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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하는 기억의 공간 3] 『자작나무 숲』과 쓰레기의 정치학

  • 작성일 2026-05-01

박서양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6년 3월부터 2026년 5월까지 <부패하는 기억의 공간>으로 3회 연재됩니다.


    부패하는 기억의 공간

    ㅡ 『자작나무 숲』과 쓰레기의 정치학(3)


박서양


  1부에서는 「빈집」을 중심으로 쓰레기가 공적 처리 시스템에 들어가기 이전, 사적 공간에서 수행되는 ‘버림 노동’과 그 경계의 문제를 살피고, 『자작나무 숲』에서 할머니가 거주하는 쓰레기 집을 통해 쓰레기의 인접성과 배치의 정치성을 검토했다. 2부에서는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손녀의 글쓰기를 중심으로 개연성이 무엇을 서사로 승인하고 무엇을 배제하는지를 살피며, 그 과정에서 탈락한 이야기들이 어떻게 쓰레기와 인접하게 되는지를 분석했다. 이제 연작의 마지막이 될 3부에서는 이러한 배제와 잔여를 가능하게 해 온 서사의 구조를 검토하며, 수직적 깊이에 기반한 개연성의 조직이 어떻게 흔들리고 수평적 배열로 전환되는지를 살피고자 한다.


  1. 개연성과 중심: 서사의 수직적 구조


  주지하듯 개연성은 사건들이 인과적 필연성에 따라 조직되며 서사적 설득력을 획득하는 원리다. 그러나 이 인과는 서사를 하나의 구심점에 수렴시키기 위해, 핵심을 향해 응집되지 못하는 요소들을 배제하고 제거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인과관계에 맞지 않는 사건은 이야기에서 제거되고, 반복되는 일상의 노동, 신체의 미세한 감각, 명확한 동기로 설명되지 않는 충동들은 쓸모없다고 판단되어 버려진다. 다시 말해 개연성은 서사 내부에서 질서에 어긋나는 요소들을 걸러내는 원리로 기능한다. 이때 서사의 개연성을 따르지 않는 것들은 언어화되지 못한 채 잔여로 남아 서사 바깥의 영역을 형성하고, 이는 매끄러운 서사 구조에 균열을 내는 잠재적 가능성으로 실재한다.


  하지만 이때 무엇을 개연적인 서사로 인정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기준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개연성의 원리는 때로 현실의 권력관계와 결합하여 특정한 인과를 필연적인 것으로 구성하고, 그 과정에서 불균등한 배치를 정당화하거나 재생산한다. 물질적 층위에서도 유사한 방식의 배제가 일어난다. 더 이상 사용되거나 교환될 수 없다고 판단되는 것들은 의미와 가치를 상실한 쓰레기로 간주된다. 요컨대 서사의 구조에서 탈락한 경험과 물질의 층위에서 배제된 쓰레기는 세계를 하나의 중심으로 정리하려는 질서가 필연적으로 남기는 잔여다. 『자작나무 숲』에서 개연성의 질서에서 벗어난 서사적 잔여와, 가치의 질서에서 배제된 사물(쓰레기)이 나란히 놓이며 공명하는 것은 이들이 동일한 배제의 구조에 놓여 있음을 드러낸다.


  모든 인물이 명확하고 일관된 동기를 가져야 하고, 뿌려진 복선은 회수되어야 하며, 결말은 갈등의 원인을 해명해야 한다는 소설 작법은 목적론적이고 합리적인 주체를 전제한다. 이러한 전제는 무엇이 이야기로 인정될 수 있는지를 가르는 기준으로 작동한다. 쓰레기 집을 만들고 사체를 은닉하는 할머니의 행위나, 합리적 이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열정 속에서 부유하는 여성들의 궤적은 이 기준 앞에서 개연성이 결여된 것으로 처리되며, 괴담이나 소문으로만 남게 된다. 결국 개연성은 서사의 완결성을 가늠하는 중립적 기준이 아니라, 누가 어떤 행위를 할 수 있는 존재로 여겨지는지, 더 나아가 어떤 삶과 경험이 서사로 승인될 수 있는지를 미리 규정하는 기대의 틀로 기능한다.


  2. 수직적 발굴의 욕망과 탐정의 실패


  이와 같은 조직은 사건의 원인을 심층에 배치하고, 서사가 그것을 향해 점진적으로 접근해 가는 ‘수직적 발굴’의 구조를 전제한다. 이때 서사는 표면에서 심층으로 내려가며 중심에 도달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러한 수직적 배열은 고전적 모험 서사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예컨대 영화 <인디아나 존스>로 대표되는 고고학적 모험 서사에서 이야기의 목표는 심층에 은닉된 단 하나의 대상, 곧 유물이나 진실에 도달하는 데 있다. 초반에 제시되는 단서들은 주인공의 이동과 발굴의 과정에 따라 점차 하나의 중심으로 수렴되며, 표면에 흩어져 있던 요소들이 선별되고 재배치된다.


  추리 서사 역시 표면에 흩어진 요소들을 심층의 원인에 연결함으로써 개연성을 회수하는 ‘수직적 발굴’의 구조를 따른다. 탐정은 무질서하게 흩어진 사건의 정황들을 살피면서 인과에 기여하는 단서와 그렇지 않은 ‘노이즈’를 구분한다. 그렇게 선택된 단서들은 논리정연하게 엮여 심층의 진실을 사후적으로 구성한다. 이 과정 역시 어떤 요소를 의미 있는 것으로 승인하고, 그 밖의 요소가 배제된 채 남겨지는 것을 전제한다. 


  김인숙의 소설에서도 이 같은 추리소설 모티프가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작품은 고전적 추리 서사의 문법을 따르면서도, 그 구조를 그대로 재현하는 데에는 이르지 않는다. 예컨대 애거사 크리스티의 동명의 소설 제목을 인용한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는 외딴 섬의 예술가 레지던시에서 발생한 소설가의 살인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전형적인 추리 서사의 장치를 내세우지만, 독자가 기대하는 해명은 제시되지 않으며 사건은 끝내 설명되지 않은 상태로 남는다. 오히려 형사 안찬기는 다른 작품에서 다시 등장하며, 이 같은 인물의 반복적 출현은 사건을 단일한 결말로 봉합하기보다 서사의 바깥으로 확장하는 효과를 낳는다. 그리고 『자작나무 숲』은 할머니의 물건 수집 행위를 통해 이 같은 수직적 발굴의 논리를 흔들고, 물질의 뒤엉킴이 만들어내는 수평적 배열을 전면화한다.


  “그런데 내가 뭘 건드려놓으면 할머니가 귀신같이 그걸 알아요. 다 제자리로 돌려놔요. 사람들은 그냥 쓰레기라고만 말하지만 할머니한텐 그게 아니에요. 할머니한테는 저 집이 뭐랄까…. 박물관 같은 거지요.”

  박물관이라면 무엇을 보존하고 무엇을 기억하기 위한 것일까. (124쪽)


  박물관에서 사물은 역사와 기억을 증언하는 역할을 부여받음으로써 보존의 대상으로 편입된다. 여기서 사물은 과거를 안정적인 기원을 지닌 사실로 고정하는 증거로 간주되며, 보존은 그 증거성을 훼손하지 않은 채 지속시키는 실천으로 이해된다. 이는 대상의 물리적 완전성을 복원하고 유지하는 일을 통해 그 ‘진실’ 역시 온전히 보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 기초한다. 그러나 할머니의 집에서 물질은 더 이상 안정된 형태로 보존되지 못한 채, 뒤엉키고 부패하는 상태로 방치되어 끊임없이 변형된다. 수집된 사물들은 과거의 안정된 기원을 증명하는 물질로 기능하지 않으며 고정된 기억으로 환원되지도 않는다. 다만 그것들은 다른 사물과 뒤섞이고 점액질을 내뿜으며, 때로 벌레와 쥐의 서식지가 되어 서로와 연루되고 얽힌다. 요컨대 할머니의 수집은 과거나 기억을 재구성하기보다, 현재 속에서 물질이 분해되고 서로 뒤엉키는 과정을 감각적으로 노출하는 실천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렇듯 물질이 더 이상 기억을 가리키지 못하는 상태는 아래 인용에서 할머니의 쓰레기 집이 파헤쳐지는 장면을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된다.


  “방에서는 그야말로 이상할 것도 없게, 별별 이상한 것들이 다 나왔다. 옷과 폐지뿐만 아니라 피처럼 거무죽죽한 얼룩이 묻은 수건 뭉치, 엄청난 양의 비닐 뭉치, 심지어 자루가 부러진 삽까지 나왔다. 그 속에서 퀸의 브로마이드를 발견했다.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큼은 아빠의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엄마와 아빠가 연애하던 시절에, 그런 걸 연애라고 말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그때 아빠는 퀸에 미쳐 있었고, 엄마는 그런 아빠를 프레디라고 불렀다고 했다.” (104-105쪽)


  손녀(화자)는 쓰레기로 가득 찬 방을 정리하면서 퀸의 브로마이드를 발견하고, 그것을 곧바로 부모의 연애 시절이라는 가족사의 기원으로 소급한다. 하지만 이 확신에 찬 어조는 역설적으로 독자에게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피 묻은 수건과 부러진 삽 사이에서 우연히 발견된 브로마이드 한 장이 정말 아빠의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이 장면에서 독자는 화자의 언술을 완전히 신뢰하는 대신 사물과 기억을 잇는 연결고리가 얼마나 자의적이고 취약한 것인지를 상기하게 된다. 브로마이드가 가족의 기원을 증명하는 증거인지, 아니면 그저 우연히 그곳에 함께 끼어 있었던 종이 한 장에 불과한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렇기에 그것은 어떤 가족사적 진실을 보증하지 않으며, 오히려 흩어진 파편들을 억지로 하나의 서사적 기원과 연결하고자 하는 화자의 강렬한 욕망을 노출시킨다.


  요컨대 이 소설에서 기억은 이질적인 물질들의 뒤섞임 속에서 발생하는 우발적 접속을 통해 구성된다. 서로 다른 시간과 맥락에 속한 관계의 흔적들이 우연히 마주치는 과정에서 의미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때 물질은 기억과 일대일 대응 관계를 맺지 않으며, 오히려 다른 방식의 기억을 촉발한다. 쓰레기 더미에서 발견된 브로마이드 역시 가족사의 선명한 기원을 증명하기보다, 그 기원을 빗겨나가는 다른 관계의 가능성을 환기한다. 이때 남겨진 것들은 미처 서사화되지 못한 이야기의 잔해이면서, 동시에 기억의 그물망에 포획되지 않는 물질적 잔여들의 존재감과 부피감 그 자체다. 이 소설은 이 거대한 물질의 퇴적을 하나의 중심 기억으로 관통해 파헤치려 하지 않는다. 그 대신 흩어진 흔적들이 서로의 경계를 침식하며 맞닿아 있는 물리적 형상 그대로를 텍스트의 표면 위에 수평적으로 펼쳐놓는다.


  3. 지층의 붕괴와 지표의 서사


  구소현의 「수수께끼를 푸는 방학」(《쓺》 2023년 상반기호 수록)에서 주인공 소이는 자신이 어린 시절 사슴 혹은 사람을 죽여서 파묻었다는 기억에 불현듯 사로잡힌다. 소이는 이 불확실한 기억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가, 자신이 무언가를 묻었다고 생각하는 문제의 장소를 다시 찾아간다. 무엇인가가 묻혀있다는 확신 속에서 땅을 파헤치는 이 수직적 행위는, 지표면 아래에 감춰진 물질을 통해 서사의 인과를 회수하려는 고전적 의미의 발굴에 대한 욕망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아래 인용에서 사슴을 죽였다는 소이의 과잉된 기억은, ‘닭 뼈’라는 앙상한 물질 앞에서 급격히 낙하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이의 손에 무언가가 잡혔다. 비로소 형체가 드러나자 곧 소이의 입이 무방비하게 벌어졌다. 개가 마구 짖어댔다. 소이의 기억이 맞았다. 땅속에서 수십 점의 뼈가 발견되었다. 삼분의 이가량 썩어버린 종이 상자와 어느 부분 하나도 썩지 않은 은색 알루미늄 포일과 까만 비닐봉지도 발견됐다. 상자 안에는 앙상하게 드러난 수십 점의 뼈가 가득했다. 닭 뼈였다. 죽은 사슴에게서 흘러내리던 검붉은 피의 정체는 바로 소이가 먹고 버린 양념치킨이었다.” (208쪽)


  사슴을 죽였다는 소이의 비대한 죄의식이 양념치킨이라는 사소한 물질성으로 급격히 축소되는 이 장면은, 지질학적 깊이와 기억의 층위 사이의 대응 관계에 균열을 일으킨다. ‘수직적 발굴’의 세계관은 아래로 내려갈수록 기원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에 기반한다. 그러나 소이가 마주하는 것은 형체만 겨우 남긴 채 썩어버린 종이 상자와, “어느 부분 하나도 썩지 않은 은색 알루미늄 포일과 까만 비닐봉지” 같은 것들이다. 이때 치킨 뼈는 ‘무엇을 묻었는가’라는 질문에 응답하며 소이의 기억을 소환하는 물질이다. 반면 알루미늄 포일과 비닐봉지는 뼈와 동일한 곳에 묻혀 있지만 기억의 재구성과는 무관한 잔여로 남아 있다. 달리 말해, 소설에서 파헤쳐진 땅은 주인공의 개인적 진실이 회수되는 장소인 동시에, 그 기억과 연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폐기물과 마주하는 지점이 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소설의 주요 소재인 ‘닭 뼈’는 인류세를 가리키는 결정적 징후로 기능한다. 인류세(Anthropocene)는 인간의 활동이 지구의 층위를 바꿔 놓은 시대를 가리킨다. 특히 산업적 축산의 산물인 브로일러 닭의 뼈는 쉽게 사라지지 않은 채 널리 남아, 인류세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기술 화석’으로 언급된다. 이는 과거가 안정적으로 퇴적되던 홀로세적 질서가 더 이상 유지되지 않고, 인공적인 잔여물이 지층의 위계를 흐트러뜨린 채 뒤섞여 있음을 보여준다.


  썩지 않고 지층 사이에 남아 있는 물질은 발굴을 더 이상 진실을 향한 온전한 복원의 행위로 기능하지 못하게 한다. 또한 어떤 물질은 기억과의 대응을 거부한 채 그저 그곳에 남아 있음으로써 기억의 개연성을 교란한다. 영화 <파묘>가 발굴을 통해 억압된 과거를 단일한 인과 속에서 해명하고 봉합하는 서사를 제시한다면, 구소현의 소설은 그 종착점에서 끝내 해명되지 않는 잔여들과 더불어 남겨지는 인간의 조건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처럼 수직적 발굴이 불가능해진 자리에서 마주하는 또 다른 ‘뼈’는 김인숙의 『자작나무 숲』에서 다른 방식으로 제시된다. 쓰레기 집의 중심에 놓인 백골 사체는 할머니의 역사와 관련된 심층의 진실을 명확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소설은 단지 할머니가 평생 쌓아 올린 쓰레기 집을 이질적인 사물과 기억이 뒤섞인 채 축적되는 장소로 제시할 뿐이다. 이러한 양상은 서사에도 이어진다. 후반부로 갈수록 진실은 하나로 수습되지 않고, 잔여로 남는 문장들만 이어진다. 할머니의 죽음으로 서사는 사실상 종료되지만, 중심을 상실한 문장과 이야기들은 서로 인접한 채 잔여의 풍경을 이룬다. 이 문장들의 배열은 아래 인용에서 곡교 마을이라는 공간의 차원으로 확장된다.


  담장 위에서 모유리는 잠시 멈췄다. 할머니 집이 다르게 보였다. 밖에서 보는 것과 안에서 보는 것이 달랐고, 위에서 보는 것이 아래에서 보는 것과 달랐다. 어떤 의미에서는…… 아니, 어떻게 말한다 해도…… 그건 장관이었다. 쓰레기가 먹어버린 건 산1번지만이 아니었다. 쓰레기는 뒷산까지 먹어치우는 중이었다. 그 뒷산 너머 도시까지 먹어치울 작정인 것 같았다. 그건 쓰레기의 천하, 쓰레기의 세상이었다. 그 완벽한 무질서라니, 이건 일종의 저항이 아닌가. 모든 존재하는 것에 대한……. 모든 존재하는 것을 깡그리 쓰레기로 만들어버리는……. 

  그 쓰레기를 자신이 물려받아야 한다는 생각만 아니었다면 어쩌면 모유리는 이렇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숭고하구나. (341쪽)


  모유리가 담장 위에서 쓰레기 산을 바라보며 내뱉는 “숭고하구나”라는 말은 단순한 감탄이 아니다. 그것은 서사로 포섭되지 않는 거대한 물질을 마주할 때 발생하는 경탄에 가깝다. 그러나 그녀가 느끼는 ‘장관’에 대한 경외는 곧바로 지독한 현실적 국면으로 전도된다. 쓰레기는 단지 바라보는 관조의 대상을 넘어, 자신이 상속받고 처리해야 할 대상이라는 사실을 손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는 해명되고 청산되지 않으며, 제거되지 않은 채 그녀의 현재적 삶 속으로 끈질기게 침투한다. 백골과 쓰레기는 파헤쳐야 할 비밀을 품은 대상이 아니라, 그 부피와 악취라는 감각 자체로 모유리에게 상속될 유산이다. 


  결국 『자작나무 숲』이 그려내는 것은 기억의 완전무결한 복원이 아니라, 기억으로 환원되지 않는 잔여와의 공존이다. 그렇기에 이 소설은 쓰레기 속에 기억이 내재해 있다는 식의 낭만적 관점을 따르지 않는다. 서사가 그것들을 하나의 인과적 의미로 수습하기를 멈출 때, 남겨진 것들은 더 이상 해명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각자의 물성으로 그 자리에 놓인다. 발굴은 진실을 회수하는 행위가 아닌, 끝내 회수되지 않는 것들과 마주하는 실천이 된다. 


  지층이 무너진 자리에서 서사는 더 이상 숨겨진 원인을 추적하는 방식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대신 수습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폐기물들 곁에 머무르며, 그것들이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기록하는 쪽으로 이동한다. 이때 발굴은 진실을 회수하는 과정이 아니라, 끝내 회수되지 않는 것들과 마주하는 계기가 된다. 따라서 수직적 발굴이 실패한 바로 그 지표면에서 비로소 다른 종류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것은 끝내 파헤쳐졌지만 하나의 의미로 수습되지 않는 파편들, 서로 연결되지 않은 채 다만 인접한 상태로 남아 있는 잔여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다.



박서양 문학평론가의 연재 비평 <부패하는 기억의 공간>


- 1편. 『자작나무 숲』과 쓰레기의 정치학

- 2편. 『자작나무 숲』과 쓰레기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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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비평

〈공정과 인정, 그리고 감정〉―이미상 소설을 중심으로

[현장 비평] 《문장웹진》은 다양한 시선을 통해 폭넓은 담론을 펼칠 수 있는 ‘비평의 장’을 마련하고자 2020년 진행되었던 〈본격! 비평〉 코너를 정비하여, 2021년 4월호부터 〈현장 비평〉을 선보인다.2021년 〈현장 비평〉은 신진 문학평론가 9명이 각자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자유롭게 주제를 정해 매월 1편씩 발표된다. 〈공정과 인정, 그리고 감정〉― 이미상 소설을 중심으로 박서양 1. 능력주의와 감정의 종속 2021년 현재 한국 사회에서 ‘공정’과 ‘능력주의’ 담론은 한정된 자원의 바람직한 분배를 둘러싼 논쟁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를 점하고 있다. 조국 전 법무부장관의 자녀 입시 비리 의혹과 더불어 인천국제공항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둘러싼 논란, 공공의대의 설립 반대 사태 등 공정성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은 여전히 그 합의점을 찾기 어려워 보인다. 입시, 취업, 인사 평가, 임금 및 근로조건의 결정 등 생애 주기에서 일어나는 모든 과정이 공정이라는 잣대로 판단되며, 불평등의 심화로 인해 분배의 몫 자체가 줄어든 상황에서 공정성에 대한 높은 민감도는 때로 절차와 형식의 공정만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흐르거나, 차이를 둘러싼 적대심이나 박탈감 등의 태도로 표출된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청년 세대는 공정의 가치를 드높이며 능력주의를 철저히 체화하면서도 대안적 사회질서를 상상하지 못하는 수동적인 집단으로 재현된다. 잘 알려져 있듯 능력주의(Meritocracy)는 영국의 철학자 마이클 영이 이론화한 것으로, 개인의 능력에 따라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배분하는 보상 시스템을 의미한다. 이는 사회의 분배 질서가 어떠한 개인의 ‘특정’한 자질을 ‘특별’한 능력으로 규정하는 방식을 통해 구조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사회가 특정한 자질에 인정을 부여하는 기준에 따라 어떤 능력은 보다 가치 있는 것으로, 어떤 능력은 상대적으로 무가치한 것으로 취급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능력을 규정하는 잣대는 선험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이 언제나 사회적 필요에 의해 구성되고 선택되는 것임을 뜻한다. 그런데 지금 능력주의를 둘러싼 많은 이야기에서 이와 같은 능력의 발생적 기원은 크게 언급되지 않는 듯하다. 그리고 공정한 경쟁의 질서만을 따지는 맹목적 사고는 사회적으로 이미 존재하는 지위와 서열의 순서가 능력에 따른 가치의 절대 지표라는 믿음을 재생산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사회의 보상 기준 자체가 능력 그 자체를 판단하고 가늠하는 기준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능력은 누가, 어떠한 기준으로 규정되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져보는 일은 지금의 상황에서 유의미하지 않을까. 이미상1)의 소설 속 인물들 이러한 능력의 규정성 자체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이와 같은 맥락 속에 내재된 모종의 불평등한 구조를 가시화시키고 있다. 1) 본고에서 다룰 이미상의 작품은 다음과 같다. 「하긴」(『2019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1

  • 박서양
  • 2021-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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