는 점에서 서구 페미니즘 역사의 맥락이나 페미니스트적 실천으로서의 글쓰기 양상으로 조명되어 왔다. 로런 포니에의 작업은 동시대 미술사 및 페미니즘의 다양한 관점을 통해 ‘자기이론’을 구체적 ‘자기(self)’에서 출발해 기존 장르의 범주와 경계를 넘어서는 “트랜스미디어적인 것”이자 “트랜스분과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자서전 혹은 오토픽션과 달리 좀 더 “자기-인식적인 방식으로”(20쪽) 다양한 이론과 철학을 직접적으로 텍스트에 끌어들여 전개하는 자기이론적 글쓰기는 전기, 자서전, 회고록을 넘어 논/픽션, 편지, 일기, 개인적 에세이, 비평, 저널, 구술 증언, 전기영화, 블로그 등 다양한 형식과 장르의 경계를 넘나든다. 장르와 분과 경계를 넘어서 “일견 이질적인 양태들을 섞어서 신선한 효과를 창출하는 작업들에 어울리는 용어”(15쪽)로 ‘자기이론’을 규정한다면, 동시대 한국문학에 나타나는 다양한 자기이론적 경향을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자기이론은 개인적인 것과 개념적인 것, 이론적인 것과 자서전적인 것, 창조적인 것과 비판적인 것을 학제적이고 페미니스트적인 역사들과 조응하는 방식으로 통합하는 일련의 작업 양태들을 시사한다.”(23쪽) 이런 맥락에서 자기이론을 동시대 한국문학 비평장의 흐름과 연결하여 살펴보는 것 또한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으로 보인다. 자기이론의 주요 특성을 (이 글의 성격에 맞게) ‘비평하는 나’와 연결하여 간명하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자기(경험/주관)를 활용한다는 것, 자기와 이론/철학이 맺는 관계의 방식을 비판적으로 성찰한다는 것, 상호텍스트적 친밀성을 전제한 ‘관계로서의 인용’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 4) 김혜순을 경유하여 

   산문 장르에 기반한 ‘자기이론’을 시 장르로 확장해 김혜순의 글쓰기를 “에세이 형태의 기술과 시론의 구축이라는 두 가지 방식의 글쓰기를 동시적으로 수행”하는 것으로 조명한 조연정의 글4)은 시의적절한 작업으로 보인다. 김혜순의 시와 시론을 여성의 신체와 경험을 통해 자기이론적으로 수행한 사례로 읽는 이 글은 “남성적 보편 언어의 장을 사적 기술을 통해 해체시키고자 하는 실천”으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자기이론의 페미니즘적 성격을 강조한다. 그러나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철학(이론)과 자서전적 기술 사이의 분할선을 흐리게 하는 것이 자기이론의 한 특성임을 감안할 때, 나는 역설적으로 자기이론이 가진 새로운 가능성을 가늠해 보게 된다. 이를테면 ‘남성적 보편 언어-여성적 사적 기술’이라는 분할선마저 흐리게 할 수 있는 잠재적 힘이 자기이론에 이미 내재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질문을 던져 보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이론을 퀴어 페미니스트적 글쓰기 범주 바깥으로 확장해 젠더 이분법마저 넘어선 차원에서, 궁극적으로는 동시대 다양한 매체들을 아우르는 예술 실천의 맥락에서 고찰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이를 위해서는 ‘자기이론’의 역사와 페미니즘 예술의 계보를 중요하게 인식하면서도 이러한 논의가 특정 프레임으로 환원되지 않고 “초(extra)-제도적이고 초-담론적일 자기이론의 잠재력”(14쪽)으로 확장될 수 있도록 자기이론을 ‘개인 경험/사유의 이론화’라는 폭넓은 스펙트럼으로 개방하려는 시도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5) 


   # 5) 자기이론적 글쓰기로서의 비평

   로런 포니에의 『자기이론』 번역에 참여한 양효실은 이 책을 “추상, 객관, 보편의 지위를 구가해온 이론을 젠더와 인종, 계급 등등의 맥락에서 오염시키는, 다시 말해 삼인칭 말하기에 진입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소수자들의 일인칭 말하기가 어떻게 이론의 헤게모니를 해체하면서 이론도 자서전도 아닌 혼종적 텍스트를 제시하는지 보여주는 이론서”6)라고 요약한다. 양효실의 말 중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부분은 다음과 같다. 


동시대 예술가들은 리서치와 일인칭 고백을 연결하고 정치적 문제와 사적인 욕망을 연결하는 방식으로 좋은 작업을 내놓고 있습니다. (···) ‘자기 이론’은 자기계발서가 요구하는 비대한 자아의 자기 승리나 교양소설의 형식과는 한참 먼 경향이에요. 그럼에도 인용의 방식으로, 관계의 방식으로 계속 사랑을 설파한다는 점에서 따듯하고 아름답죠. (···) 자기 이론은 ‘나’의 유능함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관계들이 계속 등장하면서 ‘나’가 ‘계속’ 연결되고 ‘우리’를 형성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글쓰기예요.7)


   나는 이 대목에서 ‘비평하는 나’를 둘러싼 삼각형의 세 꼭짓점에 ‘에세이’, ‘아마추어리즘’에 이어 ‘자기이론’을 놓아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재확인하게 되었다. 셋을 연결하는 공통점은 고정된 개념이나 기존의 정의에 구속되지 않고, 다양한 재규정의 가능성에 열려 있다는 것이다. ‘에세이’는 단순한 형식이라기보다 “에세이의 규칙을 창조하는 게임”8)에 가깝다. 이러한 규정은 새로운 정의 혹은 규칙을 창조한다는 점에서 에세이만이 아니라 아마추어리즘이나 자기이론에도 적용되며, 궁극적으로는 문학이나 예술 전반에 요구되는 조건이기도 하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거듭 재규정/재정의되는 개념으로 ‘에세이’를 개방하게 되면, 이는 ‘자기이론적 글쓰기’로서의 ‘비평’과도 만나게 된다. 나는 ‘비평하는 나’를 드러내는 최근의 비평 경향과, 자신의 뿌리를 에세이 전통에서 찾는 자기이론적 특성이 미묘하게 맞닿아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포스트-진실의 시대에 문학(예술)과 이론(철학)의 교차점에서 자기 인식과 이론적 성찰을 결합함으로써 새롭게(다르게) 텍스트와 현실을 바라보는 태도는 ‘자기이론적 실천’으로서의 ‘비평 행위’를 생각하게 한다. “자기이론은 비평과 자서전 사이 장소에 존재한다”9)는 말이 보여 주듯 ‘자기’에 기반한 ‘자서전적인 것’과 ‘철학적 에세이’의 전통은 자기이론의 근간을 이룬다. 자기이론의 주목할 만한 선례로 몽테뉴의 『에세』,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루소의 『고백』이 언급되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위의 인용문으로 돌아가 보자. 양효실이 언급한 ‘동시대 예술가들’의 자리에 ‘동시대 (일부) 비평가들’을 놓아 보면 다음과 같은 상응 관계가 성립한다. 아카이브와 일인칭 고백을 연결하고 정치적 문제와 개인적 욕망을 연결하는 것. 이번엔 ‘자기이론’의 자리에 ‘비평’을 놓아 본다. 비평(가)의 권위나 전문성을 보여 주는 것이라기보다, 관계들 속에서 인용과 대화의 방식으로 ‘나’들의 연결을 통해 ‘우리’를 형성하는 비평의 수행 과정을 보여주는 것. 물론 ‘비평적인 것’이 ‘자기이론’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로 작용한다고 해서 ‘비평’을 ‘자기이론’과 등치관계에 놓을 수는 없다. 자기이론적 특성 중에 동시대 비평의 어떤 경향(혹은 징후)과 조응하는 지점을 연결해 살펴보고, 이를 바탕으로 비평의 미래를 가늠해 보는 하나의 계기로 삼을 수 있을 뿐이다. 이 글은 에세이, 아마추어리즘, 자기이론 각각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각 영역이 교차하는 지점에 초점을 맞추어 그 교차점에서 비평의 자리에 대한 사유를 시도한 작고 파편적인 몸짓에 불과하다. 



   2. 비평이라는 자기이론


   # 1) 마치 (비평)인 것처럼 – ‘목록’에서 ‘에크리튀르’로의 이행 

   ‘에세이즘’은 단순히 에세이라는 형식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시험해 보고 가정해 보는 태도, 즉 “모험 정신”과 “미완성성”에 대한 태도를 의미한다. “위험이나 모험에의 충동 그리고 완결된 형식이나 미적 완성에의 충동 사이에서 흔들리는 장르”10)로서의 ‘에세이’는 서로 다른 충동의 배합이라는 점에서 예술과 이론 사이에서 흔들리는 비평과 닮았다. 또한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열린 형식”으로서의 에세이는 “시도하기와 실험하기”가 능동적으로 일어나는 ‘자기이론’의 장소이기도 하다.(『자기이론』, 56쪽) 내가 처한 비평적 글쓰기의 곤경은 롤랑 바르트의 말처럼 “이질적이고 잡다한 오브제들의 리스트”에서 ‘비평’이라는 긴 텍스트로의 이행 과정 자체에 있을 것이다. “간단한 형식과 긴 형식 사이 투쟁의 문제”11)이기도 한 ‘단장(fragment)에서 에크리튀르(écriture)’로의 이행. 에크리튀르의 자리에 나는 비평을 적어 넣는다. 바르트가 말하는 ‘소설’의 자리에 ‘비평’을 놓아 보면 다음과 같은 문장도 성립한다. 지금 내가 하(고자 하)는 작업은 비평 한 편을 만드는 것 또는 만들지 못하는 것, 실패하는 것 또는 성공하는 것, 그것은 하나의 ‘실적’이 아니라 ‘길’이다.12) 바르트는 “마치 내가 소설을 한 편 만들 것처럼 할 것”이라고 말하며, 여기에 “마치 ······인 것처럼”이라는 제목을 붙인다. 목록(혹은 메모)에서 비평으로 넘어가는 이행 과정이 “마치 (비평)인 것처럼” 보이는 하나의 길이라면 비평하는 나는 그 길을 헤매는 주체일 수밖에 없다. 브라이언 딜런에 따르면 ‘집필이 아닌 목록을 작성하는 에세이스트’에게 목록들은 “야심과 그에 따른 불만들, 좌절들, 실패들에 대한 명시적 표현”이기도 하다. 목록은 “지속적 불안의 증거”이다. 목록은 영영 마무리되지 않을 것이다. 바르트가 말하는 “마치 ······인 것처럼”과 딜런이 말하는 “불완전한 목록”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글쓰기는 그 준비 단계에 머물 수도 있다는 것. 어쩌면 이 글은 바르트가 말하는 ‘소설의 준비(준비와 계획으로만 짜이고 쓰이는 글쓰기)’를 ‘비평의 준비’로 전유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 2) 비평의 준비

   바르트는 “계획의 불안”이나 “억지로 비틀어 논리를 만드는 전개의 강박”13)에서 벗어나는 파편적 글쓰기를 선호한다. 바르트가 콜레주드프랑스의 문학기호학 개강 취임 연설에서 자신의 작업과 정체성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은 인상적이다. “오랜 세월 제 작업을 문학, 어휘론, 사회학이라는 학문 분야에 포함시키기를 바란 건 사실이나, 정작 제가 생산해 낸 것은 에세이들, 즉 글쓰기와 분석이 서로 경쟁하는 모호한 장르에 불과하다는 점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14) 바르트를 겨냥한 ‘아마추어 비평가’라는 비판은 이러한 맥락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각종 이론을 섭렵하면서도 엄정한 과학에 귀의하기보다 떨어져 나오는 바르트”가 “묵직한 고증과 엄밀한 해석, 집대성의 원리를 주축으로 하는 제도 비평계와 대학 강단에서 곧잘 의구심과 비판을 부추”15)기며 ‘에세이만 쓰는 이’로 간주되기도 했다는 사실. 이는 내게 ‘자처하는 아마추어’의 모습을 환기한다. 내게 ‘아마추어’라는 단어는 소위 ‘프로페셔널’의 전문성에 미치지 못하는 열등한 상태를 가리키지 않는다. 이는 ‘프로’에 상응하는 결과물을 산출할 수 있는 능력과 더불어 (통상 ‘프로’에게는 용인되지 않는) 실수의 위험을 내포한 시도마저 감행하려는 태도와 연관된다. “어떤 주체의 모험이 계속 나아가도록”16) 만드는 모종의 에너지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 3) 아마추어리즘으로부터

   자신을 ‘비평적 아마추어’로 규정하고 ‘아마추어리즘을 사고하고 실천한다’고 주장해 온 이여로의 ‘아마추어리즘’에서 자기이론적 비평의 특성을 발견하는 것은 흥미롭다. “이런저런 동시대 이론과 작품 사이의 상동성에 대한 확인으로 미적 판단을 대체하는” 지배적 관습에 저항하면서 “판단의 기준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바로 여기에서부터 구축할 방법”을 찾는 시도로서의 아마추어리즘은 “각자의 체계”를 요구하는 “자기-체계 및 자기-이론의 생산”17)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자기이론과 만난다. 보편적 기준을 상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질적 판단을 폐기하려는 개념”18)으로 아마추어리즘이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고 이여로는 말한다. 아마추어적 탐색은 기존의 지식이나 제도 등을 거부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며, 이미 만들어진 생각의 재현이 아닌 생각함의 행위성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지식이 그 바깥에서 행위를 객체화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가 지식들을 객체화해서 이용할 때야, 주체성의 자리가 마련된다.”19) 판단의 기준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가져온다는 것은, 자기 삶에 기반한 경험을 이론과 결합한다는 측면에서 ‘자기이론적’이다. 이미 만들어진 생각의 재현이 기존 이론의 안전한 적용을 가리킨다면, 생각함의 행위성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기존 지식/이론을 자신의 삶으로 끌어와 재검토하고 활용하는 (위험과 모험을 수반하는) 차원에 가깝다. 전자가 ‘이론’이라는 고정된 체계에 방점을 찍는다면, 후자는 ‘이론-함’이라는 수행성에 방점을 찍는다. 관건은 기존 이론의 보편적 권위를 단순히 부정하거나 그 객관성에 저항하는 것이라기보다, 다른 방식으로 자기 삶의 맥락으로 들여와 새롭게 재구성하고 기입하는 문제를 성찰하는 ‘실천’의 궤적에 있을 것이다. 결국 비평 또한 텍스트 앞에서 자신의 앎과 경험을 바탕으로 이론에 접속하는 글쓰기 행위이기 때문이다.


   # 4) 이론을 통해 참여하기

   자기이론으로서의 비평이 이론과 맺는 관계는 “이론에 참여하기보다 이론을 통해 참여하기”20)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론에 참여하기’가 기존 이론의 권위를 인정(혹은 부정)하면서 그 이론을 강화(혹은 해체)하는 방식으로 ‘나’의 논의를 전개하는 것과 관련된다면, ‘이론을 통해 참여하기’는 기존 이론을 수용(혹은 비판적으로 변용)하는 과정에서 읽는(해석하는) ‘나’의 삶과 정동을 기입하며 ‘자기’를 형성해 나가는 과정과 관련된다. ‘자기이론’에서 말하는 ‘이론(理論, theory)’을 기존의 정의에서 확장해 자기 삶에 기반한 경험적 지식이나 신체화된 인식틀로 재규정할 수 있다면, 자기이론적 글쓰기로서의 비평은 ‘자기 해석’의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에 놓인다. 


   # 5) 예술을 통해 참여하기

   ‘예술을 통해 참여하기’라는 말이 유독 인상적이었던 이유를 생각해 본다. ‘예술’은 ‘타자성’에, ‘참여’는 ‘자기’의 문제와 관련된다. 타자성을 ‘나’의 권역으로 흡수하지 않은 채 타자와 ‘나’의 관계성을 사유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시선을 제시하는 읽기(해석)가 내가 생각하는 ‘비평’의 핵심에 근접한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직접 창작 행위에 참여할 수도 있(겠)지만, 창작된 텍스트를 통해 창작자의 정동과 사유의 흔적에 ‘나의 것’(정동/사유)을 포개거나 어긋나게 함으로써 다른 방식으로 참여하는 것. 전자가 예술‘에’ 참여하기라면, 후자는 예술‘을 통해’ 참여하기가 된다. 비평은 자신이 관심하는 ‘비평 대상을 통해’ 참여하는 행위이다. 참여하는 ‘나’는 나의 정동과 사유를 풀어놓는 과정에서 이론에 접속한다. 이론에의 접속 방식은 다양하다. 어떤 방식이든 ‘이론’은 내가 다루는 비평 대상을 온전히 담아내는 열쇠로 작동할 수 없다. 애초에 ‘언어’로 포획되지 않는 ‘무엇’을 표현하고자 하는 열망이 ‘예술’을 추동하는 것이라면, 언어로 포섭되지 않는 무엇에 대한 갈망(그것을 ‘실재에 대한 열망’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을 논리적 언어와 체계적 이론으로 포착하고 재단하려는 시도는 내정된 실패를 전제한다. 내게 비평의 곤경은 이러한 비평의 불가능성에 있다. (이는 ‘무능’일 수도 ‘불능’일 수도 있다. ‘무능’이라면 쓰는 ‘나’에게 귀속되는 것일 테고, ‘불능’이라면 비평의 욕망 자체가 갖는 필연적 귀결일 것이다.)


   # 6) 딜레마

   바르트가 말한 ‘메모(목록)에서 에크리튀르로의 이행’ 과정에 빗대어 보자. 예컨대 이런 상황. 특정 시인의 시 텍스트를 읽고 메모한다. 노트에, 시집 여백에, 핸드폰 메모장에, 포스트잇에도 메모한다. 본격적 비평 쓰기로의 이행 단계에서 어김없이 예상(치 못)한 난관에 봉착한다. 해석에 저항하는 시를 해석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 그리고 해석을 뒷받침하는 논리를 만들어가고 이에 대한 정합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 구조와 서사는 스토리텔링의 두 기둥이다. 나는 내가 쓴 글에서 내적 모순을 발견하고 괴로워한다. 일이관지(一以貫之)의 경지는 나의 것이 아니다. 나는 ‘일관성’이라는 딜레마에 빠진다. 앞에서 언급했던 개념과 뒤에 놓은 개념이 불화하고, 앞에서 말한 것과 뒤에서 말한 것이 논리적으로 어긋난다. 내가 선택한 단어가 나를 배신하고, 내가 꾸린 문장이 나의 뒤통수를 친다. 길은 번번히 막히고 나의 걷기-생각하기-쓰기는 교착상태에 빠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은 (어떻게든 밀고 나가는 자에 의해) 만들어진다. 이것은 비평인가 소설인가 에세이인가. “결여된 현실성”이 아닌 “과도한 합리성”을 ‘픽션’의 성격으로 규정한다면, 랑시에르의 “근대적 픽션의 합리성”21)에 따라 비평은(도) 픽션이다. 


   # 7) 나르시시즘이라는 함정 

   한 가지 자문. 작품을 판단하는 기준이 ‘나’로부터 나오고, 이론적 정합성이나 형식적 완결성 못지않게 쓰는 주체의 정동이나 스타일도 중요하다면, 비평의 객관성은 위험에 처하게 되는 게 아닐까. 비평하는 ‘나’를 배제하지 않으려는 시도는 자칫 비평의 나르시시즘으로 빠지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은 아닐까. 이와 관련하여 ‘에세이 열풍’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살펴보는 것은 도움이 될 듯하다. 오늘날 주체로 하여금 자기 진실을 생산하게 하고 그 진실을 사적으로 자원화하는 장치가 일반화된 상황에서, 에세이 역시 일종의 자아 생산 장치가 아닌지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고 제기하는 한영인의 글은 주목을 요한다. 에세이의 생산과 소비를 이끄는 주도적 힘이 “위계화된 문학 제도를 해체하기 위한 급진적 변혁 운동이나 시민적 교양의 축적을 위한 열망이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나’의 주관성이 타인의 그것과 동일한 무게와 의미를 지닌다는 다원주의적 평등의 관념에서 비롯하는 듯 보인다”22)는 지적은 참고할 만하다. “‘나’를 중심으로 세계가 해석되고 시야가 제한되는 특징을 삶의 태도로 기꺼이 수용하려는 추세”23)는 ‘문학과 글쓰기의 민주주의’라는 관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지만, “개인의 목소리를 가시화하는 평등주의가 나르시시즘을 반복 강화하는 ‘자아독재’의 위험과 맞붙어 있다”24)는 염려로 이어질 수 있다. 형식의 억압을 거부하고 개인의 고유함만을 과감하게 승인하는 ‘자아 생산 장치로서의 에세이’가 신자유주의적 나르시시즘의 진정성으로 귀결될 수 있다고 비판하는 대목은 경청할 필요가 있다. 만일 자기이론적 글쓰기가 경계해야 할 지점이 있다면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는 “자기서사로부터 유구한 여성 혐오 구조 및 근대의 대표성 원리에 균열을 내는 장면의 맥락을 강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권적이며 유아독존적인 ‘소유적 개인주의’를 경계하고 ‘주권적 자아’ 너머를 상상해야 한다고 말하는 김미정의 견해25)와도 궤를 같이한다. 문제는 ‘자기 진술(표현)을 가능하게 하는 모든 자아 생산 장치로부터 벗어나는 것’ 자체에 있지 않을 것이다. 장치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수용하면서도 어떻게 한 주체가 자기를 스스로 구축하고 설립하기 위해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를 다른 방식으로 사유할 수 있을 것인가에 방점이 찍혀야 하지 않을까. 나 역시 이에 대한 정답이나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하지만, 그 질문의 자리에 ‘자기이론’이 하나의 가능성으로 놓일 수는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 8) 나르시시즘과 자기-인식

   어느 미국 예술가의 흥미로운 작품 제목. 「나르시시스트이기엔 난 너무 자기-인식적이야」. 이는 “나르시시즘”의 반대편에 “자기-인식”을 놓음으로써 자기 성찰을 결여한 무비판적 나르시시스트의 대척점에 자기-인식적인 태도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자기이론』, 91~93쪽) 자서전적인 것과 이론적인 것, 자기-성찰적인 것과 비판적인 것 사이를 오가는 자기이론이 ‘나르시시즘’과 ‘자기’의 문제를 다루는 방식은 ‘자기이론적 비평’이라는 가능성에 유의미한 통찰력을 제공할지도 모른다.


   # 9) 자아에서 자기로 

   문득 ‘자아’와 ‘자기’를 구분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나, 자아, 자기, 에고 등의 단어가 뒤섞여 사용되는 상황에서 각 용어의 역사성 및 이들 용어가 가진 의미론적 두께를 이 자리에서 상세히 살필 수는 없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철학적, 정신분석학적, 심리학적 배경에서 각기 다른 의미와 뉘앙스로 사용되어 온 ‘나’라는 용어를 해석학적 관점에 비추어 ‘자아’와 ‘자기’로 구분해서 살펴보는 것이 유용할 것으로 보인다. 자기이론의 관점에서 동시대 한국 시에 나타나는 ‘나’를 ‘자아에서 자기로의 이행’으로 살펴보려 한 것이 이 글의 원래 계획이었다(는 점을 밝혀둔다). 하나의 담론으로 환원되지 않는 동시대 일인칭 ‘나’에 대한 인식과 태도를 해석하는 데 ‘자기(self)’라는 개념이 새로운 방향을 제시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특정 시 세계를 조명해 보고자 하는 계획에서 ‘비평’의 문제로 관심을 돌리게 된 것은, 나/자아/자기의 문제가 ‘비평의 일인칭화/에세이화’(라 불리는 경향)에 대한 비판과 이에 대한 다양한 논의들과도 연결되어 있음을 인식하면서이다. ‘자기이론’이라는 렌즈를 통해 이러한 사안들을 자기 해석학적 관점과 연동해 조명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지금까지의 파편적 단상들은 그러한 문제의식을 풀어 나가는 과정에서 불려 나온 목록들의 나열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3. 비평의 진실‘들’ 


   # 1) 비평의 에세이화? 제4의 문학? - 에세이의 재정의

   비평의 위기를 논하는 과정에서 제기된 ‘비평의 경량화’ 문제는 여전히 진행 중인 듯하다. 소영현은 신자유주의 문학장에서 비평이 리뷰화되는 현상에 주목하면서 ‘비판적’ 규정력을 상실한 ‘비판적 에세이’의 편제화, 다시 말해 비평에서 ‘판단과 평가’가 배제되는 현상을 일컬어 비평의 ‘에세이화’로 통칭한 바 있다.26) 여기서 ‘에세이화’에 대한 비판이 ‘에세이’라는 개념의 내용과 형식을 모두 겨냥하고 있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판단과 평가의 부족이나 심미적 감상을 지적하는 내용의 문제일 수도, 쓰는 ‘나’를 드러내는 일인칭 형식이나 전형적 비평 형식을 벗어나 자유롭게 기술하려는 탈-형식이 문제일 수도 있다. 요는 비평이 (시대 현실과 사회에 대한 성찰로서의) 비판적 판단력을 결여한 상황을 지적하는 것일 텐데, 비평의 비판적 역할에 대한 수다한 논의와 글들을 여기서 다룰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흥미롭게 살펴볼 만한 것은 거의 20년 전 새로운 형태의 ‘중간 문학’을 가리켜 “제4의 문학”이라 명명하고 그 중요한 특징으로 ‘에세이적인 글쓰기’를 꼽는 움직임이 있었다는 점이다.27) ‘제4의 문학’이라는 용어는 ‘미래파’라는 용어만큼 파급력이 크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에세이’라는 단어가 가진 비좁은 통념을 깨고 보다 폭넓은 의미로 외연을 확장함으로써 ‘비평의 지평’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는 점에서 유의미해 보인다. 당시 탈권위와 탈경계를 표명하며 새로운 가능성으로 평가받았던 (것처럼 보이는) ‘에세이’라는 용어가 몇 년 뒤에 ‘협소, 경량, 사사로운 것’이라는 부정적 의미로 축소된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는 ‘동시대’라는 단어가 시대를 거듭하며 새롭게 재정의되는 것처럼, ‘비평적인 것’을 규정하는 방식 또한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환기한다. 예컨대, 사진가 홍진훤의 행보를 경유해 “비평적 행위란 단지 비평가의 작품 읽기에 국한되지 않으며 예술가의 기획이자 실천일 수도 있음”을 제시하는 장은정의 글28)은 비평의 지평이 제한된 범위 내에 고정되는 것을 경계하는 의미로 읽힌다. 비평/비평적인 것(혹은 문학/문학적인 것)은 하나의 진실로 존재하거나 주어진 범주 내에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관점들에 의해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무엇이기 때문이다. 이는 “비평은 전문가/비전문가의 구분 없이 수행되는 자신의 시대에 대한 해석이자 개입이고 음미이자 판단”29)이라는 관점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2020년대에 이르러 ‘에세이’라는 개념은 ‘자기이론’과 만나 ‘개인 경험/사유의 이론화’를 통한 ‘비판적 에세이’로 거듭날 수 있는 길목에 다시 놓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 2) 크리틱

   비평(批評)이라는 용어가 프랑스어의 ‘critique’나 독일어의 ‘Kritik’처럼 비판과 비평을 아우르는 하나의 단어에서 왔음을 감안할 때, ‘비평’과 ‘비판’이 같은 뿌리를 두고 있음을 환기하는 것은 중요해 보인다. 비판(크리틱) 개념의 역사를 칸트 이전의 종교적 맥락으로 거슬러 올라가 살피는 푸코에 의하면 “비판은 자발적 불복종의 기술, 숙고된 불순종의 기술”, 한마디로 “진실을 둘러싼 정치라고 부를 수 있는 활동 속에서 탈예속화désassujettissement를 그 본질적인 기능으로 갖는 것”30)이다. 여기서 말하는 ‘진실’은 무엇일까. ‘나’가 그것을 진실이라고 보는 관점에서 ‘재구성한 결과’ 혹은 진실이라고 보도록 만드는 ‘조건적 가설’을 ‘진실’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면, “비평에서 성찰과 판정의 역할이 현저히 약화”31)되었다고 판단하는 가설만큼이나, ‘비평의 에세이화-이론의 소멸’ 현상이 이론의 남용에 대한 자성이자 (비평의 궁극 목표 중 하나일) 문학작품화를 향한 비평의 도전32)이라고 판단하는 가설 역시 존중될 필요가 있다. 비평의 위기 속에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분화되는 글쓰기를 실천하는 평론가들의 수행을 통해 비평의 미래를 가늠해 볼 수 있다33)는 가설 역시 마찬가지이다. 나는 비판적 태도가 결여된 동시대 비평의 한 경향이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비평과 비판의 관계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 3) 비판-해석-비평-창조

   비평의 ‘비판 부재’에 대한 글들과는 조금 다른 결로 읽히는 황현산의 글을 일부 살펴본다. 


누구나 알다시피 비평은 해석과 비판으로 이루어진다. 해석이 작품에 대한 이해를 꾀하는 일이라면 비판은 그 한계를 지적하는 일이다. 작품의 해석은 비평가 저 자신과의 싸움이고 비판은 세상과의 싸움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데, 옳지 않다. 해석은 오직 비평가의 역량이 문제되는 반면 비판은 그것이 지닐 수밖에 없는 부정적인 성격으로 여러 가지 갈등을 불러올 수 있기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겠지만, 비평의 그 두 기능이 그렇게 확연히 분리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해석을 통해서도 비판은 충분히 가능하며, 비판은 해석의 가장 좋은 방법이 되기도 한다.


- 황현산, 「젊은 비평가를 위한 잡다한 조언」, 『현대시 산고—황현산 유고 평론집』, 난다, 2020, 291쪽. 강조는 인용자.


   비평을 이루는 두 기능인 ‘해석과 비판’이 확연히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해석을 통한 비판’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대목에 주목한다. “비평은 해석과 비판으로 이루어진다”는 명제에서 비판과 해석은 비평의 부분집합이 된다. ‘해석을 통한 비판’과 ‘해석의 방법이 되는 비판’은 해석과 비판이 공속(共屬) 관계에 있음을 보여준다. 어느 시점부터 한국 비평장에서 ‘비판’의 문제를 다루는 논의가 “‘(주례사로 멸칭되는) 나쁜 비평’을 축출하고 ‘(비판이라 찬미되는) 좋은 비평’을 도래케 하자는 메시아주의로 귀결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한설의 글34)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비판이란 단어가 그럴듯한 명분으로 공허하게 사용되”는 것을 경계하고 “비평의 자리가 위태로운 듯해도 비판은 여전히 잔존해 있다”는 입장을 피력한다. 이는 ‘해석’을 통한 새로운 가치 창조로서의 ‘비평’을 환기하는데, 여기서 해석은 “해석의 좋은 방법”일 수 있는 ‘비판’을 경유한 해석일 것이다. “(철학적) 비판이 예술의 세계 속에 들어왔을 때 가지게 되는 이름이 (예술) 비평”35)이라면, 들뢰즈의 비평이 철학적 ‘비판’에서 예술 ‘비평’으로, 재현이 아닌 생성으로서의 예술을 사유하는 창조적 비평으로 이해되는 것처럼, 비판-해석-비평-창조의 문제는 상호작용의 관계 속에서 좀 더 유연하게 검토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 4) 여러 개의 진실‘들’이 존재하는 비평장에서 

   비평-문학-현실의 관계를 각자의 방식으로 사유하는 최근 평론가들의 작업은 특정 의제에 대한 치열한 논쟁보다는 대화를 전제한 일종의 ‘반향’을 형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대표적인 것이 『문학과사회 하이픈』이 2023년 두 계절에 걸쳐 마련한 ‘비평-대화’ 연속 기획인데, 최근의 비평들이 갈라지고 만나는 지점들을 짚어 내며 대화적 비평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작업으로 평가된다. 엇갈린 의견을 취합해 합의점을 도출하기보다 현존하는 다양한 의견들이 지속적으로 공존할 수 있는 대화의 자리를 마련함으로써 그로부터 ‘비평적 대화의 가능성’이 열릴 것이라고 믿는 기획의 말(「가을호를 펴내며」)은 여전히 중요하다. 비평은 “결정의 심급이 아니라 공존의 한 형태”36)가 되어 가고 있다. 공존을 전제한 대화의 기획에서 자기이론이나 아마추어리즘의 맥락과 연결되는 부분을 살펴보는 것은 흥미롭다. 먼저, “비평장에는 여러 개의 진실이 존재”하므로 “각자의 진실이 얼마나 다른지를 확인하는 것뿐만 아니라, 각자의 진실이 어느 정도로 섞여 있는지를 확인하는 일”이 비평적 대화를 위한 조건임을 강조하는 최선교의 글이 있다. 노태훈의 글은 비평에 내재된 대화의 속성을 짚어내고 AI가 아닌 “인간 평론가”들의 소통이 전통적 의미의 비평적 대화를 넘어서서 ‘날것의 데이터’를 개방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과감한 형태의 대화일 수도 있음을 제시한다. “(평론가의) 경험이나 감정은 비평의 용어로 적절하지 못한가?”라는 최선교의 질문이나 “비평의 무심한 표정과 평론가의 감정”을 다루는 이은지의 글은 ‘나’의 경험과 정동에 기반해 자료들을 개방하려는 자기이론적 글쓰기와 맥락을 같이한다. 강보원이 말하는 “자가진단의 정당성 없음”과 성현아가 주장하는 “다채로운 방향성” 그리고 “새로운 범주‘들’을 구축”해 보려는 실천의 강조는 비평의 에세이화를 ‘보편적 판단 기준의 상실’로 보는 비판적 시각에 대응하면서, “판단의 기준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구축할 방법”을 찾는 아마추어리즘의 특성을 떠올리게 한다. 윤재민이 문학을 문학주의(라는 논쟁적 용어)에서 떼어 내며 후쿠시마 료타의 비평집 『백 년의 비평—어떻게 근대를 상속할 것인가』의 서문을 인용하는 대목도 인상적이다. 어느 한 강연에서 “비평이란 한마디로 좋은 아마추어(애호가)이고자 하는 지적 운동을 의미”한다고 말하는 후쿠시마의 언급은 “아마추어적이고 탈경계적인, 자기 완결적인 프로젝트로서의 문학을 지향하는 지적인 실천”으로 (문학)비평을 읽어낸다는 점에서, 아마추어리즘에 입각한 자기이론적 비평에 맞닿아 있는 듯 보인다. “평론가들 각자의 문학적 ‘움직임’이 지금보다는 더 의식적으로 가시화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라고 말하는 윤재민의 마지막 문장이 “평론가들의 ‘문학’”에 방점을 찍는 것은 ‘문학으로서의 비평’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37) (문학)비평은 문학이다. 


   # 5) 관점‘들’

   문학 비평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지향점은 다양하다. 사회 비평을 추구할 수도 있고 예술 비평을 지향할 수도 있다. 평론가 각자의 규정에 따라 “비평-퍼포먼스”38)라 부를 수도 있고, 담론적 갈래에 따라 “생성의 비평”이나 “제동의 비평”39)으로 부를 수도 있다. 비평가의 위상을 가리켜 “애매한 학자, 애매한 예술가인 동시에 애매한 저널리스트”40)라고 표현한 것이 “지식인-비평(가)에서 작가-비평(가)로”41)라는 명명을 거쳐, 다시 “학자적 평론가, 작가적 평론가, 저널리즘적 평론가”42)라는 모델로 돌아오는 것은, 비평(가)의 양상이 실천 방식에 따라 구분은 될지언정 ‘보편성’이라는 이름 아래 어느 한쪽으로 환원되거나 규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환기한다. 오히려 “어떤 역사, 어떤 보편이냐 하는 차이”를 인정하면서 “각각의 역할을 잘 수행”하는 것, 비평 무용론이나 회의론을 재생산하기보다 “(좋은 의미에서의) 아마추어리즘을 평론가들이 조금 더 깊이 있게 내면화”43)하는 것이 필요한 시점인지도 모른다. 구조적/역사적 조건에 기반한 이론 작업으로서의 비평이든, 시대 현실에 대한 정치사회적 비판에 초점을 맞추는 비평이든, 작가와 작품의 이해를 우선시하며 문학 작품의 향유에 집중하는 작업이든, 독자와의 접점을 고민하는 자리에서 기존과 다른 형식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 방법이든, 나름의 문제의식을 구축하고 자기 고유의 비평 세계를 지속시키려는 노력과 시도들은 한국 비평장의 다양성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 6) 또 하나의 가설 - 자기이론적 비평 주체 

   ‘비평의 에세이화’라는 가설은 한국 비평장에서 이미 하나의 담론으로 자리 잡은 듯하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를 취합해 나 또한 하나의 가설을 제시해 보려 한다. ‘비평의 에세이화’라는 명명으로 참조되곤 하는 동시대 비평의 한 경향은, ‘자기’와 ‘이론’의 관계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이로부터 창조적 ‘이론-함’을 수행하는 ‘자기이론적 비평’으로 다르게 규정될 수 있다는 가설. ‘비평의 에세이화’라는 닫힌 의미를 ‘자기이론적 비평’이라는 보다 열린 의미로 개방할 때, ‘비평하는 나’는 ‘소유적 개인주의’나 ‘주권적 자아’와 같은 혐의에서 벗어나, 해석학적 우회로서의 글쓰기를 수행하는 ‘자기이론적 비평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닐까. 바르트에 의하면 “비평은 작품에 대한 비평이자 자기 자신에 대한 비판”44)이기도 하다. 작품을 통해 타자 이해와 자기 이해를 동시에 수행하는 해석학적 관점에 비추어 본다면, 텍스트라는 타자를 경유해 자기 이해에 도달하는 비평하는 ‘나’는 “자기 삶의 자료들을 해독하는 우회를 통해서만 파악될 수 있는”45) ‘자기’에 가깝다. 이때 비평하는 ‘나’, 즉 비평가의 ‘자기’는 데카르트적 코기토로서의 ‘자아(moi)’가 아니라 텍스트에 의해 형성된 ‘자기(soi)’라는 점에서 ‘자기이론적 주체’와 만나게 된다. ‘자아(ego)’가 동일성의 원리를 따르는 인격적 정체성에 가깝다면, ‘자기(self)’는 매 순간 변화하는 자신을 텍스트를 통해 구성해 나가는 행위 주체에 가깝다. 폴 리쾨르의 저서 제목처럼 ‘자기’는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soi-même comme un autre)”46)인 것이다. 리쾨르의 주체 철학이 ‘나’의 해석학이 아닌 ‘자기’의 해석학인 것처럼, 텍스트를 기반으로 자기의 경험과 이론-함을 연결함으로써 텍스트는 물론 자기 자신의 존재 양식까지 변화시키는 자기이론적 글쓰기는 푸코의 후기 개념인 ‘자기 배려(le souci de soi)’와도 연결된다. 일인칭 비평을 통상적 ‘나’의 개념이 아닌 ‘자기’의 개념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다. 



   4. 결론(없음)을 대신하여


   # 1) ‘자기-되기’와 ‘이론-하기’ 사이에서 — 자기이론적 비평 에세이

   에세이와 아마추어리즘이 그렇듯 자기이론 역시 하나의 단일한 정의로 환원될 수 없을 것이다. 비평의 맥락에서 자기이론은 기존 이론의 정통성이나 보편성을 거부하자는 움직임으로 규정될 수도 없고, 그 모든 이분법적 분할의 경계선을 파괴하자는 주장으로 정당화될 수도 없다. 자기이론은 또 하나의 보편적 기준으로 떠오른 무엇이 아니라, 특정 분야에서 권위를 획득한 (것으로 인정되는) 어떤 이론(가설)을 하나의 보편타당한 진리(진실)로 여기(려)는 ‘고착화’의 경향에 저항하는 ‘자기’들의 몸짓으로 이해되어야 하지 않을까. 자기이론을 실체화하려는 어떤 시도도 결국 자기이론이 가진 ‘자기이론적’ 특성 때문에 실패할 운명을 가지게 될 것이다. 에세이즘이 “상충하는 힘들을 교차시켜 상충하는 구심점들을 끝없이 만들어내는 것”47)처럼, 자기이론은 “(기존의 범주들과 일반적인 기대치에 의해 형성된) 정적이고 고정된 장르라기보다 실천으로서의 존재론적 특성을 보유”한 “생애-쓰기(life-writing)”(『자기이론』, 31쪽)에 가깝다. 나는 ‘자기(auto)+이론(theory)’이 ‘자기-서사(self-narrative)’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며, 실천으로서의 ‘자기이론적 비평 에세이’를 상상해 본다. 비평은 결국 비평하는 ‘자기’의 이야기를 텍스트 행간에 풀어냄으로써 새로운 시선과 대화의 자리를 마련하는 일일 것이다. 이때 텍스트는 ‘나’의 바깥에 있는 ‘타자성’ 그 자체인 동시에 ‘비평하는 나’를 비추어 주는 거울로 기능하면서 ‘나’로 하여금 글쓰기를 단순한 ‘표현’의 수단에서 ‘사유/이론-함’의 기술로 전환하도록 만드는 하나의 힘이자 효과적 경로로 작용한다. (문학은 이러한 힘들의 장이다.) 그렇다면 고정된 형식을 벗어나 유동하는 존재론적 특성을 최대화하는 비평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자기’와 ‘이론’ 사이를 길항하는 역동적 균형 감각이 비평하는 나에게 필요한 것은 아닐까. ‘자기’는 ‘이론-함’이라는 창조적 수행으로, ‘이론’은 ‘자기-언어화’로의 이행으로. 서로 다른 방향으로 조금씩 움직이(려)는 의지를 지속시키는 것. 벡터와 역벡터의 긴장은 모종의 잠재성과 연결된다. “분명한 것은 각기 다른 반응이나 판단의 저변에 개별 언어로는 온전히 구체화되지 않는 비평에 대한 상이 ‘공통적으로’ 존재한다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적확한 표현은 아니겠지만, 그것을 두고 보편적 의미에서의 비평이라고 칭해 두자면, 그것이 있다는 공통적 감각은 역설적이게도 비평에 대한 ‘자의적’ 서술을 가능하게 한다.”48) 만약 내게 ‘공통 감각’에 대한 자의적 서술이 허락된다면 이렇게 말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론-하기와 자기-되기 사이에서 분투하는 자기이론적 비평 주체’가 하나의 공통 감각이 될 수도 있으리라는 것. 비평하는 ‘나’는 하나의 방법론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 2) 징후‘들’

   자기이론의 관점에서 최근 흥미롭게 읽은 평론은 송현지와 송연정의 글이다. “짓고 허물기”라는 제목이 말해 주듯 비평을 쓰는 ‘나’의 곤경을 첫 문장부터 드러내며 마감 직전에 글을 허물고 처음부터 다시 쓰게 되는 정황까지 언급하는 송현지의 글은 시의 내용과 형식을 분석하는 비평가 자신의 방법론과 정동까지 비판적 성찰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49) 비평하는 ‘나(송현지)’의 신체화된 경험과 정동이 이론적 방법론과 연결되면서 반성적 ‘자기 인식’이 이루어지는 장면은 자기이론적 시 비평의 한 사례를 보여 주는 듯하다. 한편 송연정은 신이인의 시에 “홀려버리고야 말았다는 고백”과 함께 “시의 화자가 위치하는 자리에 ‘나’의 이름을 써넣어봐도 되지 않을까”라는 마음을 밝힌다. 송현지가 비평하는 ‘나’를 객관적 거리두기의 대상으로 바라보려 한다면, 송연정은 거꾸로 ‘나(시적 화자)’에서 따옴표를 벗기고 싶어 하는 비평하는 ‘나(송연정)’의 충동을 적극적으로 드러낸다.50) 이를 두고 ‘텍스트에 밀착하는 것’과 ‘텍스트에 편입되는 것’의 차이를 짚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두 글을 언급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노출시키는 두 평자의 다른 방식에 대한 가치 판단을 내리기 위함이 아니라, 비평하는 ‘나’를 드러내는 양상이 이전보다 훨씬 과감하고 다채로워지고 있다는 것을 하나의 주목할 만한 현상으로 포착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징후로부터 자기이론적 비평의 한 흐름을 파악하는 일도 가능할 것이다. 


   # 3) 목소리‘들’

   젊은 평론가들의 대화로 이루어진 최근의 한 흥미로운 좌담51). 이들의 문제의식은 “문학평론가가 자신의 문제의식이나 글쓰기를 계속 이어 갈 수 있는가”(이희우, 333쪽)와 같은 “비평(가)의 자기 연속성”(조대한, 340쪽)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들에게 비평의 에세이화와 연결되는 일인칭 글쓰기는 비판/긍정으로 나뉘는 찬반의 문제가 아니라 “거스를 수 없는 흐름”(전승민, 356쪽)으로 인식된다. 관건은 “일인칭 안에 들어 있는 정치적이거나 비평적인 것의 확장 가능성”에 있다. 일인칭 ‘나’라는 기반에 이미 시대적이고 사회적인 맥락이 함축되어 있다는 것(전청림, 354쪽), 단독적인 ‘나’의 글쓰기는 오히려 축소되고 공통적인 감각 안에 소속된 ‘나’의 영역만이 비대해지고 있다는 느낌(조대한, 358쪽)을 밝히는 것은 비평의 에세이화가 단순히 비평의 세속화나 대중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오히려 일인칭 형식으로 담론화할 수 있는 방향이 비슷한 의제(질병이나 돌봄)로 흘러가는 현상을 지적하며, 좀 더 과감하게 ‘나’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나’의 고유성을 보여 주는 것이 “비평의 에세이화가 보다 역동적인 정치성을 발휘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전승민, 357쪽)임을 역설하는 부분은 인상적이다. “소통과 대화의 방식으로 비평의 방식을 습득하고 글을 쓰는” 이들에게 비평은 “지성과 권위라는 횃불을 좇기보다는 유동하는 정동 사이에 있는 것”(전청림, 353쪽)이다. 이는 “텍스트 간의 관계 맺기”라는 점에서 ‘인용’의 문제로도 연결된다. “권위를 높여주는 권력 지향적 인용이 아닌, 연결과 확장으로서의 대화적 인용”(전승민, 358쪽)이 중요하다는 것. 내가 이 글에서 여러 목소리‘들’을 다시 인용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일 것이다. 바르트가 “권위적인 것이 아니라 우정어린 것”으로서의 인용을 말한 것처럼52) 이는 자기이론의 한 양상 즉 상호텍스트적 친밀성을 전제한 ‘관계로서의 인용’을 수행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 4) 비평하는 나에 대한 비판적 존재론

   ‘비평의 에세이화’를 ‘자기이론적 비평’으로 재규정하려는 시도는 타당한가. 이는 ‘자기이론’이라 불리는 새로운 경향에 대한 충분한 검토와 숙고 없이 새로운 개념을 동시대 한국 비평장에 조급하게 적용하려는 일환으로 보일 수도 있고, 단순히 정의(definition) 투쟁의 한 양상으로 비추어질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이 역시 예속화의 한 사례가 될 것이다. 그러한 위험을 무릅쓰고 (‘비평의 에세이화’ 담론에 주요 키워드로 사용되는) ‘에세이’를 ‘아마추어리즘’과 접목하고 이를 다시 ‘자기이론’으로 수렴해 보고자 시도한 데에는 두 가지 문제의식이 작동했다. 크게는 ‘비평 주체’에 대한 것, 작게는 ‘나’와 ‘자기’의 문제를 살펴보는 것. 여기에 개인적인 것을 덧붙인다면, 한 사람의 ‘비평하는 나’로서 그간 의구심을 가져온 사안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정리하면서 해명해 보려는 의지가 작용했을 것이다. 고정된 개념으로서의 비평 주체를 상정하지 않는다면, ‘비평하는 나’는 비평적 글쓰기라는 수행적 과정을 통해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형성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일인칭 하기의 역사적 몽타주”53)라는 표현은 ‘일인칭 글쓰기’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다양한 층위로 재구성되는 ‘나’의 형성 과정을 보여 준다는 점과 연관된다. 이는 비평 과정을 통해 비평 행위자가 구성된다는 관점과 상응하며 비평 주체의 위치를 생각해보게 한다. “횡단 비평”과 “평론가의 위치”에 대해 언급한 이광호의 말을 일부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장르문학과 영화, 개념미술까지 다루는 그의 저서가 ‘비평집’ 대신 ‘비평 에세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기존 장르의 범주와 경계를 넘어서는 “트랜스분과적인 것”은 ‘자기이론’의 핵심이기도 하다.)


하지만 ‘시장-제도’ 혹은 ‘자본-국가’의 시스템으로부터 자유로운 비판의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문학 장치들’의 바깥은 없기 때문에 비판의 주체는 근본적으로 위선적이고 이중적일 수밖에 없다. 비평가의 불확실한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 비평은 일종의 기만이다. 평론가는 ‘자신에 대한 비판적 존재론’ 위에서 읽고 써야 할 것이다. (...) 진실은 횡단의 과정 속에서 간신히 대면할 수 있는 얇고 잠재적인 것이다. 횡단은 어떤 문학 이념과 문학 집단의 동일화에도 매몰되지 않는 탈장소화의 탈예속화의 운동이다. 평론가는 ‘나’와 나 아닌 것의 경계, ‘우리’와 우리 아닌 것의 경계를 가로지른다.


- 이광호, 『작별의 리듬—문학·예술에 관한 횡단 비평』, 문학과지성사, 2024, 6~9쪽. 


   # 5) 비평의 자기-변형 

   보편적 판단 기준과 주관적 해석 기준은 대립적 이항관계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일까? ‘보편적 이론’과 ‘주관적 자기’ 사이를 가로지르는 자기이론적 글쓰기의 가능성을 믿어 본다면, 양자 간의 대화가 불가능해 보이는 것만은 아니다. 대화는 어느 한쪽으로의 통합을 강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둘의 무대”이자 “지속되는 구축”54)으로서의 ‘사랑’을 환기한다. 사랑은 통합의 에로스가 아니라 간극의 방황이다.55) 사랑은 만남이라는 사건을 통해 서로를 변형시킨다. ‘비평하는 나’의 여정은 ‘텍스트라는 타자’와의 만남을 기반으로 ‘자기-되기와 이론-하기 사이의 대화를 통해 서로를 조금씩 변형시키는 과정’으로 번역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비평의 미래는 비평하는 나‘들’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비평의 자기-변형(self-transformation)’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 6) 처음으로 돌아가서 

   목록에서 비평으로 넘어가는 이행 과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이러한 글쓰기 결과물이 어떻게 읽힐지는 나도 모른다. 칼끝을 구부려 나 스스로에게 향하게 하는 이러한 시도가 어떤 ‘쓸모’ 혹은 ‘효능감’ 혹은 ‘의미’와 연관될지도 예상할 수 없다. 다만, 자기-되기와 이론-하기 사이에서 동요하는 어느 한 글쓰기 주체(인 것처럼 보이는 자)가 ‘파편적 단상의 잡록’을 어떻게 비평이라는 이름의 ‘에크리튀르’이자 ‘자기이론’이자 ‘창작의 아마추어리즘’으로 이행시키고자 했는지 그 헤맴과 고투의 과정을 드러내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면 그나마 다행이라 여길 수 있을 것 같다. 한 편의 ‘자기이론적 비평 에세이’로 읽힌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0. 인간은 항상 자기가 사랑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데 실패한다. - 롤랑 바르트



1) 롤랑 바르트,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 류재화 옮김, 21세기북스, 2025, 269쪽.

2) 앞의 책, 271쪽. 역주에 따르면 “원뜻은 자유 기고가가 다방면으로 쓴 모든 글이다. 또는 도서관에 기타 서적으로 분류되어 있는 진열장이다. 한 작가의 위대한 작품에 견주어 이런저런 잡문을 모아놓은 글로 다소 평가절하하는 자조적인 의미가 있다.” (역주, 같은 쪽)

3) 로런 포니에, 『자기이론: 자기의 삶으로 작업하기』, 양효실 외 옮김, 마티, 2025, 224쪽. 페미니즘 글쓰기의 맥락에서 전개되어 온 ‘자기이론(autotheory)’이라는 개념과 주요 텍스트, 장르적 계보에 대해 연구한 이 책은 자기이론에 대한 역사화를 본격적으로 시도한 작업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자기이론은 직접적이고 자기-인식적인 방식으로 이론 및 철학과 자서전을 통합하려는 문학, 글쓰기, 비평의 작업을 기술하기 위해 21세기 초입부에 등장한 용어이다.”(22쪽) 이하 인용 시 쪽수로만 표기.

4) 「‘자기이론(autotheory)’의 수행으로서 김혜순의 글쓰기」, 『여성문학연구』 제65호, 2025, 37~69쪽.

5) 젠더 분할선을 넘어, ‘자기이론적 시학’을 한국에서 급진적으로 선취한 사례로 이승훈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자기 기술과 이론의 영역을 넘나들며 시와 시론을 동시에 사유한 그의 작업을 2000년대 이후 한국 현대시와 연계하여 살펴보는 것은 자기-이미지, 일인칭의 문제, 이론적 사유의 직접적 기입 등 지금-여기의 문학과 연결하여 조명할 수 있는 또 다른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6) 서보경·양효실·오은교 좌담, 「자기 이론 시대의 인류학적 성찰」, 『문학동네』 2025년 여름호, 83쪽.

7) 앞의 글, 84~85쪽.

8) 브라이언 딜런, 『에세이즘 Essayism』, 김정아 옮김, 카라칼, 2023, 17쪽. 이 책에서 저자는 에세이를 (essayer라는 프랑스어 동사의 뜻을 따라) “노력하고, 시도하고, 시험하는 글”, “추정하거나 감행하는 만큼, 실패로 끝날 가능성도 높은 글”로 정의한다. 15~16쪽 참조.

9) 로런 포니에, 「자기이론의 역사적 뿌리들」, 『자기이론』, 55쪽. 로런 포니에는 철학적 정전들 내부에서도 자기이론의 선례를 발견한다. 여기엔 니체, 칸트, 프로이트, 데카르트, 데리다와 같은 사상가들의 ‘자기이론적 작업’이 포함된다. 53~62쪽 참조.

10) 브라이언 딜런, 앞의 책, 29~31쪽.

11) 롤랑 바르트,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 변광배 옮김, 민음사, 2022. 바르트는 ‘메모에서 소설로 넘어가는 문제’를 다루며 ‘노타시오(notaio) → 메모하기(notation) → 글쓰기(소설)’의 세 단계를 말한다.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이나 영감을 몇 개의 단어나 간단한 문장으로 기록하는 단순한 메모가 ‘노타시오’라면, 이러한 메모 내용을 정리하고 필사하는 단계는 ‘메모하기’, 본격적 글쓰기의 단계는 에크리튀르(écriture)로서의 소설이다. 51~53쪽 참조.

12) 앞의 책, 55쪽에서 변용. “소설 한 편을 만드는 것 또는 만들지 못하는 것, 실패하는 것 또는 성공하는 것, 그것은 하나의 ‘실적’이 아니라 ‘길’입니다.”

13) 롤랑 바르트, 『롤랑 바르트가 쓰는 롤랑 바르트』, 268쪽.

14) 롤랑 바르트·자크 데리다, 『강의∣롤랑 바르트의 죽음들』, 김예령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5, 11쪽.

15) 앞의 책, 옮긴이 해제 「B/D」, 148~149쪽.

16) 앞의 책, 롤랑 바르트, 「강의」, 40쪽.

17) 이여로, 「아마추어리즘의 사회, 그리고 예술」,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1년 가을호, 120~121쪽.

18) 앞의 글, 115쪽.

19) 앞의 글, 122쪽.

20) 이 표현은 이동휘와 이여로가 쓴 『시급하지만 인기는 없는 문제: 예술, 언어, 이론』(미디어버스, 2022년)의 한 구절인 “예술에 참여하기보다 예술을 통해 참여하기”(46쪽)를 변용한 것이다. 예술, 언어, 이론에 대해 새로운 각도로 접근한 이 책은 ‘자기이론적’ 글쓰기의 한 예를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21) 자크 랑시에르, 『픽션의 가장자리』, 최의연 옮김, 오월의봄, 2024. 랑시에르에게 문학과 사회과학은 모두 픽션의 논리를 따르는 형식들이다.

22) 한영인, 「자아 생산 장치로서의 에세이」, 『현대비평』, 2024 여름호, 111~112쪽.

23) 정주아, 「일인칭 글쓰기 시대의 소설」, 『창작과비평』 2021년 여름호, 55쪽.

24) 한영인, 앞의 글, 115쪽.

25) 김미정, 「말하는 입에서 듣는 귀까지—‘자기 서사’ 문제틀의 재구성」, 『젠더—동시대 문학사 2』, 문학과지성사, 2025, 151~156쪽 참조. 김미정은 ‘내 삶은 내가 소유하고 있다’는 식의 ‘소유적 개인주의’가 개인을 자산으로 강조하는 오늘날 통치술의 전제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26) 소영현, 「비평의 장소와 비평(가)의 임무: 사회인문학적 지평에서 ‘비평의 가능성’을 음미하기」, 『사회와 철학』 제21호, 2011, 177~206쪽 참조. 이 글은 「비평, 어디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제목으로 『올빼미의 숲—사회비평 선언』(문학과지성사, 2017)에 재수록되었다. 이 글에서 소영현은 ‘에세이화’ 경향이 비평을 가능하게 하는 해석 공동체의 붕괴와 보편적 판단 기준의 상실이 불러온 현상임을 지적하고, 비평이 처한 이러한 현실 속에서 ‘판단과 평가’로서의 비평의 실현 가능성과 “다성적 보편성”을 위한 방법론을 제안한다.

27) “에세이적 글쓰기 ‘제4문학’이 떠오른다”, 경향신문, 2008년 1월 16일. 계간 『문예중앙』(랜덤하우스) 2007년 겨울호에 마련된 “제4의 문학을 위하여”라는 특집을 소개하는 이 기사는 당시 편집위원들(권혁웅·김수이·김형중·심진경)이 시도 소설도 평론도 수필도 아닌 새로운 범주의 글을 ‘제4의 문학’이라고 명명하는 움직임을 다루고 있다. 이에 따르면, 박상륭의 『칠조어론』은 “설법이자 논문이고, 문학이자 비평이며, 경전이자 학문”이라는 점에서 ‘에세이’라고 평가되며, 신형철의 시인론은 “창작물을 논리화, 개념화하는 기존 비평과는 다른, 창작의 기교가 돋보이는 에세이”로 규정된다.

28) 장은정, 「현장-스코어-비평」, 『문학과사회』, 2019년 봄호, 313~314쪽.

29) 소영현, 「비평, 어디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올빼미의 숲』, 문학과지성사, 2017, 16쪽.

30) 미셸 푸코, 『비판이란 무엇인가?/자기수양』, 오트르망 심세광·전혜리 옮김, 동녘, 2016, 47쪽.

31) 소영현, 「일인칭 비평 시대: 발견하는, 비평하는」, 『오늘의 문예비평』, 2023년 가을호, 46쪽.

32) 양순모, 「기획의 말: 이론의 소멸과 시 비평」, 『현대시』, 2023년 9월호, 104쪽.

33) 김남진, 「위기를 말하는 권력과 비평장의 위치 변화」, 위의 책, 125쪽.

34) 한설, 「비평적인 것의 재조립」, 『자음과모음』 2024년 겨울호, 331쪽.

35) 서동욱, 「비평의 개념: 비판에서 비평으로—예술 비평의 기원」, 서동욱·이솔·강선형·박민철, 『비평가 들뢰즈—파괴하고 창조하는 예술 비평』, 도서출판 길, 2025, 33쪽. “‘예술 비평’은 철학이 오래도록 숙고해 온 ‘비판’의 동전 뒷면에 새겨진 근사한 초상화”이다. (같은 책, 「서문」 6쪽)

36) 미셸 푸코, 『광기, 언어, 문학』, 오트르망 심세광·전혜리 옮김, 동녘, 2026, 145쪽. 푸코는 (타인의 책에 대해 논의/평가/비교/추천/규탄하는 기능을 담당하던 어떤 종류의 인간들인) “비평하는 인간homo criticus”이라는 종족의 소멸을 말하면서 동시에 비평 행위의 주체가 소멸해 가는 바로 그 순간에 그 행위는 증식된다고 말한다. “진정한 비평가는 (···) 비평적 행위를 통해 문학적 품행의 일부가 되는 사람들(더 나아가 텍스트들 자체)”이라는 관점은 오늘날 비평 주체에 관한 논의들에도 여전히 유효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144~145쪽 참조.

37) 인용한 글들은 지면에 수록된 순서대로 다음과 같다. 강동호, 「대화적 비평을 모색하며」(『문학과사회』, 2023년 가을호) ; 성현아, 「비평(非平)한 비평(批評)—비평의 경량화에 대한 비판과 옹호」 ; 노태훈, 「사라진 한국문학봇과 챗—비평의 시대」 ; 이은지, 「비평의 오물—물밑을 휘저으며」(『문학과 사회 하이픈』, 2023년 가을호) ; 강보원, 「자가진단으로서의 비평」 ; 최선교, 「대화의 조건—『문학과사회 하이픈』 2023년 가을호를 읽고」 ; 윤재민, 「연구 노트/단상—비평이라는 문학」(『문학과사회 하이픈』, 2023년 겨울호).

38) 신형철 해제, 「제임스 우드의 비평-퍼포먼스」, 제임스 우드, 『인생에 가장 가까운 것』, 노지양 옮김, 아를, 2025, 20~21쪽. 신형철은 “스스로 문학이 되는 데 주저함이 없는 비평” 즉 “작가의 비평 writer’s criticism”으로 압축되는 우드의 비평관을 경유해 비평이 지닌 ‘주관성’과 ‘사유의 퍼포먼스’를 강조하는 “비평-퍼포먼스”를 말한다.

39) 최가은, 「비평의 자리 2」, 『문장웹진』, 2025년 10월호 참조. 최가은은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한국문학 비평장의 담론적 분산을 두 갈래로 구분하는데, 이를 들뢰즈적 ‘전망’을 토대로 하는 ‘생성의 비평’과 푸코적 ‘비판’을 토대로 하는 ‘제동의 비평’으로 각각 명명한다.

40) 홍정선, 「한국 현대 비평의 위상」, 『문학과사회』, 1994년 봄호, 47쪽.

41) 소영현, 「비평의 미래: 성찰적 비평의 가능성에 대한 일고찰」, 『현대문학의 연구』 44호, 2011 ; 「지식인-비평(가)에서 작가-비평(가)로」, 『올빼미의 숲』, 문학과지성사, 2017.

42) 강경석·김건형·김나영·박혜진·강동호 좌담, 「대화, ‘지금-여기’의 비평을 향해」,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3년 가을호, 103쪽 참조. 박혜진은 평론가를 크게 세 유형으로 나누는데, “학술적 담론들을 생산해내는 학자적 평론가, 자기 글과 자기 독자를 갖고 있는 예술가적·작가적 평론가, 그 사이에 (출판사의 작품 선정 시스템에 의해) 저널리즘 활동이라고 할 만한 정보를 만들어내는 평론가”가 그것이다.

43) 앞의 글, 강경석의 말(105~109쪽) 참조.

44) 이기언, 「텍스트란 무엇인가」, 『해석학』, 그린비, 2021년, 152쪽. 「비평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바르트는 “비평은 타자 알기(connaissance)이자 자기 자신이 세상에 함께-태어나기(co-naissance)이다”(『비평 에세이 Essais critiques』, 254)라고 정의했다.(153쪽)

45) 이기언, 「자기 이해의 문제」, 앞의 책, 183쪽.

46) 폴 리쾨르, 『타자로서 자기 자신 Soi-même comme un autre』,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6년. 리쾨르는 유아론적 코기토를 의미하는 ‘나(je/moi)’ 대신 모든 문법적 인칭들의 재귀적 측면을 가리키는 재귀대명사 ‘자기(soi)’를 사용한다. ‘자기 자신(soi-même)’은 ‘자기(soi)’의 강조된 형태이다. (「서문: 자기성의 문제」 참조)

47) 브라이언 딜런, 앞의 책, 21쪽. 시인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의 에세이에서 인용한 부분으로 전체 문장은 다음과 같다. “에세이가 가진 능력은 다중화하는 것, 무한히 파열시키는 것, 상충하는 힘들을 교차시켜 상충하는 구심점들을 끝없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48) 소영현, 「일인칭 비평 시대: 발견하는, 비평하는」, 65쪽, 각주 21) 참조.

49) 송현지, 「짓고 허물기—백가경론」,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5년 겨울호. “정작 나는 그의 시를 읽고 해석하려는 자리에만 앉아, 다른 위치에서 시와 관계 맺는 가능성을 애초에 상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내가 노동하고 있는 위치, 그러니까 ‘시의 바깥’에서 시를 나의 언어로 환원하려는 이 자리 자체가 이미 백가경 시의 새로움과 결정적으로 어긋나 있는 것은 아닐까.”(61~62쪽)

50) 송연정, 「빌려온 (검은) 고양이—신이인론」,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5년 겨울호. “고백하건대, ‘나’를 타이핑하는 순간마다 그 양옆에 자리하는 작은따옴표를 생략하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혼났다.”(53쪽)

51) 전승민·전청림·조대한·소유정·이희우, 「미래를 지속하기 위해—문학과지성사 창립 50주년 기념 좌담」, 『문학과사회』 2025년 겨울호, 326~363쪽 참조. 이하 인용 시 평론가 이름/쪽수로만 표기.

52) “나는 내 글을 증명하고자 인용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지나가는 길에 나를 매혹시키고 설득했던, 혹은 한순간이나마 이해한다는(또는 이해된다는?) 즐거움을 주었던 것들을 하나의 인사로서 상기하려 할 따름이다.” (롤랑 바르트, 김희영 옮김, 『사랑의 단상』, 동문선, 2004, 22쪽.)

53) 이광호, 「‘나’는 쓸 수 있는가—‘일인칭 하기’의 역사적 몽타주」, 『나—동시대 문학사 1』, 문학과지성사, 2025, 21~23쪽.

54) 알랭 바디우, 「사랑의 구축」, 『사랑 예찬』, 조재룡 옮김, 도서출판 길, 2010 참조.

55) 박영진, 『사랑, 그 절대성의 여정—알랭 바디우의 『진리의 내재성』 읽기』, 에디투스, 2022, 121쪽. “There is no eros of integration, but rather an errancy of interst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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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비평

[부패하는 기억의 공간 2] 『자작나무 숲』과 쓰레기의 정치학

박서양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6년 3월부터 2026년 5월까지 으로 3회 연재됩니다. 부패하는 기억의 공간 ㅡ 김인숙의 『자작나무 숲』과 쓰레기의 정치학 (2) 박서양 1. 앞서 1부에서 살펴보았듯 『자작나무 숲』을 단편에서 장편으로 개작하는 과정을 거쳐 쓰레기 집이 지니는 의미는 보다 새로운 차원으로 확장된다. 기존의 사회적 담론이 쓰레기 집을 단순히 개인의 병리적 현상이나 위생 문제로써 다뤄왔다면, 장편소설에서 작품의 주된 배경이 되는 쓰레기 집은 한 가문의 은폐된 기억이 귀환하는 실체적 장소로 탈바꿈한다. 그렇기에 이곳은 단순히 한 노인의 저장강박이 빚어낸 결과물이 아니다. 쓰레기가 켜켜이 쌓이고 느리게 부패하는 이 공간은 공적 시스템의 신속한 망각에 맞서 기억의 소멸을 유예하는 지연의 장소다. 그런 점에서 소설의 과거 배경이 1989년이라는 사실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1995년 쓰레기 종량제가 시행되며 규격 봉투 안에 모든 폐기물이 동질화되고 익명화되기 이전, 쓰레기는 그것을 배출한 자의 삶의 궤적과 정보가 선명하게 남겨진 물질이다. 즉, 1989년이라는 시간은 쓰레기가 아직 완전히 규격화되지 않은 채, 특정한 누군가의 것이었다는 실명(實名)의 흔적을 지닌 채 공동체 내부에 머물던 시기다. 또한, 좁은 다리 하나를 통해서만 외부와 연결되는 곡교의 폐쇄적인 마을 구조 역시 이러한 쓰레기의 관계적 속성을 한층 강화시킨다. 쓰레기차가 드나들기 어려워 쓰레기를 각자 태우거나 묻는 비공식적 처리에 의존해야 했을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 변두리 마을에서 쓰레기의 출처는 서로에게 투명하게 노출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누가 무엇을 버렸는지 훤히 알 수 있는 동네에서 타인의 쓰레기를 거두어들인다는 것은 단순한 수집이나 저장 행위가 아니라 누군가가 서둘러 지우고자 했던 기억들을 자신의 공간으로 편입시키는 행위가 된다. 더욱이 할머니가 쓰레기를 쌓아 올리는 산1번지의 집이 본래 일제강점기 고리대금업으로 부를 축적했던 시아버지 모칠성의 거처였다는 점도 자못 의미심장하다. 할머니의 수집이 시작되기 훨씬 이전부터 그곳은 이미 채무자들에게서 거두어들인 장물들이 켜켜이 쌓이던 공간이었다. 저당 잡힌 물건들은 누구에게서 어떤 연유로 빼앗아 왔는지 그 유래가 명확하다는 점에서, 그 어떤 폐기물보다도 비극적이고 선명한 서사를 품고 있다. 요컨대 이 집은 단순히 버려진 사물들의 무덤이 아니라, 타인의 삶의 서사가 강제로 유입되고 축적되어 온 역사적 장소인 셈이다. 이러한 공간적 내력은 언뜻 산1번지의 쓰레기 집을 마을의 배제된 기억과 비밀이 축적되는 일종의 아카이브처럼 비치게 만든다. “할머니한테는 저 집이 뭐랄까…… 박물관 같은 거지요.”(124쪽) 하지만 할머니의 수집 행위를 ‘기억의 보존’으로 쉽게 낭만화할 수는 없다. 집 안으로 모여든 쓰레기들은 한데 뒤엉켜 부패하며 본래의 형태와 개별성을 잃고, 그것이 매개하던 고유한 서사 역시

  • 박서양
  • 2026-04-01

문장웹진 비평

[부패하는 기억의 공간 1] 『자작나무 숲』과 쓰레기의 정치학

박서양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6년 3월부터 2026년 5월까지 으로 3회 연재됩니다. 부패하는 기억의 공간 ㅡ 『자작나무 숲』과 쓰레기의 정치학 (1) 박서양 0. 연재에 앞서 본고는 김인숙의 장편소설 『자작나무 숲』을 중심으로 쓰레기라는 물질이 공적인 처리 제도와 가정이라는 사적 공간, 그리고 기억과 서사의 경계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단계적으로 고찰하는 3부작 비평이 될 예정이다. 1부에서는 단편소설 「빈집」을 살피며 쓰레기가 공적 처리 시스템에 편입되기 이전 가정이라는 공간에서 수행되는 분류 노동과 그 젠더화된 정동을 분석할 것이다. 2부에서는 쓰레기를 배제함으로써 질서를 회복하려는 배제의 원리가, 서사에서 개연성을 통해 사건을 정합적으로 배열하려는 충동과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를 살핀다. 3부에서는 지워진 여성들의 언어와 역사, 그리고 쓰레기 사이의 관계를 고찰하며, 재개발과 쓰레기집이라는 한국 사회의 현실 속에서 여성 고딕적 상상력이 어떻게 변주되는지를 논할 예정이다.1) 1. 쓰레기집의 사회적 상상력 곡교동 산1번지의 쓰레기집은 소설 『자작나무 숲』의 공간적 배경이자 독자를 압도하는 오브제다. 개발과 투기의 욕망으로 들끓는 재개발 예정 구역 한복판에 우뚝 선 이곳은 그 강렬한 존재감으로 독자를 끌어당긴다. 우리는 흔히 ‘집’이라는 단어에서 안식과 보호, 정돈과 재생산의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쓰레기와 오물로 뒤덮인 이 공간은 그와는 거리가 멀다. 쓰레기와 쓰레기 아닌 것, 집과 집 아닌 것의 구분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이 이질적인 장소에서, 자본의 생리에 따라 버려져야 할 물건들은 한데 뒤엉켜 완강한 물질적 현존을 드러낼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물질의 축적은 단순한 불결함이나 미관의 문제로 환원되지 않는다. 일상적 분류와 질서의 법칙이 멈춘 어느 공간에서 소설은 사물의 퇴적과 부패를 집요하게 드러내며, 집의 장소성을 ‘언캐니(uncanny)’하고 낯선 심연으로 변주시킨다. 집은 물리적으로 내부를 보호하고 외부를 차단하는 경계로 구성되며, 무엇을 수용하고 배출할 것인지를 판단하는 분류 체계 위에 성립한다. 소비주의 사회에서 상품은 끊임없이 순환되어야 하므로 ‘쓸모’를 다한 물질은 즉각 폐기되어 사라져야 한다. 이러한 논리는 집이 수행하는 선별의 원리와 닮아 있다. 이때 집은 어떤 사물이 여전히 인간의 일상에 머물 자격이 있는지를 판가름하는, 선택과 배제의 논리가 구체적으로 작동하는 장소로 존재한다. 산1번지에 위치한 그곳이 문제적인 이유는 이러한 소비주의 시스템과 분류 기제가 지속적으로 실패하고 무력화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사물의 분류 체계도, 공간의 경계 논리도 더 이상 안정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대신 오랜 시간 퇴적되고 방치된 사물들만이 거대한 물질 덩어리로 합쳐져 뒤엉킨 채 굳어간다. 이처럼 쓰레기 더미가 인간의 거주 공간을 잠식하는 장면 속에서 독자는 익숙한

  • 박서양
  • 2026-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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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다곰젤리

    생동하는 '나'들의 상호 교차에 의거한 비평을 긍정적으로 재조명된 여러 관점들, 대표적으로 에세이적인 것 등을 통해 풀어나가면서 다양한 의제 제시와 더불어 보편적 동일성과 신격화를 지양키 위해 문제점 또한 드러내고 대안을 찾아내려는 평론가의 미시적 천착이 돋보이는 몽타주적 구성으로 이뤄진 평론.

    • 2026-04-02 16:14:13
    판다곰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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